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복 교수님 고별 강연 동영상(오마이뉴스)

6월 8일 신영복 선생님이 올해로 17년째인 교수 생활을 마감하는 고별 강연을 가졌다. 운 좋게도 오마이뉴스에서 인터넷으로 생중계해주는 것을 챙겨볼 수 있었다. 선생님 강연의 핵심은 석과불식(碩果不食)이었다. 가장 위태롭고 절망만이 가득 찬 때가 바로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는 기회라는 말이다. 석과불식은 주역(周易)의 박괘(剝卦)의 효사(爻辭)를 풀이한 구절로 “씨 과실은 먹지 않는다”는 뜻이며, 왕필처럼 좀 더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씨 과실은 먹히지 않는다”는 뜻이라고 한다. 선생님께서 동서고금의 수많은 담론 중에서 가장 아끼는 희망의 언어다.


박괘는 단 한 개만 남아있다는 뜻으로 “세상에 나쁜 악이 만개해 있고 단 한 개의 가능성, 희망만이 가느다랗게 남아있는 상태”를 말한다. 이 마저도 언제 음효로 전락될지 모르는 곤경의 상황을 의미하는데 주역 64괘 가운데 제일 어려운 상황을 나타낸다고 한다. 한 괘(卦)를 이루는 각 효(爻)의 뜻을 설명한 글을 효사라고 한다. 박괘의 효사인 석과불식에서 석과(碩果)는 앙상한 나뭇가지에 마지막으로 매달린 과실이라는 뜻으로 절박하고 위태로운 상황을 상징한다. 이 절망의 상황에서 희망의 복(復)괘로 갈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선생님은 엽락(葉洛)과 분본(糞本)을 말씀하셨다.


엽락이분본(葉落而糞本), 잎이 떨어져 뿌리의 거름이 된다는 말이다. 엽락(葉落)은 잎사귀를 떨어야만 줄기가 선명하게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거품 속에 가려 있던 우리 사회의 경제적 구조, 정치적 주체성, 문화적 자존을 냉정하게 직시하자는 외침이다. 분본(糞本)은 잎사귀가 떨어져 뿌리를 거름하고 북돋우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 뿌리(本)는 곧 사람(人)을 말한다. 선생님은 가장 중요한 사람을 길러내는 것이 절망의 괘를 희망의 괘로 바꿀 수 있음을 역설하셨다. 아울러 잎사귀를 떨구고 뿌리를 거름하려면 겨울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 사회의 뿌리,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고민의 시간을 가질 것을 당부하셨다. 고독 속에서 제 자신, 제 둘레의 실상을 마주하는 건 그 얼마나 두렵고 아픈 일인가.


선생님은 차가운 머리만으로는 안 된다, 뜨거운 가슴까지 내려가야 한다는 말씀하셨다. “머리에서 가슴으로의 여행이 가장 먼 여행”이라는 선생님의 말씀이 애틋하다. “각박한 언어로 제시되면 안 되고 더 큰 인간적인 애정 속에서 융화될 때 진정한 담론”이 된 가르침을 마음에 새긴다. 선생님은 사회 변화를 쉽지 않을 것으로 본다고 고백(?)하셨다. 그러나 변화시키려는 과정 자체가 인간적이고 아름답고 보람 있으면 그것으로서 훌륭한 사회임을 강조하셨다. 꽃을 피우기보다 곳곳에 씨를 묻는 노력을 함께해나가기를 당부하셨다. 나는 과연 얼마나 사람의 가치를 온전하게 읽어내고 키워낼 수 있을까. 내 대책 없는 낙관주의는 사람과 세상에 대한 따스한 애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는지 반성해본다.


선생님은 어리석은 사람의 우직함 때문에 세상이 더 나아진다고 말씀하신다. 세상에 자기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자기에게 맞추려는 사람이 끝끝내 세상을 바꾼다는 것이다. 여기서의 어리석음은 단순한 무지는 물론 아닐 것이다. 어쩌면 이 땅의 구접스러움을 익히 알면서도 차마 구합(苟合, 구차하게 영합함)하지 않는 태도는 아닐까. 힘겹다는 것을 알면서도 냉소하지 않고 시시한 실천을 다하는 자세가 아닐까. 현란한 희망과 믿음의 수사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합리적이지 못할 때도 많고 정의를 외면하고 강자에 굴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나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무한의 신뢰를 보낼 만큼 너그럽지 못하다. 그러나 나는 불인인지심(不忍人之心)을 기대한다. 남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 남에게 잔학하게 굴지 못하는 마음은 사람에게 품는 희망의 고갱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신영복 선생님의 가르침대로 인성, 품성으로 내 자신을 완성하기 위해 노력할 것을 다짐하는 것으로 고별강연의 강연료를 대신할까 한다. 선생님이 늘 건승하시고 건필하시길 바란다. - [小鮮]


다음은 신영복 선생님의 고별 강연에서 사용된 사전원고 전문이다.


희망의 언어 석과불식(碩果不食)

곤경에 처한 사람에게 가장 절실한 언어가 바로 희망이라고 생각된다. 아마 그 다음이 인내일 것이다. 현재의 상황을 무작정 견디는 것이라고 한다면 희망은 견디기는 견디되 곤경의 건너편을 바라보는 것이다. 무작정 인내하기보다 희망을 잃지 않고 있는 경우가 훨씬 수월하다는 우리들의 일상적인 삶에서 수시로 확인된다. 절망이란 의미가 희망이 없다느 뜻이고 보면 어려움에 처한 사람에게 희망이란 참으로 소중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좀 더 생각해보면 희망도 희망 나름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들이 갖고 있는 희망이 단지 소망이나 위안에 불과한 적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겨울이 오면 봄도 멀지 않다"는 시구를 비롯하여 희망의 언어는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동서고금의 수많은 담론 중에서 내가 가장 아끼는 희망의 언어는 '석과불식'이다. 이 말은 '씨 과실은 먹지 않는다'는 뜻이다. 더욱 적극적인 의미로 해석하여 '씨 과실은 먹히지 않는다'는 뜻으로 읽기도 한다. 주역 박괘의 효사에 있는 구절이다. 씨 과실은 결코 먹히지 않는 법이며 씨 과실은 결코 사라지는 법이 없다. 이 말에서 나는 옛 사람의 지혜를 읽게 된다. 수많은 세월을 면면히 겪어오면서 터득한 옛사람들의 유장함을 떠올리게 된다.


나는 이 괘를 읽을 때마다 고향의 감나무를 생각한다. 장독대와 우물 옆에 서 있는 큰 감나무다. 무성한 낙엽을 죄다 떨구고 앙상한 가지로만 서 있는 초결울의 감나무는 들판의 전신주와 함께 겨울바람이 가장 먼저 달려드는 곳이기도 하다. 바야흐로 겨울의 입구에서 그 앙상한 가지로 서 있는 나무는 비극의 표상이며 절망의 상징이다. 그러나 그 앙상한 가지 끝에 달려 있는 빨간 감 한 개는 글자 그대로 희망이다. 그것은 먹는 것이거나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씨를 남기는 것이다. 나목의 가지 끝에서 빛나는 가장 크고 탐스런 씨 과실은 그것이 단 한 개에 불과하다 하더라도 희망이다. 그 속에 박혀있는 씨는 이듬해 봄에 새싹이 되어 땅을 밟고 일어서기 때문이다.


석과불식이 표상하는 이러한 정경이 더 없이 아름다운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희망의 언어를 이처럼 낭만적 그림으로 갖는다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낭만은 흔히 또 하나의 환상이라는 의구심을 떨쳐버리기 어렵다. 곤경에서 갖는 우리들의 희망이 단지 소망이나 위안에 그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의미로 이 정경을 읽어야 할 것인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희망은 우리들 스스로가 키워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밭을 일구고 씨를 심는 경작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WTO, IMF, FTA 라는 일련의 힘겨운 상황에서 나는 모든 것을 빼앗기고 잇는 박(剝)괘를 연상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진정한 희망을 갖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환상이나 소망이 아닌 진정한 희망을 키워내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이것이 우리들에게 주어진 당면한 과제라고 생각된다.


나는 무엇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은 앙상하게 드러난 나무의 뼈대를 직시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무성한 잎이 떨어지고 한파 속에 팔 벌리고 서있는 나목의 뼈대를 직시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거품이 걷히고 난 후의 우리 경제의 모습을 직시하는 일이다. 비단 경제구조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통틀어 돌이켜 보는 일이다. 그러한 역사를 살아온 우리들 스스로의자화상을 대면하는 일이다. 남의 돈을 빌려 살림을 꾸리고 자녀들을 내몰아 오로지 돈 벌어 오기만을 호령해 온 어른들의 모습이 우리의 자화상이 아니었는지 반성해야 할 것이다. 어떻게 하든 이 겨울을 넘기고 나면 다시 봄이 오겠지. 이것은 안이한 답습의 낡은 언어이며 결코 희망의 언어가 아니다. 희망은 새로운 땅에 싹트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희망은 새로운 땅을 일구는 작업에서부터 시작돼야 할 것이다. 동토에 쟁기를 박아 넣는 견고한 의지에서부터 시작돼야 할 것이다. 더 이상 패배할 수 없는 천근의 땅에 씨앗을 심는 각오여야 하기 때문이다.


산지박괘의 다음 괘는 '지뢰복' 괘다. 다섯 개의 음효가 위로 쌓여 있고 제일 밑바닥에 한개의 양효가 싹트고 있는 모양이 복 괘의 형상이다. 글자 그대로 광복이다. 씨 과실 속에 있던 씨앗이 땅 속에서 싹 트는 모습이다. 우리 사회의 가능성을 키워내는 것 이것이 절망의 괘에서 희망을 읽는 진정한 독법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앞으로 얼마나 많은 곤경을 견뎌야 할 지 모른다. 그럴수록 더욱 간절해지는 것이 희망의 언어다. 희망을 키워내는 실천의 방법이다.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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