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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3.26 한국의 시호(諡號) 탐구(1)
  2. 2009.03.26 한국의 시호(諡號) 탐구(2)
  3. 2007.10.22 개를 위해 시호를 짓다 2

2007년 10월에 썼던 <한국의 시호(諡號) 탐구>를 증보한 잡글입니다. 인터넷 상에서 몇몇 분들이 이전 글을 퍼가셨던데 한없이 부끄럽습니다. 일부 오류를 다잡고 내용을 보강했습니다.


1. 시호란 무엇인가?

한자문화권 사람들은 한 개인의 상징인 이름(名)을 존중하는 경명사상(敬名思想)이 있었다. 부모가 지어준 이름은 임금, 부모, 스승 앞에서나 썼고, 남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는 피휘(避諱) 전통으로 말미암아 이름을 대신한 자(字), 호(號), 시호(諡號) 등을 썼다. 우리 선조들은 피휘를 지켜 조상이나 군주의 이름과 같은 이름은 절대로 작명하지 않았다. 임금의 본명에 들어가는 글자는 공문서와 사문서 모두에 사용이 금지됐다. 정조(正祖)의 휘인 산()처럼 대다수 임금들은 왕자의 이름을 지을 때 벽자(僻字)로 지었다. 아예 없는 글자를 만들어 쓰기도 했는데 그래야만 피휘하기 쉽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사람의 이름도 함부로 부르지 않았는데 죽은 사람의 경우에는 더했다. 시호(諡號)란 죽은 이의 행적을 살펴 붙여주는 존호(尊號)의 일종이다. 왕족, 제후, 공신, 학자를 비롯한 빼어난 행적을 남긴 사람 등이 죽으면 나라에서 시호를 올리거나 하사했다. 이순신과 제갈량이 받은 충무(忠武)는 가장 널리 알려진 시호 가운데 하나다. 시호도 넓은 의미의 호이지만 일반적인 호와는 달리 사후에 생시의 행적을 평가하여 국가가 망자에게 내린 칭호이다. 특히 왕으로부터 시호를 받는 것을 이름을 바꾸어주는 은전(易名之典)이라고 하여 당사자나 자손의 큰 영광으로 삼았다.


시호는 대개는 높은 벼슬을 한 사람에게 내려지는 게 관례다. 하지만 관직에 뜻을 두지 않아 큰 벼슬을 하지 않았던 김시습은 청간(淸簡), 서경덕은 문강(文康), 조식은 문정(文貞)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이와 반면에 학문이 높고 덕망이 있음에도 시호가 없는 경우에는 교우나 제자, 친지나 고향 사람들이 추도하는 의미로 시호를 짓기도 했다. 나라에서 지어준 시호와 구별하여 사시(私諡)라고 한다. 조선시대에 시호를 정할 때 보통 세 가지 안을 내는데 이를 시호망(諡號望)이라 한다. 1안을 수망(首望). 2안을 부망(副望), 3안을 말망(末望)이라 부른다(비단 시호를 정할 때뿐만 아니라 사람을 뽑거나 할 때도 이러한 3안제를 쓴다).


2. 시호 짓는 법

시호는 살아있을 때의 업적을 참작해 몇 개의 자(字)로 집약한다. 본래 시호의 취지는 착한 일을 한 분에게는 선시(善諡)를 주고, 나쁜 일을 한 이에게는 악시(惡諡)를 주어 후대의 귀감과 경계로 삼는 것이다. 진시황(秦始皇)은 전국을 통일하고 자식이 아비를 평가하고 신하가 왕을 평가하는 것은 부당하다며 시호 제도를 폐지한다. 진시황은 자신을 시호로 부르지 말고 시황제(始皇帝)라 부르도록 명했으며 다음 왕을 이세황제(二世皇帝), 삼세황제(三世皇帝)라 하여 자자손손 이어나가기를 바랐다. 과연 진시황다운 발상이다.


그러나 중국 한나라 이후 시호 제도는 부활해서 점점 정교하게 발달했다. 중국이나 한국 모두 후대로 내려올수록 악시를 짓는 일이 줄어들고 좋은 뜻의 시호만 짓게 되는 경향이 심화된다. 시호를 한번 지으면 거의 고치기 힘든 점에 비추어 기왕이면 좋게 지어주려는 경향은 옛날부터 있은 모양이다. 『논어』에는 자공(子貢)이 공자에게 위(衛)나라 대부였던 공어(孔圉)의 시호가 어째서 ‘문(文)’이냐고 묻는 대목이 나온다. 듣기에 따라 시호 인플레를 따지는 질문이다. 공자는 “명민하면서 배우기를 좋아하고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니, 이에 그를 文이라 이른 것이다(敏而好學, 不恥下問, 是以謂之文也)”라고 설명한다.


시호로 쓰는 글자는 제한되어 있는데 문(文)뿐만 아니라 충(忠), 공(恭), 무(武), 숙(肅), 의(義), 정(貞), 장(莊), 효(孝) 등 많이 쓰이는 시자(諡字)에는 다양한 뜻이 있다. 시호에 담긴 뜻을 시주(諡註)라고 하는데 어떤 뜻의 글자를 받았느냐에 따라 평가가 구분된다. 문(文)의 경우만 해도 온 천하를 경륜하여 다스린다(經天緯地)/ 도덕을 널리 들어 아는 바가 많다(道德博聞)/ 배우기를 부지런히 하고 묻기를 좋아한다(勤學好問)/ 충성스럽고 믿을 수 있으며 남을 사랑한다(忠信愛人)/ 널리 듣고 많이 본다(博學多見)/ 공경하고 곧으며 자비롭고 은혜롭다(敬直慈惠)/ 민첩하고 배우기를 좋아한다(敏而好學)/ 백성을 슬퍼하고 은혜롭게 하며 예로 대접한다(愍民惠禮) 등의 많은 시주가 있다.


결국 공자가 공어의 시호가 문(文)이 된 것은 그의 행적에 부족함이 있다고 해도 민이호학(敏而好學) 등의 장점이 있으니 그런 시호를 받을 만하다고 평한 것이다. 단 한 가지 선한 면이 있다면 그것을 취해 시호로 삼아 악을 숨겨 주고, 오로지 악행만 있을 때에야 비로소 악시를 주려는 자세가 엿보인다. 자주 쓰이는 시자에 다채로운 시주가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기야 오늘날 묘비명에도 악행은 좀처럼 기록하기 미안한 것과 매한가지 논리이리라.


조선 조정에서 올린 정조의 시호는 문성무열성인장효(文成武烈聖仁莊孝)인데 『조선왕조실록』에는 여기서의 문이 경천위지(經天緯地)임을 밝히고 있다. 이에 반해 이황의 문순(文純)과 이이의 문성(文成)에서의 문은 도덕박문(道德博聞)의 문이었다. 조선시대 많은 유학자들이 도덕박문을 받았다고 하는데 경천위지 다음의 위상이었을 것이다. 사림의 거두 김종직이 죽었을 때 그의 첫 시호는 문충(文忠)이었다. 훈구파가 이는 너무 과분하다며 논박하며 시호를 문간(文簡)으로 고쳤는데 도덕박문(道德博聞)의 문에서 박문다견(博學多見)의 문으로 시주도 바꿨다. 이를 볼 때 시자에 딸린 시주에도 어느 정도의 등급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시호로 쓸 수 있는 글자와 각 글자가 담고 있는 의미를 규정해 놓은 것을 시법(諡法) 또는 시호법이라 한다. 조선초기에는 194자였으나 글자 수의 부족으로 시호 정하기가 어려워지자 세종(世宗)이 명해 301자까지 늘어났으나 활용 빈도가 높았던 글자는 약 120자 정도다. 대표적인 관련 문헌으로 당(唐)의 주석가 장수절(張守節)이 『사기(史記)』를 해설한 『사기정의(史記正義)』의 한 편인 『시법해(諡法解)』와 북송(北宋)시대 문장가 소순(蘇洵)의 『시법』 등이 있다.


소순이 찬한 시법에는 311조에 168개 시자가 수록되어 있어 시호를 결정하는데 참고했다. 인터넷에 정리된 자료를 보면 우리나라의 시법은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의 기록,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직관고(職官考), 『한국고사대전(韓國故事大典)』 시고(諡考)편 등을 참조할 수 있으나 방대하고 산재해 있어 찾아보기는 힘들 듯싶다. 다행히 이민홍 충북대 교수가 『시법』과 「시법해』를 묶어 번역한 책이 있어 많은 도움이 된다.


3. 고구려의 시호

우리나라에는 삼국시대부터 시호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중국의 시법과 다른 양상이 많이 보인다. 삼국별로 살펴보면 우선 고구려의 경우 1대 동명성왕(東明聖王), 2대 유리명왕(瑠璃明王), 3대 대무신왕(大武神王)이라는 시호에서 출발하는데 생시의 업적을 토대로 만든 시호인지가 불분명하다. 한자어의 뜻에 비추어 동명성왕이나 대무신왕은 그렇다고 쳐도 유리명왕의 경우 유리(類利) 혹은 유류(孺留)와 누리(累利)라는 휘와 관계가 있어 보인다.


한 사람을 다르게 표기한 것은 한자 도입 초기 의미보다는 소리를 옮기는데 주력했음을 알려준다. 고구려 28왕 중에 능의 위치(葬地)를 시호로 쓴 왕이 열두 분이다. 열거하자면 민중왕(4대), 모본왕(5대), 고국천왕(9대), 산상왕(10대), 동천왕(11대), 중천왕(12대), 서천왕(13대), 봉상왕(14대), 미천왕(15대), 고국원왕(16대), 소수림왕(17대), 고국양왕(18대)이다. 이것은 시호라기보다는 능의 이름을 일컫는 능호(陵號)라고 불러야 더 적절할 듯싶다.


고구려의 역대 왕은 시(諡)의 개념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號爲○○王” 혹은 “號曰○○王”라고만 표기하고 있다. 예외가 있다면 장수왕이 죽자 북위의 효문제가 시호를 강(康)이라고 했다(諡曰康)는 기록 정도다. 다만 28대 보장왕의 경우 왕의 이름 휘가 장(臧) 혹은 보장(寶臧)이라고 하면서 나라를 잃었기 때문에 시호는 없다(以失國故無諡)라고 적고 있는데 아마 삼국사기의 편찬자들도 시와 호가 헛갈렸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6대 태조왕(太祖王)과 7대 차대왕(次大王), 8대 신대왕(新大王)은 시(諡)의 개념이 녹아들어 가있다. 특히 태조왕(혹은 國祖王) 때부터 계루부가 왕위를 계승하여 고구려가 실질적인 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췄다는 의미이기에 태조라는 시호가 쓰였다. 또한 19대 광개토왕(廣開土王)이나 20대 장수왕(長壽王)도 왕의 특징을 나타내준다는 점에서 시(諡)의 개념이 있으나 직설적인 표현일 뿐 중국의 시법과는 차이가 있다. 그런데 다음 왕들인 문자명왕, 안장왕, 안원왕, 양원왕, 평원왕, 영양왕, 영류왕은 휘를 그대로 쓴 것은 아닌 것 같지만 그렇다고 중국식 시호의 흔적을 찾기도 힘들다(문자명왕은 다소 예외).


여담이지만 양원왕은 양강상호왕(陽崗上好王), 평원왕은 평강상호왕(平崗上好王)이라고 부르기도 한다는 기록에서 양원이나 평원도 능의 위치를 나타내는 것은 아닌지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고국원왕도 국강상왕(國岡上王)이라고도 한다는데 이 또한 왕이 묻힌 지명일 것이다. 결국 이 복잡한 문제를 풀 실마리는 광개토왕비에 쓰인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라는 시호다.


국강상(國岡上)은 장지일 것이고, 광개토경(廣開土境)은 땅을 넓혔다는 의미이며, 평안(平安)은 말 그대로 태평성세였다는 뜻이다. 호태왕(好太王)은 고구려왕에 대한 미칭(美稱)으로 왕 중의 왕 정도로 해석하면 되겠다. 만약 광개토왕뿐만 아니라 고구려의 모든 왕들이 이런 식으로 시호를 썼다고 가정한다면 현전하는 고구려왕의 시호는 온전한 것이 아니다. 기록이 미비하여 더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광개토왕비의 기록은 고구려에는 고유의 시법이 있었음을 약하게나마 증빙하고 있다.


4. 백제, 신라, 발해의 시호

백제의 왕들은 사료의 부족인지 기록의 소홀인지 알 수 없으나 시호는커녕 장지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 23대 삼근왕까지 휘에다가 ‘왕’자만 붙인 것인지, 고유의 시법이 있었던 것인지 확실치 않다. 24대 동성왕(東城王)부터 시호처럼 보이기 시작하는데 글자 그대로는 동쪽의 성이라는 의미일 뿐 중국에서 시법의 용례도 보이지 않는다. 25대 무령왕(武寧王)부터 성왕(聖王), 위덕왕(威德王), 혜왕(惠王), 법왕(法王), 무왕(武王)으로 이어지는 왕들의 시호는 중국의 시법에 모두 있는 글자다.


무령왕릉의 지석(誌石)에서 무령왕을 사마왕(斯麻王)이라 칭하고, 위덕왕 재위 시절 만들어진 국보 제288호 창왕명석조사리감(昌王銘石造舍利龕)에서 위덕왕의 휘인 창(昌)이 쓰인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시호와 더불어 왕의 휘를 직접 쓰기도 했던 것 같다. 비슷한 시기 신라도 처음으로 시호를 쓰기 시작한 점으로 미루어볼 때 당시 중국과의 교류가 활발했던 백제는 신라에 앞서 중국의 시법을 받아들였을 공산이 크다. 자세한 기록이 없어 아쉽다.


신라의 왕 가운데 지증왕이 최초로 시호를 받았다. 『삼국사기』는 “新羅諡法始於此”, 『삼국유사』는 “諡號始于此”라고 명시하여 신라의 시호가 처음 시작되었음을 알리고 있다. 국호를 신라로 바꾸고 왕호를 개정하는 등의 중앙집권적 국가체제 확립에 시호도 일정한 역할을 수행했다. 혹자는 지증이 한국 시법의 시초라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고구려와 백제의 사례가 명확하지 않다고 해서 섣불리 단정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지증이라는 시호는 지철로(智哲路), 지도로(智度路), 지대로(智大路)라는 휘와 관련지어 지었다고 짐작한다(고구려 유리명왕과 비슷한 사례). 한자로 우리말 소리를 옮기는 과정에서 뜻까지 나타내려는 과도기적 현상이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23대 법흥왕부터 28대 진덕왕까지는 불교식으로 시호를 지었다. 29대 무열왕부터 56대 경순왕까지는 중국 시법에 맞추어 시호를 지은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 기록을 살필 때 신라가 왕의 사후에 당나라에서 시호를 받은 것 같지는 않다. 성덕왕 16년 태자 중경이 죽자 시호를 효상(孝殤)이라고 했고, 흥덕왕 10년에 김유신을 흥무대왕(興武大王)에 추존했다. 진성왕 2년에 위홍이 죽자 시호를 추증해 혜성대왕(惠成大王)이라 하였다는 기사 등으로 볼 때 시호는 자체적으로 정했던 것으로 사료된다. 중국 시법에 맞게 시호를 지은 것은 통일신라를 전후한 시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남북국 시대의 발해 역시 중국 시법에 맞게 시호를 올렸다. 신라가 두 자 시호였던 반면에 발해는 한 자 시호를 올렸다. 『신당서』는 발해가 사사로이 연호(年號)와 시호를 썼다고 기록하고 있다. 앞서 살펴봤듯이 신라 또한 시호를 주체적으로 사용했던 만큼 아마도 발해와 신라의 차이는 독자 연호의 제정 여부였을 것이다. 발해는 문헌상 거의 전 기간 독자 연호를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의 독자 연호 기록이 광개토왕비와 일부 금석문에서나마 엿보이는 것에 견주어 발해는 우리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다.


대조영을 고왕(高王)이라고 칭한 것은 태조나 고조(高祖)의 의미로 보인다. 이어서 무왕(武王), 문왕(文王), 성왕(成王), 강왕(康王), 정왕(定王), 희왕(僖王), 간왕(簡王) 등의 시호가 있었다. 시호가 전하지 않는 왕도 있지만 폐위된 왕을 제외하고는 기록의 탈루인 듯싶다. 일부 기록에서는 시호가 추가로 수록되어 있기도 한데 발해와 대씨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협계태씨족보와 영순태씨족보가 대표적이다. 이에 따르면 미상이던 발해 말기 왕들이 화왕(和王), 원왕(元王), 경왕(景王), 애왕(哀王) 등의 시호를 받았다고 한다.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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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고려의 시호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은 시호 제도의 새 지평을 연다. 고려시대에는 왕뿐만 아니라 공이 있는 신하들에게도 시호를 하사했다. 신숭겸에게 장절(壯節), 배현경에게 무열(武烈), 복지겸에게 무공(武恭), 홍유에게 충렬(忠烈)이라는 시호를 내린 것이 대표적 예다. 8대 현종 때에는 신라의 최치원에게 문창후(文昌候), 설총에게 홍유후(弘儒侯)라는 시호를 추증하기도 한다. 특히 역대 임금의 시호를 왕이라고만 칭하지 않고 중국 황제와 같이 조(祖) 또는 종(宗)이라 붙이는 조종법(祖宗法)을 따랐다.


이로써 시호와 묘호(廟號), 능호가 확실하게 정리되었다. 왕건의 시호는 신성(神聖), 묘호는 태조(太祖)이며, 능호는 현릉(顯陵)이다. 이러한 시호, 묘호, 능호의 부여는 원 간섭기 이전까지 일관되게 수행됐고 조선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시호와 묘호가 구분이 되기 시작한다. 묘호를 대강 정의하면 왕실의 사당(태묘나 종묘)에 배향할 때 붙이는 이름으로 왕에게만 추증되는 또 다른 시호다. 쉽게 말해 왕에 대한 호칭으로 조나 종자가 붙는 것을 묘호라고 일컫는다. 중국의 묘호 기준을 적용해보면 통일 이전의 삼국에서 묘호로 보이는 것은 고구려 태조왕과 신라 태종 무열왕이 전부다. 삼국 가운데 고구려는 묘호와 시호를 엄밀히 구분하지 않았던 것을 보인다. 묘호가 정형화되어 쓰인 것은 고려시대부터다.


중국의 은주(殷周)시대와 한대(漢代)에 걸쳐 묘호를 가진 임금이 있었으나 모든 임금이 묘호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당대(唐代) 이후에는 모든 황제가 묘호를 갖게 된다. 결국 묘호는 시호가 신하들에게도 수여되면서 왕을 좀 더 부각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기능했음을 알게 된다. 시호 인플레가 심화되면서 시호가 점점 늘어나 수십 자에 달하는 황제도 심심찮게 등장했다. 결국 묘호가 본래 시호의 역할을 대신해 그 왕의 치적을 평가하는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중국의 제후국을 자처한 조선왕조는 원칙상 묘호를 써서는 안 되었지만, 고려왕조부터 써오던 관례라며 대충 넘어가며 사용했다.


하지만 가장 강력하게 내정 간섭을 했던 외세인 원나라는 묘호나 시호를 우리의 뜻대로 쓰지 못하게 했다. 이 시기 묘호는 쓰이지 않았으며 시호마저 원나라 황제에 대한 충성심을 표기한다는 뜻으로 “忠○王”이라 썼다. 충렬왕 시기부터 중국의 사시(賜諡)가 단행되어 조선 말기까지 이어진다. 충자 돌림 시호는 왕이 신료들에게 내린 것과 마찬가지였으며 형식적이나마 중원의 황제가 동방의 제후에게 하사한다는 분위기를 풍긴다.


31대 공민왕은 원명교체기의 국제 정세를 이용하여 원의 연호와 관제, 예제 등을 철폐했다. 공민왕 6년(1357) 원의 시호를 받았던 임금들을 다시 추존해 충렬왕은 경효(景孝), 충선왕은 선효(宣孝), 충숙왕은 의효(懿孝), 충혜왕은 헌효(獻孝), 충목왕은 현효(顯孝)라고 시호를 올렸다. 고려 왕의 시호에 거의 들어가던 효(孝)자를 부활시킴으로써 자주성을 천명했다. 다만 30대 충정왕만은 시호를 올리지 않았는데 공민왕이 그를 몰아내고 즉위했기 때문에 정통성 문제로 말미암은 것으로 보인다.


6. 공민왕, 우왕, 창왕, 공양왕


공민(恭愍)이라는 시호는 명나라에서 준 것이다. 새로이 중원의 주인공이 된 명나라의 쩨쩨한 심보가 드러난다. 공(恭)은 공경하게 사대하라는 뜻일 테고, 문제는 민(愍)자다. 민은 그리 좋은 시자는 아닌데 나라에서 재난이나 반란을 만나고, 백성을 비통하게 하고 해친다 정도의 뜻이다. 잇따른 반란과 홍건적의 난, 왜구 등에 시달렸던 공민왕 치세의 파란만장함에 제법 어울리는 시호이기는 하지만 그의 적잖은 업적으로 볼 때 폄훼됐다는 느낌이 강하다.


민(愍)과 비슷한 의미를 갖는 시자(諡字)로는 회(懷), 애(哀), 도(悼), 상(殤) 등이 있다. 회(懷)는 행실은 자애로우나 일찍 죽은 것(慈行短折), 지위를 잃고 죽은 것(失位而死)을 일컫는다. 장수절의 시법해에 의하면 단(短)은 60세 못된 것이고, 절(折)은 30세가 못된 것이다. 애(哀)는 공손하고 어질지만 일찍 죽은 것, 도(悼)는 중년이 안 되어 요절한 것, 상(殤)은 요절하여 이루지 못한 것이다. 왕위에 올랐다가 요절하거나 뜻을 펴지 못했을 때 주로 쓰는 시자들이다.


한국사에서 이런 시자를 받은 임금을 대강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신라 제40대 애장왕(哀莊王)은 숙부 김언승의 반란 때 살해되었고, 제44대 민애왕(閔哀王)은 희강왕을 협박해 자살하게 하고 스스로 왕이 되었으나 김우징이 장보고의 힘을 빌려 쳐들어오자 패하여 병사들에게 살해되었다(閔은 愍과 상통하는 글자다). 제55대 경애왕(景哀王)이 견훤에게 핍박당해 자살하게 된 것은 유명한 사실이다.


고려 7대 목종(穆宗)은 처음에는 묘호가 민종(愍宗), 시호는 선령(宣靈), 능호가 공릉(恭陵)이었다. 이는 모두 목종을 시해한 강조(康兆)가 지은 것이라 현종(顯宗) 3년 묘호를 목종(穆宗), 시호는 선양(宣讓), 능호는 의릉(義陵)이라 고쳤다. 제14대 헌종(獻宗)의 시호는 회상(懷殤)이었다가 예종(睿宗)이 즉위한 뒤 공상(恭殤)이라 고쳤다. 헌종은 숙부 계림공 왕희에게 사실상 왕좌를 찬탈당하고 후궁으로 물러나 14세에 사망했다.


조선 8대 예종(睿宗)이 재위 13개월 만에 죽자 명나라에서 양도(襄悼)라는 시호를 주었다. 영조(英祖)의 둘째 아들이 뒤주 속에서 사망하자 영조는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다. 훗날 정조(正祖)가 즉위 후 10일 만에 사도세자의 시호를 장헌(莊獻)를 고쳤다. 도(悼)자를 바꾼 것으로 보아 높이려는 의도로 보인다. 여하간 회(懷)라는 글자에는 야니를 가슴에 묻고 간직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는 셈이다. 아마 옛사람들도 그랬으리라.


우왕은 공민왕이 부활시킨 고려 시법에 의거하여 인문의무용지명렬경효대왕(仁文義武勇知明烈敬孝大王)이라는 시호를 올렸다. 마지막 경효(敬孝)에서 효자 시호가 여전히 쓰였다. 고려에서 올린 시호가 엄연히 있는데도 불구하고 원나라와 명나라가 내려준 시호를 계속 쓰는 것은 『고려사』 편찬자의 시각을 그대로 답습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은 아닐지 염려스럽다. 가뜩이나 고려 후기의 왕들은 묘호가 없어 허전한데 말이다. 조심스럽지만 고려에서 올렸던 시호를 병기하는 시도를 해보는 건 어떨까 싶다.


고려 왕 가운데 시호를 아예 받지 못한 임금이 우왕과 창왕이다. 이성계 일파는 우왕이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라 신돈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면서 우왕과 창왕은 왕씨가 아니라는 우창비왕설(禑昌非王說)을 내세웠다. 폐가입진(廢假立眞)이라며 우왕과 창왕을 차례로 폐위하고 공양왕을 옹립했다. 조선의 개창자들은 더욱 잔인하게도 『고려사』에서 우왕과 창왕을 국왕의 연대기인 세가(世家)에도 넣지 않고 신우(辛禑)와 신창(辛昌)으로 부르며 열전(列傳)의 반역전(叛逆傳)에 편입시켰다.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恭讓王)의 시호는 신라의 경순왕(敬順王)과 마찬가지로 모욕적인 뜻이다. 공손히 왕위를 양보했다는 시호를 줘놓고도 결국 살해한 이성계 일파의 박절함이 밉살스럽다. 고려숭의회에서 펴낸 『여말충의열전』에서 우왕, 창왕, 공양왕은 조선의 왜곡된 호칭인 만큼 고려말의 유신(遺臣)들이 이네들을 지칭했다던 여흥왕(驪興王), 윤왕(允王), 간성왕(干城王)의 칭호를 준용(遵用)한다는 내용이 있다.


6. 조선의 시호


조선으로 넘어와서는 시호와 묘호, 능호가 잘 정리되어 별로 논쟁거리는 없다. 조선 왕의 시호가 길어져서 묘호의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더 커졌다고 할 수 있다. 가령 세종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世宗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은 묘호인 세종, 명나라에서 받은 시호인 장헌, 조선에서 올린 영문예무인성명효로 구성된다. 임금이 붕어하면 중국에게 시호를 받기 위해 청시사(請諡使)를 보냈다. 시간이 걸리는 관계로 그 전까지는 신하들이 올린 시호를 쓰다가 중국에서 시호가 도착하면 그 시호가 왕을 대표하는 호칭이 되었다.


그런데 『선원계보(璿源系譜)』를 비롯한 조선의 사서에는 명나라가 준 시호만 있을 뿐, 청나라가 줬을 법한 시호는 찾기 힘들다. 조선 숙종 때 역관이던 김지남이 아들과 함께 편찬한 『통문관지(通文館志)』라는 책에는 조선이 청나라로부터 청해 받은 각 왕들의 시호들이 모두 기록되어 있다. 인조는 장목(莊穆), 효종은 충선(忠宣), 현종은 장각(莊恪), 숙종은 희순(僖順), 경종은 각공(恪恭), 영조는 장순(莊順), 정조는 공선(恭宣), 순종은 선각(宣恪), 순조의 세자로 사후에 왕으로 추존된 익종은 강목(康穆), 헌종은 장숙(莊肅), 철종은 충경(忠敬)이라 했다. 충(忠), 각(恪), 순(順), 공(恭) 등이 많이 보이는 것에서 고분고분하기를 바랐던 청나라의 소망이 선하다.


조선에서는 인조를 비롯한 국왕의 사후에 청에게 시호를 청하여 받았으면서 이 시호는 청에게 보낸 외교문서 외에는 사용하지 않았다. 각 왕대의 실록에서도 청나라에 시호를 청한 사실만 기록되어 있고 어떤 시호를 받았는지는 기록하지 않았다. 공식 기록에 의도적으로 수록하지 않은 이 시호들을 굳이 열거한 까닭은 앞서 고려 말기 왕들을 격하한 것에 대한 항의의 뜻이다.^^; 청나라 시호를 사용하지 않은 까닭은 자주성이라는 측면보다는 일그러진 모화의식의 산물일 공산이 크다.


조선 왕에게는 묘호가 중요해지면서 묘호 인플레가 극심해졌다. 고려에서는 태조만이 조(祖)이던 것을 조선에서는 조(祖)가 붙은 왕은 7명이다. 조선 후기 묘호가 개상(改上)된 경우는 전부가 종(宗)을 조(祖)로 바꾼 것으로 볼 때 조를 선호한 듯싶다. 실제로 본래 선종(宣宗), 영종(英宗), 정종(正宗), 순종(純宗)이던 묘호가 선조(宣祖), 영조(英祖), 정조(正祖), 순조(純祖)가 되었다. 참고로 연산군과 광해군은 종묘에 들지 못했으니 당연히 묘호가 없고 왕자시절의 호칭을 그대로 쓴다.


조선조 묘호 산정이 편파적이었다는 지적이 많다. 1468년 세조가 재위 13년 만에 세상을 떠나자 신료들이 신종(神宗), 예종(睿宗), 성종(聖宗)이라는 세 가지 묘호를 올렸다. 묘호에 조가 들어가 있지 않았음을 비추어 볼 때 당대의 신료들도 세조의 찬탈 행위를 평가하는데 있어서 경계를 그었던 모양이다. 이를 탐탁지 않게 여긴 예종이 아버지는 국가를 다시 일으켜 세운 공이 있다고 문제를 제기해 결국 묘호가 세조가 되었다. 선종은 임진왜란을 극복한 공이 있다고 하여 선조가 되었는데 그 공로는 잘 도망 다녔다는 뜻이려나?


인조는 쿠데타를 일으켜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앉자 자신의 아버지를 본래 예법으로 대원군으로 삼아 정원대원군(定遠大院君)이라 칭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논란 끝에 왕으로 추존해 묘호를 원종(元宗)이라 했다. 대군이나 세자가 아닌 왕자가 추존왕이 된 것은 원종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1649년 인조가 죽자 열조(烈祖)로 묘호가 정해졌다. 조를 남발한 것도 모자라 인조(仁祖)로 묘호를 고쳤는데 소현세자가 의문사하지 않았으면 왕위에 오르지 못했을 효종의 이심전심 띄워주기인 셈이다. 병자호란을 자초하고 아들과 며느리를 억울하게 죽인 아둔하고 냉혹했던 인물에게 어질다는 묘호를 붙이다니 민망하다. 왕에게 있어 시호의 역할을 했던 묘호 산정이 이렇게 흐물흐물했다니 부끄러운 일이다.


대한제국 초대 황제인 광무제의 시호는 高宗統天隆運肇極敦倫正聖光義明功大德堯峻舜徽禹謀湯敬應命立紀至化神烈巍勳洪業啓基宣曆乾行坤定英毅弘休壽康文憲武章仁翼貞孝太皇帝이다. 고종은 묘호이고, 문헌무장인익정효(文憲武章仁翼貞孝) 8자는 시호로서 고종이 붕어한 후 올린 것이다. 고종과 문헌무장인익정효 사이의 50자에 달하는 존호는 고종 9년부터 순종 즉위년까지 생존해있는 고종에게 일곱 차례에 걸쳐 상호(上號)한 것이며, 태황제(太皇帝)라는 존호는 고종이 강제 퇴위를 당해 순종이 즉위했던 1907년에 봉책한 것을 고종 사후에 재추봉한 것이다.


망국의 황제가 누리기에는 너무 넘치는 시호였다고 생각했는지 일제는 이에 대한 시비를 걸었다. 고종·순종실록 감수보조위원(監修補助委員)으로 활동한 에하라 젠쓰이(江原善槌)는 고종실록의 편찬과정에서 실록의 권두에 실릴 고종의 시호가 일본 황실의 한 왕가로서의 지위에 저촉된다고 주장했다. 창덕궁 이왕인 순종황제가 덕수궁 이태왕인 고종황제에 대한 시호를 봉책하여 태황제라고 할 권능이 없으며, 순종이 올린 8자의 시호 역시 삭제해야 한다고 투덜거렸다. 결국 일제는 한일합방을 기점으로 하여 그 이전의 황권만을 인정하는 태도를 취했다. 한일합방 이후의 실록은 순종황제실록부록(純宗皇帝實錄附錄)으로 처리하고 제왕의 칭호도 격하시키고, 대한제국 황제의 재위년도나 연호 대신 일본의 연호를 사용했다.


7. 시호의 정신을 새기며


1456년 처형된 사육신이 1691년 숙종에 의해 시호가 내려진 것처럼 시호는 한 개인에 대한 역사의 엄정한 평가를 지향했다. 오늘날에 그 형식을 곧이곧대로 따를 것은 없어도 그 정신은 배울 점이 많다. 이런 일도 있었다. 조선 전기 문신이던 김국광이 뜻을 펴되 성취하지 못했다는 의미(述義不克)의 정(丁)자가 포함된 시호를 받았다. 아들 김극유는 4년 동안 열 차례가 넘는 상소를 올리며 시호를 고쳐주기를 청하였다. 성종과 대신들은 김국광이 현저한 과실이 없는데 나쁜 시호를 얻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시호는 바꿀 수 없다는 원칙을 고수해 끝내 바꿔주지 않았다.


그런데 그 원칙이 반드시 지켜진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한명회의 시호가 명성(明成)이라고 정해졌다. 생각이 과감하고 원대한 것(思盧果遠)을 명(明)이라고 했으나 자부심이 강하다는 뜻이 그리 아름답지 못하다는 문제 제기가 들어왔다. 성종은 결국 특명을 내려 명을 충(忠)으로 고치게 했다. 시호를 고치지 말 것을 상소한 신하들이 있었지만 성종은 당대의 세도가에 자신의 장인이었던 한명회의 시호를 마냥 외면하지 못했다.


이에 반해 고려 말의 권신 이인임의 시호는 황무(荒繆)로 정해졌다. 당시 전의부령(典儀副令)이던 공부가 그의 시호를 이렇게 짓자 종당(宗黨)이 이를 갈며 압박했지만 공부는 움직이지 않았다고 전한다. 황(荒)은 안팎으로 난이 생긴다, 방종하게 즐기면서 법도가 없다, 기강과 법도를 혼란스럽게 한다는 뜻이다. 무(繆)는 명분과 실제가 어긋난 것, 즉 명분은 아름다우나 실상이 손상되었다(名與實爽)는 뜻이다. 가히 한국사에 있어 악시의 대표 격이다. 이인임은 말년에 실각했으니 한명회와 같은 호사는 누리지 못했던 것일까?^^;


옛사람들은 시호 한 자에 웃고 울었다. 허울뿐이라고 구박해도 그만이지만 역사를 두려워하라는 시호의 참뜻을 되새길 필요가 있겠다. - [無棄]


<참고 문헌>
박영규, 『고구려왕조실록』, 웅진지식하우스, 2004
박홍갑, 『양반나라 조선나라』, 가람기획, 2001
신용호·강헌규, 『先賢들의 字와 號』, 전통문화연구회, 1997
이민홍 편, 『諡號, 한 글자에 담긴 인물 評』, 문자향, 2005
신명호, “조선시대 국왕호칭의 종류와 의미”, 『역사와경계』 제52집, 부산경남사학회, 2004, pp. 47~67
이민홍, “중원 시법(諡法)의 수용과 한국 역대(歷代) 제왕의 시호(諡號)”, 『한문학보』 제12권, 우리한문학회, 2005, pp. 485~509
이영춘, “『通文館志』의 편찬과 조선후기 韓中關係의 성격”, 『역사와실학』 제33집, 역사실학회, 2007, pp. 121~161
임민혁, “高ㆍ純宗의 號稱에 관한 異論과 왕권의 정통성 - 廟號ㆍ尊號ㆍ諡號를 중심으로 -”, 『사학연구』 제78호, 한국사학회, 2005, pp. 189~230
shyisna님이 올려주신 네이버 오픈 백과 “시호(諡號)”,  “시호(諡號) 사례분석”

Posted by 익구
:

개를 위해 시호를 짓다

일기 2007. 10. 22. 05:13 |

(시호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익구닷컴 내 졸문 <한국의 시호(諡號) 탐구>를 참조해주세요)


시호(諡號)는 행적이 뛰어난 사람에게 국가가 내려주는 것이었다. 대개는 높은 벼슬을 한 사람에게 내려지는 게 관례다. 하지만 관직에 뜻을 두지 않아 큰 벼슬을 하지 않았던 김시습은 청간(淸簡), 서경덕은 문강(文康), 조식은 문정(文貞)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이와 반면에 학문이 높고 덕망이 있음에도 시호가 없는 경우에는 교우나 제자, 친지나 고향 사람들이 추도하는 의미로 시호를 짓기도 했다. 나라에서 지어준 시호와 구별하여 사시(私諡)라고 한다. 요절한 반려견 야니를 애도하기 위한 시호를 짓기 위해 한국사에 있어 시호의 의미와 용례를 살펴봤다. 내가 하는 일이 으레 그렇듯이 배보다 배꼽이 커져 버려 한 편의 글을 완성했다(졸문 “한국의 시호(諡號) 탐구”참조).


개에게 시호를 주는 게 너무 괴상한 일은 아닐까 고심했으나 사사로이 시호를 쓰기로 결정했다. 오늘날 시호가 쓰이지 않는 만큼 참례(僭禮)라고 구박할 여지도 별로 없어 보인다. 보다 근본적으로 생명권의 개념을 확장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준 야니에게 사람과 개의 엄격한 분별은 어울리지 않는다. 불가에서는 인간과 축생을 똑같이 보기 때문에 절에서 함께 생활하던 개가 죽으면 49재를 치러준다고 한다. 본적이 없어 진짜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키우던 개를 49재 지내줬다는 애견인의 이야기는 들은 바 있다. 여하간 야니의 49재 즈음해 시호를 건넨다. 부디 세계 최초가 아니길 바란다.^^; 이민홍 충북대 교수님이 당(唐)의 주석가 장수절(張守節)이 『사기(史記)』를 해설한 『사기정의(史記正義)』의 한 편인 시법해(諡法解)와 북송(北宋)시대 문장가 소순(蘇洵)의 『시법』을 번역해 펴낸 책이 있어 큰 도움을 얻었다(이민홍 편, 『諡號, 한 글자에 담긴 인물 評』, 문자향, 2005). 한국의 시법이 이 내용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판단해 다른 전거를 찾기보다 이 책으로 시호를 정하기로 했다.


야니의 시호를 강회(强懷)라고 지었다. 소순의 『시법』에 따르면 강(强)의 시주(諡註, 시호에 담긴 뜻) 가운데 “죽어도 정을 옮기지 않은 것(死不遷情)을 强이라 한다”는 내용이 있다. 생전에 그토록 다정다감했던 야니에게 어울리는 듯싶다. 또 시법과 관계없이 활발하고 강인했던 성품과도 잘 맞는다. 조선시대에 시호를 정할 때 보통 세 가지 안을 내는데 이를 시호망(諡號望)이라 한다. 1안을 수망(首望). 2안을 부망(副望), 3안을 말망(末望)이라 부른다(비단 시호를 정할 때뿐만 아니라 사람을 뽑거나 할 때도 이러한 3안제를 쓴다). 회(懷)자는 확고부동했던지라 수망은 강회(强懷), 부망은 강회(康懷), 말망은 경회(敬懷)라고 해서 고민하다가 수망으로 결정했다. 강(康)은 온화하고 선량하여 좋아하고 즐거워할 만한 것이라는 뜻이 있는데 시법과 무관하게 나를 평안하게 해준 것에 대한 고마움을 표하기에 좋은 글자 같았다. 막판까지 경합했으나 말썽꾸러기 녀석에게는 강(强)이 좀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아 정말 나는 혼자서도 잘 논다.^^;


강(强)은 춘추전국시대의 역사서 『국어國語』에 그 출전이 있다. 진(晉)나라 헌공(獻公)의 애첩 여희의 간계에 빠져 태자인 아들 신생(申生)을 폐하려 했다. 신생의 사부인 두원관(杜原款)이 죽임을 당하기 전에 태자에게 전언을 남기며 “군자는 정을 버리지 않고, 참언에 대해 변명하지 않으며, 참언으로 인해 죽더라도 미명을 남긴다”라는 말을 인용한다. 이어서 죽어도 정을 옮기지 않음이 강(强)이며, 정을 지켜 아버지를 즐겁게 하는 것이 효(孝)이며, 자신을 죽여 뜻을 이룸은 인(仁)이요, 죽더라도 임금을 잊지 않음은 경(敬)이라 말한다. 깨끗한 죽음을 권하는 무서운 내용이다.^^; 주위에서는 무고한 태자가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신생은 이를 마다하고 사부의 가르침을 받아서 결국 자결한다. 여희는 신생의 이복 동생인 중이(重耳)와 이오(夷吾)마저 죽이려 해서 이들 형제는 진나라에서 도망쳤다. 동생인 이오가 먼저 군주가 되고, 중이는 19년 동안 떠돌다 진나라로 돌아오는데 그가 바로 제환공(齊桓公)의 뒤를 이어 패자(覇者)가 된 진문공(晉文公)이다(자세한 내용은 『국어』의 「진어晉語」참조).


회(懷)는 행실은 자애로우나 일찍 죽은 것(慈行短折), 지위를 잃고 죽은 것(失位而死)을 일컫는다. 장수절의 시법해에 의하면 단(短)은 60세 못된 것이고, 절(折)은 30세가 못된 것이다(短未六十, 折未三十). 회(懷)와 비슷한 의미를 갖는 시자(諡字)로는 애(哀), 도(悼), 상(殤), 민(愍) 등이 있다. 애(哀)는 공손하고 어질지만 일찍 죽은 것, 도(悼)는 중년이 안 되어 요절한 것, 상(殤)은 요절하여 이루지 못한 것, 민(愍)은 나라에 재난이나 반란을 만난 것 등의 의미를 갖고 있다. 왕위에 올랐다가 요절하거나 뜻을 펴지 못했을 때 주로 쓰는 시자들이다. 한국사에서 이런 시자를 받은 임금을 대강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신라 제40대 애장왕(哀莊王)은 숙부 김언승의 반란 때 살해되었고, 제44대 민애왕(閔哀王)은 희강왕을 협박해 자살하게 하고 스스로 왕이 되었으나 김우징이 장보고의 힘을 빌려 쳐들어오자 패하여 병사들에게 살해되었다(閔은 愍과 상통하는 글자다). 제55대 경애왕(景哀王)이 견훤에게 핍박당해 자살하게 된 것은 유명한 사실이다.


고려 제7대 목종(穆宗)은 처음에는 묘호가 민종(愍宗), 시호는 선령(宣靈), 능호가 공릉(恭陵)이었다. 이는 모두 목종을 시해한 강조(康兆)가 지은 것이라 현종(顯宗) 3년 묘호를 목종(穆宗), 시호는 선양(宣讓), 능호는 의릉(義陵)이라 고쳤다. 제14대 헌종(獻宗)의 시호는 회상(懷殤)이었다가 예종(睿宗)이 즉위한 뒤 공상(恭殤)이라 고쳤다. 헌종은 숙부 계림공 왕희에게 사실상 왕좌를 찬탈당하고 후궁으로 물러나 14세에 사망했다. 조선 제8대 예종(睿宗)이 재위 13개월만에 죽자 명나라에서 양도(襄悼)라는 시호를 주었다. 조선 제21대 영조(英祖)의 둘째 아들이 뒤주 속에서 사망하자 영조는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다. 훗날 정조(正祖)가 즉위 후 10일만에 사도세자의 시호를 장헌(莊獻)를 고쳤다. 도(悼)자를 바꾼 것으로 보아 높이려는 의도로 보인다. 여하간 회(懷)라는 글자에는 야니를 가슴에 묻고 간직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는 셈이다. 아마 옛사람들도 그랬으리라.


여담이지만 일본 에도시대의 5대 쇼군(將軍) 도쿠가와 쓰나요시는 ‘개 장군’이라는 별명이 있다. 1685년 그가 공포한 생류연민령(生類憐みの令)은 참 서슬 퍼랬다. 동물을 학대하거나 죽였다는 이유로 유배나 할복에 처해졌다고 한다. 처음부터 이런 끔찍한 법이었던 건 아니고 당초에는 중병에 걸린 생물을 내다버려서는 안 된다 정도였다. 쓰나요시는 포고령을 계속 고쳐서 물고기, 뱀, 쥐는 물론 조개, 새우 등 모든 생물을 죽이거나 먹지 못하게 했다. 달걀을 먹는 것이 금지되고, 개나 고양이 등을 죽인 죄로 도망가거나 죽은 사람이 1만 명에 이르렀다고 하니 이쯤 되면 공포다(심지어 모기를 죽였다고 처벌을 받았다). 살생의 업보 탓에 아들이 없다는 어느 스님의 충고를 따른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으니 확실치 않다. 그는 생류연민령만은 폐지하지 말라고 유언했으나 그가 죽은 뒤 열흘만에 폐지됐다. 쓰나요시가 개띠였기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여러 동물 중에 개를 특히 아꼈다. 개마다 색깔과 특징을 기록하고 사망신고서 제출을 의무화하는 등 견공의 위세가 높아지자 버려지는 개들이 급증했다.


넘치는 개들을 수용하기 위해 에도 근교에는 수십 만평에 달하는 사육장이 건설됐다. 개를 먹여 살리기 위한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쓰나요시는 특별세를 거두기도 했고, 악화(惡貨)를 주조해 화폐주조 차익을 챙겼다. 전국시대의 호전성을 누그러뜨리려는 시도였다는 평가가 있긴 하지만 쓰나요시의 정책은 너무 넘쳤다. 박재형의 『해동속소학海東續小學』에는 율곡 이이가 쇠고기를 먹지 않으면서 “일을 부려먹고 도살하여 그 고기까지 먹는 것은 어진 행실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대목이 있다. 농사일에 소를 써야 했던 조선과 일본의 사정이 비슷하다는 가정 아래 쓰나요시가 이 정도 마음가짐에서 그쳤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쓰나요시 만큼이나 엽기적인 사례는 나치 정권에게서 찾을 수 있다. 틸 바스티안의 『가공된 신화, 인간』에는 나치가 집권한 지 8주 만에 동물 학대를 금지했다고 한다. 유대인을 가스실로 보내고 그들에게서 짜낸 기름으로 비누를 만들었던 나치 집단의 분열증이 섬뜩하다. 자기 위주로 생각하는 눈먼 최선을 경계해야겠다. 내 사랑이 남에게 폐를 끼칠 수도 있음을 배웠다. 여기까지 고민하고 있는 만큼 개에게 시호를 지었다고 불편해하실 분들에게 너그러운 양해를 청한다. - [無棄]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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