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여행기 2부

문화 2003. 8. 12. 14:34 |
아침에 일어나니 이슬비가 살포시 내린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덕분에 시원한 단잠을 잘 수 있었다. 그러나 전날의 놀란 몸뚱이를 진정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던지 아직도 여기저기가 욱신거렸다. 어제 세일이와 모의한 관광모드로의 전환을 놓고 고민하고 있는 터에 푸짐한 아침상이 차려졌다. 갑자기 불쑥 찾아와 민폐만 끼쳐드리는 것이 아닌지 영 죄송스러웠지만 이 글을 빌어 다시금 감사 드린다는 말씀을 올리는 수밖에. 다시 짐을 꾸리고 협재 해수욕장으로 향했다. 나는 페달과의 투쟁을 지속할 것인가에 대해 어찌할 바를 몰라 안절부절 못했다. 눈빛으로 고민을 마주하던 세일이와 나는 “일단 좀 가보자”는 것으로 의견일치를 보았다. 결국 자전거 안장에 몸을 싣고 중얼거렸다. “이렇게 된 이상 완주 대신 반주라도 하는 수밖에. 중문관광단지에서 다음을 도모해야겠군.”



어제의 고난이 밑거름이 되어 이제는 다행히 자전거 출발과 방향전환이 수월해졌다. 내심 흥도 나면서 페달을 돌렸다. 얼마나 달렸을까.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부득이 근처 학교에 몸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서 약간의 뒤에 실은 짐들에 방수처리를 하며 비가 좀 그치기를 기다렸다. 제주도에 있는 학교들은 참 색깔이 화려하다는 느낌을 많아 받았다. 서울 도심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색동옷을 입은 학교건물들이 많이 보였다. 게다가 높지 않은 아담한 규모가 잇따른 증설로 운동장도 잡아먹고 숨을 막히게 하는 서울의 학교들과는 달리 여유와 푸근함이 느껴졌다.



소나기가 그치고 다시 여정을 재촉했다. 그러나 내가 또 사고를 치고 말았다. 뒤에 싣고 가던 돗자리의 끈이 자전거 바퀴에 칭칭 감겨 버린 것이다. 처음에는 조금 바퀴가 뻑뻑하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그 때 멈췄으면 참사를 막을 수 있었을 텐데 그저 부지런히 페달을 밟다가 줄이 엉킬 대로 엉켜버린 것이다. 결국 병승이의 휴대용 칼로 줄을 끊어내고 다시 출발을 했지만 안 그래도 지체된 길을 더 느리게 만들어 미안한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에도 짐을 묶는 끈이 바퀴에 감기는 사고를 치고 만다^^;)



어느덧 햇빛이 비치고 젖은 옷들이 마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던 중에 초콜릿박물관 안내표지를 발견하게 되었다. 급한 길이지만 그렇다고 볼거리들을 마냥 스치고 지나갈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박물관을 가자고 강력히 주장했다. 표지의 5km라는 거리의 위압감에 친구들이 망설였지만 나의 간곡한 호소로 가보기로 결정했다. 천만다행으로 들어가는 거리가 5km 보다 짧아서 어찌나 안도했는지 모른다. 돌로 아담하게 지어진 건물이 동심을 일으키려고 무던 애를 썼다. 초콜릿 몇 개 맛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들어섰으나 헛된 기대였다는 것이 밝혀져서 허탈했다.^^;



뭔가 잔뜩 초콜릿 역사 등에 대한 설명이 있었지만 전혀 눈에 가지 않았고 초콜릿 껍데기와 견본 전시도 그림의 떡이니 전혀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공짜 초콜릿에 대한 환상이 사라진 뒤에 우리는 한층 풀이 죽었다. 1년 내내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낸다는 카페에서 사진을 좀 찍으며 안장에 시달린 엉덩이를 달래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초코홀릭인 나로서는 여간 실망이 아닐 수 없었다. 싼 게 비지떡이라고 했던가. 공짜라니 이러려니 하는 수밖에. 한편으로는 그래도 이건 양반이구나 싶었다. 비싼 값 요구하면서도 알맹이 없는 상도덕이 떨어진 것들도 많은 판에 이 정도쯤이야.



또 한참을 달리다가 고행길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송악산이 펼쳐진 것이다. 동산이기는 하지만 평지보다야 힘이 더 드는 것이 당연지사. 조금 샛길로 빠져서 비포장도로를 덜컹거리며 달리다가 말이 방목되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흔히들 회자되는 ‘말자지’의 실체를 확인하고 친구들은 경악했으나 나는 그저 몸집이 크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말았다. 문득 한 시구가 떠올랐다.


세상의 사나이들은 기둥 하나를
세우기 위해 산다.
좀더 튼튼하고
좀더 당당하게
시대와 밤을 찌를 수 있는 기둥
그래서 그들은 개고기를 뜯어먹고
해구신을 고아먹고
산삼을 찾아
날마다 허둥거리며
붉은 눈을 번득인다.
- 문정희, [사랑하는 사마천 당신에게] 中



그러면서 사마천을 “기둥에서 해방되어 비로소 사내가 된 사내”라고 노래하고 있다. 평생 남의 눈치를 살피며 기둥 크기나 재다가 갈 것인지, 아니면 기둥일랑 내던지고 순수한 열정을 연료 삼아 타오를 수 있는 멋진 사내가 될 것인 지의 물음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드라이브 코스로 유명한 사계리 해변도로를 달리며 신기한 모양의 섬 두 개를 보며 재미나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아본 결과 이 섬이 형제섬이었다. 크고 작은 섬 두 개가 형과 아우처럼 마주보고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썰물 때면 모습을 드러내는 갯바위들이 있어 보는 방향에 따라 섬의 개수와 모양이 달라진다는데 내가 본 것은 딱 두 개 뿐이었다. 시원스레 달리다가 용머리 해안에 당도했다. 해안 언덕 모양이 용이 머리를 들고 바다로 들어가는 모습과 닮아 이름 붙여졌는데 바닷바람이 바위를 이리저리 파놓은 모습이 장관이며, 제주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변으로 꼽힌다. 들어가 했으나 높은 파도로 입장이 불가능해서 부득이 근방에 나와서 사진 하나 찍는 걸로 만족해야했다.



이제 또 다른 난코스인 산방산을 오르게 시작했다. 오르막길의 연속이라 자전거를 끌고 하염없이 올라가야 했다. 산방산은 큰 바윗덩어리가 하나 덩그러니 있는 형상이라 마치 어떤 큰 산의 봉우리를 쏙 뽑아도 놓은 듯하다. 아니나 다를까. 본래 한라산 정상이던 것이 뽑혀 산방산이 되고 그 뽑힌 자리가 백록담이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고 한다. 산방산 아랫자락에서 계단으로 30분 정도 올라가면 산방굴사가 나온다고 하지만, 이미 페달을 돌릴 여력을 소진해서는 안된다는 판단 하에 올라가지 않기로 합의했다. 해안을 바라보며 마시는 물 여러 모금이 마음을 씻어주었다. 본래 물을 즐겨 마시던 나는 이번 여행 내내 철저한 ‘워터홀릭’이 되어 버렸다. 무언가의 부재는 고통스럽지만, 그 부재중에서 가장 원초적인 갈증은 정말 견디기 힘든 일이다. 물을 자꾸 마시면 자전거 운전에 지장이 있다는 친구들의 지적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물을 아낌없이 들이켰다. 가늘게 나오는 신음소리를 벗삼아 오르다보니 어느덧 내리막길이 보였고 나는 산방산 탈출(?)에 쾌재를 불렀다.



이제 목표 지점인 중문을 향해 달렸다. 약간 길을 헤매는 바람에 날이 어두워졌지만 서둘러 천제연(天帝淵) 폭포로 향했다. 천제연 폭포는 ‘하느님의 못’이라는 뜻으로 한밤중이면 옥황상제의 일곱 선녀들이 내려와 목욕을 한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다. 폭포야 비가 온 후 가서 보는 것이 물줄기도 크고 제 맛이라고 하지만, 물안개가 자욱해서 경관을 즐길 수 없었다. 3개로 나누어진 폭포를 모두 둘러보는 데 자전거에 시달린 다리를 이끌고 가려니 정말 한 걸음 한 걸음이 무거웠다. 울창한 수풀이 폭포만큼이나 호젓하게 다가왔다. 천제연 계곡에는 선녀 상을 조각한 선임교라는 웅장한 아치형 다리가 있는데 그 아래로 내려다보는 안개 속에 쌓인 폭포수는 몽환적 분위기를 연출했다. 선임교를 건너면 보이는 천제루라는 누각이 딱 내 취향이었으나 몇 개 되지 않는 계단을 보고 오를 마음이 싹 사라졌다. 물안개에 몸도 마음도 젖어 눅눅한 기분에 휩싸였다. 무거웠다.



서둘러 민박집을 잡고 무거운 몸을 풀었다. 낙지전골, 된장찌개, 김치찌개를 시켜 푸짐한 저녁을 먹고 나니 무거운 기운이 가시는 듯했다. 맛난 저녁을 먹은 후에 근처 할인매장에서 각자 선호하는 간식을 하나씩 골랐다. 내가 고른 초코파이를 비롯해 수박 반쪽, 강정 등을 펼쳐놓고 후식도 거나하게 즐겼다. 이 날부터 저녁 먹고 난 후에 각자 선호하는 간식 고르기는 여행 끝까지 계속되었다. 방정맞은 군것질도 여행길에서는 낭만으로 둔갑해버린다.^^



셋째 날 아침이 밝았다. 아침부터 햇살이 무척 따가웠다. 우리는 제주도 최고의 관광명소인 중문 관광단지로 향했다. 깨끗이 단정된 거리와 쭉쭉 뻗은 야자수가 마음을 설레게 했다. 신라, 롯데, 하얏트 등의 특급 호텔들을 그저 바라만 보는 것만으로도 어찌나 황홀하던지. 중문해수욕장에 인접한 호텔 산책로를 즐기는데 무더운 날씨라 연신 헐떡거리기만 했다. 물살은 꽤 거칠게 일고 있어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물론 그 정도 가지고 이 찌는 더위를 식히기는 역부족이었지만 말이다.^^;



찌는 듯한 더위에 아침 겸 점심을 해결할 곳을 찾기로 하고 제주국제컨벤션센터로 향했다. 에어컨 바람에 더위를 식히니 좀 나아진 것 같다. 심상치 않아 보이는 레스토랑을 찾아 들어가 봤으나 그 화려한 가격에 경악하며 나올 수밖에 없었다. 종영한 드라마 ‘올인’의 무대가 되었던 곳인 것 같은데 ‘올인 샌드위치’라는 메뉴의 가격을 보고 다들 입을 모았다. “올인 샌드위치 먹다가 올인 나겠네.” 한바탕 웃고 말았지만 형편이 된다면 이런 곳에서 샌드위치 뜯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널찍한 공간에 은은한 음악에, 색다른 맛을 즐기는 것이 뭐 어때서. 학교 앞 식당에서의 밥 몇 끼 식사라고 계산 두드리는 것은 옹졸한 처사다. 개인적으로 여행하면서 뭔가 해먹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엠티 같은 것을 가서 고기 구워먹고 라면 끓이는 것 정도야 재미로 넘기지만) 몇 끼 해먹는다고 절약하면 얼마나 절약한다고.



‘무전여행’이라든가 돈 몇 만원 딸랑 들고 가는 여행도 그리 달갑지 않다. 이런 여행길은 결국 이런저런 신세를 질 수밖에 없는데, 본인이야 멋진 경험을 한다며 뿌듯해할지도 모르지만, 남의 희생으로 이루어지는 뿌듯함은 나로서는 영 삐딱하게 보인다. 첫째 날 병승이 선배 집에서 하룻밤 묵어가는 것도 어찌나 죄송스러웠는데 뱃삯만 덩그러니 들고 떠났다느니 하는 무용담(?)은 불편하기만 하다. 여행을 갈 때는 돈을 쓰러간다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나의 신조다. 안 그래도 소비 위축으로 난리라는데, 내 지갑 안 열면서 남의 지갑 열리기 바라는 것도 상도덕에 어긋나는 일 아니겠는가.^^; 짠돌이 인생이라도 흔치 않는 여행길에는 너무 아끼지 말자. 여행에서의 궁상은 더욱 초라할 뿐이다. 멋을 즐기는 인생은 결국 얼마만큼은 낭비하며 가는 길이다. 아까운 기분으로 먹고 마시고, 약간의 헤픈 씀씀이에 취하는 것이다. 비단 여행길뿐만 아니라 시시콜콜한 일상 속에서도 가끔의 사치는 생활의 활력이 되어 준다.



결국 이 곳에서 끼니 때우기를 포기하고 근처에 있는 지삿개를 보러 떠났지만, 나와 병채는 건물 안에서 에어컨 바람에 푸욱 빠져 있었다. 지삿개를 다녀온 친구들이 좋았다며 흥분해서 이야기할 때도 별로 흔들리지 않았다. 에어컨 바람의 효용이 그 어느 것보다 컸기 때문일 것이다. 지삿개는 고등학교 지리시간에 나오는 주상절리를 말한다. 이것은 용암이 식으면서 기둥모양으로 굳은 것으로 용암이 바닷물을 만나 냉각되면서 압축력을 받아 수축작용에 의해 생겨난 틈이 절리이고, 그 형성상태가 기둥 모습이어서 주상이라 부른다. 찍어온 사진 몇 장으로 그 기운이 제법 느껴질 정도로 제주도에서 손꼽히는 장관이다. 파도가 절벽을 때리면서 절벽과 물거품의 흑백대비가 그리 어렵지 않게 머릿속에서 그려졌다.



근처 매점에서 팥빙수와 컵라면으로 요기를 하게 된 우리는 이번 여행의 최고 한 마디를 뜻하지 않게 접하게 된다. 그 내용인즉슨, 날이 더운 터라 팥빙수만 먹기로 했으나 못내 아쉬워던 병채의 권유로 컵라면도 먹기로 한다. 컵라면을 주문하러 들어간 병채왈, “라면도 좀 먹어야겠는데요...” 우리는 동시에 자지러졌다. 분명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통상 ‘라면 3개 주세요’ 라는 정도의 표현에 익숙한 우리들에게 그 미묘한 어감이 주는 해학은 대단했다.



제주도에서 가장 놀거리 많다는 중문 관광단지를 너무 가볍게 지나쳤음을 일주 막바지에 들어서 깨달았지만, 당시는 얼른 전진하자는 일념밖에 없었다. 날은 덥고, 오르막은 달릴만하면 나오는터라 모두들 땀을 뻘뻘 흘려가며 힘겹게 나아갔다. 자꾸 뒤쳐진 나는 늦게 도착한 죄로 친구들보다 쉬는 시간도 적은 터라 자꾸만 중간중간 멈취 서기 일쑤였다. 홀로 천천히 달리면서 몸은 참 정직하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조금 더우면 땀이 나고 발이 아프면 통증이 찾아드는 것은 어김이 없었다. 사람의 마음은 애써 본심을 숨기고, 자기합리화로 방어를 하기 급급하며 위선으로 치장할 수 있는 것에 비하면 몸은 그 자체로 너무나 솔직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비루한지도 모르겠다. 동서양의 숱한 철학자들이 몸에 대해 질시를 보낸 것도 몸의 감추지 못하는 속성 때문은 아니었을까.



한참의 오르막을 지나고서 만나게 된 외돌개 가는 내리막길은 무척 구불거리고 가팔랐다. 이곳은 사고가 잦은 지역이라 초심자로서는 브레이크를 요령 껏 잡아가며 속도 조절을 해야했다. 어린 시절 자전거 뒷 안장에 타서 가파른 언덕을 내려오다가 사고를 당한 기억이 있는 터라 더욱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유난을 떨었던 덕분인지 별탈 없이 난코스를 통과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일행 중에 나 혼자만 여행자 보험을 가입했다. 도저히 보험의 힘을 빌리지 않고는 자전거에 오를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치고 포기하고 싶었을 때 나를 이끈 건 팔할이 여행자보험 3000원이었다.^^; 외돌개는 말 그대로 외롭게 자리한 20미터 높이의 기둥바위이지만, 내려가는 계단을 보고 생략하기로 결정했다. 외돌개 꼭대기에 있다는 외돌개보다 더 외로운 해송 한 그루를 보지 못한 것은 조금 아쉽지만 발길을 돌렸다. 시원한 곳이 필요하다.



--- 자전거를 벗삼아 떠난 제주도 여행기 3부를 기대하시라...^^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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