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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6.05 ▦ 바보 노무현과 고별하며 2
  2. 2009.01.12 사과를 요구하고 싶더라도 4

(노무현 대통령님의 서거를 애도하는 마음에서 ‘대통령님’이라는 잉여적 표현을 썼습니다. 너그러이 헤아려주시기 바랍니다.)


1.
지난 일주일 동안 노무현 대통령님의 서거를 가슴 깊이 슬퍼했다. 나는 국민장이 치러지는 일주일은 애도만 하고 싶었다. 그냥 일주일의 기간만 온전히 비통해할 시간을 넉넉히 확보한 것이 내가 우울증을 앓지 않고 견뎌낸 비결이었다. 정치적 구호는 내세우지 말고 그냥 애도만 하라는 자칭 비판언론들은 국민장 기간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내내 정부에 대한 비판을 정치 공세쯤으로 폄하할 모양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 애도만 하고 있을 마음이 전혀 없다. 비정치적인 삶을 권하는 정치적 술수에 맞서 이 비극이 발생한 원인을 제거할 방도를 모색할 것이다.


일주일의 애도 기간을 견디기 힘들어 하는 분들을 이따금 만났을 때도 그 조급증이 야속했을지언정 그 내용은 경청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상갓집에서 수학문제를 풀 수는 없는 노릇인지 잘 들리지 않았다. 어차피 슬픔을 다독이고 나면 역사가 차가운 표정으로 그를 응시할 테니 내 무지몽매함을 너무 탓하지 않기로 했다. 혹자는 뜬금없이 넘치는 애도가 불편하다고 말했다. 애이불상(哀而不傷)하는 수준에서 슬퍼한다면 크게 나무랄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며칠만이라도 그냥 애달파하고 화내는 풍경을 지켜볼 여유를 품었으면 어땠을까 싶다. 그렇게 해서라도 원한이 덜 쌓이고 응어리가 조금은 풀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자기와 친분이 없는 사람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건 그저 아름답다.


노무현 대통령님의 서거라는 비극에 일말의 책임이 있을 자들이 사과 한마디 없는 상황에서 고인의 유지를 빙자해서 화해니 통합이니 늘어놓는 건 참 기만적인 일이다. 관용은 피해자의 ‘의무’가 아니라 ‘권리’가 되어야 한다. 이번 사건의 피해자는 노 대통령님과 그 둘레 사람들 몇 명이 아니다. 추모객을 향해 관용을 권하는 건 너무 이르고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라 박절하게 들렸다. 추모 기간마저 상식과 예의를 잃어버린 졸렬한 정부 여당의 행태에 원한을 품는다면 그건 그네들이 스스로 불러일으킨 셈이다. 설령 그것이 넘치는 의견이라고 해도 그런 여론을 겸허히 수렴하는 것이 지금 정권을 책임지고 있는 분들의 자세일 것이다.


노 대통령님의 서거로 말미암은 사회적 분열이나 갈등을 염려한다면 그 감정의 골을 메울 행위자는 어디까지나 정부 여당의 힘센 분들이다. 자신을 그 자리에 올려준 국민들에게 악감정을 품지 말라거나 원한을 표출하지 말라고 외칠 권한은 그들에게는 없다. 정부가 못하는 일을 대신해주겠다면서 몇몇 언론들이 관용 장사에 나서지 않으셨으면 좋겠다. 어떤 언론들은 자신의 허물이 없었는지 돌아보는 용기를 보여줬지만 관용을 내세우는 언론들은 노 대통령님에게 비난을 넘어 저주를 퍼붓던 지난날을 까맣게 잊은 모양이다. 용서를 청하는 집단이 없는데 무슨 화해를 한단 말인가.


2.
노 대통령의 서거에 따른 책임론에 시달리는 검찰은 수사는 정당했다고 강변했다. 검찰이 스스로 수사의 공정성과 신뢰성을 허무는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는 점을 망각한 처사다. 살아 있는 권력이라는 천신일 회장의 구속영장마저 기각되면서 검찰의 항변은 더욱 빛을 바랬다. 천 회장이 반드시 구속이 되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 그만큼 부실하고 조급한 수사를 했다는 방증으로 이해해야 한다. 임채진 검찰총장은 “이번 사건 수사의 당위성과 정당성을 존중해 주길 간곡히 부탁드린다”라는 사퇴의 변을 남겼다. 그나마 국민에게 사죄한 기품에 고개를 숙이지만 이번 일은 책임은 검찰총장이 모두 지고 갈 사안은 아니다.


노 대통령님의 시신이 수원 연화장에서 화장되는 상황을 생중계할 때 한 시민이 “이명박 ××× 복수할 거야 이 ×××야”라고 외치는 장면이 TV 생중계로 나갔다. 영결식장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헌화할 때 행사장은 물론 행사장 밖의 시민들이 야유했다.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를 입에 달면서도 줄곧 괴상하게 실천했던 청와대가 이런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란 쉽지 않을 듯싶다. 저분들에게 용서나 사죄를 구걸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1991년 4월 헌법재판소는 사죄광고 제도가 타인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믿지 않는 자에게 본심과 다르게 깊이 사과하도록 강요하는 것이므로 인간 양심의 왜곡과 굴절이자 이중인격 형성의 강요라고 정의하며 위헌 결정을 내렸다(89헌마160). 반성을 강제할 수 없다는 결정이다.


헌재의 결정으로 비추어 볼 때 유독 방송사에만 강요하고 있는 ‘시청자에 대한 사과’ 조치는 위헌일 가능성이 크다는 견해도 있고, 헌재의 결정이 언론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고찰이 부족해 약자인 피해자의 권리 구제를 소홀히 만든다는 비판도 들린다. 여하간 헌법이 보호하는 양심의 자유는 선하고 올바른 판단만을 보호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덜 선하고 덜 올바른 내심마저 보장하는 것이 양심의 자유의 고갱이다. 양심에 거슬려 사과를 못하겠다는 사람에게 양심을 탑재하라며 구박한다면 헌법정신과 어긋나는 행동이다. 물론 사인과 공인은 차이가 있다. 굳이 사과를 받아야 한다면 사적 영역보다는 공적 영역을 향해야 요구해야 한다. 공인들의 양심이 덜 소중하다는 건 아니지만 명예나 체면을 중시하는 한국의 문화나 정서를 모두 부인할 수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2004년 탄핵 정국 당시 “잘못이 있어 사과하라면 사과할 수 있지만 잘못이 뭔지 모르겠는데 시끄러우니까 사과하고 넘어가자는 건 받아들이기 어렵다”라는 요지의 발언을 했던 노 대통령님은 결국 탄핵소추까지 당했다. 정부의 사과 표명은 그네들의 자유의사에 맡기는 게 기본원칙이라고 믿는다. 끝끝내 사과를 거부하는 자세를 칭찬하는 건 결코 아니지만 잘못이 없다고 믿거나 잘못이 뭔지 모르는 분들에게 사과를 청하는 건 도리가 아니다. 그럼에도 사과에 미련이 남는 것은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을 존중하면서 얻어낼 것이 그 정도뿐이기 때문이다.


3.
노 대통령님이 서거하시기 이틀 전까지만 해도 나는 때 아닌 산수놀이에 빠졌다. 민주당을 비롯한 야당들이 신영철 대법관 탄핵소추안을 발의할 계획이라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사법부의 자정 노력을 지켜보는 것이 순리이겠으나 그와 더불어 입법부가 우회적으로 나설 수밖에 없는 고충을 이해하고 반겼다. 이것이 삼권 분립의 대의에 부합하는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탄핵소추안 발의조차 여의치 않아 보여서 서글펐다. 대법관에 대한 탄핵소추안 발의에는 재적의원 3분의 1 이상의 동의가 필요하다. 친박연대 3명의 의원직 상실로 재적의원 수가 296명으로 줄어든 지금 99명이 동의해야 하는 셈이다.


민주당 84석과 민주노동당 5석, 창조한국당 3석, 진보신당 1석이 모두 동참해도 한참 모자란다. 친박연대 5석과 호남 무소속 4석이 동조해야만 간신히 발의할 수 있는 실정이다. 자유선진당과 한나라당의 일부의 호응을 기대하려는 계산 자체가 너무 씁쓸했다. 소수 야당들이 사안에 따라 힘을 모으는 일이야 나쁠 것은 없지만 이렇게 구차하게 애를 써야 한다는 현실이 원망스러웠다. 민의가 제대로 반영되었는지 의심스러운 현행 선거구제의 탓인지 몰라도 저 거대 여당을 견제할 수 있는 야당들이 부재하다는 형국이 너무 아슬아슬하다. 그렇다고 여당의 절제나 양식을 기다리기도 어렵다. 신 대법관을 감싸고도는 한나라당의 태도에서 사법부의 독립을 바라는 충정을 읽을 수 없기 때문에 더 참담했다.


지난 일주일 내내 물기 어린 눈으로 보냈지만 금요일 영결식 장을 나서던 운구차를 보며 살아생전 먼발치에서나마 본 적도 없는 그 분을 보내려니 또 눈물이 났다. 아마도 이 눈물들은 내 자신을 위한 눈물이었을 것이다. 눈물을 닦고 다시금 산수놀이를 하려니 화가 치밀었다. 상중에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지만 일상으로 돌아와서도 내 뜻대로 되는 일은 거의 없어 보여서다 모두들 미래를 말하는데 나는 지난 2004년 총선 당시로 퇴행하고 말았다. 단순히 열린우리당의 의회권력 쟁취에 집착한다고 비판받던 그 시기 즈음으로 돌아가 버렸다. 집권이나 승리 이후는 고심하지 않고 집권과 승리 자체를 열망할까봐 부끄럽다.


한나라당의 집권으로 민주주의가 후퇴할 것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던 분들이 요즘도 같은 생각인지 궁금하다. 물론 노무현과 참여정부를 반대하면서 이명박 정부를 반대하는 행위는 얼마든지 양립 가능하다. ‘다 똑같은 놈들’ 정도로 여기시고 노무현도 했는데 이명박이라고 못할 것이 없다는 판단이셨는지, 아니면 어쨌든 국민 다수의 뜻이니 차마 민주주의 후퇴 운운할 수는 없어서 그런 말씀들을 하신 건지 묻고 싶다. 나는 지금 지난날 노무현에게 과도한 책임을 물었다고 투덜거리는 것이 아니다. 노무현의 실정을 비판하는 것만큼 이명박의 난정을 바로잡을 세력의 수가 너무 적어 보이는 안타까움을 토로할 따름이다. 이명박을 제어할 수 있는 가장 큰 행위자가 박근혜인 현실이 기가 막혀서다.


4.
서거의 충격이 가시지 않은 관계로 지금이야 민주당이 한나라당과 지지율을 나란히 하고 있지만 조정기간이 도래할 것이 분명하다. 만약 그 조정기간을 거쳐도 한나라당 지지율의 팔할 이상을 유지한다면 2010년 지방선거에서부터 2012년 총선과 대선까지 이어질 선거에서 한나라당과 한바탕 겨뤄볼만 한 상황이 조성된다. 물론 미지의 카드이자 희망의 카드인 진보정당이 제자리를 지켜주고 계시지만 지방선거와 총선거에서의 선전은 기대해도 대선까지 도모한다는 건 진보정당 지지자 본인들도 믿지 않으실 게다.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가지 않고 명줄이 늘어난 제1야당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를 고민해야할 시점이다. 다만 이 과정에서 사표론 따위의 논쟁이 다시 나올까봐 걱정이다.


노 대통령님의 서거가 전통적 민주당 지지층의 분열을 치유하는 실마리가 될지도 모른다는 전망이 나온다. 내 소견으로는 열린우리당 지지층과 옛 민주당 지지층이라고 표현해야 더 적절하다. 자기들이 선출한 후보를 흔들면서 국민을 농락했던 분당 전의 민주당을 지지하지는 않았지만 열린우리당은 지지했던 나 같은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어지러운 창당놀음의 당연한 결과로 2007년 대선에서 패배한 후 결국 민주당 간판을 걸었지만 과연 이네들이 화학적 결합을 했는지 의심스럽다. 민주당은 친노 세력을 껴안겠다는 속셈이지만 누구의 앙금이 더 남았든 감정의 골이 커 보인다.


뉴민주당 플랜을 추진하며 노무현과 참여정부에 거리두기에 열중하던 민주당이 너무 표변하는 모습이 볼썽사납지만 두고 볼 참이다. 참여정부의 긍정적 유산을 건져 올리는 작업을 하겠다며 분주하지만 한나라당과 또렷이 차별화할 묘책을 찾아낼 결기를 보여줄지 미지수다. 한편으로는 친노 세력의 신당 이야기도 들리지만 지역적 기반이 없는 신당이라면 자유선진당 만큼도 성과를 거두지 못할 공산이 크다. 수도권이야 본래 어려운 싸움이고, 영남은 거의 가능성이 없으니 생환 확률이 별로 높지 않으므로 친노 신당의 미래는 바보 노무현의 험난한 좌절을 되풀이하고 막을 내리기 십상이다.


개인적 차원이 아닌 한 정당 전체가 죽기를 각오하고 달려드는 경우는 1990년 3당 합당에 반대했던 꼬마 민주당 정도가 기억나는데 거대 여당을 눈앞에 두고 이 모험을 감당하기란 쉽지 않다. 민주당과 2등 경쟁에 함몰될 신당이라면 신중해야 한다. 굳이 신당이 아니더라도 친노파의 존속은 유권자들을 위해 다행스러운 일이다. 열린우리당에 몸담았던 분들이나 친노파가 잘났다고 옹호하려는 뜻이 아니다. 당장 진보정당으로 달려가기를 머뭇거리는 상당수 국민이 정치 냉소자가 되어 버리는 현상을 막고 선택의 폭을 넓힐 수 있다는 점을 안도할 따름이다. ‘그놈이 그놈’이라고 여기는 분들은 반동의 징후라 하시겠지만 이 체제가 재생산되는 사태야말로 반동이다.


5.
노 대통령님이 퇴임하실 때 참여정부를 두고 재평가가 이뤄질 것이라는 견해에 동감했다. 그가 대한민국에 어떤 부정적 유산을 남겼는지도 차차 밝혀지겠지만, 긍정적 유산 또한 드러날 것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라는 핑계를 함부로 입에 담지 못할 때 비로소 참여정부를 차분하게 평가할 토대가 마련되리라 내다봤다. 하지만 노무현을 제물로 한 희생제의는 그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무죄추정의 원칙을 미뤄두고 진행된 과정은 너무 야만적이었다. 우리들은 그 매질이 우리 스스로의 품위를 깎아내리는 일이었음을 이제야 깨달았다. 국민이 뽑은 대통령을 욕보여서 이룩할 법치주의라면 너무 초라하다. 온 사회가 공인의 윤리적 책임, 법적 책임에 대해 성토를 했던 그 마음은 잘 간직해보자.


노 대통령님께서는 대통령 재임시절에 당신을 진보라고 표현하신 적이 많았고 생애 마지막까지도 진보주의를 궁리하셨다고 전한다. 한국적 맥락에서는 노무현이 얼마든지 진보로 분류될 여지가 있음을 인정한다. 진보와 보수의 중간 개념인 개혁세력이라고 부르는 게 낫겠지만 내 개인적으로는 노 대통령님께서 한국 보수주의의 한 극점을 보여주신 분이라 좋아했다. 추모 열기를 ‘인간’ 노무현에 대한 그리움에 국한하기도 하지만 나는 ‘정치인’ 노무현은 한국 보수주의의 업그레이드를 이뤄낸 인물로 평가하고 싶다. 스스로를 보수라고 칭하는 분들이 노무현을 그렇게 매몰차게 대했다니 참 곤혹스럽다.


노무현에게 아쉬웠던 점을 메우면서 또 다른 매력으로 우리를 잡아끌 분을 가까운 시일 내에 찾지 못할 것 같아서 멍멍하다. 갖은 미움을 받았으나 현실 정치인 가운데 노무현만큼 대중성과 진솔성, 원칙과 가치를 제시한 교양 있는 지도자는 너무 드물었다. 그 대중성은 굳건하지 못했고, 진솔성은 계산된 것이었으며, 원칙은 분열적이었고, 가치는 흐릿했다는 험담이 대개 온당하다고 수긍하더라도 말이다. 어쩌면 이 추모 열기는 그와 같은 사람을 다시는 만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아쉬움이 크게 배어있는지도 모른다. ‘또 다른 노무현’이나 ‘더 나은 노무현’이 등장하지 않을 것 같다는 체념이랄까.


그 또한 불완전한 인간이었다. 권좌에서 쌓은 허물을 내려와서 천천히 갚아나가길 바랐다. 내가 사랑했던 나의 일꾼이자 나의 대표가 세월의 손길을 마주잡고 가는 광경을 기대했는데 그렇지 못해 가슴이 저민다. 그의 지지자든 반대자든 그 분을 서서히 잊어감으로써 얻을 평화를 모두가 잃어버렸다. 이래저래 실망하고 서운했지만 그런 감정보다 한두 뼘쯤은 더 좋아하고 아꼈던 분에게 작별을 고한다. 죽은 뒤에 받는 복덕[冥福]을 믿지 않는 나로서는 치열하게 살았던 당신의 삶이 살아 계실 때 상당 부분 보상받았다는 말씀을 올리고 싶다. 바보 노무현, 고마웠습니다. - [無棄]


추신 - 노제 때 잠깐 개방됐다 다시 봉쇄됐던 서울광장의 차벽이 4일 새벽 철수했다고 한다. 아예 광장 주변에 성벽을 세우고 쪽문을 내는 게 좋을 듯싶다. 주인인 시민이 쓸 광장을 머슴인 자들이 멋대로 막았다 열었다 하는 꼴을 더는 보기 싫어서다. 며칠 전 헌법재판소가 옥외집회 개최 때 경찰에 미리 신고토록 한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조항이 합헌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헌재는 “일정한 신고절차만 밟으면 일반적ㆍ원칙적으로 옥외집회 및 시위를 할 수 있도록 보장하고 있으므로, 사전 신고제도는 헌법상 사전허가 금지에 반하지 않는다”라고 밝혔다. 헌재의 결정에 아쉬운 점이 있지만 합헌의 논거로 들었던 내용이나마 지켜지는 나라에서 살기를 희망한다. 법과 원칙은 이 정권의 입맛으로 가름하는 게 아니다.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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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세밑에 내가 몸담고 있는 대학교 반 클럽에서 선배 갑이 쓴 댓글을 삭제해주기를 청하는 후배 을의 글이 익명게시판에 올라왔다. 갑이 댓글을 통해 어느 종교에서 추앙하는 위인을 폄훼한 것이 문제의 발단이다. 1000이 넘는 조회수와 100개 가까운 댓글이 오고 간 것을 보고 뭔가 방책을 마련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을은 나를 비롯한 클럽 운영진이 문제의 댓글을 지워주기를 바란 모양이다. 하는 일 없는 부클럽장이었던 내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나는 댓글을 삭제하는 데 머뭇거린 까닭은 고학번에 대한 예우라고 밝혔다.


이와 비슷한 사안의 당사자가 누가 되었든 간에 그 분이 고학번이라면 편집권을 발동하는데 신중하게 응했을 것이다. 저학번에게는 편집권을 함부로 발동한다는 뜻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좀 더 망설였을 것이라는 뜻이다. 굳이 이런 식의 번거로운 절차를 밟으려고 한 것은 선배님들에 대한 흠모이자 머잖아 이 자리에 오를 후배님들을 위한 배려라고 여겼다. 적잖은 후배들은 나의 이런 발언을 “선배의 글이기 때문에 삭제하지 않는다”라고 받아들인 모양이다. 나는 선배가 아니라 고학번이라고 명확히 범위를 한정했다. 고학번을 개념 정의하기 나름이지만 나는 내가 속한 클럽에 종종 들러주는 고학번을 가파른 잣대로 보면 열 명이나 스무 명 남짓으로 보고 있었고 클럽 구성원들이 대체로 동감할 수치이다.


이 분들에게 우리 클럽의 손윗사람으로서 예우를 갖추는 게 특혜라고 치더라도, 그 특혜가 과도하다고 보기 힘들다. 그 특혜라는 것도 스스로 자기의 실수를 돌아볼 수 있는 여유를 주는 정도인데 말이다. 그 여유라고 해봤자 내가 논쟁이 진행되는 과정을 지켜보며 밤새 기다린 몇 시간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누군가 잘못을 저질렀다고 손가락질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하지만 그 사람에게 자신의 행동을 성찰하고 조회할 시간을 부여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몇 시간 정도 벌어진 댓글 논쟁을 보면서 갑이 교정할 의사가 없는 것을 알고 문제의 댓글을 삭제하려던 찰나에 댓글이 수정되었다. 갑이 자신의 견해를 철회할 의사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표현의 과격함을 자구 수정한 게 큰 의미가 있을까 싶기도 했지만 일단 아쉬운 대로 매듭을 지었다.


고학번이라고 할 만한 분들의 글에 대한 수정이나 삭제에 신중해야 한다는 개인적인 소견에 대한 지적이 적잖았다. 하지만 내가 “학번 불문하고 공평무사하게 게시판을 관리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면 솔직하지 못한 처사다. 더군다나 나는 고학번이라고 불리는 시점에서도 우리 클럽을 종종 드나들어주는 분들이 드물지만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 고마운 일이고 그에 대한 예우를 갖추는 게 클럽 운영진으로서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었든, 자기 필요에 의해서 들렀든 간에 그래도 잊지 않고 반 클럽을 찾아준 일 자체가 너무 반가워서 다른 관점에서 생각하지 못했음을 인정한다. 선후배 사이의 원활한 소통을 방해할지 모른다는 비판을 겸허하게 받아들인다.


그럼에도 어떤 분쟁이 발생했을 때 먼저 스스로 자기 교정을 할 여유를 부여하는 것 정도가 과도한 특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누구보다 원활한 소통을 꿈꾸는 내가 기다린 며칠, 몇 시간이 어떤 후배님에게는 참을 수 없는 시간이었는지 모르겠으나 나 또한 무척 고통스럽고 가슴 시린 순간이었음을 헤아려주시면 고맙겠다. ‘예우’, ‘특혜’라는 표현을 부러 쓴 이유는 역설적으로 나를 비롯한 고학번 선배들의 자기 책임과 자기 반성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선배된 자의 한마디가 후배들에게 어떻게 전달될 것인가’에 대한 고심을 먼저 품어주시길 바라는 마음의 다른 표현이었다고 할까.


을의 주장에 동조하는 몇몇 후배들은 갑에게 사과를 요구하기도 했다. 나는 선배를 향해 사과를 요구하는 것을 좀 자제해줄 것을 호소했다. 이유가 어찌 됐든 선배가 정색하고 후배에게 사과하는 모습은 너무 야박한 상황이 아니겠냐며 다독였다. 굳이 후배가 나서지 않아도 동기들이나 선배들도 보는 눈이 있는 만큼 서운함이 크더라도 살짝 기다려주는 건 어떻겠냐며 조심스레 말했다. 아무리 마땅하다고 여겨지는 일이라도 막상 사과까지 받아내고 나면 후배들이 그 모짊에 대한 미움이 생길까 염려스러웠다.


이러한 나의 진의와는 관계없이 사과 자제 요청에 대한 비판도 일었다. 내가 단순히 선배는 후배에게 사과를 해서는 안 된다고 단정짓지 않았음을 누구나 다 알아주실 것이라 믿는다. 나는 다만 정식적인, 공식적인 사과라는 절차는 최후의 수단으로 아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소견을 밝혔다. 사사로운 친목단체에서는 꽤 각박하게 느껴지는 절차이기 때문이다. 내 욕심이었는지 모르겠으나 상대방이 사과를 받으려고 하기보다는 당사자가 스스로 돌아보는 과정을 밟고 싶었다. 나는 지금도 몇몇 후배들이 선배를 향해 사과를 운운할 때 좀 머뭇거려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자기 실수를 인정하는 건 선후배를 떠나 누구에게나 힘든 일인만큼 조금만 넉넉하게 기다려줄 수 있으면 어떨까?


어느 선배님께서는 “손윗사람한텐 사과도 못 받는 고대의 경직성이 싫다”라는 댓글을 달아주셨다. 선배님께서는 “선배가 후배한테 이러쿵저러쿵 하는 경우는 조언인데 후배가 선배한테 이러쿵저러쿵 하는 건 버릇없단 이야길 듣”는 것이 온당치 않다고 말씀하셨다. 전적으로 동감하는 바이고 그런 분위기를 없애기 위해 앞으로도 노력할 것이다. 그렇지만 ‘비판’과 ‘사과 요구’는 동일선상에 놓고 재기는 힘들 듯싶다. 다시 말해 비판을 수용하는 것과 사과 요구를 실행하는 건 다소 차원이 다른 문제다. 비판할 때는 한 번 생각하고 제기해도 되지만, 사과를 요구할 때는 세 번 정도는 생각해야 한다.


『장자』에 “저자에서 남의 발을 밟으면 미안하다고 사죄하지만, 동생이 형의 발을 밟으면 따뜻한 눈길로 보아주면 되고, 자식이 어버이의 발을 밟았을 때는 아무 말이 없어도 된다”라는 구절이 있다. 유가의 예는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숭상하지만, 진정한 예는 유별나게 따지고 가리는 것이 아니라는 도가의 입장이 녹아 들어가 있다. 사과마저도 필요 없는 관계가 이상적이라고 설파하지만 무조건 꿈결같은 상황만은 아닐 게다. 더욱이 사과 요구를 표현하는 것도 서로의 관계에 대한 신뢰와 친근함을 나타내는 수단으로 작동할 여지도 있다. 또한 선배가 나의 비판이나 사과 요구를 받아들일 만한 아량이 품었다고 믿는 것이 그 사람에 대한 예우일 수 있다.


그러나 친교 모임에서 정식적인, 공식적인 사과란 절차는 최후의 수단으로 아껴 쓸 때 효용이 커진다고 본다. 사과는 자발적으로 해야 빛나고, 사과 요구는 공인(公人)에게 먼저 건네야 한다. 따지고 보니 이렇게 ‘사과 요구’를 두고 말이 길어진 연유는 내가 생각하는 ‘사과’에 대한 개념 정의가 다소 엄격했기 때문이다. 1991년 4월 헌법재판소는 사죄광고 제도가 타인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믿지 않는 자에게 본심과 다르게 깊이 사과하도록 강요하는 것이므로 인간 양심의 왜곡과 굴절이자 이중인격 형성의 강요라고 정의하며 위헌 결정을 내렸다. 반성을 강제할 수 없다는 결정을 접하며 많은 영감을 얻었다. 헌재의 결정문 일부를 발췌해봤다(89헌마160).


그러므로 양심의 자유에는 널리 사물의 시시비비나 선악과 같은 윤리적 판단에 국가가 개입해서는 안되는 내심적 자유는 물론, 이와 같은 윤리적 판단을 국가권력에 의하여 외부에 표명하도록 강제받지 않는 자유 즉 윤리적 판단사항에 관한 침묵의 자유까지 포괄한다고 할 것이다. 이와 같이 해석하는 것이 다른 나라의 헌법과 달리 양심의 자유를 신앙의 자유와도 구별하고 사상의 자유에 포함시키지 않은 채 별개의 조항으로 독립시킨 우리헌법의 취지에 부합할 것이며, 이는 개인의 내심의 자유, 가치판단에는 간섭하지 않겠다는 원리의 명확한 확인인 동시에 민주주의의 정신적 기초가 되고 인간의 내심의 영역에 국가권력의 불가침으로 인류의 진보와 발전에 불가결한 것이 되어 왔던 정신활동의 자유를 보다 완전히 보장하려는 취의라고 할 것이다.


더 나아가 살피건대 원래 깊이 “사과한다”는 행위는 윤리적인 판단·감정 내지 의사의 발로인 것이므로 본질적으로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자발적인 것이라야 할 것이며 그때 비로소 사회적 미덕이 될 것이고, 이는 결코 외부로부터 강제하기에 적합치 않은 것으로 이의 강제는 사회적으로는 사죄자 본인에 대하여 굴욕이 되는 것에 틀림없다. 사과의 정도에 따라 굴욕감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적어도 “사과”의 문구가 포함되는 한 그것이 마음에 없는 것일 때에는 당사자의 자존심에 큰 상처요 치욕임에 다름없으며, “사과문”, “진사문”, “해명서” 등 어떠한 명목의 것이든 관계없이 그러하다.


헌재의 결정으로 비추어 볼 때 유독 방송사에만 강요하고 있는 ‘시청자에 대한 사과’ 조치는 위헌일 가능성이 크다는 견해도 있고, 헌재의 결정이 언론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고찰이 부족해 약자인 피해자의 권리 구제를 소홀히 만든다는 비판도 들린다. 여하간 헌법 제19조는 “모든 국민은 양심의 자유를 가진다”라고 하여 양심의 자유를 기본권의 하나로 보장하고 있다. 헌법이 보호하는 양심의 자유는 선하고 올바른 판단만을 보호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덜 선하고 덜 올바른 내심마저 보장하는 것이 양심의 자유의 고갱이다. 양심에 거슬려 사과를 못하겠다는 사람에게 양심을 탑재하라며 구박한다면 헌법정신과 어긋나는 행동이다.


2004년 탄핵 정국 당시 “잘못이 있어 사과하라면 사과할 수 있지만 잘못이 뭔지 모르겠는데 시끄러우니까 사과하고 넘어가자는 건 받아들이기 어렵다”라는 요지의 발언을 했던 노무현 대통령은 결국 탄핵소추까지 당했다. 앞서 공인을 향해 먼저 사과를 요구하자고 했던 것은 상대적이고 제한적인 맥락에서 한 말이다. 명예나 체면을 중시하는 한국의 문화나 정서를 모두 부인할 수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사과 권하는 사회를 단숨에 고치기 힘들다면 사적 영역에서 사과를 받아내고픈 열망을 눅이는 대신에 공적 영역으로 눈을 돌려봄직하다. 그렇다고 공인들의 양심이 덜 소중하다는 건 아니다. 공인인 만큼 자기 반성을 더 바지런해야 하고, 자기 반성을 하다 보면 사과 또한 먼저 하게 되는 경우가 많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을 따름이다(과연?).


정리하자. 미안할 때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건 아름다운 덕목이다. 강제적인 사죄광고는 위헌 결정을 받았지만 자발적인 의사에 따른 사죄광고는 지금도 얼마든지 많이 이뤄진다. 나는 후배가 선배를 향해 사과를 요구하는 것도, 동기가 동기에게 사과를 요구하는 것도, 선배가 후배에게 사과를 요구하는 것도 신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번 사건의 시발점이 된 갑의 불관용이 너무 안타까웠지만 불관용에 대한 불관용은 수정 및 삭제 조치 등으로 충분하다고 본다. 갑의 사과 혹은 유감 표명은 갑의 자유의사에 맡기는 게 기본원칙이라고 믿는다. 끝끝내 사과를 거부하는 자세를 칭찬하는 건 결코 아니지만 말이다. - [無棄]


<참고문헌>
김욱, 『그 순간 대한민국이 바뀌었다』, 개마고원, 2005, pp. 39~53
박성철, 『헌법 줄게 새법 다오』, 이매진, 2007, pp. 26~35
윤진수, “謝罪廣告制度와 民法 제764조의 違憲 여부-憲法裁判所 1991.4.1.宣告, 89헌마 160決定(判例月報 250호 64면 이하)-”, 『사법행정』 제32권 제11호, 한국사법행정학회, 1991, pp. 73~89
윤철홍, “명예훼손과 원상회복: 사죄광고를 중심으로”, 『비교사법』 제10권 3호, 한국비교사법학회, 2003, pp. 25~55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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