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청에서 주관한 2006 문화유산 사진 및 답사후기 공모전에 출품한 졸작입니다. 솔직히 입선 말석이라도 될 줄 알았는데 똑 떨어졌어요. 문화재청을 살짝 구박하는 내용이 있어 미움을 산 거 같기도 하고, 답사기 콘셉트가 주최 측이 원하는 것과 좀 안 맞았던 거 같기도 합니다. 물론 이건 농담 삼아 해본 말이고, 다른 분들이 좋은 글을 많이 써주셔서 많이 배우는 좋은 계기가 되었습니다.^-^


<공양왕릉에서 고려를 추억하다>




1.
사육신묘 답사를 함께 갈 지인들을 찾다가 너는 왜 그리 무덤을 좋아하느냐는 핀잔을 들었다. 짬짬이 흥덕왕릉, 무령왕릉, 능산리 고분군, 석촌동 고분군, 경순왕릉, 고려 고종 홍릉과 고려 희종 석릉, 세종대왕릉, 의릉, 태릉, 동구릉, 홍유릉, 정몽주 선생묘, 최영 장군묘, 이율곡 선생묘, 정약용 선생묘 등을 답사하며 지관(地官)이 될 참이냐는 농담을 많이 들었다. 앞으로의 답사 계획에 경주 대릉원, 융건릉, 광해군묘, 조광조 선생묘, 김육 선생묘 등이 잡혀있는 것을 보면 앞으로도 그런 지청구에서 벗어나지 못할 듯싶다.


무령왕릉이나 세종대왕릉 같이 아주 유명해서 관광객이 몰리는 극소수 무덤을 제외하고는 능묘로 가는 길은 한적하다. 어지간한 산사들이 관광객들로 붐벼 번잡함을 느끼기 일쑤인 것보다 고즈넉함을 더 간직하고 있다. 덜 알려진 무덤을 찾는 길은 조금이라도 흐린 날에 찾았다가는 한적함을 넘어 스산함마저 느끼기 십상이다. 제대로 된 안내 표지판이 미비한 경우가 많은 선현의 유택을 부러 찾아가는 것은 모종의 세속적 꿍꿍이가 있음을 솔직히 고백한다. 우선 일세를 풍미했던 인물들도 결국 한줌 흙으로 돌아가는 무상함 앞에 짜릿한 평등의식을 느낀다. 아울러 현실 세계의 승리도 중요하지만 장구한 역사는 지킬 만한 가치를 지킨 사람을 마냥 외면하지 않음을 믿게 된다. 무덤 앞에서 내 삶을 좀 더 알차고 기품 있게 가꿀 것을 다짐한다. 잘 살면 얼마나 잘 살겠다고 구차하게 명리에 몸과 마음을 팔지 않기를 새삼 결심한다.


공양왕릉을 찾아가는 길은 고려 말의 충의지사를 추념하기 좋은 시간이다. 『논어』에 “날이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歲寒然後 知松栢之後凋也)”는 구절을 떠올려도 좋다. 살다보면 선택의 순간이 온다. 고만고만한 선택지라면 제 입맛에 따라 골라잡으면 그만이지만, 거대한 간극이 있는 경우에는 취사선택 앞에 하염없이 고독해진다. 맹자는 고뇌 끝에 이렇게 선언한다. “삶(生)도 원하는 것이고 의(義)도 원하는데 둘 다 취할 수 없다면 목숨을 버리고 의를 지키겠다.” 『맹자』 고자상편에 나오는 유명한 사생취의(捨生取義)다. “살 수 있는 방법이 있더라도 그것을 쓰지 않고,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지라도 피하지 않는 것은 삶보다 더 소중히 하는 것이 있고, 죽음보다도 더 싫어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라는 맹자의 외침을 실현한 여말 망국대부들의 충절에 옷깃을 여민다.


세상에 버릴 사람은 하나도 없지만 시세의 흐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늦게까지 제 자리를 지키는 한결같은 사람에게 더 애착이 가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강원도 영월에 있는 단종의 장릉(莊陵)에는 충의공 엄홍도의 정려각이 있다. 영월 호장이라는 미관말직의 엄홍도는 단종이 시해 당하자 시신을 수습해 선산에 장사 지냈다. 주위에서는 후환을 두려워하며 만류했으나 이를 뿌리치며 “의롭고 착한 일을 하다가 화를 당해도 나는 달게 받겠다(爲善被禍吾所甘心)”라고 의연히 말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엄홍도의 경우는 그나마 운이 좋은 편이다. 아무리 착한 일을 해도 사람들은 그리 오래 기억하지 않을지 모른다. 좋은 일을 해도 다른 속셈이 있는 것은 아니냐며 오해를 살지도 모른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내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사느냐이다. 부끄러울 치(恥)자 셋이면 천박함을 피한다. 스스로에게 던지는 “부끄럽지 않은가!”라는 질문 하나만으로도 꺼삐딴 리의 역겨움을 제법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2.
일전에 강화도 답사 준비를 할 때 남한에도 고려 왕릉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물론 고려 왕릉은 대부분 북한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강화 천도 시절의 왕릉 2기(희종 석릉, 고종 홍릉)와 소재가 확실치 않은 3기(우왕, 창왕, 공양왕릉)를 제외한 나머지 29기는 개성일대에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제까지 17기가 확인되었다고 하지만 국내에서 상세한 자료를 구하기는 어려워서 일반인들에게 양질의 정보가 제공되고 있지 못한 실정이다. 특히 공양왕릉은 경기도 고양시의 공양왕릉(사적 제191호)과 강원도 삼척의 공양왕릉(지방기념물 제71호)의 2기가 전해지고 있다. 문화재 당국은 세종실록의 기록을 근거로 고양시에 있는 공양왕릉을 공식 인정하고 있다. 여담이지만 능산리 고분군에는 의자왕과 태자 부여융의 가묘가 있다. 백제가 멸망한 직후 당나라에 포로로 끌려가 그곳에서 묻힌 두 사람의 원혼을 달래려는 애틋함이 고맙다. 비명횡사한 우왕과 창왕에 대한 조촐한 가묘라도 설치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공양왕릉은 고려의 마지막 제34대 왕인 공양왕과 순비 노씨의 쌍릉으로 망국의 임금의 처량함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공양왕의 비참한 최후와 고려의 멸망이 주는 비감이 그 어떤 감회들을 압도한다. 봉분에 입힌 떼가 듬성듬성 허전하다. 봉분 앞으로 비석과 석상이 각각 하나씩 서있고, 장명등, 석인 두 쌍, 석수 한 마리가 서있다. 비석과 석상, 장명등이 군색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본디 고졸한 맛을 자랑하는 고려의 석물이 무참하게 석인들마저 좀스러웠다. 유독 세월의 풍상을 더 겪은 것처럼 마모도 심하다. 그러나 공양왕릉의 참담함은 단지 석물이 조악하다거나 정자각 같은 제향시설이 없어서 뿐만 아니다. 그보다 왕릉 뒤로 보이는 수많은 무덤들이 공양왕릉을 찾은 답사객의 마음을 허탈하게 만든다. 조선시대에 행세깨나 했던 벼슬아치인지는 몰라도 감히 왕릉 바로 뒤에 번듯한 묘역을 차린 몰취향도 밉살스럽고 이를 방기한 조선왕실과 관료들의 무관심도 씁쓸하다.


볼품없는 능역이지만 무덤 주위에 세우는 석수가 맨 앞에 튀어나온 것이 이채로운데 봉분 둘레에 한 쌍씩 두는 보통의 능묘 형식과는 사뭇 다르다. 본래 봉분 옆에 두 마리가 마주보고 있던 것이 한 마리만 남았다가 능역을 보수하면서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고 한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공양왕이 데리고 다녔다는 삽살개가 형상화되어 능을 지키게 되었다고도 한다. 능역 아래에 있는 연못의 전설을 소개한 안내판에는 왕과 왕비가 연못에 몸을 던져 자결하고 홀로 남은 삽살개가 짖어 이 사실을 알렸다고 쓰여 있다. 사서에서는 강원도 삼척에서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능도 두 개이듯이 죽음도 두 장면이 남은 셈이다. 아마도 한 마리만 남게 된 석수를 놓고 고양지역 사람들이 공양왕을 추모하는 뜻에서 삽살개의 전설을 만들었겠지만 석수의 파격은 역설적이게도 공양왕릉에서 그나마 멋스런 부분이다.


『고려사』에는 이성계의 추대로 왕위에 오른 공양왕이 “이 무거운 책임을 지게 되니 어떻게 할 바를 모르겠다”며 눈물 흘리며 절규했다고 전한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는 조선 초기 역사가들의 입장이 반영되어 적잖은 왜곡이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특히 여말의 혼란과 패악을 집중 부각시킴으로써 조선 건국의 당위성을 돈독하게 하려 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 대표적인 것이 우창비왕설(禑昌非王說)로 우왕과 창왕을 신돈의 자식으로 폄하해 『고려사』 열전 반역편에 싣는 만행을 저지른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하지만 조선 초기 사가들의 기록은 너무 지나쳤다. 그만큼 오백 년간 지속된 왕조를 무너뜨리는 작업이 녹록지 않았다는 방증이다. 『고려사』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왜곡이 오죽했으면 세종대왕이 학자들에게 내린 유자(柚子)와 정과(正果)가 아깝다는 탄식을 할 정도였을까. 그러나 공양왕의 눈물만큼은 진실이었을 것이다. 기실 그 자리에 누가 있든 간에 망국의 대미를 장식하고 싶지는 않았으리라.


공양왕은 시종일관 나약하고 우유부단한 인물로 그려진다. 이성계 일파가 원하는 대로 사람을 뽑고 내치고 죽였다. 그 쓸모가 다하자 공양왕은 혼암하여 임금의 도리를 잃고 인심도 이미 떠나갔다는 이유로 폐위된다. 폐위 교지를 엎드려 들은 공양왕은 내가 본디 임금이 되고 싶지 않았는데 여러 신하들이 나를 강제로 왕으로 세웠다고 말하며 울었다고 한다. 그는 그 순간 자신이 재가했던 우왕과 창왕의 비참한 말로를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원주로 추방된 공양왕은 강원도 간성으로, 다시 삼척으로 멀리 유배되었다가 끝내 두 아들과 함께 목 졸려 죽는다. 『조선왕조실록』에 여러 신하들이 죽이기를 청하길 열두 번이나 하니 어쩔 수 없이 그 청을 따른다는 이성계의 변명이 가소롭다. 이런 번지르르한 말과는 달리 조선왕조가 정책적으로 왕씨들을 멸족하려 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성계육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제 아무리 권력이 달콤하고 대의명분이 또렷해도 함부로 살상해 깊은 원한을 남기지 않는 절제가 필요함을 담담히 말해준다.


3.
공양왕릉을 이리저리 살피며 이광철 의원의 2004년 문화재청 국정감사 자료를 실감했다. 이 의원이 내놓은 고려왕릉 보존관리 실태조사 보고서는 방치된 고려 왕릉의 실태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현재 남한에 있는 고려 왕릉급 무덤은 총 5기로 이들 모두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하지만 예산이 전무하거나 제대로 된 관리가 이뤄지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특히 고양 공양왕릉의 경우 2001년 크게 훼손되어 도굴을 당한 것으로 밝혀져 한바탕 난리가 났다. 도굴이라기보다는 보수공사가 잘못돼 단순 훼손된 것이 도굴 흔적처럼 보인 것이라고도 한다. 부장 품목에 대한 조사가 이뤄지지 않은 만큼 도굴 여부를 판단하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도굴 의혹 기사가 쏟아진 이후 관련 기사를 뒤적여 봤지만 추후에 어떤 결론이 났는지는 알 길이 없다. 어쩌면 문화유산 관리의 허술함보다 더 서글픈 것은 그 때 그 때 잠깐 관심을 갖다가 잊어버리는 우리들의 냄비근성이 아닐까 싶다. 사적으로 지정된 고분뿐만 아니라 보전의 필요성이 인정되는 고분군에 대한 보호 관리 대책 수립이 긴요하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엄청난 인적, 물적 자원을 요하는 일이라 1년 예산이 3,700억(2006년 기준) 내외인 문화재청이 감당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얼마 전 문화재청은 ‘조선시대의 왕릉과 원’ 53기에 대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으로 등재를 신청했다. 찾아가느라 애먹었던 강화지역의 고려 왕릉들도 강화문화권 정비사업에 포함되어 있다니 뒤늦게나마 다행이다. 이러한 의지를 살려 고분 전반에 대한 체계적인 관리를 수행해낼 수 있느냐 하는 문화적 역량 시험에 직면해 있다.


우리는 전통문화를 이야기할 때 대개 조선시대를 떠올린다. 아무래도 현대에서 가장 가까운 시기의 왕조이고, 관련 유적과 사료가 단연 많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지상 건축물의 대부분은 임진왜란 이후에 지어진 건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러나 종합적이고 입체적인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세우기 위해서는 조선으로 그치지 않는 의도적 노력이 필요하다. 특히 더 중점을 두어야 할 것이 고려시대가 아닐까 한다. 삼국시대를 비롯한 고대사는 『삼국유사』, 『삼국사기』에 대한 관심에 힘입어 대중적 기반을 넓혀가고 있는 추세다. 그러나 조선시대만큼의 깊이와 저력을 가졌던 고려시대의 문화는 잘 인지되지 않고 있다. 이는 현재 북한 지역인 개경 일대에 고려시대의 주요 문화유산이 있다 보니 접근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도 크다. 오는 유월에는 북한의 국보급 문화재들이 국내에 처음으로 공개된다. 고구려 고분에 대한 남북 공동 연구도 잰걸음을 하고 있다. 이처럼 남북 경제 교류만큼이나 문화 교류에도 눈을 돌려 그간 무심했던 고려 왕릉을 위시한 고려의 문화유산들이 많이 알려져 고려시대 역사를 탐구하고 문화를 음미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지금은 교착상태에 빠져있지만 머잖아 개성 관광이 현실화되면 꼭 한 번 개성을 답사하고 싶다. 왕건릉, 공민왕릉도 참배하고 선죽교의 돌도 쓰다듬어 보고 만월대에 걸터앉아 석양에 지내는 객(客) 행세도 해보고 싶다.


큰 산은 바라보기에 따라 다르다. 우리의 유구한 전통 또한 여러 겹의 속살을 가지고 있기에 다각적이고 섬세하게 바라보는 정성이 필요하다. 공양왕릉은 변변찮은 유형문화유산에 지나지 않을지 모르지만 능역을 감도는 그 처연한 서정은 많은 영감을 가져다준다. 문화유산은 국보나 보물 같은 지정문화재가 많은 것으로만 우열을 가름할 수 없다. 그 자리에 걸맞은 역사성과 시대정신을 담보해낼 수 있다면 제 나름의 흥미로운 역사의 숨결이 될 수 있다. 거창한 복원과 중건에만 현혹되지 말고 이런 식으로 영혼을 어루만지는 작은 문화유산들도 소중히 여기는 발상의 전환이 있어야겠다. 문화는 고매한 기교 이전에 낮고 약하고 가여운 것을 외면하지 않는 정신이다.


공양왕릉에서 고려의 영광과 황혼을 찬찬히 회상해본다. 늘 승전고만 울릴 수 없는 것이 인생이라면, 기왕 지더라도 떳떳하고 아름답게 패배하고 싶다. - [小鮮]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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