戀人多望愛難成 퇴고

잡록 2006. 2. 22. 21:30 |

퇴고(推敲)는 시문(詩文)을 지을 때 자구(字句)를 여러 번 생각하여 고치는 것을 말한다. 좀 더 확장해서 적절한 표현을 찾기 위해 문장을 다듬고 어휘를 살피는 작업이다. 이태준은 『문장강화』에서 퇴고의 고사를 “우리 문장인에겐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로맨스를 전한다”고 찬했다. 그 내용인즉슨 당시기사(唐詩紀事)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당나라 시인 가도(賈島)가 절친한 친구였던 이응(李凝)의 집을 방문하고 돌아오던 길에 좋은 시상이 떠올라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 이응의 그윽한 거처에 붙여(題李凝幽居)라는 제목의 오언율시는 다음과 같다.


閑居隣竝少(한거린병소)
草徑入荒園(초경입황원)
鳥宿池邊樹(조숙지변수)
僧敲月下門(승고월하문)

한가로이 거처하니 이웃도 드물고
풀에 묻힌 오솔길은 거친 정원으로 통한다.
새는 연못가의 나무 위에 잠들고
스님은 달 아래 문을 두드린다.


가도는 결구(結句)를 두드리다(敲)로 해야 할지, 밀다(推)로 해야 할지 골똘히 고민하다가 자신을 향해 오는 고관의 행차와 부딪혔다. 가도가 길을 막은 사람은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이며 서울시장격인 경조윤(京兆尹)의 직위에 있던 한유(韓愈)였다. 한유는 가도가 길을 비키지 못한 까닭을 듣고 잠시 생각하다니 두드릴 고(敲)가 좋겠다고 말했다. 그 후로 둘은 막역한 시우(詩友)가 되었다고 한다.


자신이 쓴 글을 읽어주고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얼마나 황송한 기쁨인가. 내 마음을 읽고 봄바람 같은 격려와 가을서리 같은 비판을 해주는 이는 그 얼마나 투명한 설렘인가. 가낭선(賈浪仙)과 한퇴지(韓退之)의 우의를 숭앙하며 연인이 건네 준 권애시를 조심스레 퇴고해봤다.


<퇴고 전>
戀人多望愛難成(연인다망애난성)
靑春不來拜別悔(청춘불래배별회)
珍重交際相悅愛(진중교제상열애)
於焉之間詣而立(어언지간예이립)
연인은 바라는 게 많고 사랑은 이루기 어려우니
젊음은 다시 오지 않고 헤어지면 후회하게 된다.
소중히 여기며 사귀고 서로 아끼고 즐거이 사랑하면
어느새 이립의 때가 오게 될 것이다.


<퇴고 후>
戀人多望愛難成(연인다망애난성)
靑春不停拜別悔(청춘부정배별회)
喜色然後亦破顔(희색연후역파안)
塵世誰知自由心(진세수지자유심)

연인은 바라는 바가 많고 사랑은 이루기 어려우니
젊음은 머무르지 않고 헤어지면 후회하게 된다.
연인이 기뻐한 후에 나 또한 웃으니
티끌세상에 누가 자유로운 마음을 헤아릴까.


1행의 望자는 바라보다의 의미도 있지만 願자는 원하다, 소망하다의 의미로 많이 쓰이니 뜻이 보다 명료하기는 하다. 하지만 다망(多望)이라는 말은 "바라는 바가 많음, 꿈이 많음"이라는 뜻이니 그냥 놔둬도 무방할 듯 싶다. 이럴 때는 독음을 입으로 읊조려서 더 달라붙는 걸 선택하는 수가 있는데 이응(ㅇ) 받침이 한결 부드럽다. 2행에서 올 래(來)자 대신 머무를 정(停)자를 쓴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다.


초고의 3, 4행은 다소 산문적이어서 조금 문학성을 높이기 위해 이것저것 뒤적거려봤다. 3행은 송나라 재상이었던 범중엄(范仲淹)의 악양루기(岳陽樓記)에서 천하 사람들이 근심하기 전에 근심하고, 천하 사람들이 즐거워 한 다음에 즐거워해야 한다(先天下之憂而憂 後天下之樂而樂)는 구절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처음에는 자구만 좀 수정해서 후연인지소이소(後戀人之笑而笑)라고 해서 "연인이 웃고 난 다음에 웃고"라고 했다가 좀 더 변형해 봤다.


4행은 조광조의 영금(詠琴)이란 시 4행을 따왔다. 조광조가 외로움을 노래한 시구를 이런 데 훔쳐 와서 모종의 자부심을 표현하니 좀 민망하다.^^; “때를 만나 천지가 모두 뜻을 함께 하더니/ 운이 다하니 영웅도 어쩔 수 없구나/ 백성을 사랑한 정의일 뿐 내 잘못이 없나니/ 나라를 위한 참된 마음을 그 누가 알아주랴(時來天地皆同力 運去英雄不自謀 愛民正義我無失 爲國丹心誰有知)”는 전봉준의 절명시(絶命詩) 4행을 고쳐서 多情丹心誰有知 혹은 自由丹心誰有知라고 써볼까 했으나 고심 끝에 조광조의 시구를 채택했다. 백아절현(伯牙絶絃) 고사에서 나온 조광조 시 전문은 다음과 같다.


瑤琴一彈千年調(요금일탄천년조)
聾俗紛紛但廳音(농속분분단청음)
怊悵鐘期歿已久(초창종기몰이구)
世間誰知伯牙心(세간수지백아심)

천년의 가락을 거문고에 실어 보지만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다만 듣기만 하네.
슬프도다 종자기 죽은 지 이미 오래되었고
이 세상에 뉘 있어 백아의 마음 알아주리.


플라톤은 사람은 사랑할 때 누구나 시인이 된다고 했지만 아무나 되는 건 아닌가 보다. 한바탕 씨름했더니 배가 고프다.^^ - [小鮮]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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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小鮮 2006.02.25 17:55 Address Modify/Delete Reply

    제 내공의 얕음을 알아채지 못하도록 늘 샘물을 길어다 채우고 있습니다. 샘이 깊은 물이 가뭄에 마르지 않고 내를 이루어 바다에 간다는 말처럼 그렇게 되어봅시다.^^

  2. 정규 2006.03.05 02:33 Address Modify/Delete Reply

    칫.감히 잘써진 시를 건들다니 무례하닷! ㅋㅋㅋㅋㅋ -_-;미안;
    한시를 잘 몰라서 어디를 봐야하고 어디가 좋고 머 이런건 모르겠다만,
    평범하게 살아온 나로서는 참 부러운 모습이구만 ㅋ
    나중에 한시도 좀 갈켜줘 익구. 하긴 머...한문을 잘 모르니 갈켜줘봤자 또 한귀로 줄줄 흘러나가겠지만;

  3. 小鮮 2006.03.07 13:03 Address Modify/Delete Reply

    내가 뭐 한시를 알겠어. 그저 남이 쓴 좋은 구절 훔쳐내서 제 것인 양 하는 것일 뿐이지. 여하간 요즘 들어 틈틈이 읽는 시들이 나를 촉촉하게 해주는 것 같아 참 좋다. 너도 바쁜 와중에 시 한 수 붙들고 가슴 뛸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