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각을 우직하게 밀고 나갈 수 있을까에 대한 회의가 엄습하는 요즘 故 조지훈 선생의 지조론이 읽고 싶어졌다. 도입부의 “지조를 지키기 위한 괴로움이 얼마나 가혹한가를 헤아리는 사람들은 한 나라의 지도자를 평가하는 기준으로서 먼저 그 지조의 강도(强度)를 살피려 한다”는 구절부터 끄트머리의 “그러나 역시 지조는 어느 때나 선비의, 교양인의, 지도자의 생명이다”에 이르기까지 죄다 절절이 다가온다.

자유당 말기 극도로 부패한 정치현실 속에서 친일파들이 과거에 대한 뉘우침 없이 정치일선에서 득세하고 사회 지도층들이 변절을 일삼는 세태를 통렬히 꾸짖는 명논설은 오늘날에도 전혀 빛이 바래지 않는다. 그래서 서글프다. ‘변절자를 위하여’라는 부제(副題)처럼 변절이 횡행하는 시대에 변절을 마음 먹고 있는 이들에게 이 글을 권하고 싶다. 아울러 개인적인 바람을 밝히자면 나도 먼훗날 이런 식의 경세적인 중수필을 쓸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인터넷 상에 오타가 적잖은 전문이 오고가고 있어 안타까운 마음에 《조지훈 전집5: 지조론》(나남, 1996)을 저본(底本)으로 하여 최대한 원문에 가깝게 교열, 감수했다. 어려운 단어 풀이도 하고, 인물 소개도 부기하였으니 온라인 상에서 볼 수 있는 최고의 지조론 텍스트가 될 수 있으리라 자부한다. 다만 나의 이런 노력이 저작자의 사망 후 50년까지 저작권이 존속되는 현행 저작권법에는 다소 위배되는 바가 있다. 선생께서 너그러이 양해해주시리라 믿는다.^-^



지조론(志操論)
―변절자(變節者)를 위하여-



지조(志操)란 것은 순일(純一, 온전한 하나의)한 정신을 지키기 위한 불타는 신념이요, 눈물겨운 정성이며, 냉철한 확집(確執, 자신의 주장을 끝까지 지켜 나감)이요, 고귀한 투쟁이기까지 하다. 지조가 교양인의 위의(威儀, 위엄이 있는 엄숙한 차림새)를 위하여 얼마나 값지고 그것이 국민의 교화에 미치는 힘이 얼마나 크며, 따라서 지조를 지키기 위한 괴로움이 얼마나 가혹한가를 헤아리는 사람들은 한 나라의 지도자를 평가하는 기준으로서 먼저 그 지조의 강도(强度)를 살피려 한다. 지조가 없는 지도자는 믿을 수가 없고 믿을 수 없는 자는 따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자기의 명리(名利, 명예와 이익)만을 위하여 그 동지와 지지자와 추종자를 일조(一朝, 하루아침에, 갑자기)에 함정에 빠뜨리고 달아나는 지조 없는 지도자와 무절제와 배신 앞에 우리는 얼마나 많이 실망하였는가.


지조를 지킨다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일임을 아는 까닭에 우리는 지조 있는 지도자를 존경하고 그 곤고(困苦, 어렵고 고생스러움)를 이해할 뿐 아니라 안심하고 그를 믿을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이 생각하는 자(者)이기 때문에 배신하는 변절자를 개탄(慨嘆)하고 연민(憐憫)하며, 그와 같은 변절의 위기의 직전에 있는 인사들에게 경성(警醒, 정신을 차려 그릇된 행동을 하지 않도록 타일러 깨닫게 함)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지조는 선비의 것이요, 교양인의 것이다. 장사꾼에게 지조를 바라거나 창녀에게 지조를 바란다는 것은 옛날에는 없었던 일이지만, 선비와 교양인과 지도자에게 지조가 없다면 그가 인격적으로 장사꾼과 창녀와 가릴 바가 무엇이 있겠는가. 식견(識見)은 기술자와 장사꾼에게도 있을 수 있지 않는가 말이다. 물론 지사(志士)와 정치가가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니다. 독립운동을 할 때의 혁명가와 정치인은 모두 다 지사(志士)였고 또 지사라야 했지만, 정당운동의 단계에 들어간 오늘의 정치가에게 선비의 삼엄한 지조를 요구하는 것은 지나친 일인 줄은 안다. 그러나 오늘의 정치-정당운동을 통한 정치도 국리민복(國利民福)을 위한 정책을 통해서의 정상(政商, 정치가와 상인의 결합, 정치가와 결탁하거나 정권을 이용해서 사사로이 이익을 꾀하는 사람)인 이상, 백성을 버리고 백성이 지지하는 공동전선을 무너뜨리고 개인의 구복(口腹, 입과 배, 탐욕)과 명리를 위한 부동(浮動, 떠다님)은 무지조(無志操)로 규탄되어 마땅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현실과 이 난국을 수습할 지도자의 자격으로 대망하는 정치가는 권모술수(權謀術數)에 능한 직업정치인보다 지사적 품격의 정치 지도자를 더 대망하는 것이 국민 전체의 충정(衷情)인 것이 속일 수 없는 사실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염결공정(廉潔公正, 성품이 청렴결백하며 공평하고 정대함) 청백강의(淸白剛毅, 성품이 깨끗하고 강직하며 씩씩함)한 지사정치(志士政治)만이 이 국운을 만회할 수 있다고 믿는 이상 모든 정치 지도자에 대하여 지조의 깊이를 요청하고 변절의 악풍을 타매(唾罵, 더럽게 생각하고 경멸하며 욕함)하는 것은 백성의 눈물겨운 호소이기도 하다.


지조와 정조는 다같이 절개에 속한다. 지조는 정신적인 것이고, 정조는 육체적인 것이라고들 하지만, 알고 보면 지조의 변절도 육체생활의 이욕(利慾)에 매수된 것이요, 정조의 부정도 정신의 쾌락에 대한 방종에서 비롯된다. 오늘의 정치인의 무절제를 장사꾼의 이욕과 계교와 음부적(淫婦的, 음탕한 여인과 같은) 환락(歡樂)의 탐혹(眈惑)이 합쳐서 놀아난 것이라면 과연 극언이 될 것인가.


하기는, 지조와 정조를 논한다는 것부터가 오늘에 와선 이미 시대착오의 잠꼬대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사람이 있을는지 모른다. 하긴 그렇다. 왜 그러냐 하면, 지조와 정조를 지킨다는 것은 부자연한 일이요, 시세를 거역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과부나 홀아비가 개가(改嫁)하고 재취(再娶)하는 것은 생리적으로나 가정생활로나 자연스러운 일이므로 아무도 그것을 막을 수 없고, 또 그것을 막아서는 안 된다. 그러나 우리는 그 개가와 재취를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승인하면서도 어떤 과부(寡婦)나 환부(鰥夫, 홀아비)가 사랑하는 옛짝을 위하여 또는 그 자녀를 위하여 개가나 속현(續絃, 거문고와 비파의 끊어진 줄을 다시 잇는다는 뜻으로, 아내를 여읜 뒤 새 아내를 얻음을 비유해서 이르는 말)의 길을 버리고 일생을 마치는 그 절제에 대하여 찬탄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보통 사람이 능히 어려운 일을 했대서만이 아니라 자연으로서의 인간의 본능고(本能苦)를 이성과 의지로써 초극(超克)한 그 정신의 높이를 보기 때문이다. 정조의 고귀성이 여기에 있다.


지조도 마찬가지이다. 자기의 사상과 신념과 양심과 주체는 일찌감치 집어던지고 시세(時勢)에 따라 아무 권력이나 바꾸어 붙어서 구복의 걱정이나 덜고 명리의 세도에 참여하여 꺼덕대는 것이 자연한 일이지, 못나게 쪼를 부린다고 굶주리고 얻어맞고 짓밟히는 것처럼 부자연한 일이 어디 있겠느냐고 하면 얼핏 들어 우선 말은 되는 것 같다.


여름에 아이스케이크 장사를 하다가 가을바람만 불면 단팥죽 장사로 간판을 남 먼저 바꾸는 것을 누가 욕하겠는가. 장사꾼, 기술자, 사무원의 생활 방도는 이 길이 오히려 정도(正道)이기도 하다. 오늘의 변절자(變節者)도 자기를 이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자처한다면 별 문제다. 그러나 더러운 변절의 정당화를 위한 엄청난 공언(公言)을 늘어놓는 것은 분반(噴飯, 웃음이 참을 수 없음)할 일이다. 백성들이 그렇게 사람 보는 눈이 먼 줄 알아서는 안 된다. 백주대로에 돌아앉아 볼기짝을 까고 대변을 보는 격이라면 점잖지 못한 표현이라 할 것인가.


지조를 지키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자기의 신념에 어긋날 때면 목숨을 걸고 항거(抗拒)하여 타협하지 않고, 부정과 불의한 권력 앞에는 최저의 생활, 최악의 곤욕(困辱)을 무릅쓸 각오가 없으면 섣불리 지조를 입에 담아서는 안 된다. 정신의 자존 자시(自尊自恃, 스스로를 존중하고 믿음)를 위해서는 자학(自虐)과도 같은 생활을 견디는 힘이 없이는 지조는 지켜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조의 매운 향기를 지닌 분들은 심한 고집과 기벽(奇癖, 기이한 취마나 버릇)까지도 지녔던 것이다. 신단재(申丹劑) 선생은 망명생활 중 추운 겨울에 세수를 하는데 꼿꼿이 앉아서 두 손으로 물을 움켜다 얼굴을 씻기 때문에 찬물이 모두 소매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고 한다. 어떤 제자(弟子)가 그 까닭을 물으매, 내 동서남북 어느 곳에도 머리 숙일 곳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는 일화(逸話)가 있다. 무서운 지조를 지킨 분의 한 분인 한용운(韓龍雲) 선생의 지조가 낳은 기벽의 일화도 마찬가지다.


오늘 우리가 지도자와 정치인에게 바라는 지조는 이토록 삼엄한 것은 아니다. 다만 당신 뒤에는 당신들을 주시하는 국민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고 자신의 위의와 정치적 생명을 위하여 좀더 어려운 것을 참고 견디라는 충고 정도다. “한 때의 적막을 받을지언정 만고의 처량한 이름이 되지 말라”는 《채근담(菜根譚)》의 한 구절을 보내고 싶은 심정이란 것이다. 끝까지 참고 견딜 힘도 없으면서 뜻있는 야당(野黨)의 투사를 가장함으로써 권력의 미끼를 기다리다가 후딱 넘어가는 교지(狡智, 교활한 슬기, 약은 꾀)를 버리라는 말이다. 욕인(辱人)으로 출세의 바탕을 삼고 항거로써 최대의 아첨을 일삼는 본색을 탄로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이러한 충언의 근원을 캐면 그 바닥에는 변절하지 말라, 지조의 힘을 기르라는 뜻이 깃들어 있다.


변절(變節)이란 무엇인가? 절개를 바꾸는 것, 곧 자기가 심신으로 이미 신념하고 표방했던 자리에서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철이 들어서 세워 놓은 주체의 자세를 뒤집는 것은 모두 다 넓은 의미의 변절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욕하는 변절은 개과천선(改過遷善)의 변절이 아니고, 좋고 바른 데서 나쁜 방향으로 바꾸는 변절을 변절이라 한다.

일제 때 경찰에 관계하다 독립운동으로 바꾼 이가 있거니와 그런 분을 변절이라고 욕하진 않았다. 그러나 독립운동을 하다가 친일파(親日派)로 전향한 이는 변절자로 욕하였다. 권력에 붙어 벼슬하다가 야당이 된 이도 있다. 지조에 있어 완전히 깨끗하다고는 못하겠지만 이들에게도 변절자의 비난은 돌아가지 않는다.


나머지 하나 협의(狹義)의 변절자, 비난 불신의 대상이 되는 변절자는 야당전선(野黨戰線)에서 이탈하여 권력에 몸을 파는 변절자다. 우리는 이런 사람의 이름을 역력히 기억할 수 있다.


자기 신념으로 일관한 사람은 변절자가 아니다.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남한산성(南漢山城)의 치욕에 김상헌(金尙憲)이 찢은 항서(降書)를 도로 주워 모은 주화파(主和派) 최명길은 당시 민족정기(民族正氣)의 맹렬한 공격을 받았으나 심양(瀋陽)의 감옥에 김상헌과 같이 갇히어 오해를 풀었다는 일화는 널리 알려진 얘기이다. 최명길은 변절의 사(士)가 아니요 남다른 신념이 한층 강했던 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 누가 박중양(朴重陽), 문명기(文明琦) 등 허다한 친일파를 변절자라고 욕했는가. 그 사람들은 변절의 비난을 받기 이하의 더러운 친일파로 타기(唾棄, 침을 뱉듯이 버리고 돌아보지 않음)되기는 하였지만 변절자는 아니다.


민족 전체의 일을 위하여 몸소 치욕을 무릅쓴 업적이 있을 때는 변절자로 욕하지 않는다. 앞에 든 최명길도 그런 범주에 들거니와, 일제 말기 말살되는 국어의 명맥을 붙들고 살렸을 뿐 아니라 국내에서 민족 해방의 날을 위한 유일한 준비가 되었던 《맞춤법 통일안》, 《표준말모음》, 《큰 사전》을 편찬한 ‘조선어학회’가 ‘국민총력연맹 조선어학회지부(國民總力聯盟 朝鮮語學會支部)’의 간판을 붙인 것을 욕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무런 하는 일도 없었다면 그 간판은 족히 변절의 비난을 받고도 남음이 있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좌옹(佐翁), 고우(古友), 육당(六堂), 춘원(春園) 등 잊을 수 없는 업적을 지닌 이들의 일제 말의 대일 협력(對日協力)의 이름은 그 변신을 통한 아무런 성과도 없기 때문에 애석하나마 변절의 누명을 씻을 수 없었다. 그분들의 이름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그에 대한 실망이 컸던 것을 우리의 기억이 잘 알고 있다. 그 때문에 이분들은 ‘반민특위(反民特委)’에 불리었고, 거기서 그들의 허물을 벗겨 주지 않았던가. 아무것도 못하고 누명만 쓸 바에는 무위(無爲)한 채로 민족정기의 사표(師表)가 됨만 같지 못한 것이다.


변절자에게는 저마다 그럴 듯한 구실이 있다. 첫째, 좀 크다는 사람들은 말하기를 백이(伯夷), 숙제(叔齊)는 나도 될 수 있다, 나만 깨끗이 굶어 죽으면 민족은 어쩌느냐가 그것이다. 범의 굴에 들어가야 범을 잡는다는 투의 이론이요, 그 다음이 바깥에선 아무 일도 안 되니 들어가 싸운다는 것이요, 가장 하치(품질이 낮은 것)가, 에라 권력에 붙어 이권이나 얻고 가족이나 고생시키지 말아야겠다는 것이다. 굶어 죽기가 쉽다거나 들어가 싸운 다거나 바람이 났거나 간에 그 구실을 뒷받침할 만한 일을 획책(劃策)도 한 번 못해 봤다면 그건 변절의 낙인밖에 얻을 것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일찍이 어떤 선비도 변절하여 권력에 영합해서 들어갔다가 더러운 물을 뒤집어쓰지 않고 깨끗이 물러나온 예를 역사상에서 보지 못했다. 연산주(燕山主)의 황음(荒淫)에 어떤 고관의 부인이 궁중에 불리어 갈 때 온몸을 명주로 동여매고 들어가면서, 만일 욕을 보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겠다고 해 놓고, 밀실에 들어가서는 그 황홀한 장치와 향기에 취하여 제 손으로 그 명주를 풀고 눕더라는 야담이 있다. 어떤 강간(强姦)도 나중에는 화간(和姦)이 된다는 이치와 같지 않는가.


만근(輓近, 근래에, 최근에) 30년래에 우리나라는 변절자가 많은 나라였다. 일제 말의 친일 전향, 해방 후 남로당의 탈당, 또 최근의 민주당의 탈당, 이것은 20이 넘은, 사상적으로 철이 난 사람들의 주책없는 변절임에 있어서는 완전히 동궤(同軌, 같은 궤도, 같은 선상에 있음)다. 감당도 못할 일을 제 자신도 율(律)하지 못하는 주제에 무슨 민족이니 사회니 하고 나섰다라는 말인가. 지성인의 변절은 그것이 개과천선이든, 무엇이든 인간적으로는 일단 모욕을 자취(自取, 제 스스로 만들어서 됨)하는 것임을 알 것이다.


우리가 지조를 생각하는 사람에게 주고 싶은 말은 다음의 한 구절이다. “기녀(妓女)라도 늘그막에 남편을 좇으면 한평생 분냄새가 거리낌이 없을 것이요, 정부(貞婦)라도 머리털 센 다음에 정조(貞操)를 잃고 보면 반생(半生)의 깨끗한 고절(苦節, 어떤 고난을 당해도 변하지 아니하고 끝내 지켜 나가는 굳은 절개)이 아랑곳없으리라. 속담에 말하기를, 사람을 보려면 다만 그 후반(後半)을 보라” 하였으니 참으로 명언이다.


차돌에 바람이 들면 백 리를 날아간다(늦게 배운 잘못은 더 큰 잘못을 저지른다)는 우리 속담이 있거니와, 늦바람이란 참으로 무서운 일이다. 아직 지조를 깨뜨린 적이 없는 이는 만년(晩年)을 더욱 힘쓸 것이니, 사람이란 늙으면 더러워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아직 철이 안든 탓으로 바람이 났던 이들은 스스로의 후반을 위하여 번연(飜然, 깨달음이 갑작스러움)히 깨우치라. 한일합방(韓日合邦) 때 자결한 지사시인(志士詩人) 황매천(黃梅泉)은 정탈(定奪, 옳고 그름을 가리어 결정함)이 매운 분으로 ‘매천필하무완인’(梅泉筆下無完人, 매천의 붓 아래에서는 온전한 사람이 없다-매천의 날카로운 비평과 지조를 일컬음)이란 평을 듣거니와 그 《매천야록(梅泉野錄)》을 보면 민충정공(閔忠正公), 이용익(李容翊) 두 분의 초년(初年) 행적을 헐뜯은 곳이 있다. 오늘에 누가 민충정공, 이용익 선생을 욕하는 이 있겠는가. 우리는 그 분들의 초년을 모른다. 역사에 남은 것은 그분의 후반이요, 따라서 그분들의 생명은 마지막에 길이 남게 된 것이다.


도도(滔滔)히 밀려오는 망국(亡國)의 탁류(濁流)-이 금력과 권력, 사악 앞에 목숨으로써 방파제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은 지조의 함성을 높이 외치라. 그 지성 앞에는 사나운 물결도 물러서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다. 천하의 대세가 바른 것을 향하여 다가오는 때에 변절이란 무슨 어처구니없는 말인가. 이완용(李完用)은 나라를 팔아먹었어도 자기를 위한 36년의 선견지명(先見之明)(?)은 가졌었다. 무너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권력에 뒤늦게 팔리는 행색(行色)은 딱하기 짝없다. 배고프고 욕된 것을 조금 더 참으라. 그보다 더한 욕이 변절 뒤에 기다리고 있다.


“소인기(少忍飢, 잠깐 굶주림을 참으라)하라.” 이 말에는 뼈아픈 고사(故事)가 있다. 광해군의 난정(亂政) 때 깨끗한 선비들은 나가서 벼슬하지 않았다. 어떤 선비들이 모여 바둑과 정담(情談)으로 소일(消日)하는데, 그 집 주인은 적빈(赤貧)이 여세(如洗)라(몹시 가난하기가 마치 물로 씻은 듯하여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음) 그 부인이 남편의 친구들을 위하여 점심에 수제비국이라도 끓여 드리려 하니 땔나무가 없었다. 궤짝을 뜯어 도마 위에 놓고 식칼로 쪼개다가 잘못되어 젖을 찍고 말았다.


바둑 두던 선비들은 갑자기 안에서 나는 비명을 들었다. 주인이 들어갔다가 나와서 사실 얘기를 하고 추연(愀然, 낙심하는 모양)히 하는 말이, 가난이 죄라고 탄식하였다. 그 탄식을 듣고 선비 하나가 일어서며, 가난이 원순 줄 이제 처음 알았느냐고 야유하고 간 뒤로 그 선비는 다시 그 집에 오지 않았다. 몇 해 뒤 그 주인은 첫 뜻을 바꾸어 나아가 벼슬하다가 반정(反正, 광해왕 15년(1623)에 이귀, 김류 등 서인(西人) 일파가 광해왕 및 집권파인 대북파(大北派)를 몰아내고 능양군인 인조를 즉위시킨 인조쿠데타를 가리킨다) 때 몰리어 죽게 되었다.


수레에 실려서 형장(刑場)으로 가는데 길가 숲 속에서 어떤 사람이 나와 수레를 잠시 멈추게 한 다음, 가지고 온 닭 한 마리와 술병을 내놓고 같이 나누며 영결(永訣)하였다. 그때 그 친구의 말이, 자네가 새삼스레 가난을 탄식할 때 나는 자네가 마음이 변한 줄 이미 알고 발을 끊었다고 했다. 고기밥 맛에 끌리어 절개를 팔고 이 꼴이 되었으니, 죽으면 고기 맛이 못 잊어서 어쩌겠느냐는 야유가 숨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 찾은 것은 우정이었다. 죄인은 수레에 다시 타고 형장으로 끌려가면서 탄식하였다. “소인기, 소인기(少忍飢 少忍飢)하라”고…….


변절자에게도 양심이 있다. 야당에서 권력으로 팔린 뒤 거드럭거리다 이내 실세(失勢)한 사람도 있고, 지금 요추(要樞, 중요한 요직)에 앉은 사람도 있으며, 갓 들어가서 애교를 떠는 축도 있다. 그들은 대개 성명서를 낸 바 있다. 표면으로 성명은 버젓하나 뜻있는 사람을 대하는 그 얼굴에는 수치의 감정이 역연하다(歷然―, 누가 보아도 분명하다). 그것이 바로 양심이란 것이다. 구복과 명리를 위한 변절은 말없이 사라지는 것이 좋다. 자기 변명은 도리어 자기를 깎는 것이기 때문이다. 처녀가 아기를 낳아도 핑계는 있다는 법이다. 그러나, 나는 왜 아기를 배게 됐느냐 하는 그 이야기 자체가 창피하지 않은가.


양가(良家)의 부녀가 놀아나고 학자 문인까지 지조를 헌신짝같이 아는 사람이 생기게 되었으니 변절하는 정치가들도 우리쯤이야 괜찮다고 자위할지 모른다. 그러나 역시 지조는 어느 때나 선비의, 교양인의, 지도자의 생명이다. 이러한 사람들이 지조를 잃고 변절한다는 것은 스스로 그 자임(自任, 스스로 자기의 임무로 여김, 자기의 능력 따위에 대하여 훌륭하다고 자부함)하는 바를 포기하는 것이다.

- 1960년 2월 15일 《새벽》 3월호


<인물 소개>

* 단재 신채호(申采浩, 1880~1936): 항일 독립운동가, 사학자. 1905년 성균관 박사가 되었으나 그해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황성신문에 항일 논설을 쓰기 시작했으며, 이듬해 대한매일신보 주필로 활약하며 내외의 민족 영웅전과 역사 논문을 발표하여 민족의식 앙양에 힘썼다. 1919년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가, 의정원(議政院) 의원, 전원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했으며, 1925년경부터 무정부주의를 신봉하기 시작, 1927년 신간회(新幹會) 발기인, 무정부주의 동방동맹(東方同盟)에 가입해서 활동하다 일경에 잡혀 복역하던 중 옥사하였다. 적과 타협 없이 독립투쟁을 전개하는 동안 ‘독립이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쟁취하는 것이다’라는 결론에 도달, 이와 같은 견해가 곧 그의 역사연구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고조선(古朝鮮)과 묘청(妙淸)의 난(亂) 등에 새로운 해석을 시도했고 ‘역사라는 것은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다’라는 명제를 내걸어 민족사관을 수립, 한국 근대사학의 기초를 확립했다. 저서에 조선상고사, 을지문덕전, 이순신전 등이 있다.

* 만해 한용운(韓龍雲, 1879~1944): 항일 독립운동가, 승려, 시인. 대승불교의 반야사상(般若思想)에 입각하여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1926년 시집 님의 침묵(沈默)을 출판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섰다. 1931년 조선불교청년회를 조선불교청년동맹으로 개칭,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을 강화하고 이해 월간지 《불교(佛敎)》를 인수, 이후 많은 논문을 발표하여 불교의 대중화와 독립사상 고취에 힘썼다. 그 후에도 불교의 혁신과 작품활동을 계속하다가 서울 성북동에서 중풍으로 죽었다. 시에 있어 퇴폐적인 서정성을 배격하고 불교적인 ‘님’을 자연으로 형상화했으며, 고도의 은유법을 구사하여 일제에 저항하는 민족정신과 불교에 의한 중생제도(衆生濟度)를 노래했다.

* 청음 김상헌(金尙憲, 1570~1652): 조선 중기의 문신. 1636년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인조를 호종하여 선전후화론(先戰後和論)을 주장했으며, 최명길이 작성한 항복 문서를 찢고 통곡했다. 1641년 청나라 심양(瀋陽)에 끌려가 이후 4년여 동안 억류해 있었다. 당시에도 강직한 성격과 기개로써 청인들의 굴복 요구에 불복하여 끝까지 저항하였다.

* 지천 최명길(崔鳴吉, 1586~1647): 조선 중기의 문신. 병자호란에서 강화를 주관했으나 1643년 청나라에 끌려가 수감되었다가 1645년 소현세자 일행과 함께 풀려났다. 병자호란 때는 “싸우자니 힘이 부치고 감히 화의하자고 못하다가 하루 아침에 성이 무너지고 위아래가 어육(魚肉)이 되면 종사를 어디에 보존하겠느냐”는 입장에서 강화를 주장하였지만, 자신이 쓴 항서를 찢는 척화파 김상헌의 행동에도 의미가 있다고 인정함으로써 독단에 빠지지 않았다. 병자호란 후에도 스스로 청나라를 왕래하면서 대청 외교에서 패전국으로서 겪는 온갖 어려움을 당당한 자세로 해결했다.

*박중양(朴重陽, 1874~1955?): 일제강점기 때 유명한 친일파 관료. 이토 히로부미의 눈에 들어 통감부 시절 이래 일제 치하 내내 전국 각지의 주요 관직을 두루 지냈다.

* 문명기(文明琦, 1878~?): 일제강점기 때 유명한 친일파 경제인. 일제의 비호 아래 지역 굴지의 사업가로 성장, 제지업과 수산업으로 자본을 축적한 뒤 금광에 투자하여 대부호가 되었다.

* 좌옹 윤치호(尹致昊, 1865~1945): 한말에서 일제강점기의 정치가. 일찍부터 개화운동에 투신해 1881년에는 신사유람단을 따라 일본에 다녀온 뒤 미국에 건너가 신학문을 배웠다. 1895년 독립협회, 1906년 대한자강회를 조직하여 교육 사업에 힘썼으며, 1910년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YMCA)을 조직했다. 일제 말에 변절, 일본제국의회의 칙선 귀족원의원을 지냈다. 1945년 광복 후 친일파로 규탄받자 자결했다.

* 고우 최린(崔麟, 1878~1958): 일제강점기의 친일파, 독립운동가.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1933년 말 대동방주의(大東方主義)를 내세우며 친일파로 변절, 1934년 조선총독부 중추원참의(中樞院參議)가 되었고, 1937년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사장에 취임하였으며, 1939년 조선임전보국단(朝鮮臨戰報國團) 단장을 지내는 등 8·15광복 때까지 친일활동으로 일관했다. 1950년 6·25전쟁 중 납북되었다.

* 육당 최남선(崔南善, 1890~1957): 한국의 사학자, 문인. 신문화 수입기에서 언문일치(言文一致)의 신문학운동과 국학(國學) 관계의 개척에 선구자적 역할을 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는 독립선언문을 기초하고 민족대표 48인 중의 한 사람으로 체포되어 2년 6개월형을 선고받았으나 다음해 가출옥했다. 1938년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만몽일보 고문으로 있다가 1939년 일본 관동군이 세운 건국대학 교수가 되었고, 귀국 후 1943년 재일조선인 유학생의 학병지원을 권고하는 강연을 하기 위하여 도쿄로 건너갔다. 광복 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기소되어 1949년 수감되었으나 병보석되었다.

* 춘원 이광수(李光洙, 1892~1950): 한국의 소설가. 1917년 한국 최초의 근대 장편소설 《무정(無情)》을을 써서 한국 근대소설사의 새 장을 열었으며, 1919년 도쿄 유학생의 2·8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뒤 상하이로 망명, 임시정부에 참가하여 독립신문사 사장을 역임했다.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반년 만에 석방되고부터 본격적인 친일행위로 기울어 1939년에는 친일어용단체인 조선문인협회 회장이 되었다. 8·15광복 후 반민특위법으로 구속되었다가 병보석으로 출감했으나 6·25전쟁 때 납북되었다.

* 매천 황현(黃玹, 1855~1910): 조선 후기의 학자, 우국지사. 시문에 능하여 1885년(고종 22) 생원진사시에 장원하였으나 시국의 혼란함을 개탄, 향리에 은거하였다. 1910년(융희 4) 일제에 의해 국권피탈이 되자 국치를 통분하며 절명시(絶命詩) 4편을 남기고 음독 순국하였다. 《매천야록(梅泉野錄)》은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총서(史料叢書) 제1권으로 발간되어 한국 최근세사 연구에 귀중한 사료가 된다.

* 충정공 민영환(閔泳煥, 1861~1905): 한말의 문신, 순국지사. 잦은 해외여행으로 새 문물에 일찍 눈을 떠, 개화사상을 실천하고자 유럽제도를 모방하여 정치제도를 개혁하고, 민권신장(民權伸張)을 꾀할 것을 상주하였다. 친일적인 대신들과 대립, 일본의 내정간섭을 성토하다가 시종무관장(侍從武官長)의 한직(閑職)으로 밀려났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조병세와 함께 이를 반대했으나, 이미 대세가 기운 것을 보고 집에 돌아가 조용히 자결했다. 의정대신(議政大臣)에 추증, 고종의 묘소에 배향되었다.

* 이용익(李容翊, 1854~1907): 한말의 문신, 정치가. 친러파의 수령으로 일본이 침투하는 것을 막기 위해 노력했다. 1904년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가 체결된 후 배일(排日)친러파로 일본에 납치되었다가 이듬해 귀국, 경북관찰사에 등용되었는데, 그 동안 보성사(普成社) 인쇄소를 차리고 보성학원(普成學院: 지금의 고려대학교)을 설립하였다. 나중에는 블라디보스토크 등지로 망명하여 구국운동을 계속하다 병사하였다.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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