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꿈을 자주 꾸는 편이 아니다. 설령 꾸더라도 별로 의미를 안 두기 때문에 깨어나서 금세 잊어버린다. 프로이트 같은 분이 들으면 무지 섭섭해하시겠지만 말이다.^^; 주말 아침에 늦잠을 자다가 깨어나서도 생생한 꿈을 꿔서 또 잊어버리기 전에 기록해둔다. 꿈속에서의 나는 1인 2역을 했다. 아니 정확히는 한 번은 3인칭 관찰자 시점, 또 한 번은 1인칭 주인공 시점이었다.^^;


장면#1
뜬금없이 전투가 한창이다. 어쩌면 꿈도 내 취향대로 각색되었는지 피와 살이 튀기기보다는 그저 칼과 창, 방패 등이 내는 쇳소리만 요란한 것 같다. 만신창이가 된 한 장수가 병사 몇 명과 함께 분투를 하고 있는 모습이 안쓰럽다. 으레 이 대목에서 나오는 장면이지만 "중과부적이오니 어서 피하시옵소서 장군!"이라는 병사의 하소연에 장수는 하늘을 우러러 탄식한다. 이윽고 장수는 침통한 표정으로 입을 연다. "어서 폐하를 보위해야겠다" 그래봤자 그 말을 따를 부하는 고작 대여섯에 지나지 않는다. 장수는 급히 몸을 피해 궁궐로 향한다. 하지만 몇 마리는 있을 법한 말은 보이지 않고 죄다 보병들만이 흙먼지 날리면서 싸우고 있다. 장수나 병사들도 그냥 냅다 뛰어서 도망하는 수밖에. 말뿐만 아니라 궁수들도 하나 없어서 화살이 허공을 가르는 장면도 나오지 않는다. 여하간 비탈길에서 한번 미끄러져 주고, 개천을 힘겹게 건넌다. 이 초라한 몰골의 일행을 추격하는 무리가 있으니 어이없게도 절대 그 간격을 좁히지 못하고 뒤꽁무니만 열심히 좇아오고 있다. 도망가는 쪽이 지쳐서 슬슬 걸어가고 있는데도 말이다. 그 덕분에 어느 주택에 무사히 몸을 피한다. 도망가는 장면의 연속이었는데 힘들다거나 급박한 것을 못 느꼈으니 이건 3인칭 관찰자 시점인 듯 싶다.^^;


장면#2
장수와 병사 두 명(최종적으로 탈출 성공한 건 둘 뿐인 모양이다)이 도착한 곳은 으리으리한 고대광실(高臺廣室)이었다. 그러나 정식 궁궐은 아니고 행궁(行宮) 내지 임시 거처인 모양이다. 마치 창덕궁 내에 사대부들의 집을 본떠 만들었다는 연경당(演慶堂)의 분위기가 느껴진다. 모든 건물이 단청이 없는 백골집이었다. 아마도 만월대의 옛풍경을 상상하기 힘들고, 고려 시대의 단청이 제대로 남아있는 것이 없다 보니 꿈속에서도 제대로 재현이 안 된 것 같다. 이쯤 되니 꿈의 배경이 고려말, 그 중에서도 최후가 임박한 시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문 밖에는 수천의 군사가 도열해있다. 행궁 안에서는 불안한 표정의 왕과 신료들이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그러던 참에 문밖에서 서신이 날아든다. 한자로 되어 있어 잘 모르겠지만 이방원의 하여가(何如歌)처럼 얼른 항복하면 안위는 보장한다는 내용인 것 같다. 왕은 내게 답서를 준비하게 된다. 나는 비분강개하는 마음으로 "웃기지 마라, 너희들 이러는 거 아니다"라는 식의 내용을 일필휘지로 써내려 갔다. 우습게도 이 대목에서 마치 사극에서의 내레이션처럼 이 문장을 후세사람들이 절의의 상징으로 기린다는 말이 깔린다. 마치 제갈공명의 출사표쯤 되는 양 말이다.^^; 큰소리는 뻥뻥 쳐놨지만 행궁 내의 군사는 일이백명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최대한 기억해낸 꿈의 기억들이다. 나름대로 생생하게 꿈을 꿨지만 돼지는커녕 동물은 하나도 안나왔으니 그야말로 별 신통치 않은 꿈일 듯하다. 고려왕국에 대한 애착이 꿈으로 표현되었나보다라고 편하게 생각하면 그만이다. 개성 시범관광이 진행 중인데 그 여파로 꿈속에서나마 개성 땅을 밟고 싶었나보다.^^


초등학교 3학년 가을 어느 날 읽었던 정몽주/성삼문 위인전은 내 인생을 크게 바꿨다. 이 얄팍한 책을 읽고 또 읽으며 충의와 절개의 화신인 두 사람의 삶에 흠뻑 빠져버린 나는 이렇게 살아야겠다고 몇 번이고 다짐했으니 말이다. 내가 책을 본격적으로 좋아하게 된 계기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고민하게 된 계기도 바로 이 책에서 비롯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포은 선생도 선생이지만 시호조차 못 받고 원통하게 간 우왕과 창왕, 결국 고려의 황혼을 장식해야했던 공양왕에게 늘 연민의 정이 솟아난다. 망하기 전에 지렁이도 꿈틀해본다는 심정으로 칼도 휘둘러보고, 문장으로 농락을 해보는 광경이 그려본 것이 아닐까 싶다.


여담이지만 고려시대 사가들이 썼던 고려실록은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다고도 하고, 『고려사』를 편찬한 후 정사를 편찬한 후에 소각하는 관례에 따라 소각되었다고도 한다(엄청난 분량의 사료를 소각했다니 조선왕조실록의 운영과 비교해서 다소 의아스럽다). 삼국시대의 역사가 고려시대에 쓰여진 『삼국사기』, 『삼국유사』등에 의해서 간신히 전해지는 것처럼 고려시대의 역사도 대부분 조선시대 사가들의 입맛에 재단되고 있는 셈이다. 여하간 당대에 기록된 1차 사료가 없다는 것은 고려사의 비운이다. 『고려사』나 『고려사절요』같은 2차 사료가 고려사 연구의 기본자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못내 안타깝다. 하기야 진수의 정사 『삼국지』도 위나라 조씨와 진나라 사마씨를 띄웠던 것처럼 패장은 말이 없고, 승자는 골라먹는 재미를 느끼는 것이 세상사의 이치인지도 모르겠다.


잠에서 깨서 문득 야은 길재의 시조 한 수가 떠올랐다. 정몽주 위인전의 여파로 원척석의 시조와 더불어 초등학교 3,4학년 때부터 외우는 시조 중에 하나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匹馬)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人傑)은 간 데 없네/ 어즈버 태평연월(太平烟月)이 꿈이런가 하노라"를 읊으면서 고려청자와 고려불화에 대해 좀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을 해봤다. 가끔 이렇게 혼자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좋아라 하는 것도 삶의 윤활유가 되어주지 않을까 싶다.^^; 종종 재미난 꿈들을 꿔보고 싶다. - [憂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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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도 잘 논 하루

문화 2005. 8. 24. 15:22 |
나는 종종 혼자서도 잘 논다는 평을 듣는다. 자기만의 세계를 꾸리면서 사색에 빠져 지낼 듯한 이미지에다 책읽기를 좋아하고 잡글 쓰는 것을 즐기는 행태... 게다가 역사 공부나 문화유산 탐구 같은 대중성 떨어지는 취미를 보유하고 있다 보니 그런 혐의가 짙게 드리우는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외로움도 많이 타고 대부분의 경우 함께 하는 일을 선호한다. 혼자 있는 시간도 무척 즐기지만 그 이상으로 지인들과 알콩달콩 재미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좋아하는 녀석이다.


그런데 특히 내가 잘 못하는 일이 혼자 여행을 떠나는 일이다. 산책이나 서점 방문은 혼자서도 곧잘 만끽하는 편이지만 어딘가 새로운 곳으로 떠나거나 문화유산 답사 같은 건 도통 혼자서 못하겠다. 젊은 시절 흔히들 꿈꿔보는 나홀로 배낭여행 같은 건 단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했으니 말이다. 독립심이 부족하다는 핀잔을 줄 수 있겠으나 진정한 독립심은 사람들 속에서 자신의 가치를 견결히 지켜내는 데 있지 않을까 싶다. 혼자서 하는 일은 대개 독립적이게 마련이니 말이다.^^; 마치 진정한 자유는 제 혼자 있을 때가 아니라 얽히고설킨 인연들 속에서 찾아야하듯이 말이다.


굳이 이런 사설들을 늘어놓은 까닭은 간만에 혼자 길을 나섰기 때문이다(독립문, 서대문형무소, 사직단, 태릉, 의릉, 동묘 등을 혼자서 다닌 전례가 있긴 하다). 토요일 아침 겸 점심을 먹고 나서 갑자기 필 받아서 국립고궁박물관으로 향했다. 갑작스레 잡힌 일정이라 함께 갈 사람을 구하지 못해 다음 기회로 미루려 하였으나 이날로 예정된 유홍준 문화재청장의 갤러리 가이드를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청산유수 같은 청장님의 말씀을 직접 들어보는 좋은 기회였다. 이런 식으로 대중과 호흡하며 우리 문화를 알리려고 노력하시는 모습이 무척 좋았다. 사람이 유식해지려면 저 정도는 되어야겠구나라는 생각도 해봤다.


국립고궁박물관은 일부만 개관한 것이고 2007년 완전개관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한다. 국립고궁박물관을 국립중앙박물관과 더불어 양대축으로 키우겠다는 유 청장의 야심 찬 포부에 찬사를 보낸다. 아직도 창고에 잠자고 있는 숱한 유물들을 어서 만나보고 싶다. 내 나라가 그렇게 꾀죄죄한 나라만은 아니었음을, 우리 선조들이 맨날 신음만 하고 지낸 것은 아니었음을 이렇게나 증명하고 싶기 때문이다. 너무 유물론적 관점인 것 같기도 하지만...^^; 인천국제공항에 커다란 백자 달항아리를 전시해 놓으면 어떻겠냐는 유 청장의 제안에 박수가 터져 나왔다. 유 청장 말씀대로 우리 문화유산을 널리 알릴 수 있는 활동들이 많이 있었으면 한다. 자칫하다가 중국과 일본 틈에 끼어서 별 볼일 없는 나라로 전락하는 것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깔끔한 내부 전시실은 새로운 볼거리들로 풍성했다. 내 눈길을 끈 것은 규장각에 걸어놨다는 임금의 지침을 적은 주련(柱聯, 기둥이나 바람벽 따위에 장식으로 써 붙이는 글씨)이었다. 선생이 아니면 함부로 들어오지 말라(非先生勿人), 손님을 봐도 일어서지 말라(見來客不起)는 글귀는 얼마나 학자들을 아끼고 면학 분위기(?) 조성에 애썼는지를 알 수 있다. 이 밖에 궁궐 정전 천장에서 쓰였을 법한 용무늬, 봉황무늬 천장 장식도 인상적이었다. 창덕궁 인정전 천장 양식은 목을 쭈욱 빼야만 볼 수 있고, 선정전은 비공개 지역이니 가볼 수도 없다. 경복궁 근정전, 창경궁 명정전, 경운궁 중화전도 높이 올려져 있다보니 세밀하게 관찰할 수는 없다. 그런 것을 바로 앞에서 지켜보니 나도 몰래 가슴이 뛰었다. 이동식 행궁에서 소맷돌로 썼을 법한 나무 해태와 경회루 연못에서 나온 청동용도 볼거리였다.


이 밖에 왕실에서 쓰던 가구나 장신구, 의복과 종묘 제례 때 쓰던 제기들도 질박한 듯 미려했다. 화려한 구석도 적잖았지만 대체적으로 수수함이 지배적인 듯했다. 고려말 불교의 폐단을 지적한 신흥사대부가 새 왕조를 개창한 이래로 유교 문화는 적어도 대외홍보용으로는 사치와 향락을 배격했다. 조선시대 건축기술의 최고 집약체라고 할 궁궐건축에서도 가장 화려한 등급의 금단청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니 말이다(단청 종류를 나누는 기준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서울 5대 궁궐에서 금단청이 쓰인 것 같지는 않다). 조선의 백자와 회화들은 고려의 청자와 불화에 비하면 너무 소박하다 못해 초라하게 느껴질 정도다. 혹자는 유교의 선비정신을 내세워 절제미를 이야기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불가의 고승과 선사들도 만만치 않은 자기수양을 했다. 유교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성리학(주자학에 한정된) 일당독재가 너무 심했다는데 조선의 비극이 있었다.


때마침 개관 특별전으로 백자 달항아리 9점이 전시되고 있었다. 조선 백자의 최고봉으로 뽑히는 백자대호(白瓷大壺)를 보러가기 전에 고려 청자의 최고봉으로 뽑히는 국보 제68호 청자상감운학문매병(靑磁象嵌雲鶴文梅甁)의 이미지를 떠올리며 잘나봤자 얼마나 잘났겠나 하는 고약한 심보를 품었다.^^; 하지만 이내 백자의 은근한 매력에 빠져들었다. 작은 전시실을 선뜻 떠나지 못하고 뱅뱅 돌면서 음미하다가 살짝 어지럼증까지 느낄 정도였다. 높이가 40cm 이상이 되는 보름달마냥 둥그런 달항아리를 만들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한다. 그런데 조선의 장인들은 두 개의 사발을 접붙여서 원형을 만들어냈다. 콜럼버스의 달걀도 울고 갈 재치다. 백자대호의 허리부분에는 이음매가 보이는데 이 때문에 완전한 원형이 아니라 둥근 느낌은 한껏 주면서 약간 이지러진 듯한 아슬아슬한 긴장감이 엿보였다.


전시실 여기저기에는 백자를 찬양한 여러 시인묵객들의 글귀들을 적어놨는데 그 애틋함이 절절하다.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역임했던 고 최순우 선생이 “달항아리는 너무나 순정적이어서 마치 인간이 지닌 가식 없는 어진 마음의 본바탕을 보는 듯한 느낌”이라고 표현한 것부터 온갖 찬사들이 쏟아진다. 그만큼 한국인의 심성에 착 달라붙는 다는 방증이기도 할 것이다. 청자의 귀족적이고 호사스러움보다는 백자의 서민적이고 검박한 풍취를 노래하는 것이 더 그럴듯하기도 하다.^^; 여하간 이번 특별전은 백자에도 제법 정을 붙이는 계기가 되어 청자에 올인했던 것에서 백자와의 포트폴리오(?)를 이루는 성과를 거뒀다. 하지만 진짜배기를 백자를 보며 감탄하는 마음 이면에는 제대로 된 청자를 봐야겠다는 열망도 커졌음을 솔직히 고백한다.


달항아리 중에서 가장 먼저 국보로 지정된 국보 제262호 백자대호 앞에서 약간 찌그러진 듯한 모양이 굴곡미를 만들어 내며 마음을 푸근하게 해주는 효험이 다가왔다. 가장 어설퍼 보인 작품이었지만 눈을 씻고 유심히 바라보면 뭉클한 기운이 치솟는다. 결국 참다못해 디카로 사진을 몇 장 후닥닥 찍어버렸다. 석굴암에서 사진을 못 찍게 하듯이 백자도 사진을 찍으면 훼손할 우려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여하간 조금 못된 짓을 했지만 그간의 문화재 애호정신에 비추어 너그러이 용서해주기를 바랄 따름이다. 유물 보호를 위해 사진을 못 찍게 하는 것은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일일이 비싼 도록을 살 수도 없는 노릇이니 참 딜레마다. 2004년 국립중앙박물관 폐관 기념으로 열렸던 한시적으로 국보 제78호와 제83호인 금동반가사유상 사진촬영을 허용한 것과 같은 기회가 좀 더 많았으면 좋겠다.


한국 미술사의 개척자인 우현 고유섭 선생은 한국미의 특질을 “무기교의 기교”라고 평했다. 무기교의 기교, 무계획의 계획의 극치를 백자대호에서 찾을 수 있었다. 도가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나 못하는 일 없이 다하고 있다”는 무위무불위(無爲無不爲)의 정신을 만난다고나 할까. 백자는 유교 문화의 정수였으나 도가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 셈이다. 최치원 선생의 난랑비서문을 보면 “우리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풍류라 한다(國有玄妙之道 曰風流)”고 말하며, “실로 삼교(유불도)를 포함하고 있으며 모든 생명들이 만나서 관계를 맺으며 변한다(實乃包含三敎 接化群生)”고 했다. 장인들은 풍류나 현묘지도를 체득했을지 모르겠으나 위정자들은 그렇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여담이지만 올해는 고유섭 선생의 탄생 백돌 되는 해이다. 열화당에서 여덟 권짜리 전집이 나온다고 하니 쉽게 읽을 수 있는 몇 권은 장만해볼 참이다. “전통이란 결코 손에서 손으로 손쉽게 넘어다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피로써 피를 씻는 악전고투를 치러 ‘피로써’ 얻는 것”이라고 했던 선생의 말씀이 따갑다.


기왕 나온 김에 경복궁도 잠시 들렀다. 지인들을 데리고 가이드도 몇 번 해줘서 3000원 본전 생각이 조금은 났다.^^; 햇살은 따가웠고 덕분에 흥례문의 단청은 눈부셨다. 우리의 단청은 햇살을 받으면 그 휘황찬란함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땀은 좀 흘렸을지언정 그간 다닌 답사 중에서 가장 즐거운 단청 완성을 했다. 이래서 세상만사는 일장일단이다.^^ 김영삼씨가 무식하게 부셔버렸다고도 하지만 중앙청 건물을 철거한 것은 잘한 일이라고 본다. 옛사람의 솜씨보다 못할지는 몰라도 이렇게 멋진 건물을 새로 지어서 탄성을 자아내게 하니 말이다. 또한 72억2500여 만원을 들여 3년 10개월간의 보수공사를 마친 근정전도 퇴락했던 단청들에 생명이 불어넣어져 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흥례문이나 근정전을 볼 때마다 우리 문화유산 중건 혹은 복원에 대한 강한 의지를 새삼 확인하게 된다. 교태전 후원의 아미산은 한국인의 미감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곳이다. 아미산은 경회루 연못을 판 흙을 쌓아 만든 작은 동산이다. 중국 자금성 뒤편의 거대한 인공산인 경산과 비교했을 때 지나친 기교를 삼가고 자연과 더불어 호흡하려는 우리 장인들의 정성을 읽을 수 있다. 백자대호의 정신을 여기서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보물 제 811호인 아미산의 굴뚝 또한 앙증맞은 볼거리인데 굴뚝 장식은 온돌 문화인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다고 한다.


나가는 길에 늘 빼먹고 왔던 국보 제101호 지광국사현묘탑을 찾았다. 국립고궁박물관 옆 뜰에 덩그러니 남겨져 있다 보니 대부분 그냥 놓치고 가능 경우가 대부분이다. 일본놈들이 멋대로 가져다 놓은 경천사터 10층석탑을 비롯한 석조 문화재들이 대부분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부도탑만은 떠나지 못하고 홀로 외로이 서있다. 이 부도탑은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박살이 나서 지금 것은 파편들을 모아 간신히 복원해놓은 것이라고 한다. 유심히 쳐다보면 여기저기 땜질용 시멘트가 슬프게 처발라져 있다. 이처럼 속으로 골병이 들어서 함부로 손을 댔다간 다시 망가지기 십상이라고 한다. 부도탑 너머로 근정전 지붕이 보이면서 불교 문화유산과 유교 문화유산의 오묘한 조화가 나타나기는 했지만 어딘가 어색하고 불협화음이 날 듯한 초조함이 느껴졌다. 탑파의 미려한 모습이 참 쓸쓸해보였다.


답사를 다 마치고는 외대 근처의 헌책방인 신고 서점에 가서 충동구매를 살짝 했다. 헌책방은 늘 가봐야지 해놓고도 선뜻 못 찾아갔는데 모처럼 마음을 다잡았다. 규모도 크고 분야별로 정리도 잘 되어 있어 헌책의 구수한 향기에 넋을 잃었다. 고종석 선생은 “[민음사만의 일은 아니겠지만](한국일보, 2005/05/11)”라는 칼럼에서 좋은 시집들의 절판을 아쉬워하며 우리 출판문화를 개탄했다. 인문과학 서적에서도 그런 경우는 부지기수다. 절판된 책들을 학교 도서관에서 그나마 대부분 빌려볼 수 있어서 다행이지만 그래도 가끔은 물욕이 발동해서 꼭 손에 넣고 싶은 책도 있게 마련이다. 대출 기간 동안 몇 장 읽다가 말고 반납해야할 때 영 마뜩잖다. 며칠 만에 읽는 것이 아니라 늘 곁에 두고 가끔 꺼내보고 싶은 책을 시중에서 구할 수 없을 때 참 난감하다. 읽는 것이 사 모으는 것을 못 따라갈 때가 많아서 민망하지만 좋은 책들이 일찍 절판될까 저어해서 미리 사둘 필요가 없었으면 좋겠다.


한 손으로 들기에는 무겁다고 느껴질 정도의 책을 사들고 집으로 향했다. 저녁 시간을 훌쩍 넘긴 때였지만 그래도 마냥 신명이 났다. 혼자서도 잘 논 하루였지만 그래도 다음번에는 함께 거닐며 노닥거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혼자서도 잘 놀지만 함께 있으면 더 흥겨운 녀석이니까 말이다.^^ - [憂弱]


추신 - 절판된 도서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절판되어서 찾기 힘든 책 중에 내가 갖고 싶은 책 두 권이 있다. F. Copleston 著, 임재진 譯의 [칸트](중원문화 刊)노명식의 [자유주의의 원리와 역사](민음사 刊)이 그것이다. 서양철학사 정리로 유명한 코플스톤의 열권짜리 History of Philosophy 중에서 칸트 부분만 번역한 [칸트]는 도서관에 딱 한 권 있을 뿐 시중에서는 자취를 찾을 길이 없다. 칸트 관련 저작이야 하고 많지만 내가 읽을만한 책은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상스레 이 책은 꼭 좀 소장하고 싶다. [자유주의의 원리와 역사]는 도서관에서 빌릴 때마다 이런 저런 일 때문에 앞부분만 좀 읽고 반납하기 일쑤였던 기구한 인연의 책이라 괜스레 애착이 간다. 이건 이 책을 집에다 놓고 보라는 하늘의 뜻인가라고 착각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혹시나 이 두 책의 행방을 아시는 분은 꼭 좀 신고해주세요. 그래서 제 소박한 물욕을 잠재워주시길. 푸하하^^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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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저작권 문제에 의연하게 대처하던 익구닷컴이었으나 고심 끝에 현행 저작권법을 준수하기로 결론 내렸습니다. 한국온라인신문협회가 제정한 디지털뉴스 이용규칙(http://www.kona.or.kr/konacopyright.htm )을 읽고 마음을 굳혔습니다. 출처와 글쓴이를 밝혔더라도 이는 “저작인격권” 문제를 해결한 것일 뿐이며, “지적재산권”은 침해 소지가 있다는 지적을 겸허히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여전히 좋은 글은 나눌수록 더 가치가 커진다고 믿지만 익구닷컴의 장기적 미래를 위해 아쉬운 결정을 내렸습니다. 앞으로는 제가 감명 깊었던 글, 널리 나눠서 함께 공유하고픈 글들을 올리는 데 많은 제약이 있을 것 같습니다. 링크라는 방식이 있긴 하지만 전문 게재와는 느낌이 다르고 링크하기가 여의치 않은 글들도 많으니까요.


제 허접한 잡글의 민망함을 논객들의 맛깔스런 글들로 메우기도 했는데 이제 홀로서기를 해야 할 시점인가 봅니다.^^; 현재 저작권법에 저촉되지 않는 선에서 칼럼의 일부를 발췌해 제 코멘트를 넣는 식의 게시판을 신설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대가들의 이야기를 듣는 흥겨움에만 빠져있지 말고 스스로 궁리하고 탐구하도록 노력하는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보겠습니다.


이제 이 시간부로 펀글 전용 게시판인 부국안민, 백화제방, 백가쟁명 게시판에 대한 더 이상의 업데이트를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앞으로 한달 정도의 기간 동안은 게시판을 그대로 둘 터이니 골라 읽는 재미를 느껴주세요. 저는 그 기간 사이에 백업도 좀 하고 향후 대책(?)을 강구해볼랍니다. 여하간 늦어도 9월 말에는 펀글 게시판들을 폐쇄하겠습니다. 그 전에 퍼가시고 싶은 글들을 퍼가세요. 흑흑


끝으로 향후 저작권법 개정이 저작권 보호라는 선의만 너무 앞선 나머지 온라인상의 커뮤니케이션을 지나치게 옥죄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럼 오늘도 좋은 글, 재미난 글 많이 읽으세요. 고맙습니다.^^ - [憂弱]
Posted by 익구
:
익구닷컴 게시판을 약간 개편했습니다. 간략히 설명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알립니다 - 익구닷컴 공지사항이나 익구 신상에 중대한 변화가 있거나 할 때 알리는 곳입니다.


우약탐구 - 저에 대한 이모저모를 늘어놓는 곳입니다. 憂弱이라는 제 호는 “약함을 걱정한다”는 의미입니다. 언제나 저의 어리석음과 모자람을 인식하자는 뜻이면서도 약한 것, 어려운 것, 힘겨워 하는 것에 대한 관심을 놓지 말자는 뜻이기도 합니다. 갖다 붙인 유려한 의미만큼이나 제 호에 부끄럽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자유단심 - 제 잡글 중에서 딴에는 표현이 유창하고 내공이 많이 실린 주옥같은 글들을 올릴 예정입니다. 찾아보며 공부를 하거나 깊은 고민을 많이 한 글로서 나름대로 작품성 짙은 글들이 모일 듯 하네요. 푸하하 자유인, 자유주의에 대한 깊은 애정을 단심(丹心)이라고 표현해봤습니다.


명각만필 - More liberal 게시판보다는 조금 가벼운 잡생각들과 고민의 무늬들이 남겨질 곳입니다. 조촐한 사유의 흔적과 사색의 즐거움이 있도록 하겠습니다. 명각(明覺)은 불교 수계식에서 받은 제 법명입니다. 한번 써먹어 보고 싶어서요.^^ 만필(漫筆)이란 보고 듣고 느낀 바를 마음 내키는 대로 적은 글이라는 뜻입니다. 김만중의 서포만필, 시인 황인숙님의 인숙만필 정도의 용례가 있네요.


익공잡록 - 일기장 같은 곳으로 신변잡기와 시사 논평이 주를 이룰 것입니다. 주위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이야기나 사회에 투덜거리고픈 이야기를 가볍게 써내려 갈까 합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자질구레한 일들을 기록한다는 뜻의 잡록(雜錄)이라 이름 붙였습니다. 참고로 익공(翼公)은 제 또 다른 애칭입니다.


부국안민 - 명색이 경영학도인 만큼 경제 관련 칼럼을 엄선해봤습니다. 제 꿈이 부국안민에 보탬이 되는 사람입니다.^^


백가쟁명 - 함께 나누고 싶은 여러 논객들의 칼럼을 모으는 곳입니다.


백화제방 - 이것저것 모으기 좋아하는 익구가 이래저래 모으는 시나 좋은 글 조각입니다.


게시판 개편과 더불어 조만간 익구닷컴 글들을 좀 정리할 생각입니다. 익구닷컴을 꾸린지 두 해가 넘어서면서 글도 제법 쌓여서 수백개의 글들이 있다 보니 공해도 좀 있는 거 같고요. 새출발하자는 의미로 정리벽이 발동하여 제 컴퓨터 문서파일 정리를 겸해서 싹 정리를 해보려고 합니다.


저는 시답지 않은 잡글을 올릴 때도 많은 자기검열을 합니다(검열이라는 표현보다는 함부로 글을 쓰지 말자는 경계라는 표현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네요). 혹시 나중에 꼬투리 잡히지나 않을까, 먼 훗날 필화의 소재로 쓰이지 않을까라는 기우에 호들갑을 떨지요.^^; 이런 생쇼 속에서 탄생한 제 잡글들은 정말 자식 같이 애착이 갑니다. 나중에 돌아보면 제 민망했던 역사가 고스란히 묻어나기도 하고, 지금은 잊고 사는 뜨거운 마음에 부끄러워지기도 하고, 이런 기특한 생각들을 했었구나라며 대견스러워하기도 합니다.


이건 여담이지만 무한 애프터서비스 정신으로 제 잡글에 오타나 맞춤법, 띄어쓰기 오류도 발견되는 족족 수정하고 있답니다. 오프라인에서 다 보여 주지 못한 저란 녀석의 생각과 사는 모습들을 이 온라인 공간에서 진솔하게 담아내기 위해 무던 애를 쓰고 있으니 어여삐 여겨 주세요.


끝으로 블로그가 익숙지 않으신 분들께서 종종 글 쓸 수 있는 곳을 찾으시는데... 그토록 애타게들(?) 찾으시는 방명록은 익구닷컴 로고가 있는 맨 위쪽에서 GuestBook을 찾으시면 됩니다. 블로그 특성상 손님용 게시판 메뉴가 따로 존재하지 않음을 양지해주시기 바랍니다.^^ 이제 글 쓰는 곳 없다는 핑계 말고 글도 남겨주고 가세요.^^ 그럼 오늘도 치열하고 재미나시길! - [憂弱]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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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검색을 하던 중에 ["조선찌라시·맹바기·발끈해공주" 고대 시험예문 파문]이라는 8월 10일자 경향신문 기사를 보고 무척 놀랐습니다. 제가 2004년 2학기에 강의를 들었던 경제원론1 중간고사 문제가 보도되었거든요. 그 시험문제에는 "조선찌라시/ 월간조선찌라시뺑끼칠/ 맹바기나라/ 딴나라의 화폐단위는 친미/ 발끈해 공주/ 國害擬員인지 寄生層인지 정체가 불분명한 주성영씨" 등의 표현이 나옵니다. 아마도 특정 정당의 정치인들과 일부 언론을 비하하는 표현이 나와서 뒤늦게 언론을 탄 것 같습니다.


경제원론 재수강을 어떤 분을 들을까 하다가 친구의 추천으로 이 선생님의 강의를 듣게 되어 한 학기 동안 쉽고 재미나게 배울 수 있어서 개인적으로 즐거운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돌이켜보니 학기 중에 강의용 클럽게시판에서 시험문제의 인명이나 단위가 편향된 것이 아니냐는 어떤 학우 분의 지적이 있었습니다. 저 또한 그 때 일을 계기로 편파성이라는 것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기도 했고요. 편파적인 채점 시비가 아닌 이런 정도의 시험 출제가 문제시되는 것을 보면서 표현의 자유에 과도한 비용을 요구하는 것인지는 아닌지 씁쓸합니다.


언론 보도 이후 선생님께서는 수강생들과 문제지에 실린 모든 이들께 사과한다는 요지의 사과문을 보내왔습니다. 사실 이만한 일로 사과까지 하고 불이익을 걱정해야하는가 안타깝습니다. 물론 경제학 강의였고 정치적 사안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시험 문제에 그런 식의 표현들이 등장하는 것은 다소 부적절하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 강사의 편파성 자체가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강사의 해석이 과연 타당한 논거로 적실성 있게 주장되고 있는지 여부가 강의 시간만으로는 파악하기 어려웠다는 점이 지적될 수는 있습니다. 강의 시간에는 별 말 없다가 시험 문제는 덜컥 그런 식으로 나오면 당황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말입니다(그런데 시험에 앞서 단위 등을 비꼬아서 낼 것이니 주의해서 풀라고 누차 강조해주셨습니다).


문제 상의 인명과 단위가 명목적(nominal)이 아니라 특정인을 비하하고 조소할 의도가 있었다고 해도 좀 어떻습니까. 교양과목 강의에 그 정도의 여유와 풍자도 들어갈 틈이 없다면 너무 팍팍하겠지요. 물론 일부 의뭉스러운 보수 세력들이 밉살맞아서 이런 문제들을 내셨겠지만 크게 악의에 차 보이지도 않고요. 선생님께서는 사과를 하는 것으로 이번 사건을 마무리지으시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앞으로 이런 식의 센스가 돋보이는 문제를 출제하지 않으실지도 모르고요. 차라리 경제학 또한 가치와 인간이 빠질 수 없는 학문이라는 것을 밝히고, 난이도도 높일 겸 교수 재량으로 문제를 좀 비틀거나 희화화하여 내는 것을 너그러이 양해해달라고 하셨으면 어땠을까 생각해봅니다.


저는 시험 문제를 풀고 나서 개인적으로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을 풍자해서 시원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역으로 생각해봤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을 개구리나 놈현으로, 열린우리당을 닫힌너네당, 돼지우리당으로, 유시민 의원을 개시민 등으로 표현한 시험문제를 받아 들고서는 처음에는 기분이 언짢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교수 개인의 좋고싫음 자체를 구박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가기업, 나기업, 다기업... A씨, B씨, C씨... 원, 달러, 위안 대신에 개인의 편향이 가미된 것이 좀 들어가는 것 정도는 용인할 수 있다고 봅니다. 강의 열성적으로 해주고, 시험문제 깔끔하고, 채점 또한 공정하다면 딱히 시비 걸 까닭이 없지요. 오히려 제가 좋아하고 제가 믿는 바의 허술한 점을 집어주고 비판해줘서 발전의 계기를 만들어 준다면 제자로서 감사할 노릇입니다. 여하간 학교를 비롯한 사회 전반에서 때로는 극단적이거나 유치한 표현까지도 수용할 수 있는 자유주의의 너른 포용력이 발휘되었으면 합니다.


살펴보면 불편부당(不偏不黨)을 주창하면서 뒷구멍으로는 추악한 편들기를 하는 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자기 생각을 솔직하게 드러냄으로써 사상의 자유시장에서 티격태격하다가 생채기 나는 것은 회피하면서 말입니다. 자신의 표현에는 비용을 지불하지 않으면서 남의 표현에는 과도한 비용을 지불하도록 하는 것은 상도덕에 어긋나는 처사일 겁니다.


그런데 다원화된 사회가 될수록 옳고/그름의 문제보다는 그저 다름의 문제에 봉착하게 되는 경우가 늘어납니다. 유시민 선생의 표현대로 "한 점의 오류도 없는 사상이나 단 한 톨의 진실도 담지 않은 사상은 없"기 때문입니다. 옳고 그름은 판정 내리기가 비교적 쉽지만, 다름의 문제 앞에서는 선택의 자유를 움켜쥐고는 하염없이 고독해집니다. 실컷 고심해서 내놓은 결론도 남의 입장에서는 또 하나의 편파적이고 자기본위의 주장이기 일쑤입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우리는 깔끔한 객관성과 담백한 평형감각이라는 이데아(idea)는 확보할 수 없을지 모릅니다.


이런 어려움 때문에 당최 편파적인 것이 염려된다면 존 롤즈가 말한 반성적 균형(reflective equilibrium)을 지향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반성적 균형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것에 대해 외부의 비판을 검토해서 자신의 견해를 수정하고 보완하는 과정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을 타인과의 관계에서 다시 한번 평가하고, 스스로 다시 궁리하여 보다 나은 접점을 찾으려는 노력으로 중용(中庸)과 비슷한 개념이지요. 결국 조금 더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하기 위해 자신의 직관적 판단(개인적 선호)에서 시작하여 끊임없이 숙고하여 적절한 상태에 도달하려는 노력입니다. 여기서 반성적 균형상태는 단순한 산술평균이 아니라 숙고한 반성의 내용이 한쪽으로 치우칠 수도 있다는 점이 포인트입니다.


저는 치열하게 고민해서 나온 결과물을 가지고 당당히 편파적(!)으로 사는 멋진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합니다. '즐거운 편벽됨'이 우리네 삶을 보다 윤택하고 촉촉하게 만들어 주리라 믿습니다. 결론으로 이르는 과정이 진실하고 합리적이어야 한다는 자세를 갖춘다면 말입니다. 저 또한 과정상의 엄격함과 성실함을 확보한다면 누구든 자유로이 발언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는데 일조하고 싶습니다. 끝으로 존경하는 경제원론 선생님께서 앞으로도 고대 학우들께 좋은 강의 해주시길 부탁드리며 내내 건승하시길 바랍니다. 선생님께서 즐겨하시는 말씀으로 이 글을 마칩니다. "평안하시길..." - [憂弱]

<참고기사>
- "조선찌라시·맹바기·발끈해공주" 고대 시험예문 파문(이걸 꾸욱~)
- '딴나라'의 '발끈해 공주'가 가격규제 한다면?(이걸 꾸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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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책임분석의 발견

잡록 2005. 8. 5. 21:30 |
중구청에서 일하게 된 4주는 그리 긴 기간은 아니지만 정이 제법 들었다. 그 결정적 이유 중에 하나가 싸고 맛있는 구청 구내식당에 흠뻑 빠졌기 때문이다. 훈련소 짬밥보다 백만배쯤 다채롭고 맛나는 점심식사를 하다보면 스트레스가 스르르 풀리는 것 같다. 문득 즐거운 점심식사를 하다가 음식을 거의 남기지 않는 나를 발견했다. 가령 반찬에 샐러드가 나올 때 오이를 빼고 담으려고 무던 애를 쓴다. 거의 먹지 않고 버릴 오이를 담지 않기 위해서다. 이런저런 노력을 통해 대부분 잔반이 거의 없었다. 문득 그 이유가 자유배식에 대한 모종의 책임감의 발로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원하는 만큼 마음껏 덜어갈 수 있는 만큼 음식물쓰레기나마 덜 남기는 것으로 보답하려는 의지가 아니겠냐는 것이다. 훈련소 때 담아주는 음식들을 많이 남긴 것과는 대조적이다. 4주 동안 짬밥을 다 먹은 적이 단 한차례도 없었으니 말이다.


시사주간지 시사저널은 “자유만큼 책임을 생각하는 언론”이라는 사시(社是) 혹은 모토를 내세우고 있다. 2004년 경영대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학생회장 인사 시간에 내가 새내기들에게 했던 첫 번째 당부가 “자유를 만끽하시고 그 결과에 책임을 지시기 바랍니다"였다. 이처럼 “자유에 따른 책임을 지자”고 설파하고 다녔던 나는 무언가 선수를 당한 느낌에 아쉬웠다. 표절인지라 그대로 따오기는 민망하지만 자유와 책임이라는 개념은 공공재적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슬쩍 빌려써본다면... “자유만큼 책임을 생각하는 익구”^^; 자유주의자에게 있어 그 어떤 모토보다 명징한 신념이 아니지 싶다.


히로가네 겐시의 [정치 9단]이라는 만화에서 주인공 카지 류우스케는 “자유와 책임당”을 창당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종국에는 총리대신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자유와 책임당은 신자유주의 색채가 강하지만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되 그에 따른 책임을 묻는 정강정책들은 나름대로 매력적이었다. 자유책임당의 약자는 자책당(自責黨)이라고 쓰면 좋을 것 같다. 이승만 전대통령 때문에 자유당이라는 명칭은 이제 거의 쓸 수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맨날 남 손가락질하기 바쁜 정당이 아닌 내 탓을 하고 양심에 가책을 느낄 줄 아는, 자책할 줄 아는 정당이라니 괜찮지 않은가!^^;


지난 2004년 미국 대선에서 뉴욕타임스는 존 케리 민주당 후보를 열렬히 지지한다고 선언했다. 이렇게 정치적 자유를 누리는 것은 뉴욕타임스가 보여주는 반성적 균형(reflective equilibrium)에 대한 신뢰가 있기 때문이다. 반성적 균형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것에 대해 외부의 비판을 검토해서 자신의 견해를 수정하고 보완하는 과정을 반복하는 것이다. 여기서 반성적 균형상태는 단순한 산술평균이 아니라 숙고한 반성의 내용이 한쪽으로 치우칠 수도 있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설령 특정 후보 지지 같은 편파적인 결정이 나오더라도 그 과정이 공정하다면 불편부당에 위배되는 것은 아니다. 앞에서는 공평한 척하며 뒷구멍으로 온갖 꼼수를 부리는 우리의 일부 언론들을 볼 때 정치적 자유를 누리되 공정 보도, 객관적 분석이라는 책임을 다하는 모습이 참 부럽다.


쇠고기버섯국에 밥을 말아먹는 내내 자유와 책임을 생각했다. 자유로운 선택을 할 여지가 많을 때 그 만큼 책임도 막중해진다. 남 핑계대기 쉽고, 변명으로 떠넘기기 쉬운 세상이지만 그럴 때일수록 자기 몫의 일에 자기 탓을 할 수 있어야한다. 요리학적으로 자유라는 곰국에는 책임이라는 뼈다귀를 푹 고아 삶아야 제 맛이다. 연애학적으로 자유와 책임은 백년해로해야 할 연인인 셈이다. 수학적으로 자유와 책임은 일대일대응이 되어야 한다. 회계학적으로 분개할 때 차변에 얼마만큼의 자유를 쓰면, 대변에는 그만큼의 책임을 기입해야 대차평균의 원리가 맞는다. 점심시간 동안의 사색을 통해 앞으로는 주어진 자유만큼의 책임을 다했는가하는 자유책임분석(Liberty-Responsibility Analysis)을 생활화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경영학의 비용편익분석에서 영감을 얻었음). 이만하면 오늘 밥값은 한 셈이다.^^ - [憂弱]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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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지향적이라는 말은 대개 부정적 뜻빛깔을 나타낸다. 미래로 치닫기도 바빠 죽겠고, 지금 현재의 행복을 누리기도 정신이 없는데 한가하게 과거 타령한다고 꾸지람을 듣기 일쑤다. 하지만 나는 무척 과거지향적인 모습을 많이 가지고 있다. 역사에 대한 관심 때문인지는 몰라도 내 일개인의 역사에도 꽤 의미를 부여하는 편이다. 과거의 잘잘못을 가려보고 취할 것과 버릴 것을 선별해낸다면 지난날을 들쑤시는 작업이 마냥 백해무익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지난날을 돌아보면 어쩌다가 흐뭇할 때도 있지만, 대부분 부끄러운 마음에 후회가 한가득이다. 회상이 시작되기 전에 부디 자족하자고 스스로에게 신신당부를 해봐도 별로 소용이 없다. 이렇게 보면 나란 녀석이 은근히 욕심이 많은 것 같다.^^; 결벽증도 적잖이 있어서 뒷마무리가 깔끔하지 못한 일이 있으면 얼마나 제 자신을 타박하는지 모른다. 게으르고 굼뜨게 사는 주제에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에 몸서리치다니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공익근무 시작을 기점으로 내 대학생활 전반기를 마쳤다. 공익근무 기간과 남은 2학기 기간을 대학생활 후반기로 명명(命名)하기로 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부쩍 지나간 3년 반의 대학 전반기를 돌아보는 일이 많아졌다. 헛되이 살지 않았다는 확신이 쉽사리 들지 않는다. 훌쩍 지나가 버린 내 대학생활에 대한 회한이 짙게 드리운다. 늦었다고 생각될 때 시작하면 생각보다 그리 늦지 않은 경우가 많다는 점이 거의 유일한 위안이다.


[유몽영(幽夢影)]에서 "부끄럽다는 한 글자는 군자를 다스리는 까닭이 된다(恥之一字, 所以治君子)"고 했다. 문제는 한 글자로 그치지 않고 "부끄럽고, 부끄럽고 또 부끄럽고"가 된다는 데 있다. 무언가 동분서주한 느낌은 드는데 딱히 제대로 한 건 없다는 자괴감이 나를 짓누른다. 지나친 위악(僞惡)과 과도한 자기비하는 겸손도 아니고 제 스스로를 비참하게 만들뿐이지만 한없는 부끄러움을 통해 통절한 반성을 하고 싶다. [중용(中庸)]에서 위로는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아래로는 사람들을 탓하지 않는다(上不怨天 下不尤人)"는 구절을 꺼내본다. 지난날의 과오들이 죄다 내 탓인 양 가슴이 저린다.


대학생활 후반기를 맞이하면서 "꽤 그럴듯한 자유인"이 되도록 노력할 것을 다짐했다. 그 전에는"꽤 그럴듯한 자유주의자"라고 칭했으나 무슨무슨 주의자보다는 그냥 자유인이라는 표현이 좀 더 그윽한 거 같다. 행동상의 제약이 있는 공익근무 생활에다가 진로에 대한 고심으로 뒤척일 4학년 생활 속에서 자유인 운운하는 것이 일견 모순처럼 보인다. 그러나 본디 자유인이라는 것은 끊임없는 긴장과 자기절제, 성장통을 달고 다녀야 하는 것이리라. 어디론가 떠나고 옮겨 다니기보다 내가 맺은 인연 속에서 깨달음을 얻고 보람을 찾아야 한다. 침잠(沈潛)하되 얽매이지 않고, 견결(堅決)하되 열려있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서도.


제 몸뚱아리 건사하며 사는 것조차 만만치 않다. 대충 살기도 힘든 세상에 열심히, 재미나게 살기로 결심한 이상 그에 따르는 고통도 기꺼이 감수해야 한다. 최치원이 당나라 유학 시절 남들이 백 번의 노력을 할 때 천 번의 노력을 기울이는 인백기천(人百己千)으로 유명을 떨쳤듯이 나도 인백기천하며 치열하게 살아야겠다. 또 이런 멋들어진 말을 쓰려니 대학 전반기 동안 내가 내뱉었던 번지르르한 구두선(口頭禪)들이 떠오른다. 허영에 들떠 실수한 점도 많지만, 실천이 좀 더뎠다고 해서 살맛나는 세상을 꿈꿨던 풋풋한 이상들을 함부로 박대하지는 말기를.


얼마 전 "역시 고대생은 다르구만!"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낯간지럽기도 했지만 하루 종일 싱글벙글했다. 내 자신이 칭찬 받은 것도 기쁘지만 내가 보고 배우고 느꼈던 곳까지 추켜세워지는 즐거움이 쏠쏠하다. 나로 인해 내가 딛고 있는 곳, 나와 교류하는 사람들까지 믿을 수 있게 할 수 있다니 개인주의자도 손뼉치며 뿌듯해할 일이다. 지금이야 일신의 영달에 전전긍긍하는 처지지만 내 마음의 고향 고려대학교의 하해와 같은 은덕에 이런 식으로나마 보답할 수 있다면 참 고마운 일이다. 여하간 대학 후반기를 가슴 뛰게 살고 나서 내 유식찬란(有識燦爛)에 놀라고, 인자무적(仁者無敵)을 실감하는 기분 좋은 상상을 해본다. 대책 없는 낙관주의는 나의 힘! - [憂弱]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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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쓰고 읽기가 참 편해진 인터넷 세상이지만 진솔한 글을 쓰기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너무 장황하고 산만하기는 했지만 나란 녀석에게 던져진 질문에 답하면서 내 자신을 궁리하는 뜻깊은 시간이 되었다. 질문해주신 모든 분들 고맙습니다.^^

○ 형께서는 대기업(ex.삼성,SK)의 회장이나 국립중앙박물관 같은 거대한 박물관의 관장 자리를 맡아 줄 것을 동시에 부탁받았을 때 어느 것을 고르실 겁니까??ㅋ (나이가 50대 쯤 되었을 때...)

일단 질문이 현실성이 떨어집니다. 대기업에서 그런 자리를 저 같은 녀석에게 내어줄 리가 없겠죠. 다만 어디까지나 사고실험이니까 제가 그만한 능력이 있다고 가정해버리겠습니다.^^; 나이가 50대쯤이라고 했으니까 그동안 무슨 일은 했든 여생을 대충 먹고 살만하다고 마저 가정하겠습니다. 당장 먹고살기 벅차다면 대기업 간부를 해서 살림살이에 보탬이 되는 것이 인지상정이니까요.

여하간 이럴 경우 박물관 관장 등의 일을 시켜준다고 하면 내심 좋아서 입 꼬리가 귀까지 찢어질 거 같습니다. 박물관장씩도 필요 없고 문화재 안내사 혹은 큐레이터나마 할 수 있는 역량이 된다면 참 고마울 따름이지요.

얼마 전에 홍유릉(고종, 순종황제릉) 답사를 다녀왔는데 홍유릉 안내를 해주시는 아주머니의 설명을 듣고 실제로 능에 올라 가보는 영예를 얻었습니다. 제가 문화유산을 좋아하다고 하니까 필 받으셔서 이런 특혜를 베풀어주시더라고요.^^ 이 아주머니는 은행에서 일을 하시다가 은퇴하시고 자원봉사를 하는 것이라 하셨는데 그게 참 부러워 보이더라고요.

지금이야 경영학도로 사는 것으로 정신이 없지만 제 오랜 취미는 역사공부와 문화유산 감상이었으니까요. 불우했던 과거사로 인해 너무 많이 훼손된 우리 문화유산들을 복원하고 더 알려나가는 일에 보탬이 되는 것은 언젠가는 꼭 해보고 싶은 일입니다. 아마 박물관 일을 하게 된다면 그 때쯤 한창 잘 나가고 있을 선배님, 동기들, 후배님들께 손을 좀 벌려서 문화유산 재정비에 투자하도록 하려고요.

저말고도 잘할 수 있는 사람이 널려있는 일보다는 제가 좀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드는 일, 할 때마다 제 영혼이 기쁨에 겨워 파르르 떨릴 수 있는 일은 아무래도 문화유산 쪽 일이겠지요. 물론 체계적인 공부를 한 것도 아니고 전문가도 아니니 한계가 있겠지만요. 아무쪼록 행정 당국이 21세기는 문화의 세기이며, 문화유산은 국가 경쟁력의 중요한 요소로 부상하고 있음을 인식했으면 합니다.

덕분에 무척 즐거운 상상이었습니다. 푸하하


○ 익구형을 보면 항상 스스로를 성찰하고 키워나가시는 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게다가 후배에게도 예의와 존중을 잊지 않으시는 형의 모습을 보면 느끼는 바가 많습니다.
이쯤에서 질문을 해보고자 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질문을 합니다.
타인에게 자신을 투영시키기 위한 질문에서부터, 나 자신을 알고자 하는 질문까지
그 종류는 매우 다양하겠지요.

제가 궁금한 것은 이런 것입니다.
익구형이 살아오시면서, 혹은 앞으로 살아가시면서 그 답을 찾고 있는 질문이 있으십니까?
스스로를 향한 것일 수도, 타인에게, 혹은 대자연 앞에 펼쳐내는 질문일 수도 있는 ...
어떻게 보자면, 형의 인생을 걸고 추구하는 바 일 수도 있겠지요.

두서 없는 잡담에 가치 있는 답변을 기대하는 것이 욕심일지도 모르겠지만,
우문현답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형님의 현답(혹은 현문)을 기다리겠습니다.


이 질문에 제대로 답하려면 아마 사흘밤낮은 머리 싸매고 고민해야할 듯 하네요. 좋은 질문을 한다는 것, 괜찮은 문제의식을 가진다는 것이 그만큼 힘들고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질문을 던지는 것 자체도 너무나 유의미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그에 대한 대답 혹은 대안을 제시하고 그에 걸맞은 실천까지 따르는 것... 참 어려운 일이지요.

제가 요즘 가장 고민하고 있는 문제는 "어떻게 하면 꽤 그럴듯한 자유주의자가 될 수 있을까"라는 것입니다. 지난 2년 간 이런저런 생각들을 수입하고, 글들을 발췌하며, 지인들과의 대화를 통해 대강의 얼개는 잡아봤습니다. 답을 찾기 위해 고심하기보다는 어떻게 잘 실천할 수 있을까로 머리털 쥐어 뽑고 있답니다.^^

"자유주의자"라고 타이틀을 잡아봤지만 좀 더 풀어서 설명하면 나만큼이나 타인의 입장을 존중하는 개인주의, 생각의 자유를 주창하는 자유주의, 다양성을 긍정하는 다원주의를 총칭하는 의미로 쓴 말입니다.

저는 자유주의자로서 사상의 자유시장에서 상도덕을 준수하는 것을 신조로 합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자유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집단의 선택보다 우위에 두는 것으로서 타인의 자유를 침범하지 않는 이상 국가나 집단이 그 개인의 결정에 감놔라 배놔라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자유경쟁이 이뤄지는 시장경제와 정기적으로 실시되는 자유선거에 의해 권력자를 선출하는 의회 민주주의가 개인의 자유를 보다 더 잘 실현할 수 있는 시스템이라고 믿고 지지합니다. 제가 바라는 자유주의의 이상은 사실 대한민국 헌법에 규정된 자유권들이 제대로 실현되기만 하면 되는 것이지요. 이론상...^^;

또한 제 개인적으로는 집단에 피신하지 않고 자기 삶을 주체적으로 선택하는 자세, 나의 생각과 판단에 책임을 지겠다는 마음, 남을 존중하고 인정하는 태도를 가지려고 노력합니다. 저는 타인과의 차이를 존중하지만 그것이 차별이 되는 것을 반대합니다. 그러나 차별이 싫다고 차이마저 없애려는 시도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차이는 자유의 자연스런 산출물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자유주의자는 차이가 폭압적 차별의 징검다리가 되는 것을 막고, 불평등이 고착화되는 것에도 고개를 가로 저어야 한다고 봅니다. 이는 모든 사람이 개성의 향연을 누리면서도 그런 개성들 사이에 현저하게 다른 가치가 부여되지 않도록 하는 세상을 말합니다.

대강 저의 자유주의에 대한 소회를 풀어봤습니다. 이를 위해... 치열하게 고민해서 나온 결론을 가지고 당당하게 편파적으로 살기, 그러나 자신이 틀릴 수 있음을 알고 늘 열린 자세로 경청하기, 설령 내 결정이 소수파에다 대중성이 떨어진다고 해도 너무 두려워하지 말기, 역지사지(易地思之)를 생활화하고 개구리가 되었다고 올챙이 시절을 잊지 말기... 이런 다짐들을 해봅니다.

이와 더불어 철학자 칼 포퍼가 주장한 "점진적 사회공학"도 제 일생을 걸고 추구하는 과제입니다. 이것까지 설명하면 글이 너무 길어지니 생략합니다. 혹 관심이 있으시면 번거로우시더라도 익구닷컴에서 "점진적 사회공학"이라고 검색해보면 관련 글이 몇 개 나오니 그걸 참조해주세요.

어린왕자에서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제가 가진 자유주의로 사람의 마음을 얻고 싶다는 생각 간절합니다. 저는 제가 좀 더 개성이 넘치는 사람이 되길 바라며, 그러한 개성이 남들에게 인정받기를 바랍니다. 또한 저의 생각이 좀 더 살맛 나는 세상을 가져다 줄 수 있기를 소망하며, 이를 위해 창조적 상상력을 연마하는 데 저의 정성을 쏟고 싶습니다. 여하간 여기까지가 저의 답변입니다. 뜨아아 막상 써놓고 보니 제 속내를 마구 꺼낸 것 같아 민망합니다.^^;

인생이란 모이고 흩어짐이 무상하여, 오늘은 모였지만 내일은 각각 어디로 갈 것인지를 알지 못합니다(고려말 문인 이규보의 글에서 따온 표현입니다). 그럴수록 더욱더 교류의 즐거움, 소통의 기쁨에 대한 열망은 커져 갑니다. 아무쪼록 넓어질수록 깊어지고, 높아질수록 낮아지며, 적극적이면서도 진지하고, 자유로우면서도 책임감 있는 후배님이 되어주세요. 저도 함께 노력하겠습니다.^^


○ 책 많이 읽는 형, 군대 가서 훈련 받는 중에는 책 못읽으실텐데~ 형 어찌합니까 ㅋㅋ
공익이셔서 다행이네요


훗 정말 저도 훈련소 기간을 제외하고는 민간인 신분을 유지할 수 있어 감사할 따름입니다. 정말 할 줄 아는 것도 별로 없고, 특별히 잘하는 것도 없는 저이지만... 천만다행으로 글 읽고 쓰는 것은 좋아해서 그나마 살아가는 재미에 보태고 있으니까요.

근데 제가 책을 많이 읽는다고는 하지만 속독하거나 발췌독 하는 경우도 많고, 독서 분야도 편벽되어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게임 한판, 당구 한판, 미팅/소개팅 한판 대신에 책 몇 장 더 보고 잡글 몇 줄 더 쓰는 정도이니 말입니다.

무언가 읽고 쓸 수 없는 세상은 제게는 암흑이겠죠. 그 암흑기간이 남들에 비해 현저히 적다는 것에 감사하며 덤으로 얻은 시간은 남들을 위해 쓰도록 노력하려고요.


○ 1년에 과연 몇 권의 책을 읽으시는지요? 저는 개인적으로 1년에 많아봐야 3권? ㅎㅎ 제기랄

제가 원체 무계획으로 사무를 처리하기 때문에 독서도 필(Feel)에 의존해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건기(乾期)와 우기(雨期)처럼 책을 읽고 싶을 때는 정말 내키는 대로 잡히는 대로 휘리릭 넘겨 읽지만, 그다지 마음이 동하지 않을 때는 책 겉표지도 쳐다보지 않거든요. 제가 초등학교 때였던가 어느 선생님께서 "독서는 취미가 아니다. 그것은 생활이다"라고 말씀해주신 것에 큰 감명을 받고 생활화를 하려고 무던 애를 썼는데 아직 그 단계는 아닌 것 같네요. 너무 편차가 크고, 편식도 심하니 말입니다.

술잔도 세면서 마시면 맛이 떨어지듯이, 책도 세면서 읽으면 괜한 강박관념만 드는 것 같습니다. 게다가 제가 속독을 하거나 발췌독을 하는 경우도 많은데, 이 때 이 책을 읽었다고 계상을 해야할지도 애매하고요. 목표는 한해에 100권 정도 읽는 것인데 지난 3년 간의 대학생활에서는 잘 지키지 못한 것 같습니다. 학생회 잡일이 몸이 바빴다기보다 괜히 그 쪽으로 신경을 쓰다보니 차분히 앉아있을 시간이 적었던 것이 사실이고요.

이제 제법 여유로워졌고 공익근무 날짜가 지체되면서 휴학기간이 길어지는 바람에 대학 들어서는 가장 많은 독서량을 보이고 있습니다. 2005년 2월 이후 넉 달간 도서관 대출 기록을 추적해봤습니다. 재미없어 대충 보거나 몇 개 부분만 발췌해본 책을 제외하니 60권 정도 빌려봤네요. 거기다가 동생 대학교 도서관에서 빌려본 것이 15권 정도 되네요. 또한 제가 소장하고 있는 책이나 도서관 내에서 읽어버린 책들 포함하면 80권쯤 될 것 같네요. 뭐 제가 엄밀한 학술서적을 본 것은 거의 없고 대부분 빨리 읽을 수 있는 역사분야나 문화유산 파트 쪽을 읽은 것이기 때문에 다소 양이 뻥튀기된 셈이지요.

여하간 한해 100권 읽는 것으로 치면 대학 4년 동안 400권이 되어야 하는데 벌써 3년이 지나갔고 할당량에 비해 많이 모자라는 것으로 추산됩니다. 4학년 때는 아무래도 이래저래 바빠서 책도 많이 못 볼텐데 말이죠. 그래서 보충학습(?)하는 셈치고 공익근무를 하면서도 짬짬이 못다 읽은 책들 메워보려고요.

다산 정약용 선생이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책을 읽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 가운데 가장 맑은 일이다(讀書是人間第一件淸事)"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비단 책을 읽는 것만이 아니라 인터넷을 이용해서도 얼마든지 많은 글을 읽을 수 있으니 편리한 세상 같아요. 허영의 독서가 적잖았겠지만 많은 책들, 각종 글들에서 아름다운 마음들을 만나는 건 제 낙인 것 같습니다.

자리가 높아지고 몸이 편안해질수록 책을 찾을 수 있는 여유, 문필가씩은 아니더라도 잡글을 쓰면서 삶의 기록을 남겨보는 재미... 이 두 가지와 더불어 모국어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사랑까지 안고 사는 제가 되고 싶어요. 재미난 책 많이 보세요.^^


○ 자신의 인생 계획을 20대, 30대, 40대 등등으로 나누어 얘기해주세요.

10년 단위로 딱딱 계획을 세울 만큼 체계적인 것은 없답니다. 차라리 20대와 나중에 노년기 정도를 구분해서 말씀드릴 수 있을 듯 해요.

일단 20대에는 당장에 닥친 공익근무를 무탈하게 하면서 장기적인 미래 설계를 해야겠지요. 취업 외의 방도인 대학원 진학과 행정고시 도전 여부를 정하는 것이 일단 첫 관건이 될 듯 하네요. 대학원을 결정하면 기왕이면 4년 간은 더 배워야겠고, 행시를 결정하면 붙기 위해 노력을 해야겠죠(너무 당연한 이야기^^;). 이 둘 다 아니라면 무난히 취업준비 모드로 접어들겠고 졸업을 위한 영어공부를 포함해 각종 상식을 습득하겠지요. 여기까지 얼추 정해지면 세부적으로는 일로매진(一路邁進)해버리려고요.

전 그다지 변화무쌍한 삶을 원하지 않아서 일단 한번 정해지면 큰 궤도 수정 없이 밀고 나갈 수 있는 것을 원합니다. 그래서 진로 설정을 남들보다 굼뜨게 신중을 거듭하고 있기도 하고요. "힘들게 결정하고 우직하게 밀어붙인다" 주의거든요.

여하간 어찌저찌 삶을 꾸려나가다 보면 세월은 부지런히 흘러가겠지요. 저는 특별히 초인적인 체력을 가지고 있거나 출중한 실력을 가진 녀석이 아닌지라 한 60세 정도가 되면 어지간한 일손은 다 놓고 싶습니다. 부득이 그 전에 놓아야할지도 모르겠지만요.^^; 자유를 숭상하는 제게 노년기의 자유도 무지 흥미진진할 듯 합니다.

우선 서예를 좀 배워서 지인들에게 제가 쓴 글씨도 막 선물하고 싶습니다. 그 때까지도 미처 못간 우리 문화유산 답사(기회가 되면 중국 등의 외국들도)를 다니며 유유자적하겠고, 그 때까지 쓴 제 잡글 중에 괜찮다 싶은 걸로 문집 비슷한 걸 엮어보고도 싶어요.

이런 것들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젊은이들이 괜히 모자라고 어리숙하다고 타박하지 않도록 수양을 해야겠죠. 저 또한 그 시절에는 무지하게 어리버리했고 윗사람 눈에 못미더운 녀석이었음을 깨닫고, 후임자들이 잘하는 모습에 기뻐하고 축복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곱게 늙는 것이 제 마지막 인생계획입니다. 푸하하


○ 강아지 이름을 야니라고 지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한자로 옆에 덧붙인걸 보니 무언가 의미심장한 작명 센스가 발휘된 결과물인 것 같은데 ㅋㅋㅋ

그다지 의미심장하지는 않습니다. 야니는 세 살 때인 2003년 6월에 데리고 와서 키우게 된 개인데 前주인이 붙인 이름을 그대로 쓰고 있습니다. 저는 처음에 평소 흠모하던 철학자인 칸트로 부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주장했으나 가족들의 차가운 반응을 얻고 그냥 야니라 쓰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름은 새로 지어줄 수가 없으니 대신 한자이름을 만들어 주게 됩니다. 야니에 해당하는 한자가 별로 없어 생각한지 1분만에 만들 수 있었지요. 들 野, 진흙 泥... 야니의 개구쟁이스러움과 산책 시의 오두방정에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밖에 마치 개구리를 연상시키는 이 포즈 때문에 '야니 개구리'를 줄여서 '야구리'라는 애칭을 쓰기도 합니다. 나름대로 말티즈이니 털이 새하얀터라 백옥(白玉), 하얀 털에 눈 두 개, 코 하나만 새까맣다고 해서 삼점(三點) 등의 아호(雅號)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야니는 고도의 훈련견이 아닌지라 자기에게 붙여진 다양한 별칭들을 거의 다 알아듣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지요.^^; 훗 그래도 뭐 알콩달콩 재미나게 지내고 있답니다.^^


○ 어떻게 하면 형처럼 환하게 웃을 수 있을까요??^^

제가 환하게 웃던가요?^^; 제가 대책 없는 낙관주의자인지라 어지간하면 웃어 넘기려고 하는 경향이 강한 것 같기는 합니다. 난감한 일이 있을 때도 "야야~ 이거 곤란해~" "당최 이게 무슨 일이람?"이라며 씨익 웃어 버리는 경우도 많고요. 나름대로 근엄하고 엄숙하게 무게도 잡고 분위기도 잡고 싶지만 그런 걸 잘 못하거든요. 저는 카리스마 있고, 듬직하고, 패기 있다기보다는 그저 열려 있고 쉽고 만만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만으로 만족합니다. 거기까지가 제 한계이고, 그게 또 제 매력이라면 매력일테니 말입니다.

미국의 행동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는 "우리는 행복하기 때문에 웃는 것이 아니라 웃기 때문에 행복한 것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저도 이 말을 믿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무슨 병이 있는 거 같지만 저는 혼자 있을 때도 실실 쪼개거나 히죽거리기를 잘합니다. 그러다 보면 무료한 일상에도 기쁨이 스며들거든요. 여하간 질문에 답하자면... 하루에 쓸데없이(!) 세 번만 더 웃어 보세요. 팍팍한 우리네 삶에 여유와 평화가 깃들 수 있다고 봅니다. 웃음으로 사치하는 것은 경영학적으로도 유의미한 행동일 겁니다.

모든 것이 고통이다(一切皆苦)라는 불가의 가르침씩은 아니더라도 세상살이는 분명 녹록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마냥 얼굴 찌푸리고 있기보다는 악착같이 재미나게 지내려고 노력해야겠지요. 무언가 가지고 싶어서 자꾸 부족해지고, 집착하게 되고, 상실감에 허덕이게 되는 것은 경계하면서 말입니다. 여하간 언제 어디서 어떻게 뒹굴 거리더라도 최소한의 양심과 이상은 손에서 놓지 않을 자신이 있다면 너무 걱정근심에 휩싸이지 말고 푸하하 웃으며 지내야겠습니다.


○ 익구야 너 인사하는 법 어디에서 배웠니!!?
너무 좋아!!!! 꺄아~


누나는 제 인사법을 참 좋아 해주시는 것 같아요. 사실 별 것도 없는데 말입니다. 저는 제 인사법을 "70도 인사"라고 부릅니다. 가볍게 하는 눈인사인 목례(目禮)나 목 부분만을 사용하는 인사보다는 허리까지 숙여야 나오는 각도인 70도까지 육박하는 인사를 하려고 노력 중입니다. 사실 이제는 거의 습관이 되어 하지 말라고 해도 자동이지만요.^^;

서울외고 한문시간에 양성준 선생님께서 명심보감 강의를 해주셨을 때 "만약 남이 나를 중히 여겨주기 바란다면 내가 남을 중히 여기는 것을 지남은 없느니라(若要人重我 無過我重人)"라는 구절을 참 감명 깊게 들었습니다. 비슷한 말로 독일의 작가 토마스 만은 "자기에게 성의가 있으면 상대방에 허위가 있을 리 없고, 자기에게 허위가 있으면 상대방에 성의가 있을 리 없다"고 말했다고 하네요.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는 결국에는 주고받는 것이라고 봅니다. 이렇게 말하니 좀 메말라 보이지만 교류는 일방적이지 않고 쌍방이 함께 노력해야한다는 의미지요. 정리하자면 제가 정성을 다하는 만큼 상대방도 정성을 다해주는 것입니다. 잠시 동안은 정성을 다하지 않고서도 상대방의 호의를 받을 수 있겠지만 머지않아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공짜가 없는 세상, 거저먹는 인간관계는 없겠지요. 친해질수록 상호 존경심을 잃지 않고 함부로 대하지 않는 것 참 힘든 일이지만요.

지극한 정성,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는 말을 많이 쓰지만... 그 이전에 지성이면 감인(感人)인 것 같아요. 제 인사법은 이 지성을 실천하겠다는 상징적 의미라고 보시면 될 것 같네요. 고등학교, 대학교 이중 후배인 만큼 앞으로도 많이 아껴주세요. 저도 노력할게요. 고맙습니다.^^
Posted by 익구
:
飛반인 탐방 질문과 답변 대부분을 그대로 정리해봤다. 비슷한 문항을 모아서 정리했다. 한가한 휴학생이었던지라 나름대로 정성껏 답변을 하려고 노력했는데 나란 녀석을 좀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 가장 좋은 평가를 내리고 싶은 한국 대통령을 알고 싶습니다.

노무현 대통령님을 꼽고 싶습니다. 아직 임기가 많이 남아 섣불리 평가하기는 좀 무리가 있지만요. 지난 2002 대선 때 비록 투표권은 없었지만 노무현 지지를 천명했었고 지금도 노무현 지지자임을 숨기지 않고 있습니다. 혹자는 너무 가볍다며 대통령의 처신을 나무라지만 저는 노 대통령의 그 소탈하고 탈권위적인 리더십에 매료되었습니다. 역대 대통령들은 시키는 대로 안 하면 안 될 것 같은 숨막힘이 느껴지거든요. 가령 김대중 전 대통령님의 카리스마적 리더십과도 사뭇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고 봅니다.

제 편향된 의견인지 모르겠으나 그간의 대통령 중에서 가장 국민을 무서워할 줄 아는 정치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군림하던 대통령의 모습이 아닌 끊임없이 지지자들과 국민들에게 짐을 나눠달라고, 힘을 보태달라고 외치는 모습을 보는 참신함이라고나 할까요. 다만 노 대통령을 잘 도와야할 열린우리당이 종종 삽질을 하면서 제 가슴을 긁어 놓지만요.^^;

개인적으로 사람을 단숨에 잘 믿지는 않지만, 일단 한 번 믿으면 끝까지 믿는 성격입니다. 그야말로 '미워도 다시 한 번~'을 외치는 유형이라고 할 수 있지요.^^; 물론 앞으로 몇 번을 더 '다시 한 번~'을 외칠지 모르겠지만요.^^ 부담 없는 지지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부담'은 '책임'과 동의어겠지요.

저는 노 대통령이 새로운 시대를 열 것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그저 자유주의자로서, 개혁적 보수로서의 면모를 다잡는 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기 바랍니다. 진보인척 하면서 표를 구걸하고 입을 닦는 파렴치한 수법은 이제 더 이상 쓸 수 없거든요. 다만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는 국가보안법의 폐지나 천민자본주의와 극단적 시장만능주의에 대한 경계 같은 자유주의 미감을 구현할 짐은 지고 있습니다. 꽤 그럴듯한 보수가 되는 것이 노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의 소임일 것입니다.

독선과 오만을 버리는 것만큼이나 과욕을 버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노 대통령님이 이것을 잘 해내신다면 분명 존경받는 지도자로 박수를 받으며 떠날 것이라고 믿습니다.


○ 좋아하는 스포츠와 스포츠 스타를 알고 싶습니다.

민망하게도 저는 스포츠에는 정말 관심이 없는 편입니다.ㅜ.ㅜ 고연전이 없었다면 정말 스포츠와는 완전 무관하게 살았을지도 몰라요. 천성이 게을러서 굼뜨다 보니 무언가 재빠르고 순발력을 요구하는 것에는 정말 젬병이거든요. 그냥 세간의 이목을 끄는 주요 대회 같은 것을 좀 보고 누구누구 잘한다고 해보기도 하지만 사실 이건 좋아하는 축에도 못 들겠죠. 아마도 스포츠 쪽은 제 영원한 미개척 분야가 될 것 같습니다. 스포츠를 보거나 하는 것을 죄다 시큰둥해하니 특히나 남자들 사이의 관계에서 많은 애로사항이 있긴 합니다. 그래도 저 같은 녀석이 하나쯤은 있어도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며 지냅니다.^^;

비단 스포츠뿐만 아니라 각종 게임도 나몰라라하고, 연예인 이야기도 관심이 없고, 이런저런 잡기에도 무지한 편입니다. 도대체 무슨 재미로 사냐고도 하는데 그래도 나름대로 늘 재미나게 지내고 있다니 신기할 따름입니다. 다만 이렇게 재미없는 녀석을 친구나 선배, 후배로 삼아 두고 싶을 사람이 누가 있겠냐는 두려움은 늘 맴돌죠.

모든 스포츠에 거의 완전히 관심이 없는 저이지만 E-SPORTS라고 불리는 스타 중계만큼은 무척 즐겨보고 있습니다(물론 제가 직접 하는 스타는 최악입니다^^;). 이것도 스포츠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면 프로토스 유저인 박지호, 강민 선수 등을 맹렬히 응원하고 있습니다. 스타에 영원히 관심 없을 줄 알았던 제가 스타 중계 방송에 푹 빠져 있듯이 세상만사 함부로 가름하고 제한해서는 안되겠구나 생각했습니다. 인생은 무상하고, 무상한 덕분에 사람은 늘 변하니까요. 그 재미에 이 무료한 삶이 그나마 살아 볼만한 것이겠지요. 혹시 이러다가 제가 열혈 스포츠광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 가능성이 무척 희박하지만.^^;


○ 내유외강형 인물과 외유내강형 인물 중 어떤 사람이 좋습니까?

보통 외유내강(外柔內剛)을 칭찬의 의미로 더 많이 쓰는 것 같습니다. 다소 낯선 내유외강(內柔外剛)은 말 그대로 겉으로는 강하게 보이지만, 속은 부드러운 것으로... 처음에는 무뚝뚝하고 어렵지만 일단 마음을 열면 따뜻하게 잘 대해주는 사람, 내면은 부드럽지만 겉으로는 강철같은 의지가 느껴지는 사람을 지칭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언가 엄청 다를 것 같은 두 단어이지만 막상 풀어서 보면 매우 비슷해집니다. 그도 그럴 것이 두 단어는 마냥 부드러운 것, 마냥 딱딱한 것이 아닌 두 요소가 조화를 이룬 상태를 말하니까요. 내유외강, 외유내강을 손쉽게 구분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네요.

차라리 타인과의 관계에서 편견 없이 열린 자세로 경청할 수 있다면, 스스로 생각하면서 아집에 휩싸이지 않고 열린 마음으로 변화를 모색할 수 있다면 외유내강이든, 내유외강이든 큰 관계가 없을 것 같습니다. 요점은 “열려있음” 그 자체가 아닐까 싶습니다.


○ 가장 좋아하는 한식과 양식은 무엇인가요?

한식은 제육볶음, 순두부찌개, 냉면을 좋아합니다. 고기류 중 간장 양념보다는 고추장 양념이 들어간 것 중에 비싸지 않은 부위라 부담없이 먹을 수 있는 제육볶음, 제가 좋아하는 두부와 달걀이 찰떡궁합으로 만난 순두부찌개, 혹시 마약이 아닐까 의심되는 육수의 짜릿함으로 속을 풀어주는 냉면... 이거 없이 어떻게 살까요.^^

양식은 크게 즐기는 편이 아니고 먹어봤자 한국화된 양식을 즐겨서 잘 모르겠네요. 가령 돈까스를 좋아한다고 해서 그걸 양식의 범주에 넣기 민망하듯이 말입니다. 제가 서양쪽에 좀 약해요.^^; 차라리 중식 요리들은 돈이 없어서 못 먹을 뿐 참 좋아합니다. 한국에서 먹는 중국 음식은 비싸고 양 적어서 참 슬퍼요.ㅜ.ㅜ


○ 첫사랑에 대해 말해주세요.

왜 아직도 여자친구 한번 못 사귀었냐는 질문에 혼자서도 잘 논다는 말로 둘러대기 일쑤였죠. 아직 누군가를 좋아한다거나 할 마음이 크게 절실하지는 않은 것 같고요. 원래 제가 이렇게 무딘 심성으로 모진 세상 살아가고 있죠. 푸하하

굳이 제 첫사랑을 추적해보자면 고등학교 1학년 때 첫눈에 반했다고 해야할 분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첫눈에 반하는 사랑을 전혀 믿지 않았기 때문에 이걸 어떻게 생각해야 하나 한참 고민하다가 흐지부지되었습니다. "첫눈에 반한다는 것이 성립할 수 있는가?"을 가지고 생난리를 치다가 "외면에 내면이 드러나는가?"하는 문제로 넘어갔다가 결국 중간에서 타협했습니다.

외면과 내면은 별개의 것이다라고 철썩 같이 믿던 제가 양보해서 외면에 내면이 어느 정도 드러나는 개연성이 있을 수 있다는 "내외개연성론(內外蓋然性論)"을 주창했거든요. 한 사람의 내면을 중시하고자 했던 제 철없는 고집이었는지 모르지만 이렇게 한바탕 난리를 치고 난 뒤로는 어떤 사람을 만나도 그 사람의 마음을 보려고 무던 애를 쓰는 꽤 괜찮은 습관이 생겼습니다.^^

여하간 첫눈에 반하기는 했는데 첫사랑으로 인준은 제대로 못 받고 제 나름의 철학적인 논쟁만 즐겨버린 엽기적인 사태가 되었습니다. 저는 여전히 첫인상보다는 조금 시간이 지나야 드러나는 세월로 빚어낸 인연에 대한 집착이 강합니다. 그저 이래저래 교류하면서 지내다가 적당히 세월의 무게가 쌓였을 때 아 이 사람을 내가 좋아해도 되겠구나 싶은 경우가 찾아오리라 믿습니다.

완전 횡설수설이지만 제 첫사랑은 이미 있었다고 해야할지, 아직 없었다고 해야할지 딱히 형언하기 힘듭니다.^^;


○ 태어나서 첫눈에 반한 여성이 있는지요?

고등학교 1학년 때 처음 그 경험을 해본 것 같습니다. 그 이후에도 첫눈에 완전 넘어가는 수준은 아니라도 처음 만났는데 호감이 가는 경우가 종종 있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첫눈에 반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크게 의미를 부여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스위스의 심리학자 융은 모든 인간은 그 정신 속에 자신과 반대되는 성적 요소, 즉 남성은 아니마(여성적 영혼)를, 그리고 여성은 남성적인 아니무스(남성적 영혼)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융이 말하는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극단적이면서도 서로 조화하고자 하지요. 육체는 남성 아니면 여성으로 있지만, 인간성의 본질은 원래 양성적이라는 것입니다.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항상 무의식적으로 이성에게 투사되어 '매력' 또는 '혐오감'을 야기하는 주요한 원인중의 하나가 됩니다. 즉 남성의 경우 여성에게 아니마를 투사할 때 자기 아니마의 여성상과 동일한 특성을 가지고 있으면 매력을 느끼고, 모순된 경우에는 혐오를 느낀다는 것이다. 어느 시인의 "그냥 좋은 것이 가장 좋은 것입니다"라는 시구는 그런 인간의 표현하기 힘든 무의식의 감정을 잘 대변해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첫눈에 흠뻑 빠져버린다는 것, 괜시리 좋은 사람이 생기는 것, 그냥 믿고 싶은 사람이 덜컥 나타나는 것은 살다가 몇 번은 겪어보고 싶은 유쾌한 일이겠지만 융의 설명에 따르면 상대방을 보고 느끼는 황홀감이 사실은 자기 마음속에 있는 아니마, 아니무스 원형상이라는 것입니다. 조금 김이 새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낭만이 아주 떨어져버리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래도 첫눈에 반하는 것은 그다지 내키지 않네요. 첫인상이 좋은 계기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세월이라는 필터로 걸러내는 것만큼 좋은 것은 없겠죠.


○ 지나가다가 정말 자신의 반쪽이라고 생각하는 여성을 길거리에서 마주친다면.. 과연 용기있게 말을 걸 수 있을런지?

위 문항에서 말씀 드렸지만... 길거리에서 정말 이상형이 지나간다고 해도 그냥 보낼 듯 합니다. 이건 굳이 용기가 없어서라기보다는 길거리에서 운명처럼 마주치는 사랑 이런 것에 관심이 없어서라고 해야 더 맞을 것 같네요.


나 정말 궁금한게 있는데..........
저기있자나........☞☜
B반하고 특히 친한거야?아니면 B반말고도 다른반에서도 이렇게 활동을 열심히 하는건지^^;


뭐 솔직하게 말씀드릴게요. 일단 제 학생회장 임기와 함께 했던 04학번 후배님들과는 반 그런 거 없이 정말 다 친하고 싶고 잘해주고 싶어요. 대학 새내기로서 즐기는 이런저런 행사들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것 같아 늘 죄송스런 마음뿐이거든요. 그래서 반 상관없이 친한 04학번 후배들과는 앞으로도 계속 좋은 관계 맺고 싶고, 저도 그렇게 노력 중입니다.

제가 2004년 37대 경영대 학생회장 일을 하던 때야 당연히 다섯 개 반을 다 다니려고 노력하고, 어느 한 반 소홀히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개인의 호오를 떠나 그건 당연한 책무니까요. 게다가 이미 36대 경영대 학생회 일을 도우면서 2003 새터를 준비할 때(이 때 홍익이, 병일이 등과 함께 일했음)부터 경영대 다섯 개 반을 골고루 만나며 다녔으니 제게는 특정 반이라는 개념을 가질 기회가 없었습니다. 지난 2년 간은 특정 반이 아닌 경영대를 위해 일한다는 생각으로 살았으니 제 특수성을 조금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작년 11월 제 임기가 다 끝나고 올해 3월 초에 있던 다섯 개 반 개강총회까지 다 참석한 이후 학생회장 A/S도 공식 종료하고 각종 반행사 이런 걸 챙기지 않습니다. 이제 제가 갈 권한도 없고 말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몇몇 04학번 후배들만 간헐적으로 만나는 것이 전부였지요.

그런데 임기도 끝나고 이제 사라져야할 녀석에게 아름다운 마음을 보여주신 분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 글을 읽고 있으신 飛반 학우 여러분이었지요.ㅜ.ㅜ 그 마음이 너무 고마워서 飛반 행사에 아주 가끔씩 모습을 나타냈습니다.^^; 다른 반 05학번은 거의 모르지만 이상하게 飛반 05학번 후배님들과는 이래저래 많이 보게 되더라고요. 먼저 연락도 해주고 말입니다. 낯가리는 제게 먼저 인사해준 현수, 보경이, 먼저 문자 보내준 태관, 정석이 등등의 후배님들께 이 자리를 빌어 감사 인사드립니다.

여하간 정리하자면 지금 저는 쥐뿔도 아닌 입장이고, 반활동을 할 처지도 아닙니다. 다만 저를 아니 미워하신다면 飛반 행사에 잠시나마 나타나 인사나 나눌 수 있었으면 하는 소박한 바람을 가져봅니다.^^


○ 비반과 많은 시간을 보내시면서 05 애들이 형 원래 비반 02학번 선배였던 걸로 착각할만큼 비반 속에 깊숙히 자리해 계시는 형입니다. 형, 비반에 대한 단상을 듣고 싶어요.

飛반 학우 여러분들에게 헌사하고픈 갖은 미사여구를 빼고 담백하게 정리해보자면... 너른 포용력, 진취적 기상, 끈적한 우애... 이 세 가지가 아닐까 싶네요.

사실 제가 과거에는 제 맡은 바 소임을 다하기 위해 손님 입장에서 들렀지만 단순한 과객(過客)이 아닌 가족처럼 따스하게 대해준 그 푸근함이 아직도 기억에 납니다. 또한 술자리에서나 지나가다 겨우 본 것에 불과한데도 기억해주고 먼저 인사해주고, 연락해주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 적극적인 모습도 참 좋았습니다. 게다가 일단 관계 맺은 사이끼리 서로 챙겨주고 아껴주는 그 마음씨에 어찌 아니 감복하겠습니까.

저를 아니 미워하신다면 飛반 여러분들과 久而敬之(논어 제5편 공야장 中)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오래되어도 여전히 공경한다"라고 해석하면 친해지더라도 존경심을 잃지 않고 범속에 빠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시간이 흘렀다고 무심해지지도 않고, 세월이 지났다고 차갑게 식지 않는 그런 존재 말입니다. "오래 사귈수록 공경하게 된다"라고 해석하면 오래 사귀어도 그 사람의 약점이 드러나기보다는 강점이 더욱 커진다는 뜻입니다. 아니 어쩌면 그 약점과 한계마저 품을 수 있을 만큼 그릇이 커진다는 뜻인지도 모르겠네요. 세월로 빚어내는 久而敬之, 가장 아름다운 인연이 아닐까 싶은데 함께 해요~


○ B반 행사에 참여 하시면서 느꼈던 B반인만의 장점은 무엇인가요?

용철이가 한 질문(윗 문항)에서 飛반에 대해 정리하면서 너른 포용력, 진취적 기상, 끈적한 우애... 이 세 가지를 들었습니다. 이것을 飛반의 장점이라고 해야겠지요.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사람 소중한 줄 알고, 옆에 있는 사람들이 귀한 줄 안다는 점입니다. 하고많은 사람 중에 이 공간, 이 시간을 공유하는 우리들은 꽤 각별한 인연이라고들 합니다. 그러나 사람과 사람의 만남은 실상 랜덤하고 우연하게 배정되는 것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飛반에게는 이런 우연성을 필연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힘이 있는 것 같습니다.

명심보감 성심편에 "有麝自然香 何必當風立(사향을 지녔으면 저절로 향기로운데 어찌 바람을 맞아 서 있을 필요가 있겠는가?)"란 구절이 있습니다. 飛반에서 풍기는 인정의 내음, 열정의 내음은 억지로 드러낼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조금 시간이 지나면 드러나게 되는 그 무엇입니다. 세월에 바래지 않는 飛반의 멋을 깨닫는다면... "그렇기 때문에" 飛반을 좋아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飛반을 좋아할 수 있게 될 겁니다. 저처럼 말입니다.^^

아울러 덧붙이자면 온라인 상에서도 돈독한 교류 나눌 수 있는 이 커뮤니티도 빼놓을 수 없지요. 경영대에 많은 온라인 커뮤니티가 있지만 이처럼 체계적이고, 많은 이들이 참여하는 커뮤니티는 없는 듯 합니다. 앞으로도 이 커뮤니티가 번성했으면 좋겠어요.^^


○ 요새는 학생회의 영향력이나 비중이 예전같지 않다.
학생들의 열의도 없는것 같고 학생회 선거나 행사에 대해 모두가 무관심해 보이는데.....
학생회장을 하면서 가장 속상했던적은?


학생회의 영향력이 예전 같지 않은 것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저는 이제 학생회 조직으로 대동단결하는 시대는 끝났다는 것을 늘 말하고 다니지요. 학생회는 그저 현상유지와 역할배분, 학교측과의 협상 통로로서의 역할에만 충실하면 된다고 봅니다. 너무 많은 일을 하려는 과욕 때문에 학생회 조직이 오히려 쇠퇴하는 역설적인 현상을 맞았다고 봅니다.

제가 어쩌다가 학생회장이 되어 한해 살림을 맡았을 때도 무탈한 현상유지책을 썼습니다. 이미 많은 학우들은 그 정도의 역할만 해주는 것으로 만족하시거든요. 무언가 거창해 보이고 일반 학생은 범접하기 힘든 빡센 학생회가 아니라 쉽고 만만하고 널널하게 보이는 학생회 살림을 꾸려나가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잘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속상한 적이 있다면 제가 무능하여 재미난 회의 진행을 하지 못한 것을 들고 싶습니다. 반일꾼들 모아놓고 하는 회의가 그리 재미날 것은 없지만 그래도 소중한 시간 내준 분들께 일말의 보람을 심어 드렸어야했는데 그걸 잘 못했던 거 같아요.

그리고 飛반 후배들 중에서 학생회 일꾼을 많이 뽑고 싶었는데 아쉽게 그건 잘 안된 거 같아요. 제가 인사권(?)이 있었을 때 학생회 감투(?)라도 많이 나눠드리고 싶었는데 04학번 김효진양을 편집국장으로 선임한 거 이외에는 없었지요. 제가 좀 더 적극적으로 삼고초려를 했어야 하는데 그 때는 경황이 없어서 그러지 못했네요. 쿨럭

아참 그리고 2004 새터 때 네 번째로 간 飛반 사발식 시주하고 나서 다섯 번째 반을 못 가고 쓰러져 잠들었을 때 속상했답니다. 흑흑 왜 그리 많은 양을 주셨단 말입니까? 지금이야 추억이지만 처음에는 사발식 시주를 하라는 건지, 그냥 사발식을 하라는 건지 헷갈렸을 정도였습니다. 훗 여하간 그 때 당시 관계 당사자들과 오해를 풀고 잘 지내고 있답니다. 푸하하

끝으로 저 같은 녀석도 학생회장을 한해 동안 했답니다. 올해 11월에 있을 경영대 학생회장 선거는 04학번 이상이면 도전 가능합니다. 혹시 관심 있으시면 은밀히 연락을... 막 이러고...^^;


○ 어떻게 하면 그렇게 살이 안찌는지?무얼먹고 사나요♬

특이사항은 전혀 없고요, 이렇게 말하면 민망하지만 체질인 것 같아요. 예전만큼 많이 먹지는 않지만 아직도 식충이나 배 안에 거지 있다는 소리들을 정도로 많이 먹는 편인데... 이러다가 나중에는 뚱뚱보 아저씨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지금 현재는 그다지 살이 잘 안찌는 체질 같아요. 대신 몇 끼를 굶거나 스트레스를 받거나 하면 살이 쭉쭉 빠져버려서 오히려 현상유지를 위해 애쓰는 편입니다. 고3 이후로 몸무게 변화가 거의 없었죠. 살이 좀 쪘다 싶어도 이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고 말입니다. 마구 먹어봤자 뱃살만 느는 터라 억지로 살을 찌울 노력도 하고 있지 않습니다. 흑흑 염장질이 아니었기를...


○ 졸업후 하고싶은일이 뭡니까?

그런 장기적 계획은 아직 세워보지 못했습니다. 아직 대학원 진학이냐, 고시 등의 시험 공부냐, 취업 준비냐 같은 기본적인 진로 설정도 못했고요(올해 안에 대강 정해봐야겠지만...). 뭐 지금까지 검토한 바에 따르면 대학원 진학은 호감도가 줄었고, 행정고시 쪽의 공부를 늦게나마 시작해볼까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긴 합니다. 게으르고 놀기 좋아하는 제가 고시생이 될 수 있을지가 꺼림칙하지만요.

예전에는 장래희망이 뭐냐고 물을 때 국무총리라고 멋대로 둘러댔습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다소 후퇴하여 국무위원이나 정부 산하의 숱한 위원회에서 괜찮은 일을 맡아보는 것이라고 농담 삼아 말합니다. 이럴 때는 큰 정부의 강력한 옹호자가 되어버리기도 하죠. 푸하하

실은 중 3때 장래희망이 대학교수라고 했다가 담임선생님께 벌써부터 그런 생각을 하면 결국에는 나 같은 선생질밖에 못한다는 연설을 1시간 동안 듣고 세뇌되어 일단은 뻥을 치며 다니고 있습니다. 제가 돈 문제 신경 쓰고 살 수 있다면 학자나 문필가쪽을 매우 긍정적으로 검토해봤겠지만 사실상 포기 상태이고요.

주위에서 제가 그냥 무난하게 회사를 다니면서 살 것 같지는 않다는 말은 숱하게 들어온지라 저도 제 미래가 걱정태산입니다. 여하간 무슨 일을 하게 되든 책이나 글을 읽을 시간, 잡글이나마 쓰면서 소일할 시간이 있는 일을 하고 싶네요.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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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온을 되찾다

잡록 2005. 7. 21. 00:18 |
군복무 시작을 전후해 요 몇 주간 불안정한 생활을 보내다가 이제야 좀 평온을 되찾았다. 아직 요원 생활이 몸에 익지 않아서 그런지 일과시간이 마치고 나면 피로한 기운에 저녁 시간을 제대로 보내고 있지 못하고 있지만 차차 나아질 것이다. 요원 생활 동안 허송세월을 하지 않으려면 저녁 시간을 잘 활용해야 한다지만 그게 마음만큼 쉽지는 않을 것 같다. 그래도 훈련소에서 걸렸던 지독한 감기도 이제 다 나았고, 짧았던 머리도 제법 자라서 답답했던 모자도 벗어버렸다. 그간 초췌했던 모습은 윤기가 흐르는 여유로 바뀌고 있다. 자정도 되기 전에 졸리는 현상만 극복하면 훈련소 이전의 생활방식을 거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출근길에 공짜신문 3종을 탐독하다가 앞으로 덤으로 얻은 시간을 알차게 보내 얻은 성과물은 나만을 위해서 쓰지 말기를 다짐했다.


마냥 귀엽고 잘해주고 싶은 남자 후배들의 대부분이 군대 문제로 씨름해야 하는 광경을 보는 것은 늘 따갑다. 한 두 사람 보내본 것도 아니고 이제 좀 무덤덤해질 때도 됐는데 떠나보내는 마음은 늘 섭섭하고 아쉽다. 복거일 선생의 말대로 징병제는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구성 원리로 삼은 사회에는 맞지 않는 제도다. 가뜩이나 사병들에 대한 복지가 열악한 실정인데, 모병제 군대로 전환할 때 예상되는 엄청난 비용은 참 고심스런 문제다. 게다가 여전한 북한의 군사적 위협도 우리 사회의 국방색이 탈색되는 것을 막고 있다. 그러나 우리 군대가 적어도 의무복무기간을 대폭 줄이는 쪽으로 나아가기 바란다. 징병제를 실시하는 60여개국 중 우리보다 긴 복무기간을 가진 나라는 북한을 비롯해 5개국 정도에 불과하다고 한다. 탄탄한 동기부여와 전문가정신으로 무장한 정예병이 국가안보에 더 보탬이 된다고 본다면 복무기관 단축에 인색할 이유는 없다.


사는 게 고만고만한 현역병들에 비해 공익근무요원들의 삶은 다채롭다. 어떤 생활은 생각보다 빡세서 고개를 가로젓게 만들고, 어떤 생활은 얄미울 정도로 부럽기도 하다. 사람 욕심은 참 끝도 없어서 구청에 와서 보직을 배정 받는 그 순간까지 가능한 무난한 일이 되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기왕이면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 주어지기를 바라는 심정이라고 둘러댔지만 실상 남들이 선망하는 편한 일을 기대했다. 내게 주어진 일이 인연이라 생각하고 즐겁고 재미나게 해나가야겠다. 한결같은 것을 좋아하는 나이지만 2년은 제법 긴 시간이라 날마다 근면성실한 모습을 보이기는 힘들 것이다. 가끔은 태업의 달콤함을 맛볼지 모르겠지만 엄연히 병역의 의무를 수행하는 만큼 나태함에 빠져 희희낙락하지 않을 것을 서약한다. 구청 구내식당에서 맛난 밥을 먹을 때마다 고마움을 품는다면 은인자중(隱忍自重)하면서 소소한 재미도 챙길 수 있으리라. 짜증과 투정보다는 안온한 나날들로 꾸려보자. - [憂弱]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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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7/1 야간행군 中

모든 떠남은 돌아옴(歸)이게 마련입니다. 4주간의 훈련소 생활 동안 과연 저는 제 자신으로 정직하게 돌아오고, 타인에 대한 겸손한 이해를 체득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네요.


군대란 곳에 있어보니 적잖이 짜증도 나고, 투덜거릴 일도 많았지만 그럴 때면 "참고 참고 또 참고"를 외쳤습니다. 바닥에 忍 혹은 忍耐(인내)를 쓰기도 했고, 푸쉬킨의 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를 읊조렸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차차 나누기(훈련소 기록을 조만간 잡글로 작성할 예정)로 하고 일단 지친 몸을 좀 쉬겠습니다. 아 정말 속세로 돌아오니 좋네요. 푸하하 - [憂弱]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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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익근무를 시작하며

잡록 2005. 6. 11. 06:09 |
이제 곧 공익근무를 시작하게 된다. 생각보다 날짜가 늦게 나와서 노는 시간이 길어졌지만 어쨌든 내 삶의 전환점으로 삼을만한 변화가 찾아온다. 공익근무를 기다리며 놀았던 반년의 시간동안 딱히 무엇을 시작하지도 못하고 어딘가에 빠져보지도 못한 어정쩡한 시간이었다. 이제 나라의 녹(?)을 먹는 처지가 되어 일감(?)도 생긴 만큼 일도 열심히 하면서 좀 더 새로운 삶의 보람거리를 찾아봐야겠다.


또래친구 중에 빠른 경우는 벌써 제대를 해서 복학생 소리를 듣는 경우도 있다. 그들을 보면 제법 의젓한 풍모가 나오는 것도 사실이다. 군대 가서 사람된다는 식의 말은 전혀 믿지 않는다. 다만 군복무를 마치면 여유도 많이 줄고, 마음도 급해지는 모양이다. 이제 제 살 길을 찾아야겠다는 절박한 심정들이 느껴진다. 그것이 정말 성숙해진 증거이든, 국가에 헌납한 시간이 아까워 손실을 메꿔야겠다는 본전의식의 발로이든 보고 배울 점은 많다.


한 학기 휴학을 하면서 이래저래 많은 약속도 잡아보고 생각지도 않게 05학번 후배들도 많이 만났다. 작년까지 학생회 일꾼 생활을 한답시고 정신 뺏겼던 것을 만회하기 위해 더 애썼는지도 모르겠다. 올해 들어 새로 알게된 사람들이 참 많았다. 더욱 친해진 사람도 많아졌다. 진작에 이렇게 교류 나누며 지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후회막심이다. 그리 사교적이지도 않고 무심한 편인 나이지만 모자란 나에게 마음을 열어주고, 시간을 할애해주고, 생각을 나눠준 이들과의 좋은 관계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다. 늦었다고 생각될 때 시작하면 생각보다 그리 늦지 않은 경우가 많으니까.


도무지 바쁘다는 핑계를 댈 수 없는 휴학생인 만큼 내키는 대로 잡히는 대로 책을 봤다. 대학 4년 간 한해에 100권씩 읽어치우겠다는 다짐을 제대로 지킨 적이 없었다. 그것을 만회라도 할 요량으로 책을 달고 지냈다. 차분히 앉아서 독서할 분위기는 아닌지라 내가 빨리 읽을 수 있는 역사와 문화유산 분야 책들 위주로 빨리 읽어내려 갔다. 간만에 독서열에 불타면서 대학 1학년 때부터 이렇게 살았다면 내가 얼마나 달라졌을까 상상해봤다. 그러나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과거였고, 앞으로 공익근무를 하면서도 짬짬이 못다 읽은 책들로 메우면 되리라. 내게 독서는 취미가 아닌 생활의 일부가 되어야 하기에.


공익근무라서 정말 다행인 점은 훈련소 기간을 제외하고는 민간인 신분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점이다. 정말 할 줄 아는 것도 별로 없고, 특별히 잘하는 것도 없는 나이지만 천만다행으로 글 읽고 쓰는 것은 좋아해서 그나마 살아가는 재미에 보태고 있으니 말이다. 무언가 읽고 쓸 수 없는 세상은 나에게 암흑이다. 그 암흑기간이 남들에 비해 현저히 짧다는 것에 감사하며 덤으로 얻은 시간만큼이라도 남들을 위해 쓸 것을 서약한다.


일단은 무탈한 요원 생활이 지상과제지만 적당히 안정이 되면 본격적으로 내 진로에 대해 고심할 생각이다. 천성이 게으르고 아무리 굼뜨다고 해도 대학 4학년씩이나 돼서 번듯한 미래설계도 없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공익근무 기간을 진로 설정을 위한 숙고의 시간으로 삼은 만큼 머리를 쥐어짜 보겠다. 내 영혼이 기쁨에 겨워 파르르 떨릴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궁리하는 시간이 그간 너무 없었다. 당최 뭐해서 벌어먹고 살지를 좀 정해봐야겠다.


나는 대체로 다른 사람들에게는 큰 관심이 없다. 내가 꼭 하지 않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에도 흥미가 없다. 내가 해야만 하는 일들만이 내 마음을 잡아끈다. 조금만 지루하거나 힘들어도 '왜 내가 이 일을 해야만 하는가?'는 의문이 솟구치는 일 따위에는 애당초 몰두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완전히 소진되고 나서도 조금 더 소진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내가 누구인지 증명해주는 일,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일, 견디면서 동시에 누릴 수 있는 일, 그런 일을 하고 싶었다.
- 김연수. [청춘의 문장들](2004). 마음산책. 67쪽


"견디면서 동시에 누릴 수 있는 일"이라는 표현이 참 와닿는다. 청나라 때 장조(張潮)는 [유몽영(幽夢影)]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꽃에 나비가 없을 수 없고, 산에 샘이 없어서는 안 된다. 돌에는 이끼가 있어야 제격이고, 물에는 물풀이 없을 수 없다. 교목엔 덩굴이 없어서는 안 되고 사람은 벽이 없어서는 안 된다.
(花不可以無蝶 山不可以無泉 石不可以無苔 水不可以無藻 喬木不可以無藤蘿 人不可以無癖)



여기서 벽(癖)이란 어떤 것에 흠뻑 빠진 상태를 말한다. 무상한 인생에 그나마 벽(癖)이 변치 않고 나를 지켜줄 것이다. 不狂不及(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라는 말처럼 미친 듯이 몰두해야 남이 따라오지 못하는 독보적인 경지에 이를 수 있다. 어떤 것에 미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마니아적 감수성이 현실과 부딪힐 때 끝까지 자신의 가치를 고수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다. 내 편벽됨이 하필이면 주류의 것이 아니라 비주류나 소수파의 것이라면 또 얼마나 번민해야 할까. 부와 권력과 명예와는 별 상관없는 것을 추구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물론 먹고사는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세속적인 꿍꿍이를 외면할 수도 없다. 하지만 이것을 하지 않고서는 온몸이 근질거려서 견딜 수 없는, 이것을 미친 듯이 할 때 따르는 아픔과 버림도 이겨낼 수 있을 것과 같은 일이 분명 있을 것이다. 남들 하는 대로 따라하기도 힘든 세상이지만 그렇게 해봤자 내 꿈은 백년하청(百年河淸)일 따름이다. 모든 걸 평균치만 하는 사람은 결국 평균 이하가 된다. 차라리 평균 이하가 몇 개 있더라도 평균 이상이 몇 개 있어서 상쇄시키는 편이 훨씬 낫다. 선택과 집중을 위한 진통이 필요하다.


나는 그다지 변화무쌍한 삶을 원치 않으니 일단 한번 정하면 큰 궤도 수정 없이 밀고 나가길 바란다. 힘들게 결정하고 우직하게 밀어붙이고 싶다. 신중을 거듭하되 너무 지체하지는 말자. 여하간 공익근무를 앞두고 심사가 복잡하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 어떻게 뒹굴 거리더라도 최소한의 양심과 이상은 손에서 놓지 않을 자신이 있다면 너무 걱정근심에 휩싸이지 말고 씨익 웃어보자. 대책 없는 낙관주의자는 이럴 때 진가를 발휘해야 한다. 뚜벅뚜벅 신명나게 요원 생활을 시작하자.^^ - [憂弱]
Posted by 익구
:
초등학교 3학년(1992년) 가을 어느 날 읽었던 정몽주/성삼문 위인전은 내 인생을 크게 바꿨다. 이 얄팍한 책을 읽고 또 읽으며 충의와 절개의 화신인 두 사람의 삶에 흠뻑 빠져버린 나는 이렇게 살아야겠다고 몇 번이고 다짐했다. 이 문고판 책과의 인연을 어찌나 소중히 여겼는지 이 책의 초판 발행일인 9월 10일을 '독서의 날'로 지정하여 기리고 있을 정도다. 내가 책을 본격적으로 좋아하게 된 계기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고민하게 된 계기도 바로 이 책에서 비롯됐다. 뜬금없이 위인전 타령을 하는 까닭은 얼마 전 다녀온 동구릉(東九陵) 답사에서 어릴 적의 비분강개가 아스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동구릉 중에 태조의 건원릉(健元陵)과 문종의 현릉(顯陵)에서 감회가 남달랐다. 건원릉의 능상을 바라보며 이성계에게서 고려말 모순을 극복한 혁명가를 그려보려 했다. 그러나 오히려 시호조차 못 받고 원통하게 간 우왕과 창왕, 결국 고려의 찬란한 최후를 장식해야했던 공양왕, 그리고 충절의 대명사 정몽주의 넋을 기리고 말았다. 현릉은 더했다. 사육신이 사형 당하면서도 꿈에서 그린 현릉을 보며 나도 모르게 목이 멨다. 속으로 성삼문의 시조인 "이 몸이 죽어 가서 무엇이 될꼬 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 하리라"를 읊으며 안타까워할 정도였으니 어린 시절 읽었던 작은 책이 아직도 내 뇌리를 지배하고 있는지 모른다.^^; 사육신 이개는 죽기 전에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우정(禹鼎)같이 무거울 때는 삶도 또한 큰 일이나
홍모(鴻毛)처럼 가벼운 곳에서는 죽음이 도리어 빛나더라
날 밝도록 잠 못 자고 문 밖에 나서니
현릉의 송백이 꿈속에 푸르구나.


禹鼎重時生亦大(우정중시생역대)
鴻毛輕處死有榮(홍모경처사유영)
明發不寐出門去(명발불매출문거)
顯陵松柏夢中靑(현릉송백몽중청)


우정(禹鼎)은 우임금이 만든 아홉 개의 솥(九鼎)으로 나라와 왕권을 상징하며 제대로 된 정사가 펼쳐짐을 의미한다. 강상(綱常)이 무너진 참혹한 시대에는 목숨도 초개같이 버려야 한다는 그 기백이 헌걸차다. 충의지사를 추억하며 논어에 "날이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歲寒然後 知松栢之後凋也)"는 구절을 떠올렸다. 어려울 때 그 사람의 됨됨이가 드러난다는 뜻이다. 세상에 버릴 사람은 하나도 없지만 시세의 흐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늦게까지 제 자리를 지키는 한결같은 사람에게 더 애착이 가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는 말을 많이 쓰지만 그 이전에 지성이면 감인(感人)이다. 지극한 정성이 사람의 마음을 바꾼다.


이런 참 선비가 있는가 하면 정반대의 소인배도 있다. 아니 오히려 훨씬 더 많을 것이다. 을사오적 중에 한 놈인 이근택은 을사늑약이 체결되던 날 퇴궐하여 집안 사람들에게 이제 죽음을 면할 수 있게 되었다며 득의양양하게 말한다. 이 말을 듣고 있던 몸종이 "나라가 위태로운데 죽지 아니하고 다행히 목숨을 건졌다 말하는 너는 참으로 개돼지로다. 내 비록 천인이라 하더라도 어찌 개돼지의 종이 되겠는가"라고 일갈하며 집을 뛰쳐나갔다는 일화가 황현의 매천야록(梅泉野錄)에 전해진다. 남 위에 있으려면 그만한 책임감으로 무장해야 하는데 이 도둑놈은 부끄러움조차 없었다.


현릉을 나서며 단종이 스스로 정사를 펼 수 있을 때까지 문종이 살아 있었더라면, 수양대군의 역사가 아닌 단종의 역사가 펼쳐졌다면 하는 부질없는 상상을 해봤다. 하지만 현실의 승자는 계유정난과 사육신 사건에 연루된 부녀들을 나눠 가지며 희희낙락했던 수양과 공신들이었다. 끝내 단종이 수양대군에 의해 살해되고 시신이 강물에 던져졌다. 역적의 시신에 손을 대면 삼족을 멸한다는 위협 때문에 아무도 시신에 손을 대지 못했다. 그런데 영월 호장이라는 미관말직의 엄홍도가 관을 마련하여 선산에 장사 지냈다. 주위에서 만류했으나 이를 뿌리치며 시신을 수습한 그는 "의롭고 착한 일을 하다가 화를 당하면 나는 달게 받겠다(爲善被禍 吾所甘心)"고 의연히 말한다. 너무 아름다워 몇 번을 되뇌었다.


김남주의 시구처럼 불의와의 싸움에서 정의가 졌다고 해서 정의가 정의 아닌 것은 아니다. 정조대왕은 단종의 능인 장릉(莊陵)에 배식단(配食壇)을 만들어 단종조의 충신들을 제향하는 것으로 잘못된 역사 바로잡기를 마무리했다(노산군으로 강등되었던 단종은 1698년(숙종 24)에 복위되고 단종이라는 묘호도 이 때에 비로소 추증된다). 정조 15년인 이 때는 계유정난이 발생한 지 338년, 사육신 등의 상왕복위기도사건이 일어난 지 335년, 단종이 비명횡사한지 334년만이다. 그릇된 역사를 다잡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지 똑똑히 보여주는 사례다. 역사는 결국 올곧게 산 자의 편인지 모르나 이렇게 맨날 뒷북만 쳐서는 안 될 것이다. 신숙주 등 남은 자들의 업적이 클수록 국가권력의 정통성에 목숨을 바쳤던 갸륵한 충절이 더 아쉽다.


아무리 착한 일을 해도 사람들은 그리 오래 기억하지 않을지 모른다. 좋은 일을 해도 다른 속셈이 있는 것은 아니냐며 오해를 살지도 모른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내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사느냐이다. "착한 것을 보거든 목마를 때 물 본 듯 주저하지 말라(見善如渴)"는 말처럼 살도록 노력하자. 현실 세계의 승리도 중요하지만 장구한 역사는 지킬 만한 가치를 지킨 사람을 마냥 외면하지 않음을 믿자. 어느 정도 물들고 타협해서 살다가도 마지막에 양보 못할 부분에서는 "No"라고 외치며 돌아설 수 있는 내가 되자. 힘들 때는 맹자의 "스스로 반성해서 정직하다면 천만인이 가로막더라도 나는 갈 것이다(自反而縮 雖千萬人 吾往矣)"라는 구절을 주문처럼 외우면서 말이다.


나는 손해보는 장사는 정말 싫어하는 경영학도로서 비용-편익 분석을 꼼꼼히 하며 살 것이다. 그러나 가끔 남 좋은 일 하다가 손해보는 것도 유쾌한 경험으로 간직할 수 있는 넉넉함을 가졌으면 좋겠다. 내가 어쩌다가 좋은 일 하나 해서 그 덕분에 남들이 알콩달콩 재미나게 지내는 모습을 본다면 괜히 침 흘리지 말기를, 하나둘 나란 녀석을 모른 체 해도 잊혀지는 것에 너무 몸서리치지 말기를 다짐한다. 부귀할 때는 따르는 자가 많고, 빈천할 때는 벗조차 떠나가는 것이 세상 인심일지라도 爲善被禍 吾所甘心 여덟 자를 마음 한 구석에 새기고 있다면 외롭지 않으리라. - [憂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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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7일 숭례문(崇禮門) 광장이 개장했다. 숭례문은 일제 강점기 때 훼손돼 지금까지 98년 동안 찻길로 막혀 멀리서만 바라 봐야했다. 명색이 국보 1호이면서도 정작 가까이 가서 볼 수 없었던 문화유산을 조금 더 가까이서 완상할 수 있게 되었다. 숭례문은 1398년(태조 7년) 만들어진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이며, 국내에서 현존하는 성문 중에서 규모도 으뜸이다. 임진왜란 때 서울시내 궁궐을 비롯한 어지간한 목조 건축물이 화마에 휩싸였지만 천만다행으로 살아남은 참 고마운 존재다.


앞으로도 숭례문 광장 조성과 같은 문화유산 복원과 개방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오는 6월 1일부터 1일 3회 개방하는 경복궁 경회루 특별관람 신설도 환영할 만하다. 그러나 보물 1호인 흥인지문(興仁之門)은 여전히 찻길로 둘러싸여 답답하다. 머지 않은 시기에 흥인지문 광장도 만들어 봄직하다. 또한 철근 콘크리트로 엉망으로 복원한 광화문(光化門)도 원형대로 복원할 계획이라는데 제 위치를 찾아 조선 정궁의 문으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기를 바란다. 광화문을 통해 정면으로 경복궁에 입장하는 그 날을 기분 좋게 상상해본다.


많은 외침과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우리의 문화유산은 어느 하나 성한 것이 없다. 목조 건축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적극적인 문화유산 복원(혹은 중건) 작업을 할 필요가 있다. 잘 지켜내지 못한 만큼 다시 세우려는 노력만은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이 마저 소홀히 한다면 볼 것 없는 나라라는 오명을 벗지 못할 것이다. 설령 옛날의 그 솜씨만큼은 못하더라도 복원한 것이 훗날에는 또 하나의 문화유산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사안은 다르지만 충북 단양 구인사 조사전이 "이 시대의 국보급 문화재를 짓겠다"는 사명감으로 웅혼하게 지어진 것도 좋은 사례다.


이 거대한 도시에서 보여줄 것이라고는 고층 빌딩뿐이라면 얼마나 민망한가. 이제 문화의 향기가 짙게 배어나는 아름다운 도시로 가꾸어 나가자. 육백여년의 애환을 간직한 육중한 몸매로 서울을 굽어살핀 숭례문 앞에서 우리 역사의 부침을 회상하며 영감을 얻어보면 좋겠다. 이제 곧 공익근무로 일하게 될 서울 중구에 또 하나의 명소가 생겨서 흥겹다. 얼른 숭례문 단청을 보러 가야겠다. - [憂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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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로 빚어내는 인연

문화 2005. 5. 22. 08:46 |
흔히들 대학에서의 인간관계는 참 쉽지 않다고 푸념을 늘어놓는다. 대학 새내기에서부터 졸업반에 이르기까지 사람 사이에 대한 어려움을 털어놓기 일쑤다. 서로간에 솔직하지 못하다며, 너무 신경을 써야 한다며, 이해타산을 따져야 한다는 등으로 투덜거린다. 그러나 대학에서의 인간관계는 중등학교 이전의 인간관계와 당연히 달라야 한다. 다양한 사람과 갖가지 생각이 부딪치는 데 쉬울 리가 없다. 훨씬 힘들어야 자연스럽다. 거저먹는 인간관계는 없다.


이미 소원해져버린 관계를 애써 외면하고 바빠서 잘 못 만나고 있다고 위안한다. 변변히 교류 나누지도 못하면서 언제 시간이 되면 괜찮은 관계가 될 수 있다고 희망한다. 그러나 세월이 사람을 기다리지 않듯이, 사람도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 굳이 기다리는 경우는 이미 절친한 관계가 되어 인연의 끈이 매우 질긴 이후의 일이다. 끈을 놓는 것이 더 가슴 아릴 때야 그리운 마음이 싹튼다. 그렇지도 않는데 멀어졌다며 불평하고, 나중에 다시 끈끈해질 거라며 손놓고 있어봤자 백년하청이다.


나는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인연을 꽤 믿는 편이다. 하고많은 사람 중에 이 공간, 이 시간을 공유하는 주변 사람들은 꽤 각별한 연분이라고 본다. 사실 사람과의 만남은 랜덤하고 우연하게 배정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 우연성을 필연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노력은 참 숭고하다. 인연이란 "아무리 애가 타도 앞당겨 끄집어 올 수 없고, 아무리 서둘러서 다른 데로 가려 해도 달아날 수 없(최명희의 [혼불] 中)"는 그 무엇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불가항력이라며 될 대로 되라고 나 몰라라 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인위적으로 맺어보겠다고 억지로 떼쓰지 말라는 뜻이지 내 참마음을 내어 보이는 용기까지 버리라는 뜻은 아니다. 또한 나는 이 사람에게서 멀어졌는데, 그 사람은 여전히 나를 좋아 해주기 바라지 않는 신실함이다. 도덕경 48장의 "아무 것도 (억지로) 하지 않으나 이루지 않는 것이 없다(無爲而無不爲)"란 구절을 곱씹어본다. 소중한 인연은 억지 춘향이가 아니다.


앨빈 토플러는 [미래의 충격]에서 영속성보다는 일시성이 두드러진 미래사회의 인간관계는 한 사람과 총체적인 관련을 맺기보다는 그 사람의 한 부분에만 관련을 맺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제는 만나지도 않고 이해도 달리하는 친구들 대신에, 새로운 친구들을 탐색하는 사회적 발견의 냉혹한 과정"을 통해 효용가치가 없는 옛친구들은 빨리 버리거나 잊고 살림살이에 보탬이 될만한 새 친구를 찾아야한다는 그의 주장이 날카롭다(앨빈 토플러 著 장을병 譯. [미래의 충격](1986). 범우사. 88~108쪽 참조).


법정 스님의 말씀을 기대하며 찾아왔다가 외면당한 사람의 볼멘 소리를 들은 스님은 허허 웃으며 "때로는 인정이 없어야 하는 게 수행자다. 만나자는 사람 다 만나주면 내 공부는 언제 하라는 말이냐"고 대꾸했다고 한다(이형삼. "法頂이 있어 맑고 향기롭게 산다." 신동아. 1999년 12월호 기사 참조). 스님은 "인정이 많으면 도심(道心)이 성글다는 옛 선사들의 말을 빌릴 것도 없이, 집착은 우리를 부자유하게 만든다(법정. [무소유](3판, 2001). 범우사. 75쪽)"고 말한다.


토플러의 탁견이나 법정 스님의 일화에서 내 자신을 가꾸기 위해 애써야함을 깨달았다. 스치듯이 지나가는 숱한 관계에서 내가 좀 더 오래 실존할 수 있으려면 내 밑천이 두둑해야한다. 조금 사귀고 나니 별 볼일 없이 깡통 소리만 낸다면 나라도 마음이 떠날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의 사교적 몸부림이야 필요하겠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나란 녀석과 진지한 유쾌함을 나눌 수 있게 만드는 역량을 키워야 한다. 관계를 맺고 교류를 나누는 자체에만 정신이 팔려 스스로 공부를 등한시하면 사랑과 우정의 샘물도 이내 마르고 만다.


명심보감 성심편에 "有麝自然香 何必當風立(사향을 지녔으면 저절로 향기로운데 어찌 바람을 맞아 서 있을 필요가 있겠는가?)"란 구절이 있다. 내가 뿜어내는 향기가 은은하다면 자연스레 나란 녀석과 관계 맺을 유인이 생길 것이다. 내가 풍기는 자유와 사색의 내음, 배움과 인덕의 내음으로 벗을 구해보자. 나는 불콰하게 술에 익은 얼굴로 터놓고 가까워지거나 말쑥한 첫인상의 아찔함으로 유혹하는 재주는 없다. 조금 시간이 지나야 드러나는... 세월에 바래지 않는 나만의 멋을 아껴주는 고마운 사람을 찾을 따름이다.


내 인연들이 久而敬之(논어 제5편 공야장 中)할 수 있기를 꿈꾼다. "오래되어도 여전히 공경한다"라고 해석하면 친해지더라도 존경심을 잃지 않고 범속에 빠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시간이 흘렀다고 무심해지지도 않고, 세월이 지났다고 차갑게 식지 않는 그런 존재 말이다. "오래 사귈수록 공경하게 된다"라고 해석하면 오래 사귀어도 그 사람의 약점이 드러나기보다는 강점이 더욱 커진다는 뜻이다. 아니 어쩌면 그 약점과 한계마저 품을 수 있을 만큼 그릇이 커진다는 뜻인지도 모르겠다. 세월로 빚어내는 久而敬之, 가장 아름다운 인연이 아닐까. - [憂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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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총학생회 탄핵발의안이 전체학생대표자회의(이하 전학대회)에서 찬성 13표, 반대 39표, 기권 2표로 부결되었다. 전학대회 재적인원 66명의 3분의 2 이상이 찬성해야 총회 또는 총투표 안건으로 상정하게 되는데 그 전 단계에서 자초된 것이다. 이미 충분히 예견된 결과였고, 총투표 찬성의견을 밝힌 대의원들 상당수가 5월 2일 시위가 정당하다고 생각하지만 탄핵 총투표를 통한 재신임을 원한 것이었다고 한다.


일련의 사건들을 놓고 학내 여론을 극심하게 대립한 것에 비하면 학생 대표자들의 회의에서는 상당히 일방적인 결론이 난 셈이다. 전학대회 참석 대의원 54명 중 십 수명이 5월 2일 시위 참여 대의원이라고 하니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는 조소가 나올 법하다. 시위 참여 대의원들만 반대해도 어차피 통과시키지 못할 참으로 싱거운 싸움이었다. 그러나 탄핵발의안은 그 자체로 의미심장했고, 달걀로 바위치기를 하며 마음고생이 심했을 평화고대 여러분들께도 깊은 고마움을 표한다.


이제 한바탕 소란은 정리되었다. 마땅히 승복하고 갈등을 마무리해야함에도 불구하고 그게 쉽지는 않을 것 같다. 이번 일이 학생 대표자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워줬기를 바랄 따름이다. 이번 일은 그간 학생회 살림을 주도적으로 꾸려왔던 학생운동 세력 전반에 대한 엄중한 경고이기 때문이다. 여전히 나는 아무 잘못도 없는데 몰상식한 자들이 자신들을 음해했다고 생각한다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여하간 이제 우리 고대에 평화가 좀 찾아오길 바란다. 그간 불필요하게 서로 너무 얼굴을 붉혔다.


이번 사건의 핵심적인 논란 중의 하나는 학생 대표자의 정파성 문제다. 일반 학우들은 학생 대표자 개개인의 정치적 의사 표현 자체를 나무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학생 대표자들의 언동 하나하나는 비단 일개인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소속된 학생 전체의 의사를 대변하는 것으로 오해되기 십상이다. 적어도 학생회는 정치적 결사체가 아니다. 원하는 정치적 의사표시는 별도의 정치적 조직을 통해 하면 충분하다. 필요할 때는 학우들의 대표자라는 위세를 빌리고, 여의치 않을 때는 개인의 자유라며 빠지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이번 이건희 학위수여식 사건은 정의와 불의의 문제가 아니었다. 일부 학생들의 시위에 부정적인 여론을 재벌권력의 하수인쯤으로 취급하려는 태도가 더욱 반발을 재생산하고 있지 않은가 우려스럽다. 이런 반대 여론을 삼성의 부정적 측면은 죄다 외면하는 놈들로 구획 지으려는 시도도 이제 그만했으면 한다. 자신만이 정의라고 착각하기는 쉬운 일이나,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못해서 두부 썰 듯이 쉽게 두 동강나지는 않는다. 자신들이 하는 일을 옳다고 믿는 것은 좋으나 폐쇄적 자세로 일관한다면 허구한 날 민주주의를 외쳐도 비민주적인 조직이라는 비판이 따가울 것이다.


학생회 일꾼들의 땀과 눈물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종종 벌어지는 이런 행동은 그간의 공적을 야금야금 갈아먹는다. 여러분들이 직접 뽑은 사람에 대한 부당한 비난을 거두라고 다그치기 전에, 믿고 뽑아준 사람들의 상심을 헤아리는 여유를 보여주기 바란다. "고대 정신"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우리 모두 것이 되어야 한다. 자유, 정의, 진리를 독점하려는 욕심을 버리자. - [憂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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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KT 신춘문예에 수필 부문을 응모해 동상을 수상했다. 약 270편의 작품이 응모됐고, 대상 1명, 금/은/동상 각 4명씩 13명에게 수상했으니 대략 20대 1의 경쟁률인 셈이다. 내 졸작이 뽑힌 것은 무안하고 민망한 일이다.^^; 이번 행사를 주관하신 KT 관계자 분들께도 깊은 감사의 말씀드린다.

대상을 받으신 분은 시집도 내신 적이 있는 준 시인이셨고, 수상자 중에는 문학적으로 조예가 깊은 분도 적잖았다. 그런 쟁쟁한 어른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어린 녀석이 도전한 게 기특해서 배려해주신 것이 아닐까 싶다. 특히 주제가 우리 문화유산에 대한 짙은 애정을 드러낸 것이라 표현의 구질구질함도 어여삐 넘어간 것이 아닐까 싶다.

응모작 [황룡사터에 서다]는 지난 설 연휴 때 갔던 경주기행의 감회를 읊은 글로써 익구닷컴에 개재했던 글을 수정해서 올린 것이다. 중학교 논술대회나 백일장 대회에서 상을 받은 이후로 글짓기로는 무척 오랜만에 상을 받아서 감개무량하다. 글쓰기가 사치스러워진 시대에 이번 수상을 계기로 글 읽고 쓰기를 더욱 즐겁게 해봐야겠다. 모든 상은 앞으로 잘하라는 의미가 강하니까.^^

부끄럽지만 글 전문을 싣는다. 인터넷 상에서 보기 좋게 각 문단마다 한 줄씩 띄었다.



 

<황룡사터에 서다>

1.

다시 찾은 서라벌은 싱그러웠다. 경주 시내에 도착해 도로변 여러 왕릉과 탑 등의 유적지들을 스쳐 지나면서 천년 고도로 들어왔음을 실감했다. 긴 설 연휴를 틈타 초등학교 6학년 수학여행 이후 10년만의 경주 방문이었다. 문화유적을 끔찍이도 좋아하는 나이지만 초등학생 때까지 그런 것을 볼 줄 아는 혜안은 없었기에 거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단체 기념사진에서 지루함과 피곤함이 쌓인 어린이의 모습이 그 증거다.

비록 반강제적 성격이기는 하지만 수학여행을 통해 어린이들이 우리 문화유산을 처음 접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체계적인 역사 교육까지는 필요 없지만 적어도 우리 문화유산이 보잘 것 없고 하찮은데다 따분하다는 생각을 심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중등학교 이후에 우리 문화유산을 찾아보는 관심이 현저히 떨어지는 것도 첫 단추를 잘못 꿴 잘못이 크지 않을까 싶다. 유치한 구호이지만 진정한 세계화는 한국적인 것의 가치를 널리 알리고 사랑하는 데에 있을 것이다.

문화유산은 잘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보존하는 것도 능력이다. 진정한 문화강국은 잘 만드는 것보다 잘 지켜내는 것에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면에서 우리나라는 형편없는 축에 속한다. 훼손된 문화유산의 목록은 끝도 없지만 그 중에서 많은 이들을 애타게 하는 것 중에 대표적인 것이 바로 황룡사다. 황룡사는 4대왕 93년이라는 긴 세월에 걸쳐 완공된 신라 최대 사찰이다. 동양 최대의 목탑인 9층목탑과 거대한 본존불 금동장륙상 및 성덕대왕신종보다 4배나 큰 황룡사종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1238년(고려 고종 25년) 몽골군의 침입으로 불타버리고, 임진왜란 때도 왜놈들이 불타버린 황룡사의 유물들을 파헤쳐 갔다고 한다.

흔히들 우리의 문화유산이 볼품 없고 보잘것없다고 말할 때 나는 주로 그렇지 않다고 항변하는 편이다. 하지만 국권이 미약하여 우리의 문화유산의 수난을 막지 못했던 것은 두고두고 아쉬운 일이다. 이구열 선생의 [한국 문화재 수난사](돌베개, 1996)와 같은 문화재 훼손에 대한 기록들이 많이 알려지기를 바란다. 누구나 어려웠던 기억을 되돌리는 것은 힘든 일이다. 하지만 구차하고 비루했던 우리 역사와 똑똑히 마주함으로써 현재를 다잡고 미래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2.

지금의 황룡사터는 금동장륙상을 올려놓았을 커다란 석조대좌 흔적과 9층목탑을 쌓았던 64개의 초석 정도가 남아 있을 뿐이다. 잿더미가 되고 약탈도 당했지만 발굴 당시에 많은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경주국립박물관에서 볼 수 있었던 높이 182cm, 최대 폭 105cm인 대형 망새(궁궐, 절 전각의 용마루 양쪽 머리에 얹는 장식 기와)는 황룡사의 규모를 짐작케 해준다. 망새가 클수록 건물도 크게 마련이니 거대한 망새의 존재는 당시의 건물이 얼마나 웅장했는지 즐겁게 상상하게 만든다.

유명한 9층목탑 터에 서면 전율이 돋는다. 600년대에 세워진 높이 80m(225척)의 웅장한 목탑의 위용은 가늠하기조차 힘들다. 현존하는 목탑 중에 세계에서 가장 높다는 1056년 요나라 때 만들어진 응현5층탑을 능가하는 높이다. 많은 이들이 9층목탑 복원을 소망하는 것도 문헌상의 기록으로만 짐작하는 화려했던 목탑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리라. 너른 목탑 터에서 세계 최고의 목탑을 세운 것에 대한 자부심보다는 지켜내지 못한 것에 대한 회한이 더 짙게 드리운다. 거대한 심초석을 어루만지며 어느 소설에 등장하는 세계적 석학 피터 버갓씨의 냉소를 떠올렸다. 그는 한국은 과거의 나라가 아닌 미래의 나라인 듯하다며 이 나라 사람들이 자신들의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빈약한 자연적 문화적 자원을 생각하면, 이 정도의 사회라도 만든 것이 대견하다(고종석, [엘리아의 제야](2003), 문학과 지성사, 89~90쪽)고 말한다. 그의 빈정거림이 따갑다.

우리가 풍요로운 전통문화를 자랑한다고는 하지만 이웃나라인 중국과 일본의 문화유산을 보면 주눅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만큼 지켜내는 능력이 부족했던 우리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오늘날 우리가 세계에 알려지게 된다면 풍성한 문화유산보다는 첨단 기술력의 덕이 더 클 것이다.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에 세워질 높이 700m가 넘는 버즈 두바이 빌딩을 수주한 우리 기업의 쾌거나 초고속 인터넷망과 우수한 정보통신기술을 통한 IT강국으로서의 면모가 우리를 미래의 나라로 이끌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미래는 과거에 대한 존경과 애정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3.

문득 작년 중국 베이징 여행 때 들렀던 원명원이 생각났다. 본디 이화원을 능가하는 호화로운 이궁(離宮)이었으나 수 차례 외국군의 파괴로 폐허만 남게 되었다. 서양루 유적지를 둘러보니 여기저기 부서진 석재들이 그 자체로 매력이 있었다. 하지만 황룡사터 경우에는 목조 건축이다 보니 주춧돌만 덩그러니 남아 그런 감흥이 일지가 않는다. 남은 잔해가 거의 없으니 아무리 머리를 쥐어 짜내도 제대로 느끼기가 힘든 것은 목조 건축의 치명적 단점인 셈이다. 폐허마저 흥미로운 볼거리였던 원명원은 2008년 올림픽을 대비한 대대적인 복원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많은 외침과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우리의 문화유산은 어느 하나 성한 것이 없다. 목조 건축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적극적인 문화유산 복원(혹은 중건) 작업을 할 필요가 있다. 잘 지켜내지 못한 만큼 다시 세우려는 노력만은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이 마저 소홀히 한다면 볼 것 없는 나라라는 오명을 벗지 못할 것이다. 가능한 많은 문화유산을 복원하는 것은 관광수지 적자에 대처하는 장기적인 투자다. 설령 옛날의 그 솜씨만큼은 못하더라도 복원한 것이 훗날에는 또 하나의 문화유산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미래로 치닫는 세상이지만 한편으로는 과거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문화유산은 국가 경쟁력의 중요한 요소로 부상하고 있음을 인식하고 과감한 투자가 절실하다.

용서하되 잊지는 말자고 했다. 그러나 우리의 모습을 보면 너무 빨리 잊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싶다. 전반적인 문화유산에 대한 인식도 낮고, 우리 역사에 대한 관심도 날로 줄어들고 있다. 이미 수능시험에서 국사가 사회탐구 선택과목의 하나일 뿐이며, 행정고시, 외무고시 1차 시험에서 국사시험이 사라진다. 우리가 스스로 제 나라 역사를 팽개치고 있는 셈이다. 그 사이에 이 작은 나라를 놓고 여기저기 군침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일본은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며 망언을 내뱉고, 중국은 고구려사, 발해사를 제 것으로 만들려는 야욕을 실현해나가고 있다. 비극적 현실에 좌절하여 자기혐오에 빠지기보다는 스스로 존중하고 아끼는 마음으로 이 난국에 대처할 수 있기를 바란다. 희망은 가난한 자의 빵이니까.

황량한 황룡사터에서 어깨도 쭈욱 펴고 입술도 질끈 깨물어보자. 잃어버린 역사에 대한 아쉬움보다는 새로 만들어갈 희망을 노래하기 좋은 곳이다. 9층목탑터에서는 흐뭇한 표정도 지어볼 일이다. 절터에서 맞는 바람이 참 시원하다.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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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학생회 일꾼에서 물러나 유유자적 재미나게 지내고 있는 나이지만 학교를 둘러싼 이런저런 일들에 내 의견을 묻는 경우가 끊이지 않는다. 이번에도 아예 자체 의견 정리를 해봤다. 이번 탄핵 사태가 어떻게 전개될지 잘 모르는 분들을 위해서 향후 탄핵 절차를 소개할 필요도 있고 말이다. 사상 초유의 일이고, 이런 파국을 맞이하게 된 것은 씁쓸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탄핵 총투표까지 가는 수밖에 없다고 본다.

<고려대 총학생회 탄핵 총투표 실시해야>

지난 5월 2일 이건희 명예 철학박사 학위수여식 사건 이후 내홍에 시달리던 고려대가 결국 사상 초유의 탄핵발의 사태까지 벌어졌다. 16일 평화고대측은 재적인원의 10분의 1이 넘는 2300여명의 서명을 받아 총학생회 탄핵안을 발의했다. 이제 단과대 학생회장, 과반 학생회장 등의 학생 대표자들로 구성된 전체학생대표자회의(이하 전학대회)를 소집해 재적의원 2/3 이상의 찬성으로 총회 또는 총투표 안건으로 상정하게 된다(총학생회칙 36조 참조).


전학대회 과반수 출석으로 개회하는 것도 녹록지 않은데 2/3 이상의 출석은 더욱 힘들다. 더군다나 2/3 이상의 찬성으로 의결하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다. 이렇게 해서 통과시켜봐야 겨우 총투표(총회는 사실상 성립이 불가능하다고 본다) 절차를 밟는데 전체투표율 50%가 안 될 때에는 무효로 판정하기 때문에 이것도 까마득하다. 사실 탄핵안 발의가 된 것만으로도 너무나 유의미할 뿐 실제 탄핵까지는 넘어야할 산이 너무 많다. 대통령 탄핵보다도 힘든 것이 총학생회장 탄핵이다.^^;


개인적으로 지난 사건이 총학생회 탄핵까지 이어질 정도의 중죄라고 보지는 않는다. 총학생회로서는 억울한 점이 적잖을 것이다. 그러나 비단 이번 일 하나 때문이기보다 학우들이 가지고 있는 불만이 이를 계기로 터져 나온 것임은 부인하기 힘들다. 합당한 탄핵 사유라고 보기 힘들지만 학우들의 누적된 불신의 표출이라는 점에서 총학생회의 잘못을 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전학대회 대의원들은 지금의 이 비극적 상황에 책임을 통감하고 탄핵 총투표를 받아들이는 용단을 내려야 한다.


전학대회 대의원들이 설령 탄핵에 공감하지 못해도 이제는 학우 전체의 의사를 물을 시점이다. 이는 대의 민주주의를 거스르겠다는 뜻이 아니라 전학대회에서 무마하기에는 파장이 너무 커졌다는 냉철한 분석이다. 만약 전학대회에서 탄핵안을 압도적 부결로 마무리짓는다면 탄핵안에 찬성한 학우들은 다시 한번 열패감에 사로잡힐 공산이 크다. 전례 없는 극심한 학내 갈등을 치유하기 위해서 이번 탄핵 총투표를 재신임의 계기로 삼아야한다.


탄핵 사유는 부실하다고 비판할 수 있을지 모르나 탄핵에 대한 학우들의 의견을 묻는 것까지 봉쇄하기에는 상황이 너무 커져버렸다. 개교 100주년을 맞이한 뜻 깊은 해에 학우들이 양분되어 반목하는 것은 너무 서글픈 일이다. 이번 탄핵 총투표는 비단 총학생회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간 학생회 살림을 주도적으로 꾸려왔던 학생운동 세력 전반에 대한 신뢰의 문제다. 사태가 이 지경이 된 것은 가슴 아프지만 이 고름을 쉬쉬하기보다는 이제 터뜨릴 때다. 끝으로 만약 총투표가 실시될 경우 학우 여러분들께서 투표에 참여하셔서 찬반 의사를 표하기를 바라마지않는다. - [憂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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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드라마 [5공화국]을 보는 내내 속이 메스꺼웠다. 12.12 사태 당시 탐욕스런 고깃덩어리들이 헌정을 유린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당대를 살지 않은 내게도 무척이나 고역이었다. 대세가 전두환 일당들에게 기울어 갈 때도 마지막 순간까지 타협하지 않은 몇 안 되는 군인들을 보는 것도 서글펐다. 구차하게 제 안위를 챙기느라 갈팡질팡했던 대다수 인물들을 보며 한없이 씁쓸했다.


특히 직속상관인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체포하는 최세창 3공수여단장을 보며 권력의 비정함을 새삼 실감했다. 정 특전사령관을 마지막까지 보호하려한 특전사령관 비서실장 김오랑 소령이 절친한 친구인 3공수여단 예하 15대대장인 박종규 중령에게 살해당한 것도 기가 막혔다. 직속상관을 체포하고, 친구를 사살하는 역겨운 순간을 보다 보니 평소 욕지기를 거의 하지 않는 나도 이따금 몇 마디 내뱉고 말았다.


또한 반란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하면서 시청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던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도 인상적이었다. 여기저기 눈치보기와 배신이 벌어지고 있을 때 가장 적극적으로 진압군을 지휘했던 그야말로 진정한 군인의 사표였다. 쿠데타가 거의 성공할 때도 자신의 휘하 병력 100여명을 이끌고 진압 작전에 나섰다고 하니 그 용기가 존경스러울 따름이다.


89년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된 정병주 특전사령관과는 달리 장태완 장군은 비록 강제 예편에 가택연금을 당하기도 하고 아버지와 아들이 세상을 떠나는 아픔을 겪지만, 반역도당들이 역사의 심판을 받으며 뒤늦게나마 명예회복을 했다. 재향군인회장과 새천년민주당 국회의원을 역임한 것이 지난날의 비운을 보상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그가 2002년 대선 때 장 장군은 후보단일화협의회에 참여하면서 전국구 의원직을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 탈당하지 않고 당에 제명을 요구하는 추태를 부렸다. 그 참담한 반역의 순간에도 민주주의를 위한 지조를 지켰던 그가 국민과 함께 뽑은 대통령 후보를 흔드는 일에 동참한 것은 그의 빛나는 지난날을 배반하는 처사다. 물론 후단협 가입과 탈퇴를 반복하며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은 것 같지만 말이다.


지난 대통령 탄핵발의안에 서명한 의원 명단에서 그의 이름을 발견했을 때 다시금 침통했다. 탄핵소추안 가결 당시 행인지 불행인지 미국에 체류하는 바람에 표결에 불참했기 망정이지 표결에 참석했다면 노장군의 영예에 또 한번 먹칠을 하고 말았을 것이다.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쳤던 이가 어쩌다가 현실 정치에서 이런 꼴을 보이고 물러났는지 가슴이 아프다.


살아있는 사람을 존경하는 일은 이만큼 힘들고 어려운 일이다. 과거는 미화되기 싶지만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이의 잘잘못을 논하는 것은 대개 편이 갈리고 다툼이 있기 때문이다. 불완전한 인간이 살아가며 실수를 저지르게 마련이며 개인적 한계를 나타내기도 한다. 장태완 장군에 대한 애증이 교차하지만 반역의 회오리에서 중심을 지킨 몇 안 되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사모의 정을 표하는 것으로 내 예우를 다할까 한다.


나는 앞으로도 제2, 제3의 장태완을 만날지도 모른다. 이 경우 그 사람을 어떻게 평가해야할지 무척 곤혹스러울 것이다. 그럴 때면 유시민 선생의 다음과 같은 말을 되새기며 시름에 잠길 것 같다. - [憂弱]


어느 하나의 문제에 대한 다른 사람의 견해를 비판하시는 것은 얼마든지 좋습니다. 그러나 그 문제에 대한 그의 견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인간적인 배신감을 느끼지는 마십시오. 그 사람의 사상과 삶의 궤적 전체를 비난의 대상으로 삼는 일도 삼가주십시오. 세상은 완전히 희거나 검은 사람만 사는 곳이 아니며 타고난 악당과 성인군자가 싸우는 무대도 아닙니다. 세상은 불완전한 인식능력을 지닌 불완전한 인간들이 숱한 고뇌와 번민 속에 서로 다투면서, 그리고 저마다 실수와 잘못을 저지르고 그것을 바로잡아 가면서 살아가는 곳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 유시민. "마지막 당부... 다시한번 기회를..." 한국경제신문. 2000. 05. 29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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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호 고려대 교수는 [문자문화쇠망약사]라는 책에서 "이제 전자문화는 싫고 좋음이나 옳고 그름 또는 수용과 거부와는 무관하게 마치 바람처럼, 공기나 바다처럼 그렇게 우리 곁에서 우리를 지배할 것이다. 나 또한 쓰러져 가는 문학의 고목 아래서 서성이며 전자제국의 백성으로 살아갈 것이다"라며 문자문화의 몰락을 씁쓸하게 전망하고 있다. 문자제국의 유민들은 전자제국을 향해 비이성적이고 천박하다고 손가락질한다. 그러나 촉한(蜀漢)이 망할 때 성도 백성들이 향불을 피워 들고 위나라 군사들을 맞았듯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담담히 받아들일 따름이다.


오늘날의 인터넷 시대는 적어도 글쓰기 영역을 소수의 전유물이 아닌 네티즌 모두에게 개방했다는 점에서 환영할만한 일이다. 과거에는 선비들만이 거의 독점적으로 글을 쓰고 책을 내며 자기들끼리 즐겼지만 이제는 그런 제약은 많이 사라졌다. 물론 그렇다고 아무나 손쉽게 책을 뚝딱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지만 그에 미치지는 못해도 웹 상에서나마 자신의 잡글을 가지고 교류를 나눌 수 있는 시대인 것이다. 고종석 선생은 "글쓰기의 민주주의"는 시간을 우군으로 삼고 있다며 다음과 같이 예견했다.


특히 인터넷은 대중으로서의 지식인을 탄생시키며 즐김으로서의 글쓰기, 아마추어리즘으로서의 글쓰기를 격려해, 교육적ㆍ계급적ㆍ연령적 배경과 상관없이 누구나 사이버 공간과 현실 공간을 넘나들며 자유롭게 글을 쓰는 문자의 민주주의를 머지 않은 미래에 실현할 것이다.
- 고종석. "글쓰고 책 내는건 특권층의 향유물?." 한국일보. 2001. 02. 13.


하지만 이처럼 글쓰기의 민주화가 되었다고 해도 텍스트보다는 이미지에 무게중심이 가있다. 과거처럼 이미지가 텍스트를 보조하는 기능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이미지 자체가 새살림을 차린 "이미지 글쓰기"라는 새로운 영역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문자향(文字香)의 그윽함을 설교할 생각은 없지만 문자언어의 성찰 없이는 창조적이면서 생산적인 영상문화를 기대하기 힘들다. 읽고 쓰지 않고, 보여주고 보는 것에 급급하다보면 우리의 문화는 까칠해질 것이다. 편식은 결국 스스로를 야위게 만들뿐이다.


글을 읽고 쓴다는 것은 고도의 문화적인 활동이다. 문자를 통해 제 생각을 표현하고, 남의 의견을 분석해나가는 것은 인간 이성과 감성을 동원하는 사고 훈련이다. 향을 옆에 두면 옷에 향냄새가 배고, 가랑비에 옷이 젖는 것처럼 반복적인 행동으로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는 것을 불가에서는 훈습(薰習)이라고 말한다. 글을 읽고 쓰는 훈습은 당장에 눈에 띄는 효과를 가져다주는 것 같지 않아도 시나브로 우리 내면에 변화를 일으킨다. 글로 이루는 훈습은 롤즈가 말한 반성적 균형(reflective equilibrium)을 향해 나간다.


반성적 균형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것에 대해 외부의 비판을 검토해서 자신의 견해를 수정하고 보완하는 과정을 반복하는 것이다. 자기 입맛에 맞는 것이라며 마냥 취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에서 다시 한번 평가하고, 스스로 다시 궁리하여 보다 나은 접점을 찾으려는 노력으로 중용(中庸)과 비슷한 개념이다. 결국 조금 더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하기 위해 자신의 직관적 판단(개인적 선호)에서 시작하여 끊임없이 숙고하여 적절한 상태에 도달하려는 노력이다. 여기서 반성적 균형상태는 단순한 산술평균이 아니라 숙고한 반성의 내용이 한쪽으로 치우칠 수도 있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지금 이 시간에도 무수한 글 읽고 쓰는 활동이 있고, 그것은 각 개인의 잣대로 만든 체를 통해 걸러져 다양한 지혜와 성찰을 낳는다. 오늘날 글쓰기의 민주화를 통해 더욱 많은 지식이 창조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자문화가 쇠락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여기저기 나오고 있다. 다양한 영상문화의 발달로 책을 좀 덜 보고 사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책 대신 다른 매체를 통해 다양한 성찰과 폭넓은 경험을 이룰 수 있음을 애써 외면하는 것은 오만이다. 하지만 글쓰는 행위가 오히려 줄고 있다는 것은 우려할만한 일이다. 가령 젊은 세대에게 인기를 얻고 표현의 욕구를 발산하는 온라인 보금자리인 싸이월드 미니홈피의 경우 게시판 기능보다는 사진첩과 방명록의 활용도가 압도적이다.


물론 싸이월드 미니홈피를 통해 대인관계를 유지하는 편의성과 저비용은 인정할 만 하다. 하지만 몇 줄 안 되는 방명록과 사진에 대한 왈가왈부를 통해서만 의견을 나누다 보니 긴 호흡의 글이 낯설어지는 부정적인 효과를 낳고 있지는 않은가 의심스럽다(이건 어디까지나 미니홈피를 하는 이들의 대체적인 경향을 말한 것이다). 나도 잠시 싸이 미니홈피를 가꾼답시고 일촌도 많이 맺어 여기저기 인사 나누느라 발이 닳도록 뛰어 다녔고 사진도 1500장 넘게 올려봤다. 이를 통해 소통하고 대중성을 가지려고 꾀했다. 하지만 역시 나란 녀석을 표현하고, 남과 교류 맺는데는 내 정성과 고심이 스민 글을 쓰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에 지금은 폐가로 버려 둔 상태다.


나는 글을 쓰지 않을 권리를 옹호한다. 아무리 보배로운 일이라도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지 않을 권리를 존중해야 한다. 좋은 일일수록 자발적인 의사로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틈만 나면 지인들에게 잡글이나마 많이 읽고 쓰기를 권한다. 이는 글을 쓰지 않을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 아니라, 글을 쓰는 권리를 함께 누리고, 그 쏠쏠한 이문(利文)을 맛보라는 충심일 뿐이다. 굳이 세속적 꿍꿍이(?)를 밝히자면 타는 목마름 끝에 마시는 물 한 모금이 달콤하듯이 매서운 세파 속에 내어놓는 잡글 한 편이 참으로 달콤쌉싸름해서 우리네 강퍅한 마음을 한결 가볍게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 [憂弱]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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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 속의 일본어

잡록 2005. 5. 3. 07:47 |
얼마 전에야 쇼부란 단어가 승부(勝負, しょうぶ)의 일본어 발음이라는 것을 알았다. 뭐 일본어의 잔재이겠거니 짐작은 했지만 막상 알고 보니 이물감이 더 커진다. 승부, 흥정, 결판, (뒷)거래 등의 우리말이 즐비한데도 쇼부란 단어가 득세하고 있는 현실이 마뜩잖다. 본래 즐겨 쓰지 않았지만 앞으로는 더욱 멀리해야겠다.


나는 국어 순화에 애를 쓰거나 고운 말, 바른 말에 집착하는 편은 아니다. 하지만 국어 순화를 쓸데없는 짓거리라며 백안시할 일도 아니라고 본다. 우리가 모국어를 사랑하고 아끼지 않는다면 누가 거들떠보겠는가. 고종석 선생의 표현을 빌리자면 "한국어는 내가 자유롭게 다루어 쓸 수 있는 유일한 언어이고,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유일한 언어"이며 한국어와 나와의 인연을 가슴에 사무치게 고마워하고 있다.


일본식 한자말 중에서도 고수부지(高水敷地,しきち)를 둔치, 강턱으로, 노견(路肩,ろかた)을 갓길로, 십팔번(十八番,じゆうはちばん)을 장기, 애창곡으로, 촌지(寸志,すんし)를 돈봉투로, 할증료(割增料,ねりましりよう)를 웃돈, 추가금으로 고치는 등의 노력이 있어왔다. 그러나 각서(覺書,おぼえがきね), 견적(見積,みつもり), 고참(古參,こさん), 납기(納期,のうき), 납득(納得,なつとく), 매립(埋立,うめたて), 사물함(私物函,しぶつかん), 생애(生涯,しようかい), 수순(手順,じゅじゅん), 식상(食傷,しよくよう), 역할(役割,やくわり), 잔고(殘高,ざんだか), 전향적(轉向的,まえきてきむ), 지분(持分,もちふん), 체념(諦念,てりねん), 추월(追越,おいこし), 축제(祝祭,まつり) 같이 이미 너무나 익숙하게 쓰고 있는 단어들을 일일이 손질하는 것은 지나친 강박증이 아닐까 싶다. 기왕이면 우리식 한자말을 찾아 쓰는 것이 좋겠지만 일본식 한자말을 무조건적으로 배격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앞서 말한 일본식 한자말은 주로 와고(和語)를 의미한다. 와고는 한자어도 아니고, 서양 외래어도 아닌 일본 고유의 말이라고 생각되는 단어를 말한다. 한자를 이용해서 일본에서 만들어진 말인 칸고(漢語, 넓은 의미의 중국계 외래어)의 경우는 사실상 논외라고 해야한다. 강의, 건축, 경쟁, 경험, 고전, 공산, 과학, 관념, 교통, 교환, 국제, 권리, 금융, 논리, 대통령, 독점, 명제, 문명, 미술, 민족, 민주, 박사, 법정, 봉건, 분자, 사회, 선거, 예술, 원소, 원칙, 윤리, 의무, 의식, 의지, 의회, 이성, 자료, 자본, 저축, 전통, 정당, 정부, 정치, 종교, 집단, 철학, 추상, 판결, 현실과 같은 어휘들은 중국 고전에서 비슷한 뜻의 어휘를 찾기도 했지만 대부분 한자를 결합해 일본인들 스스로 새로 만들어낸 말들이다. 일본어로 번역된 서구 어휘들은 우리나라를 비롯해 중국으로 역수출된 것은 익히 아는 사실이다.


한자를 음독하기도 하지만, 훈독하기도 하는 일본어의 특수성에 따라 일본어에서는 훈독을 하지만 한국어는 음독을 하는 와고의 경우는 조금 고심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와고식 한자말(표현이 맞는지는 모르겠다)"들은 한자를 매개로 삼아 수입되어, 그 한자를 한국음으로 읽는 이상 한국인들에게 그 단어들은 이미 한국어가 되었다고 생각한다(고종석, [감염된 언어](1999), 개마고원, 91~104쪽 참조). 다만 고수부지, 노견, 십팔번 같이 비교적 다른 한국어 어휘를 쓰는 것이 좋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 많은 와고식 한자말을 다 제거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고참을 선임으로, 백묵을 분필로, 사물함을 개인 보관함으로, 세모(歲暮)를 세밑으로, 망년회를 송년회로, 흑판을 칠판으로 바꾸어 쓰는 등의 노력을 굳이 그만둘 까닭도 없다. 와고식 한자말을 배격하지 않으면서도 대응되는 한국식 한자말이나 토박이말을 찾아 쓰는 것은 우리의 언어생활을 풍요롭게 해줄 것이다.


보다 큰 문제는 순일본말(일본음으로 읽는 말)과 일본식 외래말을 경계하는 것이다. 짬뽕(ちゃんぽん)을 뒤섞음, 초마면으로, 우동(うどん)을 가락국수로, 돈까스(とんかつ)를 돼지고기튀김이나 포크 커틀릿(pork-cutlet)으로 바꾸려는 것처럼 다소 억지스러운 것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 쓰지 않아도 될 말을 굳어진 버릇 때문에 못 버리는 실정이다. 일본어와 한국어의 교류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일제 강점기를 통해 반강제적으로 이뤄진 것이 많다. 특히 순일본말과 일본식 외래말은 충분히 고쳐 쓸 명분과 실리가 존재한다. 미싱, 사라, 오뎅, 와사비를 재봉틀, 접시, 생선묵, 고추냉이로 바꿔 쓰는 것이 편협한 민족주의의 발로는 아닐 것이다. 기왕 말이 나온 김에 내 미감을 심하게 거스르는 순일본말과 일본식 외래말 스무 개를 들어보겠다. 유일한 기준은 내 주관적 느낌이지만 비교적 대화 속에서 많이 들었던 말이기도 하다.


가라(から) -> 가짜, 헛것
겐세이(けんせい) -> 견제, 방해, 훼방
기스(きず) -> 흠, 흠집, 생채기, 티
낑깡(きんかん) -> 금귤(金橘), 동귤(童橘)
나가리(ながれ) -> (약속 등이) 깨짐, 허사, 헛일, 무효
노가다(どかた) -> 노동자, 막노동꾼
다라이(たらい) -> 큰 대야, 함지박
뗑깡(てんかん) -> 생떼, 억지, 투정, 행패
똔똔(とんとん) -> 득실 없음, 본전
레자(レザ-, leather) -> 인조가죽
무데뽀(むてっぼう) -> 막무가내, 무턱대고, 무모한
세꼬시(せごし) -> 뼈째썰기
스끼다시(つきだし) -> 기본안주(반찬), 곁들이 안주(반찬), 딸림 반찬, 밑반찬
싸바싸바(さばさば) -> 편법으로, 아첨하여, 대충 넘어가다
앗싸리(あっさり) -> 차라리, 아예, 깨끗하게, 간단히
요지(ようじ) -> 이쑤시개
이빠이(いっぱい), 만땅(まんタン) -> 가득(히), 한껏
찌라시(ちらし) -> 선전지, 광고전단지, 광고 쪽지
쿠사리(くさり) -> 꾸중, 야단, 핀잔, 나무람, 지청구, 구박, 면박
후까시(ふかし) -> 허세, 힘, 티내다/ 부풀머리


여담이지만 선조의 영향인지 나는 고3 수험시절에 틈틈이 한자공부를 해서 한자능력검정 2급 자격증을 딸 정도로 한자를 좋아한다.^^; 한자어의 이해에 도움이 되는 적정 수준의 한자 학습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물론 아무리 한자의 매력에 빠진 나라고 해도 한글 전용의 대원칙은 건드리지 않으며 우리 말글살이가 한글만으로 충분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1997년 유네스코에서 문자로서는 유일하게 한글을 세계 기록 문화유산으로 지정할 정도로 세계적 평가를 받는 한글이 정작 종주국에서는 갖은 생채기를 앓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스스로를 아끼는 자만이 남의 존중을 받는 법이다. 일본어 찌꺼기들과는 쇼부(!)를 보지 말자. - [憂弱]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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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 앞서 "한나절 이상 투자한 글"이란 글을 먼저 읽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스크롤의 압박이 다소 있으니 어여삐 봐주세요.^^


1. 연호란 무엇인가?

우리가 자랑스레 배워왔던 세계적인 발명품 측우기는 1441년(세종 23년)에 발명되었다. 현재 남아있는 측우기 중 가장 오래된 것은 1770년(영조 46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건륭경인오월조(乾隆庚寅五月造)라는 문구가 새겨져있다. 건륭은 청나라 건륭제의 연호(年號)이다. 조선시대 때 중국의 연호를 사용했다는 것을 모르는 대부분의 국제 학계(한국사를 잘 모르는 중국인들도 포함해서)는 측우기가 중국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연호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상당수 중국 학계는 중국의 어떤 역사서에도 측우기 발명과 사용에 대한 기록이 없고, 현존하는 측우기 유물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 연호 하나 때문에 측우기가 중국에서 만들어져 조선에 전해졌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연호란 왕조시대에 어떤 임금의 통치시기를 나타낼 때 붙이는 칭호이다. 한 명의 임금이 하나의 연호를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때로는 여러 개를 사용하기도 한다. 일본은 왜곡된 역사 교과서에서 645년 다이카개신(大化改新) 이후 중국과 다른 연호를 계속해서 사용한 나라는 동아시아에서 일본밖에 없었다며 호들갑을 떤다. 그러면서 한국을 중국의 연호를 쓴 속국이라며 건방지게 군다. 동북공정으로 열을 올리는 중국도 은연중에 한국이 중국의 속국이었다는 속내를 드러내고 있다. 박성래 한국외대 교수는 "한국사의 年號사용에 대한 오해(한국경제신문. 2004. 09. 30.)"라는 글에서 "한국 역사가 일본과 달리 독립된 연호를 사용하지 않은 것을 그리 부정적으로만 볼 이유는 없다"면서 "일본은 중국과 교류가 원활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름의 연호를 만들 수밖에 없었지만 한국은 중국과 끊임없이 교류했기 때문에 독립된 연호를 쓰기 어려웠을 뿐"이라고 말한다.


흥미로운 해석에 관련 자료를 찾아보던 중 박 교수가 쓴 "고려초의 역과 연호"라는 논문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박 교수는 고려 초기의 연호 문제를 집어 보면서 고려가 933년 천수(天授)라는 독자연호를 버리고 중국 후당(後唐)의 연호를 쓴 것은 자주성의 상실과는 관계가 없는 "일대 외교적 승리 때문"이라고 말한다. 역법의 실질적 필요성에 덧붙여 중국의 외교적 승인도 중요한 요인이며, 중국으로부터 사역(賜曆)을 받고 그 연호를 사용한다는 것은 불명예가 아니라 삼국 혹은 후삼국이 다투어 원하던 것이라는 주장한다.


그는 "연호=독립"이라는 등식은 근대역사학의 해석으로 조선시대 내내 연호는 황제국인 중국에서나 쓰는 것으로 각인되면서 나타나게된 것이라고 말한다. 하기야 지독한 모화(慕華)국가였던 조선은 망한 명나라의 연호인 숭정(崇禎)을 청나라가 거의 망할 때까지 붙들고 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고려 초에는 그런 조선시대의 양상과는 달리 "연호를 얼마나 대수롭지 않게 대륙에서 송과 요가 쟁패하고 있을 때는 그때그때 적당히 양쪽 연호를 썼다"고 말한다.


박 교수는 "중국 연호를 쓰던 시절의 한국이 중국식민지가 아니었음은 '서기'를 쓰는 지금 의 한국이 서양 식민지가 아님과 같은 이치"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단기(檀紀)와 서기(西紀)에 대한 논쟁을 바라볼 때 서기가 완전히 가치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시간측정 수단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물론 단기를 고집하는 것이 자주독립을 실현하는 것도 아니다. 요즘 같은 세계화 시대에 역법을 함께 쓰는 것이야 편의 수준이 아닌 생촌 차원의 문제다. 그러나 적어도 오늘날의 서기보다는 과거에 쓰인 중국 연호가 훨씬 더 정치적 함의가 크고 깊었다.


중국 연호가 단순히 연도 계산의 의미를 벗어나 약소국이 강대국을 따른다는 외교적인 표현임을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조선시대만큼은 아니라도 고려시대나 삼국시대에 이러한 관념이 어느 정도는 존재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아도 중국 대륙은 극복하기 힘든 거대한 존재였고, 기왕이면 우호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 상책이었을 테니 말이다. 송나라,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 연호를 그 때마다 바꾸어 쓴 것은 단순히 편의주의, 기능주의의 소산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조선과 명나라와의 관계만큼은 아니었다. 한족(漢族)에 올인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소중화(小中華) 의식에 빠져 청나라를 배격하고 명나라 연호를 몰래 고집하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2. 한국사의 독자연호1 - 고구려, 백제, 신라

혹시나 조선시대만을 생각해서 우리 역사에 독자연호란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오해를 하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기록의 멸실로 인해 확신하기는 힘들지만 삼국시대에 적잖은 독자연호가 쓰여졌을 것으로 사료된다. 여러 자료를 종합해볼 때 고구려, 백제, 신라는 자신들이 천하의 중심이라고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이런 점에서 고려나 조선의 사대주의는 냉혹한 자기 인식이라고 볼 수 있을지 모른다). 신라의 연호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의 문헌을 통해서도 알 수 있지만, 고구려와 백제는 문헌 기록은 없고 금석문을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다. 국내 역사서에 고구려나 백제의 연호를 볼 수 없는 것은 신라 중심의 사관이 작용했다는 점도 있겠지만, 나라가 망한 후 자료들이 전해지지 않아 몰라서 못 쓴 것일지도 모른다. 만약 김부식 등이 일부러 빼먹었다면 비난받아 마땅하겠지만 말이다.


흔치 않은 것은 괜히 애틋하게 보이기 마련이다. 고구려는 광개토호태왕비에서 영락(永樂)이라는 연호를 썼음을 알 수 있다. 서길수 고구려연구회 회장은 광개토대왕이라 부르는 것은 식민사관의 영향이며 중국의 황제, 일본의 천황처럼 고구려인들은 자신의 왕을 태왕(太王)이라 불렀다고 말한다. 태왕이란 왕중왕이란 뜻으로 고구려가 당시 동아시아에서 독자적인 질서를 구축하며 그 패자임을 나타낸다. 따라서 광개토태왕, 영락태왕이라는 호칭으로 불러야 할 것이다. 또한 불상 등의 금석문을 통해 연수(延壽), 연가(延嘉), 영강(永康), 건흥(建興) 등의 연호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연수는 신라, 건흥은 백제 연호라는 설도 있다).


백제의 경우 일본에 하사한 칠지도(七支刀)의 명문에서 태화(泰和)라는 연호를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판독상의 이견과 함께 중국과 관련된 연호라는 주장도 있는 만큼 조금은 신중해야겠다. 이도학 교수는 무녕왕릉매지권 등의 백제 금석문에서 연호가 발견되지 않는 점을 들어 백제는 6갑 간지만 사용해서 기년(紀年)을 표시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이도학, [살아있는 백제사](2003), 휴머니스트, 351쪽 참조). 그러나 칠지도에 나타나는 "널리 후왕(侯王)들에게 공급할 만하다"는 구절에서 후왕은 제후국의 왕을 뜻하므로 백제왕도 후왕들을 거느린 황제 수준의 위치였음을 미루어볼 수 있다. 또한 삼국사기에 근초고왕이 군사를 사열할 때 깃발을 모두 노란색으로 썼다는 기록에서 중국의 천자만이 쓰는 빛깔을 사용했던 위세를 짐작할 수 있다.


신라의 경우에는 그나마 다행으로 많은 연호가 비교적 상세하게 전해지고 있다. 법흥왕의 건원(建元), 진흥태왕(진흥왕순수비문에 고구려처럼 태왕 칭호가 나온다)의 개국(開國), 대창(大昌), 홍제(弘濟), 진평왕의 건복(建福), 선덕왕의 인평(仁平), 진덕왕의 태화(太和)가 그것이다. 삼국사기에는 신라가 독자연호를 버리는 과정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신라사신 한질허가 당태종에게 "신라는 신하로서 대국(大國) 조정을 섬기면서 어찌하여 따로 연호를 칭하는가?"라는 질문을 받는다. 한질허는 "일찍이 대국 조정에서 정삭(正朔)을 반포하지 않았으므로, 선조 법흥왕 이래 우리 나름대로의 연호를 사용한 것입니다. 만약 대국 조정의 명령이 있었다면, 작은 나라가 어찌 감히 다른 연호를 사용하겠습니까?"라고 답한다(삼국사기 진덕왕 2년(648년) 기사 참조).


결국 650년에 당나라의 영휘(永徽)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하고 독자연호를 버리게 된다. 정삭이란 곧 역법을 의미한다. 박 교수는 당시 동아시아 국가 중에서 역법을 완성해 갖고 있던 나라는 중국뿐이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신라가 당나라의 연호를 사용한 것이 단순히 역법을 계산할 줄 몰라서였다고 단정하기는 미심쩍다. 독자연호를 포기하고 난 후 당나라와 연합해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사료의 부실로 속단하기는 힘들지만 자주성의 시련이라고 평가할 만 하다. 신라가 외교적인 승리를 거둔 것인지는 모르나 우리 민족 전체에는 불행한 결과였다. 물론 오늘날의 관점에서 민족의식의 부재를 탓하기는 힘들겠지만 말이다.


통일신라 헌덕왕 14년(822)에 김헌창이 군사를 일으켜 국호를 장안(長安), 연호를 경운(慶雲)이라 한 것은 주목할 만 하다. 아버지 김주원이 왕이 되지 못한 것이 한이 맺힌 것이 주된 이유겠지만 독자연호를 사용한 것은 대당관계에 있어서 자주성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김헌창의 난이 신라의 사대성에 대한 반발이라는 측면을 가진 것도 이 때문이다. 헌덕왕 11년(819) 이사도의 군대를 제거하기 위해 당나라가 원군을 청하자 신라는 3만명의 군사를 파견한다. 드라마 해신(海神)에서 등장했듯이 이사도 집안이 고구려 유민인 것을 감안하면 조금은 당혹스럽다(이사도 집안의 제(齊)나라가 이사도 대에 내려오면 고구려의 색채가 희박해진다는 이견도 있다). 여하간 단순한 왕위쟁탈전으로 볼 수 없을 듯하다.


3. 한국사의 독자연호2 - 발해와 후삼국시대, 고려시대

독자연호와 관계되어서 가장 눈길을 끄는 나라는 단연 대진국(大震國) 발해이다. 발해는 우리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던 나라였다. 문헌상으로 볼 때 거의 전 기간 연호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가령 2대 무왕이 인안(仁安), 3대 문왕이 대흥(大興), 보력(寶曆), 10대 선왕이 건흥(建興) 등의 연호를 쓴 것이 그 예이다. 그러나 발해는 당나라에 대해서는 황제가 아닌, 왕국으로서 조공을 바치고 책봉을 받았다고 한다. 또한 왕이 사망한 후에는 황제의 칭호가 아닌, 왕의 칭호를 올렸다. 정효공주 묘지에는 황상(皇上)이란 표현과 함께 대왕이란 용어도 섞어 쓰인 것도 이런 고민의 산물이다. 발해는 강대국의 이웃으로 살아가는 지혜를 후손들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여담이지만 희귀한 발해의 유물들은 일제시대에 빼돌려져 일본에 많이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후삼국시대에 들어 후백제를 세운 진훤(甄萱)은 정개(正開)라는 독자연호를 사용하며 일세를 풍미했다. 이 연호는 전북 남원의 실상사 조계암 터에 있는 편운화상부도에 새겨져 있다(이도학 교수의 [진훤이라 불러다오](푸른역사, 1998) 참조). 이는 진훤의 백제국이 단순히 반란자 집단이 아닌 새 왕조를 개창한 것임을 분명히 해준다. 또한 궁예는 무태(武泰), 성책(聖冊), 수덕만세(水德萬歲), 정개(政開)라는 무려 네 개의 연호를 사용했다. 국호도 고려, 마진(摩震), 태봉(泰封)으로 여러 번 고쳤는데 여기서 마진은 "대동방국"을 의미한다. 후백제와 쟁투를 벌이는 것도 정신이 없는데 북벌의 의지를 피력한 것은 다소 허황된 감이 있다. 그러나 대륙 회복의 기상만은 높이 평가하고 싶다.


고려시대는 발해의 방법을 본받아 밖으로는 왕국이면서도 안으로는 황제의 제도를 꾸리는 외왕내제(外王內帝) 방식을 이어간다. 하지만 발해처럼 모든 왕이 독자연호를 쓰지는 않았다. 태조가 천수(天授), 광종이 광덕(光德), 준풍(峻豊)이라는 독자연호를 사용한 것을 제외하고는 송, 요, 금, 원, 명의 연호를 번갈아 썼다. 여기서 단재 신채호 선생이 묘청(妙淸)의 서경천도운동을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제일 대사건"으로 평가한 것이 떠오른다. 묘청 일파는 1135년 서경에서 군사를 일으켜 나라 이름을 대위(大爲)라고 부르고 연호를 천개(天開)라고 했다. 묘청의 칭제건원론(稱帝建元論)이나 금국정벌론은 상당부분 자주적인 요소가 있었기에 신채호 선생의 탄식은 깊었다.


그러나 묘청의 난이 전략적으로 치밀하지 못해서 개경에 머물던 정지상, 백수한 같은 서경파들이 앉아서 죽게 만들어 버린 점과 도참설 같은 비합리적 사고에 기대려했던 점은 비판의 여지가 있다. 또한 김부식 일파가 칭제건원을 반대한 것도 나름의 이유가 충분했다. 금나라에게 사대하기로 한지 몇 년만에 칭제건원을 할 경우 금의 반발이 예상되며 외교적, 군사적 혼란이 일어날 가능성이 컸다. 더군다나 사대하려는 대상이 중화가 아니라 금나라였다는 점에서 신채호 선생의 "사대주의의 괴(魁.괴수)"란 표현은 지나친 감이 있다. 적어도 김부식의 현실론은 조선시대에 연호 사용 자체를 반대하는 입장과는 다른 것이었다.


하지만 김부식의 사대성은 그의 저서 삼국사기에서 짙게 드리워진다. 그가 쓴 진삼국사기표(進三國史記表)에서 중국의 경전과 역사에 대해서는 잘 알면서 "우리나라의 사실에 이르러서는 도리어 망연(茫然)하여 그 시말(始末)을 알지 못하니 매우 유감스럽다"고 밝힌 그의 충정은 인정할 만 하다. 그러나 진덕왕 4년(650) 당나라의 연호를 쓰기 시작하자 "옛날에 법흥왕이 연호를 스스로 썼는데, 아, 편방의 소국으로서 왜 연호를 쓰나? 당 태종이 꾸지람을 했는데도 연호를 고치지 않다가, 650년에 고종의 연호를 갖다 쓰니, 허물을 능히 잘 고쳤다고 할 수 있다"라며 주석을 단 것을 비롯해 사대주의에 찌든 편견도 적잖이 보인다. 또한 단군과 고조선에 대한 기록이 없고, 가야를 제대로 다루지 않았고, 발해의 역사도 애써 외면했다.


고대사를 둘러싼 논쟁을 접할 때마다 삼국이 스스로 편찬한 역사서가 전해지지 않는 것이 늘 안타깝다. 고구려의 유기(留記), 백제의 서기(書記), 신라의 국사(國史) 같은 삼국이 스스로 편찬한 역사서가 전해지지 않는 것은 정말 비극적인 일이다(덧붙여 향가모음집 삼대목(三代目)까지 어디서 뚝 떨어질 수 없을까?^^;). 기껏해야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에 목을 매달고 있는 우리 고대사 연구의 현실이 너무 비극적이다(삼국유사라도 없었으면 완전 초상집이었을 것이다). 물론 삼국사기의 존재는 너무나 고마운 일이지만, 삼국사기'만' 존재한다는 것은 두고두고 아쉬운 일이다.


4. 한국사의 독자연호3 - 조선시대 그리고 대한민국

조선시대로 오면 고려시대에서 그나마 보이던 이중적인 체제나 실리적 고민은 찾아볼 수 없게 된다. 오로지 사대주의에 올인하며 성리학에 빠져 살았다. 명나라의 제후국으로 굽실거리느라 독자연호 같은 건 꿈도 꾸지 못했다. 인조 쿠데타로 집권한 서인 정권의 고루한 숭명배금정책으로 비추어볼 때 조선의 사대는 고려의 사대에 비해 훨씬 저속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고종 말기에 비로소 건양(建陽)이라는 독자연호를 사용하였으며, 이듬해 대한제국을 건립하며 광무(光武), 융희(隆熙)라는 연호를 썼다. 조선시대 전반을 흐르던 사대주의에 대한 반작용인 셈이지만 이미 독자생존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묘청도 지하에서 이런 칭제건원은 원치 않았으리라.


조선 중기 시인인 백호 임제가 숨막히는 사대에 일침을 놓았던 유언은 들을수록 따갑다. "천하의 여러 나라가 제왕을 일컫지 않은 나라가 없었는데 오직 우리나라만은 끝내 제왕을 일컫지 못했으니 이 같이 못난 나라에 태어났다 죽는 것을 애석히 여길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四海諸國 未有不稱帝 獨我邦 終古不能 生於高此陋邦 其死安足惜)"는 사자후가 못내 애처롭다. 또한 병자호란 당시 청 태종이 백마산성을 피해 우회하여 서울로 진격할 만큼 출중한 장수였던 임경업이 "내가 천지 정기를 받아 가지고 났는데 물건이 아니 되고 사내가 되었는데, 요 조그마한 나라에서 나서 기운을 펴보지 못하고 일생을 보내게 되니 안타까운 일이 아닌가."라며 개탄한 것도 사대에 찌든 우울한 왕국의 초상이었다.


해방 후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단군기원, 즉 단기가 국가의 공용연호로 채택되었다. 이후 1961년 12월 공용연호에 관한 개정법률을 공포하여 연호를 단기에서 서기로 변경하였다. 이전까지는 국내 문서는 단기를, 외교문서 같은 국외용 문서에는 서기연호를 사용했으나 1962년 1월 1일부터는 공식적으로 단기연호 사용이 사라지게 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997년 생뚱맞게 김일성이 태어난 1912년을 원년으로 하는 주체(主體)라는 연호를 제정한다. 이는 대놓고 봉건전제국가임을 자인하는 것이다. 주체는커녕 주책 맞을 따름이다.ㅡ.ㅡ;


오늘날 서력기원 연호 사용은 세계적으로 보편화된 것이다. 다만 일부 국가의 경우 서력기원과 자국의 고유연호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에 눈길이 간다. 과거에는 자주성의 상징으로 독자연호가 제정되었다면, 이제는 특수성의 표현으로 고유연호를 제정해봄직하다. 일본은 일왕의 연호를 아직도 사용하고 있고, 중화민국(타이완)에서는 1912년을 원년으로 하는 민국기원(民國紀元)을 사용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이슬람 국가에서는 622년을 원년으로 하는 헤지라기원(Hegira紀元)이 쓰고 있으며, 태국 같은 불교 국가에서는 부처가 열반한 해를 기준으로 하는 불멸기원(佛滅紀元), 즉 불기를 쓰고 있다. 단기가 부담스러우면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이나 1945년 광복을 기원으로 하는 고유연호를 생각해 봄직하다. 머지않아 통일이 되어 남북이 새로운 연호를 제창하는 것도 참 기분 좋은 상상이다.


5. 세계화시대의 한국사

강만길 교수는 "건망증이 심한 민족일수록 역사 실패를 거듭하기 마련이며 그것을 경계하기 위해 오욕과 고난의 역사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강만길, [역사를 위하여](1996), 한길사, 71쪽)"고 했다. 연호로 읽는 한국사도 이래저래 수난과 오욕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의 과거가 보잘것없다고 해서 내팽개칠 수는 없다. 박은식 선생이 [한국통사]의 서언에서 "국학과 국사가 망하지 않는다면 그 나라도 망하지 않는다"고 외쳤던 것은 여전히 유효하다. 전통을 지키는 것은 비싸기 마련이다. 세계의 선진국들이 자신들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어떻게 가르치고 전하는지를 보고 배워야 한다. 미국이 200여 년에 불과한 역사를 어떻게 가르치는지만 봐도 부끄럽기 그지없다.


팔은 안으로 굽게 마련이고 자국의 역사를 좀 더 그럴듯하게 기술하고 싶은 욕심은 누구나 있다. 그러나 이웃나라의 역사를 일방적으로 헐뜯고 깎아 내리는 식의 역사 교육은 무례하고 무참하다. 우리의 경우 이웃 강대국들이 먼저 시비를 건다는 점에서 저들의 쩨쩨함만 타박하고 있기에는 너무 위태롭다.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이나 중국의 동북공정 같은 역사제국주의가 터지자 여기저기서 국사 교육을 강화해야한다며 아우성이다. 역사 분야를 끔찍이도 좋아하는 나이지만 솔직히 말해 국사교육 강화와 역사왜곡 방지는 별개의 문제이다. 차라리 역사전문가, 외교전문가들에 대한 지원을 늘리고 그들의 밥줄을 많이 만들어 보다 적극적인 대응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다만 국사과목이 필요 이상으로 천대를 받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한국사와 세계사가 유기적인 관련을 맺고 교육되지 않는다면 노상 암기과목의 오명을 벗기는 힘들 것이다.


연호를 통해 한국사를 읽으면서 재야사학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들었다. 재야사학계의 국수주의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나 이에 대한 과민반응도 지나친 처사다. 이웃나라들이 옹졸한 역사왜곡을 일삼는 것에 비하면 우리 재야사학이 하는 일은 애교 수준이다. 고종석 선생은 "공격적 민족주의에 대한 올바른 처방은 해방적 민족주의가 아니다"고 말한다. "민족주의가 타인에 대한 증오라면, 애국심은 자신에 대한 사랑"이므로 "민족주의 없는 애국심"을 바라며 "남을 증오하지 않고도 자신을 존중할 수 있다"고 설파한다(고종석, [책읽기 책일기](문학동네, 1997) 참조). 하지만 해방적 민족주의라고 표현하든 아니든 어떠한 대응이 없다면 우리 역사는 중국과 일본의 입 속으로 들어가고 말 것이다. 국제사회는 비정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국수주의나 민족주의는 아무리 날카롭다고 해도 대부분 중국와 일본의 공세를 방어하는 수준이었다고 본다. 우리가 임진왜란이나 일제의 만행에 분개하는 것은 편협한 민족주의 때문이 아니라 평화와 문명을 짓밟은 것에 대한 정당한 분노일 따름이다.


백범 김구 선생 [나의 소원]에서 "나는 우리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고 말한다. 이런 문화강국의 이상은 아름답지만 이것 또한 상당 수준의 경제력과 과학기술력을 갖춰야만 가능한 목표일 것이다. 중국과 일본의 역사왜곡이 그 진실과는 상관없이 그 나라의 국력이 뒷받침되어 설득력을 얻는 것처럼 말이다. 분명 우리를 둘러싼 현실은 엄혹하다. 호방하게 큰소리도 좀 해보고 싶지만 주변 강대국들은 만만치 않다. 발해와 같은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강대국에 치이면서도 주체성을 가지고 우리의 이익을 최대한 도모하려는 날쌘 자세가 필요하다.


독자연호를 마음껏 쓰지 못하고 중국의 억압에 시달리던 시대는 지났다. 바야흐로 세계화 담론이 요란하지만 진정한 세계화, 진짜 세계시민이란 자기 것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역사상 세계는 어느 하나의 가치와 문화로 통일되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저마다의 개성을 죽이지 않고 살려나가는 사회, 서로의 다른 점을 존중하고 내 것을 강제하지 않는 사회, 인간 존엄성을 으뜸으로 하는 사회를 지향해야한다. 이를 위해 무시 못할 국가적 역량과 깊은 문화의 향기로 무장한 나라를 만들도록 노력해야한다. 몇몇 연예인이 이룩한 한류(韓流)에 만족하지 말고 진지하고 그윽한 우리의 문화유산을 애호하고 알려나가자. 스스로 사랑하는 자만이 남에게 존경을 받는다. 이제 자중자애(自重自愛)하자. - [憂弱]


추신1.
甄萱은 견훤으로 많이 알려져 있는데 이도학 교수는 甄萱을 지렁이의 아들로 적고 있는 삼국유사의 출생설화 등을 들어 진훤으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도 그에 따르는 편이다. 한편 견자가 성으로 쓰일 적에는 진으로 발음된다고 한다. 甄萱의 앞 자를 성씨로 보느냐, 그냥 이름으로 보느냐에 따라 발음이 달라진다고도 한다. 또한 아들이 아버지의 성을 사용하지 않은 점으로 미루어 견씨가 아닌 견훤 자체가 이름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기도 한다. 알쏭달쏭할 뿐이다. 일국의 제왕 이름을 어떻게 읽어야할지 혼란스러워 해야하는 것은 참 부끄러운 일이다.

추신2.
이 글을 다 쓰고 중국 당나라 문학가 한유(韓愈)가 시를 향한 자신의 병적인 몰두를 두고 "유익함도 없는 일에 정신을 낭비하니 슬프다(可憐無益費精神)(정민, [한시미학산책](2004), 솔, 188쪽)"라고 한 것을 떠올렸다.


참고문헌
박성래. 1978. "高麗初의 曆과 年號." 『한국학보』 4권 1호. 135~155
정운용. 1998. "金石文에 보이는 高句麗의 年號." 『한국사학보』 5권. 48~84
"[천자칼럼] 연호." 한국경제신문. 1997. 07. 10.
이덕일. "독자 연호 사용 ‘천하’를 꿈꿨다." 주간 동아. 제251호(2000. 09. 14).
김한종. "고구려의 자주성 내세운 연호." 한겨레신문. 2004. 08. 29.
박성래. "한국사의 年號사용에 대한 오해." 한국경제신문. 2004. 09. 30.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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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절 이상 투자한 글

잡록 2005. 4. 22. 05:17 |
대학 새내기 시절 [장자]에 대한 독후감을 쓰기 위해 컴퓨터 앞에서 12시간 동안 자리를 뜨지 않고 자판을 눌렀던 기억이 난다. 이 때 이후로 한나절 이상 투자한 글과 그렇지 않은 글로 이분화하는 경향이 생겼다. 어차피 잡글인 것은 매한가지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 그 때 그런 초인적인 힘이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요즘도 가끔 그런 필(Feel)을 종종 받기도 한다. 침식을 잃는 것은 좋으나 그것이 주로 밥 벌어먹는 것과 큰 관계가 없어서 고민이기는 하다.


며칠 동안 연호(年號)를 통해 한국사를 읽는 작업을 해봤다. 휴학생의 여유에 힘입어 간만에 한나절 넘는 글을 쓰는데 한 문장 한 문장이 쉽게 나가지 않는다. 자꾸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런저런 것들을 찾아보느라 자꾸 제자리걸음이다. 본래 생각이나 행동이 느린 편이니 글이라고 빨리 써질 리가 없다. 조금 정성을 들인다 싶으면 시간을 잡아먹는 괴물이 되어 나를 놀라게 한다.^^;


여러 자료를 찾아보는데 쓰는 시간, 많은 생각을 정리하는데 드는 시간 모두가 흥겹다가도 이내 고통스럽다. 이처럼 고질적인 생산성의 문제 앞에 맞닥뜨리면 회의가 몰려오기도 한다. 당나라 시인 노연양(盧延讓)은 "한 글자를 꼭 맞게 읊조리려고 몇 개의 수염을 비벼 끊었던가"라며 탄식했다고 한다. 하물며 하찮은 소인(素人, 아마추어)으로서 글 쓰는 나는 애끓는 마음을 천형처럼 안고 살아야할지도 모르겠다.


어디 그뿐인가. 혹시나 나만 알아먹는 이야기가 되지 않게 이런저런 부연설명이나 주(註)를 다는 것도 번거롭다. 내 온라인 보금자리는 분명 암호로 채워진 내밀한 공간은 아니다(그럴 거면 그냥 문서파일에 저장하면 그만이다). 내 글을 남들도 보고 왈가왈부해주기를 바라기 때문에 독자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나중에 내가 썼던 글이 차꼬가 되어 돌아오지는 않을까 신경 쓰는 것도 머리 아프다. 내가 꾹꾹 눌러썼던 텍스트는 지워지지 않고 내 곁에 맴돈다. 자신이 했던 말이 다시 돌아와 내게 비수가 되는 것처럼 아프고 부끄러운 일도 없다.


이처럼 글로써 소통하는 것은 마냥 즐거운 일은 아니다. 남이 읽기 위한 글, 남이 읽어줬으면 싶은 글을 쓰기로 한 이상 어느 정도의 괴로움은 감수해야 한다. 가끔 이것저것 말하거나 글 쓰고 싶어질 때면 다음과 같은 구절을 떠올린다.


지식은 회중시계처럼 살짝 호주머니 속에 넣어 주면 된다. 내보여 자랑하고 싶어서 굳이 필요도 없는데 호주머니 속에서 꺼내 보거나, 시간을 가르쳐 주거나 할 필요는 없다. 시간을 묻는 사람이 있으면 그 때만 대답하면 된다. 시간의 파수꾼이 아니니까 누가 묻지 않는데 시간을 알려 줄 필요는 없다.
- 필립 체스터필드, [내 아들아 너는 인생을 이렇게 살아라](1999), 을유문화사, 95~96쪽


그렇다. 하고 싶은 말 다하면서 사는 사람은 부박하다. 무언가 참을 수 없어 목구멍에서 뜨거운 이물감이 꿈틀거릴 때 쓰여지는 헌걸찬 글 한편이 그립다. 앞으로는 한 편의 글을 쓰고 한 마디의 말을 하기 위해 그것의 열 배가 넘는 책을 읽고 남의 말 열 마디를 듣도록 하자. 침묵의 시간이 살뜰할수록 내뱉는 말과 글이 탐스럽다. - [憂弱]

추신 - 이 글의 산파인 "연호(年號)로 읽는 한국사"라는 글은 거의 마무리 단계다. 개재하기 전에 이런 식으로 바람까지 잡았으니 어여삐 읽어주시기 바란다. 좀만 기달리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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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교황 선출에 부쳐

잡록 2005. 4. 21. 02:46 |
여기서 더 나아가 검은 피부의 교황을, 적어도 유럽 출신이 아닌 교황을 이번에 볼 수는 없을까? 그것은 가톨릭교가 바로 이름 그대로 보편적 종교라는 것을 처음으로 온 세상에 드러내는 길이기도 할 텐데 말이다.
- 고종석, "콘클라베 斷想.", 한국일보, 2005. 4. 13.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였다. 고 요한 바오로 2세에 이어 독일출신의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이 로마 가톨릭 교회 새 교황으로 선출됐다. 그 어느 때보다 비유럽 출신의 교황에 대한 기대감이 높았던 터라 다소 실망스럽다. 내심 자기 지역에서 교황이 나오기 바랐던 중남미와 아프리카 지역의 신도들이 아쉬운 표정인 것은 인지상정이다. 보편을 추구한다는 종교에도 민족과 국가가 엄존하고 있음을 깨닫게 해주는 대목이다.


고 요한 바오로 2세는 여성의 사제직 진출, 피임과 낙태, 동성애, 배아줄기세포 연구, 해방신학, 교회 개혁 등에 반대해왔다. 베네딕토 16세도 이와는 크게 다르지 않을 전망이다. 그러나 여성이 사제가 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하느님이라면 굳이 애써서 믿을 필요가 없을 듯하다. 또한 콘돔 사용을 철저히 반대하면서 에이즈가 횡행하는 가운데 하느님의 은총을 부르짖는 것은 인간 존중의 종교라고 보기 힘들다. 자유와 구원을 외치면서 사슬과 차꼬로 동여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세계 곳곳에서 민족, 인종, 종교 등의 다툼으로 피눈물이 그치지 않고 있다. 가톨릭 교회는 본인들이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세계에서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교황 장례식의 조문단을 보라!). 하느님이 부여하신 사랑의 힘을 많이 퍼뜨리기를 기대한다. "짐진 자여, 내게로 오라"는 성경 구절처럼 강한 사람에게는 한없이 높고, 약한 사람에게는 한없이 낮아지는 모습을 바라마지않는다. 하느님의 심판 이전에 종교의 자유시장이 가톨릭 교회를 지켜보고 있다.


이제 교황 선종(서거)에서 새 교황 선출 동안 요란했던 관심을 정리할 때다. 이런 종교적인 이슈가 터질 때면 먼저 떠올릴 것은 대한민국 헌법이 아닐까 싶다.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지며, 국교를 부인하고,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선언하고 있는 헌법 제20조는 늘 아슬아슬하다. 세속의 영역에서 종교를 이용하지 않는 성숙함이 좀 더 필요하다. 대한민국은 분명 세속주의 사회다. - [憂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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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혁명 45주년을 기념해 학교에서 올해도 어김없이 4.18 구국대장정이 열렸다. 본래는 오전에 학교에 가서 후배들이나 보고 학교에서 책이나 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갑자기 4.19 국립묘지를 차분히 둘러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개인적으로 찾아가 보기로 했다. 그런데 새로 장만한 컴퓨터 앞에서 한창 고민하고 있는 연호(年號)와 관련된 잡글을 쓰느라 시간 가는 줄 몰라서 너무 늦게 출발하고 말았다.


부랴부랴 수유역으로 달려갔는데 막상 전철에 있는 안내지도에는 4.19 묘역을 찾을 수가 없었다. 당연히 있을 줄 알고 자세히 알아보지도 않았는데 참 난감했다. 약간 헤맸지만 다행히도 길을 제대로 찾아서 무탈하게 찾아갈 수 있었다. 좌우로 태극기가 걸린 길을 따라 걷는데 제법 걷는 것이 미니 4.18을 하는 기분이 나서 괜찮았다.^^ 제법 걸어야 하는 거리라 안내지도에는 나타나지 않은 것이었다. 교통표지판을 따라 가면 크게 찾기 어렵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늑장을 부린 터라 이미 고대생들은 이미 도착해서 참배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올해는 경영대가 끝에서 두 번째 순서라 참배를 마냥 기다리고 있었다. 작년에 경영대가 맨 앞에서 간 것 때문에 이번에는 뽑기 운이 좋지 않았던 모양이다. 참배도 하고 싶었으나 아직도 참배가 한참 진행 중인데 경영대 순서까지 기다리기보다는 당초 계획대로 혼자 둘러보기로 했다.


4.19혁명 기념관을 가장 먼저 둘러봤으나 고대생들로 붐벼 제대로 보기는 힘들었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영상자료와 밀랍인형 전시를 빼고 특별한 유물 같은 것은 없는 터라 크게 흥미를 끌지는 못하는 것 같다. 4.19 혁명을 소재로 한 시비들을 하나하나 읽어보기도 하고, 기념사진들도 주욱 돌아봤다. 비록 문은 닫혀 있었지만 4·19혁명 희생자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유영봉안소에 올라가 4.19 희생자 영령에 대한 짧은 묵념을 했다.


그러고는 평소 전통건축에 대한 관심이 발동하여 건물을 살펴보고 말았다.^^; 정면 7칸, 측면 3칸의 제법 큰 규모에 팔작지붕을 한 건물이었다. 전통 제례 건물의 대표주자인 종묘 정전의 단아한 맞배지붕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단청도 종묘 정전은 가칠단청(선이나 문양 등을 전혀 그리지 않고 바탕칠만 칠한 단청)인 반면, 유영봉안소는 그 다음 단계로 약간 문양을 넣는 긋기단청이었다. 또한 현대에 지은 건물이라서 그런지 암막새와 수막새 모두 무궁화 문양이 독특했다. 유영봉안소 오르는 길에 소맷돌(돌계단의 난간)과 답도(踏道)는 솔직히 말해 너무 성의 없이 만든 것 같이 정감이 가지 않았다. 또한 입구 쪽에 문인석 한 쌍까지는 좋았으나 기왕 옛 흉내를 내려면 무인석 한 쌍도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올해도 고대타임(?) 사태 때문에 시간이 지체되어 개방시간인 6시를 넘겨서도 참배가 한참 진행되었다. 방송으로 개방시간이 6시까지임을 알리는 방송이 끊임없이 나오는 것이 듣기 거슬렸다. 열댓 번은 방송이 나온 것 같은데 어차피 강제로 쫓아낼 것이 아니라면 한두 번의 협조 요청 방송만 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기왕이면 4월 18일, 19일 이틀 정도는 개방시간을 늘리는 것도 검토해 볼만하다. 물론 그렇다고 늦게까지 남아서 민폐를 끼친 고대생들이 잘했다는 것도 아니다. 어쨌든 개방시간에 맞게 서둘러 출발하는 노력을 좀 더 기울여야 할 것이다. 애꿎은 공익근무요원들의 퇴근 시간만 늦추는 것도 미안한 일이다.


4.18 고대생 의거는 고대인의 자랑이다. 하지만 4.18이 있어서 4.19가 있었느니 하는 거창한 의미 부여는 자제해야겠다. 초동을 끊었다는 것은 자랑스럽지만, 4.18이 없었어도 4.19는 분명 어떤 식으로든 표출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몇 십년전 "대한민국에서 민주주의가 발전하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는 영국 언론의 비아냥은 분명 옛날 이야기가 되었다. 어쨌거나 쓰레기통에 장미꽃을 피우기는 했는데... 이제 그 꽃을 꽃병에 예쁘게 꽂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쓰레기통에만 있으면 꽃내음이 쓰레기통의 악취에 묻혀버릴 것이 아닌가(이 문단은 내가 예전에 썼던 글을 다시 끌어다 쓴 것이다)?^^


후배들을 만나 조형물 "정의의 불꽃"에서 기념사진을 간단하게 찍고 4.19 묘역을 나오며 혁명이라는 것에 대한 상념에 잠겼다. 혁명이라는 것은 저수지에 물이 차서 저절로 넘치는 것처럼 자연스레 일어나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시민의 표현을 빌리자면 "가슴속에 가득 고여 절로 흘러 넘쳐 나오는" 혁명만이 오롯이 생명력을 유지할 것이다. 어떠한 혁명도 억지로 쥐어 짜내서 성사시킬 수 없다.


이제 적어도 독재를 걱정하지 않을 만큼 우리 사회가 성숙해졌다. 4.19 기록사진 같이 초/중/고등 학생들이 거리로 나설 일은 어지간해서 없을 것이다. 앞으로는 민주와 반민주의 사생결단이 아니라 서로 다른 가치 사이의 치열한 논쟁이 전개될 것이다. 암울했던 시절에 부득이 극단적이고 편향적인 사고를 했던 것이 어느 정도 용납이 되었을지 모르나 이제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다원주의 사회에서는 숙고된 균형감각만이 요구될 뿐이다.


문득 이탈리아의 경제학자, 사회학자인 파레토가 했던 "엘리트의 자격이나 요건은 변하지만 엘리트가 사회를 이끈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라는 말이 떠올랐다. 4.19 혁명에서 알 수 있듯이 혁명의 과실은 소수가 따먹기 일쑤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 것인지 알 수 없다. 의회 민주주의와 전문가정신(professionalism)으로 무장한 엘리트주의를 지향하는 녀석으로서 혁명에 대해 궁리하는 것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다. 끝으로 이 날 4.18과 4.19의 의미를 곱씹었던 많은 고대 학우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 [憂弱]



배운대로 바른대로 노한 그대로
물결치는 대열을 누가 막으랴
주권을 차지한 그대들이여
영원히 영원히 소리칠 태양
- 송욱, [소리치는 태양]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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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말을 놓고 지내기를 희망하는 삼수생 04학번 후배 몇 명이 있다. 요즘은 확실히 학번이라는 표지(標識)만큼이나 재수, 삼수를 따지는 경향이 크다. 나는 새내기시절 학번이 깡패라는 소리도 적잖이 들었고, 어지간하면 학번으로 위계를 나누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고 배우고 느꼈다. 지금도 학번과 나이 사이의 교통 정리(?) 문제에서 어지간하면 학번에 무게중심을 두는 편이다.


이제는 학번만이 절대적인 표지이던 시대가 아니지만 아직도 비교적 학번을 고집하는 나를 보고 보수적이라며 핀잔을 준 친구가 있었다. 그러나 같은 나이끼리는 말을 놓도록 하는 것이 탈권위적이고, 진보적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어차피 학번이 사라진 자리에 생물학적 나이라는 표지가 들어찬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호랑이 없는 곳에 여우가 왕인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여하간 농으로라도 아직도 말을 놓게 하지 않는다며 지청구를 먹을 때 많이 고심이 된다. 하기야 길게 잡으면 1년 동안이나 확답을 미뤄왔다. 03학번 후배의 경우 이런저런 경우로 말을 놓고 친구처럼 지내는 경우가 있었지만, 04학번의 경우에는 전례가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말 놓기를 청원하는 후배는 그저 더욱 돈독한 관계를 맺자는 의도에서 그러는 것이니 나의 튕기기가 궁색한 것은 어쩔 수 없다.


문제를 확장시켜 보니 현재의 잣대로 과거를 째려보는 것, 과거의 잣대로 현재를 구박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었다. 예전에는 과거의 잣대로 현재를 마름질하는 것에 대한 반발만이 가득했다. 그러나 요즘은 부쩍 현재의 잣대로 과거를 난도질하는 것의 부박함이 만만치 않음을 느끼고 있다. 오늘의 가치관에 매몰되지 않고 어제의 생각묶음과 살림살이를 존중하는 것은 참 힘든 일이다.


변법자강운동으로 유명한 청나라 말기 학자 캉유웨이는 저서 <대동서> 중 '부모자녀문(門)'이라는 글에서 모든 인간이 정신의 윤회에 의해 다시 태어나는 이상 나이 차이란 우연에 불과한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연소자가 연장자에게 대해서 특별히 예의를 갖출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박노자, 허동현, [우리 역사의 최전선](2003), 푸른역사, 102쪽 참조). 그의 이런 문제제기는 경청할 만 하지만 "차마" 받아들일 수는 없다. 대개의 경우 "차마"할 수 없는 일은 거의 완전히 할 수 없음과 동의어다.


조선 말기 단발령을 내려지자 개화파 유길준은 유림의 거두 최익현에게 단발을 촉구하면서 "어찌 한줌의 머리털을 그리도 아끼십니까?"라며 힐난한다. 최익현은 개혁에는 본말과 경중이 있다면서 "부강(富强)으로 병립할 수 있다는 것만을 알고 강상(綱常)이 이미 추락하고 상하가 무서(無序)하여 만사불성(萬事不成)인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며 질책한다(김삼웅, [왜곡과 진실의 역사](1999), 동방미디어, 230~237쪽 참조). 앞사람이 보기에 뒷사람은 늘 예의 없어 보이기 마련이니, 학번의 벽이 허물어지는 것이 강상이 무너져 내리는 일이라 생각지는 않는다. 다만 학번중심주의(?)가 마냥 고루한 것은 아니라고 항변하고 싶다.


꼬리를 무는 생각 끝에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말을 놓는 것은 허용하되 선배라는 호칭만은 붙여줄 것을 제안할 생각이다. 예를 들자면 "익구 선배, 술 한 잔 해야지?"쯤 될 것이다. 어차피 대화 중에 내 이름을 부를 일은 거의 없으니 사실상 말을 놓는 것과 진배없다. 내가 끝내 "익구야~"를 마다하는 까닭은 내 02학번 동기들에 대한 경애의 표현이며, 선배님들에 대한 흠모의 산물이다. 또한 이 학교에 조금이나마 먼저 울고 웃은 내 자신에 대한 존경이기도 하다.


나의 타협안(?)이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잘 모르겠다. 혹시나 구태의연함을 고집하는 우매한 녀석으로 치부될까 두렵다. 호방하게 우리 이제 말 놓고 친구처럼 지내자고 하지 못하는 나의 졸렬함만 더욱 드러날까 저어된다. 하지만 나는 인덕을 보인답시고 넉넉한 척 헤프게 대한다거나, 위엄을 갖춘답시고 같잖은 유세를 부린다거나 할 생각이 전혀 없다. 그저 내 깜냥대로 최선을 다하면서 교류를 나눌 따름이다. 끝으로 나 같이 못난 놈에게 보여준 04학번 후배의 도타운 우애가 가슴 깊이 고맙다. - [憂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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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일 오전 10시에 고대하던 창덕궁 특별관람코스를 다녀왔다. 2004년 5월 1일부터 기존의 창덕궁 일반관람코스에서 후원의 관람정, 존덕정, 옥류천 지역을 추가로 개방하는 특별관람코스가 만들어졌다. 옥류천 지역은 1976년 출입이 금지된 이래 28년 만에 개방되는 곳인데 관람 횟수와 인원이 엄격히 제한되어 있어 관람하기가 녹록지는 않다. 작년에 인터넷 예매와 현장 예매를 도합 세 번을 시도했으나 번번이 매진되어 근 반년을 기다렸다가 올해 새롭게 개방을 시작하는 첫날 예매하여 들어갈 수 있었다.


창덕궁 후원(後苑)은 궁궐의 북쪽에 있다하여 북원(北苑), 왕족을 비롯한 제한된 사람들만 드나들 수 있다하여 금원(禁苑)이라 불리기도 했다. 흔히 비원(秘苑)이라고도 하는데 비원이라는 명칭이 창덕궁까지 통칭하는 것으로 잘못 쓰여지기도 한다. 이는 창덕궁을 폄하하는 말로써 창경궁을 창경원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효과를 가지므로 삼가야 한다. 비원은 원래 창덕궁 후원을 관리하는 기관의 이름 비원(秘院)에서 시작되었으나 1904년부터 秘院을 秘苑으로도 쓰게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비원이 기관(院)과 장소(苑)를 두루 지칭한다고도 하고, 왜놈들이 갖다 붙인 것이라고도 하니 알쏭달쏭하기만 하다.


창덕궁 홈페이지를 보면 후원은 뒤뜰이라는 뜻으로 일반민가에도 적용되는 만큼 왕궁의 원유를 후원이라고 부르는 것은 격에 맞지 않아 후원의 명칭에 대해 여러모로 검토 중이라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후원의 빼어난 경치 열 가지를 꼽아 상림십경(上林十景)이라고 하는 만큼 옛 명칭 중에 하나인 상림원(上林苑)도 괜찮을 것 같다. 여하간 조만 간에 얼른 결판내서 명칭에 대한 혼란을 줄여야 할 것이다.


창덕궁 특별관람코스의 관람료는 5000원인데 언뜻 비싸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본래는 10000원으로 책정할 예정이었는데 문화재청과 재경부와 협의하는 과정에서 5000원으로 조정된 것이라고 한다. 우리의 고궁 관람료가 외국과 비교해 저렴하다거나, 관람료가 싸면 고궁이 가볍게 보인다는 문화재 당국의 주장도 일리는 있다. 그러나 그보다는 너무나 파괴되어 중건(혹은 복원)이 지속적으로 요구되는 우리 궁궐을 위해 약간의 투자를 해달라고 홍보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 이 정도의 인상이 아깝다고 생각할 만큼 쩨쩨하지 않았으면 한다.


세종대왕은 후원을 두고 "내 천성이 화초를 좋아하지 아니한다. 뽕나무, 닥나무, 과실나무는 모두 일상생활에 요긴한 것이니, 이제부터 이것으로 직책을 삼음이 옳을 것이다"며 명했다고 한다. 나는 보는 눈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후원에 기화요초보다 과실수가 더 많이 있는 것은 이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창덕궁 후원에 정자들은 규모가 소박한 편인데 이는 자연 경관을 해치지 않으면서 최소한의 인공미를 가미하려는 우리 전통 조경의 산물이다. 좋게 말해 사치를 멀리하고 검박함을 추구한 왕실의 정신이 투영된 것이지만 그렇게 평하기에는 대부분의 시기 조선 왕국의 백성들은 빈궁했고 고달팠다.


새로 개방된 후원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은 관람지와 관람정이다. 관람지는 한반도 지형을 닮아 반도지(半島池)라 불리기도 했다. 동궐도(창덕궁, 창경궁을 그린 19세기 초의 지도)에는 네모난 모양에 둥근 모양이 합쳐져 나타나는 것과 판이하다. 아마도 이는 일제가 우리 영토를 한반도로 국한시키려는 의도에서 조작한 것이라는 설이 그럴 듯하다. 또한 궁궐에는 하나밖에 없는 부채꼴 모양의 정자도 생성 시기가 애매하지만 보기에 나쁘지는 않았다.


관람정 주변에는 존덕정, 승재정, 폄우사가 자리잡고 있다. 아(亞)자살 창호가 화려한 승재정이나 효명세자가 독서를 했다는 폄우사도 둘러봤다. 급한 마음에 봄꽃이 피기도 전의 행차라 새싹도 돋아나지 않은 황량한 풍경이 적지 않았다. 아직 잔디가 자라지 않아 존덕정에서 폄우사로 오르는 언덕에 있는 팔자 걸음 연습용 화강암 판석이 그리 잘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보기 드문 6각 지붕에 2층 처마를 한 존덕정은 단연 일품이었다. 한 눈에 봐도 예사롭지 않고 기교가 많이 들어간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존덕정에서 가파른 길을 오르다가 쉬어가라고 있는 취규정을 스치듯이 지나치고 옥류천 영역에 당도했다. 창덕궁의 후원 중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 왕이 길러먹던 샘물인 어정에서 한 바가지 들이키니 물맛이 참 달았다. 옥류천 바위에는 잔이 돌아오기 전에 시를 한 수 짓는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을 할 수 있는 홈이 있지만 그 길이가 짧아서 시 한 수 읊을 여유가 안 될 것 같다며 너스레를 떨어봤다. 개인적으로 매우 싫어하는 임금인 인조의 옥류천(玉流川)이라는 글씨만 없었더라면 완벽했을 것이다.^^


상림삼정(上林三亭)이라 불리는 소요정, 청의정, 태극정은 저마다의 매력을 뽐내고 있다. 특히 유일한 초가 지붕인 청의정에 눈길이 갔다. 동궐도에 보면 약 열여섯 채의 초가가 보이는데 지금은 청의정 하나만 남아 있다. 청의정 주변에 벼를 심어 추수로 나온 짚으로 지붕을 다시 만들곤 했다고 하니 자력갱생이 가능한 정자인 셈이다. 초가 지붕으로 겸양을 떨었지만 바로 아래 화사한 단청이 허허로움을 보완해주는 것 같다. 아쉽게도 청의정 앞 논은 진흙더미에 불과했다. 아직 모내기를 안 한 모양이다.^^


일제가 서울시내 5대 궁궐을 어느 하나 멀쩡히 둔 것이 없지만 창덕궁은 그나마 피해가 적어 아름다운 옛 모습을 제법 간직하고 있다. 이 덕분에 세계문화유산으로도 등록될 수 있었다. 전통 문화유산은 분명 가꾸면 가꿀수록 부가가치가 창출되는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우리가 먼저 외면하고 소홀히 여기는 것 같아 안타까울 뿐이다. 자중자애(自重自愛)라는 말처럼 스스로 무겁게 여기고 사랑하는 자만이 남의 존경과 신뢰를 받게 되어 있다. 이래저래 잘리고 상처 입은 우리 궁궐을 바라보며 일제의 만행만 곱씹기보다는 우리 스스로의 부박함을 반성해야겠다. 후원의 아름다움이 눈부신 만큼 회한도 짙게 드리운다. - [憂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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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글픈 낙산사여!

문화 2005. 4. 7. 03:43 |

5일 산불이 옮겨 붙으면서 화염에 휩싸인 강원도 양양군 낙산사 보타각. (양양=연합뉴스)

강원 양양지역에서 발생한 산불이 끝내 천년고찰 낙산사(洛山寺)를 집어삼켰다. 낙산사는 의상대사가 671년 세운 절로서 우리 역사의 시련과 함께 했다. 고려시대 몽골 침입 때 전소된 뒤, 조선 세조 때 중창했으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다시 불타버렸다. 그 후 겨우 제 모습을 찾았으나 한국전쟁으로 잿더미가 되었다. 1953년에 다시 지어진 낙산사는 결국 다시 시름에 잠겼다.


문득 고등학교 1학년 때 동해안, 설악산 방면으로 수학여행을 갔다가 낙산사를 들른 기억이 났다. 아직도 수학여행 기념사진으로 햇살에 눈이 부신 날 해수관음상(海水觀音像)과 찍은 것이 남아 있다. 그 해수관음보살 주변 석축물들이 검게 그을려 그 우아한 풍모가 빛을 바랬을 것을 생각하니 씁쓸하다. 세상 모든 고통의 목소리를 들어준다는 관세음보살도 눈물 몇 방울 훔치셨을지 모를 일이다.


다행히 화마를 피한 의상대(義湘臺)에서의 추억 한 꼭지도 떠오른다. 의상대에 올라 동해를 굽어보며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당시 교감 선생님과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것이 생각난다. 교감 선생님은 로마사 인물 중에서 누가 마음에 드느냐고 질문하셨고, 나는 패장에 대한 연민 때문이었는지 한니발을 꼽았다. 그 때 교감 선생님은 네게는 키케로가 더 잘 어울린다고 하셨고, 나는 속으로 어차피 정치적 패배자임은 마찬가지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보물 제479호인 낙산사 동종이 쇳덩어리가 된 것을 비롯해 아름다운 우리 문화유산이 또 훼손된 것 같아 안타깝다. 막을 수도 있었던 인재로 인해 국가문화재인 보물을 제대로 지켜내지 못한 것이 더욱 가슴이 따갑고 부끄럽다. 문화재청의 의지대로 중요한 전각 터에 대한 발굴조사를 통해 최초 창건 당시 가람 원형을 찾아 복원할 수 있기를 바란다. 소 잃고 고치는 외양간은 전에 것보다 더 튼실하고 보기 좋아야 할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국보, 보물 등 국가지정문화재의 절반 이상이 불교문화재이다. 특히 산 속 사찰의 목조건물에 화재가 발생하면 이번과 같은 끔찍한 비극이 다시 나타나지 마란 법도 없다.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해인사 장경판전, 화엄사 각황전, 부석사 무량수전, 금산사 미륵전, 법주사 팔상전, 불국사 대웅전이 불길에 타 들어가는 모습을 상상만 해도 참혹하다. 아울러 큰 손해를 볼 가능성이 높은 보험사나 값비싼 보험료를 내야하는 사찰 모두가 가입을 꺼려온 사찰 보험제도도 정비해서 활성화시킬 필요가 있다.


동해안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답사코스가 화마에 소실됨으로써 많은 이들이 그곳에 서렸던 수많은 추억들이 떨어져 나가는 슬픔을 느낄 것이다. 다시 관동팔경 중의 하나로 당당히 뽐낼 그 날을 고대하며 아픈 상처를 다독여보자. - [憂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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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한 날의 상념

잡록 2005. 4. 5. 19:10 |
정민 교수님의 책을 읽다가 “미로득한방시한(未老得閑方是閑)”이라는 구절을 만났다. 젊었을 때 얻는 한가로움이라야 진정한 한가로움이라는 뜻이다. 이번 휴학시기가 내 삶에서 다시 찾아오지 않을 한가로움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비장한 각오를 했지만 또 무뎌지는 것 같다. 그래도 술술 읽히는 책 위주로 독서도 제법 하면서 허송세월이 안되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다.


졸다가 남은 시간이 있으면 책을 보고, 책을 보다가 또 졸아도 아무도 깨우는 사람이 없어서 어떤 때는 하루 종일을 푹 자버리기도 한다. 때로는 어쩌다가 글을 지어 나의 뜻을 펴 보기도 하고, 그러다가 싫증이 나면 새로 배운 철현소금(鐵絃小琴)으로 두어 곡조를 뜯기도 한다. 어떤 친구가 술을 보내 주면 기쁘게 퍼마신다. 취한 뒤에는 나 자신을 스스로 예찬해보기도 한다.
- 박지원, 수소완정하야방우기(酬素玩亭夏夜訪友記) 中


책을 좀 보다가 컴퓨터를 틀어 글을 읽고 쓰고, 그러다가 한잠 늘어지게 자는 것이 박지원 선생이 누렸던 여유와 별반 다를 바 없다며 피식 웃었다. 여기에 덧붙여 지난날의 미숙함을 돌아보고 나의 말글이 비루했음을 반성한다면, 관계맺음에 대한 욕심에 미치지 못하는 내 자신의 부박함을 마주본다면 금상첨화이리라. 세속적인 꿍꿍이에서 벗어난 내면으로의 침잠이 그간 너무 부족했다.


요즘 어떻게 지내냐는 물음에 “그냥 놀고있죠 뭐”라고 대답하는 것보다는 “이래저래 글 읽고 쓰는 재미로 지내요”라고 말하는 것이 더 그럴 듯 하다며 권유를 받았다. 괜찮은 둘러대기인 것 같다.^^; 그 대신 내가 읽고 쓴 글이 스스로에게 가장 먼저 생채기를 내고, 오랫동안 앓도록 해야겠다. 집착과 원망의 고름을 짜내고, 독선과 편견의 가시를 빼낼 수 있는 성찰의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문득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의 22세의 일기에 적혀있는 말이 생각났다. “온 천하가 다 무너지더라도 내가 이것만은 꽉 붙들고 놓을 수 없다. 내가 이것을 위해 살고 이것을 위해 죽을 수 있는 나의 사명을 발견해야 한다”는 구절이다. 비슷한 나이 또래의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부끄러운 마음에 얼굴이 화끈거린다.


이어서 노자의 “큰 모습을 잡으면 세상이 다가온다(執大象 天下往)”를 읊조려본다. 집대상은 내 꿈을 어딘가에 투자하는 것이라고 풀어볼 수 있을 것이다. 집대상을 위해 지금은 우선 내 자신에 대한 분석과 시장조사를 할 시점인 것 같다. 나는 요즘 마냥 무위도식하지는 않고 딴에는 누운 용과 봉황의 새끼(臥龍鳳雛) 흉내를 내고 있다. - [憂弱]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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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B반(보다 정확히는 단결飛반) 엠티를 와달라는 문자를 받고 안 갈 수 없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이제 어느 행사든 간에 초청이 없으면 참석하기 힘든 처지가 된 것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있던 참이었다. 알고 지낸지 한달 정도 되는 05학번 후배의 초청 문자는 그래서 더욱 값지게 다가왔다. 조금 과장해서 콧등이 시큰했다.


엠티 당일에 잠도 거의 못자고 오전에는 창덕궁 특별관람코스를 다녀오느라 부산을 떠는 바람에 피로가 몰려왔다. 오후 3시인 출발시간에 너무 빠듯해서 후발대로 갈까 생각했으나 귀차니즘 때문에 제 때 출발하기로 했다. 막상 가보니 02 동기들과 03학번 후배들이 없어서 본의 아니게 나홀로 왕고(?)가 되어버렸다. 내가 왕림(?)하여 자리를 빛내지는 못하더라도 민폐는 끼치지 말기를 다짐했다.^^;


대성리로 향하는 기차길에서 후배들과 환담을 나누고 숙소에 도착해서 둘러앉아 음식도 나누고 게임도 즐겼다. 지난날 게임의 블랙홀 활동이 다시 재개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게임은 최소한도로 하고 이야기를 많이 나누고 싶었는데 정작 후배들 이름조차 제대로 못 물어본 것 같아 조금은 아쉬웠다. 고학번 선배의 고약한 심보인지는 모르나 내가 먼저 이름을 물어본 후배보다 먼저 이름을 알려준 후배가 훨씬 기억하기 좋은 것 같다. 제 자신의 머리 나쁨을 후배들의 열성 부족으로 치환하는 셈이다.^^;


컨디션이 저조했던 터라 내 트레이드마크인 “쉬어가며 오래가는 음주(혹은 릴렉스 롱런 음주)”가 제대로 발휘되지 못한 것 같다. 사실 수줍음이 많은 성격이라 어색함을 없애자고 술을 좀 급하게 마셨던 거 같다. 그래도 이번 엠티를 계기로 05학번 후배님들과도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것 같아 즐거웠다. 05학번 후배들과는 친해질 기회가 없을 줄 알았는데 참 고맙다.


[논어] 향당편(鄕黨篇)에 보면 공자는 술을 마시는 데 한도를 정하지는 않았지만 술에 취해 어지러워지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았다(唯酒無量 不及亂)고 했다. 정해진 주량은 없으나 취하지는 않고 기분이 좋은 정도로 그친다는 말이다. 사실 유주무량과 불급난 중에 하나는 어떻게 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둘을 결합시키는 것은 여간 쉽지 않다. 나의 “쉬어가며 오래가는 음주”도 이 아름다운 결합을 지향한다. 그렇다고 기어이 고집하지는 않고 가끔은 사양하지 못할 때가 있고 기억이 지워질 때도 있을 것이다. 기왕이면 오래도록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는 것이 술값은 더 버는 장사임에는 분명하다.^^;


나는 사교성이 많지 않은 내향적인 녀석이다. 흥을 띄우는 각종 잡기들도 전무하다. 유머감각이란 찾을 수 없고 고리타분한 이야기만 늘어놓기 일쑤다. 그렇다고 술을 크게 잘 마시지도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 개개인의 숨겨진 매력을 만나는 재미는 쏠쏠하다. 사실상 이제 대학생활의 낭만은 끝났다고 생각되는 시점에서 아직 아름다운 추억이 현재진행형임을 깨달았다. 이번 엠티를 계기로 나 이만하면 고대 경영대에서 행복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매일 가슴 한 구석에 자제(自制), 자제, 자제라고 세 번씩 새기고 있지만 말이다.^^; - [憂弱]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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