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3월 28일에 처음 썼고, 2012년 10월 20일에 손질했으며, 2013년 8월 4일 전면 수정을 한 잡글입니다. 결국 8년에 걸친 횡설수설이 되었습니다. 내 이럴 줄 알았어요.ㅜㅜ)
1. 묘호, 시호, 능호가 없는 광해
광해는 땅을 가진 이들에게만 조세를 부과하고,
제 백성을 살리려 명과 맞선
단 하나의 조선의 왕이다.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의 마지막 장면에 삽입된 문구다. 조선 제15대 임금 광해군은 종묘에 들어가지 못하여 묘호(廟號), 시호(諡號)를 받지 못하고, 능호(陵號)도 없이 왕자 신분으로 취급되었다. 아마 이 영화의 제목 역시 광해군이 아닌 ‘광해’라고 표기함으로써 왕자가 아닌 왕으로 대접하겠다는 의도가 있지 않을까 추측한다.
나는 광해군에게 사사로이 묘호나 시호, 능호를 올리고 싶다는 유혹을 받을 때가 있다. 이런 탓에 어떤 분들은 광해의 光을 따서 광종(光宗)이라 부르기도 하고, 선혜법(宣惠法)에서 연유한 탓인지 혜종(惠宗)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모양이다. 둘 다 괜찮은 묘호라고 생각한다. 나는 성종(聖宗)도 생각해봤다. 이민홍 선생님의 풀이에 따르면 聖은 선정을 펴고 부세를 경감시키며 빈객을 예법에 맞게 잘 대접했던 지도자라는 의미의 시자(諡字)라고 한다. 본래 묘호가 다소 미화하는 성격이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뭐든 좋을 듯싶다(능양군이 仁祖라고 묘호를 받은 것을 상기하자). 비교적 까다로운 시호법과는 달리 좀 더 자유롭게 짓는 경향이 있는 능호는 지릉(智陵)이 어떨까 싶다. 대체적으로 높이 평가 받는 균형외교에 대한 지혜를 기리는 뜻에서 말이다.
임진왜란을 맞아 구차하게 도망이나 다니다가 여차하면 명나라 영토로 갈 궁리나 했으면서, 분조(分朝)를 통해 전장을 지휘했던 세자 광해군을 시기하여 후계 구도를 불안정하게 했던 선조는 영 신통치 않다. 또한 쿠데타를 통해 용상을 차지해놓고는 병자호란에서 굴욕을 당하고, 소현세자 부부를 억울한 죽음으로 몰아넣은 인조는 용렬한 암군이었다(이하 왕자 시절 봉작인 능양군(綾陽君)이라고 칭한다). 변변치 못한 임금들이 나라를 다시 세웠다는 의미에서 조(祖)자를 참람하게 쓰는데 광해군이 앞뒤 임금들에 비해 이렇게 크게 모자라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끝내 복권되지 않은 것이 안타까운 마음에서 일단 이 잡글에서는 그냥 대왕으로 칭하겠다.
2013. 4. 13.에 답사한 대왕의 능
2. “땅을 가진 이들에게만 조세를 부과하고”
영화에서는 대왕이 대동법을 시행한 것에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하지만 오항녕 선생님을 위시한 여러 학자들이 대동법이 제대로 시행되지 못한 점을 지적한다. 오 선생님은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너머북스, 2012)에서 광해군과 핵심 대북세력이 대동법에 반대했다고 주장한다. 대동법이 경기도에 시행된 지 1년도 안 되어 혁파 여부가 논의되었을 때 대왕은 마지못해 대동법을 존속시켰다. 대동법을 임시방편적인 조치로 여긴 발언도 보인다.
왕이 이르기를,
“선혜청 제도는 오래도록 시행할 만한 것인가? 또 하나씩 고쳐가는 일이 어떻겠는가. 전결(田結)을 기준하여 미곡으로 내게 하는 일을 영원히 시행하게 할 수는 없을 듯하다(宣惠廳, 乃久行之事乎? 且一一更張, 於事何如? 田結出米, 恐不得久遠行之也).”
광해군일기 정초본(정족산본) 35권, 2년(1610 경술 / 명 만력(萬曆) 38년) 11월 18일(기미) 2번째 기사
대왕이 대동법 확대 시행에 소극적이었고, 대동법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것은 상당 부분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대규모 궁궐 영건 공사와 수취 제도 개혁을 통한 민생 안정을 함께 성취하기가 어려웠다고 본다. 대동법이라는 제도를 처음 도입한 것은 분명히 의의가 있지만 굉장히 제한적으로 실시했다는 점에서 아래의 비판을 살펴봐야 한다.
광해군대의 선혜법은 경기에서만 실시되었다. 또 처음부터 전국적으로 실시하려는 의도도 없었다. 일부 논자들의 확대 실시 요구는 산발적이었고, 당위적 차원에 머물렀다. 무엇보다 광해군이 이 법의 확대에 반대했다. 오늘날, 대동법 실시는 광해군의 업적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광해군은 대동법에 대해서 시종일관 부정적이었다.
- 이정철, 『대동법』, 역사비평사, 2010, 278쪽.
대동법을 방납인들이 다들 원수처럼 생각했다는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방납의 폐단에서 기득권을 누리던 계층의 극렬한 저항과 대왕 자신의 인식 부족으로 대동법이 반쪽짜리가 되었다. 다만, 광해군 즉위년(1608)에서 숙종 34년(1708년)에 이르기까지 대동법이 전국적으로 확대되는 데는 100년이 걸렸던 것을 보면 대왕 시절에 대동법을 전면 시행하지 않았다는 비판은 과하다. 뒤를 이은 능양군 시절에도 강원도 지방에 실시하였을 뿐 대동법 확대는 지지부진하였고, 본격적으로 대동법이 정착되는 시기는 효종 대부터이다. 대왕은 즉위 초기에 대동법을 크게 반대하지 않은 것으로도 역사적 기여를 했다. 그만큼 대동법은 발상의 전환을 요하는 혁신적인 조치였다.
3. “제 백성을 살리려 명과 맞선”
임진왜란 때 남원의 의병장이었던 조경남 선생의 『난중잡록』을 보면 당시 명나라 병사가 게워낸 음식을 서로 먹기 위해 굶주린 백성들이 달려들었다고 하는데 상상만 해도 참으로 참담하다. 심지어 『선조실록』에는 “길바닥에 굶어 죽은 사람의 시신을 베어 먹어 완전히 살이 붙어 있는 것이 하나도 없을 뿐 아니라, 혹은 산 사람을 도살하여 장(腸)과 위(胃), 뇌의 골도 함께 씹어 먹는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이런 참화를 겪었으니 조선왕조가 이때 망했어야 한다는 의견도 적잖이 들린다. 여하간 나라가 망하지 않은 덕분에(?) 세자 광해군은 왕위에 오르게 된다.
나는 대왕이 세자 시절 27개월 간 전국을 누비며 전쟁을 체험한 것이 그의 외교관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배기찬 전 청와대 안보실 동북아비서관은 대왕의 외교 노선을 투항주의라고 비판한다. 군대를 정비하려는 노력을 소홀히 하고 여차하면 후금에게 항복하고 조공을 바치면 된다고 안일하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물론 배 전 비서관은 능양군과 서인 정권의 모험주의가 투항주의보다 훨씬 나쁜 결과를 낳았다고 지적하고 있지만 말이다.
왕족이면서 전쟁터를 직접 체험한 몇 안 되는 인물이었던 대왕이 전쟁에 대한 공포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전쟁은 최대한 피해야하는 최후의 수단이라는 강박관념이 있었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또한 어떤 면에서는 왜군보다 수탈이 심했던 명군의 폐해나 명나라 조정의 내정 간섭을 겪은 대왕으로서는 명에 대한 악감정도 품었음직하다. 여하간 대왕에게서는 조선의 임금들에게서 듣기 힘든 말들이 쏟아진다.
“오랑캐로 인한 환란이 천지가 생긴 이래 어느 시대인들 없었겠는가. 주나라 태왕·문왕의 성덕(聖德)과 한 고조, 당 태종의 웅무(雄武)로서도 다 때에 따라 적당하게 처리할 방도를 썼으니, 이는 실로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계책에서 나온 것이며 당시에 기롱하는 의논이 있었다는 말은 들지 못하였다. 따라서 나라가 이에 의지하여 오래도록 평온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오늘날은 어떤 괴이한 작자들이 시의에 맞게 변통할 줄은 모르고 한갓 썩어빠진 논의만을 하여 우리나라의 일을 망치려 하고 있다. 그런데도 비변사의 여러 신하들은 이 융통성 없고 오활한 의논이 가당치 않다는 것은 살피지 않고 다 입을 다물고 수수방관하여 우물거리고 있으니, 나라를 위해 몸을 바쳐야 하는 신하로서 어찌 이와 같을 수 있단 말인가.”
- 광해군일기 정초본(정족산본) 172권, 13년(1621 신유 / 명 천계(天啓) 1년) 12월 5일(임신) 3번째 기사
“우리 나라의 병력이 과연 요양(遼陽)의 병력만 하겠는가. 답서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반드시 대적할 수 없다는 것을 똑똑히 알면서 한갓 한때의 사악한 논의만을 무서워하니 종사를 어디에 두려고 하는 것인가. 이것은 그저 자기의 몸만을 사랑하고 나라의 위망은 돌아보지 않는 태도이다. 또한 위에서 기미책(羈縻策)을 굳이 고집하도록 하려는 계책은 곧 뒷날 임금에게 모든 죄를 돌리려는 뜻이다. 옛날에 대신이 과연 이렇게 하였던가. 이제 만일 관문을 폐쇄하고 사신을 거절한다면 준절한 논의를 편 사람이 먼저 내려가서 적을 방어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오늘내일 하다가는 다만 나라만 망하고 말 것이다. 비변사의 여러 당상관의 의견을 모아 오늘 중으로 빨리 좋은 쪽으로 잘 처리하도록 하라.”
- 광해군일기 정초본(정족산본) 172권, 13년(1621 신유 / 명 천계(天啓) 1년) 12월 26일(계사) 2번째 기사
이런 발언들에 대한 재음미가 최근 들어 대왕의 국제정세 인식과 균형외교가 조명을 받아 외교적 치적은 인정받는 것 같다. 광해군 말년에 대왕은 명나라 황제의 칙서를 공개적으로 거부하면서도 후금에는 역관을 보냈다. 신료들은 그런 광해군의 왕명을 노골적으로 거부하며 수시로 파업을 일삼았다. 어찌됐든 임진왜란 당시에 조선을 도왔던 명에 대한 의리는 함부로 파기할 수 없다는 점을 충분히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사대부들의 생각은 참으로 완고했다.
사대부들의 마음을 잃었던 것은 대왕이 실각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존명의리(尊明義理) 이데올로기에 맞서기에는 소수파 정권의 대왕으로서는 여러모로 한계가 있었다. 가령 정통성이 넘쳐흐르는 숙종 같은 왕이 대왕의 외교노선을 추구했다면 한층 더 추동력을 얻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현실에서는 숙종은 존명의리 이데올로기를 심화시키기 위해 창덕궁 깊숙한 곳에 명나라의 은혜를 기리는 대보단(大報壇)일 지은 인물이지만 말이다.
이권우 선생은 프레시안에서 개최한 도서 좌담회에서 “내치에 기반을 두지 않은 외치가 가능할까요?”라고 반문하였다. 물론 내치와 외치가 상호 조화를 이루면 가장 이상적이겠지만 현실에서는 내치가 볼만했던 경우와 외치에 치적을 남긴 경우가 분리되는 경우가 적잖은 듯싶다. 더욱이 전후 복구가 한창인 시점에서 외세의 침략을 관리하는 것 역시 내치의 일환이라고 볼 여지도 있다. 대왕이 백성들의 살림살이를 나아지게 하기 위한 제도적 개혁이 속도를 내지 못했지만 더 악화시켰다고 단정하기는 어렵고, 여론 주도층인 사대부들이 사대주의를 포기할 생각이 없어서 왕과 신하가 손발이 맞지 않았던 것을 온전히 대왕의 탓으로 돌리기도 어렵다는 점에서 대왕의 외교는 여전히 빛을 발한다고 본다.
대왕의 실각 이후 능양군과 쿠데타 세력은 대왕의 외교정책을 강력히 비난하기는 했지만, 이미 후금을 오랑캐라고 매도하며 적대할 단계가 아니었고 제 나름의 유화책을 마련한 흔적도 보인다. 국제 정세는 오히려 대왕 시절보다 더욱 후금(청)으로 기울어지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능양군은 더욱 섬세한 균형외교를 꾀하거나 방어전쟁을 준비하였어야 했다. 전란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능양군과 쿠데타 세력의 대응은 참담한 수준이었고, 임진왜란보다 더 많은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가서 고초를 겪었다. 청의 침략전쟁을 일차적으로 비판하한 뒤에는 능양군과 쿠데타 세력에 대한 역사적 책임을 엄중하게 물어야 한다.
4. 대왕의 실책에 대한 고찰
물론 대왕이 강홍립에게 “정세를 잘 살펴 행동하라(觀形向背)”고 명했던 것이 내치에도 발휘되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대왕이 마냥 내치에 무능했다고 보기도 어렵다. 흔히 회자되는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폐한 폐모살제(廢母殺弟)는 조선 왕가의 피비린내 나는 변고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후계자 책봉에 관련해 선조의 미온적이었던 태도, 임진왜란 당시 원조를 빌미로 조선의 왕위 계승에 대해서도 딴죽을 걸던 명나라의 자세도 상당 부분 대왕의 입지를 불안하게 만드는 요인이었다.
게다가 대왕의 폐위 후 대왕을 죽일 것을 끊임없이 요구한 인목대비는 모자관계라기보다는 정치적 라이벌에 가깝다고 봐야 한다. 조선사에서 계비가 아들이나 며느리보다 나이가 많은 경우가 이따금 있다. 인목왕후는 대왕보다 9세 연하고, 정조의 할머니인 정순왕후는 정조보다 7세 연하다. 아무리 종법(宗法) 질서가 중한 시절이어서 오늘날과는 나이 관념이 다르다고는 하지만 이건 좀 민망한 일이다. 선조가 적장자를 갈구했던 나머지 후계자 선정에 대한 분명한 교통정리를 하지 못한 바람에 대왕은 정통성의 한계에 시달렸고 콩가루 집안이 된 듯싶어 안타깝다.
대왕이 대북파와 코드 정치를 했다고 비판도 일면 수긍할 만하다. 결과적으로 이에 불만을 품은 서인 세력이 쿠데타를 일으켰으니 말이다. 그러나 탕평책을 부르짖었던 영․정조 시대에도 노론 벽파가 주도적 위치에서 정사를 좌지우지했듯이 당쟁이 있던 대부분의 시기에 코드 인사는 그치지 않았다. 이런 면에서 대왕의 인재풀이 협소했던 측면이 부각되기는 하지만 폐위될 만큼 인사를 망쳤다고 보기는 조심스럽다. 대북파는 인조 쿠데타 이후 서인의 극심한 탄압으로 완전히 정계에서 제거되어 버렸다. 이는 남인이 잠깐의 집권기를 제외하고는 만년 야당에 허구한 날 옥사를 치렀으면서도 명맥이 이어진 것과 다른 점이다. 서인의 쿠데타가 얼마나 정통성이 허약했는지를 방증하는 것은 아닐까.
또 다른 실정의 이유로 궁궐 영건에 집착한 것이 많이 거론된다. 그러나 선조의 무능으로 궁궐이 잿더미가 된 것을 다음 왕이 서둘러 재건하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당시의 사고로는 궁궐 중수와 창건이 국가의 위신을 세우는 사업이었음도 부인하기 힘들다. 다만, 왕권강화를 한답시고 무리해서 필요 이상으로 궁궐을 지으려 한 것은 아쉽다.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진 민생을 누구보다 더 잘 알 분이 저지른 실책이라 더욱 따갑다.
대왕 재위 중에 창덕궁, 창경궁, 경운궁(덕수궁), 경덕궁(경희궁), 인경궁, 자수궁에 대한 공사가 계속되었다. 대왕은 창덕궁을 지으며 즉위하여, 인경궁을 짓다가 폐위된 셈이다. 광해군 대 지어진 건축물 중 현존하는 궁궐 건축으로는 창덕궁 내 돈화문, 선정전, 창경궁 내 홍화문, 명정문, 명정전, 경희궁 내 흥화문, 숭정전 등이 있다. 이 중에서 창덕궁 선정전은 인경궁 광정전을 옮겨 지은 것인데 광해군 대 건축물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는 모양이다.
나는 광해군의 궁궐 영건을 마냥 부정적으로만 볼 수 없다고 판단한다.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건축기술이 상당 부분 퇴보한 시점에서 대왕이 직접 궁궐 중건을 챙김으로써 건축 기술을 다시금 가다듬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넉넉하게 평가할 만하다. 가령 중국에서만 사용하던 황기와를 사용할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고, 전란 중에 단절된 청기와 제작기술의 복원에도 힘써서 인경궁의 주요 전각에는 청기와를 씌웠다. 그런데 그 후 청기와는 다시 전승되지 못하고 다시금 단절된 것으로 평가된다. 이러한 측면에 비추어 볼 때, 대왕의 무리한 토목공사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건축기술의 복원에 대한 업적도 살펴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볼 수 있는 우리 궁궐 전각들의 상당수가 대왕의 공인 것을 감안하면 후손들 입장에서는 고맙게 생각할 여지가 적잖다.
5. 패자의 역사
능양군 이종(李倧)의 쿠데타 이후 대왕의 북인 세력이 사실상 절멸해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대왕이 조선시대 내내 혼군(渾君)이니 폐주(廢主)라고 불리며 종묘에 모셔지지도 않을 만큼 무도하지는 않았다고 본다. 왕위에 있던 시간보다 더 오랜 기간을 유배지를 전전하며 아들과 며느리, 부인을 앞서 보내야할 만큼 죄악이 깊다고 보지는 않는다. 적어도 평균은 되는 임금이었다. 참고로 대왕은 영조, 태조, 고종 다음으로 장수한 임금이다.
패자에게 가혹한 평가를 내리는 것은 쉬운 일이다. 라이벌에게 옹색한 평가를 내리는 것도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패자와 라이벌을 존중하며 좋은 점을 배우는 것은 어색한 만큼 의미 있는 작업이다. 승자의 양지만을 좇기보다 과거의 패자에게서 가슴 시린 영감을 얻고, 현재의 라이벌에게서 새로운 안목을 배워보자. 패자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라이벌의 장점마저 취할 수 있을 것이다.
대왕의 외교에서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우리가 평화와 번영을 누리기 위해서는 기민한 전략을 세우고 치열한 노력을 기울여야함을 배울 수 있었다. 무엇이 국익을 지키는 것인지에 대한 좋은 귀감이 되고 있다. 또한 소수파가 집행권을 어떻게 섬세하게 행사하여야 하는지에 대한 교훈도 남겨준다. 대왕이 던진 화두를 소중히 궁리하면서 그에 대한 부당한 평가절하도 걷어낼 필요가 있다. 하늘은 편애하지 않지만 나는 그를 조금 편애하고 싶다. 어질지 못한 것은 내 평생의 부끄러움이나 모질지 못한 것은 내 아름다운 약점인지도 모르겠다. - [無棄]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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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철, 『대동법』, 역사비평사,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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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승범, 「광해군대 말엽(1621~1622) 외교노선 논쟁의 실제와 그 성격」, 『역사학보』 제193집, 역사학회, 2007, 1-37쪽
손신영, 「光海君代 官闕營建 再考」, 『건축역사연구』 33호, 한국불교미술사학회(한국미술사연구소), 2009, 267-292쪽
오수창, 「오해 속 병자호란, 시대적 한계 앞의 인조」, 『내일을 여는 역사』 26호, 내일을 여는 역사, 2006. 12, 33-45쪽
오종록, 「광해군 시대의 교훈」, 『내일을 여는 역사』 제5호, 내일을 여는 역사, 2001, 103-114쪽
지두환, 「宣組.光海君代 大同法 論議」, 『한국학논총』 제19집,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1997, 51-71쪽
한명기, 「광해군(光海君)-외교의 ‘빛’과 내정의 ‘그림자’-」, 『한국사 시민강좌』 제31집, 일조각, 2002. 8, 62-78쪽
홍석주, 박언곤, 「光海君 代의 宮闕 營建에 관한 연구」, 『건축역사연구』 제8권 4호(통권 21호), 한국건축역사학회, 1999, 25-38쪽
조선에서 후궁을 왕후로 추존한 사례는 광해군이 유일하다(현덕왕후는 문종이 세자였을 때 후궁이었지만 이미 문종의 유일한 부인이었기 때문에 엄연히 정비가 따로 존재했던 공빈 김씨와는 사정이 다르다). 광해군은 생모인 공빈 김씨를 공성왕후(恭聖王后)로 추존하고 그녀의 무덤을 성릉(成陵)으로 격상하였고, 말년에 어머니의 무덤 발치에 묻어 달라고 유언했다. 능양군의 쿠데타로 대왕이 폐위되자 공성왕후는 공빈 김씨로, 성릉은 성묘로 격하되었다. 왕릉급으로 조성된 석물을 철거하라는 명이 내려졌으나 다행히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공성왕후의 화려한 성릉과 대왕의 초라한 능과의 부조화가 애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