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런치만이 쓴 『1453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2004, 갈라파고스)에는 비잔티움이 서방의 지원을 얻기 위해 교회통합 문제에 매달리는 대목이 나온다. 동서 기독교계는 각종 교리 해석과 실천 문제를 놓고 갈렸다. 속인(俗人) 사제의 혼인에 대해 논쟁했고, 성찬용 빵이 발효된 것이어야 하느냐 아니냐를 놓고도 다퉜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교권의 문제였다. 로마 주교(교황)의 위상을 놓고 양측은 물러설 수 없었다. 동방 정교회는 모든 주교는 기본적으로 동등하다고 믿었고, 로마 주교는 수석의 지위를 가질 뿐 최고의 수장으로 여기지 않았다. 반면에 교황의 절대적 권위를 주창하는 서방 교회는 이를 양보하지 않았다. 비잔티움의 요안네스 8세는 서방 국가들의 지원을 얻기 위해 동서 교회통합을 억지로 추진했다. 비잔티움의 많은 지식인들이 반발했고 시민들은 분열했다.


오스만 투르크에게 함락되던 1453년까지 콘스탄티노플이 그토록 갈망하던 서방의 도움은 거의 없었다고 역사는 증언한다. 신뢰와 존중을 바탕으로 한 화해가 아닌 꿍꿍이로 맺어진 통합이 얼마나 실속 없는지를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까 싶다.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기 전날 밤 소피아 성당은 북적였다. 라틴인과 통합론자들이 더럽힌 곳에서 예배를 볼 수 없다는 독실한 그리스인들도 이날만은 소피아 성당에서 기도했다. 교회통합을 반대했던 사제들도 교회통합파와 함께 예배를 보았다. 글쓴이는 콘스탄티노플에서 동서 교회통합이 이루어졌다고 사뭇 비장하게 전한다. 그러나 이건 미화된 묘사일 뿐 하룻밤의 일치로 이네들의 갈등을 다 메우지 못했음은 분명하다. 다만 외침의 공포로 말미암아 내부에서 티격태격할 동력을 잃었을 뿐이다. 제국의 최후를 함께 하는 유대감 정도로 이해하면 그만이다.


뜬금없이 옛날이야기를 꺼내든 까닭은 오늘날의 현실이 갑갑해서다. 입으로는 거대 여당을 견제하겠다는 이들이 서로 앙금을 남기는 모습이 안타깝다. 10·28 재보선에서 야권은 결국 후보 단일화에 실패했다. 이들에게는 소피아 성당에서의 맞잡음 정도도 보이지 않았다. 물론 현 시국에서 여권의 위세를 오스만 제국의 압박에 빗대는 건 다소 무리가 있지만 말이다. 야권은 단일화 협상이 끝내 무산된 경기 안산 상록을의 교훈을 새겨야 한다. 일단 후보를 출마시킨 다음에 합치는 것은 너무 어려운 길임을 새삼 확인했다. 2010년 지방선거에서는 지금보다 더 많은 행위자가 뛰어들 공산이 크다. 지역구 한 곳에서도 이렇게 진통을 겪는데 협상 주체가 더 늘어날 전국 단위의 선거에서 과연 얼마나 통합을 성사시킬 수 있을지 걱정이다.


수도권에서 민주당이 의외의 쾌승을 거뒀다. 민주당과 진보정당 사이에서 고민했던 유권자들이 사표를 방지하겠다는 선택을 내린 덕이 크다. 안산 상록을에서 후보 개인의 경쟁력에다 민주노동당, 창조한국당, 진보신당의 지원이 합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임종인 후보가 15.57%의 득표에 그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수치는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는 진보정당이 사표 심리의 풍파를 견뎌내고 얻어낼 수 있는 표의 정점에 가까워 보인다. 지역구에서 임종인 후보만한 인지도를 갖춘 데다 야3당이 일치단결할 수 있는 상황이 모두 맞아떨어지는 경우는 흔치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경남 양산에서 민주당 송인배 후보가 한나라당 박희태 후보에게 4% 포인트 차이로 석패하며 선전한 것도 민주노동당 박승흡 후보를 1순위로 지지하던 유권자들이 힘을 실어준 덕분이다.


그렇다면 민주당이 지금의 작은 승리를 넘치게 기뻐할 필요는 없다. 정부 여당의 실정으로 말미암아 한나라당 일당 독주 분위기에서 한나라당 대 비한나라당이 비등한 수준이 된 것은 그나마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이는 결국 예의 사표 논쟁이 다시 불거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민주당 정세균 대표는 최근 저서에서 “과거의 민주연합, 지역연합을 뛰어넘는” 연합으로서 “민생을 중심으로 한 연합”을 제안했다. 민생연합을 통해 양당구도를 복원하겠다는 계획은 현 시점에서 가장 유효적절한 비전 가운데 하나다. 이를 위해서는 때때로 민주당이 기득권을 내어놓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사표 심리가 결국 민주당의 이익으로 이어진다는 안일한 태도를 버려야 한다. 제1야당이 선거연합을 통해 당력을 선택적으로 집중할 수 있다면 한결 전략적으로 선거에 임할 수 있을 것이다.


단순화해서 말하자면 현재의 정치 구도는 1990년에 민주정의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이 합당한 것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3당 합당으로 탄생한 민주자유당을 계승한 한나라당이 비교적 풍요로운 곳간을 자랑하는 것은 영남의 고정표가 있기 때문이다. 3당 합당 당시 대구 경북이 여당 정서가 강했다면 김영삼 전 대통령이 활약하던 부산 경남은 야당 정서가 상당했다. 통일민주당이 평화민주당과 민주정의당의 중간쯤이라고 본다면, 야당 진영에서 김영삼 중심의 영남 민주계가 이탈하면서 형성된 구도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18대 국회의원 지역구 의석수를 살펴보면 영남이 68석으로 호남, 충청, 강원, 제주 지역을 모두 합친 66석보다 많다. 여기다가 정부 여당이 세종시를 흔들면서 수도권 지역주의를 부추기는 것도 한나라당 입장에서는 크게 손해 볼 것 없는 장사다.


이와 같은 독점적 이윤의 발생은 한국 정치의 발전을 위해 바람직하지 않다. 사분오열된 야권이 거대 여당을 이길 생각은 포기하고 그에 ‘버금’가려는, 즉 2등이나 하는 경쟁에 함몰된다면 끔찍하다. 이제 힘을 모으면 ‘으뜸’이 될 수 있는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백낙청 선생은 『한반도식 통일, 현재진행형』에서 한국사회의 개혁을 위해 민족통일을 중시하는 자주파인 NL, 노동자 농민의 권익을 중시하는 평등파인 PD, 개량주의 시민운동 및 온건개혁세력인 BD(부르주아 민주주의)의 3자 결합을 제안했다. 특히 BD는 하나의 단일한 세력으로 보기 힘들만큼 다채로워 정리하기가 까다롭다. 그럼에도 이들이 모두 힘을 합치지 않으면 한나라당을 효과적으로 견제할 수 없음은 분명하다. 견제 받지 않는 권력이 얼마나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드는지 우리는 생생히 지켜보는 중이다.


자기 의사를 온전히 실현하지 못하는 건 가슴 아픈 일이다. 그러나 완전히 실현하지 못하는 건 더욱 애통한 일이다. 야권 연대 논의 과정에서 가장 많이 내어 놓아야 하면서도 가장 얻을 것이 많을 민주당이 좀 더 분발하길 바란다. - [無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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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소개서를 쓰다가

일기 2009. 11. 5. 03:07 |

주로 가으내 진행되는 자기소개서 집필은 신추문예(新秋文藝)에 빗댈 만하다. 그만큼 문학성(?)이 만개하는 글이다. 허풍이 폭넓게 허용되기는 하지만 혼자서 몰래 읽어야 할 법한 공상과학소설을 남에게 내는 민망한 기분은 나 혼자만의 감상은 아닐 게다. 그래 놓고도 미처 하지 못한 말이 있다며 아쉬워할 때는 이따금 황당하다. 지난달에 대학원 진학을 위해 자소서 한 부를 탈고하면서 여러모로 괴로웠다. 하지만 내 자신에게 이런저런 물음을 던지는 즐거운 시간이기도 했다.


공자가 존경했다는 거백옥은 예순이 될 때까지 육십 번을 변해 오십 구년의 잘못을 깨달았다고 한다. 꼭 자기소개서 방식이 아니더라도 스스로를 돌아보는 기회를 종종 만들어서 지난날의 잘잘못을 조회해보면 좋겠다. 미국에서는 인생 목표를 구체적으로 글을 써서 소지한 사람이 나중에 살펴보니 경제적인 부를 누리고 있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진정한 성공이라고 보기에 성급하다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내 꿈을 몇 줄 글로 압축해서 써둔다면 자신이 할 일과 하지 않을 일을 좀 더 또렷하게 정리하는데 도움이 된다.


자기소개서를 쓰면서 내 과거로 눈길을 돌려보니 아쉬운 지점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세속적으로 인정받는 증서들을 좀 모았으면 어땠을까 싶었다. 가령 컴퓨터 자격증이나 중국어 급수를 획득하는 식의 몸짓 말이다. 이른바 스펙을 쌓으려는 정성이 다른 사람에게 으스대기 위한, 남을 이기기 위한 위인지학(爲人之學)으로 전락하지 않도록 경계하면서도 말이다. 아무리 출중한 심사위원이라도 나의 내면을 헤집을 수는 없는 노릇일 테고 일차적으로는 그런 유의 공인된 능력을 평가할 수밖에 없으리라.


장자는 쓸모없음을 알아야 비로소 쓸모 있음을 말할 수 있다고 설파했다. 발이 닿는 쓸모 있는 땅만 남겨놓고 그 둘레를 다 파서 없앤다면 딛고 있는 땅이 쓸모없어지고 만다는 비유를 들었다. 내 배부른 소리들과 투덜대던 기억 모두가 나를 채워왔던 일들이다. 나 같이 미욱한 인간을 지탱하는데도 이렇게 많은 것들이 들어가다니 그저 두려울 따름이다. 그래도 자기소개서를 쓰는 순간만큼은 그 두려움이 곧잘 넋두리로 변모한다. 쓸모없어 보였던 나의 행동들이 앞으로 내가 발을 좀 더 내딛을 수 있도록 넓혀둔 터전이라고 넉넉하게 여기기가 쉽지만은 않다.


답답한 마음에 5년쯤, 아니 한 1~2년쯤 시간을 돌릴 수 있으면 어떨까라는 상상을 해봤다. 하지만 “어쩌면 모든 사람의 길은 십 년, 아니 이십 년을 거꾸로 돌릴 수 있다 한들, 지금의 그 길로 다시 갈 수밖에 없을는지 모른다”라는 황주리 선생님의 <마흔 살의 자화상> 한 구절을 접하고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필연적인 귀결을 옹호하지는 않더라도 현재 머무는 내 자리에 감사하는 계기로 삼았다. 첫길을 찾아나서는 일만큼이나 지금 거니는 길을 긍정하는 건 용기가 필요한 모양이다. 절차에 일부 하자가 있지만 유효하다는 말은 자기소개서 쓸 때나 통용된다. 한 개인에게는 제 삶을 무효로 할 권한이 없는지도 모른다.


(미취업이 아닌) 비취업자로 지내는 날이 하루하루 더해지면서 내 본업(?)이 무엇인지 알 길이 없어져서 곤혹스럽다. 그간 내 생활에 응용해온 3M의 15% 원칙을 더 이상 적용할 수 없어졌기 때문이다. 3M이 근무시간의 15%를 자신의 업무와는 무관한 관심 분야에 투자하도록 독려함으로써 새로운 아이디어를 양산하다 보니 포스트잇도 개발하게 되었다는 사례를 슬며시 따라해 왔는데 지금은 그 15%를 산정할 수 없지 뭔가. 한국일보 최윤필 기자님의 연재물 제목처럼 도무지 내 ‘바깥’을 더듬기가 힘들다. 이미 변두리로 나와 있기 때문일까. 그러고 보니 대다수의 자기소개서는 자신이 울타리 안에 성실히 머물렀음을 호소하는 편이다.


207년 삼고초려를 역사적 사실로 인정할 때 제갈공명이 출사한 나이는 27세로 딱 내 또래였다. 당시 기준으로 볼 때 공명이 젊은 날에 활약했다고 보기는 힘들 듯싶다. 삼국시대에서 젊은 날 대성한 사람으로 26세에 사망한 손권의 형 손책이나 24세에 요절한 천재 철학자 왕필 등이 있다. 물론 이런 분들만 있는 건 아니고 위나라 장수 등애가 촉한을 정벌했을 때 연세가 68세였는데 내게 위안을 주는 인물이다. 대기만성이란 말은 게으른 자들의 마지막 피난처인 셈이다.


『삼국지연의』의 공명은 “큰 꿈을 누가 먼저 깨닫는가/ 일평생 내 스스로 알고 있다네/ 초당에 봄잠이 넉넉한데/ 창밖에 해는 아직도 더디 가는구나(大夢誰先覺 平生我自知 草堂春睡足 窓外日遲遲)”라고 멋있게 시 한편 읊으면서 세상에 나온다. 이만하면 꽤 멋진 자기소개서다. 유비를 따라나선 자신이 세상의 먼지에 뒤덮일 것을 자조하면서도 포부를 실현하려고 일어서는 모습이 애틋하다. 설령 공명만큼의 재주가 없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파에 찌들면서 어떤 식으로든 자기 분야에서 유능해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는 젊은이들이 거드럭거릴 틈을 주지 않고, 무용함은 죄악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일정한 생활 근거가 없으면 한결같은 마음이 없어진다(無恒産無恒心)”라는 맹자의 말씀처럼 젊은이들의 항산(살아갈 수 있는 생업)을 마련하기 위해 각계각층이 뜻을 모으는 노력은 계속해야 한다. 하지만 현재 상황이 단지 항산이 모자라서 생기는 문제만은 아닌 듯싶다. 항산과 항심의 선후관계가 뒤집어질 이유는 없더라도 항심에 대한 관심도 종요롭다. 항산은 결국 항심으로 이어지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형사법의 고전 체사레 베카리아의 『범죄와 형벌』은 그의 나이 27세(한국 나이)에 출간한 책이다. 이 사실을 알고 나서 당분간은 작가의 처녀작이 언제 나왔는지 찾아보는 걸 자제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이 역시 자신의 고민을 치열하게 녹여낸 한 편의 자기소개서다. 사색의 이력을 이렇게 아담하고 간명한 소책자로 엮어낼 수 있다니 참 부럽다. 닮고 싶은 사람을 좇아가려고 애쓰는 것과 그냥 비교하고 괴로워하는 것과는 분명 차이가 난다. 굳이 비교를 하려거든 남보다는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의 자기를 대상으로 삼아야겠다.


나는 며칠 내로 자기소개서 한 부를 완성해야 한다. 괄목상대(刮目相對)라는 말이 있지만 사흘은커녕 한 달이 지나도록 눈을 비빌 만한 발전을 이루지는 못했다. 늘어난 게 있다면 나를 좀 더 분칠하는 기예인지도 모르겠다. 비록 내 항산이 조금 모자라도 내가 품은 항심이 제법 빼어나다는 점을 담아내고 싶다. 그래야만 분식(粉飾) 자기소개서를 면할 수 있으리라. 그 덕분에 배움의 기회를 얻어서 내 가슴이 뛰는 공부, 위기지학(爲己之學)을 하겠다며 뻐기는 날이 오기를 희망한다. 아직 자기소개서에서 해방되지 못한 친구들, 모두 힘냅시다!^-^ - [無棄]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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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중립을 위하여

2009. 10. 6. 08:52 |

2009년 9월 22일 전국공무원노조, 민주공무원노조, 법원공무원노조가 하나로 통합해 민주노총에 가입하기로 결정했다. 현행법상 별다른 문제가 없는 정상적인 노조활동을 두고 정부는 온갖 험담을 늘어놓았다. 한나라당과 정책연합을 하고 있는 한국노총에도 이미 공무원 노조가 포함되어 있다는 엄연한 사실을 망각한 처사였다. 한국노총에 견주어 좀 더 대정부 투쟁을 많이 하는 민주노총에 대한 거부감이 아니고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10월 5일 국회 행정안전위의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대한 국정감사에서는 선관위 노조의 상급단체인 전국민주공무원노조가 이번 결정으로 인해 민주노총의 일원이 되기로 한 것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다.


고도의 정치적 중립성을 유지해야 할 선관위 직원이 민주노총 소속원이 되면 선거관리의 공정성이 훼손될 것이라는 이유다. 신지호 의원은 “법관, 검사, 경찰 등 특정직 공무원들처럼 선관위 공무원의 노조 가입을 금지하도록 국가공무원법 개정을 추진하겠다”라고 말하기도 했지만 이런 식의 규율 위주의 사고는 조심스럽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정부가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 의무를 구체화하는 법률 개정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현재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을 국가공무원법과 공무원노조법에서 규정하고 있으나 범위와 내용이 명확하지 않다”라는 충정은 이해할 만하다. 정부가 구체적인 기준을 마련하려는 움직임 자체는 반갑지만, 정부의 작업이 공무원의 정치적 자유를 옥죄는 방향으로만 나아갈 공산이 커서 걱정스럽다.


현행 공직선거법 제9조는 “공무원 기타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하는 자(기관·단체를 포함한다)는 선거에 대한 부당한 영향력의 행사 기타 선거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하여서는 아니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국가공무원법 제65조와 지방공무원법 제57조는 ‘정치운동의 금지’ 조항을 두어 공무원이 정당이나 정치단체의 결성에 관여하거나 가입할 수 없으며, 선거에서 특정 정당 또는 특정인을 지지하거나 반대하기 위한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고 명시했다. 공무원의 노동조합 설립 및 운영 등에 관한 법률 제4조와 교원의 노동조합 설립 및 운영 등에 관한 법률 제3조는 ‘정치활동의 금지’을 두었다. 공무원과 교사에게 너무 초인적인 중립의무를 지운다는 느낌을 준다.


‘정치운동’과 ‘정치활동’이 다른 법개념이라고 할 때, 정치활동이 좀 더 범위가 넓다면 어디까지 선을 그을지에 대한 합의를 모색할 시점이다. 통합공무원노조가 자신들의 후생복지와 무관한 정책에 대한 비판을 할 때 정치활동인지 아닌지 판단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정치적인 행위가 아닌 것이 없기 때문에 정치활동을 넓게 보면 볼수록 공무원들의 정치적 자유는 제약된다. 행정국가화 경향이 나타남에 따라 공무원의 자율적 책임이 두드러지는 추세에 따라 정치적 중립성 못지않게 시민의 요구에 대한 응답성이 중시되어 행정과 정치는 맞닿을 가능성이 높다. 타율적 통제로 억눌러 ‘영혼이 없는 공무원’을 양산하기보다 공무원의 영혼을 키우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2008년 1월 17일 헌법재판소는 고 노무현 대통령이 청구한 헌법소원을 기각했다. 헌재는 대통령의 선거중립의무를 규정한 공직선거법 제9조 제1항은 명확성의 원칙과 과잉금지의 원칙에 위배되지 않아 합헌이라 결정했다. 대통령의 선거중립의무를 정치활동의 자유보다 우위에 둔 셈이다. 재판부는 “선거활동에 관해 대통령의 정치활동의 자유와 선거중립의무가 충돌하는 경우에는 선거중립의무가 우선돼야 한다”라고 천명하며 선거의 공정성이 중요함을 강조했다. 지난 2004년에도 탄핵 심판에서도 공무원의 중립의무 위반 여부가 쟁점이었음을 떠올려 보면 정치적 중립의무에 대해 다시금 환기한 사건이다.


이 공방이 벌어지기 전인 2007년 3월 노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국무위원급 행정 지도자는 정치와 무관할 수 없다”라고 주장했다. 정치와 행정의 관계에 대해서는 많은 논쟁거리가 존재하겠으나 장관 같은 고도의 정책결정자가 현실 정치에 어느 정도 관련이 있다는 점은 또렷하다. 헌재의 결정도 이러한 속성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보다 근본적 문제는 선출직 공무원이 누리는 정치적 자유에 견주어 일반직 공무원들이 누리는 자유의 크기가 너무 작다는 데 있다. 당시 청와대가 정치에 무조건(!) 무관해야 하는 하위직 공무원들의 처지를 먼저 헤아렸으면 좋았을 게다. 이것이 헌재 결정 직후 청와대가 발표한 “성숙한 민주주의로 가기 위한 정치적 자유 보장과 우리 사회의 후진적 정치체계에 대한 논의는 계속돼야 한다”라는 의견에 좀 더 부합한다.


일전에 민주노동당이 교사와 공무원을 대상으로 한 당우(黨友) 제도의 적법성 여부에 논란이 된 적이 있다. 민노당은 교사와 공무원의 정치활동이 원천봉쇄된 것에 대한 문제의식을 줄기차게 내놓았다. 우리 법체계는 공무원의 정치활동과 관련해서 자유의사에 따른 투표만 겨우 보장하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규제가 심하다. 일본이 우리와 비슷한 정도로 제한하고 있다고 하지만 공직선거법 제60조에 규정된 선거운동을 할 수 없는 자를 살펴보면 정치적 행위를 금지하는 직역은 우리가 더 광범위하다. 일본의 법제에 영향을 준 미국의 해치법(Hatch Act)이 1993년 대폭 개정되어 정치적 중립의무보다 정치적 기본권을 보장하는 쪽으로 나아간 점을 곱씹어 볼 때 우리나라는 선진 민주국가들 가운데 광범위하게 정치적 자유를 억압하는 편이다.


서구에는 한국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정치활동을 열어둔 나라들이 많지만 특히 영국에 눈길이 간다. 영국은 공무원을 세 개의 계층으로 나눠 정치적 자유를 서로 다르게 부여한다. 하위직에게는 정치활동을 완전히 보장하지만, 중간직은 입후보를 제외한 기타의 정치활동은 허가를 얻어 할 수 있게 했다. 정책 결정과 가장 관련이 깊은 고위직은 정당 가입은 인정하나 그 외 활동은 비교적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 이러한 영국식 발상을 우리도 빌려 쓰면 어떨까 싶다. 정치적 기본권이 애틋하기는 지위 높낮이를 떠나 매한가지겠으나 그것의 확대는 하위직 공무원부터 서둘러야 한다. 정치적 자유는 대학 교수와 국무위원들만 향유하기에는 너무 귀중하다. 고위직 공무원은 정책 결정 과정에서 여당과의 조율에 참여하는 등 정치활동을 수행하는 측면이 적잖다. 정치적 중립에 대한 감시가 요구된다면 그 우선순위는 정책결정권을 가진 고위직 공무원이어야 한다.


탄핵 정국과 맞물린 2004년 총선에서는 공무원의 정치 참여에 대한 논쟁이 뜨거웠다. 획일적인 정치활동 금지가 정치적 중립성 확보를 위한 필수적인 요건인지에 대한 의문을 품어봄 직하다. 2004년 3월 25일 헌재는 초중고 교사의 정당 가입이나 선거운동을 금지한 정당법과 선거법이 합헌이라고 결정했다. 교원의 정치 참여가 학습권이라는 또 다른 기본권을 침해할 수 있다는 헌재의 고뇌에 동감한다. 하지만 수업권 혹은 교육권을 헌법적 권리라고 인정하더라도 참정권을 일방적으로 제한할 수는 없다고 본다. 헌재는 입법론적인 재검토를 주문했지만 해석론적으로 위헌이라 보는 견해도 적잖다. “공무원의 신분과 정치적 중립성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보장된다”라고 한 대한민국 헌법 제7조 제2항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를 두고 다툰다.


헌재는 헌법 제7조 제2항을 권리가 아닌 의무로 해석했다. 그런데 다른 헌법조문들을 살펴보면 제6조 제2항(외국인의 지위), 제8조 제1항(복수정당제 허용)에서 “보장된다”라고 말할 때 여기서 의무가 도출되지 않는다. 반면에 제38조(납세의 의무)와 제39조 제1항(국방의 의무)에서는 “의무를 진다”라고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의무를 보장한다는 건 대다수 한국어 사용자들의 상식에 어긋난다. 권리를 보장하고 보호하는 것이며, 의무는 부과하고 부담하는 것으로 쓰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제7조 제2항은 권력이 공무원에게 정치적 간섭을 행사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공무원이 특정 계층이나 정파의 이익에 복무하지 않고 국민 전체를 위해 봉사할 수 있도록 보호하기 위한 방어막으로서의 성격이 짙다고 생각한다.


정치적 중립 조항은 제정헌법에는 없었으나 1960년 3·15 부정선거를 겪은 후에 신설됐다. 공무원들이 선거에 동원되어 집권 여당의 이익에 복무하는 폐단을 막으려는 의도였다. 군사정권에서도 관권선거가 이어졌기에 87년 헌법 개정까지 그대로 뒀다. 오늘날 공무원의 정치적 개입보다는 정치적 권리의 행사가 좀 더 화두가 되고 있는 추세다. 헌법과 법률을 해석할 때 하나의 정답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잇따른 헌재 판결을 승복하면서도 공론화 하려는 시도는 별개의 문제다. 헌법 제7조 제2항에 권리와 의무가 혼합되었다고 하더라도 권리에 쌀쌀맞았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의무를 얹을 때는 재빠르면서 권리를 건넬 때는 머뭇거린다면 법치국가라는 위상이 초라하다. 제7조 제2항을 공무원에게 영혼이 있더라도 불이익을 당하지 않는다는 논거로 활용하면 어떨까 싶다.


불안정한 고용 사정과 맞물려 취업준비생들에게 공무원이 선망의 대상이 된지 오래다. 부러운 존재인 공무원의 정치적 기본권까지 두둔하기란 정말 어렵다. 업무상 정치적 중립성을 지키면서 개인적으로는 정치적 행위를 하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한 의문도 여전하다. 공무원의 직무 특성상 정치행위와 업무행위를 구분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의무에 제약을 받는 만큼 신분과 정년을 보장받는다는 항변도 수긍할 만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공무원의 정치활동 자체를 금지하는데 반대해야 한다. 우리는 공무원에게 직무와 관련한 공정성과 능률성을 요청할 수는 있어도 거의 모든 정치행위를 금지해 그네들의 헌법상 참정권과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수는 없다. 국민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집단의 자유를 일괄적으로 제한하는 단순함이 마땅한지를 놓고 찬찬한 성찰이 필요하다. 더군다나 헌법 제37조 제2항의 기본권 제한에 대한 원칙에는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할 수 없다고 하지 않는가.


최근에 신설된 국가공무원법 제59조의2 제1항은 “공무원은 종교에 따른 차별 없이 직무를 수행하여야 한다”라며 공무원에게 종교중립의 의무를 부여했다. 이 조항은 공무원의 종교활동에 대한 어떠한 한계를 두지 않는다. 종교의 자유와 종교의 중립이 함께 추구될 수 있는 가치임을 잘 나타낸다. 정치적 자유와 정치적 중립 역시 크게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 공무원이 정치적 성향에 따른 차별 없이 직무를 수행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는 큰 이견이 없겠지만 한국이 선진 민주국가 중에서 가장 엄격히 정치적 자유를 제약할 근거가 튼실한지를 캐물어 보자. 지금처럼 정치활동을 전면적으로 불허하기보다는 공무원의 지위를 이용하거나 직무수행에 지장을 주는 정치활동만 규제하는 것이 옳다.


다시 말해 공무원의 직무수행과 관련이 없는 정치활동을 일부 허용해야 한다. 먼저 정치적 견해를 표명할 자유는 폭넓게 보장하도록 애써야 한다. 단순한 개인 수준과 노조 같은 단체 수준의 차이를 둘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이 자유의 핵심은 정부 여당의 정책에 찬성할 자유가 아니라 반대할 자유를 보장하는데 있다. 교사들의 시국선언을 단죄하는데 급급한 모습이 볼썽사납다. 그 다음에는 하위직 공무원을 필두로 가장 낮은 단계의 정치운동이라고 할 만한 정당 가입이나 정치자금 기부를 허용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단체 수준의 집단적 행동이 부담스럽다면 개개인이 자신의 신념에 따라 하는 것부터라도 인정하자. 이는 내 개인적인 주장일 뿐이지만 적어도 무조건 안 된다는 접근보다는 헌법정신을 구현하는 길에서 가깝다고 믿는다. - [無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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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삼월 초에 ㅊ역에서 놀라운 게임기를 발견했다. 집게발이 달린 뽑기 기계에다 물을 채우고 바닷가재를 넣어 두었다. 불결한 공간에서 괴롭힘을 당하며 마지막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던 바닷가재가 너무 측은했다. 배병삼 선생님의 어느 칼럼 제목인 ‘먹을거리에 대한 예의’가 너무 없는 그 비정한 게임기가 미웠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런 종류의 게임기가 한 때 유행처럼 퍼지기도 한 모양이다. 불행 중 다행인지 ㄴ역에서 본 바닷가재 게임기의 수질은 그나마 나아 보였다. 게임기에서 뽑은 바닷가재를 방생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볼 때 어차피 조리될 운명이라면 남은 생애를 굳이 저런 곳에 가둬야할까 싶다. 위생상의 문제 때문에 조리하지 않고 버려지는 경우도 부지기수이리라.


문득 광우병이 초식동물인 소에게 도살한 동물의 살과 뼈의 가루를 섞어 만든 사료를 먹인 일과 관련되었다는 조사가 기억났다. 2008년 광우병 파동 때 국민의 건강을 위해 비교적 안전하다고 여겨진 30개월 미만의 소만 수입해야 한다는 움직임도 소의 생명을 그만큼 단축하자는 뜻이니 따지고 보면 잔인한 말이었다. 물론 그 당시 시국이 여기까지 검토할 여유를 주지 않았지만 이제는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공장식 사육시스템에 대해 반대하는 목소리에도 차분히 귀를 기울여 볼만 하다. 강명관 선생님은 『시비를 던지다』에서 우리는 “미국이란 강자의 횡포를 통탄”하면서도 “우리 역시 동물에 대해 강자의 횡포를 부리고 있지는 않은가”라고 꼬집었는데 훌륭한 문제의식이라고 생각한다.


강 선생님은 이어서 『성호사설』 인사문(人事門) 식육(食肉)편을 인용한다. 성호 선생님은 만물이 사람을 위해 생겨났기 때문에 사람에게 먹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주장에 대한 정자(程子)의 논변을 소개한다. 정자는 사람을 물어뜯는 이[蝨]를 위해 사람이 생겨난 것은 아니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모기가 사람의 피를 먹고 산다고 사람이 모기를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닌 셈이다. 성호 선생님은 “고기를 먹음은 군자로서도 부득이한 일인 만큼, 또한 마땅히 부득이한 마음으로 먹어야 할 뿐이다”라고 역설한다. 성호 선생님이 오늘날의 넘치는 육식을 보신다면 약자의 살을 강자가 뜯어먹는 행위라고 비판했을 듯싶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절제는 미덕이다.
 

피터 싱어 선생님의 『동물해방』, 『죽음의 밥상』을 읽으며 여러모로 괴로웠다. 육식 애호가인 나는 혀의 만족을 끝내 극복하지 못하고 당장 육식을 그만 두는 데까지는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니 육식을 적극적으로 줄이려는 노력을 기울이지도 않은 듯싶다. 동물의 처우 개선을 바라는 나의 바람은 이토록 시시한 것이다. 이런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이 잡글을 쓰고 있는 까닭은 채식주의자에도 여러 무늬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동물성 단백질을 전혀 섭취하지 않는 비건(vegan)만 있는 게 아니라 조류와 어류만 먹는 사람, 어류만 먹는 사람, 우유와 달걀까지 먹는 사람, 우유까지 먹는 사람 등으로 나뉘었다. 마찬가지로 육식을 하는 사람 가운데는 방목된 고기만 먹는 사람, 덩어리로 된 고기는 먹지 않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다.


이런 다양한 층위의 노력을 보고 나도 먹을거리에 대한 예의를 요청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물복지 혹은 동물해방은 여러 빛깔이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 가령 육식을 하되 깐깐한 사람들처럼 낮은 단계의 동물복지를 실천하는 사람들은 동물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인간을 위한 것에 가까워 보인다. 분류하기에 따라 다르겠지만 동물권리론을 주창하는 분들은 이러한 인간 중심적 윤리를 비판하며 동물을 인간의 이익을 위해 어떤 식으로든 이용하지 말 것을 주문한다. 천부인권의 개념을 확장한 천부생명권(天賦生命權)이라고나 할까. 아마 강고한 채식주의자들은 동물권리론에 끄덕일 것이다. 그렇다고 인간의 이익을 위해 동물을 희생하는 현실은 인정하되 불필요한 고통을 줄이자는 동물복지론의 가치가 크게 떨어지지는 않는다.


단순히 인간이 안전하기 위해 동물의 처지를 개선하려는 사고를 뛰어넘어 먹을거리 앞에서 인간의 품격이나 기품을 갈구하는 게 더욱 인간다운 사회로 맞닿는 오솔길이 아닐까 싶다. 결국 동물해방을 인간이 덜 잔인해지는 방편이나 수단으로 삼는 셈인데 일단 이 정도부터 시작하는 것도 유의미한 시도다. 동물보호단체 휴메인소사이어티(HSUS)가 제안했던 고기를 덜 먹고(Reduce), 먹더라도 자연친화적으로 생산된 고기를 먹고(Refine), 가능하면 채식으로 식습관을 바꾸자(Replace)라는 ‘3R’에 이르지 못한다고 크게 자책하지 말자(동물실험의 3R 원칙을 응용한 듯하다). 티비 예능 프로그램에서 자연산(!)을 얼마나 맛있게 요리하는지 보여주려고 애쓰는 장면을 불편하게 바라보거나, 식당에서 고기반찬을 남기지 않도록 하는 일이 너무 시시하다고 여기지 말자.


19세기 노예해방, 20세기 여성해방에 이어 21세기는 동물해방의 시기가 될 것이라는 전망에 적잖이 동감한다. 한-EU FTA 협상에서 동물복지가 주요 의제로 채택되었고 앞으로의 국제무역협상에서도 제기가 될 가능성이 크다. 여기서의 동물복지는 동물이 사육·운송·도축 도중 받는 스트레스를 최소화하려는 노력을 일컫는다. 무역장벽이라는 험담도 들리지만 그런 곳에 관심을 두는 마음자리가 고맙다. 유럽인들이 동물을 사랑하는 현상의 근원이 제국주의 식민통치로 말미암아 쌓인 옹골진 경제적 풍요 덕분이라고 핀잔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이제 어느 정도 먹고 살만한 우리도 선진국의 배부른 소리를 경청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스트레스를 덜 받은 고기가 더 맛있다는 명분(?)도 나쁘게 볼 일은 아니다.


독일은 2002년에 동물에게도 인간과 같은 헌법적 권리를 주는 헌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이탈리아의 로마는 2005년에 관상용 물고기의 시력 보호를 위해 둥근 어항에서 살지 않을 권리를 부여했다. EU는 2009년부터 모든 가축 수송차량에 위성추적장치 부착을 의무화해서 수송 과정에서 가축들이 충분한 휴식을 취했는지 점검한다고 한다. 설령 위선일지라도 인간복지를 넘어 동물복지를 고민하는 그네들의 애틋함이 부럽다. 우리네 동물보호법은 아직 동물도 권리의 한 주체라고 보지는 않지만 앞으로 좀 더 그 방향으로 나아가길 기대한다. 동물실험에 대한 윤리성 및 신뢰성을 높이기 위해 2009년 3월부터 시행한 실험동물에 관한 법률도 반갑다.


개발도상국의 열악한 인권, 보다 가까이는 북한 어린이들의 참상을 틈틈이 목도하면서 감히 동물권을 논하는 것이 온당한지 망설여지기도 한다. 극단적인 동물권리론을 제외하고는 동물을 존중한답시고 인간과 동물을 일대일로 계산하지는 않지만 말이다. 게다가 꼭 인간과 동물의 상충관계만 상정할 이유는 없다. 인간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도 동물에게 이익을 주는 경우를 얼마든지 가정할 수 있다. 또한 인간의 이익과 동물의 이익이 병존할 여지도 얼마든지 존재한다. 『맹자』에는 제(齊)나라 선왕(宣王)이 제사에 쓰이기 위해 끌려가는 소를 가엷게 여겨 양으로 바꾸게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고사는 인간에게 별다른 피해를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동물에게도 딱히 더 이익이 돌아갔다고 보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소 대신 양이 죽음을 당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맹자는 눈앞의 소가 죽는 걸 차마 보기 어려운 마음이 어짊을 베푸는 실마리라고 평가했다.


“소는 보았고 양은 보지 못했다(見牛未見羊)”라는 구절에서 인간의 어쩔 수 없는 한계를 엿본다. 보지 못했던 양을 덜 불쌍히 여기는 건 너무 자연스러워서 당위적 혹은 합리적 가치를 들이대기 무안하다. 자기 둘레에 있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을 사랑한다는 것은 관념에 지나지 않을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이처럼 측은지심을 자기 주변부터 시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다 방점을 찍을 부분은 측은지심을 바지런히 넓히는 데 있다. 궁극적으로는 나와 덜 친밀한 것까지 측은지심을 품으려는 정성 말이다. 측은지심이 확산되는 순서는 매끄럽게 정해지기 힘들지만 동물 같이 힘없는 존재에 대한 윤리적 처우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회가 다른 사회적 약자를 보듬는 데도 열심이지 않을까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다시 말해 측은지심의 확산이 하나의 중심에서 퍼져나가는 동심원 구조라고 볼 필요는 없다. 게임처럼 1단계를 완료해서 2단계로 넘어가는 식은 아닐 듯싶다. 성차별과 인종차별의 문제를 모두 해결하고 동물차별 문제를 논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인간의 문제를 다 풀고 동물을 보듬는 날은 영원히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국내 경제가 충분히 성장하면 비로소 북한을 도울 수 있고, 통일까지 이뤄야 국제 구호에 나설 수 있는 것이 아니듯이, 인류가 충분히 평안해진 다음에 동물을 돌보겠다는 식의 엄격한 선후관계는 피해야 한다. 싱어 선생님이 설파했듯이 사람에게나 동물에게나, 친절함과 동정은 다른 감각 있는 존재의 고통에 무관한 것보다는 확실히 나을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을 모으더라도 동물복지에 드는 비용이 생산비에 반영되어 개별 경제주체의 경제적 부담이 가중된다는 걱정이 든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심리적 반발을 극복한 상태라면 약간의 경제적 부담에 대한 두려움은 극복 가능하다. 얼마 전에 영양 성분이 풍부하다고 광고하는 기능성 달걀이 제값만큼의 품질을 갖추지 못했다는 조사가 나왔다. 제조사들이 기능성 달걀이라고 홍보해야했던 이유는 소비자의 수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아직 동물복지 인증 제품에 대한 인식이 미비한 편이라 관련 제품에 대한 수요도 적다. 로버트 라이시 선생님이 『슈퍼 자본주의』에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자와 투자자’로 사는 것에 만족하지 말고 ‘시민’으로서의 가치관을 세우자고 촉구한 바를 곱씹는다. 우리의 건강을 챙기는 것은 물론이고 착한 소비, 어진 소비를 위해 동물복지에 대한 관심을 환기하기를 희망한다.


‘채식이냐, 육식이냐’라든가 ‘인간이냐, 동물이냐’ 하는 양자택일은 상당부분 허구다. 싱어 선생님은 유인원 같은 고등동물에게 좀 더 나은 대접을 하도록 우선 검토해보자고 제안했지만 우리와 좀 더 친근하게 느껴지는 반려동물에 대한 성찰에서 출발해도 괜찮겠다. 가령 사망한 반려동물을 생활폐기물로 취급해 쓰레기봉투에 넣어 처리하도록 한 현행 규정을 개선해 합법적이면서도 저렴한 장묘 방식을 마련하자는 운동이 좋은 예다. 인간과 동물을 차별하는 종차별주의를 반대하는 논거를 숙고할 때 그 설득력 넘치는 논증에 매료되지만 선뜻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동물에게 따스한 시선을 건넬 때 인간에 대한 존중도 더불어 커진다고 믿는다. 우리는 동물해방론에서 논리적 일관성 이상의 것, 즉 인간에 대한 사랑을 키울 수 있다. - [無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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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창덕궁 대조전을 거닐다가 새 모양으로 생긴 처마 빗물받이가 익살맞다며 연신 사진을 찍었다. 나중에 찾아보니 내가 마냥 좋다며 흐뭇한 미소를 보내던 빗물받이가 있던 곳은 대조전 부속건물인 흥복헌(興福軒)이었다. 1910년 8월 22일 흥복헌에서는 한일합병을 결의하는 조선왕조의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렸다. 이 사실을 알고 다시 흥복헌 앞에 서니 옥새를 치마 속에 감췄다는 순정효황후의 통분이 느껴지는 묘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소설가 김인숙은 내가 느꼈던 오묘한 감정을 일상에서 체화한 듯하다. 『제국의 뒷길을 걷다』(문학동네, 2008)는 북경이 천하의 수도에서 한 나라의 수도로 내려오는 여정을 묘사한다. 저자는 그 내리막길을 따라가며 어디에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헤집고 오늘날에 주는 함의까지 따져본다. 역사에 대한 입체적이고 총체적 이해가 돋보인다. 기록의 이면을 문학적 상상력으로 채우려는 시도는 풍부한 사료 검토를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더욱 빛난다.


이따금 역사의 물결을 탓하고 싶을 때가 있다. 이는 개인의 책임을 없애겠다는 속셈이 아니다. 어떤 역사적 귀결의 최종 책임자를 당대 최고의 의사결정자로 삼는 것은 대개 온당하다. 그런데 그 최고 권력자에게 얹어지는 책임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 보일 때 필부필부의 가슴은 짠하다. 늘 승전고만 울릴 수 없는 것이 인생이기 때문일까. 김인숙 역시 선통제 푸이의 이야기에서 지은 죄보다 더 과중한 벌이 내려지는 것은 아닐까 안타까워한다.


저자는 중국은 남의 나라 이야기니까 덜 고통스러워서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고 밝힌 바 있지만 그의 눈길은 충분히 촉촉하다. 어쩌면 모든 동정은 나를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중국의 문화유산들이 약탈당할 때 가슴 아파하는 까닭은 중국 근대사의 굴곡과 고스란히 빼닮은 대한제국의 말로가 자꾸 포개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기적인 동병상련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세계시민 의식이 꽃피는 실마리는 여기에서 찾아야 한다.


수용소에서 양말을 깁고 있는 푸이의 모습이 이 책에 실린 마지막 사진이라는 점은 인상적이다. 저자도 지적하듯이 “두 차례의 침략과 삼전도의 굴욕 등으로 조선에 가혹한 모욕을 주었던 청나라(76쪽)”의 마지막 황제의 안쓰러운 신세를 한껏 통쾌한 마음으로 볼 수 없는 것은 무슨 영문일까. 일세를 풍미했던 인물들이 한줌 흙으로 돌아가고, 욱일승천 하던 기세가 가뭇없이 소멸하는 무상함은 옛 원한을 눅이는가 보다.


고려 공양왕은 폐위당할 때 자신은 본디 임금이 되고 싶지 않았는데 여러 신하들이 나를 강제로 왕으로 세웠다고 말하며 울었다. 푸이는 그럴 투덜거림마저 내뱉기 전에 용상에서 내쳐졌다. 아무리 권세를 누렸던 이라도 선대의 죄과를 한 사람이 모두 짊어지는 연좌제는 불편하다. 한때는 우리를 괴롭혔던 이들의 후임자라고 하더라도 그런 연좌제에 고개를 가로 젓는 것이 오늘날을 사는 시민의 양식일 게다. 어떤 시대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받아야 하는 수난을 조금씩 덜어내는 것이 뒷사람의 도리가 아닐까 싶다.


만리장성 아래 깔렸던 원혼들을 비롯해서 억울한 죽음이 무수한데 몇몇 위정자들의 처지를 딱하게 여기는 건 일견 사치스럽다. 기록된 치욕보다 더 많은 수모가 존재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록되지 않은 고통까지 추체험하기에 우리는 너무 약다. 보이지 않는 것을 사랑한다는 것은 관념화된 추상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그 곳에서는 애틋함이 배어나오지를 않는다. 이름 없는 민초의 아픔을 추념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니다. 인(仁)의 확산이 하나의 중심에서 퍼져나가는 동심원 구조라고 볼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누군가가 가엾어 보일 때 순서를 계산할 필요는 없다.


저자가 악명 높은 서태후에게도 연민의 시선을 보낼 때 역사에서 개인이 져야 할 책임은 어디까지인가를 곱씹는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청이 패한 것이 서태후가 해군의 군비를 이화원의 증축에 유용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 유용이 서태후의 탐욕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서태후에게 아부를 하기 위한 제삼자의 행동 때문이었는지도 명확하지 않다. 혹자는 한 푼의 군비도 빼돌려지지 않았더라도 청이 일본을 이기지 못했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청나라가 좀 더 강력한 해군을 갖추었던들 쇠퇴해가는 길만이 역사의 흐름이라고 한다면 잔인한 말일까. 설령 이런 흐름이 눈에 보이더라도 서태후는 최선을 다해 억지로 거스르려고 했어야 옳다. 그가 머물렀던 자리는 그리 하라고 만든 자리였으니 말이다. 그는 자리에 걸맞은 행동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비난을 감내해야 한다. 시간을 되돌린다면 서태후가 마음을 고쳐먹을 수 있을까 상상해본다. 인간에게 두 번의 삶이 없다는 건 차라리 축복이다.


연개소문의 자식들이 골육상잔을 벌이지 않았다면 고구려는 버틸 수 있었을까. 최영과 정몽주가 별다른 실책이 없었더라면 고려를 지켜낼 수 있었을까. 큰집이 무너지려 할 때 기둥 하나로 떠받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일목난지(一木難支)임을 알면서도 저항하는 사람들은 무모하다. 하지만 그 무모함이 때때로 눈부시다. 현실 세계의 승리도 중요하지만 장구한 역사는 지킬 만한 가치를 견지한 사람을 줄곧 외면하지 않음을 되새기는 것이 역사를 읽는 자세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이야기와 다를 바가 없다는 걸 깨닫는 것(18쪽)”이기도 하다.


물론 푸이와 그 둘레 사람들이 지키고자 했던 가치는 시시한 것이었다. 예정된 실패였던 의화단이 품었던 꿈보다 더 초라한 바람이었다. 청 황릉의 도굴에 비분강개한 마음은 순정한 것이었으나 그것만으로는 선통제가 복위할 명분을 세울 수 없었다. 푸이가 만주국 수립에 협조한 것이 일본의 강압으로 말미암은 것만은 아닌 듯싶다. 그가 만주국 강덕제(康德帝)가 된 것은 단지 일본의 간계에 의한 행동이 아니었다.


푸이의 비극은 제국민을 위한 제국이었다기보다 황제를 받들기 위한 제국을 원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아니 제국민의 위한 제국을 꾀했더라도 시대정신은 제국을 거부했으리라. 일본 패망 이후 푸이는 전범 재판을 받고 사상개조라는 명목 하에 갖은 고초를 겪는다. 중국 공산당은 마지막 황제에 대한 예우를 외면하고 가혹하게 다룸으로써 이전 시대와 결별했다. 푸이의 전기에는 자신이 한 사람의 인민으로 거듭났음을 밝히고 있으나 그것이 진심인지는 알 길이 없다. 그렇게 강제적으로 이루어지는 새사람이라면 그리 탐스럽지 않다.


역사가 진보한다면 한 시대를 마무리하는 일도 점점 나아져야 한다. “사라진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60쪽)”기 때문이다. 아무리 변변치 못한 역사의 끝자락을 잡은 사람이더라도 야멸치게 업신여기는 건 사려 깊은 처사가 아니다. 폐허의 잔해를 수습하는 사람이 전적으로 틀렸다는 보장이 없다. 건곤일척의 승부가 일단락되었다면 승자는 패자의 낡은 생각들을 향해 법적 책임을 넘어선 앙갚음을 하기보다는 자신과 패자 사이의 조심스러운 견줌을 시작해야 한다. 역사의 패자가 서서히 잊힐 여유를 품어서 역사의 비정함을 줄여야 비로소 승자가 될 자격을 얻는다.  - [無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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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대선 때 김영삼 후보에게 패한 김대중 후보는 눈물을 흘리며 정계은퇴를 합니다. 김영삼의 환호보다 김대중의 침통이 어느 초등학생의 눈에 깊은 인상을 남겼어요. 그러다가 1995년 7월 18일 김대중 전 대통령님은 정계복귀를 선언합니다. 그 후로 내내 야당 분열과 정계은퇴 번복이라는 비판에 시달렸지만 제 초등학교 6학년 생일날 다시 돌아온 그분을 저는 덜 미워했습니다. 제 생일에 억지로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그때 만들어졌던 새정치국민회의라는 정당도 넉넉한 시선으로 바라봤었죠.


1996년 4·11 총선 때 김 전 대통령님은 전국구 14번의 배수진을 쳤으나 국민회의는 79석을 얻는데 그쳐 그 자신마저 낙선했습니다. 그때 저는 왠지 모르게 가슴 한 구석이 허전했지요. 이런저런 인연이 얽혀서 중학교 2학년 때인 1997년 대선 때 저는 개표 방송을 밤늦게까지 보면서 김대중 후보의 대통령 당선을 응원했습니다. 제 생애 최초의 정치적 의사 표시는 무척 엉뚱했지만 그래도 제 고향 대구의 정치적 성향에 대한 인식, 더 나아가 지역주의의 문제를 이때부터 고민하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참여정부 들어 온건 보수 세력(혹은 개혁적 자유주의 진영)이 노무현과 김대중을 두고 대립하는 모습을 보였을 때 저 또한 어느 한 편에 기울어지기도 했습니다. 이제 그 갈등을 다 메우기도 전에 두 분을 모두 잃어 서글픕니다. 갈라선 이들이 민주주의라는 구호 아래 다시 모여야 할지는 차차 고민해봐야겠습니다. 지금은 그저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의 병행을 추구하셨던 고인의 가르침을 새겨봅니다.


노무현 대통령님에 이어 김대중 대통령님까지 보내려니 가슴이 아프네요. 그래도 제가 사랑할 만한 사람을 사랑했고, 존경할 만한 사람을 존경했고, 기댈만한 꿈에 투자했음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죽은 뒤에 받는 복덕[冥福]을 믿지 않는 저로서는 치열하게 살았던 당신들의 삶이 살아 계실 때 상당 부분 보상받았다는 말씀을 올리고 싶습니다. 아, 한 시대를 이렇게 흘려보내고 있네요.


니체는 말하기를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자신이 괴물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심연(深淵)을 너무 오래 들여다보면 심연이 당신의 영혼을 들여다보기 시작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황금을 얻고자 싸운 사람은 황금에 먹히지 않도록, 권력에 집착한 사람은 권력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범인 잡는 데 종사한 사람은 자기 마음이 범인 닮아서 사악해지지 않도록, 그리고 우리가 명심할 것은 공산당과 싸운다면서 공산당의 수법을 닮아가는 일이 절대로 없도록 할 일이다.
- 김대중, 『김대중 옥중서신』, 한울, 2000, 3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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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에 읽은 자경문

익구 2009. 7. 18. 10:09 |

1995년 7월 18일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정계복귀를 선언합니다. 그 후로 내내 야당 분열과 정계은퇴 번복이라는 비난에 시달렸지만 제 생일날 다시 돌아온 그분을 저는 덜 미워했습니다. 제 생일에 억지로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그때 만들어졌던 새정치국민회의라는 정당을 넉넉한 시선으로 바라봤고, 중학교 2학년 때는 김대중 후보의 대통령 당선을 응원했습니다. 1994년 7월 18일에는 박홍 당시 서강대 총장이 주사파의 배후에는 김정일이 있다고 주장하여 레드 콤플렉스를 자극해 신공안정국을 형성하기도 했었죠.


서기 660년(의자왕 20년) 7월 18일 백제는 나당 연합군에 항복함으로써 멸망했습니다. 1401년 7월 18일 조선 3대 임금이 신문고를 설치했으나 유명무실한 건 예나 지금이나 비슷합니다. 이 일들은 양력인 제 생일과는 크게 관련이 없을 수도 있겠네요. 굳이 양력 기록을 찾아보자면 64년 7월 18일에는 로마에 대화재가 발생했는데 네로 황제가 범인을 크리스트교도로 지목하면서 엄청난 박해를 가했습니다. 1840년 7월 18일(음력 6월 16일)에는 영국이 청나라를 공격하면서 아편전쟁이 시작됩니다. 1936년 7월 18일에는 파시스트 프랑코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스페인 내전이 발발합니다. 공교롭게도 피 흘린 이야기가 많네요.^^;


1953년 미국의 예일대학교에서는 졸업생을 대상으로 인생 목표를 구체적으로 글로 써서 소지하고 있는지를 물었다고 합니다. 자신의 꿈을 글로 기록해서 간직하고 있다고 답한 학생은 3%였다고 하네요. 20여년 후에 살펴보니 목표를 정해 기록해둔 3%의 졸업생이 그렇지 않은 97%의 졸업생 전부가 모은 재산을 합친 것보다 많았다고 합니다. 하버드대학교에서 65세 정년 퇴직자들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도 비슷한 결과가 나타났고 합니다. 젊을 때 확고한 목표를 세우고 이를 글로 적어 놓은 사람들이 상위 3%의 부를 누리고 있었다고 하네요(인터넷 상에서 돌아다니는 내용을 정리한 것인데 정확한 출처는 찾지 못했습니다).


물론 경제적인 부만을 측정했기 때문에 진정한 삶의 성공이라고 보기에는 성급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꿈을 몇 줄 글로 압축해서 써둔다면 자신이 할 일과 하지 않을 일을 좀 더 명료하게 정리할 수 있을 듯싶습니다. 당장 구체적인 내용이 나오기 힘들다면 좀 추상적이고 두루뭉술하게라도 적어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가령 스물 두 살의 키에르케고르는 일기장에 “온 세계가 다 무너지더라도 내가 꽉 붙들고 놓을 수 없는 진리, 내가 그것을  위해서 살고 그것을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진리”를 갈망한다고 썼습니다.


생일을 맞은 어스름 새벽에 청년 율곡이 스무 살에 쓴 자경문(自警文)을 여러 번 읽고 새겼습니다. 미욱한 제가 이 시린 마음을 얼마나 흉내 낼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고마운 분들을 떠올리면서 동시에 제 이상에 어떤 것들이 들어 있는지 점검하는 하루 보내겠습니다. 자경문 원문은 최인호 선생님의 『유림』에 나오는 번역본을 중심으로 하여 여러 번역본을 참조해서 풀이했습니다. 여러 선생님들께 감사합니다.


<자경문(自警文)>
 
1. 입지(立志)
먼저 마땅히 그 뜻을 크게 품어야 한다. 성인을 본보기로 삼아서 터럭만큼이라도 성인에 미치지 못하면 나의 일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先須大其志 以聖人爲準則 一毫不及聖人 則吾事未了
선수대기지 이성인위준칙 일호불급성인 즉오사미료


2. 과언(寡言)
마음이 안정된 자는 말이 적다. 마음을 안정시키는 일은 말을 줄이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제 때가 된 뒤에야 말을 한다면 말이 간결하지 않을 수 없다.

心定者言寡 定心自寡言始 時然後言 則言不得不簡
심정자언과 정심자과언시 시연후언 즉언부득불간


3. 정심(定心) 
오래도록 멋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었던 마음(放心)을 하루아침에 거두어들이는 힘을 얻기가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마음이란 살아있는 물건이다. 번뇌와 망상을 없애는 힘(定力)이 완성되기 전에는 마음의 요동을 안정시키기 어렵다. 마치 마음이 어지럽고 어수선할 때에 의식적으로 싫어하고 미워해서 그것을 끊어버리려고 하면 더욱 뒤숭숭해지는 것과 같다.
마음은 갑자기 일어났다가 홀연히 없어졌다가 하여 나를 말미암지 않는 듯이 여겨진다. 설령 잡념을 끊어버린다고 하더라도 다만 이 ‘끊어야겠다는 마음’은 내 가슴에 가로막혀 있으니 이것 또한 망령된 잡념이다.
마음이 어지럽고 어수선할 때는 정신을 가다듬어 살며시 비추어 살필 일이지 집착에 끌려가서는 안 된다. 이렇게 공부하기를 오래하면 마음이 반드시 고요하게 정해지는 때가 있다. 일을 할 때에 한결같은 마음으로 하는 것 또한 마음을 안정시키는 공부다.

久放之心 一朝收之得力 豈可容易 心是活物 定力未成 則搖動難安 若思慮紛擾時 作意厭惡 欲絶之 則愈覺紛擾
구방지심 일조수지득력 기가용이 심시활물 정력미성 즉요동난안 약사려분요시 작의염오 욕절지 즉유각분요
夙起忽滅 似不由我 假使斷絶 只此斷絶之念 橫在胸中 此亦妄念也
숙기홀멸 사불유아 가사단절 지차단절지념 횡재흉중 차역망념야
當於紛擾時 收斂精神 輕輕照管 勿與之俱往 用功之久 必有凝定之時 執事專一 此亦定心功夫
당어분요시 수렴정신 경경조관 물여지구왕 용공지구 필유응정지시 집사전일 차역정심공부


4. 근독(謹獨) 
늘 경계하고 두려워하며 홀로 있을 때도 삼가는 생각을 가슴속에 담고서 생각하고 또 생각하여 게을리 함이 없다면 모든 나쁜 생각들이 저절로 일어나지 않게 될 것이다.
만 가지 악은 모두 ‘홀로 있을 때를 삼가지 않음’에서 생겨난다. 홀로 있을 때를 삼간 뒤라야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시를 읊으며 돌아온다(浴沂詠歸).’는 의미를 알 수 있다.

*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시를 읊으며 돌아온다(浴沂詠歸)’는 세속의 명리에 얽매이지 않는 마음자리 정도로 풀이할 수 있다. 출전은 『논어』 선진편 마지막 꼭지를 참조.

常以戒懼謹獨 意思存諸胸中 念念不怠 則一切邪念 自然不起
상이계구근독 의사존저흉중 염념불태 즉일체사념 자연불기
萬惡 皆從不謹獨生 謹獨然後 可知浴沂詠歸之意味
만악 개종불근독생 근독연후 가지욕기영귀지의미


5. 독서(讀書) 
새벽에 일어나서는 아침나절에 해야 할 일을 생각하고, 아침밥을 먹은 뒤에는 낮에 해야 할 일을 생각하고, 잠자리에 들었을 때에는 내일 해야 할 일을 생각해야 한다. 일이 없으면 쉬지만 일이 있으면 반드시 생각해 합당하게 처리할 방도를 찾아야 하고, 그런 뒤에 글을 읽는다.
글을 읽는 까닭은 옳고 그름을 분간해서 일을 할 때에 적용하기 위한 것이다. 만약에 일을 살피지 아니하고 홀로 앉아서 글만 읽는다면, 그것은 쓸모없는 학문을 하는 셈이다.

曉起 思朝之所爲之事 食後 思晝之所爲之事 就寢時 思明日所爲之事 無事則放下 有事則必思 得處置合宜之道 然後讀書
효기 사조지소위지사 식후 사주지소위지사 취침시 사명일소위지사 무사즉방하 유사즉필사 득처치합의지도 연후독서
讀書者 求辨是非 施之行事也 若不省事 兀然讀書 則爲無用之學
독서자 구변시비 시지행사야 약불성사 올연독서 즉위무용지학


6. 소제욕심(掃除慾心) 
재물을 이롭게 여기는 마음(財利)과 영화로움을 이롭게 여기는 마음(榮利)은 비록 그에 대한 생각을 쓸어 없앨 수 있더라도, 만약 일을 처리할 때에 조금이라도 편리하게 처리하려는 마음이 있다면 이것도 또한 이로움을 탐하는 마음이다. 더욱 살펴야 할 일이다.

財利榮利 雖得掃除其念 若處事時 有一毫擇便宜之念 則此亦利心也 尤可省察
재리영리 수득소제기념 약처사시 유일호택편의지념 즉차역리심야 우가성찰


7. 진성(盡誠) 
무릇 일이 나에게 이르렀을 때, 만약 해야 할 일이라면 정성을 다해서 그 일을 하고 싫어하거나 게으름 피울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만약 해서는 안 될 일이라면 딱 잘라 끊어버려서 내 가슴속에서 옳고 그름을 따지는 마음이 서로 다투게 해서는 안 된다.

凡遇事至 若可爲之事 則盡誠爲之 不可有厭倦之心 不可爲之事 則一切截斷 不可使是非交戰於胸中
범우사지 약가위지사 칙진성위지 불가유염권지심 불가위지사 즉일체절단 불가사시비교전어흉중


8. 정의지심(正義之心) 
항상 ‘한 가지의 불의를 행하거나, 한 사람의 무고한 사람을 죽여서 천하를 얻더라도 그런 일은 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가슴속에 담고 있어야 한다.

常以行一不義 殺一不辜 得天下不可爲底意思 存諸胸中
상이행일불의 살일불고 득천하불가위저의사 존제흉중


9. 감화(感化)
어떤 사람이 나에게 이치에 맞지 않는 악행을 가해오면, 나는 스스로 돌이켜 자신을 깊이 반성해야 하며 그를 감화시키려고 애써야 한다. 집안사람들이 선행을 하는 쪽으로 변화하지 않음은 다만 나의 성의를 아직 다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橫逆之來 自反而深省 以感化爲期 一家之人不化 只是誠意未盡
횡역지래 자반이심성 이감화위기 일가지인불화 지시성의미진


10. 수면(睡眠)
밤에 잠을 자거나 몸에 질병이 있는 경우가 아니면 눕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며 비스듬히 기대어서도 안 된다. 비록 한밤중이더라도 졸리지 않으면 누워서는 안 된다. 다만 밤에는 억지로 잠을 막으려 해서는 안 된다.
낮에 졸음이 오면 마땅히 이 마음을 불러 깨워 충분히 노력하여 깨어 있도록 해야 한다. 눈꺼풀이 무겁게 내리누르거든 일어나 몇 바퀴 걸어 다녀서 마음을 깨어 있게 해야 한다.

非夜眠及疾病 則不可偃臥 不可跛倚 雖中夜 無睡思 則不臥 但不可拘迫
비야면급질병 즉불가언와 불가파의 수중야 무수사 즉불와 단불가구박
晝有睡思 當喚醒此心 十分猛醒 眼皮若重 起而周步 使之惺惺
주유수사 당환성차심 십분맹성 안피약중 기이주보 사지성성


11. 용공지효(用功之效)
공부를 하는 일은 늦추어서도 안 되고 급하게 해서도 안 되며, 죽은 뒤에야 끝나는 것이다. 만약 그 효과를 빨리 얻고자 한다면 이 또한 이익을 탐하는 마음이다. 만약 이와 같이 하지 않고 탐욕을 부린다면 부모님께서 물려주신 이 몸을 형벌을 받게 하고 치욕을 당하게 하는 일이니, 사람의 자식이라 할 수 없다.

用功不緩不急 死而後已 若求速其效 則此亦利心 若不如此 戮辱遺體 便非人子
용공불완불급 사이후이 약구속기효 즉차역리심 약불여차 육욕유체 편비인자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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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몸담고 있는 고대 경영 B반 클럽에서 <고려대는 시국 선언 안 하나요>라는 익명게시판 글을 읽었습니다. 저는 인터넷 실명제의 확대는 적극적으로 반대하지만, 제 자신이 익게를 쓰는 건 참 어색하네요. 다만 실명게시판에 글을 쓰고 나면 댓글을 실명으로 다는 게 부담스러우신지 서로 활발한 의사소통이 잘 안 되는 단점이 보이는 것 같아요. 자주 마주치는 선후배 나 동기 사이에 너무 얼굴 붉히며 논쟁하는 거 꺼려지는 일일 테니 말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익게는 그 나름의 효용이 있다고 믿습니다. 저는 본래 제 이름 걸고 (남들이 보기에) 편파적인 이야기를 쓰는 것에 크게 부담 갖지 않는 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근본적으로는 이제 꽤 높은 고학번 선배가 된 점을 악용(?)해서 실명으로 글을 남겨봤습니다. 시의성이 중요한 잡글 같아 부랴부랴 끼적거려서 내용이 매끄럽지 못합니다.


어제 교수님들의 시국선언이 나왔더군요. 아무리 먹고 살 걱정이 덜한 교수님들이라고 해도 살아있는 권력을 비판하는 건 부담스러운 일일 겁니다. 대통령의 모교에서 시국선언을 발표한다는 게 얼마나 머뭇거려지는 일인지 익히 짐작하고 남습니다. 경영대 교수님이 한 분도 안 계신 것도 그런 연유겠지요. 시국선언문의 세세한 문구까지는 동의하지 않더라도 지금 벌어지는 상황에 대한 정부의 책임마저 외면하는 교수님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추측해봅니다. 여기저기서 용기 내서 대통령을 비판했는데도 듣는 시늉조차 잘 보이지 않고, 사회통합을 저해한다는 소리나 날아오니 그럭저럭 전진해왔던 지난 민주화 20년이 흔들린다고 느꼈습니다.


선출된 권력은 정해진 기간 동안 자신의 국정 운영 철학을 구현할 권한을 위임 받습니다. 다만 거기에는 한계나 금도가 있어야겠지요. 이 정부 들어 기본권 가운데 가장 기초적인 ‘자유권적 기본권’이 제대로 보장되지 못한다는 인상을 받고, 그간 정부의 간섭에서 비교적 자유롭던 권력기관들이 다시 정권의 사유물로 전락하는 건 아니냐는 우려는 저 혼자만의 생각이 아닌 듯하네요. 대통령을 넘치도록, 어떤 때는 부당하다 싶을 정도로 욕할 자유를 만끽하던 국민이 작금의 분위기를 어색하게 여기는 건 크게 나무랄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선동’과 ‘세뇌’를 말씀하시는 분도 계시지만 그런 단어는 그 발설자도 자유롭지 못한 문제입니다.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면 자기 머리로 생각하며 움직이는 모습은 삶에서 작은 부분이니까요. 날선 표현은 마지막까지 아꼈다가 쓰시는 게 좋겠네요. 그 논리를 그대로 따와서 경제만 살리면 그만이라는 선동과 부자들에게 감세하면 서민이 혜택을 입는다는 세뇌에 사로잡힌 분들이 적잖았다고 공박하는 건 참 쉬운 일입니다. 권력을 장악한 집단의 선동과 세뇌가 야당이나 시민단체 등의 선동과 세뇌보다 훨씬 위험하다는 걸 굳이 강조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한국 현대사에 대해서 특별히 공부한 적은 없지만 대강은 알고 있습니다. 민주화 이후 제6공화국의 첫 정부였던 노태우 정부는 여전히 공안통치를 펼쳤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전두환의 제5공화국이나 유신독재의 제4공화국에서 나타났던 폭압성보다 그 정도가 약해졌음은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그것은 노태우 정부가 너그러웠기 때문이라기보다는 1987년 6월 항쟁의 결과로 말미암아 군사정부의 파시즘 색채를 절반 정도 탈색시키는데 성공한 것이죠. 집권자의 절제를 기대하는 것보다 민주화 세력의 견제가 더 효율적이고 효과적이었음을 방증합니다.


여하간 군사반란의 수괴도 시대의 흐름을 온몸으로 거스르지는 않은 셈입니다. 그 이후 들어선 정부들은 저마다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시민적 자유를 신장해왔습니다. 그렇다면 이명박 정부 역시 지금 위치에서 민주주의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키는 시대적 소명을 수행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잃어버린 10년 운운하며 지난 정부를 극단적으로 폄훼한 분들이니 더더욱 말입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이명박 정부는 앞 정부들의 치적을 이어받아 늘어난 자유가 경제적 약자들에게까지, 지금 고통을 겪는 젊은 세대들에게까지 넓어지도록 애써주길 희망합니다. 정치적 민주주의를 넘어선 경제적 민주주의까지 고민하는 모습을 보였으면 좋겠습니다.


다 같이 잘 먹고 잘 사는 사회는 보수나 진보 같은 이념의 차이를 뛰어넘는 우리 모두의 바람 아닙니까? 방법론은 엇갈리더라도 이 대의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데 이 정부가 그 대의를 이따금 망각한 듯이 행동하셔서 아슬아슬합니다. 이명박 정부가 살리겠다는 경제는 제가 기억하기로 국민 모두의 경제였습니다. 지난 정부들에서 모자랐던 점을 채워서 더 나은 대한민국을 만들기를 바라는 시민의 마음이 그렇게 어리석고 잘못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민주주의 정도는 기본으로 깔고 더 나은 미래를 더듬어야 할 분들이 민주주의조차 지키지 못한다고 비판받는 모습이 영 안쓰럽네요. ‘민주주의’는 누구에게나 크고 무거운 주제이겠지만, 그 엄숙주의를 좀 줄이고 서로가 그리는 민주주의의 최소 기준 혹은 핵심을 논의해봅시다.


이 와중에 4대강 정비사업 예산은 22조 2000억 원으로 늘었군요. 지난해 12월 발표했던 13조9000억 원에 비해 60%가 늘어난 금액입니다. 일전에 대운하 찬성측이 대운하 사업비 예상액으로 14조에서 18억 정도를 제시하셨는데 이것보다 훨씬 많은 비용입니다. 지금 국민과의 소통이 안 된다고 아우성인 판국에 청와대는 불통(不通)이란 무엇인가 온몸으로 증명하고 계시네요. 정부 여당은 국민에게 마음을 열라고 윽박지르기 전에 스스로의 귀부터 먼저 여시길 진심으로 건의합니다. 그게 공복(公僕)의 자세입니다. 권력은 유한합니다. - [無棄]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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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님의 서거를 애도하는 마음에서 ‘대통령님’이라는 잉여적 표현을 썼습니다. 너그러이 헤아려주시기 바랍니다.)


1.
지난 일주일 동안 노무현 대통령님의 서거를 가슴 깊이 슬퍼했다. 나는 국민장이 치러지는 일주일은 애도만 하고 싶었다. 그냥 일주일의 기간만 온전히 비통해할 시간을 넉넉히 확보한 것이 내가 우울증을 앓지 않고 견뎌낸 비결이었다. 정치적 구호는 내세우지 말고 그냥 애도만 하라는 자칭 비판언론들은 국민장 기간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내내 정부에 대한 비판을 정치 공세쯤으로 폄하할 모양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 애도만 하고 있을 마음이 전혀 없다. 비정치적인 삶을 권하는 정치적 술수에 맞서 이 비극이 발생한 원인을 제거할 방도를 모색할 것이다.


일주일의 애도 기간을 견디기 힘들어 하는 분들을 이따금 만났을 때도 그 조급증이 야속했을지언정 그 내용은 경청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상갓집에서 수학문제를 풀 수는 없는 노릇인지 잘 들리지 않았다. 어차피 슬픔을 다독이고 나면 역사가 차가운 표정으로 그를 응시할 테니 내 무지몽매함을 너무 탓하지 않기로 했다. 혹자는 뜬금없이 넘치는 애도가 불편하다고 말했다. 애이불상(哀而不傷)하는 수준에서 슬퍼한다면 크게 나무랄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며칠만이라도 그냥 애달파하고 화내는 풍경을 지켜볼 여유를 품었으면 어땠을까 싶다. 그렇게 해서라도 원한이 덜 쌓이고 응어리가 조금은 풀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자기와 친분이 없는 사람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건 그저 아름답다.


노무현 대통령님의 서거라는 비극에 일말의 책임이 있을 자들이 사과 한마디 없는 상황에서 고인의 유지를 빙자해서 화해니 통합이니 늘어놓는 건 참 기만적인 일이다. 관용은 피해자의 ‘의무’가 아니라 ‘권리’가 되어야 한다. 이번 사건의 피해자는 노 대통령님과 그 둘레 사람들 몇 명이 아니다. 추모객을 향해 관용을 권하는 건 너무 이르고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라 박절하게 들렸다. 추모 기간마저 상식과 예의를 잃어버린 졸렬한 정부 여당의 행태에 원한을 품는다면 그건 그네들이 스스로 불러일으킨 셈이다. 설령 그것이 넘치는 의견이라고 해도 그런 여론을 겸허히 수렴하는 것이 지금 정권을 책임지고 있는 분들의 자세일 것이다.


노 대통령님의 서거로 말미암은 사회적 분열이나 갈등을 염려한다면 그 감정의 골을 메울 행위자는 어디까지나 정부 여당의 힘센 분들이다. 자신을 그 자리에 올려준 국민들에게 악감정을 품지 말라거나 원한을 표출하지 말라고 외칠 권한은 그들에게는 없다. 정부가 못하는 일을 대신해주겠다면서 몇몇 언론들이 관용 장사에 나서지 않으셨으면 좋겠다. 어떤 언론들은 자신의 허물이 없었는지 돌아보는 용기를 보여줬지만 관용을 내세우는 언론들은 노 대통령님에게 비난을 넘어 저주를 퍼붓던 지난날을 까맣게 잊은 모양이다. 용서를 청하는 집단이 없는데 무슨 화해를 한단 말인가.


2.
노 대통령의 서거에 따른 책임론에 시달리는 검찰은 수사는 정당했다고 강변했다. 검찰이 스스로 수사의 공정성과 신뢰성을 허무는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는 점을 망각한 처사다. 살아 있는 권력이라는 천신일 회장의 구속영장마저 기각되면서 검찰의 항변은 더욱 빛을 바랬다. 천 회장이 반드시 구속이 되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 그만큼 부실하고 조급한 수사를 했다는 방증으로 이해해야 한다. 임채진 검찰총장은 “이번 사건 수사의 당위성과 정당성을 존중해 주길 간곡히 부탁드린다”라는 사퇴의 변을 남겼다. 그나마 국민에게 사죄한 기품에 고개를 숙이지만 이번 일은 책임은 검찰총장이 모두 지고 갈 사안은 아니다.


노 대통령님의 시신이 수원 연화장에서 화장되는 상황을 생중계할 때 한 시민이 “이명박 ××× 복수할 거야 이 ×××야”라고 외치는 장면이 TV 생중계로 나갔다. 영결식장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헌화할 때 행사장은 물론 행사장 밖의 시민들이 야유했다.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를 입에 달면서도 줄곧 괴상하게 실천했던 청와대가 이런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란 쉽지 않을 듯싶다. 저분들에게 용서나 사죄를 구걸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1991년 4월 헌법재판소는 사죄광고 제도가 타인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믿지 않는 자에게 본심과 다르게 깊이 사과하도록 강요하는 것이므로 인간 양심의 왜곡과 굴절이자 이중인격 형성의 강요라고 정의하며 위헌 결정을 내렸다(89헌마160). 반성을 강제할 수 없다는 결정이다.


헌재의 결정으로 비추어 볼 때 유독 방송사에만 강요하고 있는 ‘시청자에 대한 사과’ 조치는 위헌일 가능성이 크다는 견해도 있고, 헌재의 결정이 언론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고찰이 부족해 약자인 피해자의 권리 구제를 소홀히 만든다는 비판도 들린다. 여하간 헌법이 보호하는 양심의 자유는 선하고 올바른 판단만을 보호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덜 선하고 덜 올바른 내심마저 보장하는 것이 양심의 자유의 고갱이다. 양심에 거슬려 사과를 못하겠다는 사람에게 양심을 탑재하라며 구박한다면 헌법정신과 어긋나는 행동이다. 물론 사인과 공인은 차이가 있다. 굳이 사과를 받아야 한다면 사적 영역보다는 공적 영역을 향해야 요구해야 한다. 공인들의 양심이 덜 소중하다는 건 아니지만 명예나 체면을 중시하는 한국의 문화나 정서를 모두 부인할 수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2004년 탄핵 정국 당시 “잘못이 있어 사과하라면 사과할 수 있지만 잘못이 뭔지 모르겠는데 시끄러우니까 사과하고 넘어가자는 건 받아들이기 어렵다”라는 요지의 발언을 했던 노 대통령님은 결국 탄핵소추까지 당했다. 정부의 사과 표명은 그네들의 자유의사에 맡기는 게 기본원칙이라고 믿는다. 끝끝내 사과를 거부하는 자세를 칭찬하는 건 결코 아니지만 잘못이 없다고 믿거나 잘못이 뭔지 모르는 분들에게 사과를 청하는 건 도리가 아니다. 그럼에도 사과에 미련이 남는 것은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을 존중하면서 얻어낼 것이 그 정도뿐이기 때문이다.


3.
노 대통령님이 서거하시기 이틀 전까지만 해도 나는 때 아닌 산수놀이에 빠졌다. 민주당을 비롯한 야당들이 신영철 대법관 탄핵소추안을 발의할 계획이라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사법부의 자정 노력을 지켜보는 것이 순리이겠으나 그와 더불어 입법부가 우회적으로 나설 수밖에 없는 고충을 이해하고 반겼다. 이것이 삼권 분립의 대의에 부합하는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탄핵소추안 발의조차 여의치 않아 보여서 서글펐다. 대법관에 대한 탄핵소추안 발의에는 재적의원 3분의 1 이상의 동의가 필요하다. 친박연대 3명의 의원직 상실로 재적의원 수가 296명으로 줄어든 지금 99명이 동의해야 하는 셈이다.


민주당 84석과 민주노동당 5석, 창조한국당 3석, 진보신당 1석이 모두 동참해도 한참 모자란다. 친박연대 5석과 호남 무소속 4석이 동조해야만 간신히 발의할 수 있는 실정이다. 자유선진당과 한나라당의 일부의 호응을 기대하려는 계산 자체가 너무 씁쓸했다. 소수 야당들이 사안에 따라 힘을 모으는 일이야 나쁠 것은 없지만 이렇게 구차하게 애를 써야 한다는 현실이 원망스러웠다. 민의가 제대로 반영되었는지 의심스러운 현행 선거구제의 탓인지 몰라도 저 거대 여당을 견제할 수 있는 야당들이 부재하다는 형국이 너무 아슬아슬하다. 그렇다고 여당의 절제나 양식을 기다리기도 어렵다. 신 대법관을 감싸고도는 한나라당의 태도에서 사법부의 독립을 바라는 충정을 읽을 수 없기 때문에 더 참담했다.


지난 일주일 내내 물기 어린 눈으로 보냈지만 금요일 영결식 장을 나서던 운구차를 보며 살아생전 먼발치에서나마 본 적도 없는 그 분을 보내려니 또 눈물이 났다. 아마도 이 눈물들은 내 자신을 위한 눈물이었을 것이다. 눈물을 닦고 다시금 산수놀이를 하려니 화가 치밀었다. 상중에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지만 일상으로 돌아와서도 내 뜻대로 되는 일은 거의 없어 보여서다 모두들 미래를 말하는데 나는 지난 2004년 총선 당시로 퇴행하고 말았다. 단순히 열린우리당의 의회권력 쟁취에 집착한다고 비판받던 그 시기 즈음으로 돌아가 버렸다. 집권이나 승리 이후는 고심하지 않고 집권과 승리 자체를 열망할까봐 부끄럽다.


한나라당의 집권으로 민주주의가 후퇴할 것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던 분들이 요즘도 같은 생각인지 궁금하다. 물론 노무현과 참여정부를 반대하면서 이명박 정부를 반대하는 행위는 얼마든지 양립 가능하다. ‘다 똑같은 놈들’ 정도로 여기시고 노무현도 했는데 이명박이라고 못할 것이 없다는 판단이셨는지, 아니면 어쨌든 국민 다수의 뜻이니 차마 민주주의 후퇴 운운할 수는 없어서 그런 말씀들을 하신 건지 묻고 싶다. 나는 지금 지난날 노무현에게 과도한 책임을 물었다고 투덜거리는 것이 아니다. 노무현의 실정을 비판하는 것만큼 이명박의 난정을 바로잡을 세력의 수가 너무 적어 보이는 안타까움을 토로할 따름이다. 이명박을 제어할 수 있는 가장 큰 행위자가 박근혜인 현실이 기가 막혀서다.


4.
서거의 충격이 가시지 않은 관계로 지금이야 민주당이 한나라당과 지지율을 나란히 하고 있지만 조정기간이 도래할 것이 분명하다. 만약 그 조정기간을 거쳐도 한나라당 지지율의 팔할 이상을 유지한다면 2010년 지방선거에서부터 2012년 총선과 대선까지 이어질 선거에서 한나라당과 한바탕 겨뤄볼만 한 상황이 조성된다. 물론 미지의 카드이자 희망의 카드인 진보정당이 제자리를 지켜주고 계시지만 지방선거와 총선거에서의 선전은 기대해도 대선까지 도모한다는 건 진보정당 지지자 본인들도 믿지 않으실 게다.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가지 않고 명줄이 늘어난 제1야당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를 고민해야할 시점이다. 다만 이 과정에서 사표론 따위의 논쟁이 다시 나올까봐 걱정이다.


노 대통령님의 서거가 전통적 민주당 지지층의 분열을 치유하는 실마리가 될지도 모른다는 전망이 나온다. 내 소견으로는 열린우리당 지지층과 옛 민주당 지지층이라고 표현해야 더 적절하다. 자기들이 선출한 후보를 흔들면서 국민을 농락했던 분당 전의 민주당을 지지하지는 않았지만 열린우리당은 지지했던 나 같은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어지러운 창당놀음의 당연한 결과로 2007년 대선에서 패배한 후 결국 민주당 간판을 걸었지만 과연 이네들이 화학적 결합을 했는지 의심스럽다. 민주당은 친노 세력을 껴안겠다는 속셈이지만 누구의 앙금이 더 남았든 감정의 골이 커 보인다.


뉴민주당 플랜을 추진하며 노무현과 참여정부에 거리두기에 열중하던 민주당이 너무 표변하는 모습이 볼썽사납지만 두고 볼 참이다. 참여정부의 긍정적 유산을 건져 올리는 작업을 하겠다며 분주하지만 한나라당과 또렷이 차별화할 묘책을 찾아낼 결기를 보여줄지 미지수다. 한편으로는 친노 세력의 신당 이야기도 들리지만 지역적 기반이 없는 신당이라면 자유선진당 만큼도 성과를 거두지 못할 공산이 크다. 수도권이야 본래 어려운 싸움이고, 영남은 거의 가능성이 없으니 생환 확률이 별로 높지 않으므로 친노 신당의 미래는 바보 노무현의 험난한 좌절을 되풀이하고 막을 내리기 십상이다.


개인적 차원이 아닌 한 정당 전체가 죽기를 각오하고 달려드는 경우는 1990년 3당 합당에 반대했던 꼬마 민주당 정도가 기억나는데 거대 여당을 눈앞에 두고 이 모험을 감당하기란 쉽지 않다. 민주당과 2등 경쟁에 함몰될 신당이라면 신중해야 한다. 굳이 신당이 아니더라도 친노파의 존속은 유권자들을 위해 다행스러운 일이다. 열린우리당에 몸담았던 분들이나 친노파가 잘났다고 옹호하려는 뜻이 아니다. 당장 진보정당으로 달려가기를 머뭇거리는 상당수 국민이 정치 냉소자가 되어 버리는 현상을 막고 선택의 폭을 넓힐 수 있다는 점을 안도할 따름이다. ‘그놈이 그놈’이라고 여기는 분들은 반동의 징후라 하시겠지만 이 체제가 재생산되는 사태야말로 반동이다.


5.
노 대통령님이 퇴임하실 때 참여정부를 두고 재평가가 이뤄질 것이라는 견해에 동감했다. 그가 대한민국에 어떤 부정적 유산을 남겼는지도 차차 밝혀지겠지만, 긍정적 유산 또한 드러날 것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라는 핑계를 함부로 입에 담지 못할 때 비로소 참여정부를 차분하게 평가할 토대가 마련되리라 내다봤다. 하지만 노무현을 제물로 한 희생제의는 그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무죄추정의 원칙을 미뤄두고 진행된 과정은 너무 야만적이었다. 우리들은 그 매질이 우리 스스로의 품위를 깎아내리는 일이었음을 이제야 깨달았다. 국민이 뽑은 대통령을 욕보여서 이룩할 법치주의라면 너무 초라하다. 온 사회가 공인의 윤리적 책임, 법적 책임에 대해 성토를 했던 그 마음은 잘 간직해보자.


노 대통령님께서는 대통령 재임시절에 당신을 진보라고 표현하신 적이 많았고 생애 마지막까지도 진보주의를 궁리하셨다고 전한다. 한국적 맥락에서는 노무현이 얼마든지 진보로 분류될 여지가 있음을 인정한다. 진보와 보수의 중간 개념인 개혁세력이라고 부르는 게 낫겠지만 내 개인적으로는 노 대통령님께서 한국 보수주의의 한 극점을 보여주신 분이라 좋아했다. 추모 열기를 ‘인간’ 노무현에 대한 그리움에 국한하기도 하지만 나는 ‘정치인’ 노무현은 한국 보수주의의 업그레이드를 이뤄낸 인물로 평가하고 싶다. 스스로를 보수라고 칭하는 분들이 노무현을 그렇게 매몰차게 대했다니 참 곤혹스럽다.


노무현에게 아쉬웠던 점을 메우면서 또 다른 매력으로 우리를 잡아끌 분을 가까운 시일 내에 찾지 못할 것 같아서 멍멍하다. 갖은 미움을 받았으나 현실 정치인 가운데 노무현만큼 대중성과 진솔성, 원칙과 가치를 제시한 교양 있는 지도자는 너무 드물었다. 그 대중성은 굳건하지 못했고, 진솔성은 계산된 것이었으며, 원칙은 분열적이었고, 가치는 흐릿했다는 험담이 대개 온당하다고 수긍하더라도 말이다. 어쩌면 이 추모 열기는 그와 같은 사람을 다시는 만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아쉬움이 크게 배어있는지도 모른다. ‘또 다른 노무현’이나 ‘더 나은 노무현’이 등장하지 않을 것 같다는 체념이랄까.


그 또한 불완전한 인간이었다. 권좌에서 쌓은 허물을 내려와서 천천히 갚아나가길 바랐다. 내가 사랑했던 나의 일꾼이자 나의 대표가 세월의 손길을 마주잡고 가는 광경을 기대했는데 그렇지 못해 가슴이 저민다. 그의 지지자든 반대자든 그 분을 서서히 잊어감으로써 얻을 평화를 모두가 잃어버렸다. 이래저래 실망하고 서운했지만 그런 감정보다 한두 뼘쯤은 더 좋아하고 아꼈던 분에게 작별을 고한다. 죽은 뒤에 받는 복덕[冥福]을 믿지 않는 나로서는 치열하게 살았던 당신의 삶이 살아 계실 때 상당 부분 보상받았다는 말씀을 올리고 싶다. 바보 노무현, 고마웠습니다. - [無棄]


추신 - 노제 때 잠깐 개방됐다 다시 봉쇄됐던 서울광장의 차벽이 4일 새벽 철수했다고 한다. 아예 광장 주변에 성벽을 세우고 쪽문을 내는 게 좋을 듯싶다. 주인인 시민이 쓸 광장을 머슴인 자들이 멋대로 막았다 열었다 하는 꼴을 더는 보기 싫어서다. 며칠 전 헌법재판소가 옥외집회 개최 때 경찰에 미리 신고토록 한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조항이 합헌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헌재는 “일정한 신고절차만 밟으면 일반적ㆍ원칙적으로 옥외집회 및 시위를 할 수 있도록 보장하고 있으므로, 사전 신고제도는 헌법상 사전허가 금지에 반하지 않는다”라고 밝혔다. 헌재의 결정에 아쉬운 점이 있지만 합헌의 논거로 들었던 내용이나마 지켜지는 나라에서 살기를 희망한다. 법과 원칙은 이 정권의 입맛으로 가름하는 게 아니다.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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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은행 분석(1)

경제 2009. 5. 4. 05:15 |

2008년 봄학기에 들었던 이필상 교수님의 금융론 강의에서 에세이 과제로 작성했던 산업은행 분석에다 최근 바뀐 사정들을 보강해봤습니다. 산업은행 민영화 자체에 대한 찬반 논쟁보다는 민영화로 향하는 길목에서 벌어지는 쟁점 위주로 고찰했습니다. 민영화 자체에 대한 반대도 적잖다는 점을 잘 알고 있지만 이미 주요 법률안이 통과된 마당에 보다 바람직한 민영화를 더듬기 위한 삽질로 여겨주시기 바랍니다. 너더분한 잡설을 싫어하시는 분들이라면 1번, 5번, 9번 목차만 살펴보시면 됩니다. 과제물 작성 당시 자문에 흔쾌히 응해주신 원유태 선배님께 각별한 감사를 표합니다.


1. 산업은행 민영화를 위한 입법

지난 4월 29일 국회 본회의에서 한국산업은행 민영화를 위한 한국산업은행법 일부개정법률안을 처리했다. 이로써 산업은행에서 한국정책금융공사를 분리하는 한국정책금융공사법이 지난 2월 임시국회에서 통과된 것과 더불어 산업은행 민영화를 위한 입법적 조치가 일단락됐다. 산은이 먼저 민영화되어야 그 자금으로 정책금융공사를 설립할 수 있는데 선후가 뒤바뀐 입법인 셈이지만 모양새는 갖추었다. 하지만 정부 여당이 공기업 개혁의 대표로 삼았던 산은 민영화가 이제 궤도에 올랐는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4월 30일 밤 자중지란에 빠진 한나라당으로 말미암아 금산분리 완화 관련 법안인 은행법과 금융지주회사법 중에 은행법 개정안만 가결되었다. 금융지주회사법 개정안이 부결됨에 따라 정부 여당의 계획은 상당부분 차질을 빚게 됐다. 정부 여당의 논리에 따르면 금산분리 완화를 통해 산은 지주회사의 지분 인수에 보다 많은 투자자가 참여하게 되면 몸값이 높아질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하지만 산업은행지주회사 산업자본의 금융지주회사 지분소유 한도가 현행 4%로 제한될 경우 투자 매력이 감소해 매수자를 찾기 힘들어진다. 산은 민영화를 위한 입법은 여기저기 지뢰밭이다.


물론 은행법 개정안이 이미 통과된 마당에 금융지주회사법만 그대로 두는 법체계가 오래 유지될 것 같지는 않다. 여당이 다시금 금융지주회사법 개정안을 통과시킬 공산이 크다. 이런 가정 하에 이미 통과된 법률에 따른 산은 민영화의 얼개를 고찰해보자. 산은이 금융지주회사로 전환하게 되면 산업은행 및 대우증권ㆍ산은캐피탈ㆍ산은자산운용 등을 계열사로 거느리게 된다. 정부가 산은지주의 지분 100%를 보유하지만 5년 내에 지분 매각을 시작한다. 정책금융 부문은 정책금융공사로 넘기는데 이를 위해 산은지주의 지분 49%를 정책금융공사에 출자한다. 나머지 지분 51%를 민간에 매각하고 나면 산업은행은 완전한 민간 회사로 탈바꿈한다.


산업은행의 빠른 매각에만 집착할 경우 제대로 된 가치를 평가 받기 어렵다는 염려에 귀 기울여야 한다. 산업은행의 가치를 적절하게 평가하기보다는 정해진 시간에 쫓겨 각종 절차가 허술하게 이행되어서는 곤란하다. 다행히 입법 과정에서 정책금융공사에 출자하는 산은지주 지분 49%의 최초 매각시점을 5년 이내로 잡았다. 처리시한을 다소 유동적으로 명문화함으로써 이런 걱정을 다소 덜었다. 그렇다고 가격을 높게 받기 위해 매각시한을 계속 늦춰 우리은행의 전철을 밟는 것도 피해야 한다. 정부는 대강의 틀을 정하고 구체적인 사항은 새로 임명될 최고경영자에게 포괄적으로 위임하는 것이 정책의 신뢰성과 효율성을 도모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2. 산업은행의 변천사

산업은행은 1954년 4월 세워진 국책은행으로서 산업의 개발과 국민경제의 발전을 촉진하기 위한 중요산업자금을 공급하고 관리하기 위한 목적으로 한국산업은행법에 의하여 설립된 법인이다. 산은법은 이를 위해 정부가 전액 출자하고 정부가 지급을 보증하는 것은 물론 결손까지도 정부가 보전하도록 했다. 실제로 1998년 산은이 5조원에 가까운 적자를 내자 정부가 2조원 이상의 증자를 단행했다. 이러한 목표 아래 경제발전 단계에 따라 시대적인 요청에 부응해 그 역할을 수행해 왔다. 산은은 개발도상국 단계의 국가에 필수적인 금융기관으로서 출발해 종합금융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업금융 전문은행으로 성장, 발전했다.


1950년대에는 전쟁으로 파괴된 산업시설 복구자금 지원의 역할을 맡았고, 1960~1970년대 고도 성장기에는 중화학공업 등 수출전략산업 육성을 위한 장기설비금융을 지원했으며, 1980년대에는 설비금융 및 산업합리화에 주력했다. 1990년대에는 국제ㆍ투자금융의 기반을 닦아 국내기업의 해외진출을 도왔다. 1998년부터 2000년까지는 외환위기 극복을 위해 기업구조조정, 신용경색 해소 및 시장 안정화 기능을 수행했다. 이 때 당시 산은은 시장 최후의 보루자(Last Resort)로서 대우 계열사 등 상당수 대기업들의 구조조정을 실질적으로 주도해 시장에 의한 구조조정시스템을 조기 정착시키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맡았다. 2000년대 이후에는 경제 재도약을 위한 미래 성장동력을 육성하여 국가 경쟁력을 확충하고 사회간접자본 확충 등 사회균형발전을 도모하고 있다.


이처럼 산업은행은 시대적 상황에 맞게 산업 개발과 국민경제 발전에 이바지하는 금융지원 분야 및 방식으로 변화했다. 산은법 제1조에서 규정하고 있는 “중요산업”의 개념이 계속해서 변화했기 때문이다. 50년대 중요산업이 전력, 시멘트, 석탄 등 기간산업이었다면, 60~70년대 중요산업은 섬유, 철강, 중화학산업이었다. 80년대는 자동차, 전자였으며, 90년대 들어 IT, 반도체가 중요해졌다. 2000년대 이후 방송, 통신, 생명공학 등으로 초점이 이동했다. 금융의 개방화, 자율화 추세에 발맞춰 산은법상 지원범위가 크게 확대되어 왔음을 보여준다. 시대의 변화와 관계없이 혁신형 중소ㆍ벤처 기업, 초기 기술사업화 등 금융소외영역 지원을 확대해 국가경제 및 산업발전을 촉진시켜왔다.


산업은행은 취약한 국내 금융산업의 낙후된 분야에서 첨단금융상품을 선도적으로 개발하고 도입하여 새로운 금융시장을 조성함으로써 우리나라 금융산업 발전의 한 축을 담당해 왔다. 1995년 국내 최초로 프로젝트파이낸싱(PF) 금융을 취급했고, 기업금융 관련 환ㆍ금리 리스크 헤지 등을 위한 파생상품 업무 강화로 국내 파생상품시장을 개척했다. 또 기업금융 및 구조조정 역량을 토대로 M&A 업무를 적극 추진하고 있으며, 2003년부터 컨설팅 업무도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 밖에 고도의 전문성이 필요한 사모펀드(PEF)분야에서 선도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국제금융시장 진출과 관련해서 국내기업의 외자조달을 주선하고, 선박ㆍ항공기 금융, 해외 PF 등 고부가가치 투자은행 업무로 업무영역을 확장하는 중이다.


3. 산업은행의 정체성 위기

외환위기 이후 금융의 대형화ㆍ겸업화 등으로 인해 4대 시중은행의 자산규모가 확대되면서 자산 규모나 기초 인프라 등에서 산업은행의 지위가 바뀌었다. 1999년 말까지 자산 규모 국내 1위였던 산업은행은 시중은행들이 생존을 위해 합병과 인수를 통해 몸집을 불리면서 2007년 9월 말 기준 국내 5위로 하락했다. 점포 수 및 임직원 수 등 기본적인 인프라도 상대적으로 열세에 놓였다. 또 민간금융기관의 적극적인 업무 확대로 금융시장에서의 산업은행의 주도적 지위는 약화되었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정체성의 위기가 심화되고 있다.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는 산은을 앞장세워 기업금융을 확대하고, 외화자금을 조달하였으며 기업구조조정을 추진해 시장실패를 보완했다. 외환위기 이후 기업들의 체질이 개선되자 산업은행은 민간금융기관과 충돌하게 된다. 기업들의 시설자금 수요가 급감하면서 산은은 시중은행들도 공급이 가능한 운영자금 대출을 확대했다. 전통적인 정책금융 수요가 점진적으로 감소함자 산은은 금융지주회사로 방향을 정하고 대우증권과 옛 서울투자신탁운용을 자회사로 편입하고 민간영역인 프라이빗 뱅킹(Private Banking), 방카슈랑스 등 수익성 사업을 확대했다. 정부의 출자와 지급보증ㆍ손실보전까지 받는 국책은행이 수익성 위주의 사업에 나서자 민간 금융회사들은 시장왜곡 현상이라며 반발했다. 감사원도 설립취지가 퇴색한 산은에 대해 정부 정책과 관련된 투자 및 융자에 특화된 금융기관으로 기능을 조정하도록 권고하기도 했다.


사실 업무중첩 문제는 산은이 민간영역을 의도적으로 침해했다기보다 SOC 건설을 위한 프로젝트파이낸싱(PF)ㆍ성장동력 벤처투자 등 산은이 선도적으로 개척한 분야에 민간금융기관의 진출이 확대되면서 발생한 경우가 많다. 공공적 역할로 인한 낮은 수익성을 만회하기 위한 자체 수익기반 확보 노력은 그 자체로 험담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산은의 정책금융 업무가 최근 전체 업무의 5% 이하로 줄었음은 주목할 대목이다. 산은 역할을 대신할 민간부문이 그만큼 성장했다는 방증이다. 2008년 말 국내 M&A 주선 시장에서 산은의 시장점유율은 70.8%였다. 국책은행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민간은행의 영역을 잠식한다는 주장이 점점 힘을 얻는 이유다.


산업은행이 2004년부터 조 단위의 이익을 낸 것도 대규모 유가증권 평가 및 처분이익 등의 발생에 기인한 것으로 과다한 수익성이라 보기 힘들다. 그럼에도 산은의 높은 임금 수준은 사회적 질시를 받기 충분하다. 총자산인건비율이 시중은행에 비해 낮고, 고급인력을 유치해 1인당 당기순이익과 1인당 부가가치가 시중은행에 비해 높다는 항변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2008년 산업은행 직원들의 평균 연봉은 9,270만원으로 공공기관 가운데 가장 높은 수준이다. 산은의 과도한 인건비와 성과급은 여러 차례 지적되었지만 단지 이 때문에 민영화를 추진하는 것은 아니다. 산업은행이 방만한 경영을 했기 때문에 변화를 요구한다기보다는 금융환경 변화에 걸맞은 역할을 부여한다는 의미에서 혁신을 탐색해야 한다.


4. 민영화 방안에 대한 논쟁

1990년대 이후 국제 금융질서가 바뀌면서 정부 소유 은행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정책금융이 축소되자 국책은행이 상업금융 분야로 업무영역을 넓혀가면서 국책은행의 설립목적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또 국책은행이 은행 간 경쟁을 위축시키면서 예대마진을 확대하고 여신을 대기업에만 집중시키는 부작용이 나타났다. 우리도 개발금융의 필요성이 감소하고 있으며 새로운 진로를 모색해야 한다는 의견이 공감대를 얻어 산업은행의 개편을 준비하게 되었다.


2006년 6월 산업은행경제연구소 기업금융연구센터가 펴낸 ‘주요국 정부계 은행의 발전사례 분석’에 따르면 정부계 은행의 변화유형의 선택은 각국의 경제발전 단계, 정책방향, 개별은행의 역량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하며, 정부계 은행은 업무범위 제약, 점포 및 자회사 설치 제한 등 경영 및 영업 측면에서 많은 제약을 받아왔으므로 단계적, 체제적인 체제변화가 필요하다고 분석했다. 금융공기업 개편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으나 특수은행 체제를 유지하되 상업부문과 공공부문의 역할을 재정립하는 방안과 민영화와 기능전환을 통해 일반은행으로 변모하는 방안으로 나눠볼 수 있다.


현재 산은의 상업금융은 민간으로 이관하고 정책금융의 공적 기능을 강화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싱가포르 개발은행과 대만 교통은행과 같은 민영화 성공 사례도 있지만, 실패 사례 역시 존재한다. 필리핀국립은행은 무리하게 민영화를 추진했다가 다시 국유화가 되었고 일본 정책투자은행(DBJ)은 비효율적인 경영과 방만한 지출로 문제가 되자 DBJ를 주식회사로 만들고 2015년까지 완전 민영화하겠다는 법을 만들었다. DBJ는 2005년 민영화를 선언하고 2007년 관련 법안을 만들었지만 지분 매각은 아직 단 한 건도 이뤄지지 않았다고 한다. 산은 민영화 역시 적잖은 시간이 걸릴 수 있음을 보여준다.


애초에 금융위원회는 산업은행 단독 민영화 방안을 추구했으나 산업은행과 우리금융지주, 기업은행을 합친 다음에 민영화하자는 ‘메가뱅크’안의 불씨는 쉽게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전광우 금융위원장은 산은 민영화 추진 과정에서 순차적으로 추가적인 인수합병(M&A)을 통해 대형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아 메가뱅크가 추진될 여지를 남겼다. 기획재정부는 자산규모 500조원, 세계 30위권의 대규모 은행이 탄생되게 금융의 대형화를 꾀할 수 있다는 취지에서 메가뱅크안을 내놓은바 있다. 현재 대다수 은행들이 기존 M&A의 홍역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자생적으로 대형 투자은행이 등장하기 어려운 구조다. 초대형 은행의 등장시켜 민간의 합병을 유도하자는 재정부의 고충을 이해할 만하다.


하지만 그 매물을 감당할 만한 인수 주체가 과연 있겠냐는 회의적인 시각이 적잖다. 매각이 어려운 것은 물론 별개로 매각하는 방식에 비해 가격이 떨어질 우려도 크다. 자발적인 대형화가 아닌데다 국민은행의 자산규모보다 2배 이상 큰 메가뱅크 경영이 비효율적일 경우 국민경제에 미칠 위험은 심대하다. 다만 산업은행을 따로 매각하더라도 투자은행 업무 중심의 구조조정이 동반되기 때문에 나머지 사업부문을 다른 은행과 합치는 메가뱅크안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지 않는 모양이다. 향후 우리금융지주와 기업은행이 민영화하는 과정에서 은행 간 M&A를 통해 메가뱅크가 출현할 수도 있다. 자본시장통합법 시행 이후 연기금이나 사모투자펀드(PEF)가 유사 금융주력자로 분류돼 은행을 직접 인수할 수 있기 때문에 마땅한 매수세력이 존재하지 않으리라 단정하기도 성급하다.


정부는 산업은행 민영화 과정에서 우리은행, 기업은행 중 한 곳을 자회사로 두는 것도 검토했다. 산업은행 입장에서는 자산규모가 커지고 기능면에서도 기업금융 뿐 아니라 소매금융에서도 경쟁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어 시장에서 높은 값을 받으려는 의도다. 더욱이 지난해 산은이 벤치마킹한 투자은행들의 잇따른 몰락으로 말미암아 민영화 연착륙을 위한 타 은행과의 합병이 계속 주장되는 실정이다. 이 경우에도 정부가 주도적으로 나서기보다는 전략적 투자자들의 요구에 부응하는 방식으로 매각가치를 높여야 한다. 산업은행 개편은 우리 경제 및 금융여건에 대한 세밀한 검토와 더불어 비슷한 기능을 담당하는 공공기관 전반의 재정립과 함께 추진해야 한다.


5. 정책금융공사가 갈 길

정부는 산업은행 민영화를 통해 금융공기업 민영화와 중소기업 지원이라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기대한다. 산은지주 지분 51%는 일단 정부가 보유하고, 49%는 정책금융공사로 현물 출자하기로 했다. 산업은행의 정책금융 기능을 수행할 한국정책금융공사(KPBC)는 원래 한국개발펀드(KDF)라는 이름이 붙었다. 금융위의 설명에 따르면 정책금융기관으로서의 정체성을 명확히 하기 위한 조치라고 한다. 단순히 이름만 바뀌었다기보다는 성격에도 변화가 생겼음을 감지할 수 있다. 한국개발펀드는 시장원리를 강조하면서 정책금융의 수익성과 안전성을 부각시킬 태세였다면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정책금융의 본래 기능에 방점을 찍는 모습이다.


그럼에도 정책금융공사 역시 직접 금융지원을 하는 기존 방식에서 민간금융회사를 통한 간접지원 방식으로의 전환을 염두에 두고 있다. 이는 독일의 부흥은행(KfW)을 모델로 삼는다. 소유는 정부가 운영은 민간이 함으로써 직접 정책금융방식에서 간접 방식으로 전환하는 것을 일컫는다. Kfw는 독일 정부가 상환을 보증하는 채권을 발행해 저금리로 자금을 조달해 중소기업 지원 등 공공 목적으로 사용하는 형태로 운영된다. KfW의 대출은 금융기관을 경유하는 간접대출이어서 중소기업은 먼저 거래 금융기관에 대출신청을 해야 한다. 대출신청을 받은 금융기관은 KfW에 해당 금액만큼 대출자금을 신청하고 KfW에 대해 지급하는 금리에 마진을 추가하여 중소기업에 대출한다.


이처럼 정책금융공사가 민간금융기관에 중소기업 자금을 배분하고 민간금융기관이 기업들에 대출해 주는 ‘전대방식(On-lending)’이 활용될 예정이다. 정부가 정책금융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은 설정하지만 기업 선정 등 구체적인 사업집행은 민간금융기관이 위탁하는 방식이다. 전대방식은 시장친화적이라는 이점이 있으나 대출과 투자에 따른 책임을 민간금융기관이 지기 때문에 영세기업이나 소상공인은 성장 가능성 보유 여부와 관계없이 심사과정에서 불이익을 받을 소지가 있다. 이는 기본적으로 유럽과 우리의 금융환경이 다르기 때문이다. 자금 수요자와 은행이 오랜 기간 관계를 유지하는 주거래은행제도가 활성화된 유럽과는 달리 우리는 단기거리에 편중된 상황이다. 기업에 대한 정보가 부족한 은행으로서는 전도유망한 기업을 가름할 역량이 부족해 담보나 보증에 의존하는 실정이다.


정책금융 기능이 시장에만 맡겨질 경우 일부 우량 중소기업에만 대출이 몰릴 공산이 크다. 실제로 정책금융기관을 민영화한 일본은 Kfw 방식을 따르지 않았다. 정부의 직접 지원이 아쉬운 금융위기 시대에 전대방식을 채택함으로써 중소기업이 자금 경색을 겪을 것이라는 회의적인 반응도 보인다. 몇몇 기업에 지원이 집중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중개한 금융기관의 마진폭을 신용 등급별로 차등화하고 낮은 신용등급에는 최대 50%의 보증이 이뤄질 방침이라고는 하지만 정책금융의 부실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다. 민간금융위원회에서 금융기관들이 중소기업을 제대로 판별하기 위해 중소기업에 대한 신용정보를 제공하는 인프라스트럭처 구축이 먼저 필요하다고 제안한 내용을 새겨볼만 하다. 금융위기 극복을 위한 공적자금 투여나 재정투자 확대 같은 흐름과 전대방식이 어울리기 힘든 측면이 있는 만큼 미세조정에 더 신경 써야 할 것이다.


아울러 현재 중소기업 관련 기관은 중소기업청, 신용보증기금, 기술보증기금, 예금보험공사 등 10곳이 넘고 지원자금 규모도 60조원을 넘는다. 여기에 정책금융공사까지 등장할 경우 중소기업 금융지원에 대한 업무분담과 역할정리가 절실하다. 정책금융공사의 역할을 정책금융 업무를 조정하는 교통정리 기관 정도로 국한하자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중소기업 지원 외에 수출입금융과 개도국 지원 등의 역할을 어떻게 결합할 것인가에 대한 검토도 요구되는데 정책금융공사를 만드는 대신 해당 기능을 수출입은행에 통폐합하자는 주장도 나온 바 있다. 반면에 정책금융공사에 중소기업 지원 역할과 기업 구조조정, 부실기업 회생 작업 따위의 금융시장 안전판 역할을 광범위하게 포괄하자는 견해도 나온 만큼 정책금융공사에 대한 명확한 방향 설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일각에서는 산은 민영화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암초가 될 것을 걱정한다. 한미 FTA 협상에서 양측은 국책금융기관의 정책금융 지원은 지속할 수 있도록 합의했다. 정책금융 지원 기관을 산업은행ㆍ기업은행ㆍ주택금융공사ㆍ농협ㆍ수협 등으로 명문화했는데 당시 존재하지 않았던 정책금융공사는 당연히 언급되지 않고 있다. 정부는 통상마찰 등을 피하기 위해 정책금융공사를 전대방식으로 운영할 계획이지만 미국 측이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금융위는 정책금융공사가 산은 매각 대금으로 설립되는 데다 민간금융기관과 경쟁하지 않는 공적 역할을 담당하므로 별 문제 없다는 입장이지만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야 한다. 만약 정책금융공사를 미국 측이 인정할 수 없다고 맞서면 정책금융 기능이 큰 위기를 맞을 수 있으므로 이에 대한 대응전략을 마련하길 바란다.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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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은행 분석(2)

경제 2009. 5. 4. 05:08 |

7번, 8번 목차에서 투자은행에 대한 설명이 장황하게 이어지는데 금융위기가 터지기 전인 2008년 상반기에 정리한 내용이라 시의성이 떨어집니다. 다만 투자은행 관련 개념들을 짜깁기해둔 만큼 논의의 흐름을 짚어보는데 필요할 듯싶어 쳐내지 않고 살려뒀습니다.


6. 수신기반의 확보

산업은행 민영화의 당초 목표가 글로벌 투자은행 육성이라고 하지만 IB사업의 상당부문이 개인고객 기반 없이는 성립이 어렵다. 따라서 현재의 기업금융 전문에서 소매금융까지의 영역 확대는 불가피하다. 산업은행은 예대마진이 아니라 투자수익에 의존해 왔기 때문에 순이자마진(NIM)은 2007년 말 0.2%에도 못 미쳤다. 수신기반이 취약한 데다 대출의 상당액이 5bp 내외의 유명무실한 마진을 받고 공급하는 저수익 여신이 많았다. 저수익 여신 비중을 줄여나간 결과 2008년 말 NIM은 0.73%로 개선되었지만 시중은행에 비해 많이 모자란 수치다.


산업은행은 예대마진이 아니라 투자수익에 의존해 왔다. 앞으로 산업금융채권(산금채)을 발행에 바탕을 둔 자금조달 방식은 기대할 수 없으므로 안정적인 수신기반을 마련해야 궁극적으로 IB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소매금융기관과의 제휴를 적극적으로 모색해야 하며 수신기능과 전국적인 네트워크가 형성된 우체국 금융부문과의 통합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나온다. 싱가포르 개발은행(DBS)는 민영화 과정에서 정부가 떼어 준 우정사업본부를 M&A해 출발하자마자 싱가포르 국내 수신의 60%를 보유한 상태였다.


실제로 산업은행은 민영화를 대비해 개인고객 확보에 나서고 있다. 민간은행의 적금과 경쟁하기 위해 2008년 5월부터 ‘ⓤbest 자유적금’을 판매하여 정기예금 수준의 금리를 적용 받도록 했다. 우리은행과 제휴해 우리은행 지점에서 산업은행 계좌의 입ㆍ출금, 통장정리, 통장이월, 조회 거래 등이 가능하도록 해 지점이 40여 개의 불과하다는 단점을 보완했다. 지난해 고액자산가들을 유치하려는 목적으로 PB전문인력을 채용한 것도 민영화를 대비한 포석이다. 이처럼 취약한 수신기반을 넓히기 위해 시중은행과의 M&A 역시 검토되고 있는데 최근에는 외환은행과의 짝짓기설도 들린다.


또한 국내은행 가운데 처음으로 ‘다이렉트 뱅킹’ 방식의 예금을 준비했다. 다이렉트 뱅킹이란 금융사가 지점을 거치지 않고 인터넷과 콜센터를 통해서만 예금과 대출 등 금융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을 말한다. 작년 하반기 즈음 수시입출금식예금(MMDA)인 ‘kdb 다이렉트예금(가칭)’을 출시한다고 했으나 실제로 성사되었는지는 관련 기사가 보이지 않아 확인하지 못했다. 머잖아 인터넷전문은행이 도입된다면 이를 설립할 것을 예고하는 산은의 태도로 보아 실제로 상품이 출시되지는 않은 듯싶다. 인터넷은행은 인건비 및 운영비가 덜 드는 만큼 비교적 높은 금리와 낮은 수수료를 제공할 수 있으리라 내다본다.


국책은행이라는 타이틀을 반납하는 순간 채권 발행금리가 10~20bp는 오를 것으로 예상돼 자금조달비용이 늘어날 것이 자명한 만큼 개인고객 예금을 얼마나 확보하느냐가 산업은행 독자생존의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민영화 논의가 한창이던 2008년 5월 무디스(Moody's)는 산은의 등급 전망을 ‘안정적’에서 ‘부정적’으로 낮췄다. 민영화 과정에서 산은 신용등급이 현재의 국가 신용등급보다 낮아지는 건 어느 정도 예상되는 일이다. 올해 2월에는 다른 은행은 모두 ‘안정적’으로 평가했지만 산은만 계속 ‘부정적’이라는 등급전망을 유지했다. 수신기반을 확보하는 노력은 산은의 불확실한 미래를 눅이는 지름길이다.


7. 투자은행으로의 변화

2008년 하반기 세계적인 금융위기가 터지기 전까지 투자은행은 한국의 금융환경을 개선할 백마 타고 올 초인이었다. 투자은행에 대한 열망을 키운 원인은 여러 가지다. 우선 금융의 탈중개화 현상이 심화되면서 기존의 은행 중심의 간접금융에서 직접금융 비중이 확대되었다. 은행의 수익성은 악화되어 2005년 2.8%대이던 순이자마진(NIM)이 2007년에는 2.4%대로 하락했다. 증권사도 위탁매매 중심 수익구조에서 벗어난 다변화된 수익구조를 물색했다.  여기에다 기업들이 투자, R&D보다 현금보유비중 높이는 자본과잉 현상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퍼졌다. 가계는 은행 저축보다는 펀드 같은 금융상품을 통한 투자를 선호하면서 금융이 새로운 성장동력산업으로 각광을 받기 시작했고 그 중심에 투자은행이 서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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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록, 『Investment Banking』, 교보문고, 2008. 참조/함께 과제했던 애후배 용철 작성>

투자은행은 주식ㆍ채권 등의 직접증권을 인수하고 판매하는 은행을 말한다. 즉 IB란 자본시장을 통해 기업과 투자자를 연결해 주는 중개기능을 맡는 은행이다. 상업은행이 고객들에게 확정금리에 따라 이자를 주는데 반해 투자은행은 투자 성과에 따라 고객에게 수익을 돌려준다. 국내은행의 IB업무 수익비중은 글로벌 은행에 비해 극히 낮은 수준임은 여러 차례 지적되어 왔다. IB는 전통적으로 기업 및 프로젝트의 자금조달을 위하여 증권인수 및 기업공개(IPO) 등의 서비스를 제공해 왔다. 기업에 자금을 공급하는 각종 투자형태를 망라하는데 최근에는 인수합병(M&A), 자기자본투자(PI), 신용파생거래 등을 통해 큰 수익을 창출하고 있다. 요즘 국내에서 투자은행 서비스를 필요로 하는 대상은 중소기업, 벤처 파이낸싱, 프로젝트 파이낸싱, M&A 등이며 이 가운데 특히 중소기업과 M&A를 위한 투자은행 서비스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는 추세다.


애초에 금융당국은 자본시장통합법 시행을 계기로 우리나라에도 골드만삭스 같은 대형 IB 탄생을 기대했다. 경제규모가 커지고 교역규모는 세계 10위권에 근접했지만 글로벌 자본시장에서 이름을 대면 알만한 IB 하나 없는 게 우리 금융산업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외환위기 이후 금융회사들이 건전성 확보에 주력하면서 리스크가 큰 IB부문에 주력할 수 없어 벌어진 현실이지만 자통법 시행으로 IB쪽 환경이 우호적으로 변했다. IB업무 관련 글로벌 시장에서는 과점형태로 소수의 금융회사가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는 상황이며 일정 부분 규모의 경제로 인한 진입장벽도 존재한다. 따라서 국내 금융회사는 무작정 백화점식으로 IB업무를 벌이기보다는 자신의 경쟁력을 십분 발휘할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IB업무는 고수익, 고위험 업무로서 수익의 변동성이 매우 높아 금융회사의 대형화가 필요하며 역사적으로 미국 등 선진국에서 수많은 투자은행들이 경쟁에서 도태되고 현재 몇 개 대형 투자은행만이 세계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산업은행은 국내에서 손꼽히는 IB능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해외 선진 IB에 대응하여 국내 IB산업 발전을 선도할 역량을 보유했다고 판단된다. 토종 IB 성립을 위해 산은은 대우증권 등 금융자회사와의 결합을 통한 시너지 효과를 노리겠다고 밝혔다. 산은은 광범위한 기업고객 네트워크, 채권시장업무(DCM) 관련 IB업무를 근간으로 기업금융전문은행으로 특화하고 대우증권은 주식시장업무(ECM) 관련 IB업무를 토대로 금융투자회사로 특화한다는 그림이다. 이를 통해 기업금융 중심 투자은행(CIB, Corporate Banking + Investment Banking) 체제를 구축할 계획이다.


그런데 산업은행에서 정책금융 기능을 제외한 부문을 모두 IB로 볼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산은의 기업금융부문, 즉 일반 상업금융부문이 여전히 남기 때문에 산은지주회사는 내부에 IB부문을 포괄하는 상업은행과 별도 증권사 등을 보유한 우리금융, 신한금융 등 기존 은행지주회사가 별반 차이가 없어질 가능성이 있다. 당초의 원대한 목표에 못 미치는 또 하나의 은행지주회사만 만들어지는 셈이다. 산은지주회사가 다른 은행지주회사보다 IB부문에서 강점을 가진다는 주장은 설득력 있지만 민간은행 기업금융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할지는 미지수다. 특별법의 적용을 받아왔던 국책은행이라는 장벽이 걷힐 때 IB부문의 강점을 유지할 수 있을지는 앞으로 좀 더 두고 봐야 한다.


8. 투자은행 경쟁력 향상 방안

IB업무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금융 전문인력의 양성, 선진형 보상체계 정착, 적극적 위험관리, 국내외 네트워크 확충, 조직의 유연성 제고, 규모의 대형화, 자본력 확보 등의 과제들이 손꼽힌다. 특히 중요한 것은 해외진출전략의 이행이다. 산업은행은 해외금융시장을 선도적으로 개척하려는 의지를 피력하고 있다. 국내은행의 해외진출은 외환위기 직후 크게 위축됐으나 2002년 이후 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활성화되었다. 아시아에 편중된 국내은행 해외진출의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전략적 영업거점의 해외 네트워크 확대가 필요하다. 진정한 의미의 해외영업 확대란 기존의 수익창출 구조 외에 새로운 수익원을 발굴하는 것으로 IB업무에서 나온 수수료수익 등 비이자부문의 수익창출 능력을 키워야 한다.


글로벌 IB들의 발전경로를 살펴보면 자국영업에서 출발하여 지역영업으로 확장하고, 진출지역을 하나씩 늘리면서 발전하는 모습은 보인다. 가령 1869년 설립된 골드만삭스는 미국에서 기업어음과 IPO 등의 투자은행 업무를 영위하다, 1970년 유럽지역으로의 진출을 위해 런던에 첫 해외지점을 개설했다. 유럽시장에서 M&A 재무자문 등으로 성공한 골드만삭스는 1974년 도쿄지점과 1984년 홍콩지점을 개설하면서 아시아지역으로 진출하여 공기업들의 민영화에 참여했다. 아시아에서의 성공을 발판으로 중동지역으로 진출한 골드만삭스는 아프리카와 중동지역에서만 전체 IPO 수입의 43%를 거두는 등 전세계에서 고른 실적을 거뒀다. 이러한 국내->영국->유럽->아시아로의 단계적 해외진출 전략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현지화가 수반되어야 한다.


진출한 국가의 문화, 제도 및 환경에 최적화된 전산 및 리스크관리 시스템, 인력 등의 인프라를 구축하고 이에 맞는 상품을 개발하여 해당 국가 및 글로벌 투자가에게 공급해야 한다. 여기에는 금융개방의 정도나 선진 금융기관의 진출 정도 등을 면밀히 분석하여 틈새시장을 공략하는 것도 포함된다. 선진 금융기관이 아직 진출하지 않은 아시아 지역의 성장잠재력이 높은 시장을 선점하는 타이밍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즉 진출한 국가를 거점으로 인접한 시장에 대한 정보 수집 및 교류를 통한 지역별 허브전략을 통해 유기적인 네트워크를 조성해 신흥국가에 대한 정보 취득의 어려움을 보완할 수 있다. 산은은 국내기업 M&A 자문에서 보여준 업무성과를 바탕으로 국경간 인수(Cross-border M&A) 및 지분 참여를 이용해 현지 국가의 차별적 규제를 회피하고 신뢰 및 평판을 높이도록 노력해야 한다.


글로벌 IB들이 특정업무의 전문화를 기반으로 단계적으로 성장한 역사적 사실을 감안하여 국내 IB도 단기적으로 경쟁력이 있는 특정업무의 전문화를 목표로 설정해야 한다. 산은도 기업규모(중소기업/대기업), 산업(특정 산업/모든 산업), 업무(특정 업무/모든 업무), 지역(국내/지역/글로벌) 등의 특화 가운데 어디에 선택과 집중을 할지 명확히 해야 한다. 아시아 시장에 진출함과 동시에 전략적 영업거점의 해외 네트워크를 확대하는 지역 특화를 꾀할 만하다. 또한 M&A, 구조화금융(SF)과 PF, PEF, 파생상품 업무에 집중하는 업무 특화 역시 단기적 목표로 삼을 만하다. 세분화된 목표시장을 선정해 강한 업무부문에 집중하면서도 절대적 우위로 삼을 만한 부문을 마련하는 것이 관건이다.


9. 투자은행의 실패를 징검다리 삼아야

산업은행 민영화는 경쟁력을 갖춘 동북아 투자은행을 만들어 국부를 창출하겠다는 포부에서 출발했다. 가장 잠재력 있다고 여겨지는 산업은행을 국내 IB의 선도주자로 나서게 함으로써 동북아 금융시장을 이끄는 지역 IB로 발돋움하려는 웅지를 품었다. 2008년 하반기 불거진 금융위기 국면에서 주요 투자은행들도 휘청거리는 만큼 산은의 민영화 전략이 온당하냐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 IB 육성이라는 경영전략을 원점에서 재검토해야 한다는 주장도 들린다. 그러나 금융당국은 IB 노하우를 가장 많이 축적한 산은에 대한 애정을 거두지 않고 있다.


금융당국은 리먼브라더스와 같은 독립계 IB가 아닌 상업은행을 기반으로 한 투자은행(CIB)을 지향하기 때문에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다독인다. 산은도 은행을 기반으로 하는 도이체방크식 IB를 본받겠다고 안심시킨다. 사실 CIB에 대한 개념 정의도 명확하지 않다. 당초 산은이 내세웠던 기업금융 중심 투자은행(Corporate and Investment Bank)과 지금 말하는 상업은행 기반 투자은행(Commercial and Investment Bank)은 그 정신이 비슷하지만 완전히 포개지는 것 같지는 않다. 여하간 과감한 위험 감수와 신속한 의사결정으로 상징되는 IB가 아닌 보수적인 자산운용으로 대표되는 CB를 접목하겠다는 구상이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주택 담보대출) 사태는 IB의 아성을 무너뜨렸다. 이 재앙을 빗겨간 CB를 재조명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고수익을 얻지 못한다고 구박받던 CB의 안전성이 재평가되면서 CIB나 UB(Universal Bank) 모델이 부상했다. CIB가 금융지주회사 밑에 CB와 IB를 운영하는 형태라면 UB는 CB 내에 부서를 설치해 IB업무를 수행한다. UB는 IB업무만을 담당하는 자회사를 두지 않고 CB가 IB업무를 병행한다는 점에서 CIB와 대별된다. 유럽에서는 전통적으로 CB와 IB를 분리하지 않은 UB를 운영해왔고 미국은 CIB 형태가 발달했다. CIB와 UB는 크게 차이난다기보다는 미국과 유럽의 금융법과 관련해 나온 산물일 따름이다. 두 유형 모두 IB가 부실해질 때 CB영역까지 전이될 위험이 엄존한다.


CIB가 상대적으로 안전할 수는 있지만 만병통치약이 아님은 또렷하다. CIB인 씨티그룹도 서브프라임 사태로 막대한 손실을 입고 곤욕을 치렀다. 단순히 외국의 어느 모델을 따르느냐 하는 주판알을 굴리기보다는 안전성과 수익성의 적정 비율과 알맞은 조합을 궁리하고 우리의 금융 관리ㆍ감독체제를 점검해보자. 『삼국지연의』에 비유하자면 군세를 자랑하던 IB군은 적벽에서 참담한 패배를 당한 형국이다. 산은은 IB의 긍정적 유산을 수습해 화용도로 퇴각해야 한다. 화용도의 관우는 자애로웠지만 오늘의 패잔병들이 맞닥뜨릴 ‘탐욕’이란 장수는 별로 푸근하지 않을 테니 퇴로는 험난하겠지만 말이다. 극단적 성과주의의 파국을 목격한 산업은행이 자본주의 사회의 절제를 고민하길 희망한다. - [無棄]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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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mk.co.kr/outside/view.php?year=2009&no=259048>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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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서보경님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안 빌려주자 비로소 대학 졸업을 실감했다. “대출불가 사용자”라는 문구는 내 가슴을 시리게 한다. 내가 다녔던 학교는 예약제가 있어서 이용도가 높은 도서의 경우 졸업생은 예약도 불가해서 거의 열람할 수 없는 실정이다. 학생 신분이 아니라고 책도 안 읽을 수는 없다. 미취업 혹은 미진학 졸업생들이 당장 거처를 옮길 수는 없고 학교 주변을 맴돌면서 공부를 하거나 책을 보는 경우가 대부분이니 말이다. 광야로 내몰린 사람들이 덜 스산하도록 책 몇 권 끼고 다닐 수 있게 해주셨으면 좋겠다.


관련 조사가 거의 없지만 2007년 8월에 <졸업생에 야박한 대학도서관…‘도서대출’ 제한>이라는 제목의 경향신문 기사 정도가 눈에 띈다. 서울시내 28개 대학을 취재했을 때 15곳이 졸업생에게 도서 대출을 허용하지 않았고, 아무 조건 없이 졸업생에게 도서 열람과 대출하는 학교는 경희대 한 곳뿐이었다. 나머지 학교들은 비록 예치금 등의 일정한 제한이 있지만 조건부로 대출을 허용했다. 심지어 휴학 기간에도 책을 빌려주지 않는 학교들도 있는데 너무 박절한 처사다.


나는 요즘 친구나 후배들에게 부탁해 책을 몇 권씩 빌려보는 형편이다. 다행히 2009년 3월부터 학부생에게 기존 5권에서 7권으로 대출책수가 늘어나 조금 미안함을 덜었을 따름이다. 학생증을 타인에게 양도하지 말라는 도서관 이용 수칙을 지키겠다며 책을 빌려줄 사람을 도서관까지 불러 들여야 하니 여간 면구스러운 게 아니다. 추사 김정희 선생이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 제자인 우선 이상적(李尙迪)이 보내준 책을 받고 그 정성에 감격하여 그려준 그림이 바로 세한도(歲寒圖)다. 세한도 발문을 읽다가 내게 책 보시를 해준 이들의 따뜻한 마음자리를 생각했다.


어떤 대학들은 지역 주민에게도 도서관을 개방한다고 들었지만 대학 당국이 우선 졸업생들에게 한두 권이라도 도서 대출을 허용하는 방안을 긍정적으로 검토해주셨으면 한다. 도서관이 공공성 이전에 제 몫의 사사로움을 다하는 길이다. 잡 셰어링 이야기가 많지만 북 셰어링도 긴요할 듯싶다. 재학생에 비해 더 적은 권수를 짧게 빌려주고 연체에 대핸 제재를 강화한다면 못할 일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혹여 재학생들의 도서 이용에 불편을 줄까봐 큰 목소리로 외치지는 못하지만 말이다.


지역의 공공도서관을 활용하는 방안도 있겠지만 공공도서관과 대학도서관은 장서를 보유하는 양상이 다르다. 전공서적 혹은 학술서적은 아무래도 대학도서관 사정이 낫기 때문이다. 정확한 통계는 찾지 못했지만 장서수나 시설 면에서 공공도서관을 능가하는 대학도서관이 수두룩할 게다. 대학도서관은 공공도서관에 견주어 수는 적지만 장서수는 훨씬 많다고 한다. 열악한 공공도서관 상황 때문에 주민들에게 대학이 도서관 문을 열어야 한다는 주장이 계속 나오지만 당장 힘들다면 학교 구성원이던 이들이라도 먼저 헤아려야 한다.


2008년 8월 대통령 소속 도서관정보정책위원회가 발표한 도서관발전 종합계획에 따르면 2013년까지 607개(2007년 말 기준)인 공공도서관을 900개까지 늘린다고 되어 있다. 또한 현재 1권 남짓한 국민 1인당 장서수를 1.6권 수준인 8천만 권으로 끌어올리겠다고 발표했다. 지난해 문화체육관광부가 제출한 국정감사 자료를 보면 1인당 장서수는 미국이 3권(2004년 기준), 일본이 2.8권(2006년 기준), 프랑스가 2.5권(2003년 기준), 영국이 1.8권(2005년 기준), 독일이 1.5권(2005년 기준)으로 우리가 많이 모자라다. 양이 부족하답시고 질로 승부할 역량도 아니니 문제다.


한국교육학술정보원이 OECD 가입국 가운데 28개국을 대상으로 분석한 대학도서관 현황(2001∼2002년 기준)을 보면 우리나라 학생 1인당 대학도서관 장서수는 44.2권으로 20위였다. 아이슬란드는 141.6권으로 가장 많았고 미국이 131권으로 뒤를 이었다. 일본도 92.6권으로 우리의 2배가 넘었다. 2008년 한국대학교육연구소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학생 1인당 장서수가 2000년 43.5권에서 2007년 58.5권으로 15권 증가하는 데 그쳤다고 한다. 도서관 관련 통계를 신문기사 검색을 통해 산발적으로 접했는데 앞으로는 도서관 관련 통계가 체계적이고 주기적으로 관리되길 바란다.


숙명여대가 국내 대학 중 최초로 ‘학사후 과정(Post-Bachelor Program)’ 프로그램을 운영한다고 밝힌 이후로 몇몇 대학들이 이와 유사한 대책을 내놓은 것은 그 실효성 여부를 떠나 반가운 일이다. 물론 그 학사후 과정에는 도서관 대출 가능이 필수적으로 선행되어야 한다. 최근 순천향대가 ‘졸업생 회원제’를 도입해 졸업생들도 간단한 가입 절차만 거치면 재학생과 똑같이 도서관 도서를 대출할 수 있도록 했다. 온라인 논문 검색, 열람실 및 스터디룸 사용, 멀티미디어존 등 도서관의 모든 혜택을 누릴 수 있게 한 그 애틋한 마음이 고맙다.
 

교육과학기술부가 구상하는 ‘미취업 대학 졸업생 지원 프로그램(Stay-in-School)’은 채용 지원과 교육훈련 지원 사업으로 나뉘는 모양이다. 채용 지원은 사실상 현재의 행정인턴과 흡사해 보이고, 교육훈련이 좀 솔깃했다. 각 대학이 취업지원 프로그램을 운영할 수 있도록 정부가 대학에 예산을 지원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교육훈련이 내실 있게 운영된다면 언 발을 좀 녹여줄 수 있을 것 같다. 아직 구체화되지 않아서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눈에 보이는 실업률만 낮추려고 인턴만 양산하기보다 교육을 좀 더 받을 기회를 넓혀줬으면 한다. 도서 대출도 그런 맥락이다.


2008년 4분기 전국 가구당 월평균 교양오락비는 9만 7천원으로 1년 전에 비해 8.1% 감소했다. 소비지출 기본 항목 10개 가운데 가장 큰 폭으로 감소한 셈이다. 항산(恒産)이 위태롭더라도 우리의 항심(恒心)을 건사하기 위해 책을 사보거나 문화유산을 완상하고, 공연을 관람하는 등의 행위를 너무 줄이지 않기를 희망한다. 대한출판문화협회의 2008년도 출판통계에 따르면 책 1권당 평균 가격은 1만 2116원이었다. 책값이 비교적 싼 아동도서와 만화책, 문학 분야 도서를 제외한 많은 분야의 책값이 2만 원에 육박한다. 일감이 없는 졸업생들이 이 돈을 치를 여유가 없음은 자명하다.


읽고 싶은 책을 죄다 사볼 수는 없는 노릇이고 결국에는 빌리거나 헌책을 구해야 한다. 인터넷서점들이 중고도서 시장에 속속 진출하고는 있지만 중고도서 유통망이 갈 길은 멀다. 설령 중고도서 시장이 활성화된다고 해도 한계가 있다. 모든 종류의 책이 헌책으로 나와도 그것을 다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세계 10위권의 출판대국이라는 칭호가 속빈 강정이라는 비판도 많지만 오늘도 읽을 만한 책은 쏟아지고 있다. 책을 읽고자 하는 사람이 책을 빌려보지 못한다면 나라의 불행이다. ‘도서 복지’의 개념으로 접근해보자. - [無棄]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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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이후

사회 2009. 4. 23. 02:59 |

(지난 4월 8일에 썼던 ‘친노 이후를 고민할 때’라는 잡글을 조금 수정 보완했습니다. 한 시절 저의 대표자이자 일꾼이었던 노무현 대통령님이 처참한 모습의 패장이 되어 용서를 빌고 있습니다. 침통합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신을 버려주기를 호소했다. 그는 자신의 홈페이지에다가 “저는 이미 민주주의, 진보, 정의, 이런 말을 할 자격을 잃어버렸습니다”라고 썼다. 노무현의 지지자들은 그를 서서히 잊어감으로써 얻는 평화를 잃었다. 열린우리당이 맥없이 무너진 후에 참여정부의 계승은 사실상 물거품이 되었다. 그렇기에 참여정부의 지지자들은 노무현 개인을 향한 편애에 의지한 측면이 컸고 이번 사건에 더욱 허탈감을 느낄 듯싶다. 국민을 향한 그의 사죄가 진솔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었으면 좋겠다. 노 전 대통령에게 보장된 법적 방어권은 허위사실을 막는 선에서 보장돼야 한다. 노 전 대통령은 자기 잘못을 외면하거나, 남에게 전가하지 않는 모습을 통해 마지막 기품을 건사하길 기원한다. ‘바보 노무현’의 잔영이나마 더듬고 싶다.


노무현의 재임 시절 그의 작은 성취마저 용납하지 못하던 이들이 자못 근엄한 표정으로 깨끗한 정치를 들먹인다. 개중에는 지난 대선 때 도덕보다는 능력이라고 목청을 높이던 분들이 적잖을 게다. 그런 말씀을 하는 사람들은 노무현은 무능한데다 부패하기까지 했으니 더 구박받아야 한다고 항변하겠지만 그 말을 하는 스스로도 얼마나 믿을지 궁금하다. 설령 노무현에게 험담을 할 만큼 떳떳하지 못한 자들이라도 노무현을 향해 얼마든지 돌을 던질 수 있다. 그것이 권력을 가진 자들이 마땅히 져야할 짐이기 때문이다. 측근과 가족의 허물은 결국 노 전 대통령의 허물이기도 하다. 그 허물에게 쏟아지는 꾸지람을 담담히 감내해야 한다. 참여정부 민정 기능의 부실은 너무 뼈아픈 실책이다.


현 정권 인사를 향한 수사 강도와 견주어 볼 때 균형이 맞지 않다는 볼멘소리는 마음으로 삭혀야 한다. 물론 이 정부 들어 검찰의 신뢰는 많이 실추된 상태다. 아무쪼록 여야를 가리지 말고 공정하게 수사해주길 바랄 따름이다. 죄가 있으면 벌을 받으면 그만이다. 일각에서는 편파, 표적, 기획수사라는 비판을 하기도 한다. 검찰은 이런 우려의 시선이 존재함을 헤아려야 한다. 지은 죄 만큼의 벌을 골고루 내리지 못하는 것은 또 하나의 죄를 짓는 셈이다. 검찰이 할 일은 죄 만큼의 벌을 공평하게 부과하는 것이다. 물러난 권력에는 예리한 칼날을 휘두르면서 살아 있는 권력에는 칼집이나 만지작거리는 시늉을 한다면 지금의 비극을 더 심화시킬 뿐이다. 피의사실을 무차별적으로 공표하면서 과거 정부의 흠집을 대서특필하는 데만 온 정신이 팔린 몇몇 언론들도 이 비극에 동참하지 말길 부탁한다.


이번 사안은 부정한 돈을 받은 이들이 각자의 책임을 지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듯싶다. 정치적 실체로서 존재하던 ‘참여정부 계승세력’ 혹은 ‘친노 세력’라고 불리던 자들이 몰락한 후의 한국 정치의 지형도를 그려볼 때가 다가옴이 느껴진다. 친노파라 불리는 이들은 참여정부가 표상했던 정신을 창조적으로 이어가기보다는 노 대통령과의 연줄로 권세를 누린 사람들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했다. 담담하게 참여정부와 명운을 함께 하려는 몸짓이 있었다면 이렇게 마냥 동네북이 되는 신세는 면했을지도 모른다. 친노파들이 노무현 대통령을 만들어줬던 국민들의 정성을 생각했다면 오늘날의 참담한 꼴을 당하지 않았으리라. 누구를 탓하기 전에 자기 머리부터 칠 일이다.


정권 차원의 음모가 있든 없든 간에 이번 일로 말미암아 참여정부를 지지했던 국민들의 가슴에는 멍이 들었다. 정권 차원의 부패까지는 못 되고 몇몇 측근들의 난행이라고 해도 그렇다. 한나라당을 향해 도덕적 권위를 내세운 이들이 그 상대적 우위를 반납하고 나면 너무 초라하다. 친노 세력은 차떼기를 하고도 떵떵거릴 수 있는 저들과는 처지가 다르다. 깨끗한 정치는 참여정부의 핵심 가치 가운데 하나였다. 그 가치를 내걸고 목에 힘주던 이들이라면 좀 더 사려 깊은 처신을 했어야 한다. 이명박 대통령이 4·19혁명 49주년 기념식에서 “선진화는 절대로 부정부패와 함께 갈 수 없다”라는 기념사를 남기는 빌미를 제공하다니 치욕스럽다. 저들이 유능을 참칭하더니 이제 청렴마저 훔쳐가려고 한다. 물론 유능이나 청렴은 특정인이 독점할 수 있는 덕목은 아니지만 말이다.


한때 최고의 권세를 누리던 노 전 대통령을 가엾기 여긴다는 건 민망한 일이지만 자나 깨나 노무현의 실패만을 꿈꾸던 이들의 열망을 깨트리지 못해 애석하다. 친노파와 명랑하게 이별할 준비를 하다가도 개혁세력의 한 축이 무너진 자리를 대체할 행위자가 당장 채워질 수 있을지 걱정이다. 친노의 중심인 영남 개혁세력은 한국 정치에서 소중한 존재다. 도매금으로 넘기기보다는 어지간하면 존속시켜야 할 실체다. 친노 세력에게 권력을 쥐어주었던 국민에 대한 보답을 하기 위해서 우아하게 떠날 준비를 해두는 게 좋겠다. 그럼으로써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유린하는 세력에 맞설 최후의 보루 몇 개쯤은 지켜내길 바란다. 별다른 충원 세력도 없는데 징검다리부터 치우려니 마음이 스산하다. 이 과정에서 퇴행적 지역주의가 독버섯처럼 돋아날 조짐이 보인다.


만약 친노가 붕괴하고 나면 유권자들은 하나의 선택지를 잃어버린다. 진보정당으로 달려가기를 머뭇거리는 상당수 국민들이 정치 냉소자가 되어 버리고 말 것이다. 현 정치 구도에서는 자신의 정치적 지향을 대변할 정당이 없다고 여겨 적극적 기권층이 되어버리는 셈이다. 사분오열된 야권이 거대 여당을 이길 생각은 포기하고 그에 버금가려는, 즉 2등이나 하는 경쟁에 함몰된다면 끔찍하다. 야권에게 필요한 건 ‘절반의 패배주의’다. 지금 이 상태로는 필패한다는 생각을 늘 품어야 한다. 현 정치 지형을 엄정히 성찰하고 시운에 따라 힘을 합치고 양보하면서 지지 않기 위한 모든 방법을 궁리해야 한다. 그래야만 간신히 으뜸이 될 수 있다.


이 뒤숭숭한 와중에 이명박 정부는 참여정부를 훼철하는 작업에 더욱 열을 올릴 공산이 크다. 자기네는 유능한데다 깨끗하다는 허황된 자부심을 품고 말이다. 융단폭격을 받아 만신창이가 된 노무현 시대지만 그 잿더미 속에서도 긍정적 유산을 몇 개 건져 올릴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 긍정적 유산을 부수려는 시도를 얼마나 저지할 수 있을까. 도둑고양이처럼 엄습한 친노와의 작별은 곤혹스럽다. 때 이른 친노의 퇴장은 한국 정치에 암운을 드리운다. “굿바이 노무현!”은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모든 것을 노무현 탓으로 돌려 그만 수렁에 던지고 나면 우리는 희망의 싹을 발견할 수 있는 걸까? 아닐 것 같다. - [無棄]


여담 - 노무현의 첫 번째 고백이 나왔던 시기 <노무현 전 대통령이 끝내 몸통이었다니>라는 제목의 4월 8일자 세계일보 사설은 노무현에 대한 저주라고 이를 만하다. 나는 세계일보의 독자는 아니지만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공적 지면을 이렇게 함부로 써도 되는 것인지 치가 떨리고 분통이 터진다(이 사설의 첫 구절을 그대로 따왔다). 나는 그저 이 사설의 구절들을 기억했다가 앞으로 이와 같은 불행한 사건이 터질 때 세계일보 사설이 뭐라고 쓸지 비교해볼 따름이다.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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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정동영!

사회 2009. 4. 11. 04:10 |

3월 24일에 썼던 <정동영과 617만 표>라는 잡글인데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의 전주 덕진 국회의원 재선거 무소속 출마 선언을 접하고 글 후반부에 바뀐 사정을 반영했습니다.


낭떠러지에 매달렸을 때 손을 놓을 수 있어야 대장부다(縣崖撒手丈夫兒, 현애살수장부아)


2006년 5·31 지방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이 패배했을 때 정동영 당의장이 사퇴 회견에서 인용한 구절이다. 아무런 미련 없이 깨끗하게 물러나겠다는 비유다. 나는 이 회견을 접하며 그가 이 말의 정신을 새긴다면 다시 돌아오더라도 좀 더 나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정동영씨는 7·26 재보선 정국에서 서울 성북을 출마를 권유받기도 했지만 고사했다. 혹자는 질 것이 뻔한 선거에서 몸을 사렸다고 폄하하기도 하지만 그 때의 삼감이 크게 험담 받을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난 2007년 정동영씨는 원내 제1당의 대선 후보로 선출되었다. 정동영 후보의 재능이 아무리 커다란들 그가 대선 과정에서 과분한 사랑을 받았음은 분명하다. 과문한 탓인지 모르겠으나 대선 참패 후에 정동영 후보와 그 둘레 사람들이 자책하는 모습을 도무지 볼 수 없었다. 이명박 후보에게 530만 표 차이로 졌지만 그에게 소중한 한 표를 건넨 617만 명의 지지자가 존재했다. 그들을 향해 진솔하게 사죄할 기회를 놓친 듯싶어 안타깝다.


미국 대통령 선거의 독특한 관행 가운데 하나가 패자의 승복 연설(concession speech)이다. 패자의 연설이 먼저 있고 나서 비로소 승자가 연설하는 재미난 문화다. 1860년 링컨에게 패배한 스티븐 더글러스가 “당파심이 애국심보다 앞설 수는 없습니다(Partisan feeling must yield to patriotism)”라고 말한 것을 시초로 1896년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 때부터는 패배를 인정하는 전보를 보냈고, 1952년 스티븐슨 때부터는 TV 방영이 관례로 굳어졌다고 한다.


박빙의 승부와 법정 공방을 벌였던 2000년 미국 대선에서 민주당의 앨 고어 후보는 고통스런 패배를 기품 있는 승복으로 승화시킨 명문을 직접 작성했다. 가슴 아픈 패배를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갈등을 치유하자고 읊조리는 패자들의 연설은 승자의 환희보다 좀 더 기억에 남는다. 지고 난 다음날 아침이 괴로울 때 고어의 연설을 다시 한 번 곱씹어 볼 때마다 우리에게도 이런 대표자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품기 일쑤다.


이듬해 펼쳐진 총선에서 정동영씨가 또 다시 쓴잔을 들이킨 것도 실패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는 말처럼 난 자리일 때 애틋함을 남기지 못했다면 대중 정치인으로서 큰 실책이다. 국민들은 정동영씨가 머물던 소중함을 깨달을 여유가 없었고, 그의 빈자리를 크게 느낄 짬도 없었다. 절벽 위를 오르려는 안간힘만 느꼈다면 실례일까.


고어는 “나는 연방대법원 결정에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를 받아들인다. 앞으로 미국인의 단합과 민주주의의 역량 강화를 위해 양보하고자 한다”라고 말했다. “결승선에 도달하기 전에는 무수한 논쟁이 오가지만 일단 결과가 나오면 승자나 패자나 결과를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화합의 정신”이며, “나를 지지해준 많은 분들이 실망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으며 나도 실망했다. 하지만 우리의 실망감은 조국에 대한 애정으로 극복해야 한다”라고 역설했다.


“전투가 끝난 지금 문득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아무리 패배의 상처가 쓰라리더라도 패배 역시 승리만큼이나 인간의 영혼을 새롭게 하고 영광을 가져오는데 이바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no matter how hard the loss, defeat might serve as well as victory to shape the soul and let the glory out)”라는 대목에 이르면 가슴이 짠하다. 이명박 후보를 차마 찍지 못했던 유권자들 중에 가장 큰 수의 지지를 받았던 정동영 후보가 상심에 빠진 유권자들의 마음을 어루만지기 위해 어떤 일을 했는지 가물가물하다.


정동영씨가 오는 4·29 재보선에서 전주 덕진 재선거 무소속 출마를 선언했다. 민주당은 끝내 정동영씨의 공천을 거부함으로써 제1야당의 품위를 가까스로 건사했다. 이명박 정부를 심판하려는 선거 구도를 유지하면서 지역주의를 극복하려는 노력에 박수를 보낸다. 민주당으로서는 밑천이 동난 정동영이라는 카드를 조기에 버림으로써 차기 대선을 제로베이스에서 출발하는 전화위복을 맞이할지도 모른다. 정동영씨에게 명운을 걸어야 하는 정당이라면 사실 수권정당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하다.


정동영씨가 그저 금배지가 욕심이 나서 부랴부랴 뛰어든 것은 아니겠지만 그의 선택이 사려 깊지 못했음은 또렷하다. 충분히 예측 가능했을 당내 분란에 아랑곳하지 않고 돌파하겠다는 그의 의지 앞에 어안이 벙벙하다. 자신을 대선 후보로 올려주었던 정당을 박차고 나가면서 그 정당에 곧 돌아오겠다고 읊조리는 광경은 황당하다. 그가 금배지를 손에 쥐기도 전에 금빛은 바랬다. 녹이 슬었다. 호남당을 극복하려는 민주당의 안간힘에 전주 유권자들이 적잖이 화답한다면 이 난장판 속에서도 얻는 바가 있으리라.


정동영씨가 몸 담았던 정당이 비교적 힘이 셌을 때도 그는 한나라당을 제대로 견제하지 못했다. 하물며 지금처럼 힘의 세기가 크게 벌어진 상황에서 그가 원내에 진입한들 무슨 초인적인 힘을 발휘할 것 같지 않다. 그럼에도 그는 특유의 비장한 어조로 호소하지만 별 다른 감흥이 일어나지 않는다. 지금 자신의 귀환을 환영하는 열렬한 지지자들이 지지자의 전부인 것으로 착각한다면 비극이다. 당신만큼 아파했을 617만 명의 사표를 두 번 죽이는 셈이다.


지난 4월 8일 치러진 경기도 교육감 선거에서 범야권이 음으로 양으로 지지한 김상곤 후보가 당선됐다. 교육감은 정당 공천과는 관계없지만 향후 선거에 시사하는 바가 적잖다. 앞으로의 각종 선거도 이런 단일화 및 선거연합을 통하지 않고서는 거대 여당을 이기기 난망할 것이다. 그런 판단 아래 울산 북구 재선거에서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이 후보 단일화를 추진하고 있기도 하다. 범야권은 모두 다 절반의 패배주의를 생활화할 필요가 있다. 현 정치 지형을 엄정히 성찰하고 시운에 따라 힘을 합치고 양보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그나마 몸집이 큰 행위자인 민주당은 어떤 식으로는 내홍을 수습해야 한다.


정동영씨의 그릇이 그만큼인 것을 너무 애석해할 필요는 없다. 재보선의 눈이 온통 정동영씨에게 쏠린 것은 비생산적이다. 이명박 정부가 지난 1년 동안 선보였던 가혹하고 어지러운 통치를 심판하려는 여론이 묻히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정동영씨에게 보내는 과도한 관심을 거둘 때다. 그저 똑똑하고 말솜씨 좋은 아저씨가 고향에서 인기를 누리는 정다운 모습 정도로 받아들이자. 명망 있는 야당 지도자가 그 전국적 위치를 벗어던지고 지역의 일꾼으로 헌신하겠다니 어찌 아니 아름다운가. 이제 그만 그를 보내주자. 굿바이 정동영! - [無棄]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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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0월에 썼던 <한국의 시호(諡號) 탐구>를 증보한 잡글입니다. 인터넷 상에서 몇몇 분들이 이전 글을 퍼가셨던데 한없이 부끄럽습니다. 일부 오류를 다잡고 내용을 보강했습니다.


1. 시호란 무엇인가?

한자문화권 사람들은 한 개인의 상징인 이름(名)을 존중하는 경명사상(敬名思想)이 있었다. 부모가 지어준 이름은 임금, 부모, 스승 앞에서나 썼고, 남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는 피휘(避諱) 전통으로 말미암아 이름을 대신한 자(字), 호(號), 시호(諡號) 등을 썼다. 우리 선조들은 피휘를 지켜 조상이나 군주의 이름과 같은 이름은 절대로 작명하지 않았다. 임금의 본명에 들어가는 글자는 공문서와 사문서 모두에 사용이 금지됐다. 정조(正祖)의 휘인 산()처럼 대다수 임금들은 왕자의 이름을 지을 때 벽자(僻字)로 지었다. 아예 없는 글자를 만들어 쓰기도 했는데 그래야만 피휘하기 쉽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사람의 이름도 함부로 부르지 않았는데 죽은 사람의 경우에는 더했다. 시호(諡號)란 죽은 이의 행적을 살펴 붙여주는 존호(尊號)의 일종이다. 왕족, 제후, 공신, 학자를 비롯한 빼어난 행적을 남긴 사람 등이 죽으면 나라에서 시호를 올리거나 하사했다. 이순신과 제갈량이 받은 충무(忠武)는 가장 널리 알려진 시호 가운데 하나다. 시호도 넓은 의미의 호이지만 일반적인 호와는 달리 사후에 생시의 행적을 평가하여 국가가 망자에게 내린 칭호이다. 특히 왕으로부터 시호를 받는 것을 이름을 바꾸어주는 은전(易名之典)이라고 하여 당사자나 자손의 큰 영광으로 삼았다.


시호는 대개는 높은 벼슬을 한 사람에게 내려지는 게 관례다. 하지만 관직에 뜻을 두지 않아 큰 벼슬을 하지 않았던 김시습은 청간(淸簡), 서경덕은 문강(文康), 조식은 문정(文貞)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이와 반면에 학문이 높고 덕망이 있음에도 시호가 없는 경우에는 교우나 제자, 친지나 고향 사람들이 추도하는 의미로 시호를 짓기도 했다. 나라에서 지어준 시호와 구별하여 사시(私諡)라고 한다. 조선시대에 시호를 정할 때 보통 세 가지 안을 내는데 이를 시호망(諡號望)이라 한다. 1안을 수망(首望). 2안을 부망(副望), 3안을 말망(末望)이라 부른다(비단 시호를 정할 때뿐만 아니라 사람을 뽑거나 할 때도 이러한 3안제를 쓴다).


2. 시호 짓는 법

시호는 살아있을 때의 업적을 참작해 몇 개의 자(字)로 집약한다. 본래 시호의 취지는 착한 일을 한 분에게는 선시(善諡)를 주고, 나쁜 일을 한 이에게는 악시(惡諡)를 주어 후대의 귀감과 경계로 삼는 것이다. 진시황(秦始皇)은 전국을 통일하고 자식이 아비를 평가하고 신하가 왕을 평가하는 것은 부당하다며 시호 제도를 폐지한다. 진시황은 자신을 시호로 부르지 말고 시황제(始皇帝)라 부르도록 명했으며 다음 왕을 이세황제(二世皇帝), 삼세황제(三世皇帝)라 하여 자자손손 이어나가기를 바랐다. 과연 진시황다운 발상이다.


그러나 중국 한나라 이후 시호 제도는 부활해서 점점 정교하게 발달했다. 중국이나 한국 모두 후대로 내려올수록 악시를 짓는 일이 줄어들고 좋은 뜻의 시호만 짓게 되는 경향이 심화된다. 시호를 한번 지으면 거의 고치기 힘든 점에 비추어 기왕이면 좋게 지어주려는 경향은 옛날부터 있은 모양이다. 『논어』에는 자공(子貢)이 공자에게 위(衛)나라 대부였던 공어(孔圉)의 시호가 어째서 ‘문(文)’이냐고 묻는 대목이 나온다. 듣기에 따라 시호 인플레를 따지는 질문이다. 공자는 “명민하면서 배우기를 좋아하고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니, 이에 그를 文이라 이른 것이다(敏而好學, 不恥下問, 是以謂之文也)”라고 설명한다.


시호로 쓰는 글자는 제한되어 있는데 문(文)뿐만 아니라 충(忠), 공(恭), 무(武), 숙(肅), 의(義), 정(貞), 장(莊), 효(孝) 등 많이 쓰이는 시자(諡字)에는 다양한 뜻이 있다. 시호에 담긴 뜻을 시주(諡註)라고 하는데 어떤 뜻의 글자를 받았느냐에 따라 평가가 구분된다. 문(文)의 경우만 해도 온 천하를 경륜하여 다스린다(經天緯地)/ 도덕을 널리 들어 아는 바가 많다(道德博聞)/ 배우기를 부지런히 하고 묻기를 좋아한다(勤學好問)/ 충성스럽고 믿을 수 있으며 남을 사랑한다(忠信愛人)/ 널리 듣고 많이 본다(博學多見)/ 공경하고 곧으며 자비롭고 은혜롭다(敬直慈惠)/ 민첩하고 배우기를 좋아한다(敏而好學)/ 백성을 슬퍼하고 은혜롭게 하며 예로 대접한다(愍民惠禮) 등의 많은 시주가 있다.


결국 공자가 공어의 시호가 문(文)이 된 것은 그의 행적에 부족함이 있다고 해도 민이호학(敏而好學) 등의 장점이 있으니 그런 시호를 받을 만하다고 평한 것이다. 단 한 가지 선한 면이 있다면 그것을 취해 시호로 삼아 악을 숨겨 주고, 오로지 악행만 있을 때에야 비로소 악시를 주려는 자세가 엿보인다. 자주 쓰이는 시자에 다채로운 시주가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기야 오늘날 묘비명에도 악행은 좀처럼 기록하기 미안한 것과 매한가지 논리이리라.


조선 조정에서 올린 정조의 시호는 문성무열성인장효(文成武烈聖仁莊孝)인데 『조선왕조실록』에는 여기서의 문이 경천위지(經天緯地)임을 밝히고 있다. 이에 반해 이황의 문순(文純)과 이이의 문성(文成)에서의 문은 도덕박문(道德博聞)의 문이었다. 조선시대 많은 유학자들이 도덕박문을 받았다고 하는데 경천위지 다음의 위상이었을 것이다. 사림의 거두 김종직이 죽었을 때 그의 첫 시호는 문충(文忠)이었다. 훈구파가 이는 너무 과분하다며 논박하며 시호를 문간(文簡)으로 고쳤는데 도덕박문(道德博聞)의 문에서 박문다견(博學多見)의 문으로 시주도 바꿨다. 이를 볼 때 시자에 딸린 시주에도 어느 정도의 등급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시호로 쓸 수 있는 글자와 각 글자가 담고 있는 의미를 규정해 놓은 것을 시법(諡法) 또는 시호법이라 한다. 조선초기에는 194자였으나 글자 수의 부족으로 시호 정하기가 어려워지자 세종(世宗)이 명해 301자까지 늘어났으나 활용 빈도가 높았던 글자는 약 120자 정도다. 대표적인 관련 문헌으로 당(唐)의 주석가 장수절(張守節)이 『사기(史記)』를 해설한 『사기정의(史記正義)』의 한 편인 『시법해(諡法解)』와 북송(北宋)시대 문장가 소순(蘇洵)의 『시법』 등이 있다.


소순이 찬한 시법에는 311조에 168개 시자가 수록되어 있어 시호를 결정하는데 참고했다. 인터넷에 정리된 자료를 보면 우리나라의 시법은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의 기록,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직관고(職官考), 『한국고사대전(韓國故事大典)』 시고(諡考)편 등을 참조할 수 있으나 방대하고 산재해 있어 찾아보기는 힘들 듯싶다. 다행히 이민홍 충북대 교수가 『시법』과 「시법해』를 묶어 번역한 책이 있어 많은 도움이 된다.


3. 고구려의 시호

우리나라에는 삼국시대부터 시호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중국의 시법과 다른 양상이 많이 보인다. 삼국별로 살펴보면 우선 고구려의 경우 1대 동명성왕(東明聖王), 2대 유리명왕(瑠璃明王), 3대 대무신왕(大武神王)이라는 시호에서 출발하는데 생시의 업적을 토대로 만든 시호인지가 불분명하다. 한자어의 뜻에 비추어 동명성왕이나 대무신왕은 그렇다고 쳐도 유리명왕의 경우 유리(類利) 혹은 유류(孺留)와 누리(累利)라는 휘와 관계가 있어 보인다.


한 사람을 다르게 표기한 것은 한자 도입 초기 의미보다는 소리를 옮기는데 주력했음을 알려준다. 고구려 28왕 중에 능의 위치(葬地)를 시호로 쓴 왕이 열두 분이다. 열거하자면 민중왕(4대), 모본왕(5대), 고국천왕(9대), 산상왕(10대), 동천왕(11대), 중천왕(12대), 서천왕(13대), 봉상왕(14대), 미천왕(15대), 고국원왕(16대), 소수림왕(17대), 고국양왕(18대)이다. 이것은 시호라기보다는 능의 이름을 일컫는 능호(陵號)라고 불러야 더 적절할 듯싶다.


고구려의 역대 왕은 시(諡)의 개념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號爲○○王” 혹은 “號曰○○王”라고만 표기하고 있다. 예외가 있다면 장수왕이 죽자 북위의 효문제가 시호를 강(康)이라고 했다(諡曰康)는 기록 정도다. 다만 28대 보장왕의 경우 왕의 이름 휘가 장(臧) 혹은 보장(寶臧)이라고 하면서 나라를 잃었기 때문에 시호는 없다(以失國故無諡)라고 적고 있는데 아마 삼국사기의 편찬자들도 시와 호가 헛갈렸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6대 태조왕(太祖王)과 7대 차대왕(次大王), 8대 신대왕(新大王)은 시(諡)의 개념이 녹아들어 가있다. 특히 태조왕(혹은 國祖王) 때부터 계루부가 왕위를 계승하여 고구려가 실질적인 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췄다는 의미이기에 태조라는 시호가 쓰였다. 또한 19대 광개토왕(廣開土王)이나 20대 장수왕(長壽王)도 왕의 특징을 나타내준다는 점에서 시(諡)의 개념이 있으나 직설적인 표현일 뿐 중국의 시법과는 차이가 있다. 그런데 다음 왕들인 문자명왕, 안장왕, 안원왕, 양원왕, 평원왕, 영양왕, 영류왕은 휘를 그대로 쓴 것은 아닌 것 같지만 그렇다고 중국식 시호의 흔적을 찾기도 힘들다(문자명왕은 다소 예외).


여담이지만 양원왕은 양강상호왕(陽崗上好王), 평원왕은 평강상호왕(平崗上好王)이라고 부르기도 한다는 기록에서 양원이나 평원도 능의 위치를 나타내는 것은 아닌지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고국원왕도 국강상왕(國岡上王)이라고도 한다는데 이 또한 왕이 묻힌 지명일 것이다. 결국 이 복잡한 문제를 풀 실마리는 광개토왕비에 쓰인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라는 시호다.


국강상(國岡上)은 장지일 것이고, 광개토경(廣開土境)은 땅을 넓혔다는 의미이며, 평안(平安)은 말 그대로 태평성세였다는 뜻이다. 호태왕(好太王)은 고구려왕에 대한 미칭(美稱)으로 왕 중의 왕 정도로 해석하면 되겠다. 만약 광개토왕뿐만 아니라 고구려의 모든 왕들이 이런 식으로 시호를 썼다고 가정한다면 현전하는 고구려왕의 시호는 온전한 것이 아니다. 기록이 미비하여 더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광개토왕비의 기록은 고구려에는 고유의 시법이 있었음을 약하게나마 증빙하고 있다.


4. 백제, 신라, 발해의 시호

백제의 왕들은 사료의 부족인지 기록의 소홀인지 알 수 없으나 시호는커녕 장지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 23대 삼근왕까지 휘에다가 ‘왕’자만 붙인 것인지, 고유의 시법이 있었던 것인지 확실치 않다. 24대 동성왕(東城王)부터 시호처럼 보이기 시작하는데 글자 그대로는 동쪽의 성이라는 의미일 뿐 중국에서 시법의 용례도 보이지 않는다. 25대 무령왕(武寧王)부터 성왕(聖王), 위덕왕(威德王), 혜왕(惠王), 법왕(法王), 무왕(武王)으로 이어지는 왕들의 시호는 중국의 시법에 모두 있는 글자다.


무령왕릉의 지석(誌石)에서 무령왕을 사마왕(斯麻王)이라 칭하고, 위덕왕 재위 시절 만들어진 국보 제288호 창왕명석조사리감(昌王銘石造舍利龕)에서 위덕왕의 휘인 창(昌)이 쓰인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시호와 더불어 왕의 휘를 직접 쓰기도 했던 것 같다. 비슷한 시기 신라도 처음으로 시호를 쓰기 시작한 점으로 미루어볼 때 당시 중국과의 교류가 활발했던 백제는 신라에 앞서 중국의 시법을 받아들였을 공산이 크다. 자세한 기록이 없어 아쉽다.


신라의 왕 가운데 지증왕이 최초로 시호를 받았다. 『삼국사기』는 “新羅諡法始於此”, 『삼국유사』는 “諡號始于此”라고 명시하여 신라의 시호가 처음 시작되었음을 알리고 있다. 국호를 신라로 바꾸고 왕호를 개정하는 등의 중앙집권적 국가체제 확립에 시호도 일정한 역할을 수행했다. 혹자는 지증이 한국 시법의 시초라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고구려와 백제의 사례가 명확하지 않다고 해서 섣불리 단정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지증이라는 시호는 지철로(智哲路), 지도로(智度路), 지대로(智大路)라는 휘와 관련지어 지었다고 짐작한다(고구려 유리명왕과 비슷한 사례). 한자로 우리말 소리를 옮기는 과정에서 뜻까지 나타내려는 과도기적 현상이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23대 법흥왕부터 28대 진덕왕까지는 불교식으로 시호를 지었다. 29대 무열왕부터 56대 경순왕까지는 중국 시법에 맞추어 시호를 지은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 기록을 살필 때 신라가 왕의 사후에 당나라에서 시호를 받은 것 같지는 않다. 성덕왕 16년 태자 중경이 죽자 시호를 효상(孝殤)이라고 했고, 흥덕왕 10년에 김유신을 흥무대왕(興武大王)에 추존했다. 진성왕 2년에 위홍이 죽자 시호를 추증해 혜성대왕(惠成大王)이라 하였다는 기사 등으로 볼 때 시호는 자체적으로 정했던 것으로 사료된다. 중국 시법에 맞게 시호를 지은 것은 통일신라를 전후한 시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남북국 시대의 발해 역시 중국 시법에 맞게 시호를 올렸다. 신라가 두 자 시호였던 반면에 발해는 한 자 시호를 올렸다. 『신당서』는 발해가 사사로이 연호(年號)와 시호를 썼다고 기록하고 있다. 앞서 살펴봤듯이 신라 또한 시호를 주체적으로 사용했던 만큼 아마도 발해와 신라의 차이는 독자 연호의 제정 여부였을 것이다. 발해는 문헌상 거의 전 기간 독자 연호를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의 독자 연호 기록이 광개토왕비와 일부 금석문에서나마 엿보이는 것에 견주어 발해는 우리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다.


대조영을 고왕(高王)이라고 칭한 것은 태조나 고조(高祖)의 의미로 보인다. 이어서 무왕(武王), 문왕(文王), 성왕(成王), 강왕(康王), 정왕(定王), 희왕(僖王), 간왕(簡王) 등의 시호가 있었다. 시호가 전하지 않는 왕도 있지만 폐위된 왕을 제외하고는 기록의 탈루인 듯싶다. 일부 기록에서는 시호가 추가로 수록되어 있기도 한데 발해와 대씨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협계태씨족보와 영순태씨족보가 대표적이다. 이에 따르면 미상이던 발해 말기 왕들이 화왕(和王), 원왕(元王), 경왕(景王), 애왕(哀王) 등의 시호를 받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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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고려의 시호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은 시호 제도의 새 지평을 연다. 고려시대에는 왕뿐만 아니라 공이 있는 신하들에게도 시호를 하사했다. 신숭겸에게 장절(壯節), 배현경에게 무열(武烈), 복지겸에게 무공(武恭), 홍유에게 충렬(忠烈)이라는 시호를 내린 것이 대표적 예다. 8대 현종 때에는 신라의 최치원에게 문창후(文昌候), 설총에게 홍유후(弘儒侯)라는 시호를 추증하기도 한다. 특히 역대 임금의 시호를 왕이라고만 칭하지 않고 중국 황제와 같이 조(祖) 또는 종(宗)이라 붙이는 조종법(祖宗法)을 따랐다.


이로써 시호와 묘호(廟號), 능호가 확실하게 정리되었다. 왕건의 시호는 신성(神聖), 묘호는 태조(太祖)이며, 능호는 현릉(顯陵)이다. 이러한 시호, 묘호, 능호의 부여는 원 간섭기 이전까지 일관되게 수행됐고 조선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시호와 묘호가 구분이 되기 시작한다. 묘호를 대강 정의하면 왕실의 사당(태묘나 종묘)에 배향할 때 붙이는 이름으로 왕에게만 추증되는 또 다른 시호다. 쉽게 말해 왕에 대한 호칭으로 조나 종자가 붙는 것을 묘호라고 일컫는다. 중국의 묘호 기준을 적용해보면 통일 이전의 삼국에서 묘호로 보이는 것은 고구려 태조왕과 신라 태종 무열왕이 전부다. 삼국 가운데 고구려는 묘호와 시호를 엄밀히 구분하지 않았던 것을 보인다. 묘호가 정형화되어 쓰인 것은 고려시대부터다.


중국의 은주(殷周)시대와 한대(漢代)에 걸쳐 묘호를 가진 임금이 있었으나 모든 임금이 묘호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당대(唐代) 이후에는 모든 황제가 묘호를 갖게 된다. 결국 묘호는 시호가 신하들에게도 수여되면서 왕을 좀 더 부각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기능했음을 알게 된다. 시호 인플레가 심화되면서 시호가 점점 늘어나 수십 자에 달하는 황제도 심심찮게 등장했다. 결국 묘호가 본래 시호의 역할을 대신해 그 왕의 치적을 평가하는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중국의 제후국을 자처한 조선왕조는 원칙상 묘호를 써서는 안 되었지만, 고려왕조부터 써오던 관례라며 대충 넘어가며 사용했다.


하지만 가장 강력하게 내정 간섭을 했던 외세인 원나라는 묘호나 시호를 우리의 뜻대로 쓰지 못하게 했다. 이 시기 묘호는 쓰이지 않았으며 시호마저 원나라 황제에 대한 충성심을 표기한다는 뜻으로 “忠○王”이라 썼다. 충렬왕 시기부터 중국의 사시(賜諡)가 단행되어 조선 말기까지 이어진다. 충자 돌림 시호는 왕이 신료들에게 내린 것과 마찬가지였으며 형식적이나마 중원의 황제가 동방의 제후에게 하사한다는 분위기를 풍긴다.


31대 공민왕은 원명교체기의 국제 정세를 이용하여 원의 연호와 관제, 예제 등을 철폐했다. 공민왕 6년(1357) 원의 시호를 받았던 임금들을 다시 추존해 충렬왕은 경효(景孝), 충선왕은 선효(宣孝), 충숙왕은 의효(懿孝), 충혜왕은 헌효(獻孝), 충목왕은 현효(顯孝)라고 시호를 올렸다. 고려 왕의 시호에 거의 들어가던 효(孝)자를 부활시킴으로써 자주성을 천명했다. 다만 30대 충정왕만은 시호를 올리지 않았는데 공민왕이 그를 몰아내고 즉위했기 때문에 정통성 문제로 말미암은 것으로 보인다.


6. 공민왕, 우왕, 창왕, 공양왕


공민(恭愍)이라는 시호는 명나라에서 준 것이다. 새로이 중원의 주인공이 된 명나라의 쩨쩨한 심보가 드러난다. 공(恭)은 공경하게 사대하라는 뜻일 테고, 문제는 민(愍)자다. 민은 그리 좋은 시자는 아닌데 나라에서 재난이나 반란을 만나고, 백성을 비통하게 하고 해친다 정도의 뜻이다. 잇따른 반란과 홍건적의 난, 왜구 등에 시달렸던 공민왕 치세의 파란만장함에 제법 어울리는 시호이기는 하지만 그의 적잖은 업적으로 볼 때 폄훼됐다는 느낌이 강하다.


민(愍)과 비슷한 의미를 갖는 시자(諡字)로는 회(懷), 애(哀), 도(悼), 상(殤) 등이 있다. 회(懷)는 행실은 자애로우나 일찍 죽은 것(慈行短折), 지위를 잃고 죽은 것(失位而死)을 일컫는다. 장수절의 시법해에 의하면 단(短)은 60세 못된 것이고, 절(折)은 30세가 못된 것이다. 애(哀)는 공손하고 어질지만 일찍 죽은 것, 도(悼)는 중년이 안 되어 요절한 것, 상(殤)은 요절하여 이루지 못한 것이다. 왕위에 올랐다가 요절하거나 뜻을 펴지 못했을 때 주로 쓰는 시자들이다.


한국사에서 이런 시자를 받은 임금을 대강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신라 제40대 애장왕(哀莊王)은 숙부 김언승의 반란 때 살해되었고, 제44대 민애왕(閔哀王)은 희강왕을 협박해 자살하게 하고 스스로 왕이 되었으나 김우징이 장보고의 힘을 빌려 쳐들어오자 패하여 병사들에게 살해되었다(閔은 愍과 상통하는 글자다). 제55대 경애왕(景哀王)이 견훤에게 핍박당해 자살하게 된 것은 유명한 사실이다.


고려 7대 목종(穆宗)은 처음에는 묘호가 민종(愍宗), 시호는 선령(宣靈), 능호가 공릉(恭陵)이었다. 이는 모두 목종을 시해한 강조(康兆)가 지은 것이라 현종(顯宗) 3년 묘호를 목종(穆宗), 시호는 선양(宣讓), 능호는 의릉(義陵)이라 고쳤다. 제14대 헌종(獻宗)의 시호는 회상(懷殤)이었다가 예종(睿宗)이 즉위한 뒤 공상(恭殤)이라 고쳤다. 헌종은 숙부 계림공 왕희에게 사실상 왕좌를 찬탈당하고 후궁으로 물러나 14세에 사망했다.


조선 8대 예종(睿宗)이 재위 13개월 만에 죽자 명나라에서 양도(襄悼)라는 시호를 주었다. 영조(英祖)의 둘째 아들이 뒤주 속에서 사망하자 영조는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다. 훗날 정조(正祖)가 즉위 후 10일 만에 사도세자의 시호를 장헌(莊獻)를 고쳤다. 도(悼)자를 바꾼 것으로 보아 높이려는 의도로 보인다. 여하간 회(懷)라는 글자에는 야니를 가슴에 묻고 간직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는 셈이다. 아마 옛사람들도 그랬으리라.


우왕은 공민왕이 부활시킨 고려 시법에 의거하여 인문의무용지명렬경효대왕(仁文義武勇知明烈敬孝大王)이라는 시호를 올렸다. 마지막 경효(敬孝)에서 효자 시호가 여전히 쓰였다. 고려에서 올린 시호가 엄연히 있는데도 불구하고 원나라와 명나라가 내려준 시호를 계속 쓰는 것은 『고려사』 편찬자의 시각을 그대로 답습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은 아닐지 염려스럽다. 가뜩이나 고려 후기의 왕들은 묘호가 없어 허전한데 말이다. 조심스럽지만 고려에서 올렸던 시호를 병기하는 시도를 해보는 건 어떨까 싶다.


고려 왕 가운데 시호를 아예 받지 못한 임금이 우왕과 창왕이다. 이성계 일파는 우왕이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라 신돈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면서 우왕과 창왕은 왕씨가 아니라는 우창비왕설(禑昌非王說)을 내세웠다. 폐가입진(廢假立眞)이라며 우왕과 창왕을 차례로 폐위하고 공양왕을 옹립했다. 조선의 개창자들은 더욱 잔인하게도 『고려사』에서 우왕과 창왕을 국왕의 연대기인 세가(世家)에도 넣지 않고 신우(辛禑)와 신창(辛昌)으로 부르며 열전(列傳)의 반역전(叛逆傳)에 편입시켰다.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恭讓王)의 시호는 신라의 경순왕(敬順王)과 마찬가지로 모욕적인 뜻이다. 공손히 왕위를 양보했다는 시호를 줘놓고도 결국 살해한 이성계 일파의 박절함이 밉살스럽다. 고려숭의회에서 펴낸 『여말충의열전』에서 우왕, 창왕, 공양왕은 조선의 왜곡된 호칭인 만큼 고려말의 유신(遺臣)들이 이네들을 지칭했다던 여흥왕(驪興王), 윤왕(允王), 간성왕(干城王)의 칭호를 준용(遵用)한다는 내용이 있다.


6. 조선의 시호


조선으로 넘어와서는 시호와 묘호, 능호가 잘 정리되어 별로 논쟁거리는 없다. 조선 왕의 시호가 길어져서 묘호의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더 커졌다고 할 수 있다. 가령 세종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世宗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은 묘호인 세종, 명나라에서 받은 시호인 장헌, 조선에서 올린 영문예무인성명효로 구성된다. 임금이 붕어하면 중국에게 시호를 받기 위해 청시사(請諡使)를 보냈다. 시간이 걸리는 관계로 그 전까지는 신하들이 올린 시호를 쓰다가 중국에서 시호가 도착하면 그 시호가 왕을 대표하는 호칭이 되었다.


그런데 『선원계보(璿源系譜)』를 비롯한 조선의 사서에는 명나라가 준 시호만 있을 뿐, 청나라가 줬을 법한 시호는 찾기 힘들다. 조선 숙종 때 역관이던 김지남이 아들과 함께 편찬한 『통문관지(通文館志)』라는 책에는 조선이 청나라로부터 청해 받은 각 왕들의 시호들이 모두 기록되어 있다. 인조는 장목(莊穆), 효종은 충선(忠宣), 현종은 장각(莊恪), 숙종은 희순(僖順), 경종은 각공(恪恭), 영조는 장순(莊順), 정조는 공선(恭宣), 순종은 선각(宣恪), 순조의 세자로 사후에 왕으로 추존된 익종은 강목(康穆), 헌종은 장숙(莊肅), 철종은 충경(忠敬)이라 했다. 충(忠), 각(恪), 순(順), 공(恭) 등이 많이 보이는 것에서 고분고분하기를 바랐던 청나라의 소망이 선하다.


조선에서는 인조를 비롯한 국왕의 사후에 청에게 시호를 청하여 받았으면서 이 시호는 청에게 보낸 외교문서 외에는 사용하지 않았다. 각 왕대의 실록에서도 청나라에 시호를 청한 사실만 기록되어 있고 어떤 시호를 받았는지는 기록하지 않았다. 공식 기록에 의도적으로 수록하지 않은 이 시호들을 굳이 열거한 까닭은 앞서 고려 말기 왕들을 격하한 것에 대한 항의의 뜻이다.^^; 청나라 시호를 사용하지 않은 까닭은 자주성이라는 측면보다는 일그러진 모화의식의 산물일 공산이 크다.


조선 왕에게는 묘호가 중요해지면서 묘호 인플레가 극심해졌다. 고려에서는 태조만이 조(祖)이던 것을 조선에서는 조(祖)가 붙은 왕은 7명이다. 조선 후기 묘호가 개상(改上)된 경우는 전부가 종(宗)을 조(祖)로 바꾼 것으로 볼 때 조를 선호한 듯싶다. 실제로 본래 선종(宣宗), 영종(英宗), 정종(正宗), 순종(純宗)이던 묘호가 선조(宣祖), 영조(英祖), 정조(正祖), 순조(純祖)가 되었다. 참고로 연산군과 광해군은 종묘에 들지 못했으니 당연히 묘호가 없고 왕자시절의 호칭을 그대로 쓴다.


조선조 묘호 산정이 편파적이었다는 지적이 많다. 1468년 세조가 재위 13년 만에 세상을 떠나자 신료들이 신종(神宗), 예종(睿宗), 성종(聖宗)이라는 세 가지 묘호를 올렸다. 묘호에 조가 들어가 있지 않았음을 비추어 볼 때 당대의 신료들도 세조의 찬탈 행위를 평가하는데 있어서 경계를 그었던 모양이다. 이를 탐탁지 않게 여긴 예종이 아버지는 국가를 다시 일으켜 세운 공이 있다고 문제를 제기해 결국 묘호가 세조가 되었다. 선종은 임진왜란을 극복한 공이 있다고 하여 선조가 되었는데 그 공로는 잘 도망 다녔다는 뜻이려나?


인조는 쿠데타를 일으켜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앉자 자신의 아버지를 본래 예법으로 대원군으로 삼아 정원대원군(定遠大院君)이라 칭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논란 끝에 왕으로 추존해 묘호를 원종(元宗)이라 했다. 대군이나 세자가 아닌 왕자가 추존왕이 된 것은 원종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1649년 인조가 죽자 열조(烈祖)로 묘호가 정해졌다. 조를 남발한 것도 모자라 인조(仁祖)로 묘호를 고쳤는데 소현세자가 의문사하지 않았으면 왕위에 오르지 못했을 효종의 이심전심 띄워주기인 셈이다. 병자호란을 자초하고 아들과 며느리를 억울하게 죽인 아둔하고 냉혹했던 인물에게 어질다는 묘호를 붙이다니 민망하다. 왕에게 있어 시호의 역할을 했던 묘호 산정이 이렇게 흐물흐물했다니 부끄러운 일이다.


대한제국 초대 황제인 광무제의 시호는 高宗統天隆運肇極敦倫正聖光義明功大德堯峻舜徽禹謀湯敬應命立紀至化神烈巍勳洪業啓基宣曆乾行坤定英毅弘休壽康文憲武章仁翼貞孝太皇帝이다. 고종은 묘호이고, 문헌무장인익정효(文憲武章仁翼貞孝) 8자는 시호로서 고종이 붕어한 후 올린 것이다. 고종과 문헌무장인익정효 사이의 50자에 달하는 존호는 고종 9년부터 순종 즉위년까지 생존해있는 고종에게 일곱 차례에 걸쳐 상호(上號)한 것이며, 태황제(太皇帝)라는 존호는 고종이 강제 퇴위를 당해 순종이 즉위했던 1907년에 봉책한 것을 고종 사후에 재추봉한 것이다.


망국의 황제가 누리기에는 너무 넘치는 시호였다고 생각했는지 일제는 이에 대한 시비를 걸었다. 고종·순종실록 감수보조위원(監修補助委員)으로 활동한 에하라 젠쓰이(江原善槌)는 고종실록의 편찬과정에서 실록의 권두에 실릴 고종의 시호가 일본 황실의 한 왕가로서의 지위에 저촉된다고 주장했다. 창덕궁 이왕인 순종황제가 덕수궁 이태왕인 고종황제에 대한 시호를 봉책하여 태황제라고 할 권능이 없으며, 순종이 올린 8자의 시호 역시 삭제해야 한다고 투덜거렸다. 결국 일제는 한일합방을 기점으로 하여 그 이전의 황권만을 인정하는 태도를 취했다. 한일합방 이후의 실록은 순종황제실록부록(純宗皇帝實錄附錄)으로 처리하고 제왕의 칭호도 격하시키고, 대한제국 황제의 재위년도나 연호 대신 일본의 연호를 사용했다.


7. 시호의 정신을 새기며


1456년 처형된 사육신이 1691년 숙종에 의해 시호가 내려진 것처럼 시호는 한 개인에 대한 역사의 엄정한 평가를 지향했다. 오늘날에 그 형식을 곧이곧대로 따를 것은 없어도 그 정신은 배울 점이 많다. 이런 일도 있었다. 조선 전기 문신이던 김국광이 뜻을 펴되 성취하지 못했다는 의미(述義不克)의 정(丁)자가 포함된 시호를 받았다. 아들 김극유는 4년 동안 열 차례가 넘는 상소를 올리며 시호를 고쳐주기를 청하였다. 성종과 대신들은 김국광이 현저한 과실이 없는데 나쁜 시호를 얻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시호는 바꿀 수 없다는 원칙을 고수해 끝내 바꿔주지 않았다.


그런데 그 원칙이 반드시 지켜진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한명회의 시호가 명성(明成)이라고 정해졌다. 생각이 과감하고 원대한 것(思盧果遠)을 명(明)이라고 했으나 자부심이 강하다는 뜻이 그리 아름답지 못하다는 문제 제기가 들어왔다. 성종은 결국 특명을 내려 명을 충(忠)으로 고치게 했다. 시호를 고치지 말 것을 상소한 신하들이 있었지만 성종은 당대의 세도가에 자신의 장인이었던 한명회의 시호를 마냥 외면하지 못했다.


이에 반해 고려 말의 권신 이인임의 시호는 황무(荒繆)로 정해졌다. 당시 전의부령(典儀副令)이던 공부가 그의 시호를 이렇게 짓자 종당(宗黨)이 이를 갈며 압박했지만 공부는 움직이지 않았다고 전한다. 황(荒)은 안팎으로 난이 생긴다, 방종하게 즐기면서 법도가 없다, 기강과 법도를 혼란스럽게 한다는 뜻이다. 무(繆)는 명분과 실제가 어긋난 것, 즉 명분은 아름다우나 실상이 손상되었다(名與實爽)는 뜻이다. 가히 한국사에 있어 악시의 대표 격이다. 이인임은 말년에 실각했으니 한명회와 같은 호사는 누리지 못했던 것일까?^^;


옛사람들은 시호 한 자에 웃고 울었다. 허울뿐이라고 구박해도 그만이지만 역사를 두려워하라는 시호의 참뜻을 되새길 필요가 있겠다. - [無棄]


<참고 문헌>
박영규, 『고구려왕조실록』, 웅진지식하우스, 2004
박홍갑, 『양반나라 조선나라』, 가람기획, 2001
신용호·강헌규, 『先賢들의 字와 號』, 전통문화연구회, 1997
이민홍 편, 『諡號, 한 글자에 담긴 인물 評』, 문자향, 2005
신명호, “조선시대 국왕호칭의 종류와 의미”, 『역사와경계』 제52집, 부산경남사학회, 2004, pp. 47~67
이민홍, “중원 시법(諡法)의 수용과 한국 역대(歷代) 제왕의 시호(諡號)”, 『한문학보』 제12권, 우리한문학회, 2005, pp. 485~509
이영춘, “『通文館志』의 편찬과 조선후기 韓中關係의 성격”, 『역사와실학』 제33집, 역사실학회, 2007, pp. 121~161
임민혁, “高ㆍ純宗의 號稱에 관한 異論과 왕권의 정통성 - 廟號ㆍ尊號ㆍ諡號를 중심으로 -”, 『사학연구』 제78호, 한국사학회, 2005, pp. 189~230
shyisna님이 올려주신 네이버 오픈 백과 “시호(諡號)”,  “시호(諡號) 사례분석”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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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올 때는 말없이

사회 2009. 3. 24. 03:44 |

어느 해라고 덜했겠냐만 내가 기억하는 2006년에는 추한 광경이 많이 벌어졌다. 한나라당은 7·26 재보선 서울 송파갑 공천에 기자 성 접대와 세금 체납 전력이 있는 정인봉씨를 공천했다가 취소했다. 부랴부랴 새로 공천한 사람은 놀랍게도 보궐선거의 원인을 제공했던 맹형규 전 의원이었다. 송파갑 보선은 맹형규씨가 그해 1월 서울시장 경선에 참가할 때 배수진을 친다는 의미로 사퇴해 치러졌다. 비례대표 의원이 사퇴해 지역구 의원으로 나오는 경우가 있기도 하지만 의원직을 자진 사퇴한 후보자가 그 자리에 다시 출마한다는 것이 너무 볼썽사나웠다. 아무리 누구를 앉혀놔도 당선되는 상황이라고 해도 어찌 이렇게 일말의 염치가 없을지 처량했다. 이번에 코레일 사장이 된 허준영 전 경찰청장이 성북을 공천을 신청한 것도 두고두고 기억할 사건이다.


2006년 3월 여기자 성추행 사건으로 한바탕 소란을 피운 최연희 의원은 사건 발생한지 4개월 만에 스리슬쩍 공개행보를 재개했다. 2004년 탄핵 때 의사봉을 잡았던 박관용 전 국회의장은 국회의장직이 마지막 공직이라며 정계은퇴를 선언했다가 2006년 6월 한나라당에 복당해 상임고문을 맡기도 했다. 부인이 4억 원의 공천헌금 수수 혐의로 구속되자 “조만간 정치적 거취를 밝히겠다”고 말했던 김덕룡 의원은 “대선에서 할 일이 있다”며 말을 바꿨다. 한번뿐인 인생인데 저렇게 구차하지 못해 안달인 모습을 보니 내 자신도 두렵다. 나는 얼마만큼 멈춰야 할 때를 잘 잡아낼 수 있을까.


남명 조식이 “선비의 큰 절개는 오직 출처(出處) 하나에 달려있을 따름이다(士君子大節 唯在出處一事而已)”라고 강조하셨듯이 공인일수록 나아가고 물러날 때를 잘 헤아려야 한다. 기왕이면 자유의사로 이뤄지고, 가능하면 시대정신에 대한 승복이어야 가치가 빛난다. 은퇴를 선언했던 정치인들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다시 돌아오는 모습이 그리 우아하지 못하다. 2004년 17대 총선 때 한나라당 텃밭인 서울 강남을 지역구를 스스로 포기해 아름다운 퇴장이라 칭송 받던 오세훈 전 의원이 5·31 지방선거 서울시장 후보로 뛰어들어 당선됐다. 달랑 4년만 금배지 맛을 본 초선의원이 불출마 선언을 해서 신선한 충격을 안겨줬던 그다. 서울 강남 을에서 쉽게 재선의 길을 갈 수도 있었던 달콤한 유혹을 저버린 그에게 설레지 않았을 사람이 누가 있었으랴.


당시에도 이미 서울시장 출마설이 돌았으나 그는 시종일관 부인했다. 그러나 역시 권세가 좋긴 좋은 모양인지 몇 번의 권유를 마다하지 못하고 그는 헐레벌떡 돌아왔다. 오세훈씨는 “(불출마 선언으로) 호감을 얻었지만 이를 밑천으로 정치적 도약을 노릴 만큼 미련치 않다”던 자신의 발언을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하다. 그는 서서히 잊혀지기보다 승리자의 영광을 택했다. 그가 환멸을 느끼며 떠났던 정치판이 많이 바뀌었다기보다 그가 더 바뀐 것은 아닌지 염려스럽다. 한나라당이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네들이 들어야 할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용기를 보여주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하기야 오세훈 시장 탓만 할 건 아니다. 정치인이 은퇴를 번복하거나 약속을 지키지 않은 사례는 쉽게 찾을 수 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87년 대선에서 패한 다음날 정권타도 투쟁을 선언하더니 1990년 전격적으로 3당 합당을 해버렸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1992년 대선을 패배하고 정계은퇴 선언을 했다가 1995년 정계복귀를 선언하고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다. 1997년 대선 때 신한국당 후보 경선에서 패배한 이인제씨는 불복하고 대선에 출마했고, 2002년 민주당 후보 경선 때도 음모론을 제기하며 탈당하는 등 어지러운 행보를 보였다. 정계은퇴를 번복하고 2007년 대선 직전 한나라당을 탈당해 대선에 출마했던 이회창 자유선진당 총재도 있다. 그가 요즘 간간이 보여주는 총기에도 불구하고 울림이 반감되는 이유가 지난날의 말 바꿈과 관련이 있을 게다.


2004년 총선 당시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10선 국회의원이 되겠다며 비례대표 1번을 받아들던 김종필씨는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면서도 모른 체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서산(西山)을 붉게 물들이며 떠나고 싶다”라는 노욕에 빠졌지만 그리 아름답지 못한 저녁놀이었다. 민망하게도 그의 아호는 운정(雲庭), 구름의 자유로움을 좋아해 지었다고 한다. “멈출 곳을 알면 위태롭지 않다(知止 可以不殆)”라고 할 때 知止는 소극적 개념이 아닌 적극적 개념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제는 갈 시간이다(it's time for me to go)”라고 연설을 마무리하는 앨 고어 전 미국 부통령의 승복 연설에 군침만 흘릴 필요는 없다. 드물지만 우리에게도 그런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2006년 지방선거 때 당선 영순위로 꼽히던 이원종 충북지사는 3선 불출마를 전격 선언하고 소속 정당을 탈당했다. “적절한 시기에 명예로운 퇴장은 오랜 소망이었다”며 “공을 이뤘으면 몸은 떠나는 것이 하늘의 도”라는 노자의 ‘공수신퇴천지도(功遂身退天之道)’라는 문구를 꺼내드는 모습이 감동적이었다. “은퇴하면 그림자를 남기지 말아야 하는 법”이라는 그 마음자리를 좇고 싶다.


강금실 전 법무부장관은 퇴임 기자회견에서 먼저 사의를 표명했느냐는 질문에 “떠날 때는 말없이”라고 답했다. 하지만 제 때 떠난 사람들은 말을 많이 해도 좋으리라. 자신의 아름다운 퇴장을 자랑스레 말하고 싶은 건 인지상정이다. 57세의 이른 나이에 정계를 은퇴하며 “떠나야 할 때를 넘겨 머물기보다 남들이 머물라 할 때 떠나겠다”라고 말한 존 메이저 전 영국 총리의 뒷모습은 얼마나 위풍당당했겠는가. 나는 공인들에게 얼른 그 자리에서 물러날 것을 촉구하는 게 아니다. 돌아오는 자들의 식언(食言) 릴레이가 식상하다는 투정에 지나지 않는다.


어쩌면 우리에게 시급한 것은 ‘떠날 때는 말없이’의 미덕보다는 ‘돌아올 때는 말없이’인지도 모르겠다. 앞으로도 돌아오는 사람은 이어지겠지만 그 멋쩍음을 미사여구로 분칠하지 말기 바란다. 물러났을 때의 그 견결한 마음을 실천하려면 말을 줄이고 더 많이 노력하느라 바쁘실 테니 말이다. - [無棄]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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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한도 발문 읽기

문화 2009. 3. 15. 23:08 |

추사 김정희(金正喜)의 세한도(歲寒圖)는 한국 회화 가운데 유명하기로 손꼽히지만 그 발문의 속살을 들여다보면 그림에 대한 이해가 더욱 높아진다. 세한도는 추사 선생이 59세인 1844년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 제자인 우선 이상적(李尙迪)이 보내준 책을 받고 그 정성에 감격하여 그려준 그림이다.


이상적은 역관(譯官)이라 중국을 드나들며 추사를 위한 서책을 수집할 수 있었다. 양반 지인들이 자신을 멀리할 때 역관 제자가 남아 제 곁을 지켜준 것이 유독 더 애틋했는지도 모르겠다. 추사 선생은 권세와 이익에게 달려가지 않고 자신을 찾아와 준 제자에게 그림과 발문으로 극진한 고마움을 표한다.


이상적은 스승의 세한도를 받고 “세한도 한 폭을 엎드려 읽으매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리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歲寒圖一幅 伏而讀之 不覺涕淚交)”로 시작하는 답장을 썼다. 옛사람이 왜 그림을 ‘읽는다’고 했는지 알겠다. 세한도는 발문까지 읽고 나서야 비로소 제대로 완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한도 오른쪽 아래 구석에는 장무상망(長毋相忘) 네 글자가 새겨진 붉은 도장이 찍혀있다. 오랫동안 잊지 말기를! 스승이 찍었든 제자가 남겼든 서로의 도타운 마음자리가 내 무심함마저 녹인다. 정민 선생님과 오주석 선생님의 세한도 발문 번역을 내 입맛에 맞게 고쳤다. 세한도에는 진짜배기 의리가 배어 있다. 요즘 다시 꺼내 읽고 싶어진 이유다.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못 빌리는 아픔을 겪으니 졸업이 비로소 실감이 난다. 광야로 내몰린 졸업생들이 덜 스산하도록 책 몇 권 끼고 다닐 수 있게 해주셨으면 좋겠다. 혹여 재학생들의 도서 이용에 불편을 줄까봐 큰 목소리로 외치지는 못하지만 말이다. 친구와 후배들이 나를 위해 한두 권씩 책을 빌려다줘서 고맙다. 세한도 발문을 풀이하며 그네들을 생각했다.


<세한도 발문>

지난해에는 계복(桂馥)의 <만학집晩學集>과 운경(惲敬)의 <대운산방문고大運山房文藁> 두 책을 부쳐왔더니, 올해는 또 우경 하장령(賀長齡)이 편찬한 <황조경세문편皇朝經世文編>을 부쳐왔구나. 이는 모두 세상에 늘 있는 책이 아니라서, 천만리 먼 곳에서 사온 것이며, 여러 해 걸려 얻은 것이지, 한 때에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去年以晩學大雲二書寄來, 今年又以藕耕文編寄來. 此皆非世之常有, 購之千萬里之遠, 積有年而得之, 非一時之事也.
거년이만학대운이서기래, 금년우이우경문편기래. 차개비세지상유, 구지천만리지원, 적유년이득지, 비일시지사야.


또한 세상의 도도한 물결(인심)은 오직 권세와 이익만을 따르는데, (귀한 책을 얻으려고) 마음을 쓰고 힘을 쓰기를 이와 같이 하고서도, 권세와 이익이 있는 사람에게 돌아가지 않고, 바다 밖 초췌하고 야윈 사람에게 돌아오기를 마치 세상 사람들이 권세와 이익을 따르듯 하는구나.

且世之滔滔, 惟權利之是趨, 爲之費心費力如此, 而不以歸之權利, 乃歸之海外蕉萃枯稿之人, 如世之趨權利者.
차세지도도, 유권리지시추, 위지비심비력여차, 이불이귀지권리, 내귀지해외초췌고고지인, 여세지추권리자.


태사공 사마천이 이르기를, “권세와 이익으로 합한 자는 권세와 이익이 다하면 사귐도 성글어진다”라고 했다. 그대 또한 세상의 도도한 물결 가운데 한 사람으로, 초연히 도도한 권세와 이익의 밖으로 스스로 벗어나니, 권세와 이익이란 기준으로 나를 보지 않음인가, 태사공의 말씀이 잘못되었는가?

太史公云, 以權利合者, 權利盡以交疎. 君亦世之滔滔中一人, 其有超然自拔於滔滔權利之外, 不以權利視我耶? 太史公之言非耶?
태사공운, 이권리합자, 권리진이교소. 군역세지도도중일인, 기유초연자발어도도권리지외, 불이권리시아야? 태사공지언비야?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라고 하셨다. 소나무와 잣나무는 네 계절을 지내도 시들지 않는 것으로서, 날씨가 추워지기 전에도 한결같이 소나무와 잣나무였고, 날씨가 추워진 뒤에도 한결같이 소나무와 잣나무였다. 그런데도 성인께서는 특별히 날씨가 추워진 뒤를 일컬으셨다(칭찬하셨다).

孔子曰, 歲寒然後, 知松栢之後凋. 松栢是貫四時而不凋者, 歲寒以前一松栢也, 歲寒以後一松栢也. 聖人特稱之於歲寒之後.
공자왈,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 송백시관사시이불조자, 세한이전일송백야, 세한이후일송백야. 성인특칭지어세한이후.


이제 그대가 나를 대함을 보면, 이전이라 하여 지금보다 더함이 없지만(잘 해준 것이 없지만), 이후라고 하여 지금보다 덜함이 없다(소홀함이 없다). 그러면 이전의 그대는 일컬을 만한 것이 없겠으나, 이후의 그대는 또한 성인에게 일컬을 만한 것이 아니겠는가? 성인께서 유독 이를 일컬었던 것(송백을 칭찬한 것)은 다만 늦게 시드는 곧은 절조와 굳센 절개를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날씨가 추워진 때에 느끼시는 바가 있었던 것이다.

今君之於我, 由前而無加焉, 由後而無損焉. 然由前之君, 無可稱, 由後之君, 亦可見稱於聖人也耶? 聖人之特稱, 非徒爲後凋之貞操勁節而已, 亦有所感發於歲寒之時者也.
금군지어아, 유전이무가언, 유후이무손언. 연유전지군, 무가칭, 유후지군, 역가견칭어성인야야? 성인지특칭, 비도위후조지정조경절이이, 역유소감발어세한지시자야.


아아! 서한(西漢)의 순후한 세상에서 급암(汲黯)과 정당시(鄭當時) 같은 어짊으로도 빈객들이 시세와 더불어 성하고 쇠하였다. 하비의 방문(榜文) 같은 것은 박절함이 극에 달했도다. 슬프다! 완당노인이 쓰다.

烏乎! 西京淳厚之世, 以汲鄭之賢, 賓客與之盛衰. 如下邳榜門, 迫切之極矣. 悲夫! 阮堂老人書.
오호! 서경순후지세, 이급정지현, 빈객여지성쇠. 여하비방문, 박절지극의. 비부! 완당노인서.
* 하비(下邳)는 하규(下邽)의 오기이다.


<참고>

마지막 단락에 나오는 급암과 정당시, 하규의 방문 이야기는 『사기(史記)』 급정열전(汲鄭列傳)에 나온다. 전한(前漢) 무제 때 급암(汲黯)과 정당시(鄭當時)라는 어진 신하들이 현직이 있을 때는 손님이 넘치다가 좌천되었을 때는 손님의 발길이 뚝 끊겼다.

 
사마천은 “급암과 정당시 정도의 현인이라도 세력이 있으면 빈객이 열 배로 늘어나고, 세력을 잃으면 당장 모두 떨어져 나간다. 그러니 보통 사람의 경우라면 더 말할 나위도 없다”라고 평했다.

 
이어 언급한 적공(翟公)의 사례도 마찬가지로 그 또한 해임되자 집이 한산하다 못해 문 앞에 새 그물을 쳐 놓을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여기서 문전작라(門前雀羅), 문전가설작라(門前可設雀羅)라는 고사성어가 유래되었다. 적공이 다시 관직에 오르자 손님이 다시 몰려오는 염량세태를 풍자하며 대문에 써 붙인 시는 다음과 같다.

 
一死一生 乃知交情 한번 죽고 한번 삶에 사귐의 정을 알고
一貧一富 乃知交態 한번 가난하고 한번 부유함에 사귐의 태도를 알며
一貴一賤 交情乃見 한번 귀하고 한번 천함에 사귐의 정이 드러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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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구 대학 졸업하다!

익구 2009. 3. 2. 03: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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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난 2월 25일 대학교를 졸업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새내기처럼 지내다가 미적대지 말고 쿨하게 떠나자는 결심을 얼마나 지켰는지 모르겠다. 24일 도서관 마감 시간까지 그간 빌렸던 책을 대강 넘겨보고 모두 반납했다. 졸업일 전까지 대출 도서를 반납하라는 공지를 지키고 싶어서다. 마무리의 첫걸음은 아무래도 비움이나 내려놓음이다. 무사 졸업이라는 대업(?)을 이룬 지금 좀 더 간소해져서 어디든 옮길 준비를 해야겠다.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꾸고 황제 즉위식을 올렸을 때 어느 외국 외교관이 “이처럼 즐겁지 않은 황제 즉위식은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라고 핀잔했다고 한다. 즉위식 당일 아침 고종은 꿈자리가 뒤숭숭했던 여파였는지 행렬의 출발을 지연시키는 등 몽니를 부렸다. 아무리 좋은 의식이라도 설렘 만큼이나 두려움이 있게 마련이다. 하물며 흰 손(白手)을 뽐내야 하는 내 처지는 두려움이 설렘을 압도하지 않도록 노력해야한다.


졸업식 즈음해서는 끝맺음에 대한, 혹은 떠남에 대한 영감이 마구 떠오를 줄 알았는데 막상 닥치고 보니 머리가 하얘졌다. 학생 신분은 벗어나지만 딱히 어디 거처를 마련한 곳은 없어서 대학 도서관을 이용한다는 핑계로 학교 출입이 잦을지도 모르겠다. 지역 도서관을 알아보기는 하겠지만 학교 도서관에 대한 향수를 금세 지우지 못할 듯싶어서다. 책은 빌려주지 않아도 열람을 할 수 있으니 오히려 더 오래 머물러야 하는 건 아닌가 벌써부터 걱정이다.


수로부인에게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신다면/ 꽃을 꺾어 바치오리라”라고 노래했던 헌화가의 노인은 홀연히 사라졌기에 아름다웠다. 있을 때 잘하고 아쉬울 때 내려오는 사람이 되어야 할 텐데 미련에 허덕이면 너무 부끄러울 것 같다. 나는 내가 졸업을 했답시고 미련한 젊음 대신 유능한 점잖음을 택하고, 우직한 고집 대신 표변하는 영특함을 예찬할까 아슬아슬하다. 내 지인들에게 평소처럼 나를 따끔하게 꼬집어주었기를 재차 부탁했다.


내가 존경하는 위인 가운데 한 분이 잠곡 김육 선생님이다. 격렬한 반대에 아랑곳하지 않고 칠순이 넘어서도 대동법(大同法) 확대 실시에 일생을 걸었던 잠곡의 신념을 흠모한다. 잠곡은 ‘앎’과 ‘삶’의 숙명적인 거리를 줄여나가는 노력의 전범으로서 내게 각인되었다. 당시 대동법 반대론자들도 공납의 폐단이 심각함을 알았지만 그네들은 호패법을 강화해 농민의 유망을 막자는 방책을 내놓았다. 잠곡은 백성을 통제하고 감시해서는 민생 안정을 이룰 수 없으니 호패법을 철폐하자고 주장했다. 석탑의 뜰을 떠나며 잠곡의 정신, 대동법 정신을 이어 받아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대동법과 호패법의 대립은 결론을 내리기 쉬운 편이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또렷한 해답이 있기보다는 ‘비율과 조합’의 문제에 봉착하는 경우가 많다. 이와 같은 비율과 조합 앞에서는 인간다움에 대한 믿음과 열린 자세, 그리고 창조적 상상력이 요구된다. 개개인의 각성을 존중하는 것이 비율과 조합의 문제를 푸는 첫걸음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이상론과는 달리 우리 사회는 특정한 각성만을 강요하고 상찬하기 일쑤다. ‘교정’의 대상이 아닌 ‘교류’의 대상으로서의 각성이 우리 사회를 윤택하게 만든다. 나도 그 풍요로운 마음을 모으는데 모래 한 알만큼이라도 보태길 희망한다.


2.
옛사람의 사귐에 대한 글을 묶은 『거문고 줄 꽂아놓고』라는 책에서 읽었던 일화가 자꾸 떠오른다. 정약전과 정약용 형제는 벗 사귐에 차이가 컸던 모양이다. 정약전은 여항의 술꾼들과 가까이 지냈지만 정약용은 주로 깔끔한 엘리트들과 어울렸단다. 1801년 신유사옥이 일어나 형제의 처지가 위태로워졌을 때 형의 벗들은 평소와 다름없이 정약전 형제를 잘 대해주는데 아우의 벗들은 그렇지 못했나 보다. 다산은 “이 점이 바로 내가 형님께 못 미치는 점!”이라며 탄식했다고 한다. 나는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고 말하고 다녔지만 이래저래 까다로운 잣대를 들이밀기도 했다. 대학 시절 동안 얼마나 마음으로 사람을 사귀었는지 반성해본다.


2002년 대학 새내기 시절 나는 대학교 사람들에게 쉽게 정을 붙이지 못하고 고등학교 친구들만 쫓아다녔다. 대학교 반 활동에 너무 소홀하다 보니 나중에 내가 돌아갈 자리가 딱히 없었다. 감사하게도 어찌어찌 인연이 닿아 반을 옮겨서 지내게 되었다. 좋게 말하면 여러 사람을 알게 되었고 나쁘게 말하면 대학에서의 교우관계가 좀 흩어져버린 셈이다. 내 어수선한 새내기 시절을 함께 보내준 원혁, 세일, 병채, 훈석, 현수(김), 아름이 등에게 깊은 고마움을 표한다. 비록 이런 혼란이 있었지만 이게 다 고등학교 친구들과 함께 하려 했던 내 의지였기 때문에 크게 서운하지는 않다. 앞으로 사회에서 어떤 별 같은 분들을 만나 뵐지 모르겠지만 그 때에도 빈천지교(貧賤之交)를 나눈 대학 사람들, 고등학교 친구들을 찾아다닐 게다.


내가 반 활동이 늦은 편이라 선배님들, 동기들, 후배들을 뒤늦게 만났고 지금도 새로 만나고 있지만 그래서 더 각별했던 것 같다. 벌써 오래 전 일이지만 한 때나마 내가 여기 계속 머물러야 하는지 고민했던 적이 있었다. 고심 끝에 육두품이라도 좋고, 서얼이라도 좋으니 끝까지 함께 하자고 결심했다. 육두품이라는 한계를 한탄하면서도 시무10조를 올려 흔들리는 신라를 바로잡으려 했던 최치원 선생님이, 서얼이라는 설움에 아랑곳하지 않고 가난한 나라 조선을 고쳐야 한다며 <북학의>를 지었던 박제가 선생님이 되자는 허풍을 늘어놓았다.


자신들을 박절하게 대한 나라에게 애정을 쏟은 그 분들에 비하면 고대 경영 단결 飛반인들께 두터운 은혜를 입은 나는 그야말로 행운아니 좀 더 수월하게 본받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능력이 모자라 그 마음을 다 지키지는 못했다. 지난해 4월 飛반인의 밤 행사 때 방명록에 生我者父母 知我者飛班也라고 썼다. “나를 낳아주신 분은 부모님이지만 나를 알아준 사람은 포숙아였다(生我者父母 知我者鮑叔也)”라는 관중의 유명한 말씀을 패러디한 것이다. 여기서 더 보탤 말이 없다. 내 졸업 인사를 한 해 전에 이미 써둔 셈이다. 너무 빨리 잊지 마시고 조금 천천히 잊어주시면 고맙겠다.


이제 갓 선배가 된 후배들에게 해주고픈 말이 없냐는 질문에 잔소리는 하지 말아야지 굳게 다짐했는데 결과적으로 잔소리를 하고 말았다. 고종석 선생님 표현을 조금 빌리자면 모든 선배는 후배가 저보다는 나은 선배가 되길 바랄 테니 괜찮겠지?^^; 대단한 이야기는 아니고 후배 앞에서 많이 말하기보다는 많이 들으라고 조언했다. 의식적으로 노력을 하더라도 어느 순간에 후배들 말을 잘라먹고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가 많다는 개인적인 경험담을 덧붙여서 말이다. 나도 후배들에게서 좀 더 많이 배우고 싶었는데 아쉽다. 나는 내 젊음을 알차게 쓰지도 못하면서 후배의 어림을 탐내는 못난 선배였다.


그저 바라만 봐도 아름다운 시기인 09학번 새내기에게 내가 무슨 말을 해도 군소리일 테다. 조심스레 건넨다면 자신의 안목을 갈고 닦는 연습을 위해 의심을 해보길 권하고 싶다. “작은 의심을 품으면 조금 나아가고, 큰 의심은 크게 나아가며, 많이 의심해도 괜찮다. 그러므로 분명한 곳도 의문이 있는 것처럼 봐야한다(小疑則小進 大疑則大進 多著疑不妨, 故無疑處有疑看也)”라는 주희의 말씀이 참 좋다. 대학교 저학년 때는 의심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 아닐까. 나도 아직 내가 책을 읽는 게 아니라 책에게 읽히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가 자괴감이 드니 그리 만만한 요구는 아니겠지만 말이다.


3.
학교 다니면서 저지른 잘못이 한두 가지가 아니겠지만 졸업 무렵에 유독 생각났던 사건이 있다. 2006년의 일로 기억하는데 후배들과 함께 엠티 후발대를 가게 되었다. 기차표가 모자라서 무임승차를 해야 할 처지가 되자 내가 다음 기차를 기다리든가 아예 엠티를 가지 않겠다고 버티는 바람에 결국 시외버스를 타고 엠티 장소로 향했다.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법을 덜 어기는 게 민주시민의 덕목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지만 내가 좀 넘쳤다. 나는 내 고결함(?)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선배의 권위를 이용해 후배들을 시외버스 터미널까지 끌고 다녔다. 그때 당시 후배들을 제대로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이 자리를 빌려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다.


고마운 분들이 참 많지만 여기서 다 나열하다가는 전화번호부가 될지도 모르겠네요. 가슴 깊이 감사드리며 배운 대로 살기 위해 애쓰는 모습으로 보답하겠습니다. 건승하세요.^-^ - [無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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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리들2

일기 2009. 2. 22. 21:58 |

제가 요즘 어수선하게 지내는 관계로 쓰고 싶은 잡글은 많은데 제대로 정리를 하고 있지 못합니다. 아쉬운 마음에 우수리를 모아봤습니다.


090113
기원전 600년 이전 사람인 조로아스터는 인류 역사상 최초의 종교 창시자로 추정된다. 선과 악의 대결, 최후의 심판, 천국과 지옥, 인간의 사후 운명에 대한 관심, 구세주 등 조로아스터교의 기본 교리는 유대교, 천주교, 개신교, 이슬람교, 불교에 모두 깊은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조로아스터가 석가모니, 공자, 소크라테스 등 기원전 5세기의 성인보다 앞선 시대의 사람이라 이런 가설이 나오는 모양이다. 나는 이런 역사적 사실에서 종교의 발전도 결국 인류의 진화와 함께 해온 지난한 여정이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품었다.


문득 신이란 인간의 필요에 의해 창조된 존재로 “인간이 신의 아들이 아니라 신이 인간의 아들”이라고 스스럼없이 말했던 포이어바흐가 떠오른다. 나는 종교가 인간의 행복에 복무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만 보지는 않지만 적어도 종교가 인간의 화목을 해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배타성은 종교의 본질 가운데 하나다. 그것이 근본적이라든가 공격적이라든가를 떠나서 이교도나 비종교인에게 마냥 너그럽다면 그건 이미 종교가 아니다. 그러나 그 배타성에는 절제와 금도가 있어야 한다.
 

대한민국의 지정학적 위치 때문인지 이 땅에서는 다채로운 종교가 스며들고 섞였다. 한국은 다종교 사회라고 할 만하고 세속주의 원칙이 비교적 잘 지켜진 나라라고 볼 수 있다. 헌법 제20조가 규정하고 있는 정신도 이런 현실에 바탕을 둔다. 이 정부 들어서 이 헌법정신을 잊어버린 분들이 우리 사회의 상층부에 제법 많이 계신 듯싶어 살짝 불안하다. 나는 내 자신이 불가지론자인지 무신론자인지 아직 확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설령 신이 있다고 하더라도 전지(全知)-전능(全能)-전선(全善)을 다 갖춘 신이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이런 내 신념은 헌법의 보호를 받는다.


090120
KBS 드라마 <황금사과>를 IPTV를 이용해 사흘에 걸쳐 다 봤다. 참회하는 가해자와 용서하는 피해자, 그리고 권선징악과 권불십년이라는 설정은 비현실적이다. 그러나 그 비현실성은 어디에도 없는 곳(Utopia)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앨빈 토플러는 제3의 물결이 프랙토피아(Practopia)적 미래를 낳을 것으로 전망했다. Practical과 Utopia의 합성어인 프랙토피아는 피안(彼岸)이 아닌 차안(此岸)이다. 권세를 얻은 자가 누구든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미운 짓을 벌이지 못하도록 사회적인 한계를 분명히 그어야 한다. 그래야만 속죄와 관용, 보상과 문책을 통한 화해의 문이 열린다. 이 경계가 무너지면 용서하려 해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지도 모른다.


군사독재 시절을 배경으로 삼아 틈틈이 시국에 대한 한탄을 적절히 섞은 재미가 쏠쏠하다. 극중 대사에 말조심하라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2009년 어느 날 나는 내 친구들과 술자리에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런 말 하다가 잡혀간다”라고 농담을 날린다. 요즘 한국 사회가 권력을 소수가 독점했을 때의 폐해를 다시 반복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먼 훗날 이명박 정부가 <황금사과> 같은 드라마의 배경으로 쓰이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자신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돌아볼 능력도 없던 중앙정보부 정 과장(이기영 분)은 드라마 속에만 있는 인물은 아닌 모양이다.


090212
현재 법률 해석의 원리 및 해석의 정당화를 가르치는 곳은 많다. 그러나 입법학이라 불리기도 하는 법률 제정과 개정의 문제를 탐구하는 곳은 드물다. 행정학이나 정책학, 정치학은 물론 사회학, 경제학, 경영학 등과 연계한 통합적이고 학제적인 성격을 띠기 때문인 모양이다. 그간 입법의 문제는 법률 제정 실무자들에 국한된 입법기술로 취급된 경향이 짙다. 하지만 입법 감시야말로 풀뿌리 민주주의의 주춧돌을 놓는 일이다. 미국의 정치학자 샤츠슈나이더의 말씀처럼 민주주의란 스스로가 옳다고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정치체제이기 때문이다.


2006년 9월 출범해 지역주민의 생활에 있어 가장 밀접한 하위법률 연구를 진행한 희망제작소 부설 조례연구소가 좋은 예다. 몽테스키외가 『법의 정신』에서 “무용한 법은 필요한 법을 약화시킨다”라고 역설했듯이 좋은 법률의 존재는 법치 효능감을 제고시키지만 아직 애정 어린 관심이 부족한 듯싶다. 일전에 문학평론가 이명원 선생님은 판례에 대한 단순한 ‘해설’을 넘어서는 체계적인 법률 ‘비평’이 부재하다고 지적하셨다. 입법평론 혹은 사법비평 같은 영역이 단숨에 열리지는 않겠지만 우리 사회에 긴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입법부와 사법부에 계신 훌륭한 분들이 세금 값을 넘게 하신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런 개인적인 신뢰보다는 일상적인 감시시스템과 공정한 평가체계가 더 요청된다는데 동의한다. 미국 제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이 “자유의 대가는 영원한 불침번이다”라고 설파했듯이 주권자인 시민이 입법을 감시하는 것은 헌법정신에 따른 마땅한 권리이자 의무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사법 감시도 일상화되어야 한다. 욕먹는 게 업인 정치인들은 차라리 담담한 편인데 이런 비판과 분석을 신성모독쯤으로 생각하는 판사나 검사 분들이 많아 걱정이다.


제퍼슨은 또 “신뢰는 어디서나 독재의 어버이이며, 자유로운 정부는 신뢰가 아닌 경계심에 기초하고 있다”라고도 말씀했다. 입법 감시나 사법 감시 모두 권력을 견제하는 시민의 방패막이다. 믿음은 소중한 덕목이지만 권력을 향해서는 최대한 아껴서 써야 한다. 의심이 넘치면 대개 피곤하지만 권력에게 건넬 때는 먼저 의심부터 할수록 우리 삶이 윤택해진다. 정부 여당이 내세우는 법치가 특정인에게 기울어진 것이라면 우리는 만인에게 평평한 법치를 모색해야 한다. 아마 그 평평함은 약자나 소수자에게 좀 기울어진 형태가 되어야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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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저작권법 제1조

2009. 2. 12. 05:20 |

2008년 가을학기에 저작권법 강의를 들었다. 교수님의 강의만 즐겁게 들은 것 말고는 딱히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은 듯싶은데 시험 성적이 전체 180여명 가운데 2등이라니 개인적으로 큰 영광이다(세상에 내가 등수 자랑하는 날이 올 줄이야). 이제는 생활법률이 되어버린 저작권법에 대한 다양한 상상력이 만개 하는데 미력이나마 보태고 싶다. CCL(Creative Commons Licenses) 같은 게 좋은 사례일 듯하다.


저작권법을 내가 처음 지각한 것은 문장연구가 장하늘 선생님이 한국의 명문을 엮어 만든 『소리 내어 읽고 싶은 우리 문장』이란 책에서 비롯되었다. 출판사는 본래 43편이 아닌 53편으로 기획했는데 저작권자나 그 유족들과 연락이 닿지 않아 10편이 빠지게 되었다고 밝혔다. 이 책을 기획할 당시에도 법정허락 제도가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저작권자를 확인하기 어려운 저작물에 대해 해당 출판사가 취해야 하는 신문 광고가 경제적 지출만 강요하는, 현실성도 실효성도 없는 허울뿐인 제도라고 출판사는 아쉬워했다.


결국 출판사는 “저작권자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생겨난 저작권법이 오히려 작가의 작품이 독자들에게 읽힐 수 있는 길을 원천적으로 막아버리는 장애 요인으로 변질될 수도 있다는 점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라며 출판사는 작품 게재를 포기했다. 출판사의 합법적인 행위로 말미암아 내가 알지 못하던 명문을 접할 기회를 잃은 셈이다. 현재의 개정된 저작권법 이전의 사례라 지금은 법정허락 제도가 얼마나 정비되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저작권법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첫 경험이었다.


미궁과 미로의 이미지를 많이 차용한 작가 보르헤스는 미궁과 미로야말로 삶의 진짜 모습이라며 가장 완전한 형태는 미완의 형태라는 역설적 주장을 폈다. 사실 모든 법이 다 그렇겠지만 저작권법의 묘미 역시 미로를 더듬는데 있다. “이 법은 저작권자의 권리와 이에 인접하는 권리를 보호하고 저작물의 공정한 이용을 도모함으로써 문화의 향상발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라는 저작권법 제1조에는 저작권자와 이용자 사이의 정교한 균형에 대한 끊임없는 고심을 담고 있으니까 말이다. 저작권법 제1조가 표상하는 양자의 저울질은 앞으로도 관심을 가지고 탐구할 계획이다.


최근 일부 저작권자들과 이들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은 몇몇 법무법인들의 무차별적인 고소가 갖가지 폐단을 낳고 있다. 정당한 법 집행 행위임에도 마냥 칭찬하기 어려운 까닭은 저작권 위반의 경중과 대상자를 가리지 않고 형사 고소를 남발하는 것이 저작권법 제1조의 취지에 어긋날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한미 FTA가 체결된다면 저작권법은 문화의 향상 발전은 소홀한 채 저작권자의 배타적인 권리에 더 치우칠 우려가 크다. 문화부의 저작권법 개정안에 따르면 공정이용 조항을 신설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전반적으로 저작권자의 권리를 강화했다. 차세대 성장동력으로서의 저작권 산업이라는 구호는 아름답지만 외화내빈을 경계해야 한다.


저작물을 생산한다기보다 이용하는 입장일 수밖에 없는 학생 신분으로서는 저작권법을 준수하는 게 마냥 달갑지는 않다. 이유는 간단하다. 저작권법을 지킨다는 것은 결국 제 값을 치르고 저작물을 이용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저작인격권은 철석같이 지키더라도 저작재산권을 온전히 지키기란 큰 수입이 없는 학생의 입장에서는 힘든 일이다. 학생뿐만 아니라 대다수 서민과 중산층에게는 부담스러운 일이다. 어쩌면 도로교통법 다음으로 위반자가 많은 법률이 저작권법인지도 모른다.


배운 대로 살기 위해 내 자신을 검속하면서도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하나 있다. 저작권법 제30조 단서에 나오는 “공중의 사용에 제공하기 위하여 설치된 복사기기에 의한 복제”는 사적 이용을 위한 복제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규정이 바로 그것이다. 절대 다수의 학생들이 그렇겠지만 나 또한 학교 도서관에서 복사카드를 사서 무인카드복사기를 이용해 필요한 부분을 복제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무인카드복사기를 이용하는 학생들이 저작권자의 이용허락을 받고 나서야 비로소 복제하는 경우를 아직은 한 번도 본적이 없다.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도서관에서의 복제가 사적이용을 위한 복제(공정이용)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판례가 없다고 들었다. 그러나 판례가 아직 나오지 않은 것에 불과하다. 아직 우리나라에는 사적복제보상금제도가 도입되지 않았으니 현재 쓰는 복사카드에 보상금이 포함된 것 같지는 않으니 말이다. 제30조 단서 규정이 적용된다고 한다면 집안에 복사기를 구비하지 못한 학생들은 제31조 제1항에 따라 도서관에 의뢰하여 복제물을 제공받거나, 자기 손으로 필사나 컴퓨터 타이핑하는 정도밖에 법을 지킬 방도가 없다.


설상가상으로 제31조 제1항 제1호로 이용자가 복제물을 이용하는 목적은 조사·연구를 위한 것으로 한정하고 있다. 나처럼 한문고전이나 한국사 관련 서적을 단순히 개인적인 취미나 호기심으로 읽고 정리하는 경우 이마저도 할 수 없다면 너무 답답할 것 같다. 이 규정은 선언적인 의미 이상의 별다른 중요성을 가지지 못한다는 것이 일반적 견해라고 하지만 찜찜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집행되지 않는 법을 오랫동안 방치한다면 그 법을 지키려는 의지를 부식시킨다. 법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에게 법을 어길지도 모른다는 염려가 얼마나 따가운지 입법자들은 아시는가?


설령 내 취미생활을 조사·연구를 위한 것이라고 우기고 복제를 의뢰한다고 해도 문제가 남는다. 예를 들어 『논어』 주석을 참조하려면 수십 종의 번역서 내용 중의 극히 일부를 참조해야 한다. 만약 이 번역서들을 복제하고자 하면 난감한 상황에 빠진다. 도서관 복사부에 책 10권을 들고 가서 각 권당 1~2장씩만 복사해달라고 부탁하면 그 분들도 불편하고 나도 미안한 상황이 벌어지니 말이다.^^; 그렇다고 하염없이 필사나 타이핑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여러 저작권법 교과서들을 뒤적이며 이 부분에 대한 명확한 해석을 얻고자 했으나 헛갈렸다. 내가 거의 유일하게 저작권법을 어길 소지가 있는 대목인지라 나의 저작권법 스승이신 이대희 고려대 법대 교수님께 자문을 구했다. 이 교수님께서는 “공중용 복사기는 학교 앞 복사집을 겨냥한 것이고, 개인이 직접 공중용 복사기를 이용하는 것은 저작권법 위반이 되지만 집행은 되지 않는 것이 관행이라고 할 수 있다”라는 회신을 보내주셨다. 아 역시 저작권법 위반이었던 것이다. 털썩~ 나는 혹시나 학교 도서관 건물 내부에 비치되어 있는 복사기만이라도 예외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살짝 허탈했다. 그만큼 저작권법을 지키려는 의지가 충만했다.


책 사기 싫어서 별 고민을 다한다고 오해하실까봐 말씀드리면 나는 이미 『논어』 번역서 9종을 구입해 집에 꽂아두고 있다. 그런데도 참조할 책은 많고 그 책들을 죄다 사 모을 수는 없으니 걱정을 해봤다. 책 사보는데 돈을 아끼지 않는 편이지만 중고도서 유통이 발달하지 않은 우리나라에서는 대부분 새책만을 사봐야 하기 때문에 더 괴롭다. 발췌독하는 참고도서까지 모두 구매해야 할 수 있는 학생이 대한민국에 몇이나 될까? 이런 이유로 학생들에게는 무단 복사를 묵인하는 것이 국내외의 관행이기는 하다(학생은 봐주는 대신 사회인은 엄히 다스린다면 이 또한 문제다). 하지만 단지 관행으로 머무를 것이 아니라 저작권법 위반자를 양산하지 않는 방향으로 입법을 하는 것이 순리다.


장기적으로는 앞서 언급했던 중고도서 시장의 활성화와 더불어 대학도서관을 비롯한 공공도서관의 내실화를 꾀해야 한다 이를 통해 책을 읽고자 하는 국민들이 돈을 절약할 수 있도록 해주면서도 출판사의 수익기반도 마련하는 식으로 나아가야 한다. 우지숙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무조건적인 저작권 강화는 저작권자에게도 반드시 이익을 가져다 주지만은 않는다”라고 주창한다. 필수재보다 선택재에 가까운 저작물은 너무 규제가 심하거나 가격이 높으면 이용자들이 저작물 이용을 축소시켜버리기 때문이다. 특히 디지털 저작물의 가격에 이용자들이 수긍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지금이야 학교 도서관 전자저널 기능을 이용해 무료로 이용할 수 있지만 학술지 한 편을 학회지 사이트를 통해 다운로드받는다고 가정해보자. 『오늘의 동양사상』이라는 반년간지 제16호에 실린 글을 낱개로 모두 구매한다고 치면 49,700원(302쪽), 제17호는 51,000원(329쪽), 제18호는 44,300원(272쪽)으로 모두 오프라인 판매가 12,000원을 훌쩍 넘는다. 세 권의 1쪽 당 가격은 평균 160.82원으로 복사집의 복제 가격인 40~50원보다 훨씬 비싸다(더군다나 다운로드 가격이기 때문에 출력비는 별도로 계산해야 한다). 이래서야 이용자가 느는데 한계가 있다. 디지털 저작물의 이용자 확대는 규제만으로 해결될 사안이 아니다. 합리적인 가격에 대한 검토가 절실하다.


무녀(巫女)의 금법(禁法)이 엄하던 시기의 일이다. 장령(掌令)으로 있던 조자(趙孜)는 무녀들을 멀리 내쫓거나 집단 수용하자고 아뢴다. 세종대왕은 “무릇 법을 세우는 것은 시행하기 위한 것인데, 시행할 수 없는 법은 세울 수 없는 것이다(凡立法, 爲可行也, 不可立不可行之法也)”라고 완곡하게 거절한다(세종실록 제101권 세종 25년 9월 2일). 저작권법을 다룰 때도 이 마음가짐을 좀 배웠으면 좋겠다. 몽테스키외가 『법의 정신』에서 “무용한 법은 필요한 법을 약화시킨다”라고 역설했듯이 지킬 수 있는 법,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품게 만드는 법, 지킬수록 내게 이득이 된다고 여겨지는 법이 바로 유용한 법이다.


대한민국 저작권법 제1조를 다시 읽어본다. 이 법은 저작권자의 권리와 이에 인접하는 권리를 보호하고 저작물의 공정한 이용을 도모함으로써 문화의 향상발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 - [無棄]

Posted by 익구
:

2008년 7월 추천도서를 묻는 후배의 질문에 생각나는 대로 언급했던 책들이다. 나는 책을 손 가는대로 읽는 편이라 짜임새 있는 독서가 부족하다. 좋은 책은 나눠 읽을 수록 가치가 커질 테니 이런 식의 정리 작업을 좀 해봐야겠다.


<동양 고전>
신영복, 『강의: 나의 동양고전 독법』, 돌베개, 2004
오강남 옮김, 『도덕경』, 현암사, 1995
이세동 옮김, 『대학·중용』, 을유문화사, 2007
정민, 『다산어록청상』, 푸르메, 2007


신영복 선생님의 동양고전 강의는 원체 유명하니 길잡이 삼아 보면 좋을 듯합니다. 동양 고전 가운데 도덕경과 대학을 먼저 읽어보면 좋겠다 싶어 우선 선정했습니다. 일단 분량이 짧아서 좋거든요. 짤막한 글로 엮여졌다고 알려진 『논어』만 해도 완독하려면 생각보다 만만치 않은 분량이라 저도 몇 번 실패했습니다. 수많은 주석서 가운데 쉽게 번역되고 가독성이 높은 책 위주로 골라 봤습니다. 형이상학적 내용이 가미된 『도덕경』이 좀 어렵게 느껴지신다면 오강남 선생님이 옮긴 또 하나의 역작 『장자』를 권합니다. 1학년 국어작문(지금의 사고와 표현) 과제물로 『장자』 독후감 써냈던 추억이 떠오르네요.^^; 장자를 좀 더 꼼꼼히 읽고 독후감 개정판을 내보고 싶습니다.


『대학·중용』은 같이 합본된 경우가 많은데 중용이 알쏭달쏭하기 때문에 대학만 읽어보면 동양 정신의 정수를 맛보는 겁니다. 대학 해석을 두고 성리학과 양명학이 갈리게 되는데 잡글로 정리하려고 준비는 해놨는데 언제 완성될지는 미지수입니다.^^; 양명학이 제대로 연구되지 못했던 조선 지성계의 편협함이 새삼 아쉽네요. 사실 옛날 교육 순서대로 하자면 『소학』을 먼저 보면 좋습니다. 그냥 명심보감 같은 느낌으로 우리나라 인물을 대상으로 편집한 『해동속소학』이라는 책도 있습니다. 윤호창 선생님이 옮긴 홍익출판사 『소학』 번역본이 가장 깔끔한 듯싶습니다.


정민 선생님이 편집한 다산 정약용 선생의 어록집은 그 시도가 너무 소중하기 때문에 선정했습니다. 저는 한국 고전 국역과 더불어 선현들의 어록 혹은 언행록을 정리하는 일의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논어』 같은 어록이 우리나라라고 왜 없겠습니까. 이 책에 대해서는 상세한 서평을 써둔 게 있는데 익구닷컴에서 <더 많은 어록을 고대하며>라는 제목의 제 리뷰를 참조해주세요. 자매품(?)으로 정 선생님의 산문집인 『스승의 옥편』에 대한 리뷰도 <변화 속에 변치 않는>이란 제목으로 올려져 있습니다.^^;


<역사>
박원순, 『내 목은 매우 짧으니 조심해서 자르게』, 한겨레신문, 1999
이태진 외, 『고종황제 역사 청문회』, 푸른역사, 2005
이근우, 『고대 왕국의 풍경, 그리고 새로운 시선』, 인물과사상사, 2006
이덕일, 『시원하게 나를 죽여라』, 한겨레출판, 2008


박원순 선생님 책은 세기의 재판 이야기를 흥미롭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드레퓌스 사건에서 에밀 졸라의 활약은 배우는 사람의 자세를 곱씹게 합니다. 『고종황제역사 청문회』는 2004년에 교수신문에서 벌어진 지상 논쟁을 정리한 책인데 전문적인 서술이 많지만 한 시대를 조명한다는 것의 어려움을 엿볼 수 있어 좋습니다. 고종과 대한제국에 관해 엇갈리는 평가를 접할수록 혼란스러집니다. 고종이 제국민을 위한 제국이었다기보다 황제를 받들기 위한 제국을 원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백성의 입장에서 볼 때 대한제국의 실정은 일제의 침략에 견주어 얼마나 나았겠냐는 투덜거림에 귀가 솔깃해지죠.


그럼에도 무능한 임금과 제국주의 침략세력과의 차이가 잗다랗다고 말하기에는 찜찜합니다. 일제의 폭압적 통치는 눈감은 채 통계적 수치를 통해 식민통치의 경제적 효용을 따지려는 시도는 논리적으로 무모할뿐더러 윤리적으로도 박절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보다는 미운 정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한 때 자신들의 임금을 위해 눈물을 흘렸던 당시의 백성들이 기억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전제군주의 죽음이 독립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해서 한국 역사상 최초의 민주공화제 정부를 잉태한 역사의 아이러니가 사실(史實) 앞에 겸손해야 함을 담담히 말해주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근우 선생님 책은 역사적 기록은 얼마나 진실에 가까운 가에 대한 고찰을 하게 해줍니다. 백제 성왕의 죽음을 둘러싸고 삼국사기의 백제본기와 신라본기, 일본서기의 서로 다른 서술을 헤집는 한 대목만으로 이 책의 가치는 충분합니다. 역사적 진실이라는 것이야말로 합의되고 구성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덕일 선생님 책은 나온 지 며칠 안 되는 따끈따끈한 신간입니다. 시대에 맞선 역사의 아웃사이더를 만나보세요. 패자의 역사에서 배울 때 우리의 미래는 풍요로워지리라 믿습니다.


<사회과학>
고종석, 『코드 훔치기』, 마음산책, 2000
김만권, 『자유주의에 관한 짧은 에세이들』, 동명사, 2001
김만수, 『실업사회』, 갈무리, 2004
이정전, 『우리는 행복한가』, 한길사, 2008


제 영혼의 스승인 고종석 선생님이 새천년 전후의 사회적 이슈를 살펴본 『코드 훔치기』는 요즘도 논술 교재로 애용되고 있다고 합니다. 고 선생님의 정치적 시평 모음집도 권할 만한데 『자유의 무늬』, 『신성동맹과 함께 살기』는 짧은 호흡의 칼럼을 위주라 부담 없이 읽을 수 있습니다. 『바리에떼』라는 책에서 친일 문제에 대해 정성스레 쓰신 글이 있는데 그 명문에 보답하기 위해 저도 그 부분에 대한 서평을 쓴바 있습니다. 역시 익구닷컴 검색 기능을 통해 ‘삼일절 새벽에 읽은 <식민주의적 상상력>’을 참조해주세요.


『자유주의에 관한 짧은 에세이들』는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는 자유주의의 사상적 궤적을 고찰하는 책입니다. 대한민국에는 대기업의 자유를 옹호하는 분들이 자유주의자를 자처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리 바람직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자유지상주의자의 원조격인 미제스는 “자유주의가 인류의 물질적인 복지에 대해서만 관심을 쏟는 것은 그것이 정신적인 것들을 경멸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어떠한 외형적인 규제조치로도 인간의 가장 내밀하고 고상한 것에 도달할 수는 없다는 확신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나라의 자칭 자유주의자들은 물질적 측면을 넘어 영혼에다가 물신을 주입하려 한다는 점에서 민망합니다.


김만수 선생님은 높은 실업률이 구조조정이나 경제정책으로 인한 일시적인 문제가 아니라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 경향에 따른 필연적인 결과임을 논증하고 있습니다. 1960년대 이후 한국사회 자본구성 변화를 세밀하게 분석해 가변자본의 상대적 감소가 완연함을 입증해 보이고 있습니다. 사실 저도 아직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으나 우울한 이야기임은 확실합니다. 이정전 선생님은 행복경제학의 개념을 설파하시는데 이 책에 나오는 ‘이스털린의 역설’이 특히 인상 깊습니다. 일정한 생활수준에 다다르면 경제 성장이 개인의 행복, 사회적 후생 증가에 이바지하지 못하는 현상을 이스털린의 역설이라 일컫는데 대한민국은 이 역설이 성립하는 일정한 수준의 부에 다다랐을까요? 아직 갈 길이 멀까요?


최근 계간 <창작과 비평>에서 백낙청 선생님과 김종철 선생님이 논쟁을 나눴습니다. 전문을 찾아 읽지는 못했지만 백 선생님께서 “현시점에서 한국경제가 일정한 성장동력을 유지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진전을 위해서도 필요하다”라는 요지의 말씀을 하셨고 김 선생님을 이를 반박하셨습니다. 여하간 성장의 방향을 두고도 여러 고민이 있습니다. 저는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경제성장 생각에 빠져있지만 그 성장은 순도가 높기보다는 불순물이 많이 섞인 잡스러운 녀석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누릴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적당한 성장’이라는 개념은 사회구성원들의 합의하고 구성하는 것일 텐데 아직은 막막하네요. 박정희 방식과 다르게 경제를 운용하는 대안을 산뜻하게 제시했으면 좋겠습니다.


<시리즈물>
김영사에서 나온 <지식인마을> 시리즈 가운데 끌리는 대로 집어 잡아보세요. 두 인물을 비교 대조하는 형식인데 『사이먼 & 카너먼』, 『벤담 & 싱어』, 『공자 & 맹자』 등등 재미난 내용들이 많습니다. 개마고원에서 나온 『그림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 『그림으로 이해하는 경제사상』, 『그림으로 이해하는 현대사상』도 관심 있는 부분 찾아보면 재미날 듯싶어요. 논술용으로 펴낸 것 같은데 휴머니스트에서 펴낸 『동양의 고전을 읽는다』. 『서양의 고전을 읽는다』, 『한국의 고전을 읽는다』 시리즈도 골라 읽어 볼만 합니다. 사상 부분에 관심이 있으시면 살림출판사의 <e시대의 절대사상> 시리즈도 기획 의도는 괜찮다고 하는데 아직 제대로 읽어보지 못해 뭐라 말씀드리기 어렵네요.


<마치며>
저는 비문학 청년(?)이라 문학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미친 듯이 어려운 소설에 도전해보겠다는 분은 이남호 선생님이 해제를 단 『보르헤스 만나러 가는 길』이라는 보르헤스 선집을 읽어보세요. 저는 끝내 포기하고 말았지만 “문학작품의 의미는 텍스트 속에 있는 것도 아니고 저자의 의도 속에 있는 것도 아니고 독자의 해석 속에 있다”라는 구절만은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평론가의 시각이 아닌 우리 자신만의 자유로운 관점을 내놓는 것은 늘 두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학기 중에 쫓기듯이 누군가의 평가를 받는 것이 아니라 여유 속의 독서라면 이런저런 상상력이 만개할 것만 같습니다. 끝으로 제가 읽은 소설의 앞자리에 두는 슈테판 츠바이크의 책 한 구절을 인용하는 것으로 제 횡설수설을 마칩니다. 즐거운 방학 재미난 책과 함께 하세요.^-^ - [無棄]


지금까지 지구상에 단 하나의 종교, 단 하나의 철학, 단 하나의 세계관이 독재적으로 자리잡아본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정신은 언제나 모든 억압에 맞서서 스스로를 지키는 법을 배우고, 정해진 틀에 따라 생각하는 것, 천박하고 기력없게 만드는 것, 모두 똑같이 작게 획일화하려는 것에 대해 저항하는 법을 배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존재의 신적인 다양성을 단 하나의 분모로 통합하려는 모든 노력은 얼마나 진부하고 헛된 일인가! 주먹의 논리로 쟁취한 원칙에 따라서 인류를 선과 악, 경건한 자와 이단자, 국가에 충성하는 자와 배신자로 단순하게 흑백으로 구분하려는 노력은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
- 슈테판 츠바이크, 『폭력에 대항한 양심』, 자작나무, 1998, 23쪽


<한 줄 요약>
개권유익(開卷有益)

Posted by 익구
:

지난 세밑에 내가 몸담고 있는 대학교 반 클럽에서 선배 갑이 쓴 댓글을 삭제해주기를 청하는 후배 을의 글이 익명게시판에 올라왔다. 갑이 댓글을 통해 어느 종교에서 추앙하는 위인을 폄훼한 것이 문제의 발단이다. 1000이 넘는 조회수와 100개 가까운 댓글이 오고 간 것을 보고 뭔가 방책을 마련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을은 나를 비롯한 클럽 운영진이 문제의 댓글을 지워주기를 바란 모양이다. 하는 일 없는 부클럽장이었던 내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나는 댓글을 삭제하는 데 머뭇거린 까닭은 고학번에 대한 예우라고 밝혔다.


이와 비슷한 사안의 당사자가 누가 되었든 간에 그 분이 고학번이라면 편집권을 발동하는데 신중하게 응했을 것이다. 저학번에게는 편집권을 함부로 발동한다는 뜻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좀 더 망설였을 것이라는 뜻이다. 굳이 이런 식의 번거로운 절차를 밟으려고 한 것은 선배님들에 대한 흠모이자 머잖아 이 자리에 오를 후배님들을 위한 배려라고 여겼다. 적잖은 후배들은 나의 이런 발언을 “선배의 글이기 때문에 삭제하지 않는다”라고 받아들인 모양이다. 나는 선배가 아니라 고학번이라고 명확히 범위를 한정했다. 고학번을 개념 정의하기 나름이지만 나는 내가 속한 클럽에 종종 들러주는 고학번을 가파른 잣대로 보면 열 명이나 스무 명 남짓으로 보고 있었고 클럽 구성원들이 대체로 동감할 수치이다.


이 분들에게 우리 클럽의 손윗사람으로서 예우를 갖추는 게 특혜라고 치더라도, 그 특혜가 과도하다고 보기 힘들다. 그 특혜라는 것도 스스로 자기의 실수를 돌아볼 수 있는 여유를 주는 정도인데 말이다. 그 여유라고 해봤자 내가 논쟁이 진행되는 과정을 지켜보며 밤새 기다린 몇 시간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누군가 잘못을 저질렀다고 손가락질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하지만 그 사람에게 자신의 행동을 성찰하고 조회할 시간을 부여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몇 시간 정도 벌어진 댓글 논쟁을 보면서 갑이 교정할 의사가 없는 것을 알고 문제의 댓글을 삭제하려던 찰나에 댓글이 수정되었다. 갑이 자신의 견해를 철회할 의사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표현의 과격함을 자구 수정한 게 큰 의미가 있을까 싶기도 했지만 일단 아쉬운 대로 매듭을 지었다.


고학번이라고 할 만한 분들의 글에 대한 수정이나 삭제에 신중해야 한다는 개인적인 소견에 대한 지적이 적잖았다. 하지만 내가 “학번 불문하고 공평무사하게 게시판을 관리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면 솔직하지 못한 처사다. 더군다나 나는 고학번이라고 불리는 시점에서도 우리 클럽을 종종 드나들어주는 분들이 드물지만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 고마운 일이고 그에 대한 예우를 갖추는 게 클럽 운영진으로서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었든, 자기 필요에 의해서 들렀든 간에 그래도 잊지 않고 반 클럽을 찾아준 일 자체가 너무 반가워서 다른 관점에서 생각하지 못했음을 인정한다. 선후배 사이의 원활한 소통을 방해할지 모른다는 비판을 겸허하게 받아들인다.


그럼에도 어떤 분쟁이 발생했을 때 먼저 스스로 자기 교정을 할 여유를 부여하는 것 정도가 과도한 특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누구보다 원활한 소통을 꿈꾸는 내가 기다린 며칠, 몇 시간이 어떤 후배님에게는 참을 수 없는 시간이었는지 모르겠으나 나 또한 무척 고통스럽고 가슴 시린 순간이었음을 헤아려주시면 고맙겠다. ‘예우’, ‘특혜’라는 표현을 부러 쓴 이유는 역설적으로 나를 비롯한 고학번 선배들의 자기 책임과 자기 반성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선배된 자의 한마디가 후배들에게 어떻게 전달될 것인가’에 대한 고심을 먼저 품어주시길 바라는 마음의 다른 표현이었다고 할까.


을의 주장에 동조하는 몇몇 후배들은 갑에게 사과를 요구하기도 했다. 나는 선배를 향해 사과를 요구하는 것을 좀 자제해줄 것을 호소했다. 이유가 어찌 됐든 선배가 정색하고 후배에게 사과하는 모습은 너무 야박한 상황이 아니겠냐며 다독였다. 굳이 후배가 나서지 않아도 동기들이나 선배들도 보는 눈이 있는 만큼 서운함이 크더라도 살짝 기다려주는 건 어떻겠냐며 조심스레 말했다. 아무리 마땅하다고 여겨지는 일이라도 막상 사과까지 받아내고 나면 후배들이 그 모짊에 대한 미움이 생길까 염려스러웠다.


이러한 나의 진의와는 관계없이 사과 자제 요청에 대한 비판도 일었다. 내가 단순히 선배는 후배에게 사과를 해서는 안 된다고 단정짓지 않았음을 누구나 다 알아주실 것이라 믿는다. 나는 다만 정식적인, 공식적인 사과라는 절차는 최후의 수단으로 아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소견을 밝혔다. 사사로운 친목단체에서는 꽤 각박하게 느껴지는 절차이기 때문이다. 내 욕심이었는지 모르겠으나 상대방이 사과를 받으려고 하기보다는 당사자가 스스로 돌아보는 과정을 밟고 싶었다. 나는 지금도 몇몇 후배들이 선배를 향해 사과를 운운할 때 좀 머뭇거려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자기 실수를 인정하는 건 선후배를 떠나 누구에게나 힘든 일인만큼 조금만 넉넉하게 기다려줄 수 있으면 어떨까?


어느 선배님께서는 “손윗사람한텐 사과도 못 받는 고대의 경직성이 싫다”라는 댓글을 달아주셨다. 선배님께서는 “선배가 후배한테 이러쿵저러쿵 하는 경우는 조언인데 후배가 선배한테 이러쿵저러쿵 하는 건 버릇없단 이야길 듣”는 것이 온당치 않다고 말씀하셨다. 전적으로 동감하는 바이고 그런 분위기를 없애기 위해 앞으로도 노력할 것이다. 그렇지만 ‘비판’과 ‘사과 요구’는 동일선상에 놓고 재기는 힘들 듯싶다. 다시 말해 비판을 수용하는 것과 사과 요구를 실행하는 건 다소 차원이 다른 문제다. 비판할 때는 한 번 생각하고 제기해도 되지만, 사과를 요구할 때는 세 번 정도는 생각해야 한다.


『장자』에 “저자에서 남의 발을 밟으면 미안하다고 사죄하지만, 동생이 형의 발을 밟으면 따뜻한 눈길로 보아주면 되고, 자식이 어버이의 발을 밟았을 때는 아무 말이 없어도 된다”라는 구절이 있다. 유가의 예는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숭상하지만, 진정한 예는 유별나게 따지고 가리는 것이 아니라는 도가의 입장이 녹아 들어가 있다. 사과마저도 필요 없는 관계가 이상적이라고 설파하지만 무조건 꿈결같은 상황만은 아닐 게다. 더욱이 사과 요구를 표현하는 것도 서로의 관계에 대한 신뢰와 친근함을 나타내는 수단으로 작동할 여지도 있다. 또한 선배가 나의 비판이나 사과 요구를 받아들일 만한 아량이 품었다고 믿는 것이 그 사람에 대한 예우일 수 있다.


그러나 친교 모임에서 정식적인, 공식적인 사과란 절차는 최후의 수단으로 아껴 쓸 때 효용이 커진다고 본다. 사과는 자발적으로 해야 빛나고, 사과 요구는 공인(公人)에게 먼저 건네야 한다. 따지고 보니 이렇게 ‘사과 요구’를 두고 말이 길어진 연유는 내가 생각하는 ‘사과’에 대한 개념 정의가 다소 엄격했기 때문이다. 1991년 4월 헌법재판소는 사죄광고 제도가 타인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믿지 않는 자에게 본심과 다르게 깊이 사과하도록 강요하는 것이므로 인간 양심의 왜곡과 굴절이자 이중인격 형성의 강요라고 정의하며 위헌 결정을 내렸다. 반성을 강제할 수 없다는 결정을 접하며 많은 영감을 얻었다. 헌재의 결정문 일부를 발췌해봤다(89헌마160).


그러므로 양심의 자유에는 널리 사물의 시시비비나 선악과 같은 윤리적 판단에 국가가 개입해서는 안되는 내심적 자유는 물론, 이와 같은 윤리적 판단을 국가권력에 의하여 외부에 표명하도록 강제받지 않는 자유 즉 윤리적 판단사항에 관한 침묵의 자유까지 포괄한다고 할 것이다. 이와 같이 해석하는 것이 다른 나라의 헌법과 달리 양심의 자유를 신앙의 자유와도 구별하고 사상의 자유에 포함시키지 않은 채 별개의 조항으로 독립시킨 우리헌법의 취지에 부합할 것이며, 이는 개인의 내심의 자유, 가치판단에는 간섭하지 않겠다는 원리의 명확한 확인인 동시에 민주주의의 정신적 기초가 되고 인간의 내심의 영역에 국가권력의 불가침으로 인류의 진보와 발전에 불가결한 것이 되어 왔던 정신활동의 자유를 보다 완전히 보장하려는 취의라고 할 것이다.


더 나아가 살피건대 원래 깊이 “사과한다”는 행위는 윤리적인 판단·감정 내지 의사의 발로인 것이므로 본질적으로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자발적인 것이라야 할 것이며 그때 비로소 사회적 미덕이 될 것이고, 이는 결코 외부로부터 강제하기에 적합치 않은 것으로 이의 강제는 사회적으로는 사죄자 본인에 대하여 굴욕이 되는 것에 틀림없다. 사과의 정도에 따라 굴욕감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적어도 “사과”의 문구가 포함되는 한 그것이 마음에 없는 것일 때에는 당사자의 자존심에 큰 상처요 치욕임에 다름없으며, “사과문”, “진사문”, “해명서” 등 어떠한 명목의 것이든 관계없이 그러하다.


헌재의 결정으로 비추어 볼 때 유독 방송사에만 강요하고 있는 ‘시청자에 대한 사과’ 조치는 위헌일 가능성이 크다는 견해도 있고, 헌재의 결정이 언론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고찰이 부족해 약자인 피해자의 권리 구제를 소홀히 만든다는 비판도 들린다. 여하간 헌법 제19조는 “모든 국민은 양심의 자유를 가진다”라고 하여 양심의 자유를 기본권의 하나로 보장하고 있다. 헌법이 보호하는 양심의 자유는 선하고 올바른 판단만을 보호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덜 선하고 덜 올바른 내심마저 보장하는 것이 양심의 자유의 고갱이다. 양심에 거슬려 사과를 못하겠다는 사람에게 양심을 탑재하라며 구박한다면 헌법정신과 어긋나는 행동이다.


2004년 탄핵 정국 당시 “잘못이 있어 사과하라면 사과할 수 있지만 잘못이 뭔지 모르겠는데 시끄러우니까 사과하고 넘어가자는 건 받아들이기 어렵다”라는 요지의 발언을 했던 노무현 대통령은 결국 탄핵소추까지 당했다. 앞서 공인을 향해 먼저 사과를 요구하자고 했던 것은 상대적이고 제한적인 맥락에서 한 말이다. 명예나 체면을 중시하는 한국의 문화나 정서를 모두 부인할 수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사과 권하는 사회를 단숨에 고치기 힘들다면 사적 영역에서 사과를 받아내고픈 열망을 눅이는 대신에 공적 영역으로 눈을 돌려봄직하다. 그렇다고 공인들의 양심이 덜 소중하다는 건 아니다. 공인인 만큼 자기 반성을 더 바지런해야 하고, 자기 반성을 하다 보면 사과 또한 먼저 하게 되는 경우가 많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을 따름이다(과연?).


정리하자. 미안할 때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건 아름다운 덕목이다. 강제적인 사죄광고는 위헌 결정을 받았지만 자발적인 의사에 따른 사죄광고는 지금도 얼마든지 많이 이뤄진다. 나는 후배가 선배를 향해 사과를 요구하는 것도, 동기가 동기에게 사과를 요구하는 것도, 선배가 후배에게 사과를 요구하는 것도 신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번 사건의 시발점이 된 갑의 불관용이 너무 안타까웠지만 불관용에 대한 불관용은 수정 및 삭제 조치 등으로 충분하다고 본다. 갑의 사과 혹은 유감 표명은 갑의 자유의사에 맡기는 게 기본원칙이라고 믿는다. 끝끝내 사과를 거부하는 자세를 칭찬하는 건 결코 아니지만 말이다. - [無棄]


<참고문헌>
김욱, 『그 순간 대한민국이 바뀌었다』, 개마고원, 2005, pp. 39~53
박성철, 『헌법 줄게 새법 다오』, 이매진, 2007, pp. 26~35
윤진수, “謝罪廣告制度와 民法 제764조의 違憲 여부-憲法裁判所 1991.4.1.宣告, 89헌마 160決定(判例月報 250호 64면 이하)-”, 『사법행정』 제32권 제11호, 한국사법행정학회, 1991, pp. 73~89
윤철홍, “명예훼손과 원상회복: 사죄광고를 중심으로”, 『비교사법』 제10권 3호, 한국비교사법학회, 2003, pp. 2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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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련설과 관련 현판

문화 2008. 12. 18. 21:23 |

이번 학기 교양한문 강의에서 염계(濂溪) 주돈이 선생의 애련설(愛蓮說)을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애련설을 여러 번역본을 참조해 제 취향대로 번역하고 연꽃의 특성을 묘사한 부분은 약간의 주석을 달아보았습니다. 서울 시내 궁궐에는 애련설을 출전으로 삼아 현판을 지은 경우가 두 가지 있는데 번역문 말미에 관련 글과 사진을 부기했습니다.


<애련설(愛蓮說)>

수륙에 자라나는 초목의 꽃 가운데 사랑할 만한 것이 매우 많다.
水陸草木之花, 可愛者甚蕃.
수륙초목지화, 가애자심번.  
 

진나라의 도연명은 유독 국화를 사랑했다.
晉陶淵明獨愛菊.
진도연명독애국.


당나라 이래로 세상 사람들은 모란을 매우 사랑했다.
自李唐來, 世人甚愛牧丹.
자이당래, 세인심애목단.


나는 연꽃이 진흙에서 나오지만 그것에 물들지 않고,
予獨愛蓮之出於淤泥而不染,
여독애련지출어어니이불염,
* 予獨愛蓮之는 “나는 연꽃이 ~하는 점을 홀로 사랑한다”라고 해석해 可遠觀而不可褻玩焉까지 이어지는 연꽃의 특징을 나열한 뒤에 마지막으로 풀어주는 것이 자연스럽다. 出於淤泥而不染은 군자가 세속과 타협해 더럽혀지지 않음을 비유한다.


맑은 잔물결에 씻기었지만 요염하지 않으며,
濯淸漣而不夭,
탁청련이불요,
* 맑은 내면을 가지고 있지만 겉을 꾸미지 않는다. 요염하지 않다(不夭)는 남에게 잘 보이려고 치장하지 않는 행동을 의미한다고 보면 될 듯싶다. 겉은 단지 외모나 몸가짐을 가리키기보다 곡학아세하여 영달하지 않는 지조까지 포함한다. 바로 앞 出於淤泥而不染이 표상하는 태도와 비슷하게 되어 중복되는 감이 있다.


가운데는 비어있고 밖은 곧아,
中通外直,
중통외직,
* 잡된 생각이 없고 영묘하여 어둡지 않으며(虛靈不昧), 행동이 올곧다. 사욕이 없고 강직한 모습을 말한다.


덩굴지지 않고 가지를 뻗어내지 않으며,
不蔓不枝,
불만부지,
* 이익 때문에 편당(偏黨)을 지어 영달을 추구하지 않는다.


향기는 멀수록 더욱 맑고,
香遠益淸,
향원익청,
* 아름다운 덕이 멀리 알려진다. 명심보감에 “사향을 지녔으면 저절로 향기로운데 어찌 바람을 맞아 서 있을 필요가 있겠는가(有麝自然香 何必當風立)?”라는 구절이 있는데 뜻이 상통한다.


우뚝하게 말쑥이 서 있어서,
亭亭淨植,
정정정식,
* 치우치지 않고 정결하게 바른 길을 걸어나가는 당당한 풍모.


멀리서 바라볼 수는 있어도 가까이서 함부로 가지고 놀 수는 없는 것을 홀로 사랑한다.
可遠觀而不可褻玩焉.
가원관이불가설완언.
* 우러러 볼 수는 있어도 무례하게 대할 수 없는 위엄 있는 모습.


나는 말한다, “국화는 꽃 중의 은둔하는 자와 같다.
予謂, “菊, 花之隱逸者也.
여위, “국, 화지은일자야.


모란은 꽃 중의 부귀한 자와 같다.
牧丹, 花之富貴者也.
목단, 화지부귀자야.


연꽃은 꽃 중의 군자와 같다.”
蓮, 花之君子者也.”
연, 화지군자자야.”


아! 국화에 대한 사랑은 도연명 이후에 들은 적이 드물다.
噫! 菊之愛, 陶後鮮有聞.
희! 국지애, 도후선유문.


연꽃에 대한 사랑은 나와 뜻을 함께 하는 자가 몇 사람인가?
蓮之愛, 同予者何人?
연지애, 동여자하인?


모란을 사랑하는 사람은 많은 것이 마땅하다.
牧丹之愛, 宜乎衆矣.
목단지애, 의호중의.


<애련설 관련 현판>

전통 건축물의 이름이 걸려 있는 판을 현판(懸板)이라고 부릅니다. 현판에는 각 건축물의 쓰임새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궁궐 건축물에는 유교적 도덕관이 반영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문화유산을 감상할 때 그 현판에 담긴 뜻까지 살펴보면 선조들의 마음을 좀 더 느낄 수 있을 것 같네요. 현판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은 분은 문화재청에서 편집한 『궁궐의 현판과 주련』이라는 세 권 짜리 책을 참조하시면 좋을 듯합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조 15년 기사에 “봄 정월에 궁실을 새로 지었는데 검소하면서도 누추하지 않았으며,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았다(十五年 春正月 作新宮室 儉而不陋 華而不侈)”는 말이 나옵니다.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라는 말은 삶의 자세로 삼아봐도 좋겠네요. 정도전 선생도 『조선경국전』에서 “검소하면서도 누추한 지경에 이르지 않고, 화려하면서도 사치스러운 지경에 이르지 않도록 하는 이것이 아름다운 게 되는 것이다(儉而不至於陋 麗而不至於侈 斯爲美矣)”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정신이 우리 궁궐에 녹아 들어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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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애련정(愛蓮亭)입니다. 애련설 제목을 그대로 따왔습니다. 숙종 임금이 지은 애련정기(愛蓮亭記)에는 주돈이 선생의 애련설을 상당 부분 인용하면서 “나와 뜻이 같은 자는 오직 염계 선생 한 분뿐(與吾同志者 其惟濂溪一人而已乎)”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는 연꽃도 좋지만 자신이 지탱할 만큼의 빗방울을 머금고 나면 미련 없이 비워내는 연잎의 모습도 닮고 싶습니다. 선의 아름다움과 간결미로는 한국 최고의 정자라는 평가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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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에 있는 향원정(香遠亭)입니다. 향원익청(香遠益淸)에서 따왔습니다. 경회루가 사신을 접대하는 등의 공적 공간이라면 향원정은 휴식을 취하는 사적 공간으로서 아담하고 포근한 느낌을 줍니다. 향원정으로 이어지는 다리는 연꽃 향기에 취한다는 뜻으로 취향교(醉香橋)라고 합니다. 위에서 본 애련정이 사모지붕으로 사각형이라면 향원정은 육각형인 육모지붕입니다. 우리는 육각이나 팔각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고 하네요. 그래서 향원정에는 중국풍이 살짝 느껴지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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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하건대 저는 14세기 여말선초 이전의 한국사를 주로 관심 있게 탐구하고 있어서 근현대사는 잘 모릅니다. 그런 점을 감안하시고 읽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교육과학기술부가 발표한 근현대사 교과서 수정 권고안을 놓고 다툼이 한창이다. 2010년에 제7차 교육과정이 끝나고 2011년부터 근현대사 과목은 고등학교 1학년 공통 필수과목인 역사 과목에 포함된다. 그런데도 근현대사 교과서 수정 문제를 놓고 건곤일척을 벌어지는 것이 다소 황당하다. 물론 잘못된 내용을 한시라도 가르쳐서는 안 되는 것이 맞지만 교육의 문제가 정치적 논쟁으로 확산되는 형국이다. 지난 11월 말에 이 논쟁의 한 복판에 서있으신 박효종 서울대 윤리교육과 교수님의 강의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이하 경칭 생략).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을 고찰하고 문명의 의미를 조망하는 묵직한 시간이었다.


박 교수는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했다는 식의 역사관에 동의하지 못한다고 분명히 밝혔다. 이어서 광복 이후 한국 현대사는 물질적 번영뿐 아니라 문명사적 가치에서도 성과를 거두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다원주의 사회는 여러 스펙트럼이 있음을 인정했다. 하지만 펀더멘털(fundamental)에 대한 최소한의 합의는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원주의라고 해서 모든 것이 차이 난다면 정치공동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형식의 정통성 혹은 정체성을 공유해야 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우리 국가의 형성이 잘 되었는지 여부를 논쟁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곤란하다고 선을 그었다.


결국 그의 논변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가치에 대해서는 합의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제헌헌법의 정신인 자유, 인권, 시장경제를 받아들이고 나서야 비로소 논쟁을 벌일 토대가 마련된다는 논리다. 그는 금성교과서 사례를 들며 남북합작세력을 조명하고 대한민국 정부를 불인하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으며, 이승만의 단독 정부 수립이 원죄인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한 1955년 반둥회의를 소개한 의도가 광복 후 우리가 나아갈 길이 제3세계였다는 함의를 읽었다고 술회했다. “일장기가 내려가고 성조기가 올라갔다”라는 식의 서술은 반제국주의적 민족주의라는 것이다. 이러한 흐름은 6·25 전쟁을 전체주의에 맞서 자유주의가 방어한 문명사적 의미를 누락하는 몰가치적 서술로 귀결되었다는 그의 주장이 매서웠다.


박 교수는 남북 간의 차이를 문화의 차이로 접근하려는 방식이 잘못되었다고 역설했다. 문화의 차이는 인간의 존엄성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남북의 차이는 문명과 야만의 차이라는 것이다. 그 예로 출신 성분에 따라 갖가지 차별을 받는 북한 사회에 대해 침묵하는 교과서를 언급했다. 전체주의 사회에는 사적 영역이 없는 것을 지적하지 않았다며 비판했다. 또한 북한의 농지개혁은 사적 소유권 없는 집단농장화이며 소유권이 분배된 것이 아니라 경작권에 지나지 않음을 제대로 기술하지 않은 것도 꼬집었다. 남한의 ‘유상매수 유상분배’와 북한의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두고 객관적으로 비교하지 못했다며 질타했다. 그는 문명사적 가치와 함께 가야 건강한 민족주의이며 남한 지도자의 독재를 비판하듯이 북한 전체주의를 비판해야만 건강한 국가정체성, 시민의식, 비판정신을 함양할 수 있다고 목청을 높였다.


그는 영화 <300>에 나오는 테르모필레 전투를 예로 들며 문명과 야만의 차이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묘사했다. 박 교수는 “인간은 인간 앞에 무릎을 꿇지 않는다”라고 여긴 것이 문명의 징표라고 힘주어 말했다. 시민은 이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평등하기 때문이다. 테르모필레의 전투에서 페르시아 왕 크세르크세스는 스파르타 왕 레오니다스에게 전령을 보내 항복을 종용한다. 별 소득 없이 돌아온 전령은 레오니다스와 병사들이 마주보고 서서 이야기를 나누는 광경을 보고 스파르타군을 규율 없는 오합지졸이라고 보고했다. 감히 왕을 빤히 쳐다보는 자들에게 무슨 기율이 있겠냐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스파르타가 결사항전을 하자 크세르크세스는 스파르타에서 망명을 온 데마라토스에게 자문을 구한다. 데마라토스는 “스파르타인이 두려워하는 것은 법(노모스)”이라고 말한다. 박 교수가 다른 글에서 그 발언을 좀 더 길게 인용하신 것을 발췌해봤다.


“그들은 물론 자유스럽습니다만 전적으로 자유로운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법(노모스)이라는 왕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것을 두려워하는 정도는 전하의 신하들이 전하를 두려워하는 정도를 훨씬 능가합니다. 여하튼 그들은 이 왕이 명하는 대로 행동하는데, 이 왕이 명하는 것은 언제나 한 가지, 즉 어떠한 대군을 맞이하더라도 결코 적에게 뒷모습을 보이지 말고 끝까지 자기 자리를 지키며 적을 제압하든지 자신이 죽든지 하라는 것입니다.”


박 교수가 헤로도토스의 『역사』 한 토막을 길게 인용한 것은 페르시아라는 야만에 대항했던 스파르타처럼 문명을 옹호했던 대한민국의 역사가 볼만한 것이었다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한 노력으로 보인다. 나는 북한이 야만적인 사회라는데 기꺼이 동의한다. 통일신라와 발해의 남북국 시대처럼 남북한을 바라볼 수는 없을 것이다. 북쪽 나라인 발해를 평가하기 위한 자료가 너무 부족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남쪽 나라인 신라와의 차이가 그리 크게 보이지 않는다. 다만 북한의 야만을 강조하면 할수록 야만국가는 제외하고 문명국가인 우리만이 선진화를 이룩하자는 식으로 나아갈 까봐 걱정이다. 문명 대 야만의 관점으로만 보면 우리가 지향하는 통일이 평화적인 방법보다는 요란한 파열음을 낼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북한은 야만국가임이 또렷하지만 그것을 상술하는 실익이 어느 정도일지도 따져볼 문제다. 북한의 인권문제와 남북 화해협력 사이의 균형을 찾기는 무척 어려운 일이겠지만.


여담이지만 나는 북한이 얼마나 야만적인가를 알리는데 열중하기보다는 한국 사회가 문명국을 자처하기에 너무 초라해지고 있는 현실에 더 주목하는 중이다. 취업을 위한 스펙 쌓기에 열중하는 현상이 공산주의 사회에서 당에 대한 충성을 과시하기와 비슷한 양상을 띄고 있다는 인터넷 댓글에 적잖이 공감했다. 오죽 답답했으면 그런 푸념을 했을까 싶다. 야만에 대한 경계와 문명에 대한 열망이 따로 놀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긴밀하게 잇닿는다. 민주주의와 법치주의가 조화롭게 발전하는 것이 문명의 시금석이라고 한다면 한국 사회는 얼마나 떳떳한지를 묻는 시도가 마땅히 계속되어야 한다. 이런 고민을 역사 교과서에 자세히 실을 필요는 없어도 좀 더 멋진 문명국가가 되기 위한 자기반성이 살짝 들어가는 게 좋겠다.


현대사는 역사학자 뿐만 아니라 다방면의 사람들과 소통해 합의될 만한 가치를 담아야 한다는 그의 주장이 이루어지길 희망한다. 다만 뉴라이트가 펴낸 대안교과서 필자 가운데 역사학자가 한 사람도 없다는 문제 제기는 적절하다고 본다. 근현대사가 역사학만의 영역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그 수많은 근현대사 연구자의 참여가 거의 없었다는 것은 민망한 일이다. 구색 맞추기를 위해 역사학자를 몇 명 끼워 넣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더군다나 좌편향을 문제삼는 분들이 우편향으로 달려가는 징조가 여기저기서 보이고 있다. 3억 원짜리 수면제라는 비난을 듣기도 한 서울시 교육청의 현대사 특강이 대표적 사례다. 교과서 포럼 관계자들은 이 점에 대한 성찰이 있어야 한다.


박 교수는 좌편향과 우편향은 어느 정도 용인할 수 있지만 금성교과서가 그 제한을 넘어 타깃으로 삼았다고 설파했다. 그는 교과서는 학자적 소신을 펼치는 논문이나 학술서적과는 달라서 일정 수준 검증해야 하는데 이러한 검증의 주된 잣대가 국가 정체성과 관련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설령 금성교과서의 잘못이 명백한 사실이라고 해도 그의 논설이 설득력을 얻으려면 정부나 교육 당국이 적법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벌이는 억압적인 방식에 반대해야 한다. 이는 헌법 제31조가 보장하는 교육의 전문성, 정치적 중립성에 위배될 가능성이 높다. 교과서 시장을 권력을 통해 교란시킴으로써 이 땅이 그토록 힘겹게 건사해온 시장경제의 원칙도 무너졌다. 헌법정신을 지키며 절차를 준수하고, 권력의 자의적 남용을 방지하고, 사상의 자유시장을 존중해야 문명국가이며, ‘기적의 역사’가 아닌가?


강연을 듣는 내내 “치우침으로 치우침을 치유하지는 못한다”라는 고종석 선생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사람이 하는 일에 편향이 없을 수 없지만 거기에는 절제와 금도가 있어야 한다. 정부나 교육 당국이 벌이는 일련의 행각을 사화(史禍)라고 지칭하는 분들이 있다. 절제와 금도를 넘은 사화는 또 다른 치우침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괜찮은 문명국가임을 내보이기 위해 동원하는 방법이 야만스럽다면 이것은 문명이 아니다. 역사가 정권의 전리품으로 전락한다면 이것은 문명이 아니다. 거대 언론과 정부 여당의 힘을 빌린 세력이 마녀사냥을 자행한다면 이것은 문명이 아니다. 이 정부 아래서 힘센 분들이여, 부디 역사를 그리고 문명을 외경하시길!  - [無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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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천사를 거닐다

문화 2008. 12. 2. 00:53 |

<이태 전에 전라남도 구례군에 들렀다가 매천 황현 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매천사를 찾았습니다. 매천사를 다녀온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선비정신이라는 주제로 썼던 글 조각들을 모아본 것인데 다시 봐도 어수선하네요. 이번 학기 듣는 교양한문 강의에서 황현 선생의 절명시와 맹자의 사생취의(舍生取義)를 배웠는데 서로 잇닿는 면이 있어서 예전 글을 고쳐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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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후세계를 믿지 않는다. 천국과 지옥이 있을 것 같지 않고, 극락세계와 내세도 도무지 믿기 힘들다. “한 개인의 죽음은 그 개인에게 우주의 소멸이다”는 명제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낸다. 한번뿐인 삶을 도저히 대충 살 재간이 없다. 그래서인지 치열히 살다간 선현들이 더 애틋하다.


전라남도 구례군에 있는 매천사(梅泉祠)는 최근에 지어진 건물로 그리 대단한 문화재적 가치는 없는 곳이다. 변변찮은 유형문화유산이지만 사당을 감도는 그 처연한 서정은 많은 영감을 가져다준다. 문화유산은 국보나 보물 같은 지정문화재가 많은 것으로만 우열을 가름할 수 없다. 그 자리에 걸맞은 역사성과 시대정신을 담아낼 수 있다면 제 나름의 흥미로운 역사의 숨결이 될 수 있다. 거창한 복원과 중건에만 현혹되지 말고 이런 식으로 영혼을 어루만지는 작은 문화유산들도 소중히 여기는 발상의 전환이 있어야겠다. 문화는 우아한 기품과 현란한 기교 이전에 낮고 약하고 가여운 것을 외면하지 않는 정신이다.


창의문(彰義門)을 들어서며 천지불인(天地不仁)을 생각했다. 하늘은 편애(仁)하지 않는다. 그래서 늘 무심하다. 천지는 인간세상의 훼예포폄과 흥망성쇠에는 별 관심이 없다. 누구는 더 어여삐 여기고, 누구는 더 역겹게 여기지 않는다. 내가 좀 더 잘 될 수 있게 빌고, 못된 놈이 망하기를 빌지만 천지가 이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고 야속하게 여길 필요도 없다. 이기고 지는 것은 인간의 책임일 뿐이며, 하늘은 면책특권을 내려주지 않는다. 하늘은 무심하지만 사람은 결코 무심하지 않다는 점을 믿는 수밖에 없다.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는 말을 많이 쓰지만 그 이전에 지성이면 감인(感人)이다. 지극한 정성이 사람의 마음을 바꾼다.


한말삼재(韓末三才)라 불렸던 매천 황현 선생의 탁월한 글재주보다 우리가 먼저 기억하는 건 1910년 국치를 비통해하며 남긴 절명시(絶命詩) 4수와 유서다. 유자제서(遺子弟書)에서 선비정신의 정수를 만난다. “내게는 꼭 죽어야 할 의리(義理)가 없다. 다만 이 나라가 오백 년 동안 선비를 길렀는데, 나라가 망하는 날 한 사람 죽는 이 없다면 어찌 통탄스럽지 않으랴”라는 말에 가슴이 시리다. 세상에 버릴 사람은 하나도 없지만 시세의 흐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늦게까지 제 자리를 지키는 한결같은 사람에게 더 애착이 가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문득 이 포의지사가 남겼던 『매천야록(梅泉野錄)』에 나오는 소인배가 떠오른다. 을사오적 이근택은 을사늑약이 체결되던 날 퇴궐하여 집안 사람들에게 이제 죽음을 면할 수 있게 되었다며 득의양양하게 말한다. 이 말을 듣고 있던 몸종이 “나라가 위태로운데 죽지 아니하고 다행히 목숨을 건졌다 말하는 너는 참으로 개돼지로다. 내 비록 천인이라 하더라도 어찌 개돼지의 종이 되겠는가”라고 일갈하며 집을 뛰쳐나갔다고 한다. 부끄러움의 유무가 사람을 이렇게 차이 나게 만든다. 역시 인간이 저지르는 잘못 중에 가장 끔찍한 것은 부끄러움을 잃는 것이다. 먼저 부끄러워하는 사람이 이기는 세상을 얼마나 고대해야 할까. 세상을 바꾸기 전에 스스로 바뀌는 것은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선비들의 드높았던 목청에 비하면 조선이 망할 때 그네들의 행동거지는 시시했다. 그러나 매천사에서 만큼은 조선의 절의를 추념해도 좋다. 『논어』에 “날이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歲寒然後 知松栢之後凋也)”라는 구절이 스쳐지나간다. 살다보면 선택의 순간이 온다. 고만고만한 선택지라면 제 입맛에 따라 골라잡으면 그만이지만, 삶과 죽음처럼 거대한 간극이 있는 경우에는 취사선택 앞에 하염없이 고독해진다. 매천의 죽음이 조선의 망국을 막지는 못했지만 그 같은 선비 몇 명 없었다면 조선의 최후가 얼마나 초라했을까를 상상하면 깜깜하다. 지켜야 할 원칙을 무겁게 여기고 역사를 외경하는 진짜 보수주의자들이 우리 둘레에 좀 더 늘어나길 바란다.


1947년 개성 선죽교를 방문한 백범 김구 선생은 “선죽교에 흘린 정몽주의 피, 슬퍼하는 사람들 있으나 나 결코 슬퍼할 수 없음은, 나라의 위기를 맞은 충신이 죽지 않고 살아야 할 이유가 없음이라(善竹橋頭血 人悲我不悲 忠臣當國危 不死更何爲)”라는 글을 남겼다. 하지만 제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리는 걸 손바닥 뒤집듯이 하는 사람은 없다. 절개도 좋지만 잘 먹고 잘 살고 싶다는 욕심은 얼마나 근원적인가. 그렇기에 매천이 “내가 약을 마시려다 입에서 약사발을 세 번이나 떼었다”라고 고백하는 장면은 진솔해서 슬프다. 적당히 구차하게 살려고 하지 않았던 선생의 매운 얼에 옷깃을 여민다. 차마 영악하지 못했던 사람, 끝끝내 미련했던 사람들이 사랑과 존경을 받고, 본받고 싶은 지도자가 되었으면 좋겠다.


단종의 장릉(莊陵)에는 충의공 엄홍도의 정려각이 있다. 영월호장이라는 미관말직의 엄홍도는 단종이 시해 당하자 시신을 수습해 장사 지냈다. 주위에서는 후환을 두려워하며 만류했으나 이를 뿌리치며 “의롭고 착한 일을 하다가 화를 당해도 나는 달게 받겠다(爲善被禍吾所甘心)”라고 의연히 말했다. 정조 15년 장릉에 배식단(配食壇)을 만들어 단종조의 충신들을 제향하는 것으로 잘못된 역사 바로잡기가 마무리되었다. 계유정난이 발생한 지 338년, 단종이 비명횡사한지 334년만이다. 그릇된 역사를 다잡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지 똑똑히 보여주는 사례다. 역사는 결국 올곧게 산 자의 편인지 모르나 이렇게 만날 뒷북만 쳐서는 안 될 것이다.


이웃나라 중국에도 충의지사가 많지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방효유(方孝儒) 선생이다. 명나라 3대 황제 영락제는 조카인 건문제의 황위를 찬탈한 중국판 수양대군이다. 영락제는 건문제 측근들을 무참히 제거했지만 방효유는 자신의 스승이기도 하거니와 명성 높은 대학자이기에 회유하기 위해 즉위 조서를 짓도록 명했다. 한사코 쓰지 않겠다는 방효유에게 영락제는 강제로라도 조서를 쓰게 할 작정으로 지필묵을 가져오게 한다. 방효유는 마침내 붓을 들어 무언가를 써 내려갔다. 종이에는 연적찬위(燕賊簒位, 연나라 도적이 황위를 찬탈하다)라는 네 글자만 쓰여 있었다. 영락제는 노발대발하며 방효유의 십족(十族)을 멸해 죽임을 당한 사람이 800여명이라고 한다.


조선 선비들은 방효유를 절개의 으뜸으로 삼았다고 한다. 옛 선비들의 고루한 습속까지 죄다 본받지는 않아도 견결한 정신의 상당수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상징조작에 불과하다는 핀잔을 받을만한 여지도 적잖지만 그래도 여전히 헌걸차다. 자신의 뜻을 목숨처럼 여기는 기백이야말로 선비정신의 고갱이가 아닐까 싶다. 만약 운명의 장난처럼 내가 방효유의 처지에 놓인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방효유가 제 아무리 선비정신의 고갱이를 보여주고, 지식인의 절조를 드높였다고 한들 억울한 죽음 앞에서는 죄책감이 들었을 것이다. 이런 고약한 사고실험으로 내 자신을 시험에 들게 하는 건 괴롭다. 천만다행으로 개명된 천지에 살고 있는지라 적어도 이런 무도한 경우는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며 가슴을 쓸어 내린다.^^; 그러나 입술 꽉 깨물고 ‘연적찬위’라고 써 내려가고, 민폐를 끼치지 않으면서 지인들을 북돋워주는 사람이 되기란 여전히 어렵다.


매천이 자결한 대월헌(待月軒)에 걸터앉아 역설적이게도 희망을 품는다. 현실 세계의 승리도 중요하지만 장구한 역사는 지킬 만한 가치를 지킨 사람을 마냥 외면하지 않음을 믿는다. 물들고 타협하다가도 이것만은 양보 못하겠다 싶을 때 고개를 저으며 돌아설 수 있는 내가 되도록 하자. 힘들 때는 “스스로 반성해서 정직하다면 천만인이 가로막더라도 나는 갈 것이다(自反而縮 雖千萬人 吾往矣)”라는 『맹자』 구절을 주문처럼 외우면서 말이다. 사필귀정이란 말이 나를 얼마나 더 배신할지 모르겠다.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내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사느냐이다. 부끄러울 치(恥)자 셋이면 천박함을 피한다. “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하기 어렵다(難作人間識字人)”던 매천의 절규를 깊이 간직하며 “부끄럽지 않은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다. 지조는 선비의 전유물이 아니다. - [無棄]

Posted by 익구
:

쓰고 싶은 잡글이 많지만 정리를 제대로 못하고 있습니다. 무료함을 달랠 겸 그간 여기저기에 썼던 정확한 한국어 구사를 위한 노력의 일부를 긁어 모아봤습니다. 제가 매번 이렇지는 않아요.^^;

 

<바래다 VS 바라다>
‘바래다’는 빛이 변하거나 가는 사람을 배웅하는 것을 말하며 ‘바라다’는 생각대로, 소원대로 되기를 기대한다는 뜻입니다.


<-로써 VS -로서>
‘-로써’는 도구나 기구, 수단이나 방법을 나타낼 때 쓰며, ‘-로서’는 지위나 신분, 자격을 나타낼 때 쓰입니다. ‘-로써’는 ‘-을 써서’에서 온 말이므로 ‘-을 써서’ ‘-을 이용해’ ‘-을 가지고’로 바꾸어 넣어 문장에 어울리면 ‘-로써’를 씁니다.


<이에요 VS 예요>
받침이 있을 때: -이에요/-이어요  ex) 광호형님이에요/ 광호형님이어요
받침이 없을 때: -예요, -여요  ex) 혜진누나예요/혜진누나여요


<집어넣어서 VS  집어 넣어서>
‘집어넣다’를 붙여 쓰면 ‘들어가게 하다(식순에 집어넣다)’의 의미이고, 띄어 쓰면 ‘집어서 넣다(집게로 집어 넣다)’의 의미입니다. 여기서는 집어서라는 동작보다는 삽입하다, 첨부하다의 의미이므로 붙여 쓰는 게 나을 듯합니다. 사실 좀 애매하지만요.^^;


<-이 VS -히>
‘곰곰히’ -> ‘곰곰이’, 단 ‘꼼꼼이’는 틀리고 ‘꼼꼼히’가 맞다는... ‘-이’와 ‘-히’의 용법도 은근히 까다롭지만 자주 쓰는 용례를 익혀두면 좋을 듯싶구먼. ‘-이’를 쓸 자리에 ‘-히’를 써서 틀리는 경우가 많은데 대표적으로 번번이, 틈틈이, 뚜렷이, 촉촉이, 끔찍이 등이 있다네.


<되요 VS 돼요>
되요(X) -> 돼요(O)란다. ‘되다’에 ‘-어, -어라, -었-’ 등의 어미가 결합한 것을 줄여 쓰면 ‘돼, 돼라, 됐-’의 ‘돼-’ 형태가 되지. 예를 들어 안 됀다(X) -> 안 된다(O)/ 안 되요(X) -> 안 돼요(O)가 되는데 풀어쓸 수 있으면 ‘되’로 보고, 풀어쓸 수 없으면 ‘돼’로 보면 된단다. 여기서는 ‘되어요’가 줄어 ‘돼요’로 쓰는 게 맞지. 비슷한 원리로 자주 틀리는 표현에 뵈요(X) -> 봬요(O)가 있지. 자세한 건 한글맞춤법 제35항 [붙임2]와 관련 해설을 참조해주시길.^-^


<체크 VS 첵>
우리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짧은 모음 다음의 무성 파열음 [p], [t], [k]는 받침으로 적는 것을 원칙으로 합니다. 그래서 로켓(rocket), 카펫(carpet), 도넛(doughnut), 갭(gap), 북(book), 캣(cat) 등으로 씁니다. 이 원칙에 따르면 check는 ‘첵’이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체크를 비롯해 노크, 세트, 쇼크, 히트, 배트, 메리트, 티베트, 네트, 커피 포트 등은 예외로 받침을 쓰지 않습니다. ‘첵’과 ‘췍’도 좋겠지만 오륀지인가, 어륀지가 맞다고 역설하시던 어느 분의 무지몽매함에 동참하는 건 신중해야겠습니다. 외래어 표기법은 어디까지나 우리 언어생활에서 통일성을 기하고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 만들어 쓰는 것이니까요.


<우리 반 VS 우리반>

‘우리말’이라고 하면 “외래어 대신 우리말을 쓰자”처럼 한국어를 뜻하고 ‘우리 말’이라고 하면 “교수님은 우리 말을 믿어 주신다”처럼 우리가 하는 말을 뜻합니다. 표준어는 아니지만 우리반을 飛반으로 고유명사화한다면 한 단어로 봐서 “우리반밖에”라고 쓸 수도 있겠죠. 여기서는 그냥 띄어쓰는 것으로 처리했습니다. 우리반이든, 우리 반이든 간에 오직 그것뿐임을 뜻하는 “밖에”는 붙여써야합니다. 다만, ‘~이외에도/ ~바깥’을 의미할 경우에는 “이 밖에도 또 있다" "사무실 밖에 서있다”처럼 띄어씁니다.


<걸맞은 VS 걸맞는>
나는 이런저런 글을 쓸 때 맞춤법에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다. 정확한 한국어가 아름다운 한국어가 될 가능성이 크다는 믿음 때문이다. 물론 그 정확성의 기준은 선뜻 제시하기 힘든지라 명백한 비문이나 오류를 고치는 데 그치지만. 한글 문서를 사용하면 오타의 상당 부분을 손쉽게 고칠 수 있다. ‘걸맞는’에 빨간 줄이 그어지자 나는 무의식적으로 ‘걸 맞는’이라고 띄어쓰기를 했다. 빨간 줄이 없어지니까 맞게 썼다고 생각하고 넘어 갔다. 한참이 지나 한 후배가 띄어쓰기의 의문을 제기했다. 다시 생각해보니 좀 어색해 찾아봤다.


찾아보니 ‘걸맞다’는 형용사이므로 ‘걸맞은’으로 써야 맞다. 동사의 어간에 관형사형 어미가 붙을 때는 시제가 현재이면 ‘-는’(가는 벗, 먹는 꿀), 과거이면 ‘-은(ㄴ)’(간 벗, 먹은 꿀)을 쓴다. 그런데 형용사의 어간에는 현재와 과거 시제의 구별 없이 항상 ‘-은(ㄴ)’만 붙는데, 어간에 받침이 있으면 ‘-은’, 없으면 ‘-ㄴ’이 붙는다.


형용사 ‘기쁘다’‘예쁘다’는 받침이 없으니까 ‘기쁘는 일’‘예쁘는 아이’라고 쓰지 않고 ‘기쁜 일’‘예쁜 아이’라고 쓰는 것을 생각하면 쉽다. 따라서 ‘걸맞다’도 ‘걸맞은’이 되고, ‘알맞다’ 역시 형용사이기 때문에 ‘알맞은’으로 쓴다는 것도 같이 알아두면 좋을 듯싶다. 후배 덕분에 그간 틀리게 알고 있던 표현을 고칠 수 있었다. 이런 사소한 잘못이나마 지적해주는 지인들이 있다는 건 참 고마운 일이다.


<것>1
‘것’은 의존명사이므로 앞말과 띄어 씁니다. 다만 지시 대명사인 ‘그것, 이것, 저것’과 명사 ‘날것, 들것, 탈것’ 등은 붙여 씁니다.


<것>2
스치는게 인생 -> 스치는 게 인생
'게'는 '것이'의 준말이니 띄어쓰기를 해야 한다네. 비슷한 용례로 '건(것은)'과 '걸(것을)'이 있지. '것'은 의존명사로서 앞의 어미와 띄어 쓰면 돼.


모르는∨게 없다
기쁜∨건 어쩔 수 없다
느낀∨걸 털어놓겠다


'것, 바, 줄, 수' 등과 같은 의존명사는 우리는 띄어 쓰고 있는데, 북한은 붙여 쓰고 있다고 하더군. 근데 남북 단일 어문규범 논의에서 남쪽 방식으로 띄어 쓰는 걸로 대략 합의를 봤다고 하더라고. 당분간 바뀌지 않을 모양이니 잘 띄어 쓰면 될 듯싶구먼. 되게 우습지만 전역 선물이라고 생각해주렴.^0^ 


<한잔 씩 VS 한 잔씩>
‘한잔’은 간단하게 한 차례 마시는 술이라는 의미지만 여기서는 말 그대로 1회의 의미이므로 ‘한-’과 ‘-잔’을 띄어씁니다. 아울러 수량을 나타내는 명사 또는 명사구 뒤에 쓰는 접미사 ‘-씩’은 당연히 붙여 씁니다.


한의 경우 관형사로 쓰일 경우(한 명, 한 개...) 띄어 쓰고, 하나의 명사로 쓰일 경우(한가득, 한낮, 한나절) 붙여 씁니다. 가령 한길은 넓은 길이라는 뜻으로 하나의 명사이고, 한 길은 하나의 길이라는 뜻입니다. 한번은 기회 있는 어떤 때, 잠깐/일단, 과거의 어느 때의 뜻의 단어지만(조만간 한번 봅시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한 번은 1회(回)(턱걸이를 한 번 밖에 못한다, 한 번의 슈팅찬스를 놓치다)를 뜻합니다.


‘한번/ 한 번’이 미묘한 의미 차이가 나듯이 ‘한달/ 한 달’도 차이가 나는 것인지 몰라서 국립국어원에 문의한 결과 한 달은 붙여 쓰는 경우가 없다는 답변을 받았습니다. 단위를 나타내는 명사는 띄어 쓰지만 순서를 나타내는 경우나 숫자와 어울리어 쓰이는 경우에는 붙여 쓸 수 있습니다. 예외규정의 예시로는 ‘다섯시, 삼학년’과 같이 순서를 나타내는 경우와 ‘12시, 1945년 8월 15일’과 같이 숫자와 어울리어 쓰이는 경우가 있는데 한 달’은 이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정종 VS 사케>
너는 사케를 언급하며 잘 모르는 분들을 배려해 정종이라는 용어를 썼겠지만 이제 알 만큼 알려진 만큼 청주라는 말을 써도 괜찮을 거 같단다. 정종(正宗)은 그리 바람직한 명칭이 아니라고 생각해. 정종은 일제 강점기 때 들어온 일본의 청주 상표 중 하나가 널리 쓰여 일반 명칭처럼 잘못 굳어진 것이니까. 백제 사람들이 일본에 청주 제조법을 전파했다고도 하니까 주객이 전도된 셈이야. 물론 일본은 주조 기술을 발전시켜 청주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일본 고유의 술인 사케(Sake)가 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원조라고 주장하기가 좀 머쓱하지만.


여하간 정종은 일본의 청주 상표 가운데 마사무네라고 불리는 사케의 한 브랜드일 뿐이지. 가령 한 때 진로가 수도권 소주 시장을 독점할 때 그냥 “진로 주세요”했듯이, 내가 버블에서 종종 즐기는 벨기에산 흑맥주 “레페 브라운 주세요”하는 것과 비슷한 셈이야. 일본 술 중에 예를 들자면 “아사히 주세요”하는 것과 비슷하고. 이처럼 상표명이 대표화된 예로 봉고, 워크맨, 레미콘, 미원 등이 있어. 술에서는 프랑스의 샹파뉴(Champagne) 지방에서만 생산되는 거품 나는 술인 샴페인이 보통명사처럼 쓰이고.


일본에서는 정종이 보통명사처럼 쓰이고, 정종이라는 술 브랜드가 많다고 하지만 우리가 그걸 따를 필요가 있을까 싶다. 정리하자면 정종은 일본말 마사무네를 우리 음으로 읽은 것이며, 소주나 맥주 같이 술의 종류를 나타내는 말이 아닌 브랜드명인지라 진짜 정종 상표를 마실 때만 한정해서 말하는 것이 비교적 적절하지 않을까 싶다. 그냥 청주 혹은 일본 청주라고 불러도 무방하지 않을까.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일본 국왕의 호칭 문제도 참 난감한 문제지. 일왕(日王), 일황(日皇), 천황(天皇) 혹은 덴노까지 다양한 의견이 있는데 사실 나도 헛갈린다(요즘 일본 하는 꼴을 봐서는 확 왜왕이라고 부를까도 싶지만^^;). 야채(野菜, やさい)가 일본식 용어임을 알면서도 채소(菜蔬)를 어색해 하고, 순우리말인 푸성귀나 남새는 거의 잊어버리는 현실을 보면 이름을 바로잡는 일(正名)보다 더 중요한 건 일상의 실천인지도 모르겠다. 본의 아니게 잡설을 늘어놓았어. 너그러이 헤아리시길.^-^


<뒤풀이 VS 뒷풀이>
앞으로 ‘뒤풀이’라는 표현을 많이 쓸 텐데 ‘뒷풀이’가 아니란다. 우리말 규정 가운데 사이시옷이 참 어렵지. 참고로 북한은 사이시옷을 쓰지 않는다고 해. 사이시옷 규정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한글 맞춤법 제30항과 국립국어원 홈페이지 등을 참조하면 쉽게 알 수 있을 테고, 우선은 자주 하는 실수 위주로 정리해두면 좋을 듯싶어.


‘뒤풀이’는 순우리말 ‘뒤’+‘풀이’의 결합으로 만들어진 합성어라 사이시옷이 필요할 것 같지만 뒷말의 첫소리가 된소리(ㄲㄸㅃㅆㅉ)나 거센소리(ㅊㅋㅌㅍ)가 날 때는 사이시옷을 받쳐 적을 필요가 없단다. 그래서 ‘갯벌’은 맞아도 ‘갯펄’은 틀려서 ‘개펄’이 옳은 표현이야. 이것만 알고 있어도 사이시옷을 좀 더 정확히 구사할 수 있어. 더 예를 들어보자면 ‘뒤쪽’,  ‘뒤처리’,  ‘뒤편’,  ‘뒤뜰’,  ‘위층’,  ‘위쪽’,  ‘아래쪽’은 사이시옷을 쓰지 않아. 무의식 중에 사이시옷을 넣어 쓰는 표현들이야.


‘첫째’, ‘셋째’, ‘넷째’ 정도가 예외라고 할 수 있겠구먼.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예외라고 할 수는 없어. 이 단어들은 ‘첫’, ‘셋’, ‘넷’에 접미사 ‘-째’가 결합한 파생어이므로 사이시옷과 관련이 없고, 여기서의 ‘ㅅ’은 사이시옷이 아니야. 사이시옷은 합성어인 경우에만 적용되기 때문이지. 이와 비슷한 사례로 ‘해님’과 ‘나라님’, ‘나무꾼’ 등이 있어. 이것들도 ‘-님’, ‘-꾼’이 접미사라 합성어가 아니고 파생어이기 때문에 사이시옷을 쓰지 않아.


익히 알다시피 단어에는 단일어와 복합어가 있고, 단일어는 하나의 어근으로 이루어진 말이지. 복합어에는 둘 이상의 어근으로 만들어진 단어인 ‘합성어’와 어근과 파생접사(위치로 분류하면 접두사와 접미사)로 이루어진 ‘파생어’가 있지. 사이시옷은 합성어에만 적용되는 규칙이야. 따라서 ‘해님’과 ‘나라님’은 파생어라 사이시옷을 쓰지 않지만, ‘햇볕’, ‘햇빛’, ‘햇살’, ‘나랏일’, ‘나랏돈’, ‘나랏빚’은 합성어이므로 사이시옷을 써야해. 사실 합성어와 파생어 구분은 헛갈리는 면도 많고 일일이 따질 수 없으니 이네들은 그냥 아름다운 예외로 기억해주렴.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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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이라는 것은 장차 그것으로써 행하려고 하는 바이다(學者 將以行之也)”라고 정이천(鄭伊川)은 말했다. 간명하면서도 정곡을 찌른다. ‘앎’과 ‘삶’의 숙명적인 거리를 놓고 선현들도 많은 고민을 하셨을 게다. 지와 행을 두고 벌어진 주희와 왕수인의 논변은 매력적이다. 정이천은 행동의 기초가 되는 앎을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주희 역시 제대로 알면 행하게 되며, 행하지 못하는 것은 앎이 얕기 때문이라는 입장을 취했다.


먼저 이치를 깨우쳐야 행할 수 있다는 선지후행설(先知後行說)은 직관적으로 수긍이 가는 면이 많다. 올바르게 행동하기 위해서 우선 무엇이 옳은지 알아야 한다는 견해를 반박하기는 쉽지 않다. 정조대왕 역시 주희의 견해를 좇아 “만약에 지식에 참되지 못한 바가 있다면, 실천에도 부족한 점이 있게 된다(若知有所未眞 則行有所未逮)”라거나 “배움(學)이라는 한 글자는 넓게 말하면 지(知)와 행(行)을 겸하지만, 좁게 말하면 지에 중점이 있다(學之一字 專言則兼知行 偏言則主乎知)”라고 말했다(정조대왕어록인 『일득록(日得錄)』 참조).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앎을 쌓는데 열중하느라 영원히 실천을 못하고 인생이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점에서 한계가 있는 듯싶다. 어쨌든 실천보다는 앎을 중시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시대의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지식의 습득을 강조할수록 많이 배울 여력이 있는 사대부 계급의 통치가 자연스럽게 공고해진다. 이 때문에 주자학이 체제유지적 성격을 갖고 있다고 비판받기도 한다. 배움이 깊어질 여력이 있는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사회 상층부에 좀 더 몰려있을 테니 말이다.


주자학에서도 누구나 착한 본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지만 양명학은 좀 더 적극적으로 누구나 윤리적으로 완성될 수 있다고 역설한다. 그래서 왕양명은 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을 내세우며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것은 단지 아직 알지 못한 것(知而不行 只是未知)”이라거나 “참된 앎은 행하기 위한 까닭이다. 행하지 않으면 그것을 앎이라 말할 수 없다(眞知所以爲行 不行不足以爲知)”라고 목청을 높였다. 지행합일의 참된 앎(眞知)이 발현되지 않는 것은 사욕(私慾)에 가로막힌 것이며 사욕을 배제해 지행의 분열을 극복해야 한다는 논변이다. 주자학의 관념론적 경향을 극복하기 위해 양명학은 부러 실천을 강조한 면도 적잖다.


선지후행설에 건네는 의심의 눈초리를 완전히 부인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선지후행설이 지배계급의 이익에만 복무하지 않는다면 여전히 호소력을 갖추고 있다. 지에는 지식뿐만 아니라 자신의 잘못을 조회하고 고치는 반성의 능력까지 포함한다면 선지후행이 예의 편협함을 상당 부분 덜어낼 수 있으리라. 여기다가 생활 속의 소소한 실천에 인색하지 않는 정성까지 보탠다면 선지후행설은 지행합일설과 거의 의견일치를 볼 수 있다. 이렇게까지 단서조항을 덕지덕지 달아가며 선지후행설의 불씨를 살리려는 까닭은 다원화된 사회에서는 갈등을 조정하고 합의점을 찾기 위해서라도 많이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내가 존경하는 위인 앞자리에 잠곡 김육 선생을 둔다. 잠곡은 ‘앎’과 ‘삶’의 거리를 줄여나가는 노력의 전범으로서 내게 각인되어 있다. 칠순이 넘어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대동법(大同法) 확대 실시에 일생을 걸었던 잠곡의 신념을 흠모한다. 당시 대동법 반대론자들도 공납의 폐단이 심각한 지경임을 알고 있었지만 그들은 호패법을 강화해 농민의 유망을 막자는 해법을 내놓았다. 잠곡은 백성을 통제하고 감시하는 방식으로는 결코 민생안정과 경제발전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해 호패법을 철폐하자고 주장했다. 그의 장기 비전은 한결같은 소신이 되었고, 실무파악능력은 수행력으로 뒷받침되었다.


대동법 반대론자가 권세의 눈치를 보느라 호패법을 제시했다기보다는 그네들도 자신의 생각대로 살기 위해 노력한 산물이었다. 잠곡의 삶이 선지후행인지 지행합일인지를 가르는 건 무의미하지만 굳이 따지자면 지의 문제가 좀 더 중요하게 조명될 필요는 있겠다. 대동법 찬성론자와 대동법 반대론자가 모두 지행합일에 충실했다면 그들 각각의 세계관을 조회하는데 주안점을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대동법이 보다 나은 대안이라는 것을 호기롭게 주장하자니 뒷사람의 이점을 악용하는 것만 같아 스스럽다. 그 시대에 놓였을 때 대동법을 주창할 혜안이나 용기를 갖추는 건 생각만큼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도 대동법과 호패법의 맞섬은 어느 정도 결론을 내릴 수는 있다. 실제로는 비율과 조합의 문제에 봉착하는 경우가 많다. 도덕적인 가치판단에는 어느 정도 합의 가능한 부분이 넓지만 정책적인 가치판단에는 합의하기 힘든 구석이 많다. 가령 선지(先知)에 가까운 경제학자들이 벌이는 논쟁 가운데 인플레이션과 실업 사이의 선택 문제가 있다. 효율성 측면에서 볼 때 인플레이션이나 실업이 자원배분을 왜곡하거나 자원낭비를 유발한다는 건 또렷하다. 하지만 공평성 측면에서 살피면 판단 내리기가 어렵다(이영환·김진욱, 『경제학 강의』, 율곡출판사, 2007. 참조).


실업은 전체 인구의 일부에 해당하는 문제이지만 인플레이션은 모든 국민이 겪는 문제이므로 인플레이션 퇴치를 우선하는 것이 공평성을 충족하는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반면에 인플레이션의 증가보다는 실업률이 증가하는 것이 빈곤율을 더 상승시켜 피해가 저소득층에 집중되게 만들므로 이에 대한 처방이 더 중요하다는 견해가 있다. 후자의 견해로 대표적인 학자가 앨런 블라인더(Alan Blinder)인데 그는 『단단한 머리, 부드러운 가슴(Hard Heads, Soft Hearts)』라는 책에서 인플레이션이라는 감기를 치료하기 위해 (높은 실업률이라는) 뇌수술 받는 건 어리석다고 질타했다.


블라인더는 인플레이션을 낮추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경기침체는 소득분배를 악화시키기 때문에 공평성을 해친다고 봤다. 경미한 인플레이션을 수용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 블라인더는 공직에 나가서도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 부의장을 역임하면서 그린스펀 의장과의 마찰을 빚어 18개월만에 사퇴했다. 블라인더가 옹호하려고 했던 공평성과 인플레이션 중시론자들이 건사하려 했던 공평성 사이에는 얼마나 큰 간극이 있는 것일까? 양측의 지식과 행동에 우열을 가리는 건 가능한가?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다 보니 조금 억지스럽더라도 ‘앎’과 ‘삶’의 관계를 두 갈래로 봐야하는 건 아닐까 싶다. 도덕적인 실천의 문제에서는 지행합일이 좀 더 맞고, 사회현상에 대한 정견은 선지후행이 좀 더 적합하다. 잠곡이나 블라인더의 사례를 보니 정책은 지행합일을 금과옥조로 내세우기 곤란하다. 두 영역이 매끄럽게 나눠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너무 헛갈려서는 곤란하다. 지행합일이 요구되는 곳에서 지를 핑계되며 미적거리고, 선지후행이 있어야 하는 곳에서 행이 급하다며 사려 깊지 못한 행동을 하는 건 모두 경계할 일이다. 칸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행동 없는 지식은 공허하고, 지식 없는 행동은 맹목적이다(언뜻 보면 지행합일을 논하는 것 같지만 뜻빛깔에서 차이가 난다).


고작 이런 이야기나 늘어놓으려고 쓸데없이 끼적였다. 알기도 너르게 알아야하고, 살기도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무미건조한 한마디나 읊조린다. - [無棄]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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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잊혀져 가고 있지만 내게는 여전히 생생하다. 현직 의경이 전의경 제도 폐지를 위한 농성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접하고 기분이 묘했다. 입만 살아 움직이는 내가 습관처럼 말하던 전의경 제도 폐지 주장과는 차원이 다른 무거움이 느껴졌다. 입으로 사는 사람과 몸으로 사는 사람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 모든 것을 몸으로 살아낼 수는 없으니 입이 필요한 때가 있다며 자기방어를 발동하기는 하지만...^^;


인터넷을 돌아다니다 이길준님을 두고 군복무 부적응자가 소영웅주의에 빠져 미사여구를 늘어놓았다고 폄하하는 비난 댓글을 보며 마음이 허전했다. 내 또래인 이 청년이 자신의 행동이 낳을 후폭풍을 짐작하지 못했을리 없다. 법 어기는 걸 우습게 아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 상층부에 더러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나 같은 소시민은 국법의 지엄함을 잘 알고 있다. 범법자가 되는 멍에를 감수하면서까지 이길준님이 지적하려고 했던 문제에 대해 고민을 나누는 것이 좀 더 슬기로운 모습이다. 제 삶의 주인이 되기가 이렇게 어려운 나라라면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이다.


사실 내가 무엇을 특별히 주장했다기보다는 오는 2012년 전의경 제도를 폐지하고 단계적으로 경찰공무원으로 대체하기로 한 지난 참여정부 시절의 결정을 지지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이명박 정부가 그 때의 결정을 번복하려고 하고 있어 안타까워하는 수준이었다. 박종달 병무청장은 9월 17일 국회 국방위에 출석해 “2011년까지 전·의경을 (매년) 1만2천명 수준에서 유지(배정)하는 방향으로 결론이 났다”라며 전·의경 제도 폐지 방침을 백지화했다. 이명박 정부가 끝내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을 보면 쇠고기 정국에서 그랬듯이 앞으로도 전의경을 정권 안보의 방패막으로 삼을 모양이다.


이러한 우려가 착착 현실로 바뀌고 있는 시점에서 이길준님이 정성껏 쓰신 양심 선언문의 전문을 꺼내 읽는다. 비장미로 흐르기보다는 낙관적인 자세가 묻어나는 글을 보니 이런 것이 마음을 담은 글의 힘이구나 싶다. “내 결정이 우리 사회를 훨씬 풍부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라는 이길준님의 말씀은 오래도록 큰 울림이 될 것 같다. 문득 “각성은 그 자체로서 이미 빛나는 달성”이라는 최순영 전 의원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각성이 그리 대단하고 어려운 개념이 아니라고 한다면 이길준님이 보여준 행동도 각성의 범주에 넣을 수 있으리라.


내가 이런 식의 각성만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이길준님은 국가의 폭력을 성찰하는 각성을 했지만 군복무를 통해 자신이 몸담은 공동체의 가치를 도두보고 자신의 삶을 검속하는 방편으로 삼는 각성도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다. 나는 그 각성들 사이의 우열을 가리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다만 이길준님의 각성은 사회적으로 용인되기가 힘들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매도하지는 말자 정도의 해명을 보태고 싶을 따름이다. 대한민국이 국방일보에 늘 등장하는 훈훈한 미담 사례만으로 넘쳐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공적인 발언을 통해 알리는 분들도 있다면 이 땅이 좀 더 윤택해진다고 믿는다.


특정한 각성만을 강요하고 칭찬하는 건 한 사회의 구성과 유지를 위해 불가피한 측면이 있겠지만 그 불가피성을 이유로 남발될 때 나는 얼마나 반대의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 앞으로 우리 사회가 더 발전한다면 이런 식의 다채로운 각성이 만개할 텐데 나는 얼마나 귀담아 들을 수 있을까? 존 스튜어트 밀이 『자유론』 제2장에서 이미 설득력 있게 논증했듯이 단 한 사람의 의견이라도 제약한다면 의롭지 못할 뿐더러 이롭지 못하기까지 하다. 교정의 대상이 아닌 교류의 대상으로서의 각성이 우리 사회를 풍요롭게 만든다고 확신한다. 나도 그 풍요로움에 모래 한 알만큼이라도 보태길 희망한다.


민감한 사안이기는 하지만 우리 사회가 “이런 각성도 있을 수 있겠구나” 하며 넉넉하게 접근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실정법에 어긋나는 각성을 마주칠 때 엄정한 처벌을 수행하는 정성을 조금 여투어서 처벌의 근거가 튼실한지를 따져보는 것도 중요한 시민의식의 하나가 되어야 한다. 사회적으로 공인된 각성을 옹호하는 분들이 좀 더 넉넉한 태도를 보여주시길 바란다. 우리네 민주주의가 고양될수록 이러한 넉넉함은 권장사항에서 의무사항에 가까워질 것이다. 가령 경찰 행정의 공백을 막기 위해 전의경 제도의 존치가 불가피하다고 여기는 분이 다수파고 전의경 제도가 헌법에 위배된다고 생각하는 분이 소수파라면 다수파가 좀 더 절제와 경청의 미덕을 보여야 한다. 이러한 다수파의 노력은 언젠가 소수파로 전락했을 때도 자신의 의사를 존중받는 든든한 보험으로 작동할 것이다.


내가 그리는 ‘각성’은 전통을 긍정하고 상식을 존중하되 관행에 얽매이지 않고 권위에 주눅들지 않는 용기다. 사람 마음이 매끄럽게 나눠지지는 않겠지만 용기에는 여러 무늬가 있고 그것들이 어우러질 때 진정한 힘을 발휘한다고 생각한다.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오래간다(窮則變 變則通 通則久)”라는 『주역』 구절이 그 모델이다. 나와 다른 생각을 열린 자세로 듣는 양적 변화를 쌓는 것이 첫 번째 용기, 양적 변화가 축적되어 질적 변화로 나아가 새로운 생각을 품는 것이 두 번째 용기, 그 질적 변화로 말미암아 자신이 딛고 있는 곳을 티끌만큼 바꾸는 게 세 번째 용기로 삼아볼 수 있겠다(후배 정태에게서 많은 영감을 얻었음을 밝힌다). 세 번째 용기는 이내 첫 번째 용기와 잇닿는다. 특히 애써 귀 기울이지 않으면 잘 안 들리는 소수파나 약자의 목소리를 좀 더 챙겨 듣는 것도 첫 번째 용기를 키우는 훌륭한 방편임을 유의해야 한다.


여하간 이런 식으로 각성이 세 가지 용기를 통해 구현된다고 하더라도 사람마다 편차가 있게 마련이다. 정조대왕은 총명함이 발현하는 ‘속도’보다 총명함을 유지하는 ‘지속도’가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끝끝내 지키는 사람이 위기지학(爲己之學, 자아실현을 위한 학문)을 하게 된다”라는 말씀이다(『일득록』 「문학」2). 각성도 마찬가지로 속도보다는 지속도에 좌우된다. 정조대왕이 “일시적으로 빼어난 재능은 한순간 사람들을 놀라게 할 뿐”이라고 지적했듯이 각성 또한 섬광처럼 스쳐 가는 순간으로 그친다면 둘레의 감동을 자아내지 못한다. 순간의 호기로움으로 그럴싸한 말을 늘어놓고, 짧게나마 그 실행을 위해 동분서주하기는 쉽다. 하지만 평생에 걸쳐 자신이 지녔던 아름다움을 가꾸는 건 지극한 수고로움이 따른다. 각성은 눈부시지만 그 빛남은 혜성이 아니라 항성이어야 마땅하다.


얻어먹는 밥에 연연하는 식객의 삶보다는 땀 흘려 개척하는 주인의 삶을 선택한 이길준님을 응원한다. - [無棄]


<추신>
이번에 알게 된 내용인데 독일, 스웨덴, 덴마크, 네덜란드, 벨기에, 남아공, 슬로베니아 등의 나라에서는 군인노조라는 것도 존재한다고 한다. 물론 모병제 국가에서 직업군인들이 결성한 조직이겠지만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상상력을 넓혀볼 좋은 소재였고 참신한 경험이었다. 하기야 지난 7월 말 서울시 교육감을 우리 손으로 직접 뽑을 수 있게 된 것도 여러 상상력이 결합되어 나타난 산물일 게다.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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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의 불법에 대한 혐오는 정말 놀랍다. 근친증오라는 말이 떠올랐다면 실례가 되려나? 헌법이 보장하는 국민의 기본권을 분쇄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시는 분들이 법치주의를 무력화하는 시도를 용납하지 않겠다고 호기롭게 말씀하시니 민망하다. 이 분들이 요즘 불법집회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손해배상청구를 쉽게 하기 위한 집단소송제를 도입하겠다며 벼르고 있다. 지난 6월 이명박 대통령은 촛불집회의 인파를 보고 “뼈저린 반성을 했다”라며 고개를 숙였다. 그 반성은 법치를 바로 세우겠다는 아름다운 목표를 내거는 것으로 구현됐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대통령의 법치는 평평하다기보다는 기울어진 듯싶다. 이 법치는 시위에 나선 시민들이나 쟁의에 돌입한 노동자에게 더 엄정하게 적용될 공산이 크다. ‘편향된 법치’는 형용모순이다.


시위 집단소송제는 임지봉 서강대 교수가 지적했듯이 집회나 시위가 불법인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이 사전에 명확하지 않다는 문제점이 크다. 시민들에게 자신이 참여한 집회나 시위가 불법일지도 모른다는 자기 검열 혹은 검속을 하게 만드는 것이 이 입법의 주된 목적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집회·시위의 자유를 침해하면서 이룰 건전한 시위문화는 그리 탐스럽지 않을 게다. 자유와 권리를 부여하고 나서 책임과 의무를 요구하는 것이 마땅한데 본말이 전도된 느낌이다. 현행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이 야간 집회를 원천적으로 불허하고 있다는 점에 대한 일말의 고민도 찾아보기 힘들어 아쉽다.


참여연대 공익법 센터의 논평을 통해 “우월적 지위에 있는 국가나 대기업의 불법행위를 견제하기 위한 제도이지, 돈도 없고 우월적 지위에 있지도 않은 사회적 약자로서의 권리를 주장하는 시민들에게 수십억, 수백억원의 위협성 민사소송이나 제기하라고 있는 제도가 아니다”라고 밝혔다. 약자의 권익을 지키기 위한 제도로 고안된 집단소송제가 국가 권력의 또 다른 통치수단으로 전락할 우려가 있다. 더군다나 한나라당은 현행 증권관련 집단소송제 등에 대해서는 재계의 반발을 걱정한 탓인지 미온적인 태도를 보여 이중적인 잣대를 드러냈다. 불법집회에 대한 피해 구제를 하겠다는 본래 취지보다는 정권에 반대하는 시도를 징벌하겠다는 욕망만이 퍼덕거린다. 김용철 변호사는 “<PD수첩> 수사하듯, 삼성을 수사했더라면 아마 우리 사회가 많이 달라져 있을 게다”라고 푸념했다. 법이 가진 자와 힘센 자의 손아귀에 맴돈다는 탄식이 묻어난다.


공부를 잘할 수 있다는 믿음을 학업 효능감이라고 부르고, 성공적으로 도전과제를 마칠 수 있다고 여기며 자기 능력에 대한 신뢰하는 것을 자기 효능감이라고 부른다. 이 개념을 응용해서 정치적 효능감이나 정책 효능감 같은 말도 쓴다. 우리 사회에서 이런 효능감들 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법치 효능감(constitutional efficacy)’이 아닐까 싶다. 법을 지키면 나에게 이익이 되고, 법이 나를 보호해줄 것이라는 푸근함 같은 감정 말이다. 슬프게도 대한민국의 법을 좌지우지하는 자리에 있는 분들은 ‘법치 효능감’을 다른 맥락으로 이해하고 있으신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선진 민주주의 나라에서 찾아보기 힘들다는 시위 집단소송제를 제정하려 하겠는가. 정부 여당이 기획하는 법치 효능감을 모든 사람이 골고루 나누기 힘들겠다는 불안감이 점점 커진다.


입법부와 행정부는 다수 국민의 지지에 따를 수밖에 없는 다수파기관의 성격을 지닌다지만 시위 집단소송제가 다수의 견해를 좇은 것인지는 불명확하다. 다수파기관이면서도 다수의 국민이 무엇을 원하는지에 귀 기울이지 않는 기이한 현상이다. 여하간 마지막으로 비빌 언덕은 비다수파기관이라고 불리는 사법부다. 일전에 노회찬 전 의원은 “법은 만명한테만 평등하다”라는 제목으로 책을 냈다. 만인에게 평등한 법이 아니라 만명에게 평등한 법이라는 지적이 매섭다. 앞으로도 행정부와 입법부는 자신들이 정의한 법치 효능감에 입각해 각종 법안을 쏟아낼 것이다. 이를 일차적으로 견제하는 힘은 사법부다. 사법의 정치화나 사법적극주의에 대한 논란이 적잖다. 적어도 사법부가 지금보다는 더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편에서 정치적 결정을 내리고 적극적 행동을 했다면 지금처럼 법치 효능감이 낮지는 않았으리라. - [無棄]


입법부나 행정부와 같이 그 구성과 존립이 다수국민의 지지 획득 여부에 달려있는 기관을 다수파기관이라 부른다. 입법부의 국회의원이나 행정부의 대통령은 선거에서 재선되기 위해 항상 다수국민이 무엇을 원하는가에 신경써야 한다. 그러나 사법부는 삼부 중 유일하게 ‘선거’를 치르지 않고 ‘임명’되는 비다수파기관이다. 따라서 다수국민의 의사에 신경 쓸 필요가 없고, 오히려 다수국민의 목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는 소수자의 목소리에 귀기울이고, 잘 조직화되지도 대표되지도 못하는 약자의 이익을 판결을 통해 획기적으로 구현해 나갈 수 있는 태생적 장점을 가진다.
- 임지봉 서강대 법학과 교수, [목요일언]약자 및 소수자의 법률가 中, 법률신문 2006.09.01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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