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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3.26 한국의 시호(諡號) 탐구(2)
  2. 2008.07.04 중화전에서 눈을 감아 보다

5. 고려의 시호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은 시호 제도의 새 지평을 연다. 고려시대에는 왕뿐만 아니라 공이 있는 신하들에게도 시호를 하사했다. 신숭겸에게 장절(壯節), 배현경에게 무열(武烈), 복지겸에게 무공(武恭), 홍유에게 충렬(忠烈)이라는 시호를 내린 것이 대표적 예다. 8대 현종 때에는 신라의 최치원에게 문창후(文昌候), 설총에게 홍유후(弘儒侯)라는 시호를 추증하기도 한다. 특히 역대 임금의 시호를 왕이라고만 칭하지 않고 중국 황제와 같이 조(祖) 또는 종(宗)이라 붙이는 조종법(祖宗法)을 따랐다.


이로써 시호와 묘호(廟號), 능호가 확실하게 정리되었다. 왕건의 시호는 신성(神聖), 묘호는 태조(太祖)이며, 능호는 현릉(顯陵)이다. 이러한 시호, 묘호, 능호의 부여는 원 간섭기 이전까지 일관되게 수행됐고 조선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시호와 묘호가 구분이 되기 시작한다. 묘호를 대강 정의하면 왕실의 사당(태묘나 종묘)에 배향할 때 붙이는 이름으로 왕에게만 추증되는 또 다른 시호다. 쉽게 말해 왕에 대한 호칭으로 조나 종자가 붙는 것을 묘호라고 일컫는다. 중국의 묘호 기준을 적용해보면 통일 이전의 삼국에서 묘호로 보이는 것은 고구려 태조왕과 신라 태종 무열왕이 전부다. 삼국 가운데 고구려는 묘호와 시호를 엄밀히 구분하지 않았던 것을 보인다. 묘호가 정형화되어 쓰인 것은 고려시대부터다.


중국의 은주(殷周)시대와 한대(漢代)에 걸쳐 묘호를 가진 임금이 있었으나 모든 임금이 묘호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당대(唐代) 이후에는 모든 황제가 묘호를 갖게 된다. 결국 묘호는 시호가 신하들에게도 수여되면서 왕을 좀 더 부각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기능했음을 알게 된다. 시호 인플레가 심화되면서 시호가 점점 늘어나 수십 자에 달하는 황제도 심심찮게 등장했다. 결국 묘호가 본래 시호의 역할을 대신해 그 왕의 치적을 평가하는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중국의 제후국을 자처한 조선왕조는 원칙상 묘호를 써서는 안 되었지만, 고려왕조부터 써오던 관례라며 대충 넘어가며 사용했다.


하지만 가장 강력하게 내정 간섭을 했던 외세인 원나라는 묘호나 시호를 우리의 뜻대로 쓰지 못하게 했다. 이 시기 묘호는 쓰이지 않았으며 시호마저 원나라 황제에 대한 충성심을 표기한다는 뜻으로 “忠○王”이라 썼다. 충렬왕 시기부터 중국의 사시(賜諡)가 단행되어 조선 말기까지 이어진다. 충자 돌림 시호는 왕이 신료들에게 내린 것과 마찬가지였으며 형식적이나마 중원의 황제가 동방의 제후에게 하사한다는 분위기를 풍긴다.


31대 공민왕은 원명교체기의 국제 정세를 이용하여 원의 연호와 관제, 예제 등을 철폐했다. 공민왕 6년(1357) 원의 시호를 받았던 임금들을 다시 추존해 충렬왕은 경효(景孝), 충선왕은 선효(宣孝), 충숙왕은 의효(懿孝), 충혜왕은 헌효(獻孝), 충목왕은 현효(顯孝)라고 시호를 올렸다. 고려 왕의 시호에 거의 들어가던 효(孝)자를 부활시킴으로써 자주성을 천명했다. 다만 30대 충정왕만은 시호를 올리지 않았는데 공민왕이 그를 몰아내고 즉위했기 때문에 정통성 문제로 말미암은 것으로 보인다.


6. 공민왕, 우왕, 창왕, 공양왕


공민(恭愍)이라는 시호는 명나라에서 준 것이다. 새로이 중원의 주인공이 된 명나라의 쩨쩨한 심보가 드러난다. 공(恭)은 공경하게 사대하라는 뜻일 테고, 문제는 민(愍)자다. 민은 그리 좋은 시자는 아닌데 나라에서 재난이나 반란을 만나고, 백성을 비통하게 하고 해친다 정도의 뜻이다. 잇따른 반란과 홍건적의 난, 왜구 등에 시달렸던 공민왕 치세의 파란만장함에 제법 어울리는 시호이기는 하지만 그의 적잖은 업적으로 볼 때 폄훼됐다는 느낌이 강하다.


민(愍)과 비슷한 의미를 갖는 시자(諡字)로는 회(懷), 애(哀), 도(悼), 상(殤) 등이 있다. 회(懷)는 행실은 자애로우나 일찍 죽은 것(慈行短折), 지위를 잃고 죽은 것(失位而死)을 일컫는다. 장수절의 시법해에 의하면 단(短)은 60세 못된 것이고, 절(折)은 30세가 못된 것이다. 애(哀)는 공손하고 어질지만 일찍 죽은 것, 도(悼)는 중년이 안 되어 요절한 것, 상(殤)은 요절하여 이루지 못한 것이다. 왕위에 올랐다가 요절하거나 뜻을 펴지 못했을 때 주로 쓰는 시자들이다.


한국사에서 이런 시자를 받은 임금을 대강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신라 제40대 애장왕(哀莊王)은 숙부 김언승의 반란 때 살해되었고, 제44대 민애왕(閔哀王)은 희강왕을 협박해 자살하게 하고 스스로 왕이 되었으나 김우징이 장보고의 힘을 빌려 쳐들어오자 패하여 병사들에게 살해되었다(閔은 愍과 상통하는 글자다). 제55대 경애왕(景哀王)이 견훤에게 핍박당해 자살하게 된 것은 유명한 사실이다.


고려 7대 목종(穆宗)은 처음에는 묘호가 민종(愍宗), 시호는 선령(宣靈), 능호가 공릉(恭陵)이었다. 이는 모두 목종을 시해한 강조(康兆)가 지은 것이라 현종(顯宗) 3년 묘호를 목종(穆宗), 시호는 선양(宣讓), 능호는 의릉(義陵)이라 고쳤다. 제14대 헌종(獻宗)의 시호는 회상(懷殤)이었다가 예종(睿宗)이 즉위한 뒤 공상(恭殤)이라 고쳤다. 헌종은 숙부 계림공 왕희에게 사실상 왕좌를 찬탈당하고 후궁으로 물러나 14세에 사망했다.


조선 8대 예종(睿宗)이 재위 13개월 만에 죽자 명나라에서 양도(襄悼)라는 시호를 주었다. 영조(英祖)의 둘째 아들이 뒤주 속에서 사망하자 영조는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다. 훗날 정조(正祖)가 즉위 후 10일 만에 사도세자의 시호를 장헌(莊獻)를 고쳤다. 도(悼)자를 바꾼 것으로 보아 높이려는 의도로 보인다. 여하간 회(懷)라는 글자에는 야니를 가슴에 묻고 간직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는 셈이다. 아마 옛사람들도 그랬으리라.


우왕은 공민왕이 부활시킨 고려 시법에 의거하여 인문의무용지명렬경효대왕(仁文義武勇知明烈敬孝大王)이라는 시호를 올렸다. 마지막 경효(敬孝)에서 효자 시호가 여전히 쓰였다. 고려에서 올린 시호가 엄연히 있는데도 불구하고 원나라와 명나라가 내려준 시호를 계속 쓰는 것은 『고려사』 편찬자의 시각을 그대로 답습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은 아닐지 염려스럽다. 가뜩이나 고려 후기의 왕들은 묘호가 없어 허전한데 말이다. 조심스럽지만 고려에서 올렸던 시호를 병기하는 시도를 해보는 건 어떨까 싶다.


고려 왕 가운데 시호를 아예 받지 못한 임금이 우왕과 창왕이다. 이성계 일파는 우왕이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라 신돈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면서 우왕과 창왕은 왕씨가 아니라는 우창비왕설(禑昌非王說)을 내세웠다. 폐가입진(廢假立眞)이라며 우왕과 창왕을 차례로 폐위하고 공양왕을 옹립했다. 조선의 개창자들은 더욱 잔인하게도 『고려사』에서 우왕과 창왕을 국왕의 연대기인 세가(世家)에도 넣지 않고 신우(辛禑)와 신창(辛昌)으로 부르며 열전(列傳)의 반역전(叛逆傳)에 편입시켰다.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恭讓王)의 시호는 신라의 경순왕(敬順王)과 마찬가지로 모욕적인 뜻이다. 공손히 왕위를 양보했다는 시호를 줘놓고도 결국 살해한 이성계 일파의 박절함이 밉살스럽다. 고려숭의회에서 펴낸 『여말충의열전』에서 우왕, 창왕, 공양왕은 조선의 왜곡된 호칭인 만큼 고려말의 유신(遺臣)들이 이네들을 지칭했다던 여흥왕(驪興王), 윤왕(允王), 간성왕(干城王)의 칭호를 준용(遵用)한다는 내용이 있다.


6. 조선의 시호


조선으로 넘어와서는 시호와 묘호, 능호가 잘 정리되어 별로 논쟁거리는 없다. 조선 왕의 시호가 길어져서 묘호의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더 커졌다고 할 수 있다. 가령 세종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世宗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은 묘호인 세종, 명나라에서 받은 시호인 장헌, 조선에서 올린 영문예무인성명효로 구성된다. 임금이 붕어하면 중국에게 시호를 받기 위해 청시사(請諡使)를 보냈다. 시간이 걸리는 관계로 그 전까지는 신하들이 올린 시호를 쓰다가 중국에서 시호가 도착하면 그 시호가 왕을 대표하는 호칭이 되었다.


그런데 『선원계보(璿源系譜)』를 비롯한 조선의 사서에는 명나라가 준 시호만 있을 뿐, 청나라가 줬을 법한 시호는 찾기 힘들다. 조선 숙종 때 역관이던 김지남이 아들과 함께 편찬한 『통문관지(通文館志)』라는 책에는 조선이 청나라로부터 청해 받은 각 왕들의 시호들이 모두 기록되어 있다. 인조는 장목(莊穆), 효종은 충선(忠宣), 현종은 장각(莊恪), 숙종은 희순(僖順), 경종은 각공(恪恭), 영조는 장순(莊順), 정조는 공선(恭宣), 순종은 선각(宣恪), 순조의 세자로 사후에 왕으로 추존된 익종은 강목(康穆), 헌종은 장숙(莊肅), 철종은 충경(忠敬)이라 했다. 충(忠), 각(恪), 순(順), 공(恭) 등이 많이 보이는 것에서 고분고분하기를 바랐던 청나라의 소망이 선하다.


조선에서는 인조를 비롯한 국왕의 사후에 청에게 시호를 청하여 받았으면서 이 시호는 청에게 보낸 외교문서 외에는 사용하지 않았다. 각 왕대의 실록에서도 청나라에 시호를 청한 사실만 기록되어 있고 어떤 시호를 받았는지는 기록하지 않았다. 공식 기록에 의도적으로 수록하지 않은 이 시호들을 굳이 열거한 까닭은 앞서 고려 말기 왕들을 격하한 것에 대한 항의의 뜻이다.^^; 청나라 시호를 사용하지 않은 까닭은 자주성이라는 측면보다는 일그러진 모화의식의 산물일 공산이 크다.


조선 왕에게는 묘호가 중요해지면서 묘호 인플레가 극심해졌다. 고려에서는 태조만이 조(祖)이던 것을 조선에서는 조(祖)가 붙은 왕은 7명이다. 조선 후기 묘호가 개상(改上)된 경우는 전부가 종(宗)을 조(祖)로 바꾼 것으로 볼 때 조를 선호한 듯싶다. 실제로 본래 선종(宣宗), 영종(英宗), 정종(正宗), 순종(純宗)이던 묘호가 선조(宣祖), 영조(英祖), 정조(正祖), 순조(純祖)가 되었다. 참고로 연산군과 광해군은 종묘에 들지 못했으니 당연히 묘호가 없고 왕자시절의 호칭을 그대로 쓴다.


조선조 묘호 산정이 편파적이었다는 지적이 많다. 1468년 세조가 재위 13년 만에 세상을 떠나자 신료들이 신종(神宗), 예종(睿宗), 성종(聖宗)이라는 세 가지 묘호를 올렸다. 묘호에 조가 들어가 있지 않았음을 비추어 볼 때 당대의 신료들도 세조의 찬탈 행위를 평가하는데 있어서 경계를 그었던 모양이다. 이를 탐탁지 않게 여긴 예종이 아버지는 국가를 다시 일으켜 세운 공이 있다고 문제를 제기해 결국 묘호가 세조가 되었다. 선종은 임진왜란을 극복한 공이 있다고 하여 선조가 되었는데 그 공로는 잘 도망 다녔다는 뜻이려나?


인조는 쿠데타를 일으켜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앉자 자신의 아버지를 본래 예법으로 대원군으로 삼아 정원대원군(定遠大院君)이라 칭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논란 끝에 왕으로 추존해 묘호를 원종(元宗)이라 했다. 대군이나 세자가 아닌 왕자가 추존왕이 된 것은 원종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1649년 인조가 죽자 열조(烈祖)로 묘호가 정해졌다. 조를 남발한 것도 모자라 인조(仁祖)로 묘호를 고쳤는데 소현세자가 의문사하지 않았으면 왕위에 오르지 못했을 효종의 이심전심 띄워주기인 셈이다. 병자호란을 자초하고 아들과 며느리를 억울하게 죽인 아둔하고 냉혹했던 인물에게 어질다는 묘호를 붙이다니 민망하다. 왕에게 있어 시호의 역할을 했던 묘호 산정이 이렇게 흐물흐물했다니 부끄러운 일이다.


대한제국 초대 황제인 광무제의 시호는 高宗統天隆運肇極敦倫正聖光義明功大德堯峻舜徽禹謀湯敬應命立紀至化神烈巍勳洪業啓基宣曆乾行坤定英毅弘休壽康文憲武章仁翼貞孝太皇帝이다. 고종은 묘호이고, 문헌무장인익정효(文憲武章仁翼貞孝) 8자는 시호로서 고종이 붕어한 후 올린 것이다. 고종과 문헌무장인익정효 사이의 50자에 달하는 존호는 고종 9년부터 순종 즉위년까지 생존해있는 고종에게 일곱 차례에 걸쳐 상호(上號)한 것이며, 태황제(太皇帝)라는 존호는 고종이 강제 퇴위를 당해 순종이 즉위했던 1907년에 봉책한 것을 고종 사후에 재추봉한 것이다.


망국의 황제가 누리기에는 너무 넘치는 시호였다고 생각했는지 일제는 이에 대한 시비를 걸었다. 고종·순종실록 감수보조위원(監修補助委員)으로 활동한 에하라 젠쓰이(江原善槌)는 고종실록의 편찬과정에서 실록의 권두에 실릴 고종의 시호가 일본 황실의 한 왕가로서의 지위에 저촉된다고 주장했다. 창덕궁 이왕인 순종황제가 덕수궁 이태왕인 고종황제에 대한 시호를 봉책하여 태황제라고 할 권능이 없으며, 순종이 올린 8자의 시호 역시 삭제해야 한다고 투덜거렸다. 결국 일제는 한일합방을 기점으로 하여 그 이전의 황권만을 인정하는 태도를 취했다. 한일합방 이후의 실록은 순종황제실록부록(純宗皇帝實錄附錄)으로 처리하고 제왕의 칭호도 격하시키고, 대한제국 황제의 재위년도나 연호 대신 일본의 연호를 사용했다.


7. 시호의 정신을 새기며


1456년 처형된 사육신이 1691년 숙종에 의해 시호가 내려진 것처럼 시호는 한 개인에 대한 역사의 엄정한 평가를 지향했다. 오늘날에 그 형식을 곧이곧대로 따를 것은 없어도 그 정신은 배울 점이 많다. 이런 일도 있었다. 조선 전기 문신이던 김국광이 뜻을 펴되 성취하지 못했다는 의미(述義不克)의 정(丁)자가 포함된 시호를 받았다. 아들 김극유는 4년 동안 열 차례가 넘는 상소를 올리며 시호를 고쳐주기를 청하였다. 성종과 대신들은 김국광이 현저한 과실이 없는데 나쁜 시호를 얻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시호는 바꿀 수 없다는 원칙을 고수해 끝내 바꿔주지 않았다.


그런데 그 원칙이 반드시 지켜진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한명회의 시호가 명성(明成)이라고 정해졌다. 생각이 과감하고 원대한 것(思盧果遠)을 명(明)이라고 했으나 자부심이 강하다는 뜻이 그리 아름답지 못하다는 문제 제기가 들어왔다. 성종은 결국 특명을 내려 명을 충(忠)으로 고치게 했다. 시호를 고치지 말 것을 상소한 신하들이 있었지만 성종은 당대의 세도가에 자신의 장인이었던 한명회의 시호를 마냥 외면하지 못했다.


이에 반해 고려 말의 권신 이인임의 시호는 황무(荒繆)로 정해졌다. 당시 전의부령(典儀副令)이던 공부가 그의 시호를 이렇게 짓자 종당(宗黨)이 이를 갈며 압박했지만 공부는 움직이지 않았다고 전한다. 황(荒)은 안팎으로 난이 생긴다, 방종하게 즐기면서 법도가 없다, 기강과 법도를 혼란스럽게 한다는 뜻이다. 무(繆)는 명분과 실제가 어긋난 것, 즉 명분은 아름다우나 실상이 손상되었다(名與實爽)는 뜻이다. 가히 한국사에 있어 악시의 대표 격이다. 이인임은 말년에 실각했으니 한명회와 같은 호사는 누리지 못했던 것일까?^^;


옛사람들은 시호 한 자에 웃고 울었다. 허울뿐이라고 구박해도 그만이지만 역사를 두려워하라는 시호의 참뜻을 되새길 필요가 있겠다. - [無棄]


<참고 문헌>
박영규, 『고구려왕조실록』, 웅진지식하우스, 2004
박홍갑, 『양반나라 조선나라』, 가람기획, 2001
신용호·강헌규, 『先賢들의 字와 號』, 전통문화연구회, 1997
이민홍 편, 『諡號, 한 글자에 담긴 인물 評』, 문자향, 2005
신명호, “조선시대 국왕호칭의 종류와 의미”, 『역사와경계』 제52집, 부산경남사학회, 2004, pp. 47~67
이민홍, “중원 시법(諡法)의 수용과 한국 역대(歷代) 제왕의 시호(諡號)”, 『한문학보』 제12권, 우리한문학회, 2005, pp. 485~509
이영춘, “『通文館志』의 편찬과 조선후기 韓中關係의 성격”, 『역사와실학』 제33집, 역사실학회, 2007, pp. 121~161
임민혁, “高ㆍ純宗의 號稱에 관한 異論과 왕권의 정통성 - 廟號ㆍ尊號ㆍ諡號를 중심으로 -”, 『사학연구』 제78호, 한국사학회, 2005, pp. 189~230
shyisna님이 올려주신 네이버 오픈 백과 “시호(諡號)”,  “시호(諡號) 사례분석”

Posted by 익구
:

프랑스 화가 밀레는 “남을 감동시키려면 먼저 자신이 감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옛것에 젖어들 만큼 감격하고 있는가, 아니 제대로 알고는 있는가? 딱히 돈이 안 되어 보이는 문화유산에 대한 시민들의 무심함이 아슬아슬하다. 지난 5월 20일 서울시는 새청사 기공식을 열었다. 당초에 서울시는 초고층의 건물 설계안을 내놓았는데 문화재위원회는 덕수궁과 조화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심의를 퇴짜 놓았다. 여러 차례 건축 심의를 거친 끝에 서울시는 한옥의 처마를 형상화한 디자인을 확정했다. 서울시 새청사 논란을 놓고 일부 시민들은 덕수궁이 거치적거린다고 여기며 쌀쌀맞은 시선을 건넸다. 그저 도심의 공원에 지나지 않는 덕수궁이 서울의 랜드마크를 만들겠다는 대의명분(?)의 발목을 잡는 것이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덕수궁은 빤히 보이기라도 하니까 그나마 나은 편이다. 공사 지연이 두려워 쉬쉬하고 넘어간 매장문화재는 오늘날 전혀 없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아파트 재건축 조합원들이 난입해 풍납토성 경당지구를 훼손한 치욕이 불과 2000년의 일이었다. 철원군에서 태조 왕건의 사택지로 추정되는 철원군의 구 철원향교터에 대한 발굴작업이 예산 부족 등으로 연기되었다가 올해 들어 2년 만에 재추진되었다. 가까스로 확보한 예산 2억 원은 숭례문 복원을 위한 추정예산의 100분 1 수준이다. 딱히 경제적 가치가 없어 보이는 문화유산에 대한 시민들의 무심함은 국가 지정문화재에 대한 과도한 관심으로 모아져 아슬아슬하다. 거식증보다는 편식이 낫다고 위안을 삼아보지만 말이다. 궁궐의 속살을 더듬으며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자꾸만 늘어가는 세상에 맞설 재기 발랄한 언어를 궁리해본다.


덕수궁의 이름을 바꿔야 한다는 주장을 여기저기서 많이 접했다. 덕수궁은 1907년 황제의 지위에서 물러난 고종에게 붙인 궁호일 따름이라는 이야기다. 덕수궁은 상왕이 머무는 궁궐로서 임금의 장수를 기원하는 일반적인 의미를 가진 이름이지 궁궐 고유의 명칭은 아니라는 견해에다가 덕수궁 탄생 배경이 고종의 강제 퇴위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역사적 배경이 맞물린다. 고종은 물러나서 장수를 즐기기보다는 구질구질한 옥좌를 좀 더 지키고 했으리라. 사실상 경운궁에 억류되었던 고종 입장에서는 덕수궁이라는 궁호가 마뜩잖았을 공산이 크다. 덕수궁의 옛 이름인 경운(慶運)을 ‘경사스러운 일이 옮겨오다’로 풀이해보니 그 뜻이 절묘하다. 국운이 기울던 조선 말기에 경운궁을 드나들던 이들은 운수가 움직여서 중흥하길 바랐을 것만 같다.


1895년 을미사변 겪은 후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독살을 염려해 통조림으로 요기를 한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한 나라의 왕이 다른 나라 공사관으로 피신한 아관파천이 벌어질 정도로 일본의 폭력은 혹심했다. 일본의 간섭을 피하기 위한 외교적인 몸부림으로 열강의 공사관 밀집한 곳에 경운궁을 중건했다. 조선의 독자적인 관영 공사체제로 조영된 마지막 궁궐인 덕수궁은 원래 규모의 3분의 1도 남아있지 않다고 한다. 본래 궁궐터가 아니었던지라 배치가 뒤숭숭한데 군데군데 휑한 공간이 펼쳐지니 스산하다. 대한문을 들어가서 거닐게 되는 금천교는 조악하여 예의 은근한 맛을 잃었지만 말기의 작품에 서린 처연함이 다리의 못남을 가려주고 있다. 맹자는 “나라는 반드시 스스로 정벌한 뒤에 남이 그 나라를 정벌한다(國必自伐而後人伐之)”라고 역설했다. 자책하는 다리로 삼아 살뜰하게 반성해봄직 하다.


중화문이 옹글게 서있으나 문의 기능을 다하지 못한지 오래다. 답사객들의 태반은 문으로 입장하지 않고 툭 터진 조정(朝廷)으로 자유로이 드나든다. 본래 중화문 좌우에는 행각이 늘어서 있었으나 일제가 헐어내 위용을 잃었다. 문 오른쪽에 ‘ㄱ’자 모양으로 약간 남아있는 것이 전부다. 그곳은 의자가 놓여있어 쉬어가게 해놨는데 도무지 맘 편히 쉴 수 없는 회한의 장소다. 보르헤스의 소설 <원형의 폐허들>에 나오는 도인은 꿈을 통해 완벽한 인간을 창조하려고 한다. 도인은 오래 전에 불타버리고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 이제는 누구도 그 사원의 신을 숭배하지 않는 폐허를 꿈꾸기에 안성맞춤으로 여겼다. 한바탕 덜어내고 난 곳에서 채울 것이 있기 때문이리라. 비참하게 잘려나간 중화문 행각에 걸터앉아 희망을 노래하자. 배부른 소리 좀 늘어놓고 보면 어느새 넉넉해진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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꼼꼼히 보면 어도(御道)와 그 주변 부분에 깔린 박석이 다른 재질임을 알 수 있다. 일제가 중화전 뜰의 박석을 걷어내고 잔디를 심었던 것을 최근에 뽑았기 때문이다.



중화전은 중화문과 더불어 보물 제819호로 지정되어 있다. 문화재청이 국보와 보물의 일련번호 체계를 없앤다는 소식이 들린다. 등수 매기기 식의 서열화가 사라지는 계기가 될 듯싶어 기껍다. 이 땅을 살았던 사람들의 숨결에 귀천을 나누는 건 서글프지만 차이는 숙명적이고, 차이는 자연스럽게 차별을 낳는다. 지정문화재 제도는 국가적 관리의 우선순위를 확립함으로써 후손에게 좀 더 잘 물려줄 목록을 작성한다. 문화유산을 두고 벌어지는 국가적 차별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반면에 개인적 차별은 오히려 권장할 일이다. 보다 궁극적으로는 개인적 편애는 넓혀나가고 국가적 편애는 좁혀나가야 한다. 숭례문의 참화는 국가적 편애를 제대로 못했음을 방증하고 있으며, 개인적 편애를 희석시키는 부정적 효과를 낳았다. 애이불상(哀而不傷)하고 남은 힘으로 문화유산 사랑이 관념화되고 당위적인 구호가 되는 것을 경계하자.


문화유산을 완상하는 저마다의 감상만큼은 세간의 평가라든가 경제적 가치 따위로 재는 걸 그쳤으면 좋겠다. 가슴을 흔들고 푸근한 미소를 짓게 만드는 저마다의 문화유산을 찾아보자. 나는 조선 최후의 궁궐 정전, 막둥이 중화전을 편애한다. 경복궁 근정전, 창덕궁 인정전, 창경궁 명정전이 죄다 국보이지만 그네들의 우아함 못지 않은 기품이 중화전에 있다. 중화전은 창건 당시에는 중층이었으나 1904년 화재로 소실된 후 1906년에 중건되면서 재정난 때문에 단층으로 지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황제국의 정전으로서 단층은 멋쩍었는지 지붕을 크게 올렸다고 하는데 그 궁여지책마저 살갑다. 고운 금빛으로 기운차게 쓰인 중화전 편액을 보는 맛이 쏠쏠하다. 치우침, 기울어짐, 지나침, 미치지 못함도 없으며 늘 떳떳하고 변치 않는 상태를 중화(中和)라고 한다면 얼마나 버리고 비워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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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용』에서는 희로애락이 발현하지 않는 것을 中이라 하고, 발현해서 모두 절도에 맞는 것을 和라고 풀이하고 있다.



중화전 답도에는 궁궐 정전 가운데 유일하게 봉황이 아닌 용이 새겨져 있다. 제국의 격식을 드높이기 위해 애를 썼던 게다. 용을 새긴 답도는 중화전과 원구단에서만 볼 수 있는데 만세 대신 천세를 외쳤던 조선에서는 파격이었나 보다. 중화전 천장에는 살진 황룡이 노닐고 있을 뿐만 아니라 유현문 안쪽에도 용이 그려져 있고 수막새에서도 용이 노닌다. 조지훈 선생은 <봉황수>에서 용 대신 봉황을 틀어 올린 조국을 안쓰러워했지만 막상 쌍룡을 만났는데 오히려 가슴이 먹먹해졌다. 용이 가리키는 바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창덕궁 인정전과 함께 황제를 뜻하는 황색 창호를 쓰다듬다가 고종을 떠올렸다. 고종황제와 대한제국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고종황제 역사청문회』라는 책에서 벌어진 치열한 논쟁에서 엿보이듯이 그 시절의 빛과 그림자를 헤집는 노력은 고통스러운 작업이다. 고종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는 것은 반가운 일이지만 그가 실패한 군주였음은 또렷하다.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해 자주독립을 천명했지만 그에게는 자주와 자강을 도모할 혜안이 없었다. 동학농민전쟁 때 고종이 청군과 일본군을 끌어들여 지키고자 했던 것은 왕권이지 국권이 아니었듯이 그는 제국민을 위한 제국이었다기보다 황제를 받들기 위한 제국을 원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면 백성의 입장에서 볼 때 대한제국의 실정은 일제의 침략에 견주어 얼마나 나았겠냐는 투덜거림에 귀가 솔깃하다. 그럼에도 무능한 임금과 제국주의 침략세력과의 차이가 잗다랗다고 말하기에는 찜찜하다. 더 나아가 아예 일제의 통치 결과를 두둔하는 일각의 주장에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일제의 폭압적 통치는 눈감은 채 통계적 수치를 통해 식민통치의 경제적 효용을 따지려는 시도는 논리적으로 무모할뿐더러 윤리적으로도 박절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식민통치로 이룩한 경제발전이 그다지 자랑스럽지 않다. 개개인의 자유를 몇몇 통계수치로 가늠할 수 있을지 회의적이기도 하거니와 설령 가늠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훼손된 자유에 대한 비용 처리가 너무 인색하다.


일제 강점기와 광복을 거치면서 왕정 복고를 바라는 민중이 거의 없었던 시대 상황을 반추할 때 황실에 대한 평가가 어느 정도 투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미운 정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한 때 자신들의 임금을 위해 눈물을 흘렸던 당시의 백성들의 존재 또한 분명하다. 요즘은 너도나도 촌스럽다고 손가락질하는 민족주의라든가 애국주의의 열정에 이끌렸던 그네들의 마음자리를 애틋하게 여긴다. 망국의 일차적 책임자들을 차마 미워하지 못함이 조선의 마음인지도 모른다. 1919년 고종의 갑작스런 승하와 독살설이 몰고 온 충격이 3·1 운동의 도화선이 되었음은 익히 알려져 있다. 전제군주의 죽음이 독립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해서 한국 역사상 최초의 민주공화제 정부를 잉태한 역사의 아이러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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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전의 소맷돌에는 돌짐승(瑞獸)을 장식했다. 앙증맞은 주먹코나 토실토실한 엉덩이를 살짝 쳐주고 싶다. 역경에 굴하지 않겠다는 듯 치켜든 얼굴이 익살스럽다.


화담 서경덕 선생이 한 젊은이를 만났다. 눈이 멀었다가 갑자기 앞이 보였는데 자기 집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개화의 파고 속에서 표류했던 대한제국을 추념하면서 과연 오늘의 우리는 슬기롭게 세계화의 너울을 넘고 있는지 묻는다. 화담 선생은 그 젊은이에게 눈을 감으라고 충고한다. 눈감은 젊은이가 예전처럼 지팡이를 짚어가며 집을 잘 찾아갔음은 물론이다. 이 고사를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나서 외부의 문물을 받아들이라는 뜻으로 해석한다. “다시 너의 눈을 감아라(還閉汝眼)”라는 일갈은 개안의 미덕에만 열중하던 내게 폐안의 가치를 품게 해준다. 자신의 잣대를 먼저 세워야 제 것으로 삼을 만한 것을 가려내는 안목이 길러지게 마련이다.


중화문은 황궁 법전의 정문으로서 격을 높이려고 했던지 기둥이 높아지고 처마가 길어졌다. 덕분에 문 사이로 중화전의 용마루까지 훤히 보이는데 그 곡선미가 아찔하다. 가로 부재인 창방의 직선과 대비되어 보는 맛을 돋운다. 포실한 전통의 토대 위에 특수성을 뽐내면서도 보편성을 잃지 않는 한국적 가치관을 모색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겠으나 이 용마루 선과 같은 우리의 멋은 얼마든지 있다. 움직임과 행동을 혼동하지 말라는 헤밍웨이의 말을 곱씹는다. 우리는 등 떠밀려서 움직이고 있는가? 자기가 선택한 걸음으로 행동하고 있는가? 우리는 앞길을 스스로 선택하고 있는가? 그저 식객에 지나지 않는가? 중화전은 내 자신이 주인이 되겠다는 매운 의지를 벼리는 곳이다. - [無棄]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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