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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1.04 병풍과 개인주의
  2. 2003.08.05 양심 있는 개인주의자 - 장자를 읽고

병풍과 개인주의

잡록 2008. 1. 4. 03:45 |

외우(畏友) 박영선님의 미니홈피를 갔다가 술자리에 한번 불참한 것으로도 타인에게 무한한 서운함을 주는 자의 고독을 엿봤다. 각종 모임이 잦았던 영선님은 머릿수 채우기용 병풍 역할을 계속 해야 할지를 고민하셨다. 문득 존경하는 인호형께서 일전에 들려주신 말씀이 생각났다. 언젠가부터 당연히 와 있어야 하는 사람이 되면, 오라고 챙겨주는 사람이 없어지게 되는 역설. 조연도 아닌 하나의 배경이 되어서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가 보이지 않아도 어색하지 않은 존재가 된다는 절절한 경험담을 곱씹을 때마다 가슴을 친다. 열심히 끼다보면 안 끼어있게 되고 관객석만이 덩그러니 남겨진 그 감추기 힘든 허망함이랄까. 이건 대학의 과반 활동에 그치기보다는 사람살이의 한 정형화된 주기를 보여주는 듯싶다.


요즘에 내가 몸담은 대학교 과반에서 반 활동이 앙상해졌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해법을 찾으려면 원인을 알아야 하는데 문제의 원인으로 개인주의의 심화를 드는 경우가 많아서 좀 당혹스러웠다. 개인주의는 집단주의에 대한 반대, 이타주의에 대한 반대라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그런데 이타주의에 대한 반대를 일컫는 말로 이기주의나 자기본위와 같은 말들이 있다. 그래서 칼 포퍼는 개인주의를 집단주의의 반대라는 의미로만 한정시켜 사용하겠다고 개념 정의하기도 했다. 포퍼는 플라톤이 이타주의를 집단주의와 동일시하고, 개인주의를 이기주의와 동일시했다고 비판했다. 이기적 개인주의와 이타적 집단주의라는 두 가지 선택지만 놓고 고르라고 윽박지르는 잘못을 저질렀다는 이유다. 철학자 김용석 선생님은 개인주의를 “'나'라는 개인만 중시하는 것이 아니라, 나, 너, 그, 그녀 등 모든 개인을 중요시한다. 즉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의 가치와 존엄 그리고 권리를 전제하는 것”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이기주의에는 자기 존중밖에 없다면, 개인주의에는 이와 더불어 타인에 대한 배려가 있다는 언설이 솔깃하다.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가르는 관건은 나만 생각할 것인가, 나를 포함한 모든 개인을 생각할 것인가에 있다는 주장에 거개 동감한다. 이렇게 개념 정의를 하고 나면 개인주의는 도피처가 아니라 지향점의 의미가 강해진다. 나는 개인주의는 핑계가 아니라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주장의 논거가 개인주의에 대한 개념 정의에 크게 기대고 있는 관계로 순환논증의 오류를 피하기 힘들다. 스스로 주장하려는 바를 자기 주장의 근거로 삼아버렸다고 볼 여지가 많기 때문이다. 나는 다만 개인주의가 속죄양이 되어 쉬운 변명거리로 여겨지는 세태가 못마땅해서 개인주의에 대한 내 개념 정의를 말해봤을 따름이다.


선후배 관계가 데면데면해진 것이 어찌 개인주의 탓이겠는가. 우애보다는 경쟁이 더 실용적인 사회, 대학교 1학년 때부터 학점을 챙기는 게 미덕인 시대에 우르르 몰려서 술이나 마실 짬이 어디 있으며, 후배가 연락을 안 한다고 한가로이 투덜거리는 선배는 얼마나 가여운가(반어법임). 나는 극작가 배삼식 선생님의 <제갈량의 오만>이라는 칼럼을 읽은 이태 전부터 틈틈이 후배들이 덜 유능할 때, 적당히 무능할 때 부담 없이 다짐을 남발하고, 허영심에 들떠 자기 자신을 과대평가했으면 좋겠다고 주절거린다. 해야만 하는 일보다 하고 싶은 일에 좀 더 손길을 보내고, 좋아하는 책도 많이 보고, 곁에 있는 사람의 소중함을 만끽할 수 있기를 바란다며 훈장질을 했다. 돌이켜보니 민망하다. 재빨리 유능해져서 그 유능함을 써먹는 재미에 사는 후배들에게 내 잡설은 얼마나 메스꺼웠을까(물론 여기서의 유능함은 무조건 좋은 의미는 아니다).


지난 2007년 2학기 종강잔치 2차에서 우리 반에 비해 사람수가 훨씬 적은 사학과 분들이 종강잔치 하시는 광경과 마주쳤다. 언뜻 보아도 머릿수 차이가 별로 나지 않아서 속상했다. “고대 경영대는 희망합니다 우리를 향한 질투가 더 많아지기를...” 등의 신문 광고씩이나 내는 단과대의 외화내빈을 걱정한 것은 나만의 감정이었을까. 이렇게 말하고 보니 놀지 못해서 실성한 사람 같지만 그 자리에 있었던 친구들의 대부분이 이건 좀 아쉽다고 여긴 만큼 내가 중뿔나게 호들갑을 떨지는 않았다. 설령 그렇더라도 개인주의자로 산다고 입으로는 말하면서도, 머릿수가 너무 줄어든다며 안타까워하는 내 모습을 발견할 때 씁쓸하다. 내 자신부터가 머릿수 채우는 병풍 역할을 벗어나지 못하면서도, 만만한 손아랫사람에게까지 병풍이 되라고 강권하지 않았나 반성한다.


늘은 재주는 없는 내게 후배들만 쌓일 때 곤혹스럽더니 최근에는 아예 무뎌진 듯싶다. 언제부터인가 후배들 보는 자리에서 나는 얼마나 유익했던가, 나는 또 얼마나 재미났던가를 고민했다. 그런데 요즘은 그냥 얼굴 보는 것만도 좋긴 하다. 좀 더 나은 모습을 보여야겠다는 욕심을 포기한 건 아니지만 그냥 편하게 다가온다. 체념인지 달관인지 잘 모르겠지만.^^; 셰익스피어의 마지막 작품인 <템페스트>에서 프로스페로의 딸 미란다는 “아버지에게 나는 얼마나 큰 짐이었을까?”라고 묻는다. 프로스페로는 “귀여운 내 딸아, 너 덕분에 나는 존재할 수 있었다. 너의 미소는 하늘이 내게 준 용기를 머금고 있었다”라고 답한다. 둘레 사람들에게 이런저런 짐이 되었을지 모르는 나이지만 “덕분에 존재할 수 있었다”라는 말을 듣고 싶다.


흠모하는 재현형은 “대학생활 동안 내가 부르면 찾아올 사람들을 만들었다”고 자부하셨다. 인호형께서는 이 문구를 “나는 불러줄 사람들이 많다”라고 유쾌하게 패러디하셨다. 내 대학생활 동안 (배움을 제외한) 사람 사귐은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까. 나는 천성은 게으른데 놀 때는 날래다. 불행 중 다행(?)인지 내 인간관계의 폭이 그리 두툼하지 못해서 책임질 사람이 많지 않아 부담이 덜하다. 괜찮은 병풍조차 되지 못한 내게 귀한 시간을 내준 지인들에게 조금만 미안하기 위해서라도 내 자신을 가꿔야겠다. 우선 익자삼우(益者三友) 같은 낡아서 도통 거들떠보지 않는 기준부터 채워보고 싶다. 무능한 주제에 이런 욕심을 부리다니 나는 아직도 정신을 덜 차렸다. 내게는 거침없이 죽비를 날려줄 벗이 좀 더 필요하다. 익구 공부독촉위원 인선을 마무리해야겠다.^^; - [無棄]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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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새내기 시절 날림으로 읽고 썼던 장자 독후감... 고작 이런 횡설수설 쓰는데 12시간 동안 컴 앞에서 거의 자리를 뜨지 않고 자판만 눌러대던 참으로 그리운 집중력을 발휘했던 기억이 납니다.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 서평으로도 올렸습니다)


[양심 있는 개인주의자 - 장자를 읽고]

  ‘장자’하면 내가 떠오르는 것이 하나가 있다. 아내의 죽음에서 노래를 불렀다는 것이 그것이다. 어찌 아내의 죽음에 노래냐는 친구의 물음에 그는 답한다. “괴로움의 굴레를 벗어 던지고 아무 것도 거리낄 것 없는 즐거운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어찌 울고불고 하고 있겠는가?”라고. 이렇게 죽음을 계절이 변하는 것과 같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기는 대인의 풍모가 내가 장자에 들어가기 전의 편견 아닌 편견이다.


  장자를 읽고 가장 먼저 든 느낌은 “난감함”이다. 도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지만, 어쩔 수 없이 말을 잠시 빌려 표현한다는 장자의 입장에서 보면 나는 어쩌면 당연한 반응을 보인 것인지도 모른다. 장자에는 우화와 비유들이 가득하다. 공자가 등장할 정도로 별의 별 사람들이 등장하고 숱한 이야기가 오르내리는 것을 가만히 읽고 있자니 머리가 아플 정도다. 주인공이 딱히 있는 것도 아니고 일관되게 주장하는 바도 없어 보인다.


  장자는 내편, 외편, 잡편으로 이루어졌다. 대개 내편은 장자의 저술로, 외, 잡편은 후대의 저술로 본다. 그런 외, 잡편이 우화로 이루어져 이해하기가 한결 수월한 반면 내가 건드린 내편은 난해한 사상으로 나를 곤혹스럽게 했다. 뭐 100% 이해를 목표로 한 것도 아니었기에 너무 욕심을 부리지 말고 내가 알 수 있는 만큼만 장자를 음미해 보려한다. 노자도 知足不辱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내편에 속하는 2편 제물론을 중심으로 나의 장자 읽기를 풀어보겠다.


  이제는 식상하기 조차한 “반잔의 물”비유를 꺼내보자. 그 반잔의 물을 보고 하는 말을 두고 긍정적, 부정적인 반응을 보일 수 있다고 말한다. “물이 반 밖에 없네”라는 반응보다는 “여기 물이 반이나 있잖아”라고 말하는 것이 더 낫다는 암묵적인 강요도 덧붙여서 말이다. 우리는 어쩌면 물 반잔을 놓고도 사람을 나누려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장자라면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여기 물이 반 있구만...” 어떠한 가치판단을 버리고 그저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눈을 기르라는 장자의 가르침을 따른다면 말이다.


  그러나 무턱대고 장자의 말에 동의한다는 것도 경계할 일이다. 여기 오이 한 접시가 가득 있다고 하자. 나같이 오이를 싫어하는 사람은 보자마자 눈살을 찌푸릴 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잘 씻어서 아삭 깨물어 먹고 싶다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피부미용에 관심이 많다면 오이마사지를 떠올릴 테고, 달팽이를 키워 본 사람은 오이를 썰어서 달팽이 먹이로 주고 싶을 것이다. 이처럼 똑같은 오이를 두고서 사람마다의 반응이 다르다. 그런데도 장자의 말대로라면 “오이 한 접시가 있네”라고만 말하고 만다는 것인데 과연 합당한 것인가?


  어떤 사물이 있는데 그것의 가치판단을 넘어 그저 있는 그대로의 실체로만 바라보라는 그의 말이 과연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 것인가? 칸트는 자신의 인식론을 기존의 인식론을 획기적으로 뒤집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에 비유하며 말했다. 다시 말해 이전의 인식론은 주어진 명백한 대상을 놓고 우리가 인식해 가는 것이었다면, 칸트의 인식론은 그냥 주어진 대상을 우리가 여러 가지 범주를 이용하여 능동적으로 인식해 낸다는 것이다. 우리로서는 너무나 당연하게 느끼는 것임에도 말만 어려운 건지도 모르겠다. 위에서 든 ‘오이의 비유’가 바로 칸트의 인식이론에 따른 것이다. 칸트는 자신의 인식이론을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 부르며 자화자찬(?) 했지만 2000여 년 전의 장자는 이런 칸트의 노력조차 우습게 여기고 있는 것이다.


  ‘물 반잔의 비유’에서는 그저 “물 반잔이 있네”하고 담담히 바라볼 수 있던 내 눈이,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칸트의 인식이론을 들먹이며 다시 생각해보니 장자의 말이 영 신통치 않아 보이는 것도 결국 나 또한 어떤 가치에 빠져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없게된 것이다. 또한 장자와 칸트를 놓고 누구의 견해가 옳은 것인가 따지는 것마저도 장자의 입장에서는 부질없는 짓이 되어버리니... 독자를 이렇게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으로 보아 아마 장자는 독자중심의 글쓰기를 배우지 못한 것 같아 보인다.^^;


  논의를 더 확장시켜보자. 조삼모사(朝三暮四)의 고사가 있다. 장자는 원숭이의 비유를 들면서 따지고 이해득실이나 따지는 세계를 벗어나라고 말하고 있다. 한 쪽에 치우치지 만도 않고, 독단과 독선에 빠지지도 않으며, 양쪽을 전체적으로 바라보는 것을 ‘하늘의 고름(天鈞)’에 머무는 것, ‘두 길을 걸음(兩行)’이라고 말하고 있다. 있는 그대로 인정하라는 것이다. 부산하게 좇아 다니지 말고 있는 그대로를 그러하다고 받아들이라는 것을 다른 표현을 들어 연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원숭이의 눈으로 보자면 두 길을 걸으라는 이야기는 줏대 없는 회색분자일 따름이고, 무책임한 양다리 걸치기 같아 보인다. 참 힘든 노릇이다.


“자네에게 묻겠네. 사람이 습지에서 자면, 허리가 아프고 반신불수가 되겠지. 미꾸라지도 그럴까? 사람이 나무 위에서 산다면 겁이 나서 떨 수밖에 없을 것일세. 원숭이도 그럴까? 이 셋 중에 어느 쪽이 거처에 대해 바르게 안 것일까? 사람은 고기를 먹고, 사슴은 풀을 먹고, 지네는 뱀을 달게 먹고, 올빼미는 쥐를 좋다고 먹지. 이 넷 중에서 어느 쪽이 맛을 바르게 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 구절은 내가 장자를 통틀어 가장 감명을 받은 구절 중에 하나다. “인의니, 시비니 하는 것들은 이렇게 주관적이라서 번잡하고 혼란한데 내가 어찌 이런 것이나 따지고 있겠느냐?” 는 장자의 말이 익살스럽다. 오이의 비유에서 말했듯이 사람마다의 반응이 천양지차인데 어느 것이 옳겠느냐는 것이다. 그냥 내버려두라는 것이다. (도올 김용옥 선생님이 좋아하시는 표현을 빌린다면 비틀즈의 “Let it be"라는 것이다)


  짧은 소견으로 대략 결론을 내린다. 장자는 오이를 두고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을 부인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의 견해만을 옳다고 목소리 내지 말라는 것이다. 인의니, 시비니 하는 것도 환경과 상황에 따라 형성된 특수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결국 보편타당한 진리라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선악, 미추, 우열, 귀천의 분별은 그 누가 딱 잘라 말할 수 없는 것이며, 그런 것에 매여 살지 말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또 석연치 않은 점이 남는다. 단지 귀찮다는 이유로 인의나 시비의 분별을 거두라는 것이라면 선뜻 동의할 수가 없다. 장자의 말대로 라면 그저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만 외치다 끝나는 것 아닌가. 소국과민(小國寡民)이 아니고서야 오늘날의 방대한 규모의 조직과 단체에서는 어느 하나로의 선택의 문제에 봉착하지 않을까. 이 의문점을 해소하기 위해 민주주의 사회에서의 ‘다수결’에 대한 장자의 생각을 찾아 뵙고 묻고 싶다. 장자의 견해에 따르면 어느 것이 옳고 그른 것인지 구별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했으니, 많은 의견 중에서 어느 하나로 선택되는 것은 억지라며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을까? 다수결의 논리는 필요악이라고 말씀하실까? 아니면 다른 비유로 나를 깨우치게 하실까?


  죄송하게도 다시 칸트를 들먹인다. 칸트는 위에서 말한 인식론으로 지각한 내용으로 판단한 것이 ‘물자체’와 일치할지는 장담할 수 없다고 말한다. 지각내용과 물자체가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칸트의 상대주의에 대한 대목에서야 비로소 장자와의 공통점을 찾은 것 같다. (온갖 인위로 점철된 유사점 발견이다) 장자와 칸트는 절대주의를 부정했다. 다양한 가치와 인식이 공존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자꾸 사람들은 자기중심적으로 사고하기 일쑤인가? 그것은 자신의 인식과 가치, 자신이 믿는 바가 ‘자기자신’이라고 하는 특수한 범위에서만 성립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즉, “나는 이런데 너는 왜 안 그래?”라는 오만한 논리로 무장하는 것이다. “우리 때는 이랬는데 요즘 것들은 그렇지 않아.” “나는 군대 가서 힘들게 고생했는데 너는 양심적 병역거부를 외치면서 왜 안 가려고 해?” “누구는 재수하느라 고생인데 너희들은 대학 갔다고 주말마다 만나서 노냐?” “그 사람은 내가 봤을 때 정말 아닌데 넌 왜 자꾸 그 사람이랑 사귀려고 하는 거야?”... 이런 식의 숱한 이야기들이 결국 자신을 벗어나지 못하고서 남을 나에게 맞추라는 폭력이 되어 나타난다. 이것이 장자가 상대주의, 다원주의를 옹호하면서도, 저가 잘났다고 우기는 전국시대의 제자백가들의 편협성에 질려 시비를 가르는 것을 그토록 혐오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잣대로 남을 재단하려고 하는 오만을 부리는 것, 그것을 장자는 거부한 것이다.


  이제 다른 이야기를 살펴보자. 장오자가 여희라는 미녀가 처음에는 대궐로 가기를 슬퍼하다가 왕과 함께 호의호식하자 울었던 일을 후회하였다는 말을 하면서, “죽은 사람들도 전에 자기들이 삶에 집착한 것을 후회하지 않을까?”라고 묻는다. 여희가 처음에는 집을 나서는 것을 싫어했지만, 새로운 세상에 가서 호강을 하자 집을 떠난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듯이, 우리의 삶도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확장시켜보면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지금에 익숙한 나는 다른 알지 못하는 나로 변하는 것을 두려워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인생무상하고 끊임없이 우리는 변화에 놓이게 된다. 예전의 나가 편해질 만 하니까 무상한 세상이 다시 나를 다른 곳으로 가라고 떠미는 격이다.


  대학 새내기만의 특권으로 ‘사월증후군’이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이는 3월 한달 정신 없이 지내고 4월을 맞이하고 보니 막상 기대하고 있던 대학에 대한 회의 같은 것이 몰려와서 이런 저런 고민을 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나를 포함해서 사월증후군에 시달리는 이 들에게 장자가 짐짓 이렇게 타이르지 않을까? “고민만 하고 눌러 앉아 있지 말라”고. 충분한 고민과 성찰 뒤에는 자기 속의 가능성을 실현하기 위해 시련을 헤쳐나가서 새로운 나를 찾아가라고 말이다. 삶의 모든 일들은 무상하기만 하다. 그러나 무상하기 때문에 우리는 날마다 새롭게 깨닫고, 새롭게 느끼고, 새롭게 행복할 수 있을 수 있지 않는가! 이 ‘무상의 역설’을 우리는 달게 받아들여야 한다.


  이제 유명한 ‘나비의 꿈’을 살펴보자. 장자가 나비가 되는 꿈을 꾸었는지, 나비가 장자가 되는 꿈을 꾸었는지 정녕 알 수가 없다. 지금 이렇게 힘들게 살아가는 인생이 한바탕의 꿈이라면 참 당황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설령 지금 내가 꿈을 꾸고 있다 할지라도 일단은 모두 진실이라 생각하고 열심히 살 수 밖에 없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끝내 지금의 삶이 꿈이었다고 해도 그것을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가짐을 가지라는 것이 장자의 주장이 아니었을까 라고 생각된다. 나비가 되었으면 열심히 꽃들 사이로 날아다니고 장자가 되었으면 열심히 자기 주장을 펼치라는 것이다. 사족이지만, 얼마 전 소개받은 과학이야기가 떠오른다. 이야기인즉슨, 두 입자가 거리와 무관하게 결합되어 상대에게 영향을 끼치는 ‘얽힘현상’으로 조그만 양자의 세계에서는 물체의 원격이동이 이미 현실화되고 있다는 내용이다. 내가 여기 있지만 한순간에 저기 있는 것이 가능 할 것이라는 얘기다. 장자가 설마 이것을 알고 있었단 말인가?


  지금까지 중점적으로 살펴본 제물론의 주제인 ‘제(齊)한다’는 것은 ‘하나로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의 ‘하나’는 전체주의적인 획일화가 아닌 다양함이 존중받고 어우러지는 하나됨을 말한다. 좁은 시야에서는 구별되어 보이는 개개의 사물들이 크게 보면 하나로 통일되어 보이게 된다는 것이다. 자꾸 분리하고 구별해대지만, 크게 보면 모두 같다는 깨달음이다.


  장자는 ‘어느 쪽이 바르게 알겠는가’ 라는 물음에서 핏발 세우며 내가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남도 옳을 수 있는 상태를, 여희의 이야기에서는 지금의 나를 고집하지 않는 절대적 자유경지를, 나비의 꿈에서 가치적 편견과 주관적 독선에의 초월을 노래하고 있다. 결국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로 통한다. 오리다리가 짧다고, 학의 다리가 길다고 나무랄 것이 아니라, 그대로 자유롭게 노닐도록 두는 여유를 장자는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위에서 다수결을 언급하면서 장자가 현상을 탁월하게 분석했지만 대안제시에는 미흡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했었지만 장자는 이렇게 그럴듯한 해결책을 준비하고 있었다)


  장자는 참으로 ‘양심 있는 개인주의자’라고 평해본다. 남을 철저히 존중하면서도 자신의 행복의 극대화를 위해 편견의 벽을 허물고 상식의 틀을 바꾸는 부단한 노력을 하는 그에게서 대자유를 느낄 수 있다.


  달팽이 뿔 위에서 아옹다옹하는 우리들에게 장자가 엷은 미소로 말하는 것이 들리는 듯하다. “허허... 좀 더 너그러워 지면 될 것을...”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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