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성이 능력이다4

경제 2007. 11. 6. 03:56 |

<도덕성이 능력이다>는 총 5부작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순서대로 읽으셔야 하지만 따로 읽으셔도 무방합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A는 Amorality의 약자로서 도덕성에 문제가 있는 지도자를 지칭하는 가상의 인물입니다. 대선 끝날 때까지 틈틈이 수정할 계획이니 퍼가지 말아주세요.^0^


4. 사회자본과 수기치인


정치학에서 사회자본의 개념을 대중화시킨 퍼트남(Robert D. Putnam)은 “사회자본을 상호간의 이익증진을 위한 조정과 협조를 용이하게 하는 네트워크(network), 규범(norms), 사회적 신뢰(trust)와 같은 사회조직의 특성”으로 정의한다. 이탈리아의 남과 북은 반세기가 넘도록 동일한 민주정치와 지방자치제도 아래에서 운영되어 왔음에도 사회 문화의 발전 수준의 차이가 컸다. 퍼트남은 선진국 수준에 다다른 북부에 비해 낙후성에 머무른 남부와의 차이를 축적된 사회자본의 격차로 설명한다. 수평적 질서에 기초한 신뢰와 협력을 중시하는 시민정신이 발달한 북부에 비해 남부는 수직적 질서에 따른 질서와 명령, 복종과 불신이 자리잡았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는 신뢰와 사회자본을 거의 동일한 의미로 사용했다. 그는 “한 국가의 복지와 경쟁력은 하나의 지배적인 문화적 특성, 즉 한 사회가 고유하게 지니고 있는 신뢰의 수준에 의해 결정된다”라고 주장한다. 신뢰는 거래비용을 줄이고 분업과 협동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에 고신뢰 사회일수록 번영하게 된다는 논리다.


최근 사회자본의 긍정적 효과를 조명한 연구들이 쏟아지고 있지만 아직 명확한 개념 정의가 되어 있지 않은 실정이다. 상호협력을 기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분모를 이루지만 사회자본을 구성하는 항목들에 대한 학자들의 설명은 통일성이 없다. 2000년 브라질에서 열린 세계 경영경제학회에서 사회적 자본의 4대 구성요소로 신뢰성(trust), 진실성(integrity), 단결성(solidarity), 개방성(openness)을 꼽았다. 다소 애매하게 번역된 진실성은 원칙을 준수하는 의지 및 능력을 뜻한다. 이렇게 대체로 합의된 개념을 깨우치더라도 사회자본이 경제발전의 독립변수인지에 대한 실증적 연구가 모호하다는 문제가 남는다. 사회자본이 경제발전의 원인이 아니라 경제발전으로 인하여 사회자본이 형성될 여지도 배제하기 어렵다. 특히 산업혁명 시기를 고찰해보면 부의 축적과 자본주의 발달이 시민사회 활성화와 사회자본 축적을 낳았다는 설명도 일리가 있다. 사회자본은 경제발전의 상호변수이거나 심지어 종속변수일 가능성도 있다(허철행·허용훈, “한국 사회자본 형성의 한계와 전망”, 『한국행정논집』 제19권 제1호, 한국정부학회, 2007, pp. 151~170).


이런 험담에도 불구하고 물적자본, 인적자본과 더불어 사회자본의 중요성은 커지고 있다. 저출산과 투자부진으로 인적자본과 물적자본의 한계에 봉착한 한국에서는 사회자본에 대한 관심이 더 크다. 사회자본은 한번 형성되면 장기간 지속되는 특성을 갖기 때문에 꾸준한 관심을 요구한다. 더군다나 한국 민주주의 공고화라는 틀에서 정치문화의 중요성은 증대되고 있다. 사회자본의 형성은 정치문화의 발전에 기여하기 때문이다. 사회자본은 서구의 맥락에서 지나친 개인주의의 폐단을 극복하고 공동체적 관심을 환기하느냐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한국의 사회자본은 서구의 정치문화와는 다른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연고주의나 정실주의의 잔재를 안고 있는 한국은 투명하고 정의로운 공적 영역을 만드는 과제를 우선해야 한다. 한국은 과도한 개인주의를 우려하기 이전에 지나친 권위주의, 국가주의를 걷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낮은 신뢰도에 허덕이는 국회, 정당, 정부에 대한 제도개혁을 모색할 때다. 다양한 계층의 국회 진출에 바탕을 둔 대표성의 확충, 정당의 책임성 강화로 말미암은 정당일체감 고양, 정부 정책의 일관성 확보와 대민 응답성 제고 등의 방안들이 있으리라.


이쯤에서 A의 존재를 고찰해보자.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쯤 되는 직선 대표라면 빼어난 능력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공동체의 이해 갈등 조정이다. 이를 좀 더 원활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가 가운데 하나가 윤리성이다. 지도자의 도덕성도 사회자본인 셈이고 이를 통해 국민들이 좀 더 승복하도록 유도한다. 보다 근본적인 물음은 능력이라는 게 앞서 살펴본 사회자본의 개념의 난립과 마찬가지로 명확히 측정 가능하기 힘들다. 능력의 실체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능력이 발효되는 데 시차가 있다면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한 또 다른 기제가 있어야 하는데 그 대표적인 게 바로 도덕성이다. ‘탈도덕 현상’의 심각한 부작용으로 예상되는 건 ‘비지지자 신뢰도’다. A가 다수의 지지를 얻어 권력을 행사할 때 비지지자 집단이 강한 불신을 나타낸다면 정책 추진력이 반감될 가능성이 높다. 복수의 A가 난무하는 상황이 되면 정치 냉소주의는 심화되고 그들만의 민주주의가 고착화되는 절망적인 상황이 도래할지도 모른다.


나는 수기치인(修己治人, 자신을 다스린 후에 남을 다스린다)을 전략적으로 차용하는 아이디어를 제안한다. 다른 표현으로는 내성외왕(內聖外王)이라고도 부른다. 서구의 리더십은 윤리성에 대한 고찰이 부족하다. 한국은 종래의 리더십 이론을 버리고 서구의 능률적인 기술자(technician)에 천착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지도자의 도덕성을 중시하는 정신은 우리 사회의 오랜 전통이었다. 유학에서는 개인의 도덕적 학문적 자기완성의 정도에 따라 정치활동의 범위가 점차 확대된다고 봤다. 유학의 입장에서 볼 때 논리적으로도 수기는 치인에 선행한다. 『대학』의 8조목인 격물치지성의정심(格物致知誠意正心)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가 순차적인 점진주의다. 개인의 윤리적 각성을 시발점으로 하여 그 점차적 확산을 꾀해야 한다는 유가의 가르침이다. 혹자는 정치가의 도덕적 수양에 몰두한 나머지 치인보다 수기에 치중한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유교 내지는 주자학은 수기적 행위에 치열하면 할수록 그것은 동시에 치인적 행위에도 치열한 것이 된다고 인식했다. 도덕성이 높으면 높을수록 현실적 정치능력을 보유하게 된다. 다시 말해 도덕성이 곧 능력이라는 것이다(안외순, “『동호문답(東湖問答)』에 나타난 율곡 이이의 초기 정치사상”, 『유교사상연구』 제28집, 한국유교학회, 2007, pp. 125~154). 


수기치인의 현대적 복원으로 ‘탈도덕 현상’을 누그러뜨려 볼만하다. ‘탈도덕 현상’의 이분법을 거부하고 도덕과 능력의 유기적 통합으로 ‘도덕력(道德力)’을 창출해야 한다. 현실과 유리되지 않고 현실 속에 추동하는 ‘도덕력’이야말로 전통을 창조적으로 계승하고, 오늘날의 사회자본 패러다임에도 부합하는 개념이 아닐까 한다(완전 자화자찬^^;). 『논어』에서 “제 자신이 바르면 명령하지 않아도 행해지고, 제 자신이 바르지 못하면 비록 명령한다 하더라도 따르지 않는다(其身正 不令而行 其身不正 雖令不從)”고 했다. 또 “진실로 제 자신이 바르다면 정치에 종사하는 게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제 자신을 바르게 하지 못한다면 어찌 남을 바로잡겠는가(苟正其身矣 於從政乎何有 不能正其身 如正人何)?”라는 말씀도 있다. 일전에 김진표, 김병준 두 분의 교육부총리의 자녀가 외국어고에 다닌 것이 문제가 된 적이 있다. 외고는 평준화 교육의 근간을 흔든다며 야멸친 언사를 늘어놓던 분들이 자녀는 외고에 보낸 행태를 위선이라 여기고 서운한 감정을 느낀 국민이 많았다. “지금 집을 사면 낭패를 면치 못할 것”이라는 무서운 말씀을 하셨던 이백만 전 청와대 홍보수석은 정작 자신은 강남 아파트를 구입한 것으로 밝혀져 빈축을 샀다.


『맹자』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맹자의 제자 진대(陳代)가 스승에게 제후를 만나도록 권했다. 자존심 좀 굽히고 찾아가는 건 한 자를 굽히는 작은 일이지만 왕도의 사업을 이룩하는 건 여덟 자를 펴는 큰 일이라는 구실을 내세웠다. 맹자는 한 자를 굽혀 여덟 자를 펴는 이해타산적인 생각을 한다면, 두 자도 굽히고, 석 자도 굽히다가 종국에는 여덟 자를 굽혀 한 자를 펴는 것도 이롭다는 명분으로 자행하게 될 것이라고 대꾸한다. 벼슬이 탐나 양심을 속이고 예법을 어겨서는 안 된다는 맹자의 논리를 강고한 도덕주의를 대변한다. 내가 주창한 ‘도덕력’은 이렇게 가파른 경지를 원하지 않는다. 현행 법을 준수하면서 한 자를 굽혀 여덟 자를 펼 수 있다면 긍정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도덕력’이 좀 더 실천적인 관념이 되려면 입신양명하려는 개인의 욕구와 공익의 실현을 조화롭게 추구하기 위한 방안을 보강해야 한다. 여하간 맹자는 이 대목에서 “자기를 굽히는 사람이 남을 곧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枉己者 未有能直人者也)”라고 촌철살인을 날린다. 공명을 위해 정도를 굽혀 남에게 굴종하는 자세를 칭하나 의역을 해서 “자기가 올바르지 않다면 다른 사람을 정직하게 만들지 못한다”고 해석해 봄직하다. ‘도덕력’의 고갱이는 남 탓이 아닌 자기 탓을 먼저 하는 자책(自責)의 일상화인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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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성이 능력이다3

경제 2007. 11. 6. 03:56 |

<도덕성이 능력이다>는 총 5부작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순서대로 읽으셔야 하지만 따로 읽으셔도 무방합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A는 Amorality의 약자로서 도덕성에 문제가 있는 지도자를 지칭하는 가상의 인물입니다. 대선 끝날 때까지 틈틈이 수정할 계획이니 퍼가지 말아주세요.^0^


3. 윤리경영, 부패, 신뢰


한국이 1996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으로 가입한지 11년째다. 1996년부터 2005년까지의 통계를 보면 우리나라의 평균 경제성장률은 아일랜드(7.2%), 룩셈부르크(4.9%)에 이어 4.3%로 OECD 회원국 중 3위다. 국내총생산(GDP)도 1996년 5474억달러에서 2005년 7875억달러로 41.3% 늘어나며 OECD 회원국 중 9위에 올랐다. 수출은 2005년 2844억달러를 기록해 1996년의 1297억달러에 비해 119.3%나 증가했다. 외형은 커졌지만 OECD 회원국과 비교한 순위는 크게 바뀌지 않은 것으로 보이나 경제규모가 상위권임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노동시간, 사회보장비 등 삶의 질은 최하위권이었다. 연간 근로시간도 1996년 2648시간에서 2004년 2423시간으로 줄긴 했으나 여전히 OECD에서 가장 많다. GDP 대비 사회보장비 지출은 1996년 1.8%에서 2002년 4.6%로 늘었으나 26위에 머물렀다. GDP 대비 조세부담률은 1996년 19.7%에서 2002년 19.8%로 거의 변화가 없고 27위를 유지하고 있다. 2002년 기준 공교육비 지출은 23위에 그쳤으나 사교육비 지출은 1위를 차지했다. 2005년 전체 의료비 지출은 낮은 수준이나 본인 부담률은 47%로 미국(55%), 멕시코(55%), 그리스(57%) 다음으로 4번째로 높았다. 여기에다 자살률과 저출산율은 최고 수준이다.


2003년 초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 인수위원회는 최종보고서에서 우리나라의 GDP대비 사회보장비 지출이 OECD 30개국 중 29위라며 복지후진국임 밝히며 복지, 여성, 환경, 문화, 주거 분야에 투자를 높이겠다는 의지를 밝힌 바 있다. 하지만 정부의 사회적 기능을 강화하는 것을 골자로 작성한 ‘비전 2030’에 대한 다각도의 비판으로 말미암아 큰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참여정부의 복지예산(사회복지·보건 분야) 증가율은 전체 예산 증가율보다는 높은 수준이나 국민의 정부 때에 미치지 못했다. 국민의 정부 때 복지예산은 1997년 21조원에서 2002년 37조9400억원으로 연평균 16.1% 증가했다. 이에 견주어 참여정부의 복지예산은 2002년 37조9400억원에서 2007년 61조3800억원으로 연평균 12.4% 증가했다. 결국 ‘비전 2030’으로 표상되는 대한민국 미래상을 놓고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한 탓에 정책 표류가 이어진 셈이다.


도덕성과 능력의 상관관계를 명확히 드러내는 연구 결과는 아직 없다. 하지만 윤리적 기업에 투자하는 것이 투자수익률이 더 높다는 것을 주장하는 사회적 책임성 투자( Socially Responsible Investing, SRI)이론에서는 몇 가지 실증 연구가 있다. 미국에서 ‘다우존스 공업지수(Dow Jones Industrial Average)’는 뉴욕증권거래소 상장사 중에서 선정된 30개 회사의 주가의 평균변동을 말한다. 다우존스 공업지수는 1976년~1989년의 13년 간 174% 증가하였다. 여기에 비해서 ‘윤리적인 기업’ 30개를 선정하여 조사한 ‘착한 기업 공업지수(Good Money Industrial Average)’는 같은 기간에 647% 증가하였다고 한다. 대기업 및 중소기업 1,000개 중에서 윤리수준이 높은(사회적 책임성이 있는) 400개 회사를  선정하여 작성한 평균주가지수인 ‘사회지수’와 S&P사 선정 500개 회사의 평균지수를 1983∼1988년 사이 비교한 결과, 1983년에 1,000달러를 투자하였다면 사회지수 수익률은 164.7%이었는데 비해 S&P 500개 회사의 투자수익률은 101.7%이었다고 한다(이종영, 『기업윤리』, 삼영사, 2007).


또 미국의 경제전문지 포춘(Fortune)이 선정하는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10대 기업’들의 주가수익률은 2001년의 경우 평균 9.7%로 S&P 500의 평균치인 -11.9%를 훨씬 상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1996~2001년까지의 주가수익률의 경우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10대 기업’은 25.6%로 나타나 S&P 500의 10.7%에 비해 두 배 이상을 상회하였다(이건희 외, 『윤리경영론: 21세기 기업 생존의 핵심 키워드』, 학문사, 2004). 윤리경영이 기업성과를 크게 악화시킨다는 연구 결과는 찾아보기 힘든 점으로 볼 때 윤리경영은 장기적으로 기업의 시장가치를 높인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2001년 미국의 엔론 사태가 벌어지기 직전까지만 해도 5년 연속 포춘이 선정한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10대 기업이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개중에 이런 쭉정이가 있기는 해도 윤리경영이 모든 기업의 기본 신조가 되고 있음은 또렷하다. 요즘은 많이 나아져 가고 있다지만 한국기업의 주식이 상대적으로 저평가되는 현상을 코리아 디스카운트(Korea Discount)라고 부른다. 기업의 투명성 및 책임성과 관련된 기업지배구조 위험이 가장 큰 원인이라는 지적이 많다. 매력 있는 기업이 되려는 노력은 시간과 돈이 남아서 하는 일이 아니다. 결국 기업의 안정과 경쟁력 확보를 위함이다.


국내에서도 전국경제인연합회가 2003년 1월 발표한 2001년 기준 국내 30대 그룹 소속기업을 대상으로 기업윤리와 기업가치 및 성과간의 관계 분석 결과가 있다. 이에 따르면 전담부서를 설치해 윤리경영을 적극 실천하는 기업의 1999년~2002년 주가상승률은 평균 46.3%를 기록했다. 윤리헌장만 제정한 기업의 16.1%, 윤리헌장 미제정 기업의 22.1%의 주가상승률을 크게 상회한다. 또 윤리경영 전담부서를 설치한 기업의 1998~2001년 매출액영업이익률은 평균 10.3%를 기록해 그렇지 않은 기업의 평균치인 7.3%보다 40% 이상 높았다. 전담부서 설치기업은 주식시장 상승할 경우 주가상승폭이 시장평균을 훨씬 웃돌았으며 하락할 경우에도 하락폭이 다른 기업군의 절반 정도에 그쳤다(가령 2002년에 종합주가지수는 9.5%가 빠졌으나 이들 전담부서를 설치한 기업은 오히려 10.2%가 뛰었다). 그런데 윤리경영 전담부서 없이 윤리헌장만을 제정한 기업과 윤리헌장 미제정 기업간의 주가상승률이나 매출액영업이익률은 거의 차이가 없거나 윤리헌장을 제정하지 않은 기업이 오히려 높게 나타났다. 이는 윤리헌장 제정만으로는 부족하고 전담부서 등을 통해 적극적인 노력을 해야 투자자와 소비자의 신뢰를 얻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국제 반부패 NGO인 국제투명성기구(Transparency International, TI)가 발표한 2007년 부패인식지수(Corruption Perceptions Index, CPI)에 따르면 한국은 10점 만점에 5.1점으로 조사 대상 180개국 가운데 43위를 기록했다. CPI란 공무원과 정치인 등 공공 부분이 어느 정도 부패했는지에 대한 민간 부분의 인식 정도를 지수화한 수치다. 해당 국가에 거주하는 기업인이나 전문가를 대상으로 공공부문과 정치부문의 뇌물을 포함한 각종 부패 내용을 설문 조사하여 얻은 자료를 토대로 작성한다. 점수가 낮을수록 부패가 심하다는 뜻인데 한국은 OECD 30개국 평균 7.18에 훨씬 못 미치고 순위도 25위로 2계단 하락했다. 아시아에서는 싱가포르(9.3, 4위), 홍콩(8.3, 14위), 일본(7.5, 17위), 마카오와 대만(5.7, 34위)에 이어 말레이시아와 함께 6위를 기록했다. 2006년 우리나라 교역 규모는 6349억달러로 세계 12위, 국내총생산(GDP)은 8874억달러로 세계 13위인 것에 비추어 민망한 수치다.


한국은 4.29점(1995), 5.02점(1996), 4.29점(1997), 4.2점(1998), 3.8점(1999), 4.0점(2000), 4.2점(2001), 4.5점(2002), 4.3점(2003), 4.5점(2004), 5.0점(2005), 5.1점(2006), 5.1점(2007)의 추이를 기록하고 있다. 2005년에는 조사 대상 159개국 중 40위였고, 2006년에는 163개국 중 42위였다. 2005년 5점대에 진입한 이후 답보 상태를 보이는 셈이다. TI 한국본부는 “2001년 부패방지법 제정, 2002년 부패방지위원회(현 국가청렴위원회) 설립, 2005년 투명사회협약 체결 등 하드웨어적 성과를 거뒀으나 이를 뒷받침하고 내용을 채우는 일에서 뚜렷한 진전을 보이지 못했다”라고 지적했다. 사슬의 강도는 가장 약한 부분에서 강도가 결정 나게 마련이다. 다른 부분이 아무리 굵어도 한 군데가 약하면 사슬은 툭 끊어지게 된다. 한 국가의 능력이 반드시 사슬의 법칙을 따르지는 않겠지만 경제 지표의 우수성을 바래게 하는 약한 연결고리를 강화해야 하는 건 자명한 일이다. 부정부패가 줄고 공정한 경쟁과 평가가 이루어질 때 경제성장 혹은 국민소득이 상승이 진정한 효과를 낼 것이라고 본다.


2006년 12월 한국개발연구원(KDI)의 ‘사회적 자본 실태 종합조사’ 보고서는 우리 사회의 불신 실태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불신을 0점, 신뢰를 10점이라고 했을 때, 국회 2.95점, 정당 3.31점, 정부 3.35점, 지자체 3.89점, 검찰 4.22점, 법원 4.29점, 경찰 4.48점, 노동조합 4.61점, 대기업 4.68점, 군대 4.85점, 언론기관 4.91점, 시민단체 5.41점, 교육기관 5.44점이었다. 응답자의 70%가 ‘공직자 2명 중 1명은 부패하다’고 생각하고 있고 60%는 ‘정부 공직자들이 중요 정보를 별로 또는 전혀 공개하지 않는다’고 답변했다. ‘공직자들이 법을 거의 지킨다’고 생각한다는 사람은 5%에 불과해 공직자에 대한 불신이 심각한 수준이다. 공공기관 뿐만 아니라 사람에 대한 신뢰도 낮아 평균 4.8점으로 나타났다. 공식적인 조직인 직장·학교의 동료에 대한 신뢰도는 6.5점, 비공식 조직인 동호회·단체 신뢰도는 6.0점이었고 처음 만나는 사람에 대한 신뢰도는 4.0점이었다. KDI는 이 같은 수치는 선진국에 비해 상당히 낮은 수준이라고 설명했다.


놀라운 점은 국회, 정당, 정부, 지자체에 대한 신뢰도는 전혀 모르는 사람을 만났을 때 신뢰도인 4.0점에도 못 미친다는 결과다. 저신뢰는 필연적으로 고비용을 유발한다. 서로 믿지 못하기 때문에 감시 및 통제 비용을 더 많이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국회의 입법과정이나 정부의 정책수행에 대한 불신은 법치에 대한 불신과 정책에 대한 반발을 낳을 공산이 크다. 요 근래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사회적 대타협을 모색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더 많은 투자와 고용 창출, 복지국가를 얻기 위해 재벌에게 경영권 보호를 양보하는 사회적 대타협을 이루자는 주장도 들린다. 아일랜드나 북유럽 등지에서 만들어낸 사회적 대타협 방식을 우리도 추진해보자는 고민은 동감할 만하다. 하지만 우리네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은 많이 부족한 상태다. 우리나라 국민이 선진국이라고 느끼지 못하는 결정적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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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성이 능력이다2

경제 2007. 11. 6. 03:55 |

<도덕성이 능력이다>는 총 5부작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순서대로 읽으셔야 하지만 따로 읽으셔도 무방합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A는 Amorality의 약자로서 도덕성에 문제가 있는 지도자를 지칭하는 가상의 인물입니다. 대선 끝날 때까지 틈틈이 수정할 계획이니 퍼가지 말아주세요.^0^


2. 도덕성과 능력의 상관관계


네덜란드의 일화 하나는 언제 반추해도 신선한 충격이다. 로테르담 시장으로 재직하면서 16년 동안 한국돈으로 4백 만원의 판공비를 착복했다는 혐의로 내무장관직에서 물러난 페퍼 전 시장의 존재가 무겁게 다가온다. 입만 열면 대가성이 없었다는 핑계를 대는 우리네 풍토와는 너무 다른 세상이다. 사스키아 스티벨링 감사원장은 이에 대해 “액수의 문제가 아니라 공직자에 대한 신뢰의 문제”라고 답했다. 네덜란드 공직자의 이런 자세는 도덕성과 능력은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는 판단에 기인한 것이다. 오늘날 한국의 현실은 더 퇴행적이라 부끄럽다. 이중적 윤리 잣대가 횡행하는 건 기본이고, 최고 지도자 (후보) 평가에 대한 관대화 경향은 끔찍한 정도다. 이러한 이중성과 관대화는 ‘탈도덕 현상’을 확대 재생산한다. 여기서는 도덕성과 능력의 상관관계에 대한 탐구에 집중하면 될 듯싶다. ‘탈도덕 현상’의 핵심 논리는 도덕성과 능력의 낮은 상관관계이며, 능력에 가중치를 부여하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탈도덕 현상’은 열악한 삶의 질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키기 위한 유능한 지도자를 지향한다. 개혁이나 민주주의에 대한 염증을 토로한다. 참여정부는 출범 초부터 깨끗하고 정통성 있는 정부라는 자의식이 충만했다. 정부의 도덕적 자부심은 그 자체로 큰 자산이었고, 소수파 정부로서의 약점을 보완하는 기제로 작동했다. 마키아벨리는 결과는 가치나 동기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고 역설하며 결과적 선(善)을 옹호했다. 이러한 비도덕주의(amoralism)은 정치를 도덕과 종교로부터 분리해냈다. 막스 베버는 이러한 마키아벨리의 도덕관을 상당 부분 계승했다. 그는 『소명으로서의 정치』에서 신념의 윤리(Gesinnungsethik)와 책임의 윤리(Verantwortungsethik)를 제시했다. 신념윤리(혹은 심정윤리)는 행위의 결과가 아니라 행위자의 심정, 의향에 도덕적 가치를 둔다. 선에서는 선만이 생겨나고 악에서는 악만이 생겨난다고 믿고, 동기가 선하면 주어진 행위는 그 결과에 상관없이 선하다고 본다. 이에 반해 책임윤리는 인간의 평균적인 결함을 계산에 넣는다. 달리 표현해 세계의 윤리적 비합리성(die ethische Irrationaliaet der Welt)을 고려해서 행동한다. 동기의 선함보다는 결과의 선함을 더 중시하며 예측 가능한 결과에 대한 개인적인 책임을 진다는 특징이 있다.


베버는 신념윤리를 따르는 사람은 나쁜 결과가 나올 경우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지 않고 세상이나 타인의 어리석음에 돌린다고 평한다. 이에 반해 책임윤리는 인간의 불완전성을 사려 깊게 궁리한다고 표현하기 때문에 두 가지 윤리의 개념 정의에서 베버의 의도적 편향을 엿볼 수 있다. 베버는 신념윤리와 책임윤리는 절대적으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둘이 서로 도와야 비로소 정치의 소명을 지닐 수 있는 참된 인간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베버는 신념윤리는 무책임이 아니며, 책임윤리가 무신념하지 않다고 말하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신념윤리를 평가절하하고 정치인은 책임윤리를 함양해야 한다는 쪽이다(류지한, “베버의 가치 철학에서 책임윤리와 합리성의 한계”, 『철학논총』 제29집, 새한철학회, 2002, pp. 179~203). 도덕성 시비에 휘말린 후보를 응원하는 쪽에서는 뜬금없이 책임윤리를 꺼낸다. 참여정부는 신념에 함몰되어 무책임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책임윤리를 설파했던 베버도 두 윤리를 양자택일할 수 있다고 생각지는 않았다. 설령 그가 책임윤리에 올인했다고 하더라도 그건 자신의 편의에 근거한 개념 정의에 힘입은 결론이다. 행위의 결과를 절대적으로 무시하는 정치는 존재하기 어렵고, 자신의 비전(심정)도 없이 결과를 향해 매진하는 정치 또한 상상하기 힘들다.


신념윤리와 책임윤리는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하느냐, 수단이 목적을 정당화하느냐 정도의 논쟁이 있을 뿐 이 둘을 엄밀하게 구분하는 건 실익이 없다. 선심성 행정을 비판하는 논거로 책임윤리 명제를 가져다 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남발해서 외칠만한 소리는 아니다. 설령 베버의 논리를 오롯이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A가 책임윤리의 적격자라는 견해가 도출되지는 않는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경제성장이라는 목표에 투신해야 한다는 건 어찌 보면 신념윤리와도 제법 닮았다. 신념윤리의 대표적인 사례로 기독교적 가치관을 든다. 산상수훈(山上垂訓)을 연상시키는 절대윤리의 그림자가 경제대통령 담론에 짙게 드리워져 있다. 이러한 메시아주의는 신념윤리의 부정적 측면이다. A가 책임윤리의 적임자인지는 모르겠으나 그에 대한 묻지마 지지는 책임윤리를 지향하는 태도는 아니다. 책임윤리는 결과로써 승부하는 것이다. 메시아를 옹위하려는 의도가 지나쳐 성과 평가에도 선택적 잣대를 들이대지는 않을까 염려스럽다. 모든 문제를 떠나서 A가 예측 가능한 결과에 책임을 지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지는 도덕성 여부에 관계없이 검증할 문제다.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책임윤리로 ‘탈도덕 현상’을 설명하는데는 한계가 있다. 그러면 조조의 인재 기용 방식인 ‘유재시거(唯才是擧, 능력만이 추천의 기준이다)’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건안 15년(210년) 조조는 명을 내려 “만일 반드시 청렴한 선비가 있어야만 기용할 수 있다면, 제나라 환공(桓公)은 어찌 천하를 제패할 수 있었는가!”라며 “오직 재능만을 천거하는 것이 옳으니, 나는 그런 자를 쓸 것이다”라고 말한다. 건안 19년(214년)에는 “품행이 바른 인물이라고 해서 반드시 진취적인 것이 아니고, 진취적인 인물이라고 해서 반드시 품행이 바른 것은 아니다”라며 유능한 인재가 버려지지 않기를 당부했다. 조조는 능력만 있으면 도덕성이 모자라도 기용하겠다는 의지를 가졌다. 물론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억울한 누명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진일보한 의미도 품고 있지만 그의 신하 중에 권모술수에 강한 인물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결국 사마의의 쿠데타로 위나라는 망하게 된다. 인재난에 시달리던 촉나라의 인재 기용 방식을 정확히 알기는 힘들지만 제갈량의 출사표에서 간접적으로 유추해볼 수 있다. 그가 후주 유선에게 신하를 추전하며 “착실하며 뜻과 헤아림이 충실하고 순수하다”“성품과 행함이 선량하고 공평하다”“곧고 믿음직해서 절개를 위해 죽을 만하다”라고 평한다(김재웅, 『제갈공명의 도덕성 우선의 리더십』, 창작시대, 2002).


위와 촉의 국력 차이를 볼 때 서로 다른 인재 채용이 어떤 기능을 했을지 가늠하기는 힘들다. 하나 분명한 것은 평생 청렴했던 제갈량이 단지 재능만으로 그만한 공적을 쌓은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조조의 유재시거(唯才是擧)가 도덕성과 능력이 낮은 상관관계를 입증하지도 않는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고 나니 ‘탈도덕 현상’의 근원을 탐구하는 게 무익하게 느껴진다. ‘탈도덕 현상’은 어떤 논리체계를 가진 실체라고 보기 멋쩍다. 그렇다면 현재의 정치지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A를 대체할 만한 대안세력의 부재가 가장 큰 원인일 수 있기 때문이다. A의 반대세력에 대한 불신이 팽배한 상태에서는 유일한 선택지로 지목된 A에 대한 방어심리가 기형적으로 발현될 공산이 크다. 슬프게도 광신으로 불신을 치유하지는 못한다. 거품(bubble)은 반드시 터지게 마련이다. ‘탈도덕 현상’은 이제 신뢰의 문제로 옮겨가야 한다. 그래야 좀 더 생산적인 논의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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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성이 능력이다1

경제 2007. 11. 6. 03:53 |

<도덕성이 능력이다>는 총 5부작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순서대로 읽으셔야 하지만 따로 읽으셔도 무방합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A는 Amorality의 약자로서 도덕성에 문제가 있는 지도자를 지칭하는 가상의 인물입니다. 대선 끝날 때까지 틈틈이 수정할 계획이니 퍼가지 말아주세요.^0^


1. 탈도덕 현상


17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괴이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현재 지지하고 있는 대선 후보가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을 경우 계속 지지할 것인가를 묻기 시작했다. 개인적으로 그런 조사를 처음 접한 것은 9월 9일 실시한 MBC 여론조사였는데 도덕성에 결함이 있더라도 자질이 뛰어나면 지지하겠다는 응답이 54.7%였다. 최근에는 아예 특정 후보 관련 의혹이 사실로 드러났을 경우 계속 지지하겠느냐고 묻기도 한다. 이런 식의 여론조사가 홍수를 이루면서 결과는 들쭉날쭉하지만 대개는 도덕성에 흠결이 있더라도 능력이 있으면 계속 지지하겠다는 답변이 우세하다. 도덕성에 대한 평가는 낮지만 국정운영 능력에 대한 기대는 높은 것으로 나오는 후보도 있다(SBS 10월 21일자 여론조사). 과연 윤리적 문제에 너그러운 지지층을 충성도가 높은 집단이라고 보는 것이 온당한지 궁금하다. 사기업도 윤리경영을 하겠다고 나서는 판에 공직을 맡겠다는 분들이 능력만 있으면 그만이라며 뽐내는 건 마땅한 일인지 혼란스럽다.


문화일보 10월 30일자 여론조사에 따르면 차기 대통령을 선택하는 최우선 선택기준으로 ‘경제성장 해결 능력’이라는 응답이 57.1%로 압도적이었다. 15.9%로 2위인 ‘빈부격차 해소 능력’도 크게 봐서는 경제문제라고 볼 수 있다. 도덕성은 3위인 12.1%를 기록했다. 동아일보 11월 5일자 여론조사에서도 ‘차기 대통령이 가장 역점을 둬야 할 분야’(2개 복수응답)라는 물음에 경제성장(76.3%)이 사회복지(27.0%), 실업문제 해결(25.2%)에 비해 높았다. 도덕성과 관련한 부패척결(16.0%)은 4위에 그쳤다. 사실 외환위기 이후 거의 모든 여론조사에서 경제성장 관련한 요구가 1위를 놓친 적이 없다. 어떤 후보가 국민의 높은 기대만큼 경제분야에 유능한가를 검증하는 건 내 능력 밖이다. 문제삼고 싶은 건 도덕성의 결함에 너그러운 여론조사 결과다.


나는 도덕성과 능력은 별개의 문제라는 주장, 국가 지도자의 도덕성을 그리 중요한 요소로 보지 않는 견해를 통칭하여 ‘탈도덕 현상’, 혹은 좀 더 부정적으로 ‘탈도덕 사태’라고 부르길 제안한다. 나는 ‘탈도덕 현상’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후퇴시킬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적 특수성이라고 주장하기에는 현대 선진 민주국가와는 너무 동떨어진 사고방식이다. 대다수 선진국들은 도덕성을 넓은 의미의 국가 지도자의 능력으로 보고 있다. 도덕성이 국민의 신뢰를 얻어 정책의 추진력을 높이는 원동력이라는 통설에 공감한다. 문민정부가 국민의 정부가 임기 말 대통령 아들들의 비리 문제로 도덕성에 상처를 입고 레임덕 현상에 빠졌던 것을 반추해본다. 혹자는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사례들 들지도 모르겠다. 92년 미국 대선 당시 클린턴 후보가 내건 선거구호인 “문제는 경제야, 이 멍청아!(It’s the Economy, Stupid!)”를 들려주고 싶으실 게다. 앞으로 논의의 편의를 위해 도덕성에 문제가 있는 후보를 A(Amorality의 약자쯤 되겠다)이라고 부르자. A는 어디까지나 가상의 인물이며, 누구나 될 수 있다. A의 도덕성 문제를 인지하고서도 그를 지지하는 유권자가 상당수 있다고 가정하자.


A의 도덕성 문제를 알면서도 지지하는 분들은 탄핵 역경을 딛고 높은 직무 수행 지지도로 임기를 마친 클린턴의 전례를 추억한다. A가 경제를 살려서 자신의 불안하고 찜찜한 기분을 덜어내기를 바라는 듯싶다. 물론 클린턴 시대 미국의 경제는 호황이었고, 재정적자 감소와 사회보장제도 개혁에서도 긍정적인 성과를 거뒀다. 그는 재선에 성공했으나 1998년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성추문에 휩싸여 도덕성에 큰 타격을 입었다. 클린턴은 98년 12월 위증 및 증거은폐 등 2가지 혐의로 하원에서 탄핵안이 가결됐으나 99년 1월 상원에서 부결됐다. 클린턴의 행실에는 많은 미국인이 언짢아했으나 사생활의 문제일 뿐 정치의제가 되는 것은 곤란하다는 입장이 적잖았다. 클린턴이 탄핵 위기에 처했던 이유는 부적절한 관계 때문이 아니라 국회에서의 위증 혐의였음을 기억하자. 미국헌법 제2조 제4항은 탄핵사유로 “반역죄, 수뢰죄, 기타 중대한 범죄나 중대한 비행(Treason, Bribery, or other high Crimes and Misdemeanors)”을 규정하고 있다. 거짓말에 단호한 미국인이라지만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고 판단했던 모양이다.


클린턴 전 대통령과 A가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하는 경우의 수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A의 지지자들이 보고 배워야 할 것은 미국의 인사청문회 문화가 아닐까 싶다. 1993년 클린턴 1기 행정부 출범 당시 법무장관으로 지명된 조 베어드는 불법체류 페루인 부부를 가사보조원으로 고용했으며 관련 사회보장세를 있었다는 미납했다는 사실을 인정해 인준 투표 직전에 사퇴했다. 조지 부시 대통령이 지명한 린다 차베스 노동장관 내정자나 버나드 케릭 국토안보장관 내정자 또한 불법 이민자를 가정부로 고용한 것이 문제가 되어 낙마했다. 미국의 엄격한 인사청문회를 설명할 때 많이 인용되는 사례들이다. 우리도 이를 좇아 고위 공직에 진출하려는 인사들에게 높은 도덕성을 요구하고 검증의 수위를 높이려는 문화가 정착되고 있다. 하지만 A의 열성 지지자들은 한국사회의 난맥상을 일거에 풀어줄 초인을 기다리는 경향이 있다. 계몽군주가 나타난다고 우리는 더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을까. 제도화가 진척된 한국 사회에서 계몽군주는 등장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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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를 위해 시호를 짓다

일기 2007. 10. 22. 05:13 |

(시호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익구닷컴 내 졸문 <한국의 시호(諡號) 탐구>를 참조해주세요)


시호(諡號)는 행적이 뛰어난 사람에게 국가가 내려주는 것이었다. 대개는 높은 벼슬을 한 사람에게 내려지는 게 관례다. 하지만 관직에 뜻을 두지 않아 큰 벼슬을 하지 않았던 김시습은 청간(淸簡), 서경덕은 문강(文康), 조식은 문정(文貞)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이와 반면에 학문이 높고 덕망이 있음에도 시호가 없는 경우에는 교우나 제자, 친지나 고향 사람들이 추도하는 의미로 시호를 짓기도 했다. 나라에서 지어준 시호와 구별하여 사시(私諡)라고 한다. 요절한 반려견 야니를 애도하기 위한 시호를 짓기 위해 한국사에 있어 시호의 의미와 용례를 살펴봤다. 내가 하는 일이 으레 그렇듯이 배보다 배꼽이 커져 버려 한 편의 글을 완성했다(졸문 “한국의 시호(諡號) 탐구”참조).


개에게 시호를 주는 게 너무 괴상한 일은 아닐까 고심했으나 사사로이 시호를 쓰기로 결정했다. 오늘날 시호가 쓰이지 않는 만큼 참례(僭禮)라고 구박할 여지도 별로 없어 보인다. 보다 근본적으로 생명권의 개념을 확장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준 야니에게 사람과 개의 엄격한 분별은 어울리지 않는다. 불가에서는 인간과 축생을 똑같이 보기 때문에 절에서 함께 생활하던 개가 죽으면 49재를 치러준다고 한다. 본적이 없어 진짜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키우던 개를 49재 지내줬다는 애견인의 이야기는 들은 바 있다. 여하간 야니의 49재 즈음해 시호를 건넨다. 부디 세계 최초가 아니길 바란다.^^; 이민홍 충북대 교수님이 당(唐)의 주석가 장수절(張守節)이 『사기(史記)』를 해설한 『사기정의(史記正義)』의 한 편인 시법해(諡法解)와 북송(北宋)시대 문장가 소순(蘇洵)의 『시법』을 번역해 펴낸 책이 있어 큰 도움을 얻었다(이민홍 편, 『諡號, 한 글자에 담긴 인물 評』, 문자향, 2005). 한국의 시법이 이 내용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판단해 다른 전거를 찾기보다 이 책으로 시호를 정하기로 했다.


야니의 시호를 강회(强懷)라고 지었다. 소순의 『시법』에 따르면 강(强)의 시주(諡註, 시호에 담긴 뜻) 가운데 “죽어도 정을 옮기지 않은 것(死不遷情)을 强이라 한다”는 내용이 있다. 생전에 그토록 다정다감했던 야니에게 어울리는 듯싶다. 또 시법과 관계없이 활발하고 강인했던 성품과도 잘 맞는다. 조선시대에 시호를 정할 때 보통 세 가지 안을 내는데 이를 시호망(諡號望)이라 한다. 1안을 수망(首望). 2안을 부망(副望), 3안을 말망(末望)이라 부른다(비단 시호를 정할 때뿐만 아니라 사람을 뽑거나 할 때도 이러한 3안제를 쓴다). 회(懷)자는 확고부동했던지라 수망은 강회(强懷), 부망은 강회(康懷), 말망은 경회(敬懷)라고 해서 고민하다가 수망으로 결정했다. 강(康)은 온화하고 선량하여 좋아하고 즐거워할 만한 것이라는 뜻이 있는데 시법과 무관하게 나를 평안하게 해준 것에 대한 고마움을 표하기에 좋은 글자 같았다. 막판까지 경합했으나 말썽꾸러기 녀석에게는 강(强)이 좀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아 정말 나는 혼자서도 잘 논다.^^;


강(强)은 춘추전국시대의 역사서 『국어國語』에 그 출전이 있다. 진(晉)나라 헌공(獻公)의 애첩 여희의 간계에 빠져 태자인 아들 신생(申生)을 폐하려 했다. 신생의 사부인 두원관(杜原款)이 죽임을 당하기 전에 태자에게 전언을 남기며 “군자는 정을 버리지 않고, 참언에 대해 변명하지 않으며, 참언으로 인해 죽더라도 미명을 남긴다”라는 말을 인용한다. 이어서 죽어도 정을 옮기지 않음이 강(强)이며, 정을 지켜 아버지를 즐겁게 하는 것이 효(孝)이며, 자신을 죽여 뜻을 이룸은 인(仁)이요, 죽더라도 임금을 잊지 않음은 경(敬)이라 말한다. 깨끗한 죽음을 권하는 무서운 내용이다.^^; 주위에서는 무고한 태자가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신생은 이를 마다하고 사부의 가르침을 받아서 결국 자결한다. 여희는 신생의 이복 동생인 중이(重耳)와 이오(夷吾)마저 죽이려 해서 이들 형제는 진나라에서 도망쳤다. 동생인 이오가 먼저 군주가 되고, 중이는 19년 동안 떠돌다 진나라로 돌아오는데 그가 바로 제환공(齊桓公)의 뒤를 이어 패자(覇者)가 된 진문공(晉文公)이다(자세한 내용은 『국어』의 「진어晉語」참조).


회(懷)는 행실은 자애로우나 일찍 죽은 것(慈行短折), 지위를 잃고 죽은 것(失位而死)을 일컫는다. 장수절의 시법해에 의하면 단(短)은 60세 못된 것이고, 절(折)은 30세가 못된 것이다(短未六十, 折未三十). 회(懷)와 비슷한 의미를 갖는 시자(諡字)로는 애(哀), 도(悼), 상(殤), 민(愍) 등이 있다. 애(哀)는 공손하고 어질지만 일찍 죽은 것, 도(悼)는 중년이 안 되어 요절한 것, 상(殤)은 요절하여 이루지 못한 것, 민(愍)은 나라에 재난이나 반란을 만난 것 등의 의미를 갖고 있다. 왕위에 올랐다가 요절하거나 뜻을 펴지 못했을 때 주로 쓰는 시자들이다. 한국사에서 이런 시자를 받은 임금을 대강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신라 제40대 애장왕(哀莊王)은 숙부 김언승의 반란 때 살해되었고, 제44대 민애왕(閔哀王)은 희강왕을 협박해 자살하게 하고 스스로 왕이 되었으나 김우징이 장보고의 힘을 빌려 쳐들어오자 패하여 병사들에게 살해되었다(閔은 愍과 상통하는 글자다). 제55대 경애왕(景哀王)이 견훤에게 핍박당해 자살하게 된 것은 유명한 사실이다.


고려 제7대 목종(穆宗)은 처음에는 묘호가 민종(愍宗), 시호는 선령(宣靈), 능호가 공릉(恭陵)이었다. 이는 모두 목종을 시해한 강조(康兆)가 지은 것이라 현종(顯宗) 3년 묘호를 목종(穆宗), 시호는 선양(宣讓), 능호는 의릉(義陵)이라 고쳤다. 제14대 헌종(獻宗)의 시호는 회상(懷殤)이었다가 예종(睿宗)이 즉위한 뒤 공상(恭殤)이라 고쳤다. 헌종은 숙부 계림공 왕희에게 사실상 왕좌를 찬탈당하고 후궁으로 물러나 14세에 사망했다. 조선 제8대 예종(睿宗)이 재위 13개월만에 죽자 명나라에서 양도(襄悼)라는 시호를 주었다. 조선 제21대 영조(英祖)의 둘째 아들이 뒤주 속에서 사망하자 영조는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다. 훗날 정조(正祖)가 즉위 후 10일만에 사도세자의 시호를 장헌(莊獻)를 고쳤다. 도(悼)자를 바꾼 것으로 보아 높이려는 의도로 보인다. 여하간 회(懷)라는 글자에는 야니를 가슴에 묻고 간직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는 셈이다. 아마 옛사람들도 그랬으리라.


여담이지만 일본 에도시대의 5대 쇼군(將軍) 도쿠가와 쓰나요시는 ‘개 장군’이라는 별명이 있다. 1685년 그가 공포한 생류연민령(生類憐みの令)은 참 서슬 퍼랬다. 동물을 학대하거나 죽였다는 이유로 유배나 할복에 처해졌다고 한다. 처음부터 이런 끔찍한 법이었던 건 아니고 당초에는 중병에 걸린 생물을 내다버려서는 안 된다 정도였다. 쓰나요시는 포고령을 계속 고쳐서 물고기, 뱀, 쥐는 물론 조개, 새우 등 모든 생물을 죽이거나 먹지 못하게 했다. 달걀을 먹는 것이 금지되고, 개나 고양이 등을 죽인 죄로 도망가거나 죽은 사람이 1만 명에 이르렀다고 하니 이쯤 되면 공포다(심지어 모기를 죽였다고 처벌을 받았다). 살생의 업보 탓에 아들이 없다는 어느 스님의 충고를 따른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으니 확실치 않다. 그는 생류연민령만은 폐지하지 말라고 유언했으나 그가 죽은 뒤 열흘만에 폐지됐다. 쓰나요시가 개띠였기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여러 동물 중에 개를 특히 아꼈다. 개마다 색깔과 특징을 기록하고 사망신고서 제출을 의무화하는 등 견공의 위세가 높아지자 버려지는 개들이 급증했다.


넘치는 개들을 수용하기 위해 에도 근교에는 수십 만평에 달하는 사육장이 건설됐다. 개를 먹여 살리기 위한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쓰나요시는 특별세를 거두기도 했고, 악화(惡貨)를 주조해 화폐주조 차익을 챙겼다. 전국시대의 호전성을 누그러뜨리려는 시도였다는 평가가 있긴 하지만 쓰나요시의 정책은 너무 넘쳤다. 박재형의 『해동속소학海東續小學』에는 율곡 이이가 쇠고기를 먹지 않으면서 “일을 부려먹고 도살하여 그 고기까지 먹는 것은 어진 행실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대목이 있다. 농사일에 소를 써야 했던 조선과 일본의 사정이 비슷하다는 가정 아래 쓰나요시가 이 정도 마음가짐에서 그쳤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쓰나요시 만큼이나 엽기적인 사례는 나치 정권에게서 찾을 수 있다. 틸 바스티안의 『가공된 신화, 인간』에는 나치가 집권한 지 8주 만에 동물 학대를 금지했다고 한다. 유대인을 가스실로 보내고 그들에게서 짜낸 기름으로 비누를 만들었던 나치 집단의 분열증이 섬뜩하다. 자기 위주로 생각하는 눈먼 최선을 경계해야겠다. 내 사랑이 남에게 폐를 끼칠 수도 있음을 배웠다. 여기까지 고민하고 있는 만큼 개에게 시호를 지었다고 불편해하실 분들에게 너그러운 양해를 청한다. - [無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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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은 보는 눈이 뜨여야 이런 저런 무엇을 갖출 수가 있는 것이다. 안고수비(眼高手卑)라는 말이 있어서, 마음은 크고 눈은 높아도 재주가 모자라 손이 눈을 따르지 못하는 것을 탄식하기도 한다만, 수비는 나중 이야기고 우선은 안고가 되어야 한다. 보는 눈이 먼저 열려야 분별을 하게 되고, 눈에 격이 생겨야 그 격에 이르려고 부지런히 손을 익힐 것 아니냐. 타고난 재주가 아무리 출중허고, 일평생 익힌 솜씨가 아무리 능란해도, 눈이 낮은 사람은 결국 하찮은 몰풍정(沒風情)을 벗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다른 무엇보다, 사람은 눈을 갖추어야 하느니라. 우리 사람의 정신 속에도 반드시 정신의 눈이라 할 혈이 있을  것이다. 이것이 올바른 곳에 제대로 있고, 그 혈을 보는 눈이 밝은 사람을 세상에서는 '어른'이라 하지.
- 최명희, 『혼불』 4권 14~15쪽


지난해 한가위에 보름달을 보며 안고수비(眼高手卑)하지 말기를 다짐했었죠. 이번 한가위 보름달에도 똑같은 소원을 빌어야 하는 건 아닌가 자괴감이 드네요. 제 눈이 높은지는 확실치 않지만 재주가 낮은 건 분명하니까요. 최명희 선생님의 글을 읽고 제가 그나마 자신 있던(?) 안고(眼高)도 실은 제대로 못하고 있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꿈 꿀 수 있는 것이라면, 이룰 수도 있다(If yon can dream it, you can do it)”는 월트 디즈니의 말씀이 생각나네요. 꿈에도 귀천이 있다면 너무 박절하지만 그렇다고 아무거나 건정대며 바란다고 꿈이라고 할 순 없는 노릇이죠.


이렇게 화끈거릴 때면 으레 “군자는 말이 행동보다 지나친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君子恥其言而過其行)”라는 논어 구절이 떠오릅니다. 저는 이 말을 퇴계 선생의 『자성록』 서문에서 처음 접했습니다. “옛사람이 말을 함부로 하지 않은 것은 몸으로 실천함이 말에 미치지 못함을 부끄러워했기 때문이다(古者言之不出, 恥躬之不逮也)”라는 구절인데 뜻이 서로 통합니다. 혀로 살지 말고 손발로 살라는 죽비를 몇 대 맞으니 얼얼하네요. 서투른 정성이 교묘한 잔꾀를 이긴다(巧詐不如拙誠)는 한비자의 가르침을 저도 따르고 싶은데 의심이 많아서 걱정이에요.^^;


홍기빈 선생님의 『투자자-국가 직접소송제』란 책 끄트머리에 실린 이병천 강원대 경제무역학부 교수님의 발문을 길게 인용하고 싶네요. 무릎을 치면서 타이핑해둔 구절을 우연히 발견했거든요. 높을수록 낮아지고, 샅샅이 훑을수록 멀리 보는 그 오묘한 이치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선생님의 문제의식을 함께 음미해보면 좋을 듯싶네요. 세상을 세련되게 욕하겠다는 심보로 기교에 치중하고, 남의 흠 잡는 쾌감에 만족하는 제 자신을 반성해야겠습니다. 자기 둘레를 티끌만큼 바꾸는 게 버겁고, 돈이 되지 않는 가치를 도두보기가 점점 어려워집니다. 제가 봐도 언짢은 엄살이지만요.


언젠가부터 그런 생각을 갖고 공부를 해오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다시 요동치는 대전환의 소용돌이 속에 살면서 새롭게 그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즉 보편적인 것, 영원한 것을 추구하되 구체적인 때와 장소에 상응되게, 동료 시민들과 함께 길을 걸으며 더불어 소통하면서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큰 것, 높은 것, 원대한 것, 우주적인 것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되, 아니 오히려 그것을 위해서라도 작은 것, 낮은 것, 미약한 것, 원자적인 것, 보이지 않는 것, 들리지 않는 것, 소멸한 것, 패배한 것들을 소중히 여기고 그것들이 연출하는 상호의존적인, 상관적 그물망의 숨결과 교감하고, 사랑하고, 애도할 줄 아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는 것이다. 옛것, 고전, 선각, 대가, 그리고 외래적인 것으로부터 늘 배우고 익히되, 거기에 갇히고 그것을 물신숭배하면 위태로우며, 반성적으로 사유하고 무소의 뿔처럼 자신의 길을 가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판잣집이라 해도 자기 집을 지어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뿐만 아니라 한 나라도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오죽 좋을까.


제약회사 존슨앤드존슨의 윤리경영지침으로 ‘빨간 얼굴 테스트(Red Face Test)’라는 게 있습니다. 자신이 내린 결정이나 행동을 자기 가족에게 얼굴 붉히지 않고 설명할 수 있을 만큼 윤리적인지 자문하는 과정이라고 합니다(허승호, 『윤리경영이 온다』, 동아일보사, 2004. 참조). 이보다는 덜 순박하긴 해도 GE에서는 자신의 활동이 신문에 나더라도 그와 같은 활동을 지속할 것인지를 잣대로 판단하는 Newspaper Test라는 것도 있다네요(P&G의 뉴욕타임스 룰도 같은 맥락인 듯싶습니다). 굳이 가족이나 가까운 지인들에게 설명하려고 할 것도 없이 제 자신이 얼마나 민망한 모습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이 가능성의 실마리를 잘 엮어봐야겠어요.


최근 겪은 흉사가 원인이었는지 여드름이 얼굴 동서남북으로 나서 연지곤지를 연상케 했습니다. 피부 재생이 잘 되는 청소년과 달리 성인은 여드름이 생기면 흉터가 많이 남는다는 걸 제 자신의 임상실험을 통해 입증해버렸네요. 본래 뽀송뽀송하던 낯도 아니었던 데다가 흉까지 지니 피부에 무심하던 저도 적잖게 신경이 쓰이더라고요. 이제 성인여드름을 걱정해야 하는 나이가 되어 원통합니다.^^; 연휴 동안 제 젊음과 트레이드 할(단순히 맞바꾸기보다는 자아실현을 위해 교환하겠다는 의미) 공부거리는 무엇일지 궁리해봐야겠습니다. 이만하면 작년과 똑같은 소원을 비는데 대한 궁색한 변명은 되겠지요?^^;


넋두리가 길었습니다. 아무쪼록 넉넉하고 재미난 한가위 되시길 바랍니다. 혹은 그러셨길 바랍니다. 아참 이 글은 미괄식입니다.^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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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 속에 변치 않는>
  - 『스승의 옥편』을 읽고

  ‘선발자의 이득’이라는 경제용어가 있다. 상대방에 앞서 신상품을 시장에 내놓은 기업이 얻게 되는 이익을 일컫는다. 이와 반대로 선발자가 터를 닦은 시장에 진입해 위험과 비용 부담을 줄이는 ‘후발자의 이득’이라는 말도 있다. 두 이점 가운데 어느 것이 크게 작용하느냐에 대해 서로 엇갈리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시장 개척자들이 반드시 유리한 것은 아닌 셈이다. 최근 산업자원부는 산업정책 패러다임을 빠른 추종자(fast follower) 전략에서 혁신 주도자(leading innovator) 전략으로 전환하겠다고 밝혔다. 단순히 선진국 따라잡기로는 중국 등과의 경쟁에 한계가 있으므로 원천기술과 창조적 인재에 바탕을 둔 핵심역량을 키우겠다는 포부다.


  정민 선생의 『스승의 옥편』을 읽다가 엉뚱하게도 ‘혁신’ 생각이 났다. 글쓴이의 저작에 잇따라 흐르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과 혁신 주도자라는 개념은 제법 닮았다. “전통의 계승은 지금 없는 변치 않을 옛것을 회복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은 원래 있지도 않았다. 쉴 새 없는 변화 속에 변치 않는 정신의 가치를 깃들이자는 것이다”라는 구절이 책의 고갱이다. 이런 문제의식은 옛것을 바지런히 읽어 정갈하게 갈무리하고 이를 통해 창조적으로 계승하려 했던 18세기 지식인 탐구로 이어진다. 선생은 『18세기 조선 지식인의 발견』에서 옛것을 흉내내기 급급했으면서 교조적 권위를 휘두르기 일쑤였던 기득권층을 비판한다. 그는 “민족문화의 주체성과 외래문화의 건강한 결합을 모색했던 지식인”들을 자생적 근대화의 가능성이라 평했다. 이 가능성이 사그라졌던 것에 대한 반성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비유가 거칠지만 옛사람이 선발자의 이득을, 오늘을 사는 사람이 후발자의 이득을 꾀할 수 있다고 가정해보자.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는 2등 상품이 1등이 되기 위해서는 10배 더 좋아야 한다고 설파했다. 선현과 한바탕 승부를 벌이자는 건 아니지만, 그네들의 다채로운 삶을 추체험하는 게 그만큼 쉽지 않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되겠다. 글쓴이가 틈틈이 한탄하듯이 기술의 진보가 정신의 고양으로 확산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선생은 문화는 변화할 뿐 발전하는 것이 아니기에 후고박금(厚古薄今)을 거부한다. 아울러 사람 사는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견해를 뒷받침하기 위해 언급되는 전거들 상당수가 자잘한 일상생활의 섬세한 묘사다. 이를 통해 옛사람들의 고민 상당수가 현재도 여전히 끙끙 앓는 화두임을 보여준다.


  북송 시대 사마광은 황하 유역의 서북 지역 출신이었고 왕안석은 양쯔강을 중심으로 한 동남 지역을 대표했다. 주도권을 쥐고 있던 서북 지역이 전통주의를 내세웠다면 신흥세력인 동남 지역은 신법(新法)으로 쇄신할 것을 주장했다. 지식인의 철학이나 정견이 온전히 그 개인의 것은 아닌 모양이다. 역사와 환경이라는 맥락은 부러 외면하기 힘든 규정력을 행사한다. 자신의 생각에 시공간이라는 요소(要素)를 눅여낼 때 그 사상이 좀 더 탄탄해질 수 있다. 선생은 전작 『책 읽는 소리』 후기에서 ‘그때 여기’와 ‘지금 저기’라는 두 좌표축을 균형 있게 도두볼 것을 주창한다. 상대적으로 부실한 ‘그때 여기’, 다시 말해 ‘우리의 과거’를 보강한다면 보다 혁신할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동서고금을 통합하는 담론을 위한 저자의 제안을 세 가지로 나눠봤다.


  첫째로 기록하는 습관이다. 『지봉유설』, 『성호사설』, 『임원경제지』 등의 백과사전식 저술이 그 실례다. 정조의 『일득록』을 완독하며 희열을 느꼈던 개인적인 경험이 새록하다. 퇴계선생고종기의 꼼꼼함도 감동적이다. 선생은 단순히 적는 것이 아니라 손으로 읽는 초서(鈔書)를 통해 자기 나름의 잣대로 가름하여 식견을 쌓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치밀한 기록은 일개인이든 집단이든 간에 책임성을 높여준다. 다만 단장취의(斷章取義)한답시고 자기 만족하는 건 경계할 일이다. 실상 선생의 글쓰기 작업 자체가 기록의 극치다. 라디오 진행자의 한마디나 식당에서 손에 잡힌 소식지도 메모해둔다. 생활 속의 단상도 잊기 전에 적어 두는 듯싶다. 자식의 효도는 어린 시절에 다했다는 넉넉함이 푸근하다. 조봉암 선생 무덤 앞 어록을 보고 올바른 삶을 다짐하고, 차마 속일 수 없는 사람을 모시고 싶다는 바람을 토로할 때 사람냄새가 난다. 이는 마치 18세기 소품체(小品體)의 생활작문, 미시작문을 연상케 한다.


  둘째로 위대한 일상성이다. 도저한 근면함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글쓴이는 스승의 닳고닳은 한한대사전을 넘기며 단순무식한 노력이 왕도임을 확인한다. 다산 정약용이 책상다리로 앉아 바닥에 닿은 복사뼈 자리에 구멍이 세 번 뚫렸다는 고사를 전한다. 다산의 제자 황상이 오로지 부지런하라는 삼근계(三勤戒)를 받은 이야기도 꺼낸다. 편안한 휴식이 되는 공부가 진짜 공부이며 질리지 않고 가슴 뛰게 할 수 있다고 목청을 높인다. 그럭저럭 소일(消日)하지 않는 삶은 “지극한 정성은 쉼이 없다(至誠無息)”라는 『중용』 구절과 만난다. 누구나 사흘쯤은 성인군자 행세를 할 수 있다. 닷새 정도는 공부를 하다가 지쳐 단잠에 빠질 수도 있다. 문제는 그 사흘과 닷새를 보름으로, 달포로 늘려나가는데 있다. 눈치 보지 않고 묵묵히 제 갈 길을 가는 정성이 하늘까지는 몰라도 사람은 감동시킬 수 있으리라.


  셋째로 줏대 있는 개성이다. 선생은 『미쳐야 미친다』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에 미치는 마니아들의 치열함을 예찬한 바 있다. 온달 이야기는 운 좋은 출세담이 아니라 신의의 문제로 봐야 한다는 해석을 비롯해 고쳐 읽고 따져 읽는 자세를 환기시킨다. 저자가 두드러지게 살피지는 않았지만 유교 텍스트에 내재된 지배층 옹호 및 차별의식 같은 극복해야할 인습들도 비판적으로 독해해야 할 것이다. 양명학이 중국이나 일본에 견주어 가장 심하게 이단으로 여겨진 조선 지성계의 편협함 같은 면들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고전도 결국 그 시대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선생은 특히 “정신을 본받고 표현을 본받지 말라(師其意 不師其辭)”라는 한유의 문장론을 강조한다. 옛것을 배우되 옛것을 답습하지 않고 편승하지 않는 홀로서기를 권한다.


  이 세 가지 비책의 뿌리는 역시 개권유익(開卷有益)이다. 서유럽과 영미 선진 출판시장에서는 컴패니언(companion) 북이 활성화되어 있다고 한다. 한국 출판시장이 고전의 요약정리나 이색적인 재해석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면 컴패니언 북은 고전의 핵심 부분을 발췌해 옮기고 여기에 자세한 해석을 다는 식이다. 이처럼 원문을 무궁자재로 인용하기 위해서는 고전 번역이 절실하다. 다행히 지난 7월 한국고전번역원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한문고전 번역사업을 국가가 끌어안음으로써 체계적이고 장기적인 안목으로 고전 국역사업을 수행하는 발판이 마련되었다. 포실한 고전의 토대 위에 특수성을 뽐내면서도 보편성을 잃지 않는 한국적 가치관을 모색해보자. 민족주의로 가두기에는 그 품이 너르다.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자꾸만 늘어가는 이 땅에서 곰삭은 옛글은 무슨 힘을 지닐까. 자본의 포섭에 맞설 재기 발랄한 언어는 무엇일까. 스스로 주인이 되겠다는 매운 의지를 벼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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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니가 가르쳐준 것들

잡록 2007. 9. 10. 00:39 |

여러 경로를 통해 많은 분들이 애견 야니의 죽음을 애도해주셨습니다. 쑥뜸, 덕이母, 봄봄, lee856, 클리셰, joana, 권오성, 언어의 마술사, 윤정누나, 곽기민, 강기현, 윤선진, 한용철, 김지은, 이형신, 김준수, 이성구, 박태순, 이진원, 오규상, 이수영, 이청원, 황현식, 김소은, 정승현 등의 분들 모두 고맙습니다. 덕분에 큰 힘을 냈습니다. 이어지는 잡글은 제게 따스한 마음을 보여주신 분들께 올리는 작은 선물입니다.


내내 헝클어져 있다가 간신히 추슬렀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보니 너무 넘친 행동을 한 거 같아 민망하다. 애견을 잃은 감정을 쏟아내는 건 온전히 내 자신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살면서 가끔은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행동을 할 때도 있게 마련이니 너무 자책하지 말기로 하자. 펫 로스(pet loss)에 시달리고 나니 당분간 어지간한 서글픔에 흔들리지 않을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어른이 된다는 건 제 둘레의 비극에 덤덤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저런 아픔 끝에 놀라지 않고 성내지 않게 되는 건 아닐까 싶다. 나는 내가 그런 담담함을 체화하는 게 두렵다. 내 생애 줄서고 기다린 각종 애경사에 나는 처음처럼 웃고 울을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결국 시간은 남은 사람의 편이겠지만 다시금 있을 때 잘해야 한다라는 평범한 진리를 곱씹게 된다.


지난 주말에는 비록 유해이기는 하지만 야니를 데리고 울산바위를 바라보기도 하고, 대포항의 짠내를 맡고, 화진포의 별장들을 둘러봤다. 통일전망대에 올라 북녘 땅을 가리켜보기도 했다. 고별 여행까지 다녀왔는데도 아직도 서운한 걸 보면 내가 마냥 무심한 사람은 아닌 모양이다. 반려견과 사별한 사람들이 으레 겪듯이 녀석이 생전의 재기 발랄한 모습을 뽐내는 꿈을 꾼 것도 벌써 두 번째다. 문득 그리워지면 하염없이 휑할 게다. 우울한 심사를 달래기 위해 프랑스 작가 장 그르니에의 <어느 개의 죽음>이라는 책을 읽었다. “우리는 살고 있다고 믿지만 사실은 살아남아 있을 뿐이다”라는 구절이 가슴에 사무친다. 한번뿐인 유한한 삶을 간소하면서도 진실하게, 올바르게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녀석이 삶은 유한하다는 절절한 깨우침을 주고 떠났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불완전하고 그 불완전함을 보듬어가며 살아야겠다. 사랑 받기보다는 사랑하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부질없는 결심도.


중학교 1학년 특별활동으로 논술반을 했다. 보신탕 문제가 나왔을 때 나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문화적 다양성을 드높이는 발표를 했다. 나는 그 때 브리지트 바르도를 소아병적이라고 몰아세웠다. ‘소아병적’은 내가 당시 구사하던 최고의 험담이다.^^; 최근 들어 알게된 것이지만 그녀는 푸아그라나 말고기도 반대하고 있다고 한다. 내가 보기에 그녀는 서구우월주의자보다는 동물해방근본주의자가 더 맞는 듯싶다. 어차피 개고기 애호가들이 비판받을 이유는 거의 없다. 그러나 미감의 차이에서 오는 불편함까지 원천 봉쇄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일부 서양인들의 옹졸함에 너무 성내지 말아야겠다. 야만인 운운했던 바르도의 거친 언사에 대한 반감을 좀 눅이고 개 식용 문화의 윤리적 측면을 살펴보는 넉넉함을 뽐내보자.


어린 시절 나는 문화상대주의라는 보검 하나면 더 이상 논쟁이 필요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세상 거의 모든 것이 그렇듯이 문화상대주의도 양날의 칼임을 알겠다. 문화상대주의가 지나치면 현재 상황을 맹목적으로 옹호해버릴 우려가 있다. 일체의 윤리적 판단을 포기한 채 다양성이 얼마나 잘 만개할 수 있을지 회의적이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문화상대주의에는 생태주의 가치가 들어있지 않다. 생태주의도 상대화된 가치의 하나로 존재할 따름이다. 그렇지만 환경보호와 생명존중이라는 생태주의 가치는 향후 더욱 확산될 인류의 지향점이 될 공산이 크다. 따라서 지속적인 성찰과 토론이 요구된다. 물론 개고기 논쟁에서 상대적 가치를 대체해서 보편적 가치가 얼마나 규정력을 발휘할지는 쉽게 가늠하기 힘들다. 인간의 생존 자체가 다른 생명체를 죽임으로써 가능하다는 확고부동한 사실 아래서 우리의 언행은 제약될 수밖에 없다.


이럴수록 가까운 곳부터 시작하는 게 온당하다. 『맹자』에 나오는 제(齊)나라 선왕(宣王)의 이야기가 이런 고심을 푸는 실마리가 된다. 선왕이 제사에 쓰이기 위해 끌려가는 소가 벌벌 떨고 있는 것을 보고 가여운 마음이 들었다. 선왕은 소 대신 양으로 제사를 지내라 명한다. 백성들이 소를 아껴 양을 쓴 왕을 인색하다고 여긴 모양이다. 하지만 맹자는 눈앞의 소가 죽는 걸 차마 보기 어려운 마음이 어짊을 베푸는 것이라 평가한다. 이기동 선생은 “보이지 않는 양에 대해서도 똑같이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는 식의, 머리 속에서 이끌어낸 합리적 사고에는 情이 들어있지 않기 때문에 구체적인 행동력을 동반하지 못한다”라고 풀이한다.


“소는 보았고 양은 보지 못했다(見牛未見羊)”라는 구절에서 인간의 어쩔 수 없는 한계를 엿본다. 보지 못했던 양을 덜 불쌍히 여기는 건 너무 자연스러워서 당위적 혹은 합리적 가치를 들이대기 무안하다. 제 둘레의 것들에 연민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더 먼 곳의 아픔을 헤아리는 게 가능할까. 원거리로 건네는 가련함은 관념화된 추상은 아닐까. 이런 논리 혹은 의심을 이용해 국내의 빈곤층 문제는 나 몰라라 하면서 북한 주민의 인권을 걱정하는 걸 비판할 수 있다. 그런데 마찬가지 근거로 국내의 취업난은 외면하고 북한 지원에만 열중하는 걸 통박할 수도 있다. 뭔가 이상하다. 견우미견양의 가르침을 이렇게 소비하는 건 그리 적절한 처사가 아닌 듯싶다. 이런 식으로 편협한 삶을 부추기자는 의미는 아닐 게다.


견우미견양에서 단순히 인간의 한계를 지각하는 데 그쳐서는 곤란하다는 함의를 찾아보면 어떨까 싶다. 소를 대신해 양을 쓰는 걸로 만족하지 말자는 뜻이다. 궁극적으로는 나와 덜 친밀한 것까지 측은지심을 품는 실천을 꾀해야 한다. 측은지심을 자기 주변부터 시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다 방점을 찍을 부분은 측은지심을 바지런히 넓히는 데 있다. 여기까지 동의한다고 해도 측은지심이 확산되는 순서를 어떻게 정할 수 있느냐의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국내 경제가 충분히 성장하면 비로소 북한을 도울 수 있다거나, 통일까지 이뤄야 국제 구호에 나선다거나, 인류가 충분히 평안해질 때 동물을 돌보겠다거나 하는 식은 분명 아닐 게다. 이렇게 단순한 선후관계였다면 이렇게 머리 아플 일도 없다.


반려견을 어떻게 바라보냐는 문제도 측은지심을 어떻게 배분하느냐는 서로 다른 잣대의 엉김이다. 쉽사리 합의점을 도출하기는 힘들 게다. 다만 어느 정도의 경향성은 도출할 수 있겠다. 개의 역할과 위상이 식용견에서 반려견으로 바뀌고 있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흐름이다. 정약용 선생이 흑산도에 유배된 형 정약전의 병약함을 걱정하며 개장국을 권하던 때와는 상황이 많이 다르다. 소나 돼지와 달리 활동성이 강한 개는 축산 사육이 적합하지 않다는 지적도 있다. 더군다나 이미 비만이 골칫거리인 시대에 굳이 개고기를 보양식으로 예찬하는 건 그리 아름다워 보이지 않는다. 반려동물 가운데 가장 앞자리에 있음이 명백한, 인간과 가장 친한 친구로 일컬어지는 개에 대한 예의는 아니라는 데 마음이 기운다. 인간에 대한 예의도 묽어지는 시대에 호사스런 감상인지는 모르겠지만.


한창 진행중인 한국과 EU와의 FTA 협상 과정에서 동물복지라는 기준을 놓고 쟁점이 되었다. EU는 교역 대상이 되는 식용 동물의 권리를 보호할 것을 요청했다. 개발도상국의 열악한 인권, 보다 가까이는 북한 어린이들의 참상을 틈틈이 목도하면서 감히 동물권을 논하다니! 학대받지 않은 동물의 고기가 더 맛있다는 이유를 들기도 한다지만 유럽인들의 동물 사랑에 기인한 바가 큰 듯싶다. 유럽의 동물 애호가 따져보면 제국주의 식민통치로 말미암아 쌓인 옹골진 경제적 풍요 덕분이라고 핀잔할 수도 있겠다. 설령 위선일지라도 인간복지를 넘어 동물복지를 고민하는 그네들의 애틋함이 부럽다. 배우고 싶다.


동물복지의 사상적 연원을 철학자 벤담의 공리주의에서 찾는다. 공리주의하면 계산적이고 야박하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는데 정신이 번쩍 든다. 벤담은 동물이 사람과 똑같이 감각이 있으므로 사람처럼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사람을 동물에 견주어 특별히 취급해야할 까닭이 없다며 동물을 사람과 다르게 취급하는 걸 거부한다. 반려동물을 길러 본 사람들은 동물이 희로애락을 느낀다는 걸 믿는다. 근대과학도 최소한 척추동물은 고통을 지각한다고 확증한단다. 윤리학자 피터 싱어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보다 확장했다. 싱어는 공리주의 전통을 계승해서 자신의 이익과 타자의 이익에 동등한 비중을 둬야 한다는 이익 평등 고려의 원리를 역설한다. 그는 어떤 존재들이 쾌락과 고통을 느낀다는 점에서 같다면 그들은 동등한 도덕적 배려의 대상이 돼야한다고 설파했다. 인간과 동물을 차별하는 종차별주의(speciesism)는 잘못이라는 그의 주장에 동감한다.


싱어는 “인간은 살아 있는 것들의 최대 다수를 위한 최대의 선을 행해야 한다”라는 명제를 제시한다. “동물들을 일정한 목적을 위해 이용함으로써 얻어진 선이 과연 인간이 그 동물들에게 끼치는 해악을 초과하는지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라는 대목에서는 그 고운 마음씨가 고맙다. 그간 인간다운 삶에만 천착하다가 인간 중심주의에 빠진 건 아닌가 반성을 해본다. 그는 동물해방론에서 그치지 않고 “상대적으로 풍요한 국가의 국민들이 기후 변화와 극단적 빈곤 속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제해야 할 의무가 있다”라는 데까지 나아간다. 싱어의 견해가 다소 성급해 보이기는 하지만 견우미견양이 희구하는 바와 얼추 비슷하다고 여겨진다. 더 탐구해봐야겠다.


동물 같이 힘없는 존재에 대한 윤리적 처우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회가 다른 사회적 약자를 보듬는 데도 열심이라는 건 어렵지 않게 연역할 수 있다. 이주노동자를 푸대접하면서 장애인을 염려하는 건 상상하기 힘들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어떤 사회의 후생수준은 그 사회에서 가장 낮은 수준의 후생을 누리는 구성원의 효용수준에 의해 결정된다”라는 롤즈의 사회후생함수에 기반한 추론이다(사회후생함수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니 더 자세한 사항은 미시경제학 교과서들을 참조해주세요). 경제적 보탬이 되지 않는 것에도 무심하지 않는 사회의 삶의 질이 더 높다고 직관적으로 확언한다(이걸 실증적으로 입증할 수 있을지 궁리해봐야겠다). 존재하는 모든 것에 가치와 권리를 부여하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게 앞으로 우리 사회가 나아 가야할 방향이라고 본다. 잉여인간, 잉여동물들을 박정하게 내치지 않는 세상을 갈망한다. - [無棄]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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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니야, 고이 잠들길

잡록 2007. 8. 30. 03:23 |

8월 29일 새벽 익구네 애견 야니가 향년 7세로 운명했습니다. 전날 위 절개술을 받고 잘 회복하던 중에 일어난 일이라 더 경황이 없네요. 그리 큰 수술이 아닌데다 수술도 잘 되었기 때문에 안심하던 터라 충격이 큽니다. 원체 갇혀 있는 걸 싫어하는 녀석이라 처음 겪는 입원에 쇼크사한 게 아닐까 막연히 추정하고 있습니다. 삼가 애견 야니의 명복을 빕니다.


안녕 야니야... 형아다. 네가 하얀 천에 덮여 있었을 때 나는 담담했단다. 천을 들추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쓰다듬는 것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도 나는 침착했었지. 늘 뜨겁던 네 몸이 서늘할 때도 나는 참을 수 있었어. 그런데 네 귀가 빳빳하게 굳어 잘 안 움직이는 것을 느끼고는 그만 눈물이 왈칵 쏟아지더구나. 그렇게 튼튼하고 활기차던 네가 어떻게 병실에서 하룻밤을 못 넘기고 그렇게 되었는지 참 슬프다. 따갑다.


그간 하도 집 밖 나서기를 좋아하는 너를 농담 삼아 자유견(自由犬)이라고 불렀는데 철창에서 하루도 못 참았네. 우리들 곁에 한시도 떨어지기 싫어하던 너는 실상 외로움을 많이 탔었지. 네가 안정을 취하려면 들여다보지 않는 게 좋다는 병원의 충고대로 한 건데 그 사이를 못 참다니 안타까워. 결국 내가 건넨 마지막 말은 수술실 들어가기 전에 네게 건넸던 “안녕”이었네. 참 멋없게 헤어졌다. 네 마지막을 지키지 못한 게 많이 아쉽다. 곁에 있어주지 못해 미안해.


집이 참 적막하네. 지난 주말에 사다놓고 몇 끼니 먹지 못한 채 고스란히 남아있는 네 밥, 네가 그렇게 좋아하던 간식과 껌들 그리고 쌀과자, 네가 즐겨 가지고 놀던 쿠션과 공들, 꼭꼭 씹어 늘 젖어있던 네 이불까지 덩그러니 남겨져 있어. 사진첩에 있는 네 모습에 자꾸 눈길이 간다. 네가 처음 우리 집에 왔을 때 같이 왔던 꼬질꼬질하던 수건에서 어찌나 안 떨어지려고 했었는지. 네가 가지고 놀던 물건들에 애착이 강한 걸 잘 알고 있는지라 뭘 좀 버리려고 해도 선뜻 결심이 안 서네. 다른 건 몰라도 한겨울에 입던 노랑병아리 옷은 차마 못 버릴 거 같아.


네 이름 야니에 내가 들 野, 진흙 泥라는 한자를 붙였지. 이 말처럼 개구쟁이 같던 너, 말썽꾸러기 녀석. 하얀 털에 눈 두 개, 코 하나만 새까맣다고 해서 지은 삼점(三點)이라는 아호(雅號)가 겸연쩍게 되었네. 온갖 복을 가져다준다는 뜻으로 지은 네 보금자리 이름 백복헌(白福軒)도 허전하다. 내 호사스런 취미 때문에 붙였던 이 이름들이 지금은 가슴에 사무친다. 그만큼 네가 각별했었던 모양이야. 야구리, 야구리우스, 야굴장군, 나불나불이, 복실이 등등 다채로웠던 별명들도 이제 주인을 잃었구나.


사람은 영악한 동물이라 나도 조금 지나면 너를 잊고 살겠지. 아니 그 말은 아무래도 너무 박절하다. 사실 너를 영영 못 잊을 거 같아. 무뚝뚝한 내가 네게 정이 많이 들었어. 내가 마냥 무심한 놈은 아니라는 걸 너로 인해 깨우쳤다. 이 아픔은 무(無)로 돌아간 너를 위한 것만은 아니야. 결국 내 자신을 위한 괴로움이겠지. 함께 나눌 수 있었던 내일의 가능성을 묻어야 한다는 지극히 이기적인, 그러나 마땅한 감정이랄까. 내 일부가 소실된 듯한 이 상실감. 미어진다는 기분이 이런 것이구나. 마음이 아리다. 저민다.


너는 내 생애 처음으로 겪는 지근거리(至近距離)와의 이별이다. 첫 죽음이라는 게 일개인에게 유형무형의 많은 영향을 미치겠지. 천수를 다 누리지 못하고 보내 더 비통하다. 어쩌면 네가 나를 비롯한 우리 가족의 불행을 모두 안고 그렇게 빨리 가버린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너와 한 식구가 된 지난 4년 2개월 간 적어도 내 자신한테는 나쁜 일이랄 게 없는 나날들이었거든. 쌔근쌔근 잠든 네 모습을 보며 가끔 네가 내게 행운을 가져다 주는 건 아닐까 생각했지. 그간 참 고마웠어. 내가 일자리도 얻고 돈도 버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옆에서 좀 더 지켜보지 너는 날 뭘 믿고 그리 일찍 떠났니.


귀여운 내 동생아, 너 덕분에 내가 많이 웃었다. 너를 도닥거릴 때 세상의 모든 시름을 잊었다. 지난 주 어느 날 내가 술 마시고 늦게 들어갔을 때 잠에 취해 비틀거리면서 나를 맞이해 준 네 모습이 선하다. 그게 마지막으로 네 단잠을 깨운 게 되었을 줄이야. 나는 사후세계를 믿지 않아. 천국과 지옥이 있을 것 같지 않고, 극락세계와 내세도 도무지 믿기 힘들어. 입으로는 명복을 빈다고 하지만 사실 네 죽음은 네게 있어 우주의 소멸에 지나지 않겠지. 한번뿐인 네 삶에 내가 어떤 의미였을지 모르겠다만 좋게 기억해주길 바랄게.


만약 내 믿음이 틀린 거라 우리가 다시 만날 기회가 있다면 내가 너를 알아볼까? 네가 나를 반길까? 이 부질없는 상상조차도 버겁다. ‘쭉쭉이’라고 불렀던 네 기지개가 그리울 게다. 산책 가자고 은근슬쩍 조르는 네 투정이 떠오를 게다. 다른 강아지들만 보면 짖어대던 네 극성맞음마저 추억할 게다. 매일매일 떼 줄 눈곱이 없어서 서운할 게다. 자기 전에 오줌 누고 오라고 엉덩이 톡톡 쳐주던 손동작을 괜히 해볼 게다. 첫새벽에 꼬리 흔드는 녀석이 없어서 쓸쓸할 게다. “앉아”와 “손”밖에 할 줄 모르지만 그래도 늘 즐거웠던 간식시간이 절실할 게다.


표현이 과격하기는 하지만 세상에는 개보다 어렵게 사는 사람도 많고, 개만도 못한 사람도 제법 있다. 너와의 짧은 인연을 딱한 사람을 헤아리는데 쓸게. 개만도 못한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네 못 다한 삶까지 끌어다가 열심히 살게. 응원해주렴. 널 끔찍이 아끼던 어머니가 상심이 크시다. 슬퍼하되 너무 다치시지 않게 도와주라. 말이 너무 길었다. 오늘이나 내일쯤 화장장에서 네 유해가 돌아오면 네가 자주 거닐던 산책로를 함께 걸어야겠다. 늘 그랬듯이 나는 이야기하고 너는 듣기만 하겠지. 묵동천에서 부는 바람을 네가 느꼈으면 좋으련만.


문을 열고 집에 들어서서 “형아 왔다”고 외치고 싶은데... 네가 없었다면 내 삶은 얼마나 가난했을까.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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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본래 두 달 전인 6월에 작성한 글이지만, 과객님의 고마운 댓글을 반영해 고치고 문단을 이동시켰습니다. 외래어의 된소리 표기에 대한 부분을 좀 보강했을 뿐 크게 바뀐 부분은 없습니다. 다시 생각해봐도 어려운 문제네요.^^;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서해문집, 2004)라는 책 후반부를 읽었다. 서문에서 인명과 지명 표기에 대한 고민을 엿볼 수 있었다. “현재 중국이 오늘날 한국의 인명이나 지명을 한국어 발음으로 표기하지 않고 중국어 발음을 고수하고 있는 한 우리도 형평에 맞추어 우리 식으로 중국 인명, 지명을 표기하자는 고집”하기로 한 저자들의 결단은 수긍할 만하다. 중화민국을 세운 1911년의 신해혁명 이전의 중국사람은 한국어 한자 발음으로 부르고, 그 이후는 중국어 한자 발음으로 부르는 게 대세로 자리잡았다. 호금도(胡錦濤)보다는 후진타오가, 온가보(溫家寶)보다는 원자바오가 더 널리 쓰이고 있다. 그러나 신해혁명이 왜 가름의 기준이 되어야 하는지가 애매하다. 남의 나라의 역사적 사건이 우리나라 발음표기의 기준이 된다는 건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다.


중국 지명의 경우 역사 지명으로서 현재 쓰이지 않는 것은 한국어 한자음대로 하고, 현재 지명과 동일한 것은 중국어 한자음에 따라 표기하게 되어 있다. 가령 쯔진청과 자금성(紫禁城), 톈안먼과 천안문(天安門), 완리창청과 만리장성(萬里長城) 등의 경우 역사 용어라 후자가 많이 쓰이는 편이다. 하지만 현대 지명은 일관성이 덜한 편이다. 베이징, 상하이가 많이 퍼졌지만 북경(北京), 상해(上海)도 여전히 많이 쓰인다. 청두보다는 삼국지에 나오는 촉나라 수도 성도(成都)가 익숙하고, 뤄양, 시안도 낙양(洛陽)과 서안(西安)이라고 부르고픈 마음이 적잖다. 사천(四川) 탕수육은 있어도 쓰촨 탕수육은 좀처럼 쓰지 않는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가 있었던 충칭을 드나들었던 우리 선조들은 충칭보다 중경(重慶)으로 더 많이 불렀을 공산이 크다. 옌볜 조선족보다는 연변(延邊) 조선족이라 해야 어울린다. 실제로 연변대학 교문에는 한글로 연변대학이라고 써져 있다고 한다. 한국언론에서 옌볜대학이라고 표기하는 게 적절한지 헛갈린다. 헤이룽장성 하얼빈의 경우 헤이룽장성을 흑룡강(黑龍江)성으로 쓰기는 해도, 하얼빈을 합이빈(哈爾濱)으로 쓰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혼란스럽다.


인명이야 중국어 한자음으로 부르는 데 거부감이 덜하지만 지명의 경우 한국사와 밀접한 관계를 맺은 것들이 적잖기 때문에 쉽게 바꿔 부르기 힘들다. 우리에게 요동(遼東)과 집안(集安)은 있어도 랴오둥과 지안은 없었기 때문이다. 이건 반드시 관성 탓만은 아니다. 중국식 한자음을 무작정 존중하기 힘든 역사적 맥락 때문이기도 하다. 가령 한국인이 백두산(白頭山)을 장백산(長白山), 심지어 창바이산으로 부르는 건 독도(獨島)를 다케시마(竹島)라고 부르는 것만큼이나 어색하고 언짢은 일이다. 이 여파 때문인지 황하(黃河)를 황허라고 부르는 건 낯설다. 특히 심한 건 양쯔강이다. 양자강(揚子江)을 중국식으로 불러준답시고 한 것이지만 중국에서는 장강(長江), 즉 창장으로 쓴다. 참고로 한국어에서 쟈, 져, 죠, 쥬, 챠, 쳐, 쵸, 츄는 소리가 없기 때문에 자, 저, 조, 주, 차, 처, 초, 추로 발음된다. 이로 말미암아 주스를 쥬스라고 쓰지 않듯이 江을 쟝이라고 쓰지 않는다. 마찬가지 이유로 쟝졔스가 아닌 ‘장제스(蔣介石)’가 된다.


한글은 음소 문자이면서도 낱글자를 음절 단위로 네모지게 모아씀으로써 음절문자의 효과를 낸다. ‘하ㄴ가o(漢江)’, ‘겨o세제미ㄴ(經世濟民)’이라고 쓰는 것보다 ‘한강(漢江)’, ‘경세제민(經世濟民)’이라고 표기하는 것이 시각적으로 한자와 잘 어울림은 그리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세종대왕을 위시한 훈민정음 창제자들은 한글 한 음절과 한자 한 음절이 일대일로 대응되면서 한자가 개입될 여지가 충만하게 만들었다. 이는 한국 한자음을 중국 한자음에 가깝게 고치고 싶다는 욕망의 실현이었다. 좀 좋게 말하자면 한국어와 중국어의 원활한 소통을 꾀한 것이 훈민정음이다. 고유명사의 경우 소리나는 대로 표기하는 것이 외래어 표기법의 대원칙이라지만, 중국 고유명사를 표기하는 데 있어 겪는 혼란은 훈민정음 창제에서부터 전해 내려온 습관과 버성기기 때문이리라.


김용옥, 최영애 선생님이 만든 중국어 표기법은 적극적인 된소리 표기와 더불어 모든 인명과 지명을 중국어 발음으로 읽기를 제안한다. 라오쯔(老子)와 차오차오(曹操)처럼 쓰자는 데는 공감하지 않지만 된소리를 좀 더 써야 한다는 주장은 검토해볼 만하다. 가령 東이 들어가는 마오쩌둥이나 산둥반도는 현지 발음과 너무 차이가 난다. 물론 외래어는 한국어 체계에 맞게 표기하는 게 맞지만 둥과 똥의 간극은 좀 지나치지 않나 싶다(예전 문교부안인 ‘동’이 더 나은 듯싶다). 이미 중국어 표기에서 ‘ㅆ,ㅉ’을, 일본어 표기에서 ‘쓰(つ)’를 쓰고 있다. 더군다나 2004년 12월 30일 문화관광부가 동남아시아 3개 언어의 외래어 표기법을 제정하면서 타이어는 ‘ㄲ,ㄸ,ㅃ,ㅉ’, 베트남어는 ‘ㄲ,ㄸ,ㅃ,ㅆ,ㅉ’ 등 된소리 표기를 인정했다.


푸케트(Phuket)가 푸껫이 되고 호치민(Hoa Chi Minh)은 호찌민이 된 것은 분명 현지 발음과 지나치게 동떨어진 것을 고치려는 의도다. 언젠가 중국어 표기에 ‘ㄸ’ 등이 등장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우리가 아무리 실제 발음과 가깝게 표기하려 해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너무 강박관념을 가질 필요는 없다. ‘빠리(Paris)’라고 굳이 고집하는 건 외국어 표기의 통일성을 기하기 위한 외래어 표기법의 취지에도 맞지 않다(여담이지만 나는 ‘마르크스’와 ‘맑스’가 같은 사람인 걸 대학생이 되어서야 알았다^^;). 다만 어문규범의 신뢰를 높이는 측면에서라도 너무 실제와 다르게 느껴지는 대목은 다듬어줄 필요가 있겠다.


실상 우리가 내세우는 원음주의 표기법에는 많은 예외가 있다. 스페인을 에스파냐로 고쳐 부르는 건 영어식 표현을 교정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지만 여전히 영어식 명칭은 곳곳에 만연하다. 베네치아라는 이탈리아어 명칭만큼이나 베니스라는 영어식 명칭이 많이 쓰인다. 영어식 비엔나와 독일어식 빈은 같은 도시다. 프랑스 경제학자 Walras는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발라’라고 해야하지만, 우리네 경제학 책에는 영어식으로 ‘왈라스’라고 소개하고 있다. 비단 영어식 표현만이 아니라 우리식으로 바꿔 부르는 고유명사도 적잖다. 우리는 닛폰이라 부르지 않고 일본이라고 칭하며, 도이칠란트 대신 독일을 선호한다. 몇 해 전 중앙일보에서 독일어에 어원을 둔 게놈(genom) 대신 영어식 지놈을 쓰자는 홍보를 한 적이 있었다. 정부·언론외래어심의공동위원회에서 이미 관용적으로 굳어진 게놈으로 통일하기로 결정해 논란이 일단락 났다. 이처럼 고유명사, 학술용어는 언중의 습관을 일차적으로 고려하는 게 옳다.


유럽 공통 화폐인 유로(Euro)의 경우 독일에서는 오이로, 프랑스에서는 외뢰, 이탈리아에서는 에우로 등으로 읽는다고 한다. 유럽에서는 원음주의보다는 자신들의 발음으로 변환하려는 경향이 있는 모양이다. 반면 북한에서는 철저한 원음주의를 써서 러시아를 로씨야, 멕시코를 메히코, 헝가리를 마쟈르, 폴란드를 뽈스카 등으로 표기하고 있다. 여기까지 살펴보고 나니 오히려 더 갈피를 못 잡겠다. 현행 로마자 표기법을 예외 없이 따르게 할 것인가 관행을 인정할 것인가를 놓고 어지럽다. 로마자 표기법의 허점이 적잖다는 걸 알면서도 일단 확정된 공적 규칙을 지켜왔듯이 외래어 표기법도 그런 노력을 기울이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중국의 인명과 지명을 어떻게 표기하느냐는 매우 복잡한 문제다. 똑 부러지지 않는다고 성내기 전에 한국과 중국의 애증 어린 관계를 조망해보는 것도 좋겠다. 아울러 한국어와 중국어의 비대칭성도 고찰해봐야 한다. 지난 2005년 1월 서울시는 서울에 대한 새로운 중국어 표기로 ‘首爾(서우얼)’로 확정해서 발표했다. 한청(漢城)이 입에 익은 중국 언중들의 습관을 바꾸는 건 쉽지 않을 게다. 서울은 그나마 형편이 나은 편이고, 그 밖의 우리 인명과 지명은 여전히 중국어 발음으로 읽힌다. 노무현(盧武鉉)은 ‘루우쉬안’일 뿐이다. 최익구(崔翼求)는 ‘추이이추(혹은 추이이치우)’가 되는데 중국사람이 나를 이렇게 부르면 처음에는 무척 어색할 듯싶다. 중국인과 형평에 맞게 우리도 한국어 발음으로 통일하자는 주장은 무척 설득력 있다.


훈민정음 해례본에서 “바람소리, 학의 울음소리, 닭 우는 소리, 개 짖는 소리일지라도 모두 소리나는 대로 쓸 수 있다(雖風聲鶴 鷄鳴狗吠 皆可得而書矣).”라고 자부했듯이 우리말의 표현력은 중국어를 비롯한 세계 어느 말에 견주어 뛰어나다. 중국인이 한자어로 된 우리의 인명과 지명을 자기네 발음으로 부르는 건 중화주의 때문만이 아니라 표의문자라는 언어적 특성 탓이기도 하다. 중국 입장에서 한국어 발음에 맞는 한자를 일일이 찾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중국인은 외래어를 자기식대로 음차하는 걸로 유명하다.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을 ‘커린둔(克林頓)’이라고 표기하고 맥도날드를 마이땅라오(麥當勞)로, KFC를 컨더지(肯德基)로, 코카콜라를 커커우커러(可口可樂)로, 피자헛을 삐셩커(必勝客)로 표기하며 외국어를 한자로 표기하는 기발한 재주를 뽐내고 있다. 과연 우리의 인명과 지명을 이렇게 음차해서 불러주기를 요구하는 게 마땅한지 좀 더 고심해야겠다.


내 이름의 경우 중국어 병음으로 cui yi qiu라고 쓰고 로마자로는 choi ik gu라고 쓴다. 현행 로마자 표기법을 따른다면 최씨는 ‘Choe’라고 해야하지만 이름자는 예외를 인정하는 게 적당할 듯싶어 아직은 고치지 않고 있다. 여하간 내 이름을 중국어로 한국어 발음대로 음차하기가 어렵다. ‘최’의 중국어 병음인 cui 와 비슷한 음가로 chui 정도가 있으나 본래 한자를 바꿀 만큼 발음 차이가 많이 나는 건 아니다. 한국어 발음으로 ‘익’에 해당하는 한자는 모두 yi로 발음된다. 더군다나 중국어 병음에는 i로 시작하는 것이 아예 없기 때문에 yi가 그나마 가장 가깝다. 굳이 받침을 넣자면 yin 정도가 가능할 게다. ‘구’의 경우에는 gu라는 병음에 해당하는 글자가 많아서 무리 없이 바꿀 수 있다. 종합하면 내 이름 석자 가운데 음차할 수 있는 건 한 자 뿐이다. 어떤 사람은 석 자 모두 가능하겠지만 어떤 사람은 한 글자도 근사치가 없을 수도 있다. 이럴 경우 중국어 발음으로 부르는 것보다 원음에서 더 멀어진 음차로 부르는 게 온당할 것인가. 가령 내 이름을 모두 음차해서 chui yin gu라고 한다고 할 때 양국은 동등한 위치가 되는 걸까? 그래도 한국의 유명인사나 주요 도시만큼은 ‘서우얼’처럼 음차해서 부르는 수고로움을 포기하지 말아야 하나.


현행 중국어 표기법도 이런 고민의 산물일 게다. 어느 나라 말이라도 소리나는 대로 옮길 수 있는 한국어의 장점을 국가적 자존심 혹은 언어 주권이라는 명분 아래 절제하고 감추는 게 나을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등소평(鄧小平)을 덩샤오핑이라고 원음에 가깝게 쓰고 읽을 수 있는 한국어의 우수성 때문에 행복한 고민을 하게 만든다. 한국어의 강점을 저들이 모르고 알아서 긴다고 생각할까 그게 걱정이다. 아마도 이를 염려한 사람들이 저우언라이를 주은래(周恩來)로, 류사오치를 유소기(劉少奇)로, 자오쯔양을 조자양(趙紫陽)으로 부러 지칭하는 것일 테다. 대한민국 언중은 어느 쪽에 손을 들어줄까? 어쩌면 우리가 한국어의 매력을 얼마나 알려 나가느냐도 이 지끈거림을 다스리는 관건이 될지 모르겠다. - [無棄]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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好學日記(07년 7월)

일기 2007. 8. 3. 07:11 |

070706
<평창 그리고>라는 제목으로 어느 익명게시판에 올린 글

평창이 아쉽게 졌습니다. 원래 스포츠와는 담 쌓고 지내는 저인지라 특별히 관심을 두지는 않았지만 평창 어린이들이 뚝뚝 흘리는 눈물은 가슴을 짠하게 합니다. 러시아의 막대한 로비자금이라든가 유럽의 지역주의 같은 풍문을 듣다보면 올림픽헌장이 규정하고 있는 올림픽정신은 어디에 가있는가 싶기도 합니다. 프리젠테이션 동영상에서 고 이영희 할머니가 북녘에 있는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보며 콧잔등이 시큰해졌어요.


이제 지난 일이니 솔직히 털어놓자면 한승수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위원장은 오래 전부터 양지를 찾아다닌 철새 정치인의 극치로 기억하고 있었던지라 강원도에 쓸 사람이 저렇게 없나 내심 투덜거리고 있었습니다. 비자금 조성 및 횡령 사건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박용성 두산중공업 회장은 평창올림픽 유치 활동 지원을 이유로 사면을 받아 제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죠. 이분들을 향한 제 서먹서먹함이 쉽게 가시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좀 덜 미워하는 계기가 된 거 같기는 하네요.


민주노동당이 이번 사안에 대해 내놓은 논평이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특히 유치 준비 과정에서 환경문제에 관한 염려가 적었다는 점을 지적하는 건 꽤 용기 있는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비용편익분석에서 환경 비용이 얼마나 고려됐는지 의심스러웠거든요. 아울러 월드컵, 아시안게임 유치 후 시설유지에 곤욕을 겪고 있다는 점을 들어 “국제체육경기가 많이 치러져도 그것이 우리 삶의 질을 개선되거나 쾌적하게 만드는 것과는 무관”하다는 논변은 꽤 설득력 있습니다.


인터넷 언론 프레시안에서 윤효원님의 글을 읽다가 2명 이상 복수의 IOC 위원을 둔 나라들 가운데 올림픽 참가 경험을 가진 운동선수 출신이 아닌 위원만을 둔 나라는 한국(2명)과 중국(2명) 말고는 없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한국의 경우 두 명 모두 대기업 회장 출신이며, 중국의 경우 두 명 모두 국가 관료 출신이라고 하네요. 포스트 김운용 시대를 맞아 우리네 스포츠 외교력은 어떤 식으로 신장시켜야 할지 고심해볼 문제입니다.


올림픽을 비판적으로 톺아보는 이런저런 시각들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습니다. 유치활동 동안 지자체의 행정력이 편중된 만큼 이제 그간 평창주민들에게 미뤄뒀던 복지후생을 챙겼으면 좋겠습니다. 하나가 된 평창주민이라는 구호도 좋지만 시골에 살면서 겪었을 평창주민들의 불편을 꼼꼼하게 살필 때가 아닌가 싶네요. 아마 그간 신경을 못 쓰셨을 법한 평창도서관의 도서 확충도 서두르시길 바랍니다. 끝으로 고운 정성을 보여주신 평창주민 여러분 고맙습니다.^-^


<한 줄 요약>
만일 네가 나와 다르다면, 너는 나를 해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풍요롭게 하는 것이다 - 생텍쥐페리


070714
오늘의 소장비평가들 가운데는 독자적인 사유 공간을 지닌 사람이 별로 많지 않다. 그들 중 상당수가 즐겨 참조하는 이론가들의 이름을 한번 보자. 너도나도 김윤식, 김현, 백낙청이요, 너도나도 루카치, 바흐친, 보드리야르, 제임슨, 푸코다. 왜 이렇게도 획일적일까? 이보영이나 이상섭이나 천이두의 업적(그것들은 다 누구누구의 업적 못지않게 소중한 업적들이다)에 큰 관심을 기울이고 그것으로부터 귀중한 깨달음을 얻어내는 사람은 왜 안 나오는가? 유행도서 목록에 올라 있지 않은 외국인 학자의 사상에서 뜻있는 참조사항을 구해오는 사람은 왜 이렇게도 적은가? 남이 다 읽는 책만 읽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얘기란, ‘남이 다 할 수 있는 얘기’의 테두리를 넘어서기 어려운 게 아닐까? 김윤식이나 김현이나 백낙청은 남이 다 읽는 책만 읽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런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들은 김윤식이 되고 김현이 되고 백낙청이 된 것이다. 그런데 김윤식, 김현, 백낙청을 존경해서 그들의 책을 즐겨 읽는다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 정작 그들의 본질은 배우지 않고 있으니 도대체 어찌된 영문인가?
이동하, 『홀로 가는 사람은 자유롭다』, 문이당, 1996, 191쪽


고종석 팬카페에 언어의 마술사님(이하 언마)이 올려주신 <고종석을 넘어서>라는 글에 인용된 글이다. 언마님은 “고종석을 읽고서 고종석 이상이 보여야 한다”는 지인의 충언도 언급했다. “지금의 나에게 고종석은 무조건적인 복종의 대상이 되는 것”인데 “그와 다른 시각으로 고종석을 비판한다는 것은 지금의 내게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임을 돌아보는 글을 읽고 가슴이 짠했다. 따져보니 나는 이런 반성적 물음을 던질 용기조차 없었다. 나는 고종석 선생님을 극복하겠다는 의지가 희미하고, 고 선생님을 넘지 못했다고 크게 좌절할 거 같지도 않다. 고 선생님을 넘어서야 한다는 명제는 좀 깔끄럽고 삭막하다. 나는 이 명제 자체는 추구할 만하지만 그게 또 하나의 강박관념이 되어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사람의 (노력을 포함한) 재주가 불공평하다는 걸 실감한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사람 가치의 우열을 따지는 건 매우 어렵고 조심스런 문제다. ‘고종석 이상’이라는 개념도 좋지만 ‘고종석과 다른’ 매력을 만들어보는 것도 꽤 도전해볼 만한 일이 아닐까. 인용문의 취지나 언마님의 고심도 결국 대가(大家)와 다르게 보는 안목을 갖기 위한 노력이니 만큼 결론은 대동소이한 셈이다. 설령 차별화(?)에 실패한다고 해도 나쁠 건 없다. 세상에는 지식 도매상보다는 지식 소매상이 많고, 지식 소매상보다는 지식 유통상이, 그보다는 지식 소비자가 더 많기 마련이다. 꽤 괜찮은 유통상이나 소비자가 된다고 해서 그 사람의 무게가 많이 낮아질 거 같지는 않다.


아Q의 정신승리법은 자신의 현실 속의 패배를 머릿속에서 승리인 것처럼 전환하는 기술이다. 정신승리법의 폐단은 덜 배우게 만들고, 덜 고치게 만드는 데 있다. 별 것도 아닌 차이점을 과대포장해서 스스로를 상찬하거나 앵무새처럼 외우는 삶도 그 나름의 의미가 있다며 안일한 상대주의에 빠지는 것 같은 게 정신승리법의 징후일 게다. 틈만 나면 나를 파고드는 정신승리의 유혹을 떨쳐내고 내 스스로 사고하려면 얼마나 더 뼈를 깎는 소리가 들려야 하는 걸까? 그것이 독창적인 산출물은커녕 상식을 건사하고 양심을 견지하는 것에 지나지 않더라도 말이다.


070717
앤드류 헤이우드의 『정치학』을 발췌독하다가 환경주의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맘에 드는 대목을 발견했다. 생태주의자에는 “얕고 옅은(shallow and light)” 사람과 “깊고 짙은(deep and dark)” 사람이 있다는 분류다. 사실 모든 주의자 아니 모든 보통 사람들도 이렇게 나눠봄직 하다.


얕고 옅다 보면 합리적 이기주의가 기득권 옹호와 현상유지를 정당화하는데 복무하는 현실 추수주의로 전락할 염려가 있다. 깊고 짙다 보면 실질적 행동주의가 경직되고 독단적으로 변해 근본주의로 빠질 염려가 있다. 이 사이를 잘 조율할 수 있다면 함민복 시인의 시구대로 모든 경계에서 꽃을 피울 수 있으리라.



070718
남의 생일 잘 안 챙기는 내가 제 생일을 끔찍이 여긴다면 민망한 일이다. 무덤덤하게 보냈지만 생일 축전은 과분해서 고맙다. 얻어먹은 점심도 여느 때보다 달았고, 순두부찌개와 유부초밥이 함께 한 저녁도 황홀했다. 이맘때 늘 하는 말이지만 다음 생일 때는 “철” 좀 들기를 바란다. 철에도 귀천(貴賤)이 있다면 너무 야박한 소리겠지만 좋은 철을 많이 품고 나쁜 철은 조금만 가지도록 노력해야겠다. 숙명 혹은 사명이란 말은 참 무섭지만 그래도 내게 허락된 “가지 않을 수 없던 길”이 무엇인지도 찾아봐야겠다.


학교에서 만난 친구와의 담소 속에서 내가 그간 무능하고 미성숙하다고 생각했던 어느 분에 대한 악감정이 과도한 것임을 깨달았다. 그 때 당시 그 분과 난 약간 언쟁이 붙었고 나는 “할 수 없군!”을 외치며 미련 없이 돌아서겠다며 물러났었다. 지금 돌아보니 오만했던 내 잘못이 더 크다. 누군가를 함부로 미워하는 걸 경계하는 계기로 삼자. 원망을 버리니 이렇게 홀가분한 것을 이제야 알겠다. 생일 같은 개인적 기념일에 평소 탐탁지 않게 여기던 인물에 대한 언짢은 감정을 눅이는 시도를 해보는 건 참 멋지다. 루쉰은 자신의 비판자들을 향해 “그대로 나를 증오하라. 나 역시 하나도 용서하지 않겠다”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내 미움은 수술용 메스처럼 적재적소에 쓰였으면 좋겠다.


제 뼈와 살과 피와 땀이 되어 주시는 스승님들, 형누님들, 벗님들, 동생들 모두 고맙습니다.^0^


070725
미래창조대통합민주신당(가칭)이라니, 외우기도 힘들다. 이른바 범여권의 이합집산이 이제 얼추 정리가 되는 모양이다. 17대 총선에서 152석을 얻었던 정당이 이제 원내 3당으로 밀려나는 역사적인(!) 순간이다. 김한길 포함 20명의 의원들은 열린우리당을 나온 다섯 달 사이에 탈당을 두 번 하고, 새로운 정당에 세 번 몸담는 대기록(?)을 세웠다. 누구에게나 제 밥그릇은 중요하다, 아니 숭고하다. 하지만 세금으로 먹고사는 공인이라면 그 밥그릇의 숭고함을 조금 낮출 필요가 있다. 어쩌면 지금 목격하는 희대의 촌극은 세금의 지엄함을 망각한 이들이 너무 많은 권세를 누리고 있기 때문에 벌어지고 있는 지도 모른다. 2007년 대선과 2008년 총선으로 이어지는 선거 일정 속에서 행정부, 입법부, 지방권력까지 모두 장악한 수구세력이 등장할지 모른다는 우려는 품어봄직 하다. 그런데 그걸 막겠답시고 나선 인물들의 행태가 그리 떳떳하지 못해 나를 서글프게 한다.


스티븐 런치만이 쓴 『1453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2004, 갈라파고스)에는 비잔티움이 서방의 지원을 얻기 위해 교회통합 문제에 매달리는 대목이 나온다. 동서 기독교계는 각종 교리 해석과 실천 문제를 놓고 갈렸다. 속인 사제의 혼인에 대해 논쟁했고, 성찬용 빵이 발효된 것이어야 하느냐 아니냐를 놓고도 다퉜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교권의 문제였다. 로마 주교(교황)의 위상을 놓고 양측이 물러설 수 없었다. 동방 정교회는 모든 주교는 기본적으로 동등하다고 믿었고, 로마 주교는 수석의 지위를 가질 뿐 최고의 수장으로 여기지 않았다. 이와 반대로 교황의 절대적 권위를 주창하는 서방 교회는 이를 양보하지 않았다. 비잔티움의 요안네스 8세는 서방 국가들의 지원을 꾀하기 위해 동서 교회통합을 억지로 추진했다. 비잔티움의 많은 지식인들이 반발했고 시민들은 분열했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투르크에게 함락될 때까지 그토록 갈망하는 서방의 도움은 거의 없었다고 역사는 증언하고 있다. 신뢰와 존중을 바탕으로 한 화해가 아닌 꿍꿍이로 맺어진 통합이 얼마나 실속 없는지를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까 싶다.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기 전날 밤 소피아 성당은 북적였다. 라틴인과 통합론자들이 더럽힌 곳에서 예배를 볼 수 없다는 독실한 그리스인들도 이날만은 소피아 성당에서 기도했다. 교회통합을 반대했던 사제들도 교회통합파와 함께 예배를 보았다. 글쓴이는 콘스탄티노플에서 동서 교회통합이 이루어졌다고 사뭇 비장하게 전한다. 그러나 이건 미화된 묘사일 뿐 하룻밤의 일치로 이네들의 갈등이 다 메워지지 못했음은 분명하다. 다만 외침의 공포로 말미암아 내부에서 티격태격할 동력을 잃었을 뿐이다. 제국의 최후를 함께 하는 유대감 정도로 이해하면 그만이다.


뜬금없이 옛날 이야기를 꺼내든 까닭은 오늘날의 현실이 갑갑해서다. 입으로는 수구 세력과 일전을 불사하겠다는 이들이 내부에서 투쟁하는 모습을 보는 건 괴롭다. 이들에게는 소피아 성당에서의 맞잡음 정도도 보이지 않는다. 특히 여권 일각에서 한솥밥 먹던 동지 가운데 몇몇을 친노파라고 딱지를 붙여 놓고 참여정부의 모든 과오를 덮어씌우는 희생제의를 펼치는 건 추악하고 민망하다. 참여정부와 열린우리당의 공과에서 자유로운 신당을 만들려는 욕심은 너무 지나치다. 책임질 줄 모르는 사람에게 나를 대리하게 만든다는 건 수치스럽다. 비록 정치적 측면의 개혁에 치중했다는 비판을 받지만 기간당원제 확립이나 지역주의 청산, 깨끗한 정치 구현 및 각종 개혁 입법들은 신당도 이어받아 마땅한 과제들 아닌가. 기왕지사 신당을 하겠다고 나선만큼 이제 차분히 정책으로 승부하길 바란다. 당최 기존 정당들과 얼마나 차별화 하는지 흥미롭게 지켜보겠다. 아참 점심식사는 잡탕밥을 권한다.^0^


070729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무장세력에 의한 한국인 피랍사태가 계속되고 있다. 지켜보는 사람의 애간장이 탄다. 지금 고초를 겪고 있는 분들이 죄를 넘어선 벌을 받고 있다는 건 또렷하다. 한국 사회의 상층부에 있는 사람들이 도무지 제 죄값을 제대로 치르지 않는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이들의 수난은 너무 지나치고 안쓰럽다. 일단 무탈하게 돌아오기를 기원하고 그 다음에 비판하자는 주장도 일리가 있지만 그들은 비판을 받을 필요가 없을 만큼 이미 많은 고통에 시달렸을 게다. 이번 사태를 기점으로 개신교의 배타적 선교 행위 등에 대한 반감이 폭발한 것은 우리 사회의 소통구조가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지에 대한 방증이기도 하다. 이런 문제 제기가 평소에도 좀 있고 개신교인들이 이를 수용하려는 노력을 꾸준히 기울였다면 이런 넘치는 반응은 좀 줄일 수 있었으리라.


샘물교회 관계자 등의 분들이 봉사를 강조하는 건 민망한 일이다. 나는 범속한 인물인지라 순수한 봉사 같은 말을 못 믿겠다. 설령 그 순수함을 인정하더라도 그 간의 편협과 오만에 대한 면죄부가 되지는 않는다. 궁극적 목적이 선교라면 얼마나 그 순수성을 인정할 수 있을지는 어려운 문제다. 일제 강점기 때 신사 참배 강제는 과연 순수했을까? 조선 성리학자들의 사문난적 타령은 과연 순수했을까? 정도전의 <불씨잡변>은 순수한 학문적 동기일까? 나는 모든 이들이 봉사라는 말 대신 선교라고 해야 마땅하다고 주장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끝끝내 봉사라는 말에만 갇혀 있는 분들이 상대적으로 더 가엽다. 순수함이 극단주의자들의 도피처가 되는 경우는 늘 있어 왔다. 순수는 면책의 도구가 아니다.


여하간 선교가 명확하다고 하더라도 선교단의 활동은 봉사와 매우 흡사했을 공산이 크다. 적어도 한국에서 볼 수 있듯이 불신지옥 운운하는 저열한 행동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한양대 이희수 교수님에 따르면 “이슬람 국가에서는 선교라는 것이 이슬람법을 위반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세속법에도 위배되는 행위”라고 한다. 기독교 선교뿐만 아니라 이슬람 선교도 금지되어 있다는 설명이 놀랍다. “신앙은 개인의 영역에서 머무는 것이기 때문에 신앙을 공적인 영역으로 끌어들여 강제해서는 안 된다는 이유”라니 선뜻 믿기지 않는 감이 있지만. 적어도 민간인을 살상하는 광신도들에게는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어쩌면 그들이 외세를 반대하는 독립투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탈레반 집권 시절의 철권 통치를 살펴보면 그들은 문화의 특수성을 주장할 자격이 없어 보인다. 미국도 심심지 않게 어기는 제네바 협약을 탈레반더러 준수하라고 촉구하는 것 또한 허망하니 답답하다.


나는 인질들의 무사 귀환을 고대하지만 그 이상의 적극적인 관심을 보일 용기는 없다. 이네들이 돌아오면 하나님의 은총을 운운할 게 틀림없다는 식의 댓글을 많이 읽었다. 연말 시상식에서 팬들보다 하나님께 먼저 영광을 돌리는 연예인들을 죄다 탐탁지 않게 여기는 나 역시 그런 광경이 펼쳐진다면 많이 언짢을 거 같다. 나는 나중에 덜 실망하기 위해서라도 무덤덤하게 비켜서 있고 싶다.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선의다. 더군다나 나는 아직도 강제 예배에 반대하며 단식 투쟁을 해야했던 강의석님이 잊혀지지 않는다. 개정 사립학교법에 반대하던 종교 재단 관계자들의 탐욕은 얼마나 끔찍한 것이었던가.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의 벗이었던 예수님의 삶을 대강은 들어 알고 있다. 제3자 입장에서 주제넘은 참견이겠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이 기득권을 옹호하고 수구세력에 복무하는 건 그리 떳떳하지 못한 일이다.


고귀한 생명이 위협받고 있는 지금 한국 개신교의 천격(賤格)을 고쳤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얼마나 불순한가. 하지만 그 불순함은 또한 얼마나 마땅한가. 이런 불순함이 우리 일상에서 자유롭게 논의되길 바란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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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개소문 그리고 평화

문화 2007. 7. 15. 04:52 |

1. 연개소문 평가의 어려움
얼마 전 종영된 SBS 대하사극 <연개소문>은 연개소문을 긍정적으로 재조명했다. 비록 단면적 시각을 많이 노출하기는 했지만 MBC 드라마 <신돈>에 이어 문제적 인물을 재인식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연개소문에 대한 평가는 무척 엇갈린다. 민족의 자주성을 드높인 영웅이라는 찬사가 있는가 하면 사사로운 권력욕으로 망국을 가져다 온 독재자라는 견해가 버성긴다. 나는 개인적으로 연개소문이라는 인물에 강한 매력을 느낀다. 그가 한국사에서 품었던 이상이 빼어났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존재 자체가 드물었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연개소문이 사망할 때까지 당나라는 고구려를 상대로 단 한 번도 승리하지 못했다(연개소문의 사망 시기에 대해 여러 의견이 있는데 665년에서 666년 초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 통설이다). 연개소문은 수나라군보다 더 강성해진 당나라군을 상대로 노대국(老大國)의 자존심을 지켰다. 고구려의 패망에 당시 집권자였던 연개소문의 책임이 적잖다는 판단은 적절하지만, 을지문덕이나 안시성주 양만춘에게 쏟아지는 경애에 견주어 연개소문은 상대적으로 폄하된 감이 있다.


『삼국사기』에는 연개소문이 잔인하고 포악한 독재자로 그려져 있지만 그 편찬자들이 사용했던 거의 모든 사료는 『자치통감』, 『북사』, 『수서』, 『구당서』, 『신당서』 등 중국 측 자료였다. 연개소문에 번번이 패한 중국인들의 증오에 찬 묘사를 그대로 끌어다 쓴 건 김부식을 위시한 삼국사기 편찬자들의 나태다. 설령 자료가 부족해 불가항력적이라고 해도 비판적 검토가 너무 부족하다. 다만 김부식도 그게 좀 너무했다 싶었는지 “비록 끝내는 스스로 탈출해 나왔으나 두려워함이 그와 같았는데 『신당서』, 『구당서』와 사마광의 『자치통감』에는 이 일을 말하지 않으니 어찌 자기 나라를 위해 부끄러운 일을 감추기 위함이 아닌가?(雖終於自脫, 而危懼如彼, 而新舊書及通鑑, 不言者, 豈非爲國諱之者乎)”라고 논하며 중국측 기록을 의심한다. 그러나 김부식은 “소문은 일신을 보전해 집에서 죽었으니 요행으로 모면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라며 연개소문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을 드러낸다. 『삼국유사』는 불교를 억압하고 도교를 진흥시킨 것에 대한 비판이 도드라지게 서술되기도 했다.


『동국통감』에서 권근은 더 엄격한 유교적 잣대를 들이대면서 김부식이 송나라 왕안석은 연개소문이 비상한 인물이었다는 평을 인용한 것을 비판한다. 난적의 괴수를 비상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천하고금에 난신적자가 누구인들 비상인(非常人)이 아니겠습니까(天下古今亂臣賊子孰非非常之人乎)”라며 언짢아한다. 조선 후기까지 대부분의 사서에서 연개소문은 강상(綱常)의 도리를 어지럽힌 독재자라는 프레임을 벗어나지 못한다. 신하로서 임금을 시해하고 중국에 고분고분하지 않았다는 원죄는 충성과 사대의 입장에서 용납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을 호되게 겪은 조선의 지식인들이 고구려의 강대한 군사력에 대한 긍정적 평가를 하기 시작함으로써 연개소문에 대한 호의적 반응도 드문드문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러나 고구려가 강성함만 믿고 수당과 전쟁을 벌였다는 인식 자체는 큰 변화가 없었고 이런 맥락에서 연개소문에 대한 악감정도 비슷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19세기 말 이후 민족주의 사학자들에 의해 연개소문이 재평가된다. 신채호 선생은 “우리 4천 년 역사에서 첫째로 꼽을 만한 영웅”이라 하였고, 박은식 선생은 “독립자주의 정신과 대외경쟁의 담략을 지닌 우리 역사상 제1인자”, 문일평 선생은 “천고의 영걸(英傑)”이라고 평했다. 특히 신채호 선생은 “호족공화제(豪族共和制)라는 구제도를 타파하고 정권을 통일”했으며 “서수남진(西守南進) 정책을 변경하여 남수서진(南守西進) 정책을 세웠으며” “당 태종을 격파하여 중국 대륙 침략을 시도”했다는 진취적 기상을 기렸다. 일제 강점기기의 이런 변화는 독립심을 고취하기 위해 외세를 극복하기 위한 의도적 부각이다. 시대에 따라 동일한 인물의 평이 이렇게 나뉜다. 역사의 재해석은 우리가 어디에 가중치를 두고 역사에서 교훈을 얻고 경계로 삼을 것인지를 가늠하는 중요한 과제다.


오늘날도 연개소문에 대한 평가는 다채롭다. 다만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반발심리가 다소 작용한 탓인지 이전보다는 긍정적으로 보려는 시각이 좀 더 늘은 듯싶다. 개관사정(蓋棺事定)이라고 하지만 사실 그 마저도 어렵다. 인간은 불완전할뿐더러 변화의 궤적을 더듬기도 힘들지만 다면적인 인간의 속살을 헤집기 위해서는 선입견도 다독여야 한다. 단재는 『조선상고사』에서 “시국의 형편이 연개소문을 낳음이요, 연개소문이 시국의 형편을 낳음이 아니다”고 말한다. “고대에 이른바 영웅·위인들이 거의 시국의 형편이 낳은 창조물이요 그 자체의 위대한 것은 없을 것”이라는 논리다. 어쩌면 인간이 당대의 현실 제약에서 밀고 당기듯이 역사 속 인물에 대한 풀이도 당대의 시대정신에 맞게 취사선택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서거정은 <삼국사 읽다讀三國史>는 시에서 수와 당에게 어부지리를 안겼던 삼국의 인물들을 향해 “반은 영웅이요 반은 흉역이다(半是英雄半兇逆)”라는 탄식을 남겼다. 나도 이 양다리에 동참하고 싶어진다.^^;


2. 고-당 대전의 전개와 고구려의 길
연개소문 정권을 평가하는 중요한 기준 가운데 하나가 외교정책이다. 연개소문의 대외 강경책이 고구려의 패망을 앞당겼다는 주장이 적잖다. 사실 그렇게 따지자면 598년 영양태왕이 요서 지역을 선공(先攻)한 것에서부터 거슬러 올라가야 할지도 모른다. 수나라와의 4차 전쟁이 당나라와의 대결에서 허점을 노출하게 만든 원인이 되었음은 자명하다. 승리 속에서 패망의 요소를 배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 태종 이세민은 황제천가한(皇帝天可汗)을 자임하며 한족과 유목민족 두 세계의 최고 지배자임을 지향했다. 대당 온건책을 구사했던 영류태왕 집권 시절인 631년에 당나라는 고구려의 전승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경관(京觀)을 허물고, 641년 사신 진대덕을 통해 고구려 지리를 염탐한다. 이세민은 여건이 구비되면 고구려로 향할 뜻을 여러 번 천명하고 있다. 연개소문이 전쟁을 좀 피하려는 시도를 했더라도 얼마나 통했을지 회의적이다. 가령 1차 고-당 전쟁에서 승리한 645년 이후 고구려는 당나라의 후속 침입을 방어하면서도 646년, 647년, 648년, 652년, 656년에 계속해서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면서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다.


안시성 전투로 유명한 1차 고-당 전쟁에서 『자치통감』, 『신당서』 등에서는 당군의 피해가 2,000명 남짓으로 기록하고 있다. 고구려군 전사자가 4만 명이라고 할 때 압도적인 승리인 셈이다. 그런데도 당 태종 이세민은 눈물을 흘리며 고구려 원정을 후회했다고 하니 이상한 일이다. 그는 형제를 죽이고 권력을 장악한 현무문의 변 등의 기록을 직접 보고 고치게 했던 만큼 역사 왜곡의 전과가 있다. 자신이 직접 참전한 전쟁의 기록을 윤색했음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하기야 대개의 중국 기록이 늘 그런 식이다. 타국에게 패전할 때 추위와 역병으로 둘러대기 일쑤다. 중국의 사료를 볼 때 비판적 시각을 견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다. 승자의 기록으로 패자의 역사를 온전히 복원할 수 있다고 여기는 건 나태한 발상이다. 중국측 사료에 갇히는 건 좀 과장해서 제국주의를 은연중에 용납하고, 식민주의에 빠질 염려가 있다. 섬세한 문헌비판이 필요하다. 실제로 중국의 경극과 희곡에서 연개소문이 이세민 일당을 패주시키는 이야기가 전하기도 한다(비록 악역으로 비하하고 죽임을 당했다고 왜곡하기는 해도 말이다).


660년 당나라는 백제를 거꾸러뜨린 여세를 몰아 재차 고구려를 침공한다. 2차 고-당 전쟁에서 당군은 고구려의 견고한 요동 방어망 대신 서해를 건너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을 직접 향하는 새로운 공격로를 개척했다. 백제 멸망으로 고구려를 도울 수 있는 우방국이 거의 없는 형편이었다. 도리어 백제 부흥을 위해 군대를 파견해야 했으므로 고구려에게 부담이 되었을 뿐이다. 반면 당은 더 강력해진 신라를 병참기지 및 원군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열악한 상황에서 662년 연개소문이 평양성 근처 사수(蛇水)에서 옥저도총관 방효태와 그 아들 13명을 포함한 당군 전원을 궤멸시킨 것은 을지문덕의 살수대첩과 어깨를 나란히 할만하다. 안시성 전투 못지 않은 사수대첩의 중국측 기록이 소략하다는 것은 그만큼 저들의 패배가 심대했음을 말해주는 건 아닐까. 평양을 포위하던 소정방은 신라군이 제공한 양식에 힘입어 꽁무니를 뺐다고 전한다. 소정방군이 큰 눈을 만났다는 이야기는 빠지지 않는다.^^;


연개소문 사후 용렬한 자식들의 권력 분쟁으로 촉발된 3차 고-당 전쟁으로 고구려는 막을 내렸다. 이세민이 630년 동돌궐을 이긴 때부터 670년 설인귀 휘하의 당군 10만이 대패할 때까지 40년 간 당나라의 국세는 전성기였다고 평가된다. 690년 성신황제(聖神皇帝)에 오른 측천무후 집권 초기만 잘 넘겼다면 고구려도 재도약의 발판을 마련해봄직 하다. 그러나 이런 가정은 얼마나 부질없는가. 고구려라고 당나라의 연전(連戰)을 희망해서 치른 것을 아닐 게다. 중국 중심의 일원적 천하관을 실현하려는 당나라의 침략 야욕은 지탄받아 마땅하다. 고구려 망국 30년만인 698년 발해가 건국된 점을 봐도 알 수 있듯이 당나라는 고구려를 멸망시켜도 그 땅을 온전히 지배할 능력도 의지도 없었다. 고-수, 고-당 대전을 배울 때 수나라와 당나라의 명백한 침략 야욕을 규탄하는 걸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 고구려 말기의 사적을 돌아보며 민족주의를 부추긴다는 둥의 볼멘 소리가 아쉬워서 해본 소리다. 누가 평화를 파괴한 약탈자인지는 또렷하다.


연개소문 정권에 대한 단행본을 낸 김용만 교수는 고구려와 신라와 국제정치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다름에 주목했다. “동아시아 최대의 문명전쟁에서 한쪽이 사라질 때까지 싸움은 계속된 것”이며, “고구려는 당나라를 물리치는 것으로써 자국의 안정과 번영을 추구할 수밖에 없었다”는 언명은 그간의 고정관념을 흔든다. 중국 중심의 일원적 세계관과 고구려 독자노선의 다원적 세계관의 충돌은 피하기 어려웠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과연 고구려의 입장에서 신라와 같은 친당 외교가 어느 수준까지 가능했을지 헤집다 보면 이 혈전을 좀 더 입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다. 고구려는 김춘추의 길을 걷지 않아서 망한 것이 아니라 연개소문의 길을 유지하기 위한 조율에 실패해서 망했다고 보는 게 더 적절하다. 아니 좀 더 정확히는 연개소문이 고구려가 가지 않을 수 없었던 길을 걸었던 것이지만.


3. 연개소문 정권의 한계
나는 연개소문 정권의 한계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귀족연립체제의 모순을 극복하는 제도개혁이 아니라 사적 권력기반을 강화하는데 치중했다. 시스템의 개편에 집중하지 않고 1인 개혁에만 몰두함으로써 자신의 사후에 불거질 혼란에 대한 면밀한 준비가 없었다. 연개소문의 대내 정책은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도교진흥책 정도를 들 수 있겠다. 도교의 수입은 대당 유화책의 대표 사례라고 보기도 하고, 반체제, 반문화적 이념을 독재정치에 이용했다는 설도 있고, 불교계의 반발을 사서 지식인들의 분열을 유발했다고 평하기도 한다. 별다른 자료가 없는 판국에 연개소문의 비전이나 철학을 읽었다고 한다면 억지일 게다. 그러나 특별한 대내정책이 드러나지 않은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연개소문이 정권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허비한 공력을 대강 짐작해볼 수 있다. 현상 유지에 안주하기에는 당시 국제정세는 너무 격동적이었다.


『일본서기』에는 연개소문이 죽으면서 세 아들을 불러 “너희들은 고기와 물과 같이 서로 화목하여 작위를 다투지 마라. 만약 그렇지 않으면 이웃 나라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고 유언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유언 자체는 멋진 말이지만 가족의 집권에 집착하는 모습을 엿볼 수도 있다. 그 또한 전근대 사회의 지도자의 보편적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 아들들에게 중요한 직책을 수여하고 그들로 하여금 권력을 세습하게 했으며, 태막리지(太莫離支), 태대대로(太大對盧) 등 집권을 위한 관직을 새로 만들어 취임하는 등 권력을 독점함으로써 추종 세력의 발판을 넓히지 못하고 귀족세력의 반발을 유발했다. 연개소문 사후에 벌어진 자식들 사이의 골육상쟁은 개인의 카리스마에 의지한 리더십이 얼마나 허약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연개소문은 자신이 그토록 지켜내려 애썼던 고구려의 존속을 위해 좀 더 세밀한 지도력을 발휘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취약한 정통성이 끝내 그의 발목을 잡았다. 당의 침입에 맞선 것이 결국 정권 연장의 수단이라고 평가절하 됨도 이 때문이다.


연개소문은 분명 장군으로서의 자질이 출중했고, 당나라의 패권주의에 맞서 외교적, 군사적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하지만 거란족에 대한 영향력 다툼에서 당나라에 패배하고, 당을 견제할 동맹국 설연타의 멸망을 지켜봤으며, 백제의 붕괴를 막지 못하고 백제 부흥 운동도 성사시키지 못했다. 차츰차츰 불리해지는 국제 정세를 획기적으로 돌이키지 못한 것은 뼈아픈 실책이다. 아울러 연개소문은 고-수 전쟁과 1차 고-당 전쟁에서 승리를 가져다준 요동 방어망을 과신하다 당나라의 백제 침공이라는 묘수에 결정타를 당했다. 고구려의 관성이 당나라의 혁신을 이겨내지 못했다. 일목난지(一木難支)라고 했다. 고구려 시스템 자체의 문제를 연개소문의 탓으로 돌리는 건 지나친 처사다. 최고 권력자들의 다툼이 아무리 심했던들 연개소문 사후 3년 만에 나라가 망한 것은 70년에 걸친 전란으로 말미암은 고구려의 내상이 만만치 않았음을 보여준다.


연개소문의 결정적 실책으로 신라와 척을 진 것을 많이들 꼽는다. 신라와 백제 가운데 하나를 택해야 했다면 해상 방어망에 유리한 백제를 선택한 것은 크게 그릇된 판단은 아니다. 『삼국사기』 열전에 수록된 신라측 인물의 전사자 대부분이 백제와의 전투 중에 죽은 것을 볼 때 백제와 신라의 극한 대립은 연개소문이 양자택일을 해야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음을 추론하게 만든다. 연개소문이 신라와 백제 사이의 갈등을 조정할 만큼의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지는 않았다. 문제는 동맹의 견고성이었다. 동맹국인 백제가 존망의 위기에 빠졌을 때 고구려의 대응이 너무 없었음을 비추어 볼 때 신라와 당과 같은 결속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오늘날 삼국에게 하나의 민족이라는 당위를 들이대는 건 무모한 일이라는 건 상식이 된 듯싶다. 그렇다고 쳐도 어느 정도 존재했을 삼국의 동류의식은 어떤 형국이었을까. 연개소문이 고뇌했던 삼국의 대립상은 외부의 강적에 대한 견제와 어떤 차이를 보여주고 있는 것일까. 나당연합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연개소문의 한계는 이런 궁금증을 자아낸다. 그는 적어도 삼국 통합의 의지까지 품지는 못했던 듯싶다.


강화도에 틀어박혀서 정권 연장에만 급급했던 고려 최씨 무인정권을 반추해봐도 연개소문의 처신은 보아줄 만한 것이 많다. 비록 왜와 청의 침략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하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위정자들이 보여준 태도를 곱씹어봐도 그렇다. 선조는 여차하면 명으로 도망갈 궁리를 했으며, 인조는 굴욕적 항복을 할 때까지 무책임했다. 연개소문 부자는 전장터를 누볐다. 둘째 아들 연남건은 침략의 빌미를 제공하고, 당나라의 싸움에서 번번이 패전했다고는 하지만 그가 있어 고구려의 최후가 부끄럽지 않았다. 물론 연개소문가에는 당에 협력한 매국노 연남생이나 신라로 재빨리 투항한 연정토 같이 변변치 못한 인물들도 있었다. 그러나 최후까지 평양성을 사수하며 고구려 패망에 책임을 진 거의 유일한 지도층이었던 연남건의 존재는 연개소문 정권의 의연함을 상징한다. 설령 권력 유지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하더라도 패배가 임박한 순간에 제 자리를 늦게까지 지켰던 사람에게 애틋한 감정이 생기는 건 막을 길이 없다. “질 줄 알면서도 싸워야 할 때가 있다”는 바이런의 말을 되뇌기는 쉽지만 실천하기는 어렵다. 고구려사를 그리워할 때 연남건의 이름도 함께 기억했으면 좋겠다.


4. 고구려 패망과 삼국통일의 의의
우리 역사에서 고구려가 차지한 무게감 때문에 고구려의 패망을 돌아봄은 아쉬움이다. 신라가 생존을 위해 당 중심의 국제질서에 편입되었다면 고구려는 다원화된 천하의 한 중심으로서의 위상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물론 다원화라는 말을 쓰는 건 조심스럽다. 고구려가 국제정치 상의 다원주의라든가 다극화 수준까지 꾀한 것은 아니다. 자국 중심의 일원적 천하관을 둘레에 강요한 서토(西土)의 무리들과 구분하는 의미에서 독점적 천하관 대 과점적 천하관으로 구분해볼 수도 있겠다. 조중동의 언로 과점이 그리 바람직하지 않지만 만약 이 세 신문이 하나였다면 더 끔찍한 상황이 벌어졌을 것은 자명하다. 이처럼 고구려의 과점적 천하관은 오십보 백보이기는 해도 중국의 독점적 천하관보다 좀 더 진일보한 면이 있다. 고구려의 멸망으로 중화문명의 독주를 막을 세력이 없어졌다. 중국은 이후 줄곧 지배세력만 교체된 채 문화적 우위를 독점했다.


고구려의 소멸은 동아시아의 문화적 패권주의를 강화시켰다. 동아시아 문명의 다양성이 감퇴된 측면에 앞서 우리에게 뼈아픈 것은 고구려 문명을 제대로 계승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조선시대의 소중화(小中華)라는 기형적인 자부심이 아닌 당당한 문명 주체로서의 정체성을 이어가지 못했다. 유구한 역사에서 이길 때가 있으면 질 때도 있다. 고구려가 졌다는 사실 자체보다는 고구려의 패배를 새로운 전기로 삼지 못한 것에 대한 반성이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앞으로라도 치밀한 기록을 남기는 국가 정책적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많이 나아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꼼꼼한 기록을 남기는 데 부족한 점이 많다. 치밀한 기록은 우리 사회 다양한 분야에서의 책임성을 높여줄 것이다. 당파성에 함몰되지 않고 불리한 내용도 가감 없이 남기는 현대판 사관은 불가능한 꿈일까. 이세민이 성군의 표상으로 과대 포장되고 연개소문이 악마성의 표지로 전락한 것은 결국 기록의 차이다. 기록은 국력이다.


역사는 신라의 손을 들어줬다. 신라의 대안이 더 현실 적합성이 높았는지 모른다. 중화문명은 그만큼 대단하고 막강했음을 솔직히 시인한다. 그러나 이는 결과론적인 선택이다. 역사는 결과의 학문이라고 하지만 성과만을 찬양하며 과정을 무시하는 건 아니리라. 그렇다고 신라의 외세 이용을 반민족적 망동으로 치부하는데 동의하지 않는다. 589년 수 문제 양견이 서토를 통일하고 오랜 분열의 시대에 마침표를 찍었을 때 구심력보다는 원심력이 더 크게 작용하던 고구려, 백제, 신라 또한 분열보다는 통합을 강요받게 되었다. 비록 그 통합이 우리가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비교적 나쁜 쪽으로 귀결되었기는 해도 통합은 당대의 핵심과제라 판단된다. 통합 국면을 적극적으로 대응한 신라의 정성을 부러 외면하기는 힘들다. 다만 오늘날 분단을 극복하는 길은 결국 평화적인 방법뿐임을 역사는 가르쳐 준다. 한반도 대결 국면을 조장하는 북한이 자주적 통일을 주창하는 게 허망한 이유이기도 하다. 외세의 개입을 줄이고 싶다면 평화통일의 길밖에 없다. 신라의 백제, 고구려 병탄의 후유증은 생각보다 막심했다. 이제 그 과오를 되풀이해서는 곤란하다. 21세기의 통일은 신라의 길을 걸을 수도 없고, 걸어서도 안 된다.


북한은 신라의 삼국통일을 부정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구려를 정통으로 삼아 단군조선 -> 고구려 -> 고려 -> 북한으로 이어지는 도식을 도출해낸다. 북한 체제를 옹호하기 위한 다분히 이데올로기적 접근이며 의도한 편식이다. 앞으로 남북 간 한국사 학술 교류를 통해 인식의 간극을 줄여 나가야 한다. 지리적 제약으로 인해 남한이 고구려와 발해를 잘 모르듯이, 북한도 신라와 백제를 잘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서로 더 잘 알게 된다면 편향성을 다독이고 삼국의 역사를 공정하게 바라볼 안목을 갖출 수 있을 것이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9년 3월 신축 기사에서 이조판서 허조는 “우리 왕조의 전장(典章)과 문물은 신라의 제도를 증감(增減)하였으니, 다만 신라 시조에게 제사 지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건의한다. 세종대왕은 “삼국이 정립 대치하여 서로 막상막하였으니, 이것을 버리고 저것만 취할 수는 없다(三國鼎峙, 不相上下, 不可捨此而取彼也)”며 거부한다. 과거의 역사는 오늘날 재해석되기 마련이지만 그 출발점은 팩트의 보존이다. 고구려도, 백제도, 신라도 모두 우리의 선조이며 대한민국이다.


그런데 북한의 주장에 반대한답시고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다면 언젠가 중국에 흡수되어 버렸을 것이라고 목청을 높이는 것도 민망한 일이다. 한때 서토를 호령하던 북방 유목민족 가운데 오늘날 중국으로부터 독립된 영역을 지키고 있는 나라는 몽골뿐이라는 점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라의 통일로 말미암은 중국화의 증거는 명백하지만 고구려 통일로 발생할 중국화의 심화는 섣불리 예측하기 힘들다. 국가의 미덕은 생존이라는 명제는 거개 맞지만 고구려가 생존에 실패했다고 해서 이를 부정하는 건 지나친 처사다. 하물며 고구려가 생존에 성공했다고 해도 결과는 더 파국적이었을 거라고 추정하는 건 패배주의적 사고다. 그것은 냉정한 성찰도 아니고, 객관적인 관찰도 아니다. 또 하나의 이데올로기적 접근에 지나지 않는다. 제약조건 속에서 고구려의 독자적 정체성 확보를 위한 노력을 모욕하는 태도는 또 하나의 극단이다.


5. 연개소문과 고구려를 기억하기
이성무 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은 과거 천년의 역사는 ‘중국화’의 길을 걸어왔다며 “우리가 ‘중국화의 길’을 선택한 계기는 7세기 후반 8세기 초 삼국통일 과정에서 중국의 힘에 압도당한 체험에서 시작”되었다고 본다. “‘여러 가지 경우의 수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길로 갔다’면 비판적 문제제기가 가능하겠지만, 그 시절에 한민족 생존의 가장 현명하고 실질적 방법은 중국화의 길 외에 무엇이 가능했겠는가”라는 물음에 답하기란 쉽지 않다. 신라의 생존을 위한 대안이 단지 하나 밖에 없었던 것인가. 고구려의 생존을 위한 대안도 마찬가지로 하나의 패만 허락된 것인가는 어려운 문제다. 중국이 문치를 상징하고, 고구려가 무치를 상징한다는 이분법도 사실과 다를 공산이 크다. 중국화 아니면 소멸이라는 도식은 끝끝내 인정하기 힘들다. 적어도 김춘추에게는 맞을지 몰라도 연개소문에게는 맞지 않는다. 화이관(華夷觀)을 연상시키는 이 전 위원장의 한국사 이해는 단선적이고 체념적이다.


중국 대륙을 차지했던 북방 유목민족들이 하나둘 중국화(中國化)하는 와중에도 한국은 아름다운 예외였다. 거의 모든 지배계급이 중국화를 위해 안간힘을 썼는데도 끝내 중국과는 별개의 주체성을 건사할 수 있었던 것은 경이롭다. 어떤 면에서는 당시 중국의 힘이 오늘날 미국보다 더 규정력이 있었을 텐데 말이다. 한국이 독자적인 문화권을 일정 부분 건사할 수 있었던 근본 동력은 무엇일까. 개방성이라는 요인으로만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개방성이 반드시 독창성을 담보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배층의 중국화 열망을 막아낸 것은 힘없는 백성의 보이지 않는 저항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는 고구려에 대한 기억이 켜켜이 쌓인 덕분은 아니었을까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나는 이런 견해가 진실을 조작하는 것도 아니며, 전복적 상상력으로만 그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고구려와 대한민국이 얼마나 연속성이 있느냐 타박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고구려가 대한민국을 구성하는 큰 요소 가운데 하나임을 부인하기 힘들다. 의식이든 무의식이든 고구려의 집단기억은 우리네 살림살이에 각인되었고 제 나름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일전에 백낙청 교수는 박정희 전 대통령을 “지속불가능한 발전의 유공자”라고 언급했다. ‘산업화세력 대 민주화세력’이라는 이분법에서 벗어나 민주화세력도 경제발전에 기여했다는 주장이 신선하다. 산업화세력의 경제발전 방식은 결국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고, 지속가능성이라는 측면에서는 오히려 한국사회의 건강성을 살린 민주화세력이 크게 공헌했다는 견해에 상당 부분 동감한다. 실상 박정희의 절제를 기대하는 것보다 민주화세력의 견제가 더 효율적이고 효과적이었음을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고구려 말기와 연개소문에 대한 평가도 이런 균형감각을 발휘해보면 어떨까. 연개소문은 한국사에서 값진 경험을 남김으로써 한민족의 영속과 발전에 이바지했다고 본다.


나는 중국과 일본의 틈바구니에서 역사전쟁을 치르기 위해 연개소문을 부각시키는 것도 크게 나쁠 건 없다고 본다. 편의적인 이용이라고 핀잔할 수도 있겠다. 동북아 역사전쟁에 초연한 것을 상생의 손짓인양 생각하는 분들은 노예의 도덕에 바탕을 두고 있다. 노예의 도덕은 자신의 무기력함을 대범하다거나 겸허하다는 걸로 포장한다(하기야 이 노예의 도덕은 국수주의나 군사주의에게도 넉넉하기 일쑤다). 역사전쟁은 거칠게 표현해 제국주의와 평화주의의 싸움이다. 공세적인 방어로 평화의 기치를 들자. 현대 국민국가의 국경 개념이나 민족 개념을 고대 국가에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식의 주장도 들리지만 유치한 땅따먹기를 시작한 쪽은 중국이다. 이 와중에 국사 해체론 같은 현실도피적 청담(淸談)이나 늘어놓는 건 개인의 자유다. 다만 허구한 날 긴장하며 경계근무를 해야했던 고구려 병사의 심정을, 배곯이에 시달리는 고구려 아이의 마음을 추체험하며 헝클어졌던 그 시대 개별 인간의 삶을 헛되다고, 우리와 무관하다고 말하지 않는 정도의 예의는 좀 차렸으면 좋겠다.


역사는 결국 미래를 지향한다. 연개소문 시대를 도두보는 건 거기서 좀 더 나은 내일을 기약하는 메시지를 찾기 위해서다. 세계화에 대한 논란이 한창이다. 21세기가 다중심성의 사회가 될지는 아직 미지수다. 아마도 이런 이상적 의미의 세계화는 도래하지 않을 거 같다. 나는 대한민국이 세계화 혹은 서구화라는 파고를 슬기롭게 헤쳐나가고, 복수 문명권이 협력과 경쟁을 하는 상황에 일조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연개소문이 미처 이루지 못했고, 고구려가 실현하지 못했던 그 꿈을 오늘날 이 땅에서 도전해보는 것이다. 이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집권 연장을 위해 고안해낸 ‘한국적 민주주의’ 같은 요설이 아니다. 특수성을 뽐내면서도 보편성을 잃지 않는 한국적 가치관의 모색은 편협한 민족주의로 가두기에는 그 품이 너르다. 앞서 강조했듯이 고구려를 창조적으로 계승하는 과업은 한국 사회를 좀 더 풍요롭고 튼실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연개소문을 기억하는 건 스스로 주인이 되겠다는 매운 의지를 벼리는 일이다. 아마도 외부의 싸움만큼이나 내부의 싸움이 지난할 것이다. - [無棄]


<참고 문헌>
이 글에 직접적으로 쓰이지는 않았지만 제가 읽고 영감을 얻은 자료들도 모아봤습니다. 단행본밖에 모르던 제가 학교 도서관 학회지 논문 검색과 연속간행물 서고 등을 거닐며 모은 자료라 개인적으로 각별해서 기록했어요. 졸문 작성에 특히 많은 도움을 받은 자료에는 별표(*)를 했습니다.

<단행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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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영, “新羅 三國統一에 관한 再檢討”, 『사학지』 제15권, 단국사학회, 1981, pp. 1~37
임기환, “고구려 정치사의 연구 현황과 과제”, 『한국고대사연구』 제31권, 한국고대사학회, 2003, pp. 5~33
임기환, “6ㆍ7세기 高句麗 政治勢力의 동향”, 『한국고대사연구』 제5권, 한국고대사학회, 1992, pp. 5~55
* 전미희, “淵蓋蘇文의 執權과 그 政權의 性格”, 『이기백선생고희기념한국사학논총 上』, 이기백선생고희기념한국사학논총간행위원회, 1994, pp. 267~287
정진헌, “조선 시대의 고구려 인식”, 『고구려연구』 제18집, 고구려연구회, 2004, pp. 591~620
하일식, “당 중심의 세계질서와 신라인의 자기인식”, 『역사와현실』 제37권, 한국역사연구회, 2000, pp. 74~98
한명기, “조선시대 韓中 지식인의 高句麗 인식”, 『한국문화』 제38집,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006, pp. 337~366
허태용, “임진왜란의 경험과 고구려사 인식의 강화”, 『역사학보』 제190집, 역사학회, 2006, pp. 33~60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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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604
1959년 마오쩌둥(毛澤東)은 대약진운동의 실책을 인정하고 국가 주석직에서 물러났다. 류사오치(劉少奇)와 덩샤오핑(鄧小平)은 수정주의 노선인 조정 정책으로 대약진의 실패를 만회해갔다. 삼자일포(三自一包) 등으로 개별적인 경제주체의 운용 폭이 확대되면서 생산의욕이 크게 향상되는 등 백묘흑묘론(白猫黑猫論)으로 표상되는 경제중심주의가 득세하기 시작했다. 이에 마오쩌둥의 입지가 좁아지자 이에 반발하는 홍위병 세력이 조직돼 1966년부터 1976년까지 문화대혁명이 일어난다. 1차 표적이 된 류사오치는 손자뻘인 홍위병들에게 “제군들이 나 개인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중화인민공화국 주석의 위엄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제군들의 행동은 나라를 모욕하는 것이다”라며 항변했다. 하지만 그는 갖은 능욕을 당했고, 모든 공직이 박탈된 채 비참하게 죽었다. 문혁은 유토피아를 빌미로 벌어진 참혹한 파괴극이었다. 문혁이 계승이나 논쟁의 대상이 아니라 극복의 대상임은 또렷하다.


1981년 제11기 6중전회에서 통과된 「건국 이래 당의 몇 가지 역사문제에 관한 결의」에서 공식적으로 문혁과 모택동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내려졌다. 다만 모택동이 중국혁명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인정해 공적이 첫째이고 오류를 두 번째라는 평가를 내렸다. 덩샤오핑 개혁개방정책은 지역별, 기업별, 개인별 격차와 권력을 남용한 경제 부정, 인플레이션과 도시민의 실질소득 저하, 실업자 증가, 배금주의적 사고방식 등의 문제를 낳았다. 덩샤오핑은 정치적 안정과 당의 지도를 우선시 해 정치적 민주화 요구를 무시했다. 그러나 급진적 자유주의자로 불리던 후야오방(胡耀邦) 공산당 총서기는 상당한 수준의 정치적 민주화를 담고 있는 정치 개혁을 추진함으로써 보수파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민주화 시위 진압에 미온적이었다는 이유로 실각한 후야오방이 1989년 4월 사망하자 베이징대학생을 중심으로 그의 명예회복과 민주화를 주장하며 1989년 6월 4일 제2차 천안문 사태가 촉발됐다. 민주주의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던 시위 군중들에게는 정말로 총알이 날아갔다.


후야오방의 뒤를 이었던 자오쯔양(趙紫陽) 총서기는 참사가 벌어지기 전인 5월 19일 천안문광장의 학생들을 찾아가 “여러분의 충정을 이해한다. 너무 늦게 찾아와서 미안하다”라고 사과하며 눈물을 흘린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반동 분자를 지지했다는 죄목으로 실각했고 2005년 1월 사망할 때까지 연금 생활을 했다. 힘없는 2인자의 소신 있는 패배에 옷깃을 여민다. “경제 개혁은 정치 개혁과 결합하여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설파한 자오쯔양의 논리는 민주주의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고심하게 만든다. 사회주의를 내걸고 있지만 어느 자본주의 사회보다 더 자본주의적인 중국 정치제제의 특수성은 얼마나 더 유효할 것인가. 공산당 일당 독재를 유지하면서 시장경제체제를 도입하는 이원적 지배체제가 앞으로도 계속 유지될 수 있을지는 양극화, 부패문제, 금전만능주의, 환경문제 등에 얼마나 잘 대처해 나가느냐에 달려있다. 덩샤오핑은 “양극화를 초래한다면 개혁은 실패다”라고 우려했다. 중국은 지금 극단의 오류를 극복하겠다며 또 다른 극단에 빠져있는 건지도 모른다. 치우침으로 치우침을 해결할 수 없다는 건 중국에게만 해당되는 깨우침은 아니다.


070605
『잡아함경』 9권 254경 이십억이경(二十億耳經)에 있는 소나와 거문고 줄에 대한 이야기가 흥미롭다(동국역경원 한글대장경 번역 참조). 부처님의 제자인 소나는 아무리 수행에 힘써도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의기소침한 소나에게 부처님이 찾아오셨다. 부처님은 소나가 속세에 있을 때 거문고를 잘 탔었다는 것을 아시고 이렇게 물었다. “만일 거문고 줄을 너무 조이면 미묘하고 부드럽고 맑은 소리를 낼 수 있더냐?” 소나는 아니라고 답했고 부처님은 다시금 물었다. “만일 거문고 줄을 느슨하게 매면 과연 미묘하고 부드럽고 맑은 소리를 낼 수 있더냐?” 소나는 역시 아니라고 답했다. 이윽고 부처님께서는 “거문고 줄을 고르게 하여 너무 늦추지도 않고 조이지도 않으면, 미묘하고 부드럽고 맑은 소리를 내더냐?”고 물었고 그제야 소나는 그렇다고 답했다. 부처님께서는 정진이 너무 조급하면 들뜸만 늘고, 정진이 너무 느슨하면 게으르게 된다며, 이 두 가지 이치를 고루 익혀서 집착하지도 말고 게으르지도 않게 수행하라고 설법하신다. 이러한 부처님의 비유를 실행한 소나가 해탈에 이르렀다는 해피엔딩이다.


영화 <리틀 붓다(Little Buddha)>에서는 부처님이 고행을 하고 있을 때 네란자라강을 건너던 배에서 들려온 “실을 너무 당기면 끊어지고, 너무 느슨하게 해도 연주가 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자신의 수행이 그릇된 것임을 깨닫는 장면이 나온다. 이 대목에서 향락과 고행의 극단을 버리고 중도(中道)에 설 때 진정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불교의 핵심 교리가 파생된다. 도법 스님은 중도의 길을 “사실에 근거해서 정확하게 사물을 봐야 한다”라고 풀이한다. 지금 있는 그대로에서 문제를 발견하고 여기서 실현하고 해결하라는 말씀이다. 스님께서는 우리는 자연, 사회, 부모라고 하는 대상에 의지하고 도움을 받아 태어나서 살아가는 존재라는 사실을 직시해야만 자기를 낮추고 비우고 나누게 된다고 역설하신다. 성철 스님도 중도란 연기(緣起)의 이치로 바라본 사물의 실상이라고 말씀하셨다. 좋은 말씀이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나와 너를 분별하게 되면 우열을 가르게 되고 차별하게 된다. 이 고리를 끊어내는 중도연기(中道緣起)는 탐진치(貪瞋癡, 탐내고 화내고 어리석음)를 달고 사는 내게는 너무 가파른 경지다. 그래도 기회주의와 근본주의의 양극단을 버리고, 팽팽하지도 않고 늘어지지도 않는 중도를 가고 싶다.


070606
인간이 아무리 이기적이라고 할지라도 인간의 본성에는 분명 어떤 원리(연민과 동정)들이 존재한다. 이 원리들로 인해 인간은 다른 사람들의 운명에 관심을 가지게 되며, 단지 그들의 행복을 보는 것 말고는 얻는 게 없더라도, 타인의 행복을 필요로 한다.
How selfish soever man may be supposed, there are evidently some principles in his nature, which interest him in the fortune of others, and render their happiness necessary to him, though he derives nothing from it except the pleasure of seeing it.


아담 스미스의 『도덕 감정론』의 첫 구절이다. 그는 “의심할 나위 없이 모든 인간은 원래, 첫째로 그리고 대체적으로 자신을 돌보도록 되어 있다”라는 점을 인정한다. “관찰자의 느낌은 여전히 고통 받는 자가 느낀 것의 격렬함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 보통”이며 “타인이 겪고 있는 것에 대하여 그 주요 당사자가 당연히 느끼게 되는 정도의 열정을 가질 수는 없다”라는 한계를 부인하지 않는다. 스미스는 타인과 공동체에 대한 공감으로 말미암아 도덕적 감수성의 적정성(propriety)이 작동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한 개인이 자신의 입장을 떠나 객관화해서 제3자의 입장에서 자신의 행동과 동기를 판단하는 ‘공평한 관찰자(impartial spectator)’라는 불편부당한 양심의 힘을 제시한다. 이처럼 『도덕감정론』에서는 도덕적 이상주의가 도드라진다.


그런데 『국부론』에서는 경제주의적 사고가 완연하다. 도덕적 이상주의와 경제주의의 괴리를 어떻게 융합시키는가 하느냐를 ‘아담 스미스의 문제’라고 부르기도 한다. 스미스는 자기사랑(self-love)과 이기심(selfishness)을 구분했다. 그는 인간은 공감의 본성(sympathy, fellow-feeling)과 자기사랑(self-love)을 동시에 갖고 있다고 보았다. 공감이 이타심과 다르고 자기사랑이 이기심과 다르다고 한다면 공감과 자기사랑은 공존할 수 있다는 논리가 튼실하다. 미국 경제학자 로버트 하일브로너는 『국부론』이 당시 인도주의적 법령을 반대하는 데 흔히 악용되었다고 지적한다. “구성원 다수가 가난하고 비참한 사회는 결코 번영하고 행복할 수 없다” 같은 구절들은 인용되지 않은 채 말이다.


하준경 금융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분배 정책을 비롯한 사회 안전망을 강화하는 것은 기업 혁신 및 구조조정과 보완 관계를 이룬다”고 주창한다. 안전망이 탄탄하면 구조조정에 대한 저항도 약해지고, 리스크를 안는 경제 행위도 도전하게 된다는 것이다. 오늘날 고용안정성이 비교적 높은 공공부문에 인재가 몰리는 것도 안전망의 부재 때문이다. 이를 온전히 개인의 무사안일 때문으로만 여기는 건 무성의하다. 약자에 대한 ‘사회적 최소한(social minimum)’의 배려가 있고 패자부활전이 가능한 사회가 우리가 지향해야 할 곳이라고 생각한다. 아담 스미스는 탁월한 분별력은 최고의 머리와 최고의 가슴이 결합했을 때 나온다고 했다. 보이지 않는 손은 내면적 윤리의식이라는 사회적 자본으로 뒷받침되어야 한다.


<참고 문헌>
박순성, 『아담 스미스와 자유주의』, 풀빛, 2004, pp. 201~224
이근식, 『애덤 스미스의 고전적 자유주의』, 기파랑, 2006, pp. 66~86


070607
『대학大學』 첫 문장에 나오는 “大學之道 在明明德 在親民 在止於至善”에서 親民을 놓고 주희와 왕양명은 격돌한다. 『예기』에 포함되어 있던 대학의 원문에는 親民으로 되어 있으나 주희는 대학에 주석을 달면서 정이천을 이어 받아 백성을 새롭게 한다는 뜻의 新民이라 고쳐 풀었다. 親과 新은 한 글자 차이지만 그 내용은 크게 달라진다. 新은 옛 것을 바꾸는 것이므로 스스로 명덕을 밝힌 후에 백성들로 하여금 이전에 물든 오염을 제거토록 하는 것인 셈이다. 新民은 사대부가 백성들 위에서 일방적으로 교화한다는 의미가 강하다. 상하 신분 관계를 엄격히 하는 효과를 유발한다. 왕양명은 이를 문제삼고 親民을 그대로 쓸 것을 주장한다. 백성을 친근하게 한다는 뜻의 親民은 사대부와 백성이 같은 자리에 놓이게 된다. 수직적 관계가 아닌 수평적 관계를 지향하며 이를 통해 교화뿐만 아니라 서로의 개성을 온전하게 길러주는 양육의 의미를 함께 보듬는다. 왕양명의 심즉리설(心卽理說)과 치양지론(致良知論)이 외재적 규범이나 권위에 종속되지 않고 개인의 주체적 자율성을 강조하는 것과 상통한다.


『전습록』에는 “親民이라고 말하면 가르친다는 의미와 양육한다는 의미를 겸하게 되지만, 新民이라고 한다면 한 쪽에 치우친 감이 있다(說親民便是兼敎養意, 說新民便覺偏了)”라며 新民이 ‘가르친다’에 경도되었음을 지적한다. 또 “오직 밝은 덕을 밝히는 것만을 이야기하고 親民을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곧 도가와 불가와 비슷하게 된다(只說明明德, 而不說親民, 便似老佛)”라고 강조하며 백성의 현실적 문제를 다루는 것이 유가의 특질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유가적 현실주의는 백성의 곤고함을 살피는 것에서 출발한다는 그의 견해에 동감한다. 퇴계 이황은 <전습록논변>에서 新民이 맞다며 新은 學(학문과 교육)의 뜻이지, 양명이 말하는 親(백성들에 대한 친근)·養(상보적 기름)의 뜻은 없다고 반박한다. 퇴계는 이를 통해 백성을 수동적인 교화의 객체로 국한함으로써 신분 질서를 옹호했다. 양명학파의 거두 하곡 정제두가 親民을 지지했고 다산 정약용은 親民을 수용하면서도 “親과 新의 두 글자는 형상이 이미 서로 가깝고 뜻이 서로 통하니, 친애하는 것이 새롭게 하는 것이다”라며 두 해석 모두 타당한 측면이 있음을 인정했다. 


양명이 대학 공부를 한 사람의 마음이 온 세상 사람들을 품는 경지에 오르는 것을 親民으로 이해했다면, 다산은 백성들끼리 서로 화목하며 친애하는 것을 親民으로 이해했다. 일본 유학자 오규 소라이는 新民은 혁명의 뜻이므로 수성(守成)의 지도자가 친애하는 모범을 보이라고 규정한 『대학』은 親民으로 봐야한다며 다소 이색적인 견해를 내놓는다. 親民이 보수적이고 新民이 진보적인 함의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여하간 왕양명의 주장은 중국이나 일본에 견주어 조선에서 가장 심하게 이단으로 여겨졌다. 양명학이 제대로 연구되지 못했던 조선 지성계의 편협함이 새삼 아쉽다. 주자학파와 양명학파의 차이는 생각보다 크지 않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지만 나는 그래도 이 둘의 다름에 더 관심이 간다. 양명학은 주자학의 관념론적 경향을 극복하기 위해 직관을 긍정하고 실천을 중시했다. 둘레의 현실에 무심하지 않았던, 천하의 인심을 자신의 마음처럼 여겼던 양명의 정신을 편애한다.


<참고 문헌>
금장태, 『도와 덕』, 이끌리오, 2004, pp. 192~199
김기현, 『대학 - 진보의 동아시아적 의미』, 사계절, 2002, pp. 100~114
김미영 역, 『대학·중용』, 홍익출판사, 2005, pp. 36~38
김학주 역, 『신완역 전습록』, 명문당, 2005
정인재, 한정길 역, 『전습록 1~2』, 2001


070608
정조대왕이 수원 화성을 지을 때의 일이다. 대왕의 정성이 너무 지나쳤다고 생각했는지 몇몇 신하들이 볼멘소리를 좀 했다. 군사 시설은 튼튼하기만 하면 그만이지 모양내는데 너무 신경 쓴다는 핀잔이었을 게다. 대왕은 “어리석은 신하들아, 아름다운 것이 바로 적을 이기는 힘이니라”라고 일갈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의 출전을 찾기 위해 한참을 헤맸다. 『조선왕조실록』과 정조대왕어록인 『일득록日得錄』을 뒤졌지만 찾지 못했다. 이 정도로는 나오지 않는 걸 보면 숱한 신하들의 개인 문집까지 범위가 넓어질 듯싶다.


이어령 선생님은 리움미술관 개관 축사에서 이 일화를 인용했고, 정조를 대상으로 한 어느 뮤지컬에서도 정조의 명대사로 회자됐다. 유응교 교수의 <신하가 정조에게 묻다>라는 시에서도 대왕의 말씀이 황홀한 대답으로 추켜세워진다. 고진화 의원은 2005년 대정부 질문이나 2007년 한나라당 통일외교안보 정책토론회 기조연설에서 이 문구를 언급했다. 어딘가 기록된 말이라면 출전이 좀 나올 법도 한데 감감무소식이다. “문체가 세상을 다스리는 도리와 무관하지 않다(文風關世道)”며 문체반정까지 일으켰던 정조가 화성의 실용성을 넘어 심미적 가치에도 애정을 쏟았겠거니 추정할 따름이다. 출처가 어디냐는 개인적 집착을 떠나 아름다움을 헤아릴 줄 아는 사람, 문화 양극화를 가슴 아파하는 사람이 더 많아지길 바란다. 나를 대표하는 사람 중에도 그런 분들이 늘었으면 좋겠다.


070609
리영희 선생님의 오마이뉴스 인터뷰를 읽다 콧날이 시큰해졌다. 젊은이들의 보수화에 대한 물음에 선생님은 “‘젊은이들의 보수화’는 우리가 바라던바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뜨거웠던 지난날의 목표가 청년들이 자유분방하게 누리며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었다는 그의 말씀이 따습다. 그런데 ‘보수화’라는 언명이 얼마나 타당한지 의문이 생긴다. 내 또래(보다 넓게는 20대)는 전통적 의미의 보수와 진보의 잣대가 잘 적용되지 않는 측면이 적잖다. 이래서는 정명(正名)과는 거리가 멀다. 자기비하 같지만 무식화, 맹목화, 저속화가 더 맞는 표현 같다. 내 또래는 이런 경향에 맞서 상식을 궁리하고 객관성과 주체성을 회복하며, 인간다움의 최소한을 탐구해야할 듯싶다. 우리 세대에게 건네지는 개성적이니 실용적이니 하는 표현은 좀 과분하다.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은 『실증경제학논집(Essys in Positive Economics)』에서 “그것은 무엇인가(What is it)라는 물음과 그것은 무엇이어야 하는가(What should it be)라는 물음을 혼동하는 데에서 너무나 많은 틀린 이론과 그릇된 정책이 나온다”고 일갈했다. “What is it”이라는 실증적 물음에 대한 답을 충실하게 구하는 게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살림살이 나아지기 위해서 현상에 대한 면밀한 분석부터 시작하자는 논리를 경청한다. 정치적 불감증이 일상화되고 취업에 올인하는 세태가 보수화의 증거라면 그런 보수파는 되고 싶지 않다. 한국적 맥락의 보수가 고작 이 정도라면 허기진다. 제 앞가림만 신경을 쓰는 풍토가 1987년 체제의 과실이라고 해도 많이 아쉽다. 이분법이 사라진 자리에 남겨진 하향 평준화 혹은 획일화가 그리 달갑지 않다. What is it이라는 물음에서 내 또래가 정말 보수화(실상은 경제지상주의 추종)라고 결론 내릴지도 모른다. 내가 진단한 무식화, 맹목화, 저속화로 말미암아 사회경제적 독점이나 기업사회의 전제(專制)가 심화될까 우려스럽다.


What should it be에 답해보자. 내 또래의 세대정신이라는 게 있다면 경제지상주의를 극복하고 다원화를 정착시키는 게 아닐까 싶다. 존 스튜어트 밀은 스스로 선택하는 삶이 좋은 삶이라 역설했다. 선택의 지평을 넓히고 가능성의 예술을 실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라는 외재적 조건에 대응해 다원화라는 개인주의 원리와 자유주의적 가치를 개발해보고 싶다(여기서의 ‘자유주의’는 밀의 ‘좋은 삶’이란 명제에 바탕을 두고 썼다). 만약 성공한다면 우리가 유월항쟁에 무임승차하며 되돌릴 수 없는 (절차적) 민주주의를 누리는 만큼 뒷사람에게도 비가역적인 다양성을 물려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프랑스 혁명기의 ‘테르미도르의 반동’이 이 땅에서 횡행하는 건 민망한 일이다.


우리를 초조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의 수가 아니라 그들이 그렇게 하면서 내세운 이유들이 얼마나 훌륭한가라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인기가 없는 현상 그 자체에 관심의 초점을 둘 것이 아니라 인기를 잃게 된 배경에 대한 설명에 주목해야 한다.
알랭 드 보통 저, 정명진 역,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 생각의 나무, 2005, p. 49


070610
마크 트웨인이 세계를 여행하던 때의 일이다. 그는 지나친 음주 때문에 인생이 엉클어진 젊은 승객을 만나고서 욕망에 대해 생각한다. 그는 욕망은 거부할수록 더욱 커지게 마련이므로 맹세가 부질없음을 깨닫는다. “욕망과 함께 평생을 보내야 한다는 걸 인정하는 길”이 욕망이 확대되는 걸 막는 효과적 방법이라는 주장은 쾌락에 대한 방종으로 치부하기에는 그 울림이 크다. 고독을 대하는 최상의 방법은 고독을 두려워하거나 피하는 것이 아닌 고독을 껴안는 것이라는 가르침과 비슷하다. 극단을 치유하는 수단이 또 다른 극단주의여서는 곤란하다.


쇠약해져서 어떤 약도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부인이 있었다. 마크 트웨인은 그간 체득한 경험에 따라 “사흘 간 맹세, 음주, 흡연, 식사를 중단하면 몸이 좋아질 거”라며 의기양양하게 조언했다. 그런데 그 부인은 맹세, 흡연, 음주 같은 부정적 습관이 하나도 없었다. “배의 침몰을 막기 위해 무거운 화물들을 배 밖으로 던져버려야 할 상황인데, 그녀는 이미 화물을 하나도 싣지 않은 잠수함과 같았다”라는 표현이 익살맞다. 마크 트웨인은 당혹함 속에서 “나쁜 습관이란 젊을 때부터 몸에 배이게 해놓아야, 나이가 들고 병이 들었을 때 써먹을 수가 있다”는 명제를 도출한다(마크 트웨인 지음, 남문희 옮김, 『마크 트웨인의 19세기 세계일주』, 시공사, 2003, pp. 11~17).


소설가 김영하님은 이 이야기를 언급하며 “‘나쁜 습관’이란 인생 최고의 사치품”일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시사저널 812호 <나쁜 습관, 나쁜 영화>). 내 나쁜 습관은 잡글 쓰기다. 늘 붙잡고 있으면서도 도무지 나아지는 구석이 없어 먹먹하다. 귀한 젊음을 허비하는 건 아닌가 불안하다. 마크 트웨인은 “담배를 끊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다. 수도 없이 끊어 봐서 안다”고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나도 내 누추한 잡글 쓰기를 그만두고 싶어 무던 애를 썼다. 앞으로도 절필한다는 투정이 그치지 않을게다. 마크 트웨인의 처방전이 내게도 유효할지는 모르겠지만 내 나쁜 습관을 너무 미워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 지난 301일 동안 매일 써온 好學日記를 휴간합니다. 재미없는 글 읽어주신 여러분, 왜 그러셨어요?^0^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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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에서 실시한 2007년 세계문화유산 답사기 공모전에서 입선이 된 글입니다. 사흘 연속 과한 음주로 숙취가 덜 깬 상태였지만 책 살 문화상품권을 벌기 위해 힘들게 쓰다보니 많이 엉성합니다. 이 답사기 쓰려고 모은 자료들이 적잖은데 기회가 되면 종묘에 대한 글을 좀 더 보강해서 써보고 싶네요.


<종묘 잡감>

내게 있어 공민왕신당은 종묘의 절반이다. 배보다 배꼽이 큰 격이라는 놀림을 기꺼이 감수한다. 꼭꼭 닫아두던 걸 요 근래 시원하게 열어줘서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의 영정과 준마도를 뵈니 참 고맙다. 공민왕신당의 성립 배경에 대한 특별한 문헌기록은 없다고 한다. 왕조 교체기에 고려에 아직 애정이 남은 백성들을 달래기 위한 처사로 추측할 따름이다. 우리는 전통문화를 이야기할 때 대개 조선시대를 떠올린다. 아무래도 현대에서 가장 가까운 시기의 왕조이고, 관련 유적과 사료가 단연 많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입체적이고 종합적인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세우기 위해서는 조선으로 그치지 않는 의도적(!) 노력이 필요하다. 특히 더 중점을 두어야 할 것이 고려시대가 아닐까 싶다. 조선미의 극치에서 부러 고려를 회상하는 까닭이다.


큰산은 바라보기에 따라 다르다. 역사는 연속성이 고갱이다. 우리의 유구한 전통 또한 여러 겹의 속살을 가지고 있기에 다각적이고 섬세하게 바라보는 정성이 필요하다. 공민왕신당은 시답잖은 유형문화유산에 지나지 않을지 모르지만 사당을 감도는 그 처연한 서정은 많은 영감을 가져다준다. 공민왕의 험난한 좌절을 따가워하기 좋은 곳이다. 문화유산은 국보나 보물 같은 지정문화재가 많은 것으로만 우열을 따지기 힘들다. 나 같은 녀석에게 공민왕신당 내부를 공개하는 것만 해도 얼마나 큰 즐거움인가. 이런 식으로 영혼을 어루만지는 작은 문화유산들도 소중히 여기는 발상의 전환이 있어야겠다. 문화는 고매한 기교 이전에 낮고 약하고 가여운 것을 외면하지 않는 정신이다. 결정적으로 돈도 많이 들지 않으니 일석이조다.


“고려 왕조의 종묘를 허물고 그 땅 위에 새 종묘를 짓도록 명하였다(命毁前朝宗廟, 作新廟於其地).”『조선왕조실록』 태조 1년 10월 13일의 일이다. 종묘는 새 도읍 한양에서 경복궁보다 먼저 지어진 조선의 첫 건축이다.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때 가장 먼저 챙긴 것이 종묘에 모셔진 신위(神位)였다. 왕의 주요 책무가 제사권 수호였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충효사상을 공동체의 유대를 위해 활용했던 동아시아 문명의 단면이다. 고구려가 망했을 때 보장왕 등을 당 태종 이세민이 묻힌 소릉(昭陵)에 바치게 하고, 장안의 태묘에 바쳤다고 전한다. 이것은 고구려의 제사 체계가 무너졌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서글픈 광경이다. 대한제국은 비참하게 망했지만 그 제사를 끊이지 않게 한 것은 대한민국인의 자비심 때문만은 아닐 게다. 아마 민주공화국이라는 제도의 품이 너르기 때문일 공산이 크다.


종묘대제(宗廟大祭)를 참관하고 나니 조상숭배관념에 대한 복잡한 감회가 밀려든다. 혼(魂)은 하늘로 올라가고 백(魄)만 지상에 남게 된다고 여기는 유교적 사생관이 흥미롭다. 백이야 무덤이라는 실체가 있지만 혼은 어떻게 살펴야 할지 막막하다. 신주가 모셔진 사당에서 제사를 올리면 영혼이 찾아와 흠향하고 다시 돌아간다는 재미난 구조다. 죽음을 삶의 새로운 한 국면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유교의 상제례가 다른 문화나 종교에 견주어 복잡다단한 이유도 여기 있다. 유가는 영혼은 있다고 믿지만 사후세계를 믿지 않는다. 내세가 없는 대신 죽음을 다른 맥락의 삶으로 잇대기 위한 절차와 형식을 마련했다. 제사에는 숨막히는 보수적 측면만 있는 게 아니다. 조상을 신으로 상정하려는 유가의 시도에서 서양의 천부인권 개념을 연상시키는 휴머니즘 내지 민중성을 발견했다면 너무 지나친 호들갑일까?


『예기』에는 “상례에 있어 슬픔이 모자라고 예가 넘치기보다는, 예가 모자라고 슬픔이 넘치는 것만 못하며, 제례에 있어서는 공경함이 모자라고 예가 넘치기보다는, 예가 모자라고 공경함이 넘치는 것만 못하다”고 말하고 있다. 예는 방편(方便)이다. 예는 정성을 표하는 돌다리일 뿐이니 예 자체가 절대화되어 인간의 행위를 구속하는 건 민망한 일이다. 집집마다 예법이나 풍속, 습관이 다를 수 있다는 가가례(家家禮)를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는 인인례(人人禮)로 더 쪼개보면 어떨까. 이는 개인주의 시대의 미덕이 될 것이다. 그나저나 언제쯤 종묘대제에 여성 헌관(獻官)을 볼 수 있을까? 시대의 흐름에 따라 다르다는 시시례(時時禮)를 언급하면 의례를 희화화한다고 지청구가 날아오려나.


종묘는 조선왕조가 계속 되어 모실 신위가 늘어남에 따라 몇 차례에 걸려 증축했다. 정전은 서에서 동쪽으로 증축했고, 영녕전은 중앙을 고정시키고 양옆을 늘렸다. 지금은 모든 신실이 꽉 차있는 상태다. 친진(親盡)된 신주를 땅에 묻기가 미안하다는 이유로 별묘인 영녕전을 지었다. 정전과 영녕전은 비슷하면서도 차이가 나서 정전애호파와 영녕전애호파가 나뉠 정도다.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같은 유치한 질문이 나올 법하다. 그런데 정전과 영녕전의 가름은 각별하다. 순두부처럼 흐물흐물하지도 않으면서 일반두부처럼 각지게 썰리지도 않는 다름이다. 일반두부 같은 마니교적 이분법도 아니고, 순두부 같은 니체식 허무주의도 아닌 그리 단단하지 못한 본질과 다채로운 상이점이 버물리는 연두부 같은 건축이다.


누구를 정전에 계속 봉안하고 누구를 영녕전으로 내어 모시느냐를 놓고 적잖이 다퉜다. 가령 태종의 자식인 세종은 태종 왕통의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해 삼촌인 정종을 부묘하면서 묘호조차 올리지 않고 공정왕(恭靖王)으로 불리게 놔뒀다. 세조의 후사들은 세조 왕통의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해 문종의 신주를 신실이 아닌 서쪽 협실(夾室)로 내몰기도 했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거의 모든 왕이 전대의 임금을 불천위(不遷位)로 삼으며 공적 이상의 호사를 누리게 만들었다. 불천위 제도에 담긴 국왕 평가시스템이라는 원칙보다는 미안하다는 다정함이 압도했다. 거칠게 말해 성리학적 의리명분의 핵심은 “미안하다”인 듯싶다. 태종이 미워해서 종묘에 모시지도 않았던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의 신주를 모시고, 세조가 파헤쳤던 문종비 헌덕왕후의 능인 소릉(昭陵)을 재건하고 신주를 다시 종묘에 모시고, 왕위를 빼앗겼던 단종을 복위시켜 종묘에 모시는 등의 복권 절차가 훈훈하다. 순종과 영친왕이 각각 정전과 영녕전에 모셔짐으로써 종묘는 박동을 멈췄다. 종묘가 사화산이 되었기에 아무런 복선 없이 종묘를 완상할 수 있게 되었다. 종묘의 건축을 헤집는 데 열중한 나머지 ‘종묘의 정치학’을 엿보는 재미를 놓쳐서는 안 되겠다.


종묘 건축은 당혹스러울 정도로 소박하다. 중국 베이징의 태묘 건축이 여느 궁전 건축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것과는 천양지차다. 종묘의 박석(薄石)을 최소의 인공미라고 해야 할지 최대의 자연미라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고유섭 선생이 말씀하신 “무기교의 기교”의 정수다. 그런데 밋밋한 가칠단청을 올려다보면 서운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계산된 단순함이고 기획된 질박함임을 잘 알면서도 말이다. 검소함을 추구해 장엄을 더했다고 하지만 그 연쇄효과가 퍼뜩 떠오르지 않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앞사람에게 투덜거리며 응석을 부리는 건 뒷사람의 특권일 게다. 문화유산 감상은 별난 의견도 내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처럼 종묘 건축의 단청이 조금 더 화려했으면 좋겠다는 불경한 생각을 품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 문화유산 감상이 위인전 읽듯이 일방적이라면 너무 팍팍하다. 마땅한 찬사가 나올 만큼 나왔으니 농담 삼아 옥의 티를 찾아보는 것도 괜찮겠다. 종묘의 엄숙함을 좀 눅이는 효과가 있기를 바라며.


전사청 앞의 찬막단과 희생대를 거닐며 견우미견양(見牛未見羊)을 궁리했다. 종묘를 함께 찾은 일행에게 제물로 끌려가는 소가 가엾게 여겨져서 보지 못한 양을 제물로 쓰게 되었다는 희생양의 고사를 나누리라. 인간 이성과 감정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품을 수밖에 없는 어떤 믿음을 공유하려고 애쓸 것이다. 인간에게 반드시 있으리라 믿고 싶은 ‘남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不忍人之心)’말이다(종묘제례는 소, 양, 돼지고기를 모두 제물로 쓰니 좀 어울리지 않지만). 종묘에서 넉넉함을 배우고프다.

Posted by 익구
:
070528
조만간 외국 여행을 떠나는 친구가 수집해놓은 여행 정보 가운데 흥미로운 이야기를 발견했다. 터키 국민의 99%가 이슬람 교도지만 터키 헌법은 세속주의를 명시하고 있다니 놀랍다. 터키 사람들의 일상생활에서도 이슬람적 요소는 찾아보기 힘들며 오히려 법으로 금지된 게 적잖다. 1923년 10월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국을 수립한 케말 파샤가 확립한 세속주의 원칙을 국민들이 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인다니 신기하다. 얼마 전 이슬람주의 집권여당인 정의개발당(AKP)이 총리직과 의회를 장악한 상황에서 대통령직마저 차지할 것으로 보이자 이를 놓고 터키가 내홍을 겪었다. 터키에서 막강한 실력을 보유한 군대가 세속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개입을 암시하기까지 했다. 결국 대통령 단독 후보가 사퇴하고 7월 조기 총선을 실시하기로 가까스로 결판이 났다. 세속주의 세력은 이슬람 근본주의에 맞서 일단 소기의 성과를 거둔 셈이다.

터키에서는 이슬람계 정당이 헌법상 세속주의 원칙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헌법재판소 판결을 받아 해산되는 일까지 있었다. 공공기관인 대학이나 행정 관서에 종사하는 사람은 히잡(hijab)을 착용할 수 없다고 한다. 정교분리를 위해 얼마나 노심초사하는지 짐작이 간다. 아시아의 눈으로 볼 때 터키는 묘한 나라다. 국토의 96.4%가 아시아에 있으면서 3.6%가 속한 유럽을 동경하기 때문이다. EU 가입이 하도 튕기는 바람에 최근 들어 EU 가입에 대한 터키인들의 지지도가 많이 떨어졌다고는 하지만 터키의 유럽지향성이 쉽게 누그러들 거 같지는 않다. 아마 터키의 정교분리가 비교적 성공적으로 수행되고 있는 까닭도 터키의 역사문화적 맥락에서 기인했기 때문일 듯싶다. 헌법정신을 지키기 위해 고심하는 터키인들의 모습을 좀 배우고 싶다. 초파일이라고 조계사에 헌화하기 위해 줄 선 정치인들을 보니 답답해서 하는 소리다. 종교의 자유를 핑계로 사립학교법을 흔드는 대다수 종교 재단들을 볼 때 우리네 헌법이 참 초라해 보인다.


070529
영국의 철학자 무어(G.E.Moore)는 고전적 윤리학을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했다. 첫째로 형이상학적 윤리설은 초자연적, 초경험적 실재에 관한 이론이 선(善)에 관한 윤리적 문제를 해결하는 기초가 된다는 입장이다. ‘있어야 할 것’이나 ‘해야만 할 것’이라는 당위의 근거를 초경험적 실재에서 구할 수 있다는 건 개인적으로 그다지 동감가지 않는 내용이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이나 크리스트교적 중세 철학에서 자주 보는 논리다. 둘째로 자연주의적 윤리설은 경험 가능한 사실을 근거로 삼아 보편적인 인생의 목적 또는 절대적인 행위 규범을 도출해 낼 수 있다는 입장이다. 자연주의는 사실 또는 존재에서 가치 또는 당위를 도출하는 이론이다. 이러한 시도는 윤리학을 과학화하려는 사람들이게 많은 호응을 얻었다. 셋째로 직관주의적 윤리설은 인간이 지닌 선천적 능력을 동원하여 도덕의 원리를 직접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자연주의와는 달리 사실 또는 존재에 대한 인식으로부터는 어떤 가치나 당위도 도출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직관주의는 직각론(直覺論)이라고도 부른다. 직관주의는 사실에서 당위를 연역해내는 자연주의의 추리 방식을 통박한다. 흄과 무어는 “~이다”라는 사실(존재)에서 “~해야 한다”는 가치(당위)를 도출하는 것은 전제 안에 없는 것을 결론 속에 도입하는 것으로서 논리학의 추론 규칙에 어긋난다고 주장한다. 특히 무어는 자연주의적 오류(naturalistic fallacy)를 입증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듯싶다. 그는 “선은 단순하기 때문에 정의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단순 관념은 분석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정의할 수 없다는 논리다. 선은 이미 단순하기 때문에 분석이 불가하므로 선은 선일 뿐이라는 것이다. 즉 단순 관념인 선은 (분석된) 요소로 환원할 수 없다. 이러한 반박의 얼개는 가치술어가 사실적, 경험적 정의된다고 생각해 발생하는 오류인 정의적 오류(definitive fallacy)와 당위를 존재로부터 도출할 때 생기는 오류인 연역적 오류(deductive fallacy)로 나눠져 꽤 설득력 있게 자연주의를 공략한다.

이처럼 날선 공격을 날리던 직관주의는 20세기에 등장한 정의주의(emotivism)나 규정주의(presscriptivism)에게 논박되고 있다. 사실과 가치, 존재와 당위(보통 이렇게 두 개씩 짝지어서 많이 쓰는 듯싶다)의 관계를 규명하려는 노력이 참 많다. 그 노력과 고심의 궤적을 훑어 보는 것도 힘에 부친다. 사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수많은 사실과 수많은 가치가 버성기고 맞물린다. 우리는 사실만 정리하는 것에도 편차가 난다. 우리가 사실이라고 믿는 것도 사실 가치가 개입되어 필터링 된 사실인지도 모른다. 하물며 가치나 당위가 맞설 때는 접점을 찾기 더 어렵다. 특히 우리 사회에 만연한 ‘현실론’은 자연주의적 오류라고 볼 여지가 많다. 자신에게 유리한 몇몇 사실을 모아 당위를 도출해내는 논리 구조의 허술함을 이제 좀 더 잘 살펴봐야겠다. 인간이 획일적이지 않다는 건 괴로운 축복이다. 고통을 줄이고 축배를 들자.

<참고문헌>
김태길, 『윤리학』, 박영사, 2004
P.W.테일러 지음, 김영진 옮김, 『윤리학의 기본원리』, 서광사, 1985


070530
요 근래 여기저기 적어놓았던 메모의 흔적들을 정리해봤다. 시의성을 놓쳐 수를 다한 기록들 사이에서 명언명구들이 빛난다. “나는 기술적으로는 프로가 되고 싶다. 그러나 정신적으로는 언제나 아마추어이고 싶다”는 뉴질랜드의 등산가이자 탐험가인 힐러리의 말씀이 심금을 울린다. 아마추어는 순수함이나 겸손함을 가리키는 뜻일 게다. 높을수록 낮아지는 마음자리를 흠모한다. <쿠니미츠의 정치>라는 만화책 13권에서 아즈마 미츠아키라는 인물이 말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말은 위에서 던지는 게 아니야. 같은 눈높이에서 똑바로 던지는 직구만이 사람의 마음을 흔들 수 있어”라는 구절도 만화책을 보다 펜을 들게 만들었던 명구다. 사실 난 아직도 직구를 잘 못 던진다.

방대한 양이라 아직 완독은 못했지만 『전국책』에서 갈무리해둔 구절도 많이 보인다. “나라가 망하는 것은 현인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쓸 줄을 모르기 때문이다(國亡者, 非無賢人, 不能用也)”, “백리 길을 가는 사람은 구십리를 반으로 여겨야 한다(行百里者, 半於九十)”, “지난 일을 잊지 않으면 뒷일을 위한 스승이 된다(前事不忘, 後事之師)” 같은 말씀들은 담박하지만 큰 울림이 있다. 유가의 상고주의(尙古主義)는 옛글에 주석을 달고 표현을 윤색하고 비유를 첨가하는 식으로 확대 재생산된다. 자신이 만들었다고 지식의 소유권을 강하게 주장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달갑다. 손에 잡히는 종이에 아무렇게나 끼적댄 아포리즘을 발견할 때 잊고 지내던 옛 친구를 만나고 옛 스승을 뵙는 기분이다. 하지만 좀 체계적으로 정리할 필요도 느낀다.

앨빈 토플러는 『부의 미래』에서 ‘쓸모없는’(obsolete)과 ‘지식’(knowledge)’을 합한 ‘무용지식’(obsoledge)이라는 신조어를 제시했다. 그는 “미래 경제의 모습은 지식의 타당성을 증명하기 위해 어떤 진실 여과 장치를 사용하는지에 달려 있다”라며 무용지식을 가려낼 수 있는 능력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두서없음과 뜬금없음을 자유로움의 징표로 삼는 내게는 좀 화끈거리는 말씀이다. “이론은 장례식을 거듭하며 진보한다”는 경제학자 폴 새뮤얼슨의 말씀대로 쓰레기지식도 좀 더 나은 지식의 밑거름이 되겠거니 넉넉하게 생각하고 싶다(물론 거름이 되는 속도가 너무 느려서는 안 되겠지만서도). 힘겹게 배운 걸 매정하게 내치려니 마음이 약해져서 말이다. 지식과 정보의 홍수를 슬기롭게 대처하려면 어지간히 신산스럽겠다.


070531
기자실 통폐합을 놓고 거의 모든 언론이 정부와 대통령을 향해 집중포화를 날리고 있다. 이제 언론탄압이라는 듣기 민망한 언어의 인플레는 적잖은 누리꾼들이 항의한 덕에 좀 수그러든 듯싶다. 정보 접근권 확대라든가 정보공개법 개정 같은 좀 더 생산적이면서 국민의 알 권리 확대에 보다 보탬이 되는 방향으로 논점이 옮겨가는 듯싶어 다행스럽다. 정부의 이번 조치에 극렬 반대하는 언론 집단들의 행동이 가슴 뭉클하지 않는 사람이 적잖다는 건 긍정적인 현상이다. 그네들이 언론탄압이라고 마음껏 외칠 수 있는 게 바로 언론탄압이 아니라는 증거다. 언론탄압이라니 국민의 알권리가 심대하게 침해된다느니 하는 매서운 말들이 무덤덤하게 들리는 건 우리네 언론의 자유가 반석 위에 올랐음을 나타낸다.

참여정부 비판에 학문적 역량을 아끼지 않으시는 최장집 교수님은 이번 사태가 ‘위임 민주주의’이며 ‘사이비 민주주의’라고 평했다. 정부의 섬세하지 못한 처사를 모르는 바 아니지만 조기숙 교수님의 반론대로 언론은 더 이상 약자가 아니다. 지금이 언론독재의 시대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정치독재보다 언론독재가 더 위협적이라는 지적에는 동감한다. 경남도민일보 김주완 부장님은 <독점 깨지니 두려운가?>라는 칼럼에서 전자브리핑은 지방지와 중소매체 기자들에겐 기회가 될 수 있으며 “서울지들이 난리를 치는 건 바로 이 독점이 깨진다는 것 때문이 아닐까”라고 묻는다. 획일적인 목소리 가운데 들려오는 소수의견이 반갑다. 대다수 언론들의 대동단결을 흐뭇하게 바라보기 힘든 까닭은 내 옹졸함 때문만은 아닌 듯싶다.

언론의 자유를 넘어 ‘언론으로부터의 자유’를 꾀해야 한다는 주장은 시의적절하다. 하지만 언론으로부터의 자유는 언론 보도만을 지식과 정보의 원천으로 삼지 않고 좀 더 심층적으로 사고하자는 개인적인 영역에 국한된 노력일 따름이다. 모든 국민이 신문 기사 훑어볼 때마다 행간을 읽고 가려진 진실을 추론해야 한다면 그건 너무 비효율적이다. 우리네 언론이 사실조차 입맛대로 재단한다는 의혹은 거개 온당하다. 가까운 사례로 지난 25일 세종대왕함 진수식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연설의 일부를 발췌해 요상한 기사를 쓴 문화일보 어느 기자분에게 소설가라는 야유가 쏟아졌다. 할 말은 하는 언론까지는 바라지도 않으니 제발 사실 그 자체만이라도 충실하게 보도해줬으면 좋겠다. 행정부 정보 공개만큼이나 중요한 과제는 사실 보도 정착이다. 언론으로부터의 자유와 더불어 문학성 짙은 언론을 견제하는 방안도 함께 마련하자. 펜은 확실히 칼보다 강하다. 그렇기에 칼보다 상처도 깊다.


070601
오늘자로 김병장이 전역했다. 유월에 전역인 건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이르다. 김병장보다는 김이병이 더 내 입에 익다. 내가 처음 구청에서 군복무를 시작했을 때 그와 나는 업무적 통화를 적잖이 나눴다. 업무 인계를 거의 받지 못해 업무 관련 용어를 생판 모르던 나는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말을 도무지 해독(?)하지 못했다. 가령 동미참훈련이 동원훈련 미참석자 훈련인 건 몇 달 지난 뒤에 알게 된 일이다. 그가 일병이 좀 지났을 때 그는 더 이상 통화를 하지 않았고 다른 막내 병사가 우리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왔다. 그와 나는 2005년 7월부터 그 해 말까지 반년 정도 종종 통화를 나눴다. 나는 그에게 미안한 마음에 업무를 스스로 익히기 위해 이것저것 뒤지고 물어가며 배웠던 듯싶다. 어리둥절하던 나와 긴장한 목소리의 그는 이등병 시절을 비슷하게 났다(나도 공익이병이었으니).

2006년 여름 어느 날 나는 그를 한 번 만났다. 그는 군부대 관련 행사로 구청을 들른 그는 기동대 사무실에 잠시 들렀고, 나와 김상병(당시 계급)의 관계를 아는 상근병 동생이 귀띔해줬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옆 사무실로 달려갔지만 정작 그와는 한 마디도 나누지 못했다. 먼저 인사를 건네야지 결심하고 들어갔건만 예전에 업무상으로 몇 번 통화 나눴던 사람이 괜히 아는 체를 한다고 생각할까봐 저어됐다. 지금 돌아보니 많이 후회된다. 그 때 이상한 놈으로 비치더라도 인사를 건네는 게 좋았다. 설령 그가 나를 기억하지 못하고 심지어 언짢게 생각해도 무슨 대수란 말인가. 그러고 보니 살다보면 한 번 만나고 못 만나는 경우가 심심찮게 있다. 하룻밤 술자리를 진득하게 보내고 나서 영영 연락을 나누지 못하는 경험은 얼마나 많은가. 설령 그럴지라도 나를 스쳐갔던 분들에게 내 정성을 다했으면 좋겠다. 한 번에 충실한 사람이 두 번 세 번도 충실하고 늦게까지 한결같다고 믿는다. 김병장의 전역을 축하하며 앞으로 하는 일이 잘 되길 빈다. 고마웠어요.


070602
헌책방 온라인 커뮤니티를 운영하시는 최종규님의 글을 읽다가 경악했다. <가자헌책방>이란 헌책방에서 불온 이념도서를 팔았다는 죄목(?)으로 수사를 받았다 게다. 여느 책방에서도 볼 수 있는 『자본론』 같은 책을 싸게 판 게 혐의를 구성한다니 기가 막힌다. 제 값 받고 팔아서 판매량을 낮춰야 하는데 괜히 싸게 팔아서 독자층을 넓히는 효과를 유발한다고 판단한 건 아닐 테고. 인권운동가 박래군님의 글에 따르면 <미르북>이란 곳의 운영자도 비슷한 명목으로 구속적부심까지 가서 석방됐다고 한다. 이 인터넷 서점을 통해 책을 구입한 명단을 확보해 추가 수사를 하겠다는 엄포는 뭐란 말인가. 국가보안법으로 서점 대표가 체포된 것은 1997년 이래 처음 있는 일이라는데 문득 세 해 전 생각이 났다.

국군기무사령부가 2001년부터 2004년 8월까지 경찰청 산하 공안문제연구소에 장병들이 읽거나 갖고 있는 서적, 인터넷 사이트의 글에 대해 이적·용공성 여부 감정을 의뢰했다는 기사(경향신문 2004년 10월 18일자)를 기분 나쁘게 읽었다. “군의 이념적 순수성을 보장하기 위해”라는 기무사의 해명은 민망하다. 박노자 선생님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같은 책을 읽으면 안보 위해세력이 된다는 논리는 얼마나 궁색한가. 나는 공안기관에 밥줄이 걸린 사람들의 생존을 미워하지 않는다. 그네들이 먹고 살기 위해 확신범이 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이제 선량한 사람 족치는 일 대신 다른 일감을 쥐어줄 수 있는 대한민국이 되었으면 좋겠다. 법치주의와 합리주의를 신뢰하는 보수주의자로서 하는 말이다.


070603
미국의 중국현대사가 로버트 이스트만은 『장개석은 왜 패하였는가』라는 책에서 중국 국민당이 공산당에게 패배했던 이유를 연구했다. 공산당이 국민당을 멸망시킨 것이 아니라 국민당 스스로 무너졌음을 논증했다. 전쟁 초기 정면 대결을 피하고 유격전을 벌이며 전략적 방어를 펼친 공산군의 전략도 주효했겠지만, 부패한 국민당 관리와 인플레이션을 유발한 경제적 실책으로 말미암아 민심을 잃은 탓이 크다. 토지개혁을 통해 농민들의 지지를 얻어 이를 전장에서 동원할 수 있었던 공산당과 달리 농촌지역에 세금과 징발의 부담을 더욱 가중시킨 국민당이 지지를 잃는 건 또렷하다. 국민군은 스스로의 부패를 극복하지 못하고 자멸함으로써 내부의 적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일깨워주고 있다. 이 책을 번역한 민두기 선생님은 패자의 역사는 더 많은 진실을 이야기한다고 말씀하셨다. 맹자가 주창하고 매천 황현이 인용했던 “나라는 반드시 스스로 먼저 망하게 하고 나서 남이 치러 들어온다(國必自伐而後人伐之)”는 말이 사무친다.

국민당 정부가 패주해 간 대만(타이완)의 정식 국호는 중화민국(Republic of China)이다. 중화민국은 1949년부터 1971년까지 유엔 회원국이다가 중화인민공화국(People's Republic of China)이 유엔에 가입하면서 회원국 지위를 잃었다. 중화민국은 눈물겹게 유엔 재가입을 시도하고 있지만 중국의 강력한 반대에 막혀 번번이 실패하고 있다. 최근에는 타이완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국가의 신규 가입 형식을 꾀하지만 이마저도 중국의 반대가 거세다. 중국은 줄곧 대만은 중국 영토의 일부분으로 보고 하나의 성(省)쯤으로 간주하는 ‘하나의 중국’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현대 중화민국과 수교하고 있는 나라는 중남미와 남태평양, 아프리카 지역의 약소국이 대부분이다. 최근 들어 바티칸이 중국과 수교하려는 움직임이 커지고 있어 교황청마저 대만을 버릴 공산이 크다. 명백한 주권국가인 중화민국의 유엔 가입이 좌절되는 건 국제사회의 부끄러움이다. 지난날 국민당의 실덕과 오늘날 중화민국 사람들의 고초는 맞바꿀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타이완보다는 중화민국이라는 국호를 존중한다. 한때 자유중국이라는 애칭으로 부르던 이 나라를 매몰차게 버리는 건 사람의 도리가 아닌 듯싶다. 대한민국과 중화민국은 1948년에 국교를 맺었다가 1992년 한중 수교로 인해 단교했다. 중화민국의 장제스는 우리의 독립에 적잖은 지원과 격려를 해줬고, 유엔에서 쫓겨나기 전까지 우리의 입장을 많이 대변했다고 한다. 노태우 정부는 북방외교의 일환으로 중국과 전격적으로 수교하면서 타이완과 일방적으로 단교했다. 이러한 외교적 무례는 중화민국 사람들에게 깊은 상처가 됐다. 아무리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해도 절도가 있어야 했다. 비록 정부차원의 공식적 교류는 끊어졌지만 인적 교류와 통상 교역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서로에게 5, 6대 교역국이기도 하다. 다행히 2004년 이후 양국간에 직항노선협정 체결로 하늘길이 열렸고, 중화민국 현지의 한류 열풍도 양국의 앙금을 조금씩이나마 눅이고 있다. 우리가 중화민국을 홀대했듯이 우리는 아직도 달라이라마의 방한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 중국의 막강한 영향력을 외면하자는 게 아니다. 용미(用美)만큼이나 용중(用中)의 지혜가 필요하다.

Posted by 익구
:
070521
잃어버린 몇몇 카드 신고를 하기 위해 전화도 걸고, 직접 은행에 가서 처리도 하다가 중국 약국을 회상했다. 세 해 전 중국 여행을 다녀왔을 때 약을 사러 갈 일이 생겼다. 약국에서 약을 툭툭 던지더라도 너무 놀라지 말라는 당부 말을 듣기는 했지만 약국 직원들은 대개 멀뚱거렸다. 생각보다 약은 세게 던지지 않았지만.^^; 한국에서는 전화로나 창구에서나 하나 같이 친절해 말 거는 사람이 무안할 정도다. 인간적인 수준을 넘어선 봉건왕조 시대의 왕을 비롯한 상층부나 누릴 법한 호사다. 물론 고객의 요구를 무시하거나 짜증을 내서야 곤란하겠지만 신속하고 정확하게만 처리해주면 고객과 종업원 사이에 볼일은 끝난다. 살가운 목소리가 고객 감동을 유발하고 충성도를 높일 수 있다는 점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다만 내가 듣기에 좀 부담스러웠다. 과공비례랄까. 하기야 내가 그만 좀 잃어버려서 그 분들의 일감을 줄일 생각은 않고 과잉 친절이 어쩌고저쩌고 말하다니 참 못 됐다.

박노자 선생님은 일전에 <자본주의와 친절>이란 글에서 자본주의 사회가 말단 직원에게 강제하는 친절이 허망하고 위험하다고 지적하셨다. 나는 그 논설이 너무 날카롭다고 생각한다. “소시민에게는 순간적으로 ‘왕대접을 받는’ 착각”을 일으키지만 그 순간은 너무 찰나고 이미 소시민도 그걸 잘 인지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친절도 평가로 말미암아 노동의 강도가 급격히 올라갈 거 같지도 않다. 나 또한 사무적인 관계에서 과도한 친절은 좀 삼갔으면 하지만 아마 기업 차원에서 덜 친절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도 쉽지는 않을 듯싶다. 우리는 덜 친절하게 모시겠습니다라고 발설할 기업이 어디 있겠는가. 보다 근본적으로 아랫사람들의 친절을 문제 삼을 게 아니라 도무지 불친절한 윗사람들을 문제 삼아야 하지 않을까. 그러면 아랫사람의 친절강박증도 좀 누그러지지 않을까 싶다. 권위적인 한국사회에서 윗사람은 불친절하라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 5월 26일 잃어버린 지갑을 되찾았습니다. 푸하하


070522
한윤형님의 블로그에서 <2007년 대선, 역전승의 전망이 보이지 않는 이유>라는 글을 읽었다. 자신은 이명박이나 박근혜가 당선되면 이기고 상대방은 그 외의 사람들이 당선되면 이기는 걸로 해서 내기를 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을 제외한 사람들이 확률이 아니라 희망에 돈을 걸었다고 평했다. 맞는 말이다. 윤형님은 “집권당에 대한 평가는 2002년이 훨씬 좋았다, 노풍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지금은 대세에 영향을 줄 요인이 없다, 범여권이 정권재창출을 해야할 이유가 없다”는 논거를 들어 정권재창출은 난망하며,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된다고 역설하셨다. 거개 수긍할 만하다.

유시민 보건복지부 장관이 사퇴하고 당으로 돌아오며 남긴 말씀이 인상 깊다. 그는 참여정부를 배에 비유하며 “승객 남아 있는 한 승무원에게는 탈출할 권리가 없다. 구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하고, 구하지 못하면 배와 함께 운명 마감해야 한다. 이것이 상식이다”며 “별난 충성심이라고 말하면 이는 정치적인 문화가 잘못된 것”이라 말씀하셨다. 물론 가장 최선책은 구조선으로 옮겨 타는 거다. 하지만 지지자와 국민의 꿈을 연료로 삼아 항해하는 정당이란 이름의 배들은 갈아타는 배도 살필 수 있어야 한다. 아무 배나 잡아 탈 수 없다는 게 바로 책임정치이며 정당정치 아닌가. 나는 승무원은커녕 3등칸 승객조차 아니었다. 통통배 타고 있다가 큰배가 침몰할 때 같이 깔리는 형국이랄까. 그게 살짝 억울하다.

요즘 들어 정치인이라는 직군의 사람을 함부로 믿는다는 게 얼마나 무지하고 허망한 것인지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그러나 어느 수준의 심리적 계약, 즉 잘 하리라는 믿음 없이 우리 대리인을 뽑는 정치적 지지가 가능할까? 어느 정도 기대에 어긋나도 앞으로 잘 하라며 격려해주는 넉넉한 마음 없이 누군가에게 내 꿈을 투자한다는 게 가능할까(그렇다고 어느 정당의 시멘트 지지율이 마땅하다는 건 아니다)? ‘믿음-실망’의 사이클의 계속 반복된다고 하지만 다음 선거에서 그 사람을 지지하지 않음으로써 환멸을 불러일으킨 책임을 묻는 시스템도 있고 말이다. 직선 대표의 임기 중에 유권자의 의사를 반영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는 것도 시급하지만 평가에 충실했다면 적어도 오늘날 같은 저열한 정치가 횡행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유권자 무서운 줄 모르고 저러고 있지 않은가.

하고픈 말을 꾹꾹 참느라 말이 겉돈다. 나 역시 확률이 아니라 희망에 건다. 사실 희망이라고 표할 것도 없고, 대세를 따르느냐 안 따르느냐의 문제라고 보는 게 더 정확하다. 내가 차마 대세를 따르지 못하는 건 앎과 삶의 거리를 좁히려는 내 실존적 몸부림이다. 나 같은 보수주의자가 찍을 정당이 고작 저런 집단이라니 이건 너무 불공평하고 잔인하다. 사람은 살다보면 변할 수 있기에 훗날 나의 이런 결정에 후회를 할지도 모르겠다. 머리를 쥐어뜯는 와중에 그래도 자신이 믿는 바를 소중히 여긴 것만은 내 힘이 되지 않을까. 나란 놈을 아끼는 마음에서 걱정해주신 도광양회(韜光養晦) 같은 충언들을 이번에도 다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게 죄스러울 따름이다.

희망은 원래 있다고 할 수도 있고 없다고 할 수도 있다. 이는 마치 땅 위의 길과 같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걷는 사람들이 많아지다 보면 자연스럽게 길이 되는 것이다. - 루쉰


070523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님의 『1997년 이후 한국사회의 성찰』(2006, 길)라는 책은 지성의 위기를 진단하고 있다. 김동춘 선생님은 한국사회가 ‘기업사회’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기업이 단순히 사회의 일부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가 기업의 모델과 논리에 따라 재조직되는 사회”라는 것이다. “기업의 효율성이 사회의 효율성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는 김 선생님의 명제를 공병호 선생님은 “경영원리의 도입이 모든 영리단체뿐만 아니라 비영리단체의 효율성을 올릴 수 있기 때문에 사회의 효율성은 자연히 뒤를 따르게 된다”로 대체해야 한다고 지적하신다. 한겨레 신문 지상에서 오고간 두 분의 토론을 흥미롭게 읽었다. 김 선생님은 기업사회에서의 처벌은 명예퇴직 강요, 분사, 비정규직화, 해고, 비연고지 근무 요구 등으로 이루어지는데 이는 처벌이 아니라 기업 경영 합리화라는 아름다운 이름으로 포장되어 있음을 꼬집는다.

“기업사회의 소외와 차별, 억압은 사회적으로 주변화, 개인화되며, 탈락자들은 그 책임을 자신에게 돌린다는 점에서 정치적 차별보다 더 무섭다”는 주장에 수긍한다. 자기 탓하는 게 나쁜 일은 아니지만 패배의 내면화는 인간의 존엄성을 심대하게 저해한다. 김 선생님은 소비자는 결코 시민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주체적 인간으로서의 자각과 정치 기능을 복원함으로써 기업사회를 견제하는 버팀목으로 삼아야 한다는 말씀은 구체적이지는 않아도 실천을 고심해볼만 하다. 기업사회의 가치관으로 비추어 볼 때 민주적 방식이 효율적이거나 생산성이 높다고 보기 힘들다. 그런데도 민주주의를 건사하고 오히려 경제영역에까지 확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민주주의는 기업사회에 삼감의 미덕을 갖출 수 있도록 작동할 수 있을까. ‘민주주의가 밥 먹여 주냐?’는 언설 앞에 주눅 들지 않고 맞설 희망의 언어는 무엇일까. 

최근 국가/지방 행정에서 ‘경영행정’이라는 말을 많이 쓴다. 간단히 말해 행정에도 기업식 경영방식을 도입하는 것을 말한다. 비용의 최소화, 고객 지향적 사고, 신축적 관리시스템 구축 등을 통해 행정의 효율성과 효과성을 높이자는 시스템이다. 단점도 많다. 가령 대중을 자기이익을 추구하는 소비자로 간주할 경우 공동체 형성이 어려우며, 국가적 혹은 집단적 문제는 해결하기 어려움/ 성과와 능률 등의 결과적 가치에 대한 강조는 형평성, 공정성, 절차적 정당성, 대표성 등의 민주적 가치를 손상시킬 우려/ 수익자 부담원칙의 채택으로 불필요한 공공서비스를 줄이는 과정에서 서비스의 격차가 유발되어 저소득계층의 타격이 더 클 소지/ 정부의 권한을 분산, 이양한 관계로 행정 통제가 어려워져 책임성의 문제가 대두될 가능성 등이 있으리라. 행복한 살림살이를 위한 사회 운영원리는 타협과 절충, 시행착오의 연속일 게다.


070524
이덕일 선생님의 『장군과 제왕2-중원의 고구려, 제왕 이정기』(2005, 웅진)과 지배선 선생님의 『중국 속 고구려 왕국, 제齊』(2007, 더불어책)을 읽었다. 765년에서 819년까지 이정기-이납-이사고-이사도로 이어져 중국 산동반도 일대를 통치한 제(齊)나라 이야기다. 이사도는 이태 전 드라마 <해신>에서 악역처럼 나와 역사 왜곡 논란을 낳기도 했던 인물이다. 이정기부터 이사도까지 고구려를 적극적으로 계승하려는 의지가 있었는지는 자세히 알 길이 없다. 하지만 당나라 조정은 이사도군을 “고구려의 흉악한 무리”라고 칭했다. 제나라에 고구려 유민 출신이 많았다는 것도 분명하다. 이사도는 궁궐뿐만 아니라 종묘를 건설할 정도로 독립국가라는 의식이 있었다. 그는 중국에 맞서 싸우다 순국한 한국사상 매우 드문 인물이다.

한국측 사서에는 헌덕왕 11년(819) 이사도의 군대를 치기 위해 당나라가 원군을 청하자 신라는 3만명의 군사를 파견했다는 기록만 전한다. 우리가 제나라를 이렇게 팽개쳐도 되는 걸까? 중국측 사서인 『신당서』, 『구당서』와 『자치통감』은 이씨 왕조에 대해 시종일관 부정적으로 서술한다. 그네들이 자랑하는 춘추필법은 늘 이런 식이다. 이렇게 쩨쩨한 소인배 같은 기록을 남겨 놓고 대국을 자처했는지 알면 알수록 민망하다. 하기야 이렇게 구질구질했기에 결국은 대륙을 차지해 호령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지만(그들에게서 영악함을 좀 배울 필요가 있다). 남 탓할 거 없는 건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비롯해 우리나라 사서 대부분도 중국 흉내내기 바빴기 때문이다. 모화사상은 갈수록 심해져 나중에는 중국의 기록을 그대로 베껴오기 급급한 지경에 이르렀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하지만 이겼으면 됐지 패자의 기록을 이렇게 모질게 해도 되는 건지 참 야박하다. 승자를 존중한다. 승리 앞에서 도덕이니 정의를 들먹이는 게 얼마나 허망한 가를 모르는 바 아니다. 하지만 구차하게 이기고 비루하게 부귀영화를 누린 자들을 잊지 않고 간직하는 건 뒷사람의 떳떳한 도리다. 사료의 틀에 갇힌 고정관념을 벗기는 참 힘들지만 패자의 역사를 살필 때 나는 좀 더 깊어질 수 있을 것이다.


070525
1919년 2월 말 독립선언서 제작하던 인쇄소에 종로경찰서 고등계 형사 신철이 들이닥친다. 민족 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이던 최린은 신철에게 민족을 위해 며칠간만 모른 척 해달라고 사정한다. 신철은 3·1운동이 거행되기 전에 만주로 출장을 떠난다. 그의 침묵 덕에 3·1운동이 발각되지 않았다. 신철은 정보를 감추고 상부에 보고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헌병대에 투옥되었고 그곳에서 곧 자살했다고 1919년 5월 22일자 매일신보는 전한다.

악질형사로 유명했던 이의 대변신이 참 드라마틱하다. 그런데 이런 희생을 발판으로 이뤄진 3·1운동은 결과적으로 철저히 실패했다. 민족 대표 33인은 현장에 함께 하지 않고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을 한 후 전원이 일본 경찰에 연행되는 촌극을 연출했다. 당시 조선의 인구가 1600여만 명 정도였는데 3·1운동은 200만 명이라는 엄청난 인파가 참여했다. 3·1운동을 짜임새 없는 산발적인 시위로 그치게 만든 건 지도부 탓이 크다. 남을 대표한다는 건 멋 삼아 할 일은 아니다.


070526
한미 FTA가 비준될 경우 저작자 사후 50년에서 저작자 사후 또는 저작물 발행(또는 창작) 이후 70년으로 연장하게 된다. 저작권 보호기간은 저작자와 자손 2세대까지 보호한다는 의미로, 최근 평균수명 연장 등의 이유로 전세계 약 70여개 국가가 70년 이상 보호한다. 하지만 나는 그 보호 수준이 너무 과도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에피소드가 있었다. 장하늘님이 좋은 글을 엮어 만든 『소리 내어 읽고 싶은 우리 문장 』이란 책이 있었다. 본래 43편이 아닌 53편으로 기획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저작권자나 그 유족들과 연락이 닿지 않아 10편이 빠지게 되었다. “저작권자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생겨난 저작권법이 오히려 작가의 작품이 독자들에게 읽힐 수 있는 길을 원천적으로 막아버리는 장애 요인으로 변질될 수도 있다는 점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는 말씀에 참 공감했다. 출판사는 불법 대신 작품 게재를 포기했다. 나로서는 내가 모르던 명문을 접할 기회를 잃은 셈이다.

내가 크리스트교와 좀 데면데면해서 성경 구절은 잘 모르지만 전도서 1장 9절의 “해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there is nothing new under the sun)”는 말씀은 새기고 있다. 지식의 창조자 혹은 생산자들은 그것이 자신만의 것이라고 주장해서는 안 될 거 같다. 그건 오만이 아닐까. 설령 순수하게 자신의 머리로 나왔다고 한들 그걸로 엄청난 부귀영화를 누리는 게 온당할 거 같지도 않다. 미국의 정치철학자 존 롤즈는 천부적 재능은 사회적 공공재라고 주장했다. 부잣집에서 태어났거나 재능이 뛰어나거나 하는 자연적, 사회적 우연성은 그 사람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탁월한 지적 능력은 단지 우연이라고 할 수만은 없지만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의 고사처럼 운이란 것도 있고, 천재라는 것도 있는 건 분명하다. 아무도 자신의 뛰어난 천부적 능력을 받을 자격이 있지 않으며, 사회에서 보다 유리한 출발점을 차지할 자격은 없다는 그의 말씀은 음미할 만하다. 나는 불법 복제를 옹호하는 게 아니다. 다만 저작권법이 배움을 막는 쪽으로 나아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070527
금아(琴兒) 피천득 선생님이 지난 25일 돌아가셨다. 추모하는 많은 분들이 선생님의 순수함을 드높였다. 나는 그보다 더 감명 깊은 것이 선생님의 멈춤이다. 선생님은 1970년대 중반 절필을 선언하셨다. 당신께서 전보다 못한 글을 쓰고 있다고 느껴서 글쓰기를 그만 두셨다고 한다. 선생님은 번역서를 제외하고는 한 권의 수필과 한 권의 시집을 남겼을 뿐이다. 나는 선생님의 수필 가운데 ‘반사적 광영反射的 光榮’이라는 글을 참 좋아한다. “사람은 저 잘난 맛에 산다지만, 사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 잘난 맛에 사는 것”이라는 말씀에서 겸허함을 배우고 싶다. 잘난 사람을 꿍꿍이 없이 인정할 수 있어야겠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선생님의 글을 배우고 익히던 학창시절이 문득 그립습니다.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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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각 부처의 브리핑룸과 기사송고실을 통·폐합하는 방안을 심의해 확정했다. 기자실 통폐합을 놓고 언론과 정치권의 비난이 거세다. 그런데 누리꾼들의 댓글이나 블로거들의 글은 사뭇 다른 양상이다. 수많은 언론학자와 법학자들의 이 조치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반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긍하지 못하고 항변하는 이들이 많다는 건 참 신기한 일이다. 우리가 정보를 주로 얻는 신문, TV뉴스, 정치권 성명 거의 모두가 한 목소리인데 설복되지 않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는 건 어인 영문인가. 언론사 세무조사로 귀중한 언론 지면을 정부 성토장으로 쓰던 시절에도 몇몇 언론은 다른 목소리를 냈었다. 이번에는 그런 것도 없이 한 목소리인데도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독자와 국민이 있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내 기억에 이례적인 현상이다.


나는 기자나 공무원이나 그 밥에 그 나물인데 도토리 키재기로 누가 더 나쁜 가를 재는 게 무슨 큰 의미가 있냐는 볼멘 소리에 적잖이 동감한다. 행정부의 공개 수준이 여전히 미흡하기 때문에 기자들의 접근이 차단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는 지적도 맞다. 기자실이 공무원을 접하는 방편(方便)으로서의 기능할 가능성이 있는 건 감추고 담합의 가능성만 부각시키는 건 균형을 잃은 처사라는 것도 공감한다. 원론적으로 말해 이번 사안은 언론도 정부도 함께 노력하면 그만인 일이다. 물론 세부적으로 따지자면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문제가 있지만. 굳이 선후를 따지자면 세금으로 운영하는 공무원 조직에게 더 큰 책임을 지워야한다는 주장은 너무나 마땅해 딱히 반박할 명분이 없다. 일반 국민들이 공무원에게 더 큰 책임을 요구하는 건 지당하다. 하지만 언론 자신들이 그런 말을 서슴없이 하기에는 좀 화끈거리지 않는가. 자신들이 그렇게 약자이고 책임이 덜하다고 생각할까?


기자실이 없는 수많은 선진국들에 견주어 우리네 정부의 취재 환경이 열악한 게 사실이라면 그것을 차분히 설명하면 될 일이다. 괜히 언론 탄압을 들먹이면서 사생결단 하는 건 민망하다. 언론 자유를 억압하던 시절 방기하거나 심지어 동조하던 이들도 졸지에 언론 자유를 외치는 걸 보면 그만큼은 살기가 좋아진 모양이다. 언론들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싸우는 건지 언론의 취재 편의를 위해 싸우는 건지 헛갈린다. 아마도 언론들의 과장된 수사가 거부감을 유발한 모양이다. 기자실을 유지해 국민의 알 권리가 신장된다는 확신도 없기도 하다. 기자들이 소속 언론사 데스크의 입맛에 어긋나는 기사를 쓸 수 있을지 회의적이다. 자칭 비판 언론들의 트집 잡기는 식상한 수준이 아니라 측은할 정도다. 비판은 최대주의적으로 까는 게 아니라 최소주의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닐까. 훌륭한 집도의는 피를 적게 흘린다고 하던데.


슬프게도 많은 이들이 기자란 집단의 자정능력을 그리 신뢰하지 않는 듯싶다. 이게 정부 탓은 아닐 게다. 언론의 권위, 기자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걸 누구에게 시비한단 말인가. 권위라는 말이 싫으면 기품이라고 해도 좋다. 대다수 국민들은 대다수 정치인이 제 몫을 못한다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대다수 기자들이 제 노릇을 못한다고 생각한다. 기자들이 제 몫을 채우지 못하는 게 정부가 공개하는 정보가 적어서 만은 아닐 게다. 정부로부터의 독립만큼이나 중요한 건 편집국 데스크로부터의 독립이 아닐까 싶다. 시사저널 사태에 대다수 언론이 침묵하고 있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기자님들은 신장된 자유를 어디에 쓰시는 걸까? 물론 나의 이런 넋두리는 물타기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지금 정부 취재 논의를 하는데 편집권 이야기를 하는 건 논의의 본질을 흐린다. 그러나 몇몇 온라인 매체를 제외하고 거의 같은 논조의 기사들이 난무하는 걸 보면 이 분들이 정부의 독선이나 획일성을 질타할 수 있을지 난감하다.


나는 바쁜 국민들을 대신해 언론이 정부의 고급 정보에 더 많이 접근해 그 문제를 파악하고 알려나가길 바란다. 기자들에게 보통 사람들보다 좀 더 내밀한 접근 권한을 준 것은 그런 역할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 역할에 충실했는가 스스로에게 반문해볼 수는 없을까? 언론은 사악한 정부에 맞서 진리와 정의를 수호하는 절대선인가? 정부도 국민이 비판하면 반성하는 시늉이라도 할 줄은 안다. 정당도 표 때문에라도 엎드린다. 가장 자성의 소리를 듣기 힘든 곳 가운데 하나가 언론이다. 자기네 사주의 억울함(?)을 항변할 줄은 알았지 스스로 반성하고 고쳐나가겠다는 말은 좀처럼 안 보인다. 결국 언론의 십자포화에 상당수 국민들의 핀잔은 묻히고 정부는 항복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잃어버린 믿음을 되찾지는 못하리라. 믿음은 남에게 빼앗을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남을 구박할 권리는 언론 집단에게 자연스럽게 도출된 권리가 아니라 국민이 맡겨둔, 빌려준 권리가 아닐까?


나는 정부가 기자들이 공무원을 접촉하는 걸 상당 부분 제약하는 조치를 내린 것이 불만스럽다. 강준만 교수님 말씀대로 “언론에 아무리 많은 문제가 있다 해도 ‘최악’을 감시하기 위해선 ‘차악’이라도 용인할 수밖에 없는 게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부러 언론업 종사자들을 투덜거렸지만 공직 사회의 폐쇄성 또한 밉살맞다. 기자실 통폐합을 선진화라고 밀어붙이기에는 정부가 그리 떳떳하지 못하다. 많은 이들이 지적했듯이 한미 FTA 추진 과정은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 수준을 후퇴시켰다. 정부 역시 기자실 통폐합에 상응하도록 행정 정보 공개를 넓히는 후속 조치를 내려야 한다. 나는 이게 윈윈이라고 생각한다(정부가 취재 편의 증진 방안을 내놓겠다고는 한다만서도). 강 교수님은 “이게 과연 한나라당 정권하에서도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지”를 생각해보라고 권유하지만 그건 편견이다. 기자실 통폐합의 좋은 취지를 새로운 집권 세력이 악용한다는 논리라면 국가보안법 폐지라는 선의를 친북 세력이 악용한다는 주장과 얼마나 큰 차이가 있을까?


정일용 한국기자협회장 말씀대로 “정부가 정말 공무원들과 일전을 불사할 각오로 공무원 사회의 폐쇄성을 타파할 생각이라면 먼저 그것을 확인해주고 무엇을 하더라도 늦지 않”았다. 이런 방법상 혹은 선후관계의 실책은 인정하지만 기자실 기능을 대체하는 오히려 능가하는 행정 정보 공개로 논의의 초점을 옮겨가야 한다. 이 과정이 기자의 누림을 좀 줄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제가 누리는 것을 좀 줄이더라도 국민의 세금도 절약(기자실 운영 비용)하고 국민의 정보 접근권도 높이는 방향으로 힘을 모을 수는 없을까? 반성해야할 건 정부만이 아니다. 언론의 권위나 기품이 추레한 건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끔찍한 건 언론권력이 스스로를 신성시하는 것일 테다. 성역을 없애겠다는 이들 자신이 성역이 되는 모습은 희극이라기보다 비극이다. 여담으로 한 가지 제안하고 싶은데 모든 언론사 홈페이지 메인 화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구독 중지를 손쉽게 신청하는 배너를 만드는 건 어떨까? 이솝우화에 나오는 병 문안 온 짐승을 잡아먹는 사자 동굴은 들어가기는 쉬운데 나오기는 어렵다. 마찬가지로 끊기는 어려운 이 요상한 구조를 허무는 것은 가장 쉬운 수준의 언론개혁이 아닐까 싶다. 언론에 대한 평가는 절독 밖에 없으니 해보는 말이다. - [無棄]


* 노파심에서 추신 - 저는 제 주변에 알고 지낸다고 할 만한 기자가 단 한 분도 없습니다. 만약 기자분의 고충을 접할 기회가 있었다면 이렇게 모질게 말하지는 못했겠지요. 오히려 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속 편하게 하고 싶은 말을 거의 다 한 건지도 모르겠네요. 기자란 직종을 접해보지 못한 사람들의 평균적인 감정이라고 생각하고 읽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저는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명제에 적극적으로 동감하지는 않는 녀석입니다. 가령 기자 같은 직업은 보통 생활인과 비교해 좀 더 멋지고 영향력도 있는 데다 귀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기대가 커서 실망도 큰 것이겠지만요. 상당수 기자분들이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모르시는 거 같아 아쉽네요. 하긴 뭐 기자의 밥그릇 동맹은 특별히 숭고하지는 않아도 특히 더 나쁜 건 아니니까요. 저는 궁극적으로 이 논의가 기자들의 기품을 살리는 방향으로 나아가길 바랍니다. 특권이 아니라 기품이요.

Posted by 익구
:
070514
EBS 지식채널 ⓔ라는 재미난 기획물이 있음을 이제야 알게 됐다. 아쉬운 대로 몇 개를 골라봤는데 흥미진진했다. 최근 방영된 헬렌 켈러에 대한 이야기를 영상으로 접하니 여운이 짙다. <미국의 우상>이란 제목의 영상물은 헬렌 켈러가 장애를 극복한 인간 승리의 대명사로만 알려졌을 뿐, 그가 사회주의 운동에 몸담았던 사실은 대개 은폐되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하긴 그러고 보니 어릴 적 읽었던 헬렌 켈러의 전기에는 장애를 극복한 이후의 삶이 매우 소략했다.

헬렌 켈러의 정치적 발언을 원치 않았던 이들이 헬렌 켈러의 주체적 판단력을 불신하는 전략을 쓴 모양이다. 누군가 부추기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험담했다는 게 씁쓸하다. 인간의 비루함이라는 게 이런 것일까. 헬렌 켈러의 삶을 발췌해서 간직하려는 그들은 헬렌 켈러를 그의 삶과는 정반대로 소비한다. 사회적 모순을 비판하던 그를 개인의 초인적 노력으로 역경을 딛고 일어서라는 자조론, 자력갱생의 미덕으로만 이용하려 했다. 헬렌 켈러가 자신의 아픔을 미루어 남의 아픔을 헤아리고 해결책을 모색해왔다는 측면은 부러 무시하고 단지 개인적 영역으로만 한정하려고 노력한 이들이 적잖다.

나는 우리 사회에 좌파가 더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보다 더 시급한 것은 우파들이 상식이나마 건사하는 게 아닐까 싶다. 상식은 곧 최소한의 객관성이다. 헬렌 켈러를 발췌해서 간직하듯이 박정희를 발췌해서 찬양하는 사람들이 좀 줄었으면 좋겠다(발췌의 유혹에 나도 예외는 아니다). 헬렌 켈러는 “자본주의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에 “쓸모보다 목숨이 길어요”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는 정말 낙관주의자의 사표다. “비관주의자치고 행성의 비밀을 알아낸 사람이 있는가? 인간정신을 위한 신대륙의 항로를 개척한 사람이 있는가?”라는 그의 죽비소리가 등짝에 사무친다. 행성의 비밀을 알아내지 못하고 신대륙의 항로를 개척하지는 못하더라도, 쓸모보다 목숨이 긴 삶을 살지는 말아야 할 텐데.


070515
스웨덴의 웁살라 대학은 1477년에 창설된 북유럽쪽(스칸디나비아 지방)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다. 학교 강당의 입구에는 토마스 트릴드(Thomas Thorild)의 시구인 “자유로운 사고는 위대하다. 그러나 보다 더 위대한 것은 올바르게 사고하는 것이다”가 새겨져 있다. KBS <걸어서 세계속으로>란 프로그램에서 비춰준 그 명구를 그대로 옮겨 적자면 TÄNKA FRITT ÄR STORT MEN TÄNKA RÄTT ÄR STÖRRE다. 스웨덴어는 하나도 모르기 때문에 움라우트(Umlaut)를 제대로 옮겨 적은 건지 잘 모르겠다만서도. 영어로는 TO THINK FREE IS GREAT, TO THINK RIGHT IS GREATER 정도 되는 셈이다.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악은 평범하다고 설파했다. 나치 전범 아이히만은 천성이 악마가 아니라 생각하지 않음(thinklessness)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고에도 위계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생각하는 것 자체도 요긴하다.

일단 생각에도 빛깔이 다를 수 있다고 인정하자. 그런데 내 자유로움이 온전히 올바름을 위해 쓰일 자신은 없다. 우선 올바름이란 개념을 합의하기가 너무 어렵다. 윤평중 한신대 교수는 자유주의자를 “열려 있으면서도 혼자 있을 수 있는 사람, 연대하면서도 패거리 만들지 않는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올바름을 모색하되 고집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 균형점 언저리를 향한 노력을 할 뿐이다. 올바름을 지키다가 홀로서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올바름을 핑계로 무리를 지어 남을 핍박하지도 않는 포지셔닝이 흐릿하다. 자유와 올바름의 중용이란 게 가능할까? 아니 존재라도 할까? 이데아를 빙자한 허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070516
역사학자 크로체(Croce)는 “모든 역사는 현대사(당대사)”라고 주장했다. “모든 역사적 판단의 기초가 되는 실천적인 요구는 모든 역사에 현대사의 성격을 부여한다. 왜냐하면 지금 서술되는 사건이 아무리 시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실제로 역사는 그 사건이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현재의 요구와 현재의 상황을 다루기 때문이다(The practical requirements which underlie every historical judgement give to all history character of “contemporary history” because, however remote in time events there recounted may seem to be, the history in reality refers to present needs and presents situations wherein those events vibrate. - 中).”카(Carr)는 “역사란 본질적으로 현재의 눈을 통해서 그리고 현재의 문제들에 비추어 과거를 바라보는 것이며, 역사가의 주요한 임무는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평가하는 것임을 의미한다”고 풀었다. 책에 포함된 사실이 아닌 책을 쓴 역사가에 대한 관심을 먼저 기울여야 한다는 데 많이 동감한다.

이것과는 좀 다른 맥락이기는 한데 우리네 정치사 연구가 지나치게 현대사 위주로만 진행되고 있다는 건 문제다. 물론 근대 이전으로 올라가면 원전은 한자 해독(!)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정치학도에게 그런 걸 요구하기가 쉽지는 않으리라. 하지만 정치학계가 행태주의 방법론에 치우쳐 역사적 방법론을 소홀히 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경제사상이나 경제학사가 경시되는 것처럼 정치사상이나 정치학사도 관심이 적은 듯싶다. 행태주의는 사회현상도 자연과학과 마찬가지로 엄밀한 과학적 연구가 가능하다고 본다는 특징이 있다. 수학적, 통계적 방법을 통한 측정 가능성을 높이 평가한다. “관찰 가능한 현상을 주요 분석 대상으로 다룰 뿐만 아니라 될 수 있는 한 수량화(quantification)가 가능한 문제를 다루고, 측정 및 검증 과정에 엄밀한 기법(technique)을 도입하여 정확성을 기하고자 노력(서울대학교 정치학과 교수 공저, 『정치학의 이해』, 2002, 25쪽)”하는 태도다. “정치생활의 경험을 토대로 하여 고유한 법칙적 지식을 발전시키고, 정치적 현실을 어떤 창조적인 목적적 가치규범과 관련시켜 경험법칙과 규범지식의 합리적이고 적합한 체계적 관계를 이론화(김재영 외, 『새로운 정치학의 이해』, 삼우사, 2003, 38쪽)”한다.

정치학 교과서들의 설명이 어려워 비전공자가 이해하기 어렵다. 다만 행태주의가 놓친 역사적 맥락으로 접근하는 시도를 해봐야겠다. 크로체의 명제는 반드시 현재에 벌어지는 일에만 집중하라는 뜻은 아닐 게다. 과거의 사실을 접하면서도 현재의 관심에 부응할 수 있는 안목을 일컫는 건 아닐까. 추체험(追體驗)이란 말처럼 당시의 그 사람, 그 현실 속에 들어가서 생각하고 행동해보자. 그런 사고실험을 통해 과거의 여러 사실 가운데 오늘날 유의미한 사실을 끄집어내는 작업을 수행한다. 이를 통해 오늘날의 나 자신과 시대의 문제에 적용해볼 수 있다. 미술사학자 강우방 선생님은 이론보다 실천을 앞세운 한국미술사 연구를 강조하신다. 이론의 틀 속에 넣어서 작품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작품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 시대정신과 미의식을 체험하는 것이 추체험이라 부른다고 말씀하셨다. 여전히 알쏠달쏭하지만 대략 이런 개념을 체득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070517
라오서(老舍)가 지은 『루어투어 시앙쯔(駱駝祥子)』를 읽으니 온종일 먹먹하다. 시앙쯔는 자기 인력거를 장만하기 위해 악착같이 노력한다. 그러나 그는 번번이 실패한다. “내가 도대체 누구한테 잘못했단 말이요?”라고 울부짖던 그는 결국 “빨리 달리라고요? 얼마 더 줄려요?”라고 쏘아붙이고 “왕년에는 나도 악착같이 노력했다 이거야, 그래서 뭐가 어떻게 됐나, 요 꼴밖에는”이라며 푸념한다. 나도 저들과 별반 다를 바 없음을 인정하는 고통이 절절하다. 사실 시앙쯔가 엄청난 신분 상승 욕구를 품은 것도 아니고 그저 배곯지 않는 안정적인 수입원과 자유로운 삶을 갈망했을 뿐인데 그 마저도 과분한 바람이었다.

작가는 시앙쯔가 “다른 인력거꾼들보다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은 그러한 인력거꾼다운 인력거꾼이 되었다”고 담담하게 서술한다. 자본주의 사회는 개인의 책임을 강조한다. 그런데 시앙쯔가 사회의 부조리에 시달리는 것을 보면 그에게 손가락질 하고픈 마음이 슬며시 사라진다. 시앙쯔의 타락은 편안함만을 좇게 된 게으름 때문만은 아닌 거 같다. 그의 절망이 쌓이고 쌓이는 과정을 보면 그의 숙명론을 타박하기 미안하다. 성공하려면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소리를 늘어놓기 전에 작은 노력에 작은 보상이 주어지는 사회를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는 팔자소관이 줄어드는 세상일 것이다.

비는 부자에게도 가난뱅이에게도 내린다. 의로운 사람에게도, 의롭지 않은 사람에게도 내린다. 그러나 실은 비는 결코 공평하지 않다. 공평함이 없는 세상에 내리기 때문이다.
시앙쯔는 병이 났다. 셋집 울타리 안에 병자가 그 하나 뿐은 아니었다.

- 라오서 지음, 최영애 옮김, 김용옥 풀음, 『루어투어 시앙쯔』(하), 통나무, 1986, 495쪽


070518
김혁규 의원님이 올린 <5ㆍ18 민주화운동 27주년을 맞아>라는 글을 읽었다. 그는 “저는 대한민국의 언론보다 광주의 민심을 더 두려워합니다. 광주의 동의 없이, 5ㆍ18민주화운동이 낳은 시대정신을 계승하지 않고는 결코 대한민국의 지도자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5ㆍ18 항쟁을 승리로 이끈 광주의 정신을 존경합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적잖은 누리꾼들은 당연히(!) 그의 한나라당 경력을 문제 삼는 댓글을 올렸다. 나는 이 누리꾼들의 투덜거림이 거개 적절하다고 본다. 다만 김 의원님이 열린우리당 창당 초기 어려운 시점에서 입당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그의 진정성을 어느 정도 믿어주고 싶은 마음이 크다. 어차피 비례대표 앞 순번 받을 걸 예상했을 테니 위험 부담이 적었다고 핀잔해도 할 말 없지만.

한나라당에는 왕년의 민주화 투사들이 적잖다. 가끔 제 과거에 너무 어긋나는 행동이 민망해서 짐짓 그럴 듯한 말씀을 하기도 하지만 그네들은 과거를 팔아 꽤 괜찮은 수입을 올렸다. 나는 그네들을 너무 미워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사람의 변하게 마련이다. 그 변화가 바람직한지 여부는 함부로 가를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개혁세력, 민주화세력으로 자처하는 이들이 너무 결벽성을 내세우거나 순혈주의를 주창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의 품이 저들의 품보다 작고 우리의 가시가 저들의 가시보다 더 날카롭다면 우리는 언제 우리가 꿈꾸는 세상을 실현할 수 있을까(‘우리’라는 표현을 써도 될지 고심했지만 일단 쓴다). 우리의 꿈은 고작 개개인과 그 둘레 수준의 영역에서 맴돌고 말 뿐이다. 오늘날 국민에게 표 받겠다는 사람 치고 오월의 광주를 대놓고 폄훼하는 사람은 찾기 어렵다. 오히려 광주의 정신을 잇겠다며 투항(?)하는 사람들이 줄서고 있다. 김혁규 같은 분들이 더 늘어나는 건 좋은 일이다.

음악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나이지만 가사가 좋은 몇몇 민중가요는 즐겨 듣는다. 김근태 의원님의 미니홈피 배경음악에 깔린 민중가요를 놓고 어느 누리꾼이 당신이 민중가요를 깔아놓다니 어울리지 않는다는 요지의 방명록을 남겼다. 내가 보기에 그 말은 넘쳤다. 나는 그 논리에 따르자면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광야에서>, <바위처럼>, <청계천 8가>, <아침이슬>, <상록수> 같은 노래들 근처에 가서는 안 될 테다. 그건 너무 팍팍하다. 나같이 보수적인 녀석은 사람은 꽃보다 아름답다는 명제에 동참할 수 없는 건가. 그건 너무 엄격하다. 자칭 개혁세력, 민주화세력은 (나 같은) 어정쩡한 이들을 너그럽게 거둘 필요가 있다. 콩고물을 보고 달겨드는 사람도 분명 있으리라. 그만큼 우리가 넉넉해졌다는 징표다. 항복한 장수는 후대했던 동서고금의 사례를 돌아보자. 장비가 엄안의 포박을 풀 때 참 멋졌다. 광주의 오월을 상업적으로 파는 이들이 많아지는 걸 너무 서운해 하지 마시길.


070519
오랜 만에 분당을 향했다. 초등학교 시절을 성남시 중원구에서 보낼 때 분당구는 이제 막 짓고 있는 곳이라 삭막하고 휑하던 기억뿐이다. 서울을 별로 겪어보지 못한 나는 분당에서 빌딩숲(정확히는 아파트숲)의 숨 막힘을 겪었다. 다시 찾은 분당은 녹지대가 참 많은 곳이었다. 신록은 부자 동네든 가난한 동네든 어디서나 반갑다. 문득 분당이라는 지명의 유래가 궁금해졌다. 1914년 일제에 의하여 새로 만들어진 합성지명이라고 한다. 분점리(盆店里)와 당우리(當隅里)라는 두 마을의 머리글자를 따서 분당(盆唐)이라고 했는데 당(堂)자가 당(唐)자로 바뀐 영문을 모르겠다.

초등학교 사회 과목 전과에는 직할시 등을 설명하며 그 다음으로 규모가 큰 도시로 울산과 성남을 들고 있었다. 그런데 울산이야 광역시가 되었고, 특별시와 광역시를 제외하고 인구가 가장 많은 도시는 성남이 아니라 수원이다. 내 기억에 성남이 팔십 몇 만이고, 울산이 구십 몇 만이라 성남이 2등이었는데 지금도 2등이다. 2007년 4월 말 현재 성남이 96만 여명이고, 수원이 108만 여명이다. 수원시의 연도별 인구 현황을 살펴보니 내가 초등학교 6학년 성남에서 서울로 전학 오던 해인 1995년 당시 75만 여명이다. 지난 십 몇 년 간 수원으로의 인구 유입이 많았던 셈이다.

사실 수원이 광역시가 되려 해도 경기도측의 반대가 심해 쉽지 않을 것이다. 성남의 경우는 인구만 많을 뿐 서울의 위성도시 성격이 강해 광역시 승격 요건에 맞지 않을 공산이 크다. 문득 내가 살던 동네가 직할시가 되면 좋겠다는 희망을 품었던 철부지 시절이 떠올랐다. 1995년에 지방자치법 개정으로 중앙집권적 의미가 강한 직할시 대신 광역시로 개칭되었고, 울산은 1997년 7월 광역시로 출범했다. 1995년 8월 교육부는 일제 잔재 청산을 위해 국민학교라는 명칭을 초등학교로 바꾼다고 발표했다. 실제 각급 학교 적용은 1996년 3월부터였고 내 또래는 마지막 국민학교 졸업생이 되었다. 국민학생이 품었던 직할시의 꿈은 이루지 못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내가 너무 변화의 소용돌이 한 가운데 있었던 사람처럼 말하는 거 같아 우습다. 자신의 경험이나 추억에 너무 과도기적 의미를 부여하는 걸 삼가자. 자기 삶을 각별하다고 우기면 끝도 없다. 이런 이야기는 그냥 흘러가듯 스쳐가듯 하고 잊으면 그만이다. 나이를 먹고 경험을 쌓을수록 경험을 이용해 논리를 입증하려는 유혹이 커질게다. “내가 겪어 봐서 아는데”, “그 때 당시에는 말이야” 이런 식으로 말이다. 이런 말은 상대방이 청해오면 모를까 스스로 먼저 주섬주섬 꺼내놓을 이야기는 아닐 듯싶다. 경계할 일이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경험론자보다는 합리론자 편이지 않는가(어머나 이 고질적인 편가르기란).^^;


070520
젊음은 동이 나기 때문에 더 아름답다. 요 며칠 술을 열심히 마셨고 그간 잠잠하다 싶었던 내 주사가 또 펼쳐졌다. 민폐는 끼치지 않으나 내 스스로에게 폐를 끼치는 주사 말이다. 자폐(自弊)는 어감이 안 좋으니 아폐(我弊)나 오폐(吾弊)라고 불러서 내친 김에 고유명사화 해버릴까 보다. 이번에는 지갑을 잃어버렸다. 대동제 주점 자리도 선방했거늘 축제도 끝나 적막한 안암동에서 이런 사단을 벌이다니 비통하다. 사실 전례가 많은지라 좀 덜 놀랄 법한데도 늘 후회스럽고 민망하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게 있으랴.

이것저것 잃어버려 보고 나니 내 소유에 대한 책임감이 늘기보다는 기왕이면 덜 가지고 다니게 된다. 분실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소지품을 약소하게 꾸린 노마드형(?) 지갑을 만든 덕에 좀 유쾌하다. 이러다가 내 물건들이 나를 훌쩍 떠나도 고이 보내 줄까봐 걱정이다. 이런 사건을 겪고 날 때면 나는 늘 금주령을 만지작거린다. “술은 언제나 무죄다”는 게 내 오랜 신조이기는 하지만 길일을 택해 금주 시늉을 해보면 어떨까 싶다. 숙취를 다독이며 문화재청 답사기 공모전 원고를 마무리했는데 가난해진 내게 복음이 들려왔으면 좋겠다.

Posted by 익구
:
070507
홍기빈 선생님의 『투자자-국가 직접소송제』(녹색평론사, 2006)라는 책을 흥미롭게 읽었다. ISD(Investor-State Dispute)가 한미 FTA의 최대 독소조항으로 지적하는 분들이 적잖기 때문에 관심이 가는 분야다. 홍 선생님의 저서는 ISD의 다각적 조명으로 많은 기초 교양을 쌓게 해준다. 오늘날 세계경제를 휩쓰는 (자본가의) 자유지상주의라는 철학적 기반을 엿보는 즐거운 배움이다. ISD는 외국인 투자자가 투자 유치국의 협정의무 위반 등으로 손해를 입을 경우 직접 해당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제도다. 홍 선생님은 “투자자는 국가를 대상으로 소송을 걸 수 있지만 국가는 투자자를 대상으로 소송을 걸 수 없다(23쪽)”는 비대칭적 특징을 지적한다.

ISD는 신자유주의의 확산으로 사적 소유권의 개념이 확장된 결과물이다. 소유자가 갖고 있는 “단순한 ‘사물’에서 ‘사물을 통해 벌어들일 화폐가치’, 즉 ‘소득창출 능력’으로 바뀐 것(66~68쪽)”이다. 글쓴이는 적용된 사례 검토를 통해 투자자가 주권 국가와 동급의 법적 지위를 누리는 것을 넘고 있음을 보여준다. “투자자들을 보호하는 ‘방패’의 성격을 넘어서는 것으로, 오히려 투자자들이 투자대상국 사회 전체를 공격하는 ‘창’의 성격(114쪽)”으로 돌변했음을 강조하며, “‘힘없는 투자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배상금’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정복자가 된 투자자들’이 뜯어가는 ‘승전 배당금’(161쪽)”에 가깝다고 역설한다.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걸 투자자들이 그리 만만한 존재들이 아니라는 건 직관적으로도 알 수 있다. 경계해야 한다.

송기호 변호사님 등의 분들은 ISD의 위헌적 요소를 우려한다. 투자자의 재산권과 기대이익을 포괄적으로 보장하고 있어 우리의 헌법과 법률이 보장하는 재산권보다 보호 범위가 넓기 때문이다. 또한 대한민국 헌법 제119조 등을 통해 우리 헌법이 수정자본주의 혹은 사회적 시장경제를 채택하고 있다는 게 해석론적 통설이기도 하다. 하지만 헌법 제6조 2항은 “외국인은 국제법과 조약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그 지위가 보장된다”고 규정하고 있어 외국인의 재산권 보호가 법률보상주의에 위배되지 않을 여지가 많다. 또한 FTA 협정문을 국내법으로 판단한다면 어지간한 국제조약은 위헌 시비에 말릴 공산이 크다는 현실론도 설득력 있다.

보다 근본적으로 우리 행정법상 손해전보제도의 흠결을 검토해야 한다. 행정상 손해전보에 관한 현행 법제도에는 적잖은 흠결이 발견된다. 현행 국가배상법상 위법하지만 무과실인 경우에는 국가의 손해배상책임이 인정되지 않고, 행정상 손실보상에 관한 일반조항이라 할 수 있는 헌법 제23조 3항은 재산권에 대한 직접적 침해에 대한 보상만을 규정하고 있다. 게다가 적법행위로 말미암은 특별한 손해가 발생하는 경우에도 보상규정이 없어 적절한 보상을 해주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입법론적 정비가 필요하다. 간접수용을 인정하지 않는 국내법을 근거로 협정문을 위헌이라고 타박하는 논리가 아슬아슬하다. 우리 스스로가 먼저 고칠 점이 꽤 있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우리가 세계 각국과 맺은 투자협정에 포함한 ISD로 인한 실제 분쟁이 벌어진 바는 없다. 그러나 소송 천국이라 불리는 미국과는 양상이 사뭇 다를 것이다. 법무부는 현행법과 제도, 관행 등을 분석해 협정 위반 소지가 있는 부분을 사전에 찾아내 고치고, 각 부처가 외국인 투자관련 정책을 입안할 때 FTA 협정을 위반할 가능성이 있는지 미리 점검하는 ‘외국인투자 영향평가제’를 도입할 계획이라고 한다. 국제 전문 인력풀을 구축하는 등의 장기적 호흡의 노력도 기울일 게다. 하지만 아쉬움이 남는다. 한미 FTA 협상 과정에서 한국은 ISD 조항이 포함된 협정초안을 미국에 제시했다. 국내의 반대 여론을 이용해 다른 분야에서 미국의 양보를 받을 가능성을 없애버렸다. 폭넓은 예외조항을 받아냈다고 자화자찬하기 전에 협상카드 하나를 날려버린 건 실책이 아닐까 싶다.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이라도 잘 했으면 좋겠다.


070508
프랑스 대선 결선투표에서 집권 대중운동연합의 니콜라 사르코지 후보가 세골렌 루아얄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프랑스식 국가 개입주의 모델의 황혼이라면 섣부른 생각일까? 영미식 신자유주의 모델에 맞섰던 프랑스의 예외성도 글로벌 스탠더드 앞에 융해되고 있다. 선거 결과에 대한 감상과는 별개로 프랑스 국민들의 높은 참여정신과 프랑스 정당들의 또렷한 정책 대결이 부럽다. 민주적 정당성과 안정성을 도모하기 위한 결선투표제도 호감이 간다. 그 무엇보다 패배한 사회당 지자자들이 진심으로 슬퍼할 때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절감한다.

다시 눈을 대한민국으로 돌리니 어떤 나라를 만들어야 하느냐를 놓고 갑론을박하는 프랑스인의 기품에 견주어 솔직히 열등감을 느낀다. 한국보다 더 좋은 나라로 이민을 간다는 사람의 심정이 이런 건지도 모르겠다. 같은 해에 대선을 치르는 이 땅은 국고보조금을 받기 위해 급조한 가건물 정당, 백마 타고 올 초인을 기다리는 학수고대 정당이 횡행하고 있다. 필패의 구도로 향해가는 분열신당론자들은 구차하게 질 것이 뻔한데다 역사적으로 옳지도 않은 길을 으쓱대며 걷고 있다. 물론 국회의원님들이야 어찌어찌 금배지를 다시 달 수 있을 테니 그리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닌지도 모르겠지만. 역사를 경시하는 국민들이 많다 보니 오명을 좀 남겨도 비용편익분석상 이득이 더 큰 셈이다.

선거 승리나 정치적 생존에 집착하는 분들이 추레하듯이 ‘도로 민주당’의 귀환에 예민하게 반응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신경이 쓰이는 건 솔직히 어쩔 수 없다. 내 성장통에 지역주의가 끼어있기 때문이다. 92년 대선 때 나는 열 살배기 어린이였다. 정규 방송을 다 중단하고 오로지 개표방송을 하는 게 참 지겨웠다. 88 올림픽 때 경기 중계 관계로 만화 프로그램이 일시 취소되어 분개했듯이 말이다. 내 눈에 가장 먼저 비친 것은 김영삼의 환희나 김대중의 눈물이 아니었다. 초등학교 3학년 말 한국사에 빠져 있던 내게 신라와 백제를 연상시키듯 갈라진 영호남의 개표 결과 그래프가 가슴에 박혔다. 난 그 때 처음 지역주의라는 걸 실감했다.

그 후 15년, 여전히 지역주의는 우리 정치의 큰 상수(常數)다. 역사를 하늘보다 두려워하는 녀석으로서, 양심이 신보다 위대하다고 믿는 녀석으로서 나는 새삼 또 다짐한다. 내 영혼을 내 스스로가 통제 가능할 때까지 지역주의에 손짓하거나 굴하지 않기를. 지역주의를 비롯한 부조리한 각종 연줄에 생채기가 날 때 함부로 좌절하지 말기를. 그나저나 나부터 지역주의에 대한 집착을 좀 버려야겠다. 내 자신의 문제의식만을 절대화하는 잘못을 범할까 걱정이다. 어릴 적 고민을 아직도 품고 끙끙대다니 난 어른이 덜 된 걸까? 내 출생지가 대구가 아니었더라면 좀 덜 괴로웠을까? 어렵다.


070509
두부는 물기를 어느 정도 빼느냐에 따라서 일반두부, 연두부, 순두부로 나뉜다. 빨갛게 조려낸 일반두부, 양념간장 살짝 올린 연두부, 보글보글 순두부찌개 모두 내가 사족을 못 쓰는 음식들이다. 나는 논쟁을 할 때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분명히 정하기 어려울 때면 세상을 두부 자르듯이 썰지 못하겠다며 물러설 때가 있다. 세상이 단순하지 않은 게 내 탓은 아닐 테니 나의 우유부단함만 구박하지 말아달라는 방어기제인 셈이다. 여기서 말하는 두부는 일반두부 즉 모두부를 말한다. 연두부도 모두부마냥 낱개 포장해 팔기도 하지만 연두부는 완만한 곡선미가 그 본성이라고 우기고 싶다.

점심 때 작은 연두부를 숟가락으로 떠먹으며 인간 세상이 이런 모습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순두부처럼 흐물흐물하지도 않으면서 일반두부처럼 각지게 썰리지도 않는 그런 세상 말이다. 일반두부 같은 마니교적 이분법도 아니고, 순두부 같은 니체식 허무주의도 아닌 그리 단단하지 못한 본질과 다채로운 현상이 버물리는 연두부 같은 세상! 혹자는 푸딩과 뭔 차이가 나느냐 핀잔하겠지만 내가 겪기로 푸딩의 점성(실체를 유지하려는 힘)은 연두부에 견주어 더 세다. 나는 연두부 수준의 차짐과 끈기를 사랑한다. 연두부의 목넘김을 만끽하며 나는 내 삶을 연두부처럼 가꾸고 싶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이래 놓고 순두부찌개 먹을 때는 순두부의 고집 없음을 예찬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나는 가끔 요상한 방법으로 세속을 철학화(philosophize the secular)한다.^^;


070510
『고구려의 그 많던 수레는 다 어디로 갔을까』(바다출판사, 1999)를 쓴 김용만 선생님은 “고구려는 착한 나라가 아니었다. 물론 악한 나라도 아니었다. 고구려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한 국가였다(43쪽)”라고 평했다. 『삼국사기』 광개토태왕 기록에는 거란을 쳐서 남녀 5백 명을 포로로 삼고 거란으로 이주 당한 고구려 백성 1만 명을 환국시키고, 백제를 패배시키고 8천 여명을 사로잡았다는 기록 등이 실려 있다. 이들 포로들은 고구려의 새로운 백성이 되었을 것이다. 광개토태왕비문에는 왕릉의 수묘인에 대한 규정이 나오는데 광개토태왕은 자신의 정복 활동으로 포획한 신래한예(新來韓穢)들로 하여금 묘지 관리를 맡기라고 하교한다(실제로는 한예사람들이 예법을 모를까봐 고구려 원 구성원인 구민(舊民)들을 데려와 함께 능을 관리했다).

광개토태왕 치세 때뿐만 아니라 고구려는 중국을 비롯해 주변 나라들로부터 인구를 빼앗기 위해 애썼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의 그 애달픈 피난 행궁을 긍정한다”는 김훈 선생님의 표현을 빌려 나는 고구려의 그 치열했던 노동력 확보 전쟁을 긍정한다. 나는 고구려의 약탈을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건 아니다. 그것은 억지로 부인할 수 없다는 소극적 긍정이다. 고구려에 침략주의나 제국주의적 요소가 어느 정도 포함되어 있음 역시 소극적으로 긍정한다. 한민족이라는 개념은 없었지만 자기 땅에서 사는 백성들이 배곯지 않고 자존심 팽개치지 않게 하기 위해 애썼던 고구려 지배계급에 견주어 오늘날 이 땅의 위정자들은 얼마나 진화했는가. 무참하다. 고구려는 생존을 위해 불가피하게 많은 이들의 피를 흘렸다. 역사에 진보라는 것이 있다면 불가피함의 여지를 줄여서 회피 가능하게 만드는 데 있지 않을까. 우리네 지도자들이 너무 함부로 불가항력적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 현실은 늘 냉혹하지 않았던가.


070511
지난 프랑스 대선에서 패배한 사회당이 책임 소재를 놓고 내홍을 겪고 있는 모양이다. 루아얄 후보의 탓인지, 사회당의 탓인지, 프랑스 국민들의 성향 변화 탓인지 가장 큰 요인을 놓고 설왕설래가 한창이다. 사회당의 기존 이념을 건사해 흐트러진 전선을 다잡자는 쪽과 중도파와 손잡아 우경화 된 민심을 다독이자는 쪽이 팽팽히 맞선다. 공교롭게도 대한민국 열린우리당의 사정도 비슷하다. 과격한 개혁정책이 민심을 잃었다는 쪽과 지지자를 배신하고 보수화 되었기 때문에 동력을 잃었다는 쪽이 버성긴다. 노무현 대통령의 탓인지, 열린우리당의 탓인지(혹은 한나라당의 탓인지), 대한민국 국민들의 성향 변화 탓인지 헛갈리는 문제들이 적잖다.

그만큼 인간 행동을 구성하는 요인은 복합적이고, 사회의 작동원리도 다면적이다. 신채호 선생님은 『조선상고사』에서 “개인이 사회를 만드느냐, 사회가 개인을 만드느냐”는 문제를 고심했다. “개인도 자성(自性: 그 자체의 본성이나 성질)이 없고, 사회도 자성이 없다면 역사의 원동력은 어디에 있는가?”고 묻는다. 단재는 궁리 끝에 “개인이나 사회의 자성은 없으나 환경과 시대를 따라서 자성이 성립한다고 생각한다”고 밝힌다. “환경에 따라서 성립한 민족성”과 “시대에 따라서 성립한 사회성”에 좌우된다는 것이다. 원효와 퇴계가 시대와 환경을 바꾸어 태어났다는 사고실험을 통해 시대와 경우가 인물을 산출하는 원료가 되기는 하지만, 인물이 시대와 환경을 이용하는 능력은 다름을 논증한다. 이런 논의 끝에 개인과 사회의 관계에 대해 단재가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다. “사회가 이미 결정된 국면에서는 개인이 힘을 쓰기가 매우 곤란하고, 사회가 아직 결정되지 않은 국면에서는 개인이 힘을 쓰기가 아주 쉽다”는 것이다(신채호 지음, 박기봉 옮김, 『조선상고사』, 비봉출판사, 2006, pp. 79~86 참조).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경선을 놓고 이명박, 박근혜 진영이 티격태격하고 있다. 만약 프랑스처럼 결선투표제 있었다면 이들이 이렇게 다투기보다는 1차 투표 통과를 위한 정책 공방을 벌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별로 차이가 없는 분들이니 아마 개인의 문제보다는 사회(즉 제도)의 문제가 크다. 범여권의 갈팡질팡은 호남 지역주의라는 거부하기 힘든 매력(?)이 없었더라면 저렇게 구차하지 않을 것이다. 같이 하기 힘든 사람들이 밥그릇 동맹을 맺는 것을 보니 사회적 요인보다는 (생존에 집착하는) 개인적 요인이 더 커 보인다(지역구도 하에서 소수파인 범여권이 뭉치는 건 사회적 요인이기도 하지만). 이렇게 나누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다. 이런저런 합리화를 할 뿐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건지도 모르겠다. 단재의 견해를 좇자면 우리 사회는 결정된 국면일까 그렇지 않을까. 당대의 사람들은 늘 과도기를 살게 마련이라 결정되지 않은 국면이라고 보는 경향이 많을 듯싶다. 더군다나 오늘날 변화의 속도도 빠르다. 개인의 가능성이 만개하기 좋은 시절이지만 여전히 견고한 수구기득권 구조를 보면 사회의 문제가 만만치 않으니 혼란스럽다.

그나저나 이인제씨가 민주당으로 복당한단다. 그의 이런 스스럼없는 행각은 개인의 문제인가, 사회의 문제인가.^^;


070512
사촌 윤정누나가 결혼하셨다. 내 개인 홈페이지 익구닷컴의 설계와 관리를 맡아주셨고, 외형보다는 내실이 중요하다는 점을 늘 강조하시던 누나께 늘 고맙다. 결혼식장에서 나는 부조금 봉투를 받아 번호를 매기는 일을 하느라 결혼식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식권으로 밥을 먹는 대신 답례품을 교환하거나 만원을 봉투에서 넣어 하객들에게 주는 게 흥미로웠다. 주말이면 결혼식이 겹치게 마련인데 한 쪽에서는 밥을 먹고 다른 쪽에서는 답례품을 받거나 봉투를 받는 게 훨씬 실용적이다. 내가 결혼식을 많이 안 다녀봐서 잘 모르겠지만 하객들의 선택권을 넓힌다는 측면에서 괜찮은 방안 같다.

예전 국제경영 강의 시간에 중국에서 결혼식 답례품으로 초코파이 한 상자를 나눠주는 게 인기라는 걸 배운 기억이 난다. 당시 오리온의 현지화 전략의 성공 사례로 많은 상찬을 받았다. 결혼식을 잘 마무리짓고 큰집으로 돌아와 2시간 30분에 걸쳐 부조금을 계산했다. 장부액과 실제금액이 2만원 차이 났는데 3만원짜리 부좃돈을 5만원으로 기입했기 때문에 난 착오인 듯싶다. 오차율이 0.1%도 안 되니 미련 없이 손을 털어야 회계학을 배운 자의 도리(GAAP에 따른 효익과 비용간이 균형)를 다하는 셈이 된다. 흔히 부주, 부줏돈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부조(扶助)가 맞는 표현이다. 그나저나 자형 담에는 좀 덜 어색한 모습 보여 드릴게요.^^;


070513
일주일만에 다시 종묘를 찾았다. 지난 일요일 종묘대제가 있었던 날은 너무 번잡해서 제대로 답사를 못한 게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우리궁궐 길라잡이에서 자원하신 안내원분의 설명을 경청했다. 건물도 몇 동 없어 금방 끝날 줄 알았는데 제대로 둘러보니 한참을 들었다. 특히 종묘 정전을 그동안 가운데서 양옆으로 증축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오른쪽으로만 증축했다는 것을 알게 되어 기뻤다. 내가 안내했던 분들께 정정 보도(?)를 해야 할 텐데 걱정이다. 세관 공무원이시면서 주말에 짬을 내어 궁궐 안내원으로 자원봉사를 하시는 박태훈님의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나도 언젠가 그런 기분 좋은 투잡을 가져보고 싶다.

사회봉사라고는 도통 할 줄 모르는 내게도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리라. 우리 것에 대한 예찬만 늘어놓는 게 아니라 통렬하게 투덜거리는 시비쟁이 안내원이라 구박받을까봐 벌써부터 걱정이지만. 2004년 10월 1일 종묘 답사부터 시작된 목조건축에 대한 관심이 고구려 고분벽화나 고려청자, 불화, 불상, 석탑 같은 고미술 전반으로 확장되더니 이제 문화산업이나 문화정책에까지 눈을 돌리게 만들었다. 종묘는 세계문화유산이기 이전에 내 삶의 큰 전환점이 되는 소중한 공간이다. 내게 가슴 뛰는 생의 의미를 불러일으킨 이 공간을 더 탐구하고 싶다. 종묘를 비롯한 궁궐 건축에는 준전문가가 될 계획이다. 우리 문화유산을 아끼는 아마추어 애호가가 더 늘어나야 한다는 게 내 평소 신조인데 일단 나부터 실천해야겠다.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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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430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이 대선 불출마 선언을 했다. <정당정치 중요성 일깨운 정운찬 전 총장>이라는 제목의 한국일보 사설이 이 사안을 가장 적절하게 분석하는 듯싶다. 나 또한 이번 사건이 정당정치의 중요성을 환기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오랜 시행착오를 거친 현재의 정당정치 구도에 대해 어느 정도 존중하는 마음가짐”이 부족했으며, “사회적 혜택을 정치로 보답해야겠다는 생각 자체가 낡았다”는 지적이 매섭다. 나는 일전에 농담 삼아 정 교수님이 대선이 뛰어들면 2년 주기로 나오던 거시경제이론 개정판이 올 여름에는 안 나와서 많은 수험생들의 부담을 더는 효과가 있다고 말한바 있다. 이 추세로 보아 정 교수님의 거시경제이론 8판이 곧 나올 테니 열심히 읽고 궁리해야겠다.


070501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는 한국 회화 가운데 유명하기로 손꼽히지만 그 발문의 속살을 들여다보면 그림에 대한 이해가 더욱 높아진다. 세한도는 추사 선생이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 제자 이상적이 보내준 책을 받고 그 정성에 감격하여 그려준 그림이다. 이상적은 역관(譯官)이라 중국을 드나들며 추사를 위한 서책을 수집할 수 있었다. 양반 지인들이 자신을 멀리할 때 역관 제자가 남아 제 곁을 지켜준 것이 유독 더 애틋했는지도 모르겠다. 추사 선생은 세한도 발문에서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歲寒然後, 知松栢之後凋也)”는 논어 구절을 인용해 제자에게 극진한 고마움을 표한다.

이상적은 스승의 세한도를 받고 “세한도 한 폭을 엎드려 읽으매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리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歲寒圖一幅 伏而讀之 不覺涕淚交)”로 시작하는 답장을 썼다. 옛사람들이 왜 그림을 읽는다고 했는지 알겠다. 세한도는 발문까지 읽고 나서야 비로소 제대로 완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한도 오른쪽 아래 구석에는 장무상망(長毋相忘) 네 글자가 새겨진 붉은 도장이 찍혀있다. 오랫동안 잊지 말기를! 스승이 찍었든 제자가 남겼든 서로의 도타운 마음자리가 내 무심함마저 녹인다.

정민 교수님의 번역을 내 입맛에 맞게 고쳐 세한도 발문을 익구 버전을 완성해봤다. 난 그림 그리는 솜씨는 없으니 이런 발문 혹은 답장이나마 써봐야겠다. 세한도에는 진짜배기 의리가 배어 있다. 고 오주석 선생님의 맛깔스런 세한도 해설이 다시 읽고 싶어진다.


070502
충북 괴산군이 표창한 음주문화상을 놓고 말이 많다. 건전한 음주 문화로 지역경제에 도움이 줬다는 이유로 공무원에게 상을 준 것이 비교육적이라는 비판이 매섭다. 나는 괴산군의 고육책을 아프게 긍정한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요식업에 자본을 투하하는 내수 경기 진작을 오래 전부터 주장해왔던지라 기본 취지를 동감한다. 소비를 촉진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땅을 팠다 묻는 일이라도 시켜서 임금을 지급하라던 케인즈학파의 해법을 따왔다.

어디까지나 상징적 의미이자 단기적 처방으로 제시한 것일 뿐 근본적 경기 회복책은 아님을 잘 알고 있다. 술 먹고 노는 죄책감을 덜기 위해 내수 경기 진작이라는 미사여구를 끌어다 쓰는 집단 최면에 가깝다. 다만 부상으로 국내 여행, 견학을 보내준다고 하던데 부상이 좀 안 어울리는 거 같다. 차라리 전통 명주 같은 걸 부상으로 했다면 반발이 덜하지 않았을까 싶다. ‘술에는 술’이랄까.^^; 술을 많이 마시는 것도 어렵지만 맛나게 잘 마시기는 더 어려운 듯싶다. 내 둘레 사람들과 음주문화상을 패러디한 걸 만들어볼까 생각도 해봤지만 그런 상 없어도 잘 마시고 사니 불에 기름을 부을 필요는 없겠다.

술을 마시나 안 마시나 별로 재미가 없는 나는 술자리에서 유쾌한 사람이 되는 게 오랜 숙원이다.


070503
“봉황이 천 길을 날되 오동나무가 아니면 쉬지 않고, 선비가 한 쪽에 숨어살지언정 옳은 주인이 아니면 섬기지 않는다(鳳凰翔千仞兮 非梧不棲 士伏處于一方兮 非主不依).” 유비가 삼고초려 하는 가운데 만난 제갈량의 아우 제갈균의 말이다. 현명한 새는 좋은 나무를 가려서 둥지를 튼다(良禽擇木)는 호기가 헌걸차다. 열린우리당 정동영, 김근태 전 의장이 탈당 가능성을 시사하며 신당 창당에 집착하고 있다. 한때 집권여당의 당의장까지 역임하고 참여정부의 국무위원까지 꿰찼던 분들이 내뱉는 말씀치고는 경박하고 무책임하다.

내 주제에 도덕적 훈계를 하는 거 같아 민망하다. 이 분들이 정말 제 밥그릇 때문에 이런 행위를 하는 건 아닐 거라 믿고 싶다. 현실정치는 명분만으로는 안 되는 영역이 있을게다. 현재 정치지형상 소수세력인 이 분들이 각종 연합을 통해 간신히 영남 지역주의에 맞설 수 있다는 냉혹한 실정을 모르는바 아니다. 좌파와 우파의 정책 대결이 또렷하고 공동 정부(코아비타시옹)를 구성하기도 하는 프랑스에서도 사회당이 타 세력과 연합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사람 사는 게 길다면 길지만 지고 살기에는 너무 짧다. 소심한 나는 대개 현실론의 손을 적잖이 들어줬다. 내 업보다.

선거에서 져도 출마하는 사람이 있어야 선거제도가 존속할 수 있으며, 자기 당의 강령을 들고 나올 수 있어야 복수 민주 정당제를 발전시킬 수 있는 정당이라는 유시민 보건복지부 장관의 말씀이 옳다. 우리도 자신의 신념에 책임질 줄 아는 정치인, 정당을 가져볼 때가 되지 않았나 하는 욕심을 내본다. “차라리 한 때의 적막을 겪을지언정 만고의 처량함을 취하지 말라(寧受一時之寂寞 毋取萬古之凄凉)”는 채근담 구절이 사무친다. 나는 김근태님, 정동영님의 만분의 일도 미치지 못하지만 적어도 처신만은 그 분들보다 더 잘하고 싶다. 그 분들이 밉기보다는 측은하다.


070504
지난 4월 30일 중국 장쑤(江蘇)성 천녕사(天寧寺)에서 천녕보탑(天寧寶塔) 낙성식이 성대하게 열렸다. 천녕보탑은 송나라 때 만들어졌지만 전란으로 소실되었다가 2001년부터 국내외 성금을 모아 다시 세웠다. 13층 153.79m의 높이로 중국에서 가장 높은 불교탑이 되었다. 사진으로 봐서는 복원을 한 재료가 뭔지 알 길이 없다. 제작기간이 짧은 것으로 보아 전통 목탑이라기보다 시멘트를 사용했을 거라 추정만 한다. 규모가 크니 내실은 별 볼일 없기를 바라는 내 질투 때문이다. 문득 황룡사 9층목탑을 떠올렸다가 하염없이 상념에 빠졌다.

얼마 전 경주세계문화엑스포공원 내에 짓고 있는 경주타워에 높이 82m 규모로 황룡사 9층목탑을 음각화한 형상이 공개됐다. 이렇게 나마 황룡사 목탑의 흔적을 살리려는 노력이 안쓰럽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2017년쯤 황룡사 복원 여부를 최종 결정할 예정이다. 나는 황룡사 9층목탑을 제 자리에 복원하자는 견해에 심정적 지지를 보낸다. 박래부 한국일보 논설위원님 말씀대로 “조바심 때문이 아니라 새 자료 발굴 가능성이 거의 없기 때문”에 결정적 증거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현재 기술을 집대성해 중건의 첫걸음을 떼는 게 어떨까 싶다.

김홍식 명지대 건축학과 교수님에 따르면 문화유산 수리에서 흙을 이기거나 바르는 흙일을 중국사람을 고용해서 쓰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문화재 보수공사가 이윤을 추구하는 도급제도로 운영되기 때문에 값비싼 전통기술을 쓰지 않는다”는 주장이 따갑다. 돈이 안 되는 걸 외면하다 보니 전통기술을 운용하는 장인들이 계승자 없이 고령화되고 있는 형국이다. 전통건축계의 유효수요(effective demand)를 창출하는 건 추레한 경제논리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폐사지의 낭만을 마냥 읊조리기에 우리네 문화적 저력이 너무 갑갑하다.


070505
금요일 밤에 학교 응원제인 입실렌티 뒤풀이를 참석하고 토요일 아침에 집에 왔다. 입실렌티는 고려대학교 교호(校號)로 오스만 투르크에 맞선 그리스의 독립운동가 입셀란테스에서 따왔다는 설이 유력하다. 지성과 야성을 조화롭게 추구한다는 의미로 ‘지야의 함성’이라는 별칭이 붙은 이 행사는 가수와 학생들의 공연 및 응원으로 진행된다. 아무래도 가수 중심의 무대가 형성되게 마련이라 대학 축제의 상업성 등의 비판을 받기도 한다. 가령 이번 초대 가수로 아이비가 오느냐 안 오느냐가 큰 관심사였다. 요즘 인기가수이기도 하지만 학교 응원가이기도 한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가 샘플링 된 댄스곡 ‘유혹의 소나타’가 고대생 사이에서 인기를 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끼리야 재미 삼아 하는 말이지만 외부에서 볼 때는 그리 어여삐 보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침 먹고 귀가한 게 참 오랜만이다. 홍익이와 작년 입실렌티 뒤풀이를 아침까지 남았을 때 앞으로 다시는 이렇게 하지 않기로 다짐했었다. 그 약속 지키지 못한 게 아쉽기보다는 지키지 못할 약속을 남발한 게 부끄럽다. 그래도 작년 뒤풀이보다 더 많은 분들과 풍성한 시간 보낼 수 있어서 즐거웠다. 녹지운동장에서 펼쳐진 응원을 엉성하게 따라하며 중요한 것들은 우리 몸에 각인된다는 명제에 대해 생각했다. 입가에 퍼지는 옅은 미소부터 도약할 때의 그 촉감, 어깨동무한 손등을 타고 내리는 땀방울 같은 기억들을 내 마음에 오래도록 담아 두고 싶다. 고연전의 규모에 견주어 입실렌티 응원은 약소하지만 나는 비좁고 흙먼지 날리는 입실렌티 응원만의 매력이 적잖다. 끝까지 함께 해주신 광호형께 각별한 고마움을 표한다. 형님 우리 월요병 없는 세상을 만들어 봐요!^-^


070506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종묘대제(宗廟大祭) 끄트머리를 참관하고 왔다. 무형 문화유산에 대한 관심이 낮은 나는 오월 첫째주 일요일에 열리는 이 행사를 알고는 있었지만 번번이 놓쳤다. 이번에도 늦잠이 이기지 못하고 늦게 나섰다. 종묘대제를 크게 신을 맞이하는 절차, 신이 즐기는 절차, 신을 보내는 절차로 나눈다면 나는 신을 보내는 절차만 관람한 셈이다. 종묘제례는 조선왕조가 지내는 제사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중요한 제사였다. 종묘제례를 지낼 때 연주하는 궁중음악인 종묘제례악과 더불어 2001년 유네스크 ‘인류 구전 및 무형유산걸작’으로 선정됐다. 종묘 건물 역시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상태다.

보태평(保太平)과 정대업(定大業) 등의 연주에 맞춰 추는 팔일무(八佾舞)를 온전히 감상하지 못해서 아쉬웠다. 팔일무는 여덟 줄 8열씩 64명이 늘어서 추는 춤이다. 공자는 노나라의 실권자 가운데 한 사람인 계평자(季平子)가 대부(大夫) 주제에 자신의 묘정에서 팔일무를 춰 천자를 참칭한 것이 예에 맞지 않다며 분개하기도 한다. 조선시대에는 여섯 줄 6열씩 육일무를 추었는데 대한제국시대 이후 팔일무를 추게 된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만약 공자가 이 광경을 본다면 어떻게 평할까 궁금하다(설마 따지시겠는가?). 종묘 건축이 검소함을 추구해 장엄을 더했다고 하지만 나는 그런 연쇄효과를 잘 느끼지 못하겠다. 난 종묘 건축의 단청이 조금 더 화려했으면 좋겠다는 불경한 생각을 품고 있다.

고구려가 망했을 때 보장왕 등을 당 태종 이세민이 묻힌 소릉(昭陵)에 바치게 하고, 장안의 태묘에 바쳤다고 전한다. 이것은 고구려의 제사체계가 무너졌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서글픈 광경이다. 임진왜란 때 선조가 헐레벌떡 몽진하면서도 챙긴 것은 종묘에 모셨던 선대 왕들의 신위였다. 왕의 책무 중에 하나가 제사권 수호였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충효사상을 공동체의 유대를 위해 활용했던 동양 문명의 단면이다. 대한제국은 비참하게 망했지만 그 제사를 끊이지 않게 한 것은 대한민국인의 자비심 때문만은 아닐 게다. 아마 민주공화국이라는 제도의 품이 너르기 때문일 공산이 크다. 좀 못 되게 말해 제의의 엄숙함은 상당 부분 거세된 채 관광자원으로 전락했다고 폄하할 수도 있다. 수천 명이 모여 관람하는데 그 옛날의 분위기를 기대한다는 게 억지다. 무료로 배포한 종묘대제 자료집이 일반인들의 관람에 큰 도움이 되었듯이 종묘제례악을 손쉽게 감상할 수 있도록 온라인상으로 공개했으면 좋겠다.

『예기』에는 “상례에 있어 슬픔이 모자라고 예가 넘치기보다는, 예가 모자라고 슬픔이 넘치는 것만 못하며, 제례에 있어서는 공경함이 모자라고 예가 넘치기보다는, 예가 모자라고 공경함이 넘치는 것만 못하다(喪禮, 與其哀不足而禮有餘也, 不若禮不足而哀有餘也. 祭禮, 與其敬不足而禮有餘也, 不若禮不足而敬有餘也)”고 말하고 있다. 예는 방편(方便)이다. 예는 정성을 표하는 돌다리일 뿐이니 예 자체가 절대화되어 인간의 행위를 구속하는 건 민망한 일이다. 집집마다 예법이나 풍속, 습관이 다를 수 있다는 가가례(家家禮)를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는 인인례(人人禮)로 더 쪼개보면 어떨까. 이는 개인주의 시대의 미덕이 될 것이다.

종묘 구석에 외롭게 자리한 공민왕 신당을 둘러보고 나오며 종묘에 모셔지지 않은 광해왕을 추념했다.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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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길사에서 펴낸 『百濟』는 한국 출판역사의 한 획을 그을 만하다. 신문 한 면 크기(가로 45cm, 세로 58cm)의 국내 최대 문화유산 도록이다. 그 무게만도 20kg에 이르며 500부 한정판에 가격은 200만원으로 단행본으로는 한국 출판사상 가장 비싼 책이다. 내 1년 도서 구입비와 맞먹는 수준이다. 그간 내가 최고로 치던 40만원짜리 『고려시대의 불화』(시공사) 도록을 능가한다(다만 실린 작품의 수나 희소성이라는 측면에서는 이 책이 앞선다. 나는 한때 이 책을 구하기 위해 애썼다). 내가 큰 맘 먹고 사들였던 30만원짜리 『고구려고분벽화』(풀빛), 12만원짜리 『토함산 석굴』(한·언), 6만5천원짜리 『書院』(열화당), 4만5000원짜리 『반가사유상』(민음사) 도록 등이 갑자기 초라해졌다. 지금은 술 마시고 책 사는데 다 써버렸지만 이태 전만 해도 내 통장에 200만원 가까운 돈이 들어있기도 했었는데 만약 그 돈이 수중에 있었다면 난 구매를 심각하게 고민했을지도 모른다.


교보문고에서 3만5000원짜리 보급판을 살펴봤다. 사진작가 준초이님은 기존의 문화유산 도록의 앞모습 위주로 화면을 가득 메우는 방식에서 탈바꿈해 문화유산의 특정 부분을 도드라지게 하거나 여백을 넣어 공간미를 불어넣었다. 가령 국보 제83호 반가사유상의 얼굴을 위에서 비스듬히 내려찍는 장면은 일품이다. 성낙주님과 문명대님의 석굴암 관련 책에 실린 본존불의 육중하고 고독한 뒷모습을 올려다보는 사진을 보는 듯한 희열이다. 또 쇼소인(正倉院)에 소장되어 있는 의자왕이 왜국에 보낸 바둑판과 바둑알의 화려함을 이제야 만난 게 아쉽다. 문득 럭셔리 마케팅이 얄미워졌다. 고급판과 보급판의 차이가 너무 커서 보급판을 사는 게 너무 꾀죄죄해 보인다. 값을 좀 올리더라도 사진을 좀 더 보강해서 고급판과의 차이를 줄였으면 어땠을까 싶다. 사실 이마저도 살까 말까 한참을 고민하다 사야할 책들이 밀려 일단 놓고 나왔지만.


학교 도서관에 고급판 1권과 보급판 1권을 신청했는데 선정해줬다. 머잖아 학교 도서관에서 이 귀한 책을 깨끗한 손으로 조심스레 넘겨봐야겠다. 나는 우리 문화유산에 대한 끔찍한 애호를 내 나름의 자발적 애국심이라고 생각한다. 입으로 몇 마디 애국을 들먹거리기는 쉽다. 그러나 그마저도 함부로 강요하지 않는 게 민주공화국의 힘 아닐까. 사회계약은 충성이 아니라 의지의 소산이기에. 이런 감상과 별개로 나는 앞으로도 이 땅의 역사에 짙은 애정을 품을 것이다. 아련한 그리움인 고구려 고분벽화를 완상하며 중국화에 맞섰던 그 결기를 추억하고, 애잔함이 서린 조선의 궁궐을 거닐며 실학정신과 소중화(小中華)를 오갔던 조선의 지식인을 반추할 것이다. 그런데 최근 정부가 ‘대한민국 국기법 시행령안’을 입법예고하면서 이 맹세를 고스란히 살려 넣었다는 소식은 애국심에 대한 내 미감을 헝클어뜨린다.


지난해 말 국회는 국기법을 제정하면서 맹세와 관련된 조항을 넣지 않되, 정부가 시행령에 넣을지 여부를 결정하라고 위임했지만 별다른 논의가 없었다. 그저 존치 여론이 높다는 이유뿐이다. 논란이 일자 ‘국기에 대한 맹세’ 문구를 민주화 등 미래지향적인 내용으로 수정하는 방안이 추진된다고도 한다. 문구를 몇 개 바꾸는 것 이전에 과연 맹세와 애국심의 상관관계가 얼마나 유의미한 가를 따져볼 일이다. 사람을 판단할 때 그 사람의 역량과 식견보다도 더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태도나 자세일 수 있듯이 최소한의 규범으로 삼자는 주장은 외면하기 힘들다. 맹세를 주장하는 분들도 이 짧은 맹세 구절이 애국심 고취에 엄청난 효과가 있다고 믿지는 않을 듯싶다. 다만 공동체의식을 확인하는 실마리로서 남겨두자는 의견이 많으리라 짐작한다. 마지막 보루 같은 걸로 말이다. 그러기에는 우리 사회에 전체주의의 보루가 너무 많긴 하다.


의무적인 충성 서약보다는 이 땅의 흙과 아스팔트를 밟는 발바닥의 촉감으로 내 나라를 사랑하면 어떨까. 가장 고귀한 건 자발적인 것이며 자유로운 것이다. 물론 그 자발과 자유에도 형식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에 동감한다. 그러나 그 형식이 일방적이고 폐쇄적이어서는 곤란하다. 더군다나 맹세라는 형식이 애국심이라는 실질에 크게 기여할 거 같지 않아 보인다. 개인주의 세태를 염려하기 전에 나라를 아끼는 개성 있는 행동들을 열린 자세로 보듬고 북돋워주는 게 대한민국이 더 살맛 나고 재미난 나라가 되는 길이다. 맹세에 쏟는 그 정성을 동성애자에 대한 편견을 눅이고, 이주노동자들의 후생복지를 헤아리는 걸로 전환한다면 더 좋겠다. 국기에 대한 맹세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야기는 파시스트와 아나키스트의 대결도 아니다. 국가에 대한 충성 경쟁도 아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방안에 대한 다채로운 가능성을 여투어 두자. - [無棄]


* 『百濟』는 6월 5일자로 결국 선정 부결됐습니다. 도서관까지 들어오기는 했는데 검수 단계에서 부결된 모양입니다. 학교 도서관 관계자분께서 친히 전화를 주셔서 책 부피도 만만치 않지만 낱장으로 되어있어 책으로 보기에도 애매하다는 견해를 피력해주셨습니다. 혹시 선정 부결이 되더라도 양해해달라는 말씀에 저는 기꺼이 그러겠다고 흔쾌히 답했습니다. 이 책 아닌 책을 도서관에서도 볼 수 없다면 접할 기회가 거의 없을 거 같아 살짝 아쉽네요. 친절하게 전화주신 도서관 관계자분 고맙습니다.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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好學日記(07.04.23~04.29)

일기 2007. 5. 1. 13:01 |

070423
4월 23일은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 책의 날’입니다. 22일 통계청의 2006년 가계수지동향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 전국가구(2인 이상)의 한 달 평균 서적 및 인쇄물에 대한 지출은 1만288원으로 전년에 비해 2.8% 줄었다고 하네요. 서적 및 인쇄물 지출비는 서적(학습 참고서 제외) 7631원, 일간신문 2256원, 잡지 271원, 지도·악보·카드 등 기타 인쇄물 130원으로 조사됐습니다. 대한출판문화협회가 산출한 지난해 책 한 권당 평균 가격이 1만1545원이니 두 달에 한 권 정도 사보는 셈입니다.

책을 덜 산다면 빌려서라도 많이 봐야하는데 우리나라의 열악한 공공도서관 실태를 볼 때 이마저도 여의치 않을 것 같네요. 전국 공공도서관에 대한 문화관광부의 자료구입비 지원이 2004년 폐지되면서 도서 구입 예산이 더욱 줄었거든요. 국민 1인당 월평균 독서량이 1권에서 왔다갔다하는 수준이고, 국민 1인당 도서관 장서수도 1권이 안 된다고 하니 책 관련 통계에서 1권을 돌파하는 것도 참 쉽지 않네요. 그나마 대학도서관의 사정이 나은 편이니 대학도서관을 시민에 개방하자는 주장에 끄덕이면서도 대출 중인 책이 늘어나 책 빌려보는데 불편할까봐 선뜻 찬동하기 힘든 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저는 할 일이 없어서가 아니라 할 일을 하면서도 짬짬이 하는 책읽기를 추구하지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간 허영의 독서도 있었고 불필요한 금전적 낭비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많은 책장을 넘기며 그 책들만큼 아름다운 마음들과 대화를 한 것이 행운이었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제가 할 줄 아는 게 별로 없어서 책이나마 붙잡게 된 건 천만다행이에요. 볼테르는 “책을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지금까지의 세계는 결국 책으로 지배되어 왔기 때문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볼테르의 찬사와는 달리 독서가 무력할 때도 많다고 생각하지만 읽은 만큼 실천하기 위해 노력해봐야겠습니다. 한미 FTA 체결로 국내 출판업계는 좀 더 어려워질 공산이 큰데 책을 좀 사서 봅시다.

사실 전 도서 충동구매를 좀 줄여야 하는 입장입니다. 제가 책을 읽는 속도보다 책꽂이에 책이 쌓이는 속도가 빠르거든요. 제가 애용하는 인터넷 서점 알라딘의 장바구니에는 『전습록』, 『삼국지 시가 감상』, 『알기쉬운 한국건축 용어사전』, 『비전을 상실한 경제학』, 『목적의 왕국』, 『모두에게 공정한 무역』,  『현대 정치과정의 동학』 등의 책들이 지름신이 강림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수학노트가 추가된 이준구 교수님 미시경제학 해답집 증보판은 아직 등재되지 않아서 못 집어넣었네요). 이번 달에는 헌책방을 너무 과하게 이용해서 추가 지출을 막아야 하지만 아마도 오늘이 가기 전에 몇 권을 살 거 같습니다. 영화 <러브 액츄얼리>의 명대사인 “오늘은 크리스마스니까요(Just because it's christmas)”를 패러디하자면, Just because it's world book day!!!^-^

추신 - 근데 왜 술의 날은 없을까요? 하나 만들어도 좋을 거 같은데 말이죠. 처음처럼데이 뭐 이런 거 말이죠.^^;

책의 날 기념해서 쓴 <4월 23일은 세계 책의 날입니다> 전문


070424
“수출만이 살길이야?”라는 도발적인 기사를 읽었다. 김소희 한겨레21 기자님의 글이다. 그는 스크린쿼터를 협상카드로 쓰지 않는 정부의 불철저함을 질타하는 글 말미에 “그냥 자유무역 안 하면 안 되나? 좀 못살고 세금 더 내면 안 해도 된다는데. 나는 정말 잘 먹고 싶지만 꼭 잘살고 싶지는 않다. 좀 처지더라도 대충 살길은 없는 걸까?”라며 어려운 질문을 던진다.

나는 나를 비롯한 통상론자들이 김소희 기자님의 저 물음에 어느 정도 답변을 내어놓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너와 나는 화해할 수 없는 세계관의 차이가 있다고 돌아설 사안이 아니다. “먹을 만큼 먹고 사는데 얼마나 더 잘 살아야 하냐?”는 질문에 우린 아직 갈 길이 멀다, 돌격 앞으로만 외치는 건 우스꽝스럽다. 중국과 일본의 샌드위치가 될까 두려워 밤잠을 설치시는 분들의 우국지정 또한 마땅히 기려야겠지만.

김소희 기자님은 그저 탄식했을 뿐이지만 이런 비슷한 문제의식을 모든 이들이 체화해야 할 것처럼 말씀하시는 분들도 종종 있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효용함수는 소중하다. 우리가 꾀할 바는 서로 다른 효용함수가 어울리면서도 김 기자님처럼 덜 살려는 사람들에게 여전히 잘 먹을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데 있지 않을까? 나는 덜 살겠다는 ‘결단’을 내릴 수 있으나 그것을 후대에게, 내 둘레에게 강권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복거일 선생님은 소박한 삶을 꿈꾸는 대안 공동체가 외부 세계의 노력에 편승한 무임승차자에 지나지 않을 수 있음을 설득력 있게 풀어냈다. 복 선생님은 “현존하는 것들이 사회적 진화 과정을 거치면서 많은 대안들 가운데 가장 나은 것들로 판명되었”으며 “대안으로 제시된 것들은 거의 모두 오래 전에 버려진 것들”이라고 주장하신다(“[책보기 세상읽기] 무임승차자들의 천국” 동아일보. 2002. 09. 07. 참조). 개인적 대안을 사회적 대안으로 확장시키는 데는 보다 섬세한 얼개와 동시대인에 대한 면밀한 관찰이 필요하다. 대안 없는 비판을 삶의 낙으로 여기는 언론인과 지식인이 얄밉다고 비판 그 자체가 대안일수도 있음을 간과해서도 안 되겠지만.


070425
가끔은 양비론 말고 그 어떤 말도 구차스러울 때가 있다. 4·25 재·보선이 그렇다. 기초의원까지 포함한 총 56명의 당선자 중 무소속은 23명으로 한나라당의 22명보다 많다. 정당정치가 붕괴됐다. 오래 전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꽃피기를 바라기보다는 쓰레기통에서 장미가 피기를 기다리는 편이 낫다”는 영국 언론의 악담은 한국인의 가슴에 오랜 멍울로 남았다. 이 말을 극복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노력한 필부들이 적잖다. 하지만 적어도 정당정치와 관련해서는 장미가 쓰레기통에 던져지고 있음이 또렷하다. 지난 생채기가 오죽 쓰라렸는지 이 쓰레기통은 한국 유권자에게 그리 큰 멍울은 아닌 모양이다.

정당정치가 절대선은 아닐 것이다. 돈 주고받는 재미에 넋이 나간 배금주의 정당, 제 후보를 내쳐가며 죽여주길 자청하는 피학주의 정당, 차린 건 없지만 신토불이는 몸에 좋다는 향토주의 정당이 물고 물리는 판국에 정당이 무슨 쓸모가 있을까 싶다. 물론 당선자나 낙선자 모두 나보다는 훌륭하신 분들이다. 그런 쟁쟁한 분들이 고작 이 정도 정당과 나라를 만들고 있다는 건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 이쯤 되면 과학의 영역을 과감히 포기하고 대한민국 땅의 지세(地勢)를 점검하며 풍수지리학을 비롯한 각종 주술과 미신(이라 불리는 점복과 제의)에 기대고 싶다. 좀 덜하다 싶었던 지역주의가 약동하는 모습을 보라. 짓밟아도 솟아나고 침 뱉어도 날름 받아먹는 저 맷집과 넉살이시여. 흩어졌다 모이는 현묘지도(玄妙之道)가 여기 있었네.


070426
달팽이 뿔 위에서 싸워 무엇하리
부싯돌 불같이 반짝하고 없어질 이내 몸
부귀는 부귀대로 빈천은 빈천대로 즐기리
크게 웃지 않는다면 그대는 바보
蝸牛角上爭何事(와우각상쟁하사)
石火光中寄此身(석화광중기차신)
隨富隨貧且歡樂(수부수빈차환락)
不開口笑是癡人(불개구소시치인)

문학 전반에 걸쳐 소양이 없는 나이지만 특별히 배우고 싶은데도 인연이 잘 안 닿는 게 한시(漢詩)다. 당시나 송시 선집을 아무거나 집어들어 음미하려 해도 도무지 흥취가 일지 않는다. 한학자 손종섭 선생님이 “시는 옮겨도 시가 되어야지 산문이 되어서는 안 된다”며 한시를 맛깔스런 우리말로 옮기기 위해 노력하시는 것도 한시의 감상을 돕기 위한 절치부심일 게다. 나야 그저 남들의 풀이 가운데 내 입맛에 맞는 것을 짜깁기할 뿐이지만.

고 정주영 회장께서 당신의 집무실에 걸어놓았다는 백거이의 시는 그의 삶과 다소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의 삶을 표상한 문학만을 아낄 필요는 없다. 때로는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이 더 북받친다. 풍운아 김부식도 “부끄럽구나 달팽이 뿔 만한 세상에서 반평생을 공명 찾아 헤매다니(自慚蝸角上, 半世覓功名)”라고 읊었다. 너무 팍팍하게 산다는 느낌이 들 때 달팽이 뿔(蝸角)을 떠올리며 속도 조절을 해봐야겠다. 백거이의 시는 제목 그대로 술잔을 앞에 놓고 외워야지.


070427
한겨레신문에서 오랫동안 연재되었던 “내 영혼을 울린 한마디” 같은 연재물을 내 둘레 사람들과 이어달리기 하듯이 해보고 싶다. 자신의 좌우명 혹은 자신의 삶에 큰 울림을 준 문구를 소개하는 식으로 말이다. 알고 지내는 이 많아도 나는 그 사람이 아끼는 구절 하나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앞으로는 지인들의 좌우명을 묻고 마음을 흔들었던 말을 여쭤봐야겠다. 당시 그 연재물에서 명사들이 꼽은 한마디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었다.

선과 악이 모두 나의 스승이라(善惡皆吾師) - 한승헌 변호사
해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아? - 한비야 여행가
하면 된다 - 김어준 딴지일보 총수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 부유한 것이 아니라 많이 주는 사람이 부유한 것이다 - 이경숙 국회의원
땅에 넘어진 자, 그 땅을 짚고 일어서야 한다 - 이문재 시인
가지 잡고 나무를 오르는 것은 기이한 것이 아니나(得手樊枝無足奇), 벼랑에 매달려 잡은 손을 놓는 것이 가히 장부로다(懸崖撤手丈夫兒) - 성석제 소설가
실천은 사상의 종점이다 - 유시춘 전 국가인권위원
생긴 대로 살아라! - 권혁범 대전대 정외과 교수
귀족이 되지 말라 - 이효인 전 한국영상자료원장
큰 열매를 맺는 꽃은 천천히 핀다 - 이순원 소설가
60억의 개인에게는 60억개의 진실이 있을 수 있다 - 변정수 미디어평론가


070428
2002 월드컵 한국-독일 4강전 다음 날 <서바이벌 역사퀴즈>라는 KBS 역사유적 순례 퀴즈프로그램에 촬영했다. 점심 시간에 진행자인 성세정 아나운서와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갔다. 성세정 아나운서는 소속이 소속인지라 그럴 수는 없지만 내심 MBC 차범근 해설위원의 중계를 보고 싶다는 바람을 솔직히 밝혔다. 오래 전 이야기니 이제 공개해도 무방하리라.^^; 나는 그의 진솔한 발언이 듣기 좋았다. 엄기영 앵커가 SBS 축구 중계를 보고, 보건복지부 장관이 술담배를 즐기며, 연개소문과 이세민을 한국과 중국 사람들이 서로 바꿔 좋아하고, 고대생이 연세우유를 애용하는 세상은 좀 더 너그럽고 흐뭇하지 않을까?


070429
나는 스스로 불효를 약간 면한 수준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갑자기 효성이 지극해질 가능성이 별로 없어 보인다. 다만 널리 알려진 효경(孝經) 한 구절만은 즐겨 암송한다. “몸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다치지 않도록 함이 효의 시작이요, 몸을 세워 도를 행하며 후세에 이름을 날려 부모를 드러나게 함이 효의 마침이다(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 立身行道 揚名於後世 以顯父母 孝之終也)”의 한자 독음을 외워서 10초 정도 읽는 것으로 나의 불효를 참회한다. 부모님과 오랜 시간을 같이 있게 되는 주말을 아무 일 없이 보내고 나니 문득 이 10초 참회가 하고 싶어진다. 10초는 너무 짧으니 30초 정도 되는 걸로 새로 찾아봐야겠다.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을 뒤적여 봐야 하나?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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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서점 알라딘에 서평으로 올린 글입니다)

 

『열녀전(列女傳)』은 중국 전한(前漢, 서한) 말기의 문헌학자 유향에 의해 저술된 중국 여성들의 전기다. 대개의 사람들이 짐작하듯이 나 또한 列女가 아니라 烈女들의 전기라고 생각했다. 유교적 여성 이데올로기에 경기를 일으키는 사람은 제목만 보고 이 책을 멀리하기 십상이다. 그런데 실제 책 제목은 무던하게도 여인열전 정도다. 제목도 제대로 확인 안 하고 오해해 유향 선생께 미안하다. 변명하건대 유향 선생의 『전국책(戰國策)』, 『설원(說苑)』, 『신서(新序)』 등을 좋아하는 팬이니 너그러이 헤아려주시길.


물론 列女들 가운데 烈女에게 주안점을 두고 읽힌 건 사실이다. 인지전(仁智傳)과 변통전(辯通傳)에는 지혜로운 여성들이 대거 등장한다. 사람을 변별하고 정치적 현상을 조망하는 안목, 전고(典故)를 헤집는 통찰력, 권력의 부조리를 지적하는 용기 있는 여성들이 적잖다. 그런데 이 재주 있는 여성들은 자신의 재능을 자신의 치부를 위해 쓰지 않는 희생정신까지 보인다. 조나라 장수 조괄의 어머니와 조나라 필힐의 어머니 정도가 예외다. 이 분들이 자식의 허물로 말미암아 자신들까지 처벌되는 건 곤란하다며 항변하는 건 인상적이다.


자식과 남편에게 쓴소리를 하는 것도 죄다 그네들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나는 여성들의 지혜와 식견이 남성을 위한 것으로만 복무하는 구조가 은연중에 엿보였다. 여성들의 사회적 진출이 가로막힌 사회에 자식과 남편을 통해 욕망을 실현해야 하는 설움 같은 게 느껴진다. 유리 천장(glass ceiling)은커녕 강철 장벽이 놓여 있을 때 체념하기보다 대리분출이라도 하려는 노력이 애틋하다. 미안하고 고맙다. 옛 여성들의 기록을 복원하는 건 고구려 말기의 사적을 당나라측 기록에 의지해 반추하는 씁쓸함이다.


전통적인 여성상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제나라 재상 안자(晏子)의 마부 아내 이야기는 다시 들어도 기껍다. 남편이 안자를 모시고 말을 끄는 모습을 본 아내는 남편에게 안자는 재상이 되어서도 신중하고 낮추는데 당신은 그의 마부에 지나지 않으면서 뭐가 그리 의기양양하냐고 핀잔한다. “안자의 지혜를 품고서 거기에 팔 척의 키를 더하십시오. 인의를 실천하며 현명한 주인을 섬긴다면 그 명예가 반드시 드러날 것입니다. 또 '차라리 의를 즐기고 천하게 지낼지언정 헛된 교만으로 귀하게 되지는 않는다'고 들었습니다(是懷晏子之智, 而加以八尺之長也. 夫躬仁義, 事明主, 其名必揚矣. 且吾聞, ‘寧榮於義而賤,不虛驕以貴’)”는 충언도 잊지 않는다.


이 이야기는 사마천의 사기(史記) 관안열전(管晏列傳)에 나온다. 시기상으로 더 앞서니 열녀전 고사는 이것을 윤색했을 게다. 관안열전의 마부 아내는 남편에게 실망한 나머지 떠날 것을 청할 정도였다. 아마 열녀전의 전체적 분위기에서 이혼 선언은 안 어울려서 빼고 대신 좀 더 곡진한 충고를 삽입한 모양이다. 관안열전에서 안자의 키가 6척이 채 되지 않는다(長不滿六尺)며 마부의 우람한 체격과 비교하는데, 열녀전에서는 3척(長不滿三尺)이 못 된다고 키를 반 토막 내버렸다. 아마 옮겨 적는 과정에서 오류가 있었거나 마부의 떡대를 부각시키기 위해 일부러 과장된 표현을 썼을 게다. 후자라면 열녀전에 소설적 측면이 다분함을 엿볼 수 있다. 유향 선생도 사기를 읽다가 나처럼 이 대목이 끌렸는지도 모르겠다.


다행히 남편이 말귀를 알아듣고 몸가짐을 삼가 안자에게 더 중용되었다는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마부의 아내는 인종(忍從)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관안열전의 기록을 볼 때 남편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생각을 한 거 같지도 않다. 그러나 마부의 아내는 그 누구 못지않게 여성적 매력으로 충만하다(내가 보기에는). 그가 오늘날을 산다면 어떨까? 남편에게 매여 꽃 피우지 못했던 가능성을 펼칠까? 아니면 가탈스러운 페미니스트라며 흘김을 받을까? 이 시대라고 여자의 말을 귀 담아 듣지 않는 남자의 비율이 크게 줄었을 거 같지는 않다. 나 또한 협상의 대상이 아닌 배려의 대상으로만 여성을 보려고 한다. 반성한다.


여하간 열녀전은 다양하게 변주되어 퍼졌다. 한국에서는 이와 같은 시도가 고려사 열전에서 처음 보인다. 조선의 사가들은 열전에 열녀전을 수록하며 한자를 列에서 烈로 바꾸어 놓는다. 옛날 여자는 처녀 때는 현숙한 여자가 되고, 시집가서는 현숙한 부인이 되었으며, 사고를 당해서는 열녀가 되었는데 요즘 여자는 그렇지 않아 “꿋꿋이 서서 어려움을 당하고도 이를 무릅쓰고 죽음으로써 그 지조를 바꾸지 않는 자는 찾기 어렵기에(其卓然自立 至臨亂冒白刃 不以死生易其操者 嗚呼可謂難矣)” 열녀전을 짓는(作烈女傳) 까닭을 밝히고 있다. 列女와 烈女의 작은 뜻빛깔 속에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고통을 당했을까 상상하기 그리 어렵지 않다.


유향 선생의 열녀전이 첫 시도임에도 가장 나은 모습을 보인 편이라는 게 놀랍다. 후세 사가들이 여성의 정절에만 집중해 편의적이고 형식적으로 지면을 할당한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물론 전한 성제(成帝)가 애첩 조비연 등과 놀아나는 게 마뜩잖다는 열녀전 저술 동기가 엄연하다. 그러나 유향 선생은 그것을 편협하게 풀지 않고 유교적 덕목의 너름을 뽐내기라도 하듯 무늬만이나마 다채로움(Variete)을 시도했다. 화재 현장에서 보모(保姆)가 올 때까지 방에서 나가지 않는 법도를 지키다가 불에 타죽은 백희(伯姬)가 있는가 하면, 촛값을 못내 쫓겨날 처지가 된 서오(徐吾)가 “한 방에 나 하나가 더 있다 하여 촛불이 따로 닳는 것도 아닌데 촛불을 왜 아끼는가?”라며 재치를 발산하기도 한다.


적어도 몇 대조가 이런 벼슬을 했고 무슨 문집을 남겼다 식의 족보보다 훨씬 재미나고 유익하다. 물론 시대적 상황이 이런 단편적인 기록 하나만 남기도록 허락했겠지만 유향 선생의 글 묶는 솜씨는 역시 빼어나다. 열녀전에서 어떤 여성주의의 밀알을 기대하는 건 과욕이다. 그렇다고 그러면 그렇지라며 샐쭉 토라지는 것도 무성의한 태도다. 비록 남성들에게 재단되긴 했지만 좀처럼 접하기 힘든 옛 여인들의 이야기인 만큼 복선 없이 읽었으면 좋겠다. 상고주의(尙古主義)하자는 게 아니라 희소가치에 대한 호기심과 독점을 막자는 균형감각을 발휘하자는 뜻이다.


열녀전을 덮고 나니 지난 4·25 재·보선에서 아들을 당선시켜 달라며 휠체어를 타고 무안과 신안을 누비던 이희호 여사가 문득 애처로워졌다. 오냐오냐 키우느라 싫은 소리 할 줄 모르는 어머니, 캐비어만 먹을 수 있다면 좌우 볼 거 없다는 아내, 권세의 흐름에만 민첩하고 돈 헤아리는 데만 눈이 밝은 싱글들이 과거에 비해 더 늘었다(내 편견이다). 여성들이 제 욕망을 스스럼없이 발현하는 건 환영할 일이고 권장할 일이다. 하지만 그 욕망이 좀 더 좋은 쪽으로 발현되기를 희망하는 건 여성 억압이 아닐 게다(그렇게 따지면 전 남성 혐오증 환자이려고요?^^;). 내 둘레에 매력적이고 기품 있는 여성들이 늘기를 바라는 마음은 적잖은 남성들의 앙큼한 바람일진저. - [無棄]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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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416
2007년 4월 12일 서울외고가 기독교 학교로 전환했다고 한다. 이날 1층 시청각실에서는 기독교 학교 출범 감사예배가 진행되었단다(여기서 기독교는 가톨릭이 아닌 개신교를 지칭하는 것일 테니 이하 개신교로 칭한다). 감사예배 녹취록 일부를 보니 많이 착살맞았다. 김희정 교장은 “저를 환영하고, 좋아하는 곳에만 우뚝 설 것이 아니라, 저에게 반대를 던지는 사람들이 있다면 왜 반대를 던지는지 듣기를 원합니다”는 알쏭달쏭한 말씀을 나열하고 있다. 그간 학생 대다수가 반대하는 개신교 학교로의 탈바꿈을 어떻게 일방적으로 무시했는지 익히 들어왔던지라 그 말씀에 전혀 믿음이 가지 않는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더니 2007년 3월부터 시행된 개정 서울외고 교칙 징계규정은 섬뜩한 단어들 일색이다. 본래도 그런 교칙이 있었는지 모르겠으나 혹여 믿음(?)에 반하는 학생들을 계도(?)하겠다는 의도로 추가한 건 아닌지 모르겠다. 내 모교가 교육을 포기하고 선교에 나서는 모습이 안타깝다. 학생들의 인권을 침해하면서 인성 교육을 하겠다며 호들갑 떠는 게 민망하다. 일련의 사태에 문제의식을 가진 재학생들이 울분을 토로하는 걸 보려니 가슴 아프다. 앞으로 일상적으로 자행될 위헌적 행태에 시달릴 후배님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짠하다. 대한민국 헌법 제20조 1항을 어렵사리 붙들고 있는 후배님들을 지지한다. 내 모교는 얼마나 더 초라해질 셈인가?


070417
『유림(儒林)』 4, 5, 6권을 독파했다. 조광조, 이황, 이이, 공자, 맹자, 주희, 왕수인 등 거유(巨儒)들의 조명한 유교소설이다. 비록 연작 형식이지만 참 오랜만에 읽은 장편소설이다. 특히 6권에서 퇴계의 이기이원론과 사단칠정론을 설명하는 대목은 작가가 많은 공력을 들였음을 느꼈다. 제 아무리 영민한 소설가라고 해도 유가철학의 고갱이를 쉽게 익히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 자신이 오랫동안 곱씹었기에 쉬우면서도 핵심을 가로지르는 글을 내어놓았으리라. 서술은 하되 창작은 하지 않는 유가식 글쓰기인 술이부작(述而不作)이 잘 녹아 들어간 수작이다.

마지막으로 내 눈길을 끌었던 것은 퇴계 선생님이 고봉 기대승과 편지로 치열하게 토론하는 장면이었다. 퇴계는 자신보다 스물 여섯 살 어린 고봉에게 “지금 그대(고봉)가 정성껏 저를 가르치신 덕분에 잘못된 견해를 버리고 새로운 뜻을 얻었고, 새로운 깨달음을 키웠으니 참으로 다행입니다”라고 스스럼없이 고백한다. 돌아가기 두 달 전까지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고 고치는 모습이 눈부시다. 스승으로 삼을 신하를 묻는 선조 임금에게 자신의 직계제자도 아닌 고봉을 사심 없이 추천했던 그 마음자리를 숭모한다. 도산십이곡 한 구절을 빌리자면 “그 행하신 길이 앞에 있는데 그 도리를 어찌 따르지 않으리!”


070418
미국 버지니아 공대의 총기난사 사건을 담담하게 지켜보기 힘들다. 범인 조승희씨가 한국 교포학생인 것도 차분히 관조하기 어렵게 만든다. 그러나 이번 사안이 인종이나 국적을 따질 필요가 없다는 건 또렷하다. 이번 비극이 한국인이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은 아니기 때문이다. 가령 이번 사건의 범인이 브라질인이라고 해도 이걸로 브라질인의 폭력성을 입증했다고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는 그저 총기 소지의 자유가 헌법으로 보장된 나라에서 가끔 벌어질 법한 끔찍한 사건이다. 사람의 문제보다 제도의 문제가 좀 더 크다. 사람의 문제도 민족이나 국민성의 문제라기보다는 일개인의 문제라고 봐야한다.

한국 언론의 호들갑에 과공비례(過恭非禮)라는 말을 꺼내고 싶지만 아껴두는 게 좋겠다. 법률상 대한민국인인 조승희씨의 만행에 함께 부끄러워하고 송구스러워하는 것도 거개 자연스럽고 적잖이 마땅하다. 그러나 그 감정을 좀 더 확장해서 세계시민으로서 안타깝고 애틋한 마음을 품어 봤으면 좋겠다. 외국인 노동자들의 열악한 후생복지에 고개를 젓고, 무고하게 죽어간 이라크의 시민들을 딱하게 여기는 건 위선이라든가 오지랖 넓은 참견이 아닐 게다. 한미 FTA협상에 반대하며 분신한 고 허세욱님의 호소에 관심을 보내는 것도 비슷한 맥락의 노력이다. 우리가 덜 가까운 이들의 고통을 나눌 수 있을 때 슬픔을 극복하는 힘이 솟아난다. 어느 버지니아 공대생의 피켓 문구처럼, “Heal the pain with love(사랑으로 아픔을 치유합시다).”


070419
북송 시대 사마광은 황하 유역의 서북 지역 출신이었고 왕안석은 양쯔강을 중심으로 한 동남 지역을 대표했다고 한다. 주도권을 쥐고 있던 서북 지역이 전통주의를 주장했다면 신흥세력인 동남 지역은 신법(新法)으로 쇄신할 것을 주장했다. 지식인의 철학이나 정견이 온전히 그 개인의 것은 아닌 모양이다. 시공간의 제약이라고 표현하기보다는 요소(要素)라고 보는 게 더 적절하다. 자신의 생각에 시공간이라는 요소를 눅여낼 때 그 사상이 좀 더 탄탄해질 수 있다. 역사와 환경을 톺아보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 제3세계 학생으로서의 나를 기대해본다.


070420
정부가 20일 국회 통외통위와 한미 FTA 특위에 협상 결과를 담은 협정 원문을 공개했지만 열람 수준이 너무 깐깐해서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고 있다. 컴퓨터 모니터를 통해서만 열람 가능하게 만들고 메모하는 것도 미주알고주알 제한했다. 국회의원당 보좌관 1명만 열람을 허용해서 전문가의 자문도 받지 못한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정부가 공개한 자료는 협정문 원문과 부속서에 그쳐 관세 양허안과 서비스ㆍ투자 유보안 등 민감한 세부 문건들은 공개에서 제외됐다.

참여연대의 지적대로 국민들은 통상능력과 영어능력만 보고 국회의원을 선출하지 않는다. 설령 국회의원들이 행정부의 통상전문가의 식견에는 미치지 못하더라도 그들에게 행정부를 감시하는 기능을 줌으로써 견제와 균형을 이루기 위함이다. 미국은 협상 타결 직후부터 의회와 민간 전문가 700여명이 협정문 초안을 꼼꼼하게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정부는 통상절차가 미국과 다르다며 정보 공개를 머뭇거리고 있다. 협정문 공개가 요식행위로 전락할 때까지 통상절차법 등을 손질하지 않았던 국회의원들의 책임 방기도 크다. 이래가지고 우리의 입장을 조문화 작업에 최대한 반영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그간 국정감사 등이 벌어질 때 정부 관료들에 대한 국회의원들의 오만불손한 고압적 태도가 마뜩잖았던 나이지만 정부 관료도 그에 못지 않을 수 있다는 건 여실히 목도하고 있다. 입법부와 행정부가 서로 일방통행만 하는 모습을 자주 본다. 성역을 없애기를 바랐던 참여정부가 도리어 성역을 만드는 모습을 보는 건 씁쓸하다. 관료들을 민주적으로 통제하라고 만들어 놓은 참여정부 안의 정무직 공무원들은 당최 뭐하고 있는 건가. 이 정도의 통상시스템으로 세계 각국과의 FTA를 잇달아 추진하겠다니 갑갑하다(미국과도 해치웠으니 더 두려울 게 없다는 건가).

우울한 심사를 『행정의 공개성과 정치 지도자 선출』(책세상, 2002)을 읽으며 달래봐야겠다. 막스 베버는 관료제와 의회 민주주의를 양립시키기 위해 궁리했다. 그는 튼실한 의회 민주주의 구현이 관료제의 압도를 막는 힘이 된다고 주장한다. 베버의 신념대로 한미 FTA가 대한민국 국회가 비판을 넘은 대안을 제시하고, 견제와 더불어 책임을 지는 ‘적극적인 정치(베버의 용어)’를 펼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비가 그치니 황사가 온다.


070421
말로만 듣던 <러브 액츄얼리>를 마침내 봤다. 해피엔딩 영화를 좋아하는 내가 흡족했던 걸 보니 이 영화는 해피엔딩인 모양이다. 영화를 자주 보지 않는 나는 가끔 보는 영화만이라도 “끝이 좋으면 다 좋아(All's well that ends well)”였으면 좋겠다는 고집이 있다. 그래서 해피엔딩에 집착한다. 짝사랑하던 회사 동료와 사랑을 이루지 못한 사라(로라 리니)의 이야기는 이 영화를 해피엔딩으로 간직하려는 내 욕심을 방해한다. 친구의 신부를 사랑한 마크(앤드루 링컨)는 낭만적이라며 찬사를 보내는 수준에서 마무리지을 수 있는데 말이다.

정신이상으로 수시로 동생을 찾는 오빠를 위해 그토록 고대하던 짝사랑과의 하룻밤을 포기하는 사라의 슬픔이 느껍다. 열망의 정점에서 희열의 최고조에서 스스로 내려오는 사라의 눈물이 다른 웃음들을 압도한다. 로완 앳킨슨이 아니었더라면 이 영화를 해피엔딩으로 쳐주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사랑은 분명(Love actually) 어느 곳에나 있지만 나처럼 무심한 녀석에게는 좀 멀리 떨어져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랑은 기성품(Ready-made)끼리의 만남이라는 고약한 연애관을 가진 나로서는 포르투갈어를 배우는 제이미(콜린 퍼스)의 정성을 따라가려다 가랑이가 찢어질 텐데 걱정이다.


070422
<위대한 유산 74434>를 시청하다가 『동대사요록(東大寺要錄)』의 내용을 접하고 무척 놀랐다. 그 기록에는 일본 최대의 사찰로 손꼽히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도다이지(東大寺)를 건립하기 위해 삼국이 힘을 보탰음이 적혀있다. 백제사람 행기(行基)스님을 비롯해 가람의 총책임자인 고구려사람 고려복신(高麗福神), 불상을 주조한 백제사람 국중마려(國中麻呂), 대불전 건축을 맡은 신라사람 저명부백세(猪名部百世) 등의 이름이 나온다. 나는 도다이지가 우리 것이라고 주장하려는 게 아니다. 그저 도다이지가 괜히 정겹게 느껴지고 일본에 대한 내 숙원도 좀 누그러지는 듯싶다. 일본인들은 왜 이런 걸 잘 알리려 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양국 친선 교류에 더 보탬이 될 거 같은데 말이다. 하기야 잘 알려고 하지 않는 우리 탓을 먼저 해야지 수원수구(誰怨誰咎)하리요?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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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합 성장이라는 궤변

경제 2007. 4. 23. 12:22 |

소득증가율이 경제성장률을 밑돌고 있다. 한국은행이 3월 21일 발표한 ‘2006년 국민계정(잠정)’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의 실질 GDP 성장률은 5.0%지만, 실질 GNI는 2005년 675조원에서 2006년 691조원으로 2.3% 증가하는데 그쳤다. GNI 성장률이 GDP 성장률을 밑도는 현상은 1995년 이래 11년째 계속되는 일(2002년에는 두 가지가 같았음)이다. 실질 GNI는 교역조건 변화에 따른 무역 손익을 더한 다음 외국인이 국내에서 벌어간 소득은 빼고 한국인이 국외에서 벌어들인 소득은 더해 계산한다. 수출가격이 내려가고 수입가격이 올라 교역조건이 악화되면 무역 손실이 발생하고 이 만큼 국민소득도 줄게 된다. 실질 GNI는 실질구매력을 나타내는 지표로 이 수치가 GDP 성장률보다 낮다는 것은 경제의 외형이 커지고 있으나, 실제 소득 증가가 따라가지 않는 외화내빈의 형국인 셈이다.


현대경제연구원은 3월 22일 펴낸 보고서 ‘중진국 함정에 빠진 한국경제’에서 이젠 선진국 구분의 잣대는 개인 소득 3만달러 수준이라고 제시했다. 2만달러는 1990년대까지의 기준이라는 것이다. 내 이럴 줄 알았다.^^; 결국 또 다시 목표를 더 높여 잡아야 하는 셈이다. 수출환경이 단번에 나아질 가능성이 없는 만큼 시선을 내부로 돌려 기초소재·핵심부품의 자체 생산력 제고와 내수 파급효과가 큰 서비스산업과 부품·소재, 신기술 관련 벤처기업 육성 등을 추진해야 한다는 주장을 경청할 만하다. 이광준 한국은행 경제통계국장의 말씀대로 “주요 소재 부품의 국산화율 제고와 내수 및 수출 부문의 균형 발전”이 긴요하다. 살림살이 나아질 탐구를 따라가다 보니 문득 “더 많은 돈이 지속적으로 더 행복하게 만들어 준다는 잘못된 가정”을 버리라는 미국의 경제학자 이스털린(Easterlin)의 충고가 떠오른다.


이스털린은 경제 성장과 인간의 행복감 사이의 상관관계를 탐구한 선구적 학자다. 그는 소득수준이 높은 사람들이 같은 나라, 같은 지역의 소득수준이 낮은 사람들보다 행복감도 커진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런데 부유한 나라와 가난한 나라에서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의 비율이 별 차이가 없다는 점이 발견됐다. 또 한 나라 안에서 가난하던 시절과 부유한 시절을 비교해도 행복감을 느끼는 사람의 비율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한 나라의 높은 경제 성장과 물질적 풍요가 그 나라 국민 전체를 더 행복하게 한다는 보장이 없는 셈이다. 이처럼 일정한 생활수준에 다다르면 경제 성장은 개인의 행복, 사회적 후생 증가에 이바지하지 못하는 현상을 “이스털린의 역설”이라 일컫는다.


이스털린은 “소득과 욕구는 분명 나란히 증가한다. 내 해석이 맞는다면, 경제가 성장한다고 해서 사회가 부족함 없는 과잉 공급의 상태가 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끊임없이 성장하는 욕구를 더욱 강하게 자극하게 될 것이고, 그런 욕구의 충족을 위해 다시금 경제적인 성장이 요구될 것이다(하랄드 빌렌브록 지음, 배인섭 옮김, 『행복경제학』, 미래의창, 2007, 28쪽)”라고 주장한다. 욕망의 증가 속도가 부의 증가 속도보다 더 빠르다면 돈은 바닷물과 같다던 쇼펜하우어의 말처럼 될 것이다. 이스털린의 역설이 성립하는 “일정한 수준의 부”가 어느 정도인지는 이견이 적잖다. 사회적 합의를 통해 수치화된 목표를 잡아보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을 텐데 말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니 트리클다운(Trickle Down)이라는 경제 용어가 생각났다. 대기업의 성장을 촉진하면 중소기업과 소비자에게도 자연히 혜택이 돌아간다는 이론이다. 물이 넘쳐 바닥을 적신다는 뜻으로 적하정책(滴下政策)이라고 쓰기도 한다. 오늘날 파이를 키워야 나눌 게 있다는 주장은 큰 틀에서 트리클다운에 바탕을 둔 주장으로 볼 수 있다. 이번 한미 FTA로 남는 이득을 손해 보는 부문에 보전해주자는 논리도 비슷하다. 하지만 양극화 문제를 돌이켜볼 때 성장의 혜택이 골고루 돌아가고 있는 가에 대한 논란은 여전하다. 다른 선진국의 경우에도 진보와 보수 진영이 모두 저마다의 습관적인 주장에서 탈바꿈해서 소득 불균형 문제 해결을 위해 상대방의 주장도 접합하려고 애쓰는 것을 보면 쉽게 풀어낼 문제가 아닌 듯하다.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개방이나 성장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


복거일 선생님은 “성장 자체가 양적 개념”임을 강조하신바 있다. “질적인 것도 모두 수량화(quantification)하면 잴 수 있는 것이고, 모든 것은 양적으로 환원”된다는 것이다(계간 『현대사상』 98년 여름호, 권두 좌담회 <한국 지식인, 무엇을 생각하는가> 참조). 김순덕 동아일보 논설위원은 “국민소득대로 그 나라 사람값이 매겨지는 법”이라며 “방글라데시 사람들이 암만 행복해도 그 나라 대학 졸업자가 남의 나라 가서 막일을 해야 먹고살 판이면, 난 그런 행복 원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다(“弱者를 빙자한 권력층의 "경쟁 반대!"” 동아일보. 2007. 03. 29. 참조). 두 분의 말씀은 선뜻 거부할 수 없는 힘이 있다. 하지만 양적 성장의 힘을 빌리지 않고 할 수 있는 일도 적잖다. 절대적 빈곤을 퇴치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지만, 상대적 빈곤을 다독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돈이 드는 건 아닐 게다.


정부 정책 차원에서 국민의 행복감을 증진하는 서비스를 고안해야겠지만 개별 경제주체들도 인식의 전환을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조지 버나드 쇼가 “60세가 되어 20세 시절보다 열 배 부자가 된 사람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 누구라도 열 배 더 행복해졌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핀잔에 자유롭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다. 나라가 살찌는 만큼 국민도 살찌는 선순환 구조를 궁리해야 한다. 김호기 교수님은 “성장과 분배의 선순환에다 새롭게 대외 개방과 대내 복지의 선순환을 결합시키는 이중의 선순환 구조”를 역설하셨는데 그것의 좀 쉬운 표현이다. 국민이 살찌는 나라는 민익(民益)을 지향한다. 부러 민익이라는 낯선 용어를 쓴 것은 국가주의적 국익론을 극복하는 발상의 전환을 꾀하기 때문이다.


복 선생님 말씀대로 질적 성장은 허구적 개념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양적 성장으로도 민익은 얼마든지 도모할 수 있으리라. 그런데 노동사회(work-based society)에서 문화사회(culture-based society)로의 이행을 주장한 프랑스 사회학자 앙드레 고르(Andr Gorz)의 개념 정의에 따르면 노동사회와 문화사회는 질적 차이가 선명하다. 나는 질적 성장에 대한 미련을 쉽게 못 버리겠다. 단순 성장(simple growth)을 넘은 복합 성장(complex growth)이란 궤변을 늘어놓고 싶다(왈쩌의 다원적 평등(complex equality)에서 빌려왔다). 일자리 만들기에 혈안이 된 요즘 문화사회를 꿈꾸는 건 배부른 소리다. 그러나 그 배부른 소리가 경제만능주의에 대한 근본적 반성과 행복한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할 여유를 줄지도 모르는 일이다. 나는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성장 생각에 빠져있지만 그 성장은 순도가 높기보다는 불순물이 많이 섞인 잡스러운 녀석이다. 성장에도 무늬가 있었으면 좋겠다. - [無棄]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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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409
내가 몸담고 있는 경영B반 웹진에서 한미 FTA 특집호에 도전해보자는 제안을 했다. 내가 5년 만에 신문 스크랩을 하고 있을 정도로 꽤 만만찮은 이슈라는 생각에서다. 웹진이 시사교양을 다루는 매체는 아니지만 한 번쯤 생각을 품어볼만 하다는 생각에 용기를 냈다. 어차피 나온 의견들을 정리하는 수준 밖에 만들지 못할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그 핑계로 우리끼리 공부나 좀 해보자는 꿍꿍이였다. 나는 회의 시간을 이용해 그룹 스터디식으로 학습한 다음에 좌담회 형식의 결산을 해보자는 계획을 내놓았다.

홍익이가 “준비하는 과정에서 웹지너 절반 탈퇴, 출판 후 독자층 절반 이탈 예상”이라는 재미난 댓글을 달아줬다. 일전에 김선주 선생님은 <담론이 사라진 시대>라는 칼럼에서 “이렇게 공적인 글쓰기가 어려운 시대는 없었던 것 같다”고 푸념하신 바 있다. 내 또래의 친구들이 시사적인 문제에 대한 허심탄회하게 논의하기란 참 드물다. 중국의 후스(胡適)가 “더 많은 문제를 연구하고 더 적게 주의를 논하자(多硏究些問題 少談些主義)”라고 주창했듯이 내 둘레의 사람들과 문제의식을 공유하길 바란다. 도반(道伴)이 그리 까마득한 경지는 아닐 게다.


070410
마켓 셰어는 참이슬이 높지만 로열티는 처음처럼이 높다는 기사를 재미나게 읽었다(“친구같은 술 `참이슬` vs 순해서 좋다 `처음처럼`” 한국경제. 2007. 04. 01. 참조)”. 내 눈길은 끈 것은 한국갤럽이 자체 개발한 미래 경쟁력 진단 지수인 G-CBPI(Gallup Consumer Brand Preference Index)이다. G-CBPI는 특정 브랜드에 대한 소비자의 호감도를 나타내는 지수다. 현재의 브랜드 위치를 파악하고 미래의 성과를 예측하는 지표로 활용할 수 있다. ㄱ브랜드를 가장 구매하고 싶다는 소비자가 50%고, ㄱ브랜드를 가장 구매하고 싶지 않다는 소비자가 20%면 G-CBPI는 50-20=30이 되는 간단한 계산이지만 발상이 흥미롭다.

참이슬의 G-CBPI는 50.6, 처음처럼은 26.3이라는 조사 결과는 처음처럼이 지금보다 시장 점유율을 더 높일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2004년 마케팅 강의 발표 주제로 “교촌치킨 vs BBQ”를 준비했던 기억이 난다. 팀원들 사이에도 교촌치킨파와 BBQ파가 나뉘어 티격태격했던 추억이 새록하다. 나는 발표 유인물을 작성하며 독일의 경제학자 헤르만 지몬의 말씀을 맨 끄트머리에 넣었다. “치열한 경쟁만이 최고의 노력으로 이끌어간다. 메르체데스 벤츠는 BMW와 아우디가 있음을 기뻐해야 한다. 물론 그 반대도 옳다”는 경구를 찾았다며 좋아했지만 발표 점수는 신통치 않았다.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천사 미하일은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를 돌보기 때문에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사랑으로써 살아간다는 것을 깨달아 다시 천국으로 돌아갔다. 천국 입장권을 놓고 누가 내게 같은 질문을 던진다면 나는 한참 머뭇거리며 사랑과 경쟁으로 산다고 답할 것이다. 그래도 이과적으로(!) 각종 영양분과 물이라고 답한 내 동생보다는 좀 덜 무뚝뚝하다.^^; 정정당당하게 경쟁하고 패자를 보듬는 연대의식을 발현하는 일이 양립불가능한 문제는 아니다.


070411
미국의 경제학자 이스털린(Easterlin)은 경제 성장과 인간의 행복감 사이의 상관관계를 탐구한 선구적 학자다. 그는 소득수준이 높은 사람들이 같은 나라, 같은 지역의 소득수준이 낮은 사람들보다 행복감도 커진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런데 부유한 나라와 가난한 나라에서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의 비율이 별 차이가 없다는 점이 발견됐다. 또 한 나라 안에서 가난하던 시절과 부유한 시절을 비교해도 행복감을 느끼는 사람의 비율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한 나라의 높은 경제 성장과 물질적 풍요가 그 나라 국민 전체를 더 행복하게 한다는 보장이 없는 셈이다. 이처럼 일정한 생활수준에 다다르면 경제 성장은 개인의 행복, 사회적 후생 증가에 이바지하지 못하는 현상을 “이스털린의 역설”이라 일컫는다.

이스털린은 “소득과 욕구는 분명 나란히 증가한다. 내 해석이 맞는다면, 경제가 성장한다고 해서 사회가 부족함 없는 과잉 공급의 상태가 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끊임없이 성장하는 욕구를 더욱 강하게 자극하게 될 것이고, 그런 욕구의 충족을 위해 다시금 경제적인 성장이 요구될 것이다(하랄드 빌렌브록 지음, 배인섭 옮김, 『행복경제학』, 미래의창, 2007, 28쪽)”라고 주장한다. “더 많은 돈이 지속적으로 더 행복하게 만들어 준다는 잘못된 가정”을 버리라는 그의 충고 앞에 많은 걸 곱씹게 된다. 욕망의 증가 속도가 부의 증가 속도보다 더 빠르다면 우리는 연신 소금물을 들이키며 갈증을 느껴야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스털린의 역설이 성립하는 “일정한 수준의 부”가 어느 정도인지는 이견이 적잖다. 벌써부터 국민소득 2만불 시대를 넘어 3만불 시대로 가자는 구호가 나오는 것을 보면 우리의 일정 수준은 3만불로 설정해야하는 것인지 헛갈린다. 절대적 빈곤을 퇴치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지만, 상대적 빈곤을 다독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돈이 드는 건 아닐 것이다. 정부 정책 차원에서 국민의 행복감을 증진하는 서비스를 고안해야겠지만 개별 경제주체들도 인식의 전환을 할 필요가 있다. “60세가 되어 20세 시절보다 열 배 부자가 된 사람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 누구라도 열 배 더 행복해졌다고 말하지 않는다”라는 조지 버나드 쇼의 핀잔에 자유롭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다.


070412
고3 수험시절 나를 괴롭힌 것은 늘 그랬듯이 수리탐구Ⅰ영역(수학)이었다. 영어나 과학탐구도 불안했지만 결정적 순간에는 수학이 내 발목을 잡을 것임을 오랜 경험(?) 통해 인식하고 있었다. 덕분에 수험생활 내내 내가 좋아하는 사회탐구나 언어영역 공부는 거의 못한 채 수학에 매달렸다. 내가 수학을 못했던 건 재능도 없었지만 즐기지도 않았기에 단순히 시간을 좀 더 늘린다고 단숨에 해결된 문제는 아니었다. 내 수험생활은 그리 즐겁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택한 전략은 지극히 합리적인 행동이었다. 사슬의 법칙이란 게 있다. 사슬의 강도는 가장 약한 부분에서 결정 난다는 뜻이다. 다른 부분이 아무리 굵어도 한 군데가 약하다면 사슬은 툭 끊어지게 된다. 이미 안정적인 점수를 확보한 과목에 시간을 들이기보다는 불안정하고 점수 상승의 여지가 많은 과목에 집중 투자함으로써 약한 사슬을 강화하는 건 수험생의 미덕이라고 예찬할 만하다.

행정고시 수험생들은 행정법과 경제학을 대체로 까다로워한다. 행정법의 진입장벽도 만만치 않지만 나는 결국 내 약한 사슬은 경제학이 될 것이라고 직관하고 있다. 이제 곧 경제학 공부에 들어가면 아마 지겹도록 옆에 끼고 있어야 할 듯싶다. 그러다 보면 또 다른 약한 사슬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정치는 살아 있는 생물이라고 하지만 공부도 살아있는 생물이다. 학문도 가능성의 예술이리라.


070413
꺼지기 전 촛불마냥 대통령 4년 연임제 개헌안에 대한 막판 힘 겨루기가 한창이다. 개헌이 정치적 흥정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노무현 대통령님은 조건 없이 개헌안을 거둬야 한다. 물론 대통령이 헌법에 규정된 권한에 따라 개헌 발의 의사를 밝혔을 때부터 일관되게 토론을 거부했던 분들은 떳떳하지 못했다. 시기의 문제를 제기한 분들의 논거는 그리 튼실하지 않았다. 밉살맞은 사람이 제안한 것이니 논의조차 하기 싫다는 인상을 받았다면 내 옹졸함 때문일까? 대통령과 야당, 언론 가운데 누가 제 몫의 책무에 충실했는가.

개헌은 단순한 법률 개폐와는 차원이 다른 민주공화국 최고의 정치행위 가운데 하나다. 대통령의 개헌 발의권은 그에 걸맞게 신중하게 쓰여야 한다.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자신이 별로 없는 나는 정쟁이 일상화될 거라는 비판을 방어하기 힘들다. 지금의 양대 보수정당 과점 구조는 선거제도의 모순 이전에 국민들의 자발적 선택의 결과물 아닌가. 사실 대통령 단임제가 제도의 문제인지, 사람의 문제인지는 명확히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단순히 단임제 하나에 공력을 쏟아 부을 까닭이 없다. 긴요하면서도 좀 더 손쉬운 제도 개혁으로 선거제도 개편을 들 수 있다. 우리 사회의 정치적 대표성을 높이는 건 보다 근본적인 개혁이 될 것이다.

대통령과 국회의원의 임기 만료일이 거의 일치하는 지금이 원포인트 개헌의 최적기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 시기적절성까지 포기하며 챙겨야 할 것은 국민들의 섭섭한 마음자리다. 4년 연임제 개헌을 지지하지만 현 정부 내의 개헌은 반대했던 국민들의 마음을 헤아려야 한다. 그것이 설령 노무현을 인간적으로 싫어해서 나온 견해라고 할지라도. 한미 FTA로 실의에 빠져 있는 일부 국민들을 다독이며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한 노력도 때를 놓쳐서는 안 된다. “개헌이 옳다고 생각하지만 그보다 더 옳은 것은 국민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하며 명예롭게 퇴각하자.

대통령님보다 생산적 논의를 봉쇄한 분들이 헌정을 흩뜨린 책임을 좀 더 져야할 것이다. 개헌정국에서 유독 돋보였던 고진화 의원님을 다시 보게 됐음을 꼭 기록해둔다.


070414
춘추좌전 양공 25년조에는 제 나라의 최저가 그 군주인 광을 시해했다는 경문(經文)이 나온다. 사관의 우두머리인 태사(大史; 전문(傳文)에는 대사라고 쓰여 있으나 직책 이름은 태사라는 풀이가 많아서 이걸로 따른다)가 “최저가 그의 군주를 시해했다(崔杼弑其君)”라고 기록했더니 최저가 그를 죽였다. 태사의 아우 두 사람이 이어서 그렇게 기록했는데, 그 두 사람도 죽였다. 그들의 아우가 또 그렇게 기록하니, 그 때는 그대로 두었다고 한다. 당시 역사서를 적는 사관은 세습제였다고 한다. 결국 4형제가 목숨을 걸고서야 한 줄의 역사 기록이 세상에 전하게 됐다. 이 고사는 역사의 엄중함을 환기하는 사례로 많이 인용된다.

조선왕조실록 태종 4년조의 기사에는 재미난 기록이 실려 있다. 태종이 사냥을 하다가 말에서 떨어지자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사관(史官)이 알게 하지 말라(勿令史官知之)”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바람과는 달리 그 말 그대로 적히게 됐다. 세종 13년에는 세종대왕이 태종실록을 열람하겠다고 나서자 맹사성 등이 “사관(史官)도 또한 군왕이 볼 것을 의심하여 그 사실을 반드시 다 기록하지 않을 것이니 어찌 후세에 그 진실함을 전하겠습니까(史官亦疑君上之見, 必不盡記其事, 何以傳信於將來)?”라며 만류한다. 세종 20년 대왕께서 다시금 열람을 시도하자 황희 등이 “만약 전하께서 실록을 보신다는 것을 들으면 (사관들의) 마음이 반드시 편하지 못할 것(若聞殿下省覽, 則心必未安)”이라며 반대해 끝내 보지 못했다.

오늘날 공무원의 중립의무가 공무원의 정치적 자유를 옥죄는 방향으로 쓰이고 있는 실정에서 옛 의미의 사관 제도를 만들기는 어려워 보인다. 사평(史評)까지는 바라지 않지만 적어도 꼼꼼한 기록을 남기는 데는 좀 더 정성을 쏟아야 한다. 미국의 국립문서기록관리청(The Nati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과 같은 노력이 부족하다. 연방정부의 독립 행정청인 미국의 경우에 견주어 우리네 국가기록원은 행정자치부 산하 2급청이다. 국가기록원을 독립된 차관급 청으로 격상시켜야 한다는 주장에 수긍한다. 치밀한 기록은 행정의 책임성을 높여줄 것이다. 불리한 내용도 가감 없이 남기는 현대판 사관은 불가능한 꿈일까. 기록은 힘이 세다.


070415
컴퓨터 앞에 있으면 국어사전 이용하기가 참 편리하다. 모르는 단어를 톡톡 쳐 넣으면 풀이와 용례가 척척 나온다. 한국어로 밥벌이를 하지 않는 사람 가운데 나처럼 국어사전을 애용하는 경우도 드물게다. 동생 방 정리를 하다가 나온 어휘집을 넘기며 새로 익히는 우리말 표현이 흥겨웠다. 문득 이렇게 어휘집이나 사전을 통해 발굴한 말을 억지로 유통시키려는 것이 얼마나 온당한 가에 대한 문제의식을 품어봤다.

나는 언어순수주의자는 아니지만 정확한 한국어가 아름다울 개연성이 있다는 가정에는 기꺼이 동감한다. 나는 정확성과 더불어 다양성을 추구하고 싶다. 한국어에 개념어가 부족하다고는 하지만 형용사나 동사는 아예 묻어버린 말들이 너무 많다. 먼지를 털어내고 조금 써보는 게 그리 극단주의적 행위는 아닐 것 같다. 이러한 개인 언어가 둘레로 퍼져서 언중의 호감을 얻는다면 어휘로서의 생명력을 부여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안습’, ‘지름신’, ‘폐인’ 같은 신조어의 숨결만 느낄 까닭이 없다.

소설가 김훈 선생님이 영어를 잘해야 한국말도 잘할 수 있고, 국제적 감각이 있어야 한국말이 풍요로워진다는 말씀을 하셨다(“'역전' … 이젠 도올이 김훈을 인터뷰하다” 중앙일보. 2007. 04. 14. 참조). 나는 그렇게 단정하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영어는 잘해도 한국어를 못하는 경우가 많으며, 한국어를 잘 하기 때문에 영어까지 잘 하는 경우도 많다. 오히려 세계화 시대라는 미명 아래 영어로의 쏠림이 심화돼 모국어를 얕보게 만드는 경향이 있는 듯싶다. 누리꾼들이 영어 전치사와 접속사를 구분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는 정성의 반의 반만 국어사전을 들췄다면 이처럼 그악스러운 악플들이 넘치지는 않았으리라. 오늘 익혔던 풋풋한 토박이말을 복습해본다.

결곡하다, 공변되다, 구순하다, 깨단하다, 꾀송거리다, 너볏하다, 느껍다, 당알지다, 두남두다, 부닐다, 빙충맞다, 아금받다, 알쭌하다, 앙그러지다, 억실억실하다, 일매지다, 찐덥다, 참따랗다, 탁탁하다, 헤살놓다...

Posted by 익구
:

070402
한미 FTA가 타결됐다. 협상 내용을 분석해보면 우리가 얻어낸 것과 얻어내지 못한 것을 어떻게 헤아리느냐에 따라 많은 입장 차이가 있다. 벌써부터 농축수산업 손실보전 대책 등이 분주하게 나오는 모양인데 부디 내실 있게 진행하길 바란다. 피해부문의 구제와 보상조치를 얼마나 착실히 수행하느냐에 한미 FTA의 충격을 얼마나 줄일 수 있는지가 달려있다. 특정 부문에 집중될 손해를 국민 전체가 분담하는 사회적 연대가 이뤄질지 솔직히 회의적이다. 그러나 누군가의 크나큰 희생을 바탕으로 일구는 경제발전을 반성할 수 있는 계기로 삼기 위해 노력해보자. 아니,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개방은 지속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070403
3년 반 동안 국회에서 표류해온 국민연금법 개정안이 2일 본회의에서 부결됐다. 70살 이상 노인 가운데 60%에게 한달에 8만9천원을 지급하는 기초노령연금법을 통과시킴으로써 더 내고 덜 받아 미래세대의 부담을 덜어주자는 국민연금 개혁은커녕 후세의 부담을 더 늘려버렸다(아마 내가 포함되겠지^^;). 정부가 마련한 국민연금법 개정안은 더 내고 덜 받을 수밖에 없는 엄중한 현실을 반영한 고육지책이었다.

오불관언 근본주의적 태도로 일관한 민주노동당이야 논외로 치고, 감세와 복지 축소를 주장하던 한나라당의 돌변은 어지럽다. 정부안보다 재정 부담이 더 높은 기초연금제를 주장하려면 뭔가 재원 마련의 방안도 함께 내놓아야 하는데 잘 들리지 않는다. 한나라당이 집권하면 그간 숨겨 놨던 화수분이라도 꺼내놓을 모양이다. 열린우리당을 탈당하며 민생 법안 처리에는 협조하겠다던 탈당파 의원들은 이번 표결에서 대거 기권함으로써 이 엽기적 사태를 부채질했다.

법사위까지 통과한 정부 개정안을 놔두고 한나라당과 민주노동당이 수정안을 제출한 건 결정적 패착이다. 설마 했는데 공든 탑이 무너지게 됐다. 이렇게 따로 법안을 상정함으로써 자당의 법안만을 고집하는 소인배의 무책임 정치를 낳았다. 나는 이번 사안에서 양비론을 취할 생각이 없다. 나는 정부안이 그간의 논의를 통해 실현가능한 차선책으로 다듬었다고 생각한다. 정부는 국민연금법 개정안을 조속한 시일 내에 재추진하길 바란다.

물론 민주노동당과 한나라당이 가입자 단체와 합의해 내놓은 조정안도 그 나름의 의미가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미래의 가입자들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잘 보이지 않는다. 아울러 재원 마련에 대해 양당의 입장이 통일되었는지도 의심스럽다. 기왕 힘을 합친 김에 재원 마련에 대한 청사진도 함께 제시해주시길 바란다. 내가 머잖아 낼 세금의 크기를 늘리려면 그만한 설득은 있어야 할 것 아닌가. 아니면 감춰뒀던 화수분을 좀 보여 달라.


070404
나는 “직선 대표는 본래 인기 없음에 초연할 수 없는 존재다”는 말을 자주한다. 물론 이런저런 단서 조항을 붙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철인왕(philosopher king)을 주창했던 플라톤이야 말할 것도 없고 아리스토텔레스도 민주주의가 타락해 중우정치가 펼쳐지는 끔찍함을 노래(?)했다. 이처럼 인민의 지배(democracy)는 본래 그리 말쑥한 용어는 아니었다. 하지만 인간 이성이 진보한 것인지, 대철학자들의 험담이 과장된 것인지 오늘날 민주주의는 눈부신 말이 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민주주의가 적은 나라 가운데 하나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국호를 쓰고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

노무현 대통령님은 2일 한미 FTA 타결과 관련한 대국민 담화에서 “개인으로서는 아무런 이득이 없다”면서 “정치적 손해를 무릅쓰고 내린 결단”임을 강조하셨다. 그러고 보면 노 대통령님께서 지지자들의 반대편에 서서 제 지지층을 허문 일은 수두룩하다. “정치적 손해 가는 일을 하는 대통령은 노무현 밖에 없다고 스스로 믿고 있기 때문에 특단의 의지로 결정했다”는 발언은 이미 충분히 입증(?)되어 있는 셈이다. 일각에서 배신자라고 욕할 때 어지간한 강심장도 속이 쓰릴 것이다. 그것은 간언을 받아들이지 않는 속 좁음이라기보다는 자신을 지지해준 사람을 거스르는 직선 대표의 고독 때문이리라.

흔히들 반대자도 포용하는 지도자가 되라고 한다. 하지만 요 며칠 다시 봤다며 호들갑 떠는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는 과도한 비난과 저주를 즐겨 쓰던 분들이었다. 이네들의 추켜세움이 아무리 달콤하다고 해도 옛 지지자들의 돌팔매 몇 개가 더 아플 것이다. 물론 노무현 지지자 가운데 개방에 반대하는 경우는 적다고 본다. 한미 FTA까지는 아니더라도 개방 정책은 후보 시절부터 이미 예측 가능한 행보였다. 지지자들은 아마 우려가 더 된다는 뜻으로 부표를 던진 경우가 많으리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거 당시의 지지층이 붕괴되는 건 책임 정치에 비추어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다.

이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걱정을 뛰어 넘는 민주주의 자체의 위기이기 때문이다. 한미 FTA를 추진하며 도드라졌던 비민주성에 대한 지적을 겸허히 수용하길 바란다. 노무현의 뚝심이란 게 있다면 그것은 바로 민주주의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정신이 되어야 한다(개인적인 바람이지만). 이제 노 대통령님께서 하실 일은 그간의 협상 내용을 조속히 공개하고 불편한 진실을 꺼리지 않는 것이다. 단편적 정보로 인한 막연한 추측만이 난무하는 사태를 눅이고 최선을 다한 만큼 국민들의 평가를 기다리길 바란다. 진짜 뚝심은 이제부터다.


070405
오마이뉴스 민경진 기자는 “신책불이(身冊不二: You are what you read)”라는 표현을 즐겨 쓰신다. 한 사람의 사고방식은 그가 무엇을 읽고 접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는 주장이다. 민 기자는 2002 대선 당시 “신문 같은 활자매체에 길들여진 구세대와 인터넷에 익숙해진 신세대간의 갈등”이 신책불이의 한 사례라고 설명한다. 인간의 창의성도 결국 자신이 딛고 있는 곳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현실적 제약조건은 얼마나 매서운가. 뉴턴은 “만일 내가 더 멀리 내려본다면, 그것은 내가 거인의 어깨 위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라며 자신의 학설이 논리성뿐만 아니라 역사성까지 갖췄음을 겸손하게 내비쳤다. 이것도 신책불이의 한 사례이리라.

고 정운영 선생님이 쓴 중앙일보 칼럼이 변절 논란을 낳았을 때 프리맨(yong73)이라는 아이디를 쓰는 한 누리꾼이 던진 “그 많은 책을 평생 읽은 결과가 고작 이런 것이라면 인생이 허무하지 않을까?”란 물음은 무섭다. 내가 읽는 것이 편협해서 거기에 얽매임을 염려하면서도 그저 주절대다 끝나는 것이 더 두렵다. 앎과 실천의 문제에 있어 주희와 왕수인은 서로 다른 견해를 내어놓았다. 알면서 행하지 않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지만,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나서는 것도 경계할 일이기에 선뜻 어느 쪽 주장에 손을 들 수 없다. 어쩌면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에서 보신책처럼 둘러대듯이 진실은 중간 어디쯤에 있을지도 모른다. 두루 읽으면서 때 맞춰 움직이는 건 평생을 걸쳐 고민할 화두다.


070406
1857년 독일의 통계학자 에른스트 엥겔(Engel)은 벨기에 노동자 가구 153세대의 가계지출을 조사했습니다. 그 결과 수입이 적은 가계일수록 지출에서 차지하는 식료품비의 비율이 높고, 수입이 많은 가계는 그 반대라는 경험법칙을 발견했지요. 여기서 도출된 엥겔지수(Engel’s coefficient)는 가계소비지출에서 식료품비가 차지하는 비중을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엥겔지수가 25 이하면 높은 수준의 문화생활을 하는 ‘최상류’로 분류되고, 26~30은 ‘상류’, 31~50은 ‘중류’로 분류된다고 하네요.

보릿고개가 어느 정도 극복한 1980년대까지도 우리나라의 평균 엥겔지수는 40%을 오르내렸습니다. 2006년 8월 통계청이 발표한 ‘통계로 본 8·15 광복 이후 경제·사회 변화상’에 따르면 도시근로자가구의 엥겔지수는 1963년 61.3%에서 2005년 26.6%대로 하락했다고 합니다. 1963년에는 식료품비 지출에서 외식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7.5%에 그쳤지만 2005년에는 48.5%로 높아졌습니다. 참고로 북한의 엥겔지수는 1990년대 말의 80%에서 2006년 70%대로 떨어졌다고는 하나 대체로 50% 이상인 개발도상국의 엥겔지수보다는 높은 편입니다. 중국은 40% 이하이며 2050년까지 15%로 끌어내린다는 목표를 세우고 있다고 합니다.

버시바우 주한 미국대사는 한미 FTA를 옹호하며 한국 소비자들이 평균 국제 소비자에 비해 농산물에 대해 많은 비용을 지불하고 있기 때문에 엥겔지수가 OECD국가들에 비해 높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비싼 편인 쇠고기를 먹고 있기도 하지요. 하지만 값싼 쇠고기를 먹고 오렌지를 즐기는 게 소비자 후생의 전부는 아닐 겁니다. 풍요로운 먹을거리를 값싸게 이용하는 방안과 더불어 농축산업계에 발생하는 역진적인 소득재분배로 인한 사회적 형평성의 문제까지 살피는 균형감각을 키워야겠습니다.

엥겔지수와 삶의 질이 역(逆)의 상관관계에 있다고는 하지만 반드시 그런 건 아니지요. 엥겔지수를 낮추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음식을 맛나게 음미하고, 다채롭고 개성있는 문화생활로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가꾸는 일일 겁니다. 자자 밥은 먹고 다닙시다.^-^

- <작렬하는 엥겔지수> 대학로 맛집 탐방을 마친 기념으로 쓴 글


070407
언제부터인가 ‘愛후배’라는 표현이 유행했다. 각별히 아끼는, 가깝게 여기는 후배라는 뜻 정도로 쓰인다. 사람 사이가 다 그렇지만 많은 후배들 중에도 좀 더 오래 남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지난 5년 여간 이런저런 자리에서 스쳐간 후배만 수백 명은 될 텐데 내가 책임지기 힘들 정도의 관계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지만 그 정도로 스치고 만다면 망각과 무심이 인연의 자리를 꿰차는 건 시간문제다. 얼마 남지 않은 대학생활 동안 좀 더 내 곁을 지켜줄 사람을 만들고 싶다는 욕심이 자꾸 커진다. 그래서인지 나도 부쩍 愛후배라느니, 愛선배라느니 하는 말을 자주 쓰고 있다. 愛후배를 자청하는 경우도 있고, 내가 愛후배를 삼으려고 하는 경우도 있다.

잡아함경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아난다가 붓다에게 “착한 벗이 있고 착한 동지와 함께 있다는 것은 이 성스러운 길의 절반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붓다께서 “아난다여, 그렇게 말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이 성스러운 길의 전부입니다”라고 고쳐 주었다. 서로의 마음에 있는 거문고 줄(琴線)을 건드리는 愛선배-愛후배의 길은 멀고도 험하다. “너를 만나면 더 멋지게 살고 싶어진다”는 용혜원님의 시구처럼 그렇게 내 자신을 먼저 다잡는 것부터 시작해보자.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않으니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人不知而不溫 不亦君子乎)”란 논어 첫 구절도 조바심 내지 않는 힘이 되리라.


070408
부활절 즈음해서 TV에서 틀어준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흥미롭게 봤다. 예수님의 마지막 12시간은 그야말로 피와 땀으로 점철되어 있다. 뚝뚝 떨어지는 핏속에서 태형과 십자가형의 잔혹함을 사실에 가깝게 묘사했다. 영화평론가 허문영님의 평이 가장 와 닿는다. 비기독교도에게는 얼핏 “예수의 초인적인 맷집에 관한 영화”처럼 보인다는 평이 그리 불경스럽지 않아 보인다. “영적 영웅이 아니라, 육체적 영웅”으로 다가온다는 지적도 적절하다.

빌라도가 “진리가 무엇이냐”고 묻자 예수님은 “내가 곧 진리다”라고 말씀하신다.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가 떠오르기도 하고, 몸으로 살아낸 것만이 진리라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나는 부처님께서 마지막으로 남겼다는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에 좀 더 공감하는 듯싶다. 내가 성경에 문외한이라 예수님께서 대중을 진리의 주체로 보기보다 용서의 대상으로만 본 거 같아서다(물론 그런 대중들을 섬기는 심부름꾼을 자청하신 건 경배의 대상이다). 불가의 개유불성(皆有佛性)이란 개념이 기독교에도 있는지 잘 모르겠다. 

예수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용서했지만 하느님은 지진을 일으켰다. 나는 그 장면이 그다지 통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흔든 것은 “내가 목마르다(요한복음 19장 28절)”는 외침이었다. 나는 기독교가 많은 이들의 목마름을 축여줬음을 알고 있다. 하지만 박해에서 벗어난 기독교의 흐트러진 모습도 많이 보아왔다. 우리의 잘못을 대신해 돌아가신 예수님을 찬양하는 것도 좋지만 우리 둘레에 억울하게 고통 받는 이들을 돌아보려는 노력으로 대체하려는 정성도 필요하다.

어릴 적 밤새 읽었던 김동리의 『사반의 십자가』가 떠오른다. 사반은 예수님 왼쪽에서 십자가형을 당한 죄수를 모티브로 만든 인물이다. 소설에서 사반은 예수님에게 “비겁한 자여, 너는 유대 나라와 너의 생명을 버리고서 어디다 낙원을 찾고 있느냐?”일갈한다. 하늘의 영광보다 땅의 영광을 갈구하며 예수님과 격렬히 맞섰던 사반에 좀 더 동감했던 것이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듯싶다.

내세나 윤회를 믿지 않는 나는 지금 이 생애가 전부다. 나의 현세주의(現世主義)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하나님의 나라에, 불국정토에, 목적의 왕국에 좀 더 가까워지길 바란다.

Posted by 익구
:
070326
경북대 국문과 백두현 교수님은 최근 〈경북대신문〉에 기고한 칼럼 ‘대구 지역의 생활어, 대구 사투리의 특성’에서 “음절이 긴 말을 짧게 줄이는 발음 습관이 대구 사투리 특징”이라며 “이는 말을 자주 줄여 쓰는 지금 젊은이들의 언어 습관과도 통하는 현대적인 요소로 볼 수 있다”고 주장하셨다. 대구 사람들이 말수가 적고 과묵한 편이라 ‘언어의 경제성’측면에서 말을 많이 줄여 쓴 것이라는 분석이 흥미롭다.

대구 지역의 몇몇 어휘에서 말을 줄여 쓰는 현상이 비롯되었다는 것은 선뜻 수긍하기 힘들다. 용건을 압축해서 보내야 하는 휴대전화 문자나 메신저, 채팅 등을 통한 짤막한 대화의 확산도 적잖은 기여를 했을 것이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이미지나 영상의 범람하고 문자 텍스트의 지위가 흔들리면서 기인한 바도 있으리라. “과묵한 언어행실을 미덕으로 삼던 유교전통”까지 불러들이는 건 좀 지나쳤다. 그래도 대구 사투리가 말 줄임 현상의 한 요인이 되었겠거니 넉넉히 끄덕인다. 내 무뚝뚝함을 방어하기 위해서라도.

태어난 지 다섯 달 만에 서울로 오기는 했지만 태어난 곳을 고향이라 칭한다면 대구는 내 고향이다. 나는 내 고향 사람들이 말수 줄이는 것보다는 서로 많은 대화를 나누셨으면 좋겠다. 그래서 이심전심으로 지역주의의 존속에 힘을 보태기보다는 그 해체를 위해 애써주셨으면 좋겠다. ‘우리가 남이가’와 ‘미워도 다시 한번’ 이 대구시민의 미덕으로 남는다면 지역주의 완화는 요원할 게다. 나는 결국 지역주의를 극복하는 첫 걸음은 대구가 결단하는 수밖에 없다고 지역주의적(!)으로 생각한다. 나는 내 고향을 사랑하지만, 이 나라를 더 사랑한다.


070327
“형 좌익이죠?”라는 질문에 순간 화를 낼 뻔했다. 우파 편식을 염려하는 내게 어울리지 않는 질문이기도 하거니와 별 다른 근거도 없이 뜬금없이 묻는 게 좀 당혹스러웠다. 나는 “중도 자유주의자”쯤 되는 거 같다고 해명(?)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내 자신에게 화가 났다. 무의식 중에 튀어나온 “중도(中道)”라는 말 때문이다. 일전에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님은 참여정부를 중도 자유주의로 규정하신 바 있다. 아마 그걸 읽은 기억이 언뜻 나서 그렇게 밝힌 모양이다. 진보와 보수 모두에게 뭇매를 맞고 있는 참여정부가 정체성이 없기 때문인지, 공격 받기 좋은 중도로 포지셔닝해서 그런 것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난 중도라는 말이 어색하다. 

나는 정치학적 개념에 대한 공부가 부족하고 변덕도 심해 내 성향(?)을 밝히기 힘들다. 자유주의 좌파(liberal left)라고 분류되는 존 롤즈의 사상에 많은 감화를 입었기 때문에 그 언저리에서 조금 오른쪽에 있겠거니 막연히 추측한다. 자유주의 좌파를 오른쪽으로 옮기면 자유주의 중도가 되긴 하겠지만 인간의 내면이 그렇게 두부 자르듯이 갈리는 건 아닐 테니 더 이상의 가름은 무익하다. 실상 내가 자유주의자를 자칭하더라도 자유주의는 자유지상주의자에서부터 중도 좌파에 이르기까지 폭 넓은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요즘 중도 노선이 유행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중도가 균형감각을 향한 노력이기보다는 제 치우침을 분칠하기 위한 용도가 강하다. 사실 그 치우침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닌데도 말이다. 이 땅을 어떤 모습으로 만들어 가야 하느냐하는 섬세한 논의를 위해서 건전한 이념 논쟁을 벌일 용기나 정성이 모자란 모양이다. 중도가 좌와 우의 산술평균이 아니라는 점은 자명하다. 중도를 습관처럼 입에 올리는 분들이 이것과 저것을 뛰어넘은 대안을 만들어 낸 거 같지는 않다. 중도니 상생이니 통합이니 하면서 개혁이 필요한 곳을 넘어가려 하지 않았나 엄중히 성찰해야 한다.

소설가 공지영님은 어느 인터뷰에서 캐피어 좌파를 언급하며 “캐비어를 먹는 사람은 꼭 우파여야 하나요?”고 되물었다. 나는 그 지적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우리 사회에는 좀 더 많은 좌파가 필요하다는 지당하신 말씀만 읊조리고 싶지는 않다. 나는 보다 구체적으로 좌파도 캐비어를 맛나게 먹을 수 있기를 바란다. 혹자는 좌파와 캐비어는 네모난 원처럼 모순되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하지만 캐비어 먹는 좌파가 늘어날 때 좌파에 관심을 쏟는 이들이 더 늘어날 거 같다. 스스로 우파로 여기는 사람의 상당수가 캐비어를 탐낸다면 너무 지나친 발언일까?

나는 좌파에게 내 자신도 지키지 못할 과도한 윤리적 잣대를 들이대는 것을 멀리할 것이다. 좌파도 똑같은 불완전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좌파이면서도 캐비어를 먹을 위치가 되기가 쉽지 않은 게 사실이다. 이 고민을 좀 더 확장해봐야겠다. 극우파를 정규분포의 끄트머리로 내모는 일과 병행해서 말이다.


070328
동아대 석당학술원 산하 고려사역주사업단이 전 30권으로 기획된 고려사 완역본 중 1차분으로 열전(列傳)편을 9권으로 완간했다는 소식을 이제야 확인했다. 곧 나올 세가(世家)편에서는 신돈의 자손이라며 격하돼 반역열전에 실린 우왕과 창왕을 세가에 복권해 싣기로 했다. 반가운 일이다. 고려사 말기의 왜곡된 사적을 주석으로나마 교정하는 노력까지 기울여 주셨으면 좋겠다. 조선왕조실록처럼 국역 고려사 홈페이지도 머잖아 개설돼 고려사도 손쉽게 검색할 수 있기를 바란다.

한국고전번역원을 설립하는 법안이 국회에서 계류 중이라고 한다. 예산 부족이라는 핑계 때문이다. 지난 10년간 번역된 모든 한국 고전의 75%가 민족문화추진회에서 나온 셈이다. 우리 고전을 한글로 옮기는 사업을 민간단체가 도맡아 해왔다니 부끄럽다. 고전번역원이 설립될 경우 현재 민추 지원 예산에 20억원 정도의 예산이 추가로 소요된다고 하는데 이 돈이 없어서 못하고 있다니 개탄스럽다.

고전을 국역해 일반인이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하는 작업이 학술문화 민주화의 일환이라는 주장에 적잖이 동감한다. 뒷 세대 번역가들은 점점 한문을 모국어처럼 읽기 힘들다고 한다. 한문을 모국어처럼 읽을 수 있는 세대가 모두 돌아가시면 영영 물어볼 곳도 없어지는 셈이다. 민추는 고전번역원에 발전적으로 흡수되려는 어려운 결단을 내렸다. 이네들의 노고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열악한 처우를 조속히 개선하고 고전 국역에 가속도를 붙일 필요가 있다. “빨리 빨리”는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거다.


070329
신라 제42대 흥덕왕이 후사 없이 붕어하자 사촌 동생인 김균정과 오촌 조카인 김제륭은 왕위를 놓고 다툰다. 균정이 전사하자 그의 아들 김우징은 김양 등과 더불어 청해진으로 도망가 장보고에게 의탁한다. 제륭을 도와 왕(희강왕)으로 옹립한 김명은 이홍, 배훤백 등과 함께 다시 난을 일으켜 스스로 왕(민애왕)이 된다. 때를 노리던 김우징 일파는 장보고의 힘을 빌어 민애왕을 공격한다. 민애왕이 병사들에게 시해되고 승리를 거두자 김양은 그 옛날 균정과 제륭의 전투 때 자신의 다리를 쏘아 맞혔던 배훤백을 부른다.

<삼국사기> 김양 열전에는 김양이 배훤백에게 “개는 제각기 주인 아닌 사람에게 짓는 법이다. 너는 너의 주인을 위해 나를 쏘았으니 의사(義士)다. 내가 원망하지 않을 것이니 너는 안심하고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삼국지>에도 보인다. 조조가 원소에게 대승을 거두고 성을 접수하자 조조의 신하들이 원소와 내통한 문서들이 많이 발견되었다. 조조는 “원소가 한창 강성하였을 때는 나 스스로도 생존할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했소. 하물며 다른 사람들이야 오죽했겠는가?”라며 서신들을 불태우게 했다.

김양과 조조의 행동이 승자의 여유라고 폄하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고사가 애틋하게 다가오는 까닭은 이런 도량은커녕 악어의 눈물조차 흘릴 줄 모르는 승자들이 너무 많다는 못마땅함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070330
<‘인생은 무의미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라는 말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물음에 대한 답글>

중국 북송(北宋)의 유학자 주돈이의 <태극도설>은 우주의 생성과 인간의 근원을 논한 글이라고 해. 성리학의 입문서라는 <근사록>이나 퇴계 선생의 <성학십도>의 첫 머리는 태극도설에서 시작하니 세계를 인식하는 데 중요한 길잡이로 삼은 텍스트지. 그런데 “무극이 곧 태극(無極而太極)”이라는 구절의 해석을 놓고 서로 다른 주장이 펼쳐지고 있어. 무극으로부터 태극이 나온다고 해석해 무에서 유가 생긴다는 뜻으로 보는 도가적 해석이 있고, 무극과 태극을 한 실재의 두 가지 방면으로 보아 인식을 초월했다는 점에서 무극이라 이름 짓지만 태극은 실재한다는 주자의 해석으로 갈리고 있어.

물론 나도 이게 뭔 소리인지 잘 모르겠다. 고등학교 윤리 시간에 잠깐 맛보는 이기론(理氣論)도 여기서 출발하는 것이니 손쉽게 이해하려는 건 과욕인지도 모르겠어. 아무튼 무에서 유가 나왔다는 주장과 무와 유가 한 실재의 다른 모습이라는 주장 가운데 무엇이 더 설득력 있는지 잘 모르겠어. 어쩌면 어느 하나를 믿어버리면 그만이라는 생각도 들고.^^; 여하간 인생의 본질이 무의미한가라는 질문도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듯싶다. 인류의 운명이 특수한 역사적 법칙이나 진화적 법칙에 의해 필연적으로 전개된다는 역사결정론인 역사주의를 어떻게 받아들이는 가도 결부시켜 생각해볼 수 있겠지.

한 인간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다고, 보다 정확히 말해 부여된 사명이나 해야 할 임무 같은 게 있을까를 섣불리 말하기는 어려운 문제다. 이건 인간 본성이 선하냐 악하냐 묻는 것만큼 인간의 인식능력을 벗어나는 영역일 공산이 크니까. 나처럼 인생은 한 번 뿐이라고 믿는 사람은 어떤 거창한 대의명분의 병졸로서 내 삶이 소비되는 것도 원치 않고, 그렇다고 아무런 의미 없이 태어났으니 엉성하게 살다가 가는 것도 바라지 않아. “인간다움”에 대한 개념 정의는 저마다 다르겠지만 최소주의로 합의한 인간성을 고양하는 게 내 삶의 부가가치라고 믿고 있어. 그것은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인생은 한 번 뿐이고, 인간은 앞으로도 불완전하다는 가정 위에 내린 결론이지.

여전히 추상적이기는 하지만 나는 “남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不忍人之心)”이 확산되는데 미력이나마 보태고 싶어. 좀 더 구체적으로는 사회, 경제, 문화적 독점을 해체하는 것을 탐구하고 있고. 이러한 고심들이 내 삶이 너무 덧없고 맥없게 끝나지 않는 의지가지가 되어줬으면 좋겠어. 나는 이처럼 인생의 의미 유무보다는 무의미한 삶을 사는 개인을 줄이는 일에 더 관심이 간단다. 이 정도의 의미나마 부여하지 않는다면 세속에 살기가 너무 팍팍하지 않을까? 이 의미를 구현하기 위해서라도 대충 살지 말아야 하는데 노는 걸 너무 좋아해서 큰일이야.^^;


070331
97학번부터 07학번이 만나는 뜻깊은 자리에 미력이나 보탤 수 있고, 함께 즐길 수 있어서 영광이었다. 난 행사장 입구에서 06, 07학번을 대상으로 후래자 삼배(後來者 三盃)를 실시했다. 말 그대로 늦게 온 벌로 석 잔을 마시는 걸 뜻한다. 경주 안압지에서 발굴된 14면체 주사위에도 ‘연거푸 술 세 잔 마시기(三盞一去)’가 있기도 하다. 어려운 걸음 해주시는 선배님들보다 미리 와서 자리를 채워주길 바라는 마음에 악역을 자처했다.

나는 행사장에 비치된 방명록에다 도덕경 58장의 광이불요(光而不耀)를 눌러 썼다. 다양한 풀이가 있을 수 있지만 “빛나되 눈부시지 않기를”이라는 해석이 가장 마음에 든다. 우리의 빛남이 서로의 빛남을 간직하며 밤하늘의 별처럼 따로 또 같이 광휘를 뿜어내기를 바란다. 이 귀중한 자리의 실마리를 제공해주신 재현형님, 인호형님 고맙습니다. 2차까지 함께 해주신 영빈형님과 주원형님께도 감사 인사 드려야겠다.


070401
꿈결같은 밤이 지나갔다. 시인 최영미님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의 시구가 떠올랐다. 한바탕 잔치가 끝난 뒤의 허무감이 잘 묻어나는 대목이라서 잘 어울리는 듯싶다. 물론 이 시는 그런 용도(?)로만 인용되기에는 더 묵직한 시다. 마치 오늘날의 386세대에게 쏟아지는 환멸을 예견이나 하듯이 담담하게 투덜거리는 이 시를 얼마나 되뇌었는지 모르겠다.

Posted by 익구
:

댓글을 달아주세요!

공지 2007. 3. 29. 12:00 |

익구닷컴은 본래 고독함을 작정한 공간입니다. 문자 텍스트로만 꾸려나가는 무미건조하고 재미없는 공간이죠. 제 둘레에 개인 홈페이지를 꾸리던 분들이 거의 다 그만 두셨지만 그간 어찌어찌 버텨 왔습니다. 2003년 7월에 익구닷컴을 개설한지 어느덧 네 해가 다 되어 가네요.


미뤄둔 공부가 너무 쌓이다 못해 이제는 포기하고 넘어갈 것들마저 쌓이고 있습니다. 익구닷컴 운영에 들이는 시간이 더 줄어들 거 같아서 차라리 문을 닫는 게 어떨까라는 고심도 해봅니다. 머잖아 익구닷컴 문을 잠시나마 닫게 되는 날이 오기 전에 손님들의 옥음(玉音)을 담아두지 않으면 아쉬울 거 같습니다.


지인들께서 오며가며 들렀다는 말씀은 종종 해주시는데 당최 어떤 분들이 제 누추한 홈페이지를 들러주시는지 모르겠어요. 눈팅할 것도 별로 없는 이 공간에 방명록이나 댓글을 다는 행위가 얼마나 번거로운 일인지 너무나 잘 알지만 그래도 꼭 한 번 해보고 싶었습니다.


이 글에다가 댓글을 좀 달아주세요.
“안녕”, “나 왔다 간다”고 짧게 쓰셔도 좋아요.
“넌 이걸 좀 고쳐야 돼” 같은 말씀도 좋고요.
꼭 한 번 만나고 싶습니다.
당신의 소중한 흔적을...^-^

Posted by 익구
:

열대과일음료의 추억

경제 2007. 3. 29. 07:30 |

2004년 5월 마케팅원론 시간에 했던 질문과 그에 대한 답변이다. 역시 질문도 명료하게 하지 못하고 내 하고 싶은 이야기만 잔뜩 늘어놓았다. 무능한 경영학도의 비애다.^^;




<5월 18일 델몬트 망고 질문입니다^^>

안녕하세요. 델몬트 망고 발표 즐겁게 잘 들었습니다.
저는 망고뿐만 아니라 포시즌과 구아바까지 다 마셔봤는데 저마다의 개성들이 있고 다들 상큼한 열대과즙을 느낄 수 있어서 즐겨 마시고 있습니다.^^


올해 열대과일음료 시장이 전체 주스 시장 예상 규모인 1조원 중에서 2000억원 정도 차지할 것이라고 하니 열대과일음료의 인기를 실감하게 됩니다. 여담이지만, 비락 식혜가 작년 9월 발매 10년을 맞았을 때 10억캔을 팔았다는 뉴스를 접한 적이 있었는데, 망고 주스의 경우 발매 11개월만에 2억 4000만캔이 팔렸다는 뉴스를 접하고 과히 망고 열풍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식혜 제품이 등장했을 때도 당시 음료시장의 수위를 달리던 사과주스의 매출액이 감소한 것으로 아는데... 망고 주스의 등장도 몇 년 전의 식혜 돌풍처럼 대단한 인기를 끌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다만 이 인기를 어떻게 유지하느냐가 관건이겠지만요.^^


보아하니 롯데칠성에서는 열대과일음료 신제품을 통해 비슷한 제품군을 통한 시너지 효과를 누리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발표하신 내용대로 웰빙 열풍으로 탄산음료를 기피하는 소비자들을 열대과즙으로 공략할 계획인 것 같습니다.


발표 시간에 망고 주스의 경우 생산공정이 일반 음료와 달라 상대적으로 높은 생산단가를 보이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와 더불어 질의 응답시간에도 망고 수급에 대한 우려가 제기된 것으로 기억합니다. 저 또한 비슷한 염려가 드는 것이 만약에 롯데칠성이 앞으로도 열대과일음료 제품군으로 재미를 보고자 기획하고 있다면, 아마도 상당량의 원료를 외국으로부터 수입해야 할 것입니다(말 그대로 열대과일이니까요^^;). 그렇다면 공급자의 교섭력이라는 측면에서 걱정이 되기도 하는데요. 열대과일음료 원료 수급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대책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배나 사과 같은 경우는 국내산도 많으니 논외로 하고, 가령 오렌지 같은 경우에는 미국과 브라질에서 양질의 오렌지가 원체 많이 공급되고 있고, 수입 농산물 등으로 대체재가 풍부해질 것으로 예상되어 공급자의 교섭력이 낮다고 손쉽게 말할 수 있지만 열대과일의 경우에는 조금 다를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 때문에 그렇습니다. 실은 제가 좋아하는 열대과일음료를 원하는 때에 언제든 손에 쥘 수 있을 수 있을까라는 쓸데 없는 걱정의 산물이기도 하고요.^^; 제 걱정을 좀 덜어주셨으면 합니다. 고맙습니다.^^

<질문에 대한 답변입니다^^> - 나호님

우선 미흡하기 그지없었던 저희 발표를 즐겁게 들으셨다니 쑥쓰럽고 황송하군요^^;;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말씀하신대로 망고 주스는 그 원료를 전량 수입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얼마나 원활히 원료를 수급하느냐가 제품의 성패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것입니다.


우선 제품을 런칭한 시기, 그러니까 작년 초까지는 망고의 수급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우선 망고의 주요 생산국중의 하나인 필리핀에서 농축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원활히 수입할 수가 있었고 롯데칠성 음료측에서 예측한 '델몬트 망고'의 2003년 예상 판매액 100억원어치를 생산할 수 있는 양의 원료는 충분이 확보가 되어있었기 때문이죠.


문제는 델몬트 망고가 업계의 예상보다 너무 많이 팔렸기 때문에 발생했습니다. 업계는 작년 한해 망고 시장이 1500억원에 달했기 때문에 필리핀에서 수입하는 농축액의 양으로는 수요를 따라가기에 부족해지는 상황에 직면합니다. 그나마 롯데 칠성은 선발주자였고, 또한 선도업체였기 때문에 질좋은 필리핀산 망고 농축액을 독차지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사정이 괜찮았지만 후발 주자들은 원료를 구하지 못해서 수입선을 이스라엘, 인도, 콜롬비아로 돌리는 방안을 추진중에 있습니다. 아마도 이같은 사정은 선도업체인 롯데칠성도 마찬가지겠죠.


그러나 업계의 전문가들은 망고음료시장이 올해를 기점으로 하향곡선을 그릴것으로 예상하고 있기 때문에, 추가적인 수급대책을 내놓는 것은 아직 시기상조라고 생각합니다.


부족하나마 답변이 되셨는지 모르겠네요. 관심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


<나의 댓글>
와우 그렇군요. 앞으로도 열대과일음료를 마음껏 즐길 수 있겠네요. 답변 고맙습니다.^^



아쉽게도 답변자의 말씀대로 열대과일음료 열풍은 사그라졌고 한때 좋아하던 나도 시들해졌다. 마실거리에 관심이 많은 나는 앞으로도 이 분야에 눈길을 계속 건넬 듯싶다. 그나저나 조만간 학교로 돌아가면 유종의 미를 거둬봐야겠다.^^;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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