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입학 전에 신입생 과제물로 전광용의 『꺼삐딴 리』에 대한 독후감을 쓰면서 “이인국은 물질적으로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정신적으로는 패배한 사람이다”라고 신랄한 비난을 했다. “대의보다 대세를 따르려는 현실이 아쉽다”고 탄식하기도 했다. 꽤 시일이 지난 오늘날 다시 곱씹어보니 그 비난의 날은 무뎌졌지만 탄식은 더 깊어진 것 같다.


이인국은 도드라진 처세술로 기득권을 누린 지식인이다. 일제강점기 하에서 친일파로, 해방기에는 친소파로, 월남해서는 친미파로 변신하는 삶의 궤적은 현란하다. 모범적인 황국신민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사상범의 입원을 거절하는 장면, 소련군 장교의 후원에 힘입어 아들을 모스크바로 유학 보내는 장면, 미국으로 가기 위해 미대사관 직원에게 고려청자를 선물하는 장면을 따라가다 보면 영달을 위한 노력이 신기하다 못해 추잡하기까지 하다. 기회주의자가 승승장구하던 시대에 개인의 윤리와 책임은 무엇인가를 음미하게 해준다.


권력에 빌붙다가 어느 순간 그 자신이 권력이 된 기득권의 변절은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한다. 때로는 혐오하고 때로는 연민하다가 어느 순간 흠모하고 추종하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 부박한 생존양식을 온몸으로 마다할 자신이 점점 없어진다. 약자의 설움에 눈물 흘리면서도 결국은 강자를 편드는 것이 세상인심이라며 남 탓하기 바쁘다. 힘있는 자 곁에서 호가호위(狐假虎威)하는 재미를 은연중에 그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미워하면서 닮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게 제일 두렵다.


강원도 영월에 있는 단종의 장릉(莊陵)에는 충의공 엄홍도의 정려각이 있다. 영월 호장이라는 미관말직의 엄홍도는 단종이 시해 당하자 시신을 수습해 선산에 장사 지냈다. 주위에서는 후환을 두려워하며 만류했으나 이를 뿌리치며 “의롭고 착한 일을 하다가 화를 당해도 나는 달게 받겠다(爲善被禍吾所甘心)”라고 의연히 말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엄홍도의 경우는 그나마 운이 좋은 편이다. 아무리 착한 일을 해도 사람들은 그리 오래 기억하지 않을지 모른다. 좋은 일을 해도 다른 속셈이 있는 것은 아니냐며 오해를 살지도 모른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내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사느냐이다. 부끄러울 치(恥)자 셋이면 천박함을 피한다.


지난 4월 16일 열린 서울 길상사 법회의 아름다운 법문이 떠오른다. 법정 스님은 아프리카 탐험에 나섰던 유럽인들의 경험담을 소개했다. 유럽 탐험가가 원주민을 짐꾼 겸 안내인으로 앞세워 쉬지 않고 나아갔다. 사흘째 되는 날 원주민들이 꼼짝도 않고 주저앉아버렸다. 탐험가가 이유를 묻자 원주민은 “우리는 이곳까지 제대로 쉬지도 않고 너무 빨리 왔어요. 이제 우리 영혼이 우리를 따라올 시간을 주기 위해서 이곳에서 기다려야만 합니다”라고 말했다. 속도와 효율성을 내세우다가 영혼을 상실한 현대인의 모습을 상징하는 우화다. 원주민의 말을 이렇게 변형해보면 어떨까. “우리는 제대로 성찰하지 않고 너무 빨리 변했어요. 이제 우리 영혼이 우리를 따라올 때까지 부끄러워해야만 합니다”라고.


스스로에게 던지는 “부끄럽지 않은가!”라는 질문 하나만으로도 꺼삐딴 리의 역겨움을 제법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 [小鮮]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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