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에 해당되는 글 83건

  1. 2006.01.16 네트워크 혁명에 대한 고찰 2
  2. 2006.01.10 비전향 장기수 송환 어떻게 볼 것인가 2
  3. 2005.12.24 역행보살 과학영웅의 몰락
  4. 2005.12.13 사립학교법 통과를 환영한다 2
  5. 2005.12.05 PD수첩과 과유불급 3
  6. 2005.11.17 DJ의 진솔한 사과를 기대한다 1
  7. 2005.11.14 김대중 대통령님의 침묵을 본받고 싶다
  8. 2005.10.16 강정구 교수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아도 2
  9. 2005.09.28 국가의 책임까지 떠맡지 말자
  10. 2005.09.14 북한의 습관성 몽니가 지겹다 2
  11. 2005.05.16 12.12 쿠데타와 장태완 장군 생각 3
  12. 2005.03.16 민주적이지 못했던 민주노총
  13. 2005.03.11 한승조 망언을 접하고
  14. 2005.02.04 뉴라이트가 살찌는 방법
  15. 2005.01.30 오해받는 두려움 달게 받기 1
  16. 2004.12.23 그렇게 믿었는데, 얼마나 울었는데, 어떻게 사랑했는데 1
  17. 2004.12.11 색깔론에 바치는 두 편의 시 3
  18. 2004.12.01 박정희의 값비싼 교훈 1
  19. 2004.11.22 앗 선수 당했다! 1
  20. 2004.10.22 황당한 신행정수도특별법 위헌판결 1
  21. 2004.09.25 김용갑이 몇 번 더 까무러치더라도 2
  22. 2004.08.08 화씨 911 - 자유가 불타고 있다
  23. 2004.06.29 유물론의 틈새시장
  24. 2004.06.26 전쟁 즐, 테러리즘 KIN 1
  25. 2004.06.18 행정수도 이전을 지방 발전의 계기로
  26. 2004.06.12 이해찬 세대 논쟁에 부쳐 1
  27. 2004.05.29 노무현 대통령, 진보가 아니어도 좋다
  28. 2004.05.22 공부권 단상
  29. 2004.05.02 경악스런 이라크 포로 학대를 그만두라
  30. 2004.04.23 신자유주의와 자유주의 미감
『네트워크 혁명, 그 열림과 닫힘』(홍성욱, 2002, 들녘)을 읽고

정보화 시대가 들어서면서 벌어지는 급격한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겠다는 사람들의 아우성이 거세다. 하지만 이미 우리 생활에 깊숙이 침투한 변화의 흔적은 짙다. 컴퓨터 자판을 통해 글을 써서 교류하는 전자우편, 채팅, 커뮤니티 활동이 자연스러워졌다. 시중에서 구할 수 없는 책을 인터넷 헌책방에서 가까스로 구하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네트워크 혁명, 그 열림과 닫힘』은 가속화될 정보기술의 발전 속에서 어떤 삶의 양식을 품어야 할지를 다각도로 고찰하고 있다.


글쓴이는 진행 중인 변화를 "네트워크 혁명"으로 명명한다. 오늘날 변화의 원동력은 정보통신 네트워크로 연결되면서 파생되는 것이라고 진단한다. 그러면서 "변화의 핵심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결의 혁명적 변화다(19쪽)"라고 선언한다. 결국 네트워크 혁명의 요체는 사람이 되어야 하며, 기술적 혁신만큼이나 인문학적 사유가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이 엄청난 변화의 물결에서 균형감각을 잃지 않고 긍정적인 면을 극대화할 수 있는 것은 인문학적 성찰과 반성의 힘이라는 것이다.


글쓴이는 쏟아지는 정보를 잘 골라내고 창조적으로 재결합하는 사람에 대해 강조한다. "중요한 것은 찾은 정보를 거르고, 이 중 괜찮은 정보와 그렇지 못한 정보를 골라내며, 이를 조합해서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내는 능력(50쪽)"이라며 암묵적 지식을 체화한 사람의 중요성을 설파한다. 이를 위한 대학 교육 시스템을 개편에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글쓴이의 이런 바람과는 달리 인문학의 위기는 어제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실용성이라는 잣대에 인문학은 나가떨어지기 일쑤다. 이런 아쉬움 때문에 인문학적 기초를 강조하는 것은 좋지만 인문학 지식에 대한 관심이 테크놀로지쪽으로 전이되었다고 해서 마냥 백안시할 필요는 없다. 시집 한 권과 MP3 음악 모음 사이에 위계서열을 매기는 것은 무의미하지 않을까. 글쓴이의 인문학 강조는 정보기술에만 매몰된 테크니션을 경계하라는 수준에서 받아들이면 될 듯 하다. 비단 인문학뿐만 아니라 넓은 의미의 순수학문 혹은 기초학문에서도 실력을 배양하도록 노력해야할 것이다.


글쓴이는 온라인을 통한 사회적 연결망을 주시한다. "전통적인 사회운동이 약화되는 반면 네트워크를 통한 새로운 사회운동이 부상(23쪽)"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글쓴이는 다양한 정체성을 기반으로 하는 가상 공동체의 힘을 높게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가상 공동체의 관계는 느슨한 경우가 많고, 오프라인의 뒷받침이 없으면 지속성을 가지기도 힘들다. 지난 2002 대선 때 인터넷이 대통령을 만들었다는 말이 회자되었지만 인터넷과 종이신문이라는 대립항에서 나온 이야기일 뿐 인터넷만으로 당선되었다는 것을 다소 지나친 감이 있다. 혹자들은 인터넷이 인간의 감성적인 면에 호소함으로써 단시간에 파급력을 넓혀나가는 것을 우려한다. 가령 2004년 대통령 탄핵 사태 때 탄핵표결 장면이 빠르게 전파되면서 많은 네티즌들의 공분을 샀던 것도 그러한 일환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온라인상의 활동이 반드시 격정적이고, 급격하게 이루어지는 것만은 아니다. 또한 문자텍스트를 기반으로 한 활자매체 대신 이미지를 기반으로 한 영상매체들이 득세한다해서 진지한 사고를 못한다고 단정하기는 힘들다. 텍스트와 이미지의 이분법적 대립구도보다는 상호조화를 통해 좀 더 명료한 지식을 세워나가야 한다.


이미 네트워크 혁명의 편리성과 유용성을 거부하고 살 수 없는 시대다.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재미난 정보들만 좇아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살만큼 진보했지만 거기서 머무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네트워크 혁명을 통해 "글로벌 문화의 잡종적 혼재 양식"인 "글로컬리제이션(134쪽)"을 지향해야한다. 정보화 사회는 힘의 논리가 아닌 문화와 지식의 다양성이 지배하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 21세기는 문화의 세기라고들 하는데 이는 네트워크 혁명과 무관하지 않다. 중급지식의 범람으로 고급지식의 가치가 천정부지로 치솟는 것처럼 독창적이고 참신한 문화역량을 갖추는 것도 절실한 과제이다.


섞임과 스밈을 마다치 않고 열린 자세로 숙고해낸 균형감각만이 어떠한 변혁에도 흔들림 없이 인간다운 삶을 지켜낼 수 있을 것이다. 상호연관과 상호의존이 일상화되면 "이타적 개인주의"까지 나아가지는 못하더라도 극단적 대립보다는 화해와 협력의 자세가 널리 퍼지게 만들 수 있으리라. 네트워크 혁명은 결국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금 깨닫게 해준다. - [憂弱]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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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5일 어느 모임에서 김동원 감독의 영화 [송환]을 보고 쓴 후기이다. 영화를 마치고 나눈 대화를 통해 많은 생각거리를 얻었다. 스스럼없이 반북주의자(?)를 자처하는 나이지만 남북문제는 참 어렵다.^^;)

김동원 감독의 영화 [송환]을 보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하 북한으로 칭함)에 대한 적개심에 불타오르는 저란 녀석의 부박함에 말입니다.^^; 또한 영화 내내 계속되는 폭력에 대한 증언에서 인간 자유의지를 단죄할 권리가 존재할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을 해봤습니다. 물론 우리 사회는 이제 영화처럼 폭력을 통해 특정 의사를 강제하지는 못할 만큼 성숙했습니다. 작년 12월 북파공작특수임무동지회 소속 일부 회원이 경기 파주 보광사 경내에 있는 비전향 장기수 묘역을 훼손시키는 사건이 벌어지기는 했지만요.^^; 이네들의 불관용을 지적할 만큼 우리 사회가 넉넉해졌음을 실감합니다.


비전향 장기수들의 북한 송환을 보면서 폭력과 광기의 한 시대가 저물어 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더 이상 폭압과 희생의 제의를 걱정하지 않을 만한 사회로 가고 있다는 안도감도 듭니다. 납북을 인정하지 못하는 장기수들이나 장기수 송환을 촉구하는 집회에 빨갱이들이라고 손가락질하던 분이나 모두 보고 싶어하는 것만 보는 우를 범하고 있습니다. 꼴 보기 싫은 것을 바로 보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지만요. 영화 말미에 납북자 가족들이 장기수 송환 차량을 막아서는 장면이 가장 인상 깊었습니다. 조금 비약인지 모르겠으나 피해자간의 대립을 통한 분할통치(divide and rule)가 아닐까 싶습니다. 앞서든 묘역 훼손 사건에서 남북 분단의 희생자인 북파공작원이 장기수의 고통은 헤아리지 못하는 비극이 수구기득권층의 분할통치전략에 부합하고 있다는 의구심을 가져봤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오랫동안 상대방의 잘못을 이유로 들어 자신의 똑같은 잘못을 정당화시키는 냉전적 사고틀에 갇혀 살았다. 이것을 과감히 벗어 던질 수 있는 능력, 이것이 바로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능가하는 '대한민국의 힘'이 아닐까 싶다.
- 유시민. 2000. 『WHY NOT?』. 개마고원. 248쪽 「비전향 장기수에 대한 단상」 中


유시민 의원의 말씀대로 대한민국의 힘이 발현되어 현재 대한민국에서 사상전향제도와 준법서약서 제도는 폐기되었습니다. 그러나 북한은 국군포로와 납북자의 실체조차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북한 체제가 국군포로나 납북자를 용납할 수 없는 시스템이라고 해도 우리는 이 문제를 묵혀두고 있을 여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역설적으로 인권, 인도주의 측면은 엄격한 상호주의가 필요한 것이 아닌가라는 사료됩니다. 부러 상호주의라는 용어를 쓰기는 했지만 이것은 미송환 장기수와 국군포로 혹은 납북자와의 일대일 교환 같은 완전한 등가교환을 추구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오해하지는 말아주세요.^^; 가령 적어도 북한 당국에 실체 인정과 실태 조사를 요구할 수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솔직히 이 정도의 인도주의적 요구조차 체제 유지에 위해가 될까 걱정하는 사회라면 어차피 그 체제는 존재할 가치조차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 또한 북송을 희망하는 미송환 장기수를 대한민국 땅에 붙잡아둘 실익이 거의 없다는 것이 자명한 만큼 얼른 보내드리는 것이 상책이라고 봅니다. 북송된 장기수들이 훈장을 차고 인민의 영웅대접 받는 것이 못마땅할 수도 있겠으나 적어도 대한민국의 비인도적 처사를 더 이상 비난할 수는 없을 터이니 그리 손해보는 건 아니니까요. 그러나 장기수들의 북송이 선심 쓰듯이 할 사안인가에 대한 의문은 여전합니다. 과연 조건 없는 북송이 북한에 대한 도덕적 우위를 지키며 통일의 초석을 놓는 것인지도 확신하기 어렵습니다. 현대아산 김윤규 부회장의 퇴진을 둘러싼 현대아산과 북한의 갈등을 보며 기본적인 상도덕조차 준수하지 않는 상대와 무슨 사업과 지원을 할 수 있을지 회의적인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송환 장기수들은 기꺼이 보내겠으나 북한측의 태도와는 관계없이 우리는 그에 상응하는 후속대책을 추구해야 합니다. 이 문제의 주도권은 북한에 있다고 생각하고 손놓고 있을 만큼 한가로운 사안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먼저 국군포로와 납북자 문제를 적극적으로 제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장기수분들이 그렇듯이 이분들도 대부분 고령입니다. 더군다나 시간을 끌면 끌수록 냉전세력에게 공격의 빌미를 제공하는 아킬레스건으로 두고두고 괴로움을 겪을 뿐입니다. 남북 화해 분위기 조성에 방해가 될까봐 이 문제를 후순위로 조정해서는 곤란합니다. 국익이란 명분으로 북한 땅에서 신음하는 대한민국인의 고난을 외면한다면 우리가 비판해마지않는 국가주의자, 전체주의자와 얼마나 섬세한 차이가 나는 걸까요? 국익을 위한 이라크 파병이란 말에 언짢아했던 사람이라면 마찬가지로 남북화해를 위해 국군포로와 납북자 문제를 덮어두는데 반대해야하는 게 일관된 처신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여담이지만 칸트는 영구평화론(Zum ewigen Frieden)에서 영구 평화는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될 때 가능하다고 설파했습니다. 자본주의의 확산과, 민주주의의 심화가 그것입니다. 슬프게도 북한은 이 두 조건 모두를 충족시키고 있지 못하네요.^^; 북한은 오히려 네오콘의 대부 레오 스트라우스가 주창한 국가의 안정을 위해 언제나 외부의 적과 전쟁을 벌여야 한다는 영원한 전쟁(perpetual war)에 충실하고 있습니다. 역시 극과 극은 통하나봅니다.^^ 북한의 습관성 몽니는 여러모로 불편하고, 이러다가 “영구적 평화”는커녕 “영원한 전쟁”에 함몰되어 있는 한반도는 “항구적 분단”이 고착되지는 않을까 염려스럽습니다. 이념대결의 시대가 갔다고 화해협력의 시대가 무조건적으로 꽃피는 것은 아닙니다. 투철한 반공교육의 압박을 피하고 자란 젊은 세대들이 북한에 대한 적개심이 덜할지는 모르겠으나 그렇다고 애호감이 더해졌다고 보기도 힘드니까요. 그렇기에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지속된 남북 화해무드를 잘 이어나가야 하겠습니다.


[송환]을 보며 남북관계에 대한 다양한 고민을 꺼내볼 수 있어서 무척 유익했습니다. 아울러 전체주의의 끔찍함도 새삼 깨우쳤습니다. 일평생 전향하지 않고도 두 발 뻗고 잘 수 있는 세상, 아니 궁극적으로는 전향과 비전향의 잣대보다는 다양한 개성의 향연을 만끽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겠습니다. 끝으로 한반도 땅에서 자유의지를 제 목숨처럼 여겼던 많은 민주영령들에게 존숭의 뜻을 표합니다. 쉽사리 망각하지 말고 함부로 무심하지 않기를! - [憂弱]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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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황우석 교수팀의 줄기세포 연구결과를 재검증 중인 서울대 조사위원회의 중간 조사활동 결과 2005년 사이언스 논문이 고의적으로 조작되었음이 드러났다. 2개 줄기세포주에서 얻어진 결과를 11개로 부풀린 것이다. 황 교수팀은 매매난자 및 소속 연구원 난자의 사용 과정에서 생명윤리에 대한 실책이 불거지기 무섭게 논문 조작이 발견됨으로써 과학자로서의 치명적인 오점을 남겼다. 전국을 거대한 논쟁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이번 사태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논문 조작이다. 이미 황 교수가 논문 철회 의사를 밝힌 마당에 원천기술 보유가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이 거대한 논란이 이제 일단락 되어 가면서 지난 한달 간의 격론 속에 내 자신이 어떤 생각들을 품었는지 돌아봤다. 평소에 세상 돌아가는 일에 오지랖 넓게 왈가왈부를 즐기다 보니 주위에서 이번 사건의 의견을 묻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생명과학분야에 대해 그다지 아는 것도 없던 터라 내 의견을 밝히기를 꺼렸다. 다만 PD수첩팀에게 쏟아진 무차별적인 폭격에 대해 문제의식 아니 정확히는 공포감을 느꼈을 뿐이다. 사상의 자유시장이 무참하게 짓밟힐 때 용기보다는 침묵을 선택한 것은 아니었나 하는 자괴감이 든다.


그 와중에 PD수첩의 취재윤리 위반과 함께 MBC의 사과문 발표를 보며 대세가 기운 것이 아닌가하며 섣불리 판단했다. 난리가 벌어진 새벽에 [PD수첩과 과유불급]이라는 제목으로 부랴부랴 잡글을 썼으니 말이다. PD수첩의 공과를 냉철히 판단하자며 거대한 비난의 예봉을 꺾어보려 무던 애를 썼지만 내심 걱정도 많았다. 괜히 PD수첩을 편드는 걸로 오해사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있었다. 워낙 사안이 엄중하다 보니 PD수첩의 실수가 너무 뼈아프고 무겁게 보였다는 다소간의 변명도 둘러대 본다. 오십보 백보를 따지며 "나는 달랐다"라고 우쭐대기보다는 "나 또한 그리 다르지 않았다"고 겸허하게 인정한다. 시린 진실보다는 달콤한 희망에 현혹되었고, 진지한 물음보다는 기계적 균형 속에 안락했다.


2.
지난 5월초 고대 100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황우석 교수님의 강연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전문적인 내용까지 죄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자신의 분야에 애정을 가지고 산다는 것이란 무엇인가를 가슴 시리게 깨우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다. 그의 형형한 눈빛을 보며 내 자신이 한없이 작아지는 기분에 설레었다. 강연이 있은 며칠 뒤에 환자맞춤형 배아줄기세포로 사이언스 표지논문이 되었다는 낭보를 들었다. 내 성공처럼 기뻐했다. 수의대라는 비주류학과에 순수 국내파 박사가 이룬 쾌거이기에 더욱 반가웠다. 6두품의 서러움 운운하거나, 주류 의학계의 음모론을 주창하는 이들에게 심정적으로나마 끌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윤리 논란이 벌어졌을 때까지만 해도 황 교수님은 솔직히 사과하고 책임지는 모습을 보였다. 나는 이를 두고 “진짜배기 학자를 만난 신선함이 기껍다”라고 호평했다. 하지만 얼마 뒤 황 교수님이 “인위적 실수”를 언급하실 때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사태가 여기까지 이르고 보니 예전에 썼던 칭찬을 슬쩍 지우고 싶은 욕망이 일었다. 누가 알아채겠냐는 생각에 “진짜배기...” 구절 대신 “앞으로도 각종 의구심들에 성실하게 대응해주시길 바란다”는 글귀를 집어넣었다가 다시 원상복귀시켰다. 그 때 당시의 내 생각을 감추는 것은 부질없고 비겁한 짓이라고 판단했다. 무책임은 무능과 무지만큼이나 무서운 죄악이다.


사실 진실공방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면서 이쯤 되면 서로 비기는 게 상책이라는 소망을 가졌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황 교수팀의 조작은 광범위했고 과욕은 넘쳐났다. 우리 사회가 황빠와 황까로 나뉘어 극심한 대립을 겪었지만 심지어 황까조차도 논문 전반에 대한 의혹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랐을 것이다. 황 교수님이 조국을 사랑하셨던 만큼 우리 국민들도 조국을 사랑했다. 나는 얼마 전까지 PD수첩팀에게 관용을 요구했듯이 황 교수팀에게도 관용을 베풀기를 청한다. 황 교수팀은 논문 조작에 대한 엄중한 처벌을 받되 PD수첩팀에 쏟아졌던 멸시와 조롱까지 받지는 않기 바란다. PD수첩 사태에서 얻은 교훈을 당장 써먹어 보자. 지은 죄만큼의 벌을 내리는 성숙한 사회를 만드는 계기로 삼으면 어떨까. 과유불급(過猶不及)을 과유불급으로 맞서지 말았으면 한다. 그 대신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하루하루 정성을 쏟고 있는 많은 연구자들에게도 애정과 관심을 가지는 쪽으로 나아갔으면 좋겠다.


3.
문득 일본이 세계적인 망신살을 뻗쳤던 2000년 11월 마이니치신문의 보도를 떠올렸다. 60만년 전 구석기 유물을 발굴해 일본인의 민족적 자부심을 고양시킨 일본 고고학자 후지무라 신이치의 신화가 발굴지에 미리 석기를 파묻은 조작극이었음이 드러났다. 일본의 역사왜곡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나로서는 옳거니 하면서 일본인들의 추악한 역사왜곡을 질타했던 기억이 난다. 이제 당분간 전세계에서 대한민국의 참담한 학문풍토를 질타할지도 모르겠다. 일본에게 뱉었던 욕지기를 고스란히 돌려 받을 각오도 해야겠다. 아무쪼록 이 참담한 사건도 우리 역사로 잘 기억되길 바란다. 그리고 앞으로 이 서글픈 역사를 기억하고 반성의 계기로 삼았으면 한다.


불가에서는 역행보살(逆行菩薩)이란 말을 쓴다. 남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 일부러 못된 짓을 하는 이로 화현(化現)한 보살이라는 뜻이다. 내 인상을 찌푸리게 만드는 이들이 오히려 가르침을 주는 스승이라 여기며 자기 자신을 돌아보라는 그윽하고 넉넉한 이야기다. 타고난 악당은 없고 저마다 크고 작은 실수를 저지르게 마련이다. 미움과 증오가 밀려올 때 스스로를 반성하며 내 자신 속의 역행보살을 찬찬히 살펴볼 수 있어야겠다. 그리고 남이 저지른 실책에 너그러워지고 연민을 가질 수 있기 바란다. 어쩌면 우리들의 역행보살이었을지 모르는 과학영웅의 몰락이 못내 씁쓸하다. 신실한 불자로 유명했던 황 교수님에게 어느 헌책방에서 성경책 표지에 써놓은 “양심은 신보다 위대하다”라는 구절을 조금 바꿔서 말씀드리고 싶다. “진실은 부처보다 위대하다”고.


나는 내 조국을 사랑한다. 그러나 내가 더 사랑하는 것은 진리다. 나는 내 나라가 진실과 정직과 연민을 더 애호하길 바란다. 나 또한 소수의 목소리에 더 귀 기울이고, 나만이 진실이라고 우쭐거리지 않기를 다짐한다. 광신과 성역 앞에 떨고 있지만 말기를. - [憂弱]


추신 - 고종석 선생님은 원로 국문학자 김윤식의 표절 문제를 제기한 평론가 이명원이 겪은 수난을 이야기하며 “우리 사회의 구접스러움은 표절 자체에 있다기보다 표절을 대하는 방식에 스며 있는 ‘아름다운’ 인연의 그물에 있다(고종석, 「‘표절’을 대하는 태도」, 시사저널842호(2005/12/02).)”고 탄식했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논문 조작 자체보다 논문 조작을 대하는 방식이 우리 사회의 성숙을 가늠하는 시금석이 될 것이다. 조작의 유혹과 표절의 매력은 늘 아찔하다.
Posted by 익구
:

개방형 이사제 도입을 골자로 한 사립학교법 개정안이 열린우리당, 민주노동당, 민주당의 공조로 마침내 국회를 통과했다. 오랜 진통 끝에 이뤄진 사학법 개정으로 인해 사학운영 전반에 큰 변화의 바람이 불어 닥칠 전망이다. 그러나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 마르지 않는 법이다. 인재 양성을 위한 나름의 의지와 포부로 시작한 교육사업을 무탈하게 펼쳤다면 뭐가 그리 걱정이고, 호들갑이겠는가. 제 발이 저리신 분들은 목청을 높이기 전에 발마사지부터 서두를 일이다.^^;

 

학교를 폐쇄하겠다며 게거품을 무는 일부 사학 관계자들을 보면 인간적 연민을 감출 수 없다. 학생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식의 태도에 분통이 터진다. 자신들이 애써 가꾼 학교를 내 덕분에 이만큼 일구어냈다며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그 공로 또한 일개인으로 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며 설령 그렇다고 해도 그것이 학교를 좌지우지할 권한을 부여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도덕경 2장에 生而不有 爲而不恃(생이불유 위이불시)라는 구절이 있다. 잘 이루면서도 그 결실을 가지려하지 않고, 잘 되어가도록 하면서도 그것에 기대려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生而不有 爲而不恃를 권한다. 설령 학교 폐쇄가 이뤄진다면 교육당국은 임원 승인취소와 임시이사 파견 등의 조치를 신속하게 하면 그만이다.

 

성난 표정을 짓고 있는 사학 관계자들도 사립학교가 설립되는 순간 학교는 설립자의 사유물 이전에 공익적인 학교법인의 재산이 된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을 것이다. 사립학교의 운영비가 재단 전입금보다는 학생들의 등록금과 국고로 대부분 충당된다는 것도 외면하기 힘들 것이다. 사학법인의 재정기여도는 초 12.8%, 중 1.8%, 고 1.9%, 대학 8.4%로 낮은 편으로 대다수 사립대는 등록금으로, 중등학교는 국민들이 낸 세금에 의존하고 있다. 사립학교의 자주성을 외치기 이전에 공공성에는 얼마나 충실했나를 스스로 성찰해봤으면 좋겠다. 사학법인들을 회원으로 하는 한국사립학교법인연합회가 제정한 ‘사학윤리강령’에 포함된 “사학을 위하여 제공된 재산은 국가사회에 바쳐진 공공재산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사유물 같이 다뤄져서는 안된다”는 구절에 부끄럽지 않게 말이다.

 

사립학교 법인의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는 종교계는 특히 더 자성하길 바란다. 다른 단체들도 아니고 종교계에서 색깔론 운운하는 것처럼 볼썽사나운 것이 없다. 우습게도 졸지에 사립학교법이 종파를 초월한 종교간 화합과 단결의 장을 열어주었지만 종교를 팔아 제 뜻을 관철시키려는 꼼수를 부리지 말아야 한다. 대자대비하신 부처님도 눈물을 흘리시고, 사랑과 용서의 하나님도 콧등이 시큰해지셨으리라. 불국정토나 하나님의 왕국이 탐욕과 분노 속에서 세워지지 않는다는 것은 명백하다. 부디 우리 종교계가 그저 남들 다 지키는 상도덕이나마 준수하길 기원한다. 몸과 마음이 가난한 자들의 벗이 되는 것은 그 다음 일이다.

 

다시금 사학법 개정안 처리를 환영한다. 이제 열린우리당이 당초 제시한 4대 개혁입법 중에서 국가보안법 폐지안 하나만을 남겨두고 있다. 남은 하나의 입법이 결코 만만치는 않을 것이다. 다른 법안들에 비해 국민들의 지지도 그다지 높은 편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욱 겸허한 자세로 국민들의 이해를 구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간 입만 살았던 개혁의 허송세월을 만회하기 위해서는 좀 더 부지런해져야한다. 다시, 국보법 폐지를 촉구한다. - [憂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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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수첩과 과유불급

사회 2005. 12. 5. 02:47 |
황우석 교수팀의 윤리 문제를 보도한 MBC 프로그램 PD수첩에 대한 집중 성토가 무섭다. 황우석 교수는 매매된 난자를 연구에 사용했고, 또 연구원의 난자를 기증 받아 연구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솔직히 사과하고 책임을 지려고 애쓰는 모습에 한없는 경의를 표한다. 각종 의혹들에 변명하지 않고 순순히 인정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을까를 생각하면 황 교수의 사과는 참으로 값지다. 진짜배기 학자를 만난 신선함이 기껍다.


각종 공방이 격화되는 가운데 12월 4일 MBC는 뉴스데스크를 통해 PD수첩팀이 배아줄기세포 진위논란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취재윤리를 위반한 사실을 확인하고 사과문을 발표했다. 윤리 문제를 제기했던 PD수첩팀 스스로가 취재윤리를 확보하지 못한 점은 뼈아픈 실책이다. 황 교수가 실수를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려한 모습과는 판이하기에 더욱 아쉽다. PD수첩팀의 과욕은 제 눈의 들보를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게 되었으며 MBC 또한 치열한 자기검증에 실패했다.


PD수첩팀이 그간 성역처럼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받아들여지던 황우석 신화의 틈바구니에서 연구원 난자 제공 및 난자제공자에 대한 금전적 대가 지급 등을 사실을 밝힌 것은 실로 대단한 일이다. 비록 취재윤리 위배로 인해 빛이 바래기는 했지만 앞으로의 줄기세포 연구가 윤리적인 견제와 감시 속에서 해나가야 한다는 교훈을 준 공로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진중하지 못했던 연구 검증 공방에서 PD수첩팀의 과유불급(過猶不及)이 그래서 더 안타깝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흙보다도 더한 겸허를 지녀야 한다"는 간디의 말이 따갑다.


이제 더 이상의 극한 대립을 거두고 양측이 수긍할만한 공적 검증을 신속하게 진행할 필요가 있다. 이런 시련을 통해 단련된 윤리의식을 토대로 다시 생명공학 발전을 위해 매진한다면 전화위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아무쪼록 황 교수의 성공을 내 일처럼 기뻐하고 아꼈던 국민들도 PD수첩팀에 대한 서운한 감정을 누그러뜨리길 바란다. 여담이지만 PD수첩팀에 쏟아 부은 극렬한 분노를 포트폴리오(?) 전략을 구사해서 다른 사회문제들에도 생산적으로 분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번 사태에도 불구하고 황 교수팀에 대한 건설적인 비판은 중단 없이 이어져야 한다. 또한 우리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언론보도들도 기탄 없이 이어져야 한다. 언론은 진실과 사실을 추구하기 위해 노력할 뿐 오지랖넓게 국익을 추구하거나 국민들의 심기를 살피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또한 언론 스스로 자아도취하여 마녀사냥을 펼치려 하거나 자신의 오류를 수긍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써서도 안 될 것이다. 다른 언론들도 PD수첩팀의 공과를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지은 죄 이상의 벌을 내리는 것은 또 하나의 죄를 짓는 것이다. PD수첩팀에 대한 치죄가 너무 공포감을 유발할 정도로 끔찍하게 펼쳐지는 것을 막아야 한다. '사람'과 그 사람의 '주장'을 일치시켜서 그 사람의 '주장'이 밉다며 그 '사람'을 제거하려 드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아울러 소수파에 대한 관용은 그 사회의 성숙함을 재는 척도가 되어야 한다. 모든 광신을 경계하고, 다시금 관용을 꺼내드는 것이 이번 사건의 소중한 깨달음이리라.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말하고 논쟁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 만한 애국이 어디 있겠는가.^^ - [憂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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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의 불법도청 의혹과 관련해 국민의 정부 시절 국정원장들이 전격 구속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항간에서는 김대중 전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이 결별 수순을 밟고 있다고도 한다. 음모론이라느니, 모독 운운하며 설왕설래가 어지럽다. 김대중 전대통령측의 극구 부인에도 불구하고 민주화의 공덕과 인권 대통령으로서의 면모는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 물론 불법도청 사건은 아직 수사가 진행 중이니 무죄추정이 옳다. 그러나 드러난 정황으로 보아 완전 사실무근으로 보기는 힘들다.


분기탱천보다는 석고대죄가 필요한 시점이다. 김 전대통령이 이런저런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지 않았으면 좋겠다. 국민의 정부가 내걸었던 가치를 거스르는 부끄러운 과거에 많은 이들이 상심했다. 미워하면서 닮는다고는 하지만 군사정권의 치부를 답습하는 모습은 여간 실망스러운 것이 아니다. 도청을 하고 싶다는 권력의 유혹을 단호히 뿌리치지 못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김 전대통령은 당시 국정 최고책임자로서 국민에게 겸허하게 사죄하는 것이 순리다. 노 대통령이나 열린우리당에게 섭섭함을 토로하기 이전에 그를 믿고 지지한 국민들의 허탈감을 달래는 것이 우선이다. 김 전대통령 본인의 충격보다 국민들의 아픔을 헤아린다면 국가기관의 조직적 범죄가 일어날 수 없는 계기가 되는 데 일조할 수 있으리라. 인생무상을 누구보다 많이 겪었을 당신께서 세리(勢利)에 연연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DJ의 인생역정에서 한줄기 빛이 되었던 진실에 대한 열망은 그만의 것은 아니다. 두 전직 국정원장을 믿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이겠지만 사필귀정(事必歸正)은 김 전대통령 뿐만 아니라 전국민이 바라마지않는 것이다. 변함없이 진실과 정의를 애호하는 그의 모습을 그려본다. 아름다운 은퇴자로 남기란 여간 힘든 일이지만 그래도 당신이기에 이런 어려운 기대를 해보는 것이다. 건승을 기원하며 충심으로 경의를 표한다. - [憂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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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잡글의 모티브이자 요즘 자꾸 읽게 되는 칼럼 - 김대중을 ‘3김’으로 묶지말라

최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열린우리당 지도부의 방문을 받은 자리에서 한 "여러분은 나의 정치적 계승자"라는 덕담 한 마디에 우리당과 민주당의 신경전이 날카로웠다. 우리당이 기쁨에 겨워 몸서리칠 일도 아니고, 민주당이 냉소를 날리며 코방귀를 낄 일도 아닌 듯 싶다. 우리당은 김 전대통령의 애정 어린 충고를 받아 들여 민심을 얻는데 애쓰기 바란다. 민생경제를 추스르고 지역주의에 굴종하지 않는 것이 진정 김대중 전대통령을 계승하는 일이 아닐까 한다.


여하간 이 헤프닝을 계기로 생뚱맞게 김대중 전대통령과 나와의 인연(?)을 생각해봤다. 92년 대선 때 김영삼 후보에게 패한 김대중 후보는 눈물을 흘리며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김영삼의 환호보다 김대중의 침울이 내게는 깊은 인상을 남긴 모양이다. 그러다가 95년 7월 18일 김 전대통령은 정계복귀를 선언한다. 그 후로 내내 야당 분열과 정계은퇴 번복이라는 비난에 시달렸지만 내 생일날 다시 돌아온 그를 나는 내심으로 환영했는지도 모르겠다. 96년 4.11 총선 때 그는 전국구 14번의 배수진을 쳤으나 국민회의는 79석을 얻는데 그쳤다. 그 자신마저 낙선했을 때 나는 왠지 모르게 가슴 한 구석이 허전했다.


중학교 2학년 때 97년 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대중에 대한 지지를 공식적으로 천명했다. 내 생애 최초의 정치적 의사표시였다. 어린 나이였지만 부당하게 욕을 먹는 듯한 김대중이라는 사람에 대한 연민과 당시 나라를 말아먹던 김영삼에 대한 실망이 함께 작용한 결과였다. 내 고향 대구의 정치적 성향이 어떤 것인지 어렴풋이 파악하기 시작했고, 소수파가 될 것을 자처하며 내린 결심이었다. 밤늦게까지 엎치락뒤치락하는 개표방송을 지켜보다 그의 미소를 볼 수 있었다.


국민의 정부는 그 탄생만으로도 대단한 역사적 성과였다. 하지만 욕심만큼 썩 잘 하지는 못한 것 같다. 김대중의 성공만을 막아야겠다며 저주를 퍼붓던 이들을 보란 듯이 이겨내지 못한 점도 많다. 김종필 일당과 손을 잡고서야 겨우 집권할 수밖에 없었던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해 아쉽다. 그러나 대놓고 미워하지는 못했다. 그와의 첫 만남이 하필이면 정계은퇴를 선언하는 눈물바다였다 보니 그 잔상이 머릿속을 맴돈 탓이었을까. 아니면 괜히 내가 잘못한 것 같아 그것을 인정하기 싫다는 우스운 자존심 때문이었을까.


그의 퇴임 후 이런저런 불평불만이 쌓여서 김대중 전대통령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음을 솔직하게 고백한다. 그런데 몇몇 사건들을 겪고 나니 김대중이란 인물이 얼마나 거인이었는가를 절감한다. 특히 지난 4.15 총선에서 끝끝내 침묵을 지킨 것이 정말 대단한 일이었음을 이제야 깨달았다. 자신을 향한 삼보일배를 보며 애간장이 타면서도 인고하고 말았던 그 헌걸찬 기백을 뒤늦게나마 경외한다. 그 때 당시 속시원하게 우리당을 지지해주지 않는다며 타박했던 나의 옹졸함과 부박함이 너무 민망할 따름이다.


나아갈 때를 알고 너무 머뭇거리지 않는 것도 능력이지만 물러날 때 깔끔하게 뒤로 가는 것도 참 매력적인 일이다. 요근래 내가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알고서도 모른 체하고, 허영심에 들떠 소명감을 들먹거리는 유혹을 마다치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느꼈다. 내 손을 떠난 일인데도 내가 나서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착각을 하고, 세월의 무게로 인해 쌓아놓은 것이 바래는 것을 참지 못하기 일쑤였다. 지난 총선 때 김대중 전대통령이 보여줬던 침묵을 본받아야겠다.


나는 내게 주어진 일감에 최선을 다하고서 스스럼없이 잊혀질 수 있기를 바란다. 어떤 성과 앞에서 죄다 내 공덕인 것처럼 우쭐거리지 말고, 쥐꼬리만한 권세에 취해 남을 업신여기지 말고, 인기 관리를 한답시고 자꾸 숨기고 핑계대지 말자는 의미다. 감놔라 배놔라 참견하는 대신 차분하게 책을 읽을 수 있는 여유를 가지고, 겪었던 일들을 재치 있게 털어놓는 넉살을 품고, 뒷사람들이 잘하는 모습에 아낌없이 격려할 줄 아는 겸허함을 간직하고 싶다.


無爲而無不爲! 억지로 하지 않기에 이루지 못하는 것이 없는 고요함과 치열함을 그려본다. - [憂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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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구 교수를 놓고 여기저기서 게거품을 물고 있다. 열린 사회의 적들이 목소리를 높인다. 최장집 교수, 송두율 교수 사건에 이어 국가보안법의 광기가 희생양을 찾기 위해 군침을 흘리고 있다. 물론 "한계 없는 관용은 관용 자체를 파괴하고, 제한 없는 자유는 자유 자체를 파괴(신중섭. "맥아더가 전쟁광이면 김일성은 뭔가." 문화일보. 2005. 07. 29.)"한다. 하지만 강 교수가 자유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적화통일을 갈망하고 있다고 보지는 않는다. 오히려 일부 수구세력들의 한계 없는 불관용과, 제한 없는 반자유가 더 문제인 듯 싶다.


법무장관의 지휘권 행사에 반발해 검찰총장이 사퇴한 것도 황당한 일이다. 형식상 적법한 조처를 차마 거부하지는 못해 수용하면서도 이런 식으로 항거해야만 했나 씁쓸하다. 검찰은 이번 일을 계기로 불구속 수사의 원칙을 돌아보길 바란다. 인신구속은 아무리 신중해도 지나치지 않다. 또 열린우리당은 행여나 이번 사건이 악재로 작용하지 않을까 염려해서 몸 사리지 말길 바란다. 우리당은 대한민국 헌법을 수호하고, 자유민주주의를 파괴하려는 세력들에 맞서야 한다. 자유주의를 지향하는 정당이 이 마저도 외면한다면 부끄러운 일이다.


강 교수를 감옥에 넣으라고 아우성인 자들을 보니 너무 섬뜩하다. 오늘날에는 사람을 없애 그 사람의 이론과 사상을 손쉽게 정리하는 야만을 저지르기 힘든 세상이라고 넉넉히 생각하고 있던 차에 뒤통수를 한방 맞았다. 사람을 원망하기는 쉽지만 그 사람의 생각을 반박하는 것은 많은 노력이 드는 일이다. 강 교수 주장을 논리적으로 반박하여 오류를 찾아내고 수정할 수 있도록 하면 그만이다. 사람 자체를 매장하려 하지말고 그 사람이 내놓은 지식과 인식, 내뱉은 말과 글을 비판해야 한다. 강 교수를 증오하는 사람들이 죄다 게으르고 단순하다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


진중권의 말대로 "강 교수를 구속하라고 인민재판을 벌이는 그 분들이야말로 사상의 자유시장을 믿지 못하여 국가의 개입을 요구하는 반시장주의자들"이 너무 밉살맞다. 북한에서 탈북자 가정에게 가해진다는 연좌제가 백보라면, 강 교수 수업을 들은 학생들에게 취업 불이익을 줘야 한다는 김상렬 대한상의 부회장의 연좌제는 오십보쯤 된다. 오십보와 백보는 분명 큰 차이가 있다. 그러나 김상렬 부회장이 좀만 더 건각(健脚)이었으면 김정일을 따라잡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사고방식이 피차일반이기 때문이다. 폭압적인 김정일 정권을 이기는 데 왜 그네들과 똑같은 폭력을 사용해야 하는가. 저들의 야만스런 행위를 따라하는 것이 과연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는 길인가.


고만고만한 사람들이 하는 일에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없다. 사상의 자유시장에서 티격태격하며 배우고, 고치는 수밖에 없다. 사상의 자유에는 웬만하면 고개 끄덕일만한 근사한 생각을 할 자유만이 아니라, 이거 아니다 싶은 조악한 생각을 할 자유가 포함된다. 표현의 자유에는 남 듣기 좋은 입 발린 소리를 늘어놓는 자유만이 아니라, 남의 속을 긁어 놓는 헛소리를 할 자유가 포함된다. 조악한 생각과 헛소리를 탓하기 전에 폭력을 휘둘러 자신의 사상을 강제하고, 다른 생각을 발본색원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자유의 적'들을 경계하자. 더군다나 사상의 자유시장에 영원한 승자는 없다.


"나는 당신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그 견해 때문에 박해를 받는다면 나는 당신 편에 서서 싸우겠다"는 볼테르의 말을 심심하면 꺼내들어야 하는 현실이 솔직히 짜증난다. 왜 굳이 편들고 싶지도 않은 사람을 위해 열을 내야 하는가. 강 교수의 언행은 내 미감을 심하게 거스른다.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을 위해 애쓰는 것만큼 흥이 안 나는 일도 없다. 하지만 이런 번거로움에도 내가 강 교수의 학문적 자유를 옹호하는 까닭은 이러한 행위가 김정일 일당의 폭력과 야만, 극우파들의 옹졸과 부박(浮薄)보다는 한결 너그럽되 굳건하고, 우아하면서도 인간적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끝으로 나라가 붉게 물들까봐 걱정이 태산인 이들이 잠을 설쳐 충혈된 눈망울로 횡설수설하는 걸 앞으로 계속 들을 생각을 하니 고역이다. 빨갱이 사냥하느라 지친 당신, 이제 잠 좀 자자.^^ 강 교수를 어떻게 하면 감옥에 집어넣을 수 있을까 고심하느라 날밤을 새기보다는 국가보안법 좀 폐지하는데 일조해주시면 어떨까. 주체사상 같은 북한의 실체를 여과 없이 만나게 하는 것만큼 효과적인 반공이 어디 있을까. 물론 아동틱한 자기자랑과 신물나는 찬양을 즐기는 독특한 취향이 있을 수 있겠지만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손학규 경기지사의 말대로 "사회가 다양해질수록 별의별 사람들이 많고 별의별 이론을 내놓는 사람들이 많게 마련"이다. 우국지사(?)들도 두 다리 뻗고 잘 수 있는 불면증 없는 대한민국은 상상만 해도 즐겁다. - [憂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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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주의는 야만이다』는 동생이 서평 과제가 어렵다고 긴급구호를 요청하길래 엉겁결에 읽게 된 책이다. 그 통렬한 문제의식에 십분 공감하면서도 해법은 조금 다른 식으로 내봤다. 책을 열심히 읽지는 않은 터라 내용 파악에 미진한 부분이 있을까 두렵다)


IMF 사태가 터졌을 때 일 열심히 하고 세금 꼬박 내던 서민과 중산층에게 돌려진 화살은 엄청났다. 마치 이 모든 것이 국민들의 안이한 생활태도 때문인 것처럼 각종 언론매체에서는 아우성이었다. 한강의 기적이라는 경제성장의 과실은 대체 어디로 가고 다시 허리띠나 졸라매라는 채찍질만 돌아온 것인가. 『가족주의는 야만이다』는 이러한 의구심에 대한 해법을 모색하고 있다.


글쓴이는 경제침체 이후 심심지 않게 등장하는 박정희 향수는 파시즘의 소산이라고 주장한다. 개발독재 시대에 가족이 국가 동원의 단위로 이용되면서 사회의 부재, 사회적 안전망의 부재가 은폐된 것이다. "가족을 정(情)의 수사학으로 포장하면서 국가의 존재를 은폐시키는 것이야말로 파시즘"으로서 "사디즘적인 사회에서는 개인이 마조히즘화되고 개인의 정신은 왜곡"된다고 본다. 글쓴이는 가국(家國) 체제라는 개념을 제시하는데, 이는 "가족이라는 사적인 영역이 국가가 공적인 영역에서 해야 할 일들을 다 떠맡고 있는 체제"를 말한다.


글쓴이는 시종일관 가족=국가라는 도식을 비판한다. 이어서 나라의 위기가 나의 위기로 여기며 스스로 국가에 기꺼이 봉사하는 마조히즘적 국민에서 벗어나라고 주장한다. 내 역할에 충실히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것은 국가와 사회가 책임져야 할 부분을 개인이나 가족단위가 떠맡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가령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농산물 시장 개방의 경우 사회적 후생을 증가시킨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농가에서 기를 쓰고 반대하는 이유는 개방으로 인한 이익이 자신들의 손해를 보상하는 데 쓰일 것이라는 신뢰가 없기 때문이다. 국가가 어느 정도 책임져야할 부의 재분배 노력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방증일 것이다.


농산물 시장 개방의 예에서처럼 국가의 기능 중에 대표적인 것이 가치 분배일 것이다. 가치의 생산이나 창출은 개인과 기업의 역할이 더 크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이런 가치 분배의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 홍세화는 나눔과 분배가 같은 말인데도 상반된 반응이 나타나는 이유가 "나눔은 사적 영역으로서 시혜나 기부의 의미를 갖는다면, 분배는 공적 영역으로서 조세정의 등 제도화를 요구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홍세화. "나눔과 분배, 그리고 공공성." 한겨레신문. 2005. 8. 24. 참조). 양극화와 빈곤 문제를 개인의 선의에 호소하는 나눔이라는 구호가 내걸리는 것은 국가의 책임 방기라고 비판해야 한다. 글쓴이가 예로 든 수재의연금과 금모으기 운동이 기만적인 이유도 이 연장선상에 있다.


글쓴이는 국가와 사회를 구분하면서 국가와 가족 사이에 시민사회가 형성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가족-사회-국가로 이어지는 유기적인 관계를 지향하자는 주장하기에는 국가와 사회, 가족 간의 경계가 다소 애매한 감이 있다. 조금 수정해보면 국민 개개인의 이익을 존중하고 개인의 욕망을 억압하지 않는 '국가', 민주적 시민의식을 함양하고 연대성을 키우는 '시민사회', 그리고 궁극적 소수로서 자유롭게 욕망하는 '개인'으로 나눠볼 수 있다. 글쓴이는 가족이라는 존재를 무척 중요시하지만 가족관념이 많이 희박해진 현대 사회에서 가족은 시민사회와 상당부분 포개질 공산이 크다. 즉 가족과 시민사회의 기능이 상호작용하면서 둘 사이의 구분이 큰 의미가 없어진다고 생각한다. 대신 가족의 자리에 개인을 놓는다면 국가욕망으로부터 탈주하기도 한결 수월할 것이다. 고종석이 제시했듯이 "모두가 궁극적 소수 곧 개인인 세상", "집단이라는 추상에서 개인이라는 구체로 눈높이가 낮아진 세상(고종석. 2002. 『서얼단상』. 개마고원. 148~149쪽)"을 지향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글쓴이는 "가족은 신성하지만 가족주의는 불온하다"면서 '가족'과 '가족주의'는 엄연히 다른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렇게 두부 자르듯이 나누기 힘들어 보이며 가족이 가족주의, 국가주의로 나아가는 것이 반드시 국가의 세뇌 때문만은 아니다. 가족을 중시하는 사고에도 이미 국가주의의 싹이 트고 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국가의 책무를 소홀히 하고 가족에게 책임을 전가한다는 글쓴이의 지적은 타당하지만 가족보다는 개인에게 초점을 맞추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아울러 국가주의와 가족이기주의에만 논의를 집중한 나머지 우리 사회에서 큰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지역주의나 학벌주의 같은 집단주의에 대한 검토가 부실한 편이다.


결국 글쓴이에게서 사익을 국익으로 포장하는 권력자들의 술수에 넘어가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다원화된 민주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지만 일사불란한 국론통일 욕구는 여전히 강하다. 이러한 유혹을 뿌리치기 위해서는 공공성을 확보한 시민사회의 영역이 보다 넓어지고, 자기 자신을 함부로 희생하지 않고 자중자애하는 성숙한 개인들이 보다 많아져야 한다. 국가주의를 경계하기 위해서 개성과 자유라는 칼과 공동체와 연대라는 방패로 맞서야 한다. 자유의 대가는 영원한 불침번이기에. - [憂弱]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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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아산 김윤규 부회장의 퇴진을 둘러싼 현대아산과 북한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 다시금 대북사업의 리스크를 실감하게 하는 사건이다. “비리 경영인 인사조치가 잘못된 것이라면 비굴한 이익보다 정직한 양심을 택하겠다”는 현정은 회장의 선언도 예사롭지 않다. 이렇게 신뢰도 떨어지는 상대방과 계속 교류를 나눠야 하는지 회의감도 적지 않다. 현대가 막대한 투자를 통해 얻어낸 독점사업권을 이렇게 간단히 무시한다면 대북사업 전체의 신뢰도에 치명적인 타격이 될 것이다. 상도덕을 준수하지 않는 상대와 무슨 사업이며, 지원이란 말인가.


북한은 “100% 포식하려 들지 말고 80% 정도의 포만감에 만족해야 한다”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충고를 경청해야 한다. 걸핏하면 민족공조를 외치면서 조금만 배알이 뒤틀리면 습관성(?) 몽니를 부리는 자세는 적절치 않다. 북한은 남한 사람들이 금강산과 개성이 정말 볼 것이 풍부해서 비싼 돈 내며 관광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이런저런 불편함을 감수하고 북한을 굳이 찾아가는 이들이 어떤 안쓰러운 마음으로 북녘 땅을 밟고 있는지를 헤아릴 필요가 있다.


칸트는 영구평화론(Zum ewigen Frieden)에서 영구 평화는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될 때 가능하다고 설파한다. 자본주의의 확산과, 민주주의의 심화가 그것이다. 슬프게도 북한은 이 두 조건 모두를 충족시키고 있지 못하다. 오히려 핵을 이용한 협박으로 세계평화를 위협하고 있다. 김정일 정권은 제 인민들을 굶겨 죽이면서도 폭압적 전제정치만 고수하고 있다. 이처럼 지구상에서 가장 어처구니없는 나라 중의 하나인 북한과 통일 준비를 해야한다는 것은 심원한 비극이다.


북한은 국가의 안정을 위해 언제나 외부의 적과 전쟁을 벌여야 한다는 영원한 전쟁(perpetual war) 개념을 가장 충실히 하는 나라로 보인다. 네오콘의 대부 레오 스트라우스의 이 개념이 북한에 그대로 적용된다는 것을 볼 때 극과 극은 통한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남북 화해무드가 계속되고 있기는 하지만 북한의 안하무인적 태도는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이러다가 “영구적 평화”는커녕 “영원한 전쟁”에 함몰되어 있는 한반도는 “항구적 분단”이 고착되는 것은 아닌가 염려스럽다.


믿음도 산산이 부서질 때가 오고, 눈물도 마를 때가 오며, 사랑도 식을 때가 오게 마련이다. 북녘을 내 나라 땅처럼 여기며 아끼고 챙겨준 이들이 등을 돌리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퍼주기라는 비난과 친북주의자라는 꼬리표를 마다치 않았던 이들을 이런 식으로 욕보인다면 곤란하다. 믿음의 자리에 실망이, 슬픔보다는 성냄이, 사랑 대신 증오가 싹 트지 말라는 법도 없다. 북한 인민과 남한 국민들을 볼모로 호의호식하는 한줌의 노멘클라투라들은 가슴에 손을 얹고 돌아봐야한다. 시간은 결코 북한 편이 아니다.


아울러 현대 그룹은 교착상태에 빠진 대북사업에 주눅들지 말고 원칙을 흔들림 없이 견지해나가기 바란다. 내정간섭을 끔찍이 싫어하는 북한이 남의 나라, 기업에 간섭하기를 즐기는 것은 아이러니다. 고 정주영, 정몽헌 회장의 유지도 대북사업이 평화통일의 초석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지, 북한의 부당한 압력에 굴복하라는 것은 아닐 것이다. 평화통일은 너무나 소중한 지상과제지만 의연하고 당당하게 추진해나가야지, 비굴하게 매달릴 필요는 없다. 현정은 회장의 말대로 대북사업은 지금 기로에 서있다. 대한민국은 몰상식과 파렴치까지 다 받아줄 만큼 만만한 나라가 아니다. - [憂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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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드라마 [5공화국]을 보는 내내 속이 메스꺼웠다. 12.12 사태 당시 탐욕스런 고깃덩어리들이 헌정을 유린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당대를 살지 않은 내게도 무척이나 고역이었다. 대세가 전두환 일당들에게 기울어 갈 때도 마지막 순간까지 타협하지 않은 몇 안 되는 군인들을 보는 것도 서글펐다. 구차하게 제 안위를 챙기느라 갈팡질팡했던 대다수 인물들을 보며 한없이 씁쓸했다.


특히 직속상관인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체포하는 최세창 3공수여단장을 보며 권력의 비정함을 새삼 실감했다. 정 특전사령관을 마지막까지 보호하려한 특전사령관 비서실장 김오랑 소령이 절친한 친구인 3공수여단 예하 15대대장인 박종규 중령에게 살해당한 것도 기가 막혔다. 직속상관을 체포하고, 친구를 사살하는 역겨운 순간을 보다 보니 평소 욕지기를 거의 하지 않는 나도 이따금 몇 마디 내뱉고 말았다.


또한 반란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하면서 시청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던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도 인상적이었다. 여기저기 눈치보기와 배신이 벌어지고 있을 때 가장 적극적으로 진압군을 지휘했던 그야말로 진정한 군인의 사표였다. 쿠데타가 거의 성공할 때도 자신의 휘하 병력 100여명을 이끌고 진압 작전에 나섰다고 하니 그 용기가 존경스러울 따름이다.


89년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된 정병주 특전사령관과는 달리 장태완 장군은 비록 강제 예편에 가택연금을 당하기도 하고 아버지와 아들이 세상을 떠나는 아픔을 겪지만, 반역도당들이 역사의 심판을 받으며 뒤늦게나마 명예회복을 했다. 재향군인회장과 새천년민주당 국회의원을 역임한 것이 지난날의 비운을 보상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그가 2002년 대선 때 장 장군은 후보단일화협의회에 참여하면서 전국구 의원직을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 탈당하지 않고 당에 제명을 요구하는 추태를 부렸다. 그 참담한 반역의 순간에도 민주주의를 위한 지조를 지켰던 그가 국민과 함께 뽑은 대통령 후보를 흔드는 일에 동참한 것은 그의 빛나는 지난날을 배반하는 처사다. 물론 후단협 가입과 탈퇴를 반복하며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은 것 같지만 말이다.


지난 대통령 탄핵발의안에 서명한 의원 명단에서 그의 이름을 발견했을 때 다시금 침통했다. 탄핵소추안 가결 당시 행인지 불행인지 미국에 체류하는 바람에 표결에 불참했기 망정이지 표결에 참석했다면 노장군의 영예에 또 한번 먹칠을 하고 말았을 것이다.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쳤던 이가 어쩌다가 현실 정치에서 이런 꼴을 보이고 물러났는지 가슴이 아프다.


살아있는 사람을 존경하는 일은 이만큼 힘들고 어려운 일이다. 과거는 미화되기 싶지만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이의 잘잘못을 논하는 것은 대개 편이 갈리고 다툼이 있기 때문이다. 불완전한 인간이 살아가며 실수를 저지르게 마련이며 개인적 한계를 나타내기도 한다. 장태완 장군에 대한 애증이 교차하지만 반역의 회오리에서 중심을 지킨 몇 안 되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사모의 정을 표하는 것으로 내 예우를 다할까 한다.


나는 앞으로도 제2, 제3의 장태완을 만날지도 모른다. 이 경우 그 사람을 어떻게 평가해야할지 무척 곤혹스러울 것이다. 그럴 때면 유시민 선생의 다음과 같은 말을 되새기며 시름에 잠길 것 같다. - [憂弱]


어느 하나의 문제에 대한 다른 사람의 견해를 비판하시는 것은 얼마든지 좋습니다. 그러나 그 문제에 대한 그의 견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인간적인 배신감을 느끼지는 마십시오. 그 사람의 사상과 삶의 궤적 전체를 비난의 대상으로 삼는 일도 삼가주십시오. 세상은 완전히 희거나 검은 사람만 사는 곳이 아니며 타고난 악당과 성인군자가 싸우는 무대도 아닙니다. 세상은 불완전한 인식능력을 지닌 불완전한 인간들이 숱한 고뇌와 번민 속에 서로 다투면서, 그리고 저마다 실수와 잘못을 저지르고 그것을 바로잡아 가면서 살아가는 곳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 유시민. "마지막 당부... 다시한번 기회를..." 한국경제신문. 2000. 05. 29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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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교섭 안건을 처리하기 위해 소집된 민주노총 임시대의원대회가 일부 노동자들의 물리력 행사로 또 무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착잡했다. 목소리 큰 소수가 한 표의 권리 이상을 행사하려 들 때의 광경은 대개 볼썽사납다. 유치한 원론 이야기지만, 민주주의는 소수파가 다수파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는 데 그 의의가 있다. 그런 룰 때문에 다수파는 소수파를 존중하고, 소수파는 다수파의 결정에 승복하는 것이다.


나는 민주노총 대의원 구성도 잘 모르고, 그들이 노조원 평균의 의사를 잘 대변하고 있는지도 미지수다. 그러나 이는 대부분의 대의민주주의가 가진 한계일 따름이다. 마찬가지로 현재의 국회의원이 보통 국민들을 가장 잘 대변한다고 확신할 수 없으며, 4월에 있을 열린우리당 대의원대회에서 가장 훌륭한 인물을 당의장으로 선출한다고 기대할 수도 없다. 나는 다만 한 표의 권리들이 모여 선출한 이들이 절차적 정당성을 가지고 의결권을 행사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믿을 뿐이다.


회의를 저지하려는 쪽에서는 절차적 민주주의보다 내용적 민주주의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내가 민주주의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어 잘은 모르겠으나 절차적 민주주의 다음에 내용적 민주주의를 고려하는 것이 상식이다. 절차에 문제가 없어야 알찬 내용을 만들어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전까지의 절차가 큰 문제가 있었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고서 이렇게 절차를 깡그리 무시하는 이들이 내용적 민주주의를 들먹거릴 수 있는지 의문이다.


아무리 많은 토론과 대화를 한다고 해도 소수파가 100% 만족할만한 결론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다수파가 뜻하는 바가 많이 반영되는 것이 민주주의의 원리다. 그렇지 않고서야 다수파가 되려는 노력을 할 필요가 무엇이 있겠는가. 민주주의 사회에서 패자는 서글프고 소수파는 애달프게 마련이다. 어쩌면 의사결정 과정에서 소수의 의견이 적절하게 반영되지 않아 불가피하게 항거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연 그렇다고 보기에는 노동계와 대다수 국민의 시선이 너무 싸늘하다.


합당한 비판과 부당한 비판의 경계는 언제나 논란이 있기 마련이지만... 두 가지 기준 정도가 있다고 할 수 있겠죠. 과거에 어떻게 했는가와, 지금 현재 다른 존재에게는 어떻게 하는 가를요. 가령 언론의 비판에 대해서 따져보면 과연 김영삼에게 던졌던 비판의 수준과 동일한가, 또 현재 한나라당과 극우세력에게 던지는 화살과 비슷한가... 이런 것들을 따져보았을 때 ‘그들’에게는 너무 넉넉하고 노무현에게는 너무 매섭다고 충분히 느껴져서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거죠. 이것도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견해이지만...^^
- 대통령 탄핵 때 메신저 대화 中


내가 제시했던 비판의 기준 두 가지는 사실 매우 허약한 것이다. 과거와 현재의 환경이 달라졌을 수도 있고, 현재 존재하는 존재들 간에 기대되는 수준도 다르기 때문이다. 좀 더 섬세한 비판을 위해서는 변수 몇 가지가 추가되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사례’와 ‘현재 다른 존재’에게 동일한 잣대를 썼는가는 매우 중요하다. 비판이 일관성을 잃으면 단순한 인신공격으로 전락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이 국가보안법 폐지안 상정을 막기 위해 필리버스터(Filibuster, 의사진행방해)를 할 때 게거품을 물며 질타하고, 행정도시특별법이 통과되었는데도 난리법석을 떠는 이들에게 의회주의의 적들이라고 일갈했다. 하지만 이번 민주노총 사태에 대해서는 비교적 말을 아낀 편이다. 괜히 건수 잡았다고 호들갑을 떠는 경향도 있는 것 같아 자제하려고 했다. 내 스스로의 비판에 대한 기준을 지키지 못한 것 같아 자괴감이 들기도 한다.


그러다가 내키지 않는 쓴소리를 하는 까닭은 이번 갈등을 잘 치유하고 비 온 뒤에 땅이 굳는 모습을 보여주기 바라는 마음에서다. 그들 표현대로 신자유주의나 자본의 공세가 얼마나 거센지는 모르겠으나 결국 가장 큰 적은 내부에 있게 마련이다. 그럴 때일수록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노력을 해야한다.


끝으로 그렇게 노동자 계급의 단결을 외치던 민주노총이 내부 분열에 시달리는 모습에서 사람 모이는 곳은 어디든 비슷하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 [憂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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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조 망언을 접하고

사회 2005. 3. 11. 02:53 |
한승조 고려대 명예교수의 일제 식민지배가 축복이었다는 망언을 접한 직후의 단상을 정리해봤다.


1. 얼마 전 독립문 근처의 서대문형무소역사관 관람한 기억이 났다. 매우 한산할 때 찾아 일제의 참혹한 고문 장면들을 나 혼자 찬찬히 둘러볼 수 있었다. 사형장에 들어서니 스산한 분위기가 엄습해 어찌나 몸서리쳤는지 모른다. 최근에 읽은 책에서는 일제의 우리 문화재 파괴의 기록들을 읽으며 치를 떨었다. 갖은 분노를 겨우 잠재우고 나니 힘없는 나라의 비애를 다시는 되풀이하지 말기를 다짐했다. 잊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또 그렇게 지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


2. 애국과 민족을 극성스레 강조하는 것이 전세계 극우파의 특성이다. 그런데 유독 한국의 극우파는 자기 민족을 비하하고 외세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하다. 게다가 자기 말에 동조하지 않으면 죄다 빨갱이에 좌파에 공산당으로 규정해버린다. 세상 천지를 붉은 색으로 칠해 놓고 말세 타령을 하니 이런 삽질이 따로 없다. 자기들은 빨갱이 세상에서 잘만 살면서도 뭔 엄살이 그렇게 심한지 모르겠다. 이런 저질 군상들이 이 참에 제 마각을 드러내기를 바란다.


3. 식민 지배를 축복하는 이들이나 개발독재를 찬양하는 이들이 싫은 가장 큰 이유는 그들에게서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강준만 선생의 표현)”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일제 부역이나 독재에 대한 아부를 통해 호사를 누렸으면서도 부끄러운 줄 모른다. 피땀 어린 부당한 고통과 희생 앞에서 불가피성을 역설하는 것을 넘어 아예 지난날을 합리화하고 확대 재생산하려고 안달이다.


4. 일본은 또 독도 가지고 시비다. 짜증나는 일이다. 그래도 일본 극우파들은 제 나라를 위해서 동분서주한다. 우리는 나라 팔아먹고, 인권 유린하고, 자식 군대 안 보내고, 집회에서 성조기를 흔들고, 세금 빼먹고, 땅 투기에 원정출산까지 서슴지 않는 이들이 애국한답시고 설친다. 비극이다.


5. 개교 100주년을 맞아 들뜬 고려대학교에 똥물을 퍼붓다니... 학교가 욕 무지하게 먹도록 애써주신 덕분에 개교 200주년도 거뜬할 것 같다. 하지만 그런 식의 도움은 다시는 필요 없다. ᅳ.ᅳ; 이런 액땜 두 번 했다가는 거덜나기 좋겠다.


아 지금은 前 고려대 명예교수다. 앞 전자가 이렇게 각별하게 느껴지기는 처음이다.^^; - [憂弱]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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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지간한 군자와 성인이 아니라고 한다면 개인적 좋고싫음의 상당수는 편견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인간관계에서 개인적 좋고싫음은 자연스러운 것이며 그 과정이 크게 합리적이지 않더라도 폭력적이지만 않는다면 존중받아야 한다. 어떤 사람에 대해 나쁜 감정을 품는 것은 자유지만 그것을 가지고 그 사람의 말과 글을 신뢰하지 않는다거나, 자신의 뜻대로 강요하는 행위는 폭력적이고, 구박받아 마땅하다. 이런 경우의 대표가 나만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 자신은 절대적으로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일 것이다.


최근에 뉴라이트(New Right) 운동을 표방하며 등장한 자유주의연대를 위시한 단체에게서 “나만 잘났다”의 혐의를 지울 수 없다. 사실 처음 자유주의연대가 등장했을 때 극우파들에게 신선한 자극제가 되어 제대로 된 보수세력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런데 이들이 하는 일이라고는 오로지 남의 탓이며 내 말이 옳다라는 독선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명색이 자유주의자라는 이들이 이 짓거리니 더욱 실망스럽다.


제 정신이 박힌 사람이라면 “나는 누구인가?”를 가장 중요한 물음으로 삼아야 한다. 그런데 뉴라이트들은 “너는 누구인가?”를 캐내는 데 날밤을 새고 있다. 너는 주사파고 빨갱이라며 손가락질하기 바쁘다. 자기 반성 없이 누군가를 비판하는 것은 얼마나 공허한가. 합리적 보수 세력을 꿈꾸는 이들이라면 먼저 극우파와 수구세력을 통박하는 것이 순서다. 국가주의적 폭력과 손잡는 사이비 자유주의자와 경제적 자유에만 편향된 자유주의자들을 극복하는 데서 제 존재 의의를 찾았어야 한다.


그런데 뉴라이트들은 진보좌파를 공격한답시고 노무현 정부에 화살을 쏘고 있다. 자기 반성 없이 남 손가락질하는 것도 우스운데 그것도 번지수를 한참 잘못 찾아간 셈이다. 뉴라이트와 노무현 정부의 사회경제정책이 얼마나 차이가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FTA를 통해 시장 개방을 추진하고, 노조 등에 욕 먹어가며 기업의 자유를 보장하는 데다 사회복지도 열악해서 부실 도시락 파문이나 일으키는 정부가 무슨 좌파라는 것인지 수긍하기 힘들다. 게다가 대한민국의 헌법이 규정한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 국가보안법 폐지를 하겠다는데 자유민주주의의 위협이 된다고 생각하니 황당할 따름이다.


앞서 말했듯이 자칭 자유주의자들은 자신을 먼저 돌아볼 필요가 있다. 극우파의 횡포에 침묵했거나 오히려 한술 더 떠서 거기에 기생하고 봉사했던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자유주의자는 사이비에 불과하다. 왕년의 주체사상 신봉자였던 이들이 전향해서 극우파를 지원사격하는 것도 자유주의와 거리가 먼 것은 피차 일반이다. 아니 오히려 극단을 넘나들며 헛소리를 반복하는 모습에서 연민이 느껴진다. 물론 사람은 누구나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고 주사파에서 반공투사로 바뀌는 것도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자신들의 고해성사를 빌미로 남의 양심고백을 얻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왕년에 요설을 휘둘러 대장질 하던 재미가 쏠쏠했는지는 몰라도 이제는 통하지 않는다.


사상의 자유시장을 옥죄는 국가보안법을 나 몰라라 하고서 “나와 정정당당하게 한 판 겨뤄보자”는 외침은 공허할 뿐이다. 진정한 자유주의자는 “전면적 자유주의자”라야 한다. 경제적 자유만을 절대시하는 것은 진리의 포트폴리오를 하겠다는 이의 자세가 아니다. 경제, 정치, 사회, 문화 모든 영역에서의 자유가 만개할 때 자유주의가 실현되는 것이다. 자유가 모든 영역에서 평등(!)하게 적용할 때 비로소 자유주의자로서의 보람을 느껴야 한다. 일부 사이비 자유주의자들은 제 입맛에 맞는 자들의 자유만 옹호하고, 합리적 토론을 가로막는 각종 폭력적 방식에 침묵, 방조하는 편식을 함으로써 스스로의 영혼을 야위게 하고 있다.


태도로서의 자유주의는 모든 ○○주의자의 상식이 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주의자라는 타이틀이 한국 사회에서 유효한 것은 전체주의와 싸우고, 이 땅의 숨막히는 보수성에 유연성을 불어넣고, 개인의 해방을 추구하는데 아직 할 일이 많다고 보기 때문이다. 뉴라이트가 공연히 연막작전이나 피우면서 한나라당 등의 세력을 돕는 판세가 되는 것을 경계해야한다. 조선일보에 실리는 진보적 색채의 글 상당수가 조선일보의 극우성을 감추는 분칠을 하는데 쓰이는 것처럼 말이다. 뉴라이트가 첫마음을 잃고 극우파와 짝짜꿍할 때 그네들이 그렇게 주창하는 자유시장의 법칙에 따라 퇴출되거나 한나라당에 인수, 합병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뉴라이트는 자신의 자유만큼 남의 자유가 소중하다는 것을 알고 함부로 강요하는 행위를 경계해야 한다. 힘있는 자의 자유에는 너그러우면서 힘없는 자의 자유에는 매서운 자유주의자는 볼썽사납다. 오류의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는 김정일 폭압정권을 누구보다 비판하는 분들인 만큼 자신들도 그 덫에 빠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니체는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자신이 괴물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했다. 싸우면서 닮는다고 하지만 공산당을 극복하겠다면서 파시스트의 방식을 답습해서는 희망이 없다. 자유주의자가 믿고 기댈 것은 남의 생각과 색깔을 따지기 전에 스스로를 회의하고 성찰하려는 자세, 사상의 자유시장에서 부당한 지원 없이 정정당당히 겨뤄보려는 자세다.


신자유주의 바람이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기 보다 자꾸만 팍팍하게 만든다면 진짜 자유주의자들이 앞장서서 비판해야 한다. 부당한 부자유와 불평등으로 인해 인간다운 삶이 위협받을 때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는 것도 진짜 자유주의자들이 포기할 수 없는 과제다. 이제 진보주의자들이 각종 개혁 의제를 독점하게 놔두지 말자. 앞으로 진보 세력에게 볼멘소리로 시비나 걸고 반동적 목소리에 동조하는 추한 모습도 삼가자. 우리가 몸둘 곳은 치열한 경쟁이 있는 자유시장이지, 안온한 자본과 기득권의 품속이 아닐 것이다. 자유시장에서 상도덕을 지키며 살다보면 끼니마다 고기반찬이 오르기 힘들지는 몰라도, 편식 없는 고른 영양섭취로 영혼이 살찔 수 있을 것이다.


자유주의자는 확신을 미감으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신뢰만은 포기하지 않는다. 이러한 낙관주의가 없으면 자유주의는 비루해진다. 남의 자유를 존중하고 그 자유가 잘 실현될 수 있도록 배려한다면, 굳이 서로를 철썩 같이 믿지 못해도 낙관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뉴라이트의 건투를 빈다. - [憂弱]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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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구닷컴이 블로그로 전환하면서 손님용 게시판이었던 舊 익구닷컴 자유게시판이 없어지게 되었다. 손님들의 글선물 중에 인상 깊었던 글과 나의 해명(?)과 선배님의 변호(?)를 올린다)

[경짱님아......] - C반04, 2004-04-15

여기 즐겨찾기 해놓구 자주 들어와서

많이 배우고, 많이 느낍니다.

저는 특별한 정당을 지지하거나 그렇진 않습니다.

정치에 관해서는 극히 중립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경짱님의 정치적 견해가 어떻든

개인적 홈페이지에 특정정당을 지지한다고

적어놓는 것은 이곳에 들어오는 사람에게 거부감을 주게 마련입니다.

물론 경짱님 개인의 정치적인 소견이 뚜렷하고, 미래의 자신을 그리면서 거기에

맞춰가려 한발 또 한발 앞으로 나아가며 노력하는 것 같아 저는 개인적으로 보기 좋습니다.

그러나 여기 들어오는 사람들이 다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죠

한나라당 지지자도 있을 것이고, 민주당, 노동당 지지자들도 있을 겁니다.

또 우리나라 정치판을 보고 질려서 심히 개탄하는 사람들도 있을거구요.

그런 사람들이 들어와서는 한 사람으로, 한 훌륭한 인격체로 경짱님을 보기 이전에

편견과 선입견의 색안경을 낄 것입니다.

물론 경짱님이 쓰신 글, 주옥같은 생각들도 그 안경에 가려져 곡해되고 비하 될 것입니다.

큰 정치인이 되려면 일단 여러 사람을 끌어안아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고,

포용하는 힘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열린우리당 지지자 최익구님이 아니라 멋진 포부를 가지고 꿈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 최익구를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내보여야 하지 않을까요?

저의 이런 짧은 생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단지 저는 사람들이 오해할까 조금 아쉬웠을 뿐입니다.

더 크고 깊은 사람으로 나라의 굳건한 재목이 되어주시길 바랍니다. 꼭 그리 되실 거라 믿습니다.



(이 글에 대한 익구의 답글이다. "새우범생"은 익구의 온라인 별칭이다)

[오해받는 두려움 달게 받기] - 새우범생, 2004-04-15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04학번으로 본인을 소개하셨으니 제가 후배님으로 부르겠습니다. 우선 글선물에 굶주린 이 누추한 집구석에 글을 남겨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사실 어느 한 정당을 지지하기로 결심하면서 저 또한 정파적 이해에 자유로울 수 없는 녀석이 되어 버렸지요. 내가 지지하는 곳에서 잘못을 저지르면 적당히 덮어주고 싶고, 저 쪽이 잘못하면 버럭 화를 내며 확대 재생산하는 것은... 분명 잘하는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매도할 부당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적당히 방어할 권리가 있으니까요.^^


편견과 선입견의 색안경을 염려해주셨는데... 사실 “나는 우리당을 지지한다”고 외치는 그 순간부터 어느 정도 감수하겠다고 다짐한 일이지요. 친구들이나 혹은 주위 사람들이 저란 녀석을 보는 여러 가지 표지(標識) 중에서 “아 저 사람은 우리당 지지한데”라는 강력한 낙인이 찍히는 것을 예상치 못한 것도 아니고요.


이런 안경 혹은 낙인에 가려 곡해되었다고, 비하되었다고, 오해받는다고 섭섭해할 생각은 없습니다. 저는 단지 제가 비교적 옳다고 믿는 것, 제가 추구하는 가치를 비교적 잘 발현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선호를 밝힌 것뿐이고, 타인의 입장에서 보면 저는 편파적으로 세상을 재단하는 오류투성이에 불과할 수도 있는 것이니까요. 자신의 견해를 밝혀서 어떤 불이익을 받는다는 것은 늘 두려운 일이지만,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는 자유주의자로서 저는 이 두려움을 달게 받아야죠 뭘...^^;


물론 저도 단순히 우리당 지지자로서의 정체성으로 타인에게 다가갈 생각은 없습니다. 그건 제 스스로에 대한 나태함이니까요. 저란 인간의 이런저런 모습들 중의 하나로서 우리당 지지자가 있어야지, 우리당 지지자라는 표식이 저를 대표하는 것은 저도 원하지 않는 일이고요. 다만 많은 분들이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제가 저란 인간의 다른 가치를 발굴하지 못한 것이니 다시 한 번 반성해야겠지만 말입니다. (총선이 끝나면 일부 친구들이 평하는 정치색 물씬 풍기는 이 집구석도 아마 상당부분 탈색될 것 같네요^^;)


글 중에 “큰 정치인이 되려면 일단 여러 사람을 끌어안아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고...”라는 구절이 있는데 사실 저와는 맞지 않은 과분한 말씀이십니다. 문득 회남자의 海不讓水라는 구절이 생각났습니다. “바다는 마음이 넓어 온갖 물을 사양하지 않는다”는 이 구절을 처음 접하고 가슴을 때렸습니다. 그 이유는 제가 가진 이 무기력한 자유주의 가지고는 도랑물에서 평생 만족해야겠구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죠.^^;


저는 제가 누구보다도 열린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언제나 제 편협함과 소심함, 그리고 귀차니즘은 이런 저의 다짐을 늘 흔듭니다. 큰산이 한줌의 흙을 마다하지 않고, 바다가 시냇물을 가리지 않는다지만 저란 인간은 결벽증을 핑계로 남을 무시하고, 혼자 깨끗한 척 깔끔을 떨지 않았나 늘 돌아봐야겠습니다.


경영학도로서 손해보는 장사를 싫어하는 만큼, 제가 남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을 정도의 역량을 갖추기 위해 노력해야겠지요. 아마 배우는 학생 입장에서는 이것이 가장 시급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아마 제가 좋아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 제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배우고 생각해야 하는데 이 게으른 몸뚱이 때문에 근심만 한가득입니다.^^;


잡소리가 길었습니다. 이 정도면 주신 글선물에 대한 고마움을 다한 것인지 걱정스럽습니다. 아무쪼록 중간고사가 코앞인데 후배님의 시험공부에 진전 있으시고, 좋은 성과 있으시길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 [憂弱]


(글 중에 ‘노동당’은 ‘민주노동당’이라고 해주세요. 민노당 지지자분들이 섭섭해하십니다.^^ 열린우리당이 ‘열우당’으로 불릴 때 늘 조금씩 섭섭해봤으니 남들이 섭섭해하는 것을 보고 싶지는 않네요. 잔소리 미안합니다^^;)



(어느 선배님께서 다음과 같은 답글을 달아주셨다)

[새우범생을 변호하며...] - mannerist, 2004-04-16

안녕하세요. C반04(이 글에서 님을 이렇게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괜찮을지요)님.

님의 글을 보고 생각나는 것 몇 자 적습니다.

...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말은, 헌법 조항으로만 존재하는 레토릭만은 아닐것입니다. 대한민국이라는 민주국가를 지탱하는 가장 큰 기둥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겠죠. 그리고 그 주권을,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통해, 또한 이런저런 경로를 통해 자신의 의사를 피력함으로서, 대한민국의 구성원들은 행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넓은 의미에서, 저 행위를 정치 과정의 범주에 넣는 것이, 그리 부자연스러워보이진 않습니다. 대한민국의 주권자된 권리로 정치 과정에 참여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며, 또한 이는 민주공화국 시민으로서의 의무이기도 합니다. 이를 부정하시진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C반04님께서 생각하시는 문제는 이런 것이 아닐까 합니다. 정치 과정의 참여의 중요성과 필요성은 부정하지 않으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정치 참여의 일부로 정당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고, 특히나 '공적'영역에 있는 사람이 적극적으로, 대외적으로 특정 정당을 지지하는 것은, 그 정치적 지향점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에게 거부감을 줄 수 있는데 문제가 있는 게 아니냐고 말이죠. 줄여 말하면, 민주공화국 시민으로서의 정치행위 참여와, 특정 정당의 공개지지 사이에 벌어져 있을지도 모르는 거리를 불편해하시는 것 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해 보는 건 어떨까요? 대한민국의 구성원이 주권을 행사하는 여러가지 방법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선거권과 피선거권입니다. 과연 이것이 특정 정당에 대한 지지와 과연 떨어져 생각할 수 있는 것일까요? 이렇게 반문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선거권과 피선거권 이외에도 정치과정에 참여하는 방법은 많이 있다고 말이죠. 하지만 저는 '가장 중요한'방법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곳에 한정하자면, 저 물음에 대한 대답은 "둘은 밀접한 관련이 있다"가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좀 더 적극적으로 자신의 권리를 누리기 위해서, 정치과정에 참여하기 위해서 자신의 신념에 맞는 정당에 대한 지지를 피력하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행위가 아닐지요.


문제는 특정 정당에 대한 지지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과정이 아닐까요. 얼마나 바른 기준을 가지고 해당 정당을 지지하느냐라는 문제 말입니다. 딴지일보 총수 김어준씨의 말을 조금 빌리자면 "정치는 결국 선택의 문제다. 따라서, 어느 쪽에 편파적인가가 문제가 아니라, 그 편파성에 도달하는 과정이 문제다. 이 과정이 합리적이라면 편파성 그 자체는 문제될 게 없다"정도가 되겠지요. 특정 정당에 대한 편파성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편파성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이 문제란 것입니다. 간단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한달 수입 백만원도 안되는 데 상당한 불만을 품고 있는 비정규직 종사자가, 기업에 대한 노동 규제 약화와 고용의 유연성을 강조하는 정당을 지지하는 것은 그 자신의 위치와 신념을 완전히 배반하는 것입니다. 혹은 자신이 특정 지역 출신이기 때문에 어느 정당을 지지한다면, 이 역시 합리적인 절차로 지지 정당을 선택한 것은 아닐 겁니다. 바른 기준으로, 자신의 신념에 맞는 정당을 지지하는 것은 정치 참여라는 대의에 있어서, 나쁘게만 볼 일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문제는 이런 것이겠지요. 만약 익구군이 자신의 위치를 악용하여 경영대 학생들에게 공적인 장소에서 강하게 특정 정당에 대한 지지를 강요하거나(어디까지나 가정입니다)해당 정당에 대해 이로운 일을 하기 위해 자신의 할 일을 접어놓거나 할 때, 즉 자연인 최익구가 아니라 경영대 학생회장 최익구로서 특정 정당에 이로운 행위를 할 때 말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강하게 비판해야합니다. 그렇지만, 자연인, 주권을 가진 궁극적 소수로서의 최익구군이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이성적인 판단을 거쳐 나온 결론으로 피력하는 것은 비난받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합니다. 문제는 편파성에 이르는 과정입니다. 그 과정에 지역감정/사적감정 등이 개입하였다면 그 부분의 논리적 모순을 비난해야합니다. 그렇지만 저 과정이 합리적이었다면, 그 사람의 일상적 정치 행위에 대해 왈가왈부해선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노파심에 조금 더 덧붙입니다. 특정 정당의 지지자라고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것을 걱정하셨는데요. 저는 어느 사람이 특정 정당을 지지한다는 것을 표방한다고 그러한 편견을 가지는 사람들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누누히 말씀드린것처럼, 편파성 자체가 아니라 그 편파성에 도달하는 과정과, 그 편파성이 일에, 대인 관계에 어떻게 작용하느냐가 문제입니다. 비판한다면 그 과정과, 편파성으로 인한 잘못을 지적하는게 옳지 편파성 자체를 문제삼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저 사람은 특정 정당의 지지자니까 이러이러할꺼야'라는 편견을 가지고 바라보는 것과, 개심한 전과자에 대한 곱지 못한 시선, 장애자에 대한 비장애자들의 편견과의 거리는 그다지 멀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조금 힘 주어 말합니다. 그 편견을 떨쳐내시라고 말입니다.


앞으로도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거리낌 없이, 당당히 드러내시는 자세, C반04님 계속 지켜나가시길 빌어마지않습니다.

정릉에서 mannerist...

넋두리) 노동당이 아니라 민.주.노.동.당. 입니다. =)
Posted by 익구
:
열린우리당이 한나라당과의 야합을 통해 4대 개혁입법 처리를 물거품으로 만들려고 하고 있다. 그렇게 믿었는데, 얼마나 울었는데, 어떻게 사랑했는데, 열린우리당 당신들이 어떻게 이럴 수 있나? 여기저기 울분을 토하고 분노를 표하는 지지자들이 보이지 않는가, 들리지 않는가? 안으로는 우리당의 모자란 점을 다독거려 주고, 밖으로는 반대자들의 손가락질 받느라 몸도 마음도 지친 우리당 지지자들에게 기어코 피와 땀과 눈물을 쥐어 짜낼 참인가?


우리당에 한 표를 얹기 위해서 고군분투했던 많은 자유주의세력, 개혁세력, 온건보수세력들은 고작 한나라당에 굴복하는 꼴을 보고 싶었던 것이 아니다. 우리당을 과반수 1당으로 만들어준 것은 이 땅에 극우파를 썩혀 거름으로 쓰고 제대로 된 자유를 심어 개혁을 꽃피우라는 뜻이다. 이를 위해 우리가 얼마나 굽실거리고 생채기 나야했단 말인가. 당신들이 떵떵거리고 거들먹거릴 수 있는 것은 다 지지자들이 허리 아프게 굽히고, 손바닥 열나게 비비고, 발바닥 저리게 뛰어다닌 덕분임을 잊지 마라.


탄핵 사태 때문에 엉겁결에 뽑힌 인간들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자유주의 개혁세력에 쓸만한 인재가 아무리 없다고 해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자유주의 개혁세력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국가보안법 폐지조차 이렇게 미적거릴지 몰랐다. 수구세력과 극우파들이 저렇게 난리를 치는 것은 국가보안법이 저들을 지켜주는 심리적 마지노선이기 때문이다. 저들의 방벽이 아무리 튼튼하더라도 인권의 화살을 날리고, 자유의 창으로 부수고 함락해야 한다.


우리가 얼마나 힘겹게 이겼나? 얼마 만에 찾아온 기회이고, 이번을 놓치면 다시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가? 믿음도 산산이 부서질 때가 오고, 눈물도 마를 때가 오며, 사랑도 식을 때가 오게 마련이다. 당신들이 어려울 때 함께 눈물 흘리고 곁에서 힘이 되었던 지지자들이 등을 돌리고 있다. 마음이 떠나고 있다. 욕지기가 나오고 있다. 믿음의 자리에 실망이, 슬픔보다는 성냄이, 사랑 대신 증오가 싹 트고 있다.


한나라당과 치열하게 토론하라. 하지만 끝내 의견을 좁히지 못할 때는 당당히 표결 처리하라. 파시스트의 눈치보다는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지지자들의 눈치를 보라. 수구세력을 걱정하기보다는 실적이 엉망이라며 아우성인 투자자들을 걱정해라. 극우파와 어깨동무하기보다는 자유에 목마른 국민의 손을 잡아줘라. 우리당에 꿈을 투자한 많은 투자자들에게 수익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우리가 앞장서 당신들을 시장에서 퇴출시킬 것이다. 저들이 결사적으로 나온다면 당신들도 모든 것을 걸고 맞서라. 이제 당신들이 코피 터지게 싸울 때다. - [憂弱]
Posted by 익구
:
국가보안법 폐지안 법사위 상정조차 결사적으로 저지하던 한나라당이 이번에는 열린우리당 이철우 의원이 북한 노동당에 가입해 간첩으로 활동했다며 색깔론을 들고 나왔다. 한나라당은 저희들 스스로가 국가보안법이 왜 폐지되어야 하는지를 증명하고 있다. 사상의 자유와 인권의 엄숙함 앞에 타협이란 없다. 열린우리당은 국가보안법 폐지를 비롯한 개혁입법을 흔들림 없이 추진해나가야 한다.

익구는 이번 사건을 길이 기억하기 위한 기념시를 발표했다. 패러디 대상이 된 시인은 민족문학작가회의에서 발표한 친일문인명단에 들어간 사람 중에서 골라 노천명의 [사슴],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가 당첨됐다. 야만스러운 국가보안법과 그 법을 추종하는 무리들에게 이 시를 바친다. 시제가 좋지 않은 관계로 문학성은 그리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다.^^; - [憂弱]


[늑대]

상판때기가 두꺼워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불안한 편 말이 많구나.
국(國)이 부끄러운 너는
무척 무참한 족속이었나 보다.

핏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잊었던 고문을 생각해 내고는
주체할 수 없는 향수에
흐린 동태눈깔을 하고
바로 옆 빨갱이를 째려본다.



[국보법 옆에서]

한 조각의 국보법을 지키기 위해
박정희부터 한나라당은
그렇게 가뒀나 보다.

한 조각의 국보법을 지키기 위해
사상의 자유는 철창 속에서
또 그렇게 갇혔나 보다.

아프고 목마름에 가슴 후비던
생생한 국가폭력의 뒤안길에서
아직도 살아서 헌법 위에 선
승냥이 똥같이 생긴 법이여.

빠알간 네 조문이 적용되려고
대낮엔 인권이 저리 내동댕이쳐지고
내게는 눈물이 마르지 않았나 보다.
Posted by 익구
:

박정희의 값비싼 교훈

사회 2004. 12. 1. 03:15 |
박정희 신드롬에 대한 상반된 평가

  우리 근현대사의 인물 중에서 박정희만큼 평가가 극명하게 갈리는 경우도 드물다. 한 쪽에서는 근대화의 기수, 고독한 혁명가, 청렴하고 강력한 지도자라는 찬사를 들으며 단군 이래 이 땅에서 가난을 몰아낸 지도자라며 추켜세움을 받는다. 그러나 다른 한 쪽에서는 만주군 장교 출신의 민족반역자이며, 민주주의를 파괴한 군사독재자, 인권유린의 원흉이라는 혹평이 내려진다.

  박정희는 역대 대통령 평가에서 1위를 놓치지 않고 있으며, 복제인간으로 만들고 싶은 인물로 거론될 정도로 여전히 국민들의 뇌리에 깊이 박혀있다. 특히 IMF 사태 이후에 일부 언론사들의 부추김에 힘입어 박정희 신드롬이 확산되기도 했었다. 요즘 경기침체로 다시 박정희 향수가 일어날 조짐이 보이기는 하지만 5년 넘게 끌어온 박정희 기념관 사업이 사실상 무산되었다. 이를 볼 때 국민들이 박정희를 경제적 치적 등을 높게 보는 듯 하면서도 박정희에 대한 총체적 평가가 호의 일변도는 아님을 알 수 있다. 인간 박정희와 그에 대한 공과를 논해보고 오늘날의 시사점을 살펴보겠다.


기회주의자 박정희

  박정희는 초등학교 교원을 하다가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해 황군 장교가 되었고, 만주군의 긴칼을 차다가 해방을 맞이한 바람에 슬그머니 광복군에 잠시 가담하기도 했다. 또한 한국 군대 내 남로당의 조직책으로 활약하다 여순 사건을 계기로 전향하여 군부 안의 좌익을 색출하는 숙군 수사에 적극 협력하여 본인은 처벌은 면하게 된다. 종국에는 반공투사가 되어 군국주의에 기반한 병영국가를 만든 독재자가 되었다. 강준만 전북대 교수는 박정희의 제3공화국을 기회주의 공화국으로 표현한다. 아마도 이러한 평가는 박정희 개인의 이력에서 드러나는 기회주의적 처신에 크게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친일파, 좌익활동, 반공투사로 이어지는 박정희의 숨가쁜 변신은 우리 현대사의 격변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박정희는 절대 대세를 놓치지 않는 사람이다. 그는 일생을 통해 단 한 번도 ‘정의로운 소수’에 참여하거나 동조한 적이 없었다. 사회적 약자의 편을 든 적도 없다. 대세에 편승하더라도 그냥 끼어드는 정도가 아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 핵심부에 들어갔다.

- 최상천, [알몸 박정희](사람나라, 2001), 157쪽

  박정희의 기회주의적 처신의 끝은 5.16 군사쿠데타로 정점에 다다른다. [실록 군인 박정희]에서 그려진 5.16 쿠데타 이모저모를 살펴보면 고작 3400여명의 군인을 동원된 명백한 불법 쿠데타였음에도 불구하고 민주당 정권 수뇌부나 군 수뇌부들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것 또한 기회주의의 발로였다. 결국 멋들어진 혁명 공약을 내세운 박정희 세력들은 강한 권력에 취해 부패하기 시작했고, 정경유착과 인권유린이 도처에서 자행되었다.


박정희의 통치철학

  박정희는 [우리 민족의 나갈 길]이라는 저서에서 5.16 쿠데타를 찬양하면서 서구적인 민주주의가 아니라 우리의 사회적, 정치적 현실에 맞는 민주주의를 해나가야 할 것을 주장한다. 이러한 민주주의는 행정적 민주주의(administrative democracy)로서 민주주의를 정치적으로 달성할 것이 아니라 행정적으로 구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행정적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의 가장 핵심인 ‘국민에 의한 통치’에 대한 유보를 정당화하는 논리를 지니고 있다. 결국 박정권은 이 개념을 통해 자신들의 군정을 민주주의의 일종으로 포장하려 했다.

- 전재호, [반동적 근대주의자 박정희](책세상, 2000), 48쪽

  주권자인 국민을 배제하고 행정적 방법을 사용하겠다는 것이 행정적 민주주의의 핵심이다. 박정희 정권은 시종일관 한국적 특색을 담은 민주주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행정적 민주주의를 비롯해 민족적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통해 한국적인 체질과 이념에 맞는 이데올로기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박정희는 자신들은 민족적 자주성과 주체성에 기반한 민주주의 사상을 지녔다고 주장하며 야당의 민주주의를 사대주의적이며 서구 민주주의에 경도된 것이라며 비판했다. 하지만 한일회담이 졸속으로 처리되면서 민족적이라는 수사는 공허한 것으로 전락한다. 이처럼 박정희는 경제 발전을 위한 행정의 능률성과 원만한 정치적 협조를 강조하면서 이를 발판으로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등을 추진하게 된다.

  행정적 민주주의를 위시한 박정희가 주창했던 통치철학들은 실상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을 무시한 처사였다. 국민 개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철저히 제한하면서도 주권자의 뜻에 따르는 민주주의를 운운한 것 자체가 모순이었다. 권력자가 자신이 국익이라고 믿는 것을 실현하기 위해 행정적 수단을 총동원하고 국민들의 자유로운 토론과 비판의 기회를 억압하는 것은 결코 민주주의가 아니라 전체주의에 불과하다. 박정희의 행정적 민주주의는 파시스트의 미사여구에 지나지 않는다.


박정희의 경제 발전 공로 분석

  박정희식 한국적 민주주의는 가난에 허덕이는 국민들에게 민주주의는 무의미하며, 일단 경제 발전을 해야한다는 논리이다. 많은 이들의 박정희의 무수한 과오를 부정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경제 발전 공로는 인정해야한다고 말한다. 대다수 국민들이 절대빈곤을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박정희가 빈곤 퇴치에 기여한 점을 부인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아무리 휘황찬란한 경제 발전과 근대화라고 해도 국민 개개인의 자유의지가 훼손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과오다. 장면 정부가 혼란을 수습하고 경제 발전에 박차를 가했을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장면 내각이 들어선 지 18일 만에 쿠데타 모의를 한 육사 8기생들의 기록으로 보아 박정희 일파의 쿠데타 이유가 장면 정부의 무능과 부패였는지도 의심스럽다. 5.16 쿠데타는 합법적인 정부를 통한 산업 근대화와 경제 발전의 가능성을 송두리째 앗아갔다. 이런 가능성 박탈에 대한 비판은 경제 발전의 공로가 아무리 커도 가릴 수 없는 허물임에 분명하다.

  물론 박정희가 당대의 시급한 과제였던 빈곤 퇴치에 기여했음을 인정한다. 잘 살고자 하는 국민들의 의지를 결집해서 대다수 국민들에게 믿음과 의욕을 가질 수 있도록 한 공로도 평가할만하다. 이렇게 군사 쿠데타로 인한 정통성 부재를 경제 발전으로 만회하려는 선의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더라도 박정희의 업적은 상당 부분 세계 최악의 노동조건에 시달린 노동자들의 희생에 밑바탕을 두고 있다. 또한 박정희가 특출 난 능력이 있어서 국민들의 열망을 잘 조직해냈다고 하는 의견은 동감하기 어렵다. 그것은 결과지상주의라는 혐의를 벗어나기 힘들다.

  다만 박정희를 위한 변명을 할 점이 있다면 그의 성장전략이 빈부격차를 심화시켰다는 선성장 후분배 정책에 대한 비판이다. 미국이나 영국 같은 자본주의 국가들도 공업화 초기에는 분배의 편중이 심하여 노동자, 농민이 간신히 생계를 꾸려나갔고, 공산주의 국가였던 소련과 중국 또한 급속한 공업화를 추진하며 인민들의 소비 억제로 인해 굶주려야했다. 이 당시 대다수 국가들이 추진한 경제개발 전략의 폐해가 대략 비슷했던 것을 굳이 박정희 정권에게만 높은 잣대를 들이댈 필요는 없다.

  개발독재라는 미명 하에 이뤄진 박정희의 철권통치 없이도 민주정부를 통해 경제 발전을 제대로 수행해 나갈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확답을 내리기 힘들다. 혹자들은 박정희가 없었다면 국가역량을 경제 발전에 집중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그를 옹호한다. 물론 역사적으로 볼 때 사회발전이 모든 측면에서 골고루 이뤄지기 힘들고, 이상적 방안대로 실현되는 것도 아니다. 불완전한 인간이 하는 일에는 실수도 있고 다툼도 있게 마련이다. 60년대 당시 성숙한 민주의식을 가진 시민들과 집행력을 갖춘 정부관료들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합법적 민주정부가 통치한 기간은 너무 짧았기 때문에 섣불리 평가를 내리기 힘들다. 고작 1년 남짓의 혼란스러운 시절을 겪었다고 민주주의 싹을 잘라버린 것은 박정희와 쿠데타 세력이 자랑하는 경제 발전의 영원한 짐이 될 것이다.


박정희의 명백한 과오

  박정희의 경제 발전 업적은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명확한 평가를 내리기 힘든 사안들이 많다. 하지만 박정희의 과오들은 비교적 명확하게 드러난다.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박정희의 유토피아는 인간성 개조를 통한 병영사회의 건설이었다.

그 사회는 무엇보다도 병영 사회였다. 지금까지도 그 흔적을 남기고 있는 향토예비군, 학도호국단, 민방위대, 학생 교련, 반상회라는 것을 통해 자신의 신민 전체를 군대식으로 편제한 것이 박정희였고, 긴급조치, 물고문, 전기고문, 야간통금, 장발단속, 치마단속을 통해 그 신민 전체를 ‘표준적 인간’으로 만든 것이 박정희였다. 어린아이들에게 ‘국민교육헌장’과 ‘국기에 대한 맹세’를 매일 외게 한 것도 박정희였다. 그 시절 애국가는 극장에서고 학교에서고 거리에서고 하루도 쉬임 없이 흘러나왔고, 신민들은 멈춰서고 기립하고 입다문 채 하루에도 몇 차례씩 경건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 고종석, [자유의 무늬](개마고원, 2002), 249쪽

  일사불란한 병영사회 건설을 위해 갖가지 인권유린이 다반사로 벌어졌다. 자신에 반대하고 민주화를 요구한 많은 이들을 혹독하게 처벌한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며 문민정부 이후 당시 민주화 인사들이 국회를 비롯한 사회 각 분야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면서 복권이 되고 있는 실정이다. 병영사회를 표방한 전체주의가 국민들을 세뇌하면서 국민들의 윤리의식 수준이 상당히 저하되었다. 군부독재가 장기화되면서 기업들은 상도덕 준수보다는 정권에의 밀착이 지상과제가 되었고, 일반 국민 사이에서도 금전만능주의가 심화되었다.

  일각에서는 인권탄압이 경제발전을 위한 불가피한 것이었다고 항변하기도 한다. 이익집단 간의 다툼이 되기 쉬운 민주주의 제도의 맹점을 지적하며 강력한 사회통합이 경제발전을 위해 필요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인권과 경제발전이 높은 상관관계가 있는지는 아직 규명된 바가 없다.

그런데 아직 개발독재로 인해 탄압받은 사람들이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살아 있는데 그 독재자를 예찬하자고? 그건 인간의 길이 아니다. 일부 인간들이 부당하게 죽음을 당하고 고통받았다 해도 전체의 국부가 증대되었으면 그건 좋은 일이다고 말하는 건 극단적인 파시스트도 감히 공개적으론 하기를 꺼리는 말임을 알아야 한다. 그건 집에 들어가 이불 속에서 혼자 키득거리며 내뱉을 말이다. 그게 바로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아니겠는가.

- 강준만, [인물과 사상] 2권(개마고원, 1997), 35, 36쪽

  오늘날 우리가 이만큼의 의회 민주주의를 비롯한 민주적 생활양식을 향유하고 있는 것은 군부독재에 저항한 민주인사들의 노고 덕분이다. 박정희 정권의 경제발전을 아무리 긍정적으로 평가한다고 하더라도 개인의 자유를 신장하기 위해 투쟁한 이들에 대한 평가도 이뤄져야 한다. 위의 글의 지적처럼 유신체제를 거치면서 부당하게 고통받은 사람들이 엄연히 남아있는데도 경제발전의 공로만을 찬양하는 것은 균형감각을 상실한 것이다.


박정희의 값비싼 교훈
  
  지금까지 살펴본 박정희에 대한 평가에서 경제발전 공로에는 상대적으로 박한 점수를 주고, 과오는 큰 것으로 본 것은 개인적인 편견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더 이상 이 땅에 박정희 등장할 수 없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민주주의를 훼손하고 인권을 유린하며, 자유를 억압하면서 경제발전에 올인하는 것에 국민 대다수는 동의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적잖은 국민들이 생존의 문제를 해결해보고자 박정희의 개발독재를 지지했더라고 하더라도 이제는 시대적 환경이 그 때와는 판이하다.

  경제침체를 빌미로 박정희 향수가 조금 피어나는 것까지는 너그러이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박정희 추종자들이 과거 추억을 넘어 과거의 부활을 노리는 것에는 단호히 반대할 것이다. 카리스마적 지도자가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말을 듣기보다는 서로 논쟁하고 협력하려는 개인 자유의지의 총합이 사회를 이끌어나가는 원동력이 되어야 한다. 사회 제반시스템을 정비해나가고 세계화 시대의 무한경쟁의 파고를 넘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하거나, 우리 손으로 뽑은 대표자들에게 맡길 것이다.

  결국 박정희의 가장 큰 업적은 역설적으로 이 땅에 박정희 같은 파시스트들의 등장을 다시는 용납하지 않겠다는 값비싼 교훈을 남겼다는 점이다. 아무쪼록 현재의 경제침체를 보란 듯이 극복해서 박정희의 망령을 잠재우는데 각 경제주체들의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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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 선수 당했다!

사회 2004. 11. 22. 02:18 |
앗 이럴수가... 선수를 당하고 말았다. 新우파운동(NEW RIGHT) 운동이라는 알 수 없는 흐름이 조직을 하나 만들었다고 한다. 인터넷 신문에서 대략적으로 확인한 것에 불과해서 이 조직의 내실은 전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조직명 만큼은 익구의 뒷통수를 후려치기 충분했다. 이름하여 “자유주의연대”... 이 명칭은 익구가 몇 년 전부터 맛깔스럽다고 평가하던 것이다(나중에 써먹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는...^^;). 그런데 이 명칭이 정체불명의 단체에서 사용하기 시작할 모양이다. 연대하는 자유주의자는 아름답다. 과연 이 단체가 이 아름다움을 구현해 줄지는 미지수다. 창립선언문(첨부자료 참조)을 보아도 무언가 알맹이 없이 장황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창립선언문 내용을 살펴보면 우리네 어두운 근현대사를 좀 규명하겠다는 것이 왜 자학사관인지 이해하기 힘들며, 노무현 정부가 수구좌파라는 인식에도 동감하기 힘들다. 노무현 정부는 이미 자유주의연대가 내세우는 강령대로 FTA를 통한 개방형 통상국가를 추구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청빈이 아닌 청부(淸富)를 권장하는 것은 좋은 뜻이나 탁부(濁富)에 대한 비판이 잘 보이지 않는다. 또한 빈부격차의 해소가 아니라 빈곤의 해소를 추구하자고 하는데 작은 정부랍시고 복지 확충에는 부정적인 듯 보여 어떻게 해결하자는 것인지 알쏭달쏭하기만 하다. 게다가 북한 인권개선 및 민주화를 들먹이고 있는데 정작 대한민국 국민들의 인권을 심각히 침해하는 국가보안법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모순을 보여주기까지 한다(물론 아직 잘 정립되지 않은 단체이니 이건 어디까지나 애정 어린 의문이다).


이런 우려에도 불구하고 자유주의연대가 자기가 내뱉은 말들에 책임을 질 수 있는 단체로 잘 굴러가기를 바란다. 수구기득권 세력과의 분명한 차별성으로 건전한 보수의 위상을 확립할 수 있다면 선수 당한 것에 대한 아쉬움도 많이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보수의 탈을 쓰고서 극우파들과 히죽거릴 때 누추한 말로를 면치 못할 것이다. 자유당, 자유총연맹, 자유민주연합 등 자유를 들먹거렸던 많은 단체들이 오히려 자유를 억압한 사례들을 무수히 보아왔다. 부디 자유주의연대는 가진 자의 자유가 아니라 모든 이의 자유를 추구해서, 자유를 참칭했던 사이비들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 바란다. 여하간 그래도 배 아픈 것은 어쩔 수 없다. ᅮ.ᅮ - [憂弱]


<첨부자료>
[자유주의연대 창립선언문] - 업코리아 2004년 11월 20일

우리의 사랑하는 조국, 대한민국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져 있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이념적 정당성과 대한민국 건국의 역사적 정통성이 집권세력에 의해 의문시되면서 국가정체성이 훼손되고 있다. 구체적 대안이 결여된 섣부른 자주외교는 한미동맹의 표류와 대북 안보불감증의 확산을 초래하였다. 경제는 뚜렷한 정책적 방향성의 결핍으로 활력을 잃고 중산층과 서민의 삶을 옥죄고 있다. 이런 가운데 이념, 세대, 지역간 갈등이 심화되고 脫대한민국의 흐름이 확산되면서 공동체 해체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가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위기의 주범이 세계의 흐름을 도외시한 채 낡은 이념과 대중선동형 포퓰리즘의 포로가 되어 권력투쟁에 몰두하고 있는 후진적인 정치라고 생각한다. 21세기는 세계화․정보화․자유화의 시대다. 대한민국은 이 물결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여 선진국에 진입해야 한다. 한 세기 전 우리 선조들이 근대화의 물결에 적응하지 못해 망국의 수난을 당했던 오류를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지금 이 나라는 그 반대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국민적 예지를 모아 선진국 건설에 일로매진해야 할 이 무한경쟁의 시대에 노무현 정권은 자학사관을 퍼뜨리며 지배세력 교체와 기존질서 해체를 위한 '과거와의 전쟁'에 자신의 명운을 걸고 있다. 한심한 것은 노무현 정권만이 아니다. 두 차례의 대선 패배로 좌파 포퓰리즘 세력에게 나라운영의 권리를 넘겨 준 한나라당은 21세기 미래 대안세력으로서의 환골탈태를 등한시한 채 기득권유지에 전전긍긍하는 기회주의적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제 이러한 수구좌파와 수구우파가 주도하는 정치는 종말을 고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20세기 수구연합’의 낡은 이념을 대체하여 대한민국의 올바른 발전방향을 제시할 21세기 이념과 이에 기초한 혁신 청사진이 마련되어야 한다. 오늘 우리는 그러한 역사적 소명에 부응하기 위해'자유주의연대'를 출범시킨다. 21세기의 시대정신은 산업화세력의 권위주의도, 일부 민주화세력의 민중주의도 아니다. 세계화․정보화․자유화를 온전하게 실현할 한국적 현실에 맞는 21세기형 자유주의다. 우리가 추구할 한국사회의 자유주의 개혁방향은 다음과 같다.


1. 과거청산보다 미래건설에 초점을 맞춘 개혁을 추구한다.
2. 국가주도형 방식에서 시장주도형 방식(작은 정부-큰 시장)으로의 경제시스템 전환을 통해 2만 달러 시대를 개척한다.
3. 자유무역협정(FTA)의 능동적 추진을 통해 '열린 통상대국'을 건설한다.
4. 모든 특권을 철폐하고 만인에게 기회의 균등을 보장하되 결과에 대해서는 승복하는 합리적 사회문화를 창출한다. 청부(淸富)를 권장하며 빈부격차의 해소가 아니라 빈곤의 해소를 추구한다.
5. 법치주의의 확고한 기초 위에서 다원주의에 기초한 관용의 정치문화를 실현하고 사회구성원의 정신적 성숙에 기초해 사회적 공동선을 찾아나가는 성찰적 민주주의를 개화시킨다.
6. 학생에게 학교선택권을, 학교에게 학생선발권을 부여하는 교육혁신을 추구한다.
7. 대북정책의 최우선과제로 북한 대량살상무기 문제의 근원적 해결을 통한 전쟁 가능성 제거 및 공고한 평화체제 구축을 추구한다.
8. 한반도 전역의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북한 인권개선 및 민주화를 추구한다.
9. 기존의 한미동맹을 21세기 상황에 걸맞게 발전시키며 주변국과의 우호관계를 강화한다.
10. 문화, 학술 등 연성권력(soft power)을 신장시키며 세계 민주화에 기여한다.


대한민국은 지난 반세기 동안 세계가 놀라는 성과를 이루었다. 공산주의의 위협이라는 백척간두의 위기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지켜냈으며, 전쟁의 폐허 위에서 '한강의 기적'을 이룩하였다. 민주화도 매우 빠른 속도로 이루어냈다.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경제와 정치, 문화 모든 면에서 선진국의 대열에 진입해야 하며 자유통일을 이루어야 한다.'자유주의연대'는 이러한 역사적 과제 수행에 복무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우리 자신이 몸담았던 '386'의 제한적, 폐쇄적 경험을 뛰어넘어 열린 마음으로 세계와 대화하면서 대한민국의 새로운 길을 모색해 나갈 것이다. 특히 80년대의 감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386문화를 업그레이드 시키는데 진력할 것이다. 이를 통해 21세기 대한민국을 이끌 새로운 주체세력의 형성에 기여할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한없는 행복이자 무궁한 영광이다.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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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재판소가 신행정수도특별법에 대해 위헌결정을 내렸다. 헌재의 결정 요지를 보면 “서울이 수도라는 명문화된 헌법 규정은 없지만, 조선시대 한양을 도읍으로 결정한 이후 건국 이후에도 모든 국민이 수도라고 의심의 여지 없이 확신해온 것으로 관습헌법으로 볼 수 있다”며 “우리나라의 수도가 서울이라는 점에 대한 관습헌법을 폐지하기 위해서는 헌법이 정한 절차에 따른 헌법개정이 이뤄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관습헌법이라는 낯선 용어도 문제지만, 설령 그 존재를 인정할 경우에도 성문법 국가에서 그 효력을 성문헌법과 동일하게 볼 수 있는 가에 대한 기본적인 문제의식은 지울 수 없다. 국회의 입법행위와 대통령의 정책 추진에 대해 관습 헌법으로 제동은 건 것을 삼권분립의 원칙을 넘어서는 오바질이다. 헌법에 규정되지 않은 사항은 입법기관인 국회에 위임하고 있는 삼권분립의 원칙을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소수의견을 낸 전효숙 재판관을 의견을 경청할만하다. 관습헌법이 억지 춘향이임을 간파한 전효숙 재판관에게 경의를 표한다. 사실 대한민국은 상식이 통하지 않아서 겪은 비용이 너무 크다.


“'서울이 수도'라는 관습헌법의 변경은 헌법개정에 의해야 한다면, 이는 관습헌법이 헌법이 부여한 국회의 입법권을 변경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관습헌법에 대하여 국회의 입법권 보다 우월적인 힘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 헌법은 '입법권은 국회에 속한다'(제40조)고 규정하며, 헌법에 달리 규정이 없는 한 국회의 입법권은 포괄적 대상을 지닌다. 입법권의 주체는 다름아닌 국민에 의하여 직접 선출된 대의기관이며 헌법은 국민주권과 자유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방법으로 대의제를 기본형태로 채택하고 국민으로부터 민주적 정당성을 부여받은 대표기관이 입법작용을 통하여 그 이념을 수행하도록 하고 있다”


신행정수도특별법은 국회에서 여야의 압도적 찬성으로 가결된 법률이다. 2002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의 대선 핵심 공약 중에 하나이기도 했다. 또한 지난 4.15 총선에서 이를 공약으로 내세운 열린우리당이 다수당이 되었다. 이러한 대의 민주주의상의 일련의 과정들을 거쳤음에도 관습헌법이라는 논리로 위헌 판결을 내린 것은 납득하기 힘든 처사다. 대통령과 정부, 국회와 일반 국민들도 가늠하기 힘든 관습헌법을 헤아릴 수 있는 헌법 재판관들의 문학가적 상상력과 역사가적 고증력에 무릎을 꿇고 감동의 눈물이라도 흘려야 하나?


관습헌법을 성문헌법과 똑같이 취급한다면 관습헌법을 판단할 수 있는 권한을 독차지한 헌재가 국회의 입법권을 제약할 위험이 크다. 앞으로 열린우리당이 추진할 각종 개혁법안들이 수구기득권 세력에 의해 위헌 소송이 잇따라 제기될 경우 관습헌법을 판별할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을 가진 헌법재판관 9인이 대한민국을 실질적으로 통치하게될지도 모른다. 얼마 전 헌재는 국가보안법에 대한 헌법소원은 전원일치로, 양심적 병역거부는 7대 2라는 압도적 다수로 합헌 결정을 내린바 있다. 이러한 헌재의 보수성은 행정권력과 입법권력의 교체에도 불구하고 수구기득권 세력이 큰 소리 칠 수 있는 토양이 되고 있다는 강한 의구심을 가지게 한다.


우리는 이번 사태를 통해 두 가지를 정리해볼 수 있다. 우선 헌재의 권위가 어디까지 정당한 것인가에 대해 근본적으로 문제제기를 해야 한다. 헌법재판관이나 대법관이 비록 대통령으로부터 임명을 받아 간접적으로 민주적 절차를 거치기는 하지만, 대통령과 국회에 비해 민주적 정당성이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이런 측면에서 헌법 재판관이 자신의 분수를 망각하고 대의 민주주의를 위협할 경우에 자신들 스스로가 헌법 질서를 문란하게 만드는 우스운 꼴이 될 것이다. 헌재의 결정은 존중하지만 관습헌법 같이 억지 짜맞추기식 논리를 남발하다가는 국민들의 분노를 면치 못할 것이다(하지만 분노를 해도 심판을 할 뾰족한 방도는 없는 실정이다ᅳ.ᅳ). 앞으로 민주적 대표성을 확립하고, 다양한 사회적 가치를 반영할 수 있는 헌재를 구성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다음으로 참여정부는 이러한 정치적 시련에 굴복하지 말고 지방 분권화와 국토 균형발전이라는 목표를 흔들림 없이 추진해야 한다. 행정수도 이전이 한나라당, 서울시 의회의 선동과 정파적 이해관계에 함몰되면서 국민적 지지를 얻어내는데 실패한 것은 겸허하게 반성해야 한다. 앞으로 수구기득권 세력의 악의적인 선동과 저주 속에서도 국민들의 삶의 질이 고루 개선될 수 있는 방안을 궁리하는 데 더욱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또한 의기소침해졌답시고 개혁입법 추진에 더 이상의 지체가 있어서도 안 된다. 노무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이 이 위기를 “위대한 기회”로 만들 수 있기를 기대한다.


물론 이번 사태에서 긍정적 측면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이번 헌재 코미디는 알 수 없는 소리들을 주절거려 우리를 쫄게 만들었던 법관들이 사실 쥐뿔도 아닐 수 있구나 하는 유쾌한 깨달음을 선사해준 것이다. 아~  법관들이 괜히 좋은 우리말 비비꼬아서 사용할 때부터 알아 챘어야했다. 이 사람들이 잘 몰라서 그러는 것이라는 것을... - [憂弱]

엄마야, 누나야 관습헌법이 보우하는 서울살자.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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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북한의 위협에서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노심초사하시는 김용갑 의원이 국회 5분 자유발언 시간에 노기가 폭발해서 그만 고꾸라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김용갑은 “제발 대통령과 집권 여당은 정신을 차리고…”라고 외치다가 초특급 할리우드 액션으로 살포시 쓰러졌다. 기왕이면 발언 단상을 안고 과감하게 앞으로 데굴데굴 굴러서 뇌진탕을 유발했으면 하는 아쉬움을 짙게 남겼다.


국가보안법 폐지 결사반대의 1인 시위에 이어 그가 보여준 추한 작태들은 역설적으로 우리 사회의 진보를 보여주고 있다. 이제 김용갑이 피켓을 들고, 졸도를 해야 할 만큼 우리 사회는 조금이나마 나아진 셈이다. 여기서 병역면제 받은 두 아들을 이라크에 의용군으로 보내겠다는 비장한 자기 희생의 선언만 있었으면 금상첨화였을 것이다(우리나라의 자칭 애국지사들은 남의 자식들의 피땀을 쥐어짜는 천부적인 소질이 있다).


비단 김용갑 뿐만 아니다. 헌법재판소는 단 한 명의 소수 의견도 없이 전원일치로 국가보안법에 합헌 결정을 내렸고, 대법원은 한술 더 떠 국가보안법 폐지론을 조목조목 반박하는 오바질을 했다. 파시스트들이 국가보안법을 정권 유지의 도구로 삼아 무고한 시민들의 인권을 유린할 때 곁에서 짝짜꿍하던 사법부는 지금까지 일언반구의 반성도 없이 오만하고 뻔뻔하게 입을 놀리고 있다.


또 자칭 사회원로라고 불러주기를 바라는 늙은이 1400여명은 군부 독재에 기생하던 그 옛날의 영광을 추억하며 지금이 위기라며 호들갑을 떨고 있다(당신네들이 활개치던 시절만큼 위기가 또 어디 있었다고...ㅡ.ㅡ;). 어디 그 뿐인가, 천주교 김수환 추기경이나 조계종 법장 총무원장도 국가보안법 폐지를 반대한다며 자기네들의 신앙에 스스로 침을 뱉고 앉아 있다.


국가보안법이라는 몇 줄 안 되는 법조문 앞에서 아직도 마음 속에서 냉전을 벌이고 있는 분들이 넋을 잃고 헛소리들을 하고 있다(그래. 조선일보 사설에서 말하는 “어른 없는 가정에서 보고 배우지 못하고 자란 막된 인간의 불량기까지 느껴질 정도”인 녀석 중에 하나가 바로 나다^^). 정말 국가보안법은 멀쩡한 사람을 싸이코로 만들고, 무고한 사람을 범죄자로 만들고, 건강한 사람을 병원신세 지게 하는 악법인 것이다.


김용갑이 몇 번 더 까무러치더라도, 보수적 법관들이 몇 번 더 얼굴에 철판을 깔더라도, 자칭 원로들이 몇 번 더 성명을 발표하고 앓는 소리해도, 김수환이 몇 번 더 하느님을 모욕하며 양심의 눈을 감더라도, 박근혜가 몇 번 더 게거품을 물면서 새끼 박정희들과 손을 맞잡더라도... 우리는 국가보안법 폐지라는 원칙을 지켜야한다. 극우파들이 총궐기하여 결사항전의 자세로 나오는 만큼 우리 또한 사상과 양심의 자유 앞에서 한발자국도 물러설 수 없다. 내 머릿속을 헤집고 다닐 권리는 그 누구에게도 줄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굿이나 보고 떡 먹듯이 김용갑 쇼 보고 국가보안법 폐지하면 된다.


김용갑이 구역질나는 쇼를 벌이느라 병원에 들락날락 거리면서 나갔을 국민의 혈세가 아깝다. 그에게는 한가위 선물로 떡 대신 질 좋은 참나무로 만든 관 하나 장만해 주는 것을 어떨까?^^; 김용갑은 대통령과 여당이 정신 차려야 한다며 사자후를 토했지만, 제발 정신 차릴 사람이 누구인가? 진정 눈물 흘리며 참회할 사람이 누구인가? 정녕 신이 벌할 사람이 누구인가? 풍성한 한가위 연휴에 병역면제 받은 두 아드님과 함께 1인 시위 피켓 제작만 하지말고, 이 질문에 대해 머리를 맞대고 상의해 볼 것을 권한다. - [憂弱]

국가보안법 폐지에 투자하세요. 당신의 영혼이 풍족해집니다.^^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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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5일 익구는 규상이와 [화씨 911]을 관람했다. 조조영화로 볼 계획을 잡고 있었으나 연일 계속되는 열대야 때문에 밤잠을 설쳐 늦잠을 자는 바람에 계속 미뤄지던 것을 마음을 굳게 잡고 성사시켜 영화관으로 향했다. ‘자유와 진리가 불타는 온도’라는 뜻의 가진 영화제목답게 9.11 테러와 이라크 전쟁 등을 소재로 부시 일당들을 신랄하게 비꼰다. 익구는 통쾌하면서도 서글픈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영화는 지난 2000년 미 대선에서 고어의 이상한 패배에서 출발한다. 모든 악의 근원이 부시 당선이라는 끔찍한 상황에서 연유된 것이라는 가정이다. 별 다른 저항 없이 받아들여질 정도로 그간 부시 일당들에게 많이 시달린 것 같다.^^; 당시 고어의 깨끗한 승복에 감동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고, 이것이 미국의 민주주의 시스템이라며 찬사를 받았지만 여전히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다.


미 의회의 하원의원 일부가 부정선거 문제를 제기했지만 상원 의원 1명 이상의 서명을 받지 못한 나머지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나중에 안 것인데 현재 미국 의회에서 흑인 상원 의원은 한 명도 없다고 한다). 몇몇 하원의원들의 울분에 찬 목소리가 상원의원을 비롯한 대다수의 의원들의 비웃음에 파묻히는 광경에서 지난 탄핵 폭거가 오버랩되었다. 다수의 지배에만 매몰된 의회 민주주의의 역겨움을 목도하는 불편함이라고나 할까.


부정선거 의혹을 떨쳐내지 못하고 아버지 부시가 임명한 재판관 덕에 백악관에 입성하게 된 부시를 향해 달걀세례가 날라오자 행진을 포기해야 했던 부시는 이 때부터 맛이 가기 시작했다. 9.11 테러 발생 전 42%의 시간을 여가활동으로 보냈다는 부시를 보면서도 놀 거 다 놀면서 정무를 돌보는 미국식 스타일을 찬양했던 호사가들은 좀 부끄러워했으면 좋겠다. 9.11이 터진 것을 보고 받는 순간의 부시의 멍한 표정은 이 인간의 또라이 기질을 여과 없이 드러내주고 있다.


이어서 참사 이후 미국에 있던 빈 라덴 일가가 백악관의 도움으로 미국을 유유히 빠져나간 데 대한 의문이 이어진다. 여러 가지 증거가 제시되며 빈 라덴 일가, 사우디아라비아 왕가와 부시 일당과의 밀착관계가 폭로된다. 민중들의 고혈을 빨아먹고 있을 것이 뻔한 사우디 왕족들이나 그에 기생하고 있을 빈 라덴 일가, 이런 집안 분위기 떨치고 일어나서 한다는 게 고작 이슬람 근본주의 광신도인 오사마 빈 라덴, 허구한 날 사업 말아먹고 여기저기 손 벌리는 부시 조합이라니 정말 끼리끼리도 이렇게 최악일 수가 없다. 여기다가 아프간 전쟁과 이라크 전쟁으로 미소짓는 군수업체와 석유회사까지 끼어 드니 정말 이것이야말로 악의 축이 아니고 무엇인가.


또한 테러에 대한 공포심을 빌미로 제정한 애국법도 코미디다. 가뜩이나 박정희 망령을 등에 업은 박근혜의 헛소리에 정신이 없는 마당에 부시에게서 지난 날 반공에 대한 열정(?)을 강요함으로써 국민을 총화단결시킨 박정희를 찾는 것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공동의 적에 대한 적개심으로 국민을 불안하게 하고, 서로를 감시하게 만드는 모습은 이것이 우리가 닮고자 했던 미국의 모습인가 싶을 정도였다. 훼손된 자유에 무감각한 미국인이라면 굳이 경애할 필요는 없을 듯 하다.


2003년 3월 부시 일당은 이라크 침공을 감행한다. 많은 매체들을 통해 익히 접해왔던 것들을 다시 마주했지만 새로운 따가움으로 다가왔다. 한 이라크 여성이 “알라신이시여, 저들을 응징해 주소서, 저들을 용서하지 마소서”를 외치는 모습에서 익구도 같은 절규를 했다. 부시가 열렬히 믿는 다는 그 신은 과연 피눈물을 흘리고 있을지를 상상해보았다. 알라신의 침묵은 차치하고 부시가 믿는 신이 침묵한 것은 참기 힘든 일 아닌가.^^;


장면이 바뀌어 자기 자식을 비롯해 많은 친척들이 입대한 미국의 어느 여성은 조국에 봉사하는 것을 자랑스러워하고 있었다. 이라크에 가기 싫다는 아들을 달래 보내고 조국에 대한 사랑에 한껏 부푼 이 어머니는 아들의 죽음과 부시는 또라이이며, 명분 없는 전쟁에 동원된 자신을 한탄하는 아들의 마지막 편지를 읽으며 단지 아들이 보고 싶다는 말만을 되뇌인다. 모두가 패배자일 뿐인 전쟁의 속성을 여실히 증명해주는 대목이다.


끝으로 상하원 의원 중에 자식을 이라크에 보낸 사람이 단 한 명뿐이라는 사실도 씁쓸하게 다가왔다. 미국의 가난한 젊은이들을 사지로 몰아넣는 것도 모자라 한국 등지의 젊은이들의 피까지 요구하는 부시 일당들의 간악함과 이와 한통속인 미국 지배계급들의 마수에 우리가 얼마나 시달리고 있는가. 그리스 시인 핀다로스는 “전쟁을 재미있어 하는 것은 무경험자 뿐이다”라고 말했다. 전쟁에 미친 자들을 위한 묘약은 역시 그네들을 전쟁터에 집어넣는 수밖에 없나보다.^^;


화씨 911은 현직 대통령을 드러내놓고 비난하고 있다는 점에서 경이롭다. 한국에서 아직 이런 영화는 상상하기 힘들기 때문에 더욱 군침이 도는 지도 모른다. 실미도를 보고 색깔이 의심스럽다며 빨간 칠을 해보려는 자들이 있는 판에 말이다. 사실 미국의 진짜 무서움은 마이클 무어 같은 이들의 존재라는 혹자의 평이 제법 근사하게 들린다. 아무 거리낌없이 민주당 전당대회에 참석하는 마이클 무어의 모습을 보며 정파적 이해에 죽고 사는 우리네 정치판의 초라한 몰골도 부끄럽다. 하지만 여전히 부시의 지지율이 40%는 가뿐히 넘고 있다는 사실에 경악할 수밖에 없다. 한국에서는 대통령이 말실수 한 번 해도 지지율이 뚝뚝 떨어진다는데, 전쟁 일으키고 인권 유린해도 지지율이 안정적이니 부시는 좋겠다.^^;


영화를 함께 본 규상이는 연신 투덜거리며 분노를 삭이고 있었고, 익구 또한 프레첼 과자가 왜 부시 기도를 좀 더 꽉 막지 못했을까 아쉬워했다. 부시 일당은 지난 4년 간 우리에게 테러 그 자체였다. 익구는 부시의 낙선을 꿈에서도 빌고 있지만 그렇다고 마이클 무어의 의도대로 케리가 당선되면 새로운 세상이 올 것이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부시의 재선은 만성 식욕부진의 신호탄이 될 수 있겠다는 커다란 공포다. - [憂弱]


미국은 프라이버시를 포함한 시민적 자유의 일부를 헌납하고서야 안전을 얻을 수 있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이 안전은 타인(특히 외국인)에 대한 불신을 통해 확보되고 있다. 여기서기자는 자유와 안전이라는 두 가치사이의 고전적 갈등을 목격한다. 극도로 위생처리된 사회는 분명히 안전한 사회일 것이다. 그러나 그 살균된 사회 속에서 사람들은 숨이 가쁠 것이다. 자유의 공기에는 늘 병균이 묻어 있는 법이다. 미국인들 다수는 이런 위생처리를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다. 시민적 자유의 모국에서 그런 풍경을 보는 것은 우울했다. 자유의 헌납과 타인의 불신에 대범해질 수 있다면, 세상에 북한 사회만큼 안전한 곳이 있겠는가?

- 고종석, [살균된 사회, 위생처리된 자유], 한국일보 2001.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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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론의 틈새시장

사회 2004. 6. 29. 04:18 |
유물론(唯物論)은 물질을 제1차적, 근본적인 실재로 생각하고, 마음이나 정신을 부차적, 파생적으로 보는 철학설을 말한다. 가령 mannerist 선배님의 들어주신 예를 보면 20세기 후반 여권의 신장은 여권 운동의 결실이 아니라 양차 세계대전 이후 모자른 남성 인력을 메우기 위해 여성 인력이 많이 투입되었고, 그 결과 돈을 만지게 된 여성이 그 물질적 기반을 통해 권리 향상을 이룰 수 있었다는 식이다. 물질이 주(主)고 의지나 의식은 물질의 소산으로서 종(從)이기 때문에 유물론은 팍팍하다고 느껴질 소지가 크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총 경제활동 인구 중 군대에 간 비율은 대체로 약 20퍼센트였다. 덧붙여 말하자면, 수년 동안 지속된 그러한 대중동원 수준은 현대적이고 생산성 높은 산업화된 경제와-또는 그러한 경제 대신에-주로 비전투원 인구 부문에게 맡겨진 경제가 없었더라면 유지될 수 없었을 것이다. 전통적인 농업경제-적어도 온대지역에서의-는 모든 일손이 필요할 때 (이를테면 수확기)가 1년에 여러 번 있으므로 특정한 계절을 제외하고는 보통 그렇게 큰 비율의 노동력을 동원할 수 없다. 산업사회에서조차 그렇게 큰 인력동원은 노동력에 막대한 부담을 주며, 바로 그러한 사정이 현대의 대량전이, 조직된 노동자층의 힘을 강화한 동시에 가정 밖에서의 여성고용에 일대 혁명을 일으켰던 -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일시적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영구적으로-이유이다.

- 에릭 홉스봄, [극단의 시대], 1장 총력전의 시대 중 부분, 69 ~70쪽


경험론자들보다는 합리론자인 스피노자나 라이프니츠에 호감을 느끼고, 촘촘한 감각보다는 번뜩이는 직관을 통해 의사결정을 하는 편이 잦고, 인간의 자유의지에 전폭적인 신뢰를 보내는 나로서는 유물론을 그다지 흡족하게 여기지는 않은 것 같다. (다만 종교란 인간의 행복 추구 욕구로부터 비롯되었으며, ‘신’이란 결국 인간의 행복을 보장하기 위해 인간이 창조해 낸 것이라는 포이어바흐의 입장을 지지한다. 하지만 숱한 종교인들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신 혹은 정령의 존재는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낫겠다 싶으니 이마저 완전한 유물론은 아닌 셈이다^^;)


특히 사적 유물론 같은 것에는 넌더리가 난다. 마르크스는 자유란 필연성의 인식이라고 말했다고 한다(좀 더 근사한 표현으로 “자유의 왕국은 오직 필연의 왕국에 기초하여 건설될 수 있다”는 말이다). 어떠한 법칙성의 기술적 이용을 인간의 자유로 볼 수 있으나 어디까지나 법칙에 따르는 자유라는 결정론적 사고다.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신뢰로 먹고사는 자유주의자가 필연성 어쩌고 하는 것을 달갑게 여길 리가 없지 않는가.^^;


요즘 지인들과 추가 파병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눠보았다. 대개는 소극적 반대와 소극적 찬성 사이에서 헤매는 경우가 많았다. 아마도 이것이 국민들의 평균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나도 크게 다르지 않다). 좋아서 파병에 찬성하는 사람은 없었고, 그렇다고 대놓고 반대하기는 꺼림칙하다는 것이 대개의 생각들이었다. 이 꺼림칙함을 다소 크게 본 사람은 소극적 찬성 쪽에, 작게 본 사람은 소극적 반대의 입장을 보였다고나 할까. mannerist 선배님은 그 둘은 별로 차이가 없다고 하셨다. 게다가 아가리 닫고 있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선배님께서는 근조 리본 떼고 거리로 나올 것을 종용하는 입장인 셈이다). 나는 일면 동의하면서도 괜스레 너무 유물론적 해석이 아니냐고 너스레를 늘어놓았다.


누군가와 대화를 나눌 때 수강신청 잘했냐는 둥, 여행계획이 뭐냐는 둥, 주말 드라마가 어떻고, 토익 점수가 어떻고, 엊그제 했던 소개팅이 어쩌고, 내일 먹으러 갈 음식이 저쩌고 하는 숱한 소재가 있다. 그 중에서 추가 파병 꺼내드는 것도 사실 쉽지 않다. 자칫했다가는 화기애애했던 분위기를 무거운 공기로 갈아치우는 위험도 있다. 그러나 한바탕 다투든, 합의점을 찾든, 미국과 부시를 진탕 욕하건 간에 적당히 결론을 맺고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는 과정 자체는 무척 소중하다. 나는 일단 여기서부터 시작을 해야한다고 본다. 일단 대화의 소재를 바꾸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논쟁을 벌이는 것 자체는 그 성과물의 생산성 여부를 떠나서 선행되어야 할 과업이다.


물론 실천이 중요하고, 움직여야 무언가 바뀌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 전의 과정을 충분히 거쳐야 할 것이다. 서로의 차이점만 발견하고 영양가 없는 공방을 주고받더라도 일단 그 논의의 마당을 여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오히려 친할 사이일수록 이런 마당을 불편하게 여기고 그냥 넘어가려고 한다. 친하게 지내고 싶으면 껄끄러운 이야길랑 접어두는 것이 불문율이 되어버린 사회에서 비판적 언어를 통한 갈등과 혼란의 공유는 아둔한 짓으로 치부된다. 하지만 나는 논의의 마당을 후닥닥 지나치고서 합의의 도장을 냉큼 찍고, 얼른 실천의 광장에 뛰쳐나오는 것을 원치 않는다.


일단 논의의 마당에 마주 서게 하는 것부터가 나를 허덕이게 만들고, 따가운 눈초리를 받게 만든다.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살가운 분위기가 가득한 물 잔에 한 방울의 쪽빛 잉크를 떨어뜨리는 것만으로도 참 어렵고 힘들다. 그런데 그 물 잔을 온통 푸른빛으로 물들이고, 거기다가 끓어오르게까지 하는 것은 아직 언감생심이다. 나는 다만 유물론이 간과하는 빙산 아래 거대한 논의의 마당에 좀 더 애정과 역량을 쏟을 참이다. 이 누추한 틈새시장에서 장사가 얼마나 될라나 모르겠지만 말이다. - [憂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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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즐, 테러리즘 KIN

사회 2004. 6. 26. 02:12 |
▶謹弔◀ 故 김선일님의 명복을 빕니다.

결국 우려하던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우리가 추가 파병을 결정한 이상 민간인을 상대로 한 테러는 충분히 예상했던 일이었다. 그러나 끝내 김선일씨는 참혹한 주검으로 돌아와 우리에게 큰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야만스런 테러집단과 외교당국의 늑장 대처가 빚어낸 참극이다. 참으로 슬프고 분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무고한 민간인에 대한 살상은 어떠한 경우에도 용납할 수 없는 반평화적 폭거이다. 이런 잔혹한 테러리즘에 관대해서는 안 된다.


테러리스트들의 만행에 경악을 금치 못하지만 저들에 대한 성냄이 이라크 민중들에 대한 분노로 확산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는 무모한 테러리즘에 대해서는 단호하지만 이라크 민중을 비롯한 이슬람 세계에 대해서는 차분한 마음으로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 더러운 침공을 자행한 미국의 전쟁광들에게 손가락질을 할지언정 오늘도 고된 하루를 살아가는 이라크 민중에게는 모든 손가락 활짝 펼쳐서 악수를 청해야 한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추가 파병 철회를 비롯한 이라크 철군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비장하게 추가 파병을 강행하겠다고 선언하며 테러 근절을 외치는 노무현 대통령의 모습은 실망스럽다. 만약 노무현이 대통령의 자리에 있지 않았다면 분명 파병반대의 목소리를 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 대통령은 추가 파병의 의지를 재천명해야 하는 이 누추한 모습에 서글플 따름이다.


노 대통령은 미국의 영향력을 무시 못할 경제 문제, 북핵 문제 등을 염두에 두고 국익의 개념을 빌려 파병의 불가피성을 역설했다. 그러나 그 자신이 명분 없고 더러운 전쟁에 발을 담근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일인지를 잘 알 것이다. 그의 궁색한 변명을 접할 때 지지자로서 당혹스럽다. 변명할 가치가 없는 사안을 갖은 미사여구를 동원해서 방어하는 모습은 정말 추잡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함께 그 추잡함을 뒤집어쓰고 싶다.


물론 노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의 고뇌를 모르는 바 아니다. 그네들이 정서적으로는 파병에 반대하면서도 한 나라의 대통령으로서, 집권여당으로서의 책무를 다하기 위한 방도를 모색하려는 노력도 모르는 바 아니다. 기실 미국과의 관계 악화로 인한 후폭풍이 무엇인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경제 침체와 안보 불안 같은 상황을 감내할 만한 여력이 되지 않는다면 그것을 솔직히 시인하는 것도 그네들의 책무다.


차라리 파병철회를 했을 때의 우리가 치를 비용 혹은 손해가 대처하기 곤란할 정도로 부담스럽다고 말하라. 이라크의 평화와 재건이라는 말하는 자신도 믿지 않는 같잖은 논거를 대기보다는 그것으로 국민을 설득해야 한다. 국민을 진심으로 설득하려는 노력은 보이지 않고 앵무새 같이 했던 이야기나 반복하는 것은 노 대통령의 모습이 아니다. 아무리 부시 일당의 보이지 않은 협박이 강했다고 하더라도 자국민의 생명을 제대로 챙기지 못해 우리 국민들의 상처 입은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는 진심 어린 설득 과정이 있어야 할 것이다.


미국에 영혼까지 갖다 바친 일부 기득권 세력들을 제외하고서 국민 중에 누가 가뿐 마음으로 파병을 찬성하겠는가. 우리의 이 고통의 열매를 가진 자들이 따먹는 광경을 왜 생각 못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병 문제에 자유롭지 못한 약소국의 설움에 다시금 몸서리를 친다. 익구는 전쟁에 반대하므로 대한민국의 파병에도 반대한다. 대통령과 우리당의 고충을 이해하지만 이미 감정적, 논리적 파산 선고를 받은 이라크 사태에 개입하는 것이 어리석은 짓이라고 본다. 국민여론을 수렴하고 국회 차원의 논의를 통해 좀 더 신중하게 추가 파병을 검토했으면 한다.


아 정말 비통하다. 불가에서 말하는 윤회를 믿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다. 이런 비루한 인생은 딱 한 번으로 족하기 때문이다. 신이 있다면 저 전쟁에 미친놈들에게 한줄기 벼락을 내려주시라. 익구가 신을 믿지 않는 이유가 있다면 이 더러운 광경을 목도하면서도 침묵하는 자에게 어찌 내 영혼을 굽힐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신이라면 부시나 실컷 믿으라고 해라! 끝으로 미국의 개 노릇을 해야하는 대한민국의 초라한 몰골에 다함께 슬퍼하되 서로 너무 헐뜯지 말았으면 한다. 잠시라도 서로를 위무하며 이 아픔을 함께 나눴으면 한다. - [憂弱]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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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신행정수도 이전 대상기관에 입법부와 사법부가 포함되자 일각에서 사실상의 천도라고 반발하며 국민 투표를 주장하고 있다. 이는 국회에서 진행된 합의 과정과 의결 행위를 무력화시키는 의도다. (물론 누더기 친일규명진상특별법 통과 같은 경우는 대다수 국민들의 의사를 무시한 처사 같은 경우도 있겠지만 말이다) 신행정수도 이전은 지난 대선 때 노무현 대통령의 핵심공약이었고, 국회에서 국가균형발전 3대 특별법으로 통과되었다. 여소야대의 16대 국회에서 압도적 다수(재적 194명 중 찬성 167명, 반대 13명, 기권 14명)로 통과돼 국민적 합의를 얻었다고 볼 수 있다.


입법부와 사법부 이전은 특별법 6조 4항에 규정된 대로 '수립된 이전계획의 내용 중 정부에 속하지 아니하는 헌법기관의 이전계획에 대해서는 국회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원칙에 따라 국회와 사법부 스스로 판단하면 된다. 뜬금없이 이전기관의 범위를 걸고넘어지는 것은 그간의 행정수도 이전 합의 과정에 참여한 자들이 일부러 사실을 호도하거나, 아니면 진짜 무식해서 법안 검토도 안 해본 것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대선 직후 노무현 당선자가 국민투표를 거치지 않으면 동의가 안되는 상황이 오면 국민투표를 실시할 수도 있다는 입장을 밝히자 한나라당은 행정수도 이전 사안이 국민투표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못박았다. 국회가 거부하면 불가능한 일이 되는 것이지 국민투표를 통하는 것은 국회를 경시하는 일이라고 비판하기까지 했다. 결국 여소야대의 상황에서 법안 통과를 장담할 수 없는 노 대통령이 제2의 방법으로 국민투표를 생각하고 있었겠지만 어디까지나 국회에서의 의결을 얻어내려고 했다. 가장 저렴한 비용으로 국민의 동의를 얻기 위한 노력의 결실이 작년 12월 신행정수도특별법 통과이다.


<"노무현 당선자가 충청지역에서 행정수도 이전을 국회가 반대하면 국민투표를 해서라도 하겠다고 하였다. 잘못 알고 있다. 헌법 72조에 따라 대통령은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에는 외교, 국방, 통일 기타 국가안위에 관한 중요 정책을 국민투표에 부칠 수 있는 것이다. 일반 사항은 국민투표에 부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국회에서 법 제정이 되지 않거나 국회에서 거부하면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국회를 얼마나 경시하는가 하는 면면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2003년 2월6일 주요당직자회의, 이상배 정책위의장)

"대다수 국민들은 수도이전을 가장 실현성 없는 헛공약으로 꼽고 있는데 노무현 당선자는 다시 충청권에 가서 헌법상 국민투표 대상도 아닌 사안을 국민투표를 해서라도 추진할테니 야당이 반대하면 좀 설득해 달라고 벌써 내년 총선을 겨냥한 허풍선전을 또 한 바 있다." (2003년 2월13일 주요당직자 회의, 김영일 사무총장) >


지난 16대 국회에서 여야가 합의해 통과시킨 정책에 대해서 대통령이 다시 국민투표를 한다는 것은 국회의 의사를 거역하거나 번복하게 하는 것으로 삼권 분립의 원칙에 맞지 않는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입장 표명은 옳다. 한나라당은 이제 와서 충청도 표심을 의식한 졸속처리였다는 사실을 인정해봤자 국민적 합의를 운운한 자신들의 반대논리가 부실한 것을 드러낼 뿐이다. 한나라당은 자신들의 당론을 결정하고 국회에서 당당하게 논의에 임하라. 왜 자기네들이 할 일을 대통령이 국민투표를 결단해야 한다며 남에게 떠넘기는가. 혹시 17대 총선에서 의회권력을 빼앗겨서 국회에서의 합의에 자신이 없는 것인가?


한나라당은 국회에서의 승산은 별로 없고 국민투표에 불을 지펴 자신들의 든든한 텃밭인 영남과 혹시나 하며 불안해하는 수도권 유권자들을 엮어보겠다는 속셈일 것이다. 어차피 별로 표도 없는 충청권의 민심을 버리고 자신들의 지지기반을 수도권으로 확장해보려는 술수다. 표가 얼마 안 되는 호남권을 고립시킴으로써 영남 패권주의에 기생했던 지역주의 정당의 노림수에 현혹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대통령 탄핵을 의회 민주주의적 결단이라고 치켜세우던 자들이 대의 민주주의의 절차적 정당성을 짓밟고 다시금 논쟁의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것은 이제 자신들이 정치적 소수파가 된 것에 대한 투정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노 대통령의 행정수도 이전 공약도 분명 표심을 잡기 위한 것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분권화와 국토 균형발전이라는 분명한 논거를 가지고 있다.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의 과밀화 현상은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지방 발전이 자꾸 더뎌지고 있고, 국토의 불균형 발전은 계속 심화되고 있고 지역감정 같은 국민적 갈등만을 유발하고 있다. 수도권에 경제, 정치, 교육, 행정이 집중되어 있는 상황에서 개별 경제주체가 지방으로 내려갈 유인은 거의 없다. 수도권 집중의 폐해를 줄이고 지방의 경제발전의 열쇠는 민간보다는 정부의 몫이고, 그 실천방안으로 행정기관의 이전이 추진되고 있는 것이다.


신라의 신문왕은 금성이 수도로서는 국토의 동남쪽에 너무 치우쳐 있어 이를 만회하고 위해 달구벌로의 천도를 추진했지만 경주 진골들의 강력한 저항으로 실패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문왕은 그 대안으로 수도의 역할을 나눌 수 있는 5소경 제도를 창안했고, 수도의 편재성을 극복하려고 했다. 노무현 정부도 5소경 제도의 지혜를 다시금 살려 행정수도 이전을 국민통합에 이바지하도록 신중하지만 꾸준하게 추진해야 것이다. 참여정부는 국민들에게 국토 균형발전의 의지를 재천명하고 홍보해서 행정수도 이전 논란이 정파적 이해관계의 제물이 되는 것을 조기에 방지해야 한다. - [憂弱]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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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찬 국무총리 후보 지명자를 두고 열띤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기실 이해찬 1세대인 익구로서는 그 격랑의 한가운데에 있었기 때문에 사안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지에 대한 의구심이 든다. 우선 논의에 앞서 분명히 짚고 넘어갈 점이 있다. 이해찬 총리 지명자가 교육부장관 재직시절 추진했던 각종 교육 개혁정책들은 김영삼 정부 시절 입안된 정책을 구체화한 것이라는 점이다. 7차 교육과정의 고시는 김영삼 정부 말인 97년 말에 이루어졌으며 이해찬 장관이 추진했던 새학교 문화창조의 방안들은 사실 문민 정부의 교육개혁위원회에서 도안해 낸 정책들이다.


물론 이해찬 장관이 다양한 전형 방법으로 대학 신입생을 뽑는 2002 입시 개혁을 주도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기조는 이전 정권의 기본구상을 받아들인 것이다. 아무리 심심하면 바뀌는 교육 제도라지만 국가차원의 교육 정책이 이해찬 개인의 농간(?)으로 좌지우지되는 것이 아님을 밝히고 싶다. 정리하자면 이해찬 장관은 이미 하기로 되어 있었던 것을 시행한 것이지, 새롭게 무언가를 뚝딱 만들어 낸 것은 아니다. 2002 입시 개혁안이 98년에 대서특필되다보니 그렇게 오해하기 쉬울 수도 있겠다는 노파심에 말씀드린다.


여담이지만 어느 교육부 간부가 이해찬 당시 장관에게 2002 입시 개혁안을 ‘무시험 전형’이 아니라 ‘다양한 전형’으로 명명해야 한다고 건의했다고 한다. 그런데 결국 이해찬 장관이 좀 더 관심이 끌릴 만한 무시험 전형이라는 용어를 선택하고 말았다. 이 용어는 결국 많은 오해를 낳았다. 한가지만 잘해도 대학 갈 수 있기는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다양한 입시전형의 일부분일 뿐이었다. 또한 시험을 보지 않고도 대학에 갈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준 것도 크나큰 실책이다. (사실 이 부분은 교육부에서 홍보를 제대로 못한 것과 더불어 언론의 침소봉대도 한 몫을 했을 것이다)


혹자들은 멀리 내다보지 못하는 근시안적 교육 행정이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98년 입시 개혁안이 나온 내용이 2001년도(2002 대입)에 현실화된 것일 뿐 졸속 행정이라는 비판은 수긍하기 힘들다. 내신과 각종 특기가 중시되는 수시 제도나 총점제 폐지 같은 내용들은 다 98년도에 나온 이야기다. 대체 그 때는 가만히 있다가 막상 닥치니 난리법석인 것은 온당치 못한 처사였다고 생각한다. 또한 입시 개혁안에 부응하지 못하고 기존의 입시 전형을 고수해온 대학 당국에게도 비판의 화살을 돌려야 공정할 것이다.


입시 개혁안과 더불어 추진 된 모의고사/야간자율학습/보충학습 폐지 같은 정책들도 일선 학교들에게 혼란을 조장했다. 이런 정책들로 말미암아 고교생들이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아 기초 학력이 떨어졌다는 세간의 눈초리를 받아야 했다. 이른바 이해찬 세대의 탄생이다. 가만히 물어보자. 정녕 이해찬 세대 스스로가 단군 이래 최저학력이라는 손가락질에 동의하는 것인지를... 이해찬이라는 사람 때문에 우리가 이 모양 이 꼴로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지를.


얼마 전 익구는 서울외고를 방문해서 어느 선생님 말씀을 들었는데 요즘에는 0교시도 없고, 야자도 강제가 아니라고 한다. 그럼 고등학교 후배님들의 학력은 바닥을 긁다못해 지하로 들어가야 정상이다. 하지만 아마도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후배님들도 우리와는 사뭇 다르지만 나름대로의 공부를 할 것이다. 후배님들도 배울 것은 다 배울 것이고, 우리도 지난날 배울 것은 얼추 다 배웠다. 이것은 ‘정책이 어찌 되었건 공부할 놈들은 다한다’의 논리가 아니라 ‘정책 덕분에 다양한 공부의 싹이 틀 토양이 마련되었다’로 해석할 수 있다. 부디 이해찬이라는 사람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무식해졌다고 하지말고, 우리 신세가 처량하다고 생각지 말자. 살다보면 외적 귀인(external attribution)을 하는 것이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죄 이상의 벌을 내리는 것은 또 하나의 죄가 될 수도 있다.


이해찬 장관의 교육 개혁은 탄탄한 제도적 보완을 받지 못해 크게 성공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분명 이전보다 개선된 제도를 만들려고 했다는 점은 확실하다. 교육 개혁에 대한 논쟁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이해찬 세대라고 불리는 우리를 둘러싼 논란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이해찬 장관의 교육 개혁은 고등 교육을 가만히 두고 초, 중등 교육을 아무리 지지고 볶아봤자 한계가 있음을 여실히 증명해 보였다. 이 점에서 전략적 패착을 거듭했고 지적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제도 몇 개가 바뀌었다고 해서 우리 의식 속의 학벌주의를 비롯한 한국 교육의 병폐들을 몰아내지는 못할 것이다. 정책의 취지는 옳았으나 학벌 피라미드의 근본 구조가 온전한 가운데 변죽만 울리고 끝나버린 아쉬움이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도 개선과 우리의 내면 의식이 상호작용하면서 조금씩 바뀌어 나가고 있다.


이해찬 총리 지명자가 적절한지의 여부는 교육부장관으로 재직하면서 저질렀던 잘잘못과 더불어 총체적으로 총리로서의 자질을 논하는 인사청문회 과정을 지켜보며 판단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그것보다 괜히 이해찬 세대 논쟁이 불거져 나와 그 시대를 살아왔던 우리의 마음을 다시금 흔들어 놓는다. 그러나 이것 하나는 분명하다. 우리를 망하게 하는 것이 있다면, 우리의 신세를 누추하게 만드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일 것이라는 점이다. 또한 어떤 공부든 자신이 좋아하고 의미를 찾을 수 있다면 열심히 하면 그만이라는 점이다.


오늘날 대학사회는 하고 싶은 공부보다는 해야만 하는 공부를 더 많이 해야하는 서글픈 모습이다. 그러나 그 핑계는 고등학교 때도 지겹게 했다. 아마 훗날 취업을 하거나 사업을 하게 된다면 그 때는 먹고 사는 일이 바빠서 하고 싶은 공부를 못한다고 할 것이다. 이 끝없는 핑계와 유보의 고리를 끊고 우리 지금 이 순간을 알콩달콩 재미나게 살아갔으면 좋겠다. 물론 그 순간 순간을 소중한 지인들(이 글을 읽는 여러분!)과 나눌 수 있기를 누구보다 바란다. 우리를 보고 공부도 못한 것들이라는 부당한 매도에 당당히 방어하는 이해찬 세대들이 되었으면 한다. 우리는 충분히 그럴만한 자격이 있다. - [憂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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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의 5월 27일 연세대 특강 내용 중에 진보와 보수를 언급한 내용은 여러모로 혼란스럽다. 노 대통령은 보수를 “힘이 센 사람이 좀 마음대로 하자. 경쟁에서 이긴 사람에게 거의 모든 보상을 주는 약육강식이 우주섭리에 가깝다고 말하는 쪽”이라고 말하며 “합리적 보수, 따뜻한 보수 별의별 보수를 갖다 놓아도 보수는 바꾸지 말자는 것”으로 정의했다. 반면 진보는 “인간은 어차피 사회를 이루어 살도록 만들어져 있으니 더불어 살자”는 것으로 정의했다.


대강의 얼개는 맞다고 볼 수 있지만, 문제는 진보는 선이고, 보수는 악이라는 뜻빛깔(뉘앙스)을 강하게 풍기고 있다는 점이다. 노 대통령의 진보와 보수에 대한 인식은 곤혹스럽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은 개인의 자유이나 지나치면 독단과 독선에 빠지게 된다. 노 대통령의 강연 내용에게 그런 혐의를 짙게 드리우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물론 노 대통령이 말하는 보수는 사익만을 추구하고, 상도덕을 어기는 보수를 지칭하는 것이겠지만 정치적 수사로 용인하기에는 너무 비약이 심했다.


레이건의 ‘악의 제국’이나 부시의 ‘악의 축’ 따위의 레토릭이 상대를 인정하지 않고 말살의 대상으로 여기는 사고의 산물이듯이, 노 대통령의 보수세력에 대한 비판도 상당히 우려스러운 수준이다. 못돼 먹은 수구세력, 냉전적 보수에 손가락질하는 것을 넘어 건전하고 합리적인 보수세력들까지 도매금으로 취급하려 했다는 점에서 부적절한 발언이다. 기실 박근혜 대표의 말대로 “보수는 끊임없이 고치며 살자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한나라당이 그런 세련된 보수라는 데는 동의하지 않는다. 자기들이 언제 끊임없이 고쳤다고...ㅡ.ㅡ;)


또한 노 대통령 자신의 정치적 성향이 진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다소 현실과 괴리가 있다. 노회찬씨의 지적처럼 “자유주의적 개혁적 보수주의”가 노 대통령의 정치적 지향을 보다 적실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유시민 의원이 누차 강조하듯 열린우리당이 온건보수, 한나라당이 강경보수, 민노당이 진보라는 위치잡기(포지셔닝)를 하고 있다는 것이 보다 타당한 설명이 될 것이다.


노 대통령은 좌파를 빨갱이 취급하던 한국의 기형적 정치 질서에 얽매인 사고를 벗어 던져야 한다. 이제 그런 우편향 된 정치지형에 균열이 생기고 있는 만큼 억지로 자신을 진보라고 자처하기보다는 스스로 자유주의자로서, 개혁적 보수로서의 면모를 다잡는 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기 바란다. 노 대통령이 굳이 진보적 정치를 펼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는 국가보안법의 폐지나 천민자본주의와 극단적 시장만능주의에 대한 경계 같은 자유주의 미감을 구현할 수 있는 것을 실현할 짐은 지고 있다. 꽤 그럴듯한 보수가 되는 것으로도 노 대통령의 소임은 다할 것이다. - [憂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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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권 단상

사회 2004. 5. 22. 17:37 |
하나의 유령이 대학을 떠돌고 있다 - 공부권이라는 유령이.

대학 생활의 목표를 좋은 학점 취득과 대기업 취업, 고시 등 각종 시험 합격에 두고 학과 공부와 시험 공부에 매진하는 학생들을 일컫는 ‘공부권’이 무섭게 세를 넓혀가고 있다. 공부권이라는 단어를 처음 고안해 낸 서울대의 이규진씨는 “과거엔 학생들이 반독재 투쟁 등 사회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가 있었지만, 지금은 자신의 전공분야를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 가장 큰 시대적 요구라고 생각한다(한국일보 2003. 11/02 기사 참조)”고 말했다.


공부권들의 등장이 가뜩이나 사회에 무관심한 대학생들이 개인주의에 더 매몰되고 있다는 비판이 적잖이 있지만 열심히 공부하겠다는 그네들의 욕구를 막지는 못할 듯 싶다. 설령 그 공부의 목적이 오로지 개인의 출세와 영달에만 국한되는 것이라고 해도, 또 어려운 경제상황으로 인한 생계형 포지셔닝이라고 해도, 치열하게 자신을 가꾸려는 노력이 힘을 얻고 있다는 것은 일단은 환영할만한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뒹굴 뒹굴 놀 궁리만 하는 나는 정말 반성해야 한다^^;)


공부권의 선의를 받아들인다면 그들은 멀리 뛰기 위해 잠시 움츠리는 냉철한 현실감각을 갖추는 것이며 내일의 당당한 주체로 서기 위해 오늘의 땀방울을 아끼지 않는 자세이다. 순간의 행복을 포기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순간의 행복을 유보한 만큼 얼마나 더 큰 행복을 거둘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활활 타오를 기회는 나중에 널렸다며 불씨 정도만 간직하고 사는 성실한 공부쟁이들을 나는 존중한다. 그리고 나 또한 공부권으로서의 기질이 다분함을 느낀다.


학교 우등생이 사회 열등생이라는 말은 이제 옛말이다. 학교 모범생이 사회에서도 두각을 나타내는 실력위주의 사회가 도래한지 오래다. 고지식하고 순발력도 떨어지는 나 같은 범생 스타일이 앞으로 좀 더 사회의 주도적 위치로 진출할 수 있을 것이라고 호들갑을 떨어본다. 지금 당장에 시급 4000원의 알바보다는 미래에 시급 40만원의 역량을 쌓는 것이 한 개인에게 있어서나 사회 전체에 있어서나 후생을 증대시키는 유쾌한 노력이 될 것 같다. 물론 높아질수록 낮은 곳을 응시할 줄 아는 올챙이적 기억을 간직하겠다는 기본적 합의가 전제된다면 말이다.


어느덧 대학 3학년이라는 압박에 허덕이는 나를 보면서 많은 질문을 던져본다. 당최 앞으로 뭘 해서 밥 벌어먹고 살지 막막한데, 무엇에 내 꿈을 투자해야 할지도 아직은 묘연하다. 고민할 시간이 자꾸 침식되어 가고 있다는 절박감이 엄습한다. 일단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은 오늘 하루를 열심히 배우고 익히면서 살아내는 것이다. 분명 언젠가 이거구나 하는 것이 내게 살포시 다가 올 것이라는 희망을 안고서 말이다.


공부권들은 개인주의 혁명에서 자신들을 묶고 있는 무식의 족쇄 외에는 잃을 게 없다. 그들에게는 얻어야 할 진리가 있다.

만국의 공부권들이여, 흩어져라! - [憂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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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구는 최근 언론매체의 미군의 이라크인 포로 학대 장면 보도를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익구는 이라크 포로들의 옷을 벗긴채 추악한 학대를 하며 웃고 있는 미군의 모습을 보며 인간의 비루함에 다시 한 번 서글퍼했다. 익구는 미군의 야만스런 인권침해를 강하게 비난하고, 이토록 처참한 지경에 떨어진 이라크 사태에 우리나라가 동참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개탄스럽다는 논평을 냈다.


익구는 애당초 부당한 추가 파병이었지만 이로서 저 더러운 전쟁에 발을 담근다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가 명백해졌다고 주장했다. 평소 이라크 파병에 비교적 찬성하던 입장의 친구들조차 이번 포로 학대에 분노를 표시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져 앞으로 파병 논쟁에 더욱 불꽃이 튈 것으로 예상된다.


익구는 정부가 추가 파병 철회를 선언하기 어려운 형편이라고 보고, 이러한 파병 딜레마의 짜증나는 현실을 마냥 무시할 수만은 없다는 입장이다. 또한 지난 추가 파병 논란 때 정부가 파병을 결정하더라도, 국회가 파병동의안을 부결시킴으로써 파병도 막고, 체면치레도 하는 궁상맞은 전략을 제시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번 파병 철회 문제에 있어서도 국회에서 이를 처리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피력했다. 열린우리당이 파병 불가피론을 외칠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노무현 정부를 위해서는 파병 철회 목소리를 높일 것을 주문했다.


미군과 영국군의 포로 학대를 격렬하게 비난한 익구지만 이러한 극단적 사건 하나로 모든 판단을 내리는 것은 성급한 일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이번 사태는 분명 규탄 받아 마땅하지만 이를 이유로 미국에 대한 분별 없는 적개심에 넘칠 필요는 없고, 파병찬성론자들을 향해 욕지기를 하며 흥분할 것도 없다는 것이다. 익구는 파병찬성론자들의 선의와 논리를 충분히 인정하지만 그들의 근거는 이제 설득력을 많이 상실했고, 적어도 인간적, 감정적으로는 파산했으며 이제 논리적 파산이 임박했다고 평가했다.


익구는 미군과 영국군은 제네바 협약을 지켜 포로들을 대우해야 한다는 원칙을 강조하며 후세인의 인권유린을 빌미로 침공을 했던 미국이 이제는 후세인의 전철을 밟고 있다며 비꼬았다. 이번 참담한 포로 학대 장면은 파병반대론자가 건수를 잡았다고 기뻐하기보다는 인간 내부의 잔혹성과 만나는 불편함이 더욱 클 것으로 보인다. 만행에 대한 분노보다는 슬픔이 압도하는 익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망하기보다는 평화를 향한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며 씁쓸한 와중에도 낙관적 자세를 다짐했다. - [憂弱]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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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의 사회과학적 용어가 다 그렇지만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는 확연히 달라지게 된다. 오늘날 많은 논란이 되고 있는 신자유주의도 그 중 하나다. 정말 신축성이 뛰어난 고무줄마냥 이 용어에 대한 해석은 엄청난 탄력성을 보여준다.^^; 유시민 선생의 “한 점의 오류도 없는 사상이나 단 한 톨의 진실도 담지 않은 사상은 없다”는 말을 믿는 나로서는 설령 신자유주의가 진보진영에서 외치는 것처럼 나쁜 점만 가득하다 할지라도 몇 톨의 진실을 줍기 위해 기웃거려볼 생각이다. 하지만 내 생각에 신자유주의가 몇 톨의 진실만을 담고 있는 것으로 폄하되기는 힘들 것 같다. (사실 고작 한 두 톨 정도의 진실만을 담은 사상은 생산성이 너무 떨어지기 때문에 머지 않아 적실성을 잃고 퇴출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사라질 운명이라도 잠시라도 제 목소리를 낼 기회를 주는 것이 바로 사상의 자유시장이다)


내가 얼치기 경영학도로서 배운 몇 안 되는 것 중의 하나는 수익자부담과 참여자보상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 조직은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인센티브 없는 곳에 열심히 일할 유인이 좀처럼 생기지 않고, 경쟁의 압력을 받지 않고 있는 개인이나 조직은 비효율에 수렁에 빠지게 마련이다. 이건 성선설 혹은 성악설의 문제가 아니라 자연스런 인간의 귀차니즘일 것이다. 여기에 도덕적 가치판단을 내리는 것은 부적절하다. (나는 선악이 개인의 의지 이외의 어떤 것에 귀속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인간 본성에 선에 대한 능력, 악에 대한 능력이 동시에 있다고 말한 칸트의 성무선악설을 지지한다) 인간의 이러한 편안함에 대한 욕망이 비루하다고 한탄할 수 있을지 몰라도, 나쁜 것이니 제거해야 한다고 난리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사실 귀찮음을 제거하려는 노력이 인간의 진보를 가져왔다는 것을 부인하기 힘들다.


신자유주의는 악의 화신도 아닐 것이고, 그렇다고 만병통치약은 더더욱 아닐 것이다. 하지만 신자유주의가 세계경제의 주도적 흐름이 되어 우리의 선택을 강요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명색이 사회주의 국가라는 중국이 돈맛을 알면서 각종 개방정책과 외자유치에 두 발 벗고 나서고, 시장경제 도입에 박차를 가하는 모습은 우리의 감상과는 별개로 엄연한 현실이다. 이런 중국의 거센 도전에 우리 기업들이 위기의식을 갖고 있다는 것도 외면하고 싶지만 분명한 현실이다. 결국 신자유주의가 천민 자본주의나 부박한 경쟁일변도의 논리로 전락하지 않도록 감시하는 수밖에 없다. 물론 대전제인 상도덕이 바로잡힌 사회부터 만드는 것이 급선무이다. 사실 이것도 제대로 안된 흙에 신자유주의라는 나무를 심으려고 하니 제대로 자랄 리가 없다.


혹자는 신자유주의가 WTO로 대표되는 미국 주도의 세계화라고 비판한다. 물론 그런 측면이 다분하고 그것이 그리 달갑지는 않다. 어차피 우리 주도가 아닌 이상 남이 하는 일이 무조건 좋게 보이는 것도 배알이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거부하겠다는 것은 머리가 없는 짓이다. 약간 옆으로 새자면 미국의 패권이 쇠퇴한 뒤에도 자유무역질서가 영향력을 끼칠 수 있을 것인가는 국제정치경제분야의 뜨거운 감자다. 현실주의자들이 WTO 같은 국제 레짐(regime)은 패권국의 운명과 같이 한다는 입장인 반면, 자유주의자들은 국제 레짐이 독자적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내가 보기에 자유무역질서가 살림살이에 보탬이 된다면 미국 패권의 지속 여부와는 관계없이 계속 유지할 유인이 생길 것이다. 솔직히 자유무역질서가 미국의 지원 없이도 제 앞가림 할 수 있을지를 확신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미국과 함께 촉석루를 등지며 남강으로 뛰어들지는 않을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미국의 이익에 봉사한다는 명제는 타당하지만, 미국만의 이익에 목매달고 있다는 명제는 타당하지 않다.


경영학은 제한적인 합리성(Bounded Rationality)을 가진 인간을 가정한다고 한다. 시장도 정부도 불완전하다. 인위적 질서인 국가가 그런 것처럼 자생적 질서인 시장 역시 완전무결한 존재는 아니며, 시장과 정부는 서로 대립하면서도 의존하는 관계일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당연한 결과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합리성에 한계가 있는 이상 시장의 오바(over)와 정부의 삽질을 적절히 제어하는 것도 사실 불완전할 것이다. 그러나 부지런히 감시의 눈빛을 보낸다면 오류의 폭은 줄어들 것이며, 효용의 수준은 늘어날 것이다.


칼 포퍼의 점진적 사회공학에는 두 가지 전제가 있다. 첫째는 추상적인 선의 실현을 위해 힘쓰지 말고 구체적인 악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모든 악은 직접적인 수단에 의해 제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미래의 유토피아 건설로 악을 간접적으로 제거할 생각말고, 오늘의 희생을 쥐어 짜내기보다 지금의 고통을 덜어내는 데 힘쓰라는 것이다. 이는 고종석 선생의 선을 증진시키려는 노력은 악을 감소시켜려는 노력으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말과도 상통한다. 기쁨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슬픔을 더는 세상은 개개인을 조정하여 세상을 바르게 만들 수 있다는 ‘치명적 자만’을 버리는 것에서 시작한다.


나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찬반을 떠나 점진적 사회공학으로서의 순기능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으면 한다. (물론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순기능은 보잘 것 없는 것으로 생각들 하시겠지만 말이다) 신자유주의가 사회적 약자에게 그리 따뜻한 눈길을 보내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것은 기업가에게 사회적 책임을 강제하는 것만큼이나 억지스런 짓이다. 그러나 신자유주의가 낮은 사람들에게 발길질까지 해대는 것은 반대한다. 적어도 균등한 기회를 주고 노력한 만큼의 대가를 수확할 수 있는 풍토를 조성하는 것이 신자유주의가 주창하는 자유경쟁의 원리일 것이다. 냉정한 자기책임의 원칙을 역설하기 전에 우선 상도덕이 바로잡힌 시장 구축에 힘써야 한다.


신자유주의가 공짜 점심을 먹으려는 자들에게 칼로 작용한다면 환영할 일이다. 치열하게 사는 사람들에게 합당한 보상이 주어지는 사회, 성실한 사람에게 균등한 기회가 주어지고 투명하게 평가되는 사회, 상도덕을 어긴 자들에게는 엄중한 문책과 퇴출이 이루어지는 사회라면 나는 기꺼이 받아들이겠다. 그러나 신자유주의가 일부 광신적 시장주의자들의 도피처가 되고, 일부 자본가들의 식탁만을 풍성하게 하는 수단으로 전락한다면, 정치만능주의에 대항한답시고 경제만능주의에 빠져버린다면 나는 열심히 구박하겠다.


모든 주의주장이 그렇듯이 실재를 보다 명확하게 해석하는 능력과 더불어 보다 많은 이들의 후생을 증진시킬 수 있는 실력을 갖춘 사상만이 생명력을 얻을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그 선의에도 불구하고 천박한 경제만능주의로 빠진다면 매섭게 비판해야겠지만, 공정한 게임의 규칙이 적용되는 자유경쟁의 제도화에 힘쓴다면 응원할 생각이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우상을 섬기는 이들 상당수가 가진 자의 더 큰 자유만을 옹호할 때 나는 곤혹스럽다. 알아서도 잘 살 사람들을 굳이 돕는 것은 자유주의 미감을 거스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저 내버려둬라(Laissez faire). 자유주의자가 할 일이 이 땅에 만연한 부자유를 제거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가진 자의 부자유보다는 못가진 자의 부자유를 제거하는 것에 우선순위를 두는 것이 맞다.


자유는 본질적으로 차이를 낳고, 이 차이에는 여러 종류의 불평등이 포함된다. 그러나 진정한 자유주의자는 이 차이가 차별이 되는 것을 막고, 불평등이 계속 고착화되는 것에도 고개를 가로 저어야 한다. 과연 신자유주의라는 이름 하에 행해지는 것들이 자유주의 미감을 얼마나 구현해낼 수 있을지 좀 더 두고봐야겠다. 자유주의 미감이라 함은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물론 째려 볼 수 있는 역량을 갖추려면 우선 나부터 열심히 공부해야겠다.^^ - [憂弱]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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