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소'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0.10.09 '조세법연구방법론'을 읽고
  2. 2009.10.06 정치적 중립을 위하여 3
  3. 2009.01.12 사과를 요구하고 싶더라도 4

이창희, “조세법연구방법론”, 『서울대학교 법학』 제46권 제2호(통권 제135호), 서울대학교 법학연구소, 2005, pp. 1~35를 읽고


  논문의 저자는 조세법의 연구방법론을 법해석론과 입법론으로 구분한다. 비교적 간명한 구분으로 이해하기 쉽다. 현행 조세법의 해석학에 매몰되지 말고 입법론까지 탐구해야 한다는 주장도 수긍이 간다. 조세법 분야 역시 법제도 자체나 그 시행상의 효과와 문제점의 분석, 새로운 개선책 제시 등과 같은 입법적 문제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 조세를 정책수단으로서 활용하는 추세와 맞물려 입법과정에서부터 법률가가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촉구함은 적절한 제안이라 생각한다.


세법의 해석론

  저자는 세법이 형법의 해석에서 허용되는 정도의 확대해석을 금한다고 풀이할 길은 없다고 주장한다(14면). 세법에서 확대해석이나 유추적용을 허용할 수 없다는 논거로 판례와 학설이 들고 있는 조세법률주의를 여러 각도에서 비판한다. 세법에서는 오로지 엄격해석만이 인정된다는 식의 조세법률주의란 독일이나 미국에서는 없다는 논거를 든다. 세법에서 엄격해석만이 가능하다는 명제를 부인하는 저자의 논변에 비교적 수긍이 가지만 그 논거를 비교법적 고찰 외에도 다양하게 들 수 있겠다. 가령 한국의 경제발전 정도나 오늘날 행정의 사회국가적 요청 등에 따라 엄격해석만으로는 세법의 실효성을 확보할 수 없다는 등의 논거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정당한 해석의 범위 안에서는 납세자에게 불리한 확대해석도 가능하다고 본다(16면). 확대해석 자체가 아니라 정당한 해석의 범위 안에 있는가 만이 문제될 뿐이라고 말한다. 세법은 침익적 행정이기 때문에 법적 안정성의 요청이 강하다. 따라서 목적론적 해석이 허용되더라도 법문언의 내재적 의미 안에서만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또한 세법상 허용되는 해석에 의해서도 의미를 명확하게 파악할 수 없는 경우 납세자에게 불리하게 해석하기보다는 ‘의심스러운 경우에는 납세자의 이익으로’ 해석하는 것이 적절하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입법과정에부터 납세자의 기본권이 보장되는 방향으로 법제도를 설계해야 한다. 입법부의 ‘사전적’ 해석은 사법부의 ‘사후적’ 해석보다 갈등비용을 낮출 여지가 크다.


세법의 사법심사

  저자는 불확정한 개념으로 보이더라도 그 의미내용을 특정한 판결이 쌓여 있으면 이는 이미 불확정개념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불명확한 법률의 내용을 장차 판결로 구체화해나갈 수 있는가는 헌법재판소의 권한 범위 밖(27면)이라고 보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이에 따르면 대법원을 비롯한 일반법원의 판례는 불확정개념을 구체화하는 기능을 수행하지만 헌재는 그렇지 못하다는 뜻이다. 저자는 어떤 세법이 효율적인가에 관한 입법부나 행정부의 정책적 판단은 사법심사의 대상으로서 사실판단이라고 본다. 사실판단의 문제는 법관의 고유영역에 속한다고 보면서도 헌재의 역할에 부정적인 것은 헌재 결정의 파급효가 가장 심대한데 비해 전문성이 부족하기 때문으로 보인다(다소 의아한 헌재 결정이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조세법의 위임사항이 행정입법에 정확히 반영되지 아니한 경우에는 헌법 위반의 문제가 발생한 것이며, 헌재 역시 입법재량에 대한 통제를 할 권한을 부여받았다. 2010년 개정된 헌법재판소법에 따르면 헌법재판에 대한 중장기적이고 집중적인 연구 수행과 헌법연구관 및 사무처 공무원 등의 교육을 위하여 헌재 산하에 헌법재판연구원을 설립하는 등 헌재의 전문성을 제고하려는 노력도 있는 만큼 사실판단의 문제에서 헌재를 배제하려는 시도는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


  효율성의 심사는 법관의 권한에 속한다고 보는 것은 법관이 문제를 풀어낼 수 있다는 전제 하에 나온 결론이다. 저자는 법관 스스로의 사실판단에 확신이 없는 경우라면 법원은 당연히 효율에 관한 사법적 판단을 자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31면). 전문성이 없는 법관이 입법부나 행정부의 판단을 함부로 재단해서는 안 된다는 견해는 결국 조세문제에 대한 판단에서 전문성이 중요한 척도임을 의미한다. 조세분야에서 전문성이 중요하다는 점은 동감한다. 하지만 전문성이 있는 법관에게 강한 사법재량을 부여하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 법철학자 허버트 하트는 법관이 사법재량을 행사를 통해 규칙 창설적, 입법적 행위에 종사할 수 있다고 주장한 바 있는데 저자의 주장은 이와 유사하다. 그러나 법관은 선출된 기관이 아니며, 조세입법 역시 여느 입법처럼 복잡한 이해관계 속에서 타협하고 조정한 산물로서 존중해야 한다. 전문성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법관이 재량을 행사해 법률을 수정하거나 창설해서는 안 된다.


세법의 입법론

  저자는 과세요건법정주의와 과세요건명확주의가 갈등하는 관계에 놓여 있음을 지적한다(23면). 헌법재판소의 위헌결정으로 말미암아 국회와 행정부는 가능한 한 모든 내용을 구체적으로 법률에 담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과세요건법정주의를 따르다 보니 과세요건이 점점 더 불명확해지고 말았다는 비판은 음미할 만하다. 물론 법문의 분량이 많더라도 체계적이고 구체적이어서 의미가 분명한 알기 쉬운 세법이라면 분량이 좀 늘어난다고 해서 무조건 문제는 아니다. 향후에는 법률만으로 과세요건을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고, 위임입법은 그에 대한 실무상 지침에 주안점을 두는 식으로 개편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우리 헌법은 입법권은 국회에 속한다고 규정하고 있으므로 조세입법 역시 국회의 권한이다. 하지만 세법의 전문적이고 기술적인 특성으로 인해 행정부가 조세입법을 주도하는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경제현상에 대응하는 효율적이고 공평한 과세를 하기 위해서는 세부적인 사항은 입법부가 제정하는 법률보다 탄력성이 있는 행정입법에 위임하는 것이 불가피하다. 이러한 행정입법에 대한 통제는 이미 많은 논의가 이루어졌다. 앞으로는 조세입법에서 법률과 시행령의 관계에 대한 검토 못지않게 정부입법이 의원입법을 앞서는 현상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해야 한다. 17대 국회에서 의원입법이 정부입법을 처음으로 앞지르는 등 입법부의 활동이 양적으로 증가했음은 분명하다. 이제는 양뿐만 아니라 세법 같은 전문성이 요구되는 분야에서도 입법부의 활동성이 제고되어야 한다.


  행정국가화 경향에 따라 행정부의 조세전문성이 강화되는 추세이며, 저자의 논리에 따르면 행정부가 조세문제에 있어서 사실판단을 내릴 권한이 가장 막강해진다. 이는 삼권분립의 원칙을 위협할 우려가 있으므로 입법부와 사법부가 조세전문성을 확충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사법부에 의한 통제는 사후적 구제절차라는 측면에서 입법부의 적극적인 통제가 요청된다. 즉 납세자의 기본권을 사전적으로 구제하기 위해 조세입법 과정에서 절차적 통제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 산재한 입법지원기구를 통합하여 조직의 능률성을 높이는 방안을 긍정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직능대표로서의 성격이 강한 비례대표 선출에서도 조세전문가에 대한 배려가 있어야 할 것이다. - [無棄]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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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중립을 위하여

2009. 10. 6. 08:52 |

2009년 9월 22일 전국공무원노조, 민주공무원노조, 법원공무원노조가 하나로 통합해 민주노총에 가입하기로 결정했다. 현행법상 별다른 문제가 없는 정상적인 노조활동을 두고 정부는 온갖 험담을 늘어놓았다. 한나라당과 정책연합을 하고 있는 한국노총에도 이미 공무원 노조가 포함되어 있다는 엄연한 사실을 망각한 처사였다. 한국노총에 견주어 좀 더 대정부 투쟁을 많이 하는 민주노총에 대한 거부감이 아니고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10월 5일 국회 행정안전위의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대한 국정감사에서는 선관위 노조의 상급단체인 전국민주공무원노조가 이번 결정으로 인해 민주노총의 일원이 되기로 한 것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다.


고도의 정치적 중립성을 유지해야 할 선관위 직원이 민주노총 소속원이 되면 선거관리의 공정성이 훼손될 것이라는 이유다. 신지호 의원은 “법관, 검사, 경찰 등 특정직 공무원들처럼 선관위 공무원의 노조 가입을 금지하도록 국가공무원법 개정을 추진하겠다”라고 말하기도 했지만 이런 식의 규율 위주의 사고는 조심스럽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정부가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 의무를 구체화하는 법률 개정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현재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을 국가공무원법과 공무원노조법에서 규정하고 있으나 범위와 내용이 명확하지 않다”라는 충정은 이해할 만하다. 정부가 구체적인 기준을 마련하려는 움직임 자체는 반갑지만, 정부의 작업이 공무원의 정치적 자유를 옥죄는 방향으로만 나아갈 공산이 커서 걱정스럽다.


현행 공직선거법 제9조는 “공무원 기타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하는 자(기관·단체를 포함한다)는 선거에 대한 부당한 영향력의 행사 기타 선거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하여서는 아니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국가공무원법 제65조와 지방공무원법 제57조는 ‘정치운동의 금지’ 조항을 두어 공무원이 정당이나 정치단체의 결성에 관여하거나 가입할 수 없으며, 선거에서 특정 정당 또는 특정인을 지지하거나 반대하기 위한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고 명시했다. 공무원의 노동조합 설립 및 운영 등에 관한 법률 제4조와 교원의 노동조합 설립 및 운영 등에 관한 법률 제3조는 ‘정치활동의 금지’을 두었다. 공무원과 교사에게 너무 초인적인 중립의무를 지운다는 느낌을 준다.


‘정치운동’과 ‘정치활동’이 다른 법개념이라고 할 때, 정치활동이 좀 더 범위가 넓다면 어디까지 선을 그을지에 대한 합의를 모색할 시점이다. 통합공무원노조가 자신들의 후생복지와 무관한 정책에 대한 비판을 할 때 정치활동인지 아닌지 판단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정치적인 행위가 아닌 것이 없기 때문에 정치활동을 넓게 보면 볼수록 공무원들의 정치적 자유는 제약된다. 행정국가화 경향이 나타남에 따라 공무원의 자율적 책임이 두드러지는 추세에 따라 정치적 중립성 못지않게 시민의 요구에 대한 응답성이 중시되어 행정과 정치는 맞닿을 가능성이 높다. 타율적 통제로 억눌러 ‘영혼이 없는 공무원’을 양산하기보다 공무원의 영혼을 키우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2008년 1월 17일 헌법재판소는 고 노무현 대통령이 청구한 헌법소원을 기각했다. 헌재는 대통령의 선거중립의무를 규정한 공직선거법 제9조 제1항은 명확성의 원칙과 과잉금지의 원칙에 위배되지 않아 합헌이라 결정했다. 대통령의 선거중립의무를 정치활동의 자유보다 우위에 둔 셈이다. 재판부는 “선거활동에 관해 대통령의 정치활동의 자유와 선거중립의무가 충돌하는 경우에는 선거중립의무가 우선돼야 한다”라고 천명하며 선거의 공정성이 중요함을 강조했다. 지난 2004년에도 탄핵 심판에서도 공무원의 중립의무 위반 여부가 쟁점이었음을 떠올려 보면 정치적 중립의무에 대해 다시금 환기한 사건이다.


이 공방이 벌어지기 전인 2007년 3월 노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국무위원급 행정 지도자는 정치와 무관할 수 없다”라고 주장했다. 정치와 행정의 관계에 대해서는 많은 논쟁거리가 존재하겠으나 장관 같은 고도의 정책결정자가 현실 정치에 어느 정도 관련이 있다는 점은 또렷하다. 헌재의 결정도 이러한 속성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보다 근본적 문제는 선출직 공무원이 누리는 정치적 자유에 견주어 일반직 공무원들이 누리는 자유의 크기가 너무 작다는 데 있다. 당시 청와대가 정치에 무조건(!) 무관해야 하는 하위직 공무원들의 처지를 먼저 헤아렸으면 좋았을 게다. 이것이 헌재 결정 직후 청와대가 발표한 “성숙한 민주주의로 가기 위한 정치적 자유 보장과 우리 사회의 후진적 정치체계에 대한 논의는 계속돼야 한다”라는 의견에 좀 더 부합한다.


일전에 민주노동당이 교사와 공무원을 대상으로 한 당우(黨友) 제도의 적법성 여부에 논란이 된 적이 있다. 민노당은 교사와 공무원의 정치활동이 원천봉쇄된 것에 대한 문제의식을 줄기차게 내놓았다. 우리 법체계는 공무원의 정치활동과 관련해서 자유의사에 따른 투표만 겨우 보장하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규제가 심하다. 일본이 우리와 비슷한 정도로 제한하고 있다고 하지만 공직선거법 제60조에 규정된 선거운동을 할 수 없는 자를 살펴보면 정치적 행위를 금지하는 직역은 우리가 더 광범위하다. 일본의 법제에 영향을 준 미국의 해치법(Hatch Act)이 1993년 대폭 개정되어 정치적 중립의무보다 정치적 기본권을 보장하는 쪽으로 나아간 점을 곱씹어 볼 때 우리나라는 선진 민주국가들 가운데 광범위하게 정치적 자유를 억압하는 편이다.


서구에는 한국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정치활동을 열어둔 나라들이 많지만 특히 영국에 눈길이 간다. 영국은 공무원을 세 개의 계층으로 나눠 정치적 자유를 서로 다르게 부여한다. 하위직에게는 정치활동을 완전히 보장하지만, 중간직은 입후보를 제외한 기타의 정치활동은 허가를 얻어 할 수 있게 했다. 정책 결정과 가장 관련이 깊은 고위직은 정당 가입은 인정하나 그 외 활동은 비교적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 이러한 영국식 발상을 우리도 빌려 쓰면 어떨까 싶다. 정치적 기본권이 애틋하기는 지위 높낮이를 떠나 매한가지겠으나 그것의 확대는 하위직 공무원부터 서둘러야 한다. 정치적 자유는 대학 교수와 국무위원들만 향유하기에는 너무 귀중하다. 고위직 공무원은 정책 결정 과정에서 여당과의 조율에 참여하는 등 정치활동을 수행하는 측면이 적잖다. 정치적 중립에 대한 감시가 요구된다면 그 우선순위는 정책결정권을 가진 고위직 공무원이어야 한다.


탄핵 정국과 맞물린 2004년 총선에서는 공무원의 정치 참여에 대한 논쟁이 뜨거웠다. 획일적인 정치활동 금지가 정치적 중립성 확보를 위한 필수적인 요건인지에 대한 의문을 품어봄 직하다. 2004년 3월 25일 헌재는 초중고 교사의 정당 가입이나 선거운동을 금지한 정당법과 선거법이 합헌이라고 결정했다. 교원의 정치 참여가 학습권이라는 또 다른 기본권을 침해할 수 있다는 헌재의 고뇌에 동감한다. 하지만 수업권 혹은 교육권을 헌법적 권리라고 인정하더라도 참정권을 일방적으로 제한할 수는 없다고 본다. 헌재는 입법론적인 재검토를 주문했지만 해석론적으로 위헌이라 보는 견해도 적잖다. “공무원의 신분과 정치적 중립성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보장된다”라고 한 대한민국 헌법 제7조 제2항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를 두고 다툰다.


헌재는 헌법 제7조 제2항을 권리가 아닌 의무로 해석했다. 그런데 다른 헌법조문들을 살펴보면 제6조 제2항(외국인의 지위), 제8조 제1항(복수정당제 허용)에서 “보장된다”라고 말할 때 여기서 의무가 도출되지 않는다. 반면에 제38조(납세의 의무)와 제39조 제1항(국방의 의무)에서는 “의무를 진다”라고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의무를 보장한다는 건 대다수 한국어 사용자들의 상식에 어긋난다. 권리를 보장하고 보호하는 것이며, 의무는 부과하고 부담하는 것으로 쓰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제7조 제2항은 권력이 공무원에게 정치적 간섭을 행사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공무원이 특정 계층이나 정파의 이익에 복무하지 않고 국민 전체를 위해 봉사할 수 있도록 보호하기 위한 방어막으로서의 성격이 짙다고 생각한다.


정치적 중립 조항은 제정헌법에는 없었으나 1960년 3·15 부정선거를 겪은 후에 신설됐다. 공무원들이 선거에 동원되어 집권 여당의 이익에 복무하는 폐단을 막으려는 의도였다. 군사정권에서도 관권선거가 이어졌기에 87년 헌법 개정까지 그대로 뒀다. 오늘날 공무원의 정치적 개입보다는 정치적 권리의 행사가 좀 더 화두가 되고 있는 추세다. 헌법과 법률을 해석할 때 하나의 정답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잇따른 헌재 판결을 승복하면서도 공론화 하려는 시도는 별개의 문제다. 헌법 제7조 제2항에 권리와 의무가 혼합되었다고 하더라도 권리에 쌀쌀맞았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의무를 얹을 때는 재빠르면서 권리를 건넬 때는 머뭇거린다면 법치국가라는 위상이 초라하다. 제7조 제2항을 공무원에게 영혼이 있더라도 불이익을 당하지 않는다는 논거로 활용하면 어떨까 싶다.


불안정한 고용 사정과 맞물려 취업준비생들에게 공무원이 선망의 대상이 된지 오래다. 부러운 존재인 공무원의 정치적 기본권까지 두둔하기란 정말 어렵다. 업무상 정치적 중립성을 지키면서 개인적으로는 정치적 행위를 하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한 의문도 여전하다. 공무원의 직무 특성상 정치행위와 업무행위를 구분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의무에 제약을 받는 만큼 신분과 정년을 보장받는다는 항변도 수긍할 만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공무원의 정치활동 자체를 금지하는데 반대해야 한다. 우리는 공무원에게 직무와 관련한 공정성과 능률성을 요청할 수는 있어도 거의 모든 정치행위를 금지해 그네들의 헌법상 참정권과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수는 없다. 국민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집단의 자유를 일괄적으로 제한하는 단순함이 마땅한지를 놓고 찬찬한 성찰이 필요하다. 더군다나 헌법 제37조 제2항의 기본권 제한에 대한 원칙에는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할 수 없다고 하지 않는가.


최근에 신설된 국가공무원법 제59조의2 제1항은 “공무원은 종교에 따른 차별 없이 직무를 수행하여야 한다”라며 공무원에게 종교중립의 의무를 부여했다. 이 조항은 공무원의 종교활동에 대한 어떠한 한계를 두지 않는다. 종교의 자유와 종교의 중립이 함께 추구될 수 있는 가치임을 잘 나타낸다. 정치적 자유와 정치적 중립 역시 크게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 공무원이 정치적 성향에 따른 차별 없이 직무를 수행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는 큰 이견이 없겠지만 한국이 선진 민주국가 중에서 가장 엄격히 정치적 자유를 제약할 근거가 튼실한지를 캐물어 보자. 지금처럼 정치활동을 전면적으로 불허하기보다는 공무원의 지위를 이용하거나 직무수행에 지장을 주는 정치활동만 규제하는 것이 옳다.


다시 말해 공무원의 직무수행과 관련이 없는 정치활동을 일부 허용해야 한다. 먼저 정치적 견해를 표명할 자유는 폭넓게 보장하도록 애써야 한다. 단순한 개인 수준과 노조 같은 단체 수준의 차이를 둘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이 자유의 핵심은 정부 여당의 정책에 찬성할 자유가 아니라 반대할 자유를 보장하는데 있다. 교사들의 시국선언을 단죄하는데 급급한 모습이 볼썽사납다. 그 다음에는 하위직 공무원을 필두로 가장 낮은 단계의 정치운동이라고 할 만한 정당 가입이나 정치자금 기부를 허용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단체 수준의 집단적 행동이 부담스럽다면 개개인이 자신의 신념에 따라 하는 것부터라도 인정하자. 이는 내 개인적인 주장일 뿐이지만 적어도 무조건 안 된다는 접근보다는 헌법정신을 구현하는 길에서 가깝다고 믿는다. - [無棄]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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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세밑에 내가 몸담고 있는 대학교 반 클럽에서 선배 갑이 쓴 댓글을 삭제해주기를 청하는 후배 을의 글이 익명게시판에 올라왔다. 갑이 댓글을 통해 어느 종교에서 추앙하는 위인을 폄훼한 것이 문제의 발단이다. 1000이 넘는 조회수와 100개 가까운 댓글이 오고 간 것을 보고 뭔가 방책을 마련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을은 나를 비롯한 클럽 운영진이 문제의 댓글을 지워주기를 바란 모양이다. 하는 일 없는 부클럽장이었던 내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나는 댓글을 삭제하는 데 머뭇거린 까닭은 고학번에 대한 예우라고 밝혔다.


이와 비슷한 사안의 당사자가 누가 되었든 간에 그 분이 고학번이라면 편집권을 발동하는데 신중하게 응했을 것이다. 저학번에게는 편집권을 함부로 발동한다는 뜻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좀 더 망설였을 것이라는 뜻이다. 굳이 이런 식의 번거로운 절차를 밟으려고 한 것은 선배님들에 대한 흠모이자 머잖아 이 자리에 오를 후배님들을 위한 배려라고 여겼다. 적잖은 후배들은 나의 이런 발언을 “선배의 글이기 때문에 삭제하지 않는다”라고 받아들인 모양이다. 나는 선배가 아니라 고학번이라고 명확히 범위를 한정했다. 고학번을 개념 정의하기 나름이지만 나는 내가 속한 클럽에 종종 들러주는 고학번을 가파른 잣대로 보면 열 명이나 스무 명 남짓으로 보고 있었고 클럽 구성원들이 대체로 동감할 수치이다.


이 분들에게 우리 클럽의 손윗사람으로서 예우를 갖추는 게 특혜라고 치더라도, 그 특혜가 과도하다고 보기 힘들다. 그 특혜라는 것도 스스로 자기의 실수를 돌아볼 수 있는 여유를 주는 정도인데 말이다. 그 여유라고 해봤자 내가 논쟁이 진행되는 과정을 지켜보며 밤새 기다린 몇 시간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누군가 잘못을 저질렀다고 손가락질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하지만 그 사람에게 자신의 행동을 성찰하고 조회할 시간을 부여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몇 시간 정도 벌어진 댓글 논쟁을 보면서 갑이 교정할 의사가 없는 것을 알고 문제의 댓글을 삭제하려던 찰나에 댓글이 수정되었다. 갑이 자신의 견해를 철회할 의사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표현의 과격함을 자구 수정한 게 큰 의미가 있을까 싶기도 했지만 일단 아쉬운 대로 매듭을 지었다.


고학번이라고 할 만한 분들의 글에 대한 수정이나 삭제에 신중해야 한다는 개인적인 소견에 대한 지적이 적잖았다. 하지만 내가 “학번 불문하고 공평무사하게 게시판을 관리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면 솔직하지 못한 처사다. 더군다나 나는 고학번이라고 불리는 시점에서도 우리 클럽을 종종 드나들어주는 분들이 드물지만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 고마운 일이고 그에 대한 예우를 갖추는 게 클럽 운영진으로서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었든, 자기 필요에 의해서 들렀든 간에 그래도 잊지 않고 반 클럽을 찾아준 일 자체가 너무 반가워서 다른 관점에서 생각하지 못했음을 인정한다. 선후배 사이의 원활한 소통을 방해할지 모른다는 비판을 겸허하게 받아들인다.


그럼에도 어떤 분쟁이 발생했을 때 먼저 스스로 자기 교정을 할 여유를 부여하는 것 정도가 과도한 특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누구보다 원활한 소통을 꿈꾸는 내가 기다린 며칠, 몇 시간이 어떤 후배님에게는 참을 수 없는 시간이었는지 모르겠으나 나 또한 무척 고통스럽고 가슴 시린 순간이었음을 헤아려주시면 고맙겠다. ‘예우’, ‘특혜’라는 표현을 부러 쓴 이유는 역설적으로 나를 비롯한 고학번 선배들의 자기 책임과 자기 반성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선배된 자의 한마디가 후배들에게 어떻게 전달될 것인가’에 대한 고심을 먼저 품어주시길 바라는 마음의 다른 표현이었다고 할까.


을의 주장에 동조하는 몇몇 후배들은 갑에게 사과를 요구하기도 했다. 나는 선배를 향해 사과를 요구하는 것을 좀 자제해줄 것을 호소했다. 이유가 어찌 됐든 선배가 정색하고 후배에게 사과하는 모습은 너무 야박한 상황이 아니겠냐며 다독였다. 굳이 후배가 나서지 않아도 동기들이나 선배들도 보는 눈이 있는 만큼 서운함이 크더라도 살짝 기다려주는 건 어떻겠냐며 조심스레 말했다. 아무리 마땅하다고 여겨지는 일이라도 막상 사과까지 받아내고 나면 후배들이 그 모짊에 대한 미움이 생길까 염려스러웠다.


이러한 나의 진의와는 관계없이 사과 자제 요청에 대한 비판도 일었다. 내가 단순히 선배는 후배에게 사과를 해서는 안 된다고 단정짓지 않았음을 누구나 다 알아주실 것이라 믿는다. 나는 다만 정식적인, 공식적인 사과라는 절차는 최후의 수단으로 아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소견을 밝혔다. 사사로운 친목단체에서는 꽤 각박하게 느껴지는 절차이기 때문이다. 내 욕심이었는지 모르겠으나 상대방이 사과를 받으려고 하기보다는 당사자가 스스로 돌아보는 과정을 밟고 싶었다. 나는 지금도 몇몇 후배들이 선배를 향해 사과를 운운할 때 좀 머뭇거려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자기 실수를 인정하는 건 선후배를 떠나 누구에게나 힘든 일인만큼 조금만 넉넉하게 기다려줄 수 있으면 어떨까?


어느 선배님께서는 “손윗사람한텐 사과도 못 받는 고대의 경직성이 싫다”라는 댓글을 달아주셨다. 선배님께서는 “선배가 후배한테 이러쿵저러쿵 하는 경우는 조언인데 후배가 선배한테 이러쿵저러쿵 하는 건 버릇없단 이야길 듣”는 것이 온당치 않다고 말씀하셨다. 전적으로 동감하는 바이고 그런 분위기를 없애기 위해 앞으로도 노력할 것이다. 그렇지만 ‘비판’과 ‘사과 요구’는 동일선상에 놓고 재기는 힘들 듯싶다. 다시 말해 비판을 수용하는 것과 사과 요구를 실행하는 건 다소 차원이 다른 문제다. 비판할 때는 한 번 생각하고 제기해도 되지만, 사과를 요구할 때는 세 번 정도는 생각해야 한다.


『장자』에 “저자에서 남의 발을 밟으면 미안하다고 사죄하지만, 동생이 형의 발을 밟으면 따뜻한 눈길로 보아주면 되고, 자식이 어버이의 발을 밟았을 때는 아무 말이 없어도 된다”라는 구절이 있다. 유가의 예는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숭상하지만, 진정한 예는 유별나게 따지고 가리는 것이 아니라는 도가의 입장이 녹아 들어가 있다. 사과마저도 필요 없는 관계가 이상적이라고 설파하지만 무조건 꿈결같은 상황만은 아닐 게다. 더욱이 사과 요구를 표현하는 것도 서로의 관계에 대한 신뢰와 친근함을 나타내는 수단으로 작동할 여지도 있다. 또한 선배가 나의 비판이나 사과 요구를 받아들일 만한 아량이 품었다고 믿는 것이 그 사람에 대한 예우일 수 있다.


그러나 친교 모임에서 정식적인, 공식적인 사과란 절차는 최후의 수단으로 아껴 쓸 때 효용이 커진다고 본다. 사과는 자발적으로 해야 빛나고, 사과 요구는 공인(公人)에게 먼저 건네야 한다. 따지고 보니 이렇게 ‘사과 요구’를 두고 말이 길어진 연유는 내가 생각하는 ‘사과’에 대한 개념 정의가 다소 엄격했기 때문이다. 1991년 4월 헌법재판소는 사죄광고 제도가 타인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믿지 않는 자에게 본심과 다르게 깊이 사과하도록 강요하는 것이므로 인간 양심의 왜곡과 굴절이자 이중인격 형성의 강요라고 정의하며 위헌 결정을 내렸다. 반성을 강제할 수 없다는 결정을 접하며 많은 영감을 얻었다. 헌재의 결정문 일부를 발췌해봤다(89헌마160).


그러므로 양심의 자유에는 널리 사물의 시시비비나 선악과 같은 윤리적 판단에 국가가 개입해서는 안되는 내심적 자유는 물론, 이와 같은 윤리적 판단을 국가권력에 의하여 외부에 표명하도록 강제받지 않는 자유 즉 윤리적 판단사항에 관한 침묵의 자유까지 포괄한다고 할 것이다. 이와 같이 해석하는 것이 다른 나라의 헌법과 달리 양심의 자유를 신앙의 자유와도 구별하고 사상의 자유에 포함시키지 않은 채 별개의 조항으로 독립시킨 우리헌법의 취지에 부합할 것이며, 이는 개인의 내심의 자유, 가치판단에는 간섭하지 않겠다는 원리의 명확한 확인인 동시에 민주주의의 정신적 기초가 되고 인간의 내심의 영역에 국가권력의 불가침으로 인류의 진보와 발전에 불가결한 것이 되어 왔던 정신활동의 자유를 보다 완전히 보장하려는 취의라고 할 것이다.


더 나아가 살피건대 원래 깊이 “사과한다”는 행위는 윤리적인 판단·감정 내지 의사의 발로인 것이므로 본질적으로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자발적인 것이라야 할 것이며 그때 비로소 사회적 미덕이 될 것이고, 이는 결코 외부로부터 강제하기에 적합치 않은 것으로 이의 강제는 사회적으로는 사죄자 본인에 대하여 굴욕이 되는 것에 틀림없다. 사과의 정도에 따라 굴욕감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적어도 “사과”의 문구가 포함되는 한 그것이 마음에 없는 것일 때에는 당사자의 자존심에 큰 상처요 치욕임에 다름없으며, “사과문”, “진사문”, “해명서” 등 어떠한 명목의 것이든 관계없이 그러하다.


헌재의 결정으로 비추어 볼 때 유독 방송사에만 강요하고 있는 ‘시청자에 대한 사과’ 조치는 위헌일 가능성이 크다는 견해도 있고, 헌재의 결정이 언론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고찰이 부족해 약자인 피해자의 권리 구제를 소홀히 만든다는 비판도 들린다. 여하간 헌법 제19조는 “모든 국민은 양심의 자유를 가진다”라고 하여 양심의 자유를 기본권의 하나로 보장하고 있다. 헌법이 보호하는 양심의 자유는 선하고 올바른 판단만을 보호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덜 선하고 덜 올바른 내심마저 보장하는 것이 양심의 자유의 고갱이다. 양심에 거슬려 사과를 못하겠다는 사람에게 양심을 탑재하라며 구박한다면 헌법정신과 어긋나는 행동이다.


2004년 탄핵 정국 당시 “잘못이 있어 사과하라면 사과할 수 있지만 잘못이 뭔지 모르겠는데 시끄러우니까 사과하고 넘어가자는 건 받아들이기 어렵다”라는 요지의 발언을 했던 노무현 대통령은 결국 탄핵소추까지 당했다. 앞서 공인을 향해 먼저 사과를 요구하자고 했던 것은 상대적이고 제한적인 맥락에서 한 말이다. 명예나 체면을 중시하는 한국의 문화나 정서를 모두 부인할 수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사과 권하는 사회를 단숨에 고치기 힘들다면 사적 영역에서 사과를 받아내고픈 열망을 눅이는 대신에 공적 영역으로 눈을 돌려봄직하다. 그렇다고 공인들의 양심이 덜 소중하다는 건 아니다. 공인인 만큼 자기 반성을 더 바지런해야 하고, 자기 반성을 하다 보면 사과 또한 먼저 하게 되는 경우가 많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을 따름이다(과연?).


정리하자. 미안할 때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건 아름다운 덕목이다. 강제적인 사죄광고는 위헌 결정을 받았지만 자발적인 의사에 따른 사죄광고는 지금도 얼마든지 많이 이뤄진다. 나는 후배가 선배를 향해 사과를 요구하는 것도, 동기가 동기에게 사과를 요구하는 것도, 선배가 후배에게 사과를 요구하는 것도 신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번 사건의 시발점이 된 갑의 불관용이 너무 안타까웠지만 불관용에 대한 불관용은 수정 및 삭제 조치 등으로 충분하다고 본다. 갑의 사과 혹은 유감 표명은 갑의 자유의사에 맡기는 게 기본원칙이라고 믿는다. 끝끝내 사과를 거부하는 자세를 칭찬하는 건 결코 아니지만 말이다. - [無棄]


<참고문헌>
김욱, 『그 순간 대한민국이 바뀌었다』, 개마고원, 2005, pp. 39~53
박성철, 『헌법 줄게 새법 다오』, 이매진, 2007, pp. 26~35
윤진수, “謝罪廣告制度와 民法 제764조의 違憲 여부-憲法裁判所 1991.4.1.宣告, 89헌마 160決定(判例月報 250호 64면 이하)-”, 『사법행정』 제32권 제11호, 한국사법행정학회, 1991, pp. 73~89
윤철홍, “명예훼손과 원상회복: 사죄광고를 중심으로”, 『비교사법』 제10권 3호, 한국비교사법학회, 2003, pp. 25~55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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