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싱어'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0.01.25 노력에 대한 보상(내용 추가) 4
  2. 2009.09.29 인간도 위하는 동물해방

2009년 8월에 썼던 잡글을 보완했습니다. 교육 현실과 접목해본 4장이 추가되면서 오히려 더 횡설수설한 느낌입니다.ㅡ.ㅜ


1.
가모우 히로시의 『떴다! 럭키맨』(원제: とっても!ラッキーマン)이라는 만화책은 럭키맨과 그 둘레 영웅들이 우주의 평화를 해치는 무리들을 처치하는 단순한 줄거리다. 등장인물 가운데 내가 가장 애틋하게 여기는 이는 바로 노력맨이다. 그는 그야말로 근성과 끈기의 화신이다. 노력맨은 운이 좋아 패배를 모르는 럭키맨이나 승리를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승리맨처럼 승률이 높은 것도 아니고, 여러 친구들의 도움을 받는 우정맨이나 뛰어난 예지력을 발휘하는 천재맨처럼 효율적인 전투를 치르는 것도 아니다. 하다못해 가장 약골로 취급되는 슈퍼스타맨이 지닌 불사신에 가까운 빠른 재생력도 없는 노력맨은 오로지 근면함과 성실함으로 승부한다. 우리는 노력맨이 되기를 권장하고 강요받는 시대를 살고 있다. 과연 노력맨이 되면 우리는 행복할까?


얼마 전에 초등학생들도 국제중학교 진학을 대비해서 스펙 쌓기가 열풍이라는 기사를 읽었다. 치열한 자기계발은 권할 만한 일이지만 우리 사회가 치켜세우는 자기계발이 실용이라는 미명 아래 협소한 분야라서 안타깝다. 젊은 세대들의 스펙 쌓기를 보면서 우려하는 목소리에는 경청할 점이 많다. 청년들이 스펙에 열중하느라 체제에 순응하는 인간이 된다는 비판은 곱씹을 만하다. 이태 전에 리영희 선생님의 오마이뉴스 인터뷰를 읽다 가슴이 짠했던 적이 있다. 젊은이들의 보수화에 대한 물음에 선생님은 젊은이들의 보수화는 우리가 바라던 바 중 하나라고 말씀하셨다. 그만큼 젊은이들이 자유분방해졌다는 방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치적 불감증이 일상화되고 취업에만 몰두한다면 우리 세대 스스로가 반성할 지점도 분명히 존재한다. 정명(正名)을 위해서 보수화라는 말보다는 맹목화나 획일화라고 하면 어떨까 싶다. 자기비하 같지만 우리 스스로에게 엄격해서 나쁠 건 없지 않겠는가.^^;


스펙 권하는 사회에 대한 우려가 적잖지만 조금씩 능력사회로 향하는 발걸음 자체는 나쁘게 볼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능력주의 사회는 실력이 학력만큼이나 평가받고, 대학 졸업장이 아니라 평생에 걸친 지적 훈련이 존중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이런저런 연줄로 말미암아 능력의 가치가 왜곡되지 않는 사회, 열심히 살면 정말로 성공하는 사회여야만 능력에 따라 차등적으로 보상하는 능력주의의 보상체계가 제대로 작동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다양한 종류의 능력이 존중받기를 바란다. 프로게이머가 활약함으로써 우리 사회가 더 밝아졌듯이 말이다. 젊은이들이 좋은 일자리를 흠모하고, 좀 더 윤택한 삶을 누리기 위해 땀 흘림은 아름다운 일이다. 그렇지만 다양한 개성들이 몇 가지 안 되는 목표에 함몰되는 건 진정한 능력주의 사회라고 하기에는 좀 아쉽다. 사는데 좀 더 요긴하게 쓰이는 기예나 재능이야 앞으로도 존재하겠지만 거기서 그치지 말았으면 좋겠다. 선망 받는 지위가 분산될수록 특정 지위를 향한 무한 경쟁의 강도가 줄어들어 재능의 낭비를 막는다.


능력주의의 보상체계는 뛰어난 능력은 대부분 빼어난 성과로 드러나기 마련이므로 그 성과에 대해 보상함을 골자로 한다. 유능과 성공 사이의 상관관계는 대체로 인정된다. 그런데 ‘능력’이 누구나 갖출 수 있는 성질의 힘인지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 왜냐하면 사람의 능력이 서로 다르다는 건 상식이기 때문이다. 능력이 노력에 의해 계발된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한계가 있음도 직관적으로 파악 가능하다. 만약 그 한계가 제법 커서 능력과 노력이 포개지는 정도가 너무 작다면 능력주의 사회의 대원칙은 흔들리게 된다. 개념의 혼란을 막기 위해 ‘능력’은 후천적인 ‘노력’과 선천적인 ‘재주’로 나눌 수 있다고 정의하겠다. 능력을 선천적인 것으로 보아 후천적인 노력과 대비시키는 경우도 많지만 여기서는 그런 의미의 능력은 재주라는 단어로 대신한다. 국어사전을 살펴보면 ‘재능’은 개인이 타고난 능력과 훈련에 의하여 획득된 능력을 아울러 이른다고 말하고 있으니 ‘능력’과 비슷한 뜻으로 보이니 섞어 쓰겠다.


능력이 노력보다는 재주에 의해 좌우된다면 능력주의 사회는 선천적인 요소가 크게 기능하는 셈이다. 노동소득조차도 이런데 재산소득으로 눈을 돌리면 문제는 더 심각하다. 재산소득은 부모로부터의 상속이라는 요인이 크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결국 재주와 상속의 혜택을 입지 못한 사람이 마지막으로 기댈 언덕이 바로 노력이다. 노력맨으로 변신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함은 재주와 상속의 덕택을 입지 못한 이들의 유일한 선택지인 셈이다. 그런데 이 노력이 교육을 통해 계발된다고 하면 그 교육에 들어가는 재화를 마련하는 것도 만만치 않은 과제다. 천정부지로 올라 사회 문제가 된 대학 등록금이 대표적 사례다. 교육비를 재주와 상속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벌어야 한다면 그 시간만큼 공부를 못해 학습 진도가 떨어질 수도 있고, 여가를 충분히 즐기지 못해 행복감이 떨어질 수도 있다. 노력이 재주와 상속을 따라잡기가 점점 힘들어진다는 지적이 나온다.


2.
재주를 천부적인 운이라고 본다면 재주가 사회적 가치의 분배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현상은 부당하게 여겨진다. 이런 견해에 따르면 능력주의의 분배는 불평등을 재생산하는데 그칠 공산이 크다. 롤즈는 이런 문제의식을 발전시켜 몸과 재주가 개인의 소유라고 할 필연적인 이유가 없으므로 사회의 자산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의 몫이 아닌 것을 분배받는 것에 반대하며 재주란 노력 없이 거저 얻은 것으로 이득을 보는 것은 정의롭지 못하다고 보았다. 우연히 좋은 부모를 만나고 천부적인 재주를 갖게 된 것이 다른 사람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다고 해서 온전히 자신의 몫으로 삼을 수 없다는 논변은 설득력 있다. 자신에게서 비롯된 몫만을 분배의 기준으로 내세우려는 정신을 곱씹어보자.


이에 반해 노직은 재주가 모자란 사람들은 재주를 소유한 사람들이 있음으로 해서 이익을 얻음을 강조한다. 재주 넘치고 부지런한 재간둥이가 우리 곁에 있음으로써 우리가 더 넉넉하게 살 수 있다는 항변이다. 장기적으로 볼 때 일부 사람들이 재주나 노력으로 더 많은 재화를 얻으면 다른 사람들이 그만큼 잃게 되는 제로섬 게임이 아니라고 설파한다. 개인의 재능은 그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에게도 이익을 주기 때문에 재간둥이의 정당한 몫에 손을 벌리지 말라고 일갈한다. 그의 지적대로 재주도 모자라고 노력도 하지 않는 사람을 위해 재간둥이가 일방적으로 희생하는 사회를 설계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드워킨의 표현대로 자신의 의사에 상관없이 주어진 재주에 둔감해지도록(endowment-insensitive) 애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재주에 둔감해진 만큼 노력에 민감해지기를 제안한다.


재간둥이가 타인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하지 않았다면 정의로운 분배이므로 그 이상의 분배를 꾀한다면 재간둥이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한다는 언설에는 맹점이 있다. 침해는 직접적이거나 의도적이고 명시적인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나의 이익만을 추구해도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안겨주는 경우를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 희소한 자원을 둘러싼 경쟁에서 패배한 사람의 손해가 막대할 때 이 손해가 경쟁의 승리자의 탓은 아니더라도 그 원인으로 작용했음은 분명하다. 차병직 선생님이 『상식의 힘』에서 역설하신 대로 “진 사람이 있기 때문에 이기는 일이 가능”하며 “경쟁에서 뒤진 사람의 무능이나 나태함조차도, 그것이 이긴 사람의 영예나 쾌감에 기여하는 바는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오로지 노력으로 인한 성과물조차도 온전히 자신의 것일 수 없는데 재주로 이룬 업적이 매우 많은 공을 탐내는 건 사리에 맞지 않다.


더군다나 유능함만을 절대적인 분배 기준으로 활용하면서 유능하지 못한 계층의 생활을 외면한다면 합리적 이기주의의 관점에서도 노직 류의 견해가 그리 달갑지 않을 수 있다. 노직은 제로섬 게임이 아니므로 무능한 이들도 혜택을 누릴 것으로 전망했지만 소득 격차로 말미암은 상대적 박탈감이 심화되면 사회 통합을 저해하고 개인의 자존감이 흔들릴 것이라는 점은 어렵지 않게 추론할 수 있다. 소수의 재간둥이들은 자신의 수적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공적이거나 사적인 경호 수단을 동원할 것이다. 그런데 이 비용은 계속 높아질 가능성이 높다. 제레미 리프킨은 『노동의 종말』에서 실업의 상승과 폭력 범죄의 증가 사이에는 상관관계가 있다며 미국에서 1%의 실업 상승이 6.7%의 살인 및 3.4%의 폭력 범죄, 그리고 2.4%의 재산 범죄 증가를 야기한다는 머바와 파울스의 연구를 인용한다. 인간은 이기성 만큼이나 이타성을 지니므로 꼭 이런 수치를 들먹이며 윽박지를 일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마르크스는 능력이 아닌 필요에 따른 분배를 주창하며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한다”라는 구호를 외쳤다. 비록 능력을 몰아낸 자리에 필요를 올리려는 시도가 그리 성공적이지는 못했지만 그의 논의는 사회적 필수재 혹은 기본재를 충족해야 한다는 합의를 도출하는데 기여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회는 기회의 평등이 결과의 평등보다 현실적인 지향점이라는데 대체로 합의했다. 이에 따라 능력에 따른 차등 분배의 원칙과 더불어 필요 충족의 원칙이 혼합된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결국 생산에 이바지한 정도를 따지되 보상 수준은 그 공헌도의 차이보다는 더 적게 둠으로써 양자를 조화롭게 추구하려고 한다. 필요의 수준은 단순한 생존을 넘어 삶의 질까지 확보하는 식으로 나아가는 중이다. 이는 시혜적 평등의 의미가 아니라 한 사회에 공유하고 합의하는 인간다운 삶의 최소 수준이 되어야 한다.


3.
재주라는 우연성이 능력주의 사회의 기둥을 부식함은 충분히 살펴보았다. 물론 재주가 꼭 우연적이고 선천적이라고 할 수 없다는 이견도 보인다. 홍성욱 선생님 등이 엮으신 『뉴턴과 아인슈타인』이란 책에서는 천재 과학자들의 연구과정을 고찰하며 천부적인 재주가 창조적인 업적을 보장해주지 않는다고 분석한다. 천재성뿐만 아니라 노력으로 다져진 비판적 사고, 집중력, 끈기 등의 다양한 자질이 어우러졌기 때문에 재간둥이 가운데 앞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단지 탁월한 재주만이 아니라 부단한 연구 끝에 성취했다는 건 얼마든지 수긍할 만하다. 이 책에서는 우리 모두가 뉴턴과 아인슈타인이 될 수 있다고 보지는 않는다. 열심히 노력하면 이전보다 더 창조적으로 변모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게 해줄 따름이다. 재주라는 빙산이 생각보다는 거대하지는 않다고 항변하는 대목이 이 책의 미덕이다. 슬프게도 그래도 그 빙산은 꽤 크다.


나는 오래 전부터 능력과 필요의 대립 구조에서 노력의 가치를 도두보기를 말해왔다. 그런데 이미 선수를 쓰신 분이 계셨다.ㅡ.ㅜ 피터 싱어는 『실천윤리학』에서 타고난 능력보다는 필요와 노력에 따른 지불의 원칙을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능력과 필요 사이의 간극을 노력으로 메워야 한다고 보고 “그들의 능력이 어떠하든 간에 그들의 능력의 상한선 가까이까지 일하는 사람들에게 보다 많은 돈을 지불할 필요가 있을 것”이라고 언명했다. 싱어는 필요에 따른 분배의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에 따른 유인을 보탰다. 그의 논설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적용해보자. 갑의 잠재적인 능력이 100이고, 을의 잠재적인 능력이 50이라고 가정한다. 갑은 60%만 노력하더라도 을이 100% 노력한 것보다 더 많은 성과를 남긴다. 싱어가 구체적인 예시를 들지 않아서 단정하기 어렵지만 자기 능력의 상한선까지 오른 을에게 이전보다 더 많은 보상을 해줘야 함은 분명하다. 또한 을이 자신의 잠재적인 능력마저 뛰어넘는 120%의 초인적인 노력을 통해 갑과 같은 60의 성과를 낸다면 갑보다 더 칭찬을 건네야 할 것이다.


능력을 노력과 재주의 합이라고 볼 때 노력을 어떻게 측정하느냐 하는 문제가 남는다. 두 요소의 총합인 능력을 측정하는 기준조차 마련하기 힘든 판국에 그 능력을 노력과 재주로 가름해서 그 둘의 비율을 따지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앞서본 예처럼 보상체계가 수립된다면 갑은 자신의 재주를 감추려는 전략을 취할 유혹에 빠진다. 갑은 자신의 잠재적인 능력을 을이라고 꾸미고 60%의 노력만 기울인다면 종전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노력에 따른 유인이 너무 커진다면 이처럼 재주를 감춰서 노력이라고 분칠하고 잠재적인 능력에 도달하려는 노력을 소홀하게 된다. 갑이 60%의 노력보다는 70%의 노력을 기울이도록 이끌어서 사회적인 후생을 증가시키는 것이 좀 더 바람직하다고 할 때 재주 숨김 현상은 줄여야 한다.


결국 우리는 재주 많은 사람이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한 만큼 보상을 받는 것을 인정해줘야 한다. 노력은 그 다음으로 고려할 요소다. 능력 있는 사람의 성과에 미치지 못했지만 제 나름대로 노력한 사람에게 현재 수준보다는 높은 수준의 보상을 주는 것 정도로 만족해야 한다. 다만 노력한 사람에게 줄 보상을 늘릴 재원은 필요에 따른 분배의 몫을 건드리지 말고 유능한 사람에게 주던 보상에서 일부 끌어와야 한다. 이를 통해 보상의 차이가 성과의 차이보다 현격히 차이나지 않도록 조정해나가야 한다. 이러한 조치가 현행 능력주의 보상체계의 상층부에 있는 유능한 사람에게 반드시 불리하지만도 않다. 엄격한 능력주의는 자칫 잘못하면 1등이나 2등에게만 초점을 맞추는데 비해 노력을 통해 상위권에 다다른 사람을 위한 보상에 신경을 쓰게 되면 10등을 하더라도 상당한 보상을 얻을 수 있다. 유능한 사람이라고 해도 매번 1등이나 2등을 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10등까지도 충분한 보상을 하는 시스템의 사회적 보험 역할을 마냥 나쁘게 볼 일은 아닐 것이다.


이처럼 후천적인 노력의 가치를 재조명했더라도 의문점이 생긴다. 노력도 상당 부분 선천적인 재주의 성격을 지니기 때문이다. 노력이라는 재능이 오로지 후천적으로 계발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사가 아닌 우연적인 이유로 노력을 싫어하는 성품을 부여받을 수 있다고 반박할 소지가 다분하다. 그런 속성을 부인하지 않는다. 다만 재주보다는 노력이 우연성이 좀 덜하고, 보통 사람도 습득할 수 있는 재능이라는 점에 주목할 따름이다. 또한 노력의 적극적 재조명으로 말미암아 상위 1%가 아닌 상위 10%까지 보상체계의 접근성이 높아진다면 재주가 모자란 사람과 노력이 부족한 사람도 도전할 동기 부여가 될 것이다. 1등에 도전하기는 힘들어도 10등은 도전해볼 만하다고 용기를 북돋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재주와 대비되는 노력에 대한 사회적 의식의 환기를 기대한다. 불공평을 완화하는 기제로서 노력에 대한 보상에 주목하자.


4.
2009년 개교한 국제중은 1단계 서류심사, 2단계 면접을 거쳐 3배수를 선발한 뒤 추첨으로 학생을 뽑았다. 2010년에 개교하는 자율형 사립고는 내신 성적 50% 내에 들어야 지원이 가능하고, 2배수를 뽑은 뒤에 추첨으로 선발한다. 성적순으로 줄 세우기에만 익숙하던 우리네 입시 풍토에서 추첨제의 도입은 참신하면서도 어색했다. 실제로 대다수 언론이 국제중이나 자율고의 추첨 장면을 보도하면서 추첨의 비교육적인 측면을 꼬집었다. 시험은 노력으로 만회할 수 있지만 운 때문에 원하는 학교에 가지 못한다면 승복할 수 있겠느냐는 항변은 설득력 있다. 그러나 시험이나 경시대회 성적으로 1배수를 뽑는 것을 지양함으로써 경쟁의 압력을 완화하고 불필요한 비용을 절감하려는 목적은 바람직하다. 전남대는 2009년 도전 장학생을 신설해서 학업성적 위주로 장학금을 선발하던 관행에서 벗어나 자기계발 활동 등을 통해 발전가능성이 있는 학생에게 도전 장학금을 줬다. 이 역시 성적순을 극복하는 파격적인 시도다.


공정한 경쟁을 통해 능력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교육이라는 주장에 적잖이 동감한다. 하지만 공정한 경쟁이 단지 1등부터 꼴등까지 서열화한 성적을 나누는 것이라면 마냥 교육적일 것 같지 않다. 노력으로 만회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시험공부가 자본에 따른 경쟁이 되어간다는 비판이 점점 커지고 있다. 자녀가 초등학생일 때부터 특목고 입시를 준비시킬 여유가 있는 부모의 자본도 우연적인 요소이고 비교육적이다. 우리 사회는 이미 소수점을 가지고 다투는 입시경쟁의 폐해가 얼마나 극심한지 겪었다. 더욱이 시험 위주의 선발제도는 투입(input) 위주의 경쟁에만 몰두하는 문제를 낳았다. 한국의 대학들이 우수한 신입생을 유치하는 데만 온 정신을 쏟고 유능한 졸업생을 배출하려는 산출(output) 경쟁을 등한시한다는 지적이 적잖았다. 고교 교육의 다양화라는 미명 아래 고등학교마저 엄격한 능력주의에 매몰된 투입 경쟁을 이제는 줄여야 한다.


외국어고등학교 입시 개편에도 추첨제를 적극적으로 도입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추첨제를 채택한 학교들과 형평에 맞는다. 외고는 어학 영재 양성이라는 특수목적고의 설립 취지를 거의 살리지 못했다. 다만 외고가 고교 평준화 정책의 보완책으로 수월성 교육에 대한 수요를 충족하는데 기여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 수월성은 결국 대학 입학의 수월성으로 귀결됐다. 결국 외고는 우수한 인재를 양성하기보다는 우수한 인재를 선점하는데 더 특화된 모습을 보였다. 대학들도 이에 호응해 내신 반영률을 낮춰 외고생들의 내신 부담을 덜어주는 등 각종 특혜를 제공했다. 2010학년도 서울 경기지역 외고 입시는 구술면접이 폐지되고 영어 듣기평가가 약화되는 대신에 학교 내신 성적의 비중이 강화됐다. 사교육비 경감을 위한 대책이었지만 풍선 효과로 말미암아 내신 합격선이 상승하는 효과를 낳았다. 내신 강화의 부작용은 추첨제의 도입으로 해소할 수 있다. 가령 내신 20~30% 정도를 지원 자격으로 하고, 영어 듣기평가나 구술면접을 합격, 불합격(Pass or Fail)을 정하는 요소로 활용해 일정 배수를 선발한 뒤 추첨을 하는 방식을 도입할 만하다.


추첨제는 정부가 수월성 교육을 목표로 하는 학교를 도입하면서 사교육비 증가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자 고육지책으로 등장했다. 사교육을 조장하지 않겠다는 점을 부각하는데 급급했을 뿐 추첨을 결단한 것에 대한 철학적 고려가 부족했다. 나는 추첨제의 부분적인 도입이 노력에 대한 보상 체계를 수립하는데 부합한다고 생각한다. 추첨제를 1%에 대한 보상에서 10%에 대한 보상으로 늘리는 대표적인 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다고 본다. 경제적 능력에 따라 차별이 빚어져서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헌법상의 권리가 자꾸 침해되는 현상을 막는 방안이 될 수 있다. 노력을 해서 일군 성과에 따른 정당한 차별이라는 대원칙을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추첨제를 적용하는데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야 한다. 인생의 한 시기에 펼쳤던 경쟁의 결과가 그 사람의 평생을 규정하게 되어서는 안 된다. 추첨제는 특정 학교의 우월적 지위를 상당부분 누그러뜨리고 교육을 통한 산출 경쟁에 좀 더 주안점을 두도록 유도한다. 고령화 시대에는 젊은이 한 사람이 여러 명의 어른을 부양해야 한다. 이제 극소수의 승자만이 대접받는 시대가 아니라 누구나 자신의 잠재성과 소질을 계발하도록 노력하는 사회 풍토를 조성해야 한다.


우리는 다양한 분야에서 여러 종류의 경쟁을 설계해야 한다. 물론 경쟁이 늘어난다고 해서 경쟁의 강도가 줄어들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실제로 법학전문대학원의 경우 학점 경쟁도 심하면서 변호사시험 준비도 병행해야 해서 고충이 크다고 한다. 시험이 고급화될수록 교육과 상충관계가 된다. 모든 가치기준이 수험적합성에 맞춰지면서 법과대학의 수업이 파행적으로 운영되었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한 번의 시험이 아닌 다방면의 교육으로 법조인을 양성하기 위해 로스쿨을 도입한 만큼 변호사시험은 의사국가고시를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 의사국가고시의 합격률은 2010년 92.9%, 2009년 93.6%였다. 이렇게 높은 합격률에도 별다른 시비가 없는 것은 의대 교육과정에 대한 신뢰와 더불어 시험으로 평가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라는 합의가 있기 때문이다. 경쟁의 강도에 대한 고민은 시험과 교육의 적절한 배합의 문제로 요약된다. 시험을 위한 노력만큼이나 교육을 향한 노력도 평가해야 한다. - [無棄]


추신 - 다른 영웅들이 적의 공격을 민첩하게 피할 때, 노력맨은 빠른 속도로 벽돌을 쌓아 노력 보호막을 만든다. 이 졸문은 그 우직함에 대한 경의의 표시다. 노력맨이 되는 건 상찬할 일이지만 노력 그 자체가 목적이 되도록 하지는 말자.

Posted by 익구
:

지난 삼월 초에 ㅊ역에서 놀라운 게임기를 발견했다. 집게발이 달린 뽑기 기계에다 물을 채우고 바닷가재를 넣어 두었다. 불결한 공간에서 괴롭힘을 당하며 마지막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던 바닷가재가 너무 측은했다. 배병삼 선생님의 어느 칼럼 제목인 ‘먹을거리에 대한 예의’가 너무 없는 그 비정한 게임기가 미웠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런 종류의 게임기가 한 때 유행처럼 퍼지기도 한 모양이다. 불행 중 다행인지 ㄴ역에서 본 바닷가재 게임기의 수질은 그나마 나아 보였다. 게임기에서 뽑은 바닷가재를 방생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볼 때 어차피 조리될 운명이라면 남은 생애를 굳이 저런 곳에 가둬야할까 싶다. 위생상의 문제 때문에 조리하지 않고 버려지는 경우도 부지기수이리라.


문득 광우병이 초식동물인 소에게 도살한 동물의 살과 뼈의 가루를 섞어 만든 사료를 먹인 일과 관련되었다는 조사가 기억났다. 2008년 광우병 파동 때 국민의 건강을 위해 비교적 안전하다고 여겨진 30개월 미만의 소만 수입해야 한다는 움직임도 소의 생명을 그만큼 단축하자는 뜻이니 따지고 보면 잔인한 말이었다. 물론 그 당시 시국이 여기까지 검토할 여유를 주지 않았지만 이제는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공장식 사육시스템에 대해 반대하는 목소리에도 차분히 귀를 기울여 볼만 하다. 강명관 선생님은 『시비를 던지다』에서 우리는 “미국이란 강자의 횡포를 통탄”하면서도 “우리 역시 동물에 대해 강자의 횡포를 부리고 있지는 않은가”라고 꼬집었는데 훌륭한 문제의식이라고 생각한다.


강 선생님은 이어서 『성호사설』 인사문(人事門) 식육(食肉)편을 인용한다. 성호 선생님은 만물이 사람을 위해 생겨났기 때문에 사람에게 먹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주장에 대한 정자(程子)의 논변을 소개한다. 정자는 사람을 물어뜯는 이[蝨]를 위해 사람이 생겨난 것은 아니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모기가 사람의 피를 먹고 산다고 사람이 모기를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닌 셈이다. 성호 선생님은 “고기를 먹음은 군자로서도 부득이한 일인 만큼, 또한 마땅히 부득이한 마음으로 먹어야 할 뿐이다”라고 역설한다. 성호 선생님이 오늘날의 넘치는 육식을 보신다면 약자의 살을 강자가 뜯어먹는 행위라고 비판했을 듯싶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절제는 미덕이다.
 

피터 싱어 선생님의 『동물해방』, 『죽음의 밥상』을 읽으며 여러모로 괴로웠다. 육식 애호가인 나는 혀의 만족을 끝내 극복하지 못하고 당장 육식을 그만 두는 데까지는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니 육식을 적극적으로 줄이려는 노력을 기울이지도 않은 듯싶다. 동물의 처우 개선을 바라는 나의 바람은 이토록 시시한 것이다. 이런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이 잡글을 쓰고 있는 까닭은 채식주의자에도 여러 무늬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동물성 단백질을 전혀 섭취하지 않는 비건(vegan)만 있는 게 아니라 조류와 어류만 먹는 사람, 어류만 먹는 사람, 우유와 달걀까지 먹는 사람, 우유까지 먹는 사람 등으로 나뉘었다. 마찬가지로 육식을 하는 사람 가운데는 방목된 고기만 먹는 사람, 덩어리로 된 고기는 먹지 않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다.


이런 다양한 층위의 노력을 보고 나도 먹을거리에 대한 예의를 요청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물복지 혹은 동물해방은 여러 빛깔이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 가령 육식을 하되 깐깐한 사람들처럼 낮은 단계의 동물복지를 실천하는 사람들은 동물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인간을 위한 것에 가까워 보인다. 분류하기에 따라 다르겠지만 동물권리론을 주창하는 분들은 이러한 인간 중심적 윤리를 비판하며 동물을 인간의 이익을 위해 어떤 식으로든 이용하지 말 것을 주문한다. 천부인권의 개념을 확장한 천부생명권(天賦生命權)이라고나 할까. 아마 강고한 채식주의자들은 동물권리론에 끄덕일 것이다. 그렇다고 인간의 이익을 위해 동물을 희생하는 현실은 인정하되 불필요한 고통을 줄이자는 동물복지론의 가치가 크게 떨어지지는 않는다.


단순히 인간이 안전하기 위해 동물의 처지를 개선하려는 사고를 뛰어넘어 먹을거리 앞에서 인간의 품격이나 기품을 갈구하는 게 더욱 인간다운 사회로 맞닿는 오솔길이 아닐까 싶다. 결국 동물해방을 인간이 덜 잔인해지는 방편이나 수단으로 삼는 셈인데 일단 이 정도부터 시작하는 것도 유의미한 시도다. 동물보호단체 휴메인소사이어티(HSUS)가 제안했던 고기를 덜 먹고(Reduce), 먹더라도 자연친화적으로 생산된 고기를 먹고(Refine), 가능하면 채식으로 식습관을 바꾸자(Replace)라는 ‘3R’에 이르지 못한다고 크게 자책하지 말자(동물실험의 3R 원칙을 응용한 듯하다). 티비 예능 프로그램에서 자연산(!)을 얼마나 맛있게 요리하는지 보여주려고 애쓰는 장면을 불편하게 바라보거나, 식당에서 고기반찬을 남기지 않도록 하는 일이 너무 시시하다고 여기지 말자.


19세기 노예해방, 20세기 여성해방에 이어 21세기는 동물해방의 시기가 될 것이라는 전망에 적잖이 동감한다. 한-EU FTA 협상에서 동물복지가 주요 의제로 채택되었고 앞으로의 국제무역협상에서도 제기가 될 가능성이 크다. 여기서의 동물복지는 동물이 사육·운송·도축 도중 받는 스트레스를 최소화하려는 노력을 일컫는다. 무역장벽이라는 험담도 들리지만 그런 곳에 관심을 두는 마음자리가 고맙다. 유럽인들이 동물을 사랑하는 현상의 근원이 제국주의 식민통치로 말미암아 쌓인 옹골진 경제적 풍요 덕분이라고 핀잔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이제 어느 정도 먹고 살만한 우리도 선진국의 배부른 소리를 경청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스트레스를 덜 받은 고기가 더 맛있다는 명분(?)도 나쁘게 볼 일은 아니다.


독일은 2002년에 동물에게도 인간과 같은 헌법적 권리를 주는 헌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이탈리아의 로마는 2005년에 관상용 물고기의 시력 보호를 위해 둥근 어항에서 살지 않을 권리를 부여했다. EU는 2009년부터 모든 가축 수송차량에 위성추적장치 부착을 의무화해서 수송 과정에서 가축들이 충분한 휴식을 취했는지 점검한다고 한다. 설령 위선일지라도 인간복지를 넘어 동물복지를 고민하는 그네들의 애틋함이 부럽다. 우리네 동물보호법은 아직 동물도 권리의 한 주체라고 보지는 않지만 앞으로 좀 더 그 방향으로 나아가길 기대한다. 동물실험에 대한 윤리성 및 신뢰성을 높이기 위해 2009년 3월부터 시행한 실험동물에 관한 법률도 반갑다.


개발도상국의 열악한 인권, 보다 가까이는 북한 어린이들의 참상을 틈틈이 목도하면서 감히 동물권을 논하는 것이 온당한지 망설여지기도 한다. 극단적인 동물권리론을 제외하고는 동물을 존중한답시고 인간과 동물을 일대일로 계산하지는 않지만 말이다. 게다가 꼭 인간과 동물의 상충관계만 상정할 이유는 없다. 인간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도 동물에게 이익을 주는 경우를 얼마든지 가정할 수 있다. 또한 인간의 이익과 동물의 이익이 병존할 여지도 얼마든지 존재한다. 『맹자』에는 제(齊)나라 선왕(宣王)이 제사에 쓰이기 위해 끌려가는 소를 가엷게 여겨 양으로 바꾸게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고사는 인간에게 별다른 피해를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동물에게도 딱히 더 이익이 돌아갔다고 보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소 대신 양이 죽음을 당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맹자는 눈앞의 소가 죽는 걸 차마 보기 어려운 마음이 어짊을 베푸는 실마리라고 평가했다.


“소는 보았고 양은 보지 못했다(見牛未見羊)”라는 구절에서 인간의 어쩔 수 없는 한계를 엿본다. 보지 못했던 양을 덜 불쌍히 여기는 건 너무 자연스러워서 당위적 혹은 합리적 가치를 들이대기 무안하다. 자기 둘레에 있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을 사랑한다는 것은 관념에 지나지 않을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이처럼 측은지심을 자기 주변부터 시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다 방점을 찍을 부분은 측은지심을 바지런히 넓히는 데 있다. 궁극적으로는 나와 덜 친밀한 것까지 측은지심을 품으려는 정성 말이다. 측은지심이 확산되는 순서는 매끄럽게 정해지기 힘들지만 동물 같이 힘없는 존재에 대한 윤리적 처우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회가 다른 사회적 약자를 보듬는 데도 열심이지 않을까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다시 말해 측은지심의 확산이 하나의 중심에서 퍼져나가는 동심원 구조라고 볼 필요는 없다. 게임처럼 1단계를 완료해서 2단계로 넘어가는 식은 아닐 듯싶다. 성차별과 인종차별의 문제를 모두 해결하고 동물차별 문제를 논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인간의 문제를 다 풀고 동물을 보듬는 날은 영원히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국내 경제가 충분히 성장하면 비로소 북한을 도울 수 있고, 통일까지 이뤄야 국제 구호에 나설 수 있는 것이 아니듯이, 인류가 충분히 평안해진 다음에 동물을 돌보겠다는 식의 엄격한 선후관계는 피해야 한다. 싱어 선생님이 설파했듯이 사람에게나 동물에게나, 친절함과 동정은 다른 감각 있는 존재의 고통에 무관한 것보다는 확실히 나을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을 모으더라도 동물복지에 드는 비용이 생산비에 반영되어 개별 경제주체의 경제적 부담이 가중된다는 걱정이 든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심리적 반발을 극복한 상태라면 약간의 경제적 부담에 대한 두려움은 극복 가능하다. 얼마 전에 영양 성분이 풍부하다고 광고하는 기능성 달걀이 제값만큼의 품질을 갖추지 못했다는 조사가 나왔다. 제조사들이 기능성 달걀이라고 홍보해야했던 이유는 소비자의 수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아직 동물복지 인증 제품에 대한 인식이 미비한 편이라 관련 제품에 대한 수요도 적다. 로버트 라이시 선생님이 『슈퍼 자본주의』에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자와 투자자’로 사는 것에 만족하지 말고 ‘시민’으로서의 가치관을 세우자고 촉구한 바를 곱씹는다. 우리의 건강을 챙기는 것은 물론이고 착한 소비, 어진 소비를 위해 동물복지에 대한 관심을 환기하기를 희망한다.


‘채식이냐, 육식이냐’라든가 ‘인간이냐, 동물이냐’ 하는 양자택일은 상당부분 허구다. 싱어 선생님은 유인원 같은 고등동물에게 좀 더 나은 대접을 하도록 우선 검토해보자고 제안했지만 우리와 좀 더 친근하게 느껴지는 반려동물에 대한 성찰에서 출발해도 괜찮겠다. 가령 사망한 반려동물을 생활폐기물로 취급해 쓰레기봉투에 넣어 처리하도록 한 현행 규정을 개선해 합법적이면서도 저렴한 장묘 방식을 마련하자는 운동이 좋은 예다. 인간과 동물을 차별하는 종차별주의를 반대하는 논거를 숙고할 때 그 설득력 넘치는 논증에 매료되지만 선뜻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동물에게 따스한 시선을 건넬 때 인간에 대한 존중도 더불어 커진다고 믿는다. 우리는 동물해방론에서 논리적 일관성 이상의 것, 즉 인간에 대한 사랑을 키울 수 있다. - [無棄]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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