俗人昭昭 我獨昏昏 세상 사람 모두 똑똑한데 나 홀로 어수룩하고,
俗人察察 我獨悶悶 세상 사람 모두 살피고 따지는데 나 홀로 답답합니다.
澹兮其若海 담담하구나, 마치 바다와 같이.
飂兮若無止 몰아치는구나, 마치 멈출 곳이 없는 듯이.
衆人皆有以 뭇사람들은 모두 쓸모가 있는데
而我獨頑似鄙 나 홀로 고집스럽고 촌스럽게 보입니다.


『도덕경』 20장의 일부다. 내게는 여러모로 각별한 구절이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으로 온라인 필명(혹은 별명)을 만들어 썼을 때 아독혼민(我獨昏悶)이라고 지은 것도 여기서 따온 것이다(2003년 말 이래로 ‘새우범생’이라는 별칭을 쓴다). 고요히 흐르는 모양을 묘사한 담혜(澹兮)는 내가 스스로 지은 생애 최초의 호(號)이기도 했다. 『도덕경』이 본래 어려운 텍스트이기는 하지만 20장의 이 구절은 복잡한 내용이 아니다. 그래서 어린 시절부터 즐겨 읽었던 모양이다. 오강남 선생님은 노자의 실존적 고독이 묻어나는 대목이라고 해석했다.


노자도 여기서 자기의 이런 심정을 이야기하고 있다. 세상 사람 모두 희희 낙락하고, 똑똑하고, 영리하고, 분명하고, 여유 있고, 쓸모 있고, 목적 의식이 투철하고 희망으로 가득한 것 같은데 자기 혼자 멍청한 것 같고, 맹맹한 것 같고, 촌스럽고, 답답하고 미욱하게 보이고, 빈털터리 같고, 정처없이 떠다니는 것 같고……. 하면서 자기의 ‘홀로임’을 슬픈 어조로, 그러나 담담하게 읊고 있다.
- 오강남 풀이, 『도덕경』, 현암사, 1995, 97쪽


왕필은 “무엇을 바라고 하고자 하는 바가 없으므로 어둡고 멍청한 것이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다. 그러므로 우둔하고 또 고루하다고 했다”라고 주석을 달았다. 하상공은 “뭇사람들은 유위하는데 나 홀로 무위하여 세상의 일반적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것 같다”라고 풀었다. 대체로 억지로 하려는 일이 없이 순리대로 살다보니 세속적 기준과 동떨어진 것처럼 보인다고 생각한다. 노자는 남들과 ‘다른 삶’을 살았기 때문에 고독했다. 나는 평균적인 삶을 사는 분에게서 배우듯이 평균적인 삶을 살지 않은 분들에게서 배워야 한다.


노자는 초월적 발상을 통해 세상의 이분법을 극복하려 한다. 김진석 선생님은 ‘초월’에 대응되는 개념으로 ‘포월(匍越)’을 제시했다. 현실의 경험과 인식을 훌쩍 뛰어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둘레의 현실을 부둥켜안고 기어서 넘어가자는 말씀이다. 여하간 ‘포월’하며 ‘다른 삶’을 살고 싶다. ‘다른 삶’에 대한 열망 역시 또 하나의 목적이 되어 내 자신을 수단으로 만드는 것은 아닐까? ‘다른 삶’에 대한 과시는 또 하나의 지적 허영심이 아닐까? ‘다른 삶’을 꾀하는 것이 결국은 세속적 기준에 맞추려는 정성을 회피하는 면죄부는 아닐까? - [無棄]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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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모없음의 쓸모 있음

공지 2008. 7. 16. 03: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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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 주신 분: 정승현 님)



서른두 살. 가진 것도 없고, 이룬 것도 없다. 나를 죽도록 사랑하는 사람도 없고, 내가 죽도록 사랑하는 사람도 없다. 우울한 자유일까, 자유로운 우울일까. 나,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무엇이든?
- 정이현, 『달콤한 나의 도시』, 문학과지성사, 2006


이 구절을 읽고는 크게 안도했습니다. ‘나는 고작 스물 여섯밖에 되지 않았으니 이 얼마나 감사하고 황송한 일인가!’ 하고 말입니다. 저의 대책 없는 낙관주의는 이런 식으로 곧잘 악용됩니다.^^; 저는 아직도 제가 가야만 하는 길이 있다고 확신을 품지 못하고 있습니다. 서성거리다 좀 더 발걸음이 옮겨지는 곳이 있다면 그것을 제 길로 삼겠다는 생각이 마냥 나쁜 것은 아니겠지요. 모든 가능성이 열려있다고 호기롭게 말하고 다녔지만 사실 발설하는 순간 순간마다 가능성의 문은 하나씩 닫히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솔직히 요즘은 주눅이 듭니다.


늘 모자라다고 투정부렸지만 실상 제 깜냥에 견주어 많은 것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준 것보다 받은 것이 많았고, 일러준 것보다 본받은 것이 많았습니다. 그런 까닭인지는 몰라도 호구지책일랑 얼렁뚱땅 마련하고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취미생활을 영위해보자는 식으로 오만하고 나태하게 생활해 왔습니다. 천직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의 소명감은 가져야할 진로 탐색을 호구지책이라고 비아냥거린 것부터 잘못이겠죠. 이런 자세로 살벌한 밥벌이 경쟁에 뛰어든 것부터가 글러먹은 사고방식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무슨 고고한 분위기를 풍기며 세속적 기준을 보아란 듯이 비웃는 것도 아니지만요. 결국 따라가기 위해 뒤늦게나마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이룬 것이 없다고 느껴지고, 가진 것도 없다고 느껴질 때 지난날을 살뜰하게 보내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밀려옵니다. 죽어라 공부 안 하던 토익시험을 부랴부랴 준비하며 문득 예전에 펑펑 놀 때 미리 해뒀으면 편하지 않았겠냐는 구박을 해봅니다. 인턴 한 번 못해보고 졸업을 하려니 뒤통수가 서늘하네요. 남들 다 다녀온다는 교환학생이나 어학연수에도 한 톨의 관심을 두지 않고 이 땅을 살아왔다니 제 자신이 경이롭기까지 합니다. 그 무엇보다도 열심히 사는 제 둘레의 후배들을 보며 후생가외라고 넉넉하게 생각하기에는 제 자신이 너무 초라하고 부끄럽습니다.


게으른 천성을 단박에 바꿀 수 없다고 친다면, 적어도 자유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말랑말랑함이나마 제게 있었다면 이렇게 민망하지 않았겠지요. 좋은 책을 읽거나 훌륭한 강의를 듣다 보면 제 자신은 그저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선 난쟁이라는 절망감이 엄습하기 일쑤입니다. 눈을 지그시 감고 제 머리로 사색하기보다는 어느 어깨가 더 탐스러운지 물색하느라 눈알을 바지런히 굴렸던 것 같습니다. 그저 거인의 쩍 벌어진 어깨 위에 올라서 호가호위하는 재미에 빠져 있었던 것은 아닌지 반성해 봅니다.


혜자가 장자에게 말씀했다. "자네의 말은 쓸모가 없네."
장자가 말씀했다. "쓸모없음을 알아야 비로소 쓸모 있음을 말할 수 있는 법이네. 대저 땅은 넓고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지만 사람에게 쓸모 있는 땅은 발이 닿고 있는 부분뿐이라네. 그렇다고 발이 닿는 부분만 남겨놓고 그 둘레를 황천에 이르기까지 파서 없앤다면 그래도 (발이 닿고 있는 땅이) 쓸모 있는 것일 수 있겠는가?"
혜자가 말씀했다. "쓸모없다고 하겠지"
장자가 말씀했다. "그러므로 쓸모없는 것도 쓸모 있는 것이 분명하다네."


惠子謂莊子曰 子言无用.
莊子曰 知无用而始可與言用矣. 夫地非不廣且大也 人之所用容足耳. 然則廁足而墊之 致黃泉 人尙有用乎?
惠子曰 无用.
莊子曰 然則無用之爲用也 亦明矣.
- 『莊子』 外物篇


갑갑한 마음에 한 줄기 위안이 되는 말씀입니다. 장자는 지극히 무용해 보이는 것조차 유용함을 뒷받침하고 있다고 역설합니다. 제가 이상이랍시고 내뱉었던 배부른 소리들이나 늘어놓을 때나 청춘은 동나게 마련이라며 흥청거리며 노닥대던 기억들 모두가 저를 채워왔던 쓸모없던 일들이었습니다. 제가 발을 좀 더 내딛을 수 있도록 넓혀둔 터전이라고 믿습니다. 문득 제가 딛고 있는 자리들, 배웠던 것들, 읽었던 책들, 투덜거렸던 생각들, 가슴 뛰던 느낌들이 하염없이 쓸모없어 보이는 순간에도 앓는 소리하지 않겠습니다. 그 쓸모없어 보이는 것들이 저란 녀석을 여기까지 끌고 와줬네요. 저 같이 하찮은 인간을 지탱하는데도 이렇게 많은 것들이 들어가다니 두렵기도 합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지인 여러분, 그리고 기막힌 인연으로 이 공간을 들러주신 손님 여러분! 7월 15일은 익구닷컴 개장 5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이 누추한 공간이 늘 쓸모없다고 볼멘 소리를 하면서도 제 소중한 일부분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자축하기보다는 지난 5년 간 제가 벌였던 쓸데없는 일들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겠습니다. 지인 여러분들께 저는 쓸모없는 녀석이었지만 그래도 가끔은 쓸모가 있지 않을까, 혹은 쓸모없음 자체로나마 뭔가 보탬이 되지 않을까 넉살좋게 생각해 봅니다. 아무쪼록 좀 더 쓸모 있는 사람이 되도록 애쓰겠습니다.


잠시 이 자리를 비울게요. 어차피 부실한 업데이트를 하나마나 이기는 합니다만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이 도리일 것 같아서요. 엄청 비장해 보이지만 선선한 가을 무렵에는 돌아오겠죠 뭐.^^; 내내 치열하시고 재미나시길 축원합니다. 고맙습니다. - [無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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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구닷컴 최신 배너입니다. 예전만큼 홍보를 안 해서 잘 안 쓰고 있지만요.^^;
(만들어 주신 분: 영록형님)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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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화가 밀레는 “남을 감동시키려면 먼저 자신이 감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옛것에 젖어들 만큼 감격하고 있는가, 아니 제대로 알고는 있는가? 딱히 돈이 안 되어 보이는 문화유산에 대한 시민들의 무심함이 아슬아슬하다. 지난 5월 20일 서울시는 새청사 기공식을 열었다. 당초에 서울시는 초고층의 건물 설계안을 내놓았는데 문화재위원회는 덕수궁과 조화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심의를 퇴짜 놓았다. 여러 차례 건축 심의를 거친 끝에 서울시는 한옥의 처마를 형상화한 디자인을 확정했다. 서울시 새청사 논란을 놓고 일부 시민들은 덕수궁이 거치적거린다고 여기며 쌀쌀맞은 시선을 건넸다. 그저 도심의 공원에 지나지 않는 덕수궁이 서울의 랜드마크를 만들겠다는 대의명분(?)의 발목을 잡는 것이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덕수궁은 빤히 보이기라도 하니까 그나마 나은 편이다. 공사 지연이 두려워 쉬쉬하고 넘어간 매장문화재는 오늘날 전혀 없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아파트 재건축 조합원들이 난입해 풍납토성 경당지구를 훼손한 치욕이 불과 2000년의 일이었다. 철원군에서 태조 왕건의 사택지로 추정되는 철원군의 구 철원향교터에 대한 발굴작업이 예산 부족 등으로 연기되었다가 올해 들어 2년 만에 재추진되었다. 가까스로 확보한 예산 2억 원은 숭례문 복원을 위한 추정예산의 100분 1 수준이다. 딱히 경제적 가치가 없어 보이는 문화유산에 대한 시민들의 무심함은 국가 지정문화재에 대한 과도한 관심으로 모아져 아슬아슬하다. 거식증보다는 편식이 낫다고 위안을 삼아보지만 말이다. 궁궐의 속살을 더듬으며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자꾸만 늘어가는 세상에 맞설 재기 발랄한 언어를 궁리해본다.


덕수궁의 이름을 바꿔야 한다는 주장을 여기저기서 많이 접했다. 덕수궁은 1907년 황제의 지위에서 물러난 고종에게 붙인 궁호일 따름이라는 이야기다. 덕수궁은 상왕이 머무는 궁궐로서 임금의 장수를 기원하는 일반적인 의미를 가진 이름이지 궁궐 고유의 명칭은 아니라는 견해에다가 덕수궁 탄생 배경이 고종의 강제 퇴위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역사적 배경이 맞물린다. 고종은 물러나서 장수를 즐기기보다는 구질구질한 옥좌를 좀 더 지키고 했으리라. 사실상 경운궁에 억류되었던 고종 입장에서는 덕수궁이라는 궁호가 마뜩잖았을 공산이 크다. 덕수궁의 옛 이름인 경운(慶運)을 ‘경사스러운 일이 옮겨오다’로 풀이해보니 그 뜻이 절묘하다. 국운이 기울던 조선 말기에 경운궁을 드나들던 이들은 운수가 움직여서 중흥하길 바랐을 것만 같다.


1895년 을미사변 겪은 후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독살을 염려해 통조림으로 요기를 한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한 나라의 왕이 다른 나라 공사관으로 피신한 아관파천이 벌어질 정도로 일본의 폭력은 혹심했다. 일본의 간섭을 피하기 위한 외교적인 몸부림으로 열강의 공사관 밀집한 곳에 경운궁을 중건했다. 조선의 독자적인 관영 공사체제로 조영된 마지막 궁궐인 덕수궁은 원래 규모의 3분의 1도 남아있지 않다고 한다. 본래 궁궐터가 아니었던지라 배치가 뒤숭숭한데 군데군데 휑한 공간이 펼쳐지니 스산하다. 대한문을 들어가서 거닐게 되는 금천교는 조악하여 예의 은근한 맛을 잃었지만 말기의 작품에 서린 처연함이 다리의 못남을 가려주고 있다. 맹자는 “나라는 반드시 스스로 정벌한 뒤에 남이 그 나라를 정벌한다(國必自伐而後人伐之)”라고 역설했다. 자책하는 다리로 삼아 살뜰하게 반성해봄직 하다.


중화문이 옹글게 서있으나 문의 기능을 다하지 못한지 오래다. 답사객들의 태반은 문으로 입장하지 않고 툭 터진 조정(朝廷)으로 자유로이 드나든다. 본래 중화문 좌우에는 행각이 늘어서 있었으나 일제가 헐어내 위용을 잃었다. 문 오른쪽에 ‘ㄱ’자 모양으로 약간 남아있는 것이 전부다. 그곳은 의자가 놓여있어 쉬어가게 해놨는데 도무지 맘 편히 쉴 수 없는 회한의 장소다. 보르헤스의 소설 <원형의 폐허들>에 나오는 도인은 꿈을 통해 완벽한 인간을 창조하려고 한다. 도인은 오래 전에 불타버리고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 이제는 누구도 그 사원의 신을 숭배하지 않는 폐허를 꿈꾸기에 안성맞춤으로 여겼다. 한바탕 덜어내고 난 곳에서 채울 것이 있기 때문이리라. 비참하게 잘려나간 중화문 행각에 걸터앉아 희망을 노래하자. 배부른 소리 좀 늘어놓고 보면 어느새 넉넉해진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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꼼꼼히 보면 어도(御道)와 그 주변 부분에 깔린 박석이 다른 재질임을 알 수 있다. 일제가 중화전 뜰의 박석을 걷어내고 잔디를 심었던 것을 최근에 뽑았기 때문이다.



중화전은 중화문과 더불어 보물 제819호로 지정되어 있다. 문화재청이 국보와 보물의 일련번호 체계를 없앤다는 소식이 들린다. 등수 매기기 식의 서열화가 사라지는 계기가 될 듯싶어 기껍다. 이 땅을 살았던 사람들의 숨결에 귀천을 나누는 건 서글프지만 차이는 숙명적이고, 차이는 자연스럽게 차별을 낳는다. 지정문화재 제도는 국가적 관리의 우선순위를 확립함으로써 후손에게 좀 더 잘 물려줄 목록을 작성한다. 문화유산을 두고 벌어지는 국가적 차별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반면에 개인적 차별은 오히려 권장할 일이다. 보다 궁극적으로는 개인적 편애는 넓혀나가고 국가적 편애는 좁혀나가야 한다. 숭례문의 참화는 국가적 편애를 제대로 못했음을 방증하고 있으며, 개인적 편애를 희석시키는 부정적 효과를 낳았다. 애이불상(哀而不傷)하고 남은 힘으로 문화유산 사랑이 관념화되고 당위적인 구호가 되는 것을 경계하자.


문화유산을 완상하는 저마다의 감상만큼은 세간의 평가라든가 경제적 가치 따위로 재는 걸 그쳤으면 좋겠다. 가슴을 흔들고 푸근한 미소를 짓게 만드는 저마다의 문화유산을 찾아보자. 나는 조선 최후의 궁궐 정전, 막둥이 중화전을 편애한다. 경복궁 근정전, 창덕궁 인정전, 창경궁 명정전이 죄다 국보이지만 그네들의 우아함 못지 않은 기품이 중화전에 있다. 중화전은 창건 당시에는 중층이었으나 1904년 화재로 소실된 후 1906년에 중건되면서 재정난 때문에 단층으로 지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황제국의 정전으로서 단층은 멋쩍었는지 지붕을 크게 올렸다고 하는데 그 궁여지책마저 살갑다. 고운 금빛으로 기운차게 쓰인 중화전 편액을 보는 맛이 쏠쏠하다. 치우침, 기울어짐, 지나침, 미치지 못함도 없으며 늘 떳떳하고 변치 않는 상태를 중화(中和)라고 한다면 얼마나 버리고 비워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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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용』에서는 희로애락이 발현하지 않는 것을 中이라 하고, 발현해서 모두 절도에 맞는 것을 和라고 풀이하고 있다.



중화전 답도에는 궁궐 정전 가운데 유일하게 봉황이 아닌 용이 새겨져 있다. 제국의 격식을 드높이기 위해 애를 썼던 게다. 용을 새긴 답도는 중화전과 원구단에서만 볼 수 있는데 만세 대신 천세를 외쳤던 조선에서는 파격이었나 보다. 중화전 천장에는 살진 황룡이 노닐고 있을 뿐만 아니라 유현문 안쪽에도 용이 그려져 있고 수막새에서도 용이 노닌다. 조지훈 선생은 <봉황수>에서 용 대신 봉황을 틀어 올린 조국을 안쓰러워했지만 막상 쌍룡을 만났는데 오히려 가슴이 먹먹해졌다. 용이 가리키는 바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창덕궁 인정전과 함께 황제를 뜻하는 황색 창호를 쓰다듬다가 고종을 떠올렸다. 고종황제와 대한제국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고종황제 역사청문회』라는 책에서 벌어진 치열한 논쟁에서 엿보이듯이 그 시절의 빛과 그림자를 헤집는 노력은 고통스러운 작업이다. 고종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는 것은 반가운 일이지만 그가 실패한 군주였음은 또렷하다.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해 자주독립을 천명했지만 그에게는 자주와 자강을 도모할 혜안이 없었다. 동학농민전쟁 때 고종이 청군과 일본군을 끌어들여 지키고자 했던 것은 왕권이지 국권이 아니었듯이 그는 제국민을 위한 제국이었다기보다 황제를 받들기 위한 제국을 원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면 백성의 입장에서 볼 때 대한제국의 실정은 일제의 침략에 견주어 얼마나 나았겠냐는 투덜거림에 귀가 솔깃하다. 그럼에도 무능한 임금과 제국주의 침략세력과의 차이가 잗다랗다고 말하기에는 찜찜하다. 더 나아가 아예 일제의 통치 결과를 두둔하는 일각의 주장에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일제의 폭압적 통치는 눈감은 채 통계적 수치를 통해 식민통치의 경제적 효용을 따지려는 시도는 논리적으로 무모할뿐더러 윤리적으로도 박절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식민통치로 이룩한 경제발전이 그다지 자랑스럽지 않다. 개개인의 자유를 몇몇 통계수치로 가늠할 수 있을지 회의적이기도 하거니와 설령 가늠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훼손된 자유에 대한 비용 처리가 너무 인색하다.


일제 강점기와 광복을 거치면서 왕정 복고를 바라는 민중이 거의 없었던 시대 상황을 반추할 때 황실에 대한 평가가 어느 정도 투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미운 정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한 때 자신들의 임금을 위해 눈물을 흘렸던 당시의 백성들의 존재 또한 분명하다. 요즘은 너도나도 촌스럽다고 손가락질하는 민족주의라든가 애국주의의 열정에 이끌렸던 그네들의 마음자리를 애틋하게 여긴다. 망국의 일차적 책임자들을 차마 미워하지 못함이 조선의 마음인지도 모른다. 1919년 고종의 갑작스런 승하와 독살설이 몰고 온 충격이 3·1 운동의 도화선이 되었음은 익히 알려져 있다. 전제군주의 죽음이 독립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해서 한국 역사상 최초의 민주공화제 정부를 잉태한 역사의 아이러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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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전의 소맷돌에는 돌짐승(瑞獸)을 장식했다. 앙증맞은 주먹코나 토실토실한 엉덩이를 살짝 쳐주고 싶다. 역경에 굴하지 않겠다는 듯 치켜든 얼굴이 익살스럽다.


화담 서경덕 선생이 한 젊은이를 만났다. 눈이 멀었다가 갑자기 앞이 보였는데 자기 집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개화의 파고 속에서 표류했던 대한제국을 추념하면서 과연 오늘의 우리는 슬기롭게 세계화의 너울을 넘고 있는지 묻는다. 화담 선생은 그 젊은이에게 눈을 감으라고 충고한다. 눈감은 젊은이가 예전처럼 지팡이를 짚어가며 집을 잘 찾아갔음은 물론이다. 이 고사를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나서 외부의 문물을 받아들이라는 뜻으로 해석한다. “다시 너의 눈을 감아라(還閉汝眼)”라는 일갈은 개안의 미덕에만 열중하던 내게 폐안의 가치를 품게 해준다. 자신의 잣대를 먼저 세워야 제 것으로 삼을 만한 것을 가려내는 안목이 길러지게 마련이다.


중화문은 황궁 법전의 정문으로서 격을 높이려고 했던지 기둥이 높아지고 처마가 길어졌다. 덕분에 문 사이로 중화전의 용마루까지 훤히 보이는데 그 곡선미가 아찔하다. 가로 부재인 창방의 직선과 대비되어 보는 맛을 돋운다. 포실한 전통의 토대 위에 특수성을 뽐내면서도 보편성을 잃지 않는 한국적 가치관을 모색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겠으나 이 용마루 선과 같은 우리의 멋은 얼마든지 있다. 움직임과 행동을 혼동하지 말라는 헤밍웨이의 말을 곱씹는다. 우리는 등 떠밀려서 움직이고 있는가? 자기가 선택한 걸음으로 행동하고 있는가? 우리는 앞길을 스스로 선택하고 있는가? 그저 식객에 지나지 않는가? 중화전은 내 자신이 주인이 되겠다는 매운 의지를 벼리는 곳이다. - [無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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子曰 富與貴 是人之所欲也 不以其道得之 不處也 貧與賤 是人之所惡也 不以其道得之 不去也
君子去仁 惡乎成名 君子無終食之間違仁 造次必於是 顚沛必於是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부유함과 귀함은 사람들이 바라는 바이지만 정당한 방법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면 누리지 않는다. 가난함과 천함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바이지만 정당한 방법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면 벗어나지 않는다.
군자가 인을 떠나면 어디에서 이름을 이루겠는가? 군자는 밥을 먹는 사이에도 인은 어김이 없으니 황급한 순간에도 반드시 인을 행하고, 곤경에 처한 순간에도 반드시 인을 행한다.”
- 『論語』 里仁편


貧與賤 是人之所惡也 不以其道得之 不去也 구절을 두고 해석이 갈린다. 크게 보면 두 가지 해석이 있는데 대강 정리해보면 아래와 같다.

 

1) 가난함과 천함 이것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이지만 정당한 방법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면(벗어날 수 없다면) 떠나지 않는다.

 

2) 가난함과 천함 이것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이지만 정당한 방법으로 얻은 것이 아닐지라도 애써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2)의 해석이 전통적인 해석이지만 선뜻 의미가 파악되지 않기 때문에 1)의 해석도 음미할 만하다. 박기봉 선생님에 따르면 오늘날 한국을 제외한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1)의 해석을 취하고 있다고 한다. 호기심이 생겨 도서관에서 논어 관련 주석서들을 이것저것 뒤적여봤다. 내가 이것저것 찾아본 번역들을 짜깁기하고 멋대로 편집한 것이라 드러내놓기 민망하지만 스쳐 가는 생각거리로 삼아주시길 바라며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이렇게 올린다.


전통적인 해석인 2)의 핵심 논거로 작용했던 주희는 정상적인 방법으로 얻은 빈천이 아니지만 억지로 그 상황을 벗어나지 않는다, 즉 빈천을 편안히 여기는 태도라고 풀이했다. 군자가 부귀를 자세히 살피고 빈천을 편안히 여김을 이와 같이 한다고 보았다. 하안(何晏)과 형병(邢昺)은 “운수가 막힐 때와 태평할 때가 있으니 군자가 도를 실천할지라도 도리어 빈천한 경우가 있다. 이는 도로써 얻은 것은 아니다. 비록 빈천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바이지만 억지로 벗어나려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時有否泰 故君子履道而反貧賤 此則不以其道而得之 雖是人之所惡 不可違而去之)”라고 했다. 조선 후기 성리학자 호산 박문호가 不以其道得之 앞에 雖(비록)의 뜻이 있다고 본 것도 이와 상통한다.


다시 말해 정당하게 주어진 빈천이 아닐지라도 애써 떠나려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자신은 착하고 어질게 살았는데 사회가 타락하고 정치가 어지러워서 군자가 빈천하게 되었다고 해도 구태여 그 빈천을 마다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부당한 빈천이라면 태연하게 안주하라, 안빈낙도(安貧樂道)하라고 충고하는 글귀가 된다. 맹자가 대장부를 설명하며 “가난하고 천하더라도 자기의 뜻을 옮기지 않는다(貧賤不能移)”라고 했던 구절을 비롯해서 유가의 경전에서 곧잘 접하게 되는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길을 의연하게 걸어나가는데 부귀나 빈천 따위의 외부적인 요소에 휘둘리지 말 것을 주문하고 있다.


이에 반해 정약용은 왕충(王充)과 견해를 같이 해 1)의 해석에 가깝게 풀이했다. “진실로 이와 같이 본다면 군자는 끝내 빈천을 버리는 날이 없을 것이다. 한번 빈천을 얻어 오직 이를 버리지 않는 것으로 법을 삼을 뿐, 도리인지 도리가 아닌지를 전혀 묻지 않는다면 어찌 군자다운 시중(時中)의 의(義)라고 할 수 있겠는가? 오직 그 정당한 도리로 얻지 않았기에 그것을 버리지 않았을 따름이다”라며 하안의 주석을 반박했다. 결국 이러한 논리로 “빈천은 비록 누구나 싫어하는 것이지만 정당한 방법으로 벗어나지 못하면 그것에서 떠나지 않는다”라고 했다.


즉 정약용의 관점은 2)와는 달리 정당한 방법으로 벗어날 수 없는 한 벗어나지 않는 것일 뿐 정당한 방법을 도모한다면 빈천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좀 더 의역하자면 부귀처럼 바라는 것일 때는 온당하게 머무를 만한 가를 살피고, 빈천처럼 싫어하는 것일 때는 마땅하게 벗어날 방도를 궁리하라는 뜻이 될 듯싶다. 不以其道得之의 得之에서 去가 생략된 것으로 보아 得去之로 해석했다. 得은 빈천에서 떠나는 방법을 얻는 것을 일컫는 셈이다. 양백준(楊佰峻)도 빈천은 사람들이 얻으려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得은 부적절하고 不以其道得之의 得之를 去之로 바꾸는 것이 맞다고 주장한다.


1)과 2)의 해석 모두 그 나름의 의미가 있기 때문에 딱히 이것이 맞다고 주장하기는 힘들다. 한문 번역에서 정답을 내놓으라고 투정부린다면 우스운 일이다. 한쪽은 인간다운 길을 찾는 과정에서 느닷없이 들이닥치는 빈천에 억울해 하지말고 가야할 길을 가라고 주문하고, 다른 쪽에서는 빈천을 벗어나는 게 능사가 아니라 어떻게 잘 극복하느냐를 염두에 두라고 다독인다. 사실 서로 강조하는 바가 살짝 다를 뿐 결국 지향하는 바는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조금 자세한 논어 번역서를 읽다 보면 이렇게 해석상 이견이 있는 구절이 적잖음을 발견하게 되어 당혹스러워진다. 전통적 주석과 별개의 견해가 오늘날 제시되기도 한다.


신영복 선생님은 빈천은 탈피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도로써 추구할 만한 가치가 될 수 있다고 역설한다. 적극적으로 빈천을 추구하는 삶도 존재할 수 있다고 본 셈이다. 요즘 회자되는 ‘간소한 삶’의 개념과 잇닿는다. 이렇게 보면 其道得之는 도로써 얻은 빈천이 되고 不以其道得之한 도로써 얻지 않은 빈천이 되어 떠나지 말고 책임을 져야한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전통적 해석은 정당하지 못한 빈천, 부당한 빈천을 자기 잘못에 기인한 것뿐만 아니라 불의한 세상 때문에 뜻하지 않게 손해를 본 것도 감내해야 한다(지나치게 신경 쓰지 말아야 한다)는 식으로 정의한다면, 신영복 선생님은 부당한 빈천은 자기 자신의 잘못으로 한정해서 본다는 차이가 있다. 


전통적 해석의 경우에 군자는 빈천은 외물(外物)이기 때문에 거기에 너무 마음을 쏟지 말고 도를 추구하라, 인을 행하라는 식의 가르침이라면 신 선생님은 부당한 빈천이 불합리한 사회구조나 어질지 못한 사람의 간계에 기인한 것이라기보다는 자기 자신이 인의에 벗어나는 행동을 저질러서 얻게 된 것으로 본 듯하다. 신 선생님도 반드시 이렇게 봐야 한다고 역설하시기보다는 이건 어떠냐고 제안하시는 정도인 것 같다. 이 부분도 놓치지 말고 생각해보자고 화두를 던져주신 것으로 읽었다.


이남호 선생님은 『보르헤스 만나러 가는 길』 서문에서 “내가 읽은 보르헤스 소설은 이미 보르헤스의 것이 아니고 나 자신이 쓴 소설이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이 선생님께서는 문학평론가이시기 때문에 엉뚱한 해석마저 힘있게 들린다. “미디어는 메시지”라는 유명한 명제를 좀 패러디 해 권위 또한 메시지라고 생각한다. 문학평론가라는 아우라를 접하고서 거기에 얽매이지 않기가 힘들다. 주자의 광휘에 맞서길 꺼렸던 조선의 유학자도 비슷한 심정이 아니었을까.


“문학작품의 의미는 텍스트 속에 있는 것도 아니고 저자의 의도 속에 있는 것도 아니고 독자의 해석 속에 있다”라는 이 선생님의 말씀은 한문 고전을 읽을 때는 얼마만큼 적용될지 고심스럽다. 문학은 오독이 창조적 독서의 일환일 수 있지만, 아니 오독이라는 것이 성립하는지가 의심스럽다. 한문 고전을 한국어로 번역해 읽을 때 오역 시비가 있다면 그것을 풍요로운 해석이라고 치켜세울 수 있는 것인지, 다른 성질의 문제인지 헛갈린다.

 

가령 『논어』는 孔子 한 사람의 저술이 아니고 그 책을 읽어온 모든 사람들의 공동저술이다. 『논어』에 새로운 주석을 단 사람은 『논어』를 새로 쓴 사람인 것이다. 그리하여 공자가 쓴 『논어』는 빈약한 내용의 책이었지만, 현재 내가 읽는 『논어』는 매우 풍부한 내용을 지닌 책이 되었다.


- 이남호, 『보르헤스 만나러 가는 길』, 민음사, 1995, 144쪽


내 얕은 『논어』 읽기는 발설자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한 것이 전부였던 것 같다. 과연 공자와 제자들은 무슨 생각으로 이런 말을 했을까, 그네들이 살던 시대 배경은 무엇이고 어떤 해법을 내놓고 있느냐는 식으로만 접근했다. 텍스트에는 실체적 진실이 있어야 하고 그것의 근처를 더듬는 것이 학생의 본분인 것으로 믿어왔다. 교조적 지위를 누렸던 주희의 해석과 다른 해석을 부러 찾으려는 노력까지 덧붙여서 말이다. 고전을 읽는다는 것은 과거의 발언록을 온전히 복원하는 것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거의 불가능하고 실익도 없다. 어쩌면 고전의 해석도 실체적 진실이 있다기보다는 결국 합의되고 구성되는 것인지 모른다.


용기를 내서 고전을 집어들고 있다보면 내 자신은 그저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선 난쟁이라는 절망감이 엄습하기 일쑤다. 눈을 지그시 감고 사색하기보다는 어느 어깨가 더 탐스러운지 물색하느라 눈알을 바지런히 굴렸던 것 같다. 그저 거인의 쩍 벌어진 어깨 위에 올라서 호가호위하는 것으로 만족하지는 않았나 스스로를 반성한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고 할 때 知新은 배운 것을 자신의 삶에서 재해석하고 다른 일에도 확장시켜 가는 과정이다. 이런 세세한 구절 풀이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얼마나 실천하느냐이다. - [無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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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학기를 마치면서 “배움은 미치지 못하는 듯이 하고, 이미 배운 것을 잃어버릴까 두려워한다(學如不及 猶恐失之)”라는 공자의 말씀을 실천할 것을 다짐했다. 미욱한 제자가 교수님의 강의에 보답하고픈 마음에 꺼내든 구절이다. 학기 내내 내 능력이 모자라 가르침을 따라가지 못할까 전전긍긍했지만 이제 학기를 마치며 그렇게 애태우며 배운 것을 너무 일찍 잊어먹지 않도록, 기왕이면 생활 속에서 구현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


정약용 선생은 猶恐失之를 『논어고금주』에서 嚮道而行 如有重寶在前 爲他人所先獲 此之謂惟恐失之라고 풀이하셨다. 기초한문을 수강한 학생으로서 용기를 내보자면 “도를 향해 가는데 마치 귀중한 보배가 앞에 있어 다른 사람이 먼저 얻어 가는 바를 두렵게 여기는 것이니, 이를 일러 惟恐失之라고 한다”라고 해석할 수 있을 듯싶다. 爲는 ‘생각하다’로 보았는데 여기서는 두렵게 여긴다, 조마조마하게 생각한다 정도로 의역을 하면 대강 이런 뜻이 나온다.


정리해보면 學如不及은 배울 때는 능력이 모자라 가르침을 따라가지 못할까 전전긍긍하며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 정도로 볼 수 있다. 猶恐失之의 경우 통설은 그렇게 애태우면서 배운 것을 잃어버리지 않게 잘 체화시키라는 뜻이다.  猶恐失之는 배운 것을 온축해내는 복습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 정이천 선생은 “오히려 잃을까 두려워하여 그대로 지나칠 수 없으니, 잠시 내일까지 기다리겠다고 말하는 것은 불가하다(猶恐失之 不得放過 才說姑待明日 更不可也)”라고 주석을 달았다.


반면에 정약용 선생처럼 읽는다면 견선여갈(見善如渴)과 비슷한 맥락에서 배움도 목마를 때 물을 본 듯이 한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하기야 착한 일도 그렇지만 배움이라는 것도 남에게 양보하기보다는 먼저 달려가야 할 것일 테니 말이다. 정약용 선생의 견해는 부지불식간에 놓치고 있는 진리가 없나 두려운 마음으로 살피고 혹여 숨겨진 가르침이 있거든 귀한 보석을 만난 듯 내달릴 수 있어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박세당 선생의 『사변록』에는 “학문을 할 때에는 부지런히 하되, 항상 부족한 것같이 하며, 오히려 잃어버릴까 두려워해야 하는데, 하물며 자기 스스로 힘쓰지 않으면 얻음이 있겠는가”라고 풀이하면서도 정이천의 주석을 인용하되 “이같이 하여도 오히려 얻지 못할까 근심한다(又云如此猶恐不獲)”라고 의역을 했다. 정이천이 내일로 미루지 말고 열심히 공부하라는 말을 얻지 못할 것을 염려하듯이 공부하라는 뜻으로 본 모양이다. 주희의 주석과는 사뭇 다른 뜻이라 “앞뒤 말이 조금 같지 않는 바가 있다(前後說 微有不同)”라며 의문을 표했다.


동양고전연구회에서 낸 『논어』 번역서에서는 猶恐失之에 대한 정약용 선생의 견해를 “이미 배운 것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선생님의 가르침을 놓칠까 걱정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뜻이 와 닿지 않는다. 선생님의 가르침을 놓칠까 걱정하는 것은 이미 學如不及에 내포되어 있는 개념 같기도 하거니와 앞서 언급한 정약용 선생의 비유에서 그런 내용이 선뜻 도출되지도 않는 듯싶다.


물론 여기서의 ‘가르침을 놓친다’는 의미를 學如不及에서는 강의 진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개인적인 문제로 보고 猶恐失之에서는 여러 학생들 가운데 쳐져서 체득하지 못한다라고 좀 나눠볼 소지는 있다. 그런데 스승의 가르침은 우수한 제자 몇 명이 독차지할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고 그런 식의 경쟁으로 묘사하는 건 어색하다. 역시나 내가 봤던 대로 진흙 속의 진주와 같은 깨우침을 잃지 않도록 노력해보자 뭐 이 정도가 아닐까 싶다.


여하간 學如不及 猶恐失之하는 제자가 되겠습니다.^-^ - [無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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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말미에 정이현의 『달콤한 나의 도시』에 대한 약간의 스포일러 있습니다. 드라마의 결말이 어떻게 날지 모르겠으나 혹시 미리 짐작하시게 만들 수 있으니 유념해주세요.


정이현의 동명소설을 드라마로 만든 SBS 드라마 <달콤한 나의 도시>의 주인공 오은수(최강희 분)는 양다리를 넘어 세다리에 가까운 행보를 보여주고 있다. 결혼 상대를 물색하려는 궁여지책일 수도 있겠다는데 생각이 미치니 마냥 낭만적이지만은 않다. 오늘날 연애 결혼이 일반화되면서 동반자적 관계, 일부일처제를 내면화한 부부가 늘고 있다. 한편으로는 이혼율도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정부는 충동적 이혼을 줄이겠다는 명분으로 2008년 들어 이혼 전에 일정 기간 동안 이혼을 다시 고려해 보는 기회를 부여하는 이혼숙려제도의 기간을 늘려 도입했다. 이는 미성년 자녀의 양육에 대해 합의하지 않은 경우 협의이혼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다. 성숙한 개인의 자기결정권과 행복추구권을 존중해야 한다는 비판이 적잖다. 이혼숙려제도는 개인적인 행복이나 독자적인 인격을 국가가 나서서 억압할 소지가 크다. 굳이 나라가 할 일을 찾자면 상대적으로 열악한 처지에 놓일 공산이 큰 이혼 여성이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방안을 모색해 봄직하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제2의 성』에서 결혼을 순수한 사랑의 산물로 보지 않는다. 결혼의 문제는 대개 제도상의 결함으로 말미암는다고 봤다. 남자에게 결혼은 생활양식이지만 여자에게는 운명이라고 주장하며 결혼이 여자의 경제주권을 확보하는 기능을 한다고 역설한다. 그는 결혼을 계기로 남녀 관계에서 여성의 수동화, 예속화가 더욱 강화되는 것을 염려했다. 또한 남편과 아이들의 굴레 안에서 자신의 자주성을 잃어버리고 권태에 시달리는 여성의 실태에 좀 더 주안점을 두었다. 그람시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극복하기 위해 여성의 독립성과 부부 사이의 상호의존성을 강조한다. 여성이 모성을 발현하는데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인 자기 영역을 마련해 자아실현을 할 수 있어야 진정한 가족이 된다고 봤다. 보부아르는 여성이 스스로 원해서 간통을 했다면, 거기에는 자유의 한 단면이 담겨있다고 생각했다. 남녀평등을 확립하는 것이 간통을 사라지게 하는 필요조건이 될 수 있다고 주창한다. 사회 구성원들이 결혼을 통해 자아실현을 하고 행복한 삶을 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양성평등을 실현하는 것을 근본적 방책으로 삼아야 한다. 특히 혼자서도 윤택한 삶을 꾸릴 수 있는 여성이 많이 등장한다면 이성 사이의 사랑이나 결혼이 어느 한 쪽에 기울지 않고 원만하게 유지되는 밑거름이 될 것이다.


요즘 법과 제도의 변화는 가부장제의 약화를 초래했다. 1990년대 들어 남녀차별을 시정하고 여성의 권익을 향상시키기 위한 입법이 잇따랐다. 여성발전기본법, 남녀고용평등법을 비롯하여 성폭력과 가정폭력에 대한 처벌법도 제정됐다. 호주제와 제대군인가산점제도에 대한 위헌결정도 이러한 흐름에 동참했다. 그럼에도 우리 법 제도에는 아직 주부의 가사활동을 폄하하거나 여성의 사회활동을 방해하는 성차별 조항이 남아 있다. 국민·공무원·군인 연금법에서 유족연금을 받을 권리가 있는 사람이 재혼하면 그 권리가 소멸한다고 규정한 것과 재산 등록 대상에서 '출가한 여자'는 제외시키고 있는 공직자윤리법 등이 그 사례다. 맥락은 다르지만 강간의 피해자를 여자로 한정해 동성 사이의 강간을 인정하지 않고, 남성과 여성 간의 획일적 성역할을 법제화한다며 피해자를 '사람'으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이런 미비점을 메우기 위한 입법은 계속될 전망이다. 법조문상의 형식적 문구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고정된 성역할을 해체하고 성소수자에 대한 구조적 차별을 눅여나가는 장치로서 법의 역할이 촉구된다.


고종석의 『사십세』에서 주인공은 자신을 야합에 의해 태어난 자식, 첩의 자식이라고 명명한다. 사생아라는 처지를 자괴하면서 가족과 부인에게 무책임했던 아버지에 대한 증오심이 가득하다. 소설의 핵심 주제는 아니지만 정상적이지 못한 가족 관계가 자식의 인격 형성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는 지를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 불륜은 배우자의 피해 뿐만 아니라 자식의 고통을 야기하기 마련임을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다. 축첩과 같은 지속적인 간통으로 형성된 부자관계는 위태로웠고 가족 관계는 그다지 화목하지 못했다. 주인공의 아버지가 자신의 육욕을 충족하려 했다면 정당한 방법으로 결혼을 정리하고 새로운 사랑을 찾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습관적으로 외도를 저질렀다. 자신의 결혼생활이 불행했음은 물론이고 자식들에게도 갈등의 씨앗을 남긴 폐해가 크다. 이처럼 간통 행위는 혼인 외 자녀 문제나 가족의 유기 문제 등을 낳는다. 형법 제241조는 법률상 혼인을 한 사람이 자신의 배우자가 아닌 자와 성관계를 가지면 처벌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미국이나 유럽은 대부분 간통죄를 형사처벌하지 않는 대신 민사상 배상을 엄격히 적용하고 있다. 1990년 김양균 헌법재판관이 간통죄에 대한 합헌결정에 반대하며 “처벌에 대한 두려움이 윤리 도덕을 지키는 주요 동기가 된다면 그것은 오히려 윤리의식의 퇴보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제시한 의견을 경청할 만하다. 간통한 배우자에 대한 손해배상을 입법화 한다는 전제조건 아래 간통죄 폐지를 논의해 볼만 하다.


간통이 위헌이든 합헌이든 그것이 나쁜 행위이고 줄여나가야 한다는 점은 또렷하다. 간통죄를 세분화하고 중벌 규정을 완화하는 대체법안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견 접근을 해볼 수 있다. 다만 미성년 자녀를 보호하기 위해 양육비 지급에 관한 강제 조항을 보완하는 등의 실질적인 조치를 강구해야 한다. 소설에서는 서자인 주인공이 아버지의 호적에 올랐다는 내용이 있는데 새로 시행되는 가족관계부는 다양한 가정 모습을 보듬을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일부일처제가 인간의 본성에 어긋난다는 견해가 맞을지도 모른다. 만프레트 타이젠의 『러브 사이언스』에 따르면 5천 종이 넘는 포유류 가운데 평생 같은 짝과 더불어 지내는 동물은 비버와 수달 등 약 3%에 불과하다고 한다. 제러드 다이아몬드의 『섹스의 진화』에서는 대부분 포유동물의 새끼들은 젖을 떼자마자 스스로 먹을 것을 구하고 부모로부터 독립하는데 반해 인간의 아이는 혼자 먹고 살 수 있으려면 훨씬 오랜 세월이 걸린다는 점에 주목했다. 여성이 배란을 드러내지 않고 언제든지 남성과 성교할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함으로써 남성이 가족의 둥지에 머무르며 아이를 함께 양육하게 되고 이것이 일부일처제로 진화한 것이라는 주장이 흥미롭다.


현재의 결혼제도도 인간의 필요에 의해 잠정적으로 합의된 산물이라 고정불변이 아니라는 점은 기꺼이 인정한다. 그렇더라도 인간이 연애 호르몬에 의해 전적으로 조종 당하는 존재가 아닌 한 혼인서약을 나눈 배우자에 대한 신의와 존중은 봉건윤리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권장할 덕목이다. 한스 노삭의 『늦어도 11월에는』에서 재벌의 아내 마리안네는 작가 베르톨트와 첫눈에 사랑에 빠져 훌쩍 떠나버린다. 일견 지위와 명예를 버리고 행복을 추구하는 해방의 기운이 물씬 풍긴다. 그러나 이는 소설적 구성에 힘입은 바가 크다. 거꾸로 마리안네가 가난한 남편을 버리고 부유한 남자에게 마음이 동했다면 감동이 반감되었을 것이다. 사랑은 아름답지만 자신의 쾌락만을 위해 남을 해쳐가며 탐닉하는 사랑에는 삼감이 필요하다. 내 욕망에 앞서 배우자를 배려하고 자녀가 받을 상처를 생각한다면 법으로 강제하지 않아도 품어야 할 미덕이다. 한 사람을 끝까지 사랑할 수 없다면 적절한 시기에 헤어질 수 있는 시대다. 그것이 함께 했던 시간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앞으로도 개인의 선택과 다양한 애정관을 수용하도록 법제도가 개편되어야 한다. 법이 상당부분 비켜서야 할 것이다. 법이 물러난 자리에 사랑이 다 들어차기보다는 여백을 남겨둬야겠지만 말이다.


인간의 무한하거나 이중적이고 복합적인 욕망을 한꺼번에 채울 수 있는 결혼제도를 더듬기는 어렵다. 박현욱은 『아내가 결혼했다』에서 한 여자가 두 남자와 결혼한다는 아찔한 상상력을 선보였다. 비독점적 다자연애(Polyamory)라고 멋지게 이름지어진 이러한 시도들을 우리는 어디까지 수긍할 수 있을까? 독점은 대개 나쁘지만 한 사람을 독점하려는 노력은 그래도 애틋하다. 일부일처제를 건사해왔던 정성들을 퉁명스럽게 내치지 못하겠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결혼을 무덤이라고 투덜거리면서 내심 근사한 후원으로 가꾸려고 무진 애쓰는 사람들을 두둔한다. 두 남자를 사랑한 아내는 끝내 한 사람을 선택하지 못한다. 우리는 살면서 임자(?) 없는 매력적인 여남(女男)을 얼마나 많이 만나는가? 『달콤한 나의 도시』에서 오은수는 한 사람을 선택하려고 고심하는 듯싶다. 은수는 세 남자와의 줄다리기 끝에 가장 모범적인 사회생활을 꾸린다고 여겨지는 김영수와 결혼을 계획한다. 그녀는 “그에 대한 나의 사랑은 반듯한 세계에 무사히 도착하기 위한 최소한의 알리바이였다”라며 자신의 결정을 치장하지만, “내 입으로 결혼이라는 말을 뱉은 뒤, 그를 더욱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역설이 거기 있었다”라고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은수가 결혼을 통해 신분 상승을 꿈꾸거나 팔자를 고치려고 한 것은 아니겠지만 문득 보부아르의 언설이 떠오른다. 우리 둘레의 은수가 계산할 건 하면서도 지금 이 순간 나누는 사랑에 충실하길 바란다. - [無棄]


<소설 속 한 구절>
세상의 숨겨진 이치들을 이미 다 꿰뚫어 버린 것 같지만 실상 곰곰이 따져보면 내가 몸으로 직접 겪어낸 것은 별로 없었다. 아는 것과 겪는 것 사이에는 분명 엄청난 간격이 가로놓여 있다.
- 정이현, 『달콤한 나의 도시』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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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꿈

문화 2008. 6. 15. 01:33 |

이번 학기 마지막 과제였던 <유가적 사유와 논어> 과제물을 부분 수정해서 올립니다. 이 과제를 작성하는 고뇌(?)를 나눠준 준 석훈이에게 고맙다는 말 전합니다.


<원문>
子曰 老者 安之 朋友 信之 少者 懷之
- 『논어』 <공야장편>


<국역>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나의 뜻은) 나이 많은 사람을 편안하게 하며 친구에게 믿음을 주며 어린 사람을 안아주는 것이니라.”


<견해>
  공자께서 제자인 자로, 안연과 더불어 이야기를 나누다가 자신의 포부를 밝힌 문구다. 공자가 생각하는 이상사회라고 볼 수 있고, 정책구상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일견 소박해 보이는 공자의 말씀에서 공자사상의 고갱이가 엿보인다. 『예기』 예운(禮運)편에서는 큰 도가 행해진 세상에서는 천하가 온 세상 사람들의 것이라고 말한다. 자기 부모만을 부모로 여기지 않고 자기 자식만을 자식으로 여기지 않으며, 노인에게는 그 생을 편안하게 마치게 하였으며, 청장년들은 능력을 충분히 활용했으며, 어린이가 잘 자랄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는 대동사회(大同社會)가 제시되고 있다. 공자가 수신제가(修身齊家)를 다지고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의 방법으로 대동을 지향하고 있음을 유추할 수 있다. 1978년 덩샤오핑은 원바오(溫飽), 샤오캉(小康), 다퉁(大同) 사회라는 3단계 발전전략을 내놓았고 2050년까지 실현하겠다는 대동은 공산주의 이상향의 중국판이다. 기세춘 선생은 대동사회는 오히려 묵자가 서술한 안락하고 평화로운 공동체(安生生)와 맞닿는다고 보았는데 일리가 있다. 공자의 대동은 묵자와 실현방식이 달랐을 뿐더러 현세적이던 공자는 대동사회에 무게를 두지 않았을 공산이 크다.


  서양의 르네상스는 중세적 신정정치에서 탈피해 합리주의와 세속주의를 추구했다. 지상낙원을 사후의 천상이 아니라 지금 이 땅에서 구현하자는 것이다. 공자는 서양의 르네상스보다 훨씬 앞서서 인간다움에 대한 풍부한 고찰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사고는 칼 포퍼의 “점진적 사회공학”과 견주어 살펴봄직 하다. 칼 포퍼는 유토피아주의와 전체주의를 비판하며 점진적 사회공학을 주창한다. 이것에는 두 가지 전제가 있다. 첫째는 추상적인 선의 실현을 위해 힘쓰지 말고 구체적인 악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모든 악은 직접적인 수단에 의해 제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미래의 유토피아 건설로 악을 간접적으로 제거하려 생각하지 말고, 오늘의 희생을 쥐어 짜내기보다 지금의 고통을 덜어내는 데 힘쓰라는 것이다. 이는 존재하지 않는 이상의 실현으로 인간을 행복하게 하려 하기보다는 존재하는 것이 명백한 악, 피할 수 있는 고통을 최소화하는 데 애쓰라는 것이며, 지금 여기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을 구해야한다는 뜻이다.


  공자의 경우 추상적 집단이 아닌 구체적 개인의 삶에 천착해 개인의 본성을 가꾸는 이치를 주장한다는 점에서 유가의 현실적인 구세의식이 도드라진다. 선생 또한 미래나 천상의 유토피아를 언급하지 않았다. 공자는 신과 거의 무관한 세계의 인본주의를 역설했다. “사람이 도를 넓히는 것이지, 도가 사람을 넓히는 것이 아니다(人能弘道 非道弘人)”라는 말씀 속에서 인도를 넓히고 실천하는 주체는 사람 자신이고, 그러한 능력을 개개인이 충분히 품고 있다고 보고 있다. 공자는 현실에 밀착한, 현실을 떠나지 않은, 현실로 발현할 수 있는 이상을 갈파한다. 이것은 누구나 실행할 수 있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가치들이다. 仁은 가장 인간적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평생을 추구하는 힘이 된다. 누구나 생각하고, 누구나 바라고, 누구나 해낼 수 있는 것을 仁은 가리키고 있다.


  헤겔의 『법철학』 서설에는 “여기가 로도스섬이다. 여기에서 춤추어라, 여기 장미꽃이 피어 있다. 여기에서 춤추어라”라는 구절이 있다. 어떤 거짓말쟁이가 자신이 로도스섬에 있을 때 굉장히 멀리 뛸 수 있었다고 자랑한다. 그러자 한 사람이 나서며 이렇게 말했다. “그 말이 진실이라면 굳이 많은 증인이 필요 없지. 여기가 로도스야. 여기서 뛰어보게!” 헤겔은 이 우화를 미덥지 못한 이상을 늘어놓기보다 삶의 현장에서 쓰일 수 있는 방안을 고찰하라는 것으로 풀었다. 진리라면 현실의 검증을 마다하지 말고, 로도스섬으로 피하기보다는 지금 딛고 있는 곳에서 가능성을 보이라는 설명이다. 헤겔의 언설은 환상의 나라, 허구의 나라, 불가능의 나라에 닿기 위해 헛되이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지 말라는 메시지다. 공자의 주장과 잇닿아 있다. 공자는 로도스섬을 꾸며내지 않았다. 그저 老者와 朋友와 少者를 생각하는 오늘 여기의 삶을 로도스섬으로 삼았다.


  미국의 경제학자 이스털린은 경제 성장과 인간의 행복감 사이의 상관관계를 탐구한 선구적 학자다. 그는 소득수준이 높은 사람들이 같은 나라, 같은 지역의 소득수준이 낮은 사람들보다 행복감도 커진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런데 부유한 나라와 가난한 나라에서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의 비율이 별 차이가 없다는 점이 발견됐다. 또 한 나라 안에서 가난하던 시절과 부유한 시절을 비교해도 행복감을 느끼는 사람의 비율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한 나라의 높은 경제 성장과 물질적 풍요가 그 나라 국민 전체를 더 행복하게 한다는 보장이 없는 셈이다. 이처럼 일정한 생활수준에 다다르면 경제 성장이 개인의 행복, 사회적 후생 증가에 이바지하지 못하는 현상을 “이스털린의 역설”이라 일컫는다. 공자는 이 역설을 오래 전부터 꿰뚫고 있었다. 공자는 물질을 부정하지 않았고, 경제적으로 윤택한 삶을 경시하지 않았다. 선생은 다만 욕망의 증가 속도가 부의 증가 속도보다 더 빠른 것을 염려했다.


  공자가 체감(遞減)하지 않고 체증(遞增)하는 탐욕을 문제 삼은 것은 인간다움을 지키기 위해서다. 현대의 자본주의는 물신숭배와 황금만능주의로 타락하기 일쑤다. 인간보다 물질이 무겁게 여겨지는 사회를 공자는 경계했다. 선생이 설파한 仁의 개념은 추상적으로 정의되기보다는 다채로운 실례와 비유 속에서 표현된다. 가장 기본적으로는 사람을 사랑함(愛人), 널리 사람을 사랑하는 것(汎愛衆)이다. 오늘날 가치관의 전도 현상으로 말미암아 수단과 목적이 뒤바뀌고 있다. 인간의 존엄성과 행복 같은 목적적 가치보다 효율성과 편리성 그리고 경제적 부 같은 수단적 가치가 더 우월한 지위를 누리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이런 병리현상이 만연한 사회에서는 다른 사람을 자신의 이익 추구를 위한 수단으로 치부하게 된다. 공자는 이것에 반대한다. 선생은 효제(孝悌)와 충서(忠恕)를 고안해 물질적 집착을 버리고 본래의 마음을 회복하기를 촉구한다.


  孝悌가 혈연을 매개로 한 본능적 사랑이라면 忠恕는 이를 바탕으로 남에게 최선을 다하는 자세다. 인간관계를 목적적 관계로 확립함으로써 소외되는 사람이 없게 만들려는 기획이다. 세종대왕 때 박연이 시각장애 악공들의 처우 개선을 요청하며 “세상에 버릴 사람이 없다(天下無棄人也)”라고 상소했던 내용의 바탕이 되는 사상이다. 『도덕경』 27장에 나오는 “그러므로 성인은 언제나 사람을 잘 도와주고, 아무도 버리지 않습니다(是以聖人常善求人 故無棄人)”라는 구절과 상통한다. 왕필(王弼)은 주석을 통해 성인은 나아갈 것과 향할 것을 만들어서 진보에 뒤쳐지는 사람들을 못났다고 버리지 않으며, 저절로 그렇게 됨을 도와줄 뿐 새롭게 일을 시작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을 버리는 일이 없다”라고 풀이한다. 사람을 구제하기를 즐기며, 스스로의 편견 때문에 함부로 버리는 사람이 없는 태도라는 실천덕목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구현해나가야 하는 것인가? 孝悌가 忠恕로 확장되는 관계에서 미루어 알 수 있듯이 가까운 곳부터 시작하는 게 온당하다. 『맹자』에 나오는 “소는 보았고 양은 보지 못했다(見牛未見羊)”라는 구절이 이런 고심을 푸는 실마리가 된다. 제 둘레의 것들에 연민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더 먼 곳의 아픔을 헤아리는 건 불가능하다. 보이지 않는 양에 대해서도 똑같이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는 식의 관념적 사고에는 정(情)이 묻어나지 않기 때문에 구체적인 행동을 이끌어내기 어렵다. 그렇다고 見牛未見羊에서 인간의 지각적 한계만을 논해서는 곤란하다. 나와 덜 친밀한 것까지 측은지심을 품는 실천을 꾀해야 한다. 측은지심을 자기 주변부터 시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다 방점을 찍을 부분은 측은지심을 바지런히 넓히는 데 있다. 여기까지 동의한다고 해도 측은지심이 확산되는 순서가 명료한 선후관계는 아닐 터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


  공자가 꿈꾼 바를 오늘날 접목시켜본다면서 단순히 고령화 사회를 대비한 노인 복지, 사회적 신뢰의 확립과 청소년 교육의 강화 같은 피상적인 접근으로는 부족하다. 공자와 그의 벗으로 상징되는 장년층이 노년세대를 정신적, 물질적으로 예우하고, 청소년세대를 정성껏 보살펴서 세대 간의 유대감을 이어나가야 한다고 해석하면 실질적인 의미가 좀 더 커질 것이다. 즉 세대 간의 사랑과 배려를 돈독히 해서 문화와 역사를 계승 발전해 나가는 모습이다. 젊음이나 늙음은 결국 상대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역지사지한다면 세대 간의 허심탄회한 소통으로 갈등을 줄이고 사회적 응집력을 높여나갈 수 있을 것이다.


  老者와 朋友에 대한 이야기는 다른 논어 구절에서 익히 만날 수 있지만 少者를 품겠다, 포용하겠다는 언명은 이 구절에서 또렷하게 드러나 특히 인상 깊다. 이는 젊은 세대에게 관심을 보이고 사랑해주고 싶다는 협소한 의미가 아니다. 후생가외(後生可畏)나 불치하문(不恥下問)에서 알 수 있듯이 윗사람으로서 어린 사람에게 시혜적이고 일방적으로 무언가를 베풀겠다는 뜻이 아니다. 적극적으로 교류하고 배우겠다는 의지의 피력이다. 최근 기업에서 관리자가 부하직원들에게 젊은 세대의 관심사와 노하우를 전수 받는 “리버스 멘토링(Reverse Mentoring)”이 강조되고 있다. 이를 통해 핵심가치를 공유하고 상호 만족감을 높이고 있다고 한다. 이처럼 공자의 가르침을 응용한 사회적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Posted by 익구
:

내가 겪은 촛불집회에 반대하는, 최소한 언짢게 여기는 사람들의 주장에는 대강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한우도 위험하다 혹은 더 위험하다는 ‘한우 위험론’, 전경이 무슨 죄냐는 ‘전경 동정론’, 너무 감정적이고 선동적이라는 ‘군중심리론’, 그래도 불법은 안 된다는 ‘준법시위론’, 본래의 순수성을 잃었다는 ‘순수 훼손론’, 쇠고기 협상만을 문제삼아야지 다른 정책이나 정부 퇴진을 외쳐서는 안 된다는 ‘쇠고기 국한론’, 집회로 인해 선량한 시민들의 이익이 침해받는다는 ‘선량한 시민론’, 시위에 참석 안 했다고 무뇌아로 몰아 부쳐서는 안 된다는 ‘계몽 반대론’, 재협상은 통상마찰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국익론’, 본래부터 이명박 대통령을 반대했던 무리들이 문제를 부풀린다는 “안티 조장설” 따위가 그것이다. 구체적으로 설명은 안 했지만 대강 이해하시리라 본다. 몇 개는 쉽게 논파할 수 있지만 몇 개는 고민에 빠뜨린다.


특히 “물대포는 대한민국 폭력경찰이 쏘는 것이기도 하지만 권리를 침해당한 다른 선량한 국민들이 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라는 구절에서 영감을 얻어 내가 ‘선량한 시민론’이라 이름지은 주장은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든다. 나는 “과연 선량한 시민이 침해받은 이익은 무엇일까요? 정부를 옹호할 권리? 이런 건 아닐 테고, 주말 저녁에 광화문 거리를 산보하는 여유? 한밤중에 숙면을 취할 자유?”라고 비꼬았다. 진의는 아니었지만 댓글 논쟁이 벌어진 곳이 익명게시판이라 직접 사과할 기회가 없어 안타깝다. 선량한 사람들이 빼앗겼다고 주장하고픈 권리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적시해주시면 더 좋았다는 의도가 지나쳤다. 내가 든 예시는 경솔했지만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일부러 그런 표현을 쓴 측면이 있으니 양해해주시길 바란다. 홍관희 통일교육원장 내정자는 촛불 시위자들이 자동차 운전자들의 도로통행 권리, 심야에 숙면을 취하고자 하는 주민들의 자유 등을 침해한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열거해줘야 토론하기가 좀 더 수월하다.


경찰이 ‘더’ 선량한 시민을 대신해 ‘덜’ 선량한 시민을 향해 물대포를 쏘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덜’ 선량한 시민들은 ‘더’ 선량한 시민을 향해 촛불을 든 것도 아닌데 물대포를 쏘아줘야 안심이 된다면 좀 민망하다. 그렇게 해서 유지되는 선량함이 그리 탐스럽지는 않다. 이를 주장한 분은 어떤 시민이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집회에 참석하는 것이 다른 시민의 어떤 권리를 침해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어느 정도 명료한 기준을 제시하고 있지 않았다. 단도직입적으로 경찰특공대가 지키려고 했던 건 청와대인가? ‘더’ 선량한 시민의 이익인가? 이명박과 그 둘레 사람들인가? ‘더’ 선량한 시민의 공민권과 행복추구권인가? 나는 헛갈린다. 결사의 자유라든가 불복종 운동 같은 추상적인 개념을 현실에서 어떻게 구현해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섬세한 논쟁이 필요한 대목인데, 구체적인 내용 없이 “침해받은 시민을 생각하라” 이렇게만 말씀한다면 난감하다.


짧은 댓글에 모든 것을 담아내기 어렵기 때문에 빚어진 오해를 내가 너무 타박하지는 않아 염려스럽다. 그럼에도 글쓴 분의 논지를 강화하려면 이런 식의 접근이 필요하다. 가령 법을 준수하는 것이 민주시민의 덕목이며 사회의 안정에 이바지해 궁극적으로 시민의 법익을 보호할 것이라고 주장한다고 치자. 그렇다면 실정법에 어긋나는 가두시위가 적절치 않다고 볼 여지가 있다. 또 다른 측면에서 쇠고기 정국에서 정부의 태도를 지지하고 대통령을 옹호하는 국민들이 엄연히 존재한다. 정부 VS 촛불집회 시민의 구도에서 혹시 소외될 수 있는 제3의 영역, 또 다른 우리 사회 구성원의 문제를 지적하신 건 좋은데 그 문제 제기가 좀 더 공감을 얻으려면 그에 걸맞은 근거가 조금 보강되었으면 좋겠다.


말씀하신 논리가 설득력을 더하려면 선량한 시민들의 범위가 좀 더 넓어져야겠다. 글 쓴 분은 사회적 소수파에 대해 넉넉한 시선을 보내는 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선량한데도 경찰이 대신 물대포를 쏘아주기는커녕 사회적으로 소외 받고 혜택을 받지 못하는 계층에 대한 관심으로 확장한다면 어떨까 싶다. 경찰이 보호하지 않는, 아니 오히려 선량하다고 자부하는 시민들마저 나서서 손가락질하는 소수파의 목소리를 경청할 줄 아는 자세로 버려지는 사람, 버려지는 권리가 없기를 희망하시는 분이라고 믿는다. 이와 결부시켜 ‘전경 동정론’과 관련해서 한마디만 하자면 공권력을 확립해야 한다는 점과 공권력 사용에는 늘 절제가 있어야 한다는 점은 마냥 어긋나는 목표는 아니라고 확신한다. 우리는 민주 경찰과 민주 시민을 동시에 추구할 수 있다.


다음으로 이번 촛불집회를 4·19나 5·18에 빗대는 것을 마뜩잖아 하시는 분들이 있다. 4·19나 5·18의 숭고한 대의를 높이기 위해 함부로 쓰이는 것을 경계하셔서 하신 말씀일 게다. 다만 그 기저에 흐르는 공통 분모를 뽑아내려는 시도가 그리 무익한 일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4·19와 5·18은 소중한 기억이지만 그것이 관념화되고 신성시되는 건 곤란하다. 아마 우려하신 분께서도 생활 속에서 그 정신이 녹아들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으시리라 믿는다. 경험하지 않아서 모르지만 아마 그 때도 오늘과 같은 논쟁과 고민이 있지 않았을까? 4·19는 반쪽이나마 성공함으로써 성역화되어 버렸고, 5·18은 불온시되어 제대로 음미할 공간을 확보하지 못했다. 4·19나 5·18의 의미를 정리하는 것뿐만 아니라 오늘 벌어지고 있는 사태를 헤아려보고 소통하려 하는 것이 4월 혁명, 5월 항쟁을 되새기는 또 다른 길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건 몰라도 정부가 거짓말을 남발하고 있다는 공통점은 확실히 있다.^^;


4·19와 5·18, 6월 항쟁을 지지한 시민도 그 때 당시에는 소수였다. 사안마다 다르지만 처음부터 전국민적인 공감대를 얻은 건 아니다. 우리는 이 기억들이 어느 정도 성공한 역사이기 때문에 그것의 의미를 기리고 마치 일부 집권층과 동조 세력을 제외한 대다수의 국민들이 지지했다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촛불집회에 참석한 사람은 극히 소수라고 깎아 내리는 발언은 신중해야 한다. 과거 독재시절에 민주화를 위한 뚜렷한 명분이 있었다는 주장도 들린다. 그 때 그 시절에도 자칭 선량한 시민(?)들은 "그래 네 말이 맞는데 폭력시위는 안 된다" 뭐 이런 식에 가까웠다고 알고 있다. 더군다나 그 때는 빨갱이 사냥까지 있었고, 언론의 왜곡보도도 심대했다. 우리가 자랑하는 그 민주화도 애당초 용인되었기에 실현된 것이 아니다. 감정에 휩쓸려 제 앞가림을 못하고 과격한 언사를 늘어놓았던 그들이 우리가 지금 대통령을 마음껏 욕하고, 언론 보도를 의심하고, 군사주의의 공포에서 해방시켜 주었다.


아마 이런 지적이 나오는 것은 이명박 정부를 국민의 손으로 뽑았다는 엄연한 사실 때문으로 보인다. 지금의 상황이 당시의 정세와 다르다고 주장하는 핵심 논거다. 분명 무력으로 집권한 군사정권에 견주어 정통성이 월등히 높다. 좀 야박하게 말해서 이명박 정부의 무능함을 꿰뚫어본 국민이 적었다는 것이 대한민국 불행의 시발점이었는도 모른다. 이번 정권교체에서 보여주듯이 민심은 변하게 마련이다. 그 민심이 다시금 요동쳤다고 해서 군중심리라거나 조변석개(朝變夕改)라고 투덜거리는 건 일반 국민들 사이에서는 충분히 나눠봄직한 주제다. 그러나 이명박 대통령이나 그 둘레 사람들이 그런 말을 꺼내서는 곤란하다. “고객은 무조건 옳습니다”라고 써 붙인 식당처럼 국민의 올바름을 믿는 것은 직선 대표의 숙명이다. CEO 대통령이라면서 식당 주인만도 못한 정치를 펼친다면 부끄럽지 않은가.


2004년에 내가 통상정책 발표 주제로 삼기도 했던 EC-호르몬사건(EC Measures Concerning Meat and Meat Products)은 유명한 통상마찰 사례다. 미국은 WTO에 제소를 했고 WTO는 미국의 손을 들어줬다. 하지만 EU(당시 EC)의 거부와 잇따른 미국의 제소가 이어져 지금도 엎치락뒤치락 하고 있고 EU는 각종 대가를 치르면서도 버티고 있다. 이것만 봐도 통상마찰은 괴롭고 지루한 여정이 될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이번 쇠고기 협상이 전격적으로 채결되기 전까지 많은 줄다리기가 있었다.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든 책임은 대통령과 집권세력이 온전히 져야한다. 그들은 소 잃고 고칠 외양간마저 불살라 버렸다. 나는 쇠고기 협상 타결 초기에 미국산 쇠고기는 안전하다는 말밖에 할 줄 모르던 정부 관료와 여당 의원들의 작태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이제 그 과오를 만회할 길은 단 하나 뿐이다. 이게 과연 흑백논리이자 이분법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고시 철회, 협상 무효”라는 국민의 요구는 간명하다. 현 시점에서는 이걸 수용하거나 거부하거나 둘 중의 하나다. 통상마찰이 걱정되더라도 재협상 불가가 국익을 위한 구국의 결단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지금 야당들이 장외집회로 선회하고 있지만 한나라당도 재협상(에 준하는 조치)을 사실상 수용하겠다고 밝힌 만큼 국회에서 의결하면 못할 것도 없다. 사실 의회 입법으로 정부의 빠져나올 알리바이를 만드는 방식은 미국이 즐겨 쓰는 방식이다. 통상마찰을 우려한 국익론은 마치 지난날 이라크 파병 국익론과 마찬가지로 국민을 현혹하는 구호에 소모될 공산이 크다고 본다.


타격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것이 두려워 다른 방식을 모색한 단계는 지난 게 아닐까 싶다. 더군다나 한미 FTA나 대운하 같은 경우 국민경제에 미칠 영향을 찬반 양측이 엄청난 차이로 계산하고 있는 만큼 앞으로 나타날 통상마찰에 따른 피해를 경제학적 수치로 계산해서 결정하겠다는 것도 어폐가 있을 듯싶다. 기업비리가 터질 때마다 재계에서 경제사범에 대한 선처를 요구하면서 경제를 살려야 한다는 핑계를 늘어놓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는 궁색한 논리라고 생각한다. 국민이 원하는 건 두둑한 지갑만은 아니다. - [無棄]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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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고기 정국이 대한민국을 뒤흔들고 있다. 사실 나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굳이 머리를 굴려본 것이 있다면 ‘위험(Risk)’과 ‘불확실성(Uncertainty)’의 개념이다. 정의하기 나름이지만 위험은 측정 가능한 불확실성이다. 즉 확률이 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불확실성은 측정 불가능한 불확실성이다. 최근의 서브프라임 사태는 위험이라기보다 불확실성의 문제였다. 잘 모르는 상태에서는 일단 거래를 사절하거나 자금을 회수하기 마련이고 그러다 보니 자금 융통이 막혀 금융위기를 확대 재생산하는 형국인 셈이다. 요즘 불거지는 광우병 논란도 위험이라기보다 불확실성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정부는 안전하다며 위험 측면에서만 해명하고 불확실성을 다독일 방안에 대해서는 적절하게 응수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나이트(F.Knight)는 불확실성이야말로 이윤을 발생시키는 원천이라고 역설했다. 보험 처리조차 불가능한 진짜 불확실성을 감당하는 사람이 기업가이며, 사전 통제가 불가능한 위험을 지는 대가로 기업에는 이윤이 발생한다는 논리를 편다. 아직까지는 미국 쇠고기를 들여오는 이득이 뭔지는 잘 모르겠다. 값싸고 질 좋은 쇠고기를 먹을 수 있다는 정부측의 초기 대응은 안이하기만 했다. 쇠고기 협상에서 정부가 보여준 무성의한 태도는 불확실성에 대처하는 자세의 진정성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제 정신인 민주정부라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굴욕적인 협상을 하고도 국민들이 괴담에 놀아나네, 촛불집회에 배후가 있네 어쩌고 하면서 깐죽거리는 정부에 대한 분노가 문제의 본질이다. 이명박 정부는 불확실하지 않다. 그들은 위험할 따름이다. 그건 측정 가능하고 통제 가능하다.


정부의 거짓말과 실책이 쌓여 정책의 신뢰성이 추락했다. 그간 광우병의 위험을 함께 호들갑 떨던 이들이 갑자기 새 정부 들어 협상을 불가피하다고 외치는 것을 넘어 옹호하고 있는 모습은 불신을 부채질했다. 인간에 대한 신뢰가 무너졌는데 자율규제 하겠다, 원산지 표기 잘하겠다는 말이 믿어지겠는가. 물론 정부가 국민의 생명권을 희생해가면서 미국에 굽실거렸으리라 생각지는 않는다. 하지만 우리의 손익계산서는 분명 극악한 것이었고 그나마 나온 추가적인 조치도 국민들의 분개 때문에 겨우 이루어졌다. 국민은 정부가 자국민의 안전을 위해 호들갑을 떠는 버팀목이 되어주길 바랐다. 그런데 그네들은 국민이 호들갑을 떤다고 나무랐다. 전전긍긍해야 할 주체는 국민이 아니라 정부가 되었어야 마땅하다.


도덕적 자원을 결핍한 지도자는 ‘비지지자 신뢰도’를 확보하기 위해 유무형의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데 이 대통령은 그 비용이 크리라 추정된다. 그런데 최근 벌어지는 지지도 폭락 사태는 낮은 신뢰도에 기인했다기보다는 빠른 속도로 늘어난 비지지자 수인지도 모르겠다. 섣부른 판단이지만 지지자 충성도가 붕괴될 조짐이 보인다. 비지지자의 낮은 신뢰도를 방어하는 건 지지자의 높은 충성도다. 혹자들은 군중심리라고 타박할지 모르겠으나 이명박 정부는 많은 기대를 품고 출범했다. 설령 이해관계에 의한 투표를 건넸다고 하더라고 그와 같은 지지를 건넨 국민들에게 손가락질하는 정부라니 서글프다.


경찰이 청와대로 향하는 시민들에게 최초로 물대포를 쏘았다는 기사를 접하고 마음이 착잡했다. 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이명박 정부의 탄생을 저지하려 했던 편파적인 녀석이다. 이 점을 부인하지도 않고 감추지도 않고 살았던 것 같다. 물대포 사태가 벌어지던 날 헌책방에서 노닥거리다가 “공정하게 편파적인 것이 가장 공정한 것이며, 편파적으로 공정한 것이 가장 편파적인 것이다”라는 구절을 만나고 무척 동감했다. 나는 아직 공정하게 편파적이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편파적으로 공정하지는 않았던 듯싶다. 공정한 척하지 않는 건 내 자부심이다. 그저 이명박 정부를 막지 못한 죄를 감내하고 하루하루 견뎌내는 재미로 살려고 했는데 이쯤 되면 죗값에 견주어 너무 많은 벌을 받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속한 반 클럽에는 쇠고기 정국에 대한 논란이 불붙고 있다. 나는 고종석 선생님의 표현을 빌려 “이명박 정부의 업적이 있다면 적어도 공적 영역에서는 무능과 부패, 도덕성과 능력은 정(正)의 상관관계에 있음을 온몸으로 실천해 보여준 것이 아닐까”라고 썼다(좀 더 정확히 말하면 내가 늘 떠들고 다니던 말을 고 선생님이 먼저 글로 옮기신 것이지만^^;). 어느 누리꾼이 요즘의 일을 풍자하며 인용한 최치원 선생의 <토황소격문>의 구절을 재인용했다. “하늘이 잠깐 나쁜 자를 도와주는 것은 그에게 복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그의 흉악함을 쌓게 하여 벌을 내리려는 것이다(天之假助不善 非祚之也 厚其凶惡而降之罰).”


그 때 당시에는 나도 흥분했고(한편으로는 엄청 절제했지만) 감정의 나열에 불과해서 며칠 뒤에 지웠다. 이제 재학생 가운데는 꽤 높은 학번이 되어버린 제가 스스럼없이 툭 던진 한 마디가 어떤 맥락으로 받아들여질지를 고민해야 했는데 좀 소홀했다. 내 잡소리를 누가 귀담아 듣겠냐 싶지만 내 진솔함이 후배들에게는 불편함을 심어줄 수도 있겠다는 반성을 했다. 사석에서든 클럽 게시판 같은 공적인 지면에서든 가능하면 솔직하게 살려고 했는데 때로는 솔직함이 부담스러울 수도 있다. 예전부터 몇몇 선배님들은 내 ‘감춤 없음’을 진심으로 걱정해주셨다. 정말 고맙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그렇다고 갈등의 소지가 있거나 가치관이 맞부딪치는 문제를 전혀 언급하지 않는 것이 과연 온당하냐는 문제의식을 품어본다. 좋은 이야기와 인사치레 같은 덕담을 늘어놓으면 우리의 소중한 관계가 너무 허망할 거 같다. 나는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이슈는 의만 상하기 때문에 친구 사이에서 꺼내지 않는 게 좋다는 식의 이야기에 별로 동감하지 않는다. 그건 귀한 인연에 대한 ‘배려’가 아니라 ‘배신’이라고 오래 전부터 생각해 왔다. 익명게시판은 백 수십 개의 댓글이 달리는데 정작 오프라인 상에서는 수강신청 이야기나 나누는 우리네 우애를 돌아보게 된다. 왜 우리는 이런 소재를 두고 오프라인 상에서 허심탄회하게 이야기 나누지 못할까. 서로 덜 친해서 그런 걸까, 더 친하고 싶어서 그런 걸까?


우리가 좀 더 격의 없는 사이가 된다면 오프라인에서도 이런 이야기 술안주 삼아 주고받았으면 좋겠다. 이것이 대학에서 내가 사귄 사람들을 위한 생각일지 내 개인적인 욕심인지는 잘 모르겠다. 민주주의는 불완전성을 가정한 제도다. 관용은 “내가 잘 났으니까 너희들 이야기를 좀 들어줄게” 이런 것이 아니다. 내가 불완전하기 때문에 상대방의 존재와 가능성을 인정하고 대화와 타협에 나서는 것이다. 진리는 권력순도, 성적순도, 목소리 크기순도 아니다. 부디 내 둘레의 사람들과 관용의 미덕을 만끽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나는 뒷담화 대신 앞에서 말하기를 생활신조로 삼았다. 내가 내뱉는 만큼 얼마나 잘 경청할 수 있을까? - [無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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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으로서의 음주

잡록 2008. 6. 7. 18:52 |

우리 학교 행사 가운데 고대타임(고대생들이 으레 늦게 모이는 습속을 애정을 섞어 표현한 말)이 적용되지 않는 거의 유일한 행사가 입학식이다. 2002년 입학식 때 나는 대강 이 때쯤이면 되겠다 싶어 어슬렁거리며 입학식장이던 노천극장을 올라갔다. 30분도 늦지 않았는데 벌써 교가를 부르고 있었다.^^; 1978년 당시 김상협 총장님은 ‘여기에서 춤추어라’는 입학식사를 하셨다. “여기 자유 정의 진리의 전당이 있다, 여기에서 춤추어라. 여기 민족주체 민간주체의 석탑의 광장이 있다, 여기에서 춤추어라. 여기 지성과 야성, 한국과 세계의 캠퍼스가 있다, 여기에서 춤추어라.”와 같은 구절이 나온다. 이는 헤겔의 『법철학』 서설의 표현을 패러디한 것이라고 한다. 그는 “여기가 로도스섬이다. 여기에서 춤추어라, 여기 장미꽃이 피어 있다. 여기에서 춤추어라.”라고 썼다.


그런데 이건 또 이솝 우화를 인용한 것이다. 어떤 거짓말쟁이가 자신이 로도스섬에 있을 때 굉장히 멀리 뛸 수 있었다고 자랑한다. 그러자 한 사람이 나서며 이렇게 말했다. “그 말이 진실이라면 굳이 많은 증인이 필요 없지. 여기가 로도스야. 여기서 뛰어보게(Hic Rhodos, Hic Saltus)!” 헤겔은 이 우화를 미덥지 못한 이상을 늘어놓기보다 삶의 현장에서 실현할 수 있는 방안을 생각하라는 것으로 풀었다. 진리라면 현실의 검증을 마다하지 말고, 로도스섬으로 피하기보다는 지금 딛고 있는 곳에서 가능성을 보이라는 설명이다. 차병직 변호사님은 헤겔의 언설을 환상의 나라, 허구의 나라, 불가능의 나라에 닿기 위해 헛되이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지 말라는 메시지라고 보셨다. 축제의 계절인 오월에 음미해볼 만한 이야기 같아 많이 인용했다.


지난 5월 16일에 열렸던 대동제 주점은 즐거웠다. 재미난 시간은 빨리 가서 아쉽다. 주점이 있는 날 밤은 더 후다닥 지나간다. 처음처럼이 없는 자리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빈자리를 소중한 사람들이 채워주셔서 얼마나 흥겨웠는지 모른다. 재현형님, 상준형님, 인호형님, 윤승형님, 광호형님, 정훈형님, 혜진누님 등의 선배님들 바쁜 시간 내어 왕림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바지런히 부침개와 만두를 굽고 감자를 튀기고, 오도독뼈를 익히고 달걀을 깨고, 과일 통조림을 조합하던 후배님들 모두 고생 많았어요. 주점 마치고 뒷정리하는 것처럼 괴로운 일도 없는데 묵묵히 남아 정리했을 여러 후배님들 사랑해요. 해장국은 들고 귀가했나 모르겠네요.


오월에 이어진 각종 술자리에서 숙취 없이 선방한 날도 있고, 주말 내내 뒹굴 거리며 요양했던 날도 있다. 술을 잘 못 마시면서도 술자리를 좋아하는 저는 아찔했던 경험도 적잖았지만 “술은 언제나 무죄다”라는 구호 아래 다음 술자리를 기획하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한다. 현진건 선생님은 「술 권하는 사회」에서 식민지 조선의 암울한 상황을 술로 달래는 광경을 묘사했다. 하지만 술을 어떤 명분이나 핑계로 치장해 마시는 행동은 마뜩찮다. 우애로움이 술잔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 술은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술을 그냥 술로써 좋아해야 한다고 우겨본다.


술자리에는 부분 강화 효과(Partial Reinforcement Effect)가 있는 것이 아닐까 궁리했다. 부분 강화 효과란 보상이 언제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어떤 행동이 오래 지속되는 현상을 말한다. 주로 게임이나 도박의 사례를 많이 든다. 즉 추억으로 삼을 만한 성공적인 술자리가 언제 도래할지 예측하기 힘들기 때문에 끊지 못하는 증상이랄까?^^; 맹자는 사람들이 죽는 것을 싫어하면서도 어질지 못한 것을 좋아하는 행태를 비판하며 마치 “취하기는 싫어하면서도 무리하게 술을 마시는 것(惡醉而强酒)”과 같다고 말씀하셨다. 비유가 따갑다.


애주가들이 물아일체를 패러디 해 주아일체(酒我一體)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는데 나는 ‘주간(酒間)’이라는 말을 종종 쓴다. 좀 과장을 보태면 내 삶은 술자리와 술자리 사이에 끼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내 모자란 체력과 부족한 정신력이 용납하는 순간까지는 숙취를 애인처럼 여기며 지내볼 계획이다. 음주의 한계비용과 한계수입이 같아지는 균형점은 당최 어디에 있을까? 다음 술자리에서 더 나은 모습으로 나타나기 위해 또 알차게 살아봐야겠다. 잠시 술잔을 내려놓은 시간 동안 모두들 안녕히!^-^ - [無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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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학기에 듣는 <문학 속의 법> 과제로 냈던 글을 재편집해서 올립니다. 「피니스 씨의 허무한 시간 여행」은 6쪽 정도의 짧은 이야기로 인터넷 상에서 본문이 돌아다니는 것으로 압니다.


   서기 원년의 로마로 날아간 발명가 피니스 씨는 20세기의 의학 기술과 청결한 생활 습관을 소개했다. 이 덕분에 기원 1세기의 인류는 전염병에서 해방되어 유아 사망률이 줄고 평균 수명이 늘어 인구가 급증했다. 인류는 발달된 과학기술을 이용해 먹을거리는 그럭저럭 해결했으나 폭증하는 인구를 수용할 ‘공간’이 부족했다. 지구상의 사람의 총 질량이 지구 자체의 질량을 넘어서는 상황에 직면하자 인류는 특단의 계획을 세운다. 한 사나이를 기원 1년의 로마로 보내 피니스 씨가 타임 머신을 타고 나타날 때를 기다려 그를 사살한다. 프레더릭 폴의 단편소설 「피니스 씨의 허무한 시간 여행」의 줄거리다. 이 짧은 소설을 소재로 문학과 법학의 상관관계를 고찰해보자.


  최근 애그플레이션(Agflation)으로 말미암아 버려진 이론으로 여겨지던 맬서스의 인구론이 재조명되고 있다. 자원 부족 현상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중장기적으로 지속될 상황이라는 예측이 많다. 실제로 중국과 인도가 급성장으로 인해 자원 수요가 늘어나면서 자원 고갈을 부추기고 있다. 프레더릭 폴의 소설에서는 공간이 모자랐다. 식량 위기를 기술 혁신과 대체재 개발을 통해 극복해야 하는 오늘날의 상황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하지만 모든 인구가 잘 먹고 잘 살게 되었을 때 파생될 위험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즉 소설은 경제 성장 혹은 후생의 증진이 반드시 행복한 삶, 질적으로 고양된 삶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가르침을 준다.


  우리나라에서는 가족계획이라는 구호 아래 산아제한이 실시되었으나 근래에는 저출산이 사회 문제시되면서 출산 장려대책이 다각도로 제시되고 있다. 이 소설을 읽고 나면 다른 방식으로 문제에 접근하게 해준다.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인구밀도를 나타내고 있음을 상기할 수도 있다. 소설은 입법자에게 출산 장려대책과 더불어 시행한 정책 수단을 개발하는데 영감을 준다. 또한 입법의 우선순위를 정하는데 있어서도 보탬이 된다. 가령 보육시설 확충은 출산 장려도 꾀할 수 있지만 여성인력을 활용하게 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낳기 때문에 좀 더 우선적으로 고려할 것이다.


  문학평론가인 김경수 서강대 교수는 「법과 문학, 문학법리학」이라는 논문에서 법학과 문학은 멀리 떨어진 세상의 이야기가 아님을 논증하고 있다(『현대사회와 인문학적 상상력』이라는 책에 실려 있다). 그에 따르면 법학과 문학은 사람들의 삶을 규정하거나 해석하고 묘사한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법학과 문학은 양자 모두 언어를 매개로 구체적인 표현을 하고 체계를 형성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두 학문 모두 텍스트의 해석 및 재구성이 중시되며 이를 통해 새로운 의미를 창출한다. 또한 허구(fiction)를 통해 사회적 현실을 규정한다는 특성을 함께 지니고 있다. 허구가 발현되는 양식은 차이가 있으나 오히려 이 점이 상보적 연관 관계를 북돋운다.


  문학은 인간의 갈등과 모순을 다루며 인간 존재의 문제를 탐구한다. 이러한 인간다운 삶을 규명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법이 포함된다. 아울러 비규범적인 소수자의 출현에 문학과 법학은 그를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간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대처하려 한다는 태도가 비슷하다. 그렇다면 문학이 법학에 그리고 법학이 문학에 줄 수 있는 영향력이란 어떤 것인가? 문학이 법학에 줄 수 있는 영향력은 주로 법학도에게 긍정적 효과를 미친다. 법과대학의 정형화된 커리큘럼은 경직된 사고의 위협이 적잖다. 시험 점수를 잘 받기 위해서는 소수 입장의 학설을 취하는 것을 자제해야 안전하다는 식의 접근이 대표적인 사례다. 판례에도 소수 입장이 있으나 대개는 다수의 판례를 익히기 때문에 획일화된 가치판단을 낳을 공산이 크다. 문학에 등장하는 비규범적이고 비정형적인 인물을 접하면서 다양한 사고를 하는 계기로 삼을 수 있다. 법학이 문학에 줄 수 있는 영향력은 주로 비법학도에게 긍정적 효과를 미친다. 문학에 법의 요소가 녹아 들어가면 문학적 허구는 좀 더 개연성을 확보하게 되고, 법에 대한 막연한 반감을 눅이게 만든다. 법의 논리적 속성이 가미되면 좀 더 입체적으로 현실을 분석할 수 있게 된다.


  법리학이란 법철학과 법이론에 대한 이론적 탐구를 일컫는다. 이러한 법리학을 깊이 있게 이해하는데 문학이 이바지할 것이라는 기대에서 문학법리학이라는 용어가 나왔다. 이런 맥락에서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Martha Nussbaum)은 『시적 정의(Poetic Justice)』라는 저서에서 시인과 판사가 하나가 되는 세상이라야 공적 영역에서 정의가 세워진다고 역설했다. ‘공공의 상상력(public imagination)’을 주창하며 타인에 대한 인간적인 동정과 연민 없이는 법의 집행이 맹목일 수밖에 없다고 설파했다. 공공의 상상력은 문학 작품을 미학적으로 해석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질서의 변형을 모색하고 새로운 가치를 구상하는 등 적극적인 형성 작용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문학은 시대와의 불화를 겪으며 개인의 상상력을 공공의 상상력으로 탈바꿈한다. 문학이 품은 문제의식은 규범의 세계에 투영되어 개인의 연민을 사회적 연대로 확산시키는 역할을 한다.


  소설로 돌아가서 여기서 제기한 공공의 상상력을 발휘해 우리나라 경제참가율을 살펴보자. 선진국이 70%대인데 견주어 우리는 60% 수준이다. 이러한 부족분이 여성인력과 은퇴인력에 기인한 것이라고 진단될 때 노인인력 활용을 위해서 정년연장을 비롯해 다양한 노동 형태를 고안해 늘어난 평균 수명에 대처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변화는 노후 안정의 개념을 바꿀 것이며 노인이 일자리를 구할 수 있는 제도적 지원을 촉진한다. 또한 여성이 일자리를 얻는 것이 자연스러운 문화가 되면서 여성에게 기대하는 역할이 달라진다. 적어도 현모양처라는 규범의 강제성이 축소될 가능성이 높다.


  다른 관점에서는 지역 불균형의 문제점을 인지하는 계기가 된다. 지난 노무현 정부가 벌였던 행정중심복합도시와 혁신도시 같은 균형발전 정책은 수도권 과밀화에 대한 해소를 위한 노력으로 소설의 상황과 통하는 면이 있다. 참여정부의 견해에 따르면 수도권의 교통혼잡, 대기오염, 환경처리 등의 비용은 생산력 악화를 낳고 있으며 반대로 지방은 인구의 유출로 저비용이라는 효율성을 활용하지 못하는 문제가 생긴다고 본다. 이와 반대로 일각에서 제기된 수도권의 기능을 더 강화하자는 대수도권론이 있다. 소설이 보여준 공간의 문제는 대수도권론에 대한 비판적 논거를 마련해준다. 서울의 삶의 질 순위가 세계 하위권에 머무르는 실정에서 매력 있는 도시, 경쟁력 있는 도시가 되는 기준을 재설정하도록 이끈다.


  이처럼 소설은 규범이나 제도의 변화를 촉발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현시점의 처방에 급급한 미봉책을 넘어 장기적 안목에서 근본적으로 사고하는 힘을 길러주기 때문이다. 소설적 허구는 참신한 문제의식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기존의 문제의식을 극적으로 포장해 관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이 소설은 후자의 성격이 강하다). 이러한 창의성과 과장성은 법과 규범이 바라보는 시각과 어긋나기도 한다. 이처럼 소설적 허구가 빚어내는 공공의 상상력은 사회적 규범에 대한 성찰을 촉구한다.


  사회적 규범이라는 것도 결국 사회적 다수의 합의에 기초해 잠정적으로 약속한 제도적 허구다. 굳이 구분하자면 소설적 허구가 ‘있을 법한 세계’를 묘사한다면 제도적 허구는 ‘있어야 할 세계’ 혹은 ‘있었으면 좋은 세계’에 주안점을 둔다는 차이가 있겠다. 좀 더 나누자면 과학 소설은 ‘있을 수 있는 세계’에 좀 더 무게중심을 둔다고 할 수도 있다. 공공의 상상력이 새로운 사회적 규범으로 합의되기까지는 여러 절차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대개는 시간이 걸린다. 소설적 허구와 제도적 허구 사이의 시차를 살뜰하게 채우는 사회 구성원간의 열린 토론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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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분리 논쟁(2)

경제 2008. 4. 27. 22:52 |

3. 외국자본 어떻게 볼 것인가?

   정부가 금산분리 원칙을 수술하는 직접적인 원인은 정부가 소유하고 있는 금융 공기업의 민영화와 결부시켜 이해할 수 있다. 우리금융지주는 외환위기 때 휘청거리던 것을 예금보험공사가 공적자금을 투입하는 과정에서 정부가 최대주주가 되었기 때문에 민간 은행으로 전환하는 것이 불가피한 실정이다. 산업은행과 기업은행은 정책금융과 중소기업금융 등 공적 목적을 띄고 만들어진 국책은행이지만 효율성을 높이겠다는 목적으로 민영화할 계획이다. 그런데 이들 민영화 대상 은행을 인수할 만한 거액을 동원할 수 있는 전략적 투자자는 현실적으로 외국자본 아니면 국내 산업자본 정도다. 7개 시중은행 가운데 6개가 외국인이 주인이며 우리은행만이 정부 소유이다. 이로 말미암아 토종은행을 더 이상 외국자본에 넘겨서는 안 된다는 여론이 비등하고 있다. 민영화를 해야겠는데 국내에서는 사줄 곳이 없고, 외국자본에 내맡기기에는 부담스럽기 때문에 단계적인 금산분리 완화정책을 내놓은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금산분리 완화의 배경으로 제시하는 외국자본에 대한 방책은 앞으로도 금산분리 논쟁의 중요한 쟁점으로 부각할 것이므로 고찰하는 실익이 크다.


   2007년 외국 사모펀드인 론스타는 보유하고 있는 외환은행 지배지분(51%)의 매수계약을 홍콩상하이은행(HSBC)과 체결했다. 이에 따라 국부 유출 논란이 벌어지면서 금산분리 논쟁이 심화되었다. 외환은행이 HSBC로 넘어갈 경우 국내 금융시장에서 은행 민영화가 확대되고 국내 금융시장에 씨티그룹과 스탠다드차타드(SC)에 이어 또 하나의 강력한 외국자본이 등장하게 된다. 외국자본에 의해 인수되어 외국자본이 경영권을 행사하는 은행은 외환은행, SC제일은행, 한국씨티은행이다. 2007년 말을 기준으로 국민, 신한, 하나, 외환은행의 외국인 지분율은 81.33%, 58.13%, 75.10%, 80.72%다. 주주 구성에서 본다면 우리금융지주에 속한 우리, 광주, 경남은행, 민영화가 논의되는 기업은행, 지방은행 중 전북은행만 토종은행이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외국계 기관이 일정 부분 리스크를 감수하고 국내은행의 주인이 되었다는 점은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국내자본은 제도적으로 참여가 불가능했고, 엄청난 수익을 거둔 것에 비해 사회공헌은 전무하다는 점 등이 사회적 반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기간산업이라고 할 수 있는 금융산업의 주권을 외국인에게 빼앗기고 있기 때문에 국내 토종자본이 은행, 또는 은행지주회사를 인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산업자본의 금융지배 금지원칙을 완화하자는 주장이 적잖다. 금산분리 완화를 주장하는 이들의 가장 강력한 논거 가운데 하나다. 그나마 외국자본에 대해 독립성을 지키던 우리은행마저 곧 매물로 나오는 현실은 더 이상 외자에 국내은행을 내어줄 수 없다는 여론과 결합하여 큰 호소력을 갖는다. 금산분리를 유지하자는 입장에서도 이 부분에 대한 좀 더 명확한 대안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


   금융위는 론스타와 같은 사모펀드가 국내 시중은행의 경영권을 인수하는 것은 당분간 불가능하다는 입장이다. 투기자본보다 전략적 투자를 하는 곳만 유치할 것이라는 금융위의 자세는 일견 바람직하다. 외국자본에 맞서 국내 금융시장의 자주성을 확보하려는 시도는 그 자체로 수긍할 만하다. 국내자본이 역차별 받고 있다는 대표적인 예로 거론되는 론스타의 사례는 좀 더 면밀히 따져봐야 한다. 론스타의 경우 산업자본으로 비금융주력자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금융당국이 돈이 급해 대주주 적격성 심사(fit & proper test)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지적도 엄연하다. 2003년 론스타가 외환은행을 인수할 때 부실금융기관의 정리 등 특별한 사유가 있다고 인정되는 경우에 한해 적용되는 은행법상 예외조항을 적용받았다. 론스타의 외환은행 인수과정에서의 불법적인 문제와 먹튀 논란은 아직도 진행 중이지만 대주주 자격을 심사하고 주식취득을 승인한 정부와 감독기관에게도 분명한 책임이 있다.


   직관적으로 볼 때 외국자본의 국내 은행산업 진출은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동시에 지닌다. 먼저 은행산업 내 경쟁을 촉진하고 금융서비스 개선 효과를 가져다준다. 선진금융기법을 전수받아 금융산업의 발전을 도모할 수도 있다. 또한 감독 및 법체계 등을 포함한 금융시장 하부구조 개선을 통해 국내기업의 체질 개선에도 이바지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외환위기 이후 국내에 진입한 외국계 은행에 대한 평가는 그리 후하지 못하다. 제일은행은 뉴브리지 캐피탈에, 한미은행은 칼라일에, 외환은행은 론스타에 팔았는데 이들 외국자본은 사실상 은행업의 경험이 없는 사모펀드일 뿐이다. 이 펀드들은 부실기업을 인수하여 구조조정한 후 되파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러한 사모펀드는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은행경영을 기대할 수 없고 선진금융기법에 대한 전수도 미비했다. 외국계 은행이 보여준 안전자산 위주의 자산운용은 국내 금융산업의 안정성 측면에서는 기여를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보수적인 자산운용은 은행의 자금중개기능을 약화시켜 실물경제의 활력을 불어넣는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게 만든다. 특히 외국계 은행이 중소기업금융에 인색할 우려가 크다. 외국자본의 입장에서는 우리나라의 중소기업에 대해 정보의 비대칭성에 노출되어 있어 실제 리스크보다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이와 더불어 외국계 은행이 우량고객을 선점하게 되면 서민금융 역시 위태롭게 된다.


   이처럼 외국자본은 지금까지 그 순기능을 다하지 못했다. 하지만 외국자본이 못했다고 국내 산업자본만이 대안으로 내세우자는 결론이 논리적으로 도출되지는 않는다. 은행을 인수하는 주체가 은행을 얼마나 잘 경영할지를 판단하는 것이 우선시되어야 한다. 국내 산업자본은 증권회사나 보험사 등 비은행 금융회사를 이미 많이 소유하고 있다. 이 회사들을 세계적으로 키우기보다는 재벌의 지배구조 유지라는 목적으로 금융회사를 거느린 것이 아니냐는 의혹은 여전하다. 국내 산업자본이 금융산업을 발전시킨다는 믿음이 없는 판국에 민족주의 논리에 따라 산업자본만이 유일한 대안인 것처럼 몰고 가서는 곤란하다. 보다 근본적으로 은행에 꼭 주인이 있어야 하느냐 하는 문제도 생각해봄직하다. 앞서 살펴봤듯이 세계적인 민간 상업은행 가운데 민간 지배적인 대주주가 소유하는 곳은 많지 않다. 굳이 주인을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주인이 될 자격이 모자란 주체에게 은행을 넘기는 부정적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외국자본이 과도하게 국내은행을 좌지우지한다면 문제다. 정부가 은행을 지배하는 것도 문제고, 산업자본이 은행을 지배하는 것 역시 문제가 있다. 은행의 소유구조와 관련해서 외국자본, 산업자본, 정부 모두 정답이 아니라는 원칙이 필요하다. 세 주체 가운데 어느 것이 그나마 나은가 하는 식의 접근을 넘어 여러 가지 소유구조를 모색할 필요가 있다.


4. 금산분리 정책이 나아갈 방향은 어디인가?

   금산분리에 대한 명확한 해답은 없다. 다만 금융위의 방안이 완화 일변도에 치우쳐 있다는 점에서 보완책과 향후 과제를 찾아볼 필요는 있다. 우선 국내 금융자본 육성을 중장기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그동안 금융전업기업가 제도 등을 통해 금융자본 육성을 시도하였지만 실패했다. 현실적으로 산업자본과 연계하지 않은 별개의 금융자본의 존재 가능성에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아직은 그 규모가 작지만 자본시장통합법 등의 시행으로 비은행 금융회사의 규모가 커질 경우 순수하게 금융회사로만 이루어진 금융그룹이 출현 가능하다. 은행과 은행, 은행과 금융회사 간 상호 주식 보유(cross-shareholding)를 통해 산업자본이나 외국자본을 대체할 만한 구조를 형성할 수도 있다. 금융자본-산업자본-외국자본 사이의 견제와 균형을 통한 동반성장을 추구해야 한다. 물론 비은행 금융회사를 운용하고 있는 산업자본에게 은행을 거느릴 수 있게 만들어 시너지효과를 누리게 해야 한다는 주장에도 일리가 있다. 하지만 산업자본이 들어가지 않은 금융전업자본의 생성 가능성을 미리부터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은행 민영화 시 인수자금이 부족한 금융자본에게 매각하거나 또는 국민주 형태로 민영화할 경우 할부(installment) 방식의 매각을 고려해 볼 수 있다. 할부방식의 매각은 영국,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 등의 국가에서 정부지분 매각 시 활용한 방안으로 2단계에 걸쳐 인수가격을 지불하는 방식이다. 매각대금이 완불되기 전이라도 투자자들은 배당을 받을 수 있어 많은 소액투자자들을 유인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지분 분산효과가 발생한 사례가 있다. 이처럼 기관투자가에 다수 소액주주를 융합시키는 방안을 적극 모색해야 한다. 기존의 재벌들이 소유와 지배구조를 개선하여 금융그룹과 제조업그룹으로 그룹 내 기업들을 분할한 뒤 그 중 금융그룹이 은행을 인수하는 방법도 생각해볼 수 있다.


   하지만 현재 우리나라의 재벌 문화를 봤을 때 이 제안이 실현 가능한가에 대해서는 확답을 내리기 어렵다. 삼성의 경우 삼성물산을 정점으로 해서 제조업체들을 묶은 산업지주회사와 삼성생명을 정점으로 해서 카드, 증권을 엮은 금융지주회사로 나뉘는 시나리오가 제기되고 있는 만큼 향후 움직임이 주목된다. 이런 경향이 두드러질수록 산업자본의 금융화(financialization)가 급격하게 진행되는 수위를 조절해야 한다. 금융업이 발달해서 제조업이 위축되는 선진국에서는 실물부문에 대한 투자가 줄어들어 실업이 늘고 양극화가 심해진다. 금융기업의 성격이 강해진 GE가 금융화 축적 전략을 채택하면서 13만여 명의 생산직 노동자가 해고한 사례가 있다. ‘88만원 세대’라는 용어가 유행하는 우리의 상황도 그 굴레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제조업의 고용창출이 한계에 다다랐다며 금융을 비롯한 서비스업에 몰두하자는 주장은 금융화가 몰고 올 위기를 간과한 처사다. 금융화가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라면 산업 공동화를 가속화하지 않는 선에서 관리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다음으로 금융감독 체계를 굳건히 확립해야한다.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표방하고 나선 이명박 정부는 규제완화책에 몰두하고 있다. 대기업에 대한 정부의 신뢰는 어느 때보다 높으나 대기업의 잘못된 관행이 최근 들어 시정되었다는 증거는 찾기 힘들다. 규제완화가 가장 효과적인 단기 처방임을 인정하더라도, 사후 감독을 강화한다는 원론적 입장을 되풀이 하고 있는 금융위는 보다 실질적인 중장기 대응책을 제시해야 한다. 미국의 서브프라임(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에서 여실히 드러났듯이 금융감독이 선진적인 국가에서도 금융혁신으로 말미암아 다양한 위험들이 끊임없이 생성되는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안이한 자세가 아닐까 싶다. 우리에 견주어 금산분리가 엄격하지 않은 선진국들에서 산업자본이 금융회사를 경영하는 예를 찾아보기 힘든 것은 엄격한 금융감독이라는 사후적 감시가 잘 되어있기 때문이다. 과연 우리의 금융감독 체계가 어느 정도 수준인지를 세밀하게 따져봐야 한다. 카드사에 대한 규제완화로 400만 명의 신용불량자가 양산되고, 론스타의 대주주 적격성 논란이 아직도 진행 중인 경험에서 보듯이 금융감독 기능에 대한 불안감은 막연한 수준에 그치지 않는다.


   금융정책과 금융감독 기능을 통합한 현재의 금융위는 관치금융의 우려를 계속 자아내고 있다. 정책적 실패를 은폐하기 위해 감독권 발동을 태만하게 하는 감독유예 현상(supervisory forbearance)에 대한 걱정도 높다. 이럴 때일수록 은행의 지배구조 개선에 대한 단호한 모습을 보임으로써 시장의 규율은 철저히 준수하겠다는 신호를 보낼 필요가 있다. 정부안대로 금산분리가 완화될 경우 사외이사와 감사위원회 등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지니 이에 대한 입법적 보완도 절실하다. 또한 은행 및 비은행 금융회사에 서로 다르게 규제하고 있는 부분을 어느 정도 통일시켜 산업자본이 규제 차이를 선택적으로 이용하는 규제차익(regulation arbitrage)을 차단해 철폐되고 남아있는 규제의 실효성은 확보해야 한다. 아울러 가장 중요하면서도 번번이 실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바로 경제사범에 대한 처벌 강화다. 회계부정을 저지른 미국 엔론사의 최고경영자가 25년형을 선고받은 것은 시사해주는 바가 많다.


   궁극적으로는 금융자본과 산업자본 모두 해외시장 개척을 권장해야 한다. 국내은행의 해외진출 비중(국내은행 총자산 중 해외점포 자산의 비중)은 2006년 2.3%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자본시장통합법의 시행으로 투자은행(IB)은 은행과 증권사의 블루오션으로 떠오를 전망이다. 현재 국내은행의 수익 중 투자은행 부문의 비중은 3%에 불과한 실정이다. 보다 큰 위험을 안고 높은 수익을 추구하는 투자은행 부문의 비중을 높이기 위해 위험 부담을 안을 수 있는 자본금을 크게 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논리가 반드시 산업자본의 참여를 촉구하는 쪽으로 나아가지는 않는다. 이동걸 한국금융연구원장은 “눈높이를 낮출 필요가 있다. 국내 금융회사들이 지금 당장 세계적인 투자은행(IB)으로 성장할 수 없다. 우선 국내 자본시장에서 소외받고 있는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기업 공개, 상장 업무, 인수·합병 같은 투자은행 업무를 해가면서 실력을 키운 뒤 국제적으로 나가야 한다.”라고 말했다. 골드만삭스 대신 실버만삭스를 제안한 그의 주장을 음미할 만하다.


   산업자본에게도 외국은행 M&A에 참여하는 것을 허용하는 방안을 전향적으로 검토해볼 만하다. 국내 산업자본이 보유한 잉여자본을 외국 우량 금융회사 투자에 나서도록 제도화할 필요가 있다. 꼭 은행업이 아니더라도 증권, 보험사를 소유한 대기업들이 많은 만큼 진출에 큰 장벽은 없어 보인다. 싱가포르의 테마섹(Temasek)처럼 국외 금융업의 글로벌 경험을 쌓게 만드는 셈이다. 성공적으로 외국은행 경영을 해낸 산업자본에 한해 국내은행과 국경 간 M&A를 허용해 국내 은행산업의 글로벌화를 촉진하는 기폭제로 삼는다. 이러한 절차를 통해 금산분리 완화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키고 검증된 실력을 다시 국내로 도입하는 선순환을 노릴 수 있다. 금융위의 완화 방침 가운데 3단계는 아직 구체적인 일정이 잡혀있지 않다. 사회적 합의가 여의치 않을 경우 장기화 되거나 무산될 여지도 있다. 이러한 국내 일정에 얽매이기보다는 좀 더 적극적으로 해외로 눈을 돌리는 과감함이 요구된다. 국내 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이 글로벌 금융시장에서 결합하여 국내의 금산분리를 극복하기 위해 나라 밖에서 만나는 흥미로운 발상의 전환이다(박동창, “‘한국형 테마섹’이 금산분리 해법”, 매일경제, 2007.07.16. 참조).


   두서없이 살펴봤지만 금산분리 논쟁은 파고들수록 백가쟁명 백화제방(百家爭鳴 百花齊放)이다.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비율과 조합의 문제다. 다양한 상상력을 발휘해보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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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개혁연대 http://www.ser.or.kr/
금융위원회 http://www.fsc.go.kr/
전국경제인연합회 http://www.fki.or.kr/
프레시안 http://www.pressian.com/
한국금융연구원 http://www.kif.re.kr/

Posted by 익구
:

금산분리 논쟁(1)

경제 2008. 4. 27. 22:24 |

이번 학기에 듣는 금융론 에세이 과제로 냈던 글입니다. 후배 용철이와 공동으로 작성했습니다. 특히 2장은 용철이의 손길이 가장 많이 닿아 있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하게 된 과제물인데 예전만큼의 의욕이나 열정이 녹아 들어가 있지 않은 것 같아서 반성하는 의미에서 자주 찾아보려고 여기다 올립니다. 사실 어차피 다 짜깁기한 것이라 딱히 읽을 만한 내용도 없고요. 저와 용철이가 금산분리 정책에 대한 시각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딱히 결론이랄 것은 없습니다. 이 잡글을 쓰는데 가장 많은 영감을 제공해주신 이병윤 한국금융연구원 연구위원님과 현석원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위원님께 각별한 고마움을 표합니다.


1. 이명박 정부는 왜 금산분리를 완화하는가?

   이명박 정부의 금융정책을 총괄하는 금융위원회는 지난 3월 31일 이명박 대통령에게 업무 보고를 했다. 업무보고의 핵심은 산업자본의 은행 인수를 막는 현행 금산(金産)분리 제도의 손질이다. 금융위는 글로벌 금융강국 건설을 모토로 산업자본의 은행 소유를 막는 금산분리 규제의 완화, 금융지주회사의 설립 활성화, 산업은행의 민영화 등에 역점을 두고 있다. 금융위는 3단계에 걸쳐 금산분리 완화를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1단계는 사모펀드(PEF)와 연기금의 은행 지분 보유규제를 완화해 산업자본이 간접적으로 은행을 소유할 수 있게 한다. 2단계로 현행 4%로 제한된 산업자본의 은행 지분 보유한도를 상향조정한다. 3단계로 법률에 규정된 보유한도를 폐지할 방침이다. 금융위는 산업자본 소유한도 4%를 놔두고 1단계만 실시할 경우 실효성이 없다는 고려 하에 연내에 1단계와 2단계를 함께 시행할 가능성이 높다. 금융위는 이와 더불어 보험ㆍ증권지주회사 등 비은행 금융지주회사가 제조업체 등 비금융 자회사나 손자회사를 소유할 수 있게 할 예정이다. 금융지주회사에 대한 자회사 규제를 풀어 대형 금융그룹의 출현을 유도한다는 구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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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산분리는 산업자본과 금융자본의 결합에 의한 폐해를 막기 위해 산업자본의 금융산업의 지배 또는 금융산업의 산업자본 지배를 제한하는 규정이다. 대기업이 은행에 예치된 고객의 돈을 제멋대로 대출해 쓰거나 또는 은행의 풍부한 자금을 이용해 경영권을 확보하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에서 만들어졌다. 은행법 제16조의 2에서는 비금융주력자는 금융기관의 의결권 있는 발행주식총수의 100분의 4(지방금융기관의 경우에는 100분의 15)를 초과하여 금융기관의 주식을 보유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4% 정도의 지분이라면 은행을 좌지우지할 수 없으리라는 판단에서다. 또한 금융산업의 구조개선에 관한 법률과 공정거래법에서는 명시적으로 금산분리를 규정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금융자본의 일반산업 지배를 막겠다는 취지가 녹아 들어가 있다. 기실 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의 구분 여부는 나라마다 다르다. 스위스와 같이 전혀 구분하지 않는 나라도 있지만, 미국처럼 엄격하게 구분하는 나라도 있다. 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을 엄격하게 구분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벗어날 필요는 있겠으나 우리와 여건이 다른 외국의 사례를 추종하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참고로 기획재정부는 국책은행 민영화 방안으로 ‘메카뱅크’안을 내놓았다. 산업은행, 기업은행, 우리금융지주를 통합한 뒤 민영화자는 기획재정부의 안은 금융위와 이견을 보이고 있다. 금산분리 완화만이 유일한 방책이 아닌 셈이다.


   2007년 11월 전국경제인연합회와 서강대학교 부설 서강시장경제연구소가 공동으로 금융전문가 184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에서도 현행 금산분리 정책에 대한 찬반이 갈렸다. 현행 금산분리 정책이 우리나라 금융시장의 효율성과 금융제도의 안정성을 제고하느냐는 질문에 ‘동의하지 않는다’가 42.9%, ‘동의한다’가 40.2%로 팽팽하게 맞섰다. 금산분리 정책의 개선 방향에 대해서는 ‘현행보다 강화’가 7.6%, ‘현행대로 유지’가 25%, ‘현행보다 완화’가 39.1%, 은행과 산업 분리로 범위를 축소(은산분리)가 17.9%, ‘분리법안을 폐지’가 10.3%로 다채로웠다. 현행보다 완화해야 한다는 의견이 67.3%에 달하지만 완화 방안에도 편차가 큰 편이다. 노무현 정부 시기인 2004년 1월에 발표된 ‘산업자본의 금융지배에 따른 부작용 방지 로드맵’의 ‘7대 실천 과제’에 대한 동의 여부를 물어 본 결과 ‘동의한다’는 의견이 평균 64.2%로 나타났다. 이로 미루어 볼 때 금산분리가 완화된다 하더라고 그에 따른 부작용 방지 대책을 마련해야한다는 의견임을 알 수 있다. 금융전문가들 사이에도 의견이 엇갈리는 것으로 보아 이론적으로나 실증적으로 금산분리 찬반에 대해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옳다는 것을 뒷받침해주지 못하고 있다.


   금융위의 조치가 가시화된다면 국내 주요 기업들 가운데 은행 경영권 인수 의사를 표하는 곳이 조만간 등장할 것이다. 내년 이후 추진되는 산업은행 및 우리금융지주 민영화에는 국민연금 등 연기금과 사모펀드를 앞세운 산업자본이 뛰어들 전망이다. 사모펀드를 통한 재무적 투자를 통해 미리부터 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려 들 수도 있다. 금융위의 방침이 오히려 글로벌 스탠더드에 배치된다는 시민단체의 반발도 거세다. 2007년 경제개혁연대는 ‘세계 100대 은행 및 보험사의 최대주주 분석’ 자료를 통해 세계 100대 은행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292개 산업자본 가운데 89.0%인 260개 산업자본의 지분율은 4% 미만에 불과하고, 산업자본이 실제 은행 경영을 지배할 수 있을 정도의 지분을 보유한 경우는 세계 100대 은행 중 4개뿐이라고 지적했다. 한국금융연구원의 보고서에서는 2006년 7월말 기준 세계 100대 은행 가운데 주식 소유구조가 공개된 91개 은행을 조사했더니 영향력 있는 주요주주가 없는 경우(지분율 10% 미만)가 52.7%인 48개로 나타났다. 산업자본이냐 아니냐를 떠나 애초에 은행을 특정 자본이 지배하는 경우가 드물다는 분석 결과다. 금산분리를 완화하는 것이 글로벌 스탠더드인지, 금산분리를 유지하는 것이 글로벌 스탠더드인지 논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전망이다.


2. 금산분리 논쟁은 무엇을 두고 다투는가?

   금산분리를 둘러싼 논쟁에 앞서 우리는 우선 금융회사가 여타의 제조업 등과 구분되는 특성을 가지고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 금융회사는 주로 자금의 중개를 담당하는 업무의 특성상 자기자본이 작고 타인의 자금을 가지고 영업을 하게 된다. 국제은행(Bank for International Settlement)에서 은행의 안정적 경영을 위해 권고하는 자기자본비율이 고작해야 8%에 지나지 않을 정도이다. 이처럼 금융회사는 자기자본 비율이 적다. 즉 대주주의 입장에서는 부실화에 뒤따르는 자기자본의 손해, 즉 부실위험이 적기 때문에 위험을 추구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하지만 경제 전반적인 파급효과를 감안해 볼 때 제조업체와는 달리 금융회사의 부실은 수많은 금융 서비스 이용자들과 금융시스템 자체의 안정성 등에 미칠 악영향이 크므로 보다 더 안정적인 경영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금융회사의 운용 자산은 현금성 자산이 대부분으로 유동성이 매우 높아서 산업자본이 이를 소유하게 될 경우 임의로 계열기업에 지원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 차입경영을 통한 무분별한 팽창이 금융계열사와 비금융 계열사 모두를 부실하게 해서 지난 외환위기의 주범이 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은행의 주된 역할 중 하나는 자원의 배분이다. 적절한 곳에 적절한 자금을 투입하고 부실 가능성을 평가하여 상시적으로 구조조정을 하는 것 또한 은행의 임무다. 산업자본의 금융자본 소유는 이와 같은 은행의 역할을 정상적으로 수행하지 못하게 할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이러한 특징으로 인해 일반적으로 위험을 추구하여 높은 성장을 추구하는 산업자본이 금융회사를 소유하고 지배함에 있어 제한을 두고자 하는 것이다.


   하지만 산업자본이 금융회사를 차지하게 될 경우 예상되는 유리한 점 역시 존재한다. 우선 규모의 경제를 통해 경영 효율성을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 있다. 또한 업무가 다각화되면서 다방면에서 창출되는 종합적인 시너지효과 또한 기대해 볼 수 있겠다. 경영효율성의 제고에 가장 주된 부분은 대리인 문제(Agent-problem)의 해결이다. 기업의 주인은 주주이며 주주를 대신할 경영자를 고용하여 기업을 운영하게 되는데, 이 때 주주의 통제 감시능력이 일정 수준에 달하지 못한다면 경영자가 기업 전체의 이익을 극대화하기보다는 사적 이익에 더 큰 유인을 느끼고 행동할 가능성이 있다. 우리나라 은행의 경우 과거 소유규제로 인해 경영을 통제하는 지배대주주가 존재하지 않아 경영의 효율성이 저해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은행 민영화 과정에서 공적자금 최대 회수라는 목표를 중시하는 입장에서 지배대주주의 존재를 옹호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현실적으로 은행을 소유할 수 있을 정도의 자금력을 가진 주체는 외국자본이 아니라면 산업자본 뿐인데 현재 우리나라에서 외국 자본의 지분이 너무 높아 금융 시스템이 외국자본에 지나치게 의존하게 될 가능성이 있어 산업자본에 그 자리를 주어 이를 막자는 주장이 있다.


   또 실물기업과 금융회사가 결합하여 유기적으로 기능한다면 규모의 경제뿐 아니라 범위의 경제까지 가능하게 하여 경영 효율성을 높이는데 기여할 수 있다. 결합기업의 다양한 인력, 정보, 설비 등 생산요소의 공동사용으로 규모 및 범위의 경제를 실현하고 기업제품 및 금융제품의 연계판매와 상호구매 등을 통해 판매수입을 증대시키는 것이 가능하다. 또 서로 상이한 지역권에 위치할 경우 지역간 경기변동 차이의 영향을 상쇄시켜 결합기업 수익의 안정성을 높일 수도 있다. 또 경영자 및 전문가를 서로 파견하여 우수경영기법을 상호전수 해주는 것도 가능하다. 금융회사의 첨단 관리기법에 능숙한 금융전문가가 기업의 재무관리 효율성 증대에 보탬이 될 수 있고 국제금융시장에서의 자금조달 경험에 많은 기업의 재무관련 전문가가 국제금융 업무에 있어 금융회사의 큰 힘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여신이나 유가증권 등의 자산 운용에 있어서 금융회사와 기업간 정보비대칭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 여신 건전성을 확보할 수도 있게 된다. 더불어 기업은 단기적 지표에 얽매일 필요 없이 보다 장기적인 안목으로 효율적 투자를 추구하여 성장잠재력을 확충할 수도 있게 된다.


   그렇다면 금산분리에 대한 주요 논쟁과 거기에 대한 찬반양론의 입장을 정리해보도록 하자. 도입부에서 언급된 통계자료에도 나타나 있듯이 금산분리에 대해서는 많은 이견이 존재한다. 금산분리에서 논의되는 주요 쟁점들은 대기업의 경제력 집중 견제, 규제의 역차별성, 금융시스템의 안전성, 국내기업간 적대적 M&A 대응 문제, 금융산업 발전에 대한 이해, 규제의 실효성에 대한 논쟁의 여섯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이상의 분류는 현석원, “금산분리 논의의 쟁점과 개선 방향”, 『VIP REPORT』 2007.10.02, 현대경제연구원, 2007. 재정리).


   먼저 규제의 역차별에 대한 논의는 가장 치열한 쟁점이다. 금산분리의 현행 유지를 주장하는 측은 산업자본이 진입하지 못하는 것 때문에 국내 은행이 해외에 인수되는 것은 아니라는 의견이다. 현행법에 의해 해외자본은 외국 금융자본만이 진입 가능한 상황인데 금산분리를 완화하게 된다면 그로 인해 해외 산업자본이 국내 시장에 진입할 우려가 있다. 이에 대해 금산분리의 폐지를 주장하는 측에서는 결국 이는 국내자본에 대한 역차별이며 그것 때문에 시중은행의 경영권이 외국자본에 넘어가게 되는 현상이 나타났다고 말한다. 하지만 외국자본과 국내자본의 은행 지배에 차별성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가져 볼 수 있다. 국내 토종자본이 은행을 인수한다고 하여 금융산업이 발전할 것이라는 근거는 그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외국자본을 국내자본으로 대체한다고 금융회사의 경쟁력이 강화되는 것이 아니며 금융회사의 경쟁력은 금융회사의 경영진과 이를 견제하고 감독하는 이사회, 감사위원회의 구성, 기타 금융산업의 영업관련 규제 완화를 통해 제고할 수 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이에 대해 별도로 후술하겠다(3장 참조).


   은행의 사금고화에 대한 우려 역시 크다. 산업자본이 금융회사를 소유하게 되면 순환출자 등을 통해 은행이 기업의 사금고가 될 가능성이 높아져 경제력이 대기업에 집중될 수 있다. 앞서도 말했듯이 유동성이 높은 자산은 임의로 운용하기가 용이하기 때문이다. 적은 자본금으로 금융회사를 설립하고 레버리지를 활용한 자금동원으로 기업을 확장하여 위험도를 높일 가능성도 제기된다. 평상시에는 멀쩡하다가 모기업이 경영위기에 닥치자 급속도로 금융회사가 부실화되었던 외환위기 당시 경험담도 언급된다. 이에 금산분리의 폐지를 주장하는 측에서는 시장 개방을 통해 국경을 넘어 무한경쟁이 이루어지고 있는 현 시점에서는 그와 같은 경제력 집중에 대한 우려가 과장되었다고 주장한다. 2007년에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작성한 ‘금산분리정책의 문제점 및 정책개선방향’에 따르면 최근 금융산업의 독립성과 건전성은 외환위기 이후 금융감독장치 및 준법감시인제도, 이사회제도 등을 통해 제도적으로 확립되어 있어 금융기관에서 거액의 자금이 불법적으로 대주주에게 이동한다면 이를 충분히 감지해 낼 만큼 시장 기능이 제고되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또한 금융계열사를 지배할 여력이 있는 수준의 산업자본은 자기 신용으로 직접 시중 금리보다 저렴하게 자금을 조달할 수 있기에 굳이 은행을 사금고화 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이와 연관해서 금융시스템의 안전성 문제에 대해서도 양측의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금산분리를 유지 하는 측의 입장에서는 산업자본인 모기업의 이해관계에 따라 금융회사의 자금이 무리한 확장과 위험한 투자에 이용되어 건전성과 안전성을 침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앞서 언급하였듯 은행은 자기자본비율이 낮고 대부분 타인의 자금으로 영업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대주주 입장에서 위험사업을 추구할 유인이 크고 그에 따라 부실 위험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반면 금산분리 폐지론자들은 외환위기 이후 우리나라 기업의 낮은 부채비율을 감안할 때 은행으로부터 기업이 무분별한 대출을 할 가능성은 낮다고 본다. 현재와 같이 국제화된 금융시장에서는 금융회사 소유 여부가 기업의 확장능력을 좌우한다고 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또 국내기업의 적대적 인수합병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적대적 M&A를 막기 위해 금산분리 규제를 완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금산분리 유지를 주장하는 측에서는 적대적 M&A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규제의 완화보다 기업지배구조의 개선을 통해 주주가치의 상승을 실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반면 금산분리 폐지 입장에서는 외환위기 이후 외국인 투자유치와 기업구조조정을 위해 M&A 규제를 대부분 철폐하게 되었고 이는 곧 국내 기업 경영권이 외국자본으로 넘어가게 되는 현상을 초래했다고 말한다. 독일이나 일본의 경우 이를 막기 위해 은행과 기업 간 상호주식보유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금융산업의 발전에 위한 선결문제에도 양측이 엇갈린다. 산업자본의 은행 소유보다는 금융산업 자체의 발전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 금산분리 유지 측의 입장이다. 은행의 건전성을 위해서는 궁극적으로 정부나 외국자본, 대기업으로부터 독립된 국내 금융자본을 육성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금산분리 폐지 쪽에서는 과거와는 달리 지금은 금융이 산업을 지배하는 시대이며 기업 자본 부족의 시대는 잉여자금의 시대로 바뀌었다고 본다. 금융 자체가 고수익 산업이고 성장 동력이므로 글로벌 시대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해외기업 인수합병과 프로젝트 파이낸싱(Project Financing) 등의 분야에서 금융 및 산업자본의 공조를 이끌어내 시너지효과를 극대화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와 같은 금융과 산업자본의 분리라는 규제가 실효성이 있는가에 대한 의문도 있다. 금산분리 폐지 입장에서는 영국에서는 인터넷뱅킹(Internet Banking)을 중심으로 한 은행사업을 유통산업에 허용하고 있고, 미국의 경우 제너럴 일렉트릭(GE)은 GE 캐피탈(Capital)을 자회사로, 지엠(GM)은 GM 파이낸스(Finance)를 운영하고 있는 예로 제시하면서 정보기술의 진전에 따라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로의 변화가 시작되고 있어 인터넷 발달에 따라 제조업이나 유통업에서 은행사업으로 진출하는 경우가 많다고 본다. 이에 반해 금산분리를 유지하고자 주장하는 사람들은 은행은 기업의 정보들이 집중되는 곳임을 강조하며 은행은 반드시 중립적이어야 하며 따라서 산업자본의 은행 진출에 대한 규제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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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와 번지와의 문답

사회 2008. 4. 26. 19:59 |
이번 학기 교양으로 듣는 <유가적 사유와 논어> 과제물로 냈던 것을 부분 수정해서 올립니다. 지당하신 말씀이 가볍게 느껴지지 않는 것을 보면 시절이 수상하긴 한가 봅니다.


<원문>
樊遲請學稼 子曰 吾不如老農 請學爲圃 曰 吾不如老圃 樊遲出 子曰 小人哉 樊須也
上 好禮則民莫敢不敬 上 好義則民莫敢不服 上 好信則民莫敢不用情 夫如是則四方之民 襁負其子而至矣 焉用稼
- 『논어』 <자로편>


<국역>
   번지가 농사짓는 일을 배우기를 청했는데 공자께서는 “나는 노련한 농사꾼만 못하다”라고 하셨다. 채소밭을 가꾸는 일을 배우기를 청했는데, “나는 노련하게 채소밭을 가꾸는 사람만 못하다”라고 하셨다. 번지가 나가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소인이로다, 번수여! 윗사람이 예를 좋아하면 백성들이 감히 공경하지 않을 수 없고, 윗사람이 의를 좋아하면 백성들이 감히 복종하지 않을 수 없고, 윗사람이 믿음을 좋아하면 백성들이 감히 성실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대저 이와 같으면 온 세상의 백성들이 그 자식을 포대기에 싸서 업고 찾아오게 되니, 어찌 곡식 심는 일에 힘쓸 수 있겠는가?”


<견해>
   정약용 선생은 공자가 번지의 질문을 물리친 것은 예의를 앞세우고 음식과 재물을 뒤로한다(先禮義 後食貨)는 뜻이라고 풀이했다. 『목민심서』에서도 “뭇사람을 통솔하는 방법은 위엄과 신뢰뿐이다. 위엄은 청렴함에서 나오고, 신뢰는 자기 마음을 다하는 데에서 말미암는다. 자기 마음을 다하면서도 능히 청렴할 수 있어야 이에 뭇사람을 따르게 할 수 있다(馭衆之道 威信而已 威生於廉 信生於忠 忠而能廉 斯可以服衆矣)”라고 논하며 공자의 유지를 받들고 있다(吏典6條 馭衆). 주희는 禮, 義, 信은 대인(大人)의 일이라고 했다. 여기서의 대인은 위정자를 말한다. 주희는 공자가 언급한 소인(小人)을 세민(細民), 즉 서민이라고 봤다.


   이 문장에서 통치자와 피통치자의 역할에 따른 사회적 분업에 대한 공자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공자는 농사일과 같은 기술과 기능을 하찮게 여긴 것이 아니라 사람마다 할 일이 따로 있다고 설파했을 따름이다. 공자의 사상은 사회 변화의 주체를 선비 계급으로 보았다는 점에서 일종의 엘리트주의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사회 변화의 방향은 엘리트를 위한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백성을 위한 것이었다고 긍정적 함의를 읽어봄직 하다. 후대에 이 뜻이 왜곡되어 노동을 천시하고, 백성에 대한 사랑 없이 군림만 하려는 문제가 나타나기도 했다. 위정자가 자신의 직분에 충실함으로써 백성들에게 이익을 안겨줄 것을 주문한 것으로 보인다.


   번지가 농사일을 물은 것을 두고 농가학파(農家學派)의 영향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농가는 농경을 권장하여 의식을 풍족하게 하는 것을 주요 골자로 하는데, 임금도 백성과 함께 직접 농사를 지어야 한다고까지 주장했다. 공자는 위정자가 직접 농사짓는 일에 관여하는 것보다는 도덕정치를 하는 것이 더 근본적인 일이라고 봤다. 번지의 질문을 다르게 보면 유학이 탁상공론(卓上空論)으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 물질적 이해에 대한 고려를 너무 등한시해서는 안 된다는 현실적 고민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학문은 실용적이어야 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공자는 실용을 위해 필요한 것은 기예가 아니라 그 기예가 온전히 발휘될 수 있는 환경이나 구조를 다지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아울러 공자가 농사짓기와 같은 보여주기 식의 정치를 비판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공자는 남에게 보이기 위한 학문인 위인지학(爲人之學)을 배척하고 자아실현을 목표로 하는 배움인 위기지학(爲己之學)을 중시했다. 같은 맥락에서 공자는 남의 기림을 받는데 급급해 이미지 고양에만 힘쓰는 것을 비판했다. 얼마 전 총선에서도 시장이나 농촌 현장에서 서민들의 애환을 듣는 것은 기본이고 심지어 목욕탕에서 유세를 하는 경우까지 있었다. 오늘날의 선거문화에서 이런 모습은 불가피한 점이 있으나 교언영색(巧言令色)을 넘어서 진정으로 국리민복을 위한 활동을 하라는 공자의 질정은 경청할 만하다. 예를 좋아하고, 의를 좋아하며, 신뢰를 좋아하는 기품 있는 정치인이 나타난다면 국민의 존경심을 불러일으키고, 자발적으로 따르게 하며, 진실한 마음가짐을 품게 할 수 있다.


   맹자도 “대인의 일이 있고, 소인의 일이 있다(有大人之事 有小人之事)”라고 말하며 정신 노동을 하는 노심자(勞心者)와 육체 노동을 하는 노력자(勞力者)로 구분했다(文公上 4). 번지의 경우와 비슷하게 진상(陳相)이라는 자가 농가인 허행(許行)에게 감화되어 맹자에게 질문한 것에 대한 답변 중에 나온 구절이다. 맹자는 자기가 쓰고 먹는 물건을 모두 직접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필요한 것을 교환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농사를 지으면서 다른 기술자들의 일을 겸할 수 없듯이, 정치나 교육 등 마음을 쓰는 일도 다른 일과 겸할 수 없음을 논증했다. 맹자는 성선설(性善說)에 입각해서 사람은 모두 성인이 될 수 있는 잠재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다. 양심을 밝혀서 실천하면 군자가 되고 육체적 욕구를 충족하는데 주력하면 소인이 된다고 주장했다. 공자의 사고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한서(漢書)』에 병길전(丙吉傳)에 나오는 문우천(問牛喘)의 고사는 공자의 가르침을 체화한 사례다. 승상이 된 병길이 어느 날 외출하다가 백성들이 떼지어 싸우는 무리들과 마주쳤으나 그냥 지나쳤다. 조금 더 가서 더위를 먹어 헐떡이는 소를 보고는 크게 걱정을 했다. 따르던 사람이 의아하게 여기자 병길은 백성들이 서로 살상한 사건을 처리하는 것은 담당 관리의 소관이며 재상은 연말에 그들의 고과를 통해 상벌을 시행하면 된다고 말한다. 이어 삼공(三公)은 음양의 조화를 담당하고 있으므로 계절의 기운이 절도를 잃을 조짐이 있으니 직분상 마땅히 큰 재앙이 닥칠까 염려해야 할 바라고 설명한다. 즉 높은 지위에 오른 사람에게 요구되는 자질은 대체(大體)를 살펴 조정하는 능력임을 깨닫게 해준다.


   결국 공자와 번지와의 문답에서 자신을 다스린 후에 남을 다스린다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을 유추해낼 수 있다. 유가에서는 개인의 도덕적, 학문적 자기완성 정도에 따라 정치활동의 범위가 점차 확대된다고 봤다. 수기는 치인에 선행한다. 『대학』의 8조목인 격물치지성의정심(格物致知誠意正心)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가 순차적인 점진주의다. 개인의 윤리적 각성을 시발점으로 하여 그 점차적 확산을 꾀해야 한다는 유가의 사유다. 혹자는 정치가의 도덕적 수양에 몰두한 나머지 치인보다 수기에 치중한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유가는 수기적 행위에 치열하면 할수록 그것은 동시에 치인적 행위에도 치열한 것이 된다고 인식했다. 도덕성이 높으면 높을수록 현실적 정치능력을 보유하게 된다고 본 셈이다. 다시 말해 도덕성이 곧 능력이라는 것이다.


   요즘 도덕성과 능력은 별개의 문제라는 이분법이 힘을 얻고 있다. 공자가 언급한 好禮, 好義, 好信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탈도덕 현상을 수기치인의 현대적 복원으로 극복해야 한다. 도덕과 능력을 유기적으로 통합한 도덕력(道德力)은 전통을 창조적으로 계승할 뿐만 아니라 오늘날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는 사회자본(Social Capital) 이론에도 부합한다. 도덕성과 능력의 상관관계를 명확히 드러내는 연구 결과는 아직 없다. 하지만 윤리적 기업에 투자하면 투자수익률이 더 높다는 해외의 실증 연구가 종종 나온다. 국내에서도 윤리헌장 제정과 더불어 전담 부서를 설치해 윤리경영을 적극 실천한 기업의 주가상승률이 그렇지 못한 기업에 비해 높았다는 분석이 있다. 윤리경영이 기업성과를 크게 악화시킨다는 연구 결과는 찾아보기 힘든 것으로 보아 윤리경영은 장기적으로 기업의 시장가치를 높인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기업에서도 윤리경영이 강조되는 경향에 비추어 볼 때도 공자의 입장은 유효하다. 전문지식에 그치지 않고 인문학적 성찰을 갖춘 국가 지도자가 절실히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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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학생이 선택하는 삶

잡록 2008. 3. 20. 02:44 |

<내 이름은 김삼순>이라는 드라마 첫 회에서 삼순이는 헤어진 남자친구에게 이렇게 묻는다. “날 사랑하긴 했니? 3년 동안 넌 한번도 사랑한다는 말을 해준 적이 없어. 날 사랑하긴 한 거야?”나도 내 자신에게 묻고 싶다. “공부하기는 한 거야?” 그간 기웃거리던 행정고시 공부를 사실상 접었다. 편 것도 없으니 접을 것도 없다고 해야 맞는 표현이겠지만.^^; 졸업하기 전에 재수강을 하기로 결심한 행정법총론 강의 때문에 실낱같은 인연은 유지되지만 내 마지막 전공 과목으로 시험 과목인 미시경제론이나 거시경제론 대신 금융론을 넣음으로써 내 진로가 바뀌었음을 비로소 추인했다.


나는 어떤 결심을 할 때 관련 책을 사는 고약한 버릇이 있는데 이번에는 시험과는 전혀 관계없는 성백효 선생님이 번역한 『맹자집주』와 『논어집주』, 기세춘 선생님이 쓰신 『노자 강의』 등의 책을 구매했다. 4학년 1학기씩이나 된 학부생이 제 진로를 백지상태에서 검토한다는 건 민망한 일이다. 그런데 나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이는 고상한 예외주의라기보다는 내 삶을 그나마 이어가는 원동력인 대책 없는 낙관주의가 자기방어를 위해 발동했을 따름이다. 학교 내에 있는 국제관계연구원에서 인턴 일을 시작한 것 외에 더 정해진 바는 없다. 티베트 독립을 희망하기 전에 내 일신의 안온함을 꾀해야 할 텐데 걱정이다.


어제는 친구의 꼬드김으로 어느 기업 채용설명회를 참석했다. 올해부터는 인턴사원을 뽑을 때 작년까지는 없던 영어면접을 본다는 말에 흠칫 놀랐다. 경쟁률은 20대 1쯤 되겠냐고 대충 물었다가 면박을 당했다. 0을 하나 더 붙여 200대 1이 될 수도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역시 날라리 경영학도로 살다 보니 냉혹한 자본의 논리를 아직도 깨우치지 못했다.^^; 생각 있으면 주말까지 자기소개서를 내라고 하는데 이 일을 떠나서라도 가까운 시일 내로 자기소개서라는 것도 좀 작성해봐야겠다. 도무지 소개할 것이 없는 내 지난날을 반성하는 기막힌 계기다.


얼마 전에 김우창 선생님의 <자기가 선택하는 삶>이라는 칼럼을 무척 감명 깊게 읽었다.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남을 이기기 위한 위인지학(爲人之學)보다는 자기 자신을 위한, 자아실현을 도모하는 공부라는 위기지학(爲己之學)을 추구하라는 가르침과 상통한다. 이 글에서 선생님은 우리 사회가 외면적 순응만을 요구하고 내면적 의미의 추구를 허용하지 않는다고 진단하셨다. 젊은 시절에도 자기 스스로가 의미 있다고 느끼는 삶을 추구할 여유가 없다는 한국 현실에 대한 탄식이 고맙다. 내가 대학을 선택하고, 스스로 직장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대학과 직장에 의해 선택 당하는 문제를 지적하실 때 적잖이 통감했다. 자기가 선택하는 삶은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에 두렵다. 그 두려움을 덮고도 남을 설렘이 없다면 선택을 할 유인이 많이 떨어진다. 설렘, 그간 잊고 있던 말이다.


사기업 취직에 대한 밀도 있는 고민을 해보지 않았다. 하지만 역지사지한답시고 기업의 채용담당자가 되어 나 같은 녀석을 뽑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일어날까를 상상하는 내 자신을 발견한다. 이 또한 내가 선택하는 삶이라기보다는 남에게 선택 당하는 삶의 전형일 게다. 이러한 역지사지가 잘못이라기보다는 그에 앞서 품어야 할 고민을 망각하는 것이 잘못이리라. 그러고 보니 내가 원하는 게 진정 무엇이었는지, 내 가슴을 뛰게 만드는 것을 찾아봤는지 부끄럽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렇다고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 마구 넘쳐나지도 않는다. 대개는 고운 정만큼 미운 정이 드는 모양이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숭고하면서도 비루한 밥벌이에 나서는 이 땅의 모든 생활인들의 애환이 슬몃슬몃 나를 맴돈다.


이렇게 피곤한 채 죽으면
영원히 피곤할 것만 같아서
그것이 문득 두려워서

죽고 싶도록 슬프다는 친구여
죽을 것같이 슬퍼하는 친구여
지금 해줄 얘기는 이뿐이다
내가 켜 든 이 옹색한 전지 불빛에
生은, 명료해지는 대신
윤기를 잃을까 또 두렵다

- 황인숙, <묵지룩히 눈이 올 듯한 밤> 中


새해 들어 가장 먼저 내 눈에 들어온 시다. 사실 나는 무슨 일이든 피곤할 만큼 열심히 해본 적이 없는 듯싶다. 후배들을 보면 이틀 밤도 잘만 샌다는데 나는 지금까지 밤을 새본 적이 없다. 진정한 의미의 밤샘이란 늦잠이나 낮잠도 없이 새벽 공기를 맡는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술 마시다가 아침 먹고 들어간 적이야 있지만 노는 걸로 지새운 밤을 자랑할 만큼은 내 낯짝이 두껍지 못하다. 모닝콜을 느지막이 맞춰놓고도 못 깨어나 늦잠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는 내 자신을 보니 문득 불안하다. 졸린 눈을 비벼가며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모든 걸 다 거두지는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다.


내가 흠모하는 기열형께서 “내가 아쉬움이 없는 건 아쉬움이 남을 짓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술회하는 말씀이 너무 멋졌다, 따라하고 싶다. 아쉬움이 남을 짓을 하면서 그에 대한 아쉬움조차 정직하게 느끼지 못하는 내 자신이 딱하다. 무지근할 때까지 내 자신을 닦달할 용기는 좀처럼 나지 않지만 혹여 그런 순간이 도래한다면 이 다짐들을 기억하길. 더 많이 웃도록 하자. 술맛도 건사하자. 그 무엇보다 기품을 잃지 말자! 노곤함은 늘, 언제나 과정이어야지 결과가 되어서는 안 된다. 나는 종종 나른함이 삶의 목적인양 사는 사람을 봤다.


지난 1월 11일 타계한 뉴질랜드의 탐험가 에드먼드 힐러리를 처음 접한 건 어린이용 명언집에서였다. “나는 기술적으로는 프로가 되고 싶다. 그러나 정신적으로는 언제나 아마추어이고 싶다”라는 말씀으로 기억하는데 인터넷 상에서는 “정신적으로는 아마추어, 기술적으로는 프로이고 싶다”라고 퍼져 있다. 프로가 맡은 일을 능수능란하게 처리하는 재주라면 아마추어는 순수함이나 겸손함을 가리키는 뜻으로 많이 풀이한다. 전문 분야의 솜씨에 국한되지 않는 통섭하는 능력이라든가, 인간미와 동떨어지지 않는 기예라고 봐도 괜찮다. 빼어난 기능인이 되기도 어렵지만 이를 넘어서려는 마음가짐도 필요하다.


시에 나오는 ‘-대신’이  어미 ‘-은’, ‘-는’ 뒤에 쓰일 때는 앞말이 나타내는 행동이나 상태와 다르거나 그와 반대임을 나타낸다. 즉 명료해져서 윤기를 잃어 가는 상황을 묘사한다. 명료는 전문적인 지식 같은 서늘한 유능함으로, 윤기는 우애와 신뢰 같은 정다운 인간미로 해석하고 싶어졌다. 힐러리의 경구에 대입해 본다면 프로의 소양을 갖추다 보니 아마추어적 감수성을 잃는 형국이다. “유능한 대신 부패하다”와 “부패한 대신 유능하다”는 뜻빛깔이 다르다. 이에 비추어 볼 때 시인은 잃어 가는 윤기에 방점을 찍으며 안타까워한다. 나는 훨씬 더 명료해져야 하지만 그 과정에서 윤기를 덜 잃었으면 좋겠다. 또렷해지면서도 매끄럽고 싶다는 바람은 얼마나 거대한가.


힐러리에게 에베레스트를 어떻게 올랐냐는 질문이 쏟아지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서 올라갔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면 운명이 손을 들어주기 시작한다는 그의 지론은 내 어깨를 짓누른다. 요즘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폐허다. 내가 스스로 헝클어뜨려 놓고 괜히 투덜거린 건 아닐까 싶다. 맹자는 “사람은 모름지기 스스로를 업신여긴 뒤에 남으로부터 업신여김을 받는다(夫人必自侮 然後人侮之)”라고 역설했다. 어질지 못한 사람(不仁者)은 스스로를 모욕했기 때문에 남의 미움을 받는다는 맥락에서 쓰인 표현이다. 맹자는 이어 『서경』 태갑(太甲)편을 인용하며 “하늘이 지어낸 재앙은 오히려 피할 수 있으나 스스로 만든 재앙은 피하지 못한다(天作孼 猶可違 自作孼 不可活)”라고 강조한다.


복학해서 듣는 논어 강의에서 내 가슴을 아리게 만드는 구절을 접했다. 어찌나 따갑던지 강의시간이 참 길게 느껴졌다. 공자의 제자 염구가 “선생님의 도를 기뻐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힘에 부칩니다(冉求曰 非不說子之道 力不足也)”라고 고충을 토로한다. 공자는 “능력이 부족한 자는 도중에 그만두게 마련인데 지금 너는 미리 금을 긋고 있구나(子曰 力不足者 中道而廢 今女畫)”라고 꾸중한다. 즉 중간까지는 가서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한계를 긋고 멈추는 자포자기한 상태를 질타한 말씀이다. 숨이 차서 헐떡거리는 남들의 모습을 보고 지레 겁먹어 몸을 움츠리고 발을 뺄 궁리만 했던 건 아닌가 부끄럽다. 획(畫)을 한 번 그었으니 이제 당분간 삼가야겠다. “미안하다, 여기까지라서...”라고 말하며 퇴각하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다.


영국의 산악인 조지 말로리도 에베레스트에 오르려 애썼다. 사람들이 왜 산에 오르냐고 묻자 이렇게 답했다. “그것(에베레스트)이 거기에 있으니까요(Because It's there).” It은 에베레스트를 가리킨 말이었지만 요즘은 산 일반으로 많이 쓰인다. 좀 더 확장해서 특정한 목표를 It으로 두고 매진하는 경우도 많다. 진부한 명언을 꺼내드는 까닭은 “Because It's there”를 외칠 기력이 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프로도, 아마추어도, 명료도, 윤기도 모두 놓칠 것만 같다. 단순히 내가 게을러서 생긴 문제는 아니다. 길을 잃은 모양이다. “안개의 軍團은 샛강에서 한 발자국도 이동하지 않는다(기형도, <안개> 中).” 안개 탓만 하지는 않으련다. - [無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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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대 대통령 취임식(사진 출처 - 노무현 홈페이지http://www.knowhow.or.kr)


떠나는 노무현 대통령님을 가엾게 여긴다는 건 황당한 일이다. 나는 그의 출세를 부러워할지언정 그에게 연민을 느끼지는 않는다. 그는 지난 5년 동안 최고의 권력을 누렸고, 퇴임한 후에도 월 1500만원의 연금과 경호원 및 비서관 등을 국가에서 지원 받는다. 이러한 예우는 그를 국가의 지도자로 삼았던 국민들의 품위를 위해서이기도 하다. 성공한 전직 대통령의 모범으로 꼽히는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을 본받으라고 여러 사람들이 충언하고 있다. 이 말에는 정치적 행보를 하지 말아달라는 주문도 적잖이 녹아들어 있다. 집짓기 운동으로 유명한 카터 전 대통령이 비정치적 행위만 했는지는 가늠하기 힘들다. 정치와 비정치를 가르는 기준은 애매하게 마련이다. 국가의 분배 구조에는 침묵하고, 자선 활동만 권장하는 식이라면 매우 기만적이다.


노 대통령의 임기 말을 조명한 MBC 스페셜 <대한민국 대통령> 2부에서 희망돼지 저금통 앞에서 목이 메는 장면에서는 가슴이 짠했다. 그는 옛 지지자들에게 미안함을 표할 기회를 너무 많이 놓쳤다. 그가 악의에 차서 지지자들을 배신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여러 차례 팽개쳐진 지지자들 가운데 끝끝내 그의 선의를 믿고 싶어하는 이들이 있다. 그네들 자신의 존엄성을 건사하고픈 심리 때문이라고 깎아 내리기 망설여진다. 적어도 경제만 살리면 그만이라고 외치지 않았던 분들에게 중독자나 광신도라고 헐뜯는 건 예의가 아니다. 노무현으로 상징된 가치의 소멸을 안타까워하는 측면이 있다. 열린우리당이 맥없이 무너진 후에 참여정부의 계승은 사실상 물거품이 되었기에 노무현 개인을 향한 편애에 의지하게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노무현이 그저 대통령이 되어준 것을 고맙게 여기는 지지자들도 있겠지만, 애증이 섞인 복잡한 감정으로 그를 보내는 지지자들이 더 많으리라.


고종석 선생님은 노 대통령을 개혁세력 전체를 분열과 절망의 나락에 빠뜨린 트로이 목마라고 비판했다. 노무현이 싫다는 분들이 달려간 곳이 한나라당과 이명박 정부라는 사실에 비추어 그런 비유가 나왔다. 그러나 중도 보수 혹은 개혁적 자유주의 세력은 목마를 성안에 들여서 망한 것이 아니다. 스스로를 모욕하고 나서 스스로 붕괴했다. 호남의 지역주의에 기대 연명했던 옛 민주당의 구접스러운 행각이나 올바른 패배를 마다해 정당 민주주의의 퇴행에 일조했던 옛 열린우리당 탈당파의 팔락거림은 노무현 탓으로 감추기에는 그 그림자가 너무 짙다. 아울러 노무현의 실패가 오늘날 넘실대는 도덕과 능력이 별개라는 낭만적(?) 사고와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지도 엄밀히 따져야 한다. 노무현이 우리 사회의 윤리적 감수성을 헝클어뜨린 분노를 고작 이런 식으로 표출한다면 정직한 절망 외에는 손쓸 방도가 없다.


노무현과 참여정부를 놓고 재평가가 이뤄질 거라는 견해에 동감한다. 그가 대한민국에 어떤 부정적 유산을 남겼는지도 차차 밝혀지겠지만 이제 노무현 때문이라는 핑계는 함부로 입에 담지 못하게 되었다. 노무현을 두고 벌였던 희생제의는 이쯤에서 그치고 노무현을 넘어설 정치 지도자를 찾는 노력을 해보자. 노무현에게 아쉬웠던 점을 메우면서 또 다른 매력으로 우리를 잡아끌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을 전망이다. 갖은 미움을 받았으나 현실 정치인 가운데 노무현만큼 대중성과 진솔성, 원칙과 가치를 제시한 교양 있는 지도자는 너무 드물다. 그 대중성은 굳건하지 못했고, 진솔성은 계산된 것이었으며, 원칙은 분열적이었고, 가치는 흐릿하다는 험담이 대개 온당하다고 수긍하더라도 말이다. 참여정부가 국민과의 소통에 실패해 민심을 잃었다는 주장이 많다. 노무현을 반겼던 서민에게 환멸을 불러일으켰던 뼈아픈 실책이다. 노무현을 실패한 대통령으로 인정하기 싫은 분들도 이 점에 대해 겸허한 성찰이 있어야 한다.


물론 일부 언론이 뒤틀린 해석도 모자라 신성한 사실마저 구부러뜨려 왔음은 또렷하다. 최근 일부 언론이 이명박과 그 둘레 사람들에게 너그러운 모습은 섬뜩하다. 앞으로도 이중 잣대가 춤춘다면 언론의 신뢰도는 다시금 흔들릴 게다(참여정부가 사실을 어그러뜨린 사례도 무수히 많다). 그네들이 장악한 기록을 넘어선 균형 잡힌 평가가 다만 시간이 지나면 가능할지 궁금하다. 편향된 사료를 남겨놓고 역사의 평가를 운운하는 건 비겁한 짓이다. 그 평가는 결국 노무현 정부의 긍정적 가치를 재발견하는 형식이 아니라 후임 정부의 실정에 견주어 부각될 상대적 돋보임에 그칠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당대에도 객관적인 성과 측정과 공정한 평가를 내렸는지를 살펴야 한다. 참여정부가 남긴 대통령기록물이 역대 정부에 비해 월등히 많은 까닭도 있는 그대로의 평가에 대한 욕망이 발현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고려 공민왕은 재위 기간 동안 『서경』 「무일(無逸)」편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고 한다. 「무일」편에 대한 강의를 들었으며, 이를 써서 신하들에게 나눠주거나 정무실에 걸어두도록 했다. 「무일」편은 주공(周公)이 조카인 성왕(成王)에게 남긴 정치적 조언이다. 주공은 군왕의 지위를 특권이 아닌 의무로 보아야 한다며 안일하지 말 것을 설파한다. 「무일」편은 왕의 근면 성실한 노력을 주로 강조하고 있다. 주나라 무왕이 기자(箕子)의 충고를 청하는 「홍범(洪範)」편은 군왕의 의사소통 능력에 주안점을 둔다는 의견이 있다(김영수, 『건국의 정치』, 이학사, 2006, 208~231쪽 참조). 군왕이 망국의 유신에게 국정을 묻는 자세가 인상 깊었기 때문인 모양이다. 기자는 무왕에게 ‘그대의 나라’라고 하지 않고, ‘그대의 왕가(王家)’라고 칭하며 주나라를 완전히 인정하지 않은 듯이 보이는데도 말이다.


부지런함과 의사소통은 양자택일의 문제라고 보기 힘들다. 우리네 지도자들은 마땅히 두 가지 덕목을 품어야 한다. 윤택(尹澤)은 공민왕에게 「무일」편을 강의하면서 “전하께서도 성왕이 능히 주공의 가르침을 듣는 모습을 본받으셔서 엄숙하고 공손하여 삼가고 두려워하시면 사직의 복이 됩니다(願殿下 法成王 能聽周公之訓 嚴恭抑畏 社稷之福)”라고 말한다(『고려사절요』 공민왕 6년(1357) 5월). 주공의 언설만큼이나 그 대화가 이루어지는 맥락을 배워야 한다는 강설이다. 다시 말해 기자의 말에 귀 담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주공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태도를 갖추길 바랐다. 「무일」편 끄트머리에는 주공이 훌륭했던 이전 왕들의 행실을 평가하는 대목이 나온다. 그들은 백성이 자신을 원망하고 욕할 때 스스로 마음가짐을 조심하여 ‘그 허물이 나의 허물이다’라고 말하며, 노여워하지 않았음을 칭송하는 내용이다. 노무현과 그의 사람들이 자기 탓에 서툴렀기에 그네들이 상처를 받는 것 이상으로 국민 가슴에 생채기를 냈다.


『목민심서』의 마지막 편은 ‘관직에서 물러남(解官)’이다. 벼슬에서 물러날 때의 자세를 서술한 내용인데 제6조는 ‘사랑을 남김(遺愛)’이다. 다산 정약용은 수령이 임지를 떠난 뒤에도 백성들로부터 기림을 받는 선정의 이상향이라 생각했다. 이미 떠난 뒤에도 사모하여 심은 나무조차 사람들의 아낌을 받는 것은 감당(甘棠)의 유풍(遺風)이라는 구절이 있다. 감당의 유풍은 『시경』에 나오는 이야기로 백성들을 위해 일하다 팥배나무 밑에서 쉬어간 지도자를 경애하여 그 나무조차 건드리지 않았다는 고사다. 노무현의 빈자리를 그리워하는 국민이 얼마나 될지는 잘 모르겠다. 노무현이 임기 중에도 실현하지 못한 가난한 사람들을 보듬는 일을 퇴임 후에 해내기를 기대하는 건 무모하다. 그는 강은 똑바로 흐르지 않지만 어떤 강도 바다로 가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고별사를 남겼다. 그가 염원하는 바다가 단지 힘센 벗들과의 어깨동무는 아니었으면 좋겠다. 노무현 대통령님을 좀처럼 미워하지 못했던 내가 드리는 마지막 덕담이다.


노무현을 만나고, 그의 시련에 같이 아파했던 지난날이 애틋하다. 그와 함께 내 젊음도, 고집도 저물었다. 내가 미련한 젊음 대신 유능한 점잖음을 택하고, 우직한 고집 대신 표변하는 영특함을 예찬할까 두렵다. 내 자신에게 얼마나 저항할 수 있을까. - [無棄]


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회는 더불어 사는 사람 모두가 먹는 것 입는 것 이런 걱정 좀 안 하고, 더럽고 아니꼬운 꼬라지 좀 안 보고, 그래서 하루하루가 좀 신명나게 이어지는 그런 세상입니다.
만일 이런 세상이 좀 지나친 일이라면, 적어도 살기가 힘이 들어서 아니면 분하고 서러워서 목숨을 끊는 그런 일은 좀 없는 세상, 이런 것입니다.

- 1988년 노무현 의원의 국회 대정부 질의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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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을 애도하며

문화 2008. 2. 18. 00:44 |

나는 2005년 5월 숭례문 광장을 기꺼워했다. 옹성까지 남아있는 데다 개인적으로 더 자주 지나가는 흥인지문도 이런 식의 광장을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올해 개통될 예정이다). 한창 진행중인 광화문 복원 공사가 잘 마무리되면 세종로에서부터 광화문까지 정면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문화유산의 복원과 개방이 미진하다고 생각한 나머지 너무 한쪽으로만 말하고 다녔다. 나 또한 충분히 품었어야 하는 안전 관리에 대한 의심을 소홀히 했다. 이번 사태로 말미암아 문화유산 개방 움직임이 움츠러들 가능성이 높아 안타깝다. 서울 시내 한 복판에 있는 숭례문마저 지키지 못한 마당에 산골벽지에 있는 문화유산들을 멋대로 열었다가 관리를 못하면 후손들에게 죄를 짓는 것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을 얻었다.


이번 소실과 문화유산 개방 사이의 개연성을 따지자면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충격이 좀 다독거려지면 꼼꼼한 관리 감독과 별개로 문화유산 개방은 더 이루어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사그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당대에 음미하지 않은 문화유산을 후손들에게 고이 물려준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문화유산의 전승은 그것을 향유한 추억과 감동이 함께 어우러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시행정으로 잃어버린 숭례문에서 배운 교훈이 고작 답사객들의 손발을 묶는 방향이라면 우리는 또 다른 전시행정의 늪에 빠질지도 모른다. 꾸준한 안전 대책은 어렵지만 관람객들의 다가감을 막는 건 쉽다. 예산 부족이라는 핑계로 쉬운 길을 선택하지 않을까 벌써부터 걱정이다.


머잖아 국보와 보물의 일련번호가 없어지기 때문에 숭례문이 국보 1호라는 상징성은 소멸될 처지였다. 1등이나 1호를 선망하는 한국적 정서 탓인지 그간 오랫동안 그 자리에 올라 있어 습관이 되었는지 모르겠으나 국보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부러 지워내기 힘들다. 국보 1호라서 좀 더 슬퍼하는 태도를 무턱대고 마뜩잖아 할 수만은 없는 이유다. 숭례문의 소신공양은 경제만 살리면 그만이라는 대한민국을 얼마나 막아낼 수 있을까. 나는 이 애틋함이 지속될지 자신하기 힘들다. 상상하고 싶지 않지만 만약 숭례문은 그나마 괜찮은 관광자원이라 여겨 각별히 아쉬워했다면 정말 남세스럽다. 돈이 되지 않는 문화유산에 대한 냉대는 앞으로도 이어질 테니 말이다. 2000년 5월 아파트 재건축 조합원들이 난입해 훼손한 풍납토성 경당지구의 치욕을 반복하지 않는 나라가 될 수 있을까.


이 땅을 살았던 사람들의 숨결에 귀천을 나누는 건 서글프다. 문화유산에도 차이는 숙명적이고, 차이는 자연스럽게 차별을 낳는다. 문화유산을 완상하는 저마다의 감상은 있게 마련이고 숭례문보다 더 보살피는 문화유산은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다. 이러한 개인의 취향과는 별개로 국보나 보물 같은 지정문화재는 국가적 관리의 우선순위를 확립함으로써 후손에게 좀 더 잘 물려줄 목록을 작성한다. 문화유산을 두고 벌어지는 국가적 차별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반면에 개인적 차별은 오히려 권장할 일이다. 가령 나는 국보나 보물은 아니지만 사택지적비가 무척 살갑다. 숭례문의 참화는 국가적 차별을 제대로 못했음을 방증하고 있으며, 개인적 차별을 희석시키는 부정적 효과를 낳았다(전국민이 숭례문의 상주가 되어 침통해하는 걸 보라). 보다 궁극적으로는 개인적 편애의 폭은 넓혀나가고, 국가적 편애는 좁혀나가야 한다.


이 분위기를 틈타 문화유산이 경제를 살리는데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이라고 역설하지만 그 디딤돌은 큼직한 몇 녀석뿐이다. 서울시청사 신축을 계획할 때 거치적거렸던(?) 덕수궁을 놓고 시민이 건넨 쌀쌀맞은 시선은 현재진행형이다. 태조 왕건의 사택지로 추정되는 철원군의 구 철원향교터에 대한 발굴작업이 예산 부족 등으로 연기되었다가 올해 들어 2년 만에 재추진된다는 소식은 지방지가 아니면 접하기 힘들다. 가까스로 확보한 예산 2억원은 숭례문 복원을 위한 추정예산인 200억원의 100분의 1이다. 딱히 경제적 가치가 없어 보이는 문화유산에 대한 시민들의 무심함은 국가 지정문화재에 대한 과도한 관심으로 모아져 아슬아슬하다. 거식증보다는 편식이 낫겠지만. 우리처럼 목조건축물이 많은 중국과 일본의 사례가 잇따라 보도되고 있는데 그네들을 움직이는 동기는 단지 경제적 이득에 대한 기대감만은 아니라고 본다.


타다 남은 기왓장 하나도 교육의 자료, 참회의 유물로 삼자는 목소리가 높다. 숭례문의 비극을 원망이 아닌 애정으로 치유하려는 노력이 고맙다. 이런 몸짓보다 문화유산의 보존과 활용의 균형을 찾는 일이 절실하다. 2007년 서울 중구청이 숭례문 관리에 쓴 예산은 1억 7,200만원이었으나, 숭례문 앞까지 행진하는 수문장 교대식 예산은 20억원이라고 한다. 방재 설비를 하나 줄이고 밤을 수놓는 조명을 하나 더 달고 싶은 마음을 눅이는 계기로 삼는다면 비싼 수업료이기는 하지만 얻는 바가 적잖다. 눈에 보이는 명확한 위험을 다스리는 것과 체계적인 방재 시스템을 구축하는 건 상충하는 가치는 아니다. 철길 옆에서 신음하고 있는 국보 안동 법흥동 7층 전탑이 기울어진 건 오래된 일이다. 이제 죽음을 방기하고 장례를 후하게 치르는 잘못을 저지르지 말아야 한다. 지금 혹독하게 겪고 있듯이 문화유산은 언제나 제 자리를 지키는 존재가 아니다.


일관성은 결국 일상성이다. 세계 주요 박물관 가운데 루브르는 유난히도 마니아가 많은 곳이라고 한다. 평범한 시민들이 모여 만든 루브르 후원회인 “루브르의 친구들”은 연간 30억 원이 넘는 회비로 루브르에 작품을 기증하는 등 물심양면의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문득 시민들이 성금을 모아 환수한 보물 김시민 선무공신교서의 감동이 떠오른다. 사건이 터지거나 언론매체의 선전에 기대어 이뤄지는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라 일상에 녹아든 문화유산 애호를 모색했으면 좋겠다. 프랑스 화가 밀레(J. F. Millet)는 “남을 감동시키려면 먼저 자신이 감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잘 된 작품이라도 결코 생명이 없다”라고 했다. 감동하려면 먼저 좀 알아야 한다. 싸이월드 첫 화면에 올려진 ‘황룡사 9층 (  )’이라는 퀴즈에 석탑 56%, 목탑 44%로 잘못된 응답이 더 많았다(2월 18일 0시 현재). 문화유산 사랑이 관념화되고 당위적인 구호가 된다면 경계할 일이다. 자신의 가슴을 흔드는 문화유산을 찾아보자. - [無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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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0월에 서울시 중구 답사를 할 때 찍었던 숭례문 사진입니다. 숭례문 광장이 있기 전이라 근처에 조성된 포토존에서 촬영했습니다. 당초 동선에 없어서 좀 돌아가야 했는데 이게 마지막이 되었네요. 애도하는 의미로 당분간 제 컴퓨터 바탕화면으로 쓸 예정입니다. 너무 슬퍼하지도 넘치게 성내지도 맙시다. 그 힘을 아껴서 궁궐이나 박물관을 한번 들려보는 게 어떨까요. 클릭해서 보세요.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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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케이블TV를 스타크래프트 게임 중계와 <거침없이 하이킥> 재방송을 챙겨보는 정도로 활용한다. 1월 3일 늦은 밤에 우연히 Mnet의 <아찔한 소개팅(이하 아찔소)>이란 프로그램을 접했다. 문득 내가 생애 첫 소개팅을 했던 추억이 떠오른다. 상대 여성분도 처음이라서 둘 다 완전 어색한 마음에 네 시간동안 한자리에서 수다만 떨었다. 침묵의 공백을 만들면 안되겠다는 강박관념에 오만가지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국립중앙박물관 관람, 몇 년 만에 확산된 중국어 열풍, 회계학에 대한 고충, 자기 학과공부에 대한 투덜거림, 재미난 마케팅 사례 소개, 한자와 한문 학습, 당시(唐詩)와 송시(宋詩), 여대와 공학의 차이, 중국 여행 이야기, 한국 고미술의 보편성과 특수성, 동양화 감상법, 향후 진로 고민, 문학과 비문학 독서, 대학 선후배 관계의 미묘함, 한국 고전문학 기억해내기, 각개인의 취향을 존중하기, 문헌정보학과 도서관 서가배치 등등의 이야기를 나눴다. 아찔소는 소개팅이 이렇게 역동적(!)일 수도 있구나 일깨워 줬다. 하긴 모두가 나처럼 입으로만 소개팅하고, MBC의 <공부의 제왕> 같은 프로그램만 있다면 삶이 얼마나 밋밋하겠는가.^^;


아찔소를 본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채널을 돌리다가 몇 번 스쳐본 적이 있기는 하다. 다만 이번에는 좀 유심히 지켜본 듯싶다. 아찔소는 킹카 혹은 퀀가를 두고 여러 도전자가 서바이벌 형식으로 데이트를 즐긴다는 얼개다. NBC TV에서 방영한 <For Love or Money>란 프로그램에서 사랑이냐 돈이냐를 선택하는 형식을 빌렸다. 애정과 금전이라는 영원한 주제를 극화해 호기심을 모은다. 아찔소도 그렇지만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아이디어는 상당 부분 미국 것을 본떠 만들었다. 미국 리얼리티쇼의 자극적인 구조들은 익히 알려져 있다. 독신 남녀가 자신과 맞는 속궁합 상대를 구하는 내용도 있다고 한다. 노골적인 성 상품화, 인간 상품화가 만개한다. 내가 본 방송은 스키장을 배경으로 스노보드 국가대표 경력이 있는 킹카에 여자 도전자들이 나섰다. 아찔소는 출연자들의 실제 감정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리얼리티를 통해 적잖은 인기를 얻었다. 취중진담을 듣고 싶어하는 것과 비슷한 심리다. 취해도 쉽게 제 마음을 드러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 모양이다. ‘페이크 다큐’가 얻은 인기도 그럴 듯한 엿보기에 대한 욕망의 표출이다.


집에서는 ComedyTV가 나오지 않아서 <애완남 키우기-나는 펫>이라는 프로그램을 보지는 못했다. 연하남이 능력 있는 연상녀 집에서 반려동물 같은 활약을 하는 장면을 담는다는 이 프로그램의 설정은 듣는 것만으로도 신기하다. 계약 동거와 다를 바 없는 소재가 방송될 만큼 세상은 많이 달라졌다. 리얼리티쇼가 한국에서 수용 가능한 극한을 보는 듯싶다. 케이블TV의 선정성 논란은 피할 수 없지만 지상파와 케이블TV에 동일한 잣대를 들이댈 수 없다는 건 또렷하다. 심의라는 정의의 밧줄로 못된 상상력을 옥죄려는 시도를 삼가야 한다. 무턱대고 천박하다고 투덜거리기 전에 케이블TV의 자체 제작 노력을 칭찬하고 북돋울 필요가 있다. ‘케이블 자체제작 드라마’의 줄임말인 ‘자드’라는 새로운 말까지 나왔는데 일단은 긍정적이다. 선정성으로만 승부하는 프로그램이 있기는 하겠지만 역량이 쌓이다 보면 볼만한 프로그램을 만들어내 우리 사회의 다채로움에 이바지하리라 기대한다. 깊이를 경쟁하다 보면 넓음도 경쟁할 테니 말이다. 틈새시장 개척은 소비자를 행복한 고민에 빠뜨린다. 아직 실망하기에는 좀 이르다고 생각한다.


내가 봤던 아찔소 스키장편에서 여성 도전자에게 집단적으로 눈을 던져놓고, ‘눈 맞아야 얼마나 아프겠어요’라고 말하는 킹카의 태도는 아슬아슬했다. 커플 선정이 끝나고 선택받지 못한 여성 도전자들이 뒷담화를 하는 시간에 “남자면 요즘 평균 키는 180이다”라느니, “너 운동했다면서 몸이 왜 그래?”하는 발언들도 뜨끔했다. 출연자들이 서로를 품평하는 대목에서 어느 고깃덩어리가 탐스러운가 살펴보는 정육점 손님 같은 인상을 받았다. 처음 만나는 남녀가 노천탕에서 데이트를 하는 장면에서는 무척 화끈거렸다. 킹카는 노천탕에 가서 몸매도 보고 몸도 녹이면서 편하게 데이트하고 싶다며 천연덕스레 여겼다. 제작진이 운동선수인 킹카의 우람한 근육질과 미녀들의 늘씬한 비키니 차림을 내보내 눈을 홀리는 효과를 노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게다.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았다고 해야 하나. 그런데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일주일이 지나 다음 회를 시청하니 점입가경이었다. 미스코리아 출신의 퀸카는 남성 도전자에게 생뚱맞게 미스터코리아 대회를 출전하기를 요구했다. 한 도전자는 민망한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자진 포기하기도 했다. 그는 뒷담화 시간에 “넌 내가 보기에는 변태과(科)인 거 같다”라고 쏘아 붙였다. 여하간 삼각팬티만 입은 두 도전자가 전문적인 훈련을 한 선수들 틈에서 기죽지 않고 열심히 포즈를 취하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엉겁결에 미스터코리아 대회에 참가한 도전자 두 분 다 몸매가 준수하다 보니 의도적인 코스 선정이 아닐까 의심스럽기도 하다. 퀸카는 한 도전자의 등에 컬러크림을 바르며 짜릿함을 느꼈고, 다른 도전자는 삼각팬티를 입기 위해 허벅지의 털을 깎기도 했다. 퀸카는 “복부에 지방이 약간 있는 거 같고요”라며 평가했는데 좀 마뜩잖았다. 결국 지방을 지적 받은 도전자는 퀸카와 몇 마디 섞지도 못하고 탈락했다. “퀸카 교양 좀 가져라”라는 탈락한 도전자의 일갈에 동감했다. 당최 그게 지방이면 나는 비곗덩어리란 말인가. 다시금 정육점을 연상했던 나의 비유가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따지고 보니 킹카나 퀸카들의 황당한 요구라든가 도전자들의 굴욕과 험담의 상당수는 짜여졌다는 심증을 굳혔다. 위선 권하는 사회에 대한 반발로 위악을 뽐내는 형국인지도 모른다. 위선이 리얼리티가 아니듯 위악 또한 리얼리티와는 거리가 있겠지만. 검색해보니 아찔소에는 위악적인 장면들이 많이 등장했다. 어느 정도 정해진 설정인가 보다. 드라마 등장인물을 구박하는 재미에 보는 사람이 있듯이, 매너 없는 출연자들의 행동을 투덜거리는 흥취도 시청자를 빨아들인다. 어느 편에서는 킹카가 여성들의 뱃살을 측정해 가장 두꺼운 여성을 탈락시키고, 도전자들을 성형외과로 데려가 견적을 뽑는 살풍경이 벌어졌다고 한다. 여성 도전자들에게는 비난을 퍼부으며 못되게 굴다가 킹카 앞에서는 갖은 교태로 이중적인 모습을 보인 한 출연자에게는 아찔소 악녀라는 별칭이 붙기도 했다. 그녀의 악녀 행동이 어디까지가 진실이냐며 공방이 벌어졌다니 너무 삭막하다. 진실을 최대한 밝혀야 하는 사안이 있는가 하면, 명백하게 만들 실익이 없는 것도 있다. 아찔소는 후자다. 우르르 달려가서 악플을 남기는 건 그리 갸륵한 행동은 아니다.


대학교 새내기 때 주철환 PD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다. 그 때 감명 깊었던 말씀 가운데 하나가 바로 립싱크하는 가수들을 뭘 그렇게 나무랄 필요가 있냐는 항변이었다. 가창력으로 승부해서 오랜 세월 인기를 얻을 사람도 있고, 반반한 외모나 현란한 율동으로 인기를 모을 사람도 있으니 자기 기준만을 내세우지 말자는 내용으로 기억한다. 이처럼 리얼리티쇼에 대한 가파른 기준을 들이대려는 분들에게도 이런 호소가 좀 통했으면 좋겠다. 말 나온 김에 리얼리티쇼에 대한 두 가지 비판을 검토해보자. 환상을 조장한다? 기실 정말 우리네 현실을 보려면 뉴스도 있고, 한숨 자아내는 시사다큐멘터리도 얼마든지 있다. 시청자들이 리얼리티쇼에게 기대하는 건 적어도 그런 사실성은 아니다. 조작된 실제이지만 거기서 영감을 얻고 의욕을 찾거나 한바탕 분풀이하려는 속셈이 더 크다. “인간은(혹은 남자는/여자는) 다 그렇지 뭐”라는 허무주의를 유포한다? 리얼리티쇼가 출연자들의 톡톡 튀는 개성을 보여주려고 애를 쓰고는 있다. 만화경처럼 여러 빛깔의 사람을 보여주려는 기획 의도가 오히려 전일적 가치를 부추긴다면 서글프다. 이 점을 두고두고 경계하는 게 방송으로서의 최소한의 정치적 올바름일 테다.


별 것도 아닌데 법석이라는 핀잔이 들려온다.^^; 외모 중심주의가 어제오늘 일도 아니지만 정형화된 남성성, 여성성의 강요를 마주칠 때마다 불편하다. 내가 못났기 때문이라는 점이 일차적인 이유임을 부인하지 않지만, 아름다움은 획일적이지 않음에서 출발한다고 믿는다. 좀 더 솔직해지자는 마광수 선생님의 외침이 떠오른다. “첫눈에 반한다는 것도 결국 외모에 반한다는 얘기 아닌가요?”라는 반문에 맞서기는 힘들다. 멋지고 예쁜 사람들을 보는 즐거움 역시 사람 사는 낙이긴 하다. 작가나 교수들의 지성미에 사로잡히듯이 얼짱과 몸짱의 육체미에 반하는 행위도 마냥 미워할 일은 아니다. 마 선생님의 유미적 쾌락주의는 예술의 본질이라고 일컬어지는 카타르시스를 정화가 아니라 대리배설이라고 정의한다. 나는 예술적인 대리배설만 가지고는 욕망을 채우지 못하는 시대가 될까봐 두렵다. 절제하기 위해서라도 점점 더 관음증의 창을 열어 놓아야 하는 묘한 이율배반이다.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그런 역할을 일정 부분 수행하고 있다. 끝이 있는 것으로 끝이 없는 것을 채우려는 안쓰러운 몸짓인지는 모르겠으나 다양한 대리배설이 창안되길 바란다. 다양성이야말로 리얼리티쇼가 첫 번째로 갖춰야 할 덕목이다. - [無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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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땅하지 않았던 자유

사회 2008. 1. 11. 02: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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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에 난 여드름이 결국 흉 질 모양이다. 발칵 짜증이 난다. 문득 1999년 계훈제님의 부고가 안쓰러워하던 어린 마음이 떠오른다. 나는 정치적 시비나 이념적 차이를 떠나 일평생 올바르게 살려고 노력한 사람의 쓸쓸함에 많이 상심했다며 습관처럼 둘러댄다. 그런데 여드름을 향한 내 역정의 강도는 계 선생님의 만년을 따가워함과 별 차이가 나지 않아 보인다. 내게 민주화라는 건 여드름과 비슷한 존재였단 말인가.


『젊음이여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에 소개된 황지우님의 「사육된 세대」를 읽다보니 새삼 스스럽다. 그렇지만 앞 세대 분들이 그토록 갈망하던 민주화는 궁극적으로 사사롭고 소소한 일에 분개할 수 있는 여유가 아니었냐며 투정을 부려본다. 무위지치(無爲之治)를 높게 친다지만 이 땅의 민주주의는 지독한 인위였고, 인공미였다. 엉덩이에 피멍이 들어 팬티와 살이 붙어 떨어지지 않았던 이들의 피딱지를 먹고 자란 대한민국. 나는 피딱지 대신 여드름을 걱정한다. 딱 그만큼은 세상이 좋아졌다.


07년 9월 당시 고려대 총학생회장은 성명서에다 “출교자들이여, 나와 함께 군대로 갑시다”라는 막말을 했다. 흔히들 민주화 투쟁을 하던 분들이 군사독재와 싸우다 군사독재를 닮아갔다고 곧잘 험담한다. 자칭 순수한 비운동권을 내세우던 그들도 미워하면서 닮아버린 듯싶다. 글쓴이는 서두에 “1987년 7월 한 학생의 저승 가는 길이 슬퍼서 100만 민중이 모였다”라고 썼다. 제 학교 선후배 동기들이 쫓겨나는 걸 찬성한다는 학생들과 더불어 사는 나로서는 21세 이한열의 죽음에 그토록 많은 필부가 서글퍼 했다니 어색하다. 80년 5월과 87년 6월을 꼭짓점으로 삼아 그 전후의 시린 이야기를 풀어내는 책에 등장한 내 또래의 사람들은 도무지 이상했다.


학교를 부러 그만두고 공장에서 일하기 위해 자격증을 딴다. 부모님께 스스로 떳떳한 삶을 살고 싶다는 편지를 남기고 가출한다. 그런데도 위장 취업한 여대생의 언니는 “세상이 얼마나 더러운지는 너보다 내가 더 잘 안다”라며 생활비를 보낸다. 이 요상함은 얼마나 야만적인 시대였는가를 방증한다. 동생을 내놓으면 형을 풀어주겠다는 연좌제가 섬뜩했다. 난사 당한 여성 시신 한 구를 놓고 두 어머니가 “내 딸이다”라고 다퉜다. 보안대 지하실에서 친구 이름을 적은 수첩을 씹어 먹어야 했다. 권인숙이 “간첩도 자궁에다 봉만 박으면 불어”라는 모욕을 당해야 했다.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거짓말을 하고도 부끄러운 줄 몰랐다. 내가 그 시대를 추체험했다면 거짓말이다. 불가해하지만 과거로만 돌리기 힘든 시절이다. 상당 부분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더 찾아보고 싶어 『광주오월민중항쟁사료전집』을 훑다가 콧등이 시큰해졌다. 화장실까지 포복해서 혀끝에 똥을 묻혀 가지고 선착순으로 와야 할 때 인간에 대한 믿음은 어디까지 흔들렸을지 아찔하다. 개미가 가득한 방에 넣고 개미가 온 몸에 달라붙게 했다는 대목에서는 구역질이 나왔지만 밥맛을 잃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았다. 저녁밥을 맛나게 먹었다. 타인의 고통을, 과거의 아픔을 제것처럼 느낀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인지 황광우님도 어떤 교훈이 아니라 과거를 생생하게 있는 그대로 만지게 하고 싶다고 말한다.


글쓴이는 육군교도소에서 자행된 폭력에 침묵한 자신이 싫다며 빵을 똥통에 던졌다. 후회가 되어 화장실에서 빵을 꺼내 먹을 때 인간 존재에 대한 정의를 고통스레 바꾼다. 아! 이 분도 나와 같은 인간이구나 하는 당연한 진리를 깨닫는다. 윤상원은 감칠맛 나게 노래를 잘 불렀고, 좋아하는 사람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일기를 써내려 간 로맨티스트였다. 김남주는 “먹고 살아야 하는데 어쩌겠어요?”라고 넋두리하며 호구를 이었다. 내가 이 분들을 근엄한 투사로만 관념화하고 박제화하지는 않았나 반성한다. 이네들도 맞으면 아프고, 죽으면 슬프고, 배곯으면 고픈 똑같은 인간이었다. 물론 황광우는 통닭 대신 논어, 맹자를 달라고 했다. 윤상원은 도청을 나서지 않았고, 김남주는 우유곽에 시를 새겼다. 그러나 이들의 초인다운 면모가 인간다움을 가리지 못한다. 이 분들이 총칼보다 무서운 사람이었기에, 끝끝내 인간다움을 버리지 않았기에 성스럽고 아름답다.


글쓴이는 “여전히 역사에서 ‘수’의 의미는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라고 선언한다. 셀 수 없이 반복되는 물방울이 바위를 뚫을 수 있다고 역설한다. 참 많은 젊은이들이 죽었다. <나이 서른에 우린> 가사처럼 세월의 무게라는 시험을 치르기도 전에. 요즘은 말하기가 너무 쉽다. 쉽고 쉬운 입을 놀려 이들을 잊지 않고 간직하는데 정성을 좀 보태면 어떨까. 물론 기억을 구걸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상식을 강요하지 않는 세상을 만들자고 이네들이 산화(散花)했으니 말이다.


이제는 용서하라고 한다. 나는 관용 권하는 사회는 식객의 도덕이며 마름의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용서 이전에, 관용 이전에 기억을 논해야 한다. 기억하는 사람의 수, 통감하는 사람의 수를 늘려야 한다. 군부독재가 너무 어이없었기에 한 편이 되었던 사람들이 지금은 갈라서고 있다. 이 분화는 역사의 발전이지만, 최소한의 공통 분모는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지금 누리는 자유가 본래 마땅한 것이 아니었음을 곱씹는다. 바위 앞에 선 달걀 같던 사람들을 오래도록 기억하겠다. 가난한 자가 등불 하나를 켜는 심정으로 앎과 삶의 숙명적인 거리를 좁히기 위해 하루를 살자. - [無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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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풍과 개인주의

잡록 2008. 1. 4. 03:45 |

외우(畏友) 박영선님의 미니홈피를 갔다가 술자리에 한번 불참한 것으로도 타인에게 무한한 서운함을 주는 자의 고독을 엿봤다. 각종 모임이 잦았던 영선님은 머릿수 채우기용 병풍 역할을 계속 해야 할지를 고민하셨다. 문득 존경하는 인호형께서 일전에 들려주신 말씀이 생각났다. 언젠가부터 당연히 와 있어야 하는 사람이 되면, 오라고 챙겨주는 사람이 없어지게 되는 역설. 조연도 아닌 하나의 배경이 되어서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가 보이지 않아도 어색하지 않은 존재가 된다는 절절한 경험담을 곱씹을 때마다 가슴을 친다. 열심히 끼다보면 안 끼어있게 되고 관객석만이 덩그러니 남겨진 그 감추기 힘든 허망함이랄까. 이건 대학의 과반 활동에 그치기보다는 사람살이의 한 정형화된 주기를 보여주는 듯싶다.


요즘에 내가 몸담은 대학교 과반에서 반 활동이 앙상해졌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해법을 찾으려면 원인을 알아야 하는데 문제의 원인으로 개인주의의 심화를 드는 경우가 많아서 좀 당혹스러웠다. 개인주의는 집단주의에 대한 반대, 이타주의에 대한 반대라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그런데 이타주의에 대한 반대를 일컫는 말로 이기주의나 자기본위와 같은 말들이 있다. 그래서 칼 포퍼는 개인주의를 집단주의의 반대라는 의미로만 한정시켜 사용하겠다고 개념 정의하기도 했다. 포퍼는 플라톤이 이타주의를 집단주의와 동일시하고, 개인주의를 이기주의와 동일시했다고 비판했다. 이기적 개인주의와 이타적 집단주의라는 두 가지 선택지만 놓고 고르라고 윽박지르는 잘못을 저질렀다는 이유다. 철학자 김용석 선생님은 개인주의를 “'나'라는 개인만 중시하는 것이 아니라, 나, 너, 그, 그녀 등 모든 개인을 중요시한다. 즉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의 가치와 존엄 그리고 권리를 전제하는 것”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이기주의에는 자기 존중밖에 없다면, 개인주의에는 이와 더불어 타인에 대한 배려가 있다는 언설이 솔깃하다.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가르는 관건은 나만 생각할 것인가, 나를 포함한 모든 개인을 생각할 것인가에 있다는 주장에 거개 동감한다. 이렇게 개념 정의를 하고 나면 개인주의는 도피처가 아니라 지향점의 의미가 강해진다. 나는 개인주의는 핑계가 아니라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주장의 논거가 개인주의에 대한 개념 정의에 크게 기대고 있는 관계로 순환논증의 오류를 피하기 힘들다. 스스로 주장하려는 바를 자기 주장의 근거로 삼아버렸다고 볼 여지가 많기 때문이다. 나는 다만 개인주의가 속죄양이 되어 쉬운 변명거리로 여겨지는 세태가 못마땅해서 개인주의에 대한 내 개념 정의를 말해봤을 따름이다.


선후배 관계가 데면데면해진 것이 어찌 개인주의 탓이겠는가. 우애보다는 경쟁이 더 실용적인 사회, 대학교 1학년 때부터 학점을 챙기는 게 미덕인 시대에 우르르 몰려서 술이나 마실 짬이 어디 있으며, 후배가 연락을 안 한다고 한가로이 투덜거리는 선배는 얼마나 가여운가(반어법임). 나는 극작가 배삼식 선생님의 <제갈량의 오만>이라는 칼럼을 읽은 이태 전부터 틈틈이 후배들이 덜 유능할 때, 적당히 무능할 때 부담 없이 다짐을 남발하고, 허영심에 들떠 자기 자신을 과대평가했으면 좋겠다고 주절거린다. 해야만 하는 일보다 하고 싶은 일에 좀 더 손길을 보내고, 좋아하는 책도 많이 보고, 곁에 있는 사람의 소중함을 만끽할 수 있기를 바란다며 훈장질을 했다. 돌이켜보니 민망하다. 재빨리 유능해져서 그 유능함을 써먹는 재미에 사는 후배들에게 내 잡설은 얼마나 메스꺼웠을까(물론 여기서의 유능함은 무조건 좋은 의미는 아니다).


지난 2007년 2학기 종강잔치 2차에서 우리 반에 비해 사람수가 훨씬 적은 사학과 분들이 종강잔치 하시는 광경과 마주쳤다. 언뜻 보아도 머릿수 차이가 별로 나지 않아서 속상했다. “고대 경영대는 희망합니다 우리를 향한 질투가 더 많아지기를...” 등의 신문 광고씩이나 내는 단과대의 외화내빈을 걱정한 것은 나만의 감정이었을까. 이렇게 말하고 보니 놀지 못해서 실성한 사람 같지만 그 자리에 있었던 친구들의 대부분이 이건 좀 아쉽다고 여긴 만큼 내가 중뿔나게 호들갑을 떨지는 않았다. 설령 그렇더라도 개인주의자로 산다고 입으로는 말하면서도, 머릿수가 너무 줄어든다며 안타까워하는 내 모습을 발견할 때 씁쓸하다. 내 자신부터가 머릿수 채우는 병풍 역할을 벗어나지 못하면서도, 만만한 손아랫사람에게까지 병풍이 되라고 강권하지 않았나 반성한다.


늘은 재주는 없는 내게 후배들만 쌓일 때 곤혹스럽더니 최근에는 아예 무뎌진 듯싶다. 언제부터인가 후배들 보는 자리에서 나는 얼마나 유익했던가, 나는 또 얼마나 재미났던가를 고민했다. 그런데 요즘은 그냥 얼굴 보는 것만도 좋긴 하다. 좀 더 나은 모습을 보여야겠다는 욕심을 포기한 건 아니지만 그냥 편하게 다가온다. 체념인지 달관인지 잘 모르겠지만.^^; 셰익스피어의 마지막 작품인 <템페스트>에서 프로스페로의 딸 미란다는 “아버지에게 나는 얼마나 큰 짐이었을까?”라고 묻는다. 프로스페로는 “귀여운 내 딸아, 너 덕분에 나는 존재할 수 있었다. 너의 미소는 하늘이 내게 준 용기를 머금고 있었다”라고 답한다. 둘레 사람들에게 이런저런 짐이 되었을지 모르는 나이지만 “덕분에 존재할 수 있었다”라는 말을 듣고 싶다.


흠모하는 재현형은 “대학생활 동안 내가 부르면 찾아올 사람들을 만들었다”고 자부하셨다. 인호형께서는 이 문구를 “나는 불러줄 사람들이 많다”라고 유쾌하게 패러디하셨다. 내 대학생활 동안 (배움을 제외한) 사람 사귐은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까. 나는 천성은 게으른데 놀 때는 날래다. 불행 중 다행(?)인지 내 인간관계의 폭이 그리 두툼하지 못해서 책임질 사람이 많지 않아 부담이 덜하다. 괜찮은 병풍조차 되지 못한 내게 귀한 시간을 내준 지인들에게 조금만 미안하기 위해서라도 내 자신을 가꿔야겠다. 우선 익자삼우(益者三友) 같은 낡아서 도통 거들떠보지 않는 기준부터 채워보고 싶다. 무능한 주제에 이런 욕심을 부리다니 나는 아직도 정신을 덜 차렸다. 내게는 거침없이 죽비를 날려줄 벗이 좀 더 필요하다. 익구 공부독촉위원 인선을 마무리해야겠다.^^; - [無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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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2월 전후

일기 2008. 1. 1. 17: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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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께서는 시골에 사실 때, 나라에 올리는 세금이나 부역을 반드시 평민들보다 앞서서 바치고, 한 번도 늦춘 일이 없으셨다. 마을의 아전들도 또한 고관의 집인 줄을 몰랐었다.
先生居鄕 凡調役征賦 必先下戶而輸之 未嘗有逋稽 里胥亦不知爲達官家


곽황이 선성(宣城)의 재(宰)로 있으면서 남에게 말한 바 있다. “이 고을의 조세나 공부에 대하여 나는 걱정이 없다. 이선생께서 온 집안 사람을 거느리시고 남보다 앞서 바치시므로 고을의 백성들이 모두 선생의 의를 두려워하고 서로 앞을 다투어 와서 자진 납부하며 도리어 뒤질까 두려워하고 있으니, 내가 번거롭게 한 번도 꾸짖지 않았어도 조금도 모자람이 없으니, 내 어찌 걱정하겠느냐.”
爲宣城宰 嘗語人曰 此縣租稅貢賦 吾無其憂矣 李先生率戶先人備納 鄕里小民 畏先生之義 而爭自來納 猶恐惑後 不煩一呵 靡有所欠 吾何憂哉
<퇴계선생언행록> 卷2, 處鄕 中


능력이냐, 도덕이냐? 조악한 이분법이 나도는 시대다. 도덕도 중요하지만 지금 시점에서는 능력이 필요하다며 비장한 언설을 늘어놓는다. 내가 아는 유능함은 다양한 자원들이 결합되어 시너지 효과가 나는 건데, 능력 좋아하시는 분들은 경제성장 능력이 단독으로 호젓하게 존재할 수 있다고 믿는 모양이다. 뭐가 급하신지 자꾸 현실을 초월해 신앙의 영역으로 넘어가시려고 해서 안쓰럽다. 키에르케고르는 도덕적 이상을 성취하는데 한계를 느낀 인간의 불안감은 신에게 복종함으로써 해소된다고 설파한다. 종교적 단계에서 인간의 무력감과 허망함을 극복하게 된다는 기독교 논리인 셈이다. 능력을 성역화하는 분들도 이런 전개를 따라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을 기다리는 건 아닐까 싶다. 그런데 키에르케고르조차 개인의 주체성을 강조하며 ‘신 앞에 선 단독자’가 되라고 했다는데 경제에 종속된 식객이 되어서야 쓰겠는가.


나누기 힘든 걸 굳이 쪼개서 보시는 분들은 아마도 솔선수범하는 태도를 능력이라고 보시지는 않을 게다. 인용한 일화에서 퇴계 선생은 겉으로 드러나는 몸가짐을 보여줬다. 제자들이 오버한 측면이 있겠지만 퇴계의 처신은 볼만한 것이 많았다. 내면적인 인격이나 품성이 밖으로 배어나게 마련이라고 하지만 모든 공인들의 내면을 들여다보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설령 관찰 가능하다고 해도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는 건 피곤한 일이다. 상대당, 언론, 시민단체나 이익집단 등이 감독 역할을 일감으로 삼아 사회적 분업을 수행한 대가로 밥 벌어먹고 산다. 보수 우경화가 심화되고 있다는 진단이 들리는데 우리 사회가 건실한 견제집단을 남겨둘지 걱정이다. 문제 제기 좀 하려고 하면 과거지향적이니, 네거티브니, 발목 잡기니 하는 지청구가 날아들지는 않을까.


머잖아 새로운 대통령과 둘레 사람들이 이 나라를 다스린다. 그 누가 되었든 간에 도덕의 최소한인 법을 지키자는 말을 하지 않는 분은 없으리라. 준법도 의심되는 판에 말본새와 청렴성 혹은 청부성(淸富性)을 가늠하는 일은 얼마나 사치스러운가. 그러나 이 사치를 부리는 사람이 좀 더 늘어야 이 땅이 좀 더 예측 가능해진다. 사고의 효율성을 높인다. 정치를 도덕화하지 말라고? 나는 다만 정치가 할 일을 법에 맡기는 정치의 사법화(judicialization of politics) 현상이 서글플 따름이다. 정직은 사회자본이기 이전에, 법률 쟁송의 대상이기 이전에 개인의 미덕이다. 대한민국이 정직이나 솔선수범을 정치적 심판의 소재로 삼기를 포기할까봐 두렵다.


071210
2007년 종합부동산세 과세 대상자와 부과액이 2006년에 비해 크게 늘었다고 호들갑인 분들이 있다. 2006년에 급등한 부동산값이 공시가격에 반영됨으로써 과세 대상자가 늘었고 과세표준 적용률이 높아져 부과액도 증가했다. 종부세는 고액의 부동산 보유자에 대하여 세금을 부과함으로써 조세부담의 형평성을 제고하고, 부동산 가격안정과 지방재정 균형발전을 목적으로 2005년부터 시행됐다. 종부세는 불공평한 소득세제를 보완하는 기제로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소득은 감추기 쉬워도 부동산은 감추기 어렵기 때문이다. 보수야당과 일부 언론이 세금폭탄 운운하며 부동산 부자들의 이익을 과대 대표한 건 부끄러운 일이다. 이들의 조세저항을 접하다 문득 고려말 권문세족이 전제개혁에 반발하던 모습이 떠올랐다면 너무 실례일까.


분명히 말하건대 종부세를 못내겠다는 성냄과 종부세를 낼 집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푸념은 동일선 상에 놓아서는 안 된다. 푸념이 성냄에 견주어 더 마땅하다. 종부세는 소득과는 무관하기 때문에 오랜 세월 한 아파트에서 살아왔는데 갑자기 세금이 올라 부담스럽다는 항변도 일리가 있다. 이런 맥락에서 1가구 1주택자에 대한 종부세를 경감하자는 목소리가 높다. 설령 미세조정을 하더라도 시장에 규제가 완화된다는 신호를 주지 않기 위한 또렷한 전달이 필수적이다. 1가구 1주택에 대한 양도소득세를 감면해주거나 상속이나 증여·매매 등 소유권 이전이 발생할 때까지 종부세 납부를 유예해주자는 주장도 있다.


이런저런 검토를 하다보니 문득 마음이 불편하다. 내가 특별히 못 된 심보이기 때문은 아닌 듯싶다. 집 한 채가 전부인 봉급생활자나 고령 은퇴자들이 투기와는 무관하더라도 서민들에 비해 담세능력이 월등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종부세 과세대상이 되는 주택의 시세는 8억원이 넘는다. 시세 8억원 미만인 집을 갖고 있거나 집이 없는 서민은 1000만가구인데 고령 1주택자인 2만 명을 각별히 염려하는 게 선후 관계가 맞느냐 헛갈린다(박구재. “종부세를 위한 변명” 경향신문. 2007. 12. 03. 참조). 종부세 대상자들의 하소연을 귀담아 듣는 자세로 사회 소외계층을 챙겼다면 이 나라가 이렇게 삭막하지 않았을 것이다. 1가구 1주택에 대한 종부세 완화가 공평과세와 조세정의에 얼마나 부합하는지 면밀하게 살피지 않고 세금 덜어주는 게 엄청난 묘안인 것처럼 호언장담하는 게 마뜩잖다.


토지의 공공성을 둘러싼 논쟁은 예나 지금이나 한판 승부로 끝낼 문제는 아니다. 또한 불완전한 인간이 만든 세금제도가 무결점일리도 만무하다. 종부세 효과가 미진한 이유 가운데는 정책이 제대로 안착하겠느냐 하는 의심이 많기 때문이다. 가까스로 자리를 잡아가는 종부세 제도를 무작정 흔들기보다는 좀 지켜보면 안 될까? 아둔한 내가 보기에도 종부세에 쏟아 붓는 열정을 좀 더 비천한 곳에도 좀 건네면 사치인가? 종부세에 짜증을 내시는 분들은 그래도 당장 먹고 살만하시기에 드리는 말씀이다. 그나저나 밥벌이도 제대로 할지 모르는 내가 벌써부터 내 집 마련을 걱정하는 건 너무 빠른 김칫국이다.^^;


080101
2007년 12월 31일과 2008년 1월 1일 사이에 고종석 선생님의 단편 <엘리아의 제야>를 읽었다. 소설의 배경은 딱 5년 전 이맘때다. 섣달 그믐날(양력) 새벽까지 이어진 술자리 모임에서는 안주 삼아 2002년 대선 이야기가 나온다. 5년 뒤에도 비슷하지만 사뭇 다른 광경이 펼쳐지고 있다. 과연 2002년에 노무현을 끝내 찍지 않았던 이들의 좌절에 견주어 2007년에 차마 이명박을 찍지 않았던 이들의 낙담은 어느 정도일까.


흠뻑 취했던 주인공이 숙취를 다독이려는 노력이 줄거리다. 이런 표현은 없겠지만 숙취 문학에 한 획을 그은 작품이 아닐까 싶다. 잃어버린 기억의 퍼즐을 맞추며 함께 했던 벗들을 돌아보는 게 마치 내 삶의 한 단면을 들여다보는 듯해 친근하다.^^; 주인공이 산책 중에 타워팰리스 쪽을 바라보며 “누군가의 가랑이 밑을 지나지 않았다는 건 내 자부심이다. 기품 있게 살자”라고 새해 다짐을 하는 장면은 짠하다. 김병익 선생님은 화자가 헤프다는 것, 천민스럽다는 것에 본능적인 저항감을 느낀다고 평했다. 나도 그 꿈에 기대고프다.


내 나이 스물하고 하나였을 때 어느 어진 이가 하는 말을 들었지. “금화든 은화든 동전이든 다 내주어버려라. 그러나 네 마음만은 간직하라. 진주든 루비든 다 내주어버려라. 그러나 네 생각만은 자유롭게 하라.” 그러나 내 나이 스물하고 하나였으니 이런 말은 소용없었지.

내 나이 스물하고 하나였을 때 나는 또 그가 하는 말을 들었지. “가슴속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을 결코 거저 주어지는 법이 없지. 그것은 많은 한숨으로 보답 받고 끝없는 후회에 팔린단다.” 이제 내 나이 스물하고 둘이 되니, 오, 그것은 진실, 그것은 진실.


주인공의 가족이 정담을 나누다 앨프리드 하우스먼(A. E. Houseman)의 <내 나이 스물하고 하나였을 때(When I Was One-And-Twenty)>라는 시를 암송하는 대목이 푸근하다. 이 시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기 마음을 함부로 건네면 그로 인해 권태에 시달리고 회한이 사무친다는 충고를 노래하고 있다는 식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좀 더 넓게 풀이해봐도 좋을 듯싶다. 싫증이 엄습하지 않도록 자기 삶의 주인의식 혹은 자존감을 지키라는 뜻으로 봐도 무방하다. 나는 이 시의 조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새해에도 지인들에게 마음을 냉큼 주었다가 실망하기도 하고, 스스로를 생각의 감옥에 밀어 넣기도 하겠지만.


내 나이 스물하고 여섯이다. 흔들리지 않는 마음, 중독되지 않는 생각을 건사하는 한해를 꾸려야겠다. “만 냥이 어찌 나를 도에 살찌게 하겠소(萬金何肥於道哉)?”라는 허생의 일갈이 내게도 함께 하길! 유능과 실용을 권하는 사회에서 마음공부와 역사공부를 팽개치지 말기를! 올해도 이 모자란 녀석과 함께 해줄 여러분 모두 새해 복 많이 만드시고 나누시길 바랍니다.^0^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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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서점 알라딘에서 주최한 제3회 우수 리뷰 대회 이벤트에서 도서별(『다산어록청상』부문) 우수리뷰에 뽑혀 적립금 3만원을 받은 글입니다. 놀고 먹느라 가난한 제게는 큰 힘이 되었어요.^^;


조선 중기의 문신인 이탁(李鐸)이라는 분은 중국의 사마광을 본받기 위해 애썼다고 한다. 이탁은 사마광이 “사람이 자기가 평생 걸어온 길을 만 사람 앞에서도 떳떳이 이야기할 수 있도록 산다면 그는 성인에 가까운 사람이다”라고 한 말씀을 지침으로 삼아 ‘나도 나의 일을 남 앞에서 떳떳하게 말할 수 있도록 하겠다’라고 결심했다. 아마 이탁이 자신의 평생 신조로 삼을 금언을 접한 책은 『소학』으로 추정된다. 여기에는 “나는 남보다 뛰어난 점은 없다. 다만 내가 평생토록 한 일 중에는 남에게 말하지 못할 것이 없을 뿐이다”라는 사마광의 말씀이 있다. 『소학』의 모든 글은 기존 문헌에서 추출했다. 경전이나 사서를 떠나 유가식 글쓰기에는 이처럼 편집물이 많다. 옛글을 가공하고 재구성해서 또 하나의 책을 내는 방식이다. 사마광의 이야기는 『송명신언행록』에 출전이 있다. 『송명신언행록』은 북송시대 160년 동안에 배출한 명신들의 언행을 모은 저서다. 무려 97명이 실려 있다. 우리가 배울 점이다.


정민 선생님의 『다산어록청상』을 읽다가 한국 고전을 국역하는 일과 더불어 선현들의 어록 혹은 언행록을 정리하는 일의 중요성을 실감했다. 1884년 『소학』의 체계를 따와서 한국의 선현의 이야기로 엮은 『해동속소학』과 같은 책이 더 많이 늘어야 한다. 김종권 선생님이 편저한 『한국의 명언』이나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펴낸 『한국선현위인어록』과 같은 작업이 그런 맥락이다. 여기다가 정민 선생님의 『다산어록청상』과 전작인 『죽비소리』도 힘을 보탠다. 최근 한국고전번역원이 출범하면서 고전 국역사업이 장기적이면서 체계적인 안목으로 이뤄지게 되어 기껍다. 계산을 하기 나름이지만 번역된 고전보다 번역되지 않은 고전이 많다는 건 모두 동의하는 바다. 번역은 되었다고는 하나 너무 고어투에다 편집이 조악해서 읽기가 어려운 고전도 많다. 고전을 국역해 일반인이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하는 작업이 학술문화 민주화의 일환이라는 주장에 적잖이 동의한다. 김용옥 선생님은 다산에 대한 학위논문은 수백 편이 넘는데 여유당전서는 완역이 이루어지지 않은 실정을 통박하셨다. 무척 공감하며 고전 국역을 서둘러야 한다고 생각한다. “빨리 빨리”는 이럴 때 쓰라고 있는 말이다.


『다산어록청상』은 다산의 글에서 귀감이 될만한 토막을 가려 뽑아 모양새 있게 정리한 책이다. 공부법과 독서법을 비롯해 다산이 풀어놓는 인생론이 정갈하게 담겨 있다. 이 책의 고갱이를 한마디로 줄여보라면 너무 잔인한 요구다. 열심히 착하게 살자 식의 멋없는 이야기만 맴돈다. 정민 선생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변치 않을 마음의 주인이 되어야지, 고작 땅 주인이 되는 데 인생을 걸어서야 되겠는가?(29쪽)”라고 해도 좋겠다. 다산은 사회 지도층의 도덕적 의무를 강조했다. 물론 이건 다산만의 특징은 아니다. 옛사람들은 왜 그토록 인품을 강조했을까? 도덕적 자원을 과시함으로써 피지배층의 반말을 무마하고 지배층의 권위를 확립하려는 속셈도 있었을 게다. 『목민심서』 청심(淸心)조에서 “욕심이 큰 사람은 반드시 청렴하려 한다(大貪必廉)”라는 구절과 상통한다. 하지만 이런 꿍꿍이셈을 감안하고 보더라도 덕본재말(德本財末)을 강조하고 재승박덕(才勝薄德)을 경계하던 당대 분위기는 오늘날과 사뭇 다르다. 식견보다는 태도나 자세를 우선시하는 낯설음이다. 이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이나 내성외왕(內聖外王)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개인의 윤리적 각성을 시발점으로 하여 그 점차적 확산을 꾀해야 한다는 유가적 점진주의의 산물이다. 수기적 행위에 치열할수록 동시에 치인적 행위를 통달하게 된다는 논리다.


심심지 않게 불거지는 공직 부패를 바라볼 때 이내 갑갑하다. 고작 저렇게 살려고 그리 뼈 빠지게 공부하셨는지 좀 안타깝다. 나는 그 분들에게 그걸 좀 묻고 싶었다. 그러면 민망해서라도 달콤함과 향긋함에 몸과 마음을 함부로 팔지 않으려는 분들이 많아지지 않을까 하는 착각이 들기도 한다. 고마운 선배님께서 “공인이라면!”이라고 일갈하는 건 통쾌한 느낌은 있으나 현실적 효용은 거의 없다고 비판하셨다. 나는 돈 몇 푼에 흐트러지지 않는 분이 1%라면 5%로 늘기를 바라고, 5%라면 10%로, 10%라면 20%가 되는 식으로 의미 있는 숫자로 나아가는 모습은 포기할 수 없는 과제라고 우겼다. 부귀영화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것이 있는 사람, 제 자신의 원칙을 저버리는 것을 죽음보다 부끄러워하는 사람이 우리를 위해 봉사하고, 우리를 대표하고, 우리를 다스린다면 얼마나 기쁠까. 나의 이런 바람은 제도나 시스템으로는 부족하다. 사실 제도와 의식은 거개 상보적이다. 부패를 미워하는 마음이 부패 방지 시스템을 다지지 않았는가. 성공을 자만하는 순간 툭 떨어진다는 다모클레스(Damocles)의 칼을 스스로 매달아 놓고 살피는 건 개인에게 중요한 덕목이라고 믿는다. 채제공의 몸가짐(46쪽)도 그런 정신의 발현일 것이다. 나는 여전히 각성된 개인의 힘이 굳셈을 기대한다.


그렇다고 옛사람의 말을 빌어다가 도덕적 훈계를 하겠다는 소리는 아니다. 옛 어록을 인용하는 건 신중해야 한다. 기실 어록이라는 건 일정 부분 권위주의적 요소가 있다. 권위 없는 어록은 상상하기 힘들다. “기업의 기능이 단순히 돈을 버는 데서만 머문다면 수전노와 다를 바 없다”라거나 “기업에서 얻은 이익은 그 기업을 키워 준 사회에 환원하여야 한다”라는 말을 일개 경영학도인 내가 발설하는 것보다 유일한 박사님께서 설파하셨을 때 더 큰 힘을 얻는다. 금주령이 내려진 때에 세종대왕의 옥체를 염려한 신하들이 술을 들도록 간청한 일이 있다. 대왕은 “나는 술을 마시면서 다른 사람의 술 마시는 것을 금하는 것이 옳겠는가(予則飮酒, 而禁人用酒可乎)?”라고 답했다. 불법과 편법을 자행하는 우리네 지도자들에게 이 옥음을 늘어놓는 까닭도 결국 세종대왕의 광휘에 기대려는 의도가 아예 없다면 거짓말이다. 더군다나 모범답안이 존재하지 않는 사람 살아가는 문제를 재는 잣대로 어록을 끌어다 쓰는 건 더욱 위험하다. 앞서 본 이탁의 사례처럼 그건 개인 수준에서 그쳐야 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근사한 문구 오려 붙이는 재미는 쏠쏠하다. 의사들이 진단서를 휘갈겨 쓰고, 공대생이 수식을 즐기는 것과 비슷한 심보다. 


나는 전고(典故)가 잦은 글쓰기가 권위에의 호소가 되기 일쑤며, 우아한 분위기를 만들어 문제의 본질을 흐리기도 한다는 지적에 동감한다. 그렇지만 “좋은 게 좋은 거지”라는 의도보다는 “좋은 걸 좀 배워보자”는 의도라면 괜찮지 않을까 싶다. 마음공부를 둘러싼 다양한 말씀과 사례들을 저마다 품으려는 정성을 너무 흘겨볼 필요는 없다고 본다. 가령 『다산어록청상』을 읽고 갈무리 해둔 구절을 세밑 송년회 자리에서 써먹는 경우를 가정해보자. 담백함이 지나쳐 말라 비틀어져 가는 세태에 적절한 수준의 지적 허영이 순기능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겉멋에도 귀천이 있다면 너무 박절하겠지만 고전 인용 같은 겉멋이라면 어느 정도 권장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일전에 『예기』, 『여씨춘추』를 발췌독한다고 했더니 친구에게서 “호사스럽다”라는 핀잔이 날아왔다. 살림살이에 보탬이 되는 책 좀 읽으라는 간곡한 충고도 곁들여서 말이다. 나는 차라리 이 팍팍한 삶에 호사스러움을 건사하고 싶다. 조금 투덜거리자면 고전을 읽고 일상에서 언급하는 게 왜 호사가 되고, 겉멋이 되고, 허영이 되어야 하는가. 그건 그만큼 우리가 옛것에 대한 홀대와 괄시 속에 살아왔다는 방증일 따름이다.


기파랑은 무척 기품 있는 인물이었나 보다. <찬기파랑가>를 감상하면 기파랑이 지닌 마음의 가장자리만이라도 따르려는 마음씨가 살갑다. 『다산어록청상』의 모티브가 된 <도산사숙록>도 이런 흠모의 소산이다. 사숙(私淑)은 존경하는 사람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을 수는 없으나 그 분을 본보기 삼아 학문과 덕행을 쌓는 과정이다. 맹자가 “나는 공자님의 제자가 되지는 못했지만, 사람들을 통해 사숙했다”고 한 말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사숙을 통한 사제 관계는 매우 많다. 다산은 퇴계와 성호 이익을 사숙했고, 신사임당은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 태임(太任)을 사숙했고, 김춘수는 릴케를 사숙했다. 간디는 소로(Thoreau)를 사숙했고, 슈베르트는 베토벤을 사숙했으며, 보들레르는 포(Poe)를 사숙했다고 한다. 우리 둘레를 보면 멋있게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역할 모델에게서 영감을 얻고 성찰함을 발견한다. 칸트는 흄의 저작을 읽고 독단의 잠에서 깨어났다고 외치지 않았던가. 주위에 스승이 없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자가 될 바지런함이 없지 않았는가 반성한다. 다산은 주희를 구박하는 재미에 살았던 모기령을 높게 보지 않았다(100쪽). 스승을 넘어서는 제자가 된다는 것, 앞사람을 극복하는 뒷사람이 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니 도전할 만하지만.


다산은 “우리나라 사람들은 툭하면 중국의 일을 끌어다 쓴다. 이 또한 비루한 품격이다(168쪽)”라고 비판한다. 자식들에게 『고려사』 같은 한국 사서를 읽히려는 부정이 애틋하다. 정민 선생님과 같은 노고가 누적된다면 궁극적으로는 어린이들의 독서에 많은 보탬이 될 듯싶다. 미사여구로 분칠한 위인전에서 멈추지 말고 선현들의 어록을 익히고 평생의 신념이 될 경구를 만나게 한다면 더 흡족하리라. 기왕이면 그 폭이 넓어지길 희망한다. 정몽주의 <단심가>만 알지 말고 고려 말의 충신 변안열의 <불굴가>도 읊었으면 좋겠다. 성삼문에 그치지 말고 이개의 시조도 음미하며 올곧게 살기의 어려움을 곱씹으면 좋겠다. 정조대왕은 『홍재전서』라는 방대한 문집을 남겼는데 그 가운데 어록인 일득록(日得錄)을 넘기며 대왕과 좀 가까워졌으면 좋겠다. 공자의 위편삼절(韋編三絶)만 노래하기보다는 퇴계 선생이 소장한 주자전서 사본 한 질이 너무 낡아서 글씨가 거의 떨어져 나갈 정도였다는 일화도 꺼내보면 어떨까. 새파랗게 어린 기대승과 서간문으로 엄밀하게 논쟁하면서도 고깝게 여기지 않고 선조 임금에게 기대승을 천거하는 그 넉넉함도 배워봄직하다. 인사를 맡은 사람이 『성학집요』 용현(用賢)편을 뒤적인다면 유쾌한 일이다. 서양의 그럴듯한 유언에만 눈을 돌리기보다 왕건이 “덧없는 인생이란 예로부터 그러한 것이다(浮生自古然矣)”라고 유언한 내용도 모아두면 좋겠다. 이렇게 앞서 거닐었던 분들의 말을 기억해내고 창조적으로 이어가려는 노력이 마냥 무익하지만은 않을 게다.


신채호 선생님의 『조선상고문화사』란 책에 나오는 이야기 하나가 가슴이 짠하다. 연산군을 충동질해 무오사화를 일으킨 유자광에게 어떤 사람이 “후세의 사필(史筆)이 무섭지 않으냐?”고 따졌단다. 유자광은 의기양양하게 “누가 『동국통감』을 읽나?”고 응수했다. 『동국통감』은 조선 성종 때 서거정이 단군 조선에서 고려 때까지의 역사를 모아 편찬한 책이다. 즉 누가 조선사를 읽어 내 행적을 기억하겠는가 하며 안심한 셈이다. 우리가 우리 역사를 더 애호하고 시시비비를 간직할 때 한가로운 소리가 아니라 실용적인 기능도 수행하게 된다. 자신의 과거를 도두보는 국민이 많은 나라의 소프트 파워(soft power)는 만만치 않을 듯하다. 흔히들 한국에는 영웅이 없다고 한다. 부러 영웅을 만드는 건 억지스럽다. 하지만 앞사람들의 행적을 정리하고 끊임없이 반추할 때 영웅보다 더 훌륭한 삶의 거울이나 나침반을 만들어 봄직하다. 오늘날의 이탁이 사마광도 좋지만 한국의 누군가를 우러르며 가슴 뛴다면 이 또한 반가운 일이다. 어색한 짜릿함보다 친숙한 푸근함을 꾀하자. 편집자가 되기를 두려워하지 말자. 우리에게는 좀 더 많은 편집자가 필요하다. 케인즈가 역설했듯이 위험한 것은 기득권이 아니라 사상(思想)이다. 우리의 사상을 풍요롭게 할 편집의 만개를 고대한다. - [無棄]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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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돈 그리고 개혁

사회 2007. 12. 12. 23:23 |

1.
세상을 떠나 홀로 서있는 사람(離世獨立之人)을 얻어 크게 써서 오래 묵은 폐습(因循之弊)을 혁파하려고 (왕이) 생각했다.
『고려사』 권132, 열전45, 반역6 신돈전


공민왕과 신돈은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나? 동상이몽은 아니었을까? 가장 먼저 이런 의문을 품어 본다. 공민왕 14년 이세독립지인(離世獨立之人) 신돈은 국정의 전반에 등장한다. 공민왕은 재위 23년 동안 원년, 5년, 12년, 20년 4차례에 걸쳐 개혁조서를 반포했다. 그런데 신돈 집권기의 개혁은 조서의 형태로 일괄적으로 제시되지 않았다. 사서의 기록에 산재되어 있어 복원하기가 힘들지만 많은 학자들의 연구로 어느 정도 정리되어 있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의 기록을 신뢰하지 않는 학자들은 신돈 집권기의 기록이 누락되어 그 시대를 온전히 복원할 수 없다고 푸념하기도 한다. 그 실례로 신돈 집권기 인사 이동 내역이 부족하다는 등의 이유를 든다. 하지만 기록이 없는 게 오히려 득이 되기도 한다. 가령 왜구의 침략을 분석한 기록을 보면 상황이 다르다. 신돈의 집권 이전 13년 간 44회, 집권기 5년 7개월 간 7회, 실각 이후 3년 간 23회 있었다는 기록을 들어 군사조직 개혁에 어느 정도 성공하였다는 주장이 있다. 물론 사서의 기록을 불신하는 측에서는 나쁜 기사는 빼놓지 않고 실었을 것이라고 항변하겠지만 말이다. 이처럼 신돈의 시대를 곱씹는 일은 부족하고 편향된 사료를 헤집어야 하기 때문에 어렵다.


공민왕 8년과 10년 홍건적의 두 차례 침입이 있었다. 개경이 함락되기까지 했고, 삼원수(三元帥)를 둘러싼 극심한 내부 알력도 있었다. 12년에는 흥왕사의 난으로 말미암아 홍언박을 비롯한 공민왕의 측근세력이 제거되고 무장세력이 권력의 일선을 자치했다. 그래서 12년에 발표했던 개혁교서를 선언적인 의미에 지나지 않았다고 폄하하기도 한다. 13년에는 덕흥군이 원나라의 세력을 이끌고 침공했으나 격퇴했고, 그 해 10월에는 원의 공민왕 복위교서가 도달했다. 이러한 내우외환을 가까스로 수습함으로써 공민왕은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이러한 안정 국면을 이용해 내정개혁을 도모한 것으로 보인다. 앞서 인용했듯이 신돈을 등용한 목적은 비단 무장세력의 제거를 통한 왕권 강화에 국한되지는 않았다. 신돈의 등용을 통하여 기존의 정치세력을 모두 억누르고 국왕 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하려는 의도는 공민왕이 기존의 정치세력들을 세신대족(勢臣大族), 초야신진(草野新進), 유생(儒生)으로 나누며 비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공민왕 5년에 있었던 반원 자주화이라는 대외적 개혁이 성공적이었다면, 사회경제적 모순을 타파하는 대내적 개혁은 신돈 집권기에 가장 빛났다.


신돈 집권기의 개혁은 민생문제의 해결, 정치운영의 정비와 교육개혁으로 요약된다. 가장 주목되는 건 역시 공민왕 15년(1366) 5월 전민변정도감의 설치다. 관리의 근무일수를 승진의 기준으로 삼은 순자격제(循資格制)의 실시, 성균관 중영(重營)과 과거제도 개편 같은 행동도 궁극적으로 전민변정사업을 보완하고 개혁세력을 끌어들이기 위한 정계개편의 일환이라 볼 만하다. 전민변정도감은 전(田)과 민(民), 즉 토지와 노비를 판정하는 기관을 말한다. 토지를 본래 주인에게 돌려주고 노비를 본래의 신분으로 만드는 기능을 하기 위해 꾸렸던 기구다. 기실 전민변정도감은 공민왕 시기의 고유 제도가 아니다. 고려 후기에 토지 및 노비에 대한 행정이 어지러워지자 원종 10년(1269) 처음 설치한 이래 충렬왕, 공민왕을 비롯해 우왕 14년(1388)까지 실시되었다. 『고려사』 식화지(食貨志)에는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이 원종 10년, 충렬왕 14년과 27년, 공민왕 원년, 우왕 7년과 14년에 두었다고 쓰여 있다. 공민왕 15년에 설치한 기록은 빠져있다. 식화지나 형법지(刑法志)에 신돈 집권기에 있었던 전민변정사업에 대한 기록이 명확하지 않아 애석하다. 이는 앞서 밝혔듯이 신돈 집권기가 조서의 형태로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지 않은 여파와 더불어 신돈에 대한 폄훼의 산물이다. 『고려사절요』에는 전민추정도감(田民推整都監)이라고 하고, 『고려사』 신돈열전에는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이라고 적혀 있다. 조금 용어가 다르지만 기능은 비슷했다고 본다.


고려말의 토지 문제는 체제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고 있었다. 당시 권문세족들은 평민들의 토지를 강제로 빼앗고, 국가의 땅을 몰래 차지하면서 조세는 내지 않고 백성들에게는 고리대를 받는 등의 수탈을 자행했다. 이를 시정하기 위한 고려말의 전민변정사업은 번번이 실효를 거두지 못했으나 신돈 집권기에는 제법 볼만한 것이 있었다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다. 신돈은 전민변정도감의 판사(判事)가 되어 전민(田民)을 권세 있는 무리들(豪强之家)이 강제로 빼앗아 차지해서 백성들은 병들고 나라는 여위게 되었다(病民瘠國)고 비판하며 변정사업을 시행한다. 신돈은 병든 백성(病民)만큼이나 여윈 국가(瘠國)를 걱정했을 것이다. 억울하게 토지를 뺏기거나 노비가 된 경우를 바로 잡아서 납세와 역(役)을 담당하는 양인이 느는 건 왕권 강화에도 이바지하기 때문이다. 혹자는 이런 연유로 신돈의 개혁이 친민중적이라 보기는 곤란하다고 말한다. 그도 그럴 것이 전민변정사업은 토지 겸병의 현실과 그 발생의 구조적 모순은 묵과했다. 사패전(賜牌田)의 폐단을 시정하고 농장(農莊)을 해체하려는 정성이 보이지 않는다. 신돈을 부정적으로 평가한 『고려사』 편찬자들은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2.
명령이 발표되자 많은 권세가와 부호들이 빼앗은 전민(田民)을 그 주인에게 돌려주었으므로 온 나라가 기뻐했다. 신돈은 하루건너 도감에 출근했으며 이인임과 이춘부 이하의 관리들이 소송을 듣고 결정을 내렸다. 신돈이 겉으로 공의(公義)를 가장하고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푼답시고 천민노예(賤隸)로서 양인이라고 호소하는 자는 모두 양인으로 만들어 주었다. 이에 주인을 배반한 노예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성인(聖人)이 나셨다”라고들 하였다.
『고려사』 권132, 열전45, 반역6 신돈전


이 기록을 따져보면 신돈이 소인들의 환심을 사는 인기정책을 써서 노비가 주인을 버리고 도망갔다는 비판이다. 성인이 났다는 열광도 신돈을 깎아 내리기 위해 인용했을 확률이 높다. 이 빈정거림이 신돈의 본모습을 추적하는데 결정적 증거로 활용된다니 아이러니다. 사가들은 신돈은 토지 및 노비 분쟁에서 편파적으로 판정(偏聽)했다고 비난한다(『고려사』 권111, 열전24, 임박전). 이는 바꿔 말하면 일반민의 입장에서 권문세족에게 불리한 판정을 내렸다는 뜻이다. 제임스 팔레 교수는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이행을 사회경제적인 의미는 거의 없는 정치변동이라 평가절하하면서도 전민변정도감이 실질적으로 소유권을 건드린 대담한 개혁 조치였다고 평했다(함규진, 『역사법정』, 포럼, 2006에서 재인용) 이러한 가설이 나오게 된 배경에는 당대에 잦았던 외침과도 상관이 있어 보인다.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으로 많은 전적(田籍)과 노비문서가 망실되었다면 관계 당국이 누구의 편을 드느냐에 따라 순식간에 처지가 바뀌기 때문이다. 신돈은 “노예로서 주인을 배반한 자들(奴隸背主者)”의 편을 들어서 기막힌 반전을 펼쳤다. 아무리 의미를 부여한다고 해도 전민변정사업은 대증요법에 지나지 않았다는 지적은 설득력 있다. 과전법(科田法)에 견주어 제도적 측면이 떨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신돈의 기용 자체가 제도를 초월한 것이었고 이러한 파격을 통해 개혁추진세력을 육성하고 제도화를 노린 건 아니었을까. 관료체제 정비 등과 같은 제도적인 보완이 개혁의 지속을 위한 노력이라고 볼 여지는 없을까.


아무튼 전민변정사업은 권력자의 선의와 양심에 맡겨진다. 이는 국왕의 강인한 의지와 결단에 의한 집행을 촉구했던 이색을 위시한 사전개선론(私田改善論)자들의 방법론이다. 그들은 전주를 1인으로 한정하는 일전일주(一田一主)의 원칙에 따라 조세징수권이 중첩되는 데 따른 폐단을 바로잡으려 했다. 합법적인 토지 겸병 대토지 소유자의 이익을 결과적으로 옹호하게 되는 셈이다. 조준과 정도전으로 대표되는 사전혁파론(私田革罷論)자들은 사전문제의 원인과 해법에 차이가 있었다. 혁파하려는 사전의 개념(소유권이나 수조권이냐)과 대상(합법적인 사전을 포함하느냐 마느냐)을 둘러싼 논쟁도 있어 비전문가가 보기에는 복잡한 측면이 많다. 개선론과 혁파론 모두 자신의 방안이 조종(祖宗)의 전법(田法)을 구현한다고 표명하고 있지만 분명 차이가 있다. 인간의 내면을 중시했던 이색은 제도 자체의 변경보다는 운영의 묘와 부분적인 제도 개선을 주창했다. 제도를 운영하는 주체의 관리나 수조권자의 책임의식 강화와 도덕성 함양이 필요하다고 봤다. 사마광의 구법당이 연상된다. 이에 반해 조준은 제도 개혁에 역점을 뒀다. 수조지의 몰수와 재분배를 주요 골자로 해서 합법적인 사전마저 혁파하려고 했다. 왕안석의 신법당에 비견될 이러한 시도는 고려의 통치체계가 붕괴시키고 새로운 사회질서를 세우려는 정치적인 목적이 다분하다. 사실 사전개혁에 반대했던 인물 가운데는 이성계 일파에게 직간접적으로 협력한 인물이 많다. 이네들은 사전이 혁파되더라도 경제적 기득권을 크게 훼손 받지 않았을 공산이 컸다. 그럼에도 양측이 갈등한 까닭은 사전개혁 논쟁이 단순히 경제적인 문제가 아닌 정치적인 문제였음을 말해준다.


물론 사전개선론자들은 경제적 기득권을 수호하려는 욕구가 충만했다. 그들은 최소한의 개량을 통해 현 지배질서를 존속하려는 측면이 적잖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전개선론자들을 수구의 온상으로 매도할 수 있을지는 조심스럽다. 사전혁파론자들에게서도 생산자인 농민계층에 대한 특별한 대책은 찾기 어렵다. 우여곡절 끝에 탄생한 과전법은 당초 혁파론자의 계획과는 많이 차이가 난다. 혁파론자들은 기본적으로 권문세족의 토지를 몰수해 일반 백성을 비롯한 모든 국민들에게 배분하려고 했다. 정도전은 권문세족들이 온갖 방해를 해서 본래의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탄하면서도 고려의 문란한 전제에 비하면 몇 만 배가 낫다며 자부했다. 하지만 혁파론자 가운데 정도전이 급진적인 입장이었음을 감안하면 혁파론이 일반민을 위한 개혁을 표방했지만 지배계층의 교체를 통한 권익을 추구하는 데 이용된 개혁은 아니었나 흘겨보게 된다. 조준의 혁파론과 이색의 개선론의 간극은 생각보다 작을지도 모른다. 민생을 내세웠지만 이는 다분히 역성혁명의 명분에 이용된 느낌이 짙다. 진정 권문세족의 극심한 반대 때문에 당초의 개혁안이 후퇴한 것인지 표면상 걸어놓은 구호와 달리 통치질서의 교체에 주안점을 두었는가는 생각해볼 문제다. 여하간 과전법은 권문세족의 개인 소유지는 그대로 두고 이에 대한 수조권을 국가가 가졌다. 수조권 토지와 불법적 탈세지는 몰수해 수조권을 재정비했다는데 그 의의가 있다.


과전법에 대한 다채로운 평가가 많아 취사선택하기가 어렵다. 과전법을 박하게 평가하는 이는 고려의 전시과(田柴科) 제도와 본질상 동일하다고 보기도 한다. 집권세력의 몰락과 신흥세력의 득세를 초래한 지배층 내부의 개혁에 그쳤다는 지적도 있다. 경자유전(耕者有田) 원칙에 따른 토지 소유권 조정이 아니라 수조권을 재분배했을 뿐이기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과전법상 토지(관직복무의 대가로 부여되는 토지) 수요가 늘어나 위기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는 비판은 신랄하다. 실제로 과전법은 공신, 관리의 증가로 사전이 계속 부족해졌고 세조 12년(1466) 과전법을 폐지하고 직전법(職田法)을 실시했다. 현직관료에게만 토지를 지급하다 보니 퇴직을 대비해 재직 중에 수탈이 심하다는 폐해가 생기기도 했다. 이러한 한계점이 토지 국유제를 관철하지 못했기 때문인지는 섣불리 판단하기 힘들다. 결국 농민의 사회경제적 지위의 향상은 단순히 지배층의 제도 개혁으로 만족할 사안이 아니었다. 조선 중기 이후 소유권에 기초한 지주전호제가 일반화되자 농민들은 창조적 방법으로 생산력을 향상시키고 소작쟁의를 통해 경작권을 인정받는 등의 공력을 기울였다. 소작농에서 자영농이 되기 위한 끈질긴 분투가 기득권 세력의 양보를 받아냈으리라. 이 험난한 과정은 기득권 세력이 스스로 기득권을 내어놓은 역사가 없다는 걸 담담히 증언해주고 있다. 광해군이 즉위하던 1608년 경기도에서 처음 시행했던 대동법이 전국으로 확대되는데 꼬박 100년이 걸렸다. 개혁은 결코 국민의 수준을 넘지 못한다. 민주주의 좋다는 게 뭔가. 그것은 계몽군주에게 기대지 않는 자세에서 출발한다.


3.
신돈의 개혁은 위법적인 토지 점유를 방지하고 감찰과 재판 위주로 진행되었다. 전국적으로 얼마만큼의 실효를 거두었는지는 기록상으로 확인하기 힘들다. 다만 공양왕 4년 2월의 인물추변도감(人物推辨都監)이 정한 소송법에서 공민왕 15년 당시에 내려졌던 전민변정도감의 판결을 인정해준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 정확성을 짐작하기도 한다(『고려사』 권85, 지39, 형법2, 소송조)<각주>. 신돈의 개혁은 일견 사전개선론자들의 논리와 유사하고, 심화된 문제의식을 보여주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신돈의 전민변정사업의 흐지부지되자 더 이상 이런 수준의 개혁마저도 속행되지 못했다. 신돈의 몰락 후에 발표된 공민왕 20년의 개혁에는 토지관계 조항이 하나도 없어 신돈의 개혁을 부정하는 세력에 장악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신돈의 개혁마저 감내하지 못했던 고려는 자체 정화능력을 상실한 듯싶다. 신돈이 상대적으로 돋보였던 것은 어느 정도 실제적 효과를 거둬 일반민의 기대를 충족시킨 실행력에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즉 내용상에서 큰 차이가 없었더라도 이전과는 달리 신속하거나 광범위하게 추진했다. 물론 신돈의 지지세력에는 부원배나 권문세족들이 참여해 개혁주체와 개혁대상이 뒤섞인 측면이 있다. 여기다가 국왕의 신임에 의해서 권력을 행사하는 취약한 기반 때문에 전제개혁을 추동할 능력에 한계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돈의 정책이 한시나마 실효를 거뒀다면 집행역량을 바탕으로 기층 민중에게 정책 신뢰성을 획득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추측해본다. 이러한 실천적 모습은 사전혁파론자의 적극적 자세와 잇닿는 면이 있다. 아니 신돈의 개혁이 실패했다고 인정하더라도 사전혁파론자들은 이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아 자신의 주장을 채워나간 것은 아니었을까? 여기까지 생각이 미쳤으나 망설여지는 건 역시 조선조 사가들의 갖은 악평이 마음에 걸리기 때문이다. 신돈에 대한 사료는 정사가 유일하다. 신돈은 신하로서의 법도를 무시하고, 뇌물과 아첨을 좋아하고 여색을 밝혔으며, 호화주택을 과다하게 보유했다는 등의 비난을 받는다. 신돈의 사치와 방탕이 과장되었다는 심증이 있으면서도 그의 도덕성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막막하다. 1968년 민현구 교수의 연구 이후에 신돈이 개혁가였다는 의견이 다수를 차지하게 된다. 새로운 사료가 나오지도 않았으면서 행간의 의미를 재해석했기에 개인적인 추단이라는 비판이 가능하다. 그렇지만 조선 건국을 정당화하기 위해 고려 말기의 사필이 왜곡되었다는 건 통설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우창비왕설(禑昌非王說)이다.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으로 우왕이 폐위될 때도 그의 정통성은 부정되지 않았다. 그런데 1389년 우왕 복위사건이 벌어지자 비로소 가짜를 몰아내고 진짜를 세운다(廢假立眞)는 대의를 내걸고 우왕을 신돈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 잔혹한 조작은 고려 말기의 사료가 얼마나 윤색되었을까 불안하게 한다. 당대의 기록이 허구라면 오늘날 과연 실체적 진실을 복원 가능할까라는 회의가 든다.


그러나 중기(中期) 이후로 임금노릇을 잘하지 못하여 안으로는 폐신(嬖臣)에게 혹(惑)하고 밖으로는 권간(權姦)에게 제어(制御)되었으며, 강한 적들이 번갈아 침노하여 전쟁이 빈번하였고 나라가 쇠퇴(衰退)하여 가성(假姓: 우왕(禑王)을 신돈(辛旽)의 아들이라 한 것)이 왕위를 빼앗아 왕씨(王氏)의 제사가 끊어지기에 이르러서 공양왕(恭讓王)이 반정(反正)하였으나, 마침내 어둡고 나약해서 스스로 멸망에 이르고 말았으니, 대개 하늘이 진주(眞主)를 낳아서 우리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신 것은 진실로 사람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고려사절요』를 올리는 전(箋)


하늘이 장차 한 나라를 망하게 할 때에는 반드시 어리석고 도리에 어긋난 임금을 내고, 마음이 간사하고 흉역(凶逆)한 신하로써 그 사이에서 죄악을 양성(釀成)하여 임금을 미혹시키고 정신을 손상시킨 뒤에야 나라도 따라서 망하게 됩니다. 고려는 개국한 지가 장차 5백 년이 되어 가므로, 하늘의 돌보아줌이 이미 느슨해져 어리석고 도리에 어긋난 공민왕을 내었으며, 또 간사하고 흉역한 신돈을 내었습니다.
『동국통감』 공민왕 20년(1371) 신돈 처형 후 사론


이처럼 조선시대의 사서를 보면 악의 화신으로 묘사되는 신돈의 자식이 왕위에 올랐으니 고려의 멸망은 천명이라는 논리가 도출된다. 오백 년 고목을 찍어내기가 녹록지 않았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신돈과 우왕 부자는 망국의 필연성을 입증하기 위한 희생제의였다. 신돈이 조선시대에 갑자기 악마성의 표지가 된 건 아니다. 정사의 기록을 수용한다면 그의 집권기 전후로 이미 반대하는 많은 이들이 있었다. 신돈의 시책에 대한 반발이었든 그 자신의 덕망이 부족해서 빚은 문제였든 간에 신돈은 당대에도 적잖은 미움과 견제를 받았다. 공고한 연줄망 속에서 고립되지 않고 권력을 행사하기 위해 정적들을 과도하게 징벌한 면도 있다. 자신의 권세가 지나치게 커져서 시기심 많은 왕이 이를 꺼릴까 두려워 반역을 모의했다는 기록은 도무지 받아들이기 힘들다. 나 또한 신돈의 죽음은 공민왕의 선택이었다는 견해에 동조한다. 신돈 권력의 비대화가 우려되었을 수도 있고, 측근정치로서의 쓸모가 다했을지도 모른다. 이런 요인과 더불어 중국대륙의 판도 변화도 작용했다고 본다. 신돈의 집권기에 공민왕은 노국공주의 영전을 짓느라 애썼다는 건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그러나 공민왕은 17년(1368) 1월 명나라가 건국되고, 그 해 8월 명이 원나라의 대도(大都)를 함락시키는 국제정세를 챙기고 있었던 모양이다. 명나라의 침략되는 만큼 내정개혁을 보류하고 무장세력을 주축으로 전시태세를 갖추고, 권문세족의 경제력을 지원 받기 위해 신돈을 처형했다. 왕의 결단이 적절했는지 여부는 각자의 판단에 맡긴다.


신돈은 집권 초기에 왕에게 건넨 말대로 “백성들로 하여금 조금이나마 평안을 누리게 한 연후에 옷 한 벌과 바리때 하나만 들고(一衣一鉢) 다시 산으로 돌아갈 생각”이 서서히 가셨는지도 모른다. 절대권력 앞에 그라고 절대부패하지 않았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요승이라는 누명을 벗겨줘야겠다는 욕심이 지나쳐 그를 너무 과대평가하지는 않았나 돌아본다. 그래도 그가 죄보다 많은 벌을 받는 건 안쓰럽다. 이는 반대로 조선 건국자가 공보다 많은 상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된다. 조선 건국이 고려 후기의 심각한 체제 동요를 극복하고 민생 안정을 이뤄 역사 발전을 일구었다고 하자. 우리는 이 대목에서 목적은 수단을 어디까지 합리화할 수 있는가, 결과만큼이나 과정을 중시해야 하는가와 같은 물음을 품어야 한다. 어제를 기억하고 내일의 좌표를 삼는 건 목적과 수단, 과정과 결과 사이의 끊임없는 긴장일 테다. 여말선초를 단순히 개혁과 반개혁의 대립으로 가르지 못하는 이유다. 개혁은 절대선도 아니고 불완전한 인간이 행하는 개혁은 늘 언제나 무결하지 못하다. 우리는 실패한 개혁의 역사를 많이 접했다. 개혁은 기득권층의 저항으로 허물어지기도 하고, 지지층의 환멸로 어그러지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스스로 권태와 부단히 싸워나가야 한다. 스스로를 욕되게 한 다음에 남으로부터 모욕을 받는다는 말씀을 실감한다. 개혁을 말하는 이들이여, 부디 실패에서 배우시길. 원칙 있는 패배 또한 아름답지 않는가. - [無棄]


<각주>
병신년(丙申年) 이전에 소송에 대한 명확한 문건이 없으므로/없는 것, 정미년(丁未年) 이전의 일과 무진년(戊辰年) 이후 변정도감 및 도관(都官)이 이미 판결한 것은 다시 신고하지 못한다.
丙申年前無爭訟明文 丁未年前事及戊辰以後 辨正都監及都官已決者 不許陳告
『고려사』 권85, 지39, 형법2, 소송3
* 형법지 소송조에는 4건의 기사가 있다. 논의의 편의상 순서대로 소송2, 소송3, 소송4라고 번호를 매겼다.


이 구절에서 병신년이 공민왕 5년(1356)이고, 무진년이 우왕 14년(1388)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문제는 정미년이다. 공민왕 16년(1367)과 충렬왕 33년(1307)으로 견해가 갈린다. 일찍이 민현구 교수는 無爭訟明文을 병신년 이전에는 소송의 명문이 없어 논의될 여지가 없으므로, 이 때를 상한으로 그 이전은 문제삼지 않는다는 내용으로 보았다(민현구, “辛旽의 執權과 그 政治的 性格(下)”, 『역사학보』 제40집, 역사학회, 1968, pp. 53~119 참조). 다시 말해 1356년 이전의 쟁송명문이 없다는데 1307년을 거론하는 건 모순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丁未年前事는 공민왕 5년~15년(1356~1366)까지를 가리키게 된다. 공민왕 15년은 신돈이 전민변정사업을 주재하던 시기이기 때문에 당시의 판결을 인정한다는 자료가 되는 셈이다.


하지만 한국학중앙연구원 역주본은 소송3의 바로 앞 기사로 공양왕 3년의 상소문을 실은 소송2에 忠烈王丁未年以前事라고 명기된 구절이 있는 만큼 충렬왕 33년(1307)로 보는 게 더 적절하다고 봤다(김일권 외, 『고려시대연구 8』, 한국학중앙연구원, 2005 참조). 그래서 無爭訟明文을 “쟁송한 명문이 없는 것”이라고 풀이해 상한으로 삼는다는 내용이 들어가지 않는다. 다시 말해 1307년에서 1356년 사이에도 쟁송한 명문이 존재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또 정미년이 충렬왕 27년(1301)에 설치된 전민변정도감의 활동을 의미한다거나, 충숙왕 원년(1314)에 완성된 전적(田籍)인 갑인주안(甲寅柱案)의 작성 이전 시기를 통칭한다는 논거가 있다. 하지만 이렇게 볼 경우 굳이 1307년이라는 기준을 세웠어야 했느냐는 물음이 남는다.


본문에서는 정미년을 민 교수의 견해에 따라 1367년으로 봤다. 오기나 결락이 없다고 가정할 때 정미년을 1307년으로 볼 근거는 충분하다. 그렇지만 어색한 부분도 다소 보인다. 소송2는 토지에 관련된 기록이라면 소송3은 노비에 관한 기록이다. 비슷한 문장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정책목표가 다소 다른데 같은 기준을 써야 할 필요가 있었을까 싶다. 민 교수도 충렬왕 1307년 무렵에 노비 변정(辨正)에 관한 별다른 기록이 없다고 논설한다. 그나마 인접한 시기인 1301년의 전민변정사업은 유명무실했다고 평가받는다. 아울러 소송4의 기사를 보면 “신축년(辛丑年) 겨울에 적이 수도를 범하였을 때 공사 문권이 망실되어 거의 다 없어졌는데, 간악한 자들이 이것을 계기로 하여 사건의 단서를 꾸며 일으키고 있다”면서 신축년의 쟁송명문이 없는 자는 다시 소송을 제기하지 못하게 하라는 상소가 나온다.


여기서 신축년의 일은 공민왕 10년(1361) 홍건적이 개경을 점령한 사건을 말한다. 수도가 함락되었으니 1361년 이전의 쟁송명문이 상당수 소실되었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1356년 이전의 쟁송명문도 마찬가지로 많이 망실되었을 텐데 1307년이라는 기준을 내세우는 건 동떨어진 감이 있다. 설령 1307년이 맞다고 해서 그것이 신돈 집권기의 판결 효력이 완전히 부인되는 건 아니다. 소송2, 소송3 기사 모두에서 “다섯 번의 판결에서 세 번 이긴 것과 세 번의 판결에서 두 번 이긴 것을 따른다(五決之三 三決之二/五決從三 三決從二)”라고 했는데 신돈 집권기에 이루어졌던 판결의 효력은 이 대목에서 인정받을 수 있다. 그런데 “다섯 번 심리할 것을 세 번으로 하고 세 번 심리할 것을 두 번으로 한다”라고 해서 판결의 신속성을 강조하는 문구로 해석하면 또 달라진다.


이처럼 해석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신돈의 실각 이후에 신돈 집권기의 판결이 아예 배제되었을 가능성도 무시하기 힘들다. 고려말 여러 전민변정사업 가운데 신돈 집권기가 가장 성공적이었다는 평가가 지나쳤을 수도 있다. 이런 머뭇거림에 얽매이지 않고 정사의 기록을 비판하며 재해석하려는 입장에서는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겠다. 신돈 집권기의 성과가 철저히 부정된 증거라고 투덜거릴 여지가 많기 때문이다.^^; 정사는 우왕과 창왕 아래서 녹을 먹던 이들이 우창비왕설을 내세우고, 그네들이 진짜라고 옹립했던 공양왕마저 비참하게 죽였던 자들의 기록이다. 그네들의 양식을 얼마나 신뢰해야 하느냐를 따지는 건 참 고심스럽다. 애매한 자구 해석은 이 정도 톺아봤으면 됐지 싶다. 들인 품에 비해 실익이 없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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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익구
:

우수리들

일기 2007. 12. 3. 13:31 |
우수리를 모아서 업데이트 해봤습니다.^^;

070723
김현근님이 쓴 『가난하다고 꿈조차 가난할 수는 없다』 (2006, 사회평론)를 우연히 집어들게 됐다. 과학영재학교를 수석 졸업하고 프린스턴 대학 수시 특차로 합격한 청년의 공부 이야기를 흥미롭게 읽었다. 제목이 너무 거창한 게 흠이지만 수재의 일상이 얼마나 시시한 것인가를 느끼게 해줬다(나는 그 시시함을 흠모는 하되 실천하지는 않는 녀석이다). 현근님은 소싯적 홍정욱 헤럴드미디어 사장의 『7막 7장』을 읽고 감명을 받았다고 하는데 어릴 적 나도 그 책을 읽었지만 내게는 큰 영향력을 끼친 거 같지는 않다. 왜 나는 그를 떠받들지 못하고 나와 다른 사람이 이 지구상에는 많구나 하는 식의 깨우침밖에 얻지 못했을까. 작년에 읽은 고승덕 변호사의 『포기하지 않으면 불가능은 없다』에 대한 교훈도 그와 별반 다를 바 없으니 이를 어찌할꼬.


사소한 트집을 잡자면 이런 식의 성공기는 인간은 노력만 하면 다 이룰 수 있다는 철학을 설파하기 일쑤다. 그러나 우리의 경험에 비추어 사람의 재능이 동질하지 않다는 점은 또렷하다. 아무리 공정한 경쟁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노력이 유일 변수가 되는 날은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물론 나는 그네들이 살인적인 학구열을 부인하려는 게 아니다. 나는 다만 현근님 같은 분들이 타인의 노력에 한계가 있음을 알아주고, 노력하려는 의지를 꺾는 환경을 살필 줄 아는 시야도 갖췄으면 좋겠다. 내심 뛰어난 머리는 사회의 공공재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싶기도 하다. 빼어난 재주는 자신에게 별로 보탬이 되지 않는 사람들을 챙기는 것으로 보답해야 하지 않겠냐는 대다수 범재들의 질투를 부러 부인하지 않겠다. 이 시기심은 의외로 온당할 때가 많기도 하다.


현근님은 “이것 또한 곧 지나가리라!” 문구를 인용했다. “슬플 때 절망하지 않고 기쁠 때 오만하지 않을 수 있는 명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142쪽)”라고 한다. 문득 잊고지내던 이 명구를 처음 접했을 때의 아찔함을 떠올랐다. 이스라엘의 다윗왕이 보석 세공인에게 “내가 큰 승리를 거둔 기쁨을 억제하지 못할 때 그 것을 조절할 수 있는 글귀를 새기고, 동시에 그 글귀는 내가 큰 절망에 빠졌을 때, 용기도 함께 줄 수 있는 글귀여야 한다”라고 주문했다. 보석 세공인은 문구를 고심하느라 끙끙 앓다가 솔로몬 왕자의 도움을 청했다. 솔로몬은 ‘이것 또한 곧 지나가리라’로 정했다. “왕이 승리에 도취한 순간 이 글을 보면 자만심이 가라앉을 것이고, 낙심 중에 이 글을 보면 이내 큰 용기를 얻어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게 될 것이다”라는 친절한 해설도 덧붙여서 말이다. 유대교 문헌 미드라시(midrash)에 전하는 이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가슴 뛴다.


그러고 보면 환희와 시련이 잇닿아 있는 경우가 많다. 세상에 수그러들지 않는 기쁨이나 견딜 수 없는 고통은 그리 많지 않은 듯싶다. 유한한 인생에서 무한한 것은 극소화되게 마련이다. 영민함을 뽐내던 솔로몬도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도서 1:2)”라고 읊조렸다. 하지만 덧없음이야말로 생명의 본질 아닐까? 구차한 변명 같지만 한번뿐인 삶은 어떻게 살아도 그 개인에게는 각별하다. 나는 아마 김현근, 홍정욱, 고승덕 같은 분의 삶의 궤적을 따르지는 못하리라. 비록 그들보다는 한참 게으르고 무식한 나이지만 그들과는 다른 보람찬 삶을 꾸려볼 수 있지는 않을까? 나는 절대적인 올바름도, 고정적인 아름다움도 믿지 않는다. 이 매력적인 사람들을 따르지 않으려면 적어도 ‘다른 삶’을 살아낼 수 있어야 한다.


071029
제임스 힐튼의 소설 <잃어버린 지평선Lost Horizon>에 나오는 샹그릴라(Shangrila)는 히말라야산맥에 있는 어느 마을이다. 책을 읽지 않아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묘사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소개된 바에 따르면 티베트 사원이 있고, 평화로운 대초원이 있는 곳으로 그려지는 모양이다. “순수한 자연상태란 지상에서 대다수의 인간이 가장 덜 사악하고, 가장 행복한 상태”라고 말했던 루소의 자연상태처럼 다툼과 갈등이 없는 곳이다. 거기다가 무병장수까지 한다. 힐튼이 이 소설을 썼던 1933년 당시는 제1차 세계대전의 여파와 대공황의 참상으로 뒤숭숭한 시대였다. 작가는 시절이 하수상할 때면 으레 찾고 싶은 이상향을 그린 듯싶다. 1942년 전쟁에 지친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메릴랜드주에 지은 대통령 별장을 샹그릴라라고 이름짓기도 했다.


1997년 중국 정부는 샹그릴라가 티베트와 맞닿은 윈난성(雲南省) 중뎬(中甸)과 더친(德欽)의 중간 지점이라고 발표했다. 2001년 12월에는 아예 중뎬의 지명을 샹그릴라(香格里拉)로 개칭했다. 중국은 제 나름대로 엄밀한 조사를 벌였다고 주장은 하지만 관광 수입을 노린 술수에 지나지 않는다. 중국이 괜히 동북공정 같은 일을 벌이는 게 아니다. 그네들은 무릉도원마저도 제조하고 있으니 말이다. 2003년 유네스코는 샹그릴라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했으며 샹그릴라는 윈난성을 대표하는 관광지가 되어 많은 돈벌이를 하고 있다. 중국 안에서 가난하기로 손꼽히는 소수민족들이 사는 윈난성의 살림살이가 이 덕분에 핀 것은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관광객 편의를 위한 개발로 옛 모습을 잃고 있다는 탄식도 적잖다.


중국 정부의 상술은 얄밉지만 이렇게 해서라도 낙후된 지역을 발전시키려는 고충은 나무라기 힘들다. 자연미에 인공미(!)를 더한 샹그릴라 사례는 우리에게도 배울 점이 있다. 사극 열풍으로 드라마 세트장은 여기저기 지어진 모양인데 그 수준을 넘어서는 관광정책이 보이지 않는다. 세계인의 가슴에 새겨지는 관광지를 몇 개쯤 가꾸는 건 거기서 얻는 수입 때문만은 아니다. 대한민국의 이미지와 자존심 차원의 문제다. 볼 것 없고 살 것 없는 나라가 경제 성장을 얼마나 더한다고 세계인들의 기억에 남고 존경을 받을 수 있을까. 조지프 나이(Joseph Nye)가 설파했던 ‘소프트 파워(soft power)’는 쉽게 말해 다른 나라의 마음을 끄는 힘이다. 미국의 세계지배 전략을 뒷받침하기 위한 논거로 제시된 이야기를 인용하는 것이 껄끄러워서 ‘매력’이라고 쓰기도 한다. 뭐라고 표현하든 우리에 걸맞은 샹그릴라를 찾자.


샹그릴라는 티베트어로는 ‘내 마음 속의 해와 달’이라는 뜻이고 말레이어로는 ‘영원히 젊은’이라는 뜻도 있다고 한다. 이 말처럼 마음 속에서 꿈과 행복을 찾으려고 노력하라는 소리로 들린다. 영원한 젊음은 또 어떤가. 사무엘 울만이 <청춘Youth>이라는 시에서 노래했듯 “청춘이란 인생의 한 시기가 아니라 마음가짐을 뜻한다”라는 시구와 만난다. 후배 성구가 샹그릴라라는 필명으로 블로그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일상의 소소함에서 행복도 캐내고, 부조리도 헤집길 바란다. 안휘준 전 문화재위원장은 후생가외(後生可畏)가 아니라 후생가애(後生可愛) 정신을 강조하셨다. 사랑 받을 만한 후배이니 후생가애는 애초에 당연하고, 후생가외도 코앞이다. 나도 젊으니 함부로 후생가외를 외쳐서는 안 되겠지만. ^^;


071104
이기백 교수는 2003년 초에 펴낸 『한국전통문화론』에서 무술(巫術) 신앙은 인습의 대표적인 예로서 계승할 가치가 없다는 문제 제기를 했다. “기복신앙으로 전락한 무술신앙은 이미 오늘의 한국에서 종교적인 사명을 감당할 능력을 상실”했다는 주장이다. 전통문화를 선택적으로 계승하자는 주장은 동감할 만하다. 하지만 무속신앙을 박물관 전시품이나 연구자료로만 박제화하라는 견해에는 조심스럽다. 종교로서 기복신앙적 성격은 있게 마련이라는 항변도 설득력 있지만, 무속신앙이 민중의 물질적 희망을 채웠다는 점을 흘겨 볼 필요는 없을 듯싶다.


오랜 세월 지배계층에게 존중받지 못하고 서민의 종교로 자리매김한 무속은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무속은 나라에서 해주지 못하는 일을 신을 이용해 스스로 해결하겠다는 몸부림이었다. 인간의 생사화복, 불로장생 같은 살아가는 문제에 치중하다 보니 윤리적 요소나 정신의 문제가 적다는 단점이 있지만 그 단점은 무속의 특색일 따름이다. 그리고 그 단점은 한국에 전래된 자칭 고등종교들에도 고스란히 이식됐다. 팔이 안으로 굽는 걸 부추길 의도는 없다. 하지만 제 것을 부러 폄하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우리가 고쳐야할 습속인 듯싶다.


최준식 교수는 『최준식의 한국 종교사 바로보기』에서 한국의 종교 전통은 유불선(儒佛仙)이 아니라고 역설한다. 한국의 종교전통에서 ‘선’보다 중요한 것은 ‘무(巫)’이므로 이것으로 대체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 종교사 안에서 무교(巫敎)가 차지한 위상을 재정립하자는 제안은 신선하다. 무당을 소재로 한 소설 『계화』에 나오는 “무당은 행복한 사람들을 볼 수가 없다. 불행해서 널 찾아왔다가도 행복해지면 침을 뱉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서러워도 하지 말고 노여워도 하지 말고 원망도 하면 안 된다. 무당은 아픈 사람, 억울한 사람, 불행한 사람을 위해 태어났다”라는 대목이 떠오른다.


무속은 비운의 죽음일수록 오히려 각별하다. 한국인에게 곧잘 한(恨)의 정서가 있다고들 한다. 이는 결국 한스러움이 살아가는 사람의 생활을 너무 헝클어뜨려서는 안 된다는 문화다. 한은 풀어야 하는 것이다. 이를 체현한 것이 굿이다. 계승할 가치가 있는 전통만 이어 받는다는 명분으로 서민의 소박한 기원을 무시할 용기는 내게 없다. 고통에 대한 연민과 무병장수에 대한 갈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오늘날 지역 화합의 마당으로 살리는 방안을 고심해봤으면 좋겠다. 나는 무속을 부정하고서 우리가 꾀할 부귀영화가 그리 탐스럽지 않다고 본다.


나는 무속을 권장하자고 주창하는 게 아니다. 그냥 있는 건 내버려두자. 무속을 미신이라고 지나칠 정도로 험담하는 분을 보면 문득 섬뜩하다. 천주교가 우리나라에 도입될 때 세계 천주교 역사에 유례 없는 극심한 박해가 자행되었던 기억에 오싹하다. 무녀(巫女)의 금법(禁法)이 엄하던 시기의 일이다. 장령(掌令)으로 있던 조자(趙孜)는 무녀들을 멀리 내쫓거나 집단 수용하자고 아뢴다. 세종대왕은 “무릇 법을 세우는 것은 시행하기 위한 것인데, 시행할 수 없는 법은 세울 수 없는 것이다(凡立法, 爲可行也, 不可立不可行之法也)”라고 완곡하게 거절한다(세종실록 제101권 세종 25년 9월 2일). 이 마음가짐을 좀 배우면 안 될까?
Posted by 익구
:
『익구의 얼렁뚱땅 시읽기』(11)

ㅋ - 정호승, 「칼날」

칼날 위를 걸어서 간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피는 나지 않는다/ 눈이 내린다/ 보라/ 칼날과 칼날 사이로/ 겨울이 지나가고/ 개미가 지나간다/ 칼날 위를 맨발로 걷기 위해서는/ 스스로 칼날이 되는 길뿐/ 우리는 희망 없이도 열심히 살 수 있다


아무리 외면하려 해도 세상은 칼자루 쥔 쪽이 움직입니다. 칼끝에서 독설을 퍼붓고 몸부림 쳐도 생채기만 나고 칼 잡은 자의 마음을 바꾸지 못하기 일쑤입니다. 올챙이적 시절을 기억하는 양심적 기억력만 있다면 우리가 칼자루를 쥐어 보는 건 어떨까요? 열심히 벼린 칼을 남을 해치는 무기가 아니라 세상의 아픔을 덜어내는 수술칼로 써봅시다. 춘추좌씨전에는 무(武)라는 글자를 止戈爲武(지과위무)로 풀이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무기를 거두어들이는 것, 싸움을 그치게 하는 것이 진정한 무공이라는 뜻입니다. 공공의 적을 물리치며 부조리를 타파하고 남은 나머지 힘은 절제한다는 멋진 말입니다. 남명 조식 선생이 늘 휴대하고 다니셨다는 경의검이라는 조그만 칼과 성성자라는 쇠방울 두 개는 일상적인 긴장, 끝없는 자기검열을 상징합니다. 그 치열한 자아성찰은 자신의 능력이 자신‘만’의 것이 아님을 인식하는데서 출발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품은 꿈에 비해 힘이 약하다고 투덜거리지 말아요. 아직은 꿈을 줄일 때가 아닙니다. 벌써부터 output을 줄일 생각일랑 말고 바지런히 input을 늘려봅시다. 위기는 위대한 기회이며, 절망은 절실한 희망입니다.


후기 - 무(武)자 풀이처럼 정(正)자를 일(一)과 지(止)로 나눠서 풀이하기도 한다. 하나에서 그친다, 어느 정도에서 멈춤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꽤 그럴 듯하다. 바르게 살기 어렵지만 나는 우선 하나라도 잘 해야겠다.


『익구의 얼렁뚱땅 시읽기』(12)

ㅌ - 안도현, 「퇴근길」

삼겹살에 소주 한잔 없다면
아, 이것마저 없다면


짧은 시지만 입안에 군침이 가득 고입니다. 우리말은 두겹, 세겹이라는 말을 쓰지, 이겹, 삼겹이라고 쓰지 않습니다. 그래서 삼겹살은 1994년에야 국어사전에 올랐습니다. 돼지고기 가운데 인기 없는 비곗덩어리로 취급되던 삼겹살은 개성 사람들의 정성으로 온 국민의 벗이 되었답니다. 돼지에게 섬유질이 적은 사료와 열량 많은 사료를 번갈아 먹여 비계와 살이 적당히 섞인 삼겹살을 만든 것이라고 하네요. 좋은 마케팅 사례로도 손색이 없을 거 같아요. 세상이 아무리 팍팍해져도 서민들이 한 주에 한 번쯤은 삼겹살 구워먹을 여유는 지켜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가야할지는 다양한 견해가 있을 수 있겠지만 적어도 삼겹살 나눠먹는 즐거움이나마 건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배곯는 사람에게 가장 먼저 눈길을 보내고 손길을 건네는 사회가 되는 소박한 꿈을 품어봅니다. 노릇노릇 구워진 삼겹살과 터질 듯한 상추쌈 앞에서 잠깐이나마 “먹기 위해 살지 말고, 살기 위하여 먹으라”라는 키케로의 말도 떠올리면 좋겠네요. 마음 맞는 대로 모여 앉아 삼겹살에 소주 한 병으로 불콰해진 얼굴을 마주보며 배부른 소크라테스가 되어봅시다.


후기 - “먹는다고 하는 것은 사람에게 있어서 큰 일이다. 하루도 먹지 않을 수 없거니와 또한 하루도 구차하게 먹을 수는 없는 것이다. 먹지 아니하면 목숨을 해칠 것이요, 구차하게 먹는다면 의리를 해칠 것이다(食之於人 大矣哉 不可一日而無食 亦不可一日而苟食 無食則害性命 苟食則害義理).” 정도전이 쓴 『삼봉집』이 출전이다. 나 같은 소시민의 밥벌이에 의로움을 따지는 건 너무 팍팍해보이지만 정직하게 번 돈으로 삼겹살에 소주 한 병 나눌 수 있다면 내 인생도 그리 헛되지 않으리라.


『익구의 얼렁뚱땅 시읽기』(13)

ㅍ - 김수영, 「푸른 하늘을」

자유를 위해서/ 비상하여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아름다운 네가 내게로 왔다. 나는 새벽까지 한가로이 책을 뒤적일 때나 왁자지껄 어지러운 술자리에 낄 때, 한바탕 욕지기를 하고픈 미움이 솟구칠 때나 산사에서 빛 바랜 단청을 감상할 때도 너를 생각했다. 날마다 어떻게 하면 너를 좀 더 꼭 껴안을 수 있을까 궁리한다. 사르트르 말을 빌리자면 나는 너를 사랑하도록 저주받았으니까. 그러니 나는 늦게까지 네 곁을 지킬 것이다. 진리는 시간의 딸이라고 하지만, 사랑 또한 시간의 딸이었으면 좋겠다. 나는 너를 알고 나서부터 한번뿐인 삶을 대충 살지 않게 되었다. 사랑의 생채기를 어루만지니 내 부박함이 원망스럽고 가시 없는 장미는 없다는 말이 사무친다. 나는 너와의 인연이 나만의 것이 아님을 익히 잘 알고 있다. 다만 너를 아낀다는 사람들의 상당수가 너를 진실로 사랑하지 않아서 슬프다. 그네들은 자꾸 너를 독점하려 든다. 자신의 사랑은 로맨스라고 말하면서 남의 사랑은 불륜이라며 해코지를 하려 드는 것만큼 볼썽사나운 건 없다. 내 용기가 허락하는 한 너를 사랑하지 못하게 만드는 이들과 싸우겠다. 나는 낮은 사람들을 위해 흘리는 너의 눈물을 닦아주는 동반자가 되고 싶다. 너는 내 운명, 자유(自由)!


후기 - 리차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 한 대목. “어째서일까?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한 새에게 그가 자유롭다는 것을 확신시키는 일, 또한 그가 조금만 시간을 들여 연습한다면 스스로 그걸 증명할 수 있다는 걸 믿게 하는 것이라니? 어째서 그 일은 그렇게도 힘든 것일까?”

사르트르는 인간은 자유롭도록 저주받았다고 말했지만, 내가 지금 누리는 자유는 본래 마땅하지 않았다. 자유가 마땅하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다. 대학생들이 학교를 부러 그만두고 공장에서 일하기 위해 자격증을 땄다. 건전가요상을 탔던 <아침이슬>이 금지곡이 됐다. 5월 광주에서는 형은 계엄군, 동생은 시민군이 되어야 했으며, 6월 명동성당 농성장에는 고등학생이 지갑을 털어 성금을 보냈다.

상무대 영창에서 화장실까지 포복해서 혀끝에 똥을 묻혀 가지고 선착순으로 와야 할 때 인간에 대한 믿음은 어디까지 흔들렸을까. 한번 터뜨리면 쌀 7가마니가 순식간에 사라진다는 지랄탄에 얼마나 많은 눈물이 흘러내렸을까. 시위대가 불태운 도시락을 바라보는 전경의 속은 얼마나 타들어 갔을까. 또 박종철과 권인숙은 얼마나 무서웠을까. 타인의 고통을, 과거의 아픔을 제것처럼 느낀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모두를 위한 자유를 위해 나는 좀 더 기억해야 한다.


『익구의 얼렁뚱땅 시읽기』(14)

ㅎ - 황인숙, 「희망」

어제가 좋았다
오늘도 어제가 좋았다
어제가 좋았다, 매일
내일도 어제가 좋을 것이다.


이 시는 오늘이 그리워질 만큼 알차고 재미나게 보내라고 말하려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 오늘을 희생하는 것에 익숙하잖아요. 베네통사의 루치아노 베네통 회장의 좌우명은 “내일 할 수 있는 걸 오늘 하라(Do today what you could do tomorrow)”라고 합니다. 어제의 비로 오늘의 옷을 적시지 않고, 내일의 비를 위해 오늘의 우산을 펴지도 말고 오직 오늘을 위해 살라는 말씀입니다. 함께 하는 사람의 먼 훗날 성공과 안락을 사랑하기보다 지금 이 순간의 고뇌와 희망을 아낄 수 있다면 서로에게 늘, 혹은, 때때로 그리운 사람이 될 수 있겠지요. 애틋한 그리움끼리 만나 서로의 허물을 보듬고 서러운 눈물을 닦아준다면 날마다 고마운 인연이 될 겁니다. 오늘이 사무치게 그립도록 열심히 삽시다. 어제가 좋았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것, 그것이 희망입니다.


후기 - 린위탕(林語堂) 『생활의 발견』에는 “인간의 아름다움은 12월 마지막 날, 연초에 결심했던 것들을 되돌아보며 ‘30%쯤 달성했군’하며 아쉬워하는 데 있다”라는 구절이 있다고 한다(완역본을 찾아봤으나 어디에 있는지 잘 안 보인다. 나중에 꼼꼼히 읽어봐야겠다). 이 말처럼 인간의 매력은 모자람을 아쉬워하는 데서 있는지도 모르겠다. 알콩달콩 살아왔던 과거의 일상이 모여 내가 됨을 잊지 말자.


<연재를 마치며...>

글 읽고 쓰기를 축복처럼 여기는 제게 무언가를 털어놓을 공간이 있어 행복했습니다. 마무리도 짧은 시로 대신하려 합니다. 다시 ㄱ으로 시작해서 또 가슴 뛰는 여정을 떠납니다.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아름다운 장신구인 시 몇 구절쯤 외울 수 있는 멋진 飛반인이 되세요. 사랑합니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 고은, ‘그 꽃’

Posted by 익구
:

『익구의 얼렁뚱땅 시읽기』(6)

ㅂ - 조지훈, 「봉황수」

벌레 먹은 두리기둥, 빛 낡은 단청(丹靑), 풍경(風磬) 소리 날러간 추녀 끝에는 산새도 비둘기도 둥주리를 마구 쳤다. 큰 나라 섬기다 거미줄 친 옥좌(玉座) 위엔 여의주(如意珠) 희롱하는 쌍룡(雙龍) 대신에 두 마리 봉황새를 틀어 올렸다. (하략)


<명청교체기에 심란했을 광해왕에게 올리는 가상의 상소문이다>
신 엎드려 아뢰옵니다. 신이 듣건대 후금은 욱일승천하는 기세로 요동에서 세를 넓히고 있습니다. 저들이 중원마저 평정하고 나면 해동까지 탐낼 것은 명약관화한 일입니다. 대신들 거개가 명나라의 은덕만을 칭송하고 있으나 나라 밖 사정에 슬기롭게 대처하여 위로는 종묘사직을 평안케 하고, 아래로는 생민의 환란을 막으시옵소서. 일찍이 발해는 군주를 황상(皇上)으로 높이고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는 호기를 보였습니다. 허나 당나라에게 황제가 아닌 제후로서 조공을 바치며 책봉을 받았고, 군주가 승하한 뒤에는 황제 칭호가 아닌 왕의 칭호를 올렸습니다. 이는 그들의 법식이 정돈되지 못해서가 아니라 대국에 대처한 숙고의 산물이었습니다. 고려왕조 또한 몽골의 침략을 받기 전까지 밖으로는 왕국이면서도, 안으로는 황제의 제도를 꾸리는 외왕내제(外王內帝) 방식을 이어갔습니다. 엎드려 원하옵건대, 중화가 소중한 것만 알고 이 강토를 가벼이 여기는 자들의 말을 경계하소서. 섬기되 복종하지 않고, 낮추되 굴하지 않았던 선례를 무겁게 여기시옵소서.


후기 -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기획특별전 ‘다시 보는 역사 편지, 고려묘지명(高麗墓誌銘)’을 보고 왔다. 고려 시대부터 발견되기 시작한 묘지명은 무덤 주인공이 누구이고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기록해 무덤 안에 넣은 기록물이다. 무덤 앞에 세우는 묘비가 공적인 내용을 담는데 비해 묘지명은 개인적인 동기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당시의 생활과 문화를 읽을 수 있는 소중한 기록 유물이다. 고려 숙종의 딸이자 예종의 친동생 복녕궁주의 묘지명에는 “천자(天子)의 따님이여, 보름달 같으셨네”라는 구절이 써있다. 비록 송나라의 연호를 쓰는 사대외교를 하면서도 스스로를 천자의 나라로 자부했음을 엿볼 수 있다. 우리의 대외정책도 고려시대의 유연함을 좀 배워보면 어떨까.


『익구의 얼렁뚱땅 시읽기』(7)

ㅅ - 윤동주, 「서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황현의 『매천야록』의 한 토막입니다. 을사오적 이근택은 을사늑약이 체결되던 날 퇴궐하여 집안사람들에게 이제 죽음을 면할 수 있게 되었다며 좋아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있던 몸종이 “나라가 위태로운데 죽지 아니하고 다행히 목숨을 건졌다 말하는 너는 참으로 개돼지로다. 내 비록 천인이라 하더라도 어찌 개돼지의 종이 되겠는가”라고 일갈하며 집을 뛰쳐나갔다고 합니다. 아무리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더라도 부끄러워할 줄 아는 사람은 드물고,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들은 넘칩니다. 맹자는 “사람이 부끄러움을 몰라서는 안 된다. 부끄러움이 없음을 부끄러워한다면, 부끄러운 일이 없을 것이다”고 말합니다. 인간이 저지르는 잘못 중에 가장 끔찍한 것은 부끄러움을 잃는 것입니다. 늘 승전고만 울릴 수 없는 인생사에 기왕 지는 거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름다운 패배가 좋겠습니다. 2004년 입실렌티 초대연사인 한비야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자기가 가진 능력과 가능성을 힘있는 자에 보태며 달콤하게 살다가 자연사하시겠습니까, 그것을 힘없는 자와 나누며 맞서 싸우다 장렬히 전사하시겠습니까?”


후기 - “사람 사는 세상에 쉬운 일은 없겠지만 그렇다고 힘겹게 밀어 올려도 다시 데굴데굴 굴러 떨어지기만 하는 시지프스의 바위 또한 없다고 믿습니다”라는 구절을 넣으려다가 분량 제한 때문에 뺐다. 그리스 신화 속의 시지프스는 영겁의 세월동안 높은 산의 정상까지 바위를 올리는 형벌을 받는다. 시지프스를 무익하면서도 희망마저 없는 처지라고 비관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바위가 정상에 다다르면 결국 떨어질 것임을 알면서도 끊임없이 돌을 굴리는 포기하지 않는 정신이라고 부르고 싶다. 먼저 부끄러워하면서 먼저 고쳐나가고 싶다. 과즉물탄개(過則勿憚改)하지 않는 참회란 얼마나 공허한가. 백치미(白痴美)보다 무서운 것이 무치미(無恥美)다.


『익구의 얼렁뚱땅 시읽기』(8)

ㅇ - 백석, 「여승」

여승(女僧)은 합장(合掌)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佛經)처럼 서러워졌다


일제강점기의 궁핍한 생활로 인해 가족이 해체되는 비극적 상황을 절제된 시어로 풀어낸 리얼리즘이 돋보입니다. 문득 오늘날 화두가 되고 있는 양극화 문제를 떠올립니다. 이스털린(Easterlin)은 연구를 통해 모든 나라, 모든 지역에서 소득수준이 높을수록 행복감도 커진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여기까지는 상식 수준이지요. 그런데 놀라운 것은 부유한 나라와 가난한 나라에서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의 비율이 별 차이가 없다는 겁니다. 한 나라의 높은 경제 성장과 물질적 풍요가 그 나라 국민 전체를 더 행복하게 한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이죠. 이처럼 최저 생활수준을 벗어나면 경제 성장은 개인의 행복, 사회적 후생 증가에 이바지하지 못하는 현상을 “이스털린의 역설”이라 부릅니다. 이 역설은 행복한 삶은 수치나 물질적인 부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평범한 진리를 곱씹게 해줍니다. 한미 FTA 추진 등을 통한 국민소득 상승이 진정한 부민(富民)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에 대한 근본적 고민을 해야겠습니다. 우리 사회는 누군가의 크나큰 희생으로 이루어지는 경제 발전을 반성할 수 있을 만큼 성숙했습니다. 서러운 눈물을 줄여나가는 성장전략을 모색하는 경영학도가 되어보는 건 어떨까요?


후기 - 이스털린의 역설은 이정전(2002), 『시장은 과연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가?』, 53~81쪽/ 정갑영(2005), 『열보다 더 큰 아홉』, 230~232쪽을 참조했다. 소득수준과 행복 사이에 어느 정도 정(正)의 관계가 성립한다는 가설 자체보다 의도치 않은 역설을 발견한 게 참 재미나다. 국민소득 2만불을 돌파하면 우리는 좀 더 행복해질 수 있을까? 우리의 욕망은 부의 증가 속도보다 더 빨리 커지는 게 아닐까? “모든 사람의 필요를 위해서 지구는 넉넉한 곳이다. 그러나 누군가의 탐욕을 위해서는 지구는 넉넉하지 않다”는 간디의 말씀에 동감한다.

새로 사귄 친구가 어떤 성격과 취미를 가졌는지 묻지 않고 그 아버지의 수입이 얼마인지를 궁금해 하는 어른의 『어린왕자』 이야기가 떠오른다. 별을 많이 소유하기 위해 쉬지 않고 별을 세는 실업가도 생각난다. 물론 경제적으로 윤택하게 살고 싶다는 꿈을 품는 거 자체는 나무랄 일이 아니다. 열심히 일해 번 돈으로 더 나은 생활을 하는 건 권장할 일이다. 다만 그 탐욕이 체감(遞減)하지 않고 체증(遞增)한다는 게 문제다. 신제품 가격이 떨어질 때를 기다려 사려다가 죽기 하루 전에야 장만하는 어리석은 이의 행태가 떠오른다. 모든 것이 숫자로만 표현되는 세상에 “이쯤 되면 넉넉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용기다.


『익구의 얼렁뚱땅 시읽기』(9)

ㅈ - 오규원, 「죽고 난 뒤의 팬티」

가벼운 교통사고를 세 번 겪고 난 뒤 나는 겁쟁이가 되었습니다. 시속 80킬로만 가까워져도 앞좌석의 등받이를 움켜쥐고 언제 팬티를 갈아입었는지 어떤지를 확인하기 위하여 재빨리 눈동자를 굴립니다.


죽고 난 뒤의 부끄러움에 신경 쓰는 사람은 도무지 대충 살 수가 없습니다. 당나라 시인 두보가 실의에 차있는 친구의 아들에게 지어준 시에서 유래된 고사성어로 “관을 덮고서야 일이 정해진다(蓋棺事定)”는 말이 있습니다. 두보는 관 뚜껑을 덮기 전에는 아무것도 알 수 없으니 좌절하지 말고 치열하게 살라는 뜻으로 한 말일 겁니다. 또 한 편으로는 살아있는 사람을 평가하기란 쉽지 않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무척 복잡하고 다면적이기 때문이죠. 죽고 나서야 그 사람의 평가가 좀 더 객관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니, 일평생 긴장을 늦추지 말라는 무서운 이야기로 들립니다. 마지막 한 순간을 견디지 못해서 흐트러진 사람들을 너무 많이 보았잖아요. 팬티로 눈동자를 굴리는 마음은 혼자 있을 때 경계하는 마음과 통합니다. 옛 선비들이 좋아했던 말 가운데 홀로 있을 때도 몸가짐을 삼간다는 ‘신독(愼獨)’이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누가 보지 않더라도 내밀한 행동이 한결같다는 말이지요. 아니, 오히려 혼자 있을 때 더 잘해야 합니다. 속옷을 갈아입을 때마다 첫마음을 지키고 올바르기를 다짐한다면 웅숭깊은 삶을 꾸릴 수 있을 거예요.


후기 -  팬티 한 장에서라도 제 존재의 위엄을 부여하려는 안간힘이 짠하다. 비록 그것이 근원적인 문제보다는 지엽말단에 치중하는 것이라는 지청구를 늘어놓더라도. 죽는 것보다 더 부끄러운 짓을 벌이는 이들보다야 훨씬 더 기품 있는 사람들이 아닐까 싶다. 금아 피천득 선생님의 수필에서 “오동은 천년 늙어도 항상 가락을 지니고 (桐千老恒藏曲), 매화는 일생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梅一生寒不賣香)” 다짐하는 모습이 애틋하다. 그 소년 같은 마음을 나도 배우고 싶다. 나도 결국 때 묻을 대로 묻어 남는 건 팬티 한 장의 깨끗함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애는 써봐야겠다. 한비야님의 말을 빌리자면 “될지 안 될지 해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겠는가?”


『익구의 얼렁뚱땅 시읽기』(10)

ㅊ - 충담사, 「찬기파랑가」

열어 젖히니/ 나타난 달이/ 흰구름 좇아 떠가는 것이 아닌가?/ 새파란 냇물에/ 기파랑의 모습이 있어라./ 이로부터 그 맑은 냇물 속 조약돌에/ 기파랑이 지니시던/ 마음 끝을 따르고자/ 아아, 잣나무 가지 높아/ 서리 모르시올 화랑의 우두머리시여. (양주동 해독)


기파랑은 무척 기품 있는 인물이었나 봅니다. 기파랑이 지닌 마음의 가장자리만이라도 따를 수 있기를 희망하게 만들고, 눈조차 그의 고결한 인품을 흐트러트리지 못했다니 말입니다. 요즘은 잘 안 쓰는 말 가운데 사숙(私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존경하는 사람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을 수는 없으나 그 분을 본보기 삼아 학문과 덕행을 쌓는 것입니다. 맹자가 “나는 공자님의 제자가 되지는 못했지만, 사람들을 통해 사숙했다”고 한 말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역사상 사숙을 통한 사제 관계는 매우 많습니다. 다산 정약용은 성호 이익을 사숙했고, 신사임당은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 태임(太任)을 사숙했고, 김춘수는 릴케를 사숙했습니다. 간디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를 사숙했고, 슈베르트는 베토벤을 사숙했으며, 보들레르는 에드커 앨런 포를 사숙했다고 합니다. 우리 둘레를 보면 멋있게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Role model에게서 끊임없이 배우고 성찰하는 것을 발견합니다. 칸트는 데이비드 흄의 저작을 읽고 독단의 잠에서 깨어났다고 외쳤습니다. 주위에 스승이 없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자가 될 자신이 없는 게 아닐까요? 여러분은 몇 분의 스승을 모시고 계십니까?


후기 - 향가가 으레 그렇지만 찬기파랑가는 특히 해독에 차이가 큰 편이다. 학자에 따라 향가의 해독이 다른 것은 향가가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한국어의 어순에 따라 표기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라 때의 우리말을 향찰을 통해 재구성하기는 무척 어려운 일이다. 양주동 박사가 괜히 인간 국보를 자처한 것이 아니다. 여하간 찬기파랑가의 해독에 있어서 크게 두 가지의 의견이 있다. 양주동 박사의 원형 상징적인 해독과 김완진 교수의 개인 서정적인 해독으로 갈린다. 이 밖에 달, 물, 돌에 대한 의미도 차이가 적잖다. 여기서는 화자와 달의 문답으로 본 양주동 박사의 해독을 따왔다. 맹자 이루편(離婁篇)에 “나는 공자님의 제자가 되지는 못했지만, 사람들을 통해 사숙했다(予未得爲 孔子徒也 予私淑諸人也)”는 구절은 언제 들어도 애틋하다. 나는 내가 모시는 스승을 넘어서는 제자가 될 수 있을까?

Posted by 익구
:

2005년 10월 경영B반 웹진에 객원기자로 들어가 처음 맡은 일감이 열 줄 짜리 연재물을 해보라는 것이었다. 짜임새 있는 연재물을 궁리하다가 한글 자음 ㄱㄴㄷ을 열쇠말(키워드)로 하는 시 감상을 생각해봤다. 고종석 선생님의 『언문세설』 형식을 따왔다.

한국어 자음의 기능부담량이 동일하지 않은지라 어떤 때는 너무 넘쳐서 선택하기 힘들고, 어떤 때는 딱히 마땅한 게 없어 애태웠다. 가까스로 시 선정은 마쳤는데 그간 잊고 있던 주옥 같은 시를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왜 진작 이렇게 하지 못했나 서글프다.

나처럼 비문학적(!)인 녀석이 살가운 마음과 아름다운 언어를 헤집을 수 있을지 걱정스럽지만 애를 써보겠다. 2006년 1월부터 2007년 4월까지 틈틈이 연재되다 보니 나도 정리하는 걸 잊고 있었다. 그리 영양가 없는 글이지만 내 머리 아파 낳은 자식을 내칠 수 없는 노릇, 후기를 덧붙여서 소개한다.


『익구의 얼렁뚱땅 시읽기』(1)

ㄱ- 고려가요 「가시리」

붙잡아둘 일이지만/ 시틋하면 아니 올세라// 서러운 님 보내옵나니/ 가시자마자 돌아서 오소서


헤르만 헤세의 말대로 사랑은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기보다는 고뇌와 인고 속에서 얼마나 강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그만한 대가를 감내하지 않고서는 누릴 수 없는 기쁨이기에. 양주동은 「가시리」를 "동서문학 별장(別章)의 압권"이라고 격찬했지만 가시리는 기교나 표현이 거의 산문에 가깝다. 시가라고 보기에는 너무 푸석푸석한 담박함이 흠이 됨직하다. 어쩌면 절창이라는 찬사는 몇 안 되는 고려가요 가운데 비교우위 정도인지도 모른다. 괜한 험담에도 불구하고 고은의 표현대로 가시리는 "위대하게 단순"하다. 가는 듯 돌아오라는 실낱같은 희망은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라는「님의 침묵」의 역설과 만난다. 이처럼 집착을 덜어낸 절제된 미련이야말로 연애하는 이들의 미덕이 되어야 한다. 고종석은 "이 시의 화자가 남자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 이 여리고 애틋한 사랑이 여성만의 전유물은 아니고 그래서도 안 된다. 내 둘레에 가시리 가락처럼 슬퍼하고 참아내는 남자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후기 - 연재물의 첫 소재였던 가시리는 나름대로 많은 공력이 들어갔다. 일단 현대어 풀이를 어떻게 하는 지도 고민이 많았다. 영감을 얻기 위해 관련 논문까지 뒤적이고 집에 있던 먼지 쌓인 문고판 책도 찾아봤다. 양주동 선생의 저 유명한 가시리 평설은 예스런 말투가 너무 많아 해독이 여의치 않아 크게 보탬이 되지는 않았다. 산출물을 보니 하잘것없지만 창작의 고통은 장단(長短)을 가리지 않는다. 강준만 선생이 『글쓰기의 즐거움』에서 언급한 이야기가 떠오른다. 오스카 와일드가 누군가에게 편지를 부치면서 자기 편지가 너무 길어서 미안하다고 썼다고 한다. 시간이 없어서 편지 길이를 짧게 못 만들었다면서...^^;



『익구의 얼렁뚱땅 시읽기』(2)

ㄴ- 이형기의 「낙화」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JP님 그간 건강하셨습니까?
저는 「낙화」에서 떠남의 미학을 읽을 때마다 마음 한 구석에서 당신을 생각합니다. 10선 국회의원이 되겠다며 비례대표 1번을 받아들던 당신은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면서도 모른 체했습니다. 미셸 투르니에는 "등은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앞모습은 꾸밀 수 있으나 뒷모습은 꾸미기 어렵지요. 화사하고 씩씩한 앞모습보다는 너절하고 쓸쓸한 뒷모습이 그 사람의 참모습에 좀 더 가까울 겁니다. 당신은 뒷모습을 보일 기회를 너무 많이 놓쳤습니다. 메이저 전 영국 총리는 57세의 이른 나이에 정계를 은퇴하며 "떠나야 할 때를 넘겨 머물기보다 남들이 머물라 할 때 떠나겠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일으킨 기업을 전문경영인에게 맡기고 은퇴한 정문술 전 미래산업회장이라고 왜 괴로움이 없었을까요. 수로부인에게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신다면/ 꽃을 꺾어 바치오리라"라고 노래했던 삼국유사의 노인은 홀연히 사라졌기에 아름다웠습니다. 아쉬울 때 내려오지 못한 당신을 반면교사로 삼습니다. 저는 있을 때 잘할 게요. 고맙습니다.

* 이형기 시인은 2005년 2월 2일 고대 안암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습니다. 1주기 즈음하여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후기 - 요즘도 낙화가 교과서에 실려 있는지 모르겠다. 중학교 국어시간에 처음 접한 이후 이 시는 내 애송시 가운데 늘 앞자리에 있다. 김종필은 마지막 순간까지 “서산(西山)을 붉게 물들이며 떠나고 싶다”는 노욕에 빠졌지만 그리 아름답지 못한 저녁놀이었다. “나아가지 못할까 걱정하지 말고, 물러나지 못할까 걱정하라(不患其不能進前 而患不能退步)”는 퇴계 선생의 말씀이 사무친다.


『익구의 얼렁뚱땅 시읽기』(3)

ㄷ - 김영랑의 「독을 차고」

독 안 차고 살아도 머지 않아 너 나마저 가 버리면/ 억만 세대(億萬世代)가 그 뒤로 잠자코 흘러가고/ 나중에 땅덩이 모지라져 모래알이 될 것임을/ '허무(虛無)한듸!' 독은 차서 무엇하느냐고?


<벗과 영랑의 가상대화>
벗: 나도 독을 차보고 싶었지만 부끄럽게도 목구멍이 포도청이었네.
영랑: 유족함에 개같이 숙이느니 따가운 볕 아래 고개를 들고 싶었어. 천년을 늙어도 가락을 잃지 않는 오동나무처럼, 일생이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 매화처럼 말일세.
벗: 날선 모습은 자네답지 않네만 좀 둥글게 둥글게 살수는 없겠나?
영랑: 그렇게 둥글게 살다가 떼굴떼굴 굴러서 나락으로 떨어진 걸 많이 봤지.
벗: 살다보니 세상의 비루함과 인심의 야박함에 절망하는 데 익숙해져버렸네.
영랑: 우리가 자꾸 쓰러지는 것은 꼭 이룰 것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지금 헤매고 있는 까닭은 가지 않을 수 없는 길이 있기 때문은 아닐까?
벗: 아등바등해봤자 우리네 삶은 푸른 바다 속의 좁쌀 한 톨(滄海一粟)이지 않은가?
영랑: 그렇기에 풀 한 포기 앞에서 모래 한 알 앞에서도 솔직하게 살려고 하는 것일세. 도무지 대충 살수가 없단 말이지.
벗: 사필귀정(事必歸正)이란 말이 우리를 얼마나 배신했던가.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 같은 친구야!
영랑: 벗이여! 칠흑 속에 지칠 때 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 쉬어 가세나!


후기 - 사실 이 글은 유치환, 조지훈, 박노해, 백석 시인 등의 시구를 슬쩍슬쩍 차용해 대화문 하나를 만들어냈다. 패러디한 문구를 맞혀보라는 퀴즈를 내볼까 하다가 반응이 시큰둥할 거 같아서 그만 뒀다.^^; 대개 그렇겠지만 나는 벗과 영랑의 심정을 반반씩 가지고 있는 듯하다. 그렇다고 평소에는 영랑인척 하다가 결정적 순간에는 벗처럼 사는 게 아니라 늘 고민하며 접점을 찾는 거 같다. 이걸 단순히 기회주의적이라든가 이중적이라고 지칭하기보다는 양가적(兩價的)인 캐릭터라고 적당히 둘러대 본다.^^;


『익구의 얼렁뚱땅 시읽기』(4)

ㄹ - 김수영, 「로빈슨 크루소를 생각하며, 술을」

취해도 쉽게 제 마음을 드러내지 못하는 우리는/ 오랜만이라며 서로 눈빛을 던지지만/ 어느새 슬그머니 비어버린 자리들을 세며/ 서로들 식어가는 것이 보인다


우리는 종종 왁자지껄한 술자리에서도 로빈슨 크루소가 됩니다. 외로움을 달래려 더 술을 마시는지도 모릅니다. “한 번 마셨다면 응당 삼백 잔은 마셔야 한다”고 이태백이 말했다지만 좋은 술벗이 있다면 석 잔으로도 충분할 겁니다. 논어에서 공자는 술을 마시는 데 한도를 정하지는 않았지만 술에 취해 어지러워지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았다(唯酒無量 不及亂)고 했습니다. 유주무량과 불급난 중에 하나는 어떻게 해볼 수 있겠지만 이 둘을 결합시키기란 고연전 지는 것만큼이나 어렵네요.^^; 아주 가끔은 지워진 기억을 더듬어가며 사무치게 부끄러울 때도 있겠지만 대개는 오래도록 도란도란 환담을 나누고 싶습니다. J. 헤이는 “술은 비와 같아 진흙에 내리면 진흙은 더욱 더럽게 되나, 옥토에 내리면 아름답게 하고 꽃피게 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네 술자리가 구접스러운 세상사 시름을 날릴 수 있는 훈훈한 옥토가 될 수 있기를! 인생은 짧아도 술병 동낼 여유는 늘 있게 마련입니다.^^; 아찔했던 사발식을 추억하며 정철의 장진주사를 읊조립니다. “꽃 꺾어 산(算) 놓고 무진무진(無盡無盡) 먹세그려.”

* 이 시인은 ‘풀’,‘눈’,‘폭포’의 시인 金洙暎(1921~1968)이 아닌 동명이인 金秀映(1967~)입니다.


후기 - 소설가 김연수는 고교시절 참고서에서 봤던 이백의 시 장진주(將進酒)의 첫 구절 “그대 보지 못하는가(君不見)”를 떠올리며 ‘결국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는 것을 뼈아프게 깨달았다고 한다. “그대는 보지 못하는가/ 황하의 물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흘러서 바다로 가서는 다시 돌아오지 않음을/ 그대는 보지 못하는가/ 고대광실의 거울 앞에서 백발 서러워하는 것을/ 아침에 푸른실처럼 검던 머리 저녁에 흰눈처럼 되었음을/ 인생의 뜻을 얻었으면 즐기기를 다할지니/ 금 술잔으로 하여금 공연히 달만 쳐다보게 하지 말라...”라는 구절이 소설가의 마음을 짠하게 했다. 나는 “그대 잊지 않았는가(君未忘)”를 읊조린다. 젊은 날의 높은 꿈을 벌써 잊지는 않았는가를 습관처럼 되뇌고 싶다.


『익구의 얼렁뚱땅 시읽기』(5)

ㅁ - 서정주, 「무등을 보며」

어느 가시덤불 쑥구렁에 놓일지라도/ 우리는 늘 옥(玉)돌같이 호젓이 묻혔다고 생각할 일이요,/ 청태(靑苔)라도 자욱이 끼일 일인 것이다.


미당은 "가난이야 한낱 남루(襤褸)에 지나지 않"다고 말합니다. 물질적인 궁핍은 고매한 정신력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속삭입니다. 그러나 가난은 "타고난 살결과 마음씨"를 헝클어 놓습니다. 미당 만한 재능이 없는 범인들은 오랫동안 헐벗고 외로울 겁니다. 더군다나 미당 자신은 "옥돌같이 호젓이 묻"히지 않았습니다. 생명파의 대표주자였던 미당은 손잡지 말아야 할 것에 손을 내밂으로써 스스로의 생명의지가 얼마나 너절한지 보였습니다. 한국어의 아름다움을 드높인 미당의 친일 행적과 군사 독재에 대한 굴신 앞에 탄식합니다. 그의 삶에서 발견되는 역겨움을 통해 예술적 성취와 인격적 성숙 사이의 불일치를 곱씹어 봅니다. 미당 옹호자들의 흠집 없는 영혼에서 나온 문학만을 허용할 수는 없다는 항변에 동감합니다. 그의 과오는 엄중하지만 끊임없이 밀려오는 사면의 유혹을 뿌리치기 어렵습니다. 문학만이라도 진실을 벗했으면 좋으련만 역시 헛된 욕심인가 봅니다. 문학이 딱히 더 절개를 지킬 까닭은 없겠지요. "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하기 어렵다(難作人間識字人)"던 매천 황현의 절명시가 새삼 숙연해집니다. 미당이 좀 더 부끄러워했다면 좋았을 것을!

* 시인 나이 스물넷에 이런 투명한 시어를 엮을 수 있다는 것이 부럽다 못해 얄밉네요.^^;


후기 - 미당에 대한 논쟁은 앞으로도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 같다. 작품과 그 작품을 생산한 문인의 실제 삶을 어떻게 연관시키고 분리할 것인가 하는 까다로운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가령 얼마 전 물러난 김진표 전 교육부총리는 외국어고 졸업생이 어문계열로 진학하는 비중이 낮다고 질타했지만 정작 그 자신의 딸이 외고를 나와 비어문계열로 진학한 것으로 밝혀지자 여론이 싸늘했던 것도 이와 유사한 사례다. 물론 사람이 밉다고 그 사람의 주장에 아예 귀를 막는다거나 그 주장이 그르다고 그 사람을 제재하려는 식의 태도는 경계해야 한다. 그러나 적어도 지식인이나 공직자 같은 인물들은 제 주장과 제 생활을 일치시키려는 노력을 더 해야 하는 게 아닐까.

김지하 선생은 “미당이 윤리적으로는 친일하고 친독재하고 살았지만 시 하나는 끝내준다는 등의 무책임한 소리를 해서는 안된다. 미당의 삶이 윤리적으로 하자가 있기 때문에 미학적 관점에서도 시의 감동이 안온다”고 평가했다. 무척 설득력 있는 말이다. 또한 미당의 구차한 행적을 옹호함으로써 한국 현대사에 만연한 변절도 옹호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미당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들에 상당 부분 끌리면서도 미당에게 사면의 유혹을 느끼는 내 자신이 민망하다. 모든 예술작품은 생산자의 손을 떠나면 독자적인 생명력을 지니면서 독자들에게 흡수된다는 논리에 내가 적잖이 동감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그의 정치적 너저분함까지도 우리 문학이 품고 가야할 유산인지도 모른다. 미당의 행적을 숨기지 않되 그의 시는 더 많이 읽혀야 하는 것이 아닐까. 가뜩이나 시도 안 읽는 세상에.

이남호 선생은 인간 존재의 복합성을 강조한다. 예술가의 삶의 일부를 전체적인 평가로 평면화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술과 예술가의 삶이 분리될 수는 없긴 하지만, 그 연관성을 함부로 말해선 안 된다. 문학이 가장 경계하는 것은 섣부른 일반화와 단순화일 것”라는 주장도 경청할 만하다. 여하간 미당은 왜 일평생 부당한 권력을 편들었을까. 그래서 그의 시를 아끼는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거나 억지스런 변명을 내어놓게 만들었을까.^^;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지게 마련이다. 그림자만 부각시켜 빛을 꺼트리는 것도 잘하는 일은 아니지만 그림자를 의도적으로 감추는 것도 부질없는 처사다. 이 나라에는 아직도 그림자를 감추려는 시도가 너무 많다. 역사가 두려운 까닭은 있었던 일이 없었던 일로 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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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짓는 공민왕사당

문화 2007. 11. 26. 15:34 |

지난 11월 3일 있었던 공민왕사당 답사에 함께 해준 청원이에게 깊은 고마움을 표합니다.^0^

<다시 짓는 공민왕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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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흥창역을 나오자마자 보이는 안내 표지판이 고맙다. 공민(恭愍)이라는 시호는 명나라에서 준 것이다. 우왕은 공민왕이 부활시킨 고려 시법에 의거하여 인문의무용지명렬경효대왕(仁文義武勇知明烈敬孝大王)이라는 시호를 올렸다. 공(恭)은 공경하게 사대하라는 뜻이다. 민(愍)은 나라에서 재난이나 반란을 만나고, 백성을 비통하게 하고 해친다 정도의 뜻이다. 잇따른 반란과 홍건적, 왜구 등에 시달렸던 공민왕 치세의 파란만장함에 어울리기는 하나 그의 적잖은 업적으로 볼 때 깎아 내렸다는 느낌이 짙다.



“이건 뭐냐!” 친구의 탄식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창전동 공민왕사당은 전면 보수공사를 하고 있었다. 나는 평소에도 문이 닫혀 있어 들여다 볼 수 없는 곳인 만큼 노여움(?)을 풀라고 다독였다. 친구가 고른 저녁 메뉴가 실망스러웠기에 망정이지 지청구가 더 날아올 뻔했다. 사실 크게 알려지지 않은 문화유산을 찾다 보면 개방하지 않는 곳도 많고 퇴락해서 안쓰러운 경우도 흔하다. 함께 온 벗에게 미안한 마음에 마포구청에 몇 가지를 물었다. 마포구청 문화체육과에서는 사당 보수공사에 관한 안내가 부족해 문화재 관람에 불편을 끼쳐 죄송하다고 말씀해주셨다. 노후된 사당을 보수하는 공사는 10월 초에 착공하여 12월 초에 완료될 예정이라고 한다. 보수를 마쳐도 종전과 마찬가지로 화재예방 및 사당내부 소품 보호를 위해 개방하지 않을 계획이란다.


창전동 공민왕사당은 조선 초기에 양곡창고인 광흥창에서 일하던 창고 관리인의 꿈에 공민왕이 나타난 것을 계기로 지어졌다고 한다. 조선 초기에 공민왕을 모시는 건 반역으로 몰리기 십상이다. 그래서 삼불제석(三佛帝釋)을 모시고 신당 또는 당집으로 부르다가 정몽주 등 고려의 충신들이 복권되던 1790년경 비로소 공민왕사당이라고 이름을 바꿨다. 일제 강점기 때 화마를 입었다고도 하고, 한국전쟁 때 파괴되었다고도 한다. 소실된 사당을 주민 스스로 건축했다고 전해지고 있어 민간 전통건축기술 수준을 헤아리게 하는 자료로 평가되어 등록문화재 제231호로 지정되었다. 공민왕의 위대성은 그 당시에도 인정받은 모양이다. 조선이 건국된 후에도 공민왕에 대한 제사는 이어졌다. 이러한 숭모 분위기가 이어져 창전동뿐만 아니라 종묘 안의 공민왕신당이나 경북 봉화군 청량산 공민왕당 등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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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사당은 와우산 아래 광흥창터에 인접해 있다. 공민왕사당의 터는 옹색해서 도무지 사진 찍을 각도가 나오지 않는다. 사당 옆의 담들은 고즈넉한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다.


『서울 民俗大觀』 1권과 『마포 : 어제와 오늘, 내일』이라는 책에 공민왕사당의 내부를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사진 자료들이 다수 있다. 공민왕사당에는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신상 외에도 최영장군과 마부, 삼불제석과 동자상 등이 걸려있다. 공민왕 신상은 제법 화격(畵格)이 있는데 황색 곤룡포가 미려하고 호피무늬 의자가 위엄을 더한다. 조선 건국을 정당화하기 위해 고려 말기의 사적들이 상당 부분 날조되었음은 널리 알려졌다. 붓이 굽었던 건 오백 년 고목을 찍어 넘기기가 만만치 않았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망국의 필연성을 입증하기 위한 희생제의였던 셈이다. 공민왕이 시기심이 많고 잔인했다는 『고려사』 편찬자들의 험담과는 달리 넉넉한 신상의 모습이 반갑다. 공민왕은 고려의 대표적 화가로 손꼽히며 글씨도 잘 썼다는데 예술가적 풍모가 얼마나 녹아나느냐가 공민왕 어진의 알맹이가 아닐까 싶다. 과연 서울에서는 보기 드문 고려시대 인물과 관련된 문화유산이라 할 만하다. 우리는 옛것이라고 하면 으레 조선시대만 떠올린다. 우리네 유구한 전통에 감춰진 여러 겹의 속살을 헤집기 위해서 고려도 알고, 근현대도 탐구하는 의식적 노력을 기울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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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는 없었던 일각문(一角門)을 새로 만드는 듯싶다. 90년대 초 사진을 보니 투박한 철문을 달아놓았는데 그 후 태극문양을 집어넣었다. 점점 사당의 모양새를 갖추어 간다.


등록문화재 제도는 1876년 개항 이후 한국전쟁에 이르는 동안 만들어진 근대문화유산을 효율적으로 보존하기 위해 2001년 7월 도입됐다. 그동안은 일제 잔재라는 오명과 개발 광풍 속에서 멸실되기 일쑤였다면, 이제는 오늘이 쌓여 역사가 된다는 평범한 진리를 곱씹게 해준다. 등록문화재 제도가 정착된다면 일상의 흔적들에 대한 기록과 보존도 한층 강화될 전망이다. 등록문화재 제도는 지정문화재 제도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한 정책이다. 중앙정부나 지자체 지정문화재가 각종 규제를 수반하고 있어 재산권 침해가 불가피한데 견주어 등록문화재는 보존이나 활용에도 융통성이 많은 편이다. 소유자 중심형 문화유산 보호제도로서 국가는 각종 혜택을 통해 소유자의 활용 의사를 북돋워주는 방식인 셈이다. 흥미로운 등록문화재들이 많지만 공민왕사당도 매우 이채롭다. 근대에 지어졌지만 그 안에 담겨진 내용물은 600년도 넘는 옛날이다. 공민왕의 험난한 좌절을 따가워하기 좋은 곳이다.


공민왕은 민간신앙에서 받드는 몇 안 되는 임금이다. 무당을 소재로 한 소설 『계화』에는 “무당은 행복한 사람들을 볼 수가 없다”라는 구절이 있다. 공민왕을 기리는 민중이 있다는 건 그 불운함에 대한 동정인지도 모른다. 무속은 비운의 죽음일수록 오히려 각별하다. 공민왕의 억울함이 우리네 서글픔과 잘 포개진다는 믿음이 생기는 것이리라. 한국인에게 곧잘 한(恨)의 정서가 있다고들 한다. 이는 결국 한스러움이 살아가는 사람의 생활을 너무 헝클어뜨려서는 안 된다는 문화다. 한은 풀어야 하는 것이다. 이를 체현한 것이 마을굿이며 공민왕의 한을 푸는 것이 공민왕사당제다. 인습을 버리고 전통문화를 선택적으로 계승하자는 주장은 동감할 만하다. 하지만 그런 명분으로 서민의 소박한 기원을 무시할 용기는 내게 없다. 고통에 대한 연민과 무병장수에 대한 갈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오늘날 지역화합의 마당으로 살리는 방안을 고심해봤으면 좋겠다.


옛 기록을 살피다 보면 공민왕의 개혁이 어찌나 지난했던지 가슴이 짠하다. 부원배를 몰아내는 건 고난의 연속이었다. 신돈의 개혁에 얼마나 많은 저항이 있었는지를 엿본다. 북방을 개척했던 장수 인당의 목을 베어 원나라의 분노를 달랠 때는 참담했다. 관제를 격상시켰다가 다시 격하시키고, 원나라의 연호를 정지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명나라 연호를 사용하는 역경에 마음이 아렸다. 명나라 사신이 기녀의 실수를 트집잡아 항의하자 시중 염제신이 유배되는 대목에서는 괴로웠다. 공민왕이 노국공주가 돌아가자 애이불상(哀而不傷)에 실패해 총기를 잃은 게 단지 성정의 모자람 때문은 아니었다. 숙명은 그의 의지를 압도했다. 그러나 정치적 인간에게 가장 무서운 일은 결과로서 책임져야 한다는 점이다. 듣기 좋은 개혁 구호를 늘어놓는 지금의 지도자들이 경계 삼을 일이다. 부정적 지식(negative knowledge)이라는 말이 있다. 실패나 실수, 잘못으로부터 얻는 지식을 일컫는다. 우리는 성공보다는 실패로부터 많이 배운다. 고초 속에서 잉태되는 개혁을 입으로만 외치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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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사당은 맞배지붕에 2칸으로 된 건물이다. 사당 옆으로는 들여놓은 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운동기구가 있다. 맞은 편에 아파트 공사가 한창인데 주민들의 편안한 휴식처로 활용될 것 같다.

영구히 보존하는데 주안점을 두는 지정문화재와는 달리 등록문화재는 외관을 크게 변화시키지 않는 범위에서는 고치거나 증축이 가능하다. 사당을 새로 짓는 모습을 보며 저래도 되나 싶었던 내 궁금증도 멀끔히 풀렸다. 아마 보수공사를 결정한 중요 원인이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기 때문이리라. 등록문화재 지정을 전후로 훼손된 근대문화유산들이 적잖다고 들었다. 다행히 공민왕사당은 마포구민의 지속적인 관심 덕에 새 단장을 준비하고 있다. 매년 열리는 공민왕사당제에 힘입어 이 작은 사당이 지역주민들과 어그러지지 않고 친숙한 존재로 각인된 덕분이다. 근대문화유산의 가치는 찾기 나름이고 가꾸기 나름이다. 서운해하던 친구에게 등록문화재의 취지를 설명하고 금단청까지 잘 마르면 다시 찾아오자고 권해야겠다. 가서 고하리라. 대왕 당신을 도무지 미워할 수 없었다고. - [無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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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투고] 선거권 강제하는 50% 규정 문제 있다 
- 고대신문 1496호 2004년 12월 06일(월)

지난 38대 총학생회 선거는 학내 구성원간의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2일에서 3일로 투표일을 공식적으로 늘린 것도 모자라 월요일 하루 오후 6시까지 연장투표를 하고서 그것도 모자라 밤 11시까지 연장투표를 한 것은 선거시행세칙 상의 50% 투표율 규정을 채우기 위한 것이다.

선거권에는 투표를 할 자유와 투표를 안 할 자유가 있는 것이 상식이다. 50% 투표율 규정이 그 좋은 취지에도 불구하고 유권자의 선거권 행사를 강요하는 의미로 전락한 것이 이번 선거를 통해 명확해졌다. 상당수 대학의 총학생회 선거가 50% 투표율 규정을 고수하고 있긴 하지만 일부 대학들은 그런 규정 없이 개표를 하고 있으니 반드시 절대적인 진리는 아니다. 또한 사회에서 이뤄지는 선출투표에서 투표율 규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형식적 대표성을 갖춰야겠다는 강박관념이 “투표 권하는 사회”를 만들었다.

연장투표가 실시됨으로써 제 시간에 맞게 투표에 참여한 유권자들은 자신의 의지가 제대로 반영되지 못해 제 때 참여한 것에 대한 충분한 보상을 받지 못했다. 학생회 선거에 무관심한 사람이 연장투표를 하는 선관위원들이 안쓰러워서나, 집요한 투표 권유에 마지못해 투표를 할 때 이는 회원들의 의사를 민주적으로 수렴하려는 선거제도 본연의 취지에 맞지 않게 운영되는 것이다.

현행 50% 투표율 규정은 투표하지 않을 자유를 제약하고 회원의 선거권 행사를 강제된 의무로 만드는 효과를 가져오고 있다. 정치적 동원이 그리 거창한 것도 아니다. 자신의 자유의사에 반하는 것을 두 번 세 번 권할 때 그것이 동원이 된다. 의도했던 행위 자체를 만들어내지 못해도, 그 행위로 유도하려는 시도가 적정 수준을 넘어가면 동원으로 볼 수 있다. 선의가 충만해서 권유하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받아들이는 사람이 불편하다면 그것을 동원으로 볼 수 있다.

선거에 참여한 유권자들의 자유의사가 최대한 반영되는 것이 맞다면, 참여한 사람들 간의 치열한 논쟁과 토론을 통해 다수표를 획득한 사람이 일정 기간 권한을 가지고 업무를 수행하는 의회 민주주의의 원칙을 신뢰한다면 이러한 문제의식은 여전히 유효할 것이다.

끝으로 일각에서 제기된 선거무효(무산) 운동이 대의 민주주의제 하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대리인 비용 자체를 치르기 거부하는 것으로 발전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간 학우들의 바람과는 달리 나갔던 학생회 조직에 대한 견제를 넘어 승복 자체를 거부하지 말았으면 한다.

치열한 논쟁과 많은 진통 끝에 38대 총학생회장단이 꾸려졌다. 우리 모두 어렵게 세워진 총학생회에 애정 어린 관심을 보내주자. 또한 앞으로 학우들의 의사가 최대한 반영되는 학생회가 될 수 있도록 한해 동안 많은 학내 구성원들이 함께 노력하자.

최익구(경영02)


<덧붙이는 말>

3년 전에 고대신문에 투고했던 글을 우연히 발견했다. 나는 게재가 거부당한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실린 모양이다. 고대신문 홈페이지에 기사검색을 해서 나온 결과를 긁어왔다(명백한 오타만 수정했다). 편집이 좀 됐을지는 모르나 문장이 참 거칠다.ㅡ.ㅜ 2005년 39대 총학생회 선거가 투표율을 채우지 못해 무산되고 다음해에 재선거를 치렀다. 2003년 서울대 총학생회 선거에서 투표율이 50%에 미달해 2004년 3월에 재선거를 치르는 난리를 보며 우리 학교에서도 이런 날이 머잖아 벌어질 것을 염려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빨랐다. 2005년 11월 39대 총학생회 선거 때 제 때 투표한 유권자들의 의사가 온전히 반영되지 못한 건 두고두고 아쉬운 일이다.

그 이후에 나온 논의들은 실망스러웠다. 2006년 40대 총학생회 선거 때부터는 졸업예정자의 경우 투표에 참여하는 사람들만 투표율에 반영하는 식으로 개정해버렸다. 졸업예정자는 투표율이 낮으니 일단 빼놓고 투표하는 사람만 정족수에 산입하겠다는 이상한 논리다. 이를 통해 실질 투표율은 50%가 안 되도 개표 가능한 근거를 마련한 셈이다. 졸업예정자의 한 표는 비졸업예정자(?)의 표에 비해 투표율을 더 높이는 효과를 가져다주는 코미디를 앞으로도 계속할지는 잘 모르겠다. 50%라는 형식적 대표성을 확보하겠다며 졸업을 앞둔 사람들을 투표율 높이는데 이용하는 태도는 그리 많은 지지를 얻지 못할 것이다.

나는 투표율이 50%에 모자라서 연장투표를 하는 현상의 문제보다 원칙의 문제를 지적하고 싶었다. 50% 투표율 규정은 그 선의에도 불구하고 회원의 선거권 행사를 강요하는 의미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게 내 기본 문제의식이다. 표현력이 부족해서 그 때나 지금이나 설득력 있지는 않지만 아마 내가 틀리지는 않을 거 같다. 처음 주장할 때는 정말 외로웠지만 점점 귀 기울여 주시는 분들이 늘어나서 반갑다. 올해는 똑같은 소리를 반복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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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성이 능력이다5

경제 2007. 11. 6. 03:57 |

<도덕성이 능력이다>는 총 5부작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순서대로 읽으셔야 하지만 따로 읽으셔도 무방합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A는 Amorality의 약자로서 도덕성에 문제가 있는 지도자를 지칭하는 가상의 인물입니다. 대선 끝날 때까지 틈틈이 수정할 계획이니 퍼가지 말아주세요.^0^


5. 도덕력으로 경쟁하라


11월 1일 한국보건사회연구원·한국노동연구원이 기획예산처에 제출한 ‘소득분배 및 공적이전·조세 재분배’ 보고서에서 도시가구의 시장소득 기준 상대빈곤율이 2006년 16.42%로 관련 통계가 나온 1999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다행히 증가폭은 둔화되고 있다. 상대빈곤율은 가구소득이 도시가구 평균소득의 50%에 미치지 못하는 가구의 인구 비율을 말한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사회보장과 조세제도 등 정부 정책을 통한 불평등 완화 효과는 커지고 있지만, 개인이 벌어들이는 시장소득의 불평등은 확대되고 있다. 시장소득은 모든 수입을 합한 경상소득에서 정부보조와 같은 공적이전소득을 제외한 것으로, 가구원이 직접 벌어들인 소득이다. 저소득층의 소득이 줄어들고, 고소득층과의 격차가 벌어지고 있다. 정부지출이 불평등을 완화시키고 있다지만 비정규직이나 영세 자영업자의 소득 감소에 기인한 시장소득의 불평등에 대한 개선책 마련이 시급하다. 정부는 공적부조와 조세정책을 감안한 가처분소득은 소득 불평등 추세가 정체되고 있다고 해명한다. 선진국과의 복지 예산의 규모 차이가 재분배 효과의 차이를 낳는다는 주장도 설득력 있다. 양극화 해결을 위해 성장을 통해 좋은 일자리를 만들어야 한다는 의견도 일리가 있다.


이처럼 세상 모든 일이 그렇지만 숫자 하나를 놓고 분석도 묘안도 갈린다. 경제중심주의, 경제만능주의가 지배한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탈도덕 현상’이 꾸려 가는 경제에는 도덕성이 천덕꾸러기일 게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선(先)성장 후(後)복지 레토릭 밖에 내놓을 거리가 없다. 나는 도덕성을 희생해서 경제를 살리지 못한다고 확신한다. 윤리경영, 부패지수, 사회자본 등의 각종 이론과 실증 연구가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아니 양보해서 경제가 살아난다고 해도 부도덕한 경제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 게다가 A 같은 이들이 사회의 상층부를 차지하는 사회에서 가장 피해를 볼 계층은 서민이다. ‘도덕력’이 동난 세상에서 누가 일차적이면서 심대한 타격을 입을지는 불 보듯 뻔하다. ‘탈도덕 현상’을 가치중립적으로 평가하기 어려운 까닭은 그것이 환상이고 허상이기 때문이다. ‘탈도덕 현상’의 기저에 깔린 ‘식객(食客)의 도덕’은 시혜적 평등을 내포하고 있다. 선거는 정치적 학습 과정이다. 1952년과 56년 미국 대선에 민주당 후보로 나섰던 스티븐슨은 매카시즘에 맞서 강요된 애국심이 아닌 민주와 자유의 가치를 일깨웠다고 한다. 그는 연거푸 패배했지만 자신이 믿는 가치에 헌신할 줄 알았던 그 자세를 배우고 싶다. 이번 대선을 통해 스티븐슨 같은 괜찮은 지도자도 만났으면 좋겠다.


잡설이 길었지만 끝끝내 A가 집권한다고 치자. “요와 순은 천하를 다스리기를 어진 마음으로 하였으므로 그 백성들도 그를 따라 어질게 되었고, 걸과 주는 천하를 다스리기를 포악한 마음으로 하였으므로 그 백성들도 그를 따라 포악하게 되었다(堯舜帥天下以仁 而民從之 桀紂帥天下以暴 而民從之)”라는 『대학』 구절이 있다. 요와 순이 통치한 것은 백성들이 요순 같은 자질을 가졌기 때문이고, 걸과 주가 통치한 까닭은 백성들이 걸주와 같은 포악함을 품었기 때문이라고 거꾸로 읽으면 섬뜩해진다. 민주공화국의 수준은 결국 그 국민의 수준과 비례한다는 평범한 진리이겠지만. 이어서 “그 내리는 명령이 그들 자신이 실제로 좋아하는 바와 상반되는 것이면 백성들은 따르지 않는다. 그러므로 군자는 자기에게 선이 있은 뒤에 남에게 선을 지니기를 요구하며, 자기에게 악이 없는 뒤에 남의 악을 비난하는 것이다(其所令 反其所好 而民不從 是故 君子有諸己 而後求諸人 無諸己 而後非諸人)”라고 말한다. 앞서 본 공자와 맹자의 경구와 비슷하다. A는 결국 또 다른 A를 복제해낼 따름이다.


실질적 민주주의를 논하는 분들이 부쩍 늘었다. 절차적 민주주의는 어느 정도 완숙해진 거 아니냐는 판단에서다. 그러나 ‘탈도덕 현상’은 절차적 민주주의가 제대로 구현되고 있지 못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선출 과정의 필터링(Filtering)이 미흡하기 때문이다. 도덕적 자원을 결핍한 A는 ‘비지지자 신뢰도’를 확보하기 위해 유무형의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A 비지지자들의 냉소주의도 문제겠지만 극단적으로는 맹목적인 신뢰를 부여할 수 있는 온정주의적 독재자의 출현을 고대할지도 모른다(임혁백, 『세계화시대의 민주주의』, 나남출판, 2000). 아직 보완이 더 필요한 ‘도덕력’이지만 도덕성이 능력이라는 기본 골격만은 확고하다. 유권자들은 이제 ‘도덕력’ 경쟁도 헤아리는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 이중적 잣대와 관대화 경향을 버리고 얼마 더 깐깐해져서 이 권리를 누리자. ‘탈도덕 현상’이 헝클어뜨리고 있는 절차적 민주주의를 건사하고 믿음직한 지도자를 선택하자.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 위원으로 고생하셨던 한홍구 성공회대 역사학과 교수가 “우리는 화해를 구걸하지 않겠다”라고 일갈했다는 기사가 떠오른다(“"우리는 화해를 구걸하지 않겠다" .” 오마이뉴스. 2007. 10. 28.). 과거의 행적이든 오늘날의 과오든 양심 고백을 하는 사람은 너무 드물다. 하지만 구걸로는 진정한 화해를 이루지 못한다. 나는 마찬가지 논리로 도덕을 구걸하지 않겠다. ‘탈도덕 현상’을 부추기는 자들은 나쁜 줄 알면서 저지르는 고의범도 있고, 자신의 행동이 옳다고 믿는 확신범도 있다. 고의범은 극복과 제어의 대상일 뿐 논쟁과 토론의 상대는 아니다(이런 말을 하는 게 슬프지만). 확신범은 개전의 희망이 있기는 하다. 그네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도덕적 훈계가 아니라 ‘도덕력’의 유용함이다. A와 그 지지자들에게 건넨 손가락질을 나 자신에게 먼저 돌리고 한 번 뿐인 삶을 ‘도덕력’으로 매만지는 긴 호흡의 여정이다. 종종 고단하겠지만 남에게 말하지 못할 것이 없는 떳떳한 삶을 지킨다면 얼마나 번듯하고 흐뭇하겠는가. 정리하자. 우리를 다스리는 분들이 ‘도덕력’을 갖췄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결코 사치가 아니다. 나를 다스리는 사람이 존경스럽고 본받을 만한 분이길 갈망한다. 하지만 나는 감동을 구걸하지 않겠다. - [無棄]


* 현행 공직선거법 제93조는 탈법방법에 의한 문서·도화의 배부·게시 등 금지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선거일 180일 전부터는 선거에 영향을 끼칠 목적으로 정당·후보자를 지지·반대하는 내용에 대해 게시 및 상영을 할 수 없다는 내용입니다. 이 법이 누리꾼들의 건전한 정치 토론을 사실상 봉쇄하고 있다는 볼멘소리가 적잖습니다. 선관위가 선거법 93조의 본래 취지를 망각하고 무리하게 적용하고 있는 건 아닌지 안타깝네요. 선거법 개정에 소극적이던 어느 정당은 선관위 이외에 정당도 포털이나 언론사에 글을 올린 이용자의 신원 정보 제공을 요구할 수 있도록 하는 등 규제를 한층 강화한 법안을 지난 5월 발의했다고 합니다. 경제성장을 약속하기 전에 국민의 기본권부터 보장해주시길 간곡히 청합니다.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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