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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8.06.26 學如不及 猶恐失之하는 제자
  3. 2008.06.15 공자의 꿈
  4. 2008.04.26 공자와 번지와의 문답

세한도 발문 읽기

문화 2009. 3. 15. 23:08 |

추사 김정희(金正喜)의 세한도(歲寒圖)는 한국 회화 가운데 유명하기로 손꼽히지만 그 발문의 속살을 들여다보면 그림에 대한 이해가 더욱 높아진다. 세한도는 추사 선생이 59세인 1844년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 제자인 우선 이상적(李尙迪)이 보내준 책을 받고 그 정성에 감격하여 그려준 그림이다.


이상적은 역관(譯官)이라 중국을 드나들며 추사를 위한 서책을 수집할 수 있었다. 양반 지인들이 자신을 멀리할 때 역관 제자가 남아 제 곁을 지켜준 것이 유독 더 애틋했는지도 모르겠다. 추사 선생은 권세와 이익에게 달려가지 않고 자신을 찾아와 준 제자에게 그림과 발문으로 극진한 고마움을 표한다.


이상적은 스승의 세한도를 받고 “세한도 한 폭을 엎드려 읽으매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리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歲寒圖一幅 伏而讀之 不覺涕淚交)”로 시작하는 답장을 썼다. 옛사람이 왜 그림을 ‘읽는다’고 했는지 알겠다. 세한도는 발문까지 읽고 나서야 비로소 제대로 완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한도 오른쪽 아래 구석에는 장무상망(長毋相忘) 네 글자가 새겨진 붉은 도장이 찍혀있다. 오랫동안 잊지 말기를! 스승이 찍었든 제자가 남겼든 서로의 도타운 마음자리가 내 무심함마저 녹인다. 정민 선생님과 오주석 선생님의 세한도 발문 번역을 내 입맛에 맞게 고쳤다. 세한도에는 진짜배기 의리가 배어 있다. 요즘 다시 꺼내 읽고 싶어진 이유다.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못 빌리는 아픔을 겪으니 졸업이 비로소 실감이 난다. 광야로 내몰린 졸업생들이 덜 스산하도록 책 몇 권 끼고 다닐 수 있게 해주셨으면 좋겠다. 혹여 재학생들의 도서 이용에 불편을 줄까봐 큰 목소리로 외치지는 못하지만 말이다. 친구와 후배들이 나를 위해 한두 권씩 책을 빌려다줘서 고맙다. 세한도 발문을 풀이하며 그네들을 생각했다.


<세한도 발문>

지난해에는 계복(桂馥)의 <만학집晩學集>과 운경(惲敬)의 <대운산방문고大運山房文藁> 두 책을 부쳐왔더니, 올해는 또 우경 하장령(賀長齡)이 편찬한 <황조경세문편皇朝經世文編>을 부쳐왔구나. 이는 모두 세상에 늘 있는 책이 아니라서, 천만리 먼 곳에서 사온 것이며, 여러 해 걸려 얻은 것이지, 한 때에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去年以晩學大雲二書寄來, 今年又以藕耕文編寄來. 此皆非世之常有, 購之千萬里之遠, 積有年而得之, 非一時之事也.
거년이만학대운이서기래, 금년우이우경문편기래. 차개비세지상유, 구지천만리지원, 적유년이득지, 비일시지사야.


또한 세상의 도도한 물결(인심)은 오직 권세와 이익만을 따르는데, (귀한 책을 얻으려고) 마음을 쓰고 힘을 쓰기를 이와 같이 하고서도, 권세와 이익이 있는 사람에게 돌아가지 않고, 바다 밖 초췌하고 야윈 사람에게 돌아오기를 마치 세상 사람들이 권세와 이익을 따르듯 하는구나.

且世之滔滔, 惟權利之是趨, 爲之費心費力如此, 而不以歸之權利, 乃歸之海外蕉萃枯稿之人, 如世之趨權利者.
차세지도도, 유권리지시추, 위지비심비력여차, 이불이귀지권리, 내귀지해외초췌고고지인, 여세지추권리자.


태사공 사마천이 이르기를, “권세와 이익으로 합한 자는 권세와 이익이 다하면 사귐도 성글어진다”라고 했다. 그대 또한 세상의 도도한 물결 가운데 한 사람으로, 초연히 도도한 권세와 이익의 밖으로 스스로 벗어나니, 권세와 이익이란 기준으로 나를 보지 않음인가, 태사공의 말씀이 잘못되었는가?

太史公云, 以權利合者, 權利盡以交疎. 君亦世之滔滔中一人, 其有超然自拔於滔滔權利之外, 不以權利視我耶? 太史公之言非耶?
태사공운, 이권리합자, 권리진이교소. 군역세지도도중일인, 기유초연자발어도도권리지외, 불이권리시아야? 태사공지언비야?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라고 하셨다. 소나무와 잣나무는 네 계절을 지내도 시들지 않는 것으로서, 날씨가 추워지기 전에도 한결같이 소나무와 잣나무였고, 날씨가 추워진 뒤에도 한결같이 소나무와 잣나무였다. 그런데도 성인께서는 특별히 날씨가 추워진 뒤를 일컬으셨다(칭찬하셨다).

孔子曰, 歲寒然後, 知松栢之後凋. 松栢是貫四時而不凋者, 歲寒以前一松栢也, 歲寒以後一松栢也. 聖人特稱之於歲寒之後.
공자왈,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 송백시관사시이불조자, 세한이전일송백야, 세한이후일송백야. 성인특칭지어세한이후.


이제 그대가 나를 대함을 보면, 이전이라 하여 지금보다 더함이 없지만(잘 해준 것이 없지만), 이후라고 하여 지금보다 덜함이 없다(소홀함이 없다). 그러면 이전의 그대는 일컬을 만한 것이 없겠으나, 이후의 그대는 또한 성인에게 일컬을 만한 것이 아니겠는가? 성인께서 유독 이를 일컬었던 것(송백을 칭찬한 것)은 다만 늦게 시드는 곧은 절조와 굳센 절개를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날씨가 추워진 때에 느끼시는 바가 있었던 것이다.

今君之於我, 由前而無加焉, 由後而無損焉. 然由前之君, 無可稱, 由後之君, 亦可見稱於聖人也耶? 聖人之特稱, 非徒爲後凋之貞操勁節而已, 亦有所感發於歲寒之時者也.
금군지어아, 유전이무가언, 유후이무손언. 연유전지군, 무가칭, 유후지군, 역가견칭어성인야야? 성인지특칭, 비도위후조지정조경절이이, 역유소감발어세한지시자야.


아아! 서한(西漢)의 순후한 세상에서 급암(汲黯)과 정당시(鄭當時) 같은 어짊으로도 빈객들이 시세와 더불어 성하고 쇠하였다. 하비의 방문(榜文) 같은 것은 박절함이 극에 달했도다. 슬프다! 완당노인이 쓰다.

烏乎! 西京淳厚之世, 以汲鄭之賢, 賓客與之盛衰. 如下邳榜門, 迫切之極矣. 悲夫! 阮堂老人書.
오호! 서경순후지세, 이급정지현, 빈객여지성쇠. 여하비방문, 박절지극의. 비부! 완당노인서.
* 하비(下邳)는 하규(下邽)의 오기이다.


<참고>

마지막 단락에 나오는 급암과 정당시, 하규의 방문 이야기는 『사기(史記)』 급정열전(汲鄭列傳)에 나온다. 전한(前漢) 무제 때 급암(汲黯)과 정당시(鄭當時)라는 어진 신하들이 현직이 있을 때는 손님이 넘치다가 좌천되었을 때는 손님의 발길이 뚝 끊겼다.

 
사마천은 “급암과 정당시 정도의 현인이라도 세력이 있으면 빈객이 열 배로 늘어나고, 세력을 잃으면 당장 모두 떨어져 나간다. 그러니 보통 사람의 경우라면 더 말할 나위도 없다”라고 평했다.

 
이어 언급한 적공(翟公)의 사례도 마찬가지로 그 또한 해임되자 집이 한산하다 못해 문 앞에 새 그물을 쳐 놓을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여기서 문전작라(門前雀羅), 문전가설작라(門前可設雀羅)라는 고사성어가 유래되었다. 적공이 다시 관직에 오르자 손님이 다시 몰려오는 염량세태를 풍자하며 대문에 써 붙인 시는 다음과 같다.

 
一死一生 乃知交情 한번 죽고 한번 삶에 사귐의 정을 알고
一貧一富 乃知交態 한번 가난하고 한번 부유함에 사귐의 태도를 알며
一貴一賤 交情乃見 한번 귀하고 한번 천함에 사귐의 정이 드러나네.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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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학기를 마치면서 “배움은 미치지 못하는 듯이 하고, 이미 배운 것을 잃어버릴까 두려워한다(學如不及 猶恐失之)”라는 공자의 말씀을 실천할 것을 다짐했다. 미욱한 제자가 교수님의 강의에 보답하고픈 마음에 꺼내든 구절이다. 학기 내내 내 능력이 모자라 가르침을 따라가지 못할까 전전긍긍했지만 이제 학기를 마치며 그렇게 애태우며 배운 것을 너무 일찍 잊어먹지 않도록, 기왕이면 생활 속에서 구현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


정약용 선생은 猶恐失之를 『논어고금주』에서 嚮道而行 如有重寶在前 爲他人所先獲 此之謂惟恐失之라고 풀이하셨다. 기초한문을 수강한 학생으로서 용기를 내보자면 “도를 향해 가는데 마치 귀중한 보배가 앞에 있어 다른 사람이 먼저 얻어 가는 바를 두렵게 여기는 것이니, 이를 일러 惟恐失之라고 한다”라고 해석할 수 있을 듯싶다. 爲는 ‘생각하다’로 보았는데 여기서는 두렵게 여긴다, 조마조마하게 생각한다 정도로 의역을 하면 대강 이런 뜻이 나온다.


정리해보면 學如不及은 배울 때는 능력이 모자라 가르침을 따라가지 못할까 전전긍긍하며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 정도로 볼 수 있다. 猶恐失之의 경우 통설은 그렇게 애태우면서 배운 것을 잃어버리지 않게 잘 체화시키라는 뜻이다.  猶恐失之는 배운 것을 온축해내는 복습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 정이천 선생은 “오히려 잃을까 두려워하여 그대로 지나칠 수 없으니, 잠시 내일까지 기다리겠다고 말하는 것은 불가하다(猶恐失之 不得放過 才說姑待明日 更不可也)”라고 주석을 달았다.


반면에 정약용 선생처럼 읽는다면 견선여갈(見善如渴)과 비슷한 맥락에서 배움도 목마를 때 물을 본 듯이 한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하기야 착한 일도 그렇지만 배움이라는 것도 남에게 양보하기보다는 먼저 달려가야 할 것일 테니 말이다. 정약용 선생의 견해는 부지불식간에 놓치고 있는 진리가 없나 두려운 마음으로 살피고 혹여 숨겨진 가르침이 있거든 귀한 보석을 만난 듯 내달릴 수 있어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박세당 선생의 『사변록』에는 “학문을 할 때에는 부지런히 하되, 항상 부족한 것같이 하며, 오히려 잃어버릴까 두려워해야 하는데, 하물며 자기 스스로 힘쓰지 않으면 얻음이 있겠는가”라고 풀이하면서도 정이천의 주석을 인용하되 “이같이 하여도 오히려 얻지 못할까 근심한다(又云如此猶恐不獲)”라고 의역을 했다. 정이천이 내일로 미루지 말고 열심히 공부하라는 말을 얻지 못할 것을 염려하듯이 공부하라는 뜻으로 본 모양이다. 주희의 주석과는 사뭇 다른 뜻이라 “앞뒤 말이 조금 같지 않는 바가 있다(前後說 微有不同)”라며 의문을 표했다.


동양고전연구회에서 낸 『논어』 번역서에서는 猶恐失之에 대한 정약용 선생의 견해를 “이미 배운 것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선생님의 가르침을 놓칠까 걱정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뜻이 와 닿지 않는다. 선생님의 가르침을 놓칠까 걱정하는 것은 이미 學如不及에 내포되어 있는 개념 같기도 하거니와 앞서 언급한 정약용 선생의 비유에서 그런 내용이 선뜻 도출되지도 않는 듯싶다.


물론 여기서의 ‘가르침을 놓친다’는 의미를 學如不及에서는 강의 진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개인적인 문제로 보고 猶恐失之에서는 여러 학생들 가운데 쳐져서 체득하지 못한다라고 좀 나눠볼 소지는 있다. 그런데 스승의 가르침은 우수한 제자 몇 명이 독차지할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고 그런 식의 경쟁으로 묘사하는 건 어색하다. 역시나 내가 봤던 대로 진흙 속의 진주와 같은 깨우침을 잃지 않도록 노력해보자 뭐 이 정도가 아닐까 싶다.


여하간 學如不及 猶恐失之하는 제자가 되겠습니다.^-^ - [無棄]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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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꿈

문화 2008. 6. 15. 01:33 |

이번 학기 마지막 과제였던 <유가적 사유와 논어> 과제물을 부분 수정해서 올립니다. 이 과제를 작성하는 고뇌(?)를 나눠준 준 석훈이에게 고맙다는 말 전합니다.


<원문>
子曰 老者 安之 朋友 信之 少者 懷之
- 『논어』 <공야장편>


<국역>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나의 뜻은) 나이 많은 사람을 편안하게 하며 친구에게 믿음을 주며 어린 사람을 안아주는 것이니라.”


<견해>
  공자께서 제자인 자로, 안연과 더불어 이야기를 나누다가 자신의 포부를 밝힌 문구다. 공자가 생각하는 이상사회라고 볼 수 있고, 정책구상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일견 소박해 보이는 공자의 말씀에서 공자사상의 고갱이가 엿보인다. 『예기』 예운(禮運)편에서는 큰 도가 행해진 세상에서는 천하가 온 세상 사람들의 것이라고 말한다. 자기 부모만을 부모로 여기지 않고 자기 자식만을 자식으로 여기지 않으며, 노인에게는 그 생을 편안하게 마치게 하였으며, 청장년들은 능력을 충분히 활용했으며, 어린이가 잘 자랄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는 대동사회(大同社會)가 제시되고 있다. 공자가 수신제가(修身齊家)를 다지고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의 방법으로 대동을 지향하고 있음을 유추할 수 있다. 1978년 덩샤오핑은 원바오(溫飽), 샤오캉(小康), 다퉁(大同) 사회라는 3단계 발전전략을 내놓았고 2050년까지 실현하겠다는 대동은 공산주의 이상향의 중국판이다. 기세춘 선생은 대동사회는 오히려 묵자가 서술한 안락하고 평화로운 공동체(安生生)와 맞닿는다고 보았는데 일리가 있다. 공자의 대동은 묵자와 실현방식이 달랐을 뿐더러 현세적이던 공자는 대동사회에 무게를 두지 않았을 공산이 크다.


  서양의 르네상스는 중세적 신정정치에서 탈피해 합리주의와 세속주의를 추구했다. 지상낙원을 사후의 천상이 아니라 지금 이 땅에서 구현하자는 것이다. 공자는 서양의 르네상스보다 훨씬 앞서서 인간다움에 대한 풍부한 고찰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사고는 칼 포퍼의 “점진적 사회공학”과 견주어 살펴봄직 하다. 칼 포퍼는 유토피아주의와 전체주의를 비판하며 점진적 사회공학을 주창한다. 이것에는 두 가지 전제가 있다. 첫째는 추상적인 선의 실현을 위해 힘쓰지 말고 구체적인 악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모든 악은 직접적인 수단에 의해 제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미래의 유토피아 건설로 악을 간접적으로 제거하려 생각하지 말고, 오늘의 희생을 쥐어 짜내기보다 지금의 고통을 덜어내는 데 힘쓰라는 것이다. 이는 존재하지 않는 이상의 실현으로 인간을 행복하게 하려 하기보다는 존재하는 것이 명백한 악, 피할 수 있는 고통을 최소화하는 데 애쓰라는 것이며, 지금 여기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을 구해야한다는 뜻이다.


  공자의 경우 추상적 집단이 아닌 구체적 개인의 삶에 천착해 개인의 본성을 가꾸는 이치를 주장한다는 점에서 유가의 현실적인 구세의식이 도드라진다. 선생 또한 미래나 천상의 유토피아를 언급하지 않았다. 공자는 신과 거의 무관한 세계의 인본주의를 역설했다. “사람이 도를 넓히는 것이지, 도가 사람을 넓히는 것이 아니다(人能弘道 非道弘人)”라는 말씀 속에서 인도를 넓히고 실천하는 주체는 사람 자신이고, 그러한 능력을 개개인이 충분히 품고 있다고 보고 있다. 공자는 현실에 밀착한, 현실을 떠나지 않은, 현실로 발현할 수 있는 이상을 갈파한다. 이것은 누구나 실행할 수 있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가치들이다. 仁은 가장 인간적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평생을 추구하는 힘이 된다. 누구나 생각하고, 누구나 바라고, 누구나 해낼 수 있는 것을 仁은 가리키고 있다.


  헤겔의 『법철학』 서설에는 “여기가 로도스섬이다. 여기에서 춤추어라, 여기 장미꽃이 피어 있다. 여기에서 춤추어라”라는 구절이 있다. 어떤 거짓말쟁이가 자신이 로도스섬에 있을 때 굉장히 멀리 뛸 수 있었다고 자랑한다. 그러자 한 사람이 나서며 이렇게 말했다. “그 말이 진실이라면 굳이 많은 증인이 필요 없지. 여기가 로도스야. 여기서 뛰어보게!” 헤겔은 이 우화를 미덥지 못한 이상을 늘어놓기보다 삶의 현장에서 쓰일 수 있는 방안을 고찰하라는 것으로 풀었다. 진리라면 현실의 검증을 마다하지 말고, 로도스섬으로 피하기보다는 지금 딛고 있는 곳에서 가능성을 보이라는 설명이다. 헤겔의 언설은 환상의 나라, 허구의 나라, 불가능의 나라에 닿기 위해 헛되이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지 말라는 메시지다. 공자의 주장과 잇닿아 있다. 공자는 로도스섬을 꾸며내지 않았다. 그저 老者와 朋友와 少者를 생각하는 오늘 여기의 삶을 로도스섬으로 삼았다.


  미국의 경제학자 이스털린은 경제 성장과 인간의 행복감 사이의 상관관계를 탐구한 선구적 학자다. 그는 소득수준이 높은 사람들이 같은 나라, 같은 지역의 소득수준이 낮은 사람들보다 행복감도 커진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런데 부유한 나라와 가난한 나라에서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의 비율이 별 차이가 없다는 점이 발견됐다. 또 한 나라 안에서 가난하던 시절과 부유한 시절을 비교해도 행복감을 느끼는 사람의 비율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한 나라의 높은 경제 성장과 물질적 풍요가 그 나라 국민 전체를 더 행복하게 한다는 보장이 없는 셈이다. 이처럼 일정한 생활수준에 다다르면 경제 성장이 개인의 행복, 사회적 후생 증가에 이바지하지 못하는 현상을 “이스털린의 역설”이라 일컫는다. 공자는 이 역설을 오래 전부터 꿰뚫고 있었다. 공자는 물질을 부정하지 않았고, 경제적으로 윤택한 삶을 경시하지 않았다. 선생은 다만 욕망의 증가 속도가 부의 증가 속도보다 더 빠른 것을 염려했다.


  공자가 체감(遞減)하지 않고 체증(遞增)하는 탐욕을 문제 삼은 것은 인간다움을 지키기 위해서다. 현대의 자본주의는 물신숭배와 황금만능주의로 타락하기 일쑤다. 인간보다 물질이 무겁게 여겨지는 사회를 공자는 경계했다. 선생이 설파한 仁의 개념은 추상적으로 정의되기보다는 다채로운 실례와 비유 속에서 표현된다. 가장 기본적으로는 사람을 사랑함(愛人), 널리 사람을 사랑하는 것(汎愛衆)이다. 오늘날 가치관의 전도 현상으로 말미암아 수단과 목적이 뒤바뀌고 있다. 인간의 존엄성과 행복 같은 목적적 가치보다 효율성과 편리성 그리고 경제적 부 같은 수단적 가치가 더 우월한 지위를 누리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이런 병리현상이 만연한 사회에서는 다른 사람을 자신의 이익 추구를 위한 수단으로 치부하게 된다. 공자는 이것에 반대한다. 선생은 효제(孝悌)와 충서(忠恕)를 고안해 물질적 집착을 버리고 본래의 마음을 회복하기를 촉구한다.


  孝悌가 혈연을 매개로 한 본능적 사랑이라면 忠恕는 이를 바탕으로 남에게 최선을 다하는 자세다. 인간관계를 목적적 관계로 확립함으로써 소외되는 사람이 없게 만들려는 기획이다. 세종대왕 때 박연이 시각장애 악공들의 처우 개선을 요청하며 “세상에 버릴 사람이 없다(天下無棄人也)”라고 상소했던 내용의 바탕이 되는 사상이다. 『도덕경』 27장에 나오는 “그러므로 성인은 언제나 사람을 잘 도와주고, 아무도 버리지 않습니다(是以聖人常善求人 故無棄人)”라는 구절과 상통한다. 왕필(王弼)은 주석을 통해 성인은 나아갈 것과 향할 것을 만들어서 진보에 뒤쳐지는 사람들을 못났다고 버리지 않으며, 저절로 그렇게 됨을 도와줄 뿐 새롭게 일을 시작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을 버리는 일이 없다”라고 풀이한다. 사람을 구제하기를 즐기며, 스스로의 편견 때문에 함부로 버리는 사람이 없는 태도라는 실천덕목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구현해나가야 하는 것인가? 孝悌가 忠恕로 확장되는 관계에서 미루어 알 수 있듯이 가까운 곳부터 시작하는 게 온당하다. 『맹자』에 나오는 “소는 보았고 양은 보지 못했다(見牛未見羊)”라는 구절이 이런 고심을 푸는 실마리가 된다. 제 둘레의 것들에 연민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더 먼 곳의 아픔을 헤아리는 건 불가능하다. 보이지 않는 양에 대해서도 똑같이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는 식의 관념적 사고에는 정(情)이 묻어나지 않기 때문에 구체적인 행동을 이끌어내기 어렵다. 그렇다고 見牛未見羊에서 인간의 지각적 한계만을 논해서는 곤란하다. 나와 덜 친밀한 것까지 측은지심을 품는 실천을 꾀해야 한다. 측은지심을 자기 주변부터 시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다 방점을 찍을 부분은 측은지심을 바지런히 넓히는 데 있다. 여기까지 동의한다고 해도 측은지심이 확산되는 순서가 명료한 선후관계는 아닐 터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


  공자가 꿈꾼 바를 오늘날 접목시켜본다면서 단순히 고령화 사회를 대비한 노인 복지, 사회적 신뢰의 확립과 청소년 교육의 강화 같은 피상적인 접근으로는 부족하다. 공자와 그의 벗으로 상징되는 장년층이 노년세대를 정신적, 물질적으로 예우하고, 청소년세대를 정성껏 보살펴서 세대 간의 유대감을 이어나가야 한다고 해석하면 실질적인 의미가 좀 더 커질 것이다. 즉 세대 간의 사랑과 배려를 돈독히 해서 문화와 역사를 계승 발전해 나가는 모습이다. 젊음이나 늙음은 결국 상대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역지사지한다면 세대 간의 허심탄회한 소통으로 갈등을 줄이고 사회적 응집력을 높여나갈 수 있을 것이다.


  老者와 朋友에 대한 이야기는 다른 논어 구절에서 익히 만날 수 있지만 少者를 품겠다, 포용하겠다는 언명은 이 구절에서 또렷하게 드러나 특히 인상 깊다. 이는 젊은 세대에게 관심을 보이고 사랑해주고 싶다는 협소한 의미가 아니다. 후생가외(後生可畏)나 불치하문(不恥下問)에서 알 수 있듯이 윗사람으로서 어린 사람에게 시혜적이고 일방적으로 무언가를 베풀겠다는 뜻이 아니다. 적극적으로 교류하고 배우겠다는 의지의 피력이다. 최근 기업에서 관리자가 부하직원들에게 젊은 세대의 관심사와 노하우를 전수 받는 “리버스 멘토링(Reverse Mentoring)”이 강조되고 있다. 이를 통해 핵심가치를 공유하고 상호 만족감을 높이고 있다고 한다. 이처럼 공자의 가르침을 응용한 사회적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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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와 번지와의 문답

사회 2008. 4. 26. 19:59 |
이번 학기 교양으로 듣는 <유가적 사유와 논어> 과제물로 냈던 것을 부분 수정해서 올립니다. 지당하신 말씀이 가볍게 느껴지지 않는 것을 보면 시절이 수상하긴 한가 봅니다.


<원문>
樊遲請學稼 子曰 吾不如老農 請學爲圃 曰 吾不如老圃 樊遲出 子曰 小人哉 樊須也
上 好禮則民莫敢不敬 上 好義則民莫敢不服 上 好信則民莫敢不用情 夫如是則四方之民 襁負其子而至矣 焉用稼
- 『논어』 <자로편>


<국역>
   번지가 농사짓는 일을 배우기를 청했는데 공자께서는 “나는 노련한 농사꾼만 못하다”라고 하셨다. 채소밭을 가꾸는 일을 배우기를 청했는데, “나는 노련하게 채소밭을 가꾸는 사람만 못하다”라고 하셨다. 번지가 나가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소인이로다, 번수여! 윗사람이 예를 좋아하면 백성들이 감히 공경하지 않을 수 없고, 윗사람이 의를 좋아하면 백성들이 감히 복종하지 않을 수 없고, 윗사람이 믿음을 좋아하면 백성들이 감히 성실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대저 이와 같으면 온 세상의 백성들이 그 자식을 포대기에 싸서 업고 찾아오게 되니, 어찌 곡식 심는 일에 힘쓸 수 있겠는가?”


<견해>
   정약용 선생은 공자가 번지의 질문을 물리친 것은 예의를 앞세우고 음식과 재물을 뒤로한다(先禮義 後食貨)는 뜻이라고 풀이했다. 『목민심서』에서도 “뭇사람을 통솔하는 방법은 위엄과 신뢰뿐이다. 위엄은 청렴함에서 나오고, 신뢰는 자기 마음을 다하는 데에서 말미암는다. 자기 마음을 다하면서도 능히 청렴할 수 있어야 이에 뭇사람을 따르게 할 수 있다(馭衆之道 威信而已 威生於廉 信生於忠 忠而能廉 斯可以服衆矣)”라고 논하며 공자의 유지를 받들고 있다(吏典6條 馭衆). 주희는 禮, 義, 信은 대인(大人)의 일이라고 했다. 여기서의 대인은 위정자를 말한다. 주희는 공자가 언급한 소인(小人)을 세민(細民), 즉 서민이라고 봤다.


   이 문장에서 통치자와 피통치자의 역할에 따른 사회적 분업에 대한 공자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공자는 농사일과 같은 기술과 기능을 하찮게 여긴 것이 아니라 사람마다 할 일이 따로 있다고 설파했을 따름이다. 공자의 사상은 사회 변화의 주체를 선비 계급으로 보았다는 점에서 일종의 엘리트주의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사회 변화의 방향은 엘리트를 위한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백성을 위한 것이었다고 긍정적 함의를 읽어봄직 하다. 후대에 이 뜻이 왜곡되어 노동을 천시하고, 백성에 대한 사랑 없이 군림만 하려는 문제가 나타나기도 했다. 위정자가 자신의 직분에 충실함으로써 백성들에게 이익을 안겨줄 것을 주문한 것으로 보인다.


   번지가 농사일을 물은 것을 두고 농가학파(農家學派)의 영향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농가는 농경을 권장하여 의식을 풍족하게 하는 것을 주요 골자로 하는데, 임금도 백성과 함께 직접 농사를 지어야 한다고까지 주장했다. 공자는 위정자가 직접 농사짓는 일에 관여하는 것보다는 도덕정치를 하는 것이 더 근본적인 일이라고 봤다. 번지의 질문을 다르게 보면 유학이 탁상공론(卓上空論)으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 물질적 이해에 대한 고려를 너무 등한시해서는 안 된다는 현실적 고민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학문은 실용적이어야 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공자는 실용을 위해 필요한 것은 기예가 아니라 그 기예가 온전히 발휘될 수 있는 환경이나 구조를 다지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아울러 공자가 농사짓기와 같은 보여주기 식의 정치를 비판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공자는 남에게 보이기 위한 학문인 위인지학(爲人之學)을 배척하고 자아실현을 목표로 하는 배움인 위기지학(爲己之學)을 중시했다. 같은 맥락에서 공자는 남의 기림을 받는데 급급해 이미지 고양에만 힘쓰는 것을 비판했다. 얼마 전 총선에서도 시장이나 농촌 현장에서 서민들의 애환을 듣는 것은 기본이고 심지어 목욕탕에서 유세를 하는 경우까지 있었다. 오늘날의 선거문화에서 이런 모습은 불가피한 점이 있으나 교언영색(巧言令色)을 넘어서 진정으로 국리민복을 위한 활동을 하라는 공자의 질정은 경청할 만하다. 예를 좋아하고, 의를 좋아하며, 신뢰를 좋아하는 기품 있는 정치인이 나타난다면 국민의 존경심을 불러일으키고, 자발적으로 따르게 하며, 진실한 마음가짐을 품게 할 수 있다.


   맹자도 “대인의 일이 있고, 소인의 일이 있다(有大人之事 有小人之事)”라고 말하며 정신 노동을 하는 노심자(勞心者)와 육체 노동을 하는 노력자(勞力者)로 구분했다(文公上 4). 번지의 경우와 비슷하게 진상(陳相)이라는 자가 농가인 허행(許行)에게 감화되어 맹자에게 질문한 것에 대한 답변 중에 나온 구절이다. 맹자는 자기가 쓰고 먹는 물건을 모두 직접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필요한 것을 교환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농사를 지으면서 다른 기술자들의 일을 겸할 수 없듯이, 정치나 교육 등 마음을 쓰는 일도 다른 일과 겸할 수 없음을 논증했다. 맹자는 성선설(性善說)에 입각해서 사람은 모두 성인이 될 수 있는 잠재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다. 양심을 밝혀서 실천하면 군자가 되고 육체적 욕구를 충족하는데 주력하면 소인이 된다고 주장했다. 공자의 사고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한서(漢書)』에 병길전(丙吉傳)에 나오는 문우천(問牛喘)의 고사는 공자의 가르침을 체화한 사례다. 승상이 된 병길이 어느 날 외출하다가 백성들이 떼지어 싸우는 무리들과 마주쳤으나 그냥 지나쳤다. 조금 더 가서 더위를 먹어 헐떡이는 소를 보고는 크게 걱정을 했다. 따르던 사람이 의아하게 여기자 병길은 백성들이 서로 살상한 사건을 처리하는 것은 담당 관리의 소관이며 재상은 연말에 그들의 고과를 통해 상벌을 시행하면 된다고 말한다. 이어 삼공(三公)은 음양의 조화를 담당하고 있으므로 계절의 기운이 절도를 잃을 조짐이 있으니 직분상 마땅히 큰 재앙이 닥칠까 염려해야 할 바라고 설명한다. 즉 높은 지위에 오른 사람에게 요구되는 자질은 대체(大體)를 살펴 조정하는 능력임을 깨닫게 해준다.


   결국 공자와 번지와의 문답에서 자신을 다스린 후에 남을 다스린다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을 유추해낼 수 있다. 유가에서는 개인의 도덕적, 학문적 자기완성 정도에 따라 정치활동의 범위가 점차 확대된다고 봤다. 수기는 치인에 선행한다. 『대학』의 8조목인 격물치지성의정심(格物致知誠意正心)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가 순차적인 점진주의다. 개인의 윤리적 각성을 시발점으로 하여 그 점차적 확산을 꾀해야 한다는 유가의 사유다. 혹자는 정치가의 도덕적 수양에 몰두한 나머지 치인보다 수기에 치중한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유가는 수기적 행위에 치열하면 할수록 그것은 동시에 치인적 행위에도 치열한 것이 된다고 인식했다. 도덕성이 높으면 높을수록 현실적 정치능력을 보유하게 된다고 본 셈이다. 다시 말해 도덕성이 곧 능력이라는 것이다.


   요즘 도덕성과 능력은 별개의 문제라는 이분법이 힘을 얻고 있다. 공자가 언급한 好禮, 好義, 好信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탈도덕 현상을 수기치인의 현대적 복원으로 극복해야 한다. 도덕과 능력을 유기적으로 통합한 도덕력(道德力)은 전통을 창조적으로 계승할 뿐만 아니라 오늘날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는 사회자본(Social Capital) 이론에도 부합한다. 도덕성과 능력의 상관관계를 명확히 드러내는 연구 결과는 아직 없다. 하지만 윤리적 기업에 투자하면 투자수익률이 더 높다는 해외의 실증 연구가 종종 나온다. 국내에서도 윤리헌장 제정과 더불어 전담 부서를 설치해 윤리경영을 적극 실천한 기업의 주가상승률이 그렇지 못한 기업에 비해 높았다는 분석이 있다. 윤리경영이 기업성과를 크게 악화시킨다는 연구 결과는 찾아보기 힘든 것으로 보아 윤리경영은 장기적으로 기업의 시장가치를 높인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기업에서도 윤리경영이 강조되는 경향에 비추어 볼 때도 공자의 입장은 유효하다. 전문지식에 그치지 않고 인문학적 성찰을 갖춘 국가 지도자가 절실히 요구된다.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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