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고려의 시호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은 시호 제도의 새 지평을 연다. 고려시대에는 왕뿐만 아니라 공이 있는 신하들에게도 시호를 하사했다. 신숭겸에게 장절(壯節), 배현경에게 무열(武烈), 복지겸에게 무공(武恭), 홍유에게 충렬(忠烈)이라는 시호를 내린 것이 대표적 예다. 8대 현종 때에는 신라의 최치원에게 문창후(文昌候), 설총에게 홍유후(弘儒侯)라는 시호를 추증하기도 한다. 특히 역대 임금의 시호를 왕이라고만 칭하지 않고 중국 황제와 같이 조(祖) 또는 종(宗)이라 붙이는 조종법(祖宗法)을 따랐다.


이로써 시호와 묘호(廟號), 능호가 확실하게 정리되었다. 왕건의 시호는 신성(神聖), 묘호는 태조(太祖)이며, 능호는 현릉(顯陵)이다. 이러한 시호, 묘호, 능호의 부여는 원 간섭기 이전까지 일관되게 수행됐고 조선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시호와 묘호가 구분이 되기 시작한다. 묘호를 대강 정의하면 왕실의 사당(태묘나 종묘)에 배향할 때 붙이는 이름으로 왕에게만 추증되는 또 다른 시호다. 쉽게 말해 왕에 대한 호칭으로 조나 종자가 붙는 것을 묘호라고 일컫는다. 중국의 묘호 기준을 적용해보면 통일 이전의 삼국에서 묘호로 보이는 것은 고구려 태조왕과 신라 태종 무열왕이 전부다. 삼국 가운데 고구려는 묘호와 시호를 엄밀히 구분하지 않았던 것을 보인다. 묘호가 정형화되어 쓰인 것은 고려시대부터다.


중국의 은주(殷周)시대와 한대(漢代)에 걸쳐 묘호를 가진 임금이 있었으나 모든 임금이 묘호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당대(唐代) 이후에는 모든 황제가 묘호를 갖게 된다. 결국 묘호는 시호가 신하들에게도 수여되면서 왕을 좀 더 부각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기능했음을 알게 된다. 시호 인플레가 심화되면서 시호가 점점 늘어나 수십 자에 달하는 황제도 심심찮게 등장했다. 결국 묘호가 본래 시호의 역할을 대신해 그 왕의 치적을 평가하는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중국의 제후국을 자처한 조선왕조는 원칙상 묘호를 써서는 안 되었지만, 고려왕조부터 써오던 관례라며 대충 넘어가며 사용했다.


하지만 가장 강력하게 내정 간섭을 했던 외세인 원나라는 묘호나 시호를 우리의 뜻대로 쓰지 못하게 했다. 이 시기 묘호는 쓰이지 않았으며 시호마저 원나라 황제에 대한 충성심을 표기한다는 뜻으로 “忠○王”이라 썼다. 충렬왕 시기부터 중국의 사시(賜諡)가 단행되어 조선 말기까지 이어진다. 충자 돌림 시호는 왕이 신료들에게 내린 것과 마찬가지였으며 형식적이나마 중원의 황제가 동방의 제후에게 하사한다는 분위기를 풍긴다.


31대 공민왕은 원명교체기의 국제 정세를 이용하여 원의 연호와 관제, 예제 등을 철폐했다. 공민왕 6년(1357) 원의 시호를 받았던 임금들을 다시 추존해 충렬왕은 경효(景孝), 충선왕은 선효(宣孝), 충숙왕은 의효(懿孝), 충혜왕은 헌효(獻孝), 충목왕은 현효(顯孝)라고 시호를 올렸다. 고려 왕의 시호에 거의 들어가던 효(孝)자를 부활시킴으로써 자주성을 천명했다. 다만 30대 충정왕만은 시호를 올리지 않았는데 공민왕이 그를 몰아내고 즉위했기 때문에 정통성 문제로 말미암은 것으로 보인다.


6. 공민왕, 우왕, 창왕, 공양왕


공민(恭愍)이라는 시호는 명나라에서 준 것이다. 새로이 중원의 주인공이 된 명나라의 쩨쩨한 심보가 드러난다. 공(恭)은 공경하게 사대하라는 뜻일 테고, 문제는 민(愍)자다. 민은 그리 좋은 시자는 아닌데 나라에서 재난이나 반란을 만나고, 백성을 비통하게 하고 해친다 정도의 뜻이다. 잇따른 반란과 홍건적의 난, 왜구 등에 시달렸던 공민왕 치세의 파란만장함에 제법 어울리는 시호이기는 하지만 그의 적잖은 업적으로 볼 때 폄훼됐다는 느낌이 강하다.


민(愍)과 비슷한 의미를 갖는 시자(諡字)로는 회(懷), 애(哀), 도(悼), 상(殤) 등이 있다. 회(懷)는 행실은 자애로우나 일찍 죽은 것(慈行短折), 지위를 잃고 죽은 것(失位而死)을 일컫는다. 장수절의 시법해에 의하면 단(短)은 60세 못된 것이고, 절(折)은 30세가 못된 것이다. 애(哀)는 공손하고 어질지만 일찍 죽은 것, 도(悼)는 중년이 안 되어 요절한 것, 상(殤)은 요절하여 이루지 못한 것이다. 왕위에 올랐다가 요절하거나 뜻을 펴지 못했을 때 주로 쓰는 시자들이다.


한국사에서 이런 시자를 받은 임금을 대강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신라 제40대 애장왕(哀莊王)은 숙부 김언승의 반란 때 살해되었고, 제44대 민애왕(閔哀王)은 희강왕을 협박해 자살하게 하고 스스로 왕이 되었으나 김우징이 장보고의 힘을 빌려 쳐들어오자 패하여 병사들에게 살해되었다(閔은 愍과 상통하는 글자다). 제55대 경애왕(景哀王)이 견훤에게 핍박당해 자살하게 된 것은 유명한 사실이다.


고려 7대 목종(穆宗)은 처음에는 묘호가 민종(愍宗), 시호는 선령(宣靈), 능호가 공릉(恭陵)이었다. 이는 모두 목종을 시해한 강조(康兆)가 지은 것이라 현종(顯宗) 3년 묘호를 목종(穆宗), 시호는 선양(宣讓), 능호는 의릉(義陵)이라 고쳤다. 제14대 헌종(獻宗)의 시호는 회상(懷殤)이었다가 예종(睿宗)이 즉위한 뒤 공상(恭殤)이라 고쳤다. 헌종은 숙부 계림공 왕희에게 사실상 왕좌를 찬탈당하고 후궁으로 물러나 14세에 사망했다.


조선 8대 예종(睿宗)이 재위 13개월 만에 죽자 명나라에서 양도(襄悼)라는 시호를 주었다. 영조(英祖)의 둘째 아들이 뒤주 속에서 사망하자 영조는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다. 훗날 정조(正祖)가 즉위 후 10일 만에 사도세자의 시호를 장헌(莊獻)를 고쳤다. 도(悼)자를 바꾼 것으로 보아 높이려는 의도로 보인다. 여하간 회(懷)라는 글자에는 야니를 가슴에 묻고 간직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는 셈이다. 아마 옛사람들도 그랬으리라.


우왕은 공민왕이 부활시킨 고려 시법에 의거하여 인문의무용지명렬경효대왕(仁文義武勇知明烈敬孝大王)이라는 시호를 올렸다. 마지막 경효(敬孝)에서 효자 시호가 여전히 쓰였다. 고려에서 올린 시호가 엄연히 있는데도 불구하고 원나라와 명나라가 내려준 시호를 계속 쓰는 것은 『고려사』 편찬자의 시각을 그대로 답습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은 아닐지 염려스럽다. 가뜩이나 고려 후기의 왕들은 묘호가 없어 허전한데 말이다. 조심스럽지만 고려에서 올렸던 시호를 병기하는 시도를 해보는 건 어떨까 싶다.


고려 왕 가운데 시호를 아예 받지 못한 임금이 우왕과 창왕이다. 이성계 일파는 우왕이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라 신돈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면서 우왕과 창왕은 왕씨가 아니라는 우창비왕설(禑昌非王說)을 내세웠다. 폐가입진(廢假立眞)이라며 우왕과 창왕을 차례로 폐위하고 공양왕을 옹립했다. 조선의 개창자들은 더욱 잔인하게도 『고려사』에서 우왕과 창왕을 국왕의 연대기인 세가(世家)에도 넣지 않고 신우(辛禑)와 신창(辛昌)으로 부르며 열전(列傳)의 반역전(叛逆傳)에 편입시켰다.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恭讓王)의 시호는 신라의 경순왕(敬順王)과 마찬가지로 모욕적인 뜻이다. 공손히 왕위를 양보했다는 시호를 줘놓고도 결국 살해한 이성계 일파의 박절함이 밉살스럽다. 고려숭의회에서 펴낸 『여말충의열전』에서 우왕, 창왕, 공양왕은 조선의 왜곡된 호칭인 만큼 고려말의 유신(遺臣)들이 이네들을 지칭했다던 여흥왕(驪興王), 윤왕(允王), 간성왕(干城王)의 칭호를 준용(遵用)한다는 내용이 있다.


6. 조선의 시호


조선으로 넘어와서는 시호와 묘호, 능호가 잘 정리되어 별로 논쟁거리는 없다. 조선 왕의 시호가 길어져서 묘호의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더 커졌다고 할 수 있다. 가령 세종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世宗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은 묘호인 세종, 명나라에서 받은 시호인 장헌, 조선에서 올린 영문예무인성명효로 구성된다. 임금이 붕어하면 중국에게 시호를 받기 위해 청시사(請諡使)를 보냈다. 시간이 걸리는 관계로 그 전까지는 신하들이 올린 시호를 쓰다가 중국에서 시호가 도착하면 그 시호가 왕을 대표하는 호칭이 되었다.


그런데 『선원계보(璿源系譜)』를 비롯한 조선의 사서에는 명나라가 준 시호만 있을 뿐, 청나라가 줬을 법한 시호는 찾기 힘들다. 조선 숙종 때 역관이던 김지남이 아들과 함께 편찬한 『통문관지(通文館志)』라는 책에는 조선이 청나라로부터 청해 받은 각 왕들의 시호들이 모두 기록되어 있다. 인조는 장목(莊穆), 효종은 충선(忠宣), 현종은 장각(莊恪), 숙종은 희순(僖順), 경종은 각공(恪恭), 영조는 장순(莊順), 정조는 공선(恭宣), 순종은 선각(宣恪), 순조의 세자로 사후에 왕으로 추존된 익종은 강목(康穆), 헌종은 장숙(莊肅), 철종은 충경(忠敬)이라 했다. 충(忠), 각(恪), 순(順), 공(恭) 등이 많이 보이는 것에서 고분고분하기를 바랐던 청나라의 소망이 선하다.


조선에서는 인조를 비롯한 국왕의 사후에 청에게 시호를 청하여 받았으면서 이 시호는 청에게 보낸 외교문서 외에는 사용하지 않았다. 각 왕대의 실록에서도 청나라에 시호를 청한 사실만 기록되어 있고 어떤 시호를 받았는지는 기록하지 않았다. 공식 기록에 의도적으로 수록하지 않은 이 시호들을 굳이 열거한 까닭은 앞서 고려 말기 왕들을 격하한 것에 대한 항의의 뜻이다.^^; 청나라 시호를 사용하지 않은 까닭은 자주성이라는 측면보다는 일그러진 모화의식의 산물일 공산이 크다.


조선 왕에게는 묘호가 중요해지면서 묘호 인플레가 극심해졌다. 고려에서는 태조만이 조(祖)이던 것을 조선에서는 조(祖)가 붙은 왕은 7명이다. 조선 후기 묘호가 개상(改上)된 경우는 전부가 종(宗)을 조(祖)로 바꾼 것으로 볼 때 조를 선호한 듯싶다. 실제로 본래 선종(宣宗), 영종(英宗), 정종(正宗), 순종(純宗)이던 묘호가 선조(宣祖), 영조(英祖), 정조(正祖), 순조(純祖)가 되었다. 참고로 연산군과 광해군은 종묘에 들지 못했으니 당연히 묘호가 없고 왕자시절의 호칭을 그대로 쓴다.


조선조 묘호 산정이 편파적이었다는 지적이 많다. 1468년 세조가 재위 13년 만에 세상을 떠나자 신료들이 신종(神宗), 예종(睿宗), 성종(聖宗)이라는 세 가지 묘호를 올렸다. 묘호에 조가 들어가 있지 않았음을 비추어 볼 때 당대의 신료들도 세조의 찬탈 행위를 평가하는데 있어서 경계를 그었던 모양이다. 이를 탐탁지 않게 여긴 예종이 아버지는 국가를 다시 일으켜 세운 공이 있다고 문제를 제기해 결국 묘호가 세조가 되었다. 선종은 임진왜란을 극복한 공이 있다고 하여 선조가 되었는데 그 공로는 잘 도망 다녔다는 뜻이려나?


인조는 쿠데타를 일으켜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앉자 자신의 아버지를 본래 예법으로 대원군으로 삼아 정원대원군(定遠大院君)이라 칭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논란 끝에 왕으로 추존해 묘호를 원종(元宗)이라 했다. 대군이나 세자가 아닌 왕자가 추존왕이 된 것은 원종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1649년 인조가 죽자 열조(烈祖)로 묘호가 정해졌다. 조를 남발한 것도 모자라 인조(仁祖)로 묘호를 고쳤는데 소현세자가 의문사하지 않았으면 왕위에 오르지 못했을 효종의 이심전심 띄워주기인 셈이다. 병자호란을 자초하고 아들과 며느리를 억울하게 죽인 아둔하고 냉혹했던 인물에게 어질다는 묘호를 붙이다니 민망하다. 왕에게 있어 시호의 역할을 했던 묘호 산정이 이렇게 흐물흐물했다니 부끄러운 일이다.


대한제국 초대 황제인 광무제의 시호는 高宗統天隆運肇極敦倫正聖光義明功大德堯峻舜徽禹謀湯敬應命立紀至化神烈巍勳洪業啓基宣曆乾行坤定英毅弘休壽康文憲武章仁翼貞孝太皇帝이다. 고종은 묘호이고, 문헌무장인익정효(文憲武章仁翼貞孝) 8자는 시호로서 고종이 붕어한 후 올린 것이다. 고종과 문헌무장인익정효 사이의 50자에 달하는 존호는 고종 9년부터 순종 즉위년까지 생존해있는 고종에게 일곱 차례에 걸쳐 상호(上號)한 것이며, 태황제(太皇帝)라는 존호는 고종이 강제 퇴위를 당해 순종이 즉위했던 1907년에 봉책한 것을 고종 사후에 재추봉한 것이다.


망국의 황제가 누리기에는 너무 넘치는 시호였다고 생각했는지 일제는 이에 대한 시비를 걸었다. 고종·순종실록 감수보조위원(監修補助委員)으로 활동한 에하라 젠쓰이(江原善槌)는 고종실록의 편찬과정에서 실록의 권두에 실릴 고종의 시호가 일본 황실의 한 왕가로서의 지위에 저촉된다고 주장했다. 창덕궁 이왕인 순종황제가 덕수궁 이태왕인 고종황제에 대한 시호를 봉책하여 태황제라고 할 권능이 없으며, 순종이 올린 8자의 시호 역시 삭제해야 한다고 투덜거렸다. 결국 일제는 한일합방을 기점으로 하여 그 이전의 황권만을 인정하는 태도를 취했다. 한일합방 이후의 실록은 순종황제실록부록(純宗皇帝實錄附錄)으로 처리하고 제왕의 칭호도 격하시키고, 대한제국 황제의 재위년도나 연호 대신 일본의 연호를 사용했다.


7. 시호의 정신을 새기며


1456년 처형된 사육신이 1691년 숙종에 의해 시호가 내려진 것처럼 시호는 한 개인에 대한 역사의 엄정한 평가를 지향했다. 오늘날에 그 형식을 곧이곧대로 따를 것은 없어도 그 정신은 배울 점이 많다. 이런 일도 있었다. 조선 전기 문신이던 김국광이 뜻을 펴되 성취하지 못했다는 의미(述義不克)의 정(丁)자가 포함된 시호를 받았다. 아들 김극유는 4년 동안 열 차례가 넘는 상소를 올리며 시호를 고쳐주기를 청하였다. 성종과 대신들은 김국광이 현저한 과실이 없는데 나쁜 시호를 얻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시호는 바꿀 수 없다는 원칙을 고수해 끝내 바꿔주지 않았다.


그런데 그 원칙이 반드시 지켜진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한명회의 시호가 명성(明成)이라고 정해졌다. 생각이 과감하고 원대한 것(思盧果遠)을 명(明)이라고 했으나 자부심이 강하다는 뜻이 그리 아름답지 못하다는 문제 제기가 들어왔다. 성종은 결국 특명을 내려 명을 충(忠)으로 고치게 했다. 시호를 고치지 말 것을 상소한 신하들이 있었지만 성종은 당대의 세도가에 자신의 장인이었던 한명회의 시호를 마냥 외면하지 못했다.


이에 반해 고려 말의 권신 이인임의 시호는 황무(荒繆)로 정해졌다. 당시 전의부령(典儀副令)이던 공부가 그의 시호를 이렇게 짓자 종당(宗黨)이 이를 갈며 압박했지만 공부는 움직이지 않았다고 전한다. 황(荒)은 안팎으로 난이 생긴다, 방종하게 즐기면서 법도가 없다, 기강과 법도를 혼란스럽게 한다는 뜻이다. 무(繆)는 명분과 실제가 어긋난 것, 즉 명분은 아름다우나 실상이 손상되었다(名與實爽)는 뜻이다. 가히 한국사에 있어 악시의 대표 격이다. 이인임은 말년에 실각했으니 한명회와 같은 호사는 누리지 못했던 것일까?^^;


옛사람들은 시호 한 자에 웃고 울었다. 허울뿐이라고 구박해도 그만이지만 역사를 두려워하라는 시호의 참뜻을 되새길 필요가 있겠다. - [無棄]


<참고 문헌>
박영규, 『고구려왕조실록』, 웅진지식하우스, 2004
박홍갑, 『양반나라 조선나라』, 가람기획, 2001
신용호·강헌규, 『先賢들의 字와 號』, 전통문화연구회, 1997
이민홍 편, 『諡號, 한 글자에 담긴 인물 評』, 문자향, 2005
신명호, “조선시대 국왕호칭의 종류와 의미”, 『역사와경계』 제52집, 부산경남사학회, 2004, pp. 47~67
이민홍, “중원 시법(諡法)의 수용과 한국 역대(歷代) 제왕의 시호(諡號)”, 『한문학보』 제12권, 우리한문학회, 2005, pp. 485~509
이영춘, “『通文館志』의 편찬과 조선후기 韓中關係의 성격”, 『역사와실학』 제33집, 역사실학회, 2007, pp. 121~161
임민혁, “高ㆍ純宗의 號稱에 관한 異論과 왕권의 정통성 - 廟號ㆍ尊號ㆍ諡號를 중심으로 -”, 『사학연구』 제78호, 한국사학회, 2005, pp. 189~230
shyisna님이 올려주신 네이버 오픈 백과 “시호(諡號)”,  “시호(諡號) 사례분석”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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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대 대통령 취임식(사진 출처 - 노무현 홈페이지http://www.knowhow.or.kr)


떠나는 노무현 대통령님을 가엾게 여긴다는 건 황당한 일이다. 나는 그의 출세를 부러워할지언정 그에게 연민을 느끼지는 않는다. 그는 지난 5년 동안 최고의 권력을 누렸고, 퇴임한 후에도 월 1500만원의 연금과 경호원 및 비서관 등을 국가에서 지원 받는다. 이러한 예우는 그를 국가의 지도자로 삼았던 국민들의 품위를 위해서이기도 하다. 성공한 전직 대통령의 모범으로 꼽히는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을 본받으라고 여러 사람들이 충언하고 있다. 이 말에는 정치적 행보를 하지 말아달라는 주문도 적잖이 녹아들어 있다. 집짓기 운동으로 유명한 카터 전 대통령이 비정치적 행위만 했는지는 가늠하기 힘들다. 정치와 비정치를 가르는 기준은 애매하게 마련이다. 국가의 분배 구조에는 침묵하고, 자선 활동만 권장하는 식이라면 매우 기만적이다.


노 대통령의 임기 말을 조명한 MBC 스페셜 <대한민국 대통령> 2부에서 희망돼지 저금통 앞에서 목이 메는 장면에서는 가슴이 짠했다. 그는 옛 지지자들에게 미안함을 표할 기회를 너무 많이 놓쳤다. 그가 악의에 차서 지지자들을 배신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여러 차례 팽개쳐진 지지자들 가운데 끝끝내 그의 선의를 믿고 싶어하는 이들이 있다. 그네들 자신의 존엄성을 건사하고픈 심리 때문이라고 깎아 내리기 망설여진다. 적어도 경제만 살리면 그만이라고 외치지 않았던 분들에게 중독자나 광신도라고 헐뜯는 건 예의가 아니다. 노무현으로 상징된 가치의 소멸을 안타까워하는 측면이 있다. 열린우리당이 맥없이 무너진 후에 참여정부의 계승은 사실상 물거품이 되었기에 노무현 개인을 향한 편애에 의지하게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노무현이 그저 대통령이 되어준 것을 고맙게 여기는 지지자들도 있겠지만, 애증이 섞인 복잡한 감정으로 그를 보내는 지지자들이 더 많으리라.


고종석 선생님은 노 대통령을 개혁세력 전체를 분열과 절망의 나락에 빠뜨린 트로이 목마라고 비판했다. 노무현이 싫다는 분들이 달려간 곳이 한나라당과 이명박 정부라는 사실에 비추어 그런 비유가 나왔다. 그러나 중도 보수 혹은 개혁적 자유주의 세력은 목마를 성안에 들여서 망한 것이 아니다. 스스로를 모욕하고 나서 스스로 붕괴했다. 호남의 지역주의에 기대 연명했던 옛 민주당의 구접스러운 행각이나 올바른 패배를 마다해 정당 민주주의의 퇴행에 일조했던 옛 열린우리당 탈당파의 팔락거림은 노무현 탓으로 감추기에는 그 그림자가 너무 짙다. 아울러 노무현의 실패가 오늘날 넘실대는 도덕과 능력이 별개라는 낭만적(?) 사고와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지도 엄밀히 따져야 한다. 노무현이 우리 사회의 윤리적 감수성을 헝클어뜨린 분노를 고작 이런 식으로 표출한다면 정직한 절망 외에는 손쓸 방도가 없다.


노무현과 참여정부를 놓고 재평가가 이뤄질 거라는 견해에 동감한다. 그가 대한민국에 어떤 부정적 유산을 남겼는지도 차차 밝혀지겠지만 이제 노무현 때문이라는 핑계는 함부로 입에 담지 못하게 되었다. 노무현을 두고 벌였던 희생제의는 이쯤에서 그치고 노무현을 넘어설 정치 지도자를 찾는 노력을 해보자. 노무현에게 아쉬웠던 점을 메우면서 또 다른 매력으로 우리를 잡아끌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을 전망이다. 갖은 미움을 받았으나 현실 정치인 가운데 노무현만큼 대중성과 진솔성, 원칙과 가치를 제시한 교양 있는 지도자는 너무 드물다. 그 대중성은 굳건하지 못했고, 진솔성은 계산된 것이었으며, 원칙은 분열적이었고, 가치는 흐릿하다는 험담이 대개 온당하다고 수긍하더라도 말이다. 참여정부가 국민과의 소통에 실패해 민심을 잃었다는 주장이 많다. 노무현을 반겼던 서민에게 환멸을 불러일으켰던 뼈아픈 실책이다. 노무현을 실패한 대통령으로 인정하기 싫은 분들도 이 점에 대해 겸허한 성찰이 있어야 한다.


물론 일부 언론이 뒤틀린 해석도 모자라 신성한 사실마저 구부러뜨려 왔음은 또렷하다. 최근 일부 언론이 이명박과 그 둘레 사람들에게 너그러운 모습은 섬뜩하다. 앞으로도 이중 잣대가 춤춘다면 언론의 신뢰도는 다시금 흔들릴 게다(참여정부가 사실을 어그러뜨린 사례도 무수히 많다). 그네들이 장악한 기록을 넘어선 균형 잡힌 평가가 다만 시간이 지나면 가능할지 궁금하다. 편향된 사료를 남겨놓고 역사의 평가를 운운하는 건 비겁한 짓이다. 그 평가는 결국 노무현 정부의 긍정적 가치를 재발견하는 형식이 아니라 후임 정부의 실정에 견주어 부각될 상대적 돋보임에 그칠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당대에도 객관적인 성과 측정과 공정한 평가를 내렸는지를 살펴야 한다. 참여정부가 남긴 대통령기록물이 역대 정부에 비해 월등히 많은 까닭도 있는 그대로의 평가에 대한 욕망이 발현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고려 공민왕은 재위 기간 동안 『서경』 「무일(無逸)」편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고 한다. 「무일」편에 대한 강의를 들었으며, 이를 써서 신하들에게 나눠주거나 정무실에 걸어두도록 했다. 「무일」편은 주공(周公)이 조카인 성왕(成王)에게 남긴 정치적 조언이다. 주공은 군왕의 지위를 특권이 아닌 의무로 보아야 한다며 안일하지 말 것을 설파한다. 「무일」편은 왕의 근면 성실한 노력을 주로 강조하고 있다. 주나라 무왕이 기자(箕子)의 충고를 청하는 「홍범(洪範)」편은 군왕의 의사소통 능력에 주안점을 둔다는 의견이 있다(김영수, 『건국의 정치』, 이학사, 2006, 208~231쪽 참조). 군왕이 망국의 유신에게 국정을 묻는 자세가 인상 깊었기 때문인 모양이다. 기자는 무왕에게 ‘그대의 나라’라고 하지 않고, ‘그대의 왕가(王家)’라고 칭하며 주나라를 완전히 인정하지 않은 듯이 보이는데도 말이다.


부지런함과 의사소통은 양자택일의 문제라고 보기 힘들다. 우리네 지도자들은 마땅히 두 가지 덕목을 품어야 한다. 윤택(尹澤)은 공민왕에게 「무일」편을 강의하면서 “전하께서도 성왕이 능히 주공의 가르침을 듣는 모습을 본받으셔서 엄숙하고 공손하여 삼가고 두려워하시면 사직의 복이 됩니다(願殿下 法成王 能聽周公之訓 嚴恭抑畏 社稷之福)”라고 말한다(『고려사절요』 공민왕 6년(1357) 5월). 주공의 언설만큼이나 그 대화가 이루어지는 맥락을 배워야 한다는 강설이다. 다시 말해 기자의 말에 귀 담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주공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태도를 갖추길 바랐다. 「무일」편 끄트머리에는 주공이 훌륭했던 이전 왕들의 행실을 평가하는 대목이 나온다. 그들은 백성이 자신을 원망하고 욕할 때 스스로 마음가짐을 조심하여 ‘그 허물이 나의 허물이다’라고 말하며, 노여워하지 않았음을 칭송하는 내용이다. 노무현과 그의 사람들이 자기 탓에 서툴렀기에 그네들이 상처를 받는 것 이상으로 국민 가슴에 생채기를 냈다.


『목민심서』의 마지막 편은 ‘관직에서 물러남(解官)’이다. 벼슬에서 물러날 때의 자세를 서술한 내용인데 제6조는 ‘사랑을 남김(遺愛)’이다. 다산 정약용은 수령이 임지를 떠난 뒤에도 백성들로부터 기림을 받는 선정의 이상향이라 생각했다. 이미 떠난 뒤에도 사모하여 심은 나무조차 사람들의 아낌을 받는 것은 감당(甘棠)의 유풍(遺風)이라는 구절이 있다. 감당의 유풍은 『시경』에 나오는 이야기로 백성들을 위해 일하다 팥배나무 밑에서 쉬어간 지도자를 경애하여 그 나무조차 건드리지 않았다는 고사다. 노무현의 빈자리를 그리워하는 국민이 얼마나 될지는 잘 모르겠다. 노무현이 임기 중에도 실현하지 못한 가난한 사람들을 보듬는 일을 퇴임 후에 해내기를 기대하는 건 무모하다. 그는 강은 똑바로 흐르지 않지만 어떤 강도 바다로 가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고별사를 남겼다. 그가 염원하는 바다가 단지 힘센 벗들과의 어깨동무는 아니었으면 좋겠다. 노무현 대통령님을 좀처럼 미워하지 못했던 내가 드리는 마지막 덕담이다.


노무현을 만나고, 그의 시련에 같이 아파했던 지난날이 애틋하다. 그와 함께 내 젊음도, 고집도 저물었다. 내가 미련한 젊음 대신 유능한 점잖음을 택하고, 우직한 고집 대신 표변하는 영특함을 예찬할까 두렵다. 내 자신에게 얼마나 저항할 수 있을까. - [無棄]


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회는 더불어 사는 사람 모두가 먹는 것 입는 것 이런 걱정 좀 안 하고, 더럽고 아니꼬운 꼬라지 좀 안 보고, 그래서 하루하루가 좀 신명나게 이어지는 그런 세상입니다.
만일 이런 세상이 좀 지나친 일이라면, 적어도 살기가 힘이 들어서 아니면 분하고 서러워서 목숨을 끊는 그런 일은 좀 없는 세상, 이런 것입니다.

- 1988년 노무현 의원의 국회 대정부 질의 中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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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돈 그리고 개혁

사회 2007. 12. 12. 23:23 |

1.
세상을 떠나 홀로 서있는 사람(離世獨立之人)을 얻어 크게 써서 오래 묵은 폐습(因循之弊)을 혁파하려고 (왕이) 생각했다.
『고려사』 권132, 열전45, 반역6 신돈전


공민왕과 신돈은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나? 동상이몽은 아니었을까? 가장 먼저 이런 의문을 품어 본다. 공민왕 14년 이세독립지인(離世獨立之人) 신돈은 국정의 전반에 등장한다. 공민왕은 재위 23년 동안 원년, 5년, 12년, 20년 4차례에 걸쳐 개혁조서를 반포했다. 그런데 신돈 집권기의 개혁은 조서의 형태로 일괄적으로 제시되지 않았다. 사서의 기록에 산재되어 있어 복원하기가 힘들지만 많은 학자들의 연구로 어느 정도 정리되어 있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의 기록을 신뢰하지 않는 학자들은 신돈 집권기의 기록이 누락되어 그 시대를 온전히 복원할 수 없다고 푸념하기도 한다. 그 실례로 신돈 집권기 인사 이동 내역이 부족하다는 등의 이유를 든다. 하지만 기록이 없는 게 오히려 득이 되기도 한다. 가령 왜구의 침략을 분석한 기록을 보면 상황이 다르다. 신돈의 집권 이전 13년 간 44회, 집권기 5년 7개월 간 7회, 실각 이후 3년 간 23회 있었다는 기록을 들어 군사조직 개혁에 어느 정도 성공하였다는 주장이 있다. 물론 사서의 기록을 불신하는 측에서는 나쁜 기사는 빼놓지 않고 실었을 것이라고 항변하겠지만 말이다. 이처럼 신돈의 시대를 곱씹는 일은 부족하고 편향된 사료를 헤집어야 하기 때문에 어렵다.


공민왕 8년과 10년 홍건적의 두 차례 침입이 있었다. 개경이 함락되기까지 했고, 삼원수(三元帥)를 둘러싼 극심한 내부 알력도 있었다. 12년에는 흥왕사의 난으로 말미암아 홍언박을 비롯한 공민왕의 측근세력이 제거되고 무장세력이 권력의 일선을 자치했다. 그래서 12년에 발표했던 개혁교서를 선언적인 의미에 지나지 않았다고 폄하하기도 한다. 13년에는 덕흥군이 원나라의 세력을 이끌고 침공했으나 격퇴했고, 그 해 10월에는 원의 공민왕 복위교서가 도달했다. 이러한 내우외환을 가까스로 수습함으로써 공민왕은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이러한 안정 국면을 이용해 내정개혁을 도모한 것으로 보인다. 앞서 인용했듯이 신돈을 등용한 목적은 비단 무장세력의 제거를 통한 왕권 강화에 국한되지는 않았다. 신돈의 등용을 통하여 기존의 정치세력을 모두 억누르고 국왕 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하려는 의도는 공민왕이 기존의 정치세력들을 세신대족(勢臣大族), 초야신진(草野新進), 유생(儒生)으로 나누며 비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공민왕 5년에 있었던 반원 자주화이라는 대외적 개혁이 성공적이었다면, 사회경제적 모순을 타파하는 대내적 개혁은 신돈 집권기에 가장 빛났다.


신돈 집권기의 개혁은 민생문제의 해결, 정치운영의 정비와 교육개혁으로 요약된다. 가장 주목되는 건 역시 공민왕 15년(1366) 5월 전민변정도감의 설치다. 관리의 근무일수를 승진의 기준으로 삼은 순자격제(循資格制)의 실시, 성균관 중영(重營)과 과거제도 개편 같은 행동도 궁극적으로 전민변정사업을 보완하고 개혁세력을 끌어들이기 위한 정계개편의 일환이라 볼 만하다. 전민변정도감은 전(田)과 민(民), 즉 토지와 노비를 판정하는 기관을 말한다. 토지를 본래 주인에게 돌려주고 노비를 본래의 신분으로 만드는 기능을 하기 위해 꾸렸던 기구다. 기실 전민변정도감은 공민왕 시기의 고유 제도가 아니다. 고려 후기에 토지 및 노비에 대한 행정이 어지러워지자 원종 10년(1269) 처음 설치한 이래 충렬왕, 공민왕을 비롯해 우왕 14년(1388)까지 실시되었다. 『고려사』 식화지(食貨志)에는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이 원종 10년, 충렬왕 14년과 27년, 공민왕 원년, 우왕 7년과 14년에 두었다고 쓰여 있다. 공민왕 15년에 설치한 기록은 빠져있다. 식화지나 형법지(刑法志)에 신돈 집권기에 있었던 전민변정사업에 대한 기록이 명확하지 않아 애석하다. 이는 앞서 밝혔듯이 신돈 집권기가 조서의 형태로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지 않은 여파와 더불어 신돈에 대한 폄훼의 산물이다. 『고려사절요』에는 전민추정도감(田民推整都監)이라고 하고, 『고려사』 신돈열전에는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이라고 적혀 있다. 조금 용어가 다르지만 기능은 비슷했다고 본다.


고려말의 토지 문제는 체제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고 있었다. 당시 권문세족들은 평민들의 토지를 강제로 빼앗고, 국가의 땅을 몰래 차지하면서 조세는 내지 않고 백성들에게는 고리대를 받는 등의 수탈을 자행했다. 이를 시정하기 위한 고려말의 전민변정사업은 번번이 실효를 거두지 못했으나 신돈 집권기에는 제법 볼만한 것이 있었다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다. 신돈은 전민변정도감의 판사(判事)가 되어 전민(田民)을 권세 있는 무리들(豪强之家)이 강제로 빼앗아 차지해서 백성들은 병들고 나라는 여위게 되었다(病民瘠國)고 비판하며 변정사업을 시행한다. 신돈은 병든 백성(病民)만큼이나 여윈 국가(瘠國)를 걱정했을 것이다. 억울하게 토지를 뺏기거나 노비가 된 경우를 바로 잡아서 납세와 역(役)을 담당하는 양인이 느는 건 왕권 강화에도 이바지하기 때문이다. 혹자는 이런 연유로 신돈의 개혁이 친민중적이라 보기는 곤란하다고 말한다. 그도 그럴 것이 전민변정사업은 토지 겸병의 현실과 그 발생의 구조적 모순은 묵과했다. 사패전(賜牌田)의 폐단을 시정하고 농장(農莊)을 해체하려는 정성이 보이지 않는다. 신돈을 부정적으로 평가한 『고려사』 편찬자들은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2.
명령이 발표되자 많은 권세가와 부호들이 빼앗은 전민(田民)을 그 주인에게 돌려주었으므로 온 나라가 기뻐했다. 신돈은 하루건너 도감에 출근했으며 이인임과 이춘부 이하의 관리들이 소송을 듣고 결정을 내렸다. 신돈이 겉으로 공의(公義)를 가장하고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푼답시고 천민노예(賤隸)로서 양인이라고 호소하는 자는 모두 양인으로 만들어 주었다. 이에 주인을 배반한 노예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성인(聖人)이 나셨다”라고들 하였다.
『고려사』 권132, 열전45, 반역6 신돈전


이 기록을 따져보면 신돈이 소인들의 환심을 사는 인기정책을 써서 노비가 주인을 버리고 도망갔다는 비판이다. 성인이 났다는 열광도 신돈을 깎아 내리기 위해 인용했을 확률이 높다. 이 빈정거림이 신돈의 본모습을 추적하는데 결정적 증거로 활용된다니 아이러니다. 사가들은 신돈은 토지 및 노비 분쟁에서 편파적으로 판정(偏聽)했다고 비난한다(『고려사』 권111, 열전24, 임박전). 이는 바꿔 말하면 일반민의 입장에서 권문세족에게 불리한 판정을 내렸다는 뜻이다. 제임스 팔레 교수는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이행을 사회경제적인 의미는 거의 없는 정치변동이라 평가절하하면서도 전민변정도감이 실질적으로 소유권을 건드린 대담한 개혁 조치였다고 평했다(함규진, 『역사법정』, 포럼, 2006에서 재인용) 이러한 가설이 나오게 된 배경에는 당대에 잦았던 외침과도 상관이 있어 보인다.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으로 많은 전적(田籍)과 노비문서가 망실되었다면 관계 당국이 누구의 편을 드느냐에 따라 순식간에 처지가 바뀌기 때문이다. 신돈은 “노예로서 주인을 배반한 자들(奴隸背主者)”의 편을 들어서 기막힌 반전을 펼쳤다. 아무리 의미를 부여한다고 해도 전민변정사업은 대증요법에 지나지 않았다는 지적은 설득력 있다. 과전법(科田法)에 견주어 제도적 측면이 떨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신돈의 기용 자체가 제도를 초월한 것이었고 이러한 파격을 통해 개혁추진세력을 육성하고 제도화를 노린 건 아니었을까. 관료체제 정비 등과 같은 제도적인 보완이 개혁의 지속을 위한 노력이라고 볼 여지는 없을까.


아무튼 전민변정사업은 권력자의 선의와 양심에 맡겨진다. 이는 국왕의 강인한 의지와 결단에 의한 집행을 촉구했던 이색을 위시한 사전개선론(私田改善論)자들의 방법론이다. 그들은 전주를 1인으로 한정하는 일전일주(一田一主)의 원칙에 따라 조세징수권이 중첩되는 데 따른 폐단을 바로잡으려 했다. 합법적인 토지 겸병 대토지 소유자의 이익을 결과적으로 옹호하게 되는 셈이다. 조준과 정도전으로 대표되는 사전혁파론(私田革罷論)자들은 사전문제의 원인과 해법에 차이가 있었다. 혁파하려는 사전의 개념(소유권이나 수조권이냐)과 대상(합법적인 사전을 포함하느냐 마느냐)을 둘러싼 논쟁도 있어 비전문가가 보기에는 복잡한 측면이 많다. 개선론과 혁파론 모두 자신의 방안이 조종(祖宗)의 전법(田法)을 구현한다고 표명하고 있지만 분명 차이가 있다. 인간의 내면을 중시했던 이색은 제도 자체의 변경보다는 운영의 묘와 부분적인 제도 개선을 주창했다. 제도를 운영하는 주체의 관리나 수조권자의 책임의식 강화와 도덕성 함양이 필요하다고 봤다. 사마광의 구법당이 연상된다. 이에 반해 조준은 제도 개혁에 역점을 뒀다. 수조지의 몰수와 재분배를 주요 골자로 해서 합법적인 사전마저 혁파하려고 했다. 왕안석의 신법당에 비견될 이러한 시도는 고려의 통치체계가 붕괴시키고 새로운 사회질서를 세우려는 정치적인 목적이 다분하다. 사실 사전개혁에 반대했던 인물 가운데는 이성계 일파에게 직간접적으로 협력한 인물이 많다. 이네들은 사전이 혁파되더라도 경제적 기득권을 크게 훼손 받지 않았을 공산이 컸다. 그럼에도 양측이 갈등한 까닭은 사전개혁 논쟁이 단순히 경제적인 문제가 아닌 정치적인 문제였음을 말해준다.


물론 사전개선론자들은 경제적 기득권을 수호하려는 욕구가 충만했다. 그들은 최소한의 개량을 통해 현 지배질서를 존속하려는 측면이 적잖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전개선론자들을 수구의 온상으로 매도할 수 있을지는 조심스럽다. 사전혁파론자들에게서도 생산자인 농민계층에 대한 특별한 대책은 찾기 어렵다. 우여곡절 끝에 탄생한 과전법은 당초 혁파론자의 계획과는 많이 차이가 난다. 혁파론자들은 기본적으로 권문세족의 토지를 몰수해 일반 백성을 비롯한 모든 국민들에게 배분하려고 했다. 정도전은 권문세족들이 온갖 방해를 해서 본래의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탄하면서도 고려의 문란한 전제에 비하면 몇 만 배가 낫다며 자부했다. 하지만 혁파론자 가운데 정도전이 급진적인 입장이었음을 감안하면 혁파론이 일반민을 위한 개혁을 표방했지만 지배계층의 교체를 통한 권익을 추구하는 데 이용된 개혁은 아니었나 흘겨보게 된다. 조준의 혁파론과 이색의 개선론의 간극은 생각보다 작을지도 모른다. 민생을 내세웠지만 이는 다분히 역성혁명의 명분에 이용된 느낌이 짙다. 진정 권문세족의 극심한 반대 때문에 당초의 개혁안이 후퇴한 것인지 표면상 걸어놓은 구호와 달리 통치질서의 교체에 주안점을 두었는가는 생각해볼 문제다. 여하간 과전법은 권문세족의 개인 소유지는 그대로 두고 이에 대한 수조권을 국가가 가졌다. 수조권 토지와 불법적 탈세지는 몰수해 수조권을 재정비했다는데 그 의의가 있다.


과전법에 대한 다채로운 평가가 많아 취사선택하기가 어렵다. 과전법을 박하게 평가하는 이는 고려의 전시과(田柴科) 제도와 본질상 동일하다고 보기도 한다. 집권세력의 몰락과 신흥세력의 득세를 초래한 지배층 내부의 개혁에 그쳤다는 지적도 있다. 경자유전(耕者有田) 원칙에 따른 토지 소유권 조정이 아니라 수조권을 재분배했을 뿐이기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과전법상 토지(관직복무의 대가로 부여되는 토지) 수요가 늘어나 위기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는 비판은 신랄하다. 실제로 과전법은 공신, 관리의 증가로 사전이 계속 부족해졌고 세조 12년(1466) 과전법을 폐지하고 직전법(職田法)을 실시했다. 현직관료에게만 토지를 지급하다 보니 퇴직을 대비해 재직 중에 수탈이 심하다는 폐해가 생기기도 했다. 이러한 한계점이 토지 국유제를 관철하지 못했기 때문인지는 섣불리 판단하기 힘들다. 결국 농민의 사회경제적 지위의 향상은 단순히 지배층의 제도 개혁으로 만족할 사안이 아니었다. 조선 중기 이후 소유권에 기초한 지주전호제가 일반화되자 농민들은 창조적 방법으로 생산력을 향상시키고 소작쟁의를 통해 경작권을 인정받는 등의 공력을 기울였다. 소작농에서 자영농이 되기 위한 끈질긴 분투가 기득권 세력의 양보를 받아냈으리라. 이 험난한 과정은 기득권 세력이 스스로 기득권을 내어놓은 역사가 없다는 걸 담담히 증언해주고 있다. 광해군이 즉위하던 1608년 경기도에서 처음 시행했던 대동법이 전국으로 확대되는데 꼬박 100년이 걸렸다. 개혁은 결코 국민의 수준을 넘지 못한다. 민주주의 좋다는 게 뭔가. 그것은 계몽군주에게 기대지 않는 자세에서 출발한다.


3.
신돈의 개혁은 위법적인 토지 점유를 방지하고 감찰과 재판 위주로 진행되었다. 전국적으로 얼마만큼의 실효를 거두었는지는 기록상으로 확인하기 힘들다. 다만 공양왕 4년 2월의 인물추변도감(人物推辨都監)이 정한 소송법에서 공민왕 15년 당시에 내려졌던 전민변정도감의 판결을 인정해준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 정확성을 짐작하기도 한다(『고려사』 권85, 지39, 형법2, 소송조)<각주>. 신돈의 개혁은 일견 사전개선론자들의 논리와 유사하고, 심화된 문제의식을 보여주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신돈의 전민변정사업의 흐지부지되자 더 이상 이런 수준의 개혁마저도 속행되지 못했다. 신돈의 몰락 후에 발표된 공민왕 20년의 개혁에는 토지관계 조항이 하나도 없어 신돈의 개혁을 부정하는 세력에 장악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신돈의 개혁마저 감내하지 못했던 고려는 자체 정화능력을 상실한 듯싶다. 신돈이 상대적으로 돋보였던 것은 어느 정도 실제적 효과를 거둬 일반민의 기대를 충족시킨 실행력에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즉 내용상에서 큰 차이가 없었더라도 이전과는 달리 신속하거나 광범위하게 추진했다. 물론 신돈의 지지세력에는 부원배나 권문세족들이 참여해 개혁주체와 개혁대상이 뒤섞인 측면이 있다. 여기다가 국왕의 신임에 의해서 권력을 행사하는 취약한 기반 때문에 전제개혁을 추동할 능력에 한계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돈의 정책이 한시나마 실효를 거뒀다면 집행역량을 바탕으로 기층 민중에게 정책 신뢰성을 획득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추측해본다. 이러한 실천적 모습은 사전혁파론자의 적극적 자세와 잇닿는 면이 있다. 아니 신돈의 개혁이 실패했다고 인정하더라도 사전혁파론자들은 이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아 자신의 주장을 채워나간 것은 아니었을까? 여기까지 생각이 미쳤으나 망설여지는 건 역시 조선조 사가들의 갖은 악평이 마음에 걸리기 때문이다. 신돈에 대한 사료는 정사가 유일하다. 신돈은 신하로서의 법도를 무시하고, 뇌물과 아첨을 좋아하고 여색을 밝혔으며, 호화주택을 과다하게 보유했다는 등의 비난을 받는다. 신돈의 사치와 방탕이 과장되었다는 심증이 있으면서도 그의 도덕성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막막하다. 1968년 민현구 교수의 연구 이후에 신돈이 개혁가였다는 의견이 다수를 차지하게 된다. 새로운 사료가 나오지도 않았으면서 행간의 의미를 재해석했기에 개인적인 추단이라는 비판이 가능하다. 그렇지만 조선 건국을 정당화하기 위해 고려 말기의 사필이 왜곡되었다는 건 통설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우창비왕설(禑昌非王說)이다.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으로 우왕이 폐위될 때도 그의 정통성은 부정되지 않았다. 그런데 1389년 우왕 복위사건이 벌어지자 비로소 가짜를 몰아내고 진짜를 세운다(廢假立眞)는 대의를 내걸고 우왕을 신돈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 잔혹한 조작은 고려 말기의 사료가 얼마나 윤색되었을까 불안하게 한다. 당대의 기록이 허구라면 오늘날 과연 실체적 진실을 복원 가능할까라는 회의가 든다.


그러나 중기(中期) 이후로 임금노릇을 잘하지 못하여 안으로는 폐신(嬖臣)에게 혹(惑)하고 밖으로는 권간(權姦)에게 제어(制御)되었으며, 강한 적들이 번갈아 침노하여 전쟁이 빈번하였고 나라가 쇠퇴(衰退)하여 가성(假姓: 우왕(禑王)을 신돈(辛旽)의 아들이라 한 것)이 왕위를 빼앗아 왕씨(王氏)의 제사가 끊어지기에 이르러서 공양왕(恭讓王)이 반정(反正)하였으나, 마침내 어둡고 나약해서 스스로 멸망에 이르고 말았으니, 대개 하늘이 진주(眞主)를 낳아서 우리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신 것은 진실로 사람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고려사절요』를 올리는 전(箋)


하늘이 장차 한 나라를 망하게 할 때에는 반드시 어리석고 도리에 어긋난 임금을 내고, 마음이 간사하고 흉역(凶逆)한 신하로써 그 사이에서 죄악을 양성(釀成)하여 임금을 미혹시키고 정신을 손상시킨 뒤에야 나라도 따라서 망하게 됩니다. 고려는 개국한 지가 장차 5백 년이 되어 가므로, 하늘의 돌보아줌이 이미 느슨해져 어리석고 도리에 어긋난 공민왕을 내었으며, 또 간사하고 흉역한 신돈을 내었습니다.
『동국통감』 공민왕 20년(1371) 신돈 처형 후 사론


이처럼 조선시대의 사서를 보면 악의 화신으로 묘사되는 신돈의 자식이 왕위에 올랐으니 고려의 멸망은 천명이라는 논리가 도출된다. 오백 년 고목을 찍어내기가 녹록지 않았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신돈과 우왕 부자는 망국의 필연성을 입증하기 위한 희생제의였다. 신돈이 조선시대에 갑자기 악마성의 표지가 된 건 아니다. 정사의 기록을 수용한다면 그의 집권기 전후로 이미 반대하는 많은 이들이 있었다. 신돈의 시책에 대한 반발이었든 그 자신의 덕망이 부족해서 빚은 문제였든 간에 신돈은 당대에도 적잖은 미움과 견제를 받았다. 공고한 연줄망 속에서 고립되지 않고 권력을 행사하기 위해 정적들을 과도하게 징벌한 면도 있다. 자신의 권세가 지나치게 커져서 시기심 많은 왕이 이를 꺼릴까 두려워 반역을 모의했다는 기록은 도무지 받아들이기 힘들다. 나 또한 신돈의 죽음은 공민왕의 선택이었다는 견해에 동조한다. 신돈 권력의 비대화가 우려되었을 수도 있고, 측근정치로서의 쓸모가 다했을지도 모른다. 이런 요인과 더불어 중국대륙의 판도 변화도 작용했다고 본다. 신돈의 집권기에 공민왕은 노국공주의 영전을 짓느라 애썼다는 건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그러나 공민왕은 17년(1368) 1월 명나라가 건국되고, 그 해 8월 명이 원나라의 대도(大都)를 함락시키는 국제정세를 챙기고 있었던 모양이다. 명나라의 침략되는 만큼 내정개혁을 보류하고 무장세력을 주축으로 전시태세를 갖추고, 권문세족의 경제력을 지원 받기 위해 신돈을 처형했다. 왕의 결단이 적절했는지 여부는 각자의 판단에 맡긴다.


신돈은 집권 초기에 왕에게 건넨 말대로 “백성들로 하여금 조금이나마 평안을 누리게 한 연후에 옷 한 벌과 바리때 하나만 들고(一衣一鉢) 다시 산으로 돌아갈 생각”이 서서히 가셨는지도 모른다. 절대권력 앞에 그라고 절대부패하지 않았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요승이라는 누명을 벗겨줘야겠다는 욕심이 지나쳐 그를 너무 과대평가하지는 않았나 돌아본다. 그래도 그가 죄보다 많은 벌을 받는 건 안쓰럽다. 이는 반대로 조선 건국자가 공보다 많은 상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된다. 조선 건국이 고려 후기의 심각한 체제 동요를 극복하고 민생 안정을 이뤄 역사 발전을 일구었다고 하자. 우리는 이 대목에서 목적은 수단을 어디까지 합리화할 수 있는가, 결과만큼이나 과정을 중시해야 하는가와 같은 물음을 품어야 한다. 어제를 기억하고 내일의 좌표를 삼는 건 목적과 수단, 과정과 결과 사이의 끊임없는 긴장일 테다. 여말선초를 단순히 개혁과 반개혁의 대립으로 가르지 못하는 이유다. 개혁은 절대선도 아니고 불완전한 인간이 행하는 개혁은 늘 언제나 무결하지 못하다. 우리는 실패한 개혁의 역사를 많이 접했다. 개혁은 기득권층의 저항으로 허물어지기도 하고, 지지층의 환멸로 어그러지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스스로 권태와 부단히 싸워나가야 한다. 스스로를 욕되게 한 다음에 남으로부터 모욕을 받는다는 말씀을 실감한다. 개혁을 말하는 이들이여, 부디 실패에서 배우시길. 원칙 있는 패배 또한 아름답지 않는가. - [無棄]


<각주>
병신년(丙申年) 이전에 소송에 대한 명확한 문건이 없으므로/없는 것, 정미년(丁未年) 이전의 일과 무진년(戊辰年) 이후 변정도감 및 도관(都官)이 이미 판결한 것은 다시 신고하지 못한다.
丙申年前無爭訟明文 丁未年前事及戊辰以後 辨正都監及都官已決者 不許陳告
『고려사』 권85, 지39, 형법2, 소송3
* 형법지 소송조에는 4건의 기사가 있다. 논의의 편의상 순서대로 소송2, 소송3, 소송4라고 번호를 매겼다.


이 구절에서 병신년이 공민왕 5년(1356)이고, 무진년이 우왕 14년(1388)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문제는 정미년이다. 공민왕 16년(1367)과 충렬왕 33년(1307)으로 견해가 갈린다. 일찍이 민현구 교수는 無爭訟明文을 병신년 이전에는 소송의 명문이 없어 논의될 여지가 없으므로, 이 때를 상한으로 그 이전은 문제삼지 않는다는 내용으로 보았다(민현구, “辛旽의 執權과 그 政治的 性格(下)”, 『역사학보』 제40집, 역사학회, 1968, pp. 53~119 참조). 다시 말해 1356년 이전의 쟁송명문이 없다는데 1307년을 거론하는 건 모순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丁未年前事는 공민왕 5년~15년(1356~1366)까지를 가리키게 된다. 공민왕 15년은 신돈이 전민변정사업을 주재하던 시기이기 때문에 당시의 판결을 인정한다는 자료가 되는 셈이다.


하지만 한국학중앙연구원 역주본은 소송3의 바로 앞 기사로 공양왕 3년의 상소문을 실은 소송2에 忠烈王丁未年以前事라고 명기된 구절이 있는 만큼 충렬왕 33년(1307)로 보는 게 더 적절하다고 봤다(김일권 외, 『고려시대연구 8』, 한국학중앙연구원, 2005 참조). 그래서 無爭訟明文을 “쟁송한 명문이 없는 것”이라고 풀이해 상한으로 삼는다는 내용이 들어가지 않는다. 다시 말해 1307년에서 1356년 사이에도 쟁송한 명문이 존재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또 정미년이 충렬왕 27년(1301)에 설치된 전민변정도감의 활동을 의미한다거나, 충숙왕 원년(1314)에 완성된 전적(田籍)인 갑인주안(甲寅柱案)의 작성 이전 시기를 통칭한다는 논거가 있다. 하지만 이렇게 볼 경우 굳이 1307년이라는 기준을 세웠어야 했느냐는 물음이 남는다.


본문에서는 정미년을 민 교수의 견해에 따라 1367년으로 봤다. 오기나 결락이 없다고 가정할 때 정미년을 1307년으로 볼 근거는 충분하다. 그렇지만 어색한 부분도 다소 보인다. 소송2는 토지에 관련된 기록이라면 소송3은 노비에 관한 기록이다. 비슷한 문장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정책목표가 다소 다른데 같은 기준을 써야 할 필요가 있었을까 싶다. 민 교수도 충렬왕 1307년 무렵에 노비 변정(辨正)에 관한 별다른 기록이 없다고 논설한다. 그나마 인접한 시기인 1301년의 전민변정사업은 유명무실했다고 평가받는다. 아울러 소송4의 기사를 보면 “신축년(辛丑年) 겨울에 적이 수도를 범하였을 때 공사 문권이 망실되어 거의 다 없어졌는데, 간악한 자들이 이것을 계기로 하여 사건의 단서를 꾸며 일으키고 있다”면서 신축년의 쟁송명문이 없는 자는 다시 소송을 제기하지 못하게 하라는 상소가 나온다.


여기서 신축년의 일은 공민왕 10년(1361) 홍건적이 개경을 점령한 사건을 말한다. 수도가 함락되었으니 1361년 이전의 쟁송명문이 상당수 소실되었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1356년 이전의 쟁송명문도 마찬가지로 많이 망실되었을 텐데 1307년이라는 기준을 내세우는 건 동떨어진 감이 있다. 설령 1307년이 맞다고 해서 그것이 신돈 집권기의 판결 효력이 완전히 부인되는 건 아니다. 소송2, 소송3 기사 모두에서 “다섯 번의 판결에서 세 번 이긴 것과 세 번의 판결에서 두 번 이긴 것을 따른다(五決之三 三決之二/五決從三 三決從二)”라고 했는데 신돈 집권기에 이루어졌던 판결의 효력은 이 대목에서 인정받을 수 있다. 그런데 “다섯 번 심리할 것을 세 번으로 하고 세 번 심리할 것을 두 번으로 한다”라고 해서 판결의 신속성을 강조하는 문구로 해석하면 또 달라진다.


이처럼 해석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신돈의 실각 이후에 신돈 집권기의 판결이 아예 배제되었을 가능성도 무시하기 힘들다. 고려말 여러 전민변정사업 가운데 신돈 집권기가 가장 성공적이었다는 평가가 지나쳤을 수도 있다. 이런 머뭇거림에 얽매이지 않고 정사의 기록을 비판하며 재해석하려는 입장에서는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겠다. 신돈 집권기의 성과가 철저히 부정된 증거라고 투덜거릴 여지가 많기 때문이다.^^; 정사는 우왕과 창왕 아래서 녹을 먹던 이들이 우창비왕설을 내세우고, 그네들이 진짜라고 옹립했던 공양왕마저 비참하게 죽였던 자들의 기록이다. 그네들의 양식을 얼마나 신뢰해야 하느냐를 따지는 건 참 고심스럽다. 애매한 자구 해석은 이 정도 톺아봤으면 됐지 싶다. 들인 품에 비해 실익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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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익구
:

다시 짓는 공민왕사당

문화 2007. 11. 26. 15:34 |

지난 11월 3일 있었던 공민왕사당 답사에 함께 해준 청원이에게 깊은 고마움을 표합니다.^0^

<다시 짓는 공민왕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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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흥창역을 나오자마자 보이는 안내 표지판이 고맙다. 공민(恭愍)이라는 시호는 명나라에서 준 것이다. 우왕은 공민왕이 부활시킨 고려 시법에 의거하여 인문의무용지명렬경효대왕(仁文義武勇知明烈敬孝大王)이라는 시호를 올렸다. 공(恭)은 공경하게 사대하라는 뜻이다. 민(愍)은 나라에서 재난이나 반란을 만나고, 백성을 비통하게 하고 해친다 정도의 뜻이다. 잇따른 반란과 홍건적, 왜구 등에 시달렸던 공민왕 치세의 파란만장함에 어울리기는 하나 그의 적잖은 업적으로 볼 때 깎아 내렸다는 느낌이 짙다.



“이건 뭐냐!” 친구의 탄식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창전동 공민왕사당은 전면 보수공사를 하고 있었다. 나는 평소에도 문이 닫혀 있어 들여다 볼 수 없는 곳인 만큼 노여움(?)을 풀라고 다독였다. 친구가 고른 저녁 메뉴가 실망스러웠기에 망정이지 지청구가 더 날아올 뻔했다. 사실 크게 알려지지 않은 문화유산을 찾다 보면 개방하지 않는 곳도 많고 퇴락해서 안쓰러운 경우도 흔하다. 함께 온 벗에게 미안한 마음에 마포구청에 몇 가지를 물었다. 마포구청 문화체육과에서는 사당 보수공사에 관한 안내가 부족해 문화재 관람에 불편을 끼쳐 죄송하다고 말씀해주셨다. 노후된 사당을 보수하는 공사는 10월 초에 착공하여 12월 초에 완료될 예정이라고 한다. 보수를 마쳐도 종전과 마찬가지로 화재예방 및 사당내부 소품 보호를 위해 개방하지 않을 계획이란다.


창전동 공민왕사당은 조선 초기에 양곡창고인 광흥창에서 일하던 창고 관리인의 꿈에 공민왕이 나타난 것을 계기로 지어졌다고 한다. 조선 초기에 공민왕을 모시는 건 반역으로 몰리기 십상이다. 그래서 삼불제석(三佛帝釋)을 모시고 신당 또는 당집으로 부르다가 정몽주 등 고려의 충신들이 복권되던 1790년경 비로소 공민왕사당이라고 이름을 바꿨다. 일제 강점기 때 화마를 입었다고도 하고, 한국전쟁 때 파괴되었다고도 한다. 소실된 사당을 주민 스스로 건축했다고 전해지고 있어 민간 전통건축기술 수준을 헤아리게 하는 자료로 평가되어 등록문화재 제231호로 지정되었다. 공민왕의 위대성은 그 당시에도 인정받은 모양이다. 조선이 건국된 후에도 공민왕에 대한 제사는 이어졌다. 이러한 숭모 분위기가 이어져 창전동뿐만 아니라 종묘 안의 공민왕신당이나 경북 봉화군 청량산 공민왕당 등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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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사당은 와우산 아래 광흥창터에 인접해 있다. 공민왕사당의 터는 옹색해서 도무지 사진 찍을 각도가 나오지 않는다. 사당 옆의 담들은 고즈넉한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다.


『서울 民俗大觀』 1권과 『마포 : 어제와 오늘, 내일』이라는 책에 공민왕사당의 내부를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사진 자료들이 다수 있다. 공민왕사당에는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신상 외에도 최영장군과 마부, 삼불제석과 동자상 등이 걸려있다. 공민왕 신상은 제법 화격(畵格)이 있는데 황색 곤룡포가 미려하고 호피무늬 의자가 위엄을 더한다. 조선 건국을 정당화하기 위해 고려 말기의 사적들이 상당 부분 날조되었음은 널리 알려졌다. 붓이 굽었던 건 오백 년 고목을 찍어 넘기기가 만만치 않았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망국의 필연성을 입증하기 위한 희생제의였던 셈이다. 공민왕이 시기심이 많고 잔인했다는 『고려사』 편찬자들의 험담과는 달리 넉넉한 신상의 모습이 반갑다. 공민왕은 고려의 대표적 화가로 손꼽히며 글씨도 잘 썼다는데 예술가적 풍모가 얼마나 녹아나느냐가 공민왕 어진의 알맹이가 아닐까 싶다. 과연 서울에서는 보기 드문 고려시대 인물과 관련된 문화유산이라 할 만하다. 우리는 옛것이라고 하면 으레 조선시대만 떠올린다. 우리네 유구한 전통에 감춰진 여러 겹의 속살을 헤집기 위해서 고려도 알고, 근현대도 탐구하는 의식적 노력을 기울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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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는 없었던 일각문(一角門)을 새로 만드는 듯싶다. 90년대 초 사진을 보니 투박한 철문을 달아놓았는데 그 후 태극문양을 집어넣었다. 점점 사당의 모양새를 갖추어 간다.


등록문화재 제도는 1876년 개항 이후 한국전쟁에 이르는 동안 만들어진 근대문화유산을 효율적으로 보존하기 위해 2001년 7월 도입됐다. 그동안은 일제 잔재라는 오명과 개발 광풍 속에서 멸실되기 일쑤였다면, 이제는 오늘이 쌓여 역사가 된다는 평범한 진리를 곱씹게 해준다. 등록문화재 제도가 정착된다면 일상의 흔적들에 대한 기록과 보존도 한층 강화될 전망이다. 등록문화재 제도는 지정문화재 제도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한 정책이다. 중앙정부나 지자체 지정문화재가 각종 규제를 수반하고 있어 재산권 침해가 불가피한데 견주어 등록문화재는 보존이나 활용에도 융통성이 많은 편이다. 소유자 중심형 문화유산 보호제도로서 국가는 각종 혜택을 통해 소유자의 활용 의사를 북돋워주는 방식인 셈이다. 흥미로운 등록문화재들이 많지만 공민왕사당도 매우 이채롭다. 근대에 지어졌지만 그 안에 담겨진 내용물은 600년도 넘는 옛날이다. 공민왕의 험난한 좌절을 따가워하기 좋은 곳이다.


공민왕은 민간신앙에서 받드는 몇 안 되는 임금이다. 무당을 소재로 한 소설 『계화』에는 “무당은 행복한 사람들을 볼 수가 없다”라는 구절이 있다. 공민왕을 기리는 민중이 있다는 건 그 불운함에 대한 동정인지도 모른다. 무속은 비운의 죽음일수록 오히려 각별하다. 공민왕의 억울함이 우리네 서글픔과 잘 포개진다는 믿음이 생기는 것이리라. 한국인에게 곧잘 한(恨)의 정서가 있다고들 한다. 이는 결국 한스러움이 살아가는 사람의 생활을 너무 헝클어뜨려서는 안 된다는 문화다. 한은 풀어야 하는 것이다. 이를 체현한 것이 마을굿이며 공민왕의 한을 푸는 것이 공민왕사당제다. 인습을 버리고 전통문화를 선택적으로 계승하자는 주장은 동감할 만하다. 하지만 그런 명분으로 서민의 소박한 기원을 무시할 용기는 내게 없다. 고통에 대한 연민과 무병장수에 대한 갈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오늘날 지역화합의 마당으로 살리는 방안을 고심해봤으면 좋겠다.


옛 기록을 살피다 보면 공민왕의 개혁이 어찌나 지난했던지 가슴이 짠하다. 부원배를 몰아내는 건 고난의 연속이었다. 신돈의 개혁에 얼마나 많은 저항이 있었는지를 엿본다. 북방을 개척했던 장수 인당의 목을 베어 원나라의 분노를 달랠 때는 참담했다. 관제를 격상시켰다가 다시 격하시키고, 원나라의 연호를 정지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명나라 연호를 사용하는 역경에 마음이 아렸다. 명나라 사신이 기녀의 실수를 트집잡아 항의하자 시중 염제신이 유배되는 대목에서는 괴로웠다. 공민왕이 노국공주가 돌아가자 애이불상(哀而不傷)에 실패해 총기를 잃은 게 단지 성정의 모자람 때문은 아니었다. 숙명은 그의 의지를 압도했다. 그러나 정치적 인간에게 가장 무서운 일은 결과로서 책임져야 한다는 점이다. 듣기 좋은 개혁 구호를 늘어놓는 지금의 지도자들이 경계 삼을 일이다. 부정적 지식(negative knowledge)이라는 말이 있다. 실패나 실수, 잘못으로부터 얻는 지식을 일컫는다. 우리는 성공보다는 실패로부터 많이 배운다. 고초 속에서 잉태되는 개혁을 입으로만 외치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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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사당은 맞배지붕에 2칸으로 된 건물이다. 사당 옆으로는 들여놓은 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운동기구가 있다. 맞은 편에 아파트 공사가 한창인데 주민들의 편안한 휴식처로 활용될 것 같다.

영구히 보존하는데 주안점을 두는 지정문화재와는 달리 등록문화재는 외관을 크게 변화시키지 않는 범위에서는 고치거나 증축이 가능하다. 사당을 새로 짓는 모습을 보며 저래도 되나 싶었던 내 궁금증도 멀끔히 풀렸다. 아마 보수공사를 결정한 중요 원인이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기 때문이리라. 등록문화재 지정을 전후로 훼손된 근대문화유산들이 적잖다고 들었다. 다행히 공민왕사당은 마포구민의 지속적인 관심 덕에 새 단장을 준비하고 있다. 매년 열리는 공민왕사당제에 힘입어 이 작은 사당이 지역주민들과 어그러지지 않고 친숙한 존재로 각인된 덕분이다. 근대문화유산의 가치는 찾기 나름이고 가꾸기 나름이다. 서운해하던 친구에게 등록문화재의 취지를 설명하고 금단청까지 잘 마르면 다시 찾아오자고 권해야겠다. 가서 고하리라. 대왕 당신을 도무지 미워할 수 없었다고. - [無棄]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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