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개업식 날 친절봉사 외쳐 대면서 맛도 좋더니
실컷 놀다가 개학식날 굳은 맹세 하더니
변하더군 흐지부지 사랑이 식듯이 별 가책도 없이
원래 뭐 그런 거 아니냐더군

- 이승환, 「첫날의 약속」 中


아마도 이승환의 노래는 정채봉 작가의 「첫마음」이라는 시에서 모티브를 얻은 듯싶다. “1월 1일 아침에 찬물로 세수하면서 먹은 첫마음으로/ 1년을 산다면/학교에 입학하여 새 책을 펼치던/ 영롱한 마음으로 공부를 한다면”으로 시작하는 이 시는 첫마음이 흔들릴 때 찬찬히 소리 내어 읽어볼만하다. 공익근무를 수행한지 딱 절반의 시간이 지난 오늘 이 시를 꺼내들었다. 이제 정상에서 맑은 공기를 쐬고 하산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남은 날들을 추슬러야겠다.


요근래 근무 관련한 감사 준비를 하면서 우리의 예비군 행정체계가 이렇게 꾸려져야 하는가 많은 의구심이 들었다. 그러나 일단은 방통처럼 밀린 일들을 처리하기로 했다. 삼국지연의에는 자신을 겨우 뇌양현 현령으로 내려 보낸 유비에게 삐친 방통이 고을을 다스리지는 않고 매일 술 먹고 노는 대목이 나온다. 유비가 이 소식을 듣고 장비와 손건을 감사관(?)으로 내려 보냈다. 장비가 놀고먹는 방통을 윽박지르자 방통은 태연히 말한다. “겨우 백리밖에 안되는 고을의 작은 시빗거리를 분별하는 게 무에 그리 어려운 일이겠소?” 그리고서는 반나절도 안 돼 백여일이나 밀렸던 일을 수월하게 처리해버린다. 장비가 감동하고 유비도 자신의 과오를 뉘우쳐 방통을 중용하게 되었다 뭐 이런 내용이다. 그래도 벼락치기라도 하는 사람이 낫다.


구청으로 와서 처음 업무를 배울 때 선임이 없어서 여기저기 물어서 조금씩 배워나갔던 기억이 난다. 잘 모른다는 것이 얼마나 서러운 가를 절절이 체험하는 값진 경험이기는 했지만 당시에는 어찌나 곤혹스러웠던가. 나는 “아는 것이 힘이다”가 대개는 옳고 바람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내 주업무인 예비군, 민방위 행정에 대해 적잖이 익숙해졌지만 역시나 아직도 낯설다. 민방위 업무는 내가 좀 간소화해도 무방한 재량의 여지가 좀 있지만 예비군 업무의 경우 개인이 사사로이 건드리지 못하는 번문욕례(繁文縟禮)가 너무 많다. 하긴 이런 번문욕례가 고용을 창출하는 효과가 있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니 구박하려는 마음이 약해진다.^^; 최근에 전산화를 통해 업무 통합을 하려고 애쓰고는 있다지만 중간에 낀 아랫것들은 바뀌는 시스템에 적응하느라 고생일 뿐이다. 그 방향이 옳다고 보기에 조금 번거로움을 감수하고는 있지만 얼른 정착이 되어 행정 간소화에 이바지할 수 있기를 바란다.


예비군 제도가 현역군인 다음으로 국가안보의 축을 담당하고 있다는 선의를 인정하더라도 예비군 제도는 국민의 부담을 덜어주는 방향으로 개편하되 좀 더 양질의 작전수행력과 동원체계를 갖출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정부여당은 당정협의를 통해 2020년까지 단계적으로 예비군 복무 기간을 전역 후 8년에서 5년으로, 훈련 기간을 6년에서 4년으로 줄이기로 합의한 바 있다. 세부적인 단축안까지 내놓은 것은 아니지만 국민의 부담을 덜기 위해 노력한다는 점은 평가할 만 하다. 그러나 대한민국 국민이 된 짐을 덜기가 말처럼 쉬운 일인가. 예비군 복무기간 단축이 포함된 국방개혁기본법은 국회에 계류 중이다. 어디 그 뿐인가, 민방위 편성 연령을 40세로 인하하고, 교육시간을 4시간으로 축소해 자영업자의 부담을 줄이는 민방위기본법도 마찬가지로 상정만 되어 있고 처리가 안 되고 있다. 논어의 눌언민행(訥言敏行)이 떠오른다. 말은 좀 어눌해도 행동은 민첩하게 하는 대표자들이 좀 더 많아져야 우리 사회에 만연한 대리인비용을 좀 줄일 수 있으리라.


여하간 내가 맡고 있는 일의 범위나 폭이 좁은 편이다 보니 매너리즘에 빠지기 쉽다. 업무일지도 매일 퇴근 30분 전에 꼬박꼬박 뽑던 것이 퇴근 5분 전에 부랴부랴 뽑거나, 그마저도 못해서 다음 날로 미루기까지 한다. 공문 처리도 당일 처리 원칙이 무너지고 급한 게 아니라면 두어 개 모일 때까지 놔두기 일쑤다. 작년에는 혼자서도 거뜬히 들던 통합방위 상황판이 요즘에는 혼자 들기가 힘에 부쳐 둘이서 같이 들어야만 한다. 더군다나 매일 8시 30분까지 출근하던 것도 조금씩 늦춰져 이제는 40~45분에 간신히 출근하고 있다. 매일 하던 사무실 청소도 점점 간소화되고 있다. 의식하지 않아도 내 몸과 마음이 하산할 준비를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짬이란 칸트의 시계만큼이나 정확하다.


연애감정을 유발하는 화학물질에 유효기간이 있다는 건 꽤 알려진 연구결과다. 사랑의 감정을 일으키는 호르몬의 지속시간을 이탈리아 파비아대 엔조 에마누엘레 박사팀은 6개월, 미국 코넬대 신디아 하잔 교수팀은 18~30개월, 이탈리아 피사대 연구팀은 2년 정도라고 발표했다. 사랑의 호르몬이 사라진 자리에 귀여운 감정을 느끼게 하는 옥시토신이라는 호르몬이 채워진다고도 하지만 사랑의 가슴 뜀마저 항체가 생긴다는 건 서글픈 일이다. 권태란 참 무시무시한 녀석이다. “사랑에도 유효기간이 있다면 만년으로 하고 싶다”는 중경삼림의 대사는 생리적 유효기간을 넘어서기 위한 의지의 표출일까.


적어도 세금은 축내는 녀석이 되지 말자고 결심하며 근무를 시작했다. 조금 지나고 나서는 기왕이면 내가 받는 세금의 열배 값은 하자고 호기롭게 말했다.^^; 그러나 소집해제의 그 날까지 세금의 열배 값을 해내기란 생각보다 무척 어려운 일이다. 사람이 늘 한결같고자 하는 건 과욕이라는 중학교 2학년 시절 담임선생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한결같은 삶에 대한 강박관념에 시달리던 내게 그 말이 얼마나 위안이 되었던가. 그러나 그 말뜻은 의욕적으로 품었던 초심을 함부로 내팽개치라는 뜻은 아니다. 마음이 흐트러질 때는 언제든 처음으로 돌아갈 수 있는 여유를 가꾸라는 준엄한 가르침이다.


권태가 도둑처럼 찾아와 내가 품던 겸양과 열정을 흔들 때 다시금 내 자신을 다잡는 견결한 자세를 욕심내보자. 자동차 사고는 초보운전일 때보다 제법 운전이 익숙할 때 일어나게 마련이듯이 모든 화근은 이쯤 하면 되었다 싶을 때 시작된다. 언제나 처음처럼 살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첫마음을 건사해내는 하루하루가 모인다는 것은 기쁜 일이다. 처음처럼 살 수 있는 사람은 기본이 탄탄하기 때문이다. 그 기본은 진짜 실력에서 나온다. 변치 않기 위해 부단한 자기혁신을 마다하지 말자.


처음처럼 소주가 예전 山 소주의 시장점유율을 넘어 선전하고 있는 모양이다. 수도권 소주 시장 독점 구도를 걱정하던 나로서는 반가운 일이다. 앞으로 처음처럼을 마실 때만이라도 내 형형한 눈망울을 소중히 여기겠다는 다짐을 해봐야겠다. 앞으로 남은 절반의 공익근무 기간 동안 더 깊어지고 넓어지도록 노력하자. 근데 2007년 8월이 오기는 하는 걸까?^^; - [小鮮]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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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민 2006.07.10 18:33 Address Modify/Delete Reply

    제가 처음처럼으로 바꾼 게 결정적이었다는 설이 있죠^^

  2. 익구 2006.07.13 16:00 Address Modify/Delete Reply

    안 그래도 처음처럼이 시장점유율 두 자릿수를 돌파한 것은 선생님의 변심(?)이 크게 작용하지 않았나 강하게 추측하고 있던 참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