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행이 끝난지 꼭 한 달만에 탈고하고 말았네요. 지루한 이야기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꾸벅~


제주도의 직사광선은 무척 따가워 살이 타들어 간다는 느낌이 들게 했다. 오죽하면 햇볕 때문에 피부가 고운 제주도 여자가 없다는 우스개 소리를 들었겠는가. 하염없이 나를 태우는 태양을 피해 달려간 천지연(天地淵) 폭포에서 간신히 심신을 식힐 수 있었다. 흐릿한 날씨의 천제연 폭포와는 달리 화창한 날씨라 눈이 부셨다. 하늘과 땅이 만나서 이룬 연못이라는 뜻의 천지연 폭포는 천제연과는 달리 평평한 산책로를 즐길 수 있었다. 짙은 녹색 연못을 바라보니 그간의 시름이 반 토막 나버리는 듯했다. 영국의 시인 콜리지는 “자연에는 우울한 것이라곤 하나도 없다”고 했다. 환경오염이니 뭐니 해서 눈살 찌푸리게 하는 장면이 많은 요즘에야 우울함을 자아내는 경우가 많겠지만, 아직 때묻지 않아서 우울하지 않다는 소극적 의미를 너머 기쁘고 안락하게 해주는 이런 곳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기에 그나마 어렵사리 균형을 맞추어 가고 있는 것일 게다.



천지연 폭포의 서늘한 기운이 채 가실 새라 조금 서둘러 간 곳이 바로 정방 폭포이다. 정방 폭포는 천지연, 천제연과 더불어 제주도 3대 폭포 중에 하나로서 바다로 직접 떨어지는 동양 유일의 해안폭포로 그 명성이 높다. 제주도의 절경을 일컫는 영주십경 중에 유일하게 가본 곳이 바로 정방하폭(正房夏瀑)으로서 이는 정방폭포를 여름에 구경하는 것을 말한다. 정확히는 멀리서 구경하는 것을 말하지만 그랬다면 뼛속까지 시원해지는 기분을 느끼지 못했을 테니 근경(近景)이 오히려 더 좋았다고나 할까. 바다로 쉼 없이 출렁이는 물결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할 정도로 사방에서 물방울들이 날아왔다. 결국 근처 바위에 등지고 앉아 물방울들을 맞았다. 잠시 걸터앉았는데도 다리에는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다들 이곳이 마냥 좋았는지 떠날 생각을 안하고 물방울에 흠뻑 젖어드는 그 기분에 심취해 있었다. 심지어는 이곳에 텐트를 치고 야영을 하자는 농담까지 나왔다. (결국 무겁게 메고 다닌 텐트는 한 번도 안 쓰고 고스란히 반납했다^^;) 여로에 지친 퀭한 눈망울과 세파에 찌든 야윈 가슴을 꽉꽉 채워주는 정방 폭포의 효험은 엄청났다. 몇 번이고 그만 두려고 했던 제주도 완주에 대한 용기가 충천되어 남은 제주도의 절반은 아무 군소리 없이 달릴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물이라는 것이 얼마나 근원적이고 생명에 가까운 존재인가 하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여행기간 내내 워터홀릭을 자처해도 부끄럽지 않았던 것은 그것이 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기 때문이다. 갓 태어난 아기의 90% 어른의 70%가 물이며 체내에서 물이 5%만 빠져나가도 혼수상태가 된다고 한다. 참으로 고맙고 귀한 물에 좀 중독되기로서니 무에 그리 대수이겠는가.



물 하니까 갑자기 철학의 아버지라는 탈레스가 생각났다. “만물의 근원은 물이다”는 그의 유명한 명제보다 더욱 빛나는 것은 만물의 근원이 무엇인가를 물었던 그 물음 자체다. 생각해보기도 전에 일단 믿고 보라는 신화적 세계관이 지배하던 시절에 당당히 의심하며 물음을 던지는 저항의 상징으로서 탈레스는 철학을 열었다는 영예를 얻는다. 나를 옭아매는 이런저런 신화들에 나는 맞설 수 있을까. 신화에 맞서는 무기로서의 생각은 힘이 세지만 그 힘은 여간해서는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에 내 고민이 있다. 또 ‘믿음’ 이전에 ‘생각’이 존재한다는 나의 개똥철학조차 결국 하나의 믿음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를 외치기까지 엄청난 노력을 쏟아 부었다고 주워 들었는데(방법적 회의라고 지칭되는) 나는 고작 “생각이 먼저인 것이 확실하겠지...”라며 말꼬리 흐리며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간다.^^; ‘생각은 힘이 세다’라는 무시무시한 선전문구(?)를 남용하는 나로서는 이 부분에 대한 나의 견해가 좀 더 정교해졌으면 좋겠다.



또 물 이야기에 빠질 수 없는 것이 역시나 노자의 上善若水(상선약수)다.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 가장 훌륭한 것은 물처럼 되는 것이라고 외친 이유는 무엇일까? 노자는 뒤를 이어 다음과 같이 말한다. 水善利萬物而不爭, 處衆人之所惡...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고, 뭇사람들이 있기 싫어하는 곳에 처하기를 좋아한다는 것이다. 일부를 이롭게 하면서 다투지 않기는 쉽다. 자기들끼리 쑥덕쑥덕 해치우는 그들만의 잔치에서 무슨 다툼이 일어나겠는가. (뭐 잔치가 점점 커지면 밥그릇싸움이 시작되기도 하지만...) 그러나 전체를 이롭게 하면서 다투지 않는다는 것은 참 어렵다. 이걸 윈윈(win-win) 전략쯤으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은 다음 구절에서 무너진다.



남들이 싫어하는 곳에 기꺼이 머무른다는 것은 비교적 쉽게 다가온다. 그것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물의 속성에서 유추할 수 있다. 노자는 또 이런 말도 했다. 功成而弗居(공성이불거)... 공이 이루어져도 그 공 속에서 살지 않는다, 즉, 공을 쌓아도 그 공을 주장해서 무언가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상선약수에는 윈윈전략보다는 희생정신이 내포되어있다고 보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이 대목에서 상선약수를 즐겨 쓰는 나는 노자와 입장 차이를 보인다. 공을 쌓았다면 마땅히 보상을 주는 인센티브의 원칙은 상도덕의 근간이다. 이걸 확립하는 것이 희생정신을 독려하는 것보다 더 낫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기여를 한 사람이 손해를 보는 것은 부당하다는 말에 혹자는 말할지 모른다. 손해보니까 착한 사람이라 부르는 것이지 손해도 안보고, 희생도 안 치르고 무슨 선인이냐고. 그럴지도 모르지만 나는 조금 생각이 다르다. 여기서 나의 꿈같은 소리가 펼쳐지고 만다.^^;



나는 궁극적으로 착한 사람이 없는 세상을 꿈꾼다. 누군가의 희생을 먹고 진보하는 사회, 착한 사람들의 손해를 먹고 지탱되는 사회가 아닌 보통 사람들의 제 몫 챙기기로도 꾸려지는 사회가 그것이다. 여기서 제 몫 챙기기란 남의 자유와 권리를 침범하지 않는 한에서 내 소신껏 살면서 내 이익 도모하는 것을 말한다. 내가 ‘보통선(普通善)’이라고 지칭하는 이런 행위가 전통적 의미의 ‘선량함’을 대체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모두가 착한 사람이 되는 것도 불가능하지만, 착한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것도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믿는 개인주의가 상도덕을 지켜가며 내 것을 쟁취하는 것이라면, 내가 믿는 자유주의가 남의 자유를 훼손해서 나의 자유를 얻는 것이 아니라면... 보통선이라는 나의 이데아(Idea)는 여전히 유효할 것이다. 그러나 이 유토피아의 실현은 나조차 믿기 어렵다. 어쩌면 이 개소리는 메마른 사회가 착한 사람들의 눈물로 적셔지는 것이 못내 불편한 ‘보통 사람’의 투정인지도 모른다.



정방폭포의 묘한 힘에 이끌려 잡념들의 보따리가 방정맞게 풀어졌지만 다시 페달을 돌려보기로 하자. 하이킹 본부에서 여자들이 예쁘다며 추천해준 표선면에서 묵어가기는 힘들다고 생각한 우리는 남원읍에서 하룻밤을 묵기로 하고 남원읍 가기 전에 있는 신영영화박물관을 들렀다. (이 때 표선에 당도하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했던 친구가 있었다. 누구였더라...^^;) 영화 마니아들에게야 무척 흥미로울지 몰라도 피곤에 찌든 우리들로서는 비싼 표 값에 비해 볼 것이 없었다는 것이 대체적의 의견이었다. 영화의 탄생과 발달상, 한국영화의 역사와 포스터, 각종 영화기자재가 약간은 눈요기가 되었지만 말이다. 쉴 곳이 필요해 2층에 있던 방송국 뉴스 스튜디오와 똑같이 제작한 곳에서 앵커 기분 내면서 잠시 휴식을 취하려는 찰나 갑자기 안내방송이 나왔다. 요지인즉슨, 그 자리에서 2000원으로 사진촬영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내 멋쩍어져서 자리를 뜨면서 내가 자본주의 세상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놀란 가슴 달래기 위해 도망치듯 나온 박물관 밖 바다를 바라보는 산책로는 제법 아담하고 푸근했다. 그런데도 박물관 입장료 6000원이 비싸다며 연신 투덜거리는 나를 보고, 올인 샌드위치 가격보다도 싼 박물관 표 값에 왜이리 궁상을 떨었던 것인지... (올인 샌드위치 관련은 2부 참조...^^)



남원읍에서 민박집 잡기가 여의치 않자 일단 허기진 배부터 달래러 들어간 곳은 어느 허름한 분식집이었다. 나는 순두부찌개를 시켜서 무척 맛나게 먹었는데, 투박한 시골음식이란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세련되고 정갈한 도심지의 음식과 대조되는 그 형언할 수 없는 느낌이 입안에서 맴돌았다. (이 느낌이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다음날 아침 겸 점심도 이 집에서 해결했다. 떳다 분식에서...^^) 분식집 할머니께 묵을 곳을 물었더니 근처의 모텔을 소개해주셨다. 모텔이 주는 그 미묘한 뜻빛깔의 부담감도 제쳐두고 찾아가 보니 5명이 묵는다니 꽤나 놀라는 눈치였다. 방의 절반을 차지한 거대한 2인용 침대를 보고서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침대 때문에 잠자리 마련이 조금 불편했지만 단잠을 자는 데는 큰 지장이 없었다.^^



넷째 날부터는 큰 오르막도 없었고 평평한 도로가 펼쳐져서 속도를 낼 수 있었다. 영화박물관의 기억 때문이었는지 입장료 6000원이던 제주민속촌박물관을 생략하기로 하고, (안에 들어가서 한참 걸어야 한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해안도로를 따라 달리다가 환해산성에서 멈춰 쉬었다. 환해산성은 말 그대로 해안가를 따라 돌무더기가 쌓여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이런 걸로 어떻게 외적을 막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방어용이라기보다는 소원을 빌며 돌을 쌓는 기원용처럼 보였다. 그런데 한참을 쉬고 있는데도 병승이가 도착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알고 보니 자전거 바퀴 바람이 빠지고 말은 것이다. 자전거 수리점까지는 까마득한데 자전거가 고장나는 바람에 크게 난감했다. 다행히 낚시하던 아저씨께 통사정해서 차를 얻어타기로 하고(병승이 말로는 단순한 낚시꾼이 아닌 밀렵꾼의 분위기가 짙었다고 한다), 우리는 병승이를 남겨두고 넷이서 자전거 수리점을 찾으러 향했다. 수리점은 금세 찾을 수 있었고 위치를 병승이에게 알린 뒤, 병승이를 만나기 전까지 시간을 때울 곳을 찾았다.



나는 그래도 가장 유명하다는 성산일출봉을 가자고 주장했지만, 드라마 올인의 세트장이 있다는 섭지코지로 가자는 친구들의 의견에 따랐다. 자연경관을 보러갈 때마다 “이런 건 지리책에 보면 다 있다고...”라며 문화유적 쪽을 보러가자고 주장했던 나로서는 역으로 당한 셈이었다. 성산 일출봉이야말로 지리책의 단골손님 아닌가.^^;(섭지코지에서 먼발치로 어렴풋이 보이는 광경을 감상하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한참을 구불구불 들어가고서야 도착한 섭지코지는 올인의 유명세가 가시지 않았던지 가장 관광객이 북적였다. 코지란 ‘곶’을 의미하는 제주도 사투리며, 섭지는 좁은 땅이라는 뜻이다. 섭지코지의 산을 오르며 노오란 유채꽃과 어울리는 목가적인 풍경이 물씬 풍기는 너른 초지가 마음을 편안케 했다. 섭지코지의 제일 높은 곳에 보이는 하얀 등대까지 가는 것을 가볍게 그만 두고,(여행기간 내내 오르막을 최소화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한참을 바다를 바라봤다. 특히 용왕의 아들이 선녀에 반하여 선녀를 따라 하늘로 승천하려다 옥상황제의 노여움을 받고 바위가 됐다는 전설을 간직한 촛대 모양의 선돌 바위가 운치를 더했다. (이 바위가 외돌개와 비슷하게 생겼다는 말을 듣고 외돌개 안 간 것을 잘 했다며 어찌나 기뻐했던지...^^;)



자전거를 수리한 병승이를 만나 서둘러 우도를 향했다. 성산항에서 배를 10분쯤 타니 우도 모습이 보였다. 우리는 우도 8경 중에서 가망 유명한 서빈백사(西濱白沙)라고 불리는 산호사해수역장을 찾았다. 그리 크지 않은 규모의 해수욕장이지만 쌀알 모양의 산호가루로 이루어진 해수욕장의 정취는 일품이었다. 다공질의 현무암에 걸터앉아 파도를 바라보며 망중한을 톡톡히 즐겼다. 다만 배가 끊기기 전에 우도를 나와야한다는 강박관념이 옥의 티라면 티였다. 30여분만에 우도를 빠져 나온 우리는 세화로 향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자전거가 또 말썽을 부렸다. 알고 보니 스테이플러 심이 바퀴에 박혀 있던 것을 안 빼고 바퀴만 갈았던 것이다. 결국 병승이와 원혁이가 다시 성산으로 수리를 하기로 하고 병채, 세일, 나는 먼저 세화에서 민박을 잡아 두기로 했다. 세화 가는 길은 시원스레 뚫린 도로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힘에 부쳤다. 결국 세일이와 병채를 한참 앞서 보내고 도로 한 가운데서 휴식을 취했다. 비도 조금 쏟아지면서 전의를 상실한 패잔병마냥 추욱 늘어져 시간을 보냈다.



날이 어두워지고 있다는 생각이 퍼뜩 들면서 무거운 다리를 놀렸다. 다행히 세화는 머지 않은 곳에 있었고 얼른 여장을 풀었다. 이제 막바지에 접어든 우리의 제주도 일주는 초콜릿이 되어버린 피부를 그 증거물로 남기려 하고 있었다. 감자를 사다가 썰어서 초콜릿을 녹여보려 했지만 얼마나 효과가 있었는지는 미지수다. 물론 이 날도 간식 잔치를 벌였음은 물론이다. 다음날 우리는 이제 출발지를 향해 달렸다. 다시 뜨거운 햇빛이 우리를 괴롭혔지만 이제는 더 이상 멈출 수가 없었다. 무언가에 떠밀리는 힘이 느껴졌다. 지난 나흘 간 부지런히 밟아 온 페달의 관성이랄까. 비록 한결같이 느릿느릿한 속도로 꼴찌를 달렸지만 마음만은 쌩쌩 달렸다. 우리의 마지막을 축하하는 듯한 함덕 해수욕장의 옥빛 바다는 흥취를 돋구었다. 이대로 끝내기 못내 아쉬웠던지 국립 제주박물관 근처에서 와장창 넘어지고 말았다. 다음 날 목포로 향하는 배 안에서 원혁이의 의미심장한 말이 기억난다. “완전 만신창이가 되었구만...”^^; 조금 깊게 생채기가 났던지 다리에 힘 주는 게 따끔거리는 것이 마뜩잖았다. 결국 자전거에 내렸다가 올랐다가 하기를 수 차례 하면서 제주 시가지에 힘겹게 입성했다. 나 때문에 행군이 늦어진 것은 참으로 미안한 일이었다.^^;



자전거를 탔다 내렸다를 반복하다보니 또 저만치 뒤쳐져서 혼자 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제주목 관아와 관덕정을 만나게 되었다. 경복궁을 대여섯 번 다녀 온 고궁 마니아로서 제주목 관아를 둘러보고 싶었지만, 나 때문에 많이 지체된 길이 죄스러워 그만 두고 힐끔 쳐다보는 것으로 만족했다. 관덕정은 복잡한 제주시내에 외롭게 자리잡고 있었다. 관덕정은 활터라고 하는데 그 이름 예기(禮記)에 나오는 '사이관덕(射以觀德)'이라는 말에서 비롯되었는데, 이는 ‘활 쏘는 것으로 그 사람의 덕을 본다'라는 의미로, ‘시합이나 내기를 해보면 그 사람의 성품을 알 수 있다'라는 뜻이다. 그 점에서 나는 점수를 별로 못할 것 같다. 내기나 시합, 뽑기 등에는 여간 소질이 없는 나는 아예 그것들을 피하기 때문이다. 관덕저의 편액(扁額)이 힘있는 필치로 눈길을 사로잡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명필로 이름을 날렸던 안평대군의 필치라고 한다. 그러나 관덕정에서 마냥 들뜨는 기분만을 느낄 수는 없었다.



그 까닭은 여기서 20세기 한국사 최대의 비극으로 손꼽히는 4.3 항쟁의 흔적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1947년 삼일절 날, 28주기 3.1 운동 기념식을 끝내고 해산하던 도민들을 향한 미군정의 총격으로 무고한 도민들이 살상되는 사건이 여기서 일어났다. 이 사건은 그 후 무차별 발포에 항의하는 전도적인 총파업으로 발전하고 이에 대한 미군정의 계속적인 탄압으로 급기야 다음해에 4.3 항쟁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는 곳이다. 최소 10% 이상의 도민들이 살상  되었다고 추정되는데도 가해자가 없는 이 기막힌 사건은 제주도의 마지막 여정을 찜찜하게 했다. 얼마전 정부가 민간인 살상을 국가 차원에서 공식 인정했다고는 하나 무엇 하나 속 시원히 밝혀진 것이 없는 것 같다. 하기사 현대사에 미스터리가 한 둘이 아니었지만은 앞으로 이 땅에 이런 일이 없으리라 확언할 수 있는 것도 그만큼 숱한 이들의 노고를 먹고 진보한 역사의 열매를 향유하는 뒷사람의 행복이다.



드디어 출발지의 제주 하이킹 본부에 도착했다. 이 때가 26일 오후 3시였고, 22일 오후 2시 반경에 출발해서 4박 5일간 달려온 쾌거였다. 아이슬란드 속담에 집에만 있는 아이는 어리석다고 했다. 이번 제주도 하이킹은 과연 나를 어리석음에서 구제해 주었을까? 아마도 나는 다시 게을러지고, 운동은 여전히 멀리할 것이다. 그러나 이 여행의 추억은 값지게 간직할 수 있을 것이다. 자전거도 거의 못타는 나를 데리고 다니느라 지루하게 기다렸을 친구들... 병승, 원혁, 세일, 병채... 모두들 미안했고 고마웠다. 친구들 덕분에 이런 제주도 완주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친구들 아니었으면 내가 감히 이런 일을 꿈이나 꿔볼 수 있었겠는가...



제주시내의 민박집에서 느긋한 휴식을 즐긴 우리는 다음날 바다를 건너 일상으로 복귀했다. 다시 무료한 일상으로 돌아가도 제주도의 그 뜨거웠던 여름햇살과 온 몸을 적셨던 굵은 땀방울들을 기억할 수 있기를... 인생만사 놓고 보면 하나하나 여행길이다. 그 여행길에서 함부로 좌절하지 않고 묵묵히 나아가는 내가 될 수 있을지는 여전히 두렵다. 6(^.^)9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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