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 한 구절을 읽고 상념에 빠졌다.

만장이 “한 고을에서 다들 훌륭한 사람이라고 일컫는다면, 그 사람이 어디를 가더라도 훌륭한 사람이 되지 않음이 없을 것인데, 공자께서 덕을 해친다고 하신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라고 물었다.
맹자가 말씀하시길 “그들을 비난하려 해도 딱 들어서 비난할 길이 없고, 그를 풍자하려 해도 풍자할 구실이 없으며, 세속에 아첨하고 더러운 세상에 합류한다. 거처하는데 충실하고 신의가 있는 척하고, 나아가 행동하는데 청렴결백한 척한다. 여러 사람들이 다들 그를 좋아하고, 스스로도 옳다고 여기지만 그와 더불어 요순의 도에 들어갈 수 없다. 그러므로 덕을 해친다고 한 것이다. 공자께서는 ‘비슷하면서 아닌 것(似而非)을 미워한다. 강아지풀은 미워하는 것은 그것이 벼 싹을 어지럽힐까 두려워서이고, 아첨하는 자를 미워하는 것은 의로움을 어지럽힐까 두려워서이고, 정(鄭)나라 음악을 미워하는 것은 아악(雅樂)을 어지럽힐까 두려워서이고, 자주색을 미워하는 것은 붉은색을 어지럽힐까 두려워서이고, 향원을 미워하는 것은 그들이 덕을 어지럽힐까 두려워서이다.’고 말씀하셨다. 군자는 상도(常道)로 돌아갈 뿐이다. 상도가 바로 되면, 백성들은 감흥하고, 백성들이 각성하면 사특함이 없을 것이다.”


萬章曰 : "一鄕皆稱原人焉 無所往而不爲原人 孔子以爲德之賊 何哉?"
曰 : "非之無擧也 刺之無刺也 同乎流俗合乎 世居之似忠信 行之似廉潔 衆皆悅之 自以爲是而不可與入堯舜之道 故曰德之賊也. 孔子曰, '惡似而非者 惡莠 恐其亂苗也. 惡佞 恐其亂義也 惡利口 恐其亂信也. 惡鄭聲 恐其亂樂也. 惡紫 恐其亂朱也 惡鄕原 恐其亂德也.' 君子反經而已矣. 經正則庶民興. 庶民興 斯無邪慝矣."


맹자 진심하편(盡心下篇)에 있는 내용이다. 공자는 자신의 집 앞을 지나면서 집안에 들어오지 않고 가더라도 유감스럽게 여기지 않을 사람은 오직 향원(鄕愿)일 뿐이라고 말한다. 향원은 덕을 해치는 도둑(鄕愿德之賊)이라는 공자의 말을 두고 만장은 도대체 향원이 어떤 사람이기에 공자가 그토록 미워했는지 질문한데 대한 답이다. 향원은 한 고장에서 행세깨나 하는 사이비 군자이자 위선자를 말한다. 언뜻 보면 후덕하고 신실한 사람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구합(苟合, 구차스레 남의 비위를 맞춤)하는 기회주의자라는 뜻이다. 모든 사람에게 호감을 사려는 이는 제 자신의 줏대가 없게 마련이라는 지적이다.


논어 양화편(陽貨篇)에도 나오는 표현이지만 “섞인 자주색이 순수한 붉은색을 빼앗는 것을 미워한다(惡紫之奪朱也)”는 표현이 가슴에 박힌다. 자주색은 붉은색처럼 보이지만 붉은색은 아니다. 하기야 자주색은커녕 때 되면 표변하는 카멜레온 같은 인물들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내 자신이 벼린 원칙을 사람 좋다는 소리 듣고 싶은 욕심에 내팽개치지는 않았는지 돌아본다. 내 원칙을 세우기 위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거스르거나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을 거스르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혹여 용기를 내본다고 해도 내 자신에 쏟아질 그 실망의 눈초리를 감내할 수 있을까. 오히려 나 혼자 착하고 싶지 않다느니, 내 성정이 모질지 못하느니 하면서 끝끝내 호인(好人)행세를 하려 들것 같다.


옛 선비들의 고루한 습속까지 죄다 본받지는 않아도 그 견결한 정신의 상당수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상징조작에 불과하다는 핀잔을 받을만한 여지도 적잖지만 그래도 여전히 헌걸차다. 자신의 뜻을 목숨처럼 여기는 기백이야말로 선비정신의 정수가 아닐까 싶다. 몸을 위태롭게 할 수는 있어도 뜻을 빼앗지는 못하는 게 진짜 선비다. 끝내 자기 뜻을 지키면서 백성들의 눈물을 닦기 위해 노심초사하는 것이다. 이는 부귀에 구차하게 빌지 않고, 권세에 욕보이지 않는 고매한 정신이다. 이병기의 시조 구절인 “미진(微塵)도 가까이 않고 우로(雨露) 받아 사느니라”를 넘어 흙탕물에서 자라되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 같은 사람이 참선비다.


살다보면 선택의 순간이 온다. 고만고만한 선택지라면 제 입맛에 따라 골라잡으면 그만이지만, 거대한 간극이 있는 경우에는 취사선택 앞에 하염없이 고독해진다. 무언가를 버려야할 때 그 손실이 만만치 않다면 머뭇거리는 게 인지상정이다. 제 삶을 오롯이 걸고 결단을 내려야할 때 의로움을 택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맹자라고 이런 고민이 없었을 리 없다. 그는 고뇌 끝에 이렇게 선언한다. “삶(生)도 원하는 것이고 의(義)도 원하는데 둘 다 취할 수 없다면 목숨을 버리고 의를 지키겠다(生亦我所欲也. 義亦我所欲也. 二者不可得兼, 捨生而取義者也.).” 고자상편(告子上篇)에 나오는 이 구절이 유명한 사생취의(捨生取義)다.


“살 수 있는 방법이 있더라도 그것을 쓰지 않고,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지라도 피하지 않는 것은 삶보다 더 소중히 하는 것이 있고, 죽음보다도 더 싫어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由是則生而有不用也, 由是則可以避患而有不爲也. 是故所欲有甚於生者, 所惡有甚於死者.).”라는 맹자의 외침에 옷깃을 여민다. 이는 논어 헌문편(憲問篇)에서 인간완성에 대한 질문에 대한 공자의 답과 상통한다. “이익을 보게 되면 의로움을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보면 목숨을 바칠 줄 알고, 지난날 자기 말을 잊지 않고 실천한다(見利思義, 見危授命, 久要不忘平生之言)”면 인간완성이라 할만하다고 하신 말씀은 그 얼마나 엄중한가.


스스로에게 묻는다. 사이비가 되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향원에 안주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자주색을 미워할 자신이 있는가, 사생취의하고 견리사의(見利思義)할 자신이 있는가. 초심을 초개처럼 버리는 사람은 하고 넘친다. 그러나 초심을 태산처럼 여기며 명리(名利)를 초개처럼 버리는 사람은 드물다. 드물어서 고생스런 길에 들어서더라도 내 자신을 잃어버려서 얻는 부귀영화에 굴하지는 말자. 세상을 바꾸기 전에 스스로 바뀌는 것은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사필귀정(事必歸正)이란 말이 나를 얼마나 더 배신할지 모르겠지만 천년을 늙어도 가락을 잃지 않는 오동나무처럼, 일생이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 매화처럼, 자신이 지탱할 만큼의 빗방울을 머금고 나면 미련 없이 비워내는 연꽃잎처럼 살아야겠다. “선비는 궁해도 의로움을 잃지 않고, 높은 지위를 얻어도 도를 벗어나지 않는다(窮不失義 達不離道)”는 말을 늘 곁에 두자. 자유롭고 떳떳한 선비가 되고 싶다. 한번뿐인 삶을 도저히 대충 살 재간이 없다. - [小鮮]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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