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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합 성장이라는 궤변

경제 2007. 4. 23. 12:22 |

소득증가율이 경제성장률을 밑돌고 있다. 한국은행이 3월 21일 발표한 ‘2006년 국민계정(잠정)’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의 실질 GDP 성장률은 5.0%지만, 실질 GNI는 2005년 675조원에서 2006년 691조원으로 2.3% 증가하는데 그쳤다. GNI 성장률이 GDP 성장률을 밑도는 현상은 1995년 이래 11년째 계속되는 일(2002년에는 두 가지가 같았음)이다. 실질 GNI는 교역조건 변화에 따른 무역 손익을 더한 다음 외국인이 국내에서 벌어간 소득은 빼고 한국인이 국외에서 벌어들인 소득은 더해 계산한다. 수출가격이 내려가고 수입가격이 올라 교역조건이 악화되면 무역 손실이 발생하고 이 만큼 국민소득도 줄게 된다. 실질 GNI는 실질구매력을 나타내는 지표로 이 수치가 GDP 성장률보다 낮다는 것은 경제의 외형이 커지고 있으나, 실제 소득 증가가 따라가지 않는 외화내빈의 형국인 셈이다.


현대경제연구원은 3월 22일 펴낸 보고서 ‘중진국 함정에 빠진 한국경제’에서 이젠 선진국 구분의 잣대는 개인 소득 3만달러 수준이라고 제시했다. 2만달러는 1990년대까지의 기준이라는 것이다. 내 이럴 줄 알았다.^^; 결국 또 다시 목표를 더 높여 잡아야 하는 셈이다. 수출환경이 단번에 나아질 가능성이 없는 만큼 시선을 내부로 돌려 기초소재·핵심부품의 자체 생산력 제고와 내수 파급효과가 큰 서비스산업과 부품·소재, 신기술 관련 벤처기업 육성 등을 추진해야 한다는 주장을 경청할 만하다. 이광준 한국은행 경제통계국장의 말씀대로 “주요 소재 부품의 국산화율 제고와 내수 및 수출 부문의 균형 발전”이 긴요하다. 살림살이 나아질 탐구를 따라가다 보니 문득 “더 많은 돈이 지속적으로 더 행복하게 만들어 준다는 잘못된 가정”을 버리라는 미국의 경제학자 이스털린(Easterlin)의 충고가 떠오른다.


이스털린은 경제 성장과 인간의 행복감 사이의 상관관계를 탐구한 선구적 학자다. 그는 소득수준이 높은 사람들이 같은 나라, 같은 지역의 소득수준이 낮은 사람들보다 행복감도 커진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런데 부유한 나라와 가난한 나라에서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의 비율이 별 차이가 없다는 점이 발견됐다. 또 한 나라 안에서 가난하던 시절과 부유한 시절을 비교해도 행복감을 느끼는 사람의 비율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한 나라의 높은 경제 성장과 물질적 풍요가 그 나라 국민 전체를 더 행복하게 한다는 보장이 없는 셈이다. 이처럼 일정한 생활수준에 다다르면 경제 성장은 개인의 행복, 사회적 후생 증가에 이바지하지 못하는 현상을 “이스털린의 역설”이라 일컫는다.


이스털린은 “소득과 욕구는 분명 나란히 증가한다. 내 해석이 맞는다면, 경제가 성장한다고 해서 사회가 부족함 없는 과잉 공급의 상태가 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끊임없이 성장하는 욕구를 더욱 강하게 자극하게 될 것이고, 그런 욕구의 충족을 위해 다시금 경제적인 성장이 요구될 것이다(하랄드 빌렌브록 지음, 배인섭 옮김, 『행복경제학』, 미래의창, 2007, 28쪽)”라고 주장한다. 욕망의 증가 속도가 부의 증가 속도보다 더 빠르다면 돈은 바닷물과 같다던 쇼펜하우어의 말처럼 될 것이다. 이스털린의 역설이 성립하는 “일정한 수준의 부”가 어느 정도인지는 이견이 적잖다. 사회적 합의를 통해 수치화된 목표를 잡아보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을 텐데 말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니 트리클다운(Trickle Down)이라는 경제 용어가 생각났다. 대기업의 성장을 촉진하면 중소기업과 소비자에게도 자연히 혜택이 돌아간다는 이론이다. 물이 넘쳐 바닥을 적신다는 뜻으로 적하정책(滴下政策)이라고 쓰기도 한다. 오늘날 파이를 키워야 나눌 게 있다는 주장은 큰 틀에서 트리클다운에 바탕을 둔 주장으로 볼 수 있다. 이번 한미 FTA로 남는 이득을 손해 보는 부문에 보전해주자는 논리도 비슷하다. 하지만 양극화 문제를 돌이켜볼 때 성장의 혜택이 골고루 돌아가고 있는 가에 대한 논란은 여전하다. 다른 선진국의 경우에도 진보와 보수 진영이 모두 저마다의 습관적인 주장에서 탈바꿈해서 소득 불균형 문제 해결을 위해 상대방의 주장도 접합하려고 애쓰는 것을 보면 쉽게 풀어낼 문제가 아닌 듯하다.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개방이나 성장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


복거일 선생님은 “성장 자체가 양적 개념”임을 강조하신바 있다. “질적인 것도 모두 수량화(quantification)하면 잴 수 있는 것이고, 모든 것은 양적으로 환원”된다는 것이다(계간 『현대사상』 98년 여름호, 권두 좌담회 <한국 지식인, 무엇을 생각하는가> 참조). 김순덕 동아일보 논설위원은 “국민소득대로 그 나라 사람값이 매겨지는 법”이라며 “방글라데시 사람들이 암만 행복해도 그 나라 대학 졸업자가 남의 나라 가서 막일을 해야 먹고살 판이면, 난 그런 행복 원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다(“弱者를 빙자한 권력층의 "경쟁 반대!"” 동아일보. 2007. 03. 29. 참조). 두 분의 말씀은 선뜻 거부할 수 없는 힘이 있다. 하지만 양적 성장의 힘을 빌리지 않고 할 수 있는 일도 적잖다. 절대적 빈곤을 퇴치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지만, 상대적 빈곤을 다독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돈이 드는 건 아닐 게다.


정부 정책 차원에서 국민의 행복감을 증진하는 서비스를 고안해야겠지만 개별 경제주체들도 인식의 전환을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조지 버나드 쇼가 “60세가 되어 20세 시절보다 열 배 부자가 된 사람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 누구라도 열 배 더 행복해졌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핀잔에 자유롭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다. 나라가 살찌는 만큼 국민도 살찌는 선순환 구조를 궁리해야 한다. 김호기 교수님은 “성장과 분배의 선순환에다 새롭게 대외 개방과 대내 복지의 선순환을 결합시키는 이중의 선순환 구조”를 역설하셨는데 그것의 좀 쉬운 표현이다. 국민이 살찌는 나라는 민익(民益)을 지향한다. 부러 민익이라는 낯선 용어를 쓴 것은 국가주의적 국익론을 극복하는 발상의 전환을 꾀하기 때문이다.


복 선생님 말씀대로 질적 성장은 허구적 개념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양적 성장으로도 민익은 얼마든지 도모할 수 있으리라. 그런데 노동사회(work-based society)에서 문화사회(culture-based society)로의 이행을 주장한 프랑스 사회학자 앙드레 고르(Andr Gorz)의 개념 정의에 따르면 노동사회와 문화사회는 질적 차이가 선명하다. 나는 질적 성장에 대한 미련을 쉽게 못 버리겠다. 단순 성장(simple growth)을 넘은 복합 성장(complex growth)이란 궤변을 늘어놓고 싶다(왈쩌의 다원적 평등(complex equality)에서 빌려왔다). 일자리 만들기에 혈안이 된 요즘 문화사회를 꿈꾸는 건 배부른 소리다. 그러나 그 배부른 소리가 경제만능주의에 대한 근본적 반성과 행복한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할 여유를 줄지도 모르는 일이다. 나는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성장 생각에 빠져있지만 그 성장은 순도가 높기보다는 불순물이 많이 섞인 잡스러운 녀석이다. 성장에도 무늬가 있었으면 좋겠다. - [無棄]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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