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3일 독서토론 모임에서 관용을 주제로 한 토론의 후기다. 모든 집단주의는 대체로 악이다)

관용을 주제로 한 토론 즐거웠습니다. 특히 지역주의에 대한 고민은 하면 할수록 시름만 깊어지는 것 같습니다.^^; 기득권층의 분할통치의 산물인 지역주의를 극복하고, 지방분권과 다원화사회를 지향하는 길은 참으로 요원하기만 합니다. 영호남의 불균형이 아직도 적잖겠지만 앞으로는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불균형, 강북과 강남의 불균형에 대한 많은 문제제기가 있어야겠습니다.


지역주의의 폐해는 그 발생론적 오류(genetic fallacy)에서 기인합니다. 이는 논리 자체의 타당성을 검토하기보다는 논리를 생산한 사람을 보고 타당성 여부를 정하는 오류를 말합니다. "전라도 사람은 빨갱이다"는 언설은 빨갱이 운운한 데서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저지르기도 하지만 전라도 운운하는 발생론적 오류가 더 심각합니다. 고종석 선생님의 지적대로 "한 사람에게서 그 개인을 보는 것이 아니라 집단의 표상을 읽어내는 집단주의"인 셈입니다.


지역주의의 폐해를 보다 근본적으로 극복하는 길은 역시 개인주의의 심화입니다. 공동체의 번영이란 미명 하에 소수자 집단을 희생시키는 것에 반대하는 개인주의, 개인의 정치적 의사결정을 지역과 혈연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자유로운 사고판단으로 표출할 수 있는 개인주의의 확산만이 이 야만적인 지역주의를 합리적인 수준으로 조절할 수 있습니다. 단언컨대 한국 사회에 미만한 집단주의 사슬을 끊어내야만 합니다. 모든 집단주의는 대체로 악이니까요. 아래 고종석 선생님의 말씀대로 방어적 지역주의가 공격적 지역주의로 바뀌는 데는 그리 많은 수고로움이 들 것 같지 않습니다.


그 개인주의를 신봉하는 한국인으로서 또 나는 지역패권주의에 맞선 지역등권론이라는 것에도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그것이 한 노정객의 정치적 야심을 위해 방편적·전술적 차원에서 제기된 보기 흉한 선동이라는 판단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지역패권주의에 대한 올바른 처방 역시, 공격적 민족주의에 대한 처방처럼, 개인주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커다란 집단주의의 악을 작은 집단주의로 막을 수는 없다. 집단주의의 악을 막을 수 있는 것은 개인주의다. 게다가, 작은 집단주의가 커다란 집단주의에 견주어 반드시 윤리적으로 옳은 것도 아니다. 예컨대 통일 베트남의 민족주의가 인도차이나의 이웃 나라들에 대해 행사했던 패권주의는 중국의 대국주의가 베트남과 그 이웃나라들에 대해서 행사하려고 했던 패권주의에 견주어 반드시 덜 흉했던 것도 아니다.
- 고종석. 1997. 『책읽기 책일기』. 문학동네. 297~298쪽. 「개인주의여 영원하라」中


저는 요즘 강준만 선생님이 그토록 통박하셨던 양비론에 빠져봅니다. 민주당에 대한 호남인들의 적잖은 지지에 놀랐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현상이 2004년 총선 당시에 민주당이 궤멸적인 몰락을 겪은 것에 대한 연민의식이라고 평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호남인들의 동정표에 기대 의기양양한 민주당을 보면서 과연 저들이 자민련과 얼마나 차이가 나는 가 당혹스럽습니다. 호남인들의 상대적 진보성도 사실상 지역구도 아래 치러진 선거에서 본의 아니게 씌어진 허울이 아니었을까 하는 발칙한 상상도 해봅니다. 호남인들이 저항적 지역주의에 대한 열망을 포기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겠지요.


팔이 안으로 굽는 편견을 빌미로 억압과 통제,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다면 편견을 마냥 죄악시할 수 없다고 봅니다. 그것이 인간의 비루한 속성이라고 해도요. 만약 다수자의 편견이 나쁘다면 소수자의 편견도 딱히 나을 건 없겠지요. 유시민 장관님이 일전에 말씀하신대로 "남의 허물이 나의 알리바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한나라당을 찍는 영남인들의 심성과 민주당을 지지하는 일부 호남인의 심성, 국민중심당에 혹하는 일부 충청인의 심성 사이에 있을 섬세한 차이를 헤아리는 건 부질없는 노력이라고 생각합니다.


논의하다 연계해서 나온 대연정 문제를 살펴보면, 지역주의 타파를 위해 정치일생을 걸었다고 즐겨 말하는 노무현 대통령님이 제안한 한나라당과의 대연정은 대체로 실책이라고 봅니다. 일부 토론자께서 대연정이 앵똘레랑스를 똘레랑스로 대응하는 새로운 모델이라고 전향적으로 평가하신 견해가 무척 인상 깊었습니다. 하지만 앵똘레랑스에 앵똘레랑스하지 못했던 것은 반성하지 않고 뜬금없이 앵똘레랑스에 똘레랑스하자고 하니 좀처럼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더군다나 그런 판국에 한나라당이 거절을 한다면 똘레랑스를 앵똘레랑스한 셈이 되니 얼마나 상대방을 궁지에 몰아넣는 행위입니까. 노 대통령님의 지역구도 해체라는 목표의 진정성은 아름답지만 대연정 제안은 과정의 진정성이 부족했습니다. 노 대통령님이 갈등의 정치구조를 타파하고자 했다면 우선 열린우리당의 앵똘레랑스 전략을 독려했어야 합니다. 굳이 똘레랑스를 하려고 했다면 앵똘레랑스의 구심점보다는 앵똘레랑스를 지지하고 소비하는 국민들을 보듬었어야 합니다. 열린우리당은 한나라당이 내세우는 가치들에 좀 덜 너그러워야 했습니다.


무엇보다 대통령님 자신의 문제의식만을 절대시하는 과오가 너무 컸다고 봅니다. 지역주의라는 집단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또 다른 집단주의적 방법을 끌어다 오는 것이 탐탁지 않았습니다. 지역구도를 해소해서 정치문화가 바뀌면 사회 모든 부문이 잘 돌아갈 것이라는 식의 정치환원주의에는 여전히 동감하지 않습니다. 앙시앙레짐은 분명 극복해야할 과제이지만 앙시앙레짐은 지역구도만 있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굳이 앙시앙레짐을 해체할 열쇠를 들자면 지역주의 타파보다는 개인주의, 자유주의의 확산이라고 봅니다.


현행 선거구제 하에서는 앞으로도 많은 이들이 동토에서 산화해야할 것 같습니다. 노 대통령님 말씀대로 농부가 밭을 탓하지 않는다는 각오로 앞으로도 지극 정성을 쏟아 부어야겠지요. 누군가의 희생으로 움트는 진보를 달가워하지 않는 저이기에 더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선거구제 개편 같은 제도를 개선보다 의식을 바꾸는 것이 더 긴요하다고 봅니다. 이제 정치적인 지역차별은 거의 사라졌지만 문화적인 지역차별이 남아 있는 만큼 제도개혁보다는 의식개혁이 더 필요합니다. 선거구제 개편은 의식개혁을 촉진하기 위한 유력한 방안일 뿐이고, 이 밖에 정치경제적인 지역차별을 해소하기 위한 다양한 지방분권 전략도 많이 요구되겠지요.


언제쯤 상대방이 전라도 사람이라는 것에 개의치 않고, 경상도에서 한나라당 안 찍어도 그만 이라는 인식이 퍼질 수 있을 까요. 저는 궁극적 소수로서의 개개인에 주안점을 두기 위해 “선의의 무심함”을 주장합니다(여기서의 선의는 윤리적 평가와는 관련이 없는 법률적 의미를 말합니다). 이는 사회적 약자의 고통과 소수파에 대한 탄압을 알면서도 모르쇠 하는 악의의 무심함과는 다른 개념입니다. 상대방을 잘 모르고, 굳이 알려고도 하지 않는 무심함, 설혹 어떤 요소들을 알게 되더라도 그것을 편견의 잣대로 삼지 않는 무심함을 말하고 싶습니다. 무심한 태도는 "이해는 못해도 인정한다", "공감하지 않지만 존중한다"는 식의 태도보다 훨씬 실천하기 쉬울 겁니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집단주의 정서는 무심보다는 관심을 강조합니다. 물론 관심이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닙니다. 맹자가 말씀하신 “선을 권장함은 벗의 도리(責善 朋友之道也)”와 같은 관심은 유익한 점이 많습니다. 다만 “타인의 행복을 보살펴 줄 권리는 그들의 가까운 친구에게 한정된 하나의 특권”이라는 칼 포퍼의 제언처럼 벗의 도리는 매우 절제되어 한정되어야 합니다. 집단주의가 관심을 만나면 대개는 과도한 간섭, 부당한 개입으로 나아가기에 각별히 경계해야 합니다. 악의의 무심함을 극복하기 위한 기제로서 제한된 관심이 적용될 수 있을 겁니다.


저도 아직 궁리하는 과정에 있어서 생각이 거칠고 해법이 정돈되지 않습니다. 토론 주제였던 관용으로 돌아가자면 전체주의에 맞서기 위한 똘레랑스는 여전히, 앞으로도 유효합니다. 똘레랑스는 일종의 보험입니다. 모든 면에서 다수파일 수는 없습니다. 부러 좇아서 다수파에 줄서지 않는다면 누구나 아웃사이더, 소수파, 비주류가 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진리를 독점하라는 유혹을 버리고, 나와 다른 것을 증오하지 않는 보험료의 부담보다는 보험금의 혜택이 더 큰 남는 장사라고 확신합니다. 똘레랑스라는 늘씬한 보험상품을 파는 외판원이 좀 되어봐야겠습니다. 하나 구매해주셔도 좋고, 같이 팔러 다녀도 좋을 것 같아요. 푸하하 - [小鮮]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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