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정부'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09.06.05 ▦ 바보 노무현과 고별하며 2
  2. 2009.04.23 노무현 이후 4
  3. 2008.02.24 노무현, 차마 미워할 수 없었던 사람

(노무현 대통령님의 서거를 애도하는 마음에서 ‘대통령님’이라는 잉여적 표현을 썼습니다. 너그러이 헤아려주시기 바랍니다.)


1.
지난 일주일 동안 노무현 대통령님의 서거를 가슴 깊이 슬퍼했다. 나는 국민장이 치러지는 일주일은 애도만 하고 싶었다. 그냥 일주일의 기간만 온전히 비통해할 시간을 넉넉히 확보한 것이 내가 우울증을 앓지 않고 견뎌낸 비결이었다. 정치적 구호는 내세우지 말고 그냥 애도만 하라는 자칭 비판언론들은 국민장 기간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내내 정부에 대한 비판을 정치 공세쯤으로 폄하할 모양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 애도만 하고 있을 마음이 전혀 없다. 비정치적인 삶을 권하는 정치적 술수에 맞서 이 비극이 발생한 원인을 제거할 방도를 모색할 것이다.


일주일의 애도 기간을 견디기 힘들어 하는 분들을 이따금 만났을 때도 그 조급증이 야속했을지언정 그 내용은 경청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상갓집에서 수학문제를 풀 수는 없는 노릇인지 잘 들리지 않았다. 어차피 슬픔을 다독이고 나면 역사가 차가운 표정으로 그를 응시할 테니 내 무지몽매함을 너무 탓하지 않기로 했다. 혹자는 뜬금없이 넘치는 애도가 불편하다고 말했다. 애이불상(哀而不傷)하는 수준에서 슬퍼한다면 크게 나무랄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며칠만이라도 그냥 애달파하고 화내는 풍경을 지켜볼 여유를 품었으면 어땠을까 싶다. 그렇게 해서라도 원한이 덜 쌓이고 응어리가 조금은 풀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자기와 친분이 없는 사람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건 그저 아름답다.


노무현 대통령님의 서거라는 비극에 일말의 책임이 있을 자들이 사과 한마디 없는 상황에서 고인의 유지를 빙자해서 화해니 통합이니 늘어놓는 건 참 기만적인 일이다. 관용은 피해자의 ‘의무’가 아니라 ‘권리’가 되어야 한다. 이번 사건의 피해자는 노 대통령님과 그 둘레 사람들 몇 명이 아니다. 추모객을 향해 관용을 권하는 건 너무 이르고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라 박절하게 들렸다. 추모 기간마저 상식과 예의를 잃어버린 졸렬한 정부 여당의 행태에 원한을 품는다면 그건 그네들이 스스로 불러일으킨 셈이다. 설령 그것이 넘치는 의견이라고 해도 그런 여론을 겸허히 수렴하는 것이 지금 정권을 책임지고 있는 분들의 자세일 것이다.


노 대통령님의 서거로 말미암은 사회적 분열이나 갈등을 염려한다면 그 감정의 골을 메울 행위자는 어디까지나 정부 여당의 힘센 분들이다. 자신을 그 자리에 올려준 국민들에게 악감정을 품지 말라거나 원한을 표출하지 말라고 외칠 권한은 그들에게는 없다. 정부가 못하는 일을 대신해주겠다면서 몇몇 언론들이 관용 장사에 나서지 않으셨으면 좋겠다. 어떤 언론들은 자신의 허물이 없었는지 돌아보는 용기를 보여줬지만 관용을 내세우는 언론들은 노 대통령님에게 비난을 넘어 저주를 퍼붓던 지난날을 까맣게 잊은 모양이다. 용서를 청하는 집단이 없는데 무슨 화해를 한단 말인가.


2.
노 대통령의 서거에 따른 책임론에 시달리는 검찰은 수사는 정당했다고 강변했다. 검찰이 스스로 수사의 공정성과 신뢰성을 허무는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는 점을 망각한 처사다. 살아 있는 권력이라는 천신일 회장의 구속영장마저 기각되면서 검찰의 항변은 더욱 빛을 바랬다. 천 회장이 반드시 구속이 되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 그만큼 부실하고 조급한 수사를 했다는 방증으로 이해해야 한다. 임채진 검찰총장은 “이번 사건 수사의 당위성과 정당성을 존중해 주길 간곡히 부탁드린다”라는 사퇴의 변을 남겼다. 그나마 국민에게 사죄한 기품에 고개를 숙이지만 이번 일은 책임은 검찰총장이 모두 지고 갈 사안은 아니다.


노 대통령님의 시신이 수원 연화장에서 화장되는 상황을 생중계할 때 한 시민이 “이명박 ××× 복수할 거야 이 ×××야”라고 외치는 장면이 TV 생중계로 나갔다. 영결식장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헌화할 때 행사장은 물론 행사장 밖의 시민들이 야유했다.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를 입에 달면서도 줄곧 괴상하게 실천했던 청와대가 이런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란 쉽지 않을 듯싶다. 저분들에게 용서나 사죄를 구걸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1991년 4월 헌법재판소는 사죄광고 제도가 타인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믿지 않는 자에게 본심과 다르게 깊이 사과하도록 강요하는 것이므로 인간 양심의 왜곡과 굴절이자 이중인격 형성의 강요라고 정의하며 위헌 결정을 내렸다(89헌마160). 반성을 강제할 수 없다는 결정이다.


헌재의 결정으로 비추어 볼 때 유독 방송사에만 강요하고 있는 ‘시청자에 대한 사과’ 조치는 위헌일 가능성이 크다는 견해도 있고, 헌재의 결정이 언론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고찰이 부족해 약자인 피해자의 권리 구제를 소홀히 만든다는 비판도 들린다. 여하간 헌법이 보호하는 양심의 자유는 선하고 올바른 판단만을 보호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덜 선하고 덜 올바른 내심마저 보장하는 것이 양심의 자유의 고갱이다. 양심에 거슬려 사과를 못하겠다는 사람에게 양심을 탑재하라며 구박한다면 헌법정신과 어긋나는 행동이다. 물론 사인과 공인은 차이가 있다. 굳이 사과를 받아야 한다면 사적 영역보다는 공적 영역을 향해야 요구해야 한다. 공인들의 양심이 덜 소중하다는 건 아니지만 명예나 체면을 중시하는 한국의 문화나 정서를 모두 부인할 수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2004년 탄핵 정국 당시 “잘못이 있어 사과하라면 사과할 수 있지만 잘못이 뭔지 모르겠는데 시끄러우니까 사과하고 넘어가자는 건 받아들이기 어렵다”라는 요지의 발언을 했던 노 대통령님은 결국 탄핵소추까지 당했다. 정부의 사과 표명은 그네들의 자유의사에 맡기는 게 기본원칙이라고 믿는다. 끝끝내 사과를 거부하는 자세를 칭찬하는 건 결코 아니지만 잘못이 없다고 믿거나 잘못이 뭔지 모르는 분들에게 사과를 청하는 건 도리가 아니다. 그럼에도 사과에 미련이 남는 것은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을 존중하면서 얻어낼 것이 그 정도뿐이기 때문이다.


3.
노 대통령님이 서거하시기 이틀 전까지만 해도 나는 때 아닌 산수놀이에 빠졌다. 민주당을 비롯한 야당들이 신영철 대법관 탄핵소추안을 발의할 계획이라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사법부의 자정 노력을 지켜보는 것이 순리이겠으나 그와 더불어 입법부가 우회적으로 나설 수밖에 없는 고충을 이해하고 반겼다. 이것이 삼권 분립의 대의에 부합하는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탄핵소추안 발의조차 여의치 않아 보여서 서글펐다. 대법관에 대한 탄핵소추안 발의에는 재적의원 3분의 1 이상의 동의가 필요하다. 친박연대 3명의 의원직 상실로 재적의원 수가 296명으로 줄어든 지금 99명이 동의해야 하는 셈이다.


민주당 84석과 민주노동당 5석, 창조한국당 3석, 진보신당 1석이 모두 동참해도 한참 모자란다. 친박연대 5석과 호남 무소속 4석이 동조해야만 간신히 발의할 수 있는 실정이다. 자유선진당과 한나라당의 일부의 호응을 기대하려는 계산 자체가 너무 씁쓸했다. 소수 야당들이 사안에 따라 힘을 모으는 일이야 나쁠 것은 없지만 이렇게 구차하게 애를 써야 한다는 현실이 원망스러웠다. 민의가 제대로 반영되었는지 의심스러운 현행 선거구제의 탓인지 몰라도 저 거대 여당을 견제할 수 있는 야당들이 부재하다는 형국이 너무 아슬아슬하다. 그렇다고 여당의 절제나 양식을 기다리기도 어렵다. 신 대법관을 감싸고도는 한나라당의 태도에서 사법부의 독립을 바라는 충정을 읽을 수 없기 때문에 더 참담했다.


지난 일주일 내내 물기 어린 눈으로 보냈지만 금요일 영결식 장을 나서던 운구차를 보며 살아생전 먼발치에서나마 본 적도 없는 그 분을 보내려니 또 눈물이 났다. 아마도 이 눈물들은 내 자신을 위한 눈물이었을 것이다. 눈물을 닦고 다시금 산수놀이를 하려니 화가 치밀었다. 상중에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지만 일상으로 돌아와서도 내 뜻대로 되는 일은 거의 없어 보여서다 모두들 미래를 말하는데 나는 지난 2004년 총선 당시로 퇴행하고 말았다. 단순히 열린우리당의 의회권력 쟁취에 집착한다고 비판받던 그 시기 즈음으로 돌아가 버렸다. 집권이나 승리 이후는 고심하지 않고 집권과 승리 자체를 열망할까봐 부끄럽다.


한나라당의 집권으로 민주주의가 후퇴할 것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던 분들이 요즘도 같은 생각인지 궁금하다. 물론 노무현과 참여정부를 반대하면서 이명박 정부를 반대하는 행위는 얼마든지 양립 가능하다. ‘다 똑같은 놈들’ 정도로 여기시고 노무현도 했는데 이명박이라고 못할 것이 없다는 판단이셨는지, 아니면 어쨌든 국민 다수의 뜻이니 차마 민주주의 후퇴 운운할 수는 없어서 그런 말씀들을 하신 건지 묻고 싶다. 나는 지금 지난날 노무현에게 과도한 책임을 물었다고 투덜거리는 것이 아니다. 노무현의 실정을 비판하는 것만큼 이명박의 난정을 바로잡을 세력의 수가 너무 적어 보이는 안타까움을 토로할 따름이다. 이명박을 제어할 수 있는 가장 큰 행위자가 박근혜인 현실이 기가 막혀서다.


4.
서거의 충격이 가시지 않은 관계로 지금이야 민주당이 한나라당과 지지율을 나란히 하고 있지만 조정기간이 도래할 것이 분명하다. 만약 그 조정기간을 거쳐도 한나라당 지지율의 팔할 이상을 유지한다면 2010년 지방선거에서부터 2012년 총선과 대선까지 이어질 선거에서 한나라당과 한바탕 겨뤄볼만 한 상황이 조성된다. 물론 미지의 카드이자 희망의 카드인 진보정당이 제자리를 지켜주고 계시지만 지방선거와 총선거에서의 선전은 기대해도 대선까지 도모한다는 건 진보정당 지지자 본인들도 믿지 않으실 게다.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가지 않고 명줄이 늘어난 제1야당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를 고민해야할 시점이다. 다만 이 과정에서 사표론 따위의 논쟁이 다시 나올까봐 걱정이다.


노 대통령님의 서거가 전통적 민주당 지지층의 분열을 치유하는 실마리가 될지도 모른다는 전망이 나온다. 내 소견으로는 열린우리당 지지층과 옛 민주당 지지층이라고 표현해야 더 적절하다. 자기들이 선출한 후보를 흔들면서 국민을 농락했던 분당 전의 민주당을 지지하지는 않았지만 열린우리당은 지지했던 나 같은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어지러운 창당놀음의 당연한 결과로 2007년 대선에서 패배한 후 결국 민주당 간판을 걸었지만 과연 이네들이 화학적 결합을 했는지 의심스럽다. 민주당은 친노 세력을 껴안겠다는 속셈이지만 누구의 앙금이 더 남았든 감정의 골이 커 보인다.


뉴민주당 플랜을 추진하며 노무현과 참여정부에 거리두기에 열중하던 민주당이 너무 표변하는 모습이 볼썽사납지만 두고 볼 참이다. 참여정부의 긍정적 유산을 건져 올리는 작업을 하겠다며 분주하지만 한나라당과 또렷이 차별화할 묘책을 찾아낼 결기를 보여줄지 미지수다. 한편으로는 친노 세력의 신당 이야기도 들리지만 지역적 기반이 없는 신당이라면 자유선진당 만큼도 성과를 거두지 못할 공산이 크다. 수도권이야 본래 어려운 싸움이고, 영남은 거의 가능성이 없으니 생환 확률이 별로 높지 않으므로 친노 신당의 미래는 바보 노무현의 험난한 좌절을 되풀이하고 막을 내리기 십상이다.


개인적 차원이 아닌 한 정당 전체가 죽기를 각오하고 달려드는 경우는 1990년 3당 합당에 반대했던 꼬마 민주당 정도가 기억나는데 거대 여당을 눈앞에 두고 이 모험을 감당하기란 쉽지 않다. 민주당과 2등 경쟁에 함몰될 신당이라면 신중해야 한다. 굳이 신당이 아니더라도 친노파의 존속은 유권자들을 위해 다행스러운 일이다. 열린우리당에 몸담았던 분들이나 친노파가 잘났다고 옹호하려는 뜻이 아니다. 당장 진보정당으로 달려가기를 머뭇거리는 상당수 국민이 정치 냉소자가 되어 버리는 현상을 막고 선택의 폭을 넓힐 수 있다는 점을 안도할 따름이다. ‘그놈이 그놈’이라고 여기는 분들은 반동의 징후라 하시겠지만 이 체제가 재생산되는 사태야말로 반동이다.


5.
노 대통령님이 퇴임하실 때 참여정부를 두고 재평가가 이뤄질 것이라는 견해에 동감했다. 그가 대한민국에 어떤 부정적 유산을 남겼는지도 차차 밝혀지겠지만, 긍정적 유산 또한 드러날 것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라는 핑계를 함부로 입에 담지 못할 때 비로소 참여정부를 차분하게 평가할 토대가 마련되리라 내다봤다. 하지만 노무현을 제물로 한 희생제의는 그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무죄추정의 원칙을 미뤄두고 진행된 과정은 너무 야만적이었다. 우리들은 그 매질이 우리 스스로의 품위를 깎아내리는 일이었음을 이제야 깨달았다. 국민이 뽑은 대통령을 욕보여서 이룩할 법치주의라면 너무 초라하다. 온 사회가 공인의 윤리적 책임, 법적 책임에 대해 성토를 했던 그 마음은 잘 간직해보자.


노 대통령님께서는 대통령 재임시절에 당신을 진보라고 표현하신 적이 많았고 생애 마지막까지도 진보주의를 궁리하셨다고 전한다. 한국적 맥락에서는 노무현이 얼마든지 진보로 분류될 여지가 있음을 인정한다. 진보와 보수의 중간 개념인 개혁세력이라고 부르는 게 낫겠지만 내 개인적으로는 노 대통령님께서 한국 보수주의의 한 극점을 보여주신 분이라 좋아했다. 추모 열기를 ‘인간’ 노무현에 대한 그리움에 국한하기도 하지만 나는 ‘정치인’ 노무현은 한국 보수주의의 업그레이드를 이뤄낸 인물로 평가하고 싶다. 스스로를 보수라고 칭하는 분들이 노무현을 그렇게 매몰차게 대했다니 참 곤혹스럽다.


노무현에게 아쉬웠던 점을 메우면서 또 다른 매력으로 우리를 잡아끌 분을 가까운 시일 내에 찾지 못할 것 같아서 멍멍하다. 갖은 미움을 받았으나 현실 정치인 가운데 노무현만큼 대중성과 진솔성, 원칙과 가치를 제시한 교양 있는 지도자는 너무 드물었다. 그 대중성은 굳건하지 못했고, 진솔성은 계산된 것이었으며, 원칙은 분열적이었고, 가치는 흐릿했다는 험담이 대개 온당하다고 수긍하더라도 말이다. 어쩌면 이 추모 열기는 그와 같은 사람을 다시는 만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아쉬움이 크게 배어있는지도 모른다. ‘또 다른 노무현’이나 ‘더 나은 노무현’이 등장하지 않을 것 같다는 체념이랄까.


그 또한 불완전한 인간이었다. 권좌에서 쌓은 허물을 내려와서 천천히 갚아나가길 바랐다. 내가 사랑했던 나의 일꾼이자 나의 대표가 세월의 손길을 마주잡고 가는 광경을 기대했는데 그렇지 못해 가슴이 저민다. 그의 지지자든 반대자든 그 분을 서서히 잊어감으로써 얻을 평화를 모두가 잃어버렸다. 이래저래 실망하고 서운했지만 그런 감정보다 한두 뼘쯤은 더 좋아하고 아꼈던 분에게 작별을 고한다. 죽은 뒤에 받는 복덕[冥福]을 믿지 않는 나로서는 치열하게 살았던 당신의 삶이 살아 계실 때 상당 부분 보상받았다는 말씀을 올리고 싶다. 바보 노무현, 고마웠습니다. - [無棄]


추신 - 노제 때 잠깐 개방됐다 다시 봉쇄됐던 서울광장의 차벽이 4일 새벽 철수했다고 한다. 아예 광장 주변에 성벽을 세우고 쪽문을 내는 게 좋을 듯싶다. 주인인 시민이 쓸 광장을 머슴인 자들이 멋대로 막았다 열었다 하는 꼴을 더는 보기 싫어서다. 며칠 전 헌법재판소가 옥외집회 개최 때 경찰에 미리 신고토록 한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조항이 합헌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헌재는 “일정한 신고절차만 밟으면 일반적ㆍ원칙적으로 옥외집회 및 시위를 할 수 있도록 보장하고 있으므로, 사전 신고제도는 헌법상 사전허가 금지에 반하지 않는다”라고 밝혔다. 헌재의 결정에 아쉬운 점이 있지만 합헌의 논거로 들었던 내용이나마 지켜지는 나라에서 살기를 희망한다. 법과 원칙은 이 정권의 입맛으로 가름하는 게 아니다.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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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이후

사회 2009. 4. 23. 02:59 |

(지난 4월 8일에 썼던 ‘친노 이후를 고민할 때’라는 잡글을 조금 수정 보완했습니다. 한 시절 저의 대표자이자 일꾼이었던 노무현 대통령님이 처참한 모습의 패장이 되어 용서를 빌고 있습니다. 침통합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신을 버려주기를 호소했다. 그는 자신의 홈페이지에다가 “저는 이미 민주주의, 진보, 정의, 이런 말을 할 자격을 잃어버렸습니다”라고 썼다. 노무현의 지지자들은 그를 서서히 잊어감으로써 얻는 평화를 잃었다. 열린우리당이 맥없이 무너진 후에 참여정부의 계승은 사실상 물거품이 되었다. 그렇기에 참여정부의 지지자들은 노무현 개인을 향한 편애에 의지한 측면이 컸고 이번 사건에 더욱 허탈감을 느낄 듯싶다. 국민을 향한 그의 사죄가 진솔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었으면 좋겠다. 노 전 대통령에게 보장된 법적 방어권은 허위사실을 막는 선에서 보장돼야 한다. 노 전 대통령은 자기 잘못을 외면하거나, 남에게 전가하지 않는 모습을 통해 마지막 기품을 건사하길 기원한다. ‘바보 노무현’의 잔영이나마 더듬고 싶다.


노무현의 재임 시절 그의 작은 성취마저 용납하지 못하던 이들이 자못 근엄한 표정으로 깨끗한 정치를 들먹인다. 개중에는 지난 대선 때 도덕보다는 능력이라고 목청을 높이던 분들이 적잖을 게다. 그런 말씀을 하는 사람들은 노무현은 무능한데다 부패하기까지 했으니 더 구박받아야 한다고 항변하겠지만 그 말을 하는 스스로도 얼마나 믿을지 궁금하다. 설령 노무현에게 험담을 할 만큼 떳떳하지 못한 자들이라도 노무현을 향해 얼마든지 돌을 던질 수 있다. 그것이 권력을 가진 자들이 마땅히 져야할 짐이기 때문이다. 측근과 가족의 허물은 결국 노 전 대통령의 허물이기도 하다. 그 허물에게 쏟아지는 꾸지람을 담담히 감내해야 한다. 참여정부 민정 기능의 부실은 너무 뼈아픈 실책이다.


현 정권 인사를 향한 수사 강도와 견주어 볼 때 균형이 맞지 않다는 볼멘소리는 마음으로 삭혀야 한다. 물론 이 정부 들어 검찰의 신뢰는 많이 실추된 상태다. 아무쪼록 여야를 가리지 말고 공정하게 수사해주길 바랄 따름이다. 죄가 있으면 벌을 받으면 그만이다. 일각에서는 편파, 표적, 기획수사라는 비판을 하기도 한다. 검찰은 이런 우려의 시선이 존재함을 헤아려야 한다. 지은 죄 만큼의 벌을 골고루 내리지 못하는 것은 또 하나의 죄를 짓는 셈이다. 검찰이 할 일은 죄 만큼의 벌을 공평하게 부과하는 것이다. 물러난 권력에는 예리한 칼날을 휘두르면서 살아 있는 권력에는 칼집이나 만지작거리는 시늉을 한다면 지금의 비극을 더 심화시킬 뿐이다. 피의사실을 무차별적으로 공표하면서 과거 정부의 흠집을 대서특필하는 데만 온 정신이 팔린 몇몇 언론들도 이 비극에 동참하지 말길 부탁한다.


이번 사안은 부정한 돈을 받은 이들이 각자의 책임을 지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듯싶다. 정치적 실체로서 존재하던 ‘참여정부 계승세력’ 혹은 ‘친노 세력’라고 불리던 자들이 몰락한 후의 한국 정치의 지형도를 그려볼 때가 다가옴이 느껴진다. 친노파라 불리는 이들은 참여정부가 표상했던 정신을 창조적으로 이어가기보다는 노 대통령과의 연줄로 권세를 누린 사람들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했다. 담담하게 참여정부와 명운을 함께 하려는 몸짓이 있었다면 이렇게 마냥 동네북이 되는 신세는 면했을지도 모른다. 친노파들이 노무현 대통령을 만들어줬던 국민들의 정성을 생각했다면 오늘날의 참담한 꼴을 당하지 않았으리라. 누구를 탓하기 전에 자기 머리부터 칠 일이다.


정권 차원의 음모가 있든 없든 간에 이번 일로 말미암아 참여정부를 지지했던 국민들의 가슴에는 멍이 들었다. 정권 차원의 부패까지는 못 되고 몇몇 측근들의 난행이라고 해도 그렇다. 한나라당을 향해 도덕적 권위를 내세운 이들이 그 상대적 우위를 반납하고 나면 너무 초라하다. 친노 세력은 차떼기를 하고도 떵떵거릴 수 있는 저들과는 처지가 다르다. 깨끗한 정치는 참여정부의 핵심 가치 가운데 하나였다. 그 가치를 내걸고 목에 힘주던 이들이라면 좀 더 사려 깊은 처신을 했어야 한다. 이명박 대통령이 4·19혁명 49주년 기념식에서 “선진화는 절대로 부정부패와 함께 갈 수 없다”라는 기념사를 남기는 빌미를 제공하다니 치욕스럽다. 저들이 유능을 참칭하더니 이제 청렴마저 훔쳐가려고 한다. 물론 유능이나 청렴은 특정인이 독점할 수 있는 덕목은 아니지만 말이다.


한때 최고의 권세를 누리던 노 전 대통령을 가엾기 여긴다는 건 민망한 일이지만 자나 깨나 노무현의 실패만을 꿈꾸던 이들의 열망을 깨트리지 못해 애석하다. 친노파와 명랑하게 이별할 준비를 하다가도 개혁세력의 한 축이 무너진 자리를 대체할 행위자가 당장 채워질 수 있을지 걱정이다. 친노의 중심인 영남 개혁세력은 한국 정치에서 소중한 존재다. 도매금으로 넘기기보다는 어지간하면 존속시켜야 할 실체다. 친노 세력에게 권력을 쥐어주었던 국민에 대한 보답을 하기 위해서 우아하게 떠날 준비를 해두는 게 좋겠다. 그럼으로써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유린하는 세력에 맞설 최후의 보루 몇 개쯤은 지켜내길 바란다. 별다른 충원 세력도 없는데 징검다리부터 치우려니 마음이 스산하다. 이 과정에서 퇴행적 지역주의가 독버섯처럼 돋아날 조짐이 보인다.


만약 친노가 붕괴하고 나면 유권자들은 하나의 선택지를 잃어버린다. 진보정당으로 달려가기를 머뭇거리는 상당수 국민들이 정치 냉소자가 되어 버리고 말 것이다. 현 정치 구도에서는 자신의 정치적 지향을 대변할 정당이 없다고 여겨 적극적 기권층이 되어버리는 셈이다. 사분오열된 야권이 거대 여당을 이길 생각은 포기하고 그에 버금가려는, 즉 2등이나 하는 경쟁에 함몰된다면 끔찍하다. 야권에게 필요한 건 ‘절반의 패배주의’다. 지금 이 상태로는 필패한다는 생각을 늘 품어야 한다. 현 정치 지형을 엄정히 성찰하고 시운에 따라 힘을 합치고 양보하면서 지지 않기 위한 모든 방법을 궁리해야 한다. 그래야만 간신히 으뜸이 될 수 있다.


이 뒤숭숭한 와중에 이명박 정부는 참여정부를 훼철하는 작업에 더욱 열을 올릴 공산이 크다. 자기네는 유능한데다 깨끗하다는 허황된 자부심을 품고 말이다. 융단폭격을 받아 만신창이가 된 노무현 시대지만 그 잿더미 속에서도 긍정적 유산을 몇 개 건져 올릴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 긍정적 유산을 부수려는 시도를 얼마나 저지할 수 있을까. 도둑고양이처럼 엄습한 친노와의 작별은 곤혹스럽다. 때 이른 친노의 퇴장은 한국 정치에 암운을 드리운다. “굿바이 노무현!”은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모든 것을 노무현 탓으로 돌려 그만 수렁에 던지고 나면 우리는 희망의 싹을 발견할 수 있는 걸까? 아닐 것 같다. - [無棄]


여담 - 노무현의 첫 번째 고백이 나왔던 시기 <노무현 전 대통령이 끝내 몸통이었다니>라는 제목의 4월 8일자 세계일보 사설은 노무현에 대한 저주라고 이를 만하다. 나는 세계일보의 독자는 아니지만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공적 지면을 이렇게 함부로 써도 되는 것인지 치가 떨리고 분통이 터진다(이 사설의 첫 구절을 그대로 따왔다). 나는 그저 이 사설의 구절들을 기억했다가 앞으로 이와 같은 불행한 사건이 터질 때 세계일보 사설이 뭐라고 쓸지 비교해볼 따름이다.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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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대 대통령 취임식(사진 출처 - 노무현 홈페이지http://www.knowhow.or.kr)


떠나는 노무현 대통령님을 가엾게 여긴다는 건 황당한 일이다. 나는 그의 출세를 부러워할지언정 그에게 연민을 느끼지는 않는다. 그는 지난 5년 동안 최고의 권력을 누렸고, 퇴임한 후에도 월 1500만원의 연금과 경호원 및 비서관 등을 국가에서 지원 받는다. 이러한 예우는 그를 국가의 지도자로 삼았던 국민들의 품위를 위해서이기도 하다. 성공한 전직 대통령의 모범으로 꼽히는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을 본받으라고 여러 사람들이 충언하고 있다. 이 말에는 정치적 행보를 하지 말아달라는 주문도 적잖이 녹아들어 있다. 집짓기 운동으로 유명한 카터 전 대통령이 비정치적 행위만 했는지는 가늠하기 힘들다. 정치와 비정치를 가르는 기준은 애매하게 마련이다. 국가의 분배 구조에는 침묵하고, 자선 활동만 권장하는 식이라면 매우 기만적이다.


노 대통령의 임기 말을 조명한 MBC 스페셜 <대한민국 대통령> 2부에서 희망돼지 저금통 앞에서 목이 메는 장면에서는 가슴이 짠했다. 그는 옛 지지자들에게 미안함을 표할 기회를 너무 많이 놓쳤다. 그가 악의에 차서 지지자들을 배신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여러 차례 팽개쳐진 지지자들 가운데 끝끝내 그의 선의를 믿고 싶어하는 이들이 있다. 그네들 자신의 존엄성을 건사하고픈 심리 때문이라고 깎아 내리기 망설여진다. 적어도 경제만 살리면 그만이라고 외치지 않았던 분들에게 중독자나 광신도라고 헐뜯는 건 예의가 아니다. 노무현으로 상징된 가치의 소멸을 안타까워하는 측면이 있다. 열린우리당이 맥없이 무너진 후에 참여정부의 계승은 사실상 물거품이 되었기에 노무현 개인을 향한 편애에 의지하게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노무현이 그저 대통령이 되어준 것을 고맙게 여기는 지지자들도 있겠지만, 애증이 섞인 복잡한 감정으로 그를 보내는 지지자들이 더 많으리라.


고종석 선생님은 노 대통령을 개혁세력 전체를 분열과 절망의 나락에 빠뜨린 트로이 목마라고 비판했다. 노무현이 싫다는 분들이 달려간 곳이 한나라당과 이명박 정부라는 사실에 비추어 그런 비유가 나왔다. 그러나 중도 보수 혹은 개혁적 자유주의 세력은 목마를 성안에 들여서 망한 것이 아니다. 스스로를 모욕하고 나서 스스로 붕괴했다. 호남의 지역주의에 기대 연명했던 옛 민주당의 구접스러운 행각이나 올바른 패배를 마다해 정당 민주주의의 퇴행에 일조했던 옛 열린우리당 탈당파의 팔락거림은 노무현 탓으로 감추기에는 그 그림자가 너무 짙다. 아울러 노무현의 실패가 오늘날 넘실대는 도덕과 능력이 별개라는 낭만적(?) 사고와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지도 엄밀히 따져야 한다. 노무현이 우리 사회의 윤리적 감수성을 헝클어뜨린 분노를 고작 이런 식으로 표출한다면 정직한 절망 외에는 손쓸 방도가 없다.


노무현과 참여정부를 놓고 재평가가 이뤄질 거라는 견해에 동감한다. 그가 대한민국에 어떤 부정적 유산을 남겼는지도 차차 밝혀지겠지만 이제 노무현 때문이라는 핑계는 함부로 입에 담지 못하게 되었다. 노무현을 두고 벌였던 희생제의는 이쯤에서 그치고 노무현을 넘어설 정치 지도자를 찾는 노력을 해보자. 노무현에게 아쉬웠던 점을 메우면서 또 다른 매력으로 우리를 잡아끌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을 전망이다. 갖은 미움을 받았으나 현실 정치인 가운데 노무현만큼 대중성과 진솔성, 원칙과 가치를 제시한 교양 있는 지도자는 너무 드물다. 그 대중성은 굳건하지 못했고, 진솔성은 계산된 것이었으며, 원칙은 분열적이었고, 가치는 흐릿하다는 험담이 대개 온당하다고 수긍하더라도 말이다. 참여정부가 국민과의 소통에 실패해 민심을 잃었다는 주장이 많다. 노무현을 반겼던 서민에게 환멸을 불러일으켰던 뼈아픈 실책이다. 노무현을 실패한 대통령으로 인정하기 싫은 분들도 이 점에 대해 겸허한 성찰이 있어야 한다.


물론 일부 언론이 뒤틀린 해석도 모자라 신성한 사실마저 구부러뜨려 왔음은 또렷하다. 최근 일부 언론이 이명박과 그 둘레 사람들에게 너그러운 모습은 섬뜩하다. 앞으로도 이중 잣대가 춤춘다면 언론의 신뢰도는 다시금 흔들릴 게다(참여정부가 사실을 어그러뜨린 사례도 무수히 많다). 그네들이 장악한 기록을 넘어선 균형 잡힌 평가가 다만 시간이 지나면 가능할지 궁금하다. 편향된 사료를 남겨놓고 역사의 평가를 운운하는 건 비겁한 짓이다. 그 평가는 결국 노무현 정부의 긍정적 가치를 재발견하는 형식이 아니라 후임 정부의 실정에 견주어 부각될 상대적 돋보임에 그칠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당대에도 객관적인 성과 측정과 공정한 평가를 내렸는지를 살펴야 한다. 참여정부가 남긴 대통령기록물이 역대 정부에 비해 월등히 많은 까닭도 있는 그대로의 평가에 대한 욕망이 발현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고려 공민왕은 재위 기간 동안 『서경』 「무일(無逸)」편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고 한다. 「무일」편에 대한 강의를 들었으며, 이를 써서 신하들에게 나눠주거나 정무실에 걸어두도록 했다. 「무일」편은 주공(周公)이 조카인 성왕(成王)에게 남긴 정치적 조언이다. 주공은 군왕의 지위를 특권이 아닌 의무로 보아야 한다며 안일하지 말 것을 설파한다. 「무일」편은 왕의 근면 성실한 노력을 주로 강조하고 있다. 주나라 무왕이 기자(箕子)의 충고를 청하는 「홍범(洪範)」편은 군왕의 의사소통 능력에 주안점을 둔다는 의견이 있다(김영수, 『건국의 정치』, 이학사, 2006, 208~231쪽 참조). 군왕이 망국의 유신에게 국정을 묻는 자세가 인상 깊었기 때문인 모양이다. 기자는 무왕에게 ‘그대의 나라’라고 하지 않고, ‘그대의 왕가(王家)’라고 칭하며 주나라를 완전히 인정하지 않은 듯이 보이는데도 말이다.


부지런함과 의사소통은 양자택일의 문제라고 보기 힘들다. 우리네 지도자들은 마땅히 두 가지 덕목을 품어야 한다. 윤택(尹澤)은 공민왕에게 「무일」편을 강의하면서 “전하께서도 성왕이 능히 주공의 가르침을 듣는 모습을 본받으셔서 엄숙하고 공손하여 삼가고 두려워하시면 사직의 복이 됩니다(願殿下 法成王 能聽周公之訓 嚴恭抑畏 社稷之福)”라고 말한다(『고려사절요』 공민왕 6년(1357) 5월). 주공의 언설만큼이나 그 대화가 이루어지는 맥락을 배워야 한다는 강설이다. 다시 말해 기자의 말에 귀 담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주공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태도를 갖추길 바랐다. 「무일」편 끄트머리에는 주공이 훌륭했던 이전 왕들의 행실을 평가하는 대목이 나온다. 그들은 백성이 자신을 원망하고 욕할 때 스스로 마음가짐을 조심하여 ‘그 허물이 나의 허물이다’라고 말하며, 노여워하지 않았음을 칭송하는 내용이다. 노무현과 그의 사람들이 자기 탓에 서툴렀기에 그네들이 상처를 받는 것 이상으로 국민 가슴에 생채기를 냈다.


『목민심서』의 마지막 편은 ‘관직에서 물러남(解官)’이다. 벼슬에서 물러날 때의 자세를 서술한 내용인데 제6조는 ‘사랑을 남김(遺愛)’이다. 다산 정약용은 수령이 임지를 떠난 뒤에도 백성들로부터 기림을 받는 선정의 이상향이라 생각했다. 이미 떠난 뒤에도 사모하여 심은 나무조차 사람들의 아낌을 받는 것은 감당(甘棠)의 유풍(遺風)이라는 구절이 있다. 감당의 유풍은 『시경』에 나오는 이야기로 백성들을 위해 일하다 팥배나무 밑에서 쉬어간 지도자를 경애하여 그 나무조차 건드리지 않았다는 고사다. 노무현의 빈자리를 그리워하는 국민이 얼마나 될지는 잘 모르겠다. 노무현이 임기 중에도 실현하지 못한 가난한 사람들을 보듬는 일을 퇴임 후에 해내기를 기대하는 건 무모하다. 그는 강은 똑바로 흐르지 않지만 어떤 강도 바다로 가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고별사를 남겼다. 그가 염원하는 바다가 단지 힘센 벗들과의 어깨동무는 아니었으면 좋겠다. 노무현 대통령님을 좀처럼 미워하지 못했던 내가 드리는 마지막 덕담이다.


노무현을 만나고, 그의 시련에 같이 아파했던 지난날이 애틋하다. 그와 함께 내 젊음도, 고집도 저물었다. 내가 미련한 젊음 대신 유능한 점잖음을 택하고, 우직한 고집 대신 표변하는 영특함을 예찬할까 두렵다. 내 자신에게 얼마나 저항할 수 있을까. - [無棄]


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회는 더불어 사는 사람 모두가 먹는 것 입는 것 이런 걱정 좀 안 하고, 더럽고 아니꼬운 꼬라지 좀 안 보고, 그래서 하루하루가 좀 신명나게 이어지는 그런 세상입니다.
만일 이런 세상이 좀 지나친 일이라면, 적어도 살기가 힘이 들어서 아니면 분하고 서러워서 목숨을 끊는 그런 일은 좀 없는 세상, 이런 것입니다.

- 1988년 노무현 의원의 국회 대정부 질의 中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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