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하카드] - 황인숙

알지 못할 내가
내 마음이 아니라 행동거지를
수전증 환자처럼 제어 할 수 없이
그대 앞에서 구겨뜨리네
그것은, 나의 한 시절이 커튼을 내린 증표

시절은 한꺼번에 가버리지 않네
한 사람, 한 사람, 한 사물, 한 사물
어떤 부분은 조금 일찍
어떤 부분은 조금 늦게

우리 삶의 수많은 커튼
사람들마다의 커튼
내 얼굴의 커튼들

오, 언제고 만나지는 사물과 사람과
오, 언제고 아름다울 수 있다면

나는 중얼거리네 나 자신에게
그리고 신부님이나 택시 운전수에게 하듯
그대에게

축, 1월!



“시절은 한꺼번에 가버리지 않네”라는 구절이 한참동안 입안에서 맴돈다. 짧은 연애를 나눴던 벗에게 시절인연(時節因緣)이 다했다며 제법 단호하게 말했던 것이 민망하다. 시절인연이라는 녀석도 갑자기 확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세상사를 두부 자르듯이 재단하는 것은 질색이지만 괜한 미련을 남겨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 내 마음 한 조각과 함께 썰어냈다. 내가 아등바등해도 시절인연은 의도치 않은 다른 모양으로 싹트리라. “오, 언제고 만나지는 사물과 사람과/ 오, 언제고 아름다울 수 있다면”말이다.


육조 혜능(慧能)은 “본래 한 물건도 없는데 어느 곳에 티끌이 일겠는가(本來無一物 何處惹塵埃)”라고 노래함으로써 홍인대사의 수제자 신수(神秀)를 꺾고 선종의 법맥을 잇는 후계자가 된다. 그는 선불교를 중창하고 완성함으로써 동양 사상사에 한 획을 그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신수의 게송을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틈틈이 부지런히 닦고 털어서 먼지가 끼지 않도록 하라(時時勤拂拭 勿使惹塵埃)”는 성찰도 소중하다. 신수가 점진적인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점오(漸悟)를 말했다면 혜능은 단번에 벼락처럼 깨닫는 돈오(頓悟)를 제창했다. 선종은 혜능의 남종선과 신수의 북종선으로 나뉘어 경쟁하지만 역사는 남종선의 손을 들어준다.


선종에서 말하는 돈오의 교의는 본각(本覺) 사상이 기반이라고 한다. 본래 깨달은 존재라는 본각 사상에 따르면 구태여 새삼스레 깨우칠 것이 없는 셈이다. 따라서 수행할 때 깨달음을 기대하는 태도를 대오(待悟)라 칭하며 경계한다. 깨달음을 얻고자 헤아리고 따지는 것은 사량분별(思量分別)이라 하여 덧없게 여긴다. 본각으로서의 깨달음은 시간의 틀이나 인과율이나 세상 돌아가는 이치에 얽매이지 않는다. 단박에 깨치는 것은 세월의 무게와는 관계없다는 선가의 가르침에 정신이 번쩍 든다. 내가 그토록 애지중지 하는 세월의 무게가 실상 대오(待悟)에 불과할 수도 있단 말인가. 흐르는 시간에 기대어 깨달음을 날름 주워먹으려는 속셈은 아니었던가.


초기 불교에서는 불보살 이외의 자가 성불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뒤에 이르러 일반 중생도 후천적인 수행을 통해 불성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이 퍼졌다. 점수(漸修)를 통하여 점오(漸悟)할 수도 있게 된 셈이다. 그러던 것이 종국에는 일체중생은 불성을 지니고 있으며 미망에 가려져 있을 뿐 그것을 떨쳐버리면 성불한다고 말하게 된다. 가령 열반경(涅槃經)은 “모든 중생은 모두 불성을 지니고 있으나 무명에 뒤덮여 있어 해탈하지 못하고 있을 뿐(一切衆生 悉有佛性 無明覆故 不得解脫)”이라고 말하고 있다. 본각을 가지고 있다는데, 이미 깨우친 상태라는데 그 놈의 무명은 참 짙고도 무거운 모양이다.


여하간 또 우리 내면에 부처가 이미 있는데 뭔 놈의 욕망과 번뇌가 이렇게 많은지 의뭉스럽다. 유마경(維摩經)에서 어느 사리불이 “부처님이 보살로 수행할 때나, 현재 불도를 이루어 부처님으로서 교화할 때에, 그 마음은 분명히 청정할 터인데, 세상이 이처럼 깨끗하지 못한 것은 어인 까닭입니까?”라고 물었다. 부처님은 사리불에게 이렇게 묻는다. “여기 깨끗한 해와 달이 있다고 치자. 그러나 장님은 그것을 보지 못한다. 이 경우에 깨끗한 해와 달을 보지 못하는 것은 해와 달의 허물이냐?” 장님이 청정한 해를 보지 못한다는 비유로 본래 부처인 중생들이 미망에 가려서 본각의 세계를 보지 못한다는 설명은 일견 타당하다. 그러나 전지전능한 신의 존재를 각인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타종교의 파닥거림과 마찬가지로 안쓰럽다. 내가 백지설(白紙說)과 성무선악설(性無善惡說)의 오랜 지지자여서 그런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돈점(頓漸)논쟁은 불가의 오랜 논쟁거리 중에 하나인지라 그 속살을 들여다보기가 여간 녹록지 않다. 큰 틀에서 우리나라 불교는 혜능의 돈오 사상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런데 성철스님은 보조국사 지눌의 돈오점수(頓悟漸修)를 비판했다. 성철스님이 돈오를 한 후에도 계속 닦아나가야 한다는 돈오점수를 왜 그리 통박하셨는지 잘 모르겠다. 성철스님이 주창하셨던 돈오돈수(頓悟頓修)의 실체 또한 명료하지는 않다. 불성을 깨닫는 순간 게임오버라는 개념인지, 한번 깨우치면 잡생각에서 자유로이 수행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는 것인지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 고승대덕의 가파른 정신세계를 돈오하기란 쉽지 않다.^^;


다시 혜능의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로 돌아가자. 본래 내 것이란 없다는 가르침이 추상같다. 인연이 닿아 왔다가 인연이 다하면 물러나는 것이다. 나의 실체가 없는데 내 소유는 따져 무엇하겠는가 하는 마음, 잠시 내가 맡아 있을 뿐이라는 겸허한 자세가 애틋하다. 부러 집착할 그 무엇도 없는 공(空)의 상태란 스스로를 비우는 것을 뜻할 듯싶다. 참으로 텅 빈 곳에 오묘한 진리가 있다는 진공묘유(眞空妙有)까지는 아니더라도 자신을 잊을 때 자유로워진다는 생각을 해본다. 간디는 “내 것이란 내가 잠시 맡아둔 것일 뿐”이라며 보관인 정신(trusteeship)을 설파했다. 내가 추구하는 개인주의가 무소유를 체화할 자신은 없지만, 탐욕에 찌들지 않을 양식은 있다.


짧은 연애를 통해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힘든 일 중에 하나임을 알았다. 한 번도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았거나, 한 번도 누군가의 사랑을 받지 못한다면 부끄러운 일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시절인연이 닿아 사랑을 할 때는 동질적 경험의 반복이나 번개처럼 들이닥치는 찰나의 깨달음에 너무 기대지 말도록 하자. 범부인 나의 깜냥을 감안해서 대오(待悟)라도 해보자. 세월의 무게에 기대든, 소심하고 꼼꼼하게 따져보는 것에 기대든, 나와 다른 가치관을 존중하고 내 것을 고집하지 않는 열림에 기대든 간에 깨달음을 얻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해봐야겠다. 사량분별(思量分別)이라고 구박받을지언정 나는 사랑에서만큼은 점오점수(漸悟漸修)를 행하고 싶다. 조금씩 조신하고 조심스레 깨닫고 싶다.


결국 혜능과 신수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고 말았다. - [小鮮]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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