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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와 번지와의 문답

사회 2008. 4. 26. 19:59 |
이번 학기 교양으로 듣는 <유가적 사유와 논어> 과제물로 냈던 것을 부분 수정해서 올립니다. 지당하신 말씀이 가볍게 느껴지지 않는 것을 보면 시절이 수상하긴 한가 봅니다.


<원문>
樊遲請學稼 子曰 吾不如老農 請學爲圃 曰 吾不如老圃 樊遲出 子曰 小人哉 樊須也
上 好禮則民莫敢不敬 上 好義則民莫敢不服 上 好信則民莫敢不用情 夫如是則四方之民 襁負其子而至矣 焉用稼
- 『논어』 <자로편>


<국역>
   번지가 농사짓는 일을 배우기를 청했는데 공자께서는 “나는 노련한 농사꾼만 못하다”라고 하셨다. 채소밭을 가꾸는 일을 배우기를 청했는데, “나는 노련하게 채소밭을 가꾸는 사람만 못하다”라고 하셨다. 번지가 나가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소인이로다, 번수여! 윗사람이 예를 좋아하면 백성들이 감히 공경하지 않을 수 없고, 윗사람이 의를 좋아하면 백성들이 감히 복종하지 않을 수 없고, 윗사람이 믿음을 좋아하면 백성들이 감히 성실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대저 이와 같으면 온 세상의 백성들이 그 자식을 포대기에 싸서 업고 찾아오게 되니, 어찌 곡식 심는 일에 힘쓸 수 있겠는가?”


<견해>
   정약용 선생은 공자가 번지의 질문을 물리친 것은 예의를 앞세우고 음식과 재물을 뒤로한다(先禮義 後食貨)는 뜻이라고 풀이했다. 『목민심서』에서도 “뭇사람을 통솔하는 방법은 위엄과 신뢰뿐이다. 위엄은 청렴함에서 나오고, 신뢰는 자기 마음을 다하는 데에서 말미암는다. 자기 마음을 다하면서도 능히 청렴할 수 있어야 이에 뭇사람을 따르게 할 수 있다(馭衆之道 威信而已 威生於廉 信生於忠 忠而能廉 斯可以服衆矣)”라고 논하며 공자의 유지를 받들고 있다(吏典6條 馭衆). 주희는 禮, 義, 信은 대인(大人)의 일이라고 했다. 여기서의 대인은 위정자를 말한다. 주희는 공자가 언급한 소인(小人)을 세민(細民), 즉 서민이라고 봤다.


   이 문장에서 통치자와 피통치자의 역할에 따른 사회적 분업에 대한 공자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공자는 농사일과 같은 기술과 기능을 하찮게 여긴 것이 아니라 사람마다 할 일이 따로 있다고 설파했을 따름이다. 공자의 사상은 사회 변화의 주체를 선비 계급으로 보았다는 점에서 일종의 엘리트주의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사회 변화의 방향은 엘리트를 위한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백성을 위한 것이었다고 긍정적 함의를 읽어봄직 하다. 후대에 이 뜻이 왜곡되어 노동을 천시하고, 백성에 대한 사랑 없이 군림만 하려는 문제가 나타나기도 했다. 위정자가 자신의 직분에 충실함으로써 백성들에게 이익을 안겨줄 것을 주문한 것으로 보인다.


   번지가 농사일을 물은 것을 두고 농가학파(農家學派)의 영향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농가는 농경을 권장하여 의식을 풍족하게 하는 것을 주요 골자로 하는데, 임금도 백성과 함께 직접 농사를 지어야 한다고까지 주장했다. 공자는 위정자가 직접 농사짓는 일에 관여하는 것보다는 도덕정치를 하는 것이 더 근본적인 일이라고 봤다. 번지의 질문을 다르게 보면 유학이 탁상공론(卓上空論)으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 물질적 이해에 대한 고려를 너무 등한시해서는 안 된다는 현실적 고민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학문은 실용적이어야 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공자는 실용을 위해 필요한 것은 기예가 아니라 그 기예가 온전히 발휘될 수 있는 환경이나 구조를 다지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아울러 공자가 농사짓기와 같은 보여주기 식의 정치를 비판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공자는 남에게 보이기 위한 학문인 위인지학(爲人之學)을 배척하고 자아실현을 목표로 하는 배움인 위기지학(爲己之學)을 중시했다. 같은 맥락에서 공자는 남의 기림을 받는데 급급해 이미지 고양에만 힘쓰는 것을 비판했다. 얼마 전 총선에서도 시장이나 농촌 현장에서 서민들의 애환을 듣는 것은 기본이고 심지어 목욕탕에서 유세를 하는 경우까지 있었다. 오늘날의 선거문화에서 이런 모습은 불가피한 점이 있으나 교언영색(巧言令色)을 넘어서 진정으로 국리민복을 위한 활동을 하라는 공자의 질정은 경청할 만하다. 예를 좋아하고, 의를 좋아하며, 신뢰를 좋아하는 기품 있는 정치인이 나타난다면 국민의 존경심을 불러일으키고, 자발적으로 따르게 하며, 진실한 마음가짐을 품게 할 수 있다.


   맹자도 “대인의 일이 있고, 소인의 일이 있다(有大人之事 有小人之事)”라고 말하며 정신 노동을 하는 노심자(勞心者)와 육체 노동을 하는 노력자(勞力者)로 구분했다(文公上 4). 번지의 경우와 비슷하게 진상(陳相)이라는 자가 농가인 허행(許行)에게 감화되어 맹자에게 질문한 것에 대한 답변 중에 나온 구절이다. 맹자는 자기가 쓰고 먹는 물건을 모두 직접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필요한 것을 교환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농사를 지으면서 다른 기술자들의 일을 겸할 수 없듯이, 정치나 교육 등 마음을 쓰는 일도 다른 일과 겸할 수 없음을 논증했다. 맹자는 성선설(性善說)에 입각해서 사람은 모두 성인이 될 수 있는 잠재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다. 양심을 밝혀서 실천하면 군자가 되고 육체적 욕구를 충족하는데 주력하면 소인이 된다고 주장했다. 공자의 사고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한서(漢書)』에 병길전(丙吉傳)에 나오는 문우천(問牛喘)의 고사는 공자의 가르침을 체화한 사례다. 승상이 된 병길이 어느 날 외출하다가 백성들이 떼지어 싸우는 무리들과 마주쳤으나 그냥 지나쳤다. 조금 더 가서 더위를 먹어 헐떡이는 소를 보고는 크게 걱정을 했다. 따르던 사람이 의아하게 여기자 병길은 백성들이 서로 살상한 사건을 처리하는 것은 담당 관리의 소관이며 재상은 연말에 그들의 고과를 통해 상벌을 시행하면 된다고 말한다. 이어 삼공(三公)은 음양의 조화를 담당하고 있으므로 계절의 기운이 절도를 잃을 조짐이 있으니 직분상 마땅히 큰 재앙이 닥칠까 염려해야 할 바라고 설명한다. 즉 높은 지위에 오른 사람에게 요구되는 자질은 대체(大體)를 살펴 조정하는 능력임을 깨닫게 해준다.


   결국 공자와 번지와의 문답에서 자신을 다스린 후에 남을 다스린다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을 유추해낼 수 있다. 유가에서는 개인의 도덕적, 학문적 자기완성 정도에 따라 정치활동의 범위가 점차 확대된다고 봤다. 수기는 치인에 선행한다. 『대학』의 8조목인 격물치지성의정심(格物致知誠意正心)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가 순차적인 점진주의다. 개인의 윤리적 각성을 시발점으로 하여 그 점차적 확산을 꾀해야 한다는 유가의 사유다. 혹자는 정치가의 도덕적 수양에 몰두한 나머지 치인보다 수기에 치중한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유가는 수기적 행위에 치열하면 할수록 그것은 동시에 치인적 행위에도 치열한 것이 된다고 인식했다. 도덕성이 높으면 높을수록 현실적 정치능력을 보유하게 된다고 본 셈이다. 다시 말해 도덕성이 곧 능력이라는 것이다.


   요즘 도덕성과 능력은 별개의 문제라는 이분법이 힘을 얻고 있다. 공자가 언급한 好禮, 好義, 好信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탈도덕 현상을 수기치인의 현대적 복원으로 극복해야 한다. 도덕과 능력을 유기적으로 통합한 도덕력(道德力)은 전통을 창조적으로 계승할 뿐만 아니라 오늘날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는 사회자본(Social Capital) 이론에도 부합한다. 도덕성과 능력의 상관관계를 명확히 드러내는 연구 결과는 아직 없다. 하지만 윤리적 기업에 투자하면 투자수익률이 더 높다는 해외의 실증 연구가 종종 나온다. 국내에서도 윤리헌장 제정과 더불어 전담 부서를 설치해 윤리경영을 적극 실천한 기업의 주가상승률이 그렇지 못한 기업에 비해 높았다는 분석이 있다. 윤리경영이 기업성과를 크게 악화시킨다는 연구 결과는 찾아보기 힘든 것으로 보아 윤리경영은 장기적으로 기업의 시장가치를 높인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기업에서도 윤리경영이 강조되는 경향에 비추어 볼 때도 공자의 입장은 유효하다. 전문지식에 그치지 않고 인문학적 성찰을 갖춘 국가 지도자가 절실히 요구된다.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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