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학전문대학원 졸업

일기 2013. 3. 13. 05:37 |

2013년 2월 22일, 서울시립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을 졸업했다.

 

 

지난 3년 동안 이런저런 번개 모임에 함께 해준 저 하늘의 별처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분들의 아름다운 마음이 참 애틋했다. 앞으로 세월의 무게를 맞들며 소중한 인연을 이어가길 희망한다. 늘 투정부렸지만 실상 내 깜냥에 견주어 많은 것을 누리고 있었다. 준 것보다 받은 것이 많았고, 일러준 것보다 본받은 것이 많았다.

 

 

이 공간, 이 시간을 공유하는 분들과의 각별한 인연은 내가 누리기에 넘치는 호사였다. 이 기쁜 순간이 더 빛나도록 아름다운 마무리를 하고 싶었지만, 이미 충분히 복을 누렸다고 생각한다. 못 다 갚은 마음의 빚은 천천히 갚아나가겠다.

 

 

우리 학교의 주인으로 살고 싶었고, 좀 더 나은 학교를 후배님들에게 전하고 싶었다. 제3대-제4대 학생회장과 3학년 자치회 대표를 역임하며, 법전원 3년 중에 2년 반을 직선 대표로서 활동할 수 있어 참으로 영광스러웠다. ‘士爲知己者死’라는 봉건 시대의 문구 하나를 가슴 한 구석에 새기며 지냈던 순간들을 추억으로 간직한다.

 

 

입학 당시에 재학생 카페에다 인사를 남기면서 언급했던 고사가 다시 떠오른다. 『삼국사기』 온달열전에서 평강공주가 온달을 찾아갔을 때 온달의 어머니는 아들이 비루하고, 집이 가난해서 귀인이 살기에는 적당하지 않다고 손사래를 친다. 온달은 평강공주의 짝이 될 수 없다는 현실적인 이유를 대며 완곡히 만류한 셈이다.

 

 

그 때 평강공주는 “옛 사람의 말에 ‘한 말의 곡식이라도 방아 찧을 수 있으며, 한 자의 베라도 옷을 지을 수 있다’라고 했으니 진실로 마음만 같다면 어찌 반드시 부귀한 다음에라야 함께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답한다. 이로써 한국 역사서에 기록된 유일한 왕족-평민 커플이 탄생한다.

 

 

‘한 말의 곡식’이나 ‘한 자의 베’에 비유할 만한 재주조차 갖추지 못했던 나를 벗으로, 동생으로, 손윗사람으로 삼아준, 평강공주와 같은 넉넉한 마음을 지니신 분들에게 가슴 깊이 고맙다는 말씀 올린다. 학교를 떠나서도 늘 배우고, 온달처럼 성장하는 사람이 되도록 애쓰겠다.

 

 

끝으로 법학관 모의법정에서 개최된 ‘2012학년도 학위취득 축하 및 시상식’에서 원장님의 축사에 대한 졸업생 답사(答辭) 원고를 싣는다. 원장님보다는 짧게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휩싸여 일부분을 줄이고 재배치하느라 답사가 좀 꼬였지만, 당일 날 새벽에 부랴부랴 작성한 것만으로 감지덕지이다(손발이 오글거려서 생각이 잘 안 났기 때문이다).

 

 

서울시립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제2회 졸업생 동기 여러분, 다시금 축하합니다!!!

 

 

 

 

<제2회 졸업생 답사(答辭)>

 

존경하는 교수님과 부모님, 그리고 사랑하는 동기와 후배 여러분!

 

 

먼저 저희들의 또 다른 시작을 축복하여 주시기 위해 이 자리에 참석해주신 교수님, 부모님, 가족, 재학생 여러분들께 졸업생을 대신하여 감사드립니다. 또한 빛나지 않는 곳, 보이지 않는 곳에서 힘써주신 교학과, 학생지도센터, 대외협력센터, 도서관에 계신 선생님들 고생 많으셨습니다. 청소노동자, 경비노동자, 식당노동자 여러분 감사드립니다. 밥 챙겨 먹을 시간이 부족할 때 일용할 양식을 제공해주신 3층 파리바게트 관계자 여러분도 고맙습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 다 모시지는 못했지만 천만 서울특별시민 여러분, 특히 감사드립니다. 서울시민들의 세금이 헛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참 많은 분들이 도와주셨고, 믿어 주셨기 때문에 저희가 오늘 이 자리에 설 수 있었습니다.

 

 

서울시립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은 우리에게 새로운 삶을 살도록 해주고, 즐거운 꿈을 꾸도록 해준 곳입니다. 제2회 졸업생 동기 여러분, 우리가 법조인에 도전할 수 있는 기회를 준 우리 학교를 아끼고 사랑합시다. 서울시립대 법전원은 작지만 훌륭한 학교입니다. 우리가 좀 더 크고, 더 멋진 학교로 만들어 갔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학교의 발전을 위해 정성을 보탭시다.

 

 

제가 입학했을 무렵 저의 자습실 책상에는 “높은 사람 되기는 쉬워도 좋은 사람 되기는 어렵다(爲貴人易 爲好人難)”라는 문구를 붙여놓았습니다. 조선 후기 도암(陶菴) 이재(李縡) 선생이 과거에 급제하셨을 때 그의 어머니가 일러준 말씀이라고 합니다. 아마 여기 계신 모든 부모님과 교수님들께서 저희에게 하고 싶으신 말씀이 아닐까 합니다. 여럿이 함께 즐길 줄 아는 사람, 여민동락(與民同樂)할 수 있는 ‘좋은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우리 학교에서 ‘만 명’만을 위한 법이 아닌, ‘만인’을 위한 법을 함께 궁리했습니다. 앞으로 선량한 시민 한 사람이라도 대한민국 헌법정신에서 소외받거나 버림받지 않도록 하고 싶습니다. 아울러 교육을 통해 법조인을 양성한다는 법학전문대학원의 취지를 지키고, 법조 개혁의 일환으로 도입된 법전원 제도의 정착과 도약을 위해 지혜를 모으겠습니다. 국민에게 열려있고 쉽고 낮은 법조인이 되는 길을 함께 걸어가겠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수님, 그동안의 귀한 가르침 정말 감사드립니다. 속 썩였던 모자란 제자들이지만 학교를 떠나서도 늘 배우고, 조금씩 나아지는 사람이 되도록 애쓰겠습니다. 앞으로도 인생의 스승님으로 모시며 많이 배우고 싶습니다.

 

 

아무쪼록 저희의 졸업이 후배님들에게는 새롭게 가슴이 뛰는 설렘이고, 기회이길 소망합니다. 서울시립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에서 행복했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사랑합니다.

 

 

2013년 2월 22일 졸업생 대표 최익구

 

 

추신1.

답사에서 졸업식 당시에 여러 의미에서 화제가 되었던 노회찬 선생님과 유시민 선생님 두 분에 대한 오마주가 한 마디씩 들어가 있다. 시간을 단축하느라 실제 답사에서는 두 문장 모두 생략되어 살짝 아쉽다.

 

 

추신2.

졸업식 당일 오후 4시 30분부터 시작한 뒤풀이에 함께 해주신 승목 형(1차~4차), 창기 형(1차~4차), 혜림 누나(1차~4차), 유철(1차~5차), 상훈(2차~5차), 희보 형(3차), 자호 형(3차), 승완 형(3차), 준홍 형(3차~4차), 현영(3차~4차), 해종 형(4차), 융겸(5차) 덕분에 졸업식이 더욱 빛났습니다. 앞으로도 많이 놀아주시와요.

 

 

추신3.

졸업을 맞이하여 인용했던 시 한 구절을 남겨 둔다.

 

<贈汪倫> - 이백(李白) 

이백이 배를 타고 막 떠나려는데                               李白乘舟將欲行

갑자기 언덕 위에 발 구르며 부르는 노랫소리 들리네    忽聞岸上踏歌聲

도화담의 물 깊이가 천 자라고 하지만                        桃花潭水深千尺

왕륜이 나를 보내는 정에는 미치지 못하는 구나           不及汪倫送我情

Posted by 익구
:

(고종석 스승님의 신작 소설 『해피 패밀리의 출간을 기다리며,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 서평으로 올린 글을 뒤늦게 옮겨 옵니다)

 

『독고준』을 읽다. 소설은 독고준의 일기와 그에 대한 감상이 주된 내용이라 고종석 선생님의 전작인 『히스토리아』나 『발자국』의 기록정신을 연상해봄직하다. 소설 속 일기의 선별은 앞의 두 책보다 좀 더 자의적(!)이다. 그 덕분에 회색인의 심미안을 엿볼 수 있다(독고준의 펜을 빌린 저자의 눈길이겠지만). 독고준의 일기는 1960년 4.19 혁명부터 2007년 대통령 선거까지 반백년의 기록이다. 독고준의 손자뻘인 나로서는 아무래도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 사이의 일기에 손이 머문다. 고려 시대 같은 아주 먼 과거보다 1970년대처럼 조금 지난 이야기가 오히려 더 멀게 느껴지다니 재미난 일이다. 한국 현대사 인물들에 대한 정서적 거리감 탓만은 아닐 듯하고, 개관사정(蓋棺事定)을 위해서는 시간이 좀 더 필요한 모양이다. 


독고준의 따님인 독고원은 아버지의 견해에 동조하거나 첨언하다가도 이따금 불편해한다. 어쩌면 저자의 복합적인 생각이 투영된 것이 아닐까 싶다. 이런 생각이 있으면 저런 생각이 있게 마련이라는 담담한 상식을 말이다. 소설적 허구는 참신한 문제의식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기존의 문제의식을 극적으로 포장해 관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이 소설은 후자의 성격이 좀 더 강하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헛갈리는 것이 매력이다. 창의성과 과장성은 사회의 다수파(가 만든 법과 규범)의 시각과 어긋나기도 한다. 글쓰기를 업으로 삼는 분 중에 회색인이 많은 이유일 테다.  


독고준의 단정(斷定)하지 않는 단정(端正)함을 배우고 싶다. 시중(市中)에서 시중(時中)을 잡아보고 싶다. 나는 사람의 (노력을 포함한) 재주가 불공평하다는 걸 실감한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사람 가치의 우열을 따지는 건 매우 어렵고 조심스런 문제다. ‘독고준을 넘어서는’이란 목표도 좋지만 ‘독고준과 다른’ 매력을 만들어보는 것도 꽤 도전해볼 만한 일이 아닐까. 설령 차별화(?)에 실패한다고 해도 나쁠 건 없다. 세상에는 지식 도매상보다는 지식 소매상이 많고, 지식 소매상보다는 지식 유통상이, 그보다는 지식 소비자가 더 많기 마련이다. 꽤 괜찮은 유통상이나 소비자가 된다고 해서 그 사람의 무게가 많이 낮아질 거 같지는 않다.  


나는 삶은 한 번 뿐이라고 믿는다. 일전에 고 선생님께서 언급하시기도 하셨던 “한 개인의 죽음은 그 개인에게 우주의 소멸이다”라는 명제를 지지한다. 그래서 한 번 밖에 없는 생을 가능한 한 옳고 아름답게, 착하고 재미나게 살고 싶다. 안연은 “순임금은 어떤 사람이고, 나는 어떤 사람인가? 노력하는 자라면 또한 그와 같아질 것이다(舜何人也? 予何人也? 有爲者亦若是)”라고 말씀하셨다. 순임금이나 자신이나 모두 똑같은 사람인데 한 사람은 성인이 되고, 안연 자신은 그렇지 못하다는 자책의 뜻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인간은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준 이 위대한 문장을 변용해본다. 


 “독고준은 어떤 사람이고, 나는 어떤 사람인가? 회의하는 자라면 또한 그와 달라질 것이다.”
 
2010. 8. 19. 木

Posted by 익구
:

다시, 나를 위한 기도

일기 2009. 12. 10. 21:32 |

2008년 10월에 썼던 잡글을 일부 수정했습니다. 이 글을 쓸 때의 비장한 결심은 온데 간데 없고 1년이 지나고 봐도 그 때의 심정과 비슷해서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버킷리스트(Bucket List)>라는 영화의 줄거리를 대강 들었다. 우리말에서 ‘밥숟가락을 놓다’가 죽음을 일컫듯이 미국에서는 ‘양동이를 걷어차다(Kick the Bucket)’라는 표현이 죽음을 뜻한다고 한다. 여하간 시한부 판정을 받은 두 노인이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해나가는 내용이다. 대학 시절의 카터(모건 프리먼)는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되기, 백만장자가 되기 따위의 목록을 적었지만 죽음을 앞둔 시점에서는 모르는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기, 눈물이 날 때까지 웃기 같은 소박한 바람을 적는다.


대학 새내기 시절에 내가 품었던 꿈도 야무졌다. 학보사 편집장 되기, 책 1,000권 읽고 유식 찬란해지기, 평생 함께 할 지인 50명 만들기 같은 거창한 목표로 그득했다. 졸업이 임박해서는 버킷리스트를 흉내 낸 학사모리스트를 만들어보겠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많이 단출해진 목록을 손에 쥔 순간에도 유종의 미를 빙자한 요행수를 앞세웠다. ‘그래도 이거 하나쯤은 성사되겠지’하는 열망 말이다. 마치 그것이 당연한 나의 권리인양 행세했다.  


고종석 선생님은 <미친 사랑의 기도>라는 칼럼에서 자식이 수능시험을 잘 치르길 비는 어머니의 기도가 추하다고 쓰셨다. “그들 가운데 자식이 애쓴 만큼만 이루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어머니는 거의 없을 것”이며, “그들 대부분은 자식에게 ‘덤의 운’이 따르기를 기원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나도 내 실력을 다 발휘하고, 상대방도 제 실력을 다 발휘해 정정당당하게 경쟁할 수 있도록’ 기도할 자신이 도무지 없다. 과정보다는 결과에 천착하는 한국 사회에서 겨루기를 거듭할수록 그런 자신감이 자꾸 줄어든다.


수능이 절대적인 기준이 될 때 거의 모든 수험생과 관계자들은 ‘덤의 운’을 빌 수밖에 없다. 단 하나의 평가로 배분하는 자원의 차이가 현저하기 때문이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내신, 논술, 경시대회, 봉사활동 등을 반영하려는 교육 현장의 시도는 ‘덤의 운’을 빌려는 유인을 줄인다. 매번 운수에 기댈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이런 의도와는 달리 오히려 학생들의 고통을 자아내는 부작용을 낳았다. 획일적인 대학 서열화라는 또 다른 절대적인 기준이 온존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결국 모든 분야에 ‘덤의 운’을 빌어야 하는 기도의 남발 사태로 귀결되고 말았다. ‘덤의 운’이라도 빌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들어놓은 구조를 고찰해야 한다. 취업 포털 커리어가 2008년 상반기 인턴십을 진행한 32개 기업을 조사한 결과 인턴사원 평균 경쟁률이 54대 1로 집계됐다. 2009년 상반기에 42개 기업을 조사해보니 49 대 1로 조금 하락했는데 이는 정규 신입사원 대신 인턴사원을 뽑아서 모집인원이 늘었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떨어질 위험(Risk)이라고 해야 할지 그마저도 가늠하기 어려운 불확실성(Uncertainty)이라고 해야 할지 헛갈린다. 이런 별 따기라면 ‘덤의 운’을 빌지 않을 수 있겠는가.


최소 비용으로 최대 편익을 내고 싶다는 바람은 모든 수험생과 지원자의 꿈일 게다. 어떤 시험이든 찍은 문제는 남들보다 더 맞히길 바라고, 무슨 면접이든 아는 질문이 나오길 희망할 게다. 그것이 아름답지는 못할지언정 차마 비루하다고 손가락질하기 힘들다. 나 또한 내 분수보다 큰 것을 누리기를 바랐고, 실제보다 높은 명성을 탐했다. 더 나아가 내 둘레에 나와 친한 사람들의 ‘덤의 운’을 빌면서 생색내는 일도 다반사였다. 둘레 사람들에게 나를 위해 기도해달라고 조르면서 잘 되면 베푼다고 유혹하기도 했다.


다만 ‘덤의 운’을 바라는 정도를 자꾸 줄여나가고 싶다. 운의 자리에 재주를 채워 넣는 것이 지금 이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인지도 모른다.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하지만 그보다 더 바라는 건 자기가 하는 일에 가슴 뛰는 사람이 되고, 자기가 딛고 있는 곳에 정성을 쏟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나를 위한 기도가 조금 덜 추하고 조금 덜 역겨워지도록 노력해야겠다. 위기지학(爲己之學)을 추구했던 과정 자체를 소중하게 여기면서 이 순간이 내 삶의 공백을 넘어 여백쯤은 되었으면 좋겠다. 세상의 평평함에 누를 끼치고 싶지는 않다.


대학원 합격자 발표를 앞두고 스스로를 다잡지만 어느 순간 ‘너는 이미 합격해 있다’를 주문처럼 외우는 내 자신을 발견한다. 나는 기도의 무기력함을 잘 안다며 짐짓 의연한 척한다. 하지만 이런 태연함보다는 만약을 대비한 백수리스트를 좀 추려보는 게 좀 더 생산적인 일일 게다. 나를 위한 기도가 대개 무기력하듯이 나와 무관한 것들을 위한 기원도 무기력하다. 내 이익과 관계없이 아주 좋은 의도에서라도 ‘덤의 운’을 바라는 것은 삼가야겠다. 사적이든 공적이든 ‘덤의 운’을 넘보는 것에는 절제가 필요하다. 이러한 자세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던 ‘좋은 습관의 축적’과 잇닿는다. 시의 적절한 절제는 습관으로 삼아 마땅하다. - [無棄]

Posted by 익구
:

자기소개서를 쓰다가

일기 2009. 11. 5. 03:07 |

주로 가으내 진행되는 자기소개서 집필은 신추문예(新秋文藝)에 빗댈 만하다. 그만큼 문학성(?)이 만개하는 글이다. 허풍이 폭넓게 허용되기는 하지만 혼자서 몰래 읽어야 할 법한 공상과학소설을 남에게 내는 민망한 기분은 나 혼자만의 감상은 아닐 게다. 그래 놓고도 미처 하지 못한 말이 있다며 아쉬워할 때는 이따금 황당하다. 지난달에 대학원 진학을 위해 자소서 한 부를 탈고하면서 여러모로 괴로웠다. 하지만 내 자신에게 이런저런 물음을 던지는 즐거운 시간이기도 했다.


공자가 존경했다는 거백옥은 예순이 될 때까지 육십 번을 변해 오십 구년의 잘못을 깨달았다고 한다. 꼭 자기소개서 방식이 아니더라도 스스로를 돌아보는 기회를 종종 만들어서 지난날의 잘잘못을 조회해보면 좋겠다. 미국에서는 인생 목표를 구체적으로 글을 써서 소지한 사람이 나중에 살펴보니 경제적인 부를 누리고 있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진정한 성공이라고 보기에 성급하다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내 꿈을 몇 줄 글로 압축해서 써둔다면 자신이 할 일과 하지 않을 일을 좀 더 또렷하게 정리하는데 도움이 된다.


자기소개서를 쓰면서 내 과거로 눈길을 돌려보니 아쉬운 지점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세속적으로 인정받는 증서들을 좀 모았으면 어땠을까 싶었다. 가령 컴퓨터 자격증이나 중국어 급수를 획득하는 식의 몸짓 말이다. 이른바 스펙을 쌓으려는 정성이 다른 사람에게 으스대기 위한, 남을 이기기 위한 위인지학(爲人之學)으로 전락하지 않도록 경계하면서도 말이다. 아무리 출중한 심사위원이라도 나의 내면을 헤집을 수는 없는 노릇일 테고 일차적으로는 그런 유의 공인된 능력을 평가할 수밖에 없으리라.


장자는 쓸모없음을 알아야 비로소 쓸모 있음을 말할 수 있다고 설파했다. 발이 닿는 쓸모 있는 땅만 남겨놓고 그 둘레를 다 파서 없앤다면 딛고 있는 땅이 쓸모없어지고 만다는 비유를 들었다. 내 배부른 소리들과 투덜대던 기억 모두가 나를 채워왔던 일들이다. 나 같이 미욱한 인간을 지탱하는데도 이렇게 많은 것들이 들어가다니 그저 두려울 따름이다. 그래도 자기소개서를 쓰는 순간만큼은 그 두려움이 곧잘 넋두리로 변모한다. 쓸모없어 보였던 나의 행동들이 앞으로 내가 발을 좀 더 내딛을 수 있도록 넓혀둔 터전이라고 넉넉하게 여기기가 쉽지만은 않다.


답답한 마음에 5년쯤, 아니 한 1~2년쯤 시간을 돌릴 수 있으면 어떨까라는 상상을 해봤다. 하지만 “어쩌면 모든 사람의 길은 십 년, 아니 이십 년을 거꾸로 돌릴 수 있다 한들, 지금의 그 길로 다시 갈 수밖에 없을는지 모른다”라는 황주리 선생님의 <마흔 살의 자화상> 한 구절을 접하고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필연적인 귀결을 옹호하지는 않더라도 현재 머무는 내 자리에 감사하는 계기로 삼았다. 첫길을 찾아나서는 일만큼이나 지금 거니는 길을 긍정하는 건 용기가 필요한 모양이다. 절차에 일부 하자가 있지만 유효하다는 말은 자기소개서 쓸 때나 통용된다. 한 개인에게는 제 삶을 무효로 할 권한이 없는지도 모른다.


(미취업이 아닌) 비취업자로 지내는 날이 하루하루 더해지면서 내 본업(?)이 무엇인지 알 길이 없어져서 곤혹스럽다. 그간 내 생활에 응용해온 3M의 15% 원칙을 더 이상 적용할 수 없어졌기 때문이다. 3M이 근무시간의 15%를 자신의 업무와는 무관한 관심 분야에 투자하도록 독려함으로써 새로운 아이디어를 양산하다 보니 포스트잇도 개발하게 되었다는 사례를 슬며시 따라해 왔는데 지금은 그 15%를 산정할 수 없지 뭔가. 한국일보 최윤필 기자님의 연재물 제목처럼 도무지 내 ‘바깥’을 더듬기가 힘들다. 이미 변두리로 나와 있기 때문일까. 그러고 보니 대다수의 자기소개서는 자신이 울타리 안에 성실히 머물렀음을 호소하는 편이다.


207년 삼고초려를 역사적 사실로 인정할 때 제갈공명이 출사한 나이는 27세로 딱 내 또래였다. 당시 기준으로 볼 때 공명이 젊은 날에 활약했다고 보기는 힘들 듯싶다. 삼국시대에서 젊은 날 대성한 사람으로 26세에 사망한 손권의 형 손책이나 24세에 요절한 천재 철학자 왕필 등이 있다. 물론 이런 분들만 있는 건 아니고 위나라 장수 등애가 촉한을 정벌했을 때 연세가 68세였는데 내게 위안을 주는 인물이다. 대기만성이란 말은 게으른 자들의 마지막 피난처인 셈이다.


『삼국지연의』의 공명은 “큰 꿈을 누가 먼저 깨닫는가/ 일평생 내 스스로 알고 있다네/ 초당에 봄잠이 넉넉한데/ 창밖에 해는 아직도 더디 가는구나(大夢誰先覺 平生我自知 草堂春睡足 窓外日遲遲)”라고 멋있게 시 한편 읊으면서 세상에 나온다. 이만하면 꽤 멋진 자기소개서다. 유비를 따라나선 자신이 세상의 먼지에 뒤덮일 것을 자조하면서도 포부를 실현하려고 일어서는 모습이 애틋하다. 설령 공명만큼의 재주가 없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파에 찌들면서 어떤 식으로든 자기 분야에서 유능해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는 젊은이들이 거드럭거릴 틈을 주지 않고, 무용함은 죄악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일정한 생활 근거가 없으면 한결같은 마음이 없어진다(無恒産無恒心)”라는 맹자의 말씀처럼 젊은이들의 항산(살아갈 수 있는 생업)을 마련하기 위해 각계각층이 뜻을 모으는 노력은 계속해야 한다. 하지만 현재 상황이 단지 항산이 모자라서 생기는 문제만은 아닌 듯싶다. 항산과 항심의 선후관계가 뒤집어질 이유는 없더라도 항심에 대한 관심도 종요롭다. 항산은 결국 항심으로 이어지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형사법의 고전 체사레 베카리아의 『범죄와 형벌』은 그의 나이 27세(한국 나이)에 출간한 책이다. 이 사실을 알고 나서 당분간은 작가의 처녀작이 언제 나왔는지 찾아보는 걸 자제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이 역시 자신의 고민을 치열하게 녹여낸 한 편의 자기소개서다. 사색의 이력을 이렇게 아담하고 간명한 소책자로 엮어낼 수 있다니 참 부럽다. 닮고 싶은 사람을 좇아가려고 애쓰는 것과 그냥 비교하고 괴로워하는 것과는 분명 차이가 난다. 굳이 비교를 하려거든 남보다는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의 자기를 대상으로 삼아야겠다.


나는 며칠 내로 자기소개서 한 부를 완성해야 한다. 괄목상대(刮目相對)라는 말이 있지만 사흘은커녕 한 달이 지나도록 눈을 비빌 만한 발전을 이루지는 못했다. 늘어난 게 있다면 나를 좀 더 분칠하는 기예인지도 모르겠다. 비록 내 항산이 조금 모자라도 내가 품은 항심이 제법 빼어나다는 점을 담아내고 싶다. 그래야만 분식(粉飾) 자기소개서를 면할 수 있으리라. 그 덕분에 배움의 기회를 얻어서 내 가슴이 뛰는 공부, 위기지학(爲己之學)을 하겠다며 뻐기는 날이 오기를 희망한다. 아직 자기소개서에서 해방되지 못한 친구들, 모두 힘냅시다!^-^ - [無棄]

Posted by 익구
:

1992년 대선 때 김영삼 후보에게 패한 김대중 후보는 눈물을 흘리며 정계은퇴를 합니다. 김영삼의 환호보다 김대중의 침통이 어느 초등학생의 눈에 깊은 인상을 남겼어요. 그러다가 1995년 7월 18일 김대중 전 대통령님은 정계복귀를 선언합니다. 그 후로 내내 야당 분열과 정계은퇴 번복이라는 비판에 시달렸지만 제 초등학교 6학년 생일날 다시 돌아온 그분을 저는 덜 미워했습니다. 제 생일에 억지로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그때 만들어졌던 새정치국민회의라는 정당도 넉넉한 시선으로 바라봤었죠.


1996년 4·11 총선 때 김 전 대통령님은 전국구 14번의 배수진을 쳤으나 국민회의는 79석을 얻는데 그쳐 그 자신마저 낙선했습니다. 그때 저는 왠지 모르게 가슴 한 구석이 허전했지요. 이런저런 인연이 얽혀서 중학교 2학년 때인 1997년 대선 때 저는 개표 방송을 밤늦게까지 보면서 김대중 후보의 대통령 당선을 응원했습니다. 제 생애 최초의 정치적 의사 표시는 무척 엉뚱했지만 그래도 제 고향 대구의 정치적 성향에 대한 인식, 더 나아가 지역주의의 문제를 이때부터 고민하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참여정부 들어 온건 보수 세력(혹은 개혁적 자유주의 진영)이 노무현과 김대중을 두고 대립하는 모습을 보였을 때 저 또한 어느 한 편에 기울어지기도 했습니다. 이제 그 갈등을 다 메우기도 전에 두 분을 모두 잃어 서글픕니다. 갈라선 이들이 민주주의라는 구호 아래 다시 모여야 할지는 차차 고민해봐야겠습니다. 지금은 그저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의 병행을 추구하셨던 고인의 가르침을 새겨봅니다.


노무현 대통령님에 이어 김대중 대통령님까지 보내려니 가슴이 아프네요. 그래도 제가 사랑할 만한 사람을 사랑했고, 존경할 만한 사람을 존경했고, 기댈만한 꿈에 투자했음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죽은 뒤에 받는 복덕[冥福]을 믿지 않는 저로서는 치열하게 살았던 당신들의 삶이 살아 계실 때 상당 부분 보상받았다는 말씀을 올리고 싶습니다. 아, 한 시대를 이렇게 흘려보내고 있네요.


니체는 말하기를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자신이 괴물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심연(深淵)을 너무 오래 들여다보면 심연이 당신의 영혼을 들여다보기 시작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황금을 얻고자 싸운 사람은 황금에 먹히지 않도록, 권력에 집착한 사람은 권력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범인 잡는 데 종사한 사람은 자기 마음이 범인 닮아서 사악해지지 않도록, 그리고 우리가 명심할 것은 공산당과 싸운다면서 공산당의 수법을 닮아가는 일이 절대로 없도록 할 일이다.
- 김대중, 『김대중 옥중서신』, 한울, 2000, 348쪽.

Posted by 익구
:

우수리들2

일기 2009. 2. 22. 21:58 |

제가 요즘 어수선하게 지내는 관계로 쓰고 싶은 잡글은 많은데 제대로 정리를 하고 있지 못합니다. 아쉬운 마음에 우수리를 모아봤습니다.


090113
기원전 600년 이전 사람인 조로아스터는 인류 역사상 최초의 종교 창시자로 추정된다. 선과 악의 대결, 최후의 심판, 천국과 지옥, 인간의 사후 운명에 대한 관심, 구세주 등 조로아스터교의 기본 교리는 유대교, 천주교, 개신교, 이슬람교, 불교에 모두 깊은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조로아스터가 석가모니, 공자, 소크라테스 등 기원전 5세기의 성인보다 앞선 시대의 사람이라 이런 가설이 나오는 모양이다. 나는 이런 역사적 사실에서 종교의 발전도 결국 인류의 진화와 함께 해온 지난한 여정이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품었다.


문득 신이란 인간의 필요에 의해 창조된 존재로 “인간이 신의 아들이 아니라 신이 인간의 아들”이라고 스스럼없이 말했던 포이어바흐가 떠오른다. 나는 종교가 인간의 행복에 복무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만 보지는 않지만 적어도 종교가 인간의 화목을 해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배타성은 종교의 본질 가운데 하나다. 그것이 근본적이라든가 공격적이라든가를 떠나서 이교도나 비종교인에게 마냥 너그럽다면 그건 이미 종교가 아니다. 그러나 그 배타성에는 절제와 금도가 있어야 한다.
 

대한민국의 지정학적 위치 때문인지 이 땅에서는 다채로운 종교가 스며들고 섞였다. 한국은 다종교 사회라고 할 만하고 세속주의 원칙이 비교적 잘 지켜진 나라라고 볼 수 있다. 헌법 제20조가 규정하고 있는 정신도 이런 현실에 바탕을 둔다. 이 정부 들어서 이 헌법정신을 잊어버린 분들이 우리 사회의 상층부에 제법 많이 계신 듯싶어 살짝 불안하다. 나는 내 자신이 불가지론자인지 무신론자인지 아직 확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설령 신이 있다고 하더라도 전지(全知)-전능(全能)-전선(全善)을 다 갖춘 신이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이런 내 신념은 헌법의 보호를 받는다.


090120
KBS 드라마 <황금사과>를 IPTV를 이용해 사흘에 걸쳐 다 봤다. 참회하는 가해자와 용서하는 피해자, 그리고 권선징악과 권불십년이라는 설정은 비현실적이다. 그러나 그 비현실성은 어디에도 없는 곳(Utopia)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앨빈 토플러는 제3의 물결이 프랙토피아(Practopia)적 미래를 낳을 것으로 전망했다. Practical과 Utopia의 합성어인 프랙토피아는 피안(彼岸)이 아닌 차안(此岸)이다. 권세를 얻은 자가 누구든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미운 짓을 벌이지 못하도록 사회적인 한계를 분명히 그어야 한다. 그래야만 속죄와 관용, 보상과 문책을 통한 화해의 문이 열린다. 이 경계가 무너지면 용서하려 해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지도 모른다.


군사독재 시절을 배경으로 삼아 틈틈이 시국에 대한 한탄을 적절히 섞은 재미가 쏠쏠하다. 극중 대사에 말조심하라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2009년 어느 날 나는 내 친구들과 술자리에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런 말 하다가 잡혀간다”라고 농담을 날린다. 요즘 한국 사회가 권력을 소수가 독점했을 때의 폐해를 다시 반복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먼 훗날 이명박 정부가 <황금사과> 같은 드라마의 배경으로 쓰이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자신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돌아볼 능력도 없던 중앙정보부 정 과장(이기영 분)은 드라마 속에만 있는 인물은 아닌 모양이다.


090212
현재 법률 해석의 원리 및 해석의 정당화를 가르치는 곳은 많다. 그러나 입법학이라 불리기도 하는 법률 제정과 개정의 문제를 탐구하는 곳은 드물다. 행정학이나 정책학, 정치학은 물론 사회학, 경제학, 경영학 등과 연계한 통합적이고 학제적인 성격을 띠기 때문인 모양이다. 그간 입법의 문제는 법률 제정 실무자들에 국한된 입법기술로 취급된 경향이 짙다. 하지만 입법 감시야말로 풀뿌리 민주주의의 주춧돌을 놓는 일이다. 미국의 정치학자 샤츠슈나이더의 말씀처럼 민주주의란 스스로가 옳다고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정치체제이기 때문이다.


2006년 9월 출범해 지역주민의 생활에 있어 가장 밀접한 하위법률 연구를 진행한 희망제작소 부설 조례연구소가 좋은 예다. 몽테스키외가 『법의 정신』에서 “무용한 법은 필요한 법을 약화시킨다”라고 역설했듯이 좋은 법률의 존재는 법치 효능감을 제고시키지만 아직 애정 어린 관심이 부족한 듯싶다. 일전에 문학평론가 이명원 선생님은 판례에 대한 단순한 ‘해설’을 넘어서는 체계적인 법률 ‘비평’이 부재하다고 지적하셨다. 입법평론 혹은 사법비평 같은 영역이 단숨에 열리지는 않겠지만 우리 사회에 긴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입법부와 사법부에 계신 훌륭한 분들이 세금 값을 넘게 하신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런 개인적인 신뢰보다는 일상적인 감시시스템과 공정한 평가체계가 더 요청된다는데 동의한다. 미국 제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이 “자유의 대가는 영원한 불침번이다”라고 설파했듯이 주권자인 시민이 입법을 감시하는 것은 헌법정신에 따른 마땅한 권리이자 의무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사법 감시도 일상화되어야 한다. 욕먹는 게 업인 정치인들은 차라리 담담한 편인데 이런 비판과 분석을 신성모독쯤으로 생각하는 판사나 검사 분들이 많아 걱정이다.


제퍼슨은 또 “신뢰는 어디서나 독재의 어버이이며, 자유로운 정부는 신뢰가 아닌 경계심에 기초하고 있다”라고도 말씀했다. 입법 감시나 사법 감시 모두 권력을 견제하는 시민의 방패막이다. 믿음은 소중한 덕목이지만 권력을 향해서는 최대한 아껴서 써야 한다. 의심이 넘치면 대개 피곤하지만 권력에게 건넬 때는 먼저 의심부터 할수록 우리 삶이 윤택해진다. 정부 여당이 내세우는 법치가 특정인에게 기울어진 것이라면 우리는 만인에게 평평한 법치를 모색해야 한다. 아마 그 평평함은 약자나 소수자에게 좀 기울어진 형태가 되어야겠지만 말이다.

Posted by 익구
:

이번 학기를 마치면서 “배움은 미치지 못하는 듯이 하고, 이미 배운 것을 잃어버릴까 두려워한다(學如不及 猶恐失之)”라는 공자의 말씀을 실천할 것을 다짐했다. 미욱한 제자가 교수님의 강의에 보답하고픈 마음에 꺼내든 구절이다. 학기 내내 내 능력이 모자라 가르침을 따라가지 못할까 전전긍긍했지만 이제 학기를 마치며 그렇게 애태우며 배운 것을 너무 일찍 잊어먹지 않도록, 기왕이면 생활 속에서 구현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


정약용 선생은 猶恐失之를 『논어고금주』에서 嚮道而行 如有重寶在前 爲他人所先獲 此之謂惟恐失之라고 풀이하셨다. 기초한문을 수강한 학생으로서 용기를 내보자면 “도를 향해 가는데 마치 귀중한 보배가 앞에 있어 다른 사람이 먼저 얻어 가는 바를 두렵게 여기는 것이니, 이를 일러 惟恐失之라고 한다”라고 해석할 수 있을 듯싶다. 爲는 ‘생각하다’로 보았는데 여기서는 두렵게 여긴다, 조마조마하게 생각한다 정도로 의역을 하면 대강 이런 뜻이 나온다.


정리해보면 學如不及은 배울 때는 능력이 모자라 가르침을 따라가지 못할까 전전긍긍하며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 정도로 볼 수 있다. 猶恐失之의 경우 통설은 그렇게 애태우면서 배운 것을 잃어버리지 않게 잘 체화시키라는 뜻이다.  猶恐失之는 배운 것을 온축해내는 복습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 정이천 선생은 “오히려 잃을까 두려워하여 그대로 지나칠 수 없으니, 잠시 내일까지 기다리겠다고 말하는 것은 불가하다(猶恐失之 不得放過 才說姑待明日 更不可也)”라고 주석을 달았다.


반면에 정약용 선생처럼 읽는다면 견선여갈(見善如渴)과 비슷한 맥락에서 배움도 목마를 때 물을 본 듯이 한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하기야 착한 일도 그렇지만 배움이라는 것도 남에게 양보하기보다는 먼저 달려가야 할 것일 테니 말이다. 정약용 선생의 견해는 부지불식간에 놓치고 있는 진리가 없나 두려운 마음으로 살피고 혹여 숨겨진 가르침이 있거든 귀한 보석을 만난 듯 내달릴 수 있어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박세당 선생의 『사변록』에는 “학문을 할 때에는 부지런히 하되, 항상 부족한 것같이 하며, 오히려 잃어버릴까 두려워해야 하는데, 하물며 자기 스스로 힘쓰지 않으면 얻음이 있겠는가”라고 풀이하면서도 정이천의 주석을 인용하되 “이같이 하여도 오히려 얻지 못할까 근심한다(又云如此猶恐不獲)”라고 의역을 했다. 정이천이 내일로 미루지 말고 열심히 공부하라는 말을 얻지 못할 것을 염려하듯이 공부하라는 뜻으로 본 모양이다. 주희의 주석과는 사뭇 다른 뜻이라 “앞뒤 말이 조금 같지 않는 바가 있다(前後說 微有不同)”라며 의문을 표했다.


동양고전연구회에서 낸 『논어』 번역서에서는 猶恐失之에 대한 정약용 선생의 견해를 “이미 배운 것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선생님의 가르침을 놓칠까 걱정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뜻이 와 닿지 않는다. 선생님의 가르침을 놓칠까 걱정하는 것은 이미 學如不及에 내포되어 있는 개념 같기도 하거니와 앞서 언급한 정약용 선생의 비유에서 그런 내용이 선뜻 도출되지도 않는 듯싶다.


물론 여기서의 ‘가르침을 놓친다’는 의미를 學如不及에서는 강의 진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개인적인 문제로 보고 猶恐失之에서는 여러 학생들 가운데 쳐져서 체득하지 못한다라고 좀 나눠볼 소지는 있다. 그런데 스승의 가르침은 우수한 제자 몇 명이 독차지할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고 그런 식의 경쟁으로 묘사하는 건 어색하다. 역시나 내가 봤던 대로 진흙 속의 진주와 같은 깨우침을 잃지 않도록 노력해보자 뭐 이 정도가 아닐까 싶다.


여하간 學如不及 猶恐失之하는 제자가 되겠습니다.^-^ - [無棄]

Posted by 익구
:

2007년 12월 전후

일기 2008. 1. 1. 17:54 |

071127
선생께서는 시골에 사실 때, 나라에 올리는 세금이나 부역을 반드시 평민들보다 앞서서 바치고, 한 번도 늦춘 일이 없으셨다. 마을의 아전들도 또한 고관의 집인 줄을 몰랐었다.
先生居鄕 凡調役征賦 必先下戶而輸之 未嘗有逋稽 里胥亦不知爲達官家


곽황이 선성(宣城)의 재(宰)로 있으면서 남에게 말한 바 있다. “이 고을의 조세나 공부에 대하여 나는 걱정이 없다. 이선생께서 온 집안 사람을 거느리시고 남보다 앞서 바치시므로 고을의 백성들이 모두 선생의 의를 두려워하고 서로 앞을 다투어 와서 자진 납부하며 도리어 뒤질까 두려워하고 있으니, 내가 번거롭게 한 번도 꾸짖지 않았어도 조금도 모자람이 없으니, 내 어찌 걱정하겠느냐.”
爲宣城宰 嘗語人曰 此縣租稅貢賦 吾無其憂矣 李先生率戶先人備納 鄕里小民 畏先生之義 而爭自來納 猶恐惑後 不煩一呵 靡有所欠 吾何憂哉
<퇴계선생언행록> 卷2, 處鄕 中


능력이냐, 도덕이냐? 조악한 이분법이 나도는 시대다. 도덕도 중요하지만 지금 시점에서는 능력이 필요하다며 비장한 언설을 늘어놓는다. 내가 아는 유능함은 다양한 자원들이 결합되어 시너지 효과가 나는 건데, 능력 좋아하시는 분들은 경제성장 능력이 단독으로 호젓하게 존재할 수 있다고 믿는 모양이다. 뭐가 급하신지 자꾸 현실을 초월해 신앙의 영역으로 넘어가시려고 해서 안쓰럽다. 키에르케고르는 도덕적 이상을 성취하는데 한계를 느낀 인간의 불안감은 신에게 복종함으로써 해소된다고 설파한다. 종교적 단계에서 인간의 무력감과 허망함을 극복하게 된다는 기독교 논리인 셈이다. 능력을 성역화하는 분들도 이런 전개를 따라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을 기다리는 건 아닐까 싶다. 그런데 키에르케고르조차 개인의 주체성을 강조하며 ‘신 앞에 선 단독자’가 되라고 했다는데 경제에 종속된 식객이 되어서야 쓰겠는가.


나누기 힘든 걸 굳이 쪼개서 보시는 분들은 아마도 솔선수범하는 태도를 능력이라고 보시지는 않을 게다. 인용한 일화에서 퇴계 선생은 겉으로 드러나는 몸가짐을 보여줬다. 제자들이 오버한 측면이 있겠지만 퇴계의 처신은 볼만한 것이 많았다. 내면적인 인격이나 품성이 밖으로 배어나게 마련이라고 하지만 모든 공인들의 내면을 들여다보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설령 관찰 가능하다고 해도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는 건 피곤한 일이다. 상대당, 언론, 시민단체나 이익집단 등이 감독 역할을 일감으로 삼아 사회적 분업을 수행한 대가로 밥 벌어먹고 산다. 보수 우경화가 심화되고 있다는 진단이 들리는데 우리 사회가 건실한 견제집단을 남겨둘지 걱정이다. 문제 제기 좀 하려고 하면 과거지향적이니, 네거티브니, 발목 잡기니 하는 지청구가 날아들지는 않을까.


머잖아 새로운 대통령과 둘레 사람들이 이 나라를 다스린다. 그 누가 되었든 간에 도덕의 최소한인 법을 지키자는 말을 하지 않는 분은 없으리라. 준법도 의심되는 판에 말본새와 청렴성 혹은 청부성(淸富性)을 가늠하는 일은 얼마나 사치스러운가. 그러나 이 사치를 부리는 사람이 좀 더 늘어야 이 땅이 좀 더 예측 가능해진다. 사고의 효율성을 높인다. 정치를 도덕화하지 말라고? 나는 다만 정치가 할 일을 법에 맡기는 정치의 사법화(judicialization of politics) 현상이 서글플 따름이다. 정직은 사회자본이기 이전에, 법률 쟁송의 대상이기 이전에 개인의 미덕이다. 대한민국이 정직이나 솔선수범을 정치적 심판의 소재로 삼기를 포기할까봐 두렵다.


071210
2007년 종합부동산세 과세 대상자와 부과액이 2006년에 비해 크게 늘었다고 호들갑인 분들이 있다. 2006년에 급등한 부동산값이 공시가격에 반영됨으로써 과세 대상자가 늘었고 과세표준 적용률이 높아져 부과액도 증가했다. 종부세는 고액의 부동산 보유자에 대하여 세금을 부과함으로써 조세부담의 형평성을 제고하고, 부동산 가격안정과 지방재정 균형발전을 목적으로 2005년부터 시행됐다. 종부세는 불공평한 소득세제를 보완하는 기제로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소득은 감추기 쉬워도 부동산은 감추기 어렵기 때문이다. 보수야당과 일부 언론이 세금폭탄 운운하며 부동산 부자들의 이익을 과대 대표한 건 부끄러운 일이다. 이들의 조세저항을 접하다 문득 고려말 권문세족이 전제개혁에 반발하던 모습이 떠올랐다면 너무 실례일까.


분명히 말하건대 종부세를 못내겠다는 성냄과 종부세를 낼 집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푸념은 동일선 상에 놓아서는 안 된다. 푸념이 성냄에 견주어 더 마땅하다. 종부세는 소득과는 무관하기 때문에 오랜 세월 한 아파트에서 살아왔는데 갑자기 세금이 올라 부담스럽다는 항변도 일리가 있다. 이런 맥락에서 1가구 1주택자에 대한 종부세를 경감하자는 목소리가 높다. 설령 미세조정을 하더라도 시장에 규제가 완화된다는 신호를 주지 않기 위한 또렷한 전달이 필수적이다. 1가구 1주택에 대한 양도소득세를 감면해주거나 상속이나 증여·매매 등 소유권 이전이 발생할 때까지 종부세 납부를 유예해주자는 주장도 있다.


이런저런 검토를 하다보니 문득 마음이 불편하다. 내가 특별히 못 된 심보이기 때문은 아닌 듯싶다. 집 한 채가 전부인 봉급생활자나 고령 은퇴자들이 투기와는 무관하더라도 서민들에 비해 담세능력이 월등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종부세 과세대상이 되는 주택의 시세는 8억원이 넘는다. 시세 8억원 미만인 집을 갖고 있거나 집이 없는 서민은 1000만가구인데 고령 1주택자인 2만 명을 각별히 염려하는 게 선후 관계가 맞느냐 헛갈린다(박구재. “종부세를 위한 변명” 경향신문. 2007. 12. 03. 참조). 종부세 대상자들의 하소연을 귀담아 듣는 자세로 사회 소외계층을 챙겼다면 이 나라가 이렇게 삭막하지 않았을 것이다. 1가구 1주택에 대한 종부세 완화가 공평과세와 조세정의에 얼마나 부합하는지 면밀하게 살피지 않고 세금 덜어주는 게 엄청난 묘안인 것처럼 호언장담하는 게 마뜩잖다.


토지의 공공성을 둘러싼 논쟁은 예나 지금이나 한판 승부로 끝낼 문제는 아니다. 또한 불완전한 인간이 만든 세금제도가 무결점일리도 만무하다. 종부세 효과가 미진한 이유 가운데는 정책이 제대로 안착하겠느냐 하는 의심이 많기 때문이다. 가까스로 자리를 잡아가는 종부세 제도를 무작정 흔들기보다는 좀 지켜보면 안 될까? 아둔한 내가 보기에도 종부세에 쏟아 붓는 열정을 좀 더 비천한 곳에도 좀 건네면 사치인가? 종부세에 짜증을 내시는 분들은 그래도 당장 먹고 살만하시기에 드리는 말씀이다. 그나저나 밥벌이도 제대로 할지 모르는 내가 벌써부터 내 집 마련을 걱정하는 건 너무 빠른 김칫국이다.^^;


080101
2007년 12월 31일과 2008년 1월 1일 사이에 고종석 선생님의 단편 <엘리아의 제야>를 읽었다. 소설의 배경은 딱 5년 전 이맘때다. 섣달 그믐날(양력) 새벽까지 이어진 술자리 모임에서는 안주 삼아 2002년 대선 이야기가 나온다. 5년 뒤에도 비슷하지만 사뭇 다른 광경이 펼쳐지고 있다. 과연 2002년에 노무현을 끝내 찍지 않았던 이들의 좌절에 견주어 2007년에 차마 이명박을 찍지 않았던 이들의 낙담은 어느 정도일까.


흠뻑 취했던 주인공이 숙취를 다독이려는 노력이 줄거리다. 이런 표현은 없겠지만 숙취 문학에 한 획을 그은 작품이 아닐까 싶다. 잃어버린 기억의 퍼즐을 맞추며 함께 했던 벗들을 돌아보는 게 마치 내 삶의 한 단면을 들여다보는 듯해 친근하다.^^; 주인공이 산책 중에 타워팰리스 쪽을 바라보며 “누군가의 가랑이 밑을 지나지 않았다는 건 내 자부심이다. 기품 있게 살자”라고 새해 다짐을 하는 장면은 짠하다. 김병익 선생님은 화자가 헤프다는 것, 천민스럽다는 것에 본능적인 저항감을 느낀다고 평했다. 나도 그 꿈에 기대고프다.


내 나이 스물하고 하나였을 때 어느 어진 이가 하는 말을 들었지. “금화든 은화든 동전이든 다 내주어버려라. 그러나 네 마음만은 간직하라. 진주든 루비든 다 내주어버려라. 그러나 네 생각만은 자유롭게 하라.” 그러나 내 나이 스물하고 하나였으니 이런 말은 소용없었지.

내 나이 스물하고 하나였을 때 나는 또 그가 하는 말을 들었지. “가슴속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을 결코 거저 주어지는 법이 없지. 그것은 많은 한숨으로 보답 받고 끝없는 후회에 팔린단다.” 이제 내 나이 스물하고 둘이 되니, 오, 그것은 진실, 그것은 진실.


주인공의 가족이 정담을 나누다 앨프리드 하우스먼(A. E. Houseman)의 <내 나이 스물하고 하나였을 때(When I Was One-And-Twenty)>라는 시를 암송하는 대목이 푸근하다. 이 시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기 마음을 함부로 건네면 그로 인해 권태에 시달리고 회한이 사무친다는 충고를 노래하고 있다는 식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좀 더 넓게 풀이해봐도 좋을 듯싶다. 싫증이 엄습하지 않도록 자기 삶의 주인의식 혹은 자존감을 지키라는 뜻으로 봐도 무방하다. 나는 이 시의 조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새해에도 지인들에게 마음을 냉큼 주었다가 실망하기도 하고, 스스로를 생각의 감옥에 밀어 넣기도 하겠지만.


내 나이 스물하고 여섯이다. 흔들리지 않는 마음, 중독되지 않는 생각을 건사하는 한해를 꾸려야겠다. “만 냥이 어찌 나를 도에 살찌게 하겠소(萬金何肥於道哉)?”라는 허생의 일갈이 내게도 함께 하길! 유능과 실용을 권하는 사회에서 마음공부와 역사공부를 팽개치지 말기를! 올해도 이 모자란 녀석과 함께 해줄 여러분 모두 새해 복 많이 만드시고 나누시길 바랍니다.^0^

Posted by 익구
:

우수리들

일기 2007. 12. 3. 13:31 |
우수리를 모아서 업데이트 해봤습니다.^^;

070723
김현근님이 쓴 『가난하다고 꿈조차 가난할 수는 없다』 (2006, 사회평론)를 우연히 집어들게 됐다. 과학영재학교를 수석 졸업하고 프린스턴 대학 수시 특차로 합격한 청년의 공부 이야기를 흥미롭게 읽었다. 제목이 너무 거창한 게 흠이지만 수재의 일상이 얼마나 시시한 것인가를 느끼게 해줬다(나는 그 시시함을 흠모는 하되 실천하지는 않는 녀석이다). 현근님은 소싯적 홍정욱 헤럴드미디어 사장의 『7막 7장』을 읽고 감명을 받았다고 하는데 어릴 적 나도 그 책을 읽었지만 내게는 큰 영향력을 끼친 거 같지는 않다. 왜 나는 그를 떠받들지 못하고 나와 다른 사람이 이 지구상에는 많구나 하는 식의 깨우침밖에 얻지 못했을까. 작년에 읽은 고승덕 변호사의 『포기하지 않으면 불가능은 없다』에 대한 교훈도 그와 별반 다를 바 없으니 이를 어찌할꼬.


사소한 트집을 잡자면 이런 식의 성공기는 인간은 노력만 하면 다 이룰 수 있다는 철학을 설파하기 일쑤다. 그러나 우리의 경험에 비추어 사람의 재능이 동질하지 않다는 점은 또렷하다. 아무리 공정한 경쟁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노력이 유일 변수가 되는 날은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물론 나는 그네들이 살인적인 학구열을 부인하려는 게 아니다. 나는 다만 현근님 같은 분들이 타인의 노력에 한계가 있음을 알아주고, 노력하려는 의지를 꺾는 환경을 살필 줄 아는 시야도 갖췄으면 좋겠다. 내심 뛰어난 머리는 사회의 공공재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싶기도 하다. 빼어난 재주는 자신에게 별로 보탬이 되지 않는 사람들을 챙기는 것으로 보답해야 하지 않겠냐는 대다수 범재들의 질투를 부러 부인하지 않겠다. 이 시기심은 의외로 온당할 때가 많기도 하다.


현근님은 “이것 또한 곧 지나가리라!” 문구를 인용했다. “슬플 때 절망하지 않고 기쁠 때 오만하지 않을 수 있는 명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142쪽)”라고 한다. 문득 잊고지내던 이 명구를 처음 접했을 때의 아찔함을 떠올랐다. 이스라엘의 다윗왕이 보석 세공인에게 “내가 큰 승리를 거둔 기쁨을 억제하지 못할 때 그 것을 조절할 수 있는 글귀를 새기고, 동시에 그 글귀는 내가 큰 절망에 빠졌을 때, 용기도 함께 줄 수 있는 글귀여야 한다”라고 주문했다. 보석 세공인은 문구를 고심하느라 끙끙 앓다가 솔로몬 왕자의 도움을 청했다. 솔로몬은 ‘이것 또한 곧 지나가리라’로 정했다. “왕이 승리에 도취한 순간 이 글을 보면 자만심이 가라앉을 것이고, 낙심 중에 이 글을 보면 이내 큰 용기를 얻어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게 될 것이다”라는 친절한 해설도 덧붙여서 말이다. 유대교 문헌 미드라시(midrash)에 전하는 이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가슴 뛴다.


그러고 보면 환희와 시련이 잇닿아 있는 경우가 많다. 세상에 수그러들지 않는 기쁨이나 견딜 수 없는 고통은 그리 많지 않은 듯싶다. 유한한 인생에서 무한한 것은 극소화되게 마련이다. 영민함을 뽐내던 솔로몬도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도서 1:2)”라고 읊조렸다. 하지만 덧없음이야말로 생명의 본질 아닐까? 구차한 변명 같지만 한번뿐인 삶은 어떻게 살아도 그 개인에게는 각별하다. 나는 아마 김현근, 홍정욱, 고승덕 같은 분의 삶의 궤적을 따르지는 못하리라. 비록 그들보다는 한참 게으르고 무식한 나이지만 그들과는 다른 보람찬 삶을 꾸려볼 수 있지는 않을까? 나는 절대적인 올바름도, 고정적인 아름다움도 믿지 않는다. 이 매력적인 사람들을 따르지 않으려면 적어도 ‘다른 삶’을 살아낼 수 있어야 한다.


071029
제임스 힐튼의 소설 <잃어버린 지평선Lost Horizon>에 나오는 샹그릴라(Shangrila)는 히말라야산맥에 있는 어느 마을이다. 책을 읽지 않아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묘사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소개된 바에 따르면 티베트 사원이 있고, 평화로운 대초원이 있는 곳으로 그려지는 모양이다. “순수한 자연상태란 지상에서 대다수의 인간이 가장 덜 사악하고, 가장 행복한 상태”라고 말했던 루소의 자연상태처럼 다툼과 갈등이 없는 곳이다. 거기다가 무병장수까지 한다. 힐튼이 이 소설을 썼던 1933년 당시는 제1차 세계대전의 여파와 대공황의 참상으로 뒤숭숭한 시대였다. 작가는 시절이 하수상할 때면 으레 찾고 싶은 이상향을 그린 듯싶다. 1942년 전쟁에 지친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메릴랜드주에 지은 대통령 별장을 샹그릴라라고 이름짓기도 했다.


1997년 중국 정부는 샹그릴라가 티베트와 맞닿은 윈난성(雲南省) 중뎬(中甸)과 더친(德欽)의 중간 지점이라고 발표했다. 2001년 12월에는 아예 중뎬의 지명을 샹그릴라(香格里拉)로 개칭했다. 중국은 제 나름대로 엄밀한 조사를 벌였다고 주장은 하지만 관광 수입을 노린 술수에 지나지 않는다. 중국이 괜히 동북공정 같은 일을 벌이는 게 아니다. 그네들은 무릉도원마저도 제조하고 있으니 말이다. 2003년 유네스코는 샹그릴라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했으며 샹그릴라는 윈난성을 대표하는 관광지가 되어 많은 돈벌이를 하고 있다. 중국 안에서 가난하기로 손꼽히는 소수민족들이 사는 윈난성의 살림살이가 이 덕분에 핀 것은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관광객 편의를 위한 개발로 옛 모습을 잃고 있다는 탄식도 적잖다.


중국 정부의 상술은 얄밉지만 이렇게 해서라도 낙후된 지역을 발전시키려는 고충은 나무라기 힘들다. 자연미에 인공미(!)를 더한 샹그릴라 사례는 우리에게도 배울 점이 있다. 사극 열풍으로 드라마 세트장은 여기저기 지어진 모양인데 그 수준을 넘어서는 관광정책이 보이지 않는다. 세계인의 가슴에 새겨지는 관광지를 몇 개쯤 가꾸는 건 거기서 얻는 수입 때문만은 아니다. 대한민국의 이미지와 자존심 차원의 문제다. 볼 것 없고 살 것 없는 나라가 경제 성장을 얼마나 더한다고 세계인들의 기억에 남고 존경을 받을 수 있을까. 조지프 나이(Joseph Nye)가 설파했던 ‘소프트 파워(soft power)’는 쉽게 말해 다른 나라의 마음을 끄는 힘이다. 미국의 세계지배 전략을 뒷받침하기 위한 논거로 제시된 이야기를 인용하는 것이 껄끄러워서 ‘매력’이라고 쓰기도 한다. 뭐라고 표현하든 우리에 걸맞은 샹그릴라를 찾자.


샹그릴라는 티베트어로는 ‘내 마음 속의 해와 달’이라는 뜻이고 말레이어로는 ‘영원히 젊은’이라는 뜻도 있다고 한다. 이 말처럼 마음 속에서 꿈과 행복을 찾으려고 노력하라는 소리로 들린다. 영원한 젊음은 또 어떤가. 사무엘 울만이 <청춘Youth>이라는 시에서 노래했듯 “청춘이란 인생의 한 시기가 아니라 마음가짐을 뜻한다”라는 시구와 만난다. 후배 성구가 샹그릴라라는 필명으로 블로그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일상의 소소함에서 행복도 캐내고, 부조리도 헤집길 바란다. 안휘준 전 문화재위원장은 후생가외(後生可畏)가 아니라 후생가애(後生可愛) 정신을 강조하셨다. 사랑 받을 만한 후배이니 후생가애는 애초에 당연하고, 후생가외도 코앞이다. 나도 젊으니 함부로 후생가외를 외쳐서는 안 되겠지만. ^^;


071104
이기백 교수는 2003년 초에 펴낸 『한국전통문화론』에서 무술(巫術) 신앙은 인습의 대표적인 예로서 계승할 가치가 없다는 문제 제기를 했다. “기복신앙으로 전락한 무술신앙은 이미 오늘의 한국에서 종교적인 사명을 감당할 능력을 상실”했다는 주장이다. 전통문화를 선택적으로 계승하자는 주장은 동감할 만하다. 하지만 무속신앙을 박물관 전시품이나 연구자료로만 박제화하라는 견해에는 조심스럽다. 종교로서 기복신앙적 성격은 있게 마련이라는 항변도 설득력 있지만, 무속신앙이 민중의 물질적 희망을 채웠다는 점을 흘겨 볼 필요는 없을 듯싶다.


오랜 세월 지배계층에게 존중받지 못하고 서민의 종교로 자리매김한 무속은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무속은 나라에서 해주지 못하는 일을 신을 이용해 스스로 해결하겠다는 몸부림이었다. 인간의 생사화복, 불로장생 같은 살아가는 문제에 치중하다 보니 윤리적 요소나 정신의 문제가 적다는 단점이 있지만 그 단점은 무속의 특색일 따름이다. 그리고 그 단점은 한국에 전래된 자칭 고등종교들에도 고스란히 이식됐다. 팔이 안으로 굽는 걸 부추길 의도는 없다. 하지만 제 것을 부러 폄하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우리가 고쳐야할 습속인 듯싶다.


최준식 교수는 『최준식의 한국 종교사 바로보기』에서 한국의 종교 전통은 유불선(儒佛仙)이 아니라고 역설한다. 한국의 종교전통에서 ‘선’보다 중요한 것은 ‘무(巫)’이므로 이것으로 대체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 종교사 안에서 무교(巫敎)가 차지한 위상을 재정립하자는 제안은 신선하다. 무당을 소재로 한 소설 『계화』에 나오는 “무당은 행복한 사람들을 볼 수가 없다. 불행해서 널 찾아왔다가도 행복해지면 침을 뱉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서러워도 하지 말고 노여워도 하지 말고 원망도 하면 안 된다. 무당은 아픈 사람, 억울한 사람, 불행한 사람을 위해 태어났다”라는 대목이 떠오른다.


무속은 비운의 죽음일수록 오히려 각별하다. 한국인에게 곧잘 한(恨)의 정서가 있다고들 한다. 이는 결국 한스러움이 살아가는 사람의 생활을 너무 헝클어뜨려서는 안 된다는 문화다. 한은 풀어야 하는 것이다. 이를 체현한 것이 굿이다. 계승할 가치가 있는 전통만 이어 받는다는 명분으로 서민의 소박한 기원을 무시할 용기는 내게 없다. 고통에 대한 연민과 무병장수에 대한 갈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오늘날 지역 화합의 마당으로 살리는 방안을 고심해봤으면 좋겠다. 나는 무속을 부정하고서 우리가 꾀할 부귀영화가 그리 탐스럽지 않다고 본다.


나는 무속을 권장하자고 주창하는 게 아니다. 그냥 있는 건 내버려두자. 무속을 미신이라고 지나칠 정도로 험담하는 분을 보면 문득 섬뜩하다. 천주교가 우리나라에 도입될 때 세계 천주교 역사에 유례 없는 극심한 박해가 자행되었던 기억에 오싹하다. 무녀(巫女)의 금법(禁法)이 엄하던 시기의 일이다. 장령(掌令)으로 있던 조자(趙孜)는 무녀들을 멀리 내쫓거나 집단 수용하자고 아뢴다. 세종대왕은 “무릇 법을 세우는 것은 시행하기 위한 것인데, 시행할 수 없는 법은 세울 수 없는 것이다(凡立法, 爲可行也, 不可立不可行之法也)”라고 완곡하게 거절한다(세종실록 제101권 세종 25년 9월 2일). 이 마음가짐을 좀 배우면 안 될까?
Posted by 익구
:

개를 위해 시호를 짓다

일기 2007. 10. 22. 05:13 |

(시호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익구닷컴 내 졸문 <한국의 시호(諡號) 탐구>를 참조해주세요)


시호(諡號)는 행적이 뛰어난 사람에게 국가가 내려주는 것이었다. 대개는 높은 벼슬을 한 사람에게 내려지는 게 관례다. 하지만 관직에 뜻을 두지 않아 큰 벼슬을 하지 않았던 김시습은 청간(淸簡), 서경덕은 문강(文康), 조식은 문정(文貞)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이와 반면에 학문이 높고 덕망이 있음에도 시호가 없는 경우에는 교우나 제자, 친지나 고향 사람들이 추도하는 의미로 시호를 짓기도 했다. 나라에서 지어준 시호와 구별하여 사시(私諡)라고 한다. 요절한 반려견 야니를 애도하기 위한 시호를 짓기 위해 한국사에 있어 시호의 의미와 용례를 살펴봤다. 내가 하는 일이 으레 그렇듯이 배보다 배꼽이 커져 버려 한 편의 글을 완성했다(졸문 “한국의 시호(諡號) 탐구”참조).


개에게 시호를 주는 게 너무 괴상한 일은 아닐까 고심했으나 사사로이 시호를 쓰기로 결정했다. 오늘날 시호가 쓰이지 않는 만큼 참례(僭禮)라고 구박할 여지도 별로 없어 보인다. 보다 근본적으로 생명권의 개념을 확장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준 야니에게 사람과 개의 엄격한 분별은 어울리지 않는다. 불가에서는 인간과 축생을 똑같이 보기 때문에 절에서 함께 생활하던 개가 죽으면 49재를 치러준다고 한다. 본적이 없어 진짜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키우던 개를 49재 지내줬다는 애견인의 이야기는 들은 바 있다. 여하간 야니의 49재 즈음해 시호를 건넨다. 부디 세계 최초가 아니길 바란다.^^; 이민홍 충북대 교수님이 당(唐)의 주석가 장수절(張守節)이 『사기(史記)』를 해설한 『사기정의(史記正義)』의 한 편인 시법해(諡法解)와 북송(北宋)시대 문장가 소순(蘇洵)의 『시법』을 번역해 펴낸 책이 있어 큰 도움을 얻었다(이민홍 편, 『諡號, 한 글자에 담긴 인물 評』, 문자향, 2005). 한국의 시법이 이 내용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판단해 다른 전거를 찾기보다 이 책으로 시호를 정하기로 했다.


야니의 시호를 강회(强懷)라고 지었다. 소순의 『시법』에 따르면 강(强)의 시주(諡註, 시호에 담긴 뜻) 가운데 “죽어도 정을 옮기지 않은 것(死不遷情)을 强이라 한다”는 내용이 있다. 생전에 그토록 다정다감했던 야니에게 어울리는 듯싶다. 또 시법과 관계없이 활발하고 강인했던 성품과도 잘 맞는다. 조선시대에 시호를 정할 때 보통 세 가지 안을 내는데 이를 시호망(諡號望)이라 한다. 1안을 수망(首望). 2안을 부망(副望), 3안을 말망(末望)이라 부른다(비단 시호를 정할 때뿐만 아니라 사람을 뽑거나 할 때도 이러한 3안제를 쓴다). 회(懷)자는 확고부동했던지라 수망은 강회(强懷), 부망은 강회(康懷), 말망은 경회(敬懷)라고 해서 고민하다가 수망으로 결정했다. 강(康)은 온화하고 선량하여 좋아하고 즐거워할 만한 것이라는 뜻이 있는데 시법과 무관하게 나를 평안하게 해준 것에 대한 고마움을 표하기에 좋은 글자 같았다. 막판까지 경합했으나 말썽꾸러기 녀석에게는 강(强)이 좀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아 정말 나는 혼자서도 잘 논다.^^;


강(强)은 춘추전국시대의 역사서 『국어國語』에 그 출전이 있다. 진(晉)나라 헌공(獻公)의 애첩 여희의 간계에 빠져 태자인 아들 신생(申生)을 폐하려 했다. 신생의 사부인 두원관(杜原款)이 죽임을 당하기 전에 태자에게 전언을 남기며 “군자는 정을 버리지 않고, 참언에 대해 변명하지 않으며, 참언으로 인해 죽더라도 미명을 남긴다”라는 말을 인용한다. 이어서 죽어도 정을 옮기지 않음이 강(强)이며, 정을 지켜 아버지를 즐겁게 하는 것이 효(孝)이며, 자신을 죽여 뜻을 이룸은 인(仁)이요, 죽더라도 임금을 잊지 않음은 경(敬)이라 말한다. 깨끗한 죽음을 권하는 무서운 내용이다.^^; 주위에서는 무고한 태자가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신생은 이를 마다하고 사부의 가르침을 받아서 결국 자결한다. 여희는 신생의 이복 동생인 중이(重耳)와 이오(夷吾)마저 죽이려 해서 이들 형제는 진나라에서 도망쳤다. 동생인 이오가 먼저 군주가 되고, 중이는 19년 동안 떠돌다 진나라로 돌아오는데 그가 바로 제환공(齊桓公)의 뒤를 이어 패자(覇者)가 된 진문공(晉文公)이다(자세한 내용은 『국어』의 「진어晉語」참조).


회(懷)는 행실은 자애로우나 일찍 죽은 것(慈行短折), 지위를 잃고 죽은 것(失位而死)을 일컫는다. 장수절의 시법해에 의하면 단(短)은 60세 못된 것이고, 절(折)은 30세가 못된 것이다(短未六十, 折未三十). 회(懷)와 비슷한 의미를 갖는 시자(諡字)로는 애(哀), 도(悼), 상(殤), 민(愍) 등이 있다. 애(哀)는 공손하고 어질지만 일찍 죽은 것, 도(悼)는 중년이 안 되어 요절한 것, 상(殤)은 요절하여 이루지 못한 것, 민(愍)은 나라에 재난이나 반란을 만난 것 등의 의미를 갖고 있다. 왕위에 올랐다가 요절하거나 뜻을 펴지 못했을 때 주로 쓰는 시자들이다. 한국사에서 이런 시자를 받은 임금을 대강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신라 제40대 애장왕(哀莊王)은 숙부 김언승의 반란 때 살해되었고, 제44대 민애왕(閔哀王)은 희강왕을 협박해 자살하게 하고 스스로 왕이 되었으나 김우징이 장보고의 힘을 빌려 쳐들어오자 패하여 병사들에게 살해되었다(閔은 愍과 상통하는 글자다). 제55대 경애왕(景哀王)이 견훤에게 핍박당해 자살하게 된 것은 유명한 사실이다.


고려 제7대 목종(穆宗)은 처음에는 묘호가 민종(愍宗), 시호는 선령(宣靈), 능호가 공릉(恭陵)이었다. 이는 모두 목종을 시해한 강조(康兆)가 지은 것이라 현종(顯宗) 3년 묘호를 목종(穆宗), 시호는 선양(宣讓), 능호는 의릉(義陵)이라 고쳤다. 제14대 헌종(獻宗)의 시호는 회상(懷殤)이었다가 예종(睿宗)이 즉위한 뒤 공상(恭殤)이라 고쳤다. 헌종은 숙부 계림공 왕희에게 사실상 왕좌를 찬탈당하고 후궁으로 물러나 14세에 사망했다. 조선 제8대 예종(睿宗)이 재위 13개월만에 죽자 명나라에서 양도(襄悼)라는 시호를 주었다. 조선 제21대 영조(英祖)의 둘째 아들이 뒤주 속에서 사망하자 영조는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다. 훗날 정조(正祖)가 즉위 후 10일만에 사도세자의 시호를 장헌(莊獻)를 고쳤다. 도(悼)자를 바꾼 것으로 보아 높이려는 의도로 보인다. 여하간 회(懷)라는 글자에는 야니를 가슴에 묻고 간직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는 셈이다. 아마 옛사람들도 그랬으리라.


여담이지만 일본 에도시대의 5대 쇼군(將軍) 도쿠가와 쓰나요시는 ‘개 장군’이라는 별명이 있다. 1685년 그가 공포한 생류연민령(生類憐みの令)은 참 서슬 퍼랬다. 동물을 학대하거나 죽였다는 이유로 유배나 할복에 처해졌다고 한다. 처음부터 이런 끔찍한 법이었던 건 아니고 당초에는 중병에 걸린 생물을 내다버려서는 안 된다 정도였다. 쓰나요시는 포고령을 계속 고쳐서 물고기, 뱀, 쥐는 물론 조개, 새우 등 모든 생물을 죽이거나 먹지 못하게 했다. 달걀을 먹는 것이 금지되고, 개나 고양이 등을 죽인 죄로 도망가거나 죽은 사람이 1만 명에 이르렀다고 하니 이쯤 되면 공포다(심지어 모기를 죽였다고 처벌을 받았다). 살생의 업보 탓에 아들이 없다는 어느 스님의 충고를 따른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으니 확실치 않다. 그는 생류연민령만은 폐지하지 말라고 유언했으나 그가 죽은 뒤 열흘만에 폐지됐다. 쓰나요시가 개띠였기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여러 동물 중에 개를 특히 아꼈다. 개마다 색깔과 특징을 기록하고 사망신고서 제출을 의무화하는 등 견공의 위세가 높아지자 버려지는 개들이 급증했다.


넘치는 개들을 수용하기 위해 에도 근교에는 수십 만평에 달하는 사육장이 건설됐다. 개를 먹여 살리기 위한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쓰나요시는 특별세를 거두기도 했고, 악화(惡貨)를 주조해 화폐주조 차익을 챙겼다. 전국시대의 호전성을 누그러뜨리려는 시도였다는 평가가 있긴 하지만 쓰나요시의 정책은 너무 넘쳤다. 박재형의 『해동속소학海東續小學』에는 율곡 이이가 쇠고기를 먹지 않으면서 “일을 부려먹고 도살하여 그 고기까지 먹는 것은 어진 행실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대목이 있다. 농사일에 소를 써야 했던 조선과 일본의 사정이 비슷하다는 가정 아래 쓰나요시가 이 정도 마음가짐에서 그쳤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쓰나요시 만큼이나 엽기적인 사례는 나치 정권에게서 찾을 수 있다. 틸 바스티안의 『가공된 신화, 인간』에는 나치가 집권한 지 8주 만에 동물 학대를 금지했다고 한다. 유대인을 가스실로 보내고 그들에게서 짜낸 기름으로 비누를 만들었던 나치 집단의 분열증이 섬뜩하다. 자기 위주로 생각하는 눈먼 최선을 경계해야겠다. 내 사랑이 남에게 폐를 끼칠 수도 있음을 배웠다. 여기까지 고민하고 있는 만큼 개에게 시호를 지었다고 불편해하실 분들에게 너그러운 양해를 청한다. - [無棄]

Posted by 익구
:

好學日記(07년 7월)

일기 2007. 8. 3. 07:11 |

070706
<평창 그리고>라는 제목으로 어느 익명게시판에 올린 글

평창이 아쉽게 졌습니다. 원래 스포츠와는 담 쌓고 지내는 저인지라 특별히 관심을 두지는 않았지만 평창 어린이들이 뚝뚝 흘리는 눈물은 가슴을 짠하게 합니다. 러시아의 막대한 로비자금이라든가 유럽의 지역주의 같은 풍문을 듣다보면 올림픽헌장이 규정하고 있는 올림픽정신은 어디에 가있는가 싶기도 합니다. 프리젠테이션 동영상에서 고 이영희 할머니가 북녘에 있는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보며 콧잔등이 시큰해졌어요.


이제 지난 일이니 솔직히 털어놓자면 한승수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위원장은 오래 전부터 양지를 찾아다닌 철새 정치인의 극치로 기억하고 있었던지라 강원도에 쓸 사람이 저렇게 없나 내심 투덜거리고 있었습니다. 비자금 조성 및 횡령 사건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박용성 두산중공업 회장은 평창올림픽 유치 활동 지원을 이유로 사면을 받아 제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죠. 이분들을 향한 제 서먹서먹함이 쉽게 가시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좀 덜 미워하는 계기가 된 거 같기는 하네요.


민주노동당이 이번 사안에 대해 내놓은 논평이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특히 유치 준비 과정에서 환경문제에 관한 염려가 적었다는 점을 지적하는 건 꽤 용기 있는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비용편익분석에서 환경 비용이 얼마나 고려됐는지 의심스러웠거든요. 아울러 월드컵, 아시안게임 유치 후 시설유지에 곤욕을 겪고 있다는 점을 들어 “국제체육경기가 많이 치러져도 그것이 우리 삶의 질을 개선되거나 쾌적하게 만드는 것과는 무관”하다는 논변은 꽤 설득력 있습니다.


인터넷 언론 프레시안에서 윤효원님의 글을 읽다가 2명 이상 복수의 IOC 위원을 둔 나라들 가운데 올림픽 참가 경험을 가진 운동선수 출신이 아닌 위원만을 둔 나라는 한국(2명)과 중국(2명) 말고는 없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한국의 경우 두 명 모두 대기업 회장 출신이며, 중국의 경우 두 명 모두 국가 관료 출신이라고 하네요. 포스트 김운용 시대를 맞아 우리네 스포츠 외교력은 어떤 식으로 신장시켜야 할지 고심해볼 문제입니다.


올림픽을 비판적으로 톺아보는 이런저런 시각들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습니다. 유치활동 동안 지자체의 행정력이 편중된 만큼 이제 그간 평창주민들에게 미뤄뒀던 복지후생을 챙겼으면 좋겠습니다. 하나가 된 평창주민이라는 구호도 좋지만 시골에 살면서 겪었을 평창주민들의 불편을 꼼꼼하게 살필 때가 아닌가 싶네요. 아마 그간 신경을 못 쓰셨을 법한 평창도서관의 도서 확충도 서두르시길 바랍니다. 끝으로 고운 정성을 보여주신 평창주민 여러분 고맙습니다.^-^


<한 줄 요약>
만일 네가 나와 다르다면, 너는 나를 해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풍요롭게 하는 것이다 - 생텍쥐페리


070714
오늘의 소장비평가들 가운데는 독자적인 사유 공간을 지닌 사람이 별로 많지 않다. 그들 중 상당수가 즐겨 참조하는 이론가들의 이름을 한번 보자. 너도나도 김윤식, 김현, 백낙청이요, 너도나도 루카치, 바흐친, 보드리야르, 제임슨, 푸코다. 왜 이렇게도 획일적일까? 이보영이나 이상섭이나 천이두의 업적(그것들은 다 누구누구의 업적 못지않게 소중한 업적들이다)에 큰 관심을 기울이고 그것으로부터 귀중한 깨달음을 얻어내는 사람은 왜 안 나오는가? 유행도서 목록에 올라 있지 않은 외국인 학자의 사상에서 뜻있는 참조사항을 구해오는 사람은 왜 이렇게도 적은가? 남이 다 읽는 책만 읽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얘기란, ‘남이 다 할 수 있는 얘기’의 테두리를 넘어서기 어려운 게 아닐까? 김윤식이나 김현이나 백낙청은 남이 다 읽는 책만 읽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런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들은 김윤식이 되고 김현이 되고 백낙청이 된 것이다. 그런데 김윤식, 김현, 백낙청을 존경해서 그들의 책을 즐겨 읽는다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 정작 그들의 본질은 배우지 않고 있으니 도대체 어찌된 영문인가?
이동하, 『홀로 가는 사람은 자유롭다』, 문이당, 1996, 191쪽


고종석 팬카페에 언어의 마술사님(이하 언마)이 올려주신 <고종석을 넘어서>라는 글에 인용된 글이다. 언마님은 “고종석을 읽고서 고종석 이상이 보여야 한다”는 지인의 충언도 언급했다. “지금의 나에게 고종석은 무조건적인 복종의 대상이 되는 것”인데 “그와 다른 시각으로 고종석을 비판한다는 것은 지금의 내게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임을 돌아보는 글을 읽고 가슴이 짠했다. 따져보니 나는 이런 반성적 물음을 던질 용기조차 없었다. 나는 고종석 선생님을 극복하겠다는 의지가 희미하고, 고 선생님을 넘지 못했다고 크게 좌절할 거 같지도 않다. 고 선생님을 넘어서야 한다는 명제는 좀 깔끄럽고 삭막하다. 나는 이 명제 자체는 추구할 만하지만 그게 또 하나의 강박관념이 되어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사람의 (노력을 포함한) 재주가 불공평하다는 걸 실감한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사람 가치의 우열을 따지는 건 매우 어렵고 조심스런 문제다. ‘고종석 이상’이라는 개념도 좋지만 ‘고종석과 다른’ 매력을 만들어보는 것도 꽤 도전해볼 만한 일이 아닐까. 인용문의 취지나 언마님의 고심도 결국 대가(大家)와 다르게 보는 안목을 갖기 위한 노력이니 만큼 결론은 대동소이한 셈이다. 설령 차별화(?)에 실패한다고 해도 나쁠 건 없다. 세상에는 지식 도매상보다는 지식 소매상이 많고, 지식 소매상보다는 지식 유통상이, 그보다는 지식 소비자가 더 많기 마련이다. 꽤 괜찮은 유통상이나 소비자가 된다고 해서 그 사람의 무게가 많이 낮아질 거 같지는 않다.


아Q의 정신승리법은 자신의 현실 속의 패배를 머릿속에서 승리인 것처럼 전환하는 기술이다. 정신승리법의 폐단은 덜 배우게 만들고, 덜 고치게 만드는 데 있다. 별 것도 아닌 차이점을 과대포장해서 스스로를 상찬하거나 앵무새처럼 외우는 삶도 그 나름의 의미가 있다며 안일한 상대주의에 빠지는 것 같은 게 정신승리법의 징후일 게다. 틈만 나면 나를 파고드는 정신승리의 유혹을 떨쳐내고 내 스스로 사고하려면 얼마나 더 뼈를 깎는 소리가 들려야 하는 걸까? 그것이 독창적인 산출물은커녕 상식을 건사하고 양심을 견지하는 것에 지나지 않더라도 말이다.


070717
앤드류 헤이우드의 『정치학』을 발췌독하다가 환경주의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맘에 드는 대목을 발견했다. 생태주의자에는 “얕고 옅은(shallow and light)” 사람과 “깊고 짙은(deep and dark)” 사람이 있다는 분류다. 사실 모든 주의자 아니 모든 보통 사람들도 이렇게 나눠봄직 하다.


얕고 옅다 보면 합리적 이기주의가 기득권 옹호와 현상유지를 정당화하는데 복무하는 현실 추수주의로 전락할 염려가 있다. 깊고 짙다 보면 실질적 행동주의가 경직되고 독단적으로 변해 근본주의로 빠질 염려가 있다. 이 사이를 잘 조율할 수 있다면 함민복 시인의 시구대로 모든 경계에서 꽃을 피울 수 있으리라.



070718
남의 생일 잘 안 챙기는 내가 제 생일을 끔찍이 여긴다면 민망한 일이다. 무덤덤하게 보냈지만 생일 축전은 과분해서 고맙다. 얻어먹은 점심도 여느 때보다 달았고, 순두부찌개와 유부초밥이 함께 한 저녁도 황홀했다. 이맘때 늘 하는 말이지만 다음 생일 때는 “철” 좀 들기를 바란다. 철에도 귀천(貴賤)이 있다면 너무 야박한 소리겠지만 좋은 철을 많이 품고 나쁜 철은 조금만 가지도록 노력해야겠다. 숙명 혹은 사명이란 말은 참 무섭지만 그래도 내게 허락된 “가지 않을 수 없던 길”이 무엇인지도 찾아봐야겠다.


학교에서 만난 친구와의 담소 속에서 내가 그간 무능하고 미성숙하다고 생각했던 어느 분에 대한 악감정이 과도한 것임을 깨달았다. 그 때 당시 그 분과 난 약간 언쟁이 붙었고 나는 “할 수 없군!”을 외치며 미련 없이 돌아서겠다며 물러났었다. 지금 돌아보니 오만했던 내 잘못이 더 크다. 누군가를 함부로 미워하는 걸 경계하는 계기로 삼자. 원망을 버리니 이렇게 홀가분한 것을 이제야 알겠다. 생일 같은 개인적 기념일에 평소 탐탁지 않게 여기던 인물에 대한 언짢은 감정을 눅이는 시도를 해보는 건 참 멋지다. 루쉰은 자신의 비판자들을 향해 “그대로 나를 증오하라. 나 역시 하나도 용서하지 않겠다”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내 미움은 수술용 메스처럼 적재적소에 쓰였으면 좋겠다.


제 뼈와 살과 피와 땀이 되어 주시는 스승님들, 형누님들, 벗님들, 동생들 모두 고맙습니다.^0^


070725
미래창조대통합민주신당(가칭)이라니, 외우기도 힘들다. 이른바 범여권의 이합집산이 이제 얼추 정리가 되는 모양이다. 17대 총선에서 152석을 얻었던 정당이 이제 원내 3당으로 밀려나는 역사적인(!) 순간이다. 김한길 포함 20명의 의원들은 열린우리당을 나온 다섯 달 사이에 탈당을 두 번 하고, 새로운 정당에 세 번 몸담는 대기록(?)을 세웠다. 누구에게나 제 밥그릇은 중요하다, 아니 숭고하다. 하지만 세금으로 먹고사는 공인이라면 그 밥그릇의 숭고함을 조금 낮출 필요가 있다. 어쩌면 지금 목격하는 희대의 촌극은 세금의 지엄함을 망각한 이들이 너무 많은 권세를 누리고 있기 때문에 벌어지고 있는 지도 모른다. 2007년 대선과 2008년 총선으로 이어지는 선거 일정 속에서 행정부, 입법부, 지방권력까지 모두 장악한 수구세력이 등장할지 모른다는 우려는 품어봄직 하다. 그런데 그걸 막겠답시고 나선 인물들의 행태가 그리 떳떳하지 못해 나를 서글프게 한다.


스티븐 런치만이 쓴 『1453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2004, 갈라파고스)에는 비잔티움이 서방의 지원을 얻기 위해 교회통합 문제에 매달리는 대목이 나온다. 동서 기독교계는 각종 교리 해석과 실천 문제를 놓고 갈렸다. 속인 사제의 혼인에 대해 논쟁했고, 성찬용 빵이 발효된 것이어야 하느냐 아니냐를 놓고도 다퉜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교권의 문제였다. 로마 주교(교황)의 위상을 놓고 양측이 물러설 수 없었다. 동방 정교회는 모든 주교는 기본적으로 동등하다고 믿었고, 로마 주교는 수석의 지위를 가질 뿐 최고의 수장으로 여기지 않았다. 이와 반대로 교황의 절대적 권위를 주창하는 서방 교회는 이를 양보하지 않았다. 비잔티움의 요안네스 8세는 서방 국가들의 지원을 꾀하기 위해 동서 교회통합을 억지로 추진했다. 비잔티움의 많은 지식인들이 반발했고 시민들은 분열했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투르크에게 함락될 때까지 그토록 갈망하는 서방의 도움은 거의 없었다고 역사는 증언하고 있다. 신뢰와 존중을 바탕으로 한 화해가 아닌 꿍꿍이로 맺어진 통합이 얼마나 실속 없는지를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까 싶다.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기 전날 밤 소피아 성당은 북적였다. 라틴인과 통합론자들이 더럽힌 곳에서 예배를 볼 수 없다는 독실한 그리스인들도 이날만은 소피아 성당에서 기도했다. 교회통합을 반대했던 사제들도 교회통합파와 함께 예배를 보았다. 글쓴이는 콘스탄티노플에서 동서 교회통합이 이루어졌다고 사뭇 비장하게 전한다. 그러나 이건 미화된 묘사일 뿐 하룻밤의 일치로 이네들의 갈등이 다 메워지지 못했음은 분명하다. 다만 외침의 공포로 말미암아 내부에서 티격태격할 동력을 잃었을 뿐이다. 제국의 최후를 함께 하는 유대감 정도로 이해하면 그만이다.


뜬금없이 옛날 이야기를 꺼내든 까닭은 오늘날의 현실이 갑갑해서다. 입으로는 수구 세력과 일전을 불사하겠다는 이들이 내부에서 투쟁하는 모습을 보는 건 괴롭다. 이들에게는 소피아 성당에서의 맞잡음 정도도 보이지 않는다. 특히 여권 일각에서 한솥밥 먹던 동지 가운데 몇몇을 친노파라고 딱지를 붙여 놓고 참여정부의 모든 과오를 덮어씌우는 희생제의를 펼치는 건 추악하고 민망하다. 참여정부와 열린우리당의 공과에서 자유로운 신당을 만들려는 욕심은 너무 지나치다. 책임질 줄 모르는 사람에게 나를 대리하게 만든다는 건 수치스럽다. 비록 정치적 측면의 개혁에 치중했다는 비판을 받지만 기간당원제 확립이나 지역주의 청산, 깨끗한 정치 구현 및 각종 개혁 입법들은 신당도 이어받아 마땅한 과제들 아닌가. 기왕지사 신당을 하겠다고 나선만큼 이제 차분히 정책으로 승부하길 바란다. 당최 기존 정당들과 얼마나 차별화 하는지 흥미롭게 지켜보겠다. 아참 점심식사는 잡탕밥을 권한다.^0^


070729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무장세력에 의한 한국인 피랍사태가 계속되고 있다. 지켜보는 사람의 애간장이 탄다. 지금 고초를 겪고 있는 분들이 죄를 넘어선 벌을 받고 있다는 건 또렷하다. 한국 사회의 상층부에 있는 사람들이 도무지 제 죄값을 제대로 치르지 않는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이들의 수난은 너무 지나치고 안쓰럽다. 일단 무탈하게 돌아오기를 기원하고 그 다음에 비판하자는 주장도 일리가 있지만 그들은 비판을 받을 필요가 없을 만큼 이미 많은 고통에 시달렸을 게다. 이번 사태를 기점으로 개신교의 배타적 선교 행위 등에 대한 반감이 폭발한 것은 우리 사회의 소통구조가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지에 대한 방증이기도 하다. 이런 문제 제기가 평소에도 좀 있고 개신교인들이 이를 수용하려는 노력을 꾸준히 기울였다면 이런 넘치는 반응은 좀 줄일 수 있었으리라.


샘물교회 관계자 등의 분들이 봉사를 강조하는 건 민망한 일이다. 나는 범속한 인물인지라 순수한 봉사 같은 말을 못 믿겠다. 설령 그 순수함을 인정하더라도 그 간의 편협과 오만에 대한 면죄부가 되지는 않는다. 궁극적 목적이 선교라면 얼마나 그 순수성을 인정할 수 있을지는 어려운 문제다. 일제 강점기 때 신사 참배 강제는 과연 순수했을까? 조선 성리학자들의 사문난적 타령은 과연 순수했을까? 정도전의 <불씨잡변>은 순수한 학문적 동기일까? 나는 모든 이들이 봉사라는 말 대신 선교라고 해야 마땅하다고 주장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끝끝내 봉사라는 말에만 갇혀 있는 분들이 상대적으로 더 가엽다. 순수함이 극단주의자들의 도피처가 되는 경우는 늘 있어 왔다. 순수는 면책의 도구가 아니다.


여하간 선교가 명확하다고 하더라도 선교단의 활동은 봉사와 매우 흡사했을 공산이 크다. 적어도 한국에서 볼 수 있듯이 불신지옥 운운하는 저열한 행동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한양대 이희수 교수님에 따르면 “이슬람 국가에서는 선교라는 것이 이슬람법을 위반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세속법에도 위배되는 행위”라고 한다. 기독교 선교뿐만 아니라 이슬람 선교도 금지되어 있다는 설명이 놀랍다. “신앙은 개인의 영역에서 머무는 것이기 때문에 신앙을 공적인 영역으로 끌어들여 강제해서는 안 된다는 이유”라니 선뜻 믿기지 않는 감이 있지만. 적어도 민간인을 살상하는 광신도들에게는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어쩌면 그들이 외세를 반대하는 독립투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탈레반 집권 시절의 철권 통치를 살펴보면 그들은 문화의 특수성을 주장할 자격이 없어 보인다. 미국도 심심지 않게 어기는 제네바 협약을 탈레반더러 준수하라고 촉구하는 것 또한 허망하니 답답하다.


나는 인질들의 무사 귀환을 고대하지만 그 이상의 적극적인 관심을 보일 용기는 없다. 이네들이 돌아오면 하나님의 은총을 운운할 게 틀림없다는 식의 댓글을 많이 읽었다. 연말 시상식에서 팬들보다 하나님께 먼저 영광을 돌리는 연예인들을 죄다 탐탁지 않게 여기는 나 역시 그런 광경이 펼쳐진다면 많이 언짢을 거 같다. 나는 나중에 덜 실망하기 위해서라도 무덤덤하게 비켜서 있고 싶다.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선의다. 더군다나 나는 아직도 강제 예배에 반대하며 단식 투쟁을 해야했던 강의석님이 잊혀지지 않는다. 개정 사립학교법에 반대하던 종교 재단 관계자들의 탐욕은 얼마나 끔찍한 것이었던가.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의 벗이었던 예수님의 삶을 대강은 들어 알고 있다. 제3자 입장에서 주제넘은 참견이겠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이 기득권을 옹호하고 수구세력에 복무하는 건 그리 떳떳하지 못한 일이다.


고귀한 생명이 위협받고 있는 지금 한국 개신교의 천격(賤格)을 고쳤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얼마나 불순한가. 하지만 그 불순함은 또한 얼마나 마땅한가. 이런 불순함이 우리 일상에서 자유롭게 논의되길 바란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Posted by 익구
:
070604
1959년 마오쩌둥(毛澤東)은 대약진운동의 실책을 인정하고 국가 주석직에서 물러났다. 류사오치(劉少奇)와 덩샤오핑(鄧小平)은 수정주의 노선인 조정 정책으로 대약진의 실패를 만회해갔다. 삼자일포(三自一包) 등으로 개별적인 경제주체의 운용 폭이 확대되면서 생산의욕이 크게 향상되는 등 백묘흑묘론(白猫黑猫論)으로 표상되는 경제중심주의가 득세하기 시작했다. 이에 마오쩌둥의 입지가 좁아지자 이에 반발하는 홍위병 세력이 조직돼 1966년부터 1976년까지 문화대혁명이 일어난다. 1차 표적이 된 류사오치는 손자뻘인 홍위병들에게 “제군들이 나 개인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중화인민공화국 주석의 위엄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제군들의 행동은 나라를 모욕하는 것이다”라며 항변했다. 하지만 그는 갖은 능욕을 당했고, 모든 공직이 박탈된 채 비참하게 죽었다. 문혁은 유토피아를 빌미로 벌어진 참혹한 파괴극이었다. 문혁이 계승이나 논쟁의 대상이 아니라 극복의 대상임은 또렷하다.


1981년 제11기 6중전회에서 통과된 「건국 이래 당의 몇 가지 역사문제에 관한 결의」에서 공식적으로 문혁과 모택동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내려졌다. 다만 모택동이 중국혁명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인정해 공적이 첫째이고 오류를 두 번째라는 평가를 내렸다. 덩샤오핑 개혁개방정책은 지역별, 기업별, 개인별 격차와 권력을 남용한 경제 부정, 인플레이션과 도시민의 실질소득 저하, 실업자 증가, 배금주의적 사고방식 등의 문제를 낳았다. 덩샤오핑은 정치적 안정과 당의 지도를 우선시 해 정치적 민주화 요구를 무시했다. 그러나 급진적 자유주의자로 불리던 후야오방(胡耀邦) 공산당 총서기는 상당한 수준의 정치적 민주화를 담고 있는 정치 개혁을 추진함으로써 보수파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민주화 시위 진압에 미온적이었다는 이유로 실각한 후야오방이 1989년 4월 사망하자 베이징대학생을 중심으로 그의 명예회복과 민주화를 주장하며 1989년 6월 4일 제2차 천안문 사태가 촉발됐다. 민주주의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던 시위 군중들에게는 정말로 총알이 날아갔다.


후야오방의 뒤를 이었던 자오쯔양(趙紫陽) 총서기는 참사가 벌어지기 전인 5월 19일 천안문광장의 학생들을 찾아가 “여러분의 충정을 이해한다. 너무 늦게 찾아와서 미안하다”라고 사과하며 눈물을 흘린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반동 분자를 지지했다는 죄목으로 실각했고 2005년 1월 사망할 때까지 연금 생활을 했다. 힘없는 2인자의 소신 있는 패배에 옷깃을 여민다. “경제 개혁은 정치 개혁과 결합하여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설파한 자오쯔양의 논리는 민주주의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고심하게 만든다. 사회주의를 내걸고 있지만 어느 자본주의 사회보다 더 자본주의적인 중국 정치제제의 특수성은 얼마나 더 유효할 것인가. 공산당 일당 독재를 유지하면서 시장경제체제를 도입하는 이원적 지배체제가 앞으로도 계속 유지될 수 있을지는 양극화, 부패문제, 금전만능주의, 환경문제 등에 얼마나 잘 대처해 나가느냐에 달려있다. 덩샤오핑은 “양극화를 초래한다면 개혁은 실패다”라고 우려했다. 중국은 지금 극단의 오류를 극복하겠다며 또 다른 극단에 빠져있는 건지도 모른다. 치우침으로 치우침을 해결할 수 없다는 건 중국에게만 해당되는 깨우침은 아니다.


070605
『잡아함경』 9권 254경 이십억이경(二十億耳經)에 있는 소나와 거문고 줄에 대한 이야기가 흥미롭다(동국역경원 한글대장경 번역 참조). 부처님의 제자인 소나는 아무리 수행에 힘써도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의기소침한 소나에게 부처님이 찾아오셨다. 부처님은 소나가 속세에 있을 때 거문고를 잘 탔었다는 것을 아시고 이렇게 물었다. “만일 거문고 줄을 너무 조이면 미묘하고 부드럽고 맑은 소리를 낼 수 있더냐?” 소나는 아니라고 답했고 부처님은 다시금 물었다. “만일 거문고 줄을 느슨하게 매면 과연 미묘하고 부드럽고 맑은 소리를 낼 수 있더냐?” 소나는 역시 아니라고 답했다. 이윽고 부처님께서는 “거문고 줄을 고르게 하여 너무 늦추지도 않고 조이지도 않으면, 미묘하고 부드럽고 맑은 소리를 내더냐?”고 물었고 그제야 소나는 그렇다고 답했다. 부처님께서는 정진이 너무 조급하면 들뜸만 늘고, 정진이 너무 느슨하면 게으르게 된다며, 이 두 가지 이치를 고루 익혀서 집착하지도 말고 게으르지도 않게 수행하라고 설법하신다. 이러한 부처님의 비유를 실행한 소나가 해탈에 이르렀다는 해피엔딩이다.


영화 <리틀 붓다(Little Buddha)>에서는 부처님이 고행을 하고 있을 때 네란자라강을 건너던 배에서 들려온 “실을 너무 당기면 끊어지고, 너무 느슨하게 해도 연주가 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자신의 수행이 그릇된 것임을 깨닫는 장면이 나온다. 이 대목에서 향락과 고행의 극단을 버리고 중도(中道)에 설 때 진정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불교의 핵심 교리가 파생된다. 도법 스님은 중도의 길을 “사실에 근거해서 정확하게 사물을 봐야 한다”라고 풀이한다. 지금 있는 그대로에서 문제를 발견하고 여기서 실현하고 해결하라는 말씀이다. 스님께서는 우리는 자연, 사회, 부모라고 하는 대상에 의지하고 도움을 받아 태어나서 살아가는 존재라는 사실을 직시해야만 자기를 낮추고 비우고 나누게 된다고 역설하신다. 성철 스님도 중도란 연기(緣起)의 이치로 바라본 사물의 실상이라고 말씀하셨다. 좋은 말씀이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나와 너를 분별하게 되면 우열을 가르게 되고 차별하게 된다. 이 고리를 끊어내는 중도연기(中道緣起)는 탐진치(貪瞋癡, 탐내고 화내고 어리석음)를 달고 사는 내게는 너무 가파른 경지다. 그래도 기회주의와 근본주의의 양극단을 버리고, 팽팽하지도 않고 늘어지지도 않는 중도를 가고 싶다.


070606
인간이 아무리 이기적이라고 할지라도 인간의 본성에는 분명 어떤 원리(연민과 동정)들이 존재한다. 이 원리들로 인해 인간은 다른 사람들의 운명에 관심을 가지게 되며, 단지 그들의 행복을 보는 것 말고는 얻는 게 없더라도, 타인의 행복을 필요로 한다.
How selfish soever man may be supposed, there are evidently some principles in his nature, which interest him in the fortune of others, and render their happiness necessary to him, though he derives nothing from it except the pleasure of seeing it.


아담 스미스의 『도덕 감정론』의 첫 구절이다. 그는 “의심할 나위 없이 모든 인간은 원래, 첫째로 그리고 대체적으로 자신을 돌보도록 되어 있다”라는 점을 인정한다. “관찰자의 느낌은 여전히 고통 받는 자가 느낀 것의 격렬함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 보통”이며 “타인이 겪고 있는 것에 대하여 그 주요 당사자가 당연히 느끼게 되는 정도의 열정을 가질 수는 없다”라는 한계를 부인하지 않는다. 스미스는 타인과 공동체에 대한 공감으로 말미암아 도덕적 감수성의 적정성(propriety)이 작동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한 개인이 자신의 입장을 떠나 객관화해서 제3자의 입장에서 자신의 행동과 동기를 판단하는 ‘공평한 관찰자(impartial spectator)’라는 불편부당한 양심의 힘을 제시한다. 이처럼 『도덕감정론』에서는 도덕적 이상주의가 도드라진다.


그런데 『국부론』에서는 경제주의적 사고가 완연하다. 도덕적 이상주의와 경제주의의 괴리를 어떻게 융합시키는가 하느냐를 ‘아담 스미스의 문제’라고 부르기도 한다. 스미스는 자기사랑(self-love)과 이기심(selfishness)을 구분했다. 그는 인간은 공감의 본성(sympathy, fellow-feeling)과 자기사랑(self-love)을 동시에 갖고 있다고 보았다. 공감이 이타심과 다르고 자기사랑이 이기심과 다르다고 한다면 공감과 자기사랑은 공존할 수 있다는 논리가 튼실하다. 미국 경제학자 로버트 하일브로너는 『국부론』이 당시 인도주의적 법령을 반대하는 데 흔히 악용되었다고 지적한다. “구성원 다수가 가난하고 비참한 사회는 결코 번영하고 행복할 수 없다” 같은 구절들은 인용되지 않은 채 말이다.


하준경 금융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분배 정책을 비롯한 사회 안전망을 강화하는 것은 기업 혁신 및 구조조정과 보완 관계를 이룬다”고 주창한다. 안전망이 탄탄하면 구조조정에 대한 저항도 약해지고, 리스크를 안는 경제 행위도 도전하게 된다는 것이다. 오늘날 고용안정성이 비교적 높은 공공부문에 인재가 몰리는 것도 안전망의 부재 때문이다. 이를 온전히 개인의 무사안일 때문으로만 여기는 건 무성의하다. 약자에 대한 ‘사회적 최소한(social minimum)’의 배려가 있고 패자부활전이 가능한 사회가 우리가 지향해야 할 곳이라고 생각한다. 아담 스미스는 탁월한 분별력은 최고의 머리와 최고의 가슴이 결합했을 때 나온다고 했다. 보이지 않는 손은 내면적 윤리의식이라는 사회적 자본으로 뒷받침되어야 한다.


<참고 문헌>
박순성, 『아담 스미스와 자유주의』, 풀빛, 2004, pp. 201~224
이근식, 『애덤 스미스의 고전적 자유주의』, 기파랑, 2006, pp. 66~86


070607
『대학大學』 첫 문장에 나오는 “大學之道 在明明德 在親民 在止於至善”에서 親民을 놓고 주희와 왕양명은 격돌한다. 『예기』에 포함되어 있던 대학의 원문에는 親民으로 되어 있으나 주희는 대학에 주석을 달면서 정이천을 이어 받아 백성을 새롭게 한다는 뜻의 新民이라 고쳐 풀었다. 親과 新은 한 글자 차이지만 그 내용은 크게 달라진다. 新은 옛 것을 바꾸는 것이므로 스스로 명덕을 밝힌 후에 백성들로 하여금 이전에 물든 오염을 제거토록 하는 것인 셈이다. 新民은 사대부가 백성들 위에서 일방적으로 교화한다는 의미가 강하다. 상하 신분 관계를 엄격히 하는 효과를 유발한다. 왕양명은 이를 문제삼고 親民을 그대로 쓸 것을 주장한다. 백성을 친근하게 한다는 뜻의 親民은 사대부와 백성이 같은 자리에 놓이게 된다. 수직적 관계가 아닌 수평적 관계를 지향하며 이를 통해 교화뿐만 아니라 서로의 개성을 온전하게 길러주는 양육의 의미를 함께 보듬는다. 왕양명의 심즉리설(心卽理說)과 치양지론(致良知論)이 외재적 규범이나 권위에 종속되지 않고 개인의 주체적 자율성을 강조하는 것과 상통한다.


『전습록』에는 “親民이라고 말하면 가르친다는 의미와 양육한다는 의미를 겸하게 되지만, 新民이라고 한다면 한 쪽에 치우친 감이 있다(說親民便是兼敎養意, 說新民便覺偏了)”라며 新民이 ‘가르친다’에 경도되었음을 지적한다. 또 “오직 밝은 덕을 밝히는 것만을 이야기하고 親民을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곧 도가와 불가와 비슷하게 된다(只說明明德, 而不說親民, 便似老佛)”라고 강조하며 백성의 현실적 문제를 다루는 것이 유가의 특질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유가적 현실주의는 백성의 곤고함을 살피는 것에서 출발한다는 그의 견해에 동감한다. 퇴계 이황은 <전습록논변>에서 新民이 맞다며 新은 學(학문과 교육)의 뜻이지, 양명이 말하는 親(백성들에 대한 친근)·養(상보적 기름)의 뜻은 없다고 반박한다. 퇴계는 이를 통해 백성을 수동적인 교화의 객체로 국한함으로써 신분 질서를 옹호했다. 양명학파의 거두 하곡 정제두가 親民을 지지했고 다산 정약용은 親民을 수용하면서도 “親과 新의 두 글자는 형상이 이미 서로 가깝고 뜻이 서로 통하니, 친애하는 것이 새롭게 하는 것이다”라며 두 해석 모두 타당한 측면이 있음을 인정했다. 


양명이 대학 공부를 한 사람의 마음이 온 세상 사람들을 품는 경지에 오르는 것을 親民으로 이해했다면, 다산은 백성들끼리 서로 화목하며 친애하는 것을 親民으로 이해했다. 일본 유학자 오규 소라이는 新民은 혁명의 뜻이므로 수성(守成)의 지도자가 친애하는 모범을 보이라고 규정한 『대학』은 親民으로 봐야한다며 다소 이색적인 견해를 내놓는다. 親民이 보수적이고 新民이 진보적인 함의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여하간 왕양명의 주장은 중국이나 일본에 견주어 조선에서 가장 심하게 이단으로 여겨졌다. 양명학이 제대로 연구되지 못했던 조선 지성계의 편협함이 새삼 아쉽다. 주자학파와 양명학파의 차이는 생각보다 크지 않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지만 나는 그래도 이 둘의 다름에 더 관심이 간다. 양명학은 주자학의 관념론적 경향을 극복하기 위해 직관을 긍정하고 실천을 중시했다. 둘레의 현실에 무심하지 않았던, 천하의 인심을 자신의 마음처럼 여겼던 양명의 정신을 편애한다.


<참고 문헌>
금장태, 『도와 덕』, 이끌리오, 2004, pp. 192~199
김기현, 『대학 - 진보의 동아시아적 의미』, 사계절, 2002, pp. 100~114
김미영 역, 『대학·중용』, 홍익출판사, 2005, pp. 36~38
김학주 역, 『신완역 전습록』, 명문당, 2005
정인재, 한정길 역, 『전습록 1~2』, 2001


070608
정조대왕이 수원 화성을 지을 때의 일이다. 대왕의 정성이 너무 지나쳤다고 생각했는지 몇몇 신하들이 볼멘소리를 좀 했다. 군사 시설은 튼튼하기만 하면 그만이지 모양내는데 너무 신경 쓴다는 핀잔이었을 게다. 대왕은 “어리석은 신하들아, 아름다운 것이 바로 적을 이기는 힘이니라”라고 일갈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의 출전을 찾기 위해 한참을 헤맸다. 『조선왕조실록』과 정조대왕어록인 『일득록日得錄』을 뒤졌지만 찾지 못했다. 이 정도로는 나오지 않는 걸 보면 숱한 신하들의 개인 문집까지 범위가 넓어질 듯싶다.


이어령 선생님은 리움미술관 개관 축사에서 이 일화를 인용했고, 정조를 대상으로 한 어느 뮤지컬에서도 정조의 명대사로 회자됐다. 유응교 교수의 <신하가 정조에게 묻다>라는 시에서도 대왕의 말씀이 황홀한 대답으로 추켜세워진다. 고진화 의원은 2005년 대정부 질문이나 2007년 한나라당 통일외교안보 정책토론회 기조연설에서 이 문구를 언급했다. 어딘가 기록된 말이라면 출전이 좀 나올 법도 한데 감감무소식이다. “문체가 세상을 다스리는 도리와 무관하지 않다(文風關世道)”며 문체반정까지 일으켰던 정조가 화성의 실용성을 넘어 심미적 가치에도 애정을 쏟았겠거니 추정할 따름이다. 출처가 어디냐는 개인적 집착을 떠나 아름다움을 헤아릴 줄 아는 사람, 문화 양극화를 가슴 아파하는 사람이 더 많아지길 바란다. 나를 대표하는 사람 중에도 그런 분들이 늘었으면 좋겠다.


070609
리영희 선생님의 오마이뉴스 인터뷰를 읽다 콧날이 시큰해졌다. 젊은이들의 보수화에 대한 물음에 선생님은 “‘젊은이들의 보수화’는 우리가 바라던바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뜨거웠던 지난날의 목표가 청년들이 자유분방하게 누리며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었다는 그의 말씀이 따습다. 그런데 ‘보수화’라는 언명이 얼마나 타당한지 의문이 생긴다. 내 또래(보다 넓게는 20대)는 전통적 의미의 보수와 진보의 잣대가 잘 적용되지 않는 측면이 적잖다. 이래서는 정명(正名)과는 거리가 멀다. 자기비하 같지만 무식화, 맹목화, 저속화가 더 맞는 표현 같다. 내 또래는 이런 경향에 맞서 상식을 궁리하고 객관성과 주체성을 회복하며, 인간다움의 최소한을 탐구해야할 듯싶다. 우리 세대에게 건네지는 개성적이니 실용적이니 하는 표현은 좀 과분하다.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은 『실증경제학논집(Essys in Positive Economics)』에서 “그것은 무엇인가(What is it)라는 물음과 그것은 무엇이어야 하는가(What should it be)라는 물음을 혼동하는 데에서 너무나 많은 틀린 이론과 그릇된 정책이 나온다”고 일갈했다. “What is it”이라는 실증적 물음에 대한 답을 충실하게 구하는 게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살림살이 나아지기 위해서 현상에 대한 면밀한 분석부터 시작하자는 논리를 경청한다. 정치적 불감증이 일상화되고 취업에 올인하는 세태가 보수화의 증거라면 그런 보수파는 되고 싶지 않다. 한국적 맥락의 보수가 고작 이 정도라면 허기진다. 제 앞가림만 신경을 쓰는 풍토가 1987년 체제의 과실이라고 해도 많이 아쉽다. 이분법이 사라진 자리에 남겨진 하향 평준화 혹은 획일화가 그리 달갑지 않다. What is it이라는 물음에서 내 또래가 정말 보수화(실상은 경제지상주의 추종)라고 결론 내릴지도 모른다. 내가 진단한 무식화, 맹목화, 저속화로 말미암아 사회경제적 독점이나 기업사회의 전제(專制)가 심화될까 우려스럽다.


What should it be에 답해보자. 내 또래의 세대정신이라는 게 있다면 경제지상주의를 극복하고 다원화를 정착시키는 게 아닐까 싶다. 존 스튜어트 밀은 스스로 선택하는 삶이 좋은 삶이라 역설했다. 선택의 지평을 넓히고 가능성의 예술을 실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라는 외재적 조건에 대응해 다원화라는 개인주의 원리와 자유주의적 가치를 개발해보고 싶다(여기서의 ‘자유주의’는 밀의 ‘좋은 삶’이란 명제에 바탕을 두고 썼다). 만약 성공한다면 우리가 유월항쟁에 무임승차하며 되돌릴 수 없는 (절차적) 민주주의를 누리는 만큼 뒷사람에게도 비가역적인 다양성을 물려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프랑스 혁명기의 ‘테르미도르의 반동’이 이 땅에서 횡행하는 건 민망한 일이다.


우리를 초조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의 수가 아니라 그들이 그렇게 하면서 내세운 이유들이 얼마나 훌륭한가라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인기가 없는 현상 그 자체에 관심의 초점을 둘 것이 아니라 인기를 잃게 된 배경에 대한 설명에 주목해야 한다.
알랭 드 보통 저, 정명진 역,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 생각의 나무, 2005, p. 49


070610
마크 트웨인이 세계를 여행하던 때의 일이다. 그는 지나친 음주 때문에 인생이 엉클어진 젊은 승객을 만나고서 욕망에 대해 생각한다. 그는 욕망은 거부할수록 더욱 커지게 마련이므로 맹세가 부질없음을 깨닫는다. “욕망과 함께 평생을 보내야 한다는 걸 인정하는 길”이 욕망이 확대되는 걸 막는 효과적 방법이라는 주장은 쾌락에 대한 방종으로 치부하기에는 그 울림이 크다. 고독을 대하는 최상의 방법은 고독을 두려워하거나 피하는 것이 아닌 고독을 껴안는 것이라는 가르침과 비슷하다. 극단을 치유하는 수단이 또 다른 극단주의여서는 곤란하다.


쇠약해져서 어떤 약도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부인이 있었다. 마크 트웨인은 그간 체득한 경험에 따라 “사흘 간 맹세, 음주, 흡연, 식사를 중단하면 몸이 좋아질 거”라며 의기양양하게 조언했다. 그런데 그 부인은 맹세, 흡연, 음주 같은 부정적 습관이 하나도 없었다. “배의 침몰을 막기 위해 무거운 화물들을 배 밖으로 던져버려야 할 상황인데, 그녀는 이미 화물을 하나도 싣지 않은 잠수함과 같았다”라는 표현이 익살맞다. 마크 트웨인은 당혹함 속에서 “나쁜 습관이란 젊을 때부터 몸에 배이게 해놓아야, 나이가 들고 병이 들었을 때 써먹을 수가 있다”는 명제를 도출한다(마크 트웨인 지음, 남문희 옮김, 『마크 트웨인의 19세기 세계일주』, 시공사, 2003, pp. 11~17).


소설가 김영하님은 이 이야기를 언급하며 “‘나쁜 습관’이란 인생 최고의 사치품”일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시사저널 812호 <나쁜 습관, 나쁜 영화>). 내 나쁜 습관은 잡글 쓰기다. 늘 붙잡고 있으면서도 도무지 나아지는 구석이 없어 먹먹하다. 귀한 젊음을 허비하는 건 아닌가 불안하다. 마크 트웨인은 “담배를 끊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다. 수도 없이 끊어 봐서 안다”고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나도 내 누추한 잡글 쓰기를 그만두고 싶어 무던 애를 썼다. 앞으로도 절필한다는 투정이 그치지 않을게다. 마크 트웨인의 처방전이 내게도 유효할지는 모르겠지만 내 나쁜 습관을 너무 미워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 지난 301일 동안 매일 써온 好學日記를 휴간합니다. 재미없는 글 읽어주신 여러분, 왜 그러셨어요?^0^

Posted by 익구
:
070528
조만간 외국 여행을 떠나는 친구가 수집해놓은 여행 정보 가운데 흥미로운 이야기를 발견했다. 터키 국민의 99%가 이슬람 교도지만 터키 헌법은 세속주의를 명시하고 있다니 놀랍다. 터키 사람들의 일상생활에서도 이슬람적 요소는 찾아보기 힘들며 오히려 법으로 금지된 게 적잖다. 1923년 10월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국을 수립한 케말 파샤가 확립한 세속주의 원칙을 국민들이 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인다니 신기하다. 얼마 전 이슬람주의 집권여당인 정의개발당(AKP)이 총리직과 의회를 장악한 상황에서 대통령직마저 차지할 것으로 보이자 이를 놓고 터키가 내홍을 겪었다. 터키에서 막강한 실력을 보유한 군대가 세속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개입을 암시하기까지 했다. 결국 대통령 단독 후보가 사퇴하고 7월 조기 총선을 실시하기로 가까스로 결판이 났다. 세속주의 세력은 이슬람 근본주의에 맞서 일단 소기의 성과를 거둔 셈이다.

터키에서는 이슬람계 정당이 헌법상 세속주의 원칙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헌법재판소 판결을 받아 해산되는 일까지 있었다. 공공기관인 대학이나 행정 관서에 종사하는 사람은 히잡(hijab)을 착용할 수 없다고 한다. 정교분리를 위해 얼마나 노심초사하는지 짐작이 간다. 아시아의 눈으로 볼 때 터키는 묘한 나라다. 국토의 96.4%가 아시아에 있으면서 3.6%가 속한 유럽을 동경하기 때문이다. EU 가입이 하도 튕기는 바람에 최근 들어 EU 가입에 대한 터키인들의 지지도가 많이 떨어졌다고는 하지만 터키의 유럽지향성이 쉽게 누그러들 거 같지는 않다. 아마 터키의 정교분리가 비교적 성공적으로 수행되고 있는 까닭도 터키의 역사문화적 맥락에서 기인했기 때문일 듯싶다. 헌법정신을 지키기 위해 고심하는 터키인들의 모습을 좀 배우고 싶다. 초파일이라고 조계사에 헌화하기 위해 줄 선 정치인들을 보니 답답해서 하는 소리다. 종교의 자유를 핑계로 사립학교법을 흔드는 대다수 종교 재단들을 볼 때 우리네 헌법이 참 초라해 보인다.


070529
영국의 철학자 무어(G.E.Moore)는 고전적 윤리학을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했다. 첫째로 형이상학적 윤리설은 초자연적, 초경험적 실재에 관한 이론이 선(善)에 관한 윤리적 문제를 해결하는 기초가 된다는 입장이다. ‘있어야 할 것’이나 ‘해야만 할 것’이라는 당위의 근거를 초경험적 실재에서 구할 수 있다는 건 개인적으로 그다지 동감가지 않는 내용이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이나 크리스트교적 중세 철학에서 자주 보는 논리다. 둘째로 자연주의적 윤리설은 경험 가능한 사실을 근거로 삼아 보편적인 인생의 목적 또는 절대적인 행위 규범을 도출해 낼 수 있다는 입장이다. 자연주의는 사실 또는 존재에서 가치 또는 당위를 도출하는 이론이다. 이러한 시도는 윤리학을 과학화하려는 사람들이게 많은 호응을 얻었다. 셋째로 직관주의적 윤리설은 인간이 지닌 선천적 능력을 동원하여 도덕의 원리를 직접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자연주의와는 달리 사실 또는 존재에 대한 인식으로부터는 어떤 가치나 당위도 도출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직관주의는 직각론(直覺論)이라고도 부른다. 직관주의는 사실에서 당위를 연역해내는 자연주의의 추리 방식을 통박한다. 흄과 무어는 “~이다”라는 사실(존재)에서 “~해야 한다”는 가치(당위)를 도출하는 것은 전제 안에 없는 것을 결론 속에 도입하는 것으로서 논리학의 추론 규칙에 어긋난다고 주장한다. 특히 무어는 자연주의적 오류(naturalistic fallacy)를 입증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듯싶다. 그는 “선은 단순하기 때문에 정의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단순 관념은 분석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정의할 수 없다는 논리다. 선은 이미 단순하기 때문에 분석이 불가하므로 선은 선일 뿐이라는 것이다. 즉 단순 관념인 선은 (분석된) 요소로 환원할 수 없다. 이러한 반박의 얼개는 가치술어가 사실적, 경험적 정의된다고 생각해 발생하는 오류인 정의적 오류(definitive fallacy)와 당위를 존재로부터 도출할 때 생기는 오류인 연역적 오류(deductive fallacy)로 나눠져 꽤 설득력 있게 자연주의를 공략한다.

이처럼 날선 공격을 날리던 직관주의는 20세기에 등장한 정의주의(emotivism)나 규정주의(presscriptivism)에게 논박되고 있다. 사실과 가치, 존재와 당위(보통 이렇게 두 개씩 짝지어서 많이 쓰는 듯싶다)의 관계를 규명하려는 노력이 참 많다. 그 노력과 고심의 궤적을 훑어 보는 것도 힘에 부친다. 사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수많은 사실과 수많은 가치가 버성기고 맞물린다. 우리는 사실만 정리하는 것에도 편차가 난다. 우리가 사실이라고 믿는 것도 사실 가치가 개입되어 필터링 된 사실인지도 모른다. 하물며 가치나 당위가 맞설 때는 접점을 찾기 더 어렵다. 특히 우리 사회에 만연한 ‘현실론’은 자연주의적 오류라고 볼 여지가 많다. 자신에게 유리한 몇몇 사실을 모아 당위를 도출해내는 논리 구조의 허술함을 이제 좀 더 잘 살펴봐야겠다. 인간이 획일적이지 않다는 건 괴로운 축복이다. 고통을 줄이고 축배를 들자.

<참고문헌>
김태길, 『윤리학』, 박영사, 2004
P.W.테일러 지음, 김영진 옮김, 『윤리학의 기본원리』, 서광사, 1985


070530
요 근래 여기저기 적어놓았던 메모의 흔적들을 정리해봤다. 시의성을 놓쳐 수를 다한 기록들 사이에서 명언명구들이 빛난다. “나는 기술적으로는 프로가 되고 싶다. 그러나 정신적으로는 언제나 아마추어이고 싶다”는 뉴질랜드의 등산가이자 탐험가인 힐러리의 말씀이 심금을 울린다. 아마추어는 순수함이나 겸손함을 가리키는 뜻일 게다. 높을수록 낮아지는 마음자리를 흠모한다. <쿠니미츠의 정치>라는 만화책 13권에서 아즈마 미츠아키라는 인물이 말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말은 위에서 던지는 게 아니야. 같은 눈높이에서 똑바로 던지는 직구만이 사람의 마음을 흔들 수 있어”라는 구절도 만화책을 보다 펜을 들게 만들었던 명구다. 사실 난 아직도 직구를 잘 못 던진다.

방대한 양이라 아직 완독은 못했지만 『전국책』에서 갈무리해둔 구절도 많이 보인다. “나라가 망하는 것은 현인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쓸 줄을 모르기 때문이다(國亡者, 非無賢人, 不能用也)”, “백리 길을 가는 사람은 구십리를 반으로 여겨야 한다(行百里者, 半於九十)”, “지난 일을 잊지 않으면 뒷일을 위한 스승이 된다(前事不忘, 後事之師)” 같은 말씀들은 담박하지만 큰 울림이 있다. 유가의 상고주의(尙古主義)는 옛글에 주석을 달고 표현을 윤색하고 비유를 첨가하는 식으로 확대 재생산된다. 자신이 만들었다고 지식의 소유권을 강하게 주장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달갑다. 손에 잡히는 종이에 아무렇게나 끼적댄 아포리즘을 발견할 때 잊고 지내던 옛 친구를 만나고 옛 스승을 뵙는 기분이다. 하지만 좀 체계적으로 정리할 필요도 느낀다.

앨빈 토플러는 『부의 미래』에서 ‘쓸모없는’(obsolete)과 ‘지식’(knowledge)’을 합한 ‘무용지식’(obsoledge)이라는 신조어를 제시했다. 그는 “미래 경제의 모습은 지식의 타당성을 증명하기 위해 어떤 진실 여과 장치를 사용하는지에 달려 있다”라며 무용지식을 가려낼 수 있는 능력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두서없음과 뜬금없음을 자유로움의 징표로 삼는 내게는 좀 화끈거리는 말씀이다. “이론은 장례식을 거듭하며 진보한다”는 경제학자 폴 새뮤얼슨의 말씀대로 쓰레기지식도 좀 더 나은 지식의 밑거름이 되겠거니 넉넉하게 생각하고 싶다(물론 거름이 되는 속도가 너무 느려서는 안 되겠지만서도). 힘겹게 배운 걸 매정하게 내치려니 마음이 약해져서 말이다. 지식과 정보의 홍수를 슬기롭게 대처하려면 어지간히 신산스럽겠다.


070531
기자실 통폐합을 놓고 거의 모든 언론이 정부와 대통령을 향해 집중포화를 날리고 있다. 이제 언론탄압이라는 듣기 민망한 언어의 인플레는 적잖은 누리꾼들이 항의한 덕에 좀 수그러든 듯싶다. 정보 접근권 확대라든가 정보공개법 개정 같은 좀 더 생산적이면서 국민의 알 권리 확대에 보다 보탬이 되는 방향으로 논점이 옮겨가는 듯싶어 다행스럽다. 정부의 이번 조치에 극렬 반대하는 언론 집단들의 행동이 가슴 뭉클하지 않는 사람이 적잖다는 건 긍정적인 현상이다. 그네들이 언론탄압이라고 마음껏 외칠 수 있는 게 바로 언론탄압이 아니라는 증거다. 언론탄압이라니 국민의 알권리가 심대하게 침해된다느니 하는 매서운 말들이 무덤덤하게 들리는 건 우리네 언론의 자유가 반석 위에 올랐음을 나타낸다.

참여정부 비판에 학문적 역량을 아끼지 않으시는 최장집 교수님은 이번 사태가 ‘위임 민주주의’이며 ‘사이비 민주주의’라고 평했다. 정부의 섬세하지 못한 처사를 모르는 바 아니지만 조기숙 교수님의 반론대로 언론은 더 이상 약자가 아니다. 지금이 언론독재의 시대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정치독재보다 언론독재가 더 위협적이라는 지적에는 동감한다. 경남도민일보 김주완 부장님은 <독점 깨지니 두려운가?>라는 칼럼에서 전자브리핑은 지방지와 중소매체 기자들에겐 기회가 될 수 있으며 “서울지들이 난리를 치는 건 바로 이 독점이 깨진다는 것 때문이 아닐까”라고 묻는다. 획일적인 목소리 가운데 들려오는 소수의견이 반갑다. 대다수 언론들의 대동단결을 흐뭇하게 바라보기 힘든 까닭은 내 옹졸함 때문만은 아닌 듯싶다.

언론의 자유를 넘어 ‘언론으로부터의 자유’를 꾀해야 한다는 주장은 시의적절하다. 하지만 언론으로부터의 자유는 언론 보도만을 지식과 정보의 원천으로 삼지 않고 좀 더 심층적으로 사고하자는 개인적인 영역에 국한된 노력일 따름이다. 모든 국민이 신문 기사 훑어볼 때마다 행간을 읽고 가려진 진실을 추론해야 한다면 그건 너무 비효율적이다. 우리네 언론이 사실조차 입맛대로 재단한다는 의혹은 거개 온당하다. 가까운 사례로 지난 25일 세종대왕함 진수식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연설의 일부를 발췌해 요상한 기사를 쓴 문화일보 어느 기자분에게 소설가라는 야유가 쏟아졌다. 할 말은 하는 언론까지는 바라지도 않으니 제발 사실 그 자체만이라도 충실하게 보도해줬으면 좋겠다. 행정부 정보 공개만큼이나 중요한 과제는 사실 보도 정착이다. 언론으로부터의 자유와 더불어 문학성 짙은 언론을 견제하는 방안도 함께 마련하자. 펜은 확실히 칼보다 강하다. 그렇기에 칼보다 상처도 깊다.


070601
오늘자로 김병장이 전역했다. 유월에 전역인 건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이르다. 김병장보다는 김이병이 더 내 입에 익다. 내가 처음 구청에서 군복무를 시작했을 때 그와 나는 업무적 통화를 적잖이 나눴다. 업무 인계를 거의 받지 못해 업무 관련 용어를 생판 모르던 나는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말을 도무지 해독(?)하지 못했다. 가령 동미참훈련이 동원훈련 미참석자 훈련인 건 몇 달 지난 뒤에 알게 된 일이다. 그가 일병이 좀 지났을 때 그는 더 이상 통화를 하지 않았고 다른 막내 병사가 우리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왔다. 그와 나는 2005년 7월부터 그 해 말까지 반년 정도 종종 통화를 나눴다. 나는 그에게 미안한 마음에 업무를 스스로 익히기 위해 이것저것 뒤지고 물어가며 배웠던 듯싶다. 어리둥절하던 나와 긴장한 목소리의 그는 이등병 시절을 비슷하게 났다(나도 공익이병이었으니).

2006년 여름 어느 날 나는 그를 한 번 만났다. 그는 군부대 관련 행사로 구청을 들른 그는 기동대 사무실에 잠시 들렀고, 나와 김상병(당시 계급)의 관계를 아는 상근병 동생이 귀띔해줬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옆 사무실로 달려갔지만 정작 그와는 한 마디도 나누지 못했다. 먼저 인사를 건네야지 결심하고 들어갔건만 예전에 업무상으로 몇 번 통화 나눴던 사람이 괜히 아는 체를 한다고 생각할까봐 저어됐다. 지금 돌아보니 많이 후회된다. 그 때 이상한 놈으로 비치더라도 인사를 건네는 게 좋았다. 설령 그가 나를 기억하지 못하고 심지어 언짢게 생각해도 무슨 대수란 말인가. 그러고 보니 살다보면 한 번 만나고 못 만나는 경우가 심심찮게 있다. 하룻밤 술자리를 진득하게 보내고 나서 영영 연락을 나누지 못하는 경험은 얼마나 많은가. 설령 그럴지라도 나를 스쳐갔던 분들에게 내 정성을 다했으면 좋겠다. 한 번에 충실한 사람이 두 번 세 번도 충실하고 늦게까지 한결같다고 믿는다. 김병장의 전역을 축하하며 앞으로 하는 일이 잘 되길 빈다. 고마웠어요.


070602
헌책방 온라인 커뮤니티를 운영하시는 최종규님의 글을 읽다가 경악했다. <가자헌책방>이란 헌책방에서 불온 이념도서를 팔았다는 죄목(?)으로 수사를 받았다 게다. 여느 책방에서도 볼 수 있는 『자본론』 같은 책을 싸게 판 게 혐의를 구성한다니 기가 막힌다. 제 값 받고 팔아서 판매량을 낮춰야 하는데 괜히 싸게 팔아서 독자층을 넓히는 효과를 유발한다고 판단한 건 아닐 테고. 인권운동가 박래군님의 글에 따르면 <미르북>이란 곳의 운영자도 비슷한 명목으로 구속적부심까지 가서 석방됐다고 한다. 이 인터넷 서점을 통해 책을 구입한 명단을 확보해 추가 수사를 하겠다는 엄포는 뭐란 말인가. 국가보안법으로 서점 대표가 체포된 것은 1997년 이래 처음 있는 일이라는데 문득 세 해 전 생각이 났다.

국군기무사령부가 2001년부터 2004년 8월까지 경찰청 산하 공안문제연구소에 장병들이 읽거나 갖고 있는 서적, 인터넷 사이트의 글에 대해 이적·용공성 여부 감정을 의뢰했다는 기사(경향신문 2004년 10월 18일자)를 기분 나쁘게 읽었다. “군의 이념적 순수성을 보장하기 위해”라는 기무사의 해명은 민망하다. 박노자 선생님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같은 책을 읽으면 안보 위해세력이 된다는 논리는 얼마나 궁색한가. 나는 공안기관에 밥줄이 걸린 사람들의 생존을 미워하지 않는다. 그네들이 먹고 살기 위해 확신범이 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이제 선량한 사람 족치는 일 대신 다른 일감을 쥐어줄 수 있는 대한민국이 되었으면 좋겠다. 법치주의와 합리주의를 신뢰하는 보수주의자로서 하는 말이다.


070603
미국의 중국현대사가 로버트 이스트만은 『장개석은 왜 패하였는가』라는 책에서 중국 국민당이 공산당에게 패배했던 이유를 연구했다. 공산당이 국민당을 멸망시킨 것이 아니라 국민당 스스로 무너졌음을 논증했다. 전쟁 초기 정면 대결을 피하고 유격전을 벌이며 전략적 방어를 펼친 공산군의 전략도 주효했겠지만, 부패한 국민당 관리와 인플레이션을 유발한 경제적 실책으로 말미암아 민심을 잃은 탓이 크다. 토지개혁을 통해 농민들의 지지를 얻어 이를 전장에서 동원할 수 있었던 공산당과 달리 농촌지역에 세금과 징발의 부담을 더욱 가중시킨 국민당이 지지를 잃는 건 또렷하다. 국민군은 스스로의 부패를 극복하지 못하고 자멸함으로써 내부의 적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일깨워주고 있다. 이 책을 번역한 민두기 선생님은 패자의 역사는 더 많은 진실을 이야기한다고 말씀하셨다. 맹자가 주창하고 매천 황현이 인용했던 “나라는 반드시 스스로 먼저 망하게 하고 나서 남이 치러 들어온다(國必自伐而後人伐之)”는 말이 사무친다.

국민당 정부가 패주해 간 대만(타이완)의 정식 국호는 중화민국(Republic of China)이다. 중화민국은 1949년부터 1971년까지 유엔 회원국이다가 중화인민공화국(People's Republic of China)이 유엔에 가입하면서 회원국 지위를 잃었다. 중화민국은 눈물겹게 유엔 재가입을 시도하고 있지만 중국의 강력한 반대에 막혀 번번이 실패하고 있다. 최근에는 타이완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국가의 신규 가입 형식을 꾀하지만 이마저도 중국의 반대가 거세다. 중국은 줄곧 대만은 중국 영토의 일부분으로 보고 하나의 성(省)쯤으로 간주하는 ‘하나의 중국’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현대 중화민국과 수교하고 있는 나라는 중남미와 남태평양, 아프리카 지역의 약소국이 대부분이다. 최근 들어 바티칸이 중국과 수교하려는 움직임이 커지고 있어 교황청마저 대만을 버릴 공산이 크다. 명백한 주권국가인 중화민국의 유엔 가입이 좌절되는 건 국제사회의 부끄러움이다. 지난날 국민당의 실덕과 오늘날 중화민국 사람들의 고초는 맞바꿀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타이완보다는 중화민국이라는 국호를 존중한다. 한때 자유중국이라는 애칭으로 부르던 이 나라를 매몰차게 버리는 건 사람의 도리가 아닌 듯싶다. 대한민국과 중화민국은 1948년에 국교를 맺었다가 1992년 한중 수교로 인해 단교했다. 중화민국의 장제스는 우리의 독립에 적잖은 지원과 격려를 해줬고, 유엔에서 쫓겨나기 전까지 우리의 입장을 많이 대변했다고 한다. 노태우 정부는 북방외교의 일환으로 중국과 전격적으로 수교하면서 타이완과 일방적으로 단교했다. 이러한 외교적 무례는 중화민국 사람들에게 깊은 상처가 됐다. 아무리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해도 절도가 있어야 했다. 비록 정부차원의 공식적 교류는 끊어졌지만 인적 교류와 통상 교역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서로에게 5, 6대 교역국이기도 하다. 다행히 2004년 이후 양국간에 직항노선협정 체결로 하늘길이 열렸고, 중화민국 현지의 한류 열풍도 양국의 앙금을 조금씩이나마 눅이고 있다. 우리가 중화민국을 홀대했듯이 우리는 아직도 달라이라마의 방한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 중국의 막강한 영향력을 외면하자는 게 아니다. 용미(用美)만큼이나 용중(用中)의 지혜가 필요하다.

Posted by 익구
:
070521
잃어버린 몇몇 카드 신고를 하기 위해 전화도 걸고, 직접 은행에 가서 처리도 하다가 중국 약국을 회상했다. 세 해 전 중국 여행을 다녀왔을 때 약을 사러 갈 일이 생겼다. 약국에서 약을 툭툭 던지더라도 너무 놀라지 말라는 당부 말을 듣기는 했지만 약국 직원들은 대개 멀뚱거렸다. 생각보다 약은 세게 던지지 않았지만.^^; 한국에서는 전화로나 창구에서나 하나 같이 친절해 말 거는 사람이 무안할 정도다. 인간적인 수준을 넘어선 봉건왕조 시대의 왕을 비롯한 상층부나 누릴 법한 호사다. 물론 고객의 요구를 무시하거나 짜증을 내서야 곤란하겠지만 신속하고 정확하게만 처리해주면 고객과 종업원 사이에 볼일은 끝난다. 살가운 목소리가 고객 감동을 유발하고 충성도를 높일 수 있다는 점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다만 내가 듣기에 좀 부담스러웠다. 과공비례랄까. 하기야 내가 그만 좀 잃어버려서 그 분들의 일감을 줄일 생각은 않고 과잉 친절이 어쩌고저쩌고 말하다니 참 못 됐다.

박노자 선생님은 일전에 <자본주의와 친절>이란 글에서 자본주의 사회가 말단 직원에게 강제하는 친절이 허망하고 위험하다고 지적하셨다. 나는 그 논설이 너무 날카롭다고 생각한다. “소시민에게는 순간적으로 ‘왕대접을 받는’ 착각”을 일으키지만 그 순간은 너무 찰나고 이미 소시민도 그걸 잘 인지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친절도 평가로 말미암아 노동의 강도가 급격히 올라갈 거 같지도 않다. 나 또한 사무적인 관계에서 과도한 친절은 좀 삼갔으면 하지만 아마 기업 차원에서 덜 친절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도 쉽지는 않을 듯싶다. 우리는 덜 친절하게 모시겠습니다라고 발설할 기업이 어디 있겠는가. 보다 근본적으로 아랫사람들의 친절을 문제 삼을 게 아니라 도무지 불친절한 윗사람들을 문제 삼아야 하지 않을까. 그러면 아랫사람의 친절강박증도 좀 누그러지지 않을까 싶다. 권위적인 한국사회에서 윗사람은 불친절하라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 5월 26일 잃어버린 지갑을 되찾았습니다. 푸하하


070522
한윤형님의 블로그에서 <2007년 대선, 역전승의 전망이 보이지 않는 이유>라는 글을 읽었다. 자신은 이명박이나 박근혜가 당선되면 이기고 상대방은 그 외의 사람들이 당선되면 이기는 걸로 해서 내기를 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을 제외한 사람들이 확률이 아니라 희망에 돈을 걸었다고 평했다. 맞는 말이다. 윤형님은 “집권당에 대한 평가는 2002년이 훨씬 좋았다, 노풍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지금은 대세에 영향을 줄 요인이 없다, 범여권이 정권재창출을 해야할 이유가 없다”는 논거를 들어 정권재창출은 난망하며,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된다고 역설하셨다. 거개 수긍할 만하다.

유시민 보건복지부 장관이 사퇴하고 당으로 돌아오며 남긴 말씀이 인상 깊다. 그는 참여정부를 배에 비유하며 “승객 남아 있는 한 승무원에게는 탈출할 권리가 없다. 구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하고, 구하지 못하면 배와 함께 운명 마감해야 한다. 이것이 상식이다”며 “별난 충성심이라고 말하면 이는 정치적인 문화가 잘못된 것”이라 말씀하셨다. 물론 가장 최선책은 구조선으로 옮겨 타는 거다. 하지만 지지자와 국민의 꿈을 연료로 삼아 항해하는 정당이란 이름의 배들은 갈아타는 배도 살필 수 있어야 한다. 아무 배나 잡아 탈 수 없다는 게 바로 책임정치이며 정당정치 아닌가. 나는 승무원은커녕 3등칸 승객조차 아니었다. 통통배 타고 있다가 큰배가 침몰할 때 같이 깔리는 형국이랄까. 그게 살짝 억울하다.

요즘 들어 정치인이라는 직군의 사람을 함부로 믿는다는 게 얼마나 무지하고 허망한 것인지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그러나 어느 수준의 심리적 계약, 즉 잘 하리라는 믿음 없이 우리 대리인을 뽑는 정치적 지지가 가능할까? 어느 정도 기대에 어긋나도 앞으로 잘 하라며 격려해주는 넉넉한 마음 없이 누군가에게 내 꿈을 투자한다는 게 가능할까(그렇다고 어느 정당의 시멘트 지지율이 마땅하다는 건 아니다)? ‘믿음-실망’의 사이클의 계속 반복된다고 하지만 다음 선거에서 그 사람을 지지하지 않음으로써 환멸을 불러일으킨 책임을 묻는 시스템도 있고 말이다. 직선 대표의 임기 중에 유권자의 의사를 반영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는 것도 시급하지만 평가에 충실했다면 적어도 오늘날 같은 저열한 정치가 횡행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유권자 무서운 줄 모르고 저러고 있지 않은가.

하고픈 말을 꾹꾹 참느라 말이 겉돈다. 나 역시 확률이 아니라 희망에 건다. 사실 희망이라고 표할 것도 없고, 대세를 따르느냐 안 따르느냐의 문제라고 보는 게 더 정확하다. 내가 차마 대세를 따르지 못하는 건 앎과 삶의 거리를 좁히려는 내 실존적 몸부림이다. 나 같은 보수주의자가 찍을 정당이 고작 저런 집단이라니 이건 너무 불공평하고 잔인하다. 사람은 살다보면 변할 수 있기에 훗날 나의 이런 결정에 후회를 할지도 모르겠다. 머리를 쥐어뜯는 와중에 그래도 자신이 믿는 바를 소중히 여긴 것만은 내 힘이 되지 않을까. 나란 놈을 아끼는 마음에서 걱정해주신 도광양회(韜光養晦) 같은 충언들을 이번에도 다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게 죄스러울 따름이다.

희망은 원래 있다고 할 수도 있고 없다고 할 수도 있다. 이는 마치 땅 위의 길과 같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걷는 사람들이 많아지다 보면 자연스럽게 길이 되는 것이다. - 루쉰


070523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님의 『1997년 이후 한국사회의 성찰』(2006, 길)라는 책은 지성의 위기를 진단하고 있다. 김동춘 선생님은 한국사회가 ‘기업사회’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기업이 단순히 사회의 일부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가 기업의 모델과 논리에 따라 재조직되는 사회”라는 것이다. “기업의 효율성이 사회의 효율성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는 김 선생님의 명제를 공병호 선생님은 “경영원리의 도입이 모든 영리단체뿐만 아니라 비영리단체의 효율성을 올릴 수 있기 때문에 사회의 효율성은 자연히 뒤를 따르게 된다”로 대체해야 한다고 지적하신다. 한겨레 신문 지상에서 오고간 두 분의 토론을 흥미롭게 읽었다. 김 선생님은 기업사회에서의 처벌은 명예퇴직 강요, 분사, 비정규직화, 해고, 비연고지 근무 요구 등으로 이루어지는데 이는 처벌이 아니라 기업 경영 합리화라는 아름다운 이름으로 포장되어 있음을 꼬집는다.

“기업사회의 소외와 차별, 억압은 사회적으로 주변화, 개인화되며, 탈락자들은 그 책임을 자신에게 돌린다는 점에서 정치적 차별보다 더 무섭다”는 주장에 수긍한다. 자기 탓하는 게 나쁜 일은 아니지만 패배의 내면화는 인간의 존엄성을 심대하게 저해한다. 김 선생님은 소비자는 결코 시민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주체적 인간으로서의 자각과 정치 기능을 복원함으로써 기업사회를 견제하는 버팀목으로 삼아야 한다는 말씀은 구체적이지는 않아도 실천을 고심해볼만 하다. 기업사회의 가치관으로 비추어 볼 때 민주적 방식이 효율적이거나 생산성이 높다고 보기 힘들다. 그런데도 민주주의를 건사하고 오히려 경제영역에까지 확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민주주의는 기업사회에 삼감의 미덕을 갖출 수 있도록 작동할 수 있을까. ‘민주주의가 밥 먹여 주냐?’는 언설 앞에 주눅 들지 않고 맞설 희망의 언어는 무엇일까. 

최근 국가/지방 행정에서 ‘경영행정’이라는 말을 많이 쓴다. 간단히 말해 행정에도 기업식 경영방식을 도입하는 것을 말한다. 비용의 최소화, 고객 지향적 사고, 신축적 관리시스템 구축 등을 통해 행정의 효율성과 효과성을 높이자는 시스템이다. 단점도 많다. 가령 대중을 자기이익을 추구하는 소비자로 간주할 경우 공동체 형성이 어려우며, 국가적 혹은 집단적 문제는 해결하기 어려움/ 성과와 능률 등의 결과적 가치에 대한 강조는 형평성, 공정성, 절차적 정당성, 대표성 등의 민주적 가치를 손상시킬 우려/ 수익자 부담원칙의 채택으로 불필요한 공공서비스를 줄이는 과정에서 서비스의 격차가 유발되어 저소득계층의 타격이 더 클 소지/ 정부의 권한을 분산, 이양한 관계로 행정 통제가 어려워져 책임성의 문제가 대두될 가능성 등이 있으리라. 행복한 살림살이를 위한 사회 운영원리는 타협과 절충, 시행착오의 연속일 게다.


070524
이덕일 선생님의 『장군과 제왕2-중원의 고구려, 제왕 이정기』(2005, 웅진)과 지배선 선생님의 『중국 속 고구려 왕국, 제齊』(2007, 더불어책)을 읽었다. 765년에서 819년까지 이정기-이납-이사고-이사도로 이어져 중국 산동반도 일대를 통치한 제(齊)나라 이야기다. 이사도는 이태 전 드라마 <해신>에서 악역처럼 나와 역사 왜곡 논란을 낳기도 했던 인물이다. 이정기부터 이사도까지 고구려를 적극적으로 계승하려는 의지가 있었는지는 자세히 알 길이 없다. 하지만 당나라 조정은 이사도군을 “고구려의 흉악한 무리”라고 칭했다. 제나라에 고구려 유민 출신이 많았다는 것도 분명하다. 이사도는 궁궐뿐만 아니라 종묘를 건설할 정도로 독립국가라는 의식이 있었다. 그는 중국에 맞서 싸우다 순국한 한국사상 매우 드문 인물이다.

한국측 사서에는 헌덕왕 11년(819) 이사도의 군대를 치기 위해 당나라가 원군을 청하자 신라는 3만명의 군사를 파견했다는 기록만 전한다. 우리가 제나라를 이렇게 팽개쳐도 되는 걸까? 중국측 사서인 『신당서』, 『구당서』와 『자치통감』은 이씨 왕조에 대해 시종일관 부정적으로 서술한다. 그네들이 자랑하는 춘추필법은 늘 이런 식이다. 이렇게 쩨쩨한 소인배 같은 기록을 남겨 놓고 대국을 자처했는지 알면 알수록 민망하다. 하기야 이렇게 구질구질했기에 결국은 대륙을 차지해 호령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지만(그들에게서 영악함을 좀 배울 필요가 있다). 남 탓할 거 없는 건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비롯해 우리나라 사서 대부분도 중국 흉내내기 바빴기 때문이다. 모화사상은 갈수록 심해져 나중에는 중국의 기록을 그대로 베껴오기 급급한 지경에 이르렀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하지만 이겼으면 됐지 패자의 기록을 이렇게 모질게 해도 되는 건지 참 야박하다. 승자를 존중한다. 승리 앞에서 도덕이니 정의를 들먹이는 게 얼마나 허망한 가를 모르는 바 아니다. 하지만 구차하게 이기고 비루하게 부귀영화를 누린 자들을 잊지 않고 간직하는 건 뒷사람의 떳떳한 도리다. 사료의 틀에 갇힌 고정관념을 벗기는 참 힘들지만 패자의 역사를 살필 때 나는 좀 더 깊어질 수 있을 것이다.


070525
1919년 2월 말 독립선언서 제작하던 인쇄소에 종로경찰서 고등계 형사 신철이 들이닥친다. 민족 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이던 최린은 신철에게 민족을 위해 며칠간만 모른 척 해달라고 사정한다. 신철은 3·1운동이 거행되기 전에 만주로 출장을 떠난다. 그의 침묵 덕에 3·1운동이 발각되지 않았다. 신철은 정보를 감추고 상부에 보고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헌병대에 투옥되었고 그곳에서 곧 자살했다고 1919년 5월 22일자 매일신보는 전한다.

악질형사로 유명했던 이의 대변신이 참 드라마틱하다. 그런데 이런 희생을 발판으로 이뤄진 3·1운동은 결과적으로 철저히 실패했다. 민족 대표 33인은 현장에 함께 하지 않고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을 한 후 전원이 일본 경찰에 연행되는 촌극을 연출했다. 당시 조선의 인구가 1600여만 명 정도였는데 3·1운동은 200만 명이라는 엄청난 인파가 참여했다. 3·1운동을 짜임새 없는 산발적인 시위로 그치게 만든 건 지도부 탓이 크다. 남을 대표한다는 건 멋 삼아 할 일은 아니다.


070526
한미 FTA가 비준될 경우 저작자 사후 50년에서 저작자 사후 또는 저작물 발행(또는 창작) 이후 70년으로 연장하게 된다. 저작권 보호기간은 저작자와 자손 2세대까지 보호한다는 의미로, 최근 평균수명 연장 등의 이유로 전세계 약 70여개 국가가 70년 이상 보호한다. 하지만 나는 그 보호 수준이 너무 과도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에피소드가 있었다. 장하늘님이 좋은 글을 엮어 만든 『소리 내어 읽고 싶은 우리 문장 』이란 책이 있었다. 본래 43편이 아닌 53편으로 기획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저작권자나 그 유족들과 연락이 닿지 않아 10편이 빠지게 되었다. “저작권자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생겨난 저작권법이 오히려 작가의 작품이 독자들에게 읽힐 수 있는 길을 원천적으로 막아버리는 장애 요인으로 변질될 수도 있다는 점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는 말씀에 참 공감했다. 출판사는 불법 대신 작품 게재를 포기했다. 나로서는 내가 모르던 명문을 접할 기회를 잃은 셈이다.

내가 크리스트교와 좀 데면데면해서 성경 구절은 잘 모르지만 전도서 1장 9절의 “해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there is nothing new under the sun)”는 말씀은 새기고 있다. 지식의 창조자 혹은 생산자들은 그것이 자신만의 것이라고 주장해서는 안 될 거 같다. 그건 오만이 아닐까. 설령 순수하게 자신의 머리로 나왔다고 한들 그걸로 엄청난 부귀영화를 누리는 게 온당할 거 같지도 않다. 미국의 정치철학자 존 롤즈는 천부적 재능은 사회적 공공재라고 주장했다. 부잣집에서 태어났거나 재능이 뛰어나거나 하는 자연적, 사회적 우연성은 그 사람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탁월한 지적 능력은 단지 우연이라고 할 수만은 없지만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의 고사처럼 운이란 것도 있고, 천재라는 것도 있는 건 분명하다. 아무도 자신의 뛰어난 천부적 능력을 받을 자격이 있지 않으며, 사회에서 보다 유리한 출발점을 차지할 자격은 없다는 그의 말씀은 음미할 만하다. 나는 불법 복제를 옹호하는 게 아니다. 다만 저작권법이 배움을 막는 쪽으로 나아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070527
금아(琴兒) 피천득 선생님이 지난 25일 돌아가셨다. 추모하는 많은 분들이 선생님의 순수함을 드높였다. 나는 그보다 더 감명 깊은 것이 선생님의 멈춤이다. 선생님은 1970년대 중반 절필을 선언하셨다. 당신께서 전보다 못한 글을 쓰고 있다고 느껴서 글쓰기를 그만 두셨다고 한다. 선생님은 번역서를 제외하고는 한 권의 수필과 한 권의 시집을 남겼을 뿐이다. 나는 선생님의 수필 가운데 ‘반사적 광영反射的 光榮’이라는 글을 참 좋아한다. “사람은 저 잘난 맛에 산다지만, 사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 잘난 맛에 사는 것”이라는 말씀에서 겸허함을 배우고 싶다. 잘난 사람을 꿍꿍이 없이 인정할 수 있어야겠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선생님의 글을 배우고 익히던 학창시절이 문득 그립습니다.

Posted by 익구
:
070514
EBS 지식채널 ⓔ라는 재미난 기획물이 있음을 이제야 알게 됐다. 아쉬운 대로 몇 개를 골라봤는데 흥미진진했다. 최근 방영된 헬렌 켈러에 대한 이야기를 영상으로 접하니 여운이 짙다. <미국의 우상>이란 제목의 영상물은 헬렌 켈러가 장애를 극복한 인간 승리의 대명사로만 알려졌을 뿐, 그가 사회주의 운동에 몸담았던 사실은 대개 은폐되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하긴 그러고 보니 어릴 적 읽었던 헬렌 켈러의 전기에는 장애를 극복한 이후의 삶이 매우 소략했다.

헬렌 켈러의 정치적 발언을 원치 않았던 이들이 헬렌 켈러의 주체적 판단력을 불신하는 전략을 쓴 모양이다. 누군가 부추기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험담했다는 게 씁쓸하다. 인간의 비루함이라는 게 이런 것일까. 헬렌 켈러의 삶을 발췌해서 간직하려는 그들은 헬렌 켈러를 그의 삶과는 정반대로 소비한다. 사회적 모순을 비판하던 그를 개인의 초인적 노력으로 역경을 딛고 일어서라는 자조론, 자력갱생의 미덕으로만 이용하려 했다. 헬렌 켈러가 자신의 아픔을 미루어 남의 아픔을 헤아리고 해결책을 모색해왔다는 측면은 부러 무시하고 단지 개인적 영역으로만 한정하려고 노력한 이들이 적잖다.

나는 우리 사회에 좌파가 더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보다 더 시급한 것은 우파들이 상식이나마 건사하는 게 아닐까 싶다. 상식은 곧 최소한의 객관성이다. 헬렌 켈러를 발췌해서 간직하듯이 박정희를 발췌해서 찬양하는 사람들이 좀 줄었으면 좋겠다(발췌의 유혹에 나도 예외는 아니다). 헬렌 켈러는 “자본주의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에 “쓸모보다 목숨이 길어요”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는 정말 낙관주의자의 사표다. “비관주의자치고 행성의 비밀을 알아낸 사람이 있는가? 인간정신을 위한 신대륙의 항로를 개척한 사람이 있는가?”라는 그의 죽비소리가 등짝에 사무친다. 행성의 비밀을 알아내지 못하고 신대륙의 항로를 개척하지는 못하더라도, 쓸모보다 목숨이 긴 삶을 살지는 말아야 할 텐데.


070515
스웨덴의 웁살라 대학은 1477년에 창설된 북유럽쪽(스칸디나비아 지방)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다. 학교 강당의 입구에는 토마스 트릴드(Thomas Thorild)의 시구인 “자유로운 사고는 위대하다. 그러나 보다 더 위대한 것은 올바르게 사고하는 것이다”가 새겨져 있다. KBS <걸어서 세계속으로>란 프로그램에서 비춰준 그 명구를 그대로 옮겨 적자면 TÄNKA FRITT ÄR STORT MEN TÄNKA RÄTT ÄR STÖRRE다. 스웨덴어는 하나도 모르기 때문에 움라우트(Umlaut)를 제대로 옮겨 적은 건지 잘 모르겠다만서도. 영어로는 TO THINK FREE IS GREAT, TO THINK RIGHT IS GREATER 정도 되는 셈이다.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악은 평범하다고 설파했다. 나치 전범 아이히만은 천성이 악마가 아니라 생각하지 않음(thinklessness)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고에도 위계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생각하는 것 자체도 요긴하다.

일단 생각에도 빛깔이 다를 수 있다고 인정하자. 그런데 내 자유로움이 온전히 올바름을 위해 쓰일 자신은 없다. 우선 올바름이란 개념을 합의하기가 너무 어렵다. 윤평중 한신대 교수는 자유주의자를 “열려 있으면서도 혼자 있을 수 있는 사람, 연대하면서도 패거리 만들지 않는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올바름을 모색하되 고집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 균형점 언저리를 향한 노력을 할 뿐이다. 올바름을 지키다가 홀로서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올바름을 핑계로 무리를 지어 남을 핍박하지도 않는 포지셔닝이 흐릿하다. 자유와 올바름의 중용이란 게 가능할까? 아니 존재라도 할까? 이데아를 빙자한 허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070516
역사학자 크로체(Croce)는 “모든 역사는 현대사(당대사)”라고 주장했다. “모든 역사적 판단의 기초가 되는 실천적인 요구는 모든 역사에 현대사의 성격을 부여한다. 왜냐하면 지금 서술되는 사건이 아무리 시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실제로 역사는 그 사건이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현재의 요구와 현재의 상황을 다루기 때문이다(The practical requirements which underlie every historical judgement give to all history character of “contemporary history” because, however remote in time events there recounted may seem to be, the history in reality refers to present needs and presents situations wherein those events vibrate. - 中).”카(Carr)는 “역사란 본질적으로 현재의 눈을 통해서 그리고 현재의 문제들에 비추어 과거를 바라보는 것이며, 역사가의 주요한 임무는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평가하는 것임을 의미한다”고 풀었다. 책에 포함된 사실이 아닌 책을 쓴 역사가에 대한 관심을 먼저 기울여야 한다는 데 많이 동감한다.

이것과는 좀 다른 맥락이기는 한데 우리네 정치사 연구가 지나치게 현대사 위주로만 진행되고 있다는 건 문제다. 물론 근대 이전으로 올라가면 원전은 한자 해독(!)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정치학도에게 그런 걸 요구하기가 쉽지는 않으리라. 하지만 정치학계가 행태주의 방법론에 치우쳐 역사적 방법론을 소홀히 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경제사상이나 경제학사가 경시되는 것처럼 정치사상이나 정치학사도 관심이 적은 듯싶다. 행태주의는 사회현상도 자연과학과 마찬가지로 엄밀한 과학적 연구가 가능하다고 본다는 특징이 있다. 수학적, 통계적 방법을 통한 측정 가능성을 높이 평가한다. “관찰 가능한 현상을 주요 분석 대상으로 다룰 뿐만 아니라 될 수 있는 한 수량화(quantification)가 가능한 문제를 다루고, 측정 및 검증 과정에 엄밀한 기법(technique)을 도입하여 정확성을 기하고자 노력(서울대학교 정치학과 교수 공저, 『정치학의 이해』, 2002, 25쪽)”하는 태도다. “정치생활의 경험을 토대로 하여 고유한 법칙적 지식을 발전시키고, 정치적 현실을 어떤 창조적인 목적적 가치규범과 관련시켜 경험법칙과 규범지식의 합리적이고 적합한 체계적 관계를 이론화(김재영 외, 『새로운 정치학의 이해』, 삼우사, 2003, 38쪽)”한다.

정치학 교과서들의 설명이 어려워 비전공자가 이해하기 어렵다. 다만 행태주의가 놓친 역사적 맥락으로 접근하는 시도를 해봐야겠다. 크로체의 명제는 반드시 현재에 벌어지는 일에만 집중하라는 뜻은 아닐 게다. 과거의 사실을 접하면서도 현재의 관심에 부응할 수 있는 안목을 일컫는 건 아닐까. 추체험(追體驗)이란 말처럼 당시의 그 사람, 그 현실 속에 들어가서 생각하고 행동해보자. 그런 사고실험을 통해 과거의 여러 사실 가운데 오늘날 유의미한 사실을 끄집어내는 작업을 수행한다. 이를 통해 오늘날의 나 자신과 시대의 문제에 적용해볼 수 있다. 미술사학자 강우방 선생님은 이론보다 실천을 앞세운 한국미술사 연구를 강조하신다. 이론의 틀 속에 넣어서 작품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작품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 시대정신과 미의식을 체험하는 것이 추체험이라 부른다고 말씀하셨다. 여전히 알쏠달쏭하지만 대략 이런 개념을 체득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070517
라오서(老舍)가 지은 『루어투어 시앙쯔(駱駝祥子)』를 읽으니 온종일 먹먹하다. 시앙쯔는 자기 인력거를 장만하기 위해 악착같이 노력한다. 그러나 그는 번번이 실패한다. “내가 도대체 누구한테 잘못했단 말이요?”라고 울부짖던 그는 결국 “빨리 달리라고요? 얼마 더 줄려요?”라고 쏘아붙이고 “왕년에는 나도 악착같이 노력했다 이거야, 그래서 뭐가 어떻게 됐나, 요 꼴밖에는”이라며 푸념한다. 나도 저들과 별반 다를 바 없음을 인정하는 고통이 절절하다. 사실 시앙쯔가 엄청난 신분 상승 욕구를 품은 것도 아니고 그저 배곯지 않는 안정적인 수입원과 자유로운 삶을 갈망했을 뿐인데 그 마저도 과분한 바람이었다.

작가는 시앙쯔가 “다른 인력거꾼들보다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은 그러한 인력거꾼다운 인력거꾼이 되었다”고 담담하게 서술한다. 자본주의 사회는 개인의 책임을 강조한다. 그런데 시앙쯔가 사회의 부조리에 시달리는 것을 보면 그에게 손가락질 하고픈 마음이 슬며시 사라진다. 시앙쯔의 타락은 편안함만을 좇게 된 게으름 때문만은 아닌 거 같다. 그의 절망이 쌓이고 쌓이는 과정을 보면 그의 숙명론을 타박하기 미안하다. 성공하려면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소리를 늘어놓기 전에 작은 노력에 작은 보상이 주어지는 사회를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는 팔자소관이 줄어드는 세상일 것이다.

비는 부자에게도 가난뱅이에게도 내린다. 의로운 사람에게도, 의롭지 않은 사람에게도 내린다. 그러나 실은 비는 결코 공평하지 않다. 공평함이 없는 세상에 내리기 때문이다.
시앙쯔는 병이 났다. 셋집 울타리 안에 병자가 그 하나 뿐은 아니었다.

- 라오서 지음, 최영애 옮김, 김용옥 풀음, 『루어투어 시앙쯔』(하), 통나무, 1986, 495쪽


070518
김혁규 의원님이 올린 <5ㆍ18 민주화운동 27주년을 맞아>라는 글을 읽었다. 그는 “저는 대한민국의 언론보다 광주의 민심을 더 두려워합니다. 광주의 동의 없이, 5ㆍ18민주화운동이 낳은 시대정신을 계승하지 않고는 결코 대한민국의 지도자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5ㆍ18 항쟁을 승리로 이끈 광주의 정신을 존경합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적잖은 누리꾼들은 당연히(!) 그의 한나라당 경력을 문제 삼는 댓글을 올렸다. 나는 이 누리꾼들의 투덜거림이 거개 적절하다고 본다. 다만 김 의원님이 열린우리당 창당 초기 어려운 시점에서 입당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그의 진정성을 어느 정도 믿어주고 싶은 마음이 크다. 어차피 비례대표 앞 순번 받을 걸 예상했을 테니 위험 부담이 적었다고 핀잔해도 할 말 없지만.

한나라당에는 왕년의 민주화 투사들이 적잖다. 가끔 제 과거에 너무 어긋나는 행동이 민망해서 짐짓 그럴 듯한 말씀을 하기도 하지만 그네들은 과거를 팔아 꽤 괜찮은 수입을 올렸다. 나는 그네들을 너무 미워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사람의 변하게 마련이다. 그 변화가 바람직한지 여부는 함부로 가를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개혁세력, 민주화세력으로 자처하는 이들이 너무 결벽성을 내세우거나 순혈주의를 주창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의 품이 저들의 품보다 작고 우리의 가시가 저들의 가시보다 더 날카롭다면 우리는 언제 우리가 꿈꾸는 세상을 실현할 수 있을까(‘우리’라는 표현을 써도 될지 고심했지만 일단 쓴다). 우리의 꿈은 고작 개개인과 그 둘레 수준의 영역에서 맴돌고 말 뿐이다. 오늘날 국민에게 표 받겠다는 사람 치고 오월의 광주를 대놓고 폄훼하는 사람은 찾기 어렵다. 오히려 광주의 정신을 잇겠다며 투항(?)하는 사람들이 줄서고 있다. 김혁규 같은 분들이 더 늘어나는 건 좋은 일이다.

음악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나이지만 가사가 좋은 몇몇 민중가요는 즐겨 듣는다. 김근태 의원님의 미니홈피 배경음악에 깔린 민중가요를 놓고 어느 누리꾼이 당신이 민중가요를 깔아놓다니 어울리지 않는다는 요지의 방명록을 남겼다. 내가 보기에 그 말은 넘쳤다. 나는 그 논리에 따르자면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광야에서>, <바위처럼>, <청계천 8가>, <아침이슬>, <상록수> 같은 노래들 근처에 가서는 안 될 테다. 그건 너무 팍팍하다. 나같이 보수적인 녀석은 사람은 꽃보다 아름답다는 명제에 동참할 수 없는 건가. 그건 너무 엄격하다. 자칭 개혁세력, 민주화세력은 (나 같은) 어정쩡한 이들을 너그럽게 거둘 필요가 있다. 콩고물을 보고 달겨드는 사람도 분명 있으리라. 그만큼 우리가 넉넉해졌다는 징표다. 항복한 장수는 후대했던 동서고금의 사례를 돌아보자. 장비가 엄안의 포박을 풀 때 참 멋졌다. 광주의 오월을 상업적으로 파는 이들이 많아지는 걸 너무 서운해 하지 마시길.


070519
오랜 만에 분당을 향했다. 초등학교 시절을 성남시 중원구에서 보낼 때 분당구는 이제 막 짓고 있는 곳이라 삭막하고 휑하던 기억뿐이다. 서울을 별로 겪어보지 못한 나는 분당에서 빌딩숲(정확히는 아파트숲)의 숨 막힘을 겪었다. 다시 찾은 분당은 녹지대가 참 많은 곳이었다. 신록은 부자 동네든 가난한 동네든 어디서나 반갑다. 문득 분당이라는 지명의 유래가 궁금해졌다. 1914년 일제에 의하여 새로 만들어진 합성지명이라고 한다. 분점리(盆店里)와 당우리(當隅里)라는 두 마을의 머리글자를 따서 분당(盆唐)이라고 했는데 당(堂)자가 당(唐)자로 바뀐 영문을 모르겠다.

초등학교 사회 과목 전과에는 직할시 등을 설명하며 그 다음으로 규모가 큰 도시로 울산과 성남을 들고 있었다. 그런데 울산이야 광역시가 되었고, 특별시와 광역시를 제외하고 인구가 가장 많은 도시는 성남이 아니라 수원이다. 내 기억에 성남이 팔십 몇 만이고, 울산이 구십 몇 만이라 성남이 2등이었는데 지금도 2등이다. 2007년 4월 말 현재 성남이 96만 여명이고, 수원이 108만 여명이다. 수원시의 연도별 인구 현황을 살펴보니 내가 초등학교 6학년 성남에서 서울로 전학 오던 해인 1995년 당시 75만 여명이다. 지난 십 몇 년 간 수원으로의 인구 유입이 많았던 셈이다.

사실 수원이 광역시가 되려 해도 경기도측의 반대가 심해 쉽지 않을 것이다. 성남의 경우는 인구만 많을 뿐 서울의 위성도시 성격이 강해 광역시 승격 요건에 맞지 않을 공산이 크다. 문득 내가 살던 동네가 직할시가 되면 좋겠다는 희망을 품었던 철부지 시절이 떠올랐다. 1995년에 지방자치법 개정으로 중앙집권적 의미가 강한 직할시 대신 광역시로 개칭되었고, 울산은 1997년 7월 광역시로 출범했다. 1995년 8월 교육부는 일제 잔재 청산을 위해 국민학교라는 명칭을 초등학교로 바꾼다고 발표했다. 실제 각급 학교 적용은 1996년 3월부터였고 내 또래는 마지막 국민학교 졸업생이 되었다. 국민학생이 품었던 직할시의 꿈은 이루지 못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내가 너무 변화의 소용돌이 한 가운데 있었던 사람처럼 말하는 거 같아 우습다. 자신의 경험이나 추억에 너무 과도기적 의미를 부여하는 걸 삼가자. 자기 삶을 각별하다고 우기면 끝도 없다. 이런 이야기는 그냥 흘러가듯 스쳐가듯 하고 잊으면 그만이다. 나이를 먹고 경험을 쌓을수록 경험을 이용해 논리를 입증하려는 유혹이 커질게다. “내가 겪어 봐서 아는데”, “그 때 당시에는 말이야” 이런 식으로 말이다. 이런 말은 상대방이 청해오면 모를까 스스로 먼저 주섬주섬 꺼내놓을 이야기는 아닐 듯싶다. 경계할 일이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경험론자보다는 합리론자 편이지 않는가(어머나 이 고질적인 편가르기란).^^;


070520
젊음은 동이 나기 때문에 더 아름답다. 요 며칠 술을 열심히 마셨고 그간 잠잠하다 싶었던 내 주사가 또 펼쳐졌다. 민폐는 끼치지 않으나 내 스스로에게 폐를 끼치는 주사 말이다. 자폐(自弊)는 어감이 안 좋으니 아폐(我弊)나 오폐(吾弊)라고 불러서 내친 김에 고유명사화 해버릴까 보다. 이번에는 지갑을 잃어버렸다. 대동제 주점 자리도 선방했거늘 축제도 끝나 적막한 안암동에서 이런 사단을 벌이다니 비통하다. 사실 전례가 많은지라 좀 덜 놀랄 법한데도 늘 후회스럽고 민망하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게 있으랴.

이것저것 잃어버려 보고 나니 내 소유에 대한 책임감이 늘기보다는 기왕이면 덜 가지고 다니게 된다. 분실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소지품을 약소하게 꾸린 노마드형(?) 지갑을 만든 덕에 좀 유쾌하다. 이러다가 내 물건들이 나를 훌쩍 떠나도 고이 보내 줄까봐 걱정이다. 이런 사건을 겪고 날 때면 나는 늘 금주령을 만지작거린다. “술은 언제나 무죄다”는 게 내 오랜 신조이기는 하지만 길일을 택해 금주 시늉을 해보면 어떨까 싶다. 숙취를 다독이며 문화재청 답사기 공모전 원고를 마무리했는데 가난해진 내게 복음이 들려왔으면 좋겠다.

Posted by 익구
:
070507
홍기빈 선생님의 『투자자-국가 직접소송제』(녹색평론사, 2006)라는 책을 흥미롭게 읽었다. ISD(Investor-State Dispute)가 한미 FTA의 최대 독소조항으로 지적하는 분들이 적잖기 때문에 관심이 가는 분야다. 홍 선생님의 저서는 ISD의 다각적 조명으로 많은 기초 교양을 쌓게 해준다. 오늘날 세계경제를 휩쓰는 (자본가의) 자유지상주의라는 철학적 기반을 엿보는 즐거운 배움이다. ISD는 외국인 투자자가 투자 유치국의 협정의무 위반 등으로 손해를 입을 경우 직접 해당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제도다. 홍 선생님은 “투자자는 국가를 대상으로 소송을 걸 수 있지만 국가는 투자자를 대상으로 소송을 걸 수 없다(23쪽)”는 비대칭적 특징을 지적한다.

ISD는 신자유주의의 확산으로 사적 소유권의 개념이 확장된 결과물이다. 소유자가 갖고 있는 “단순한 ‘사물’에서 ‘사물을 통해 벌어들일 화폐가치’, 즉 ‘소득창출 능력’으로 바뀐 것(66~68쪽)”이다. 글쓴이는 적용된 사례 검토를 통해 투자자가 주권 국가와 동급의 법적 지위를 누리는 것을 넘고 있음을 보여준다. “투자자들을 보호하는 ‘방패’의 성격을 넘어서는 것으로, 오히려 투자자들이 투자대상국 사회 전체를 공격하는 ‘창’의 성격(114쪽)”으로 돌변했음을 강조하며, “‘힘없는 투자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배상금’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정복자가 된 투자자들’이 뜯어가는 ‘승전 배당금’(161쪽)”에 가깝다고 역설한다.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걸 투자자들이 그리 만만한 존재들이 아니라는 건 직관적으로도 알 수 있다. 경계해야 한다.

송기호 변호사님 등의 분들은 ISD의 위헌적 요소를 우려한다. 투자자의 재산권과 기대이익을 포괄적으로 보장하고 있어 우리의 헌법과 법률이 보장하는 재산권보다 보호 범위가 넓기 때문이다. 또한 대한민국 헌법 제119조 등을 통해 우리 헌법이 수정자본주의 혹은 사회적 시장경제를 채택하고 있다는 게 해석론적 통설이기도 하다. 하지만 헌법 제6조 2항은 “외국인은 국제법과 조약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그 지위가 보장된다”고 규정하고 있어 외국인의 재산권 보호가 법률보상주의에 위배되지 않을 여지가 많다. 또한 FTA 협정문을 국내법으로 판단한다면 어지간한 국제조약은 위헌 시비에 말릴 공산이 크다는 현실론도 설득력 있다.

보다 근본적으로 우리 행정법상 손해전보제도의 흠결을 검토해야 한다. 행정상 손해전보에 관한 현행 법제도에는 적잖은 흠결이 발견된다. 현행 국가배상법상 위법하지만 무과실인 경우에는 국가의 손해배상책임이 인정되지 않고, 행정상 손실보상에 관한 일반조항이라 할 수 있는 헌법 제23조 3항은 재산권에 대한 직접적 침해에 대한 보상만을 규정하고 있다. 게다가 적법행위로 말미암은 특별한 손해가 발생하는 경우에도 보상규정이 없어 적절한 보상을 해주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입법론적 정비가 필요하다. 간접수용을 인정하지 않는 국내법을 근거로 협정문을 위헌이라고 타박하는 논리가 아슬아슬하다. 우리 스스로가 먼저 고칠 점이 꽤 있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우리가 세계 각국과 맺은 투자협정에 포함한 ISD로 인한 실제 분쟁이 벌어진 바는 없다. 그러나 소송 천국이라 불리는 미국과는 양상이 사뭇 다를 것이다. 법무부는 현행법과 제도, 관행 등을 분석해 협정 위반 소지가 있는 부분을 사전에 찾아내 고치고, 각 부처가 외국인 투자관련 정책을 입안할 때 FTA 협정을 위반할 가능성이 있는지 미리 점검하는 ‘외국인투자 영향평가제’를 도입할 계획이라고 한다. 국제 전문 인력풀을 구축하는 등의 장기적 호흡의 노력도 기울일 게다. 하지만 아쉬움이 남는다. 한미 FTA 협상 과정에서 한국은 ISD 조항이 포함된 협정초안을 미국에 제시했다. 국내의 반대 여론을 이용해 다른 분야에서 미국의 양보를 받을 가능성을 없애버렸다. 폭넓은 예외조항을 받아냈다고 자화자찬하기 전에 협상카드 하나를 날려버린 건 실책이 아닐까 싶다.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이라도 잘 했으면 좋겠다.


070508
프랑스 대선 결선투표에서 집권 대중운동연합의 니콜라 사르코지 후보가 세골렌 루아얄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프랑스식 국가 개입주의 모델의 황혼이라면 섣부른 생각일까? 영미식 신자유주의 모델에 맞섰던 프랑스의 예외성도 글로벌 스탠더드 앞에 융해되고 있다. 선거 결과에 대한 감상과는 별개로 프랑스 국민들의 높은 참여정신과 프랑스 정당들의 또렷한 정책 대결이 부럽다. 민주적 정당성과 안정성을 도모하기 위한 결선투표제도 호감이 간다. 그 무엇보다 패배한 사회당 지자자들이 진심으로 슬퍼할 때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절감한다.

다시 눈을 대한민국으로 돌리니 어떤 나라를 만들어야 하느냐를 놓고 갑론을박하는 프랑스인의 기품에 견주어 솔직히 열등감을 느낀다. 한국보다 더 좋은 나라로 이민을 간다는 사람의 심정이 이런 건지도 모르겠다. 같은 해에 대선을 치르는 이 땅은 국고보조금을 받기 위해 급조한 가건물 정당, 백마 타고 올 초인을 기다리는 학수고대 정당이 횡행하고 있다. 필패의 구도로 향해가는 분열신당론자들은 구차하게 질 것이 뻔한데다 역사적으로 옳지도 않은 길을 으쓱대며 걷고 있다. 물론 국회의원님들이야 어찌어찌 금배지를 다시 달 수 있을 테니 그리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닌지도 모르겠지만. 역사를 경시하는 국민들이 많다 보니 오명을 좀 남겨도 비용편익분석상 이득이 더 큰 셈이다.

선거 승리나 정치적 생존에 집착하는 분들이 추레하듯이 ‘도로 민주당’의 귀환에 예민하게 반응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신경이 쓰이는 건 솔직히 어쩔 수 없다. 내 성장통에 지역주의가 끼어있기 때문이다. 92년 대선 때 나는 열 살배기 어린이였다. 정규 방송을 다 중단하고 오로지 개표방송을 하는 게 참 지겨웠다. 88 올림픽 때 경기 중계 관계로 만화 프로그램이 일시 취소되어 분개했듯이 말이다. 내 눈에 가장 먼저 비친 것은 김영삼의 환희나 김대중의 눈물이 아니었다. 초등학교 3학년 말 한국사에 빠져 있던 내게 신라와 백제를 연상시키듯 갈라진 영호남의 개표 결과 그래프가 가슴에 박혔다. 난 그 때 처음 지역주의라는 걸 실감했다.

그 후 15년, 여전히 지역주의는 우리 정치의 큰 상수(常數)다. 역사를 하늘보다 두려워하는 녀석으로서, 양심이 신보다 위대하다고 믿는 녀석으로서 나는 새삼 또 다짐한다. 내 영혼을 내 스스로가 통제 가능할 때까지 지역주의에 손짓하거나 굴하지 않기를. 지역주의를 비롯한 부조리한 각종 연줄에 생채기가 날 때 함부로 좌절하지 말기를. 그나저나 나부터 지역주의에 대한 집착을 좀 버려야겠다. 내 자신의 문제의식만을 절대화하는 잘못을 범할까 걱정이다. 어릴 적 고민을 아직도 품고 끙끙대다니 난 어른이 덜 된 걸까? 내 출생지가 대구가 아니었더라면 좀 덜 괴로웠을까? 어렵다.


070509
두부는 물기를 어느 정도 빼느냐에 따라서 일반두부, 연두부, 순두부로 나뉜다. 빨갛게 조려낸 일반두부, 양념간장 살짝 올린 연두부, 보글보글 순두부찌개 모두 내가 사족을 못 쓰는 음식들이다. 나는 논쟁을 할 때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분명히 정하기 어려울 때면 세상을 두부 자르듯이 썰지 못하겠다며 물러설 때가 있다. 세상이 단순하지 않은 게 내 탓은 아닐 테니 나의 우유부단함만 구박하지 말아달라는 방어기제인 셈이다. 여기서 말하는 두부는 일반두부 즉 모두부를 말한다. 연두부도 모두부마냥 낱개 포장해 팔기도 하지만 연두부는 완만한 곡선미가 그 본성이라고 우기고 싶다.

점심 때 작은 연두부를 숟가락으로 떠먹으며 인간 세상이 이런 모습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순두부처럼 흐물흐물하지도 않으면서 일반두부처럼 각지게 썰리지도 않는 그런 세상 말이다. 일반두부 같은 마니교적 이분법도 아니고, 순두부 같은 니체식 허무주의도 아닌 그리 단단하지 못한 본질과 다채로운 현상이 버물리는 연두부 같은 세상! 혹자는 푸딩과 뭔 차이가 나느냐 핀잔하겠지만 내가 겪기로 푸딩의 점성(실체를 유지하려는 힘)은 연두부에 견주어 더 세다. 나는 연두부 수준의 차짐과 끈기를 사랑한다. 연두부의 목넘김을 만끽하며 나는 내 삶을 연두부처럼 가꾸고 싶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이래 놓고 순두부찌개 먹을 때는 순두부의 고집 없음을 예찬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나는 가끔 요상한 방법으로 세속을 철학화(philosophize the secular)한다.^^;


070510
『고구려의 그 많던 수레는 다 어디로 갔을까』(바다출판사, 1999)를 쓴 김용만 선생님은 “고구려는 착한 나라가 아니었다. 물론 악한 나라도 아니었다. 고구려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한 국가였다(43쪽)”라고 평했다. 『삼국사기』 광개토태왕 기록에는 거란을 쳐서 남녀 5백 명을 포로로 삼고 거란으로 이주 당한 고구려 백성 1만 명을 환국시키고, 백제를 패배시키고 8천 여명을 사로잡았다는 기록 등이 실려 있다. 이들 포로들은 고구려의 새로운 백성이 되었을 것이다. 광개토태왕비문에는 왕릉의 수묘인에 대한 규정이 나오는데 광개토태왕은 자신의 정복 활동으로 포획한 신래한예(新來韓穢)들로 하여금 묘지 관리를 맡기라고 하교한다(실제로는 한예사람들이 예법을 모를까봐 고구려 원 구성원인 구민(舊民)들을 데려와 함께 능을 관리했다).

광개토태왕 치세 때뿐만 아니라 고구려는 중국을 비롯해 주변 나라들로부터 인구를 빼앗기 위해 애썼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의 그 애달픈 피난 행궁을 긍정한다”는 김훈 선생님의 표현을 빌려 나는 고구려의 그 치열했던 노동력 확보 전쟁을 긍정한다. 나는 고구려의 약탈을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건 아니다. 그것은 억지로 부인할 수 없다는 소극적 긍정이다. 고구려에 침략주의나 제국주의적 요소가 어느 정도 포함되어 있음 역시 소극적으로 긍정한다. 한민족이라는 개념은 없었지만 자기 땅에서 사는 백성들이 배곯지 않고 자존심 팽개치지 않게 하기 위해 애썼던 고구려 지배계급에 견주어 오늘날 이 땅의 위정자들은 얼마나 진화했는가. 무참하다. 고구려는 생존을 위해 불가피하게 많은 이들의 피를 흘렸다. 역사에 진보라는 것이 있다면 불가피함의 여지를 줄여서 회피 가능하게 만드는 데 있지 않을까. 우리네 지도자들이 너무 함부로 불가항력적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 현실은 늘 냉혹하지 않았던가.


070511
지난 프랑스 대선에서 패배한 사회당이 책임 소재를 놓고 내홍을 겪고 있는 모양이다. 루아얄 후보의 탓인지, 사회당의 탓인지, 프랑스 국민들의 성향 변화 탓인지 가장 큰 요인을 놓고 설왕설래가 한창이다. 사회당의 기존 이념을 건사해 흐트러진 전선을 다잡자는 쪽과 중도파와 손잡아 우경화 된 민심을 다독이자는 쪽이 팽팽히 맞선다. 공교롭게도 대한민국 열린우리당의 사정도 비슷하다. 과격한 개혁정책이 민심을 잃었다는 쪽과 지지자를 배신하고 보수화 되었기 때문에 동력을 잃었다는 쪽이 버성긴다. 노무현 대통령의 탓인지, 열린우리당의 탓인지(혹은 한나라당의 탓인지), 대한민국 국민들의 성향 변화 탓인지 헛갈리는 문제들이 적잖다.

그만큼 인간 행동을 구성하는 요인은 복합적이고, 사회의 작동원리도 다면적이다. 신채호 선생님은 『조선상고사』에서 “개인이 사회를 만드느냐, 사회가 개인을 만드느냐”는 문제를 고심했다. “개인도 자성(自性: 그 자체의 본성이나 성질)이 없고, 사회도 자성이 없다면 역사의 원동력은 어디에 있는가?”고 묻는다. 단재는 궁리 끝에 “개인이나 사회의 자성은 없으나 환경과 시대를 따라서 자성이 성립한다고 생각한다”고 밝힌다. “환경에 따라서 성립한 민족성”과 “시대에 따라서 성립한 사회성”에 좌우된다는 것이다. 원효와 퇴계가 시대와 환경을 바꾸어 태어났다는 사고실험을 통해 시대와 경우가 인물을 산출하는 원료가 되기는 하지만, 인물이 시대와 환경을 이용하는 능력은 다름을 논증한다. 이런 논의 끝에 개인과 사회의 관계에 대해 단재가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다. “사회가 이미 결정된 국면에서는 개인이 힘을 쓰기가 매우 곤란하고, 사회가 아직 결정되지 않은 국면에서는 개인이 힘을 쓰기가 아주 쉽다”는 것이다(신채호 지음, 박기봉 옮김, 『조선상고사』, 비봉출판사, 2006, pp. 79~86 참조).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경선을 놓고 이명박, 박근혜 진영이 티격태격하고 있다. 만약 프랑스처럼 결선투표제 있었다면 이들이 이렇게 다투기보다는 1차 투표 통과를 위한 정책 공방을 벌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별로 차이가 없는 분들이니 아마 개인의 문제보다는 사회(즉 제도)의 문제가 크다. 범여권의 갈팡질팡은 호남 지역주의라는 거부하기 힘든 매력(?)이 없었더라면 저렇게 구차하지 않을 것이다. 같이 하기 힘든 사람들이 밥그릇 동맹을 맺는 것을 보니 사회적 요인보다는 (생존에 집착하는) 개인적 요인이 더 커 보인다(지역구도 하에서 소수파인 범여권이 뭉치는 건 사회적 요인이기도 하지만). 이렇게 나누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다. 이런저런 합리화를 할 뿐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건지도 모르겠다. 단재의 견해를 좇자면 우리 사회는 결정된 국면일까 그렇지 않을까. 당대의 사람들은 늘 과도기를 살게 마련이라 결정되지 않은 국면이라고 보는 경향이 많을 듯싶다. 더군다나 오늘날 변화의 속도도 빠르다. 개인의 가능성이 만개하기 좋은 시절이지만 여전히 견고한 수구기득권 구조를 보면 사회의 문제가 만만치 않으니 혼란스럽다.

그나저나 이인제씨가 민주당으로 복당한단다. 그의 이런 스스럼없는 행각은 개인의 문제인가, 사회의 문제인가.^^;


070512
사촌 윤정누나가 결혼하셨다. 내 개인 홈페이지 익구닷컴의 설계와 관리를 맡아주셨고, 외형보다는 내실이 중요하다는 점을 늘 강조하시던 누나께 늘 고맙다. 결혼식장에서 나는 부조금 봉투를 받아 번호를 매기는 일을 하느라 결혼식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식권으로 밥을 먹는 대신 답례품을 교환하거나 만원을 봉투에서 넣어 하객들에게 주는 게 흥미로웠다. 주말이면 결혼식이 겹치게 마련인데 한 쪽에서는 밥을 먹고 다른 쪽에서는 답례품을 받거나 봉투를 받는 게 훨씬 실용적이다. 내가 결혼식을 많이 안 다녀봐서 잘 모르겠지만 하객들의 선택권을 넓힌다는 측면에서 괜찮은 방안 같다.

예전 국제경영 강의 시간에 중국에서 결혼식 답례품으로 초코파이 한 상자를 나눠주는 게 인기라는 걸 배운 기억이 난다. 당시 오리온의 현지화 전략의 성공 사례로 많은 상찬을 받았다. 결혼식을 잘 마무리짓고 큰집으로 돌아와 2시간 30분에 걸쳐 부조금을 계산했다. 장부액과 실제금액이 2만원 차이 났는데 3만원짜리 부좃돈을 5만원으로 기입했기 때문에 난 착오인 듯싶다. 오차율이 0.1%도 안 되니 미련 없이 손을 털어야 회계학을 배운 자의 도리(GAAP에 따른 효익과 비용간이 균형)를 다하는 셈이 된다. 흔히 부주, 부줏돈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부조(扶助)가 맞는 표현이다. 그나저나 자형 담에는 좀 덜 어색한 모습 보여 드릴게요.^^;


070513
일주일만에 다시 종묘를 찾았다. 지난 일요일 종묘대제가 있었던 날은 너무 번잡해서 제대로 답사를 못한 게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우리궁궐 길라잡이에서 자원하신 안내원분의 설명을 경청했다. 건물도 몇 동 없어 금방 끝날 줄 알았는데 제대로 둘러보니 한참을 들었다. 특히 종묘 정전을 그동안 가운데서 양옆으로 증축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오른쪽으로만 증축했다는 것을 알게 되어 기뻤다. 내가 안내했던 분들께 정정 보도(?)를 해야 할 텐데 걱정이다. 세관 공무원이시면서 주말에 짬을 내어 궁궐 안내원으로 자원봉사를 하시는 박태훈님의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나도 언젠가 그런 기분 좋은 투잡을 가져보고 싶다.

사회봉사라고는 도통 할 줄 모르는 내게도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리라. 우리 것에 대한 예찬만 늘어놓는 게 아니라 통렬하게 투덜거리는 시비쟁이 안내원이라 구박받을까봐 벌써부터 걱정이지만. 2004년 10월 1일 종묘 답사부터 시작된 목조건축에 대한 관심이 고구려 고분벽화나 고려청자, 불화, 불상, 석탑 같은 고미술 전반으로 확장되더니 이제 문화산업이나 문화정책에까지 눈을 돌리게 만들었다. 종묘는 세계문화유산이기 이전에 내 삶의 큰 전환점이 되는 소중한 공간이다. 내게 가슴 뛰는 생의 의미를 불러일으킨 이 공간을 더 탐구하고 싶다. 종묘를 비롯한 궁궐 건축에는 준전문가가 될 계획이다. 우리 문화유산을 아끼는 아마추어 애호가가 더 늘어나야 한다는 게 내 평소 신조인데 일단 나부터 실천해야겠다.

Posted by 익구
:
070430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이 대선 불출마 선언을 했다. <정당정치 중요성 일깨운 정운찬 전 총장>이라는 제목의 한국일보 사설이 이 사안을 가장 적절하게 분석하는 듯싶다. 나 또한 이번 사건이 정당정치의 중요성을 환기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오랜 시행착오를 거친 현재의 정당정치 구도에 대해 어느 정도 존중하는 마음가짐”이 부족했으며, “사회적 혜택을 정치로 보답해야겠다는 생각 자체가 낡았다”는 지적이 매섭다. 나는 일전에 농담 삼아 정 교수님이 대선이 뛰어들면 2년 주기로 나오던 거시경제이론 개정판이 올 여름에는 안 나와서 많은 수험생들의 부담을 더는 효과가 있다고 말한바 있다. 이 추세로 보아 정 교수님의 거시경제이론 8판이 곧 나올 테니 열심히 읽고 궁리해야겠다.


070501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는 한국 회화 가운데 유명하기로 손꼽히지만 그 발문의 속살을 들여다보면 그림에 대한 이해가 더욱 높아진다. 세한도는 추사 선생이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 제자 이상적이 보내준 책을 받고 그 정성에 감격하여 그려준 그림이다. 이상적은 역관(譯官)이라 중국을 드나들며 추사를 위한 서책을 수집할 수 있었다. 양반 지인들이 자신을 멀리할 때 역관 제자가 남아 제 곁을 지켜준 것이 유독 더 애틋했는지도 모르겠다. 추사 선생은 세한도 발문에서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歲寒然後, 知松栢之後凋也)”는 논어 구절을 인용해 제자에게 극진한 고마움을 표한다.

이상적은 스승의 세한도를 받고 “세한도 한 폭을 엎드려 읽으매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리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歲寒圖一幅 伏而讀之 不覺涕淚交)”로 시작하는 답장을 썼다. 옛사람들이 왜 그림을 읽는다고 했는지 알겠다. 세한도는 발문까지 읽고 나서야 비로소 제대로 완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한도 오른쪽 아래 구석에는 장무상망(長毋相忘) 네 글자가 새겨진 붉은 도장이 찍혀있다. 오랫동안 잊지 말기를! 스승이 찍었든 제자가 남겼든 서로의 도타운 마음자리가 내 무심함마저 녹인다.

정민 교수님의 번역을 내 입맛에 맞게 고쳐 세한도 발문을 익구 버전을 완성해봤다. 난 그림 그리는 솜씨는 없으니 이런 발문 혹은 답장이나마 써봐야겠다. 세한도에는 진짜배기 의리가 배어 있다. 고 오주석 선생님의 맛깔스런 세한도 해설이 다시 읽고 싶어진다.


070502
충북 괴산군이 표창한 음주문화상을 놓고 말이 많다. 건전한 음주 문화로 지역경제에 도움이 줬다는 이유로 공무원에게 상을 준 것이 비교육적이라는 비판이 매섭다. 나는 괴산군의 고육책을 아프게 긍정한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요식업에 자본을 투하하는 내수 경기 진작을 오래 전부터 주장해왔던지라 기본 취지를 동감한다. 소비를 촉진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땅을 팠다 묻는 일이라도 시켜서 임금을 지급하라던 케인즈학파의 해법을 따왔다.

어디까지나 상징적 의미이자 단기적 처방으로 제시한 것일 뿐 근본적 경기 회복책은 아님을 잘 알고 있다. 술 먹고 노는 죄책감을 덜기 위해 내수 경기 진작이라는 미사여구를 끌어다 쓰는 집단 최면에 가깝다. 다만 부상으로 국내 여행, 견학을 보내준다고 하던데 부상이 좀 안 어울리는 거 같다. 차라리 전통 명주 같은 걸 부상으로 했다면 반발이 덜하지 않았을까 싶다. ‘술에는 술’이랄까.^^; 술을 많이 마시는 것도 어렵지만 맛나게 잘 마시기는 더 어려운 듯싶다. 내 둘레 사람들과 음주문화상을 패러디한 걸 만들어볼까 생각도 해봤지만 그런 상 없어도 잘 마시고 사니 불에 기름을 부을 필요는 없겠다.

술을 마시나 안 마시나 별로 재미가 없는 나는 술자리에서 유쾌한 사람이 되는 게 오랜 숙원이다.


070503
“봉황이 천 길을 날되 오동나무가 아니면 쉬지 않고, 선비가 한 쪽에 숨어살지언정 옳은 주인이 아니면 섬기지 않는다(鳳凰翔千仞兮 非梧不棲 士伏處于一方兮 非主不依).” 유비가 삼고초려 하는 가운데 만난 제갈량의 아우 제갈균의 말이다. 현명한 새는 좋은 나무를 가려서 둥지를 튼다(良禽擇木)는 호기가 헌걸차다. 열린우리당 정동영, 김근태 전 의장이 탈당 가능성을 시사하며 신당 창당에 집착하고 있다. 한때 집권여당의 당의장까지 역임하고 참여정부의 국무위원까지 꿰찼던 분들이 내뱉는 말씀치고는 경박하고 무책임하다.

내 주제에 도덕적 훈계를 하는 거 같아 민망하다. 이 분들이 정말 제 밥그릇 때문에 이런 행위를 하는 건 아닐 거라 믿고 싶다. 현실정치는 명분만으로는 안 되는 영역이 있을게다. 현재 정치지형상 소수세력인 이 분들이 각종 연합을 통해 간신히 영남 지역주의에 맞설 수 있다는 냉혹한 실정을 모르는바 아니다. 좌파와 우파의 정책 대결이 또렷하고 공동 정부(코아비타시옹)를 구성하기도 하는 프랑스에서도 사회당이 타 세력과 연합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사람 사는 게 길다면 길지만 지고 살기에는 너무 짧다. 소심한 나는 대개 현실론의 손을 적잖이 들어줬다. 내 업보다.

선거에서 져도 출마하는 사람이 있어야 선거제도가 존속할 수 있으며, 자기 당의 강령을 들고 나올 수 있어야 복수 민주 정당제를 발전시킬 수 있는 정당이라는 유시민 보건복지부 장관의 말씀이 옳다. 우리도 자신의 신념에 책임질 줄 아는 정치인, 정당을 가져볼 때가 되지 않았나 하는 욕심을 내본다. “차라리 한 때의 적막을 겪을지언정 만고의 처량함을 취하지 말라(寧受一時之寂寞 毋取萬古之凄凉)”는 채근담 구절이 사무친다. 나는 김근태님, 정동영님의 만분의 일도 미치지 못하지만 적어도 처신만은 그 분들보다 더 잘하고 싶다. 그 분들이 밉기보다는 측은하다.


070504
지난 4월 30일 중국 장쑤(江蘇)성 천녕사(天寧寺)에서 천녕보탑(天寧寶塔) 낙성식이 성대하게 열렸다. 천녕보탑은 송나라 때 만들어졌지만 전란으로 소실되었다가 2001년부터 국내외 성금을 모아 다시 세웠다. 13층 153.79m의 높이로 중국에서 가장 높은 불교탑이 되었다. 사진으로 봐서는 복원을 한 재료가 뭔지 알 길이 없다. 제작기간이 짧은 것으로 보아 전통 목탑이라기보다 시멘트를 사용했을 거라 추정만 한다. 규모가 크니 내실은 별 볼일 없기를 바라는 내 질투 때문이다. 문득 황룡사 9층목탑을 떠올렸다가 하염없이 상념에 빠졌다.

얼마 전 경주세계문화엑스포공원 내에 짓고 있는 경주타워에 높이 82m 규모로 황룡사 9층목탑을 음각화한 형상이 공개됐다. 이렇게 나마 황룡사 목탑의 흔적을 살리려는 노력이 안쓰럽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2017년쯤 황룡사 복원 여부를 최종 결정할 예정이다. 나는 황룡사 9층목탑을 제 자리에 복원하자는 견해에 심정적 지지를 보낸다. 박래부 한국일보 논설위원님 말씀대로 “조바심 때문이 아니라 새 자료 발굴 가능성이 거의 없기 때문”에 결정적 증거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현재 기술을 집대성해 중건의 첫걸음을 떼는 게 어떨까 싶다.

김홍식 명지대 건축학과 교수님에 따르면 문화유산 수리에서 흙을 이기거나 바르는 흙일을 중국사람을 고용해서 쓰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문화재 보수공사가 이윤을 추구하는 도급제도로 운영되기 때문에 값비싼 전통기술을 쓰지 않는다”는 주장이 따갑다. 돈이 안 되는 걸 외면하다 보니 전통기술을 운용하는 장인들이 계승자 없이 고령화되고 있는 형국이다. 전통건축계의 유효수요(effective demand)를 창출하는 건 추레한 경제논리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폐사지의 낭만을 마냥 읊조리기에 우리네 문화적 저력이 너무 갑갑하다.


070505
금요일 밤에 학교 응원제인 입실렌티 뒤풀이를 참석하고 토요일 아침에 집에 왔다. 입실렌티는 고려대학교 교호(校號)로 오스만 투르크에 맞선 그리스의 독립운동가 입셀란테스에서 따왔다는 설이 유력하다. 지성과 야성을 조화롭게 추구한다는 의미로 ‘지야의 함성’이라는 별칭이 붙은 이 행사는 가수와 학생들의 공연 및 응원으로 진행된다. 아무래도 가수 중심의 무대가 형성되게 마련이라 대학 축제의 상업성 등의 비판을 받기도 한다. 가령 이번 초대 가수로 아이비가 오느냐 안 오느냐가 큰 관심사였다. 요즘 인기가수이기도 하지만 학교 응원가이기도 한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가 샘플링 된 댄스곡 ‘유혹의 소나타’가 고대생 사이에서 인기를 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끼리야 재미 삼아 하는 말이지만 외부에서 볼 때는 그리 어여삐 보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침 먹고 귀가한 게 참 오랜만이다. 홍익이와 작년 입실렌티 뒤풀이를 아침까지 남았을 때 앞으로 다시는 이렇게 하지 않기로 다짐했었다. 그 약속 지키지 못한 게 아쉽기보다는 지키지 못할 약속을 남발한 게 부끄럽다. 그래도 작년 뒤풀이보다 더 많은 분들과 풍성한 시간 보낼 수 있어서 즐거웠다. 녹지운동장에서 펼쳐진 응원을 엉성하게 따라하며 중요한 것들은 우리 몸에 각인된다는 명제에 대해 생각했다. 입가에 퍼지는 옅은 미소부터 도약할 때의 그 촉감, 어깨동무한 손등을 타고 내리는 땀방울 같은 기억들을 내 마음에 오래도록 담아 두고 싶다. 고연전의 규모에 견주어 입실렌티 응원은 약소하지만 나는 비좁고 흙먼지 날리는 입실렌티 응원만의 매력이 적잖다. 끝까지 함께 해주신 광호형께 각별한 고마움을 표한다. 형님 우리 월요병 없는 세상을 만들어 봐요!^-^


070506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종묘대제(宗廟大祭) 끄트머리를 참관하고 왔다. 무형 문화유산에 대한 관심이 낮은 나는 오월 첫째주 일요일에 열리는 이 행사를 알고는 있었지만 번번이 놓쳤다. 이번에도 늦잠이 이기지 못하고 늦게 나섰다. 종묘대제를 크게 신을 맞이하는 절차, 신이 즐기는 절차, 신을 보내는 절차로 나눈다면 나는 신을 보내는 절차만 관람한 셈이다. 종묘제례는 조선왕조가 지내는 제사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중요한 제사였다. 종묘제례를 지낼 때 연주하는 궁중음악인 종묘제례악과 더불어 2001년 유네스크 ‘인류 구전 및 무형유산걸작’으로 선정됐다. 종묘 건물 역시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상태다.

보태평(保太平)과 정대업(定大業) 등의 연주에 맞춰 추는 팔일무(八佾舞)를 온전히 감상하지 못해서 아쉬웠다. 팔일무는 여덟 줄 8열씩 64명이 늘어서 추는 춤이다. 공자는 노나라의 실권자 가운데 한 사람인 계평자(季平子)가 대부(大夫) 주제에 자신의 묘정에서 팔일무를 춰 천자를 참칭한 것이 예에 맞지 않다며 분개하기도 한다. 조선시대에는 여섯 줄 6열씩 육일무를 추었는데 대한제국시대 이후 팔일무를 추게 된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만약 공자가 이 광경을 본다면 어떻게 평할까 궁금하다(설마 따지시겠는가?). 종묘 건축이 검소함을 추구해 장엄을 더했다고 하지만 나는 그런 연쇄효과를 잘 느끼지 못하겠다. 난 종묘 건축의 단청이 조금 더 화려했으면 좋겠다는 불경한 생각을 품고 있다.

고구려가 망했을 때 보장왕 등을 당 태종 이세민이 묻힌 소릉(昭陵)에 바치게 하고, 장안의 태묘에 바쳤다고 전한다. 이것은 고구려의 제사체계가 무너졌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서글픈 광경이다. 임진왜란 때 선조가 헐레벌떡 몽진하면서도 챙긴 것은 종묘에 모셨던 선대 왕들의 신위였다. 왕의 책무 중에 하나가 제사권 수호였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충효사상을 공동체의 유대를 위해 활용했던 동양 문명의 단면이다. 대한제국은 비참하게 망했지만 그 제사를 끊이지 않게 한 것은 대한민국인의 자비심 때문만은 아닐 게다. 아마 민주공화국이라는 제도의 품이 너르기 때문일 공산이 크다. 좀 못 되게 말해 제의의 엄숙함은 상당 부분 거세된 채 관광자원으로 전락했다고 폄하할 수도 있다. 수천 명이 모여 관람하는데 그 옛날의 분위기를 기대한다는 게 억지다. 무료로 배포한 종묘대제 자료집이 일반인들의 관람에 큰 도움이 되었듯이 종묘제례악을 손쉽게 감상할 수 있도록 온라인상으로 공개했으면 좋겠다.

『예기』에는 “상례에 있어 슬픔이 모자라고 예가 넘치기보다는, 예가 모자라고 슬픔이 넘치는 것만 못하며, 제례에 있어서는 공경함이 모자라고 예가 넘치기보다는, 예가 모자라고 공경함이 넘치는 것만 못하다(喪禮, 與其哀不足而禮有餘也, 不若禮不足而哀有餘也. 祭禮, 與其敬不足而禮有餘也, 不若禮不足而敬有餘也)”고 말하고 있다. 예는 방편(方便)이다. 예는 정성을 표하는 돌다리일 뿐이니 예 자체가 절대화되어 인간의 행위를 구속하는 건 민망한 일이다. 집집마다 예법이나 풍속, 습관이 다를 수 있다는 가가례(家家禮)를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는 인인례(人人禮)로 더 쪼개보면 어떨까. 이는 개인주의 시대의 미덕이 될 것이다.

종묘 구석에 외롭게 자리한 공민왕 신당을 둘러보고 나오며 종묘에 모셔지지 않은 광해왕을 추념했다.

Posted by 익구
:

好學日記(07.04.23~04.29)

일기 2007. 5. 1. 13:01 |

070423
4월 23일은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 책의 날’입니다. 22일 통계청의 2006년 가계수지동향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 전국가구(2인 이상)의 한 달 평균 서적 및 인쇄물에 대한 지출은 1만288원으로 전년에 비해 2.8% 줄었다고 하네요. 서적 및 인쇄물 지출비는 서적(학습 참고서 제외) 7631원, 일간신문 2256원, 잡지 271원, 지도·악보·카드 등 기타 인쇄물 130원으로 조사됐습니다. 대한출판문화협회가 산출한 지난해 책 한 권당 평균 가격이 1만1545원이니 두 달에 한 권 정도 사보는 셈입니다.

책을 덜 산다면 빌려서라도 많이 봐야하는데 우리나라의 열악한 공공도서관 실태를 볼 때 이마저도 여의치 않을 것 같네요. 전국 공공도서관에 대한 문화관광부의 자료구입비 지원이 2004년 폐지되면서 도서 구입 예산이 더욱 줄었거든요. 국민 1인당 월평균 독서량이 1권에서 왔다갔다하는 수준이고, 국민 1인당 도서관 장서수도 1권이 안 된다고 하니 책 관련 통계에서 1권을 돌파하는 것도 참 쉽지 않네요. 그나마 대학도서관의 사정이 나은 편이니 대학도서관을 시민에 개방하자는 주장에 끄덕이면서도 대출 중인 책이 늘어나 책 빌려보는데 불편할까봐 선뜻 찬동하기 힘든 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저는 할 일이 없어서가 아니라 할 일을 하면서도 짬짬이 하는 책읽기를 추구하지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간 허영의 독서도 있었고 불필요한 금전적 낭비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많은 책장을 넘기며 그 책들만큼 아름다운 마음들과 대화를 한 것이 행운이었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제가 할 줄 아는 게 별로 없어서 책이나마 붙잡게 된 건 천만다행이에요. 볼테르는 “책을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지금까지의 세계는 결국 책으로 지배되어 왔기 때문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볼테르의 찬사와는 달리 독서가 무력할 때도 많다고 생각하지만 읽은 만큼 실천하기 위해 노력해봐야겠습니다. 한미 FTA 체결로 국내 출판업계는 좀 더 어려워질 공산이 큰데 책을 좀 사서 봅시다.

사실 전 도서 충동구매를 좀 줄여야 하는 입장입니다. 제가 책을 읽는 속도보다 책꽂이에 책이 쌓이는 속도가 빠르거든요. 제가 애용하는 인터넷 서점 알라딘의 장바구니에는 『전습록』, 『삼국지 시가 감상』, 『알기쉬운 한국건축 용어사전』, 『비전을 상실한 경제학』, 『목적의 왕국』, 『모두에게 공정한 무역』,  『현대 정치과정의 동학』 등의 책들이 지름신이 강림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수학노트가 추가된 이준구 교수님 미시경제학 해답집 증보판은 아직 등재되지 않아서 못 집어넣었네요). 이번 달에는 헌책방을 너무 과하게 이용해서 추가 지출을 막아야 하지만 아마도 오늘이 가기 전에 몇 권을 살 거 같습니다. 영화 <러브 액츄얼리>의 명대사인 “오늘은 크리스마스니까요(Just because it's christmas)”를 패러디하자면, Just because it's world book day!!!^-^

추신 - 근데 왜 술의 날은 없을까요? 하나 만들어도 좋을 거 같은데 말이죠. 처음처럼데이 뭐 이런 거 말이죠.^^;

책의 날 기념해서 쓴 <4월 23일은 세계 책의 날입니다> 전문


070424
“수출만이 살길이야?”라는 도발적인 기사를 읽었다. 김소희 한겨레21 기자님의 글이다. 그는 스크린쿼터를 협상카드로 쓰지 않는 정부의 불철저함을 질타하는 글 말미에 “그냥 자유무역 안 하면 안 되나? 좀 못살고 세금 더 내면 안 해도 된다는데. 나는 정말 잘 먹고 싶지만 꼭 잘살고 싶지는 않다. 좀 처지더라도 대충 살길은 없는 걸까?”라며 어려운 질문을 던진다.

나는 나를 비롯한 통상론자들이 김소희 기자님의 저 물음에 어느 정도 답변을 내어놓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너와 나는 화해할 수 없는 세계관의 차이가 있다고 돌아설 사안이 아니다. “먹을 만큼 먹고 사는데 얼마나 더 잘 살아야 하냐?”는 질문에 우린 아직 갈 길이 멀다, 돌격 앞으로만 외치는 건 우스꽝스럽다. 중국과 일본의 샌드위치가 될까 두려워 밤잠을 설치시는 분들의 우국지정 또한 마땅히 기려야겠지만.

김소희 기자님은 그저 탄식했을 뿐이지만 이런 비슷한 문제의식을 모든 이들이 체화해야 할 것처럼 말씀하시는 분들도 종종 있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효용함수는 소중하다. 우리가 꾀할 바는 서로 다른 효용함수가 어울리면서도 김 기자님처럼 덜 살려는 사람들에게 여전히 잘 먹을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데 있지 않을까? 나는 덜 살겠다는 ‘결단’을 내릴 수 있으나 그것을 후대에게, 내 둘레에게 강권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복거일 선생님은 소박한 삶을 꿈꾸는 대안 공동체가 외부 세계의 노력에 편승한 무임승차자에 지나지 않을 수 있음을 설득력 있게 풀어냈다. 복 선생님은 “현존하는 것들이 사회적 진화 과정을 거치면서 많은 대안들 가운데 가장 나은 것들로 판명되었”으며 “대안으로 제시된 것들은 거의 모두 오래 전에 버려진 것들”이라고 주장하신다(“[책보기 세상읽기] 무임승차자들의 천국” 동아일보. 2002. 09. 07. 참조). 개인적 대안을 사회적 대안으로 확장시키는 데는 보다 섬세한 얼개와 동시대인에 대한 면밀한 관찰이 필요하다. 대안 없는 비판을 삶의 낙으로 여기는 언론인과 지식인이 얄밉다고 비판 그 자체가 대안일수도 있음을 간과해서도 안 되겠지만.


070425
가끔은 양비론 말고 그 어떤 말도 구차스러울 때가 있다. 4·25 재·보선이 그렇다. 기초의원까지 포함한 총 56명의 당선자 중 무소속은 23명으로 한나라당의 22명보다 많다. 정당정치가 붕괴됐다. 오래 전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꽃피기를 바라기보다는 쓰레기통에서 장미가 피기를 기다리는 편이 낫다”는 영국 언론의 악담은 한국인의 가슴에 오랜 멍울로 남았다. 이 말을 극복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노력한 필부들이 적잖다. 하지만 적어도 정당정치와 관련해서는 장미가 쓰레기통에 던져지고 있음이 또렷하다. 지난 생채기가 오죽 쓰라렸는지 이 쓰레기통은 한국 유권자에게 그리 큰 멍울은 아닌 모양이다.

정당정치가 절대선은 아닐 것이다. 돈 주고받는 재미에 넋이 나간 배금주의 정당, 제 후보를 내쳐가며 죽여주길 자청하는 피학주의 정당, 차린 건 없지만 신토불이는 몸에 좋다는 향토주의 정당이 물고 물리는 판국에 정당이 무슨 쓸모가 있을까 싶다. 물론 당선자나 낙선자 모두 나보다는 훌륭하신 분들이다. 그런 쟁쟁한 분들이 고작 이 정도 정당과 나라를 만들고 있다는 건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 이쯤 되면 과학의 영역을 과감히 포기하고 대한민국 땅의 지세(地勢)를 점검하며 풍수지리학을 비롯한 각종 주술과 미신(이라 불리는 점복과 제의)에 기대고 싶다. 좀 덜하다 싶었던 지역주의가 약동하는 모습을 보라. 짓밟아도 솟아나고 침 뱉어도 날름 받아먹는 저 맷집과 넉살이시여. 흩어졌다 모이는 현묘지도(玄妙之道)가 여기 있었네.


070426
달팽이 뿔 위에서 싸워 무엇하리
부싯돌 불같이 반짝하고 없어질 이내 몸
부귀는 부귀대로 빈천은 빈천대로 즐기리
크게 웃지 않는다면 그대는 바보
蝸牛角上爭何事(와우각상쟁하사)
石火光中寄此身(석화광중기차신)
隨富隨貧且歡樂(수부수빈차환락)
不開口笑是癡人(불개구소시치인)

문학 전반에 걸쳐 소양이 없는 나이지만 특별히 배우고 싶은데도 인연이 잘 안 닿는 게 한시(漢詩)다. 당시나 송시 선집을 아무거나 집어들어 음미하려 해도 도무지 흥취가 일지 않는다. 한학자 손종섭 선생님이 “시는 옮겨도 시가 되어야지 산문이 되어서는 안 된다”며 한시를 맛깔스런 우리말로 옮기기 위해 노력하시는 것도 한시의 감상을 돕기 위한 절치부심일 게다. 나야 그저 남들의 풀이 가운데 내 입맛에 맞는 것을 짜깁기할 뿐이지만.

고 정주영 회장께서 당신의 집무실에 걸어놓았다는 백거이의 시는 그의 삶과 다소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의 삶을 표상한 문학만을 아낄 필요는 없다. 때로는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이 더 북받친다. 풍운아 김부식도 “부끄럽구나 달팽이 뿔 만한 세상에서 반평생을 공명 찾아 헤매다니(自慚蝸角上, 半世覓功名)”라고 읊었다. 너무 팍팍하게 산다는 느낌이 들 때 달팽이 뿔(蝸角)을 떠올리며 속도 조절을 해봐야겠다. 백거이의 시는 제목 그대로 술잔을 앞에 놓고 외워야지.


070427
한겨레신문에서 오랫동안 연재되었던 “내 영혼을 울린 한마디” 같은 연재물을 내 둘레 사람들과 이어달리기 하듯이 해보고 싶다. 자신의 좌우명 혹은 자신의 삶에 큰 울림을 준 문구를 소개하는 식으로 말이다. 알고 지내는 이 많아도 나는 그 사람이 아끼는 구절 하나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앞으로는 지인들의 좌우명을 묻고 마음을 흔들었던 말을 여쭤봐야겠다. 당시 그 연재물에서 명사들이 꼽은 한마디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었다.

선과 악이 모두 나의 스승이라(善惡皆吾師) - 한승헌 변호사
해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아? - 한비야 여행가
하면 된다 - 김어준 딴지일보 총수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 부유한 것이 아니라 많이 주는 사람이 부유한 것이다 - 이경숙 국회의원
땅에 넘어진 자, 그 땅을 짚고 일어서야 한다 - 이문재 시인
가지 잡고 나무를 오르는 것은 기이한 것이 아니나(得手樊枝無足奇), 벼랑에 매달려 잡은 손을 놓는 것이 가히 장부로다(懸崖撤手丈夫兒) - 성석제 소설가
실천은 사상의 종점이다 - 유시춘 전 국가인권위원
생긴 대로 살아라! - 권혁범 대전대 정외과 교수
귀족이 되지 말라 - 이효인 전 한국영상자료원장
큰 열매를 맺는 꽃은 천천히 핀다 - 이순원 소설가
60억의 개인에게는 60억개의 진실이 있을 수 있다 - 변정수 미디어평론가


070428
2002 월드컵 한국-독일 4강전 다음 날 <서바이벌 역사퀴즈>라는 KBS 역사유적 순례 퀴즈프로그램에 촬영했다. 점심 시간에 진행자인 성세정 아나운서와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갔다. 성세정 아나운서는 소속이 소속인지라 그럴 수는 없지만 내심 MBC 차범근 해설위원의 중계를 보고 싶다는 바람을 솔직히 밝혔다. 오래 전 이야기니 이제 공개해도 무방하리라.^^; 나는 그의 진솔한 발언이 듣기 좋았다. 엄기영 앵커가 SBS 축구 중계를 보고, 보건복지부 장관이 술담배를 즐기며, 연개소문과 이세민을 한국과 중국 사람들이 서로 바꿔 좋아하고, 고대생이 연세우유를 애용하는 세상은 좀 더 너그럽고 흐뭇하지 않을까?


070429
나는 스스로 불효를 약간 면한 수준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갑자기 효성이 지극해질 가능성이 별로 없어 보인다. 다만 널리 알려진 효경(孝經) 한 구절만은 즐겨 암송한다. “몸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다치지 않도록 함이 효의 시작이요, 몸을 세워 도를 행하며 후세에 이름을 날려 부모를 드러나게 함이 효의 마침이다(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 立身行道 揚名於後世 以顯父母 孝之終也)”의 한자 독음을 외워서 10초 정도 읽는 것으로 나의 불효를 참회한다. 부모님과 오랜 시간을 같이 있게 되는 주말을 아무 일 없이 보내고 나니 문득 이 10초 참회가 하고 싶어진다. 10초는 너무 짧으니 30초 정도 되는 걸로 새로 찾아봐야겠다.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을 뒤적여 봐야 하나?

Posted by 익구
:
070416
2007년 4월 12일 서울외고가 기독교 학교로 전환했다고 한다. 이날 1층 시청각실에서는 기독교 학교 출범 감사예배가 진행되었단다(여기서 기독교는 가톨릭이 아닌 개신교를 지칭하는 것일 테니 이하 개신교로 칭한다). 감사예배 녹취록 일부를 보니 많이 착살맞았다. 김희정 교장은 “저를 환영하고, 좋아하는 곳에만 우뚝 설 것이 아니라, 저에게 반대를 던지는 사람들이 있다면 왜 반대를 던지는지 듣기를 원합니다”는 알쏭달쏭한 말씀을 나열하고 있다. 그간 학생 대다수가 반대하는 개신교 학교로의 탈바꿈을 어떻게 일방적으로 무시했는지 익히 들어왔던지라 그 말씀에 전혀 믿음이 가지 않는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더니 2007년 3월부터 시행된 개정 서울외고 교칙 징계규정은 섬뜩한 단어들 일색이다. 본래도 그런 교칙이 있었는지 모르겠으나 혹여 믿음(?)에 반하는 학생들을 계도(?)하겠다는 의도로 추가한 건 아닌지 모르겠다. 내 모교가 교육을 포기하고 선교에 나서는 모습이 안타깝다. 학생들의 인권을 침해하면서 인성 교육을 하겠다며 호들갑 떠는 게 민망하다. 일련의 사태에 문제의식을 가진 재학생들이 울분을 토로하는 걸 보려니 가슴 아프다. 앞으로 일상적으로 자행될 위헌적 행태에 시달릴 후배님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짠하다. 대한민국 헌법 제20조 1항을 어렵사리 붙들고 있는 후배님들을 지지한다. 내 모교는 얼마나 더 초라해질 셈인가?


070417
『유림(儒林)』 4, 5, 6권을 독파했다. 조광조, 이황, 이이, 공자, 맹자, 주희, 왕수인 등 거유(巨儒)들의 조명한 유교소설이다. 비록 연작 형식이지만 참 오랜만에 읽은 장편소설이다. 특히 6권에서 퇴계의 이기이원론과 사단칠정론을 설명하는 대목은 작가가 많은 공력을 들였음을 느꼈다. 제 아무리 영민한 소설가라고 해도 유가철학의 고갱이를 쉽게 익히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 자신이 오랫동안 곱씹었기에 쉬우면서도 핵심을 가로지르는 글을 내어놓았으리라. 서술은 하되 창작은 하지 않는 유가식 글쓰기인 술이부작(述而不作)이 잘 녹아 들어간 수작이다.

마지막으로 내 눈길을 끌었던 것은 퇴계 선생님이 고봉 기대승과 편지로 치열하게 토론하는 장면이었다. 퇴계는 자신보다 스물 여섯 살 어린 고봉에게 “지금 그대(고봉)가 정성껏 저를 가르치신 덕분에 잘못된 견해를 버리고 새로운 뜻을 얻었고, 새로운 깨달음을 키웠으니 참으로 다행입니다”라고 스스럼없이 고백한다. 돌아가기 두 달 전까지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고 고치는 모습이 눈부시다. 스승으로 삼을 신하를 묻는 선조 임금에게 자신의 직계제자도 아닌 고봉을 사심 없이 추천했던 그 마음자리를 숭모한다. 도산십이곡 한 구절을 빌리자면 “그 행하신 길이 앞에 있는데 그 도리를 어찌 따르지 않으리!”


070418
미국 버지니아 공대의 총기난사 사건을 담담하게 지켜보기 힘들다. 범인 조승희씨가 한국 교포학생인 것도 차분히 관조하기 어렵게 만든다. 그러나 이번 사안이 인종이나 국적을 따질 필요가 없다는 건 또렷하다. 이번 비극이 한국인이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은 아니기 때문이다. 가령 이번 사건의 범인이 브라질인이라고 해도 이걸로 브라질인의 폭력성을 입증했다고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는 그저 총기 소지의 자유가 헌법으로 보장된 나라에서 가끔 벌어질 법한 끔찍한 사건이다. 사람의 문제보다 제도의 문제가 좀 더 크다. 사람의 문제도 민족이나 국민성의 문제라기보다는 일개인의 문제라고 봐야한다.

한국 언론의 호들갑에 과공비례(過恭非禮)라는 말을 꺼내고 싶지만 아껴두는 게 좋겠다. 법률상 대한민국인인 조승희씨의 만행에 함께 부끄러워하고 송구스러워하는 것도 거개 자연스럽고 적잖이 마땅하다. 그러나 그 감정을 좀 더 확장해서 세계시민으로서 안타깝고 애틋한 마음을 품어 봤으면 좋겠다. 외국인 노동자들의 열악한 후생복지에 고개를 젓고, 무고하게 죽어간 이라크의 시민들을 딱하게 여기는 건 위선이라든가 오지랖 넓은 참견이 아닐 게다. 한미 FTA협상에 반대하며 분신한 고 허세욱님의 호소에 관심을 보내는 것도 비슷한 맥락의 노력이다. 우리가 덜 가까운 이들의 고통을 나눌 수 있을 때 슬픔을 극복하는 힘이 솟아난다. 어느 버지니아 공대생의 피켓 문구처럼, “Heal the pain with love(사랑으로 아픔을 치유합시다).”


070419
북송 시대 사마광은 황하 유역의 서북 지역 출신이었고 왕안석은 양쯔강을 중심으로 한 동남 지역을 대표했다고 한다. 주도권을 쥐고 있던 서북 지역이 전통주의를 주장했다면 신흥세력인 동남 지역은 신법(新法)으로 쇄신할 것을 주장했다. 지식인의 철학이나 정견이 온전히 그 개인의 것은 아닌 모양이다. 시공간의 제약이라고 표현하기보다는 요소(要素)라고 보는 게 더 적절하다. 자신의 생각에 시공간이라는 요소를 눅여낼 때 그 사상이 좀 더 탄탄해질 수 있다. 역사와 환경을 톺아보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 제3세계 학생으로서의 나를 기대해본다.


070420
정부가 20일 국회 통외통위와 한미 FTA 특위에 협상 결과를 담은 협정 원문을 공개했지만 열람 수준이 너무 깐깐해서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고 있다. 컴퓨터 모니터를 통해서만 열람 가능하게 만들고 메모하는 것도 미주알고주알 제한했다. 국회의원당 보좌관 1명만 열람을 허용해서 전문가의 자문도 받지 못한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정부가 공개한 자료는 협정문 원문과 부속서에 그쳐 관세 양허안과 서비스ㆍ투자 유보안 등 민감한 세부 문건들은 공개에서 제외됐다.

참여연대의 지적대로 국민들은 통상능력과 영어능력만 보고 국회의원을 선출하지 않는다. 설령 국회의원들이 행정부의 통상전문가의 식견에는 미치지 못하더라도 그들에게 행정부를 감시하는 기능을 줌으로써 견제와 균형을 이루기 위함이다. 미국은 협상 타결 직후부터 의회와 민간 전문가 700여명이 협정문 초안을 꼼꼼하게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정부는 통상절차가 미국과 다르다며 정보 공개를 머뭇거리고 있다. 협정문 공개가 요식행위로 전락할 때까지 통상절차법 등을 손질하지 않았던 국회의원들의 책임 방기도 크다. 이래가지고 우리의 입장을 조문화 작업에 최대한 반영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그간 국정감사 등이 벌어질 때 정부 관료들에 대한 국회의원들의 오만불손한 고압적 태도가 마뜩잖았던 나이지만 정부 관료도 그에 못지 않을 수 있다는 건 여실히 목도하고 있다. 입법부와 행정부가 서로 일방통행만 하는 모습을 자주 본다. 성역을 없애기를 바랐던 참여정부가 도리어 성역을 만드는 모습을 보는 건 씁쓸하다. 관료들을 민주적으로 통제하라고 만들어 놓은 참여정부 안의 정무직 공무원들은 당최 뭐하고 있는 건가. 이 정도의 통상시스템으로 세계 각국과의 FTA를 잇달아 추진하겠다니 갑갑하다(미국과도 해치웠으니 더 두려울 게 없다는 건가).

우울한 심사를 『행정의 공개성과 정치 지도자 선출』(책세상, 2002)을 읽으며 달래봐야겠다. 막스 베버는 관료제와 의회 민주주의를 양립시키기 위해 궁리했다. 그는 튼실한 의회 민주주의 구현이 관료제의 압도를 막는 힘이 된다고 주장한다. 베버의 신념대로 한미 FTA가 대한민국 국회가 비판을 넘은 대안을 제시하고, 견제와 더불어 책임을 지는 ‘적극적인 정치(베버의 용어)’를 펼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비가 그치니 황사가 온다.


070421
말로만 듣던 <러브 액츄얼리>를 마침내 봤다. 해피엔딩 영화를 좋아하는 내가 흡족했던 걸 보니 이 영화는 해피엔딩인 모양이다. 영화를 자주 보지 않는 나는 가끔 보는 영화만이라도 “끝이 좋으면 다 좋아(All's well that ends well)”였으면 좋겠다는 고집이 있다. 그래서 해피엔딩에 집착한다. 짝사랑하던 회사 동료와 사랑을 이루지 못한 사라(로라 리니)의 이야기는 이 영화를 해피엔딩으로 간직하려는 내 욕심을 방해한다. 친구의 신부를 사랑한 마크(앤드루 링컨)는 낭만적이라며 찬사를 보내는 수준에서 마무리지을 수 있는데 말이다.

정신이상으로 수시로 동생을 찾는 오빠를 위해 그토록 고대하던 짝사랑과의 하룻밤을 포기하는 사라의 슬픔이 느껍다. 열망의 정점에서 희열의 최고조에서 스스로 내려오는 사라의 눈물이 다른 웃음들을 압도한다. 로완 앳킨슨이 아니었더라면 이 영화를 해피엔딩으로 쳐주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사랑은 분명(Love actually) 어느 곳에나 있지만 나처럼 무심한 녀석에게는 좀 멀리 떨어져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랑은 기성품(Ready-made)끼리의 만남이라는 고약한 연애관을 가진 나로서는 포르투갈어를 배우는 제이미(콜린 퍼스)의 정성을 따라가려다 가랑이가 찢어질 텐데 걱정이다.


070422
<위대한 유산 74434>를 시청하다가 『동대사요록(東大寺要錄)』의 내용을 접하고 무척 놀랐다. 그 기록에는 일본 최대의 사찰로 손꼽히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도다이지(東大寺)를 건립하기 위해 삼국이 힘을 보탰음이 적혀있다. 백제사람 행기(行基)스님을 비롯해 가람의 총책임자인 고구려사람 고려복신(高麗福神), 불상을 주조한 백제사람 국중마려(國中麻呂), 대불전 건축을 맡은 신라사람 저명부백세(猪名部百世) 등의 이름이 나온다. 나는 도다이지가 우리 것이라고 주장하려는 게 아니다. 그저 도다이지가 괜히 정겹게 느껴지고 일본에 대한 내 숙원도 좀 누그러지는 듯싶다. 일본인들은 왜 이런 걸 잘 알리려 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양국 친선 교류에 더 보탬이 될 거 같은데 말이다. 하기야 잘 알려고 하지 않는 우리 탓을 먼저 해야지 수원수구(誰怨誰咎)하리요?

Posted by 익구
:

070409
내가 몸담고 있는 경영B반 웹진에서 한미 FTA 특집호에 도전해보자는 제안을 했다. 내가 5년 만에 신문 스크랩을 하고 있을 정도로 꽤 만만찮은 이슈라는 생각에서다. 웹진이 시사교양을 다루는 매체는 아니지만 한 번쯤 생각을 품어볼만 하다는 생각에 용기를 냈다. 어차피 나온 의견들을 정리하는 수준 밖에 만들지 못할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그 핑계로 우리끼리 공부나 좀 해보자는 꿍꿍이였다. 나는 회의 시간을 이용해 그룹 스터디식으로 학습한 다음에 좌담회 형식의 결산을 해보자는 계획을 내놓았다.

홍익이가 “준비하는 과정에서 웹지너 절반 탈퇴, 출판 후 독자층 절반 이탈 예상”이라는 재미난 댓글을 달아줬다. 일전에 김선주 선생님은 <담론이 사라진 시대>라는 칼럼에서 “이렇게 공적인 글쓰기가 어려운 시대는 없었던 것 같다”고 푸념하신 바 있다. 내 또래의 친구들이 시사적인 문제에 대한 허심탄회하게 논의하기란 참 드물다. 중국의 후스(胡適)가 “더 많은 문제를 연구하고 더 적게 주의를 논하자(多硏究些問題 少談些主義)”라고 주창했듯이 내 둘레의 사람들과 문제의식을 공유하길 바란다. 도반(道伴)이 그리 까마득한 경지는 아닐 게다.


070410
마켓 셰어는 참이슬이 높지만 로열티는 처음처럼이 높다는 기사를 재미나게 읽었다(“친구같은 술 `참이슬` vs 순해서 좋다 `처음처럼`” 한국경제. 2007. 04. 01. 참조)”. 내 눈길은 끈 것은 한국갤럽이 자체 개발한 미래 경쟁력 진단 지수인 G-CBPI(Gallup Consumer Brand Preference Index)이다. G-CBPI는 특정 브랜드에 대한 소비자의 호감도를 나타내는 지수다. 현재의 브랜드 위치를 파악하고 미래의 성과를 예측하는 지표로 활용할 수 있다. ㄱ브랜드를 가장 구매하고 싶다는 소비자가 50%고, ㄱ브랜드를 가장 구매하고 싶지 않다는 소비자가 20%면 G-CBPI는 50-20=30이 되는 간단한 계산이지만 발상이 흥미롭다.

참이슬의 G-CBPI는 50.6, 처음처럼은 26.3이라는 조사 결과는 처음처럼이 지금보다 시장 점유율을 더 높일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2004년 마케팅 강의 발표 주제로 “교촌치킨 vs BBQ”를 준비했던 기억이 난다. 팀원들 사이에도 교촌치킨파와 BBQ파가 나뉘어 티격태격했던 추억이 새록하다. 나는 발표 유인물을 작성하며 독일의 경제학자 헤르만 지몬의 말씀을 맨 끄트머리에 넣었다. “치열한 경쟁만이 최고의 노력으로 이끌어간다. 메르체데스 벤츠는 BMW와 아우디가 있음을 기뻐해야 한다. 물론 그 반대도 옳다”는 경구를 찾았다며 좋아했지만 발표 점수는 신통치 않았다.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천사 미하일은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를 돌보기 때문에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사랑으로써 살아간다는 것을 깨달아 다시 천국으로 돌아갔다. 천국 입장권을 놓고 누가 내게 같은 질문을 던진다면 나는 한참 머뭇거리며 사랑과 경쟁으로 산다고 답할 것이다. 그래도 이과적으로(!) 각종 영양분과 물이라고 답한 내 동생보다는 좀 덜 무뚝뚝하다.^^; 정정당당하게 경쟁하고 패자를 보듬는 연대의식을 발현하는 일이 양립불가능한 문제는 아니다.


070411
미국의 경제학자 이스털린(Easterlin)은 경제 성장과 인간의 행복감 사이의 상관관계를 탐구한 선구적 학자다. 그는 소득수준이 높은 사람들이 같은 나라, 같은 지역의 소득수준이 낮은 사람들보다 행복감도 커진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런데 부유한 나라와 가난한 나라에서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의 비율이 별 차이가 없다는 점이 발견됐다. 또 한 나라 안에서 가난하던 시절과 부유한 시절을 비교해도 행복감을 느끼는 사람의 비율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한 나라의 높은 경제 성장과 물질적 풍요가 그 나라 국민 전체를 더 행복하게 한다는 보장이 없는 셈이다. 이처럼 일정한 생활수준에 다다르면 경제 성장은 개인의 행복, 사회적 후생 증가에 이바지하지 못하는 현상을 “이스털린의 역설”이라 일컫는다.

이스털린은 “소득과 욕구는 분명 나란히 증가한다. 내 해석이 맞는다면, 경제가 성장한다고 해서 사회가 부족함 없는 과잉 공급의 상태가 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끊임없이 성장하는 욕구를 더욱 강하게 자극하게 될 것이고, 그런 욕구의 충족을 위해 다시금 경제적인 성장이 요구될 것이다(하랄드 빌렌브록 지음, 배인섭 옮김, 『행복경제학』, 미래의창, 2007, 28쪽)”라고 주장한다. “더 많은 돈이 지속적으로 더 행복하게 만들어 준다는 잘못된 가정”을 버리라는 그의 충고 앞에 많은 걸 곱씹게 된다. 욕망의 증가 속도가 부의 증가 속도보다 더 빠르다면 우리는 연신 소금물을 들이키며 갈증을 느껴야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스털린의 역설이 성립하는 “일정한 수준의 부”가 어느 정도인지는 이견이 적잖다. 벌써부터 국민소득 2만불 시대를 넘어 3만불 시대로 가자는 구호가 나오는 것을 보면 우리의 일정 수준은 3만불로 설정해야하는 것인지 헛갈린다. 절대적 빈곤을 퇴치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지만, 상대적 빈곤을 다독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돈이 드는 건 아닐 것이다. 정부 정책 차원에서 국민의 행복감을 증진하는 서비스를 고안해야겠지만 개별 경제주체들도 인식의 전환을 할 필요가 있다. “60세가 되어 20세 시절보다 열 배 부자가 된 사람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 누구라도 열 배 더 행복해졌다고 말하지 않는다”라는 조지 버나드 쇼의 핀잔에 자유롭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다.


070412
고3 수험시절 나를 괴롭힌 것은 늘 그랬듯이 수리탐구Ⅰ영역(수학)이었다. 영어나 과학탐구도 불안했지만 결정적 순간에는 수학이 내 발목을 잡을 것임을 오랜 경험(?) 통해 인식하고 있었다. 덕분에 수험생활 내내 내가 좋아하는 사회탐구나 언어영역 공부는 거의 못한 채 수학에 매달렸다. 내가 수학을 못했던 건 재능도 없었지만 즐기지도 않았기에 단순히 시간을 좀 더 늘린다고 단숨에 해결된 문제는 아니었다. 내 수험생활은 그리 즐겁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택한 전략은 지극히 합리적인 행동이었다. 사슬의 법칙이란 게 있다. 사슬의 강도는 가장 약한 부분에서 결정 난다는 뜻이다. 다른 부분이 아무리 굵어도 한 군데가 약하다면 사슬은 툭 끊어지게 된다. 이미 안정적인 점수를 확보한 과목에 시간을 들이기보다는 불안정하고 점수 상승의 여지가 많은 과목에 집중 투자함으로써 약한 사슬을 강화하는 건 수험생의 미덕이라고 예찬할 만하다.

행정고시 수험생들은 행정법과 경제학을 대체로 까다로워한다. 행정법의 진입장벽도 만만치 않지만 나는 결국 내 약한 사슬은 경제학이 될 것이라고 직관하고 있다. 이제 곧 경제학 공부에 들어가면 아마 지겹도록 옆에 끼고 있어야 할 듯싶다. 그러다 보면 또 다른 약한 사슬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정치는 살아 있는 생물이라고 하지만 공부도 살아있는 생물이다. 학문도 가능성의 예술이리라.


070413
꺼지기 전 촛불마냥 대통령 4년 연임제 개헌안에 대한 막판 힘 겨루기가 한창이다. 개헌이 정치적 흥정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노무현 대통령님은 조건 없이 개헌안을 거둬야 한다. 물론 대통령이 헌법에 규정된 권한에 따라 개헌 발의 의사를 밝혔을 때부터 일관되게 토론을 거부했던 분들은 떳떳하지 못했다. 시기의 문제를 제기한 분들의 논거는 그리 튼실하지 않았다. 밉살맞은 사람이 제안한 것이니 논의조차 하기 싫다는 인상을 받았다면 내 옹졸함 때문일까? 대통령과 야당, 언론 가운데 누가 제 몫의 책무에 충실했는가.

개헌은 단순한 법률 개폐와는 차원이 다른 민주공화국 최고의 정치행위 가운데 하나다. 대통령의 개헌 발의권은 그에 걸맞게 신중하게 쓰여야 한다.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자신이 별로 없는 나는 정쟁이 일상화될 거라는 비판을 방어하기 힘들다. 지금의 양대 보수정당 과점 구조는 선거제도의 모순 이전에 국민들의 자발적 선택의 결과물 아닌가. 사실 대통령 단임제가 제도의 문제인지, 사람의 문제인지는 명확히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단순히 단임제 하나에 공력을 쏟아 부을 까닭이 없다. 긴요하면서도 좀 더 손쉬운 제도 개혁으로 선거제도 개편을 들 수 있다. 우리 사회의 정치적 대표성을 높이는 건 보다 근본적인 개혁이 될 것이다.

대통령과 국회의원의 임기 만료일이 거의 일치하는 지금이 원포인트 개헌의 최적기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 시기적절성까지 포기하며 챙겨야 할 것은 국민들의 섭섭한 마음자리다. 4년 연임제 개헌을 지지하지만 현 정부 내의 개헌은 반대했던 국민들의 마음을 헤아려야 한다. 그것이 설령 노무현을 인간적으로 싫어해서 나온 견해라고 할지라도. 한미 FTA로 실의에 빠져 있는 일부 국민들을 다독이며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한 노력도 때를 놓쳐서는 안 된다. “개헌이 옳다고 생각하지만 그보다 더 옳은 것은 국민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하며 명예롭게 퇴각하자.

대통령님보다 생산적 논의를 봉쇄한 분들이 헌정을 흩뜨린 책임을 좀 더 져야할 것이다. 개헌정국에서 유독 돋보였던 고진화 의원님을 다시 보게 됐음을 꼭 기록해둔다.


070414
춘추좌전 양공 25년조에는 제 나라의 최저가 그 군주인 광을 시해했다는 경문(經文)이 나온다. 사관의 우두머리인 태사(大史; 전문(傳文)에는 대사라고 쓰여 있으나 직책 이름은 태사라는 풀이가 많아서 이걸로 따른다)가 “최저가 그의 군주를 시해했다(崔杼弑其君)”라고 기록했더니 최저가 그를 죽였다. 태사의 아우 두 사람이 이어서 그렇게 기록했는데, 그 두 사람도 죽였다. 그들의 아우가 또 그렇게 기록하니, 그 때는 그대로 두었다고 한다. 당시 역사서를 적는 사관은 세습제였다고 한다. 결국 4형제가 목숨을 걸고서야 한 줄의 역사 기록이 세상에 전하게 됐다. 이 고사는 역사의 엄중함을 환기하는 사례로 많이 인용된다.

조선왕조실록 태종 4년조의 기사에는 재미난 기록이 실려 있다. 태종이 사냥을 하다가 말에서 떨어지자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사관(史官)이 알게 하지 말라(勿令史官知之)”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바람과는 달리 그 말 그대로 적히게 됐다. 세종 13년에는 세종대왕이 태종실록을 열람하겠다고 나서자 맹사성 등이 “사관(史官)도 또한 군왕이 볼 것을 의심하여 그 사실을 반드시 다 기록하지 않을 것이니 어찌 후세에 그 진실함을 전하겠습니까(史官亦疑君上之見, 必不盡記其事, 何以傳信於將來)?”라며 만류한다. 세종 20년 대왕께서 다시금 열람을 시도하자 황희 등이 “만약 전하께서 실록을 보신다는 것을 들으면 (사관들의) 마음이 반드시 편하지 못할 것(若聞殿下省覽, 則心必未安)”이라며 반대해 끝내 보지 못했다.

오늘날 공무원의 중립의무가 공무원의 정치적 자유를 옥죄는 방향으로 쓰이고 있는 실정에서 옛 의미의 사관 제도를 만들기는 어려워 보인다. 사평(史評)까지는 바라지 않지만 적어도 꼼꼼한 기록을 남기는 데는 좀 더 정성을 쏟아야 한다. 미국의 국립문서기록관리청(The Nati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과 같은 노력이 부족하다. 연방정부의 독립 행정청인 미국의 경우에 견주어 우리네 국가기록원은 행정자치부 산하 2급청이다. 국가기록원을 독립된 차관급 청으로 격상시켜야 한다는 주장에 수긍한다. 치밀한 기록은 행정의 책임성을 높여줄 것이다. 불리한 내용도 가감 없이 남기는 현대판 사관은 불가능한 꿈일까. 기록은 힘이 세다.


070415
컴퓨터 앞에 있으면 국어사전 이용하기가 참 편리하다. 모르는 단어를 톡톡 쳐 넣으면 풀이와 용례가 척척 나온다. 한국어로 밥벌이를 하지 않는 사람 가운데 나처럼 국어사전을 애용하는 경우도 드물게다. 동생 방 정리를 하다가 나온 어휘집을 넘기며 새로 익히는 우리말 표현이 흥겨웠다. 문득 이렇게 어휘집이나 사전을 통해 발굴한 말을 억지로 유통시키려는 것이 얼마나 온당한 가에 대한 문제의식을 품어봤다.

나는 언어순수주의자는 아니지만 정확한 한국어가 아름다울 개연성이 있다는 가정에는 기꺼이 동감한다. 나는 정확성과 더불어 다양성을 추구하고 싶다. 한국어에 개념어가 부족하다고는 하지만 형용사나 동사는 아예 묻어버린 말들이 너무 많다. 먼지를 털어내고 조금 써보는 게 그리 극단주의적 행위는 아닐 것 같다. 이러한 개인 언어가 둘레로 퍼져서 언중의 호감을 얻는다면 어휘로서의 생명력을 부여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안습’, ‘지름신’, ‘폐인’ 같은 신조어의 숨결만 느낄 까닭이 없다.

소설가 김훈 선생님이 영어를 잘해야 한국말도 잘할 수 있고, 국제적 감각이 있어야 한국말이 풍요로워진다는 말씀을 하셨다(“'역전' … 이젠 도올이 김훈을 인터뷰하다” 중앙일보. 2007. 04. 14. 참조). 나는 그렇게 단정하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영어는 잘해도 한국어를 못하는 경우가 많으며, 한국어를 잘 하기 때문에 영어까지 잘 하는 경우도 많다. 오히려 세계화 시대라는 미명 아래 영어로의 쏠림이 심화돼 모국어를 얕보게 만드는 경향이 있는 듯싶다. 누리꾼들이 영어 전치사와 접속사를 구분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는 정성의 반의 반만 국어사전을 들췄다면 이처럼 그악스러운 악플들이 넘치지는 않았으리라. 오늘 익혔던 풋풋한 토박이말을 복습해본다.

결곡하다, 공변되다, 구순하다, 깨단하다, 꾀송거리다, 너볏하다, 느껍다, 당알지다, 두남두다, 부닐다, 빙충맞다, 아금받다, 알쭌하다, 앙그러지다, 억실억실하다, 일매지다, 찐덥다, 참따랗다, 탁탁하다, 헤살놓다...

Posted by 익구
:

070402
한미 FTA가 타결됐다. 협상 내용을 분석해보면 우리가 얻어낸 것과 얻어내지 못한 것을 어떻게 헤아리느냐에 따라 많은 입장 차이가 있다. 벌써부터 농축수산업 손실보전 대책 등이 분주하게 나오는 모양인데 부디 내실 있게 진행하길 바란다. 피해부문의 구제와 보상조치를 얼마나 착실히 수행하느냐에 한미 FTA의 충격을 얼마나 줄일 수 있는지가 달려있다. 특정 부문에 집중될 손해를 국민 전체가 분담하는 사회적 연대가 이뤄질지 솔직히 회의적이다. 그러나 누군가의 크나큰 희생을 바탕으로 일구는 경제발전을 반성할 수 있는 계기로 삼기 위해 노력해보자. 아니,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개방은 지속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070403
3년 반 동안 국회에서 표류해온 국민연금법 개정안이 2일 본회의에서 부결됐다. 70살 이상 노인 가운데 60%에게 한달에 8만9천원을 지급하는 기초노령연금법을 통과시킴으로써 더 내고 덜 받아 미래세대의 부담을 덜어주자는 국민연금 개혁은커녕 후세의 부담을 더 늘려버렸다(아마 내가 포함되겠지^^;). 정부가 마련한 국민연금법 개정안은 더 내고 덜 받을 수밖에 없는 엄중한 현실을 반영한 고육지책이었다.

오불관언 근본주의적 태도로 일관한 민주노동당이야 논외로 치고, 감세와 복지 축소를 주장하던 한나라당의 돌변은 어지럽다. 정부안보다 재정 부담이 더 높은 기초연금제를 주장하려면 뭔가 재원 마련의 방안도 함께 내놓아야 하는데 잘 들리지 않는다. 한나라당이 집권하면 그간 숨겨 놨던 화수분이라도 꺼내놓을 모양이다. 열린우리당을 탈당하며 민생 법안 처리에는 협조하겠다던 탈당파 의원들은 이번 표결에서 대거 기권함으로써 이 엽기적 사태를 부채질했다.

법사위까지 통과한 정부 개정안을 놔두고 한나라당과 민주노동당이 수정안을 제출한 건 결정적 패착이다. 설마 했는데 공든 탑이 무너지게 됐다. 이렇게 따로 법안을 상정함으로써 자당의 법안만을 고집하는 소인배의 무책임 정치를 낳았다. 나는 이번 사안에서 양비론을 취할 생각이 없다. 나는 정부안이 그간의 논의를 통해 실현가능한 차선책으로 다듬었다고 생각한다. 정부는 국민연금법 개정안을 조속한 시일 내에 재추진하길 바란다.

물론 민주노동당과 한나라당이 가입자 단체와 합의해 내놓은 조정안도 그 나름의 의미가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미래의 가입자들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잘 보이지 않는다. 아울러 재원 마련에 대해 양당의 입장이 통일되었는지도 의심스럽다. 기왕 힘을 합친 김에 재원 마련에 대한 청사진도 함께 제시해주시길 바란다. 내가 머잖아 낼 세금의 크기를 늘리려면 그만한 설득은 있어야 할 것 아닌가. 아니면 감춰뒀던 화수분을 좀 보여 달라.


070404
나는 “직선 대표는 본래 인기 없음에 초연할 수 없는 존재다”는 말을 자주한다. 물론 이런저런 단서 조항을 붙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철인왕(philosopher king)을 주창했던 플라톤이야 말할 것도 없고 아리스토텔레스도 민주주의가 타락해 중우정치가 펼쳐지는 끔찍함을 노래(?)했다. 이처럼 인민의 지배(democracy)는 본래 그리 말쑥한 용어는 아니었다. 하지만 인간 이성이 진보한 것인지, 대철학자들의 험담이 과장된 것인지 오늘날 민주주의는 눈부신 말이 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민주주의가 적은 나라 가운데 하나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국호를 쓰고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

노무현 대통령님은 2일 한미 FTA 타결과 관련한 대국민 담화에서 “개인으로서는 아무런 이득이 없다”면서 “정치적 손해를 무릅쓰고 내린 결단”임을 강조하셨다. 그러고 보면 노 대통령님께서 지지자들의 반대편에 서서 제 지지층을 허문 일은 수두룩하다. “정치적 손해 가는 일을 하는 대통령은 노무현 밖에 없다고 스스로 믿고 있기 때문에 특단의 의지로 결정했다”는 발언은 이미 충분히 입증(?)되어 있는 셈이다. 일각에서 배신자라고 욕할 때 어지간한 강심장도 속이 쓰릴 것이다. 그것은 간언을 받아들이지 않는 속 좁음이라기보다는 자신을 지지해준 사람을 거스르는 직선 대표의 고독 때문이리라.

흔히들 반대자도 포용하는 지도자가 되라고 한다. 하지만 요 며칠 다시 봤다며 호들갑 떠는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는 과도한 비난과 저주를 즐겨 쓰던 분들이었다. 이네들의 추켜세움이 아무리 달콤하다고 해도 옛 지지자들의 돌팔매 몇 개가 더 아플 것이다. 물론 노무현 지지자 가운데 개방에 반대하는 경우는 적다고 본다. 한미 FTA까지는 아니더라도 개방 정책은 후보 시절부터 이미 예측 가능한 행보였다. 지지자들은 아마 우려가 더 된다는 뜻으로 부표를 던진 경우가 많으리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거 당시의 지지층이 붕괴되는 건 책임 정치에 비추어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다.

이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걱정을 뛰어 넘는 민주주의 자체의 위기이기 때문이다. 한미 FTA를 추진하며 도드라졌던 비민주성에 대한 지적을 겸허히 수용하길 바란다. 노무현의 뚝심이란 게 있다면 그것은 바로 민주주의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정신이 되어야 한다(개인적인 바람이지만). 이제 노 대통령님께서 하실 일은 그간의 협상 내용을 조속히 공개하고 불편한 진실을 꺼리지 않는 것이다. 단편적 정보로 인한 막연한 추측만이 난무하는 사태를 눅이고 최선을 다한 만큼 국민들의 평가를 기다리길 바란다. 진짜 뚝심은 이제부터다.


070405
오마이뉴스 민경진 기자는 “신책불이(身冊不二: You are what you read)”라는 표현을 즐겨 쓰신다. 한 사람의 사고방식은 그가 무엇을 읽고 접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는 주장이다. 민 기자는 2002 대선 당시 “신문 같은 활자매체에 길들여진 구세대와 인터넷에 익숙해진 신세대간의 갈등”이 신책불이의 한 사례라고 설명한다. 인간의 창의성도 결국 자신이 딛고 있는 곳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현실적 제약조건은 얼마나 매서운가. 뉴턴은 “만일 내가 더 멀리 내려본다면, 그것은 내가 거인의 어깨 위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라며 자신의 학설이 논리성뿐만 아니라 역사성까지 갖췄음을 겸손하게 내비쳤다. 이것도 신책불이의 한 사례이리라.

고 정운영 선생님이 쓴 중앙일보 칼럼이 변절 논란을 낳았을 때 프리맨(yong73)이라는 아이디를 쓰는 한 누리꾼이 던진 “그 많은 책을 평생 읽은 결과가 고작 이런 것이라면 인생이 허무하지 않을까?”란 물음은 무섭다. 내가 읽는 것이 편협해서 거기에 얽매임을 염려하면서도 그저 주절대다 끝나는 것이 더 두렵다. 앎과 실천의 문제에 있어 주희와 왕수인은 서로 다른 견해를 내어놓았다. 알면서 행하지 않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지만,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나서는 것도 경계할 일이기에 선뜻 어느 쪽 주장에 손을 들 수 없다. 어쩌면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에서 보신책처럼 둘러대듯이 진실은 중간 어디쯤에 있을지도 모른다. 두루 읽으면서 때 맞춰 움직이는 건 평생을 걸쳐 고민할 화두다.


070406
1857년 독일의 통계학자 에른스트 엥겔(Engel)은 벨기에 노동자 가구 153세대의 가계지출을 조사했습니다. 그 결과 수입이 적은 가계일수록 지출에서 차지하는 식료품비의 비율이 높고, 수입이 많은 가계는 그 반대라는 경험법칙을 발견했지요. 여기서 도출된 엥겔지수(Engel’s coefficient)는 가계소비지출에서 식료품비가 차지하는 비중을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엥겔지수가 25 이하면 높은 수준의 문화생활을 하는 ‘최상류’로 분류되고, 26~30은 ‘상류’, 31~50은 ‘중류’로 분류된다고 하네요.

보릿고개가 어느 정도 극복한 1980년대까지도 우리나라의 평균 엥겔지수는 40%을 오르내렸습니다. 2006년 8월 통계청이 발표한 ‘통계로 본 8·15 광복 이후 경제·사회 변화상’에 따르면 도시근로자가구의 엥겔지수는 1963년 61.3%에서 2005년 26.6%대로 하락했다고 합니다. 1963년에는 식료품비 지출에서 외식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7.5%에 그쳤지만 2005년에는 48.5%로 높아졌습니다. 참고로 북한의 엥겔지수는 1990년대 말의 80%에서 2006년 70%대로 떨어졌다고는 하나 대체로 50% 이상인 개발도상국의 엥겔지수보다는 높은 편입니다. 중국은 40% 이하이며 2050년까지 15%로 끌어내린다는 목표를 세우고 있다고 합니다.

버시바우 주한 미국대사는 한미 FTA를 옹호하며 한국 소비자들이 평균 국제 소비자에 비해 농산물에 대해 많은 비용을 지불하고 있기 때문에 엥겔지수가 OECD국가들에 비해 높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비싼 편인 쇠고기를 먹고 있기도 하지요. 하지만 값싼 쇠고기를 먹고 오렌지를 즐기는 게 소비자 후생의 전부는 아닐 겁니다. 풍요로운 먹을거리를 값싸게 이용하는 방안과 더불어 농축산업계에 발생하는 역진적인 소득재분배로 인한 사회적 형평성의 문제까지 살피는 균형감각을 키워야겠습니다.

엥겔지수와 삶의 질이 역(逆)의 상관관계에 있다고는 하지만 반드시 그런 건 아니지요. 엥겔지수를 낮추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음식을 맛나게 음미하고, 다채롭고 개성있는 문화생활로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가꾸는 일일 겁니다. 자자 밥은 먹고 다닙시다.^-^

- <작렬하는 엥겔지수> 대학로 맛집 탐방을 마친 기념으로 쓴 글


070407
언제부터인가 ‘愛후배’라는 표현이 유행했다. 각별히 아끼는, 가깝게 여기는 후배라는 뜻 정도로 쓰인다. 사람 사이가 다 그렇지만 많은 후배들 중에도 좀 더 오래 남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지난 5년 여간 이런저런 자리에서 스쳐간 후배만 수백 명은 될 텐데 내가 책임지기 힘들 정도의 관계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지만 그 정도로 스치고 만다면 망각과 무심이 인연의 자리를 꿰차는 건 시간문제다. 얼마 남지 않은 대학생활 동안 좀 더 내 곁을 지켜줄 사람을 만들고 싶다는 욕심이 자꾸 커진다. 그래서인지 나도 부쩍 愛후배라느니, 愛선배라느니 하는 말을 자주 쓰고 있다. 愛후배를 자청하는 경우도 있고, 내가 愛후배를 삼으려고 하는 경우도 있다.

잡아함경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아난다가 붓다에게 “착한 벗이 있고 착한 동지와 함께 있다는 것은 이 성스러운 길의 절반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붓다께서 “아난다여, 그렇게 말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이 성스러운 길의 전부입니다”라고 고쳐 주었다. 서로의 마음에 있는 거문고 줄(琴線)을 건드리는 愛선배-愛후배의 길은 멀고도 험하다. “너를 만나면 더 멋지게 살고 싶어진다”는 용혜원님의 시구처럼 그렇게 내 자신을 먼저 다잡는 것부터 시작해보자.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않으니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人不知而不溫 不亦君子乎)”란 논어 첫 구절도 조바심 내지 않는 힘이 되리라.


070408
부활절 즈음해서 TV에서 틀어준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흥미롭게 봤다. 예수님의 마지막 12시간은 그야말로 피와 땀으로 점철되어 있다. 뚝뚝 떨어지는 핏속에서 태형과 십자가형의 잔혹함을 사실에 가깝게 묘사했다. 영화평론가 허문영님의 평이 가장 와 닿는다. 비기독교도에게는 얼핏 “예수의 초인적인 맷집에 관한 영화”처럼 보인다는 평이 그리 불경스럽지 않아 보인다. “영적 영웅이 아니라, 육체적 영웅”으로 다가온다는 지적도 적절하다.

빌라도가 “진리가 무엇이냐”고 묻자 예수님은 “내가 곧 진리다”라고 말씀하신다.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가 떠오르기도 하고, 몸으로 살아낸 것만이 진리라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나는 부처님께서 마지막으로 남겼다는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에 좀 더 공감하는 듯싶다. 내가 성경에 문외한이라 예수님께서 대중을 진리의 주체로 보기보다 용서의 대상으로만 본 거 같아서다(물론 그런 대중들을 섬기는 심부름꾼을 자청하신 건 경배의 대상이다). 불가의 개유불성(皆有佛性)이란 개념이 기독교에도 있는지 잘 모르겠다. 

예수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용서했지만 하느님은 지진을 일으켰다. 나는 그 장면이 그다지 통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흔든 것은 “내가 목마르다(요한복음 19장 28절)”는 외침이었다. 나는 기독교가 많은 이들의 목마름을 축여줬음을 알고 있다. 하지만 박해에서 벗어난 기독교의 흐트러진 모습도 많이 보아왔다. 우리의 잘못을 대신해 돌아가신 예수님을 찬양하는 것도 좋지만 우리 둘레에 억울하게 고통 받는 이들을 돌아보려는 노력으로 대체하려는 정성도 필요하다.

어릴 적 밤새 읽었던 김동리의 『사반의 십자가』가 떠오른다. 사반은 예수님 왼쪽에서 십자가형을 당한 죄수를 모티브로 만든 인물이다. 소설에서 사반은 예수님에게 “비겁한 자여, 너는 유대 나라와 너의 생명을 버리고서 어디다 낙원을 찾고 있느냐?”일갈한다. 하늘의 영광보다 땅의 영광을 갈구하며 예수님과 격렬히 맞섰던 사반에 좀 더 동감했던 것이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듯싶다.

내세나 윤회를 믿지 않는 나는 지금 이 생애가 전부다. 나의 현세주의(現世主義)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하나님의 나라에, 불국정토에, 목적의 왕국에 좀 더 가까워지길 바란다.

Posted by 익구
:
070326
경북대 국문과 백두현 교수님은 최근 〈경북대신문〉에 기고한 칼럼 ‘대구 지역의 생활어, 대구 사투리의 특성’에서 “음절이 긴 말을 짧게 줄이는 발음 습관이 대구 사투리 특징”이라며 “이는 말을 자주 줄여 쓰는 지금 젊은이들의 언어 습관과도 통하는 현대적인 요소로 볼 수 있다”고 주장하셨다. 대구 사람들이 말수가 적고 과묵한 편이라 ‘언어의 경제성’측면에서 말을 많이 줄여 쓴 것이라는 분석이 흥미롭다.

대구 지역의 몇몇 어휘에서 말을 줄여 쓰는 현상이 비롯되었다는 것은 선뜻 수긍하기 힘들다. 용건을 압축해서 보내야 하는 휴대전화 문자나 메신저, 채팅 등을 통한 짤막한 대화의 확산도 적잖은 기여를 했을 것이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이미지나 영상의 범람하고 문자 텍스트의 지위가 흔들리면서 기인한 바도 있으리라. “과묵한 언어행실을 미덕으로 삼던 유교전통”까지 불러들이는 건 좀 지나쳤다. 그래도 대구 사투리가 말 줄임 현상의 한 요인이 되었겠거니 넉넉히 끄덕인다. 내 무뚝뚝함을 방어하기 위해서라도.

태어난 지 다섯 달 만에 서울로 오기는 했지만 태어난 곳을 고향이라 칭한다면 대구는 내 고향이다. 나는 내 고향 사람들이 말수 줄이는 것보다는 서로 많은 대화를 나누셨으면 좋겠다. 그래서 이심전심으로 지역주의의 존속에 힘을 보태기보다는 그 해체를 위해 애써주셨으면 좋겠다. ‘우리가 남이가’와 ‘미워도 다시 한번’ 이 대구시민의 미덕으로 남는다면 지역주의 완화는 요원할 게다. 나는 결국 지역주의를 극복하는 첫 걸음은 대구가 결단하는 수밖에 없다고 지역주의적(!)으로 생각한다. 나는 내 고향을 사랑하지만, 이 나라를 더 사랑한다.


070327
“형 좌익이죠?”라는 질문에 순간 화를 낼 뻔했다. 우파 편식을 염려하는 내게 어울리지 않는 질문이기도 하거니와 별 다른 근거도 없이 뜬금없이 묻는 게 좀 당혹스러웠다. 나는 “중도 자유주의자”쯤 되는 거 같다고 해명(?)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내 자신에게 화가 났다. 무의식 중에 튀어나온 “중도(中道)”라는 말 때문이다. 일전에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님은 참여정부를 중도 자유주의로 규정하신 바 있다. 아마 그걸 읽은 기억이 언뜻 나서 그렇게 밝힌 모양이다. 진보와 보수 모두에게 뭇매를 맞고 있는 참여정부가 정체성이 없기 때문인지, 공격 받기 좋은 중도로 포지셔닝해서 그런 것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난 중도라는 말이 어색하다. 

나는 정치학적 개념에 대한 공부가 부족하고 변덕도 심해 내 성향(?)을 밝히기 힘들다. 자유주의 좌파(liberal left)라고 분류되는 존 롤즈의 사상에 많은 감화를 입었기 때문에 그 언저리에서 조금 오른쪽에 있겠거니 막연히 추측한다. 자유주의 좌파를 오른쪽으로 옮기면 자유주의 중도가 되긴 하겠지만 인간의 내면이 그렇게 두부 자르듯이 갈리는 건 아닐 테니 더 이상의 가름은 무익하다. 실상 내가 자유주의자를 자칭하더라도 자유주의는 자유지상주의자에서부터 중도 좌파에 이르기까지 폭 넓은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요즘 중도 노선이 유행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중도가 균형감각을 향한 노력이기보다는 제 치우침을 분칠하기 위한 용도가 강하다. 사실 그 치우침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닌데도 말이다. 이 땅을 어떤 모습으로 만들어 가야 하느냐하는 섬세한 논의를 위해서 건전한 이념 논쟁을 벌일 용기나 정성이 모자란 모양이다. 중도가 좌와 우의 산술평균이 아니라는 점은 자명하다. 중도를 습관처럼 입에 올리는 분들이 이것과 저것을 뛰어넘은 대안을 만들어 낸 거 같지는 않다. 중도니 상생이니 통합이니 하면서 개혁이 필요한 곳을 넘어가려 하지 않았나 엄중히 성찰해야 한다.

소설가 공지영님은 어느 인터뷰에서 캐피어 좌파를 언급하며 “캐비어를 먹는 사람은 꼭 우파여야 하나요?”고 되물었다. 나는 그 지적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우리 사회에는 좀 더 많은 좌파가 필요하다는 지당하신 말씀만 읊조리고 싶지는 않다. 나는 보다 구체적으로 좌파도 캐비어를 맛나게 먹을 수 있기를 바란다. 혹자는 좌파와 캐비어는 네모난 원처럼 모순되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하지만 캐비어 먹는 좌파가 늘어날 때 좌파에 관심을 쏟는 이들이 더 늘어날 거 같다. 스스로 우파로 여기는 사람의 상당수가 캐비어를 탐낸다면 너무 지나친 발언일까?

나는 좌파에게 내 자신도 지키지 못할 과도한 윤리적 잣대를 들이대는 것을 멀리할 것이다. 좌파도 똑같은 불완전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좌파이면서도 캐비어를 먹을 위치가 되기가 쉽지 않은 게 사실이다. 이 고민을 좀 더 확장해봐야겠다. 극우파를 정규분포의 끄트머리로 내모는 일과 병행해서 말이다.


070328
동아대 석당학술원 산하 고려사역주사업단이 전 30권으로 기획된 고려사 완역본 중 1차분으로 열전(列傳)편을 9권으로 완간했다는 소식을 이제야 확인했다. 곧 나올 세가(世家)편에서는 신돈의 자손이라며 격하돼 반역열전에 실린 우왕과 창왕을 세가에 복권해 싣기로 했다. 반가운 일이다. 고려사 말기의 왜곡된 사적을 주석으로나마 교정하는 노력까지 기울여 주셨으면 좋겠다. 조선왕조실록처럼 국역 고려사 홈페이지도 머잖아 개설돼 고려사도 손쉽게 검색할 수 있기를 바란다.

한국고전번역원을 설립하는 법안이 국회에서 계류 중이라고 한다. 예산 부족이라는 핑계 때문이다. 지난 10년간 번역된 모든 한국 고전의 75%가 민족문화추진회에서 나온 셈이다. 우리 고전을 한글로 옮기는 사업을 민간단체가 도맡아 해왔다니 부끄럽다. 고전번역원이 설립될 경우 현재 민추 지원 예산에 20억원 정도의 예산이 추가로 소요된다고 하는데 이 돈이 없어서 못하고 있다니 개탄스럽다.

고전을 국역해 일반인이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하는 작업이 학술문화 민주화의 일환이라는 주장에 적잖이 동감한다. 뒷 세대 번역가들은 점점 한문을 모국어처럼 읽기 힘들다고 한다. 한문을 모국어처럼 읽을 수 있는 세대가 모두 돌아가시면 영영 물어볼 곳도 없어지는 셈이다. 민추는 고전번역원에 발전적으로 흡수되려는 어려운 결단을 내렸다. 이네들의 노고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열악한 처우를 조속히 개선하고 고전 국역에 가속도를 붙일 필요가 있다. “빨리 빨리”는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거다.


070329
신라 제42대 흥덕왕이 후사 없이 붕어하자 사촌 동생인 김균정과 오촌 조카인 김제륭은 왕위를 놓고 다툰다. 균정이 전사하자 그의 아들 김우징은 김양 등과 더불어 청해진으로 도망가 장보고에게 의탁한다. 제륭을 도와 왕(희강왕)으로 옹립한 김명은 이홍, 배훤백 등과 함께 다시 난을 일으켜 스스로 왕(민애왕)이 된다. 때를 노리던 김우징 일파는 장보고의 힘을 빌어 민애왕을 공격한다. 민애왕이 병사들에게 시해되고 승리를 거두자 김양은 그 옛날 균정과 제륭의 전투 때 자신의 다리를 쏘아 맞혔던 배훤백을 부른다.

<삼국사기> 김양 열전에는 김양이 배훤백에게 “개는 제각기 주인 아닌 사람에게 짓는 법이다. 너는 너의 주인을 위해 나를 쏘았으니 의사(義士)다. 내가 원망하지 않을 것이니 너는 안심하고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삼국지>에도 보인다. 조조가 원소에게 대승을 거두고 성을 접수하자 조조의 신하들이 원소와 내통한 문서들이 많이 발견되었다. 조조는 “원소가 한창 강성하였을 때는 나 스스로도 생존할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했소. 하물며 다른 사람들이야 오죽했겠는가?”라며 서신들을 불태우게 했다.

김양과 조조의 행동이 승자의 여유라고 폄하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고사가 애틋하게 다가오는 까닭은 이런 도량은커녕 악어의 눈물조차 흘릴 줄 모르는 승자들이 너무 많다는 못마땅함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070330
<‘인생은 무의미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라는 말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물음에 대한 답글>

중국 북송(北宋)의 유학자 주돈이의 <태극도설>은 우주의 생성과 인간의 근원을 논한 글이라고 해. 성리학의 입문서라는 <근사록>이나 퇴계 선생의 <성학십도>의 첫 머리는 태극도설에서 시작하니 세계를 인식하는 데 중요한 길잡이로 삼은 텍스트지. 그런데 “무극이 곧 태극(無極而太極)”이라는 구절의 해석을 놓고 서로 다른 주장이 펼쳐지고 있어. 무극으로부터 태극이 나온다고 해석해 무에서 유가 생긴다는 뜻으로 보는 도가적 해석이 있고, 무극과 태극을 한 실재의 두 가지 방면으로 보아 인식을 초월했다는 점에서 무극이라 이름 짓지만 태극은 실재한다는 주자의 해석으로 갈리고 있어.

물론 나도 이게 뭔 소리인지 잘 모르겠다. 고등학교 윤리 시간에 잠깐 맛보는 이기론(理氣論)도 여기서 출발하는 것이니 손쉽게 이해하려는 건 과욕인지도 모르겠어. 아무튼 무에서 유가 나왔다는 주장과 무와 유가 한 실재의 다른 모습이라는 주장 가운데 무엇이 더 설득력 있는지 잘 모르겠어. 어쩌면 어느 하나를 믿어버리면 그만이라는 생각도 들고.^^; 여하간 인생의 본질이 무의미한가라는 질문도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듯싶다. 인류의 운명이 특수한 역사적 법칙이나 진화적 법칙에 의해 필연적으로 전개된다는 역사결정론인 역사주의를 어떻게 받아들이는 가도 결부시켜 생각해볼 수 있겠지.

한 인간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다고, 보다 정확히 말해 부여된 사명이나 해야 할 임무 같은 게 있을까를 섣불리 말하기는 어려운 문제다. 이건 인간 본성이 선하냐 악하냐 묻는 것만큼 인간의 인식능력을 벗어나는 영역일 공산이 크니까. 나처럼 인생은 한 번 뿐이라고 믿는 사람은 어떤 거창한 대의명분의 병졸로서 내 삶이 소비되는 것도 원치 않고, 그렇다고 아무런 의미 없이 태어났으니 엉성하게 살다가 가는 것도 바라지 않아. “인간다움”에 대한 개념 정의는 저마다 다르겠지만 최소주의로 합의한 인간성을 고양하는 게 내 삶의 부가가치라고 믿고 있어. 그것은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인생은 한 번 뿐이고, 인간은 앞으로도 불완전하다는 가정 위에 내린 결론이지.

여전히 추상적이기는 하지만 나는 “남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不忍人之心)”이 확산되는데 미력이나마 보태고 싶어. 좀 더 구체적으로는 사회, 경제, 문화적 독점을 해체하는 것을 탐구하고 있고. 이러한 고심들이 내 삶이 너무 덧없고 맥없게 끝나지 않는 의지가지가 되어줬으면 좋겠어. 나는 이처럼 인생의 의미 유무보다는 무의미한 삶을 사는 개인을 줄이는 일에 더 관심이 간단다. 이 정도의 의미나마 부여하지 않는다면 세속에 살기가 너무 팍팍하지 않을까? 이 의미를 구현하기 위해서라도 대충 살지 말아야 하는데 노는 걸 너무 좋아해서 큰일이야.^^;


070331
97학번부터 07학번이 만나는 뜻깊은 자리에 미력이나 보탤 수 있고, 함께 즐길 수 있어서 영광이었다. 난 행사장 입구에서 06, 07학번을 대상으로 후래자 삼배(後來者 三盃)를 실시했다. 말 그대로 늦게 온 벌로 석 잔을 마시는 걸 뜻한다. 경주 안압지에서 발굴된 14면체 주사위에도 ‘연거푸 술 세 잔 마시기(三盞一去)’가 있기도 하다. 어려운 걸음 해주시는 선배님들보다 미리 와서 자리를 채워주길 바라는 마음에 악역을 자처했다.

나는 행사장에 비치된 방명록에다 도덕경 58장의 광이불요(光而不耀)를 눌러 썼다. 다양한 풀이가 있을 수 있지만 “빛나되 눈부시지 않기를”이라는 해석이 가장 마음에 든다. 우리의 빛남이 서로의 빛남을 간직하며 밤하늘의 별처럼 따로 또 같이 광휘를 뿜어내기를 바란다. 이 귀중한 자리의 실마리를 제공해주신 재현형님, 인호형님 고맙습니다. 2차까지 함께 해주신 영빈형님과 주원형님께도 감사 인사 드려야겠다.


070401
꿈결같은 밤이 지나갔다. 시인 최영미님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의 시구가 떠올랐다. 한바탕 잔치가 끝난 뒤의 허무감이 잘 묻어나는 대목이라서 잘 어울리는 듯싶다. 물론 이 시는 그런 용도(?)로만 인용되기에는 더 묵직한 시다. 마치 오늘날의 386세대에게 쏟아지는 환멸을 예견이나 하듯이 담담하게 투덜거리는 이 시를 얼마나 되뇌었는지 모르겠다.

Posted by 익구
:

070319
KBS 스페셜 <참여정치의 추억>은 상식과 원칙, 유쾌한 개미들의 반란을 꿈꾸며 창당했던 개혁국민정당의 소멸 이후를 담담히 술회한다. 2002년 11월 16일 창당식을 가지고, 2003년 11월 1일 해산투표를 하며 사실상 종지부를 찍은 개혁당은 내게도 애틋한 그리움이다. 나는 개혁당의 태동부터 몰락까지 1년여의 격정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지켜봤다. 처음 겪어보는 정당 홈페이지를 거의 매일 들렀던 거 같다.

2003년 법적으로 투표권이 생기고, 정당에 가입할 권리가 생겼을 때 개혁당원이 되는 걸 많이 검토했다(나는 여전히 개혁당 정도의 포지셔닝을 가진 정당이 한국 정당에 하나 있기를 바란다). 그러나 나는 점입가경의 신당 논의를 지켜보다 때를 놓쳤다. 만약 내가 개혁당원이었다고 해도 개혁당 해산 투표에 찬성표를 던졌을 듯싶다. 난 민주노동당 지지자들만큼의 확신과 끈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강경 보수파의 독점을 얼른 해체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개혁당 일부를 흡수 통합한 열린우리당은 얼마 전 기간당원제를 스스로 허물고, 날림 전당대회를 치름으로써 제 존재 가치를 생존욕구로만 한정짓고 말았다. 이 정당에서 작은 것이나 실현하려고 했던 무수한 꿈이 아프게 깨졌다. “개혁당 같은 정당 만들 때 다시 연락해!”라는 피켓 문구가 유독 눈에 박히는 것은 개혁당 같은 시도가 다시 이루어질 수 있을까 하는 짙은 회의 때문이리라.

당원과 지지자를 실험동물로 쓰려는 이들을 단죄하지 못하는 한 개혁당의 실패는 되풀이된다. 진정한 생활정치는 남 좋은 일이 아닌 나 좋은 일을 스스럼없이 할 수 있는데서 시작한다. 염치없는 바람이지만 개혁당과 열린우리당이 못다 이룬 백년 정당의 꿈이 다시 싹 틔우길 바란다. 그 때는 지금보다 더 적은 눈물만으로도 결실을 거뒀으면 좋겠다.


070320
노무현 대통령님이 국무회의에서 “국무위원급 행정 지도자는 정치와 무관할 수 없”다는 말씀하셨다. 정치와 행정의 관계에 대해서는 많은 논쟁거리가 있는 만큼 자세한 건 덮어두도록 하자. 하지만 장관처럼 고도의 정책결정을 내리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현실 정치에 어느 정도 관련이 있다는 점은 명징하다. 정무직 공무원으로서 정치활동을 폭넓게 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짜 문제는 이러한 선출직, 임명직 공무원이 누리는 정치적 자유에 견주어 일반 공무원들이 누리는 자유의 크기가 너무 작다는 데 있다. 노 대통령님께서 정치에 무조건(!) 무관해야 하는 하위직 공무원들의 처지를 먼저 헤아리셨으면 좋았을 거 같다.

일전에 민주노동당의 당우(黨友) 제도의 적법성 여부에 논란이 되기도 했지만 교사와 공무원의 정당활동이 원천봉쇄된 것에 대한 의문은 여전하다. 헌법재판소는 “공무원의 신분과 정치적 중립성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보장된다”는 헌법 제7조 2항을 의무로 해석했다. 그런데 헌법 제6조 2항(외국인의 지위), 제8조 1항(복수정당제 허용) 등 다른 헌법조문들에서 “보장된다”는 구절에서 의무가 도출되지는 않는다. 제38조(납세의 의무)와 제39조 1항(국방의 의무) 조항에서는 “의무를 진다”고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의무를 “보장한다”는 건 대다수 한국어 사용자들의 상식에 어긋난다.

현행 국가공무원법이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는 헌법 제11조를 위배하고 있다는 주장도 설득력 있다. 외국의 사례에 비춰 봐도 하위직 공무원에 대한 정치활동 규제가 엄격한 측면이 많다. 정당정치 제도화를 위해 청소년 및 대학생 정치교육의 내실화와 더불어 정치활동의 저변을 높이려는 시도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치적 자유는 대학교수와 국무위원들만 누리기에는 너무 중요하다.


070321
권오승 공정거래위원장은 20일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현재 우리 사회는 ‘기업하기 좋은 나라’라는 마법에 빠져 있다”는 우려를 나타냈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는 구호는 ‘목소리 큰 일부 대기업에만 혜택이 돌아가는 나라’를 만들자는 것으로도 비쳐질 수 있어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동아일보는 21일자 <기업 하기 나쁜데 살기 좋은 나라도 있나>라는 사설에서 일류국가들은 “‘기업 하기 좋은 나라’를 ‘기업 하기 더 좋은 나라’로 만들기에 여념이 없다”고 반박했다.

또 이 사설은 “기업 하기 좋은 나라보다는 소비자, 국민이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는 권 위원장의 주장에 대해 “마차(馬車)를 말보다 앞에 놓겠다는 격이다. 기업 하기가 나쁜데 어떻게 소비자와 국민이 살기 좋아질 수 있나”고 반문한다. 불학무식한 내가 건드리기에는 너무 어려운 주제다. 기업의 성장과 전체 경제 주체들의 윤택한 삶이 높은 상관관계를 보이는 지에 대한 통계자료를 쉽게 만들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겨레신문 2월 3일자 칼럼에서 “우리나라 상장기업의 순이익은 2000년부터 2005년 사이 네 배나 늘었다. 반면, 가계의 소득 증가는 경제성장률을 크게 밑돌고 있다”고 하는데 이에 대한 해법도 있어야 할 듯싶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최대한 전경련 수준으로 주창하시려는 분들은 제 주장의 정당성을 높이기 위한 논거들을 합리적으로 제시할 필요가 있다. 중국과 일본 사이에 낀 샌드위치라느니 하면서 공포의 동원을 부추기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이제 시장만능교를 세속의 영역으로 끌어내리는 노력이 필요하다. 부디 기업하기 좋은 나라라는 수사가 가뜩이나 비대한 자본권력의 살을 더 찌우는 데 이용되지 않기를 바란다.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Utopia)』가 그리는 사회의 주된 특징은 획일성이었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는 개인의 자유를 고양해 공공성을 구축하는 활사개공(活私開公, 사를 살리면서도 공을 추구한다)을 지향해야 한다. 궁극적으로 버려지는 사람이 없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 모두를 위한 나라 말이다.


070322
너는 사케를 언급하며 잘 모르는 분들을 배려해 정종이라는 용어를 썼겠지만 이제 알 만큼 알려진 만큼 청주라는 말을 써도 괜찮을 거 같단다. 정종(正宗)은 그리 바람직한 명칭이 아니라고 생각해. 정종은 일제 강점기 때 들어온 일본의 청주 상표 중 하나가 널리 쓰여 일반 명칭처럼 잘못 굳어진 것이니까. 백제 사람들이 일본에 청주 제조법을 전파했다고도 하니까 주객이 전도된 셈이야. 물론 일본은 주조 기술을 발전시켜 청주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일본 고유의 술인 사케(Sake)가 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원조라고 주장하기가 좀 머쓱하지만.

여하간 정종은 일본의 청주 상표 가운데 마사무네라고 불리는 사케의 한 브랜드일 뿐이지. 가령 한 때 진로가 수도권 소주 시장을 독점하던 시절 그냥 “진로 주세요”했듯이, 내가 버블에서 종종 즐기는 벨기에산 흑맥주 “레페 브라운 주세요”하는 것과 비슷한 셈이야. 일본 술 중에 예를 들자면 “아사히 주세요”하는 것과 비슷하고. 이처럼 상표명이 대표화된 예로 봉고, 워크맨, 레미콘, 미원 등이 있어. 술에서는 프랑스의 샹파뉴(Champagne) 지방에서만 생산되는 거품 나는 술인 샴페인이 보통명사처럼 쓰이고.

일본에서는 정종이 보통명사처럼 쓰이고, 정종이라는 술 브랜드가 많다고 하지만 우리가 그걸 따를 필요가 있을까 싶다. 정리하자면 정종은 일본말 마사무네를 우리 음으로 읽은 것이며, 소주나 맥주 같이 술의 종류를 나타내는 말이 아닌 브랜드명인지라 진짜 정종 상표를 마실 때만 한정해서 말하는 것이 비교적 적절하지 않을까 싶다. 그냥 청주 혹은 일본 청주라고 불러도 무방하지 않을까.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일본 국왕의 호칭 문제도 참 난감한 문제지. 일왕(日王), 일황(日皇), 천황(天皇) 혹은 덴노까지 다양한 의견이 있는데 사실 나도 헛갈린다(요즘 일본 하는 꼴을 봐서는 확 왜왕이라고 부를까도 싶지만^^;). 야채(野菜, やさい)가 일본식 용어임을 알면서도 채소(菜蔬)를 어색해 하고, 순우리말인 푸성귀나 남새는 거의 잊어버리는 현실을 보면 이름을 바로잡는 일(正名)보다 더 중요한 건 일상의 실천인지도 모르겠다. 본의 아니게 잡설을 늘어놓았어. 너그러이 헤아리시길.^-^

-  <정종의 바람직한 명칭을 찾아서> 전문


070323
매일유업이 지난해 12월 내놓은 ‘바나나는 원래 하얗다(이하 하얗다)’가 인기다. 빙그레 바나나맛 우유에 이어 단숨에 시장 2위를 차지했다. 바나나 우유는 노란색이란 고정관념을 깬 ‘하얗다’는 색소를 넣지 않았음을 강조하기 위해 투명 재질의 용기를 써 흰색을 부각시켰다.

바나나의 속살은 본래 하얗다. 노란 껍질에 미혹되어 그 알맹이를 몰라봤던 지난날의 과오를 반성한다. 어쩌면 바나나 우유 시장의 독점을 막기 위해 ‘하얗다’를 소주 ‘처음처럼’ 같이 좋아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달달한 걸 좋아하는 내가 단맛을 최소화했다는 이 녀석과 쉽게 친해지기는 힘들게다. 그러고 보니 바나나는 원래 안 달다.^^;


070324
사실 우이동은 집에서 가까운 편이 아니다. 하지만 엠티를 참석한답시고 자정이 다 되어 가는 시간에 그곳을 향했다. 늦게 찾아간 만큼 날은 금세 밝았고 나는 도망치듯 유유히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내 옆을 오래 지켜준 태순이와도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는데 스치듯이 지나간 숱한 후배들과 푸근한 한 때를 공유했을지 자신이 없다. 내 딴에는 있는 시간 없는 시간 짜내서 후배들을 만나는 건데 상대방에게는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모르겠다.

후배로서의 나도 변변치 못하지만, 선배로서의 나는 뭐 하나 내세울 게 없는 녀석이다. 물론 내가 생각하는 내세움의 잣대는 세간의 평가와 사뭇 다르기 때문에 빚어지는 마찰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학부생 시절에 뭔가 대단한 걸 이루기는 어렵다고 해도 돌아보면 딱히 해놓은 게 없어 부끄럽다. 하지만 인간관계라는 게 반드시 서로의 치밀한 계산 하에서 이루어지는 건 아닌 모양이다. 피차 해놓은 거 없는 적수공권(赤手空拳)끼리 의지를 북돋고 시름을 달래는 건 정겹다.

‘손님이 짜다면 짠 것’으로 여기는 음식점은 손님의 마음을 많이 얻었으리라. 나도 내 진정성을 다해 사람을 대하면서 나를 향한 충언을 귀담아 들어야겠다. “내가 그린 나보다 타인이 그린 내 모습이 설득력이 있다”는 칸트의 말씀은 재미나다. 그는 대상이나 사물이 이미 완성된 상태로 주어져 있고 우리가 그에 따라 모사하거나 반영함으로써 인식이 성립하는 대상 중심의 인식론을 반박했다. 주어진 대상을 인간이 어떤 구체적인 대상이나 사물로 만들어서 인식한다는 인간 중심의 인식론을 설파한 그인 만큼 타인에 비친 자기 모습에도 관심을 보냈을 듯싶다. 나도 점점 그런 거 같다. 내 둘레의 눈치를 보기 시작한 걸까?


070325
<하얀 거탑>이 종영된 지 2주가 되었는데도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여진(餘震)이다. 다면적 인간이었던 장준혁에 대한 내 감정도 복합적이다. 나는 그를 마음껏 미워하지 못했다. 많은 이들이 고백했듯이 내 안의 장준혁을 발견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의 치열함과 그의 갈망에 미치지 못하는 내 흐리멍덩함이 더 미웠기 때문이다.

옛사람들이 습관처럼 말하던 “그만두고자 해도 그만둘 수 없는 길”이란 건 어떤 모습일까? 나는 얼마나 의연하게 지는 게임에 참여할 수 있을까? 너무 많이 나가버려서 다시 돌아오기 힘들지 않도록 잘 살필 수 있을까? 마냥 느긋한 걸 보면 내가 아직 돈맛을 덜 보고, 권세의 달콤함에 취해보지 못한 모양이다.

Posted by 익구
:
070312
천하에는 하나의 재능도 없는 사람은 없으니 만약 많은 사람을 모아 각각 그의 장기를 써서 재능을 서로 통용하게 한다면, 세상에는 버려진 사람이 없을 것이고 사람은 재능을 버리는 일이 없을 것이다.
天下無無一能之人。若聚十百人而各用其長。便爲通才。如此則世無棄人。人無棄才矣。

- 정조대왕, 『홍재전서(弘齋全書)』卷百七十二 日得錄十二 人物[二]

“세상에 버릴 사람은 없다(天下無棄人)”에서 따온 무기(無棄)라는 내가 지어 쓴 호(號)는 위에서 내려다보는 자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봤다. 옛 글에서 무기(無棄)의 용례는 대부분 지도자가 아랫사람의 장점을 잘 취합하고 함부로 사람을 내치지 않아야 함을 강조할 때 쓰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버릴 사람이 없다”로 풀이해도 될 것을 “세상에 버릴 사람은 없다”라고 한 것도 시빗거리다. 내가 사람을 부려 쓸 수 있는 위치에 서고 싶다는 욕망이 조사 ‘-은’에 담겨 있는 건 아니었을까? 경계할 일이다.

묵자는 “남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愛人若愛其身)”며, “천하에 남이란 없다(天下無人)”고 설파했다. 묵자의 겸애(兼愛)까지 나아가지 못한 건 실천하지 못할 것을 염려해서다. 天下無人보다 天下無棄人이 보다 실천가능하다는 핑계를 대본다. 내 게으름을 현실주의를 방패막이 삼아 보호하려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여하간 부족한대로 무기(無棄)에라도 충실해보자.


070313
이명박 전 서울시장님의 출판기념회에 1만여명(혹은 2만명)의 인파가 운집했다. 한나라당이 장악한 서울시의회는 관례적으로 오후 2시에 해오던 개회식을 오전 10시로 앞당겨 출판기념회 참석을 위해 개회시간을 바꾼 것이 아니냐는 빈축을 사기도 했다. 지방에서 관광버스까지 대절해 참석한 것을 보고 동원 정치의 의혹을 제기하는 게 부질없을 정도로 열성적 지지자들의 향연이었다.

이 전 시장님은 연설에서 “투자는 성장을 가져오고 성장은 더 나은 복지와 분배의 기반을 마련한다”며, “발전이 바로 통합”이며 “모두가 다 잘 살면 국민 통합을 저절로 이루어지게 된다”고 역설하셨다. “불균형은 발전을 통해 적극적으로 해소해야”하며 “성장과 발전이 생산적 사회 통합을 이뤄낼 것”이며 “결국 통일도 경제”라는 주장이 흥미롭다. 대한민국 747을 향한 도전을 시작하자며 ‘7% 성장, 4만불 시대, 7대 경제대국’을 목표를 제시한 것도 실현 여부와 관계없이 명료해서 알아듣기 쉬웠다.

책 홍보 영상물에 전날의 자기 약속을 잊지 않고 실천한다(久要不忘平生之言)는 논어 한 구절이 인용되었다. 공자가 인간완성의 조건으로 견리사의(見利思義), 견위수명(見危授命)과 함께 제시한 말씀이다. 책임 윤리가 부족한 지도자들이 넘치는데 약속의 실현을 거듭 다짐하는 건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내가 본 출판기념회 가운데 가장 성대히 치러진 이날 행사를 보면서 도덕경 한 구절을 건네고 싶어졌다. 하여간 이 모난 성격이란.

부귀하면서 교만하면 스스로 허물을 남긴다(富貴而驕 自遺其咎).


070314
어제 강남역 회동을 기다리다 강남 교보문고를 잠시 들렀다. 김원중 건양대 교수님이 진수의 삼국지를 완역해 네 권으로 펴낸 것을 발견했다. 삼국지연의에 비하면 재미도 덜하고 가독성도 떨어지지만 삼국지 마니아들을 설레게 하고 삼국지 읽기의 지평을 넓힌다는 점에서 가슴 깊이 환영한다. 11만원짜리 전질이지만 도서 구매 목록에 올려놓고 두고두고 나를 괴롭힐 녀석들이다. 사실 삼국지가 열악한 편집 체계에도 불구하고 명맥을 유지한 것은 배송지(裵松之)가 단 주석의 힘이다. 배송지주는 원문에 맞먹는 분량이라고 하는데 이번 완역본에도 배송지주는 발췌해서 실려 아쉬움을 남긴다.

처음 뵙게 된 97학번 재현형님, 상일형님과 두 번째로 뵙는 상준형님을 비롯해 07학번까지 10년의 시차를 갖고 모인 자리는 푸근했다. 97학번 선배님들 입학 10주년 기념으로 여는 홈커밍데이를 기획하며 인해전술이나 물량공세가 아닌 농익은 우애와 은근한 진정을 나누는 자리를 고심했다. 양광모 휴먼네트워크연구소 대표는 사람은 최소한 21번은 만나야 자신의 인맥으로 만들 수 있다고 귀띔하신다. 나는 비교적 붙임성이 없는 편이다. 붙임성은 처음 보는 사람과 쉽게 친해지는 접근성을 주로 의미하지만 오래도록 인연을 잘 유지해가는 지속성을 뜻하기도 한다. 접근성이든 지속성이든 내가 좀 더 노력해야할 대목이다.


070315
<“한번쯤 ‘인용을 하나도 쓰지 말고’ 글을 써 보는건 어떨까?”라는 댓글에 대한 답변>

최근에 퇴계의 <성학십도>, 율곡의 <성학집요>를 통독했는데 대유학자의 대표작으로 일컬어지는 책의 본문 70~80%가 남의 글 편집(짜깁기라고 하면 너무 경망스럽게 보일까봐 자제했어요)이더라고요. 물론 이렇게 신나게 우려먹는 게 유가식 글쓰기의 특징임을 감안하더라도 좀 지나치다 싶었어요. 하지만 눈을 흘기면서도 은연중에 물들어서 남의 글 갈무리하면서 제 딴에는 단장취의(斷章取義)한다며 자기만족하고 그런 건 좀 있네요. 하지만 일전에도 말씀 드렸듯이 저는 지식을 생산해내는 학자도 아니니 만큼 남들이 했던 이야기를 부지런히 수입해서 재조합하기도 벅찬 녀석일 뿐입니다. 저는 글의 야마(글의 논리적 구성력쯤으로 해석하면 되나요?)를 꾀할 역량이 되지도 않고요.


차마 잡글쓰기를 당장 관둘 수 없어서 이런저런 잡글을 쓰고 있을 뿐 제가 뭐 거창한 주의주장을 담는다는 생각을 해본 적 없답니다. 최근 들어 그런 목표를 가지고 써본 글도 없네요. 하긴 제 잡글이 언제부터 그런 목표의식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요. 제가 글로써 누군가를 설득해본 경험이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는 점에 비추어볼 때 제 잡글에게서 남을 바꾼다는 측면에서의 생산성을 바라는 것도 과도한 바람이십니다.^^; 인용에도 여러 종류가 있을 수 있을 거 같은데 옛사람들 말씀을 즐겨 인용하는 것의 폐단 말고 어느 정도까지의 인용을 포함하신 말씀인지 좀 애매하네요. 좀 범위를 명확히 해주시면 좋겠어요. 개인적 경험과 지인들과의 대화 속에서 체득한 지식만을 늘어놓으라는 말씀은 아니실 테고 어느 정도의 가이드라인이 있을 텐데 제가 그걸 잘 잡아내지 못하겠어요.


“호사스런 취미”로 비춰질 수 있다는 염려는 참 무서운 지적 같아요. 가장 덜 호사스런 취미는 토익 문제집 풀기 정도가 있을까요? 국어 맞춤법에 신경 쓰는 사람을 호사스럽다고 구박하는 경우는 있어도 영어 공부에 애쓰는 사람을 호사스럽다고 하는 건 못 들어봤거든요. <예기>나 <여씨춘추>를 몇 시간 만에 발췌독한다고 했더니 들려오는 소리가 “호사스럽다”였어요(살림살이에 보탬이 되는 책 좀 읽으라는 간곡한 충고도 곁들여서요). 언젠가 좋아하는 시구를 암송하다가 호사스럽다는 농담 섞인 핀잔을 들었을 때는 좀 섭섭하기까지 하더라고요. 문화유산 완상이 호사스럽고, 맛집 탐방이 호사스럽고, 설레는 마음으로 부치는 전자우편이 호사스럽다면 저는 차라리 이 팍팍한 삶에 호사스러움을 건사하는 걸 권하고 싶네요. 그건 겉멋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이지 싶어요.


호사스러움이라는 잣대란 게 또렷하다면 슬쩍슬쩍 피해 다니고 싶은데 그게 참 어렵네요. <실업사회>란 책의 재무제표 분석 결과를 인용하고, 최장집 교수님의 옥음을 설파하는 건 덜 호사스럽고, 맹자의 불인인지심(不忍人之心)에 호들갑을 떨고 성호 이익의 “착한 사람은 박복한가(善人福薄)”란 글을 읊조리는 건 호사스러운 일일까요? 어쩌면 호사스럽다는 말은 쓸데없이 지적 낭비나 일삼고 밥벌이에 도움 안 되는 책이나 두리번거리는 (저같은) 한량을 조금 높여서 부르는 말이 아닐까 싶네요. 인생을 허비하고 있다고 말하면 너무 직설적이니까 조금 둘러서 표현하는 배려를 마다한다면 제가 너무 나쁜 놈이 되어버리겠죠.^^; 부끄럽사옵니다.


070316
『자유의 무늬』를 다시 읽다가 <특권>이라는 꼭지를 옛 친구처럼 반겼다. “예술(가)의 열외성(列外性)”을 비판하는 대목은 몇 년 전 나를 밤 새워 이 책을 읽게 만든 구절 가운데 하나다. 그런데 나는 독서가의 열외성, 공부한 사람들에 대한 존중이 많은 편이다. 내 자신이 공부와 인간적 성숙에는 상당한 인과관계가 있다는 가설을 증명하고 싶기도 하다. 마이클 폴라니의 ‘인격적 지식(Personal Knowledge)’을 지성과 덕성이 결합한 것이라 풀이한다면 이게 바로 내가 그리는 앎의 모습이다.

요 근래 내가 놀고 마시는데 탐닉하는 까닭은 내 공부가 너무 잘 먹고 잘 사는 것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에 싫증이 난 건 아닌지 모르겠다. 가난하게 살 자신도 없으면서 밥벌이를 위한 공부를 멀리하는 까닭을 모르겠다. “돈과 밥의 지엄함” 앞에 무릎 꿇을 날이 머지 않았으면서 의연한 척 담담한 척 하고 있다. 사실 해법은 간단하다. 내가 조금 더 바지런해지면 내 변변치 못한 독서가 허망하지 않고, 밥벌이를 위한 공부가 지지부진하지도 않을 게다. 내 마음도 채우고, 내 배도 채우려는 욕심이 참 가당찮다.


070317
되요(X) -> 돼요(O)란다. ‘되다’에 ‘-어, -어라, -었-’ 등의 어미가 결합한 것을 줄여 쓰면 ‘돼, 돼라, 됐-’의 ‘돼-’ 형태가 되지. 예를 들어 안 됀다(X) -> 안 된다(O)/ 안 되요(X) -> 안 돼요(O)가 되는데 풀어쓸 수 있으면 ‘되’로 보고, 풀어쓸 수 없으면 ‘돼’로 보면 된단다. 여기서는 ‘되어요’가 줄어 ‘돼요’로 쓰는 게 맞지. 비슷한 원리로 자주 틀리는 표현에 뵈요(X) -> 봬요(O)가 있지. 자세한 건 한글맞춤법 제35항 [붙임2]와 관련 해설을 참조해주시길.^-^

인터넷 상의 한 줄 짜리 댓글에서 틀린 표현을 발견하고 발끈해(?) 이런 댓글을 남기는 선배를 후배들은 과연 어떻게 받아들일까? 무섭다며 피할까? 신기하다고 여길까? 쩨쩨하다고 생각할까? 가엾다고 혀를 찰까?^^; 그나저나 앞으로 나랑 잘 안 놀아 줄까봐 걱정이다. 첫인상이 중요하다는데 07학번과 만나는 초기에는 좀 평범한 컨셉으로 나갔어야 하는 건데 또 넘쳤다.


070318
드라마 <연개소문> 옛 방송을 대강 훑어보니 당나라 인물 가운데 위징(魏徵)이 돋보였다. 당나라 초기의 정치가 위징은 본래 당 고조 이연의 맏이인 태자 이건성의 측근이었다. 위징은 이건성에게 동생 이세민을 죽이라고 건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626년 현무문의 변으로 이세민이 집권하자 그토록 자신을 죽이려고 애쓰던 위징을 잡아들이지만, 이세민은 그의 인물됨을 알아보고 그를 중용한다.

이세민의 치세는 정관(貞觀)의 치(治)라 불리며 동아시아 통치자들에게 역할 모델이 되었다. 『정관정요(貞觀政要)』에서 위징이 가장 높은 비율로 등장할 만큼 이세민은 위징의 간언을 새겨들었다. 언젠가 반대파를 과감하게 등용한 위징 기용의 사례가 코드 인사를 비판할 때 쓰인 글을 읽은 적 있다. 국민의 정부 이래로 비판적 언론과 비판적 지식인이라는 수사를 덮어쓴 집단들이 집권세력이나 개혁진보세력의 이분법과 편협성, 파괴지향성 등을 통박하는 일들이 부쩍 늘었다.

“열린 마음으로 들으면 밝아지지만, 닫힌 마음으로 들으면 어두워진다(兼聽卽明 偏聽卽闇)”라는 위징의 명언은 대통령만 계속 듣기에는 너무 아까운 말씀이다. 비판하는데 기력을 쏟느라 늘 심각한 분들의 얼굴이 밝아졌으면 좋겠다. 일단 그 분들이 듣기 좋은 말만 가려 듣지 못하게 도와드려야겠다. 쓴소리를 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기쁜 일이다. 내가 그분들을 기쁘게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자신들을 향한 비판을 기꺼워하는 언론과 지식인들이야말로 ‘비판적’이라는 왕관 혹은 방패를 쓸 자격이 있을 터이니 말이다.

Posted by 익구
:
070305
참여정부 초대 청와대 정책실장 이정우 교수님의 오마이뉴스 인터뷰를 흥미롭게 읽었다. 인터뷰 말미에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다(士爲知己者死)고 했는데 제가 노 대통령에게 등을 돌려선 안 되죠”는 말씀이 인상 깊었다. 『전국책』, 『사기』에 등장하는 의로운 자객의 표상 예양의 고사를 반추해봤다. 자신을 진실로 알아준 사람에게 정성을 다하는 모습은 아름답다.

그저 실패했다는 말씀밖에 안 해주시는 학자분들보다 참여정부의 공과를 헤집으려는 노력이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한미 FTA 관련한 이 교수님의 쓴소리에 더 무겁게 다가오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일전에 외우(畏友) 소은이는 “노무현 대통령은 외롭겠다. 정태인 같은 사람을 잃어서”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참여정부는 아까운 인재들을 그만 잃어야 한다.


070306
『주역』 사상을 계사전에서는 단 세 마디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역易 궁즉변窮則變 변즉통變則通 통즉구通則久"가 그것입니다. "역이란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오래간다"는 진리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궁하다는 것은 사물의 변화가 궁극에 이른 상태, 즉 양적 변화와 양적 축적이 극에 달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상태에서는 질적 변화가 일어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질적 변화는 새로운 지평을 연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통通의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열린 상황은 답보하지 않고 부단히 새로워진다(進新)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구久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신영복, 『강의』(돌베개, 2004), p. 130

궁(窮)은 궁극에 이르다, 막히다 정도로 풀이할 수 있다. 변화의 근본은 한계를 바라봄이다. 뼈를 깎는 노력 끝에 내쉬는 한숨이다. 정채봉 시인의 멋진 시구대로 “생선이/ 소금에 절임을 당하고/ 얼음에 냉장을 당하는/ 고통이 없다면/ 썩는 길밖에 없다”는 게 주역의 정신인지도 모르겠다. 변화하는 것이 영원하다는 오묘한 역설이다.

변화야말로 만물의 본질이라고 주장한 헤라클레이토스와 ‘존재’는 언제 어디서나 불변한다고 역설한 파르메니데스의 대립을 종합한 것은 데모크리토스다. 그의 원자론은 파르메니데스에게서 불변하는 원자의 존재 양식을 고안해내고, 헤라클레이토스에게서 원자들의 운동과 결합으로 말미암아 사물의 다양한 모습이 만들어짐을 도출했다. 물론 오늘날의 원자와는 차이가 있지만 데모크리토스의 종합은 배울 점이 많다.

한결같음과 너그러움의 조화는 내 어린 시절의 화두였다. 데모크리토스 흉내를 내서 그럴 듯하게 융합해봤으면 좋겠다.


070307
드라마 <주몽>이 인기 속에 막을 내렸다. 주몽이 오매불망 한사군(漢四郡) 중 하나인 현토군과 싸워 다물군의 유지를 이어 받는다는 설정이 흥미로웠다. 하지만 고구려가 현토군 영역에서 세워졌다는 건 중국이 고구려사를 중국사라고 우기는 근거가 되기도 하는 모양이다. 한나라 무제가 기원전 108년 위만조선을 물리치고 낙랑, 진번, 임둔, 현도 4개 군(郡)을 설치한 한사군은 중국 동북공정의 도구로 곧잘 활용된다.

한사군의 위치에 대한 이견들이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지만 가장 근본적인 의문은 과연 한사군 가운데 가장 오래 남아 한민족 역사에 한 획을 그었던 낙랑군의 존재다. 고구려에 멸망당하는 기원후 313년까지 존속했다는 낙랑군을 기원후 8년에 망한 전한(前漢:西漢)은 물론 기원후 220년에 망한 후한(後漢:東漢)과 어떤 연관 관계가 있을지 의뭉스럽다. 일제는 한반도가 낙랑군을 비롯한 한사군을 통해 원시시대를 끝냈다며 한민족 역사발전의 타율성 늘어놓기도 한 만큼 낙랑에 대한 세밀한 탐구가 있어야겠다.

더군다나 1차 사료인 사마천의 조선열전에는 4군을 설치했다는 이야기(遂定朝鮮爲四群)가 있을 뿐 낙랑, 진번, 임둔, 현도 등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조선열전을 거의 베끼다시피 한 한서(漢書)에서 “수멸조선위낙랑현도진번임둔(遂滅朝鮮爲樂浪玄兎眞番臨屯)”이라는 기록이 나오는데 여기서 한사군의 명칭이 등장한다. 일부 사학자들은 이런 정황에 비추어 한사군은 후세의 가필이라고 주장한다.

단재 신채호 선생님은 “고조선 역사가 없으면 한국사도 없다(若無古朝鮮史, 是無韓國史)”고 역설하셨다. 대한민국의 역사가 꼭 반만년을 자랑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한국 상고사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연구에 좀 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나라가 망할 수도 있고, 땅이 줄을 수는 있지만 역사는 빼앗겨서는 곤란하다. 민족주의적 감수성 같지만 중국과 일본의 천박한 역사 분탕질에 생채기를 입고 싶지 않다.


070308
시청률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지만 드라마 <궁S>는 전편과 마찬가지로 입헌군주제라는 상상력을 품게 한다. 입헌군주제는 왕권과 의회 사이의 타협이 만든 제도다. 세계에서 왕실이 있는 나라는 대략 30개국 정도라고 한다. 영국과 일본을 비롯한 대부분의 나라는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 편이지만 중동국가들의 경우 왕이 실권을 행사하기도 하는 모양이다.

말레이시아는 선출직 입헌군주제라로 13개주 가운데 말레이 반도의 9개주 군주들이 5년마다 한 명을 새로운 국왕으로 선출하는 독특한 체제를 뽐내고 있다. 아무래도 우리에게 가장 신경 쓰이는 입헌군주제 국가는 역시 일본이다. 입헌군주제 하의 왕들이 각별한 대접을 받는다는 걸 충분히 감안하더라도 일왕은 그 정도가 좀 심하다. 일본 극우파들의 구심점이 되는 일왕의 존재는 우리에게는 영 불편하다.

일각에서는 황실과 의례를 상징적으로 복원하자는 주장이 있지만 대한민국 헌법에 비추어 볼 때 거의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정작 우리가 눈을 돌려야 할 것은 민주공화국 안의 황제들이다. 곧잘 삼성 공화국이라는 말을 하지만 이는 매우 위험한 발언이다. 삼성이 입헌군주제는커녕 절대군주제와 비슷한 행동 양식을 보일 때 나는 껄끄럽다. 대한민국에 황제는 필요 없다. 과연 삼성은 절제된 자본 권력의 기품을 보여줄 수 있을까.


070309
오전 6시 55분에 출근해 오전 7시 30분부터 8시 30분까지 1시간 동안 중구청 직장민방위대 비상소집훈련을 진행을 도왔다. 내가 맡은 업무에 사명감을 갖고 일하면 좋겠지만 민방위 교육만큼 일하는 사람을 힘 빠지게 하는 과업도 없다. 이미 민방위 비상소집훈련 대리 출석과 부실한 교육 운영이 언론 보도를 통해 여러 차례 소개되기도 했다.

올해부터 민방위 편성연령이 만45세에서 40세로 낮아진 관계로 민방위대원의 수가 대폭 줄었다. 연간 8시간 교육을 실시하던 민방위 1-4년차도 4시간을 줄어 국민의 부담을 줄인 만큼 내실 있는 교육 운영이 더욱 요구된다. 하지만 유사시 비상대비태세를 갖추려는 훈련목적은 퇴색하고 출석도장 찍는 거 자체에 치중하고 있는 게 솔직한 실정이다.

이날 훈시 말씀을 하신 행정관리국장은 불참자 명단을 파악해 불참 사유서를 제출하라고 지시하셨다. 구민회관 교육장으로 이관되는 보충훈련과 달리 구청에서 자체 실시하는 기본훈련이 더 유의미하다는 주장은 일면 수긍할 만하다. 참석인원을 파악해 부정출석을 막겠다는 의지도 고무적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불참 사유서를 내라는 건 지나쳤다. 불참 사유서를 독촉해서 받아내는 하루 종일 내 기분도 언짢았다.

법적으로 보장된 보충훈련을 무시하고 직원들 기강 단속으로 활용하려는 구청 고위직 공무원의 행태는 그리 사려 깊지 못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추레한 일은 민방위 훈련을 대충 넘기기 위해 이런저런 경로로 빠져나가는 어른들이다. 민방위 훈련이 어차피 출석 확인하고 끝나는 건데 뭘 그리 깐깐하게 구냐고 말씀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다. 그 출석 확인이라도 공평해야 한다. 자신에게 귀찮은 일은 남도 귀찮다.


070310
경영飛반 개강총회 때 새로 뽑힌 반일꾼들에게 건네고 싶은 말은 성인지미(成人之美)다. 『논어』 안연편에는 “군자는 다른 사람의 아름다움을 이루어주고, 남의 나쁜 점을 이루어주지 않지만, 소인은 이와 반대로 한다(君子成人之美 不成人之惡 小人反是)”고 말한다. 성인지미(成人之美)는 다른 사람의 훌륭하고 아름다운 점을 도와서 이루게 한다는 뜻이다.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의 성(成)이 성인지미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구성원 모두가 주인의식을 가져야겠지만 직선 대표들은 특별히 제 둘레의 사람들을 아끼고 사랑해서 우리의 아름다움을 고양해주길 바란다.

3월 9일~10일 동안 벌어진 이날 행사에서 마신 소주는 1차 레드 크라우드 101병, 2차 대성집 투 41병, 3차 대성집 원 42병 도합 184병으로 공식 집계되었다(쏘맥 제조를 위한 맥주 3,000cc와 어쩌다가 등장한 막걸리 1병도 있다). 이로써 2005년 3월 11~12일 집계한 소주 133병의 기록을 갱신했다. 07학번 여러분의 가열찬 참여로 이룰 수 있었던 신기록이 아닐까 싶다. 머잖아 이 기록도 깨지겠지만 일단 어렵사리 이룬 이 기록에 고맙다. 본의 아니게 술 권하는 선배가 된 거 같아 민망하다.


070311
조국 서울대 법대 교수님은 한국일보에 쓰신 옴부즈맨 칼럼에서 “매운 소리를 통해 ‘역린(逆鱗ㆍ임금님의 분노)’을 건드릴 것을 희망(한국일보 2000년 12월 21일자)”한다고 말씀하셨다. 성역 없는 비판에 대한 주문이다. 역린(逆鱗)은 한비자 세난(說難)편에 나오는 말이다. 남을 설득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서술한 이 글에서 “유세(遊說)하려는 자는 군주의 역린을 건드리지 않아야만 성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역린을 상대의 치명적 약점이라고 봐도 좋고, 각별히 민감한 곳이라고 풀이해도 되며, 결정적 이해(vital interest)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서로의 역린이 맞설 때 우리는 곧잘 화해할 수 없는 세계관의 차이라고 일컫기도 한다. 누구에게나 역린은 있다. 하지만 큰사람일수록 그 역린은 적거나 작게 마련이다. 나에게 조금 거북하다고 역린을 건드린 것처럼 행동하는 건 미성숙하다.

남의 밥그릇을 침범하는 건 역린까지 다다를 위험이 크다. 우리는 부득이 남의 역린을 건드릴 때면 충정이나 고언(苦言)을 방어기제로 내세운다. 가령 공무원들 앞에서 공무원 시간외 수당 문제를 꺼내는 건 무척 떨리는 일이다. 역린을 함부로 들쑤시는 폐해보다 역린이 너무 크고 많은데서 생기는 폐단이 더 크다. 내 역린을 많이 덜어낸다고 해서 반드시 남의 역린을 매만질 권한이 생기는 건 아니지만 우선 내 역린의 비대함을 베는 것부터 시작해야한다.

Posted by 익구
:
070226
2월 26일 한국관광문화정책연구원이 기획예산처 사회서비스향상기획단에 제출한 <문화분야 사회서비스 실태조사 제도개선 연구> 용역 보고서에 따르면 대부분의 문화예술인들은 저소득층에 해당한다. 문화예술가의 60% 가량이 창작활동 소득 월평균 100만원 이하에 그치고 있다고 한다. 다른 일을 병행하지 않으면 생계가 어려울 정도라니 우리의 허약한 문화역량이 다시금 드러난다.

미술학부에 다니는 다운, 연정에게서 대다수 미술학부 학생들이 학교를 졸업하고 작품 활동보다는 교사 등의 진로를 결심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영국의 경우 손꼽히는 미술학과 졸업전시회에는 유수의 콜렉터들과 전문가들이 참석해서 신인 작가들을 발굴한다고 한다. 반면 우리네 대학 졸업전시회는 친구들 정도가 축하해주는 자리로 끝날 때가 많다. 있는 돈 없는 돈 모아서 개인전을 다섯 번쯤을 해야 그 때서야 작가로서의 자격을 어느 정도 인정해주기 때문에 그걸 버티지 못하고 중간에 그만 두는 사례가 많다고 한다.

두 미술 전공 친구들의 푸념을 들으며 인내심 테스트가 되어버린 우리나라 문화예술계의 서글픈 모습을 실감했다. 몇몇 연예인들과 작품들이 해외에서 인기를 얻는다고 한류라고 호들갑을 떨기에는 내실이 없다. 이렇게 2차 문화산업에 관심이 쏠리면서 기초 문화예술에 건네는 눈길이 줄어 외화내빈을 부추기는 건 아닌지 염려스럽다. 양질의 소장 도서를 갖추었느냐의 여부를 떠나 도서관의 절대 개수가 부족한 지역 도서관 실정을 보면 더욱 안타깝다.

『관자(管子)』 목민편(牧民篇)에는 “창고가 차야 예절을 알고, 의식이 풍족해야 영욕(榮辱)을 안다(倉稟實則知禮節, 衣食足則知榮辱)”는 말씀이 있다. 요즘 경제를 살리자는 이들이 즐겨 인용하는 문구라지만 이 말을 좀 변형해서 도서관에 책도 좀 차고, 예술가의 의식도 좀 풍족해지길 바란다.


070227
최장집 고려대 교수님은 최근 발표한 글을 통해 ‘정당체제의 제도화’와 ‘사회경제적 민주화’가 우리의 최우선 과제가 되어야 함을 역설하셨다. 사실 이러한 지향점보다는 참여정부가 이 두 가지를 달성하는 데 실패했다는 지적에 더 많은 관심이 쏠려 있어 논의의 본질이 흐려졌다. 보수 언론들은 최 교수님의 가리킨 달보다는 참여정부로 향한 손가락질이 더 요긴했는지도 모르겠다.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님이 최 교수님의 견해가 현실적으로 어떤 의미로 이용되는 가를 검토했으면 좋겠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신 것도 비슷한 맥락의 충고다.

참여정부와 진보진영 사이의 진보 논쟁이 생산적이려면 서로가 겸허하게 자신의 과오를 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 단지 책임 공방에 초점에 맞춰지는 게 볼썽사나운 이유다. 최 교수님의 지적대로 나 또한 한국 정치의 가장 큰 문제는 국민들의 정당일체감이 너무 낮은 데 있다고 생각한다. 양대 보수정당의 차별화가 별로 없어 그 놈을 그 놈으로 여기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나는 민주주의 제도 가운데 정당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핵심적인 집단적 행위자라는 최 교수님 말씀에 크게 공감한다.

그런데 당비를 내가며 당원이 되겠다는 유권자가 별로 없다면 정당체제의 제도화는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친다. 그렇다고 유권자들이 제 돈과 시간을 투자하고픈 정당이 만들어지기도 어려운 실정이다. 정당체제의 제도화를 선결문제로 삼기에는 현재 우리 정치 풍토상 꽤 오랜 시간을 요하는 작업이 될 듯싶다. 열린우리당이 기간당원제를 스스로 폐지하는 과정을 바라보며 정당 민주주의 구축을 원할수록 일모도원(日暮途遠)을 뇌까리게 된다.

민생을 가장 챙기고 기간당원제를 먼저 정착시킨 민주노동당에 대한 지지가 좀처럼 반등의 기미를 보이고 있지 않다. 보수 정당의 과점체제 때문이라고 말하기는 쉽지만 그 과점을 해체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많은 이들이 누차 지적하고 있지만 최 교수님은 이에 대한 해법을 명쾌하게 제시하고 있지는 못하다. “정당체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면 사회통합을 성취할 수 없다”는 최 교수님의 지론을 실현시키기는 방안들을 모색해봐야겠다. 비교정치쪽 공부를 할 때 정당일체감 고양 방안을 탐구해보고 싶다. 원론적인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또 원론적인 이야기를 꺼내고 싶지 않다.


070228
노무현 대통령님이 28일 열린우리당을 탈당했다. 대통령님은 탈당신고서 접수와 함께 공개한 <열린우리당 당원 여러분께 드리는 글>에서 “임기가 끝난 뒤에도 당적을 유지하는 전직 대통령이 되고 싶었다”며 “그러나 안타깝게도 저의 역량부족으로 한국 정치구조와 풍토의 벽을 넘어서지 못했다”고 말씀하셨다.

“저는 임기 말 당을 떠나는 마지막 대통령이 되기를 바랍니다”는 말씀이 아프게 들린다. 정당체제의 제도화를 건설하기 위해서 돈과 시간을 투자하는 당원이 주인 되는 정당, 몇몇 정치인들의 욕심에 좌우되지 않는 정당에 대한 열망이 다시금 싹트길 바란다. 못다 이룬 백년정당의 꿈이 밀알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저 비통하다.


070301
『패자의 역사』(구본창, 2003)는 패자의 역사를 도두보는 책이다. 내 흥미를 끈 것은 이율곡의 10만 양병설에 의구심을 품는다. 10만 양병설이라는 말은 이율곡의 학문을 계승한 서인(西人)들의 문집인 김장생의 율곡전서, 송시열의 율곡연보에만 나와 있다고 한다. 사실 이런 문집은 위인전인 관계로 실제보다 부풀려 써질 개연성이 크다.

실제로 선조실록에는 10만 양병설 기록은 나타나지 않는다. 인조 쿠데타로 집권한 서인 정권이 이들 문집을 기초로 선조실록을 고친 선조수정실록에서야 10만 양병설이 수록되었다고 한다. 특히 이것이 정설로 굳어진 것은 서인 노론 가문의 후손인 역사학자 이병도가 국사교과서에 실어 국민적 상식으로 만들었다. 이런 정황으로 미루어보아 율곡 선생이 10만 양병설을 실제로 주장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적잖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임종 전 마지막 저술인 시무육조계(時務六條啓) 등을 볼 때 국방력 강화를 위한 방비를 촉구한 점은 분명하다. 그의 사회경장론은 조선 사회의 폐단을 정확하게 짚어낸 것이 많았다. 그의 개혁안이 실효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그의 무실(務實)은 오늘날에도 많은 영감을 준다. 다만 한 인물의 위대성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승자가 가필을 했다면 그건 배워서는 안 될 것이다. 율곡 선생께서도 바라는 일은 아니었을 테고 말이다.


070302
신권 발행을 놓고 이런저런 지적과 불평들이 쏟아지고 있다. 다 지난 일이기는 하지만 왜 한국은행이 인물 초상 변경에 소극적이었는지 모르겠다. 조선시대 이씨 남성으로만 되어있는 현행 화폐가 대한민국을 온전히 대표하지 못한다는 건 자명하다. 일본은 의학자 노구치 히데요, 소설가 나쓰메 소세키 등을 비롯해 화폐 인물이 다채로운 편이다. 특히 2004년 11월 새 오천엔권에는 여성 소설가 히구치 이치요가 등장해 큰 관심을 모았다. 적어도 화폐 측면에서 일본에게 한참은 뒤진다.

화폐 인물을 선정하는 건 어지간한 선거를 몇 번 치르는 것보다 더 까다로운 일이라는 걸 모르는 바 아니다. 쟁쟁한 후보들 가운데 국민적 공감대를 모으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만큼 화폐의 상징적 의미가 크다는 방증이다. 은행권 용지나 주화 등을 수출할 만큼 훌륭한 기술을 보유하고도 정작 우리 화폐 도안에 대한 치밀한 검증에는 소홀한지 아쉽다. 화폐는 ‘무언(無言)의 외교관’이라고도 하지 않는가.

이제 내 지갑에도 구권보다는 신권이 더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우리의 문화적 수준을 표상하는 신권을 보며 아직도 갈 길이 멀다고 느낀다. 조만간 고액권 화폐를 만들게 되면 꼭 여성을 넣었으면 좋겠다. 그간의 모자람을 만회할 수 있는 기회로 삼기를.


070303
“쯧쯧 아랫사람 입 단속 하나 못하고 말이지.”

염동일의 양심선언을 두고 시청자 누군가는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생각하니 속이 메스껍다. 어쩌면 장준혁도 치밀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귀다툼에서 나가떨어지는 패배자 취급을 받는 건 아닐까 싶다. <하얀 거탑>이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는 찬사를 받은 건 장준혁의 승리에서 기인한 바 크다. 빼어난 실력만으로는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없는 제약조건을 그려낸 것이 드라마의 핵심 메시지였기 때문이다. 물론 염동일의 부끄러움을 보며 우리 스스로에게 마구 발급했던 면죄부를 돌아보게 하는 효과는 있다. 하지만 차라리 장준혁이 보란 듯이 이겨서 진실이 패배하는 모습을 보면 어떨까 싶다. 그게 정말 리얼리티일지도 모르겠다.

양명학파의 시초인 왕양명은 앎과 실천이 하나라며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주장한다. 먼저 이치를 깨우쳐야 행할 수 있다는 주자의 선지후행설(先知後行說)을 통박하는 말씀이다. 왕양명은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것은 단지 아직 알지 못한 것(知而不行 只是未知)”이며 “참된 앎은 행하기 위한 까닭이다. 행하지 않으면 그것을 앎이라 말할 수 없다(眞知所以爲行 不行不足以爲知)”라고 설파한다. 지행합일의 참된 앎(眞知)이 발현되지 않는 것은 사욕(私慾)에 가로막힌 것이며 사욕을 배제해 지행의 분열을 극복해야 한다는 논변이 매력적이다. 사욕을 걷어낸 염동일의 지행합일이 각별하게 다가온다.


070304
비 오는 중랑천변을 한 시간쯤 걸었다. 낚시하는 분들을 좀 지켜보다가 강태공(姜太公) 생각을 했다. 미끼도 없는 곧은 낚싯바늘로 낚시를 하며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기다린 강태공은 인내의 상징이다. 조바심 내지 않는 기다림이다. 사람을 낚는 어부는 참을성이 있어야 한다. 고등학교 동창들과 대학교 동기, 후배들을 서른 명쯤 만난 오늘 하루 나는 어떤 끈기를 보여줬을까?

『육도삼략(六韜三略)』에 나오는 강태공의 사자후는 늘 내게 큰 울림을 준다. “천하는 한 사람의 천하가 아니라 천하의 삶을 이어받은 보통사람들의 천하다. 천하의 이익을 함께 나누는 자는 천하를 얻고, 천하의 이익을 오로지하려는 자는 천하를 잃는다(天下非一人之天下 及天下之天下也 同天下之利者 則得天下 擅天下之利者 則失天下).” 이 말을 진심으로 두려워하고 실천하고 싶다.

Posted by 익구
:
070219
설 연휴 마지막날 배우 봉태규님이 출연한 영화 두 편을 연속으로 시청했다. <방과 후 옥상>은 억세게 재수 없는 고등학생 남궁달이 전학 온 첫날 학교의 짱을 건드리는 바람에 “방과 후 옥상으로 올라오라”는 통보에 맞서 벌이는 눈물겨운 생존투쟁이 익살맞게 그려진다. 고심 끝에 회피하지 않고 옥상행을 결심하며 거울을 바라볼 때 거울에 적힌 문구가 돋보였다. “겁쟁이는 천 번을 죽지만, 사나이는 한 번만 죽는다”는 셰익스피어의 명구는 영화를 보는 사람에게 한 가지라도 건져가게 하려는 교양주의의 살가운 배려다.

그 문구를 보며 우리 사회에 진정한 사나이가 적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셰익스피어는 사나이라는 말을 군자나 대장부급의 말로 썼을 것이다. 일전에 김규항 선생님은 <마초의 꿈>이란 글에서 “나보다 강한 사람 앞에서 한없이 당당하고 나보다 약한 사람 앞에서 한없이 부드럽다”는 게 마초의 기본이라 역설하셨다. 마초의 탈을 쓴 겁쟁이들은 강한 자에게 약하고, 약한 자에게 강한 것을 인간 존재의 숙명인양 비감어린 표정으로 말한다. 이 권위주의의 압박 속에서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권위를 세우는 사나이들이 좀 더 늘어야 한다. 어쩌면 양성평등이 더딘 까닭이 마초의 기본도 모르는 이들이 너무 넘치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070220
그대를 그리며 무언가를 줄 것이 없어
대나무 부채 하나를 주려고 합니다
부챗살 사이로 맑은 바람 불거든
그 바람 따라 서로를 생각하길 바랍니다.
憶君無所贈 
贈次一片竹
竹間生淸風
風來君相憶

드라마 <궁S>에 나오는 군상억(君相憶)이라는 한시다. 여남(女男) 간의 사랑을 노래한 것으로 알려진 시가 본래는 친구 사이에 서로 그리워하는 마음을 나타내는 시였음을 발견하는 과정이 흥미진진하다.

나는 책 사는 거 외에 특별히 다른 상품을 사본 적이 없어서 벗들에게 뭔가 선물하는 것에 인색한 편이다. 더군다나 옹졸하기까지 해서 남 칭찬도 잘 못하니 나 같은 녀석을 친구 삼아 지내는 사람은 참 심심하고 재미없을지도 모르겠다. 욕심은 많아서 부챗살 사이로 스쳐가는 바람을 맞으며 그리워하는 우정이 참 부럽다. 일단 내 무심한 성정부터 좀 다듬어야겠다.


070221
2월 21일은 국채보상운동이 백주년을 맞는 날이다. 일제가 우리에게 강제로 떠넘긴 차관을 국민이 대신 갚아 경제주권을 수호하겠다는 세계사적으로 보기 드문 운동이다. 나라를 운영하는 권리는 극소수가 누렸으면서 망해가는 책임은 백성 모두가 져야했던 비극이기도 하다.

1997년 IMF 외환위기 때 금 모으기 운동을 자랑스럽게 간직하기보다는 다시는 반복해서는 안 될 역사의 과오로 간직하는 게 옳다. 그런 식으로 일구는 국민통합이 얼마나 허술한 것인지는 요즘의 양극화 심화를 보면 알 수 있다. 결국 책임을 나눌 만큼 나누면 권리는 또 소수가 거머쥐는 현상의 반복일 따름이다.

김규항 선생님의 표현을 빌려 “이 같잖은 나라도 조국이랍시고” 십시일반 했던 가련한 국민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따갑다. 세금 꼬박 내고 법 잘 지키는 것만으로 국민의 의무를 다하는 세상을 꿈꾼다. 나의 이런 투덜거림에도 불구하고 백년 전 대구의 그 애틋함에는 한없는 경의를 보낸다.


070222
노무현 대통령님이 공식적으로 열린우리당을 탈당하겠다고 밝혔다. 이 땅의 책임정치, 정당정치가 무참히 허물어지는 순간이다. 퇴임 후에도 평당원으로나마 남고 싶다는 대통령님의 바람은 무너진 백년정당의 꿈만큼이나 허망해져 버렸다. 그러나 그간의 국정 최고책임자로서의 책무가 막중하기에 인간적인 연민은 최소한도로 그친다. 남은 임기동안 참여정부의 탄생을 반겼던 돈 없고 빽 없는 이들을 돌아보시길 바란다. 이는 대통령님이 옛 지지자들의 눈물을 닦아주지 못한 것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직선 대표는 본래 인기 없음에 초연할 수 없는 존재다. 그러나 그 인기를 지켜내고 만들어내는 힘은 원칙과 일관성에 있다. 제 정성을 다한 다음 겸허하게 국민의 평가를 기다리는 책임정신에 있다. 이런 맥락에서 통합신당에 대한 대통령님의 부정적 견해는 거개 옳다. 열린우리당 평당원과 지지자들은 이 정당이 그저 여당이라서 지지했다기보다는 내걸었던 창당 초심에 애정을 가졌던 분들이다. 비록 대연정 제안이라는 뼈아픈 패착도 있었지만 열린우리당의 황혼에 즈음해 대통령님이 보여준 결기는 인상 깊었다. 아무런 감동 없는 집권여당 실세들의 몸짓과는 사뭇 달랐다.

부디 대통령님께서 떠날 때의 말이 더 아름다운 사람이 되시길 바란다. 그는 속절없이 실패하기에는 너무 아까운 사람이다. 그의 이름을 연호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던 수많은 지지자들에게 보답해야할 일이 아직 많지 않은가. “울분이 소낙비처럼 쏟아지고 있다”는 탄식을 자아내게 했던 사람의 의연한 뒷모습이 보고 싶다.


070223
23일에 하루 연가는커녕 반가도 못냈지만 가까스로 조퇴를 할 수 있어서 다행히 졸업식 끄트머리에나마 찾아갈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경황이 없어서 많은 분들께 축하 인사를 건네지는 못했다. 졸업하시는 선배님들, 동기들, 후배들 다시금 가슴 깊이 축하 드린다. 특히 선배님들의 빈자리는 무슨 수로 메울 수 있을지 벌써부터 걱정이다.

어쩌면 이 허전함이라는 것도 선배님을 흠모하는 마음, 동기들을 아끼는 마음, 후배들에게 고마운 마음이라기보다는 순전히 내 이기적인 욕심 때문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봤다. 이렇게 아쉬운 까닭이 실상 내 자신을 위한 아쉬움인지도 모르겠다. 공유했던 지난날의 추억을 곱씹으며 좀 더 잘하지 못했던 내 자신에 대한 책망이기도 하다. 하지만 헤아릴 수 없는 별 만큼이나 많은 미래의 가능성만큼은 꼭 부여잡겠다.


070224
이제 막 선배가 되는 06학번에게 원나라 때 영종이 신하 배주에게 당나라의 명재상 위징과 같은 명신이 있겠냐고 물었던 고사를 언급했다. 배주는 “그야 황제가 어떤 황제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둥근 그릇에 물을 담으면 둥글게 되고, 네모난 잔에 물을 담으면 네모난 모양이 되지요”라고 답했다고 한다. 06학번들이 제 자신만의 개성을 담은 그릇이 되어주길 바란다.

07학번 새내기들에게는 찰리 채플린에게 “당신의 최고 걸작은 무엇입니까”라고 묻자 “Next One(다음 작품입니다)”이라고 답한 일화를 꺼냈다. 모든 선배는 후배가 자신보다 더 나아지기를 바란다. 새내기들이 최고 걸작이자 Next One이 되기를 기원한다. 이 밖에도 낯 뜨거운 연서를 많이 써내려 갔는데 “글은 말을 다하지 못하고 말은 뜻을 다 하지 못한다(書不盡言 言不盡意)”는 주역 계사상전 구절이 자꾸 맴돈다.


070225
드라마 <하얀 거탑>을 1회부터 재방송으로 보다가 기막힌 문구를 접했다. 오경환 석좌교수가 최도영 교수를 격려하며 “小醫治病 中醫治人 大醫治國”이라는 말씀을 하신다. 작은 의사는 병을 고치고, 중간 의사는 사람을 고치고, 큰 의사는 나라를 고친다는 말이 귀에 쏙 들어왔다. 오 교수는 최 교수에게 잘못된 관행을 바로 잡으려 한 순간부터 이미 대의의 길에 들어선 것이라며 한껏 덕담을 풀어놓는다.

최도영이라는 인물은 절차에 대한 원칙을 견결하게 지켜내기 위해 노력한다. 과정에 충실하면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다고 믿는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도 된다는 논리가 넘쳐나는 세태에 과정과 결실의 아름다운 일치를 꾀하는 사람을 만나는 건 달갑다. 살맛나는 사회는 과정과 결실의 상관계수가 높아지는 세상이 아닐까. 결실의 달콤함에 취하기보다 과정의 쌉싸래함을 만끽하는 이들이 늘기를 바란다. 최도영이 저만 아는 독불장군으로 치부될 때 우리 사회의 아픔은 더 깊어지리라.

Posted by 익구
:
070212
지난 1월 31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유신치하 긴급조치 위반사건의 판결내용과 판사명단을 공개했다. 대법원은 “30년 전 시대 상황에서 사법시스템 전체가 짊어져야 할 과오를 우연히 현재까지 현직에 남아있는 몇 명의 법관들에게 초점을 맞추는 방향으로 전개된다면, 결코 우리 모두가 바라고 있는 진실과 화해에 바탕을 둔 미래지향적인 과거사 정리를 이룩할 수 없다”고 밝혔다. 사법시스템 전반에 대한 반성이 필요하다는 의미로 좋게 받아들이려고 해도 영 마뜩잖다.

도무지 사죄하는 사람이 없다. 대기업들이 불법행위 등으로 국민의 원성을 살 때 임직원 일동 명의의 사과문을 발표했던 기억이 난다. 불법, 탈법의 주체는 그룹 총수 측근에게 한정될 것이 뻔한데도 아랫사람들까지 죄다 책임의 굴레를 씌우는 건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의 자세가 아니다. 그간 공적을 나누기는 꺼려하면서 과오는 나눌 것을 강요하는 지도층을 너무 많이 봐왔다. 판사들이 자신들의 인격권을 끔찍이 아끼는 마음으로 일반 국민들의 판결을 내렸다면 지금처럼 신뢰를 잃지 않았으리라. 영특한 머리가 아깝다.


070213
이필상 고려대 총장님이 논문 표절 의혹을 부인하며 전체 교수 신임투표를 제안한 일로 학내가 뒤숭숭하다. 나는 일평생 사상과 진리의 독점을 막기 위해 살고 싶다는 꿈을 품는 녀석이다. 내 모자란 머리로 궁리해볼 때도 진리가 다수결이 아니라는 건 너무나도 명확하다. 이 총장님이 신임을 얻어 총장직을 수행하시든 결국 용퇴를 하시든 간에 적잖은 생채기가 남게 됐다. 사기 조선열전에서 사마천은 고조선을 침공한 한나라 수륙양군이 모두 치욕을 당했다(兩軍俱辱)고 기록하고 있다. 그 누구도 승자가 아닌 참담한 상황이지만 이 난국을 슬기롭게 헤쳐나가는 힘은 우직한 원칙에 있지 않을까. 고대스러운(?) 해법이 점점 통하지 않는 세상이다.

자세한 내용은 익구닷컴 <이필상 총장님의 출처(出處)> 글 참조


070214
경복궁 건춘문 맞은 편에 자리한 술집 오로(ORO)에서 처음 만난 또래 친구에게 살가운 악수를 건네려고 했다. 모임 장소에 당도하기 전에 세 번을 상기했는데 결국 성공하지 못한 걸 보면 난 여전히 악수가 서툴다. 70도 정도 허리를 숙이는 인사를 선호하는 나로서는 악수가 영 어색하지만 내 좋고 싫음과는 관계없이 익혀둘 예법 가운데 하나다.

악수는 서양 남자들 사이의 인사법에서 출발했다. 손에 무기를 지니고 있지 않다는 뜻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가장 설득력 있지만 그 밖에도 다양한 연원이 있다. 무기를 들고 싸우지 않는 여성들이 악수하는 풍속이 없다는 게 재미나다. 그 때문인지 나도 여자와 악수를 나누기가 조금 스스럽다. 여하간 강아지가 등을 땅에 대고 연약한 배를 보임으로써 친밀감과 무저항을 보여주듯이 인간의 무기인 손을 건넨다는 건 화합의 몸짓이며, 신뢰의 교태다.

“어르신을 위하여 나뭇가지 하나 꺾어 드리는 일을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하지 않는 것이지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爲長者折枝, 語人曰 我不能 是不爲也, 非不能也)”는 <맹자> 구절이 있다. 무능한 나이지만 못하는 게 아니라 하지 않을 뿐인 일도 많이 있다. 내 게으름을 조금 다독이면 금세 해낼 수 있는 일을 내 천학비재(淺學菲才) 탓으로 돌리지 말자. 천학비재는 고치라고 있는 것이지 핑계 삼아 비빌 언덕은 아니기에.


070215
보통의 필부가 그렇긴 하지만 나도 계획은 구만리 장공을 노니는 붕새지만 결국 하는 일은 매미 정도이기 일쑤다. 초등학교 시절 명언집에서 마음에 드는 구절을 필사하기 시작한 이래로 명언명구 수집은 내 취미다. 아니, 내 생활의 일부다. 내 가슴 한 구석에는 명언집 편찬의 꿈이 은은하게 타오르고 있다. 배운 도둑질이 짜깁기라면 차라리 그 짜깁기를 멋지게 해보고 싶다.

양주동 선생님의 <세계명언대사전>은 서양 쪽에 치우쳤고, 모로하시 데쓰지의 <중국고전 명언사전>이 중국에 올인했다면 한국과 중국을 아우르는 동양고전명언사전이 좀 있어야 하지 않을까 내 멋대로 상상해본다. 아쉽게도 내가 아직 서먹서먹해서 일본까지 마수(?)를 뻗칠 자신은 없지만.^^; 쟁쟁한 대가들이 나서지 않으시는 것을 보면 그리 돈 되는 아닌 모양이다.

동양명언명구집이 없지는 않지만 적잖은 아쉬움을 느낀다. 우선 몇몇 인기 고전에 치우치지 말고 잘 알려지지 않은 글도 고루 실어야 한다. 맛깔스러운 한국어로 옮기되 재미난 해설과 번뜩이는 혜안을 선사하는 고전명구집은 내 영혼의 이데아다. 피안(彼岸)이다. 이루지 못할 꿈, 지키지 못할 약속이지만 그런 최소한의 허영심도 없다면 매미의 삶이 너무 딱하지 않겠는가.


070216
김학주 교수님이 번역한 시경이 품절이라 출판사 명문당에 재고 문의를 해봤다. 교수신문 고전번역 비평 시경 부문에 선정된 책이 아까운 마음에서다. 출판사에서는 가지고 있는 책이 두 권 있는데 표지에 문제가 있다고 한다. 지금까지 출판사 재고로 남아있는 책은 대개 반품된 것일 터이니 상태가 양호하리라 기대하는 게 무리라 이거라도 구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찰나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검색하다가 옥션에서 팔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서예용품과 서예서적 위주로 판매하는 곳이었는데 절판된 책을 구할 수 있게 해줘서 고마운 마음에 4,000원짜리 용모양 필산(筆山)도 함께 구매했다. 필산은 ‘山’ 자 모양으로 만들어 붓을 걸어 놓는 기구라는 것을 이번에 처음 알았다. 문진 용도로 쓸 수도 있고 필산도 겸용이라 서예를 하지 않는 나이지만 충동구매를 하고 말았다. 붓을 못 올려도 펜이라도 올려놓고 써봐야겠다.

일전에 어느 출판사 책창고에서 일일 알바를 한 적이 있었다. 일당 대신 책을 한가득 안고 와서 어찌나 뿌듯했는지 모른다. 함께 일했던 아저씨 한 분의 말씀이 가끔 생각난다. 많은 책을 옮기고 하다보면 좀 찌그러지고 그럴 수 있으니 조금 봐달라는 취지의 말씀이었다. 그 때 이후로 좀 많이 나아졌지만 나는 아직도 오프라인 서점에서 책을 고를 때면 제본부터 책등, 책배 상태 등을 꼼꼼히 살핀다. 책을 많이 사보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기는 하겠지만 나는 경미한 흠집이 있는 책을 많이 만나는 징크스가 있는 편이라 최대한 줄이기 위해 노력하는 편이다.

표지에 좀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에 책 사기를 망설이는 내 모습을 보면서 이런 사소한 흠집도 견디지 못하는 내가 약간 부족하거나 불편한 사람을 얼마나 잘 보듬을 수 있을지 반성해봤다. 장애책에 분개하는 내가 장애인에게 정성을 다하겠는가. 책의 껍데기를 중요시하는 내가 사람의 껍데기에 정신을 흩트리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물론 이건 좀 억지 비교다. 책 제본 상태나 표지 디자인 등에 신경 쓰는 것과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 상관관계는 낮다. 더군다나 나는 책 읽을 때는 손때나 땀이 묻는 것도 아까워 손을 깨끗이 씻는 녀석이다. 하지만 사람에 대한 고민은 미리 해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070217
영화 <홀리데이>를 중간 부분부터 봤다. 영화속 지강혁(이성재 분)이 외치던 “유전무죄(有錢無罪) 무전유죄(無錢有罪)”는 이제 과거의 이야기가 되었을까. 우리가 만들고 싶은 세상은 돈을 많이 벌기 이전에 돈 없는 게 죄가 되지 않는 세상이 아닐까 싶다.

2006년 3월경 구멍가게에 들어가 1,800원을 훔친 스물 아홉 살 이모씨에게 구속영장을 신청을 신청한 일이 있었다. 다행히 기각되어 풀려났다고는 하지만 1,800원에 추상 같이 무서웠던 국법은 왜 위로 올라갈수록 훈훈한 봄바람이 되는 것인지 우울하다.

<사기>에서 범려는 “천금의 자식은 결코 저잣거리에서 사형 당하지 않는다(千金之子 不死於市)”고 말한다. 예나 지금이나 돈이면 진실도 덮고, 사람도 살린다지만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좀 더 늘었으면 좋겠다. 천금지자의 품위보다 무금지자(無金之子)의 서러움을 먼저 생각하는 나라가 진정 아름답고 기품 있다.


070218
청원이가 하도 재미나게 보고 있다기에 나도 결국 <하얀 거탑>을 시청하게 됐다. 권력을 향해 매진하는 장준혁을 우리 둘레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조직 사회에서 살아남는 법이라며 같이 물들면서 원래 뭐 이런 거라는 소리도 적잖이 들어왔다. 우용길 부원장이 장준혁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려는 최도영을 구슬리자 끝내 마다하는 최도영을 보다가 콧잔등이 시큰해졌다. 정말 내가 이런 남자가 될 수 있을까. 나는 이런 사람을 얼마나 사귈 수 있을까 하는 시험(!)의 유혹 말이다.

의로움을 지키기 위해 권세를 마다하고, 어짊을 건사하려고 부귀를 버리는 사람이 좀 더 늘기를 바라면서도 내 자신이 그렇게 될지는 아직 장담할 수 없다. 함부로 호언장담하는 게 얼마나 신중해야 하고 두려워해야 하는 것인지를 이제야 좀 알겠다. 번민하지만 거짓 증언을 하고만 염동일에게 모진 회초리를 던지지 못하는 까닭은 그에게서 내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장준혁 같은 유능한 확신범이나 최도영 같은 정의의 사도보다는 고뇌하는 염동일이 정규분포의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으리라. 우리 사회의 희망은 좀 더 많은 염동일이 최도영쪽으로 다가서게 하는데 있다.

내게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사회를 만드는 사명 같은 건 없겠지만 그 강물에 목을 축이기 위해 내 자신이 해야할 몫이 적잖으리라 믿는다.

Posted by 익구
:
070205
‘백성들에게 육전 이외에서도 매매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許市民六廛外, 通共和賣).’ 조선왕조실록 정조편 신해년(1719년) 1월25일자의 일부다. 조선 상업사 최대사건이라는 ‘신해통공(辛亥通共)’이 시행된 것이다. ‘통공’은 진입장벽 철폐. 비단과 종이 등을 국가에 대는 육의전을 제외한 품목의 자유로운 매매 길이 열렸다.
- 권홍우. “[오늘의 경제소사/1월25일] 신해통공” 서울경제. 2005. 01. 25.

신해통공으로 시전상인이 누리던 독점상업특권인 금난전권(禁亂廛權)이 사라졌다. 이러한 봉건 상업질서의 붕괴는 사상(私商)들의 부단한 투쟁의 성과였다. 나는 여기서 영감을 얻어 “금난독권(禁亂讀權)”을 만들어 봤다. 아무 책이나 닥치는 대로 마구 읽는 독서 습관을 금지하겠다는 뜻이다. 내가 읽기로 결심한 동양고전 목록을 추려보니 아무리 속독을 한다고 해도 엄청난 양이다. 선현들이 몇 십년 걸쳐 곱씹은 고전을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읽어치우겠다는 게 지나친 처사지만 나 아니면 누가 또 이런 헛짓거리를 하겠는가?^^; 금난독권의 한시적 비호 아래 할 수 있는 데까지 고전의 바다에 빠져보자.


070206
열린우리당 김한길 전 원내대표와 강봉균 전 정책위의장 등 23명의 의원들이 집단 탈당했다. 대한민국 정당 정치의 비루한 수준을 몸소 보여주지 않으셔도 익히 잘 알고 있는데 이런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소속 정당을 떠남은 의원 개개인의 자유다. 허나 이 분들은 자신이 누리는 커다란 자유만큼의 책임은 모르는 듯싶다. 떠나는 이들의 감동 없는 참회를 들으며 이들에게 쥐어준 건국 이래 최초의 의회 권력 교체가 무참해졌다.

송나라 이방(李昉)이 편찬한 백과사서 『태평어람』에는 사귐에 대한 제갈공명의 말씀이 실려 있다. “선비가 서로 사귐에 있어서 따뜻하다고 해서 꽃을 더 피우지 않고, 춥다고 해서 잎 모양을 바꾸지 않는다. 사시사철 시들지 않고, 어려움을 겪어가며 더욱 굳건해진다(士之相知,溫不增華,寒不改棄,貫四時而不衰歷,坦險而益固)”는 말씀을 새기며 너무 많이 바꾸고, 너무 빨리 시든 분들을 곡한다. 미안하지만 당신들의 ‘먹고사니즘’에 건넬 동냥은 없다.

명나라 말기의 고증학자 고염무는 <일지록(日知錄)>에서 “세상의 흥망은 필부에게도 책임이 있다(天下興亡 匹夫有責)”고 말했다. 나같은 백면서생의 어깨마저 무겁구나.


070207
아침에 출근하다 구청 앞에서 민주노동당 중구위원회의 “노무현 정부의 공무원연금 개악을 반대한다”는 제하의 유인물을 받았다. 이 유인물은 “공무원연금 개악 저지 투쟁은 우리 모두를 위한 투쟁이다”고 강조했다. “갈수록 심각해지는 취업난과 형편없는 연금제도에 대한 대중의 불만을 공무원 노동자들에게 돌리려 한다”는 것이다. 물론 “세금이 복지에 쓰이는 것만큼 당연한 일이 어디 있는가! 오히려 다른 노동자들의 국민연금도 정부가 지원해야 마땅한 일”이라는 주장에 상당 부분 동감한다.

하지만 “공무원들이 고용 안정을 누리고 있다지만 노조 활동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수백 명이 해고됐고 ‘괘씸죄’에 걸려 연금도 못 받을 판”이라며 공무원에게 건네지는 선망의 시선을 간단하게 처리하고 넘어간 것은 그리 고와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고용 안정에 큰 가중치가 부여된 시대인 만큼 공무원들의 항변이 그리 와 닿지 않는다. 다만 “진정으로 특혜를 누리는 자들은 공무원연금을 삭감하려는 정부 고위 관료들과 국회의원들”이라는 주장에는 큰 공감을 보낸다. 국회의원들이 고통을 분담한다며 세비나 후생복지를 줄였다는 이야기는 아직 듣지 못했다. 성추행범 최연희가 꼬박꼬박 타먹은 세비만 생각하면 이 땅의 상도덕이 참 무안하다. 위로부터의 개혁을 굳이 해야 한다면 위에서부터 뼈를 깎아야만 따를 마음이 생긴다.

오후에는 중구청 광장 개소식이 열렸다. 오세훈 서울시장님이 참석하는 관계로 “명품서울 행복중구 오세훈 시장님과 함께 만들어요”, “오래도록 세상을 훈훈하게 만드시는 오세훈 시장님을 환영합니다”, “오세훈 시장님의 중구 방문을 전 구민과 함께 진심으로 환영합니다”라는 펼침막이 여기저기 걸렸다. 특히 4층짜리 별관 한쪽 면을 뒤덮는 대형 펼침막은 몇 시간 쓰려고 만든 것 치고는 너무 지나쳤다. 과공비례(過恭非禮)다. 거부감이 드는 펼침막을 걸어 놓는 몰취향도 문제지만 만약 서울시장 일행이 그걸 보고 흐뭇해한다면 이게 더 큰 문제리라. 중구민이 아니더라도 지나가면서 대형 펼침막을 보고 세금 걱정을 하는 건 인지상정이다. 서울시장이 중구청을 다시 방문해 펼침막 비용을 절반으로 줄이는 게 최선의 방책이려나.^^;

행사 진행 내내 광장 앞 한 켠에서는 덕운·흥인상가 세입자들의 시위가 이어졌다. 오 시장님은 “똑같이 혜택이 돌아갈 수 없는 현실이 마음 아프다”며 “효율적으로 서울을 개발하고 발전해 나가야”한다는 말씀을 하셨다. 문득 “그건 정말 특수한 경우일 뿐이야, 라는 자기정당화로 눈을 감아도 소용없다. 특수하든 그렇지 않든, 극빈은 관념이 아니라 삶이므로”는 황인숙 시인님의 글이 떠올랐다. 거창한 말이야 쉽지만 관념이 아닌 삶의 문제를 인고하며 풀어내는 정성어린 행정을 목 마른 사람이 우물을 찾듯이 펼치길 바란다. 공천헌금을 받아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 박성범 의원은 염치가 있는지 짤막한 인사만 하고 내려왔다.


070208
맹자는 “큰사람이란 어린 시절의 순진한 마음을 잃지 않은 사람이다(孟子曰 大人者 不失其赤子之心者也)”라고 말씀하셨다. 젊은 날의 호연지기를 기르는 것에 열중한 나머지 어린 시절의 순수하고 유치했던 기억을 하찮게 여기지는 않았나 반성한다.

정조대왕은 <일득록(日得錄)>에서 맹자의 이 구절을 언급하며 어린이의 마음이 성인의 마음과 꼭 같지는 않다고 말씀하신다. 다만 사욕에 물들지 않아 순수하고 거짓이 없는 기상을 잘 간직하여 마치 밝은 거울이며 잔잔한 수면과 같기에 ‘잃지 않는다’라고 풀이할 수 있다고 풀이한다.

중학교 1학년 시절 내 삶의 제일 목표로 삼았던 것은 “한결같음”이었다. 새삼 한결같음의 위력을 실감한다. 대중형님께서 말씀해주신 “위대한 일상성”을 떠올리며 권태와 싸우는 소소한 삶의 재미를 찾아봐야겠다.

75년 생애의 수많은 주간들은 정해진 일과의 틀을 따라 흘러갔다. 매일은 다른 날과 쌍둥이처럼 비슷하였다. (...) 이 끔찍한 작업 캘린더에는 빈 곳이 없다. (...) 창조적인 힘의 이런 엄청난 균형은 그의 생활의 지겨운 겉모습 뒤에 진짜 마적인 요소가 숨어 있음을 폭로한다.
-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안인희 옮김, 『정신의 탐험가들』, 푸른숲, 2000, pp. 319-321, mannerist님 블로그에서 재인용


070209
사적 제101호인 삼전도청태종공덕비(三田渡淸太宗功德碑)가 7일 붉은 페인트로 칠해져 심하게 훼손되었다. 삼전도비로 많이 불리는 이 비석은 370년 전인 1637년 인조가 청나라 태종에게 항복한 것을 기념해 세운 비석이다. 비문을 지은 이경석이 글공부를 한 것이 천추의 한이 된다며 탄식했던 비극의 기록이다. 말끔히 지우기 힘들 페인트만큼이나 우리 마음의 생채기도 깊어질 것이다.

누구에게나 지우고 싶은 역사는 있게 마련이다. 어쩌면 지난날의 과오를 고쳐 나은 역사를 만들 때만 과거를 분칠할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청나라에 포로로 끌려간 조선 백성들의 비참한 이야기들을 회고하려니 가슴이 아프다. 병자호란이 끝나고도 뻔뻔스럽게 왕위를 유지했던 인조를 비롯한 대다수 신료들의 무책임이 역겹다. 책임 정치를 갈구하는 건 민초들의 오랜 바람이자 마땅한 권리다.


070210
나는 확실히 호고벽(好古癖, 옛것을 좋아하는 취미)가 있는 모양이다. 옛사람들의 언행에 끔찍한 관심을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기전체 역사서의 장점은 역시 열전에 있다. <한서열전(漢書列傳)>을 읽으면서 한번 뿐인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되돌아보았다.

중과부적을 극복하지 못하고 흉노군에 항복한 이릉(李陵) 장군은 한나라로 귀환하라는 제안을 거부하며 “대장부는 욕된 일을 두 번 할 수 없다”고 말했다. 간신을 없애라고 황제의 분노를 사서 끌려가다가 어전의 난간에 매달려 난간이 부러지는 바람에 절함(折檻)의 고사를 만든 주운(朱雲)은 직언의 결기를 보여줬다. 사치로운 장례(厚葬)는 죽은 이에게 무익하다며 벌거벗긴 채로 묻어 주길 유언한 양왕손(楊王孫)은 인간의 허영심을 깨우쳤다.

도연명은 <오류선생전(五柳先生傳)>에서 스스로를 평하며 “책 읽기를 좋아하되 그 뜻을 깊이 깨달아 알려고 하지 않았으며(好讀書 不求甚解), 좋은 구절을 만나면 기뻐하여 밥을 먹는 일도 잊어버렸다(每有意會 便欣然忘食)”라고 말하고 있다. 나 또한 가슴에 와 닿는 구절을 갈무리하기를 즐기며 심대한 의미를 파헤치는 수고로움은 꺼리는 편이다. 물론 할 수 있는데 안 하는 것과 할 수 없어서 못하는 것은 엄연히 차이가 있겠지만 말이다.^^;


070211
내가 읽을 동양 고전 목록에 여씨춘추는 넣지 않았다. 여씨춘추는 잡가(雜家)에다 백과사전 성격이 강한 글이라고 들어 제대로 독해를 하지 못할 거 같았다. 그런데 우연히 접한 여씨춘추 한 구절이 내 마음을 흔들었다. 결국 여씨춘추도 읽을 책 목록에 넣기로 했다.

요리사가 맛있는 음식을 만들지만 자기가 그것을 먹지 않기 때문에 요리사일 수 있다.
만일 요리사가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그것을 자기가 먹으면 요리사가 될 수 없다.

庖人調和而弗敢食, 故可以爲庖.
若使庖人調和而食之, 則不可以爲庖矣.

이 말은 사회 지도층이 사사로운 이득을 꾀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제를 나타내고 있는 듯싶다. 당리당략에 식상하고 사리사욕에 진절머리가 나는 요즘에 더욱 음미하고픈 말씀이다. 정성껏 만든 요리를 남에게 내어 보이고 크게 심호흡을 내쉬는 모습이 요리사의 본분이요, 사명이다.

노자는 “생성하고도 그것을 소유하지 않고, 이루고도 그것에 기대지 않는다(生而不有 爲而不恃)”라고 했다. 이경숙님은 生而不有를 “살면서도 없는 듯하다”, “있는지 없는지 모를 만큼 없는 듯하다”라고 풀이하셨는데 일리가 있다. 여하간 논공행상에 집착하며 독점적이고 배타적인 권리를 누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머금을 수 있는 만큼의 물방울이 넘으면 미련 없이 비워내는 연꽃잎처럼 들어온 만큼 내보낼 수 있는 마음자리를 갈망한다. 열심히 가르친 스승이 아쉬움을 감추고 제자를 하산시키는 모습은 그 얼마나 애틋한가. 미식가는 넘치는데 요리사가 없는 사회는 암담하다.

Posted by 익구
:
070129
홍사덕 전 의원이 1996년에 펴낸 『지금 잠이 옵니까?』라는 책의 겉표지가 수험생들의 컴퓨터 바탕화면으로 인기를 끌던 적이 있었다. 홍사덕 전 의원의 매서운 눈매가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분위기를 만들어 효과만점이었다고 한다. 믿기지는 않지만 원고지 1100매 분량의 이 책은 단 닷새 만에 탈고되어 기네스북에 오르기까지 했다니 놀랍다. 분명 밤잠을 설쳐가며 그 책을 쓰셨을 게다.^^;

어쩌면 <지금 잠이 옵니까?>라는 문구를 새기며 밤잠을 쫓았을 수많은 수험생들이 대학생이 되어 다시 똑같은 표어를 꺼내들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물론 자는 시간 줄이지 말고 깨어있는 시간 동안 알차게 보내면 되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하지만 깨어 있는 시간 허비를 줄인다는 것 또한 잔인하기는 매한가지다.

밥 먹는 시간이 아까워 번번이 샌드위치로 때운다거나 어려운 책 붙잡고 있는 시간이 사치스러워 해제만 찾아다니며, 시시한 후배들과 수다 떠는 게 낭비라 후배들 밥 사주는 것도 꺼리게 된다고 가정하자. 차라리 잠을 못자 휑한 모습이지만 한 끼 식사를 맛나게 하고 정신이 혼미해질 때까지 원전을 읽다가 입술 깨물며 포기하기도 하며, 모자란 후배와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나누며 그 안에서 교학상장(敎學相長)하는 모습이 더 멋지지 않을까 싶다.

여하간 수석 합격생들의 단골 멘트인 “잠은 충분히 잤어요”가 정말 진실이었으면 좋겠다. 나는 불면 권하는 사회가 슬프다.


070130
강명석 매거진t 기획위원님은 배우 박건형님에 대한 기사에서 “사라지는 것들을 붙잡고 있는 남자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며 “‘하나쯤 있어야 할’ 배우”라고 평한다. “하나쯤”은 외로운 것들에게 건넬 수 있는 찬사이자 격려다.

칸트께서 설파하신 목적의 왕국(Reiche der Zwecke)은 수단이 아닌 목적 자체로서 절대적 가치를 지닌 인격이 도덕률로 결합한 상태를 말한다고 한다. “목적”이라는데 주안점을 두고 정리하자면 인간의 개별성이 존중되며 주인의식이 고양되는 이상향이 아닐까 싶다.

돈이 덜 되는 꿈을 꾸는 것이 외면 받는 시대라지만 나는 목적의 왕국을 꿈꾼다. 내 개별성(나쁘게 말하면 모난 성정^^;)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분들께 “저 같은 녀석 하나쯤 필요하지 않을까요?”라고 넉살좋게 말해야겠다. 자아실현은 남을 함부로 버리지 않듯이 내 자신도 함부로 팽개치지 않는데 있다.


070131
경기도 수원시 공무원들이 초과근무수당을 부당하게 지급 받아 물의를 빚고 있다. 2000여 공무원들이 아침 8시면 사무실에 도착해 밤 11시에 퇴근하는 생활을 5년 간 했다는 기록을 곧이곧대로 믿은 담당자의 정신세계가 경이롭다. 서무담당 공무원이 똑같은 필체로 서명하지 않았더라면 끝끝내 밝혀내지 못했을 세금 도둑질이었다. 무죄추정 원칙을 상기하려고 해도 이와 같은 사례가 공무원 사회에서 관행처럼 여겨지고 있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다. 공무원의 후생복지가 평균적인 취업자보다 못하지 않은 시대에 혈세 착복은 묵과할 수 없는 죄다.

공무원연금 개혁이 지지부진하다. 공무원들은 기득권을 유지하면서 일반 국민들에게 고통분담을 호소한다면 이를 받아들이기 힘들다. 누군들 더 내고 덜 받는 연금 개혁이 달갑겠냐만 고용 안정이라는 천복까지 누리는 공무원들이 연금 개혁에 반발하는 것은 더욱 명분이 없다. 잘 조직된 집단이 제 이익을 잘 지켜내는 것이 민주주의 사회의 원리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일반 국민들의 ‘합리적 무시(rational ignorance)’를 악용해 이익을 꾀하는 데도 절제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나는 여전히 착하고 성실한 공무원이 많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런 개인적인 신뢰보다는 일상적인 감시 시스템과 공정한 평가체계가 더 필요하다는데 기꺼이 동의한다. 토마스 제퍼슨은 “자유의 대가는 영원한 불침번이다”라고 말씀하셨고, 워싱턴의 미국시민권연맹 사무실 앞에는 “자유는 영원한 감시의 대가이다”라고 쓰여있다고 한다(아마 영어로 거의 동일한 모양이다). 혈세가 아깝다며 탄식하는 국민의 거친 손을 살갑게 잡고서 “아프냐? 나도 아프다”라는 멘트를 날려줄 수 있는 공무원이 더 많이 늘었으면 좋겠다.


070201
고등학교 편집부 선배이신 대중형님을 오랜만에 뵈었다. 난생 처음 먹어본 신당동 떡볶이는 달콤했고 기다리는 사람 걱정만 없다면 안주 삼아 오래도록 앉아있고 싶은 자리였다. 형과 간단히 맥주를 나누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정권교체 당연론(?)을 주장하시는 최장집 교수님 이야기가 조금 나왔는데 나는 내 견해를 정리해서 말씀드리지 못했다. 나는 본래 어정쩡한 양다리를 걸쳐왔다.

정당 정치 기능을 회복해야한다는 최장집 교수님의 논지에 동감하면서도 “분단체제 전체에 돌려야 할 책임을 현 정부나 그 이전의 개혁정부에만 묻는 것은 부당하다”는 백낙청 교수님의 논리에도 적잖이 공감을 보내기 때문이다. 참여정부에 돌을 던지기 앞서 진보 세력도 적절한 대안 마련에 실패했다는 조희연 교수님의 고백도 경청한다. 구조의 탓이라 둘러대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지만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강철같은 의지만으로 막아낼 수 있는 성질도 아닌 것 같다.

박정희 방식과 다르게 경제를 운용하는 대안을 산뜻하게 제시하지 않고서는 모든 논쟁이 허망할 공산이 크다. 형께서 친절하게 설명해주신 김만수 박사님의 『실업사회』라는 책은 많은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이 책은 높은 실업률이 구조조정이나 경제정책으로 인한 일시적인 문제가 아니라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 경향에 따른 필연적인 결과임을 논증하고 있다. 1960년대 이후 한국사회 자본구성 변화를 세밀하게 분석해 이와 같은 결론을 내렸다는 점에서 무척 흥미롭고 설득력 있다.

김 박사님은 마르크스의 개념을 빌려 자본을 가변자본(임금)과 불변자본(설비, 토지, 건물)으로 나눈다. 사람이 하는 일을 기계가 대신하면서 가변자본 비율은 작아지기 때문에 실업률은 앞으로도 더 커질 것이라 전망한다. 즉 마르크스가 역설한 산업예비군의 증가를 통계분석으로 살필 때 가변자본의 상대적 감소가 완연함을 입증해 보인다.

경제성장을 주창하는 분들은 이런 우울한 이야기에 그러니까 얼른 파이를 더 늘려야 한다고 말씀하실 지 모른다. 김 박사님의 주장을 가변자본의 감소경향이 임금 하락과 고용 감소와 직접적 연관관계가 있지 않을 수 있다는 의문을 품을 수 있듯이 이네들의 무한성장론(?)이 임금 상승과 고용 증가를 가져다 주는 지도 면밀하게 검토해야 한다. 총자본의 증가가 가변자본의 증가를 가져다줄 것이라는 장밋빛 상상은 차치하고 대중형님의 지적대로 중국만 볼 때도 파이를 늘리자는 주장이 그리 탄탄하지 못함을 알 수 있다.

2006년 중국의 경제성장률은 10.7%로 11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고 한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경제성장률이 이 정도인데 우리나라가 아무리 경제성장에 박차를 가한다고 한들 갑자기 총자본을 엄청나게 늘리는 데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탐스러운 성장의 과실을 나누는 신자유주의 유토피아는 말 그대로 ‘어느 곳에도 없는 장소’가 될지도 모른다. 여하간 자본주의 시스템은 자본가는 필연적으로 노동자를 착취할 수밖에 없도록 설계되어 있는지 혼란스럽다. 케인즈의 말씀을 음미하며 보다 인간답고 아름다운 사회를 궁리했다.

자본주의는 성공작이 아니다. 그것은 현명하지도 아름답지도 공정하지도 않으며, 고결하지도 않다. 그것은 우리의 기대에 어긋난다. 요컨대 우리는 그것을 좋아하지 않으며, 이제는 경멸까지 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무엇으로 대체하는 것이 좋을까 생각해볼 때 우리는 몹시 당혹스러워한다.
- 마이클 앨버트, 김익희 옮김, 『파레콘: 자본주의 이후, 인류의 삶』, 북로드, 2003, 135~136쪽


070202

어제 대중형님께 아흐리만님이 다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새로 연 블로그를 찾아봤다. 다행히 어렵지 않게 <한윤형의 블로그(http://yhhan.tistory.com)>를 찾을 수 있었다. 군 생활 중에 틈틈이 작성하신 글도 만날 수 있었고, 이전에 쓰셨던 글들도 알음알음 모으고 있으셨다. 낯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나는 아흐리만님이 입대하시기 며칠 전에 부랴부랴 팬레터(?)를 써서 보냈다.

“저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저는 노사모는 아니지만...” “저는 민주노동당 지지자는 아니지만...” “저는 반미주의자는 아니지만...” “저는 운동권은 아니지만...” “저는 군면제는 아니지만...” “저는 재벌옹호론자는 아니지만...” 이런 식의 말을 입에 달아야만 안심이 되고 비로소 색안경의 위협에서 벗어나는 한국 사회는 아직도 불행합니다. 도대체 명색이 자유민주주의 사회라면서 페미니스트도, 노사모도, 민노당 지지자도, 반미주의자도, 운동권도, 군면제자도, 재벌옹호론자도 각자의 생각을 나누는 것이 부자연스럽다니 말입니다.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기회의 평등조차도 제대로 실현이 안 되니 황당하지만 아마 아흐리만님께서 이 황당함을 더 많이 느끼셨을 것 같네요.

나는 이런 좀스러운 말들을 늘어놓은 말미에 나 같은 녀석보다 더 많이 읽고 쓰시는 아흐리만님이 군 생활로 말미암아 읽고 쓰는 것이 자유롭지 못함을 염려했다. 그가 무탈하게 돌아와서 반갑다. 나와 비슷한 또래에 저 정도의 사고와 논리와 용기를 갖출 수 있다니 예나 지금이나 신선한 자극이고 충격이다. 앞으로 얼마나 더 배우고 깨져야할지 벌써부터 아찔하다.

요즘 도덕 교과서에도 된사람이 으뜸이라고 가르치고 있겠지만 나는 든사람과 난사람이 부럽다. 우리 사회가 된사람이 모자라 이 모양이라고들 하지만 나는 학문과 지식이 풍성한 든사람, 총명하고 영특한 난사람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무쪼록 아흐리만님의 건승을 빌며 그가 난사람이면서 든사람이고 된사람이길 바란다.


070203
문화유산 답사를 제외하고는 나다니기 싫어하는 나 같은 녀석에게도 때로는 훌쩍 여행을 떠나고 싶을 때가 있다. 동호의 제안으로 속초 여행을 떠났다. 주말 내내 해야할 방정리를 미루고 선뜻 나선 것은 바다가 좀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자요수 인자요산(智者樂水 仁者樂山)이란 말을 중학교 한문시간에 처음 듣고 나는 물이 좋다고 생각했다. 정체되지 않기 위해 부단히 움직이는 물의 속성을 배워 자유롭게 흘러감을 본받고 싶다. 바닷바람을 마시며 답답했던 소회를 달랬다.

회맛을 더욱 돋운 콩코드 적포도주의 매력을 발견한 것도 큰 수확이다. 함께 한 동호, 주영, 한영, 기표, 지혜, 해승, 효진이에게 고맙다.


070204
청년 율곡이 스무 살에 쓴 자경문(自警文)을 여러 번 읽고 새겼다. “성인을 본보기로 삼아서 터럭만큼이라도 성인에 미치지 못하면 나의 일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以聖人爲準則 一毫不及聖人 則吾事未了)”라고 호기로움이 맵다. 율곡 선생님의 뜻을 미욱한 내가 얼마나 보듬을지 모르겠다.

“항상 ‘한 가지의 불의를 행하고, 한 사람의 무고한 사람을 죽여서 천하를 얻더라도 그런 일은 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가슴속에 담고 있어야 한다(常以行一不義 殺一不辜 得天下不可爲底意思 存諸胸中)”는 말씀 또한 내 이상에 어떤 것들이 들어 있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듯하다.

스물 두 살의 키에르케고르는 일기장에 “온 세계가 다 무너지더라도 내가 꽉 붙들고 놓을 수 없는 진리, 내가 그것을  위해서 살고 그것을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진리”를 갈망한다고 썼다. 내게도 목숨을 걸 수 있는 가치(the idea for which I can live and die)란 것이 있을까? 그것은 찾아내는 것인가, 만들어 내는 것인가?

Posted by 익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