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객의 도덕'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8.01.11 마땅하지 않았던 자유
  2. 2007.11.06 도덕성이 능력이다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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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에 난 여드름이 결국 흉 질 모양이다. 발칵 짜증이 난다. 문득 1999년 계훈제님의 부고가 안쓰러워하던 어린 마음이 떠오른다. 나는 정치적 시비나 이념적 차이를 떠나 일평생 올바르게 살려고 노력한 사람의 쓸쓸함에 많이 상심했다며 습관처럼 둘러댄다. 그런데 여드름을 향한 내 역정의 강도는 계 선생님의 만년을 따가워함과 별 차이가 나지 않아 보인다. 내게 민주화라는 건 여드름과 비슷한 존재였단 말인가.


『젊음이여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에 소개된 황지우님의 「사육된 세대」를 읽다보니 새삼 스스럽다. 그렇지만 앞 세대 분들이 그토록 갈망하던 민주화는 궁극적으로 사사롭고 소소한 일에 분개할 수 있는 여유가 아니었냐며 투정을 부려본다. 무위지치(無爲之治)를 높게 친다지만 이 땅의 민주주의는 지독한 인위였고, 인공미였다. 엉덩이에 피멍이 들어 팬티와 살이 붙어 떨어지지 않았던 이들의 피딱지를 먹고 자란 대한민국. 나는 피딱지 대신 여드름을 걱정한다. 딱 그만큼은 세상이 좋아졌다.


07년 9월 당시 고려대 총학생회장은 성명서에다 “출교자들이여, 나와 함께 군대로 갑시다”라는 막말을 했다. 흔히들 민주화 투쟁을 하던 분들이 군사독재와 싸우다 군사독재를 닮아갔다고 곧잘 험담한다. 자칭 순수한 비운동권을 내세우던 그들도 미워하면서 닮아버린 듯싶다. 글쓴이는 서두에 “1987년 7월 한 학생의 저승 가는 길이 슬퍼서 100만 민중이 모였다”라고 썼다. 제 학교 선후배 동기들이 쫓겨나는 걸 찬성한다는 학생들과 더불어 사는 나로서는 21세 이한열의 죽음에 그토록 많은 필부가 서글퍼 했다니 어색하다. 80년 5월과 87년 6월을 꼭짓점으로 삼아 그 전후의 시린 이야기를 풀어내는 책에 등장한 내 또래의 사람들은 도무지 이상했다.


학교를 부러 그만두고 공장에서 일하기 위해 자격증을 딴다. 부모님께 스스로 떳떳한 삶을 살고 싶다는 편지를 남기고 가출한다. 그런데도 위장 취업한 여대생의 언니는 “세상이 얼마나 더러운지는 너보다 내가 더 잘 안다”라며 생활비를 보낸다. 이 요상함은 얼마나 야만적인 시대였는가를 방증한다. 동생을 내놓으면 형을 풀어주겠다는 연좌제가 섬뜩했다. 난사 당한 여성 시신 한 구를 놓고 두 어머니가 “내 딸이다”라고 다퉜다. 보안대 지하실에서 친구 이름을 적은 수첩을 씹어 먹어야 했다. 권인숙이 “간첩도 자궁에다 봉만 박으면 불어”라는 모욕을 당해야 했다.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거짓말을 하고도 부끄러운 줄 몰랐다. 내가 그 시대를 추체험했다면 거짓말이다. 불가해하지만 과거로만 돌리기 힘든 시절이다. 상당 부분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더 찾아보고 싶어 『광주오월민중항쟁사료전집』을 훑다가 콧등이 시큰해졌다. 화장실까지 포복해서 혀끝에 똥을 묻혀 가지고 선착순으로 와야 할 때 인간에 대한 믿음은 어디까지 흔들렸을지 아찔하다. 개미가 가득한 방에 넣고 개미가 온 몸에 달라붙게 했다는 대목에서는 구역질이 나왔지만 밥맛을 잃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았다. 저녁밥을 맛나게 먹었다. 타인의 고통을, 과거의 아픔을 제것처럼 느낀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인지 황광우님도 어떤 교훈이 아니라 과거를 생생하게 있는 그대로 만지게 하고 싶다고 말한다.


글쓴이는 육군교도소에서 자행된 폭력에 침묵한 자신이 싫다며 빵을 똥통에 던졌다. 후회가 되어 화장실에서 빵을 꺼내 먹을 때 인간 존재에 대한 정의를 고통스레 바꾼다. 아! 이 분도 나와 같은 인간이구나 하는 당연한 진리를 깨닫는다. 윤상원은 감칠맛 나게 노래를 잘 불렀고, 좋아하는 사람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일기를 써내려 간 로맨티스트였다. 김남주는 “먹고 살아야 하는데 어쩌겠어요?”라고 넋두리하며 호구를 이었다. 내가 이 분들을 근엄한 투사로만 관념화하고 박제화하지는 않았나 반성한다. 이네들도 맞으면 아프고, 죽으면 슬프고, 배곯으면 고픈 똑같은 인간이었다. 물론 황광우는 통닭 대신 논어, 맹자를 달라고 했다. 윤상원은 도청을 나서지 않았고, 김남주는 우유곽에 시를 새겼다. 그러나 이들의 초인다운 면모가 인간다움을 가리지 못한다. 이 분들이 총칼보다 무서운 사람이었기에, 끝끝내 인간다움을 버리지 않았기에 성스럽고 아름답다.


글쓴이는 “여전히 역사에서 ‘수’의 의미는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라고 선언한다. 셀 수 없이 반복되는 물방울이 바위를 뚫을 수 있다고 역설한다. 참 많은 젊은이들이 죽었다. <나이 서른에 우린> 가사처럼 세월의 무게라는 시험을 치르기도 전에. 요즘은 말하기가 너무 쉽다. 쉽고 쉬운 입을 놀려 이들을 잊지 않고 간직하는데 정성을 좀 보태면 어떨까. 물론 기억을 구걸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상식을 강요하지 않는 세상을 만들자고 이네들이 산화(散花)했으니 말이다.


이제는 용서하라고 한다. 나는 관용 권하는 사회는 식객의 도덕이며 마름의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용서 이전에, 관용 이전에 기억을 논해야 한다. 기억하는 사람의 수, 통감하는 사람의 수를 늘려야 한다. 군부독재가 너무 어이없었기에 한 편이 되었던 사람들이 지금은 갈라서고 있다. 이 분화는 역사의 발전이지만, 최소한의 공통 분모는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지금 누리는 자유가 본래 마땅한 것이 아니었음을 곱씹는다. 바위 앞에 선 달걀 같던 사람들을 오래도록 기억하겠다. 가난한 자가 등불 하나를 켜는 심정으로 앎과 삶의 숙명적인 거리를 좁히기 위해 하루를 살자. - [無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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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성이 능력이다5

경제 2007.11.06 03:57 |

<도덕성이 능력이다>는 총 5부작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순서대로 읽으셔야 하지만 따로 읽으셔도 무방합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A는 Amorality의 약자로서 도덕성에 문제가 있는 지도자를 지칭하는 가상의 인물입니다. 대선 끝날 때까지 틈틈이 수정할 계획이니 퍼가지 말아주세요.^0^


5. 도덕력으로 경쟁하라


11월 1일 한국보건사회연구원·한국노동연구원이 기획예산처에 제출한 ‘소득분배 및 공적이전·조세 재분배’ 보고서에서 도시가구의 시장소득 기준 상대빈곤율이 2006년 16.42%로 관련 통계가 나온 1999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다행히 증가폭은 둔화되고 있다. 상대빈곤율은 가구소득이 도시가구 평균소득의 50%에 미치지 못하는 가구의 인구 비율을 말한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사회보장과 조세제도 등 정부 정책을 통한 불평등 완화 효과는 커지고 있지만, 개인이 벌어들이는 시장소득의 불평등은 확대되고 있다. 시장소득은 모든 수입을 합한 경상소득에서 정부보조와 같은 공적이전소득을 제외한 것으로, 가구원이 직접 벌어들인 소득이다. 저소득층의 소득이 줄어들고, 고소득층과의 격차가 벌어지고 있다. 정부지출이 불평등을 완화시키고 있다지만 비정규직이나 영세 자영업자의 소득 감소에 기인한 시장소득의 불평등에 대한 개선책 마련이 시급하다. 정부는 공적부조와 조세정책을 감안한 가처분소득은 소득 불평등 추세가 정체되고 있다고 해명한다. 선진국과의 복지 예산의 규모 차이가 재분배 효과의 차이를 낳는다는 주장도 설득력 있다. 양극화 해결을 위해 성장을 통해 좋은 일자리를 만들어야 한다는 의견도 일리가 있다.


이처럼 세상 모든 일이 그렇지만 숫자 하나를 놓고 분석도 묘안도 갈린다. 경제중심주의, 경제만능주의가 지배한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탈도덕 현상’이 꾸려 가는 경제에는 도덕성이 천덕꾸러기일 게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선(先)성장 후(後)복지 레토릭 밖에 내놓을 거리가 없다. 나는 도덕성을 희생해서 경제를 살리지 못한다고 확신한다. 윤리경영, 부패지수, 사회자본 등의 각종 이론과 실증 연구가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아니 양보해서 경제가 살아난다고 해도 부도덕한 경제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 게다가 A 같은 이들이 사회의 상층부를 차지하는 사회에서 가장 피해를 볼 계층은 서민이다. ‘도덕력’이 동난 세상에서 누가 일차적이면서 심대한 타격을 입을지는 불 보듯 뻔하다. ‘탈도덕 현상’을 가치중립적으로 평가하기 어려운 까닭은 그것이 환상이고 허상이기 때문이다. ‘탈도덕 현상’의 기저에 깔린 ‘식객(食客)의 도덕’은 시혜적 평등을 내포하고 있다. 선거는 정치적 학습 과정이다. 1952년과 56년 미국 대선에 민주당 후보로 나섰던 스티븐슨은 매카시즘에 맞서 강요된 애국심이 아닌 민주와 자유의 가치를 일깨웠다고 한다. 그는 연거푸 패배했지만 자신이 믿는 가치에 헌신할 줄 알았던 그 자세를 배우고 싶다. 이번 대선을 통해 스티븐슨 같은 괜찮은 지도자도 만났으면 좋겠다.


잡설이 길었지만 끝끝내 A가 집권한다고 치자. “요와 순은 천하를 다스리기를 어진 마음으로 하였으므로 그 백성들도 그를 따라 어질게 되었고, 걸과 주는 천하를 다스리기를 포악한 마음으로 하였으므로 그 백성들도 그를 따라 포악하게 되었다(堯舜帥天下以仁 而民從之 桀紂帥天下以暴 而民從之)”라는 『대학』 구절이 있다. 요와 순이 통치한 것은 백성들이 요순 같은 자질을 가졌기 때문이고, 걸과 주가 통치한 까닭은 백성들이 걸주와 같은 포악함을 품었기 때문이라고 거꾸로 읽으면 섬뜩해진다. 민주공화국의 수준은 결국 그 국민의 수준과 비례한다는 평범한 진리이겠지만. 이어서 “그 내리는 명령이 그들 자신이 실제로 좋아하는 바와 상반되는 것이면 백성들은 따르지 않는다. 그러므로 군자는 자기에게 선이 있은 뒤에 남에게 선을 지니기를 요구하며, 자기에게 악이 없는 뒤에 남의 악을 비난하는 것이다(其所令 反其所好 而民不從 是故 君子有諸己 而後求諸人 無諸己 而後非諸人)”라고 말한다. 앞서 본 공자와 맹자의 경구와 비슷하다. A는 결국 또 다른 A를 복제해낼 따름이다.


실질적 민주주의를 논하는 분들이 부쩍 늘었다. 절차적 민주주의는 어느 정도 완숙해진 거 아니냐는 판단에서다. 그러나 ‘탈도덕 현상’은 절차적 민주주의가 제대로 구현되고 있지 못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선출 과정의 필터링(Filtering)이 미흡하기 때문이다. 도덕적 자원을 결핍한 A는 ‘비지지자 신뢰도’를 확보하기 위해 유무형의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A 비지지자들의 냉소주의도 문제겠지만 극단적으로는 맹목적인 신뢰를 부여할 수 있는 온정주의적 독재자의 출현을 고대할지도 모른다(임혁백, 『세계화시대의 민주주의』, 나남출판, 2000). 아직 보완이 더 필요한 ‘도덕력’이지만 도덕성이 능력이라는 기본 골격만은 확고하다. 유권자들은 이제 ‘도덕력’ 경쟁도 헤아리는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 이중적 잣대와 관대화 경향을 버리고 얼마 더 깐깐해져서 이 권리를 누리자. ‘탈도덕 현상’이 헝클어뜨리고 있는 절차적 민주주의를 건사하고 믿음직한 지도자를 선택하자.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 위원으로 고생하셨던 한홍구 성공회대 역사학과 교수가 “우리는 화해를 구걸하지 않겠다”라고 일갈했다는 기사가 떠오른다(“"우리는 화해를 구걸하지 않겠다" .” 오마이뉴스. 2007. 10. 28.). 과거의 행적이든 오늘날의 과오든 양심 고백을 하는 사람은 너무 드물다. 하지만 구걸로는 진정한 화해를 이루지 못한다. 나는 마찬가지 논리로 도덕을 구걸하지 않겠다. ‘탈도덕 현상’을 부추기는 자들은 나쁜 줄 알면서 저지르는 고의범도 있고, 자신의 행동이 옳다고 믿는 확신범도 있다. 고의범은 극복과 제어의 대상일 뿐 논쟁과 토론의 상대는 아니다(이런 말을 하는 게 슬프지만). 확신범은 개전의 희망이 있기는 하다. 그네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도덕적 훈계가 아니라 ‘도덕력’의 유용함이다. A와 그 지지자들에게 건넨 손가락질을 나 자신에게 먼저 돌리고 한 번 뿐인 삶을 ‘도덕력’으로 매만지는 긴 호흡의 여정이다. 종종 고단하겠지만 남에게 말하지 못할 것이 없는 떳떳한 삶을 지킨다면 얼마나 번듯하고 흐뭇하겠는가. 정리하자. 우리를 다스리는 분들이 ‘도덕력’을 갖췄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결코 사치가 아니다. 나를 다스리는 사람이 존경스럽고 본받을 만한 분이길 갈망한다. 하지만 나는 감동을 구걸하지 않겠다. - [無棄]


* 현행 공직선거법 제93조는 탈법방법에 의한 문서·도화의 배부·게시 등 금지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선거일 180일 전부터는 선거에 영향을 끼칠 목적으로 정당·후보자를 지지·반대하는 내용에 대해 게시 및 상영을 할 수 없다는 내용입니다. 이 법이 누리꾼들의 건전한 정치 토론을 사실상 봉쇄하고 있다는 볼멘소리가 적잖습니다. 선관위가 선거법 93조의 본래 취지를 망각하고 무리하게 적용하고 있는 건 아닌지 안타깝네요. 선거법 개정에 소극적이던 어느 정당은 선관위 이외에 정당도 포털이나 언론사에 글을 올린 이용자의 신원 정보 제공을 요구할 수 있도록 하는 등 규제를 한층 강화한 법안을 지난 5월 발의했다고 합니다. 경제성장을 약속하기 전에 국민의 기본권부터 보장해주시길 간곡히 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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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훈석 2007.11.08 12:43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현실과는 다르게, A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인 인터넷에서 댓글들이 뭐라 하는지 모르겠지만, 도덕의 중요성을 부인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문제는 그걸 어떻게 평가하자는 건지 모르겠다. A의 선거법위반과 위장전입을 용서했다면 도덕성을 가볍게 여기는 지지자가 되는 것을 아니라고 생각한다. 의혹또한 결국 증명할 수 없는 것이라면 의혹만 가지고 도덕성을 평가하기에는 부족하다. 준법만이 도덕성의 평가기준은 아니다.

    남에게 떳떳할 수 있는 것이 도덕성 평가의 중요 기준이 될 수는 있겠지만, 문제가 많은 기준이다. 댓글에서 예상외로 많은 지지를 받았던 이해찬이 스스로 떳떳하다고 해서 도덕성이 뛰어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에게 이해찬은 책임질 생각도 없으면서 대입시험을 없애겠다는 말을 한 거짓말쟁이이며 A의 테니스만큼이나 골프를 사랑하고 독선과 오만에 가득차 있는 사람이다. 스스로 어떻게 생각하든 적어도 나에게 이해찬은 도덕적인 인물이 아니다.

    도덕성으로 경쟁하기는 힘든 면이 많다. 기독교인이 지탄을 받는 이유중 하나가 위선인데, 도덕성을 강조하면 걸리는 함정이다. 아무리 많은 기독교인들이 잘 하고 있었도 많은 사람들은 이들을 위선의 집단으로 여긴다. 도덕을 강조하면 할 수록, 그렇지 않던 사람에게 예외나 실수로 넘어갈 일을로 더 위선적이고 오만해 보인다. 위선과 오만은 비도덕의 하나 이며 결국 실제 A에 비해 "도덕력"이 월등해도 남이 보기엔 비슷해 보이거나, 그보다 못하게 여긴다.

    • 익구 2007.11.09 01:17 신고 Address Modify/Delete

      이 연작글 1편에서 분명히 공지했듯이 A는 특정 후보를 지칭한 것이 아니니 오해 없길 바라요. 온라인 토론을 꽉 막아놓은 현행 선거법 덕에 실제 후보들의 사례를 들어서 도덕성에 대한 개념을 명확히 하는 데는 한계가 있거든. 가령 선거 시기만 되면 오만가지 개혁 구호를 늘어놓는 어느 후보 또한 도덕성에 심각한 결함이 있다고 생각해. 내가 도덕성의 평가 척도를 제시할 만한 역량도 없는 만큼 그걸 나에게 궁금해하면 좀 곤란해.^^; 내가 쓴 잡글이 그 평가 척도를 제시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말이지. 그래도 분명한 건 준법은 도덕성 평가에 꼭 들어갈 항목이기는 할 듯싶네. 여하간 내 잡글은 '탈도덕 현상'으로 명명한 분위기가 마냥 온당한 것만은 아니라는 걸 환기시키는데 주안점을 두었다고 봐주렴.

      글 말미에 떳떳하다라는 표현을 쓴 건 내 개인적인 지향점을 말한 것일 뿐 후보로 나온 사람들이 나는 떳떳하다 이렇게 말하는 걸 기준으로 삼자는 뜻은 아니었어. 후보로 나온다는 사람 치고 떳떳하지 못하다고 외치는 분들이 있던가? 그건 차별화 되지 못하는 선언적 의미에 불과하니까. 떳떳함이라는 개인적인 미덕이 너무 소멸되는 게 안타까워 푸념 비슷하게 늘어놓은 거지 뭐. 그걸 공적 영역의 평가 척도로 삼을 수도 없고, 삼아서도 안 될 거 같네. 이해찬님에 대한 평가는 너와는 많이 다르지만 이 글의 주제를 벗어나는 만큼 생략할게(언제 사석에서나). 이 글은 특정인을 공격하기 위해 쓴 글이 아니니까 인물 비평은 제외하는 게 좋을 듯싶어. 다시금 강조하지만 A를 특정인으로 규정하지 말아주렴. 내가 그렇게 노력했건만... 꺼이꺼이

      내가 제시한 '도덕력'이라는 개념은 그리 정교하지도 않고 그냥 아이디어 수준인 만큼 한참 더 보강해야겠지. 다만 일국의 최고 지도자를 뽑는 선거에서 그 분 삶의 궤적이 멀끔하고 배울 점이 많으면 좋지 않을까 싶네. 게다가 오늘날 한국 사회는 도덕성 무시 현상, 도덕성과 별개로 유능한 사람이 존재할 수 있다는 환상이 지배하는 듯싶으니 반성적 균형을 위한 성찰의 계기로 삼아준다면 나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겠고. 네가 말한 대로 도덕성을 강조함으로써 위선이나 오만이 비도덕이라는 지적은 명쾌하고 상당 부분 동감해. 내 주장은 어차피 수기치인으로 묘사되는 패러다임을 바탕으로 전개하고 있는 만큼 편향이 있을 수밖에 없고, 나는 내 잡설이 보편적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지도 않아. 하지만 선거는 다수결주의가 두드러지는 시점이고, 선거야말로 사회 균열과 갈등을 표출하고 차이점과 합의점을 모색하는 시간이겠지. 나는 그저 대한민국의 한 주권자로서 내 소신을 밝혔을 뿐이라네. 미진한 답변은 좀 더 궁리하고 살짝 채워 넣을게. 고마우이.

  2. 훈석 2007.11.09 22:48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도덕성 문제가 끊이질 않는 후보가 있느데 언급하지 않고 넘어가기는 힘들어 보여서 그랬지. 나도 나라의 지도자는 본받을 만한 도덕을 갖춘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준법이 도덕성의 굉장히 중요한 기준 이라는 것도 동의하고. 서울 돌아다니다 보면 박정희 때문에 한국에 이렇게 룸싸롱이 많은 것인가 생각 들때 많고...

    '더 도덕적인 사람을 지도자로 뽑자' 가 아니라 '도덕과 능력은 별개가 아니다' 라는 말을 하려던 거였다면 능력의 정의를 다른 사람과 다르게 해서 그런 현실이 보이는 게 아닐까 싶다.

    언제 사석에서 의제 정해놓고 밤새 얘기해 봐야겠다 ㅎㅎ 맨날 얘기하자 해놓고 얘기 할 수가 있어야 말이지 :)

    • 익구 2007.11.12 00:43 신고 Address Modify/Delete

      응 나도 그렇게 생각할 여지가 많다고 생각해. 그냥 투정부려 본 거지 뭐. '도덕과 능력은 별개가 아니다'와 '더 도덕적인 사람을 뽑자' 사이에는 제법 차이가 있겠지. 나는 별개가 아니다에 치중했는데 그러다 보니까 '도덕도 능력이다'라는 생각이 들게 되어 더 도덕적인 사람을 뽑는 게 더 유능한 사람을 뽑는 게 된다는 결론이 나온 듯싶어. 논리적 모순을 좀 더 파헤쳐 봐야겠어. 너랑 밤새 이야기하다가는 내 무식과 아집이 하룻밤 만에 동나버릴 듯싶어 두렵구먼.^^;

  3. 민돈기 2007.11.11 19:13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두가지 의문점이 드는 것이 있다면 도덕력이란 것은 사람이 어떤 행동을 했을때 바로 드러나는 빠른 성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시간이 흘러서 드러날수도 있는것이고 또 영영 드러나지 않은채로 묻혀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 가시적이지 못한 것을 능력의 일부로 보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더군다나 정치적인 면에서는 정치인들은 자신의 부도덕성이 폭로 되는 것을 입막음하고 있다는 것을 암암리에 우리모두는 알고 있습니다. 정말 한 사람의 도덕성을 평가할 수 있는 완벽한 필터링을 설치하지 않는 한 도덕력을 능력으로 간주 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다른 한가지는 도덕성이 부족한 인물이 중요한 위치에 올라섰을때 그 부족한 도덕성이 다른 능력에 영향을 준다는것은 기우에 불과합니다. 실제로 글에서 삼국지의 예를 들었듯이 결과적으로 조조의 위나라는 통일을 하였고, 촉나라는 망하였습니다. 너무 결과론적인 입장인 듯 하지만 실제로 한 인물을 평가할 때 도덕성은 그닥 큰 비중을 차지 하지 않습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평가도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부도덕한 독재정치에 대한 악랄한 비평은 약해지고 그의 업적과 리더쉽등을 부각시키고 있는 추세입니다.

    너무 길어서 다읽는데 시간이 좀 걸렸지만 잘 읽었습니다.

    • 익구 2007.11.12 00:46 신고 Address Modify/Delete

      좋은 지적 감사합니다. 말씀 주신대로 인간이 불완전한데 완벽한 필터링을 만들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도덕력을 평가 척도에 넣으려고 노력하는 것과 아예 배제하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을 듯싶어요. 제가 언급한 탈도덕 현상은 능력과 도덕성이 별개이거나 능력을 도덕성보다 중시하는 사고방식을 지칭합니다. 이것이 지나치면 좋지 않기 때문에 도덕력을 평가 척도에 반영하기 위해 노력하자는 주장입니다. 또한 능력이라는 것도 생각만큼 가시적인 게 아닐 수 있습니다. 기업의 경영자를 평가할 때 주가나 단기 순이익만으로 평가하지 않듯이 능력에도 장기적이고 잠재적인 측면이 많습니다. 저는 능력이 비교적 측정하기 쉽다고 보지만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데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물론 조조의 성공 요인 가운데 능력 중시의 인재 채용이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그 자신의 능력도 출중했고요. 하지만 유비에 견주어 큰 성공을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조에 대한 역대의 평가가 일방적으로 우세하지 않은 까닭은 단지 한족중심주의 때문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비록 패자였지만 유비 집단에게 건네졌던 적잖은 지지도 무시할 수 없을 테니까요. 그것은 조조 집단이 내세웠던 능력이나 현실적인 힘만큼이나 대중적인 매력을 끄는 요소가 유비 집단에게 있었음을 나타내는 방증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는 도덕성이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 못한 현상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습니다. 제 잡글의 요지는 도덕성이 평가에 너무 적게 반영되는 게 아니냐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현상의 인식이 아니라 현상의 타파를 모색하는 글이지요. 아직 논거가 부족하지만 제 주장은 궁극적으로 도덕성이 평가에 더 많이 반영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도덕성이 능력과 분리되지 않다고 보기 때문에요). 그런 맥락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경제발전을 기리면서 그의 무단통치를 잊는다면 한 개인에 대한 올바른 평가가 아닐 듯싶습니다.

      시답잖은 내용을 길게 늘어놓아 송구합니다. 고마운 댓글을 밑거름 삼아 더 채워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